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란은 현대 국가로서 국민의 단결이나 화합정신을 발전시키는 데 한층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또 산 때문에 주요 인구 분포지가 넓은 땅덩어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보니 최근까지도 밀접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도 이 나라 도로는 절반 정도만 포장된 상태다. 그래서 뭉뚱그려 이란 국민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소수 민족 출신인 경우가 많다.
일명 파르시 Farsi라고도 하는 페르시아어는 이란 국민의 60퍼센트가 사용하는 공식 언어다. 그러나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족), 아르메니아인 모두 각기 고유 언어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아랍인, 체르케스인, 그리고 반유목 생활을 하는 루르족 같은 여러 소수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조지아어를 쓰는 마을도 있는데 대략 8천 명의 유대인이 사는 이 작은 공동체는 기원전 6세기에 벌어진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 유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정복당한 많은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사건까지 그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 P71

특히 쿠르드족이나 아제리족처럼 비교적 큰 집단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이 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늘 강력한 중앙 집권과 억압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 집단을 통제해서 어떤 지역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전임자들의 이런 정책 기조를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라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
쿠르드족은 국가의 공격적인 동화 정책에 맞서 자체 문화를 고수하는 산악지대 사람들의 가장 전형적인 표본이라 하겠다. 이란 정부가 소수 민족에 대한 통계를 명확히 밝히기를 꺼리다 보니 이들의 정확한 수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많은 자료들을 참고해서 추정해 보면 쿠르드족은 이 나라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략 850만 명정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은 16퍼센트 정도 차지하는 아제리족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소수 민족이다. 이들 대다수는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정착촌과 인접해 있는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쿠르드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은 민족성, 언어, 독립적 기풍, 그리고 시아파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그들 대다수가 수니파라는 사실때문에 수세기 동안 중앙의 당국과 갈등을 빚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말의 혼란스러운 틈을 타 소규모 쿠르드족 지역들이 독립을 선언한적도 있으나 중앙 정부가 정국을 장악하자 채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 이란 혁명‘이 벌어지자 또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이란군은 3년에 걸쳐 이들을 진압한 적이 있다. - P72

이란이 세계에서 4번째로 원유 매장량이 많고 천연가스도 2번째로많은 사실만 두고 보면 이 나라는 굉장히 잘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아바단의 정유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전쟁 이전의 생산량을 겨우 회복한 상태다. 또 이란의 화석 연료 산업은 비효율적인 걸로 악명 높은데 국제적인 경제 제재로 인해 첨단 기자재를 들여오기가 어려워진 현실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란에서 일할 의향이 있는 해외 전문가들의 수 또한 한정돼 있을 뿐 아니라 이란산 연료를 구입하려는 국가들 또한 많지 않다.
이란에게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은 뭐니 뭐니 해도 에너지다. 주요 유전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와 맞닿은 지역에 있고,
좀 더 작은 유전들은 내륙의 콤근처에 있으며, 가스전은 주로 부르즈 산맥과 페르시아만 쪽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orman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요 수출로 중 하나가 된다. 이곳이 이 나라가 개방된 해양 항로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데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4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든 선적 항로의 폭은 3킬로미터를 겨우 넘는 정도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그 사이에 3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두고 있다. 이란에게 이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 P74

현재 약 3천5백만 명이 사는 이 나라에는 1세기 전에는 대략 2백만 명이 살았다. 그들 대다수는 유목민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이 나라 국토의 대부분은 사막지대다. 이곳에는 석유와 모래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를 20세기의 주요 국가로 성장시킨 것은 다름 아닌 화석에너지원이었다. 석유야말로 이 나라가 주요 동맹국이자 보호국과 맺고 있는 관계의 근간이기도 하다. - P147

