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군대 - 게릴라전, 테러, 반란전과 대반란전의 5천년 역사 KODEF 안보총서 117
맥스 부트 지음, 문상준.조상근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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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07년 4월 9일, 바그다드 정찰


"이 책에서 테러리즘은 비국가행위자가 주로 비전투원(대부분 민간인이지만 정부 공무원, 경찰, 그리고 복무 중이 아닌 군인도 포함된다)을 위협하거나 강압하여 정부의 정책 또는 구성을 바꾸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게릴라 전술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주로 정부와 정부군을 대상으로 무장단체가 구사하는 치고 빠지기 전술을 말한다." "몇 가지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게릴라는 최소한 짧은 시간만이라도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테러리스트는 그렇지 않다. 게릴라 군대는 종종 수만 명에 이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테러 조직은 지지자가 수백 명을 넘지 않는다. 게릴라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작전을 확연히 구분되는 교전 지역에 한정해 실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닌 지역에 공격을 집중한다. 게릴라는 적을 물리적으로 패배시키거나 적어도 약화시키려고 하는 반면, 테러리스트들은 몇 번의 극적인 공격으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24-5)


제1부 문 앞의 야만인─게릴라전의 기원


1 벳호론 매복 전투─66년, 로마군 대 유대 반란군 게릴라


"로마 군단은 탁 트인 전장에서 적을 만났을 때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이런 로마 군단의 장점은 군단이 애로지형에 빠지거나, 결연한 의지로 무장한 노련한 게릴라들을 만났을 경우 발휘되지 못했다.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부대가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해안 인근 로마령 도시로 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악지대를 통과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경무장한 유대인 게릴라 부대는 고지에서 돌팔매질을 하고, 투창을 던지거나 낙오자들을 칼과 검으로 공격하는 등 로마군과 현지 동맹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로마군 병사는 1인당 평균 45kg의 중무장 갑옷과 장비를 휴대하고 있어서 민첩한 게릴라를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사자 가운데는 오늘날 미 육군 1개 여단 규모와 비슷한 5,0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로마군 6군단을 이끈 군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 군단은 치중대 물품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했고, 군수품을 실어 나를 동물도 도살되었다."(40-1)


# 애로隘路 지형: 애로란 산과 산, 언덕과 언덕 사이에 만들어진 좁은 길과 같은 협곡을 말한다.


# 치중대輜重隊: 군수지원을 제공하는 제반 전투근무지원 부대의 집단을 말한다.


2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쟁들─기원전 426~기원전 1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중앙아시아 원정, 마카베오 일족과 바르 코크바의 반란


"기원전 426년 그리스 북서쪽 해안에 있는 산간지방인 아이톨리아의 날렵한 경무장 원주민들이 어떻게 아테네 중장보병hoplite을 몰살했는지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보자." "평원에 있는 도시국가의 일반적인 장군들이 그런 것처럼, 아테네군 총사령관 데모스테네스는 청동 투구와 중장갑을 장비한 보병 50열로 구성된 밀집대형Phalanx의 전투를 선호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군의 '비대칭' 전술에는 통상적인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초기에 아테네군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것은 동맹군 궁수들이 유일했지만, 그나마도 화살이 바닥나자 아테네군은 무너졌다. 아테네군은 퇴각하려 했지만 벳호론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톨리아군은 수많은 아테네군을 섬멸했고 아테네군은 아이톨리아군의 투창에 쓰러져갔다. 나머지 아테네군 병사들은 통로 없는 도랑과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몰려들어 결국 섬멸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군은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희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6)


3 고대 원시 전쟁─대량 살육이 자행된 부족 간의 전쟁


"도시 문명 발전 이전, 그리고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현생 인류의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악전고투의 기간 동안 전쟁은 주로 군기가 엉망이고, 결속력이 약하며, 전면전을 꺼린 경무장한 자원자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 수행되어왔다. 이들은 적을 교란하고 매복해 있다가 습격하고 학살하고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기 위해 잠행, 기습, 신속기동을 선호했고, 전투력이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적을 만나면 신속히 퇴각하여 사상자를 최소화했다. 이는 현대 게릴라전의 주요 특징이자 국가 발생 이전 원시시대 전쟁의 주요 특징이다." "원시 전쟁은 전체 전사자 수가 아니라(부족 사회의 경우 도시 문명과 비교하면 인구가 매우 작기 때문이다) 전사율 측면에서 문명 사회의 전쟁보다 더 치명적이다." "부족 사회는 매년 발생하는 전투에서 평균적으로 인구의 0.5%를 잃는다. 만약 오늘날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비율로 인구를 잃으려면 매년 150만 명이 죽거나 9·11 테러와 같은 일이 1년에 500번 발생해야 한다."(56-9)


4 아카드와 반란전의 기원─기원전 2334~기원전 2005년,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초로 제국을 건국하고 동시에 최초로 상비군을 창설한 사람은 사르곤Sargon이었다. 사르곤은 아카드Akkad를 수도로 정했는데, 아카드는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비군은 새 영토를 획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복속한 지역을 통제하는 데도 필요했다. 복속된 도시가 계속 제국에 반기를 들곤 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반기에 대응해 아카드군은 〈대량 살육, 노예화, 추방, 도시 완전 파괴〉로 이들을 진압했다." "사르곤은 정복민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수메르인들을 회유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드어를 보급하고 미술을 장려했다. 사르곤의 딸 엔헤두안나 공주는 시인이자 여사제로서 세계 최초의 작가로 알려진 인물로, 수메르 신과 아카드 신의 통합을 찬미하는 설형문자cuneiform 시를 남겼다. 이는 셈족Semite인 사르곤이 수메르족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61-4)


5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기원전 512년, 페르시아군 대 스키타이족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영토에 난입한 스키타이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512년경,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병 기술인 부교를 보스포루스 해협에 설치한 후 수십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발칸 반도를 통과하여 현재의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 상륙했다. 다리우스의 예상과 달리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을 전장에서 맞아 싸우기에 너무 약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스키타이인들은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좌절한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의 왕 이단티르수스에게 애처로운 서신을 보내어 묻는다. 〈그대 괴이한 자여, 어째서 계속 도망치는가? ··· 돌아와 전투에 응하라.〉 이단티르수스는 경멸조의 답신을 보냈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페르시아인이여. ··· 우리 스키타이인에게는 함락되거나 파괴될 도시도, 경작지도 없다. 우리는 그대와 서둘러 싸워야 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는 한 응전하지 않을 것이다.〉"(69-70)


6 초토화시켜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기원전 1100~212년, 아시리아와 로마에서 찾은 대반란전의 기원


"대부분의 고대 제국은 외부 유목민이나 국내 반란군들이 일으킨 게릴라전의 위협에 똑같은 전략으로 대응했다. 이는 간단히 '공포'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고대 군주들은 무장 투쟁을 진압하고 예방하기 위해 최대한 잔인하게 진압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 군단이 점령한 도시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의 시체뿐만 아니라 토막난 개의 시체, 수많은 동물들의 찢어진 사지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일어날지도 모를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로마는 전 세계에 그들의 무자비함을 알렸다." "만약 로마 제국이 피정복민들에게 죽음과 절망만을 가져다주었다면 로마 제국은 절대로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서유럽,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450년 동안 다스렸다. 로마 제국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반란은 엄벌한 반면 통치는 관대하게 했다는 것이다."(71, 75, 79-80)


7 로마 제국의 몰락─370~476년, 야만인의 침공


"당대 최고의 제국 로마는 11만~12만 명밖에 안 되는 침략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375년 당시 로마 정규군의 수가 최소 30만 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침략군은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로마군은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거나 로마 내전에 참가하거나 침입자나 게릴라에 대항해 수천 마일에 달하는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서쪽 야만인과 맞닿은 국경에는 불과 9만 명의 정규군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로 야만인의 침입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는 습격대가 로마의 몰락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로마의 몰락에는 내부 분열과 혼란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쓴 것처럼, 〈야만인은 로마를 침략할 때까지 마치 로마의 몸통을 찔러 약하게 만든 다음 서서히 찔린 부위가 부패하게 만듦으로써 로마를 '살해'했다.〉"(89-90)


8 동양의 전쟁 방식?─손자 이후 고대 중국의 전쟁


"흔한 통념과 달리, 유럽인들은 본질적으로 야전에서 보병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인들은 게릴라전을 선호한다고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두 중국 군사사학자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과 서양의 전근대 전투수행방식의 차이는 사실 중국의 고전 병법서들처럼 우리를 믿게 만드는 권위 있는 문헌들에 나와 있는 내용만큼 그렇게 크지 않다. 여러 문헌에서 전투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회피를 강조하지만 고대 지중해 지역이나 중세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중국에서도 전투는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게릴라전은 〈동양 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아시아는 단일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에 동양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적절하다. 게릴라전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강적에 대항해 싸우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정규군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보통 부족 집단의 역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93-4)


9 유목민과 중국인─기원전 200~48년, 흉노 대 한나라


"흉노가 아는 것이라고는 전쟁뿐이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그들이 농경민인 중국인보다는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한무제는 흉노의 유목민 이웃 부족과 관계를 개선하고, 이들을 관례적으로 한군 기병대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이이제이以夷制夷는 로마도 선호했던 방법이다. 한군은 이와 같은 폭넓은 군사개혁을 통해 70만의 병력을 양성했다. 농부를 1~2년 동안 징집하여 운용하는 징병제 체제로는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로 장기간 부대를 파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1~2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기병 전술이나 궁술 숙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 같은 이유로 로마에서도 같은 군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제국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농장에서 임시로 징집되는 시민군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게릴라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직업군인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96, 100-1)


10 게릴라의 역설─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이유


"성공한 게릴라라 하더라도 능력이 생기면 정규군 전술로 전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보병, 포병, 기갑, 공병 및 기타 전문 병과로 구성된 부대는 기병 운영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 싸울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성벽 파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기동성이 빠른 유목민 전사는 방어 전투에 적합하지 못했고, 새로 정복한 영토의 행정과 정책 수립에도 적합하지 못했다." "한 역사가는 유목민이 정착민들 속에서 살게 되면서 〈유목민들은 뛰어난 개인의 재능과 조직의 결속력을 빠르게 잃어버렸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유목민, 적어도 그들의 자식 또는 손자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일종의 트레이드-오프trade-off(맞교환)였다. 정착 생활이 그 이전의 유목 생활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언제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게릴라로서 싸우기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106-8)


11 스코틀랜드 반란군─1296~1746년, 스코틀랜드 대 잉글랜드


"중세시대 유럽인들은 문화적으로 습격전에 친숙하지 않았다. 사실 유럽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근접전투를 중요시했다. 이들은 순수하게 실리적인 이유로 슈보시를 채택했다. 슈보시란 적의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방화, 약탈, 강간, 납치. 무차별 살해 등을 저지르는 것을 뜻했다. 곳곳에 구축된 성채 때문에 세트피스set-piece와 같은 전투는 드물었고, 전투가 일어나면 패한 쪽은 보통 성채로 퇴각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전투도 드물었다. 하지만 15세기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성채는 돌파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반면에, 성벽 안에 숨어드는 측의 성 인근 농지는 방어가 허술해서 적의 습격에 취약했다. 슈보시는 손쉽게 수행할 수 있고 수익성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슈보시로 얻은 전리품은 봉급이나 식량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는 생계 유지 수단이었다. 봉급을 받지 못한다거나 식량을 보급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또한 불쌍한 농민을 노리는 산적과 탈영병의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다."(111-2)


12 역사책 속의 대반란전─대반란군의 이점


"17세기에 이르러, 화약 제국들(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튀르크, 인도, 중국)은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력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갔다. 활과 화살을 잘 다루는 유목민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엄청난 군수지원을 받는 대규모 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18·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정치적 이념과 전술에 완전히 적응하여 진화된 게릴라가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대 정규군을 강력하게 만든 무기체계와 전투기술을 동일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물리치기 쉽지 않았다. 고대나 중세시대와 달리, 현대에 들어와 생긴 게릴라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과거 시대의 게릴라들로부터 배우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책과 인쇄물이 보급되고 나서 문자 해독율이 높아지자 반란군들은 앞선 게릴라들의 경험을 글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강대국이 무릎을 꿇게 만들 수 있는 기발한 기술을 개발해낼 수 있게 되었다."(122-4)


제2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자유주의 혁명의 대두


13 '이성의 시대'의 비정규군─1648~1775년, 후사르, 판두르, 그리고 유격대


"중세 시대 동안 모호했던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차이는 30년 전쟁 이후 상비군, 국민군의 확산으로 인해 뚜렷해졌다. 이러한 차이는 민족국가의 성장과 그 궤적을 같이하면서 변화하다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랐다. 이때부터 병사들을 수용할 병영, 이들을 훈련시킬 교관, 이들을 지휘할 전문 직업군인, 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할 군수체계, 이들을 입히고 장비를 갖추게 할 공장, 그리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이들을 돌봐줄 병원과 참전용사 수용시절이 등장했다. 1700년경 프랑스는 약 40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1775년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더 강력하게 게릴라전의 이념, 선전, 그리고 비교적 새로운 요소들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은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신호탄이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한 세기 동안 유럽과 이주 식민지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간 일련의 자유민주주의 대격변에는 상당히 많은 게릴라전이 포함되었다."(129-30)


