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인생이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맞다. 졸지에 팔자에 없는 집사가 되게 생겼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집사의 아빠 혹은 집사의 남편이 되겠지만 그건 큰 의미가 없다. 고양이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소생은 개나 고양이나 말이나 소나 뭐든 짐승을 키워본 적도 없고 키울 생각도 없다. 물론 정말 귀엽고 예쁜 고양이와 강아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제 한 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다른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두렵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제 딸아이가 학원에 갔다 오는데 난데없이 커다란 박스에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담아서 데리고 왔다. 3-4주 정도 된 것 같다. 아파트 단지내 풀숲에서 어미없이 버려진 고양이를 구제해왔다는 것인데, 나중에 딸아이와 같이 있었던 딸아이 친구의 증언에 의하면 인도 쪽으로 나와있던 새끼 고양이가 다시 풀숲으로 들어가는데 딸아이가 따라가서 도망가는 고양이를 거의 납치해오다시피 잡아왔다는 것이다. 물론 어미는 없었다고 한다.
이건 명명백백한 유괴 납치 사건이고 창졸간에 어미를 잃은 새끼는 낑낑거리고, 한편 어둔 거리 어디선가 새끼를 잃은 어미는 또 애타게 새끼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니 당연히 원상으로 복구되어야 했다. 고양이 유괴범으로 경찰에 잡혀갈 수도 있다는 한심한 협박에 딸아이는 콧방귀를 흥흥흥 뀌었지만 고양이를 보내기 싫어서 울었다.
저녁을 먹고 사건의 현장으로 가서 고양이를 풀어줬다. 겨우겨우 걸어 작은 풀숲으로 들어가서는 회양목 아래 자리잡고 앉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어미는 보이지 않는다. 날이 너무 추워서 다시 상자에 담아서 데리고 올라왔다. 아는 집사분에게 고양이 모래하고 고양이 이유식을 조금 얻어서 줘봤는데 먹지는 않고 낑낑거리기만 한다. 딸아이가 손가락에 묻혀서 주니 조금 핥아 먹는다. 여전히 낑낑거린다.
다음날 나는 출근했다. 왠지 걱정이 되어 전화하니, 아내가 애견까페에 가서 젖병하고 고양이용 우유를 사와서 먹였는데 안 먹는다고 한다. 오후에 또 전화를 했다. 아내 전화 너머로 딸아이 우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사건 현장에 가보니 어미인듯한 고양이가 얼쩡거리고 있어 새끼를 다시 그곳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이다. 저녁에 퇴근해서 보니 고양이가 다시 돌아와있다. 어미는 안보이고 계속 그대로 있어서 날은 춥고 해서 그냥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이미 사람의 손을 탓다고 어미가 버린건가?
어제보다는 조금 활발한 것 같다. 모래위에 쉬도 했다. 귀엽기는 귀엽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접종도 해야하고 중성화 수술도 해야하고 모래에 사료에 캣 타워도 사야하고, 소파고 의자고 다 뜯어먹고 어쩌고저쩌고. 소파야 뜯어먹든 삶아먹든 별 관심은 없지만 역시 소생은 소생의 그 많은 책들과 애지중지하는 피규어와 프라모델과 작은 장난감 등등등등이 몹시 걱정스럽다. 피규어와 프라모델은 어디 치운다고 하더라도 만약 내 책을 물어뜯거나 내 책에 노린내나는 오줌이라도 찍찍찍 뿌린다면 장담할 수 없다. 고양이를 삶아먹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딸아이는 아마 나를 삶아 먹으려들 것이다. 아아아아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단란하고 행복했던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서야 되겠는가 이 말이다. 그런데 예쁘기는 예쁘다. 더 이상 크지말고 요대로만 있어준다면 정말 좋겠지만 뭐 세상만사 모든 일이 그렇듯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었던가 이 말이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앉아 있는데 고 놈이 어떡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유나 이유식을 조금 먹었는지... 우리 고양이가 가능하다면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로 커 줬으면 좋겠다.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