그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석유는 이 나라에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이 부는 <이슬람 원리주의>라는 극단적인 브랜드인 해석을 수출하는 이 나라를 석유에 목말라하는 권력 구조 사이에서 살아남게 해주고 있다. 최근에도 사우디아라비아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국왕이나 석유 갑부가 아닌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세계가 조금씩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모래와 검은 원유밖에 없는 국토, 다루기 힘든 국민들, 정통성 시비에다 안팎의 적들에게까지 시달리는 사막 국가의 왕조는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나라에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현대화다.
21세기에 살아남으려면 재생 가능한 에너지를 활용하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이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이 시도는 중동의 보다 넓은 지역과 그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은 분명하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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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들은 부상했다가 쓰러진다. 동맹들은 손을 잡았다가 놓기도 한다. 나폴레옹 전쟁 (1797-1815년) 이후에 맺어졌던 유럽의 합의는 60여년간 이어졌다. 히틀러가 꿈꾸던 천년제국은 고작 10년을 웃돌았다.
따라서 다가오는 시대에 어떤 식으로 <힘의 균형>이 바뀔지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경제적, 지정학적 공룡들이 여전히 국제정세를 부여잡고 뒤흔들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EU의 각 나라들, 또 인도처럼 급속히 성장하는 경제 강국 등이그들이다. 그러나 보다 작은 나라들이라고 간과할 수는 없다. 지정학은 동맹을 끌어들이며,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 세계 질서에서 강대국들은 반대편 못지않게 그들 편에 설 약소국들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은 터키나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같은 나라에게 미래 권력을 향해 전략적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물론 현재는 그 만화경의 조각들이 여전히 흔들리고 있어서 완전히 제자리를 찾지는 못하고있지만 말이다. - P13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누구와 함께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외교정책과 국방 문제에 이르렀을 때 이 나라의출발점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그러했듯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그 나라의 면적과 위치는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덕분에 외부의 침략에는 안전했지만 정치적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한 광범위한 장거리 교역망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해상 항로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해군이 필요하다. 게다가 주요 우방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P24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다. 이것이 훗날 개척전쟁 (FrontierWars, 1788-1934년)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의 수위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략 2천 명의 식민지 주민들과 그보다 몇 배 많은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추정한다. 특히 원주민들은 대량 학살을 당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아무런 권리도 없는 존재로 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로 원주민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은 식민지 주민들이 많았다.
이러한 문화 파괴 행위는 일찍이 1856년에 발표된 한 글에서도 또렷이 드러난다. 당시 저널리스트인 에드워드 윌슨은 멜버른의 《아르고스Argus》라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글을 실었다.