14 미국 독립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민병대와 민심─1775~1783년, 차세대 게릴라들이 학습하고 적용해야 할 교훈을 남긴 미국 독립전쟁


"미국 독립전쟁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간과되는 것은 요크타운 전투 이후에도 영국군은 계속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군은 요크타운에서 단지 8,000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여론'을 고려했을 때 병력을 증원하는 대응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구한 게릴라전의 역사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의원내각제 정부는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적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반란군의 능력은 당시 정권이 누리고 있는 장점을 상쇄하고 반란군에게 훨씬 더 큰 성공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인류의 견해를 적절히 고려〉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이러한 선전전에서 아주 성공적인 무기였다. 모든 영국 신문들은 독립선언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1782년 2월 28일, 반전여론에 지친 영국 의회는 투표 결과 근소한 차인 234 대 215로 공세적 작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153-6)


15 목숨을 건 사투─1808~1814년, 반도전쟁 당시 프랑스군 대 스페인 게릴라


"미국 독립전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치러진 반도전쟁은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합동작전을 실시하여 강력한 점령군이 어느 쪽 위협에도 대처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정규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수행했다. 스페인에서는 비정규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소화했다. 6년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 대부분은 비정규군 활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가는 컸다. 중심 권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페인은 수십 년간 도적떼와 정치적 혼란에 시달렸다.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스페인은 도시 자유주의자 대 농촌 보수주의자 간의 내전으로 분열되었다. 자유파는 마드리드를 거점으로 삼았고, 보수파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런 혼란은 100년 후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계속된 스페인 내전에서 정점에 달했다. 사회 구조의 분열은 장기간의 반란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174)


16 흑인 스파르타쿠스─1791~1804년, 아이티 독립전쟁과 생도맹그 노예 반란


"아이티의 성공에는 모기가 창궐하는 열대기후가 한몫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기가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옮긴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이 해충 전사들이 모든 적 중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유럽에서 온 부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열병으로 인한 비전투손실이었다. 또한, 아이티의 지정학적 위치(아이티는 프랑스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반란 시기(나폴레옹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노예와 노예주의 인구 차이(노예는 50만 명, 백인은 4만 명)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결의에 가득 찬 노예들과 그들을 이끈 걸출한 지도자 흑인 스파르타쿠스였다." "프랑스가 무자비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할 수 없었다는 점은 심지어 아무런 제한이 없는 대반란전 전략조차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교훈은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189)


17 그리스인과 그리스 독립 지원자들─1821~1832년, 그리스 독립전쟁


"그리스 망명자들은 오늘날 정보전의 영역으로 알려진 분야에 매우 뛰어났다. 이들은 서양 지식인들이 예부터 그리스인들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과 서양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전쟁으로 인한 튀르크인과 중동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이 그리스의 대의를 되살렸다. 외부 세력이 반란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았다. 프랑스는 미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도와 영국에 대항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서 프랑스와 싸우던 스페인 게릴라를 돕고 그 이전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1568~1648년)에 대항한 네덜란드 반란군을 지원했다. 하지만 모두 전략적인 이유에서 지원한 것이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도 어느 정도는 일말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리스에 개입했다. 물론, 이 세 국가들이 도덕적 만족 이외에 자신들의 동맹인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커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196-9)


18 두 대륙의 영웅─1833~1872년, '20세기 게릴라들의 선구자' 주세페 가리발디와 이탈리아 통일 전쟁


"가리발디는 1860년 4월 4일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에 대항하여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촉발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다음 단계에서 중심 역할을 할 운명이었다. 그의 붉은셔츠단은 기적 같은 승리를 이어가면서 부르봉 왕가의 군대를 토벌해나갔다." "가리발디의 평생의 목표였던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에 현실화되었다. 베네치아는 1866년에 프로이센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가리발디는 다시 한 번 북이탈리아에서 게릴라전에 나섰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정규군보다도 많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가리발디는 20세기 게릴라들의 선구자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면서 일관되게 인간성과 자제력을 보여주었고 결코 자신을 위해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게릴라 지도자들보다 더 칭찬받을 만했다. 그는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업적으로 전무후무한 게릴라 지도자의 모범이 되었다."(214-6, 219-20)


19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이상은 실현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더 쉽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인권 선언으로 시작해서 전쟁과 공포정치로 끝이 났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영국 시인 셸리 같은 그리스 독립 지지자가 상상한 〈위대한 시대〉나 〈또 다른 아테네〉로 안내한 것이 아니라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토가 그리스 왕으로 옹립된 후 1862년에 쿠데타에 의해 퇴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티 독립 후에 남은 백인들이 대학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은 프랑스를 몰아내고 불경기와 내전을 겪었다. 스페인은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민주주의 체제로 탈바꿈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그들의 투쟁의 결과에 가리발디보다 훨씬 더 큰 환멸을 느꼈다. 혁명 후에 등장한 군사독재, 부패, 내전은 볼리바르가 말년에 〈소름끼치는 독재정치〉라고 비판한 것들이다." "산 호세, 볼리바르를 포함한 수많은 혁명가들의 사례는 이상은 실현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222-3)


제3부 유점(油點) 확산 전략─제국의 전쟁


20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전쟁─유럽인 정복자에 비해 군사 및 전투 기술 면에서 뒤처졌던 비유럽인은 왜 게릴라전이 아니고 정규전을 선택했는가?


"비서양 국가들이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서양 국가들의 전투력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줄루족이 수족Sioux의 교훈을 배우고 그 교훈을 적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반대로 선진국 군대는 다른 나라의 전투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비정규전을 수행할 만한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는 이념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그 애정의 주된 대상은 가족, 씨족, 부족이었지 국가가 아니었다. 원주민 국가의 지도자들은 종종 유럽인들에게 분개한 만큼 다른 부족이나 분파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분노를 느꼈다. 민족주의는 18세기에 유럽인들이 확립한 개념으로, 19세기까지 미주 대륙의 유럽인 정착 식민지들을 넘어서까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현대식 무기가 없어서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민족의식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229-31)


21 게릴라 전술의 정수, 매복공격─1622~1842년, 정착 초기 북미 동부의 '인디언 전쟁'


"17세기와 18세기 동부해안을 따라 벌어진 '삼림 전쟁'에서 왜 북미 인디언들은 결국 패배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치명적인 부족 때문이었다. 하나는 인구의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단합의 부족이었다. 처음에 북미 인디언들은 북미 개척자들보다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이주민들이 계속 들어온 반면 북미 인디언의 인구가 (전사·병사·아사 등으로) 계속 감소하기 시작한 18세기경부터 정착민의 인구가 북미 인디언의 인구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구가 줄어 약해진 북미 인디언들은 무자비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북미 인디언의 인구 감소세는 내분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상륙했을 때 북미 대륙 인디언들은 600여 개의 '자치구'로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매번 북미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백인들은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자발적 협력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241-3)


22 서부에서의 승리─1848~1890년, 북미 인디언 전사 대 미군의 전투


"서부에서 미군의 작전 목적은 인디언 토벌이 아니라 보호구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서부의 두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집단 수용은 백인들에게 사리사욕을 충족하고 숭고한 자선산업을 펴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리사욕 충족이란 백인들이 원하는 땅에서 인디언들을 몰아내어 1873년에 내무부 장관이 언급한 '빈번한 잔학행위, 일탈행위, 만민의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를 예방하는 것이었다. 자선사업(인류애와 박애를 위한 위대한 업적)이란 〈인디언들에게 농경술과 문명화에 필요한 부수적인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영국군, 프랑스군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가장 효율적인 전술은 커스터가 1868년에 실시한 것처럼 인디언들의 식량차고, 말, 티피를 목표로 삼아 부족들이 덜 활동적인 겨울에 이것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북미 인디언의 자급자족 경제를 고려할 때 이들을 기아의 위기에 빠뜨려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게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254-5)


23 동방에서의 승리─1829~1859년, 체첸과 다게스탄에서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벌인 성전


"1856년에 캅카스 총독으로 부임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바리아틴스키 공작은 난관에 부딪힌 대반란전에 종지부를 찍을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반란군 지도자) 샤밀이 사형집행자와 함께 다녔던 반면, 바리아틴스키는 재무담당자와 함께 다니며 부족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 또한 이 부족 지도자들은 제국 체제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얻었고 광신적인 무리드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바리아틴스키는 〈나는 신정주의 원칙에 반하는 칸khan들을 복권시켰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슬람교 성직자들에게 샤밀을 배교자라고 비난하고 비폭력 교리를 전파하도록 독려했다. 지역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죽이는 대신 여성과 어린이는 포위된 요새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심지어 여성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후원했다." "그는 무익한 징벌적 원정을 수행하기보다는 다게스탄의 모든 반군 거점을 체계적으로 축소했다."(278)


24 어둠의 골짜기─1838~1842년,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영국은 대반란전에서 최대 목표보다는 최소 목표를 지향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 독립운동 시의 오스만 제국이든, 미국 독립전쟁 기간의 영국이든, 점점 커지는 민족주의 반란에 직면한 대반란전 수행 주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만 제국이 초기에 더 많은 지역 자치권을 기꺼이 허용했다면, 북미 식민지에서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에 대한 통치권을 어느 정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이후 피해가 커지고 전쟁이 양쪽 모두에게 감정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그러한 타협은 생각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은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촉발할 수 있는 큰 통제권을 생각지 않고 러시아 개입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통제권만을 얻었다. 이는 뉴질랜드와 캐나다와 같은 정착민 식민지를 대영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치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법적 조치와 비공식적인 방법을 동시에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다."(290)


25 북서쪽 국경─1897~1947년, 영국과 파슈툰족


"아프가니스탄인들보다 영국인들에게 더 골치 아픈 문제는 1896년에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그어진 듀랜드 선Durand Line을 기준으로 인도 제국 쪽에 살고 있는 파슈툰족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1849년에 펀자브를 합병한 후 이 지역을 통제했지만, 다음 세기동안 매우 독립적이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이 부족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영국이 파슈툰족을 상대로 싸운 전쟁은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반란군은 지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교착상태는 정부에게 유리하다. 영국은 인도의 통치권을 유지하는 한편 소수의 영국 지원병들로 하여금 주로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감독하게 함으로써 파슈툰족을 처리 가능한 사소한 골칫거리 정도로 만들었다. 부족민의 신뢰를 얻은 로버트 워버튼 대령 같은 지식이 풍부한 관료들도 문제를 관리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91, 296-7)


26 문명화 사명─1912~1925년, 모로코의 리요테


"1899년, 인구가 2억 5,000만 명이었던 인도에는 영국군이 겨우 6만 8,000명이 주둔해 있었고, 인구가 4,100만 명인 아프리카를 포함한 나머지 대영제국 식민지에는 영국군 5만 1,000명이 주둔해 있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고대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원주민의 반란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응하면서 그들의 통치는 묵인해주는 호의적인 조치를 취했다. '민심' 또는 '인본주의'에 기반한 대반란전 학파로 불리게 된 이 정책의 위대한 이론가는 프랑스 원수 루이 위베르 곤잘브 리요테였다." "그는 〈군사 점령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행군하는 점령군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 말했다. 점령군은 〈파괴를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그 대신 시장과 학교를 건설하고 〈주민의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다른 프로젝트들을 계획하는 데 주력하는 장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는 이 임무가 본국의 부대가 적에 대해 수행하는 일반적인 전투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주장했다."(298, 302)


27 보어인 코만도─1899~1902년,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게릴라와 영국군


"다른 많은 노련한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보어인은 기동의 대가였다. 종종 영국군은 보어군을 잡으려다가 허공에 헛주먹질만 날리곤 했다. 답은 보어군이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국내 통행권 발급(러시아 차르와 구소련 인민위원회가 모두 선호한 방법)부터 (인디언 전쟁에서 미군이 자주 했던) 조랑말 무리 학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흑인과 보어군 탈영병은 영국의 대반란전 수행 부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적의 위치를 즉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0년 전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뚫고 제로니모를 추격할 때 거추장스런 치중대 없이 작전하는 소규모 분견대의 유용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었다. 보어 전쟁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군 지휘관들도 '보어 형제'처럼 성가신 치중대 없이 초원을 누비는 경기병 부대를 이끌고 싸웠다. 그들은 대大부대보다 훨씬 더 많은 포로를 잡았다."(325-8)


28 제국주의의 전성기─제국주의는 왜 자기파괴의 씨앗을 퍼뜨렸는가?


