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p472-486 '벨리니와 동양'에서 주로 인용.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메트2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면서 유구한 역사의 비잔틴제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술탄은 ‘정복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아드리아해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베네치아 공화국도 비잔틴제국이 무너진 그 자리에서 욱일승천의 기세로 준동하는 이 이슬람제국의 확장을 막아내는 데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공화국은 바다와 육지 곳곳에서 오스만과 부딪혔고 오랜세월 동안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게 되는데, 1479년에 일시적으로 평화의 시기가 찾아왔다. 그해에 공화국과 제국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위대한 군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정복 전쟁이외에 문화와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베네치아에 훌륭한 화가를 요청하자, 평화에 목말라 있던 베네치아는 도제의 궁전을 장식하고 있던 공화국의 일급 화가인 젠틸레 벨리니를 일종의 ‘문화 대사’로 오스만제국에 파견한다. 곰브리치가 <예술과 학문>이라는 글에서 전통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벨리니와 조르조네가 없었더라면 티치아노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 벨리니는 젠틸레 벨리니가 아니라 그의 동생인 조반니 벨리니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보다 못하다는 그런 이야기는 물론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형제는 용감했다 쯤 되겠다. 어쨌든
젠틸레는 이스탄불에서 1년 6개월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그 유명한 술탄 메흐메트2세의 유화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런던의 내셔널 갤러의 소장품인 이 초상화는 200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550주년을 맞아 런던에서 이스탄불로 건너와 베이올루에서 전시되었는데, 이 조그만 그림을 관람하기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니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비잔틴제국과 관련된 도서에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화가 빠지지 않듯이 오스만 제국과 관련한 거의 모든 도서에는 이 초상화가 등장한다. 오르한 파묵의 표현을 빌리자면 체게바라의 사진이 일반적인 ‘혁명가의 아이콘’ 이듯이 젠틸레의 이 초상화는 일반적인 오스만 술탄의 이미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슬람 회화의 전통에서는 인물의 초상화는 거의 그리지 않는다. 일종의 금기다. 다만 예외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은 초상화를 남겼다. 토프카프 궁전에 가면 한 방 가득 오스만 술탄들의 초상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이 그 술탄 제위 당시에 화원에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일괄하여 그린 것인지는 소생이 알 수 없다. 우리 눈에 익은 사실주의적인 그림이 아니어서 다 비슷비슷하게 보인다. 젠틸레의 이 초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술탄의 가늘고 긴 메부리코다. 오스만의 위대한 술탄 술래이만대제도 메부리코다. (고골의 단편 중에 ‘코’라는 것이 있죠 아마) 오스만 술탄 가계에 알려진 유일하게 공통된 얼굴 특징은 바로 코다. 메부리코. 가늘고 긴 메부리코를 가진 갸름한 얼굴의 사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 남자가 과연 ‘정복자’ 술탄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냥 보통의 터키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 벨리니의 1년 6개월 동방여행은 몇몇 유명한 그림들을 남겼고, 당대의 오스만 제국 화단에 적지않은 충격과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지만 그 영향이 지속되어 오스만의 전통적인 회화기법의 변화에 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의 세밀화가 시난 베이의 “메흐메트2세가 장미 향기를 맡고 있다”는 초상화는 아마도 벨리니의 영향을 받아 그려졌을 것이 분명하나 더 이상의 발전과 변화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는 없었다.
벨리니의 초상화
시난 베이의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는 메흐메트2세'
벨리니의 수채화 '예니체리'
술레이만 대제의 초상화 왼쪽은 서유럽 르네상스 화풍인듯 하고 오른쪽은 전통적인 이슬람 세밀화법 그림 같음.
술레이만은 메헤메트2세의 증손자인데 역시 메부리코로 오스만 술탄 가계의 유전적 특징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