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정일근 지음 / 당그래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깍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第二信...(생략)....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한 때는 이 시를 줄줄 외우고 다녔습니다만 지금은 거의 잊어먹었습니다....유배시류의 백미라 할 만합니다.

'인물소개'

정약용 1762(영조38) ~ 1836년(헌종2)
15세때 풍천홍씨와 결혼 6남 3녀를 두었으나, 4남 2녀는 요절하고 위 시에 등장하는 학연, 그리고 학유가 있을 뿐.. 선생의 일생은 대체로 3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정조의 총애속에 벼슬살이 하던 득의만만지절이라 할것이요, 제2기는 18년 귀양살이하던 환난고난의 시절인데........이 시기는 분명 선생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이상과 꿈이 무참히 깨어진 좌절과 절망의 시기였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선생의 학문적 노력이 빛나는 결실을 맺은 성취의 시기이기도 할것이라.....본인같은 아둔한 후학들이 사사한데에까지 이른다면 그 성취의 빛남을 새삼 일러 무엇하리요......제3기는 향리로 돌아와 유유자적하며 살던 시절 되겠슴다.

정약전 1758(영조 34) - 1816(순조16)
약용의 둘째형인데요..... 어릴때부터 재주가 있고 총명하였으며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거리낌이 없었다 하네요...... 권철신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후에 이벽, 이승훈 등 남인인사들과 교유하였고 특히 천주학의 교리에 마음이 끌려 신봉하기까지 하였으니......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아우 약용은 강진으로,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는데요. 끝끝내 풀려나오지 못하고 유배 16년만에 흑산도 그 외로운 섬에 뼈를 묻었습니다. 애재......

정약종 1760(영조36) - 1801(순조 1)
약용의 셋째 형인데요.....일찍이 이익을 사사하였으며,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품을 지녔다고 하는데요......서학에 심취하여 카톨릭 교리를 깊이 연구한 당대 최고의 교리지식이었답니다. 역시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이승훈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습니다. 통재....

(사족)
서정주 생가가 있는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부위에는 네모난 서랍이 파여져 있는데, 사실 이것은 부처님을 봉안할 때 불경이나 조성내력이 기록된 문서들을 갈무리하는 감실이라는 것이요.......언제부턴가 이 감실에 대하야 괴이한 전설이 하나 생기게 되었던 것인데요...이 부처님의 배꼽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고런 참람한 유언비어가 조선조말에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임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의 '석불비결'이 그것인데......후일, 유명한 동학장수가 되는 손화중 등이 도끼로 석불의 배꼽을 부수고 그 속에 있던 것을 꺼내어 가지고 사라졌다는 기록이 <동학사>에 실려있으니.....갑오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일년 전의 일이라.....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또다시 세월은 무심히 흘러 이 비결책에는 또 다른 증명할 길없는 전설이 첨가 되었으니, 그 비결책이란 다름아니라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군요..(유홍준의 문화유산답기에 나오는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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