"보어 전쟁과 필리핀 전쟁에서 반란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두 전쟁으로 인해 제국주의는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과거의 소규모 분쟁과 비교해 전사자가 늘었고, 얼마 되지 않던 직업군인의 수마저 줄었을 뿐 아니라 중산층과 상류층의 전시 자원입대자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과거에 '원주민'의 저항을 경멸했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이 게릴라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파괴의 씨앗을 퍼뜨렸다. 서구 행정가들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서구 교리를 널리 퍼뜨리는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1920년대부터 그들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을 자극했다. 서양인들은 사상뿐 아니라 무기도 전파했다. 유럽인들은 TNT부터 AK-47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무기를 만들어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20세기의 반란세력이 이전의 반란세력들보다 훨씬 더 잘 무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333-5)


제4부 폭탄 투척자들─국제 테러리즘의 태동


29 암살 자객─1090~1256년, 근대 이전 가장 성공적인 테러 집단 아사신


"19세기 중반 대중매체의 확산으로 테러리스트는 불과 몇 번의 폭력행위로 엄청나게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입소문을 통해 뉴스가 전파되던 시대에는 도저히 달성하기 어려운 효과였다." "학교와 대학의 확산은 테러리스트들이 신입 단원들을 모집하고,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 세계 대학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등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배양 접시petri dish 역할을 했다." "비교적 성공적인 19세기, 20세기 초반의 테러 단체로는 쿠 클럭스 클랜(KKK단)부터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과 일본에서 나타난 군국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심지어는 러시아 혁명도 암살과 '몰수'로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 전복에 기여했다."(346-7)


30 존 브라운, 흑인 노예들의 모세─1856~1859년, 미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테러리스트


"존 브라운은 게릴라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남부에 군사적 위협을 조금이라도 가할 수 있을 만한 병력을 보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자신의 위업과 발언이 신문 전면에 실리게 만든 최초의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사후에 더 큰 명성을 얻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성경 속의 선지자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브라운의 감동적인 법정 연설(1859년 12월 2일 교수형 집행)로 북부에서는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려한 표현으로 법정 연설을 마무리했다. 〈자, 정의의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나의 목숨을 빼앗고, 내 피를 내 아이들의 피와 사악하고 잔인하며 불공정한 법률로 인권이 무시되고 있는 이 노예국가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피와 더 섞어야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겠소.〉 당시 아직 노예제도 폐지론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조차도 정당한 명분만이 그러한 자기 희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58)


31 재건의 파괴─1866~1876년, 해방노예의 인권을 유린한 테러 집단 KKK단과의 전쟁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후대가 〈서사전battle of the narrative〉이라고 부르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재건을 방해하는 데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남북전쟁 이후의 진정한 희생자는 해방노예가 아니라 전 노예 소유주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림으로써 서사전에서 성공했다. 이는 『국가의 탄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유명한 책과 영화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미 1870년대에는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에서도 같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KKK나 이후에 나타난 조직들이 연방 정부를 전복하거나 심지어 연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작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연방군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것은 결국 백인이 이끄는 연방 정부가 그들의 요구를 쉽게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북부인들은 연방 탈퇴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지만,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370)


32 행위를 통한 선전─1880년경~1939년경,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


"무정부주의자들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외견상 매우 강력해 보였기 때문에 많은 나라가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해인 1881년 《뉴욕 타임스》가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억압적인 조치로 대응했다." "러시아 비밀경찰은 프랑스 정부의 동의를 얻어 파리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립했고, 이탈리아는 전 세계의 이탈리아 출신 무정부주의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형사들을 파견했다. 이러한 조치는 1923년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Interpol의 설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카메라 덕분에 대중매체는 테러리스트의 테러 사진을 게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가해자인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목적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경찰은 용의자를 촬영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에 '머그샷mug shot', 지문감식, 법의학 연구소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테러리스트들은 임무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383-4)


33 차르 암살 시도─1879~1881년경, '인민의 의지파' 허무주의자들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 집행위원들은 모두 30세 미만의 지식인으로, 주로 중산층이나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이들 대부분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반 투르게네프가 1862년에 쓴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대중화된 용어인 허무주의자Nihilist로 알려졌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행동강령agenda에 언급되어 있듯이 '포퓰리스트-사회주의자'였다. 국가를 파괴하고자 했던 무정부주의자와 달리 그들은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어느 역사가는 허무주의자들이 〈사람들이 동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농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확하면서도 신랄하게 썼다. 그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 많은 인화물질이 축적되어 있어서 작은 불꽃으로도 쉽게 타올라 결국에는 거대한 화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황제이자 독재자인 차르 암살보다 더 좋은 불꽃은 없었다."(386-7)


# 1881년 3월 1일 일곱 번째 시도 만에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34 통제 불가능한 폭발─1902~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구체제(1897~1917년) 하의 20년 동안 테러 공격 횟수는 엄청났다.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1만 7,000명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했다고 추정되며, 대부분의 테러 공격은 1905-1910년에 발생했다. 차르의 처남은 〈수많은 총독들이 혁명가들에게 암살되었다.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라고 썼다." "볼셰비키 독재 정권 하에서 스탈린은 젊었을 때 캅카스에서 도적으로 활동하며 배운 방법을 훨씬 더 큰 규모로 적용하여 소련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차르 정권이 권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 '마지막 처리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소수의 폭탄 투척자들이 무너뜨릴 수 없는 더욱 강력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이처럼 반反차르 테러리스트들은 국가 전복이라는 목표를 즉시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러시아와 세계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401, 404)


35 신페인당과 필러스─1919~1921년, 아일랜드 독립전쟁


"1921년 12월 6일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26개 남부 카운티는 캐나다처럼 대영제국의 자치령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고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는 영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북아일랜드가 배제된 것도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다수의 공화주의자들은 아일랜드 의원들이 '조지 5세 폐하'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것에 더 크게 실망했다." "1923년 5월 조약 찬성파가 대승을 거두면서 내전은 끝이 났다. 그들은 영국이 제공한 무기를 포함하여 더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론이 그들의 편이었으며(1923년 선거에서 유권자 중 27.4%만이 조약 반대파 후보를 지지), 영국인보다 더 가혹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여기서 방데의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중의 지지를 얻은 국내 정권은 거센 저항에 맞닥뜨린 외국 군대보다 저항 세력을 다루는 데 더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군이 변덕스러운 국제 및 지역 여론에 민감한 선출된 정부의 통제를 따르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419-21)


36 테러리스트의 마음─죄인인가, 성자인가?


"현대 테러리즘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가 1세기 전에 출현했던 극단주의자들과 얼마나 합치하는지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는 〈테러리스트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또는 고소득 가정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빈곤이 아니라면 무엇이 테러리즘을 유발하는가? 그는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의 억압'을 지적하면서 〈비폭력적 항의 수단이 축소되면 불만이 테러 전술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확실히 러시아 차르 시대와 심지어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만연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크루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 또는 반란과의 전쟁에서 정치 개혁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적인 복지 및 노동법은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테러를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그런 것이 없었던 러시아에서는 훨씬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430-1)


제5부 사이드쇼─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게릴라와 특공대


37 30년 전쟁─1914~1945년, '젊은 보스니아', 돌격대, 그리고 혈맹단


"지그문트 노이만은 1914~1945년 사이의 기간을 '제2차 30년 전쟁'으로 명명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20세기 저강도 분쟁 신봉자들과 실제 적용을 통해서 영향력을 얻은 유명한 교리들이 탄생했다. 그들의 활동은 상당수가 대규모 전쟁의 궁극적인 결과에 미미한 영향을 미친 '사이드쇼'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드쇼들은 불멸의 유산을 남겼다. 그들은 모든 현대 군대의 중요한 한 축인 '특수작전부대'(즉,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게릴라)를 남겼다. 그들은 외부 지원을 받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있어 가장 가혹한 대반란 정책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당수의 '원주민'을 동원하고 무장시켜 유럽의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을 숨이 가빠 헐떡이게 만든 근대 30년 전쟁의 결말은 수십 년 동안 게릴라들의 대중적 명성을 새로운 정점으로 치솟게 할 탈식민화 전쟁을 촉발시켰다."(445-6)


# 사이드쇼sideshow: 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 공연


38 사막 게릴라전 전문가로 변신한 고고학자─1916~1935년, '아라비아의 로렌스'


"T. E. 로렌스는 종전 후 프랑스군이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군이 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랜스요르단을 점령한 후 깊은 환멸을 느꼈다." "부분적으로 그의 교묘한 책략 덕분에 파이살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세 주를 병합한 이라크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파이살의 형 압둘라는 또 다른 새로운 국가인 트랜스요르단의 왕이 되었다. 이들의 아버지 후세인은 1924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개국한 이븐 사우드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헤자즈를 통치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시온주의자들의 의제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지 않았던 로렌스는 파이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하심가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1922년 승인된 국제연맹의 결의안에 따라 〈유대인의 고향〉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영국이 관리하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따라서 로렌스는 현대 중동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460-1)


39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작전부대의 등장─제2차 세계대전 때 탄생한 특수작전부대


"독일군의 유럽 진격은 적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브란덴부르크 특공대의 선도로 이루어졌다." "1943년 SS(친위대) 오토 슈코르체니 소령은 이탈리아 산 정상에 있는 산장에 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한 유명한 작전에서 글라이더를 사용했다." "프랑스가 함락되던 1940년 5월 총리직을 맡은 처칠은 육군 코만도와 정부 산하 비밀조직인 특수작전집행부SOE를 창설했다."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장거리사막정찰대, 육군 공수특전단SAS, 팝스키 별동대를 운영했다." "1941년 12월 미국이 참전했을 때, 미국 정부는 영국의 선례에 따라 〈와일드 빌〉 도노반 장군이 지휘하는 전략정보국OSS을 창설해서 정보 수집부터 선전에 이르는 임무를 맡겼다." "미 육군은 1942년에 특공대와 유사한 레인저Rangers를 창설했다. 특공대처럼 레인저는 종종 재래식 공격에서 선봉대 역할을 했다. 소련 역시 많은 파르티잔과 스페츠나츠Spetsnaz를 조직해 독일군 후방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하게 했다."(468-74)


40 윈게이트의 전쟁─1936~1944년, 팔레스타인·아비시니아·버마에서 활약한 '다루기 힘든 군사천재'


"윈게이트는 랑군이 함락된 지 몇 주 후인 1942년 3월 인도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확실히 통제하고 있어서 단기간에 재래식 전력으로 반격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아비시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주민군을 활용할 가망도 없었다. 일부 고산 부족은 영국인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대부분의 버마인들은 과거 자신들을 식민통치한 영국을 위해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게이트는 일본군이 기드온 부대와 같은 '장거리 침투'부대의 공격에 취약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적 후방에는 신장, 횡격막, 목에 해당하는 무방비상태의 지점과 다른 취약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부대의 목표는 적의 해부학적 구조상 가장 중요하고 부드러운 지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한 군사행동의 핵심은 〈공중으로 전력을 투사하고 무선으로 지휘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는 일반적인 전술이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488)


# 기드온 부대Gideon Force: 1935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활약한 비정규부대. 윈게이트는 이 부대명을 고대 이스라엘 전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 친디트Chindits: 1943~1944년 당시 버마 전역에서 활동한 영국군 및 인도군 특수작전부대. 윈게이트가 자신의 '장거리 침투작전' 개념을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 창설했다.


41 저항과 협력─1941~1948년,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대게릴라전의 한계


"대반란군, 특히 비자유주의 국가에서 파견한 세력은 무장한 민간인의 저항을 근절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수단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한다. 이로 인한 단기적인 영향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나팔총 전술은 일반적으로 저항을 진압하기보다는 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나중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도 알게 되겠지만, 그러한 방법은 희생자가 된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대중이 반격을 도와줄 외부 동맹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더 비생산적이다." "마크 마조워는 〈유고슬라비아는 유럽에서 파르티잔이 통제권을 장악한 유일한 곳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티토가 교활하고 무자비하며 끈질겼다 하더라도 나치 최고사령부가 유고슬라비아에 자원을 장기간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파르티잔은 아마 무너졌을 것이다." "발칸 반도 이외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저항운동들은 그저 방해 효과만 있었을 뿐이다."(502, 509)


# 나팔총 전술blunderbuss tactics: 짧은 거리에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명중률이 높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나팔총의 단점에 빗댄 근시안적 전술


42 특수작전부대에 대한 평가─특수작전부대는 효과가 있었는가?