20년도 채 못 돼 우리는 지구상에서 그들을 거의 쓸어내 버렸다. 우리는 개들에게 하듯 그들에게 총질을 퍼부었으며.… 전체 부족들을극심한 죽음의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그들을 술독에 빠뜨리고, 질병을 퍼뜨려서 성인들의 뼈를 썩게 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슬픔과 고통을 겪게 했다. 우리는 그들을 그들 땅에서 쫓아냈으며 머지않아 전멸될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러한 살벌한 장면은 19세기와 20세기 내내 진행되었다. 노골적인 학살이 멈춘 뒤에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 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단됐는데 그때까지 소위 <도둑맞은 세대 >가 10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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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천2백 년 전에 중국의 진시황제는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사람들한테 사형 명령을 내렸다. 아스텍 사람들은 15세기에 멕시코 계곡을 정복했을 때 과거 국가의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고, 1620년대에 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 사람들의 모든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다.
20세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공식 역사가들에게 도전한 사람들은 투옥과 망명과 사형을 당했다. 30년 전만 해도 스페인 역사가들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시 폭격 사건을 파헤치거나헝가리 역사가들이 1956년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이런일은 최근까지도 계속돼 왔다. 그리스의 내 친구들은, 제1차세계대전 전에 그리스가 어떻게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는지를 정부와 다르게 설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방 공업국에서는 노골적인 국가 탄압이 비교적 흔치 않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더 은밀한 방식으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책을 쓰고 있는 지금 신노동당 정부는, 학교에서 영국의 역사와 업적을 강조해야 하며 위대한 영국인들의 이름과 연대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기성 지배 세력의 의견에 가장 가까운 역사가들이 명예 학위를 차지하는 반면, 그 의견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지 못한다. ‘타협‘은 여전한 ‘출세 방법‘이다.
최초의 파라오 시대(5천 년 전) 이후로 지배자들은 자신과 선조들이 이룩한 ‘업적‘을 나열한 것을 역사로 내세워왔다.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도시와 기념물을 세웠고, 번영을 가져왔고, 위대한 업적과 군사적 승리를 이룩했으며, 반대로 ‘악한 인간들‘이 세상에 온갖 나쁜 것을 퍼뜨려왔다는 식이다. 최초의 역사 문헌들은 군주와 왕조의 이름을 나열한 것들로서, ‘왕들의 목록‘이라 불린다. 40년 전까지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족보를 배우는것이 역사 수업의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 신노동당(그리고 야당인 보수당)은 이런 교육을 부활시키려는 듯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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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천2백 년 전에 중국의 진시황제는 "현재를 비판하기 위해 과거를 이용한" 사람들한테 사형 명령을 내렸다. 아스텍 사람들은 15세기에 멕시코 계곡을 정복했을 때 과거 국가의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고, 1620년대에 그 지역을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아스텍 사람들의 모든 기록을 없애버리려 했다.
20세기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공식 역사가들에게 도전한 사람들은 투옥과 망명과 사형을 당했다. 30년 전만 해도 스페인 역사가들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 시 폭격 사건을 파헤치거나헝가리 역사가들이 1956년의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다. 이런일은 최근까지도 계속돼 왔다. 그리스의 내 친구들은, 제1차세계대전 전에 그리스가 어떻게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합병했는지를 정부와 다르게 설명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았다.
서방 공업국에서는 노골적인 국가 탄압이 비교적 흔치 않은 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나 더 은밀한 방식으로 통제가 이루어진다. 이책을 쓰고 있는 지금 신노동당 정부는, 학교에서 영국의 역사와 업적을 강조해야 하며 위대한 영국인들의 이름과 연대기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여전히 기성 지배 세력의 의견에 가장 가까운 역사가들이 명예 학위를 차지하는 반면, 그 의견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맡지 못한다. ‘타협‘은 여전한 ‘출세 방법‘이다.
최초의 파라오 시대(5천 년 전) 이후로 지배자들은 자신과 선조들이 이룩한 ‘업적‘을 나열한 것을 역사로 내세워왔다. 그런 ‘위대한 인간들‘이 도시와 기념물을 세웠고, 번영을 가져왔고, 위대한 업적과 군사적 승리를 이룩했으며, 반대로 ‘악한 인간들‘이 세상에 온갖 나쁜 것을 퍼뜨려왔다는 식이다. 최초의 역사 문헌들은 군주와 왕조의 이름을 나열한 것들로서, ‘왕들의 목록‘이라 불린다. 40년 전까지 영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족보를 배우는것이 역사 수업의 주된 부분을 차지했다. 신노동당(그리고 야당인 보수당)은 이런 교육을 부활시키려는 듯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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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과 올가미》
2015년 7월 인권변호사들은 왜 중국 당국의 대탄압 대상이 되었을까. 인권변호사들은 2000년 이후 조심스럽게 싹을 틔우고 성장해온 중국 사회의 풀뿌리 시민운동, 노동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전국에 흩어진 운동들을 이어주는 그물 같은 존재였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관영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소식을 전하려던 시민기자들, 탄압받는 소수민족들, 공산당이 금지한 지하교회 (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조직에 속하지 않은 교회)와 파룬궁 신자들, 토지를빼앗긴 이들을 변호하고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인권변호사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중국 전역에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 조직들도 이들을 통해 연대할수 있었다. 톈안먼 시위 유혈 진압 이후 중국 당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탄압이었던 ‘709 대체포‘는 인권변호사들의 네트워크를 궤멸시킴으로써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암흑시대를 예고했다. - P166

후진타오 시대(2002~2012), 중국 당국은 사회의 둘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중국공산당에 직접 도전하지 않는다 ‘는 암묵적인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시민사회의 성장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때는 중국의 고속 성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고, 당국은 경제적 과실 분배를 통해 사회를 관리하려 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개혁개방의 성과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풀뿌리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강제철거와 환경오염에 대한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많은 이들은 중국 사회 둘레의 선이 점점 확대되면서 좀 더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로 변해갈 것으로 기대했다.
시진핑 시대 들어 그 선이 급속히 좁아지면서 당국에 복종하지 않고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는 이들을 옥죄는 올가미로 변했다.
중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 시대가 끝나고, 미국과의 패권 경쟁으로 외부 환경이 악화되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지도부는 통제 강화로 사회불안 요소를 원천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의 영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면서 인민의 주체성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철저히 통제하는 쪽으로 급속한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광대하고 복잡한제국을 통치하는 절대 권력이 필요에 따라 지방과 백성에 대해 풀어주기(방)와 통제하기(수)를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 순환에서 통제 강화의 주기가 시작되었다. 제국의 역사적 통치술에 인공지능과 생체정보를 이용한 21세기 첨단 감시가 더해지면서 중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통제가 사회 구석구석을 뒤덮기 시작했다. - P167