"전쟁 초기의 문제 중 하나는 특수작전을 위한 훈련과 교리, 협조 및 계획이 아직 초기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전문적인 부대조차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높았다." "적 후방지역에서 실시되는 특수작전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아마 심리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선전가들에게 특수작전은 그야말로 신나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한 노다지와도 같았다. 그들은 사실이 어떻든 간에 모든 특수작전이 엄청난 역경을 딛고 승리했다고 묘사했다. 그로 인해 암울한 시대에 서양 대중의 전의는 고양되었고, 자신들의 해방을 도왔다고 믿게 된 점령지 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관점에서 후자의 결과는 은총이자 저주였다. 대리전을 수행하는 군대는 지원 세력이 항상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때때로 통제 불가능했다. 연합군 특수작전 요원들은 현지 저항세력을 무장시키고 지원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곧 총을 쥐어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514-5)


제6부 제국의 종말


43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축소되어가는 유럽의 영향력


"1945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전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심했더라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본질적으로 파산상태였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나라도 장기간 대반란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특히 세계 무대에서 이들의 자리를 빼앗은 신흥 초강대국의 적대감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소련, 그리고 나중에 중국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민족해방운동'에 무기와 훈련, 자금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은 서유럽의 재건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해외 식민지 지배 연장 시도에 거의 동조하지 않았다. 《라이프》지의 편집자들이 1942년에 영국 국민들에게 〈우리는 대영제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했듯이 실제로 미국은 영국에게 인도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일련의 식민지들에 대한 통치를 끝내도록 압력을 가했다. 나중에 냉전이 치열해지면서 미국 정부는 입장을 수정했다."(521)


44 붉은 황제의 부상─1921~1949년, 권력을 향한 마오쩌둥의 대장정


"마오쩌둥이 옌안 시기(1937~1947년)에 쓴 가장 유명한 책은 『논지구전論持久戰』이다." "『논지구전』은 태초부터 원시시대 반란군이 사용해온 단순한 치고 빠지기 전술이 아니라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란군 지침서와 마찬가지로 『논지구전』은 여러 곳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게릴라전의 법칙을 설명했다기보다는 어느 한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한 것에 불과했다. 중국에서도 소련 '동지들'의 의도적인 지원과 '왜적'─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무례하게 얕잡아 부르던 호칭─의 의도치 않은 지원이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공산당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사례는 마오쩌둥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외부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강도 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 중 외부 지원보다 중요한 요인은 없다."(546-9)


45 잘 있거라, 디엔비엔푸여!─1945~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게릴라전 전략가 보응우옌잡


"이론적으로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로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 연합군 총병력의 3%만을 잃었기 때문에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권자의 표심에 의존하는 의회 정부 하에서 국민의 지지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전쟁이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재정적 비용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전체 국방 예산 3분의 1이 소모되었다. 전쟁으로 지친 가난한 프랑스인들에게 디엔비엔푸 전투의 손실은 한계 상황을 의미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를 넘어 프랑스인들에게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참패는 식민지 전쟁에서 현대 서구 제국이 겪은 최악의 패배로, 〈자신들이 우월한 인종〉이라는 가정 하에 식민지인들을 지배했던 백인들에 대해 '유색인종' 전투원이 열등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허세와 엄포 전략으로 값싸게(국내 여론이 용인하는 유일한 방법)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럽의 민낯이 단번에 드러났다."(576)


46 설득이냐, 강요냐─1954~1962년, 알제리 독립전쟁


"1954년 11월 1일에 시작된 알제리 독립전쟁은 1959년에 이르러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공격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프랑스군이 군사적으로는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자였던 드골 대통령은 국민 대부분의 희망에 반하여 알제리 반란을 영구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가 전쟁 폐허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국제 무대에서 주요국으로 떠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전쟁은 귀중한 외교적 자본을 침식시키고 있었다. 알제리 독립은 유엔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서도 큰 지지를 얻고 있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전선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데는 성공했고, 마침내 1962년 7월 3일 공식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알제리 전쟁은 1820년대 그리스 혁명 이후로 전장에서 패한 게릴라 조직이 '홍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590-5)


# 피에 누아르pieds noir: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이주하여 살던 프랑스인과 그 2세들


47 사람과 계획─1948~1960년, 브릭스, 템플러, 그리고 말라야 비상사태


"1948년 6월 27일 영국령 말라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게릴라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말라야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말라야 고등판무관 겸 작전책임자로 임명된 템플러는 동적 전쟁보다는 정치적 전쟁에 치중함으로써 대반란전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은 문제의 25%에 불과하다. 나머지 75%는 이 나라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해답은 정글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기 위해서는 불법거주자를 재정착시키는 것과 같은 강압적인 조치도 실시해야 했다. 친디트 부대 출신 로버트 톰슨은 전쟁은 인기 경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는 〈농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정부가 전쟁에서 진정 승리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군을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603-5)


48 영국의 독특한 대반란전 접근방식─영국이 대반란전에서 성공한 이유


"20세기 이전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국들은 일반적으로 두둑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협력하는 소수 사회지도층을 제외한 '현지 주민'은 거의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언론 매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확산으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동시에 대반란전을 벌어야 한다는 점은 탈식민화 시대의 영원한 교훈 중 하나이며, 초기 제국주의의 '소규모 전쟁' 시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반란군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마오쩌둥과 그 뒤를 이은 호찌민은 선사시대부터 일반적이었던 비정치적 습격 전술이 아니라, 군사적 조치와 결합된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반란 지도자 2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614-5)


제7부 래디컬 시크─낭만에 사로잡힌 좌파 혁명가들


49 동전의 양면─1960~1970년대 게릴라 신비주의


"게릴라전과 테러의 발생률은 유럽 제국의 붕괴와 함께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집권한 1959년부터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가 집권한 1979년까지는 좌파 반란의 황금기였다. 오만, 아덴,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에서 몇 차례의 식민 전쟁이 발생했고, 식민지 이후 국가 형태를 결정하는 내전이 벌어졌던 콩고, 동티모르,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지역과 같은 곳에서 수많은 민족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충돌의 주 요인은 사회주의 이념이었으며, 바스크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 쿠르드 PKK(쿠르드 노동자당),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심지어는 미국 흑표범당Black Panthers과 같이 강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적 분리주의가 혼합된 경우가 많았다. 자신을 제2의 마오쩌둥, 호찌민, 피델 카스트로 또는 체 게바라로 자처한 급진파들은 AK-47을 들고 시골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수행하거나 또는 대부분의 경우 이 두 가지를 전부 수행했다."(619-20)


50 조용한 미국인─1945~1954년, 대반란전 해결사 에드워드 랜스데일과 필리핀 후크발라합 반란


"대반란전 해결사인 에드워드 랜스데일은 미국 육군 및 공군 장교로 근무했으며, 전략정보국(OSS)과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서 여러 가지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비밀작전과 심리전의 선구자였던 그는 1950년대 초 필리핀에서 후크발라합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랜스데일이 필리핀에서 만난 가장 중요한 친구는 라몬 막사이사이다. 두 사람이 함께 펼친 민사작전의 핵심은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였다. 막사이사이와 랜스데일은 후크발라합 반군이 1949년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부정투표로 실망한 대중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정투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그들은 1951년 의회 선거와 1953년 대통령 선거에 필리핀군을 투입했다. 대선의 승자는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은 라몬 막사이사이였다." "〈평화적이고 깨끗한〉 선거는 사람들이 〈무장투쟁의 즉각적인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던 후크발라합 반군에게는 최후의 일격과도 같았다."(626-31)


51 남베트남 건국─1954~1956년, 랜스데일과 응오딘지엠


"CIA의 사이공 군사 업무 책임자로 임명된 랜스데일 대령의 임무는 '자유베트남'의 존속을 돕는 것이었다. 랜스데일은 남베트남 정치인 응오딘지엠에게 미국 혁명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랜스데일은 〈우리는 점점 깊이 신뢰하고 서로에게 솔직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응오딘지엠이 나의 베트남 친구들을 투옥하거나 추방했기 때문에 우리의 우정이 '맹목적인 우정'은 아니었다〉라고 덧붙였다." "몇 년 후 그는 응오딘지엠의 후계자들은 〈아주 이기적이고 그저그런 평범한 사람들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간 나라에서 권력을 놓고 다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응오딘지엠이 1963년 미국의 묵인 하에 축출되어 살해된 후 남베트남에 발생한 '정치 및 안보 공백'을 돌이켜볼 때 이는 앞을 내다본 정확한 예측이었다. 훗날 CIA 국장 윌리엄 콜비는 응오딘지엠의 실각을 〈베트남에서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아마도 최악의) 실수〉라고 보았다."(634, 639-40)


52 또 다른 전쟁─1960~1973년, 베트남 전쟁에서 화력 투입만이 능사가 아니었던 이유


"랜스데일이 떠난 후 어떠한 미국 대표도 까다로운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엘살바도르의 호세 나폴레옹 두아르테,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이라크의 누리 알 말리키를 상대해야 하는 미래 세대의 미국 관료들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표면상으로만 주권을 가진 동맹국을 외부 세력이 통제하지 않고 지원하는 대반란전에서 흔히 겪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미군이 배우지 못한 과거 게릴라전 교훈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베트남 군사지원사령부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반란에 대한 해결책으로 '화력'이라는 한 단어를 제시했다." "대반란전은 〈또 다른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고 미국 자원의 95%를 소비하는 탐색격멸작전의 부차적인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남베트남에서 무분별하게 진행된 파괴적인 탐색격멸 임무는 상당한 노력을 투입하여 얻은 반군 캠페인의 이득을 상쇄하는 역효과를 낳았다."(646-51)


53 7·26운동─1952~1959년, 카스트로의 게릴라 혁명군


"카스트로는 1895년 오리엔테 상륙 직후 《뉴욕 헤럴드》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호세 마르티를 의식적으로 따라하고 있었고 에드거 스노우를 슬기롭게 이용했던 마오쩌둥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했다. 그의 대필자는 사설 기자 허버트 L. 매튜스였다." "순진한 매튜스는 카스트로의 이야기를 《뉴욕타임스》 1면에 그대로 옮겼다. 바티스타가 일시적으로 검열을 해제한 틈을 타서 카스트로의 이야기는 쿠바 신문에 그대로 실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카스트로의 살해 소식을 한 번 이상 들었던 쿠바인들은 이제 〈이상, 용기, 뛰어난 리더십의 화신 '미스터 카스트로가 이미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장악했으며 바티스타 장군이 카스트로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튜스의 주장은 과장되었지만, 결국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었다. 이는 현대 게릴라전에서 '정보작전'이 아주 중요하며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673-4)


54 비현실적인 혁명거점이론(FOCO)─1965~1967년, 체 게바라의 돈키호테적인 모험


"맛있는 음식과 술을 좋아하고 거물 노릇을 하는 카스트로와는 달리 체 게바라는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권력이나 특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체 게바라는 이상주의자였거나 '성 칼'을 숭배하고 자신을 〈북아메리카 방식으로 로마제국과 싸우는〉 초기 기독교인들에 비유한 광신자였다." "1960년에 그는 좌파 혁명가들을 위한 교범인 『게릴라전』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혁명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반란으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거점이론은 낭만적이고 영감을 주는 것이었지만, 어느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도시 지하조직과 바티스타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무시한 '상당히 왜곡된 쿠바 사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거점이론이 그것의 발상지인 쿠바에서조차 효과가 없었다면, 다른 곳에서 어떤 효과가 있었겠는가? 거점이론은 결국 최고의 혁명투사를 묘비 없는 무덤으로 이끄는 신기루나 마찬가지였다."(682-3)


# 성 칼Saint Karl: 칼 마르크스를 말한다.


# 거점이론foco theory: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풍미했던 시골 게릴라 전략.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쿠바 혁명 때 사용한 전략을 발전시킨 것으로 주민들과의 친목, 자원봉사 등을 통해 거점을 만든다는 전략이다.


55 1970년대 국제 테러 사건─엔테베 특공작전과 1970년대 테러 단체


"악시옹 디렉트(프랑스), 바더-마인호프단(독일), 붉은여단(이탈리아), 공산주의전투조직(벨기에), 일본 적군파, 급진파 IRA, 바스크 ETA, 그리그 혁명조직 11월 17일, 퀘백해방전선, 흑표범당, 웨더맨, 공생해방군 등은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테러 조직이나 러시아 허무주의 테러 조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대학생이나 대학중퇴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0년대의 가장 급진적인 단원들은 평화적인 시위, 건물 점거, 징집 영장 소각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 체계'에 대한 분노로(사실대로 말하자면 모험과 반란에 대한 호기심으로) 진압 경찰에 대한 공격, 유리창 깨기, 그리고 일부의 경우에는 은행강도, 살인, 인질극을 저질렀다. 유럽의 수많은 테러 조직을 지원한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 고위인사 마르쿠스 볼프는 이들을 〈주로 중상류층 출신의 버릇없고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폭력적인 혁명이 '아메리카Amerikkka' 같은 부패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유일한 방법이라고 규정했다."(704-5)


56 아라파트의 오디세이─아라파트가 테러로 달성한 것과 달성하지 못한 것


"아라파트는 적어도 무장투쟁 초기에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도 끊임없이 공격하면 팔레스타인에게 주권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알제리와 베트남을 모두 방문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베트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때 그의 대리인이었던 아부 이야드는 이렇게 썼다. 〈파타 창설 5년 전에 시작된 알제리의 게릴라전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성공을 상징했다.〉 이들은 중요한 차이점을 놓치고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항복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와 다름없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군이 전멸하지 않는 한 고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보잘것없는 군사력으로 맞서기에는 어림도 없었다."(729)


57 좌파 반란의 쇠퇴에도 사라지지 않는 게릴라전과 테러─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테러 단체의 종말


"1980년대에 이르자 마르크스주의 통치자들의 눈에도 마르크스주의가 파탄이 났음이 명백해 보였다." "쿠바나 북한 같이 아주 당당하게 공산주의 국가로 남은 몇 안 되는 나라들은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가난하고 억압된 나라에서 미래가 있으며 그들의 비참한 사례를 모방하기 위해 무장운동을 개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소련과 중국의 구 정권 몰락은 반군 단체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보조금, 무기, 훈련과 같은 귀중한 자원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IRA 같은 민족주의 운동은 외부 지원의 감소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란에 대한 외부 원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좌파의 반란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게릴라전과 테러리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뿌리 깊은 인종과 종교에 대한 불만을 품은 새로운 무장 단체로서 기존과 달리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방식을 취했다."(734-5)


제8부 신의 살인자들─급진주의 이슬람의 대두


58 세계를 놀라게 한 50일─1979년 11월 4일~12월 24일, 테헤란, 메카, 이슬라마바드, 카불


"세계를 뒤흔든 50일은 1979년 11월 4일에 시작되었다. 약한 비가 내리던 그날 아침, 시위대는 테헤란의 타크테 잠쉬드 거리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건물의 벽돌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붙잡힌 52명의 인질은 카터가 퇴임하고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한 1981년 1월 20일(444일만)에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1979년 11월 20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주제를 전복시킬 일으키려는 수백명의 무장세력이 관 안에 넣어 밀반입한 소총과 자동화기로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신전)를 점령했다." "11월 21일, 주헤이만이 그랜드 모스크를 점령한 지 하루 만에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미국 대산관 앞에 집결한 군중은 〈미국 개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몇 주 전 테헤란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위대는 비교적 큰 저항 없이 대사관을 점거했다. 반란의 중심이 좌익운동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로 전환된 것이다."(740-3)


59 러시아의 베트남─1980~1989년, 붉은 군대 대 무자헤딘 게릴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교과서적인 급습을 시작했을 때 지하디스트 반란군이 그렇게 강력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영국군과 맞서 싸웠던 19세기의 조상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 무기를 공급받고 조직원을 훈련시킬 수 있는 안전한 기지를 확보한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페샤와르 국경 지역 마을에 본부가 있는 7개 주요 저항세력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지원했다. 페샤와르 국경 마을은 〈엄청나게 큰 지하드 행정 기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서 총은 트럭, 말, 노새 또는 무자헤딘의 등에 실려 언론인들이 〈지하드 트레일jihad trail〉이라고 부르는 길을 따라 아프가니스탄으로 밀반입되었다. 소련군은 이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미군이 호찌민 루트 차단 작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운이 없었다. 게릴라 전투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산길이 너무 많았다."(745-7, 759)


60 A팀─1982~2006년, 정규전 전술과 비정규전 전술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전의 최전선에 선 레바논 헤즈볼라


"코란이 자살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음에도 헤즈볼라는 동일한 순교 정신을 테러 작전에 도입했다. 헤즈볼라의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1998년에 〈우리 모두는 노소를 막론하고 국토를 침략하고 점령한 유대인의 몸을 찢어버리기 위해 기쁘게 내 한 몸을 날려버릴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헤즈볼라는 〈조직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무장은 더 잘 되어 있지만, '겁 많고 비겁한' 이스라엘인과 같은 더 유약한 적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이후 다른 많은 이슬람 단체가 인용했다. 그러나 많은 후발 조직과 달리 헤즈볼라는 자살공격을 군사 목표로 제한했다." "이러한 공격은 단순히 잔인함이나 살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미국 및 기타 서방의 영향력을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이란과 그 동맹국들이 우세한 위치에 서고자 고안한 계산된 전략의 일부였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773-4)


61 국제 테러리스트─1988~2011년,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자신보다 강력한 적과 싸우기 위해 비대칭 수단을 사용하겠다는 빈 라덴의 결심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국가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충동이었다. 빈 라덴의 종교적 광신주의는 비정규 전사들 사이에서는 드문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테러 집단은 유대교 광신도와 무슬림 아사신이었다. 그러나 과거 게릴라 및 테러리스트 조직은 대부분 공격 대상을 인접국으로 제한했으며 파멸적인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폭력의 강도를 조절했다. 빈 라덴은 더 원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인이 〈알라의 가르침을 최고로 떠받들게 하고〉 중동 전역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주곡으로서 미국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최초로 진정한 세계적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정교한 최신 기술과 조직 관리 기법을 이용하는 천재성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처럼 종교적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최신 기술에 정통하고 현대 문물에 익숙한 많은 동지들을 끌어모았다."(790-1)


62 자르카위와 이라크 알카에다의 자살폭탄 테러─2003년 이후 이라크 알카에다


"이라크 알카에다의 설립자는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이다. 그의 가장 파괴적인 행동은 이라크에서 벌인 자동차 자살폭탄 테러였다. 2003~2008년에 이라크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많은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피터 버겐은 〈2008년 4월까지 자살폭탄 테러로 이라크인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라고 기록했다." "2006년 9월 라마디 인근 부족장들이 미 지상군 및 미 해병대와 협력하여 이라크 알카에다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수니파 교도들의 반알카에다 세력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부족들 사이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이라크 알카에다는 항상 불만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또한 당시 미국 국민 대다수가 원했던 대로 2007년에 미군이 철수했다면 이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2006년 말,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2만 명을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그 수는 최종적으로 3만 명으로 늘었다."(810-5)


63 대반란전의 재발견─2007~2008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와 증파


"퍼트레이어스가 주도해서 작성한 『대반란전 야전교범』은 다음과 같은 대반란전의 기본원칙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대반란전COIN 작전의 주요 목표는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효과적인 거버넌스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적절한 수준의 무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5명의 반란군을 제거하면서 부수적 피해로 인해 반란군 50명이 늘어난다면 이 작전은 비생산적인 작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대반란전 야전교범』은 정보작전, 정치적 행동,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반란군의 최고 무기 중 하나는 총을 쏘지 않는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또한 〈때로는 아군 부대를 더 많이 보호하면 할수록 덜 안전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는 거대한 방폭벽 뒤에 은폐한 채 주민과의 접촉을 삼가면서 기지 밖으로 나갈 때마다 급조폭발물IED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던 이라크에 있는 미군 부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825)


64 '보이지 않는 군대'와의 싸움은 세계화된 21세기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의 현실─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 세계 이슬람 반군과의 전쟁


"알카에다나 기타 테러리스트 조직들이 중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사마 빈 라덴이 모든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라고 규정한 핵무기, 화학무기 또는 생물학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다. 테러리스트 조직들은 세상에 종말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대량살상무기 없이도 알카에다가 9·11테러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만든 것처럼 국가를 새로운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을 레바논에 개입시켜 국가 간 분쟁을 일으켰으며,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지하드 네트워크는 인도 영토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을 촉발시킬 뻔했다. 테러 행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테러리스트가 핵보유국 간의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군대invisible army'와의 싸움은 이제 세계화된 21세기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의 현실이 되었다."(835-7)


에필로그─2011년 10월 23일, 마자르 회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거의 유사한 전술, 기술 및 절차(무력과 우호의 병존)를 적용하여 대반란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똑같은 좌절과 똑같은 성공의 기쁨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난 5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라크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아카드 및 기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을 괴롭힌 페르시아 고원 부족의 정신적 후계자들이었고, 브루나이와 슈미트는 아카드의 사르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반란전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었다. 양측은 과거로부터 반란과 대반란전에 대처하는 방법─정부를 전복시키는 방법과 정부 전복을 막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왔다. 이러한 교훈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중요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끊임없이 거듭되어온 불변의 상수와도 같은 게릴라전이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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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개정판
유진 로건 지음, 이은정 옮김 / 까치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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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특히 이슬람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즉 기원후 7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역사를 말이다. 이때는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카이로, 코르도바에 기반한 이슬람 대제국들이 세계정세를 좌우했다." "모든 아랍인은 이 때를 자신들이 세계의 주역이었던 시절로 회고한다. 아랍인이 이슬람 신앙을 가장 충실히 지켰을 때, 가장 위대했다고 주장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은 특히 이러한 주장에 공감한다." "1940년대와 1950년대 대부분의 아랍 시민들은 식민지적 유산에 기반한 작은 민족주의를 근본적으로 위법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아랍의 웅대함을 열망했던 사람들은, 당대의 강국들 사이에서 아랍인들이 적법한 자리를 되찾는 데에 필요한 통합 목표와 임계질량은 오직 광범위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으로만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식민지 경험은 아랍을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아니라 국민국가들의 군락으로 만들어놓았고, 그 결말에 아랍인들은 매우 실망했다."(15-9)


"아랍 세계가 지난 5세기 동안 겪은 일들의 대부분은 지구촌 사람들이 경험한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민족주의, 제국주의, 혁명, 산업화, 도농 간의 이동, 여권 투쟁 등 근대 인류사의 위대한 모든 주제들이 아랍 역사에서도 전개되었다. 또한 아랍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도 많이 존재하는데, 도시의 형태, 음악, 시, 선택받은 무슬림으로서의 특별한 지위(『쿠란』은 알라가 그의 마지막 계시를 인류에게 아랍어로 주었음을 최소 10번은 강조한다), 모로코에서부터 아라비아까지 뻗어 있는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와 역사에 기반한 공통의 정체성으로 묶여 있는 아랍인들은 그 다양성으로 인해서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들은 한 민족인 동시에 여러 민족이기도 하다. 즉 정부 형태나 경제 활동 유형, 방언, 서법(書法), 풍경, 건축, 요리법 등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아랍 세계의 이 모든 사람들은 개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공통의 아랍 역사에 의해서 자신들이 하나로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23-4)


1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오스만의 맘루크 제국의 정복─1516년 8월 24일 다비크 평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시작된─은 아랍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맘루크 검객과 오스만 소총수의 운명적인 무력 충돌은 아랍 세계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또한 오스만의 정복은 이슬람 등장 이후 처음으로 아랍 세계가 비아랍인이 세운 수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슬람 최초의 왕조인 우마이야는 기원후 661년에서 750년 사이에 다마스쿠스에서 빠르게 팽창하던 제국을 통치했다. 아바스 칼리프 제국(750-1258)은 당대 최고의 이슬람 제국을 바그다드에서 통치했다. 969년에 세워진 카이로는 1250년에 맘루크 왕조가 출현하기 이전부터 이미 네 왕조들이 수도였다. 하지만 1517년부터는 아랍 지역 밖의 수도들에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아랍인의 사회적 지위가 협의되었고, 이와 같은 정치적 현실은 근대 아랍 역사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가 되었다."(34)


"술탄 술레이만 1세는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성공한 통치자 중의 한 명이었다. 46년간의 치세(1520-1566) 동안 술레이만은 아버지(셀림 1세)가 시작한 아랍 정복을 마무리했다. 그는 1533-1538년에 페르시아의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바그다드와 바스라를 빼앗았는데, 수년간 시아파인 사파비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그곳의 수니파 주민들은 오스만군을 해방자로 여기며 환영했다. 이라크 정복은 전략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나 매우 중요했다. 술레이만 1세는 아랍의 고도(古都) 바그다드를 정복하고 시아파 교리가 수니파 영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술레이만 1세의 군대가 남부 아라비아의 예멘을 점령하기 위하여 1530년대와 1540년대에 이집트에서 남쪽으로 진군했다. 지중해 서쪽에서는 북부아프리카의 해안 지역인 리비아와 튀니지, 알제리를 1525년에서 1574년 사이에 정복해서 조공을 바치는 가신국으로 만들었다."(44-5)


"맘루크 제국을 정복한 2세기 동안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남부까지 성공적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아랍 지역에서 정치체제를 표준화할 생각이 없었던 또는 표준화 할 수 없었던 오스만은 많은 경우 지역 엘리트들과 협력을 통하여 통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각각의 아랍 지역들은 이스탄불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으며 각양각색의 행정 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그들 모두는 분명히 하나의 제국의 일부였다. 이러한 이질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처럼 당대의 다종족적이고 다종파적인 제국들의 공통점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오스만은 이와 같은 다양성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중앙과 아랍 주변부 간의 역학관게가 18세기 후반에 달라졌다. 새롭게 등장한 지역 통치자가 세력을 규합하여, 종종 오스만 제국의 유럽 적국들과 협력하며 오스만 체제에 반하는 자치를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60)