‘‘709 대체포‘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변호사와 인권운동가들은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법학자이자 엔지오 활동가인 쉬즈융은 시진핑 주석이 코로나19 상황에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2020년 3월에 다시 구금되었다. 왕취안장의 변호를 맡았고 사법·정치 개혁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온 위원성은 2020년 6월국가 정권 전복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정권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사법제도, 표현의 자유, 인권 보장,
역동적인 시민사회가 존재하는 중국을 희망한다. 고문이 없고, 어떤 피고인이든 법적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당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재판을 요구한다. 중국 당국은 이들이 외세와 결탁해 서구 사상을 추종한다고 비판하지만, 민주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중국 현대사의 오래된 미완의 과제다. 1919년 반제국주의와 함께 민주와 과학을 요구했던 5·4운동의 과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후 특권에 반대하고 공정한 사회를 요구했다가 반우파 투쟁에서 희생된 학생들, 문화대혁명 이후 정치 현대화를 요구했던 민주의 벽 운동, 1989년의 톈안먼 시위를 거쳐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이어져왔다.
- P168

《노학연대라는 불씨》
고작 50여 명의 대학생이, 노조를 결성하려다 해고된 노동자들을
‘지원한 ‘작은 사건‘에 왜 당국은 이토록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을까?
2001년 세계무역기구 가입 이후 중국 수출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농촌 출신 노동자들이 동·남부 연해 지역의공장으로 모여들었다. 호적에 ‘농민‘으로 분류된 이들은 도시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고 주거, 자녀 교육, 복지, 의료 등에서차별을 받으며 ‘2등 시민‘으로 살아간다. 이들 2억 9000만 농민공들의 희생으로 중국이 벌어들인 엄청난 무역흑자는 공산당, 국유기업, 권력층과 연결된 기업가들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농민·농민공들은 성장의 정당한 몫을 받지 못했다.
2010년대 들어 더 나은 처우와 독립노조 설립 등을 요구하는젊은 노동자들의 시위와 저항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 P175

동남아 국가 등으로 이전하면서 제조업 일자리는 줄고, 음식배달,
택배 등 플랫폼으로 통제되는 노동이나 일용직으로 일하는 건설업·서비스업 중심으로 일자리 구조가 바뀌고 있다. 윤종석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인문한국 연구교수는 "80년대 한국의 대규모 노동운동은 산업 고도화와 대공장화, 중산층 확대를 기반으로 일어났고, 국제적 환경도 노동자들에게 유리했다"며 "지금 중국 노동자들은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불안정 노동이 확대되고, 당·국가의 강력한 탄압 등 매우 복잡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한다. 중국 청년들은 도시의 복지 시스템에서 소외된 ‘농민공‘이란 차별의 굴레를 벗기도 전에, 첨단기술의 통제와 국가의 강력한 감시라는 이중·삼중의 굴레에 매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 무렵까지는 중국 노동운동의 희망이 확산되었던 시기였다. 파업의 물결이 광둥성과 상하이 등 연해 지역 곳곳을 뒤덮고 노동계약법이 도입되어 임금이인상되고, 노동연령층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의 발언권이 강해졌다. 사람을 기계처럼 부리는 관리 체제와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임금을 인상하라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2010년 애플 아이폰을 비롯한 글로벌 기업들의 첨단 전자제품을 조립 생산하는 중국 폭스콘 공장에서 10대와 20대 초반 노동자 18명이 잇따라 고층건물에서 몸을 던졌다. 연쇄 자살의 비극을 통해, 이들은 일주일에 6~7일, 하루 12시간 넘게 로봇처럼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며, 모든 일상을 통제당하는 고통을 세상에 폭로했다. - P184