2 오스만 지배에 맞선 아랍의 도전


"국정운영에 관한 오스만의 개념에 따르면 훌륭한 통치는 〈형평성의 순환(circle of equity)〉으로 표현되는, 상호 연관된 네 가지 요소가 섬세하게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선, 국가는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대군(大軍)이 필요하다. 대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국가의 유일한 고정적 재원은 세금이다.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서 국가는 신민의 번영을 촉진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민의 번영을 위해서 국가는 반드시 정의로운 법을 보장해야 한다. 이렇듯 한 바퀴를 돌면 다시 국가의 책무라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제국의 표준화된 관행에 따라서 18세기의 다마스쿠스도 이스탄불의 술탄이 위임하여 파견한 오스만 튀르크인이 아닌 지역명문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아즘(Azm) 가문은 17세기에 중부 시리아의 하마 인근에서 모은 광대한 농지를 통해서 부를 쌓았다. 아즘 가가 자신들의 왕국을 건립하기 시작한 결과 〈형평성의 순환〉은 깨졌고, 상황은 나빠지기 시작했다."(62-3)


"오스만 치세 초기에는 데브쉬르메, 즉 〈소년 징집〉을 통해서 모집된 노예 엘리트들이 독점했던 고위직에서 자유민 무슬림이었던 아랍인들은 배제되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많은 지역 명사들이 지방의 최고 행정직에 올랐고 〈파샤(pasha: 재상이나 군사령관, 총독 같은 고위 관료)〉라는 직함을 받게 되었다. 다마스쿠스의 아즘 가문의 예는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과 마운트 레바논을 지나 메소포타미아와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던 광범위한 현상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지역 통치자의 등장으로 많은 세금이 지역 군인들이나 총독의 건축 사업에 소요되었기 때문에, 아랍 지역에 대한 이스탄불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이 아랍 지역 곳곳으로 확산되고 누적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전은 점점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지역 통치자들이 급증하면서 18세기 후반에 아랍 지방 곳곳에서 이스탄불 지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67)


"그러나 아랍 지역은 이스탄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소소한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군대나 자원을 할애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이스탄불은 다마스쿠스나 카이로의 통치자들이 일으킨 문제보다는 빈이나 모스크바의 도전을 더 우려했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아랍 지방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보다는 유럽 이웃 국가들의 위협에 더 큰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는 오스만의 정복 이전 상태로 유럽을 되돌려 놓고 있었다. 1683년까지 오스만이 빈의 관문에서 압박을 가했었다. 하지만 1699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을 격퇴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오스만은 처음으로 영토 상실을 경험했다─을 통해서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폴란드의 일부를 보상받았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흑해 지역과 코카서스에서 오스만을 압박했다.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의 지역 명사들의 문제는 이와 같은 상황이 제기한 엄청난 위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68)


"아랍 세계에서 오스만 통치에 대한 진정한 다음 도전은 제국의 경계 너머, 중앙 아라비아 한가운데에서 제기되었다. 이념적인 순수성으로 인해서 더욱 더 위협적이었던 이 운동은 이라크에서 시리아 사막을 지나 히자즈의 메카 및 메디나 성도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오스만 통치권을 위협했다. 자히르 알 우마르나 알리 베이와 달리 이 운동의 지도자는 지금도 중동과 서구에서 유명 인사로서 영예를 누리고 있다. 바로 와하비 개혁운동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 와하브가 그 주인공이다." "와하비즘의 가장 중요한 교리는 신의 독특한 성질, 즉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신의 단일성〉이다. 하찮은 존재와 신을 결합시키려는 그 어떤 행위도 다신교(아랍어로는 〈shirk)〉라고 비난했는데, 왜냐하면 신이 협력자나 대리인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의 신 이상을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오스만 이슬람의 많은 요소들을 다신교로 규정한 와하비는 오스만 당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83-5)


"오스만은 와하비의 도전을 분쇄하는 데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개혁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변경인 아랍 지방 너머 중앙 아라비아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에서부터 나지드 국경까지 수개월간을 행군해야만 했다. 바그다드의 총독이 이미 경험했듯이, 와하비들과 그들의 영토에서 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적지에서 대군에게 음식과 물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만으로도 오스만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결국 오스만 정부는 와하비의 침략을 저지할 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와하비를 격퇴하고 히자즈를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줄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와하비 문제의 해결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그의 능력과 야심은 곧 오스만 국가를 배신했다. 실제로 1805년부터 이집트 총독을 지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아랍 지방에 대한 이스탄불의 통치권에 도전한 지역 통치자들 가운데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87-90)


3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제국


"1805년 6월 18일, 이집트 총독에 오른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이집트의 국부(國富)를 독점하여 강력한 군대와 관료 국가 건설에 그 세입을 사용했다." "무함마드 알리는, 훗날 오스만이 모방하게 되는, 유럽의 개념과 기술에 의존하며 이집트를 개혁의 길로 이끌었던 혁신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동 지역에서 최초로 농민 군단을 창설했다. 또한 유럽 바깥에서는 최초로 실현된 산업화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군에 필요한 무기와 직물을 생산하고자 산업혁명 기술을 도입했다. 교육 사절단을 유럽의 수도들에 파견하고 유럽의 서적 및 기술 편람을 아랍어 판본으로 출판하기 위해서 번역국도 창설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술탄의 총독이 아닌 독립적인 군주로 자신을 대우하는 유럽 열강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다. 치세 말기에는 이집트와 수단에 대한 무함마드 알리 가문의 세습 통치권이 성공적으로 안착되었다. 그의 왕조는 1952년에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질 때까지 이집트를 지배했다."(100)


"무함마드 알리의 큰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1817년 초 아라비아에서 와하비와 무자비한 전쟁을 벌였다. 와하비들을 중앙아라비아의 나지드 지역으로 몰아내기에 앞서서 우선 홍해 지방의 히자즈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비록 나지드가 오스만 영토 밖에 있었지만, 이브라힘 파샤는 와하비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적들을 와하비의 수도인 디리야로 몰아냈다." "1818년 9월, 수세에 몰린 와하비는 절멸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는 지금까지 중앙아라비아에서 어떤 오스만 총독이나 사령관도 해내지 못했던 전쟁을 성공적으로 잘 수행해냈다."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축출되고 와하비 운동도 격퇴됨에 따라 술탄 마흐무드 2세가 아랍 세계에서의 오스만 제국의 입지를 위협하던 가장 심각한 도전들을 무사히 넘겼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의 승리를 이끈 이집트 총독 본인이야말로 마흐무드 2세에게 더 큰 위협이 될 터였다."(103-4)


"처음으로 와하비와의 전쟁에 나서기로 동의했던 1811년 이래로 무함마드 알리는 시리아 통치를 열망해왔다. 실제로 그는 1839년 6월 24일 벌어진 네지브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물리치고 시리아 점령을 거의 실현했다. 그러나 동부 지중해가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놓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유럽 연합국은 그의 야망을 무력으로 저지했다." "영국이 보기에, 레반트에서의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 열강 간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 보존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1840년 런던 의정서에 비밀리에 첨부된 부록에서 영국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정부는 〈다른 모든 나라의 국민이 공평하게 획득할 수 없다면, 자국민만을 위한 어떤 영토 확장이나 독점적인 영향력 확보 또는 상업적인 이권 추구를 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서약을 했다. 자기부정적인 이 의정서 덕분에 오스만 제국은 오스만 영토에 대한 유럽의 구상으로부터 약 40년 동안 제국을 더 지켜낼 수 있었다."(120)


"오스만 정부로부터 지역 자치를 얻어내려는 시도 속에서 아랍 지역의 민중들은 너무도 큰 대가를 치렀고, 야심찬 지역 통치자들이 일으킨 전쟁과 인플레이션, 정치 불안, 수많은 부당한 처사로 큰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이제 평화와 안정을 원했다. 오스만 역시 체제에 대한 안으로부터의 도전을 종식시키고 싶었다. 외세의 위협과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떤 오스만도 아랍 지역을 방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되었다." "유럽 열강의 개입이 없었다면 무함마드 알리는 제2차 이집트 위기 때 오스만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오스만 정부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존의 행정기관들을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체제를 완전히 분해하여 수리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했다." "오스만 개혁가들은 고유의 문화적 고결함과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유럽의 사상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서 분투해야만 했다."(121-2)


4 위험한 개혁


"이중적 동기가 오스만 개혁 시대의 특징이 되었다. 유럽의 환심을 사기 위한 선전행위가 대내외적인 위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개혁에 나선 진심 어린 결의와 결합한 것이다. 1839년 11월 3일, 이스탄불에서 오스만의 외무대신 무스타파 레시드 파샤가 오스만과 외국의 고위 인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압둘메지드 1세를 대신해 개혁 칙령을 낭독했다. 그날부터 오스만 제국은 행정 개혁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1839년부터 1876년까지 선출 의회를 갖춘 입헌군주제로 국가 체제를 변화시켰다. 이 시기는 탄지마트(Tanzimat, 〈재정비〉라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다." "이제 술탄은 국가 수장으로서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이러한 진전은 1876년의 헌법 제정으로 마무리되었고, 여전히 술탄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의회가 설립되면서 의회의 정치적 참여가 확대되었다. 37년의 시간 동안 오스만의 절대주의 체제는 서서히 입헌군주제로 대체되어 갔다."(128-30)


"19세기 내내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를 구실로 삼았다. 러시아는 오스만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방정교회로 자신의 보호범위를 넓혔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19세기에는 오스만의 모든 가톨릭 공동체의 공식적인 후원자임을 자처했다. 영국은 이 일대의 어떤 교회와도 역사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과 드루즈파, 그리고 아랍 세계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의 주위로 모여드는 작은 규모의 개종자 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유럽 열강은 오스만 문제에 간섭하기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소수 집단의 권익 문제는, 때로는 (크림 전쟁 같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열강이 오스만에게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다."(131)


"크림 전쟁의 여파 속에서 오스만 정부는 제국의 비무슬림 소수 공동체들의 안전을 빌미로 유럽이 또다시 개입하는 것을 막고자 자국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위험까지도 무릅썼다. 1856년 개혁 칙령의 조항 대부분은 오스만의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의 권리 및 의무에 관한 것이었다. 칙령은 처음으로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오스만 신민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했다." "1856년의 칙령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는 그 어떤 개혁도 무슬림이 문자 그대로 영원한 신의 말씀으로 숭상하는 『쿠란』을 직접적으로 위배한 경우는 없었다. 『쿠란』에 반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거역을 의미했기 때문에 칙령이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낭독되었을 때, 신실한 무슬림들이 분노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탄지마트 개혁은 오스만 제국을 위험지대로 밀어넣었다. 주민 대다수의 종교와 가치에 위배되는 개혁을 정부가 단행함으로써 개혁의 진행 과정은 정부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과 신민들 간의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132-3)


"오스만은 탄지마트를 대중이 지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개혁과 혜택이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금을 더 잘 거두고 서구식 병역에 필요한 군인을 더 효율적으로 징집하기 위한 관료제의 확대로부터 대다수의 주민들은 얻을 것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정치적 사고 및 관행에 더욱 잘 부합하기 위해서 단행한 모든 사법적 변화들도 평범한 오스만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변화를 신민들이 수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 경제와 사회 복지 향상을 위한 정부의 투자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가스등이나 증기 연락선, 전기 전차와 같이 대중에게 술탄 정부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를 심어준 대규모 사업들은 개혁 정부를 향한 지지도를 높여주었다." "19세기 후반에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건설 및 토목 사업에 광범위한 정부 투자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세계가 세계 경제 속으로 빨려들어가면서 점점 더 다양한 산업 제품과 상품들이 아랍 시장으로 유입되었다."(141)


5 식민주의의 첫 번째 물결 : 북아프리카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제국주의가 북아프리카에서 시작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아랍 지역은 오스만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18-19세기 동안 이스탄불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졌다. 반면 오스만 중심부에 가까웠던 중동의 아랍 지역들─대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아라비아 반도─은 19세기 개혁기(1839-1876) 동안 이스탄불의 지배 아래 더욱더 통합되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가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다면, 튀니지나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가신국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자율성을 강화시킨 국면들─독립적인 정부를 지향하는 특정 지배 가문의 등장─이야말로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이 유럽의 점령에 취약해진 주요 요인이었다. 더욱이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남유럽─에스파냐와 프랑스, 특히 이탈리아─과 거리가 가까웠다.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먼 변경이었지만 유럽에게는 가까운 외국이었던 것이다."(155-8)


# 1830년 알제리(부족들의 저항 운동을 완전히 종식시킨 것은 1847년, 프랑스), 1881년 튀니지(프랑스), 1882년 이집트(영국), 1911년 리비아(이탈리아), 1912년 모로코(프랑스-에스파냐 보호령) 식민지화


"영국의 이집트 점령은 이집트 국경 저 너머에서도 대격변을 초래했다. 나폴레옹 시절부터 프랑스의 중요한 피보호국이었던 이집트에 경쟁 국가인 영국이 영구적인 제국주의 지배 체제를 구축하자 프랑스의 당혹감이 적대감으로 변했던 것이다. 이집트는 프랑스의 군 자문가들에게 의존해왔고, 가장 큰 규모의 교육 파견단을 파리로 파견했으며, 프랑스의 산업 기술을 수입해왔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회사도 프랑스 법인으로 설립되었다. 이집트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랑스는 기어이 〈배반자 앨비언〉(Albion, 영국 혹은 잉글랜드)에게 원한을 갚고자 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의 전략 지역을 손에 넣음으로써 앙갚음을 했는데, 이는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영국의 해외 기업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곧 이어서 포르투갈과 독일, 이탈리아가 가담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제국을 상징하는 색깔로 아프리카 지도를 칠하게 되는 〈아프리카 쟁탈전〉이 벌어졌다."(188)


"정치적 단위로서 〈민족〉─자치를 열망하는 특정 영토에 기반한 공동체─이라는 개념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동안 중동에 뿌리를 내리게 된 유럽 계몽주의 사상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초만 해도 대다수의 아랍인은, 대개 유럽의 지지를 받으며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던 발칸의 기독교 공동체와 연관된 민족주의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한 이집트와 북아프리카의 군인들은 술탄의 부름을 받고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발칸의 민족주의 운동과 싸웠었다. 그러나 북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오스만 세게와 단절되자, 민족주의는 외세의 지배에 맞서는 하나의 대안으로서 부상했다. 실제로 제국주의는 북아프리카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의 구성요소를 제공했다. 해방될 민족 영토의 경계를 명시한 국경선과 공동의 해방 투쟁으로 주민을 결집시킬 공동의 적이 바로 그것이다."(197-8)


"알 사이드 자말 알 딘 알 아프가니(1839-1897)와 셰이크 무함마드 압두(1849-1905)는 20세기에도 이슬람과 민족주의에 영향을 미칠 이슬람 개혁 의제를 만들어낸 공동 작업자이다." "알 아프가니는 이슬람이 근대 세계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무슬림이 오늘날의 문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종교적 갱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재의 무슬림들이 종교 원리에 따라 산다면, 그들의 나라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고 유럽이 제기한 외부적인 위협을 극복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압두는 역설적이게도 진보적인 이슬람을 주창하면서도 초기의 이슬람 공동체─아랍어로는 살라프(salaf, 즉 선조)로 알려진,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추종자들─를 역할 모델로 삼았다. 그 결과, 압두는 살라피즘(Salafism)─오늘날 이 용어는 오사마 빈 라덴과 가장 급진적인 이슬람 반서구 행동파를 연상시킨다─이라고 불리게 될 새로운 계열의 개혁 사상의 창시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199-201)


6 분할통치 : 제1차 세계대전과 전후 처리


"청년 튀르크인들은 1876년의 헌법 복원과 의회의 재소집을 술탄에게 요구하며 혁명을 일으킨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청년 튀르크인들이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소속감을 강화하고자 단행했던 정책들─제국의 공식 언어로 터키어를 지정하는 식의─은 오히려 신생 민족주의 운동을 초래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초기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거의가 극복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오스만 정부의 감시는 어디에나 존재했고, 비합법적인 정치 활동은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했다. 아랍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들도 부족했다. 무함마드 알리처럼, 아랍 지방에서 실력자가 봉기하여 오스만군을 패퇴시키던 시대는 지나갔다. 19세기의 오스만 개혁 성과 중의 하나는 중앙정부를 강화시켜 아랍 지역을 이스탄불의 지배에 더욱더 종속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아랍 세계에 대한 오스만의 장악력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격변이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 격변이었다."(208-9)


"1918년 가을 이후, 오스만의 전선은 와해되었다. 영국군이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시리아─아랍 반란을 일으킨 협력자들의 도움으로─에 대한 정복을 완수했다. 오스만군은 아나톨리아로 퇴각했고 다시는 아랍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18년 10월에 마지막 튀르크군이, 〈냉혹한〉 셀림이 402년 전에 아랍의 영토 정복을 시작했던 바로 그 현장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알레포의 북쪽 국경을 넘었다. 이렇게 지난 400년 동안 계속되었던 오스만의 아랍 통치가 돌연히 끝나버렸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지배와 영국의 이집트 지배가 가져온 고난을 신문에서 읽은 다른 지역의 아랍인들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외국의 지배를 피하고자 결의를 다졌다. 1918년 10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짧지만 들뜬 이 시간 동안 아랍의 독립은 곧 달성될 듯이 보였다. 하지만 영토를 둘러싼 승전국들의 야욕이라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랍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211-2)


"1919년에서 1922년까지 진행된 이집트와 영국과의 협상 사이사이에 시민소요가 발생하곤 했다. 결국 이집트 민족주의자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뿐인 독립이 전부였다. 이집트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영국은 1922년 2월 28일에 일방적으로 보호령 종식을 선언하고 〈대영제국의 핵심적인 이권과 관련된〉 4개 주요 영역─제국의 통신 안보, 이집트 방어, 외국인의 이권 및 소수 집단의 권리 보호 그리고 수단─에 대한 통제권을 영국이 보유한다는 조건으로, 이집트를 독립 주권 국가로 인정했다. 영국이 군사 기지를 보유하고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며 보호령 시절이나 별반 다를 것 없이 이집트 국내 문제에 번번이 간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들을 전제로 한, 이 독립의 한계를 양측 모두 잘 인지하고 있었다. 향후 32년 동안 주권을 찾으려는 이집트와 제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려 했던 영국은 식민지적 관계를 재규정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타협에 나서야만 했다."(238)


"1918년, 메소포타미아에 정치질서를 도입하는 작업은 2003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1920년경이면 이라크인들도 영국이 이라크를 식민통치에 종속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1919년의 이집트 혁명을 멀리서 지켜보던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다마스쿠스의 파이살 정부를 버리고 프랑스의 식민지 점령을 위한 길을 열어주려고 시리아 및 레바논에서 군을 철수하자 점점 더 큰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아랍 지역의 독립을 부정하고 자기들끼리 이 영토들을 나누어 가지려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그렇게 했다." "대부분의 서구인들은 이라크에서 〈1920년 혁명〉으로 언급되는 1920년 봉기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수세대 동안 이라크 학생들은 민족의 영웅들이 이라크의 렉싱턴과 콩코드라고 할 수 있는 팔루자와 바쿠바, 나자프에서 외국군과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웠는지를 배우며 성장했다."(239-44)


7 중동의 대영제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영국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 양안을 모두 아우르는 단일 지배 세력의 부상보다 아라비아에서 여러 국가들이 상호 견제를 하며 균형을 이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점점 강력해지고 있던 사우디 정권에 대한 완충제로 하심 가를 이용하는 것이 대영제국의 이해관계에는 더 잘 부합했다." "1921년 7월부터 9월까지 T. E. 로렌스는 전후 협상이 가져온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하도록 후세인 왕을 설득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로써 후세인은 이븐 사우드가 히자즈 정복을 위해서 전투를 개시하려는 때에 더 이상 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븐 사우드는 영토를 계속 확장했고, 1932년에 왕국의 이름을 사우디아라비아로 개명했다. 이븐 사우드는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 지역에서 왕권을 수립했으며 영국의 제국주의적인 지배로부터도 독립을 지켜냈다. 이는 영국의 중요한 오판 덕분이었다. 영국은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 석유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256-7)


"식민 장관 윈스턴 처칠은 1921년 6월 하원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자신은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의 왕으로 후세인의 아들들을 앉힘으로써 하심 가에게 했던 영국의 깨진 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기여하는 동시에 아랍 지역에 헌신적으로 의존적인 통치자들을 영국이 보유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이다." "처칠과 로렌스는 1921년 3월에 예루살렘 회의로 아미르 압둘라를 초청하여 중동에 관한 대영제국의 최신 구상안을 알려주었다. 그 안에 의하면 파이살은 프랑스가 확실히 장악하고 있는 다마스쿠스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지만 그 대신 이라크의 왕이 될 것이었다. 한편 압둘라에게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은 트란스요르단이라는 신생국의 수장 자리였다. 육지로 둘러싸인 트란스요르단─이 당시 영토에는 홍해의 아카바 항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은 압둘라의 야심을 만족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했지만,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트란스요르단에서 〈샤리프의 해결안〉은 대영제국의 현실이 되었다."(258-9)


"트란스요르단이 영국의 중동 영토 중에서 가장 지배하기 쉬웠지만, 이라크도 한동안은 가장 성공한 위임통치령으로 생각되었다. 파이살 왕은 1921년에 취임했고 제헌의회가 1924년 초에 선출되었으며 영국과 이라크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조약이 그해 후반에 비준되었다. 1930년에 이라크가 안정적인 입헌군주국으로 자리 잡으면서 위임통치국으로서의 영국의 역할은 완수되었다." "이라크는 국제연맹의 26년의 역사 동안 정회원이 된 유일한 위임통치령이었다. 이라크는 여전히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다른 모든 아랍 국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이라크가 달성한 성과, 즉 독립을 이루어서 국제연맹의 회원국이 되는 것은 아랍 세계의 민족주의자들의 목표가 되었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인 대다수는 자신의 나라에서 누리고 있는 영국의 지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1920년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고, 이라크에서의 영국의 계획을 끝까지 방해했다."(263-4)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이집트는 아랍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수준의 다당제적 민주주의를 달성했다. 1923년의 헌법 제정으로 정치적 다원주의와 양원제를 위한 정기적인 선거, 성인 남성의 참정권, 언론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많은 신당들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선거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언론인들도 상당한 자유를 누리며 활동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시대는 이집트 정치의 황금기로서보다는 분열적인 당파주의 시기로 더 자주 기억되곤 한다. 뚜렷이 구별되는 세 개의 세력이 이집트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영국과 군주, 의회를 통한 와프드당이 바로 그들이다. 이 삼자 간의 경쟁으로 이집트의 정치는 커다란 분열을 겪었다." "1930년대의 경험은 이집트인들로 하여금 자유민주주의 정당정치에 환멸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인들은 시디키의 독재를 거부했지만, 그렇다고 와프드당이 달성한 결과에도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독립에 대한 불투명한 전망은 한 세대 동안이나 더 계속되었다."(270, 277)


8 중동의 프랑스 제국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아랍 세계에 자신들의 제국을 구축하기 위하여 대(大)시리아─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요르단을 포함하는 광활한 영토─를 탐해왔었다. 프랑스는 이집트 협력자를 통해서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할 요량으로 1830년대에는 시리아를 침략한 무함마드 알리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집트가 1840년에 시리아에서 철수하자, 프랑스는 시리아의 토착 가톨릭 공동체들, 특히 마운트 레바논의 마론파와의 유대관계를 강화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프랑스는 마침내 시리아에 대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이루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통해, 자신들의 목표에 대한 영국의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알제리와 튀니지, 모로코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아랍인들을 성공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와 경험이 있다고 자신했다."(299)


"레바논 정치계에는 마운트 레바논의 지위에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표명하는 흐름이 있었다. 트리폴리와 베이루트, 시돈, 티레 같은 해안 도시들의 수니파 무슬림들과 그리스 정교도들은 시리아의 주류 정치 사회에서 고립되거나 기독교도가 지배하는 레바논 국가에서 소수자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다." "수세기 동안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난 베이루트의 민족주의자들은 더 큰 아랍 제국의 일원이 되길 원했기 때문에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파이살 정부를 지지하고 있었다." "마론파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의 기술적인 도움과 정치적인 지지를 원하면서도 어찌 되었든 간에 프랑스가 제국주의적인 이기심보다는 이타주의를 보여주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레바논에 대한 위임통치 준비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의 군 행정가들은 마운트 레바논의 행정자문위원회에 자신들의 정책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운트 레바논의 정치인들도 국가 건설에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303-5)


"프랑스는 시리아를 점령한 초기부터 도시와 지방 모두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파우지 알 카우크지는 일격을 가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며 하마에서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프랑스에 맞서서 일어났던 이전의 시리아 반란들이 끓어올랐다가 주저앉은 것을 그동안 쭉 지켜본 그는 1925년의 상황은 다르다고 판단했다. 드루즈인과 다마스쿠스인 그리고 하마의 자신의 당 사이에서 프랑스에 반대하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프랑스는 다마스쿠스의 반란을 물리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폭력을 동원했다. 요새에서 무차별적으로 다마스쿠스 지역을 대포로 포격했다. 이후 수일간의 공중 폭격이 이어졌다." "결국 민족주의 운동의 주도권은 협상과 비폭력 저항이라는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목표를 추구하며 무장 투쟁을 멀리했던 도시 엘리트들로 구성된 새로운 지도부로 넘어갔다. 하지만 1936년까지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보여주지 못했다."(326-30)