농민공들은 현실의 모순을 명확히 자각하고 더 나은 현실을 꿈꾸며 노동운동에서 희망을 찾았고, 《전태일 평전》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등을 읽으며 ‘취안타이이‘ (전태일의 중국 발음)가 준 희망의 불씨를 마음에 품었다.
시진핑 정부는 노동자들의 각성과 권리 의식 성장을 사회불안정 요소로 판단했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했고, 2016년 자선법, 2017년 해외비정부조직관리법을 시행해 시민단체들이 정부 승인 없이는 모금을 할 수 없고 홍콩이나 외국의 지원도 받을 수 없게 했다.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사회복지 서비스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역할로 변모해야 했다. 국가가 허용하는 만큼 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노동자가 변화의 주체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는 ‘당근과 채찍‘이다.
중국의 노동운동은 암흑시대를 맞았고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체포되거나 지하로 숨어들었다. 판이라는 성만 밝힌 한 노동운동가는 2020년 9월 좌파 사이트 궁차오가 마련한 온라인 세미나에서 "노동자 조직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계속되는 당국의 괴롭힘과 체포, 억압 때문에 활동이 매우 어렵다. 노동운동에 참여하려는 조직가, 운동가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로봇도 노동자들의 경쟁자로 등장했다.  - P185

노동은 한없이 불안정해지고 권리를 외칠 목소리마저 억압당하는 사회에 절망으로 저항하는 이들도 있다. 광둥성 대도시 선전의 반허 인력 시장 주변에서 살아가는 ‘싼허청년들‘은 고정된 주거지도 없이 돈이 떨어지면 배달이나 건설 일용직으로 버는 일당에 의지해 하루 벌어 3일 노는 삶을 살아간다. 이들 가운데신분증도 팔아버리고 가족과의 연락도 끊고 노숙 생활을 하면서자포자기한 채 시간을 보내는 이들은 ‘싼허다선和大神"(싼허의 신)으로 불린다.
싼허청년들의 생활을 연구해 《어찌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並不懷歸)란 책을 펴낸 사회학자 펑은 중국 언론 인터뷰에서
"싼허청년들은 어려서부터 도시의 생활을 봐왔기 때문에 생활에대한 기대도 높고 권리 의식도 강하고 불공평에 대해서도 더욱 민감하다. 하지만 권리를 지킬 수단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항의 방식, 즉 대도시에서 아무렇게나 끼니를 때우며 죽음을 기다리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가 싼허청년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착취당하고 떼먹히고 차별당하기 싫어서 일하지 않는다‘였다.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버린국가‘에 저항하고 있다. - P187

《중국 특색 자본주의》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를 정면 공격하려 한다. 중국 경제가 발전할수록 공산당의 통제가 약화되고, 계획경제는 시장경제로 전환할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의 계산은 틀렸다. ‘시진핑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중국이 서구식 모델이 아닌, 공산당의 지도와 국유경제의 우위를 유지하는 중국식 모델을 고수할 것임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기존의 시장경제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의 집중적인 자금과 기술 개발 지원을 받는 국유기업들이 전 세계 시장에서도 민간기업에 대한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2020년포춘》이 집계한 글로벌 500대 기업에서 중국 기업이 124개로 미국의 121개를 추월했는데, 그 가운데 91개가 국유기업이다.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기존 시장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보고, 중국의 굴기를 반드시 꺾어야 한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 P242

 중국도 국유기업을 강화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해 반격에 나서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미국식 시장자본주의와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의 우열을 가리는 체제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마윈은 2016년에 계획경제의 미래에 대해 의미심장한 예언을 한 적이 있다. "100년 넘게 우리는 시장경제가 최고의 시스템이라고 믿었지만, 앞으로 30여 년 안에 계획경제가 점점 커질 것이다. 빅데이터는 시장의 힘을 예측해 마침내 계획경제를 실현하게 할 것이다"라고, 중국공산당은 국유경제와 첨단기술을 결합시킨 21세기 계획경제로 미국을 뛰어넘는 위대한 중화 자본주의를꿈꾸고 있을까.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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