"아랍 민족주의가 싹트던 시기에 알제리는 오히려 제국주의를 포용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알제리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에 만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육받은 대다수의 엘리트들은 프랑스를 쫓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1930년까지도 자신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온전한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서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했다. 민족주의 대신 시민권 운동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법은 알제리의 유럽인과 무슬림 사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1865년에 프랑스 상원은 알제리의 모든 무슬림이 프랑스인이라고 공포했다. 하지만 그들이 군과 행정기관에서 일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프랑스의 '시민'은 아니었다. 알제리 원주민이 프랑스 시민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무슬림으로서의 신분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가족법 아래에서 사는 것에 동의해야만 했다. 결혼과 가족법, 유산 분배 모두가 이슬람법으로 정확히 규정되어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무슬림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종용하는 것과 같았다."(333-4)


9 팔레스타인 재앙과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서 더 이상 버틸 여력도 의지도 상실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이견은 해소가 불가능했다. 영국은 유대인에게 양보를 할 경우 1936-1939년처럼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했다. 반대로 아랍에게 양보를 한다면 유대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도(1946년 7월 22일, 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 같은) 이제 분명해졌다. 1946년 9월에 런던에서 아랍과 유대 지도부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영국의 노력은 양측의 참석 거부로 실패했다. 그리고 1947년 2월에 런던에서 열린 양자 회담도 국가 설립을 놓고 아랍과 유대인 측의 요구가 엇갈리면서 좌초되었다. 영국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벨푸어 선언의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영국은 〈기존의 팔레스타인 비유대인 공동체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유대인들의 민족향토〉를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7년 2월 25일에 영국은 국제연합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위임했다."(356)


"유대인 테러리스트들은 영국을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도록 만들겠다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한 테러 전법은 오늘날까지도 이 지역을 괴롭히고 있는 위험한 선례를 역사에 남겼다." "한편 UN이 구체화한 분할안(Partition Resolution)은 팔레스타인을 바둑판 모양으로 여섯 구역으로 나눈 후 3개의 아랍지역과 3개의 유대지역으로 지정했고, 예루살렘은 국제적인 신탁 통치 지역으로 정했다. 이 안은 유대 국가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약 55퍼센트를 할당했는데, 하이파에서 야파로 이어지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중해 해안과 아카바 만까지의 아라바 사막은 물론 이 나라의 북동쪽에 위치한 좁고 긴 갈릴리 전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루먼은 훗날 〈이 당시 내가 느낀 중압감과 백악관을 겨냥한 (시오니스트 활동가들의) 맹렬한 선전 활동〉은 전무후무한 경험이었다고 떠올렸다. 1947년 11월 29일에 분할안이 기권 10표와 찬성 33표, 반대 10표로 통과되었다."(359)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1948년은 알 나크바(al-Nakba, 대재앙)로 기억되었다. 내전과 아랍-이스라엘 전쟁으로 약 75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피난민으로 전락했다. 피난민들이 팔레스타인의 겨우 남은 아랍 영토와 레바논, 시리아, 트란스요르단, 이집트로 밀려들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만이 간신히 아랍인들의 수중에 남았다. 가자 지구는 이름만 자치 지역일 뿐 이집트의 신탁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서안 지구를 트란스요르단에 합병하면서 이제 요르단 강 양안(兩岸) 모두를 차지하게 된 트란스요루단은 요르단으로 국명을 고쳤다.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종식되었을 때 지도상에는 팔레스타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단지 외국의 점령 아래 또는 이산(離散)의 상태로 살고 있는, 뿔뿔이 흩어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국권을 인정받기 위해서 역사의 남은 시간을 싸우는 데에 써야만 했다."(382)


"팔레스타인 재앙은 아랍 정치에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신생 독립국가들의 희망과 염원에는 1948년의 패배로 인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팔레스타인에서 겪은 패배의 여파로 아랍 세계는 무시무시한 정치적 동요를 목격했다.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4개국은 정치적 암살과 쿠데타, 혁명으로 침몰했다. 구엘리트들이 젊은 세대의 군인들에 의해서 타도되면서 대대적인 사회 혁명이 발생했다. 구 정치인들이 자국의 국경 내에서 민족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면, 열정적인 자유장교단은 범아랍적인 단결을 주창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또한 '구세력'이 유럽의 언어를 구사했다면, 새로운 지도자들은 거리의 언어로 말했다. 팔레스타인 재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랍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을 종식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후 2등 국가로 전락했다. 이렇게 제국은 물러났고 새로운 강국들이 국제체제를 지배하게 되었다."(392-3)


10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


"1952년 이집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이 무렵 정부의 전복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정작 소수의 군장교들뿐이었다. 자유장교단(Free Officers)이라고 자칭했던 그들의 지도자는 가말 압델 나세르라는 젊은 대령이었다. 자유장교단은 이집트의 군주와 의회 정부가 나라를 망쳤다는 확실한 신념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쿠데타 성공 이후 이집트 대중의 지지 속에서 군인들은 대담해졌고, 정치에도 더욱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군인들은 재빠르게 이집트 정치에서 다당제를 추방했다. 1953년 1월에 와프드당과 무슬림 형제단의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혁명평의회는 모든 정당 활동을 금지하고 정당 자금을 국고로 환수했다." "독립 수호에 열성적이었던 이집트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권의 침해 없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유장교단은 타협 없이 전 세계와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곧 깨닫게 되었다."(400, 406-7)


"주목할 만한 계속된 성공으로 나세르는 아랍 세계에서 권세를 떨치게 되었다. 반제국주의자로서의 이력과 아랍 단결을 향한 호소로 그는 중동 전역에서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투사가 되었다." "나세르는 라디오를 통해서 아랍 세계를 정복했다. 〈아랍의 소리〉를 통해서 아랍 정부의 수장들을 제치고 그들의 시민들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다른 아랍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규칙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집트의 대통령이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아랍 연대에 대한 나세르의 호소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시리아의 민족주의자들이 그러했다." "시리아 정부는 카이로로의 길을 택했고, 1958년 2월 1일에 이집트와 통합 협정을 체결했다. 이것은 혁명적인 해의 시작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합은 아랍 통합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알렸다. 정점에 도달한 나세르의 입지는, 다른 아랍 국가 수장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432-3, 438)


"나세르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일아랍공화국(UAR)으로 통합된 1958년에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이 연합은 아랍 세계 전역에 충격을 몰고 왔고, 이웃의 레바논과 요르단의 유약한 정부를 거의 쓰러뜨릴 뻔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요르단과 레바논 양국이 통일아랍공화국에 가담하기를 기대하며 요르단의 하심 가 군주정과 레바논의 친서방적인 기독교 정부의 붕괴 가능성에 기뻐했다. 한편 바그다드의 하심 가 군주정을 타도한 1958년의 이라크 혁명은 이집트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통합시켜서 진보적인 통일 아랍 강대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희망을 실현시켜 줄, 새로운 아랍 질서의 전조처럼 보였다." "그러나 통일아랍공화국에 합류하지 않겠다는 이라크의 결정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간의 연대 가능성은 사라졌다. 1950년대에 성공의 정상에 도달했던 나세르는 연속적인 좌절과 실패를 겪으면서 패배의 1960년대를 보내야 했다."(450-1)


11 아랍 민족주의의 쇠퇴


"놀랍도록 계속되던 나세르의 성공 가도는 1960년대에 중단되었다. 시리아와의 통합이 1961년에 깨졌다. 이집트군은 예멘 내전의 수렁에 빠졌고, 나세르는 이집트와 아랍 동맹국들을 1967년에 발발한 이스라엘과의 재앙적인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오래된 약속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뿐만 아니라 남은 팔레스타인 영토마저 이스라엘이 점령하면서 더욱더 요원해졌다. 1960년에 아랍 세계가 품었던 희망은 닳고 닳아서 나세르가 사망한 1970년에는 환멸과 냉소로 바뀌었다. 1960년대의 사건들은 아랍 세계에 과격한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는 점점 과거의 일이 되어갔지만 이제 아랍인들은 냉전의 정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960년대에 아랍 국가들은 친서방 진영과 친소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냉전의 영향은 소련군과 미군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된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랍의 분할통치는 계속되는 듯이 보였다."(452)


"1962년부터 나세르가 주창하기 시작한 아랍 사회주의는 아랍 세계를 분열시켰다. 이집트의 정치 언어는 갈수록 교조적으로 변했다. UAR의 해체 이후, 나세르는 아랍 민족의 이해관계보다는 편협한 국가적 이기심을 앞세우는 〈반동주의적〉 자산가들을 주로 비판했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서구의 지원을 받는 아랍 국가들─모로코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보수적인 군주국들과 튀니지, 레바논과 같은 자유 공화국들─도 〈보수반동적인〉 국가(서구에서는 〈온건한〉 국가로 알려졌지만)로 일축되었다. 혁명적인 아랍 국가들은 모두 모스크바와 제휴했고 소련의 사회 경제적 모델을 따랐다. 그들은 아랍 세계에서 〈진보적인〉(서구에서는 〈급진적인〉 아랍 국가들로 경멸되었다) 국가들로 알려졌다. 진보적인 국가들의 숫자는 초기에는 매우 적었지만─이집트와 시리아, 이라크─그 대열은 알제리와 예멘, 리비아에서 발발한 성공적인 혁명의 결과로 점점 길어졌다."(455-6)


"1967년의 제3차 중동전쟁의 패배로 아랍 정치는 급진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패전과 더불어 아랍 대중을 고의적으로 기만한 사실은 아랍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를 땅에 떨어뜨렸다." "1948년의 전쟁 이후와 마찬가지로 아랍 세계 곳곳에서 쿠데타와 혁명의 물결이 일어났다. 이라크의 대통령 압드 알 라흐만 아리프는 1968년에 바트당이 주도한 쿠데타로 쫓겨났다. 리비아의 왕 이드리스는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이끈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로 타도되었고, 야파르 알 누마이리는 1969년에 수단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았다. 1970년에는 시리아 대통령 누르 알 딘 아타시가 하피즈 알 아사드의 군사 쿠데타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새로이 등장한 각국의 정부들은 급진적인 아랍 민족주의 강령을 자신들의 적법성의 기초로 삼았고, 이스라엘의 파괴와 팔레스타인 해방, 제국주의─이제는 미국이 그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의 극복을 주창했다."(483-4)


"아랍 민족주의는 나세르 (사망) 이전에 이미 소멸한 상태였다. 통일아랍공화국으로부터의 시리아의 분리, 예멘에서의 아랍 국가 간의 경쟁, 1967년의 대패, 팔레스타인 전역의 상실로 인해서 범아랍주의를 향한 염원은 결코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연속적인 타격을 입었다. 검은 9월의 사건으로 아랍 국가들 간의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냉전 노선에 따라서 미국의 우방국이 되거나 소련의 열성 당원이 된 아랍 국가들을 가르는 단층선을 나세르 외에는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었다. 1970년에 아랍 세계는 각자의 이해관계를 가진 별개의 국가들로 확실히 분열되어 있었다. 1970년 이후에도 통합안이 등장했지만, 그 어느 것도 관련국의 보위(保衛)를 위협하지 않았으며 지속되지도 않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통합안들은 아랍 민족주의가 여전히 자국민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아랍 정부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고안한 선전활동에 지나지 않았다."(503)


# 검은 9월의 사건 :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이 자신들의 테러 활동(특히 비행기 납치) 무대로 요르단 영토를 활용하자 이에 격분한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충돌한 사건


12 석유의 시대


"자연은 아랍 국가들에게 석유를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았다. 위대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수천 년 동안 거대한 농업 인구를 부양했던 이라크 외에는,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아랍 국가들─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그 외의 페르시아 만 국가들, 리비아,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가장 많은 석유 매장량이 발견되었다. 현지의 수요조차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로 적은 양의 석유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에서도 발견되었다." "산유국들은 자력으로 개발 목표를 실현하기에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다른 아랍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모집해야만 했다. 국가가 없던 팔레스타인은 물론 튀니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예멘이 아랍의 노동력 수출에 적극 참여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코 이집트가 가장 많은 노동력을 수출했다. 1970년대 동안 산유국으로 향한 아랍 이주 노동자의 숫자는 1970년의 약 68만 명에서 1973년 석유 금수조치 이후에는 130만 명으로, 1980년에는 약 300만 명으로 증가했다."(504, 560-1)


"산유국의 이집트 노동자들이 고국으로 송금한 금액은 10년 동안 무려 200배가 증가했다. 이집트 사회학자 사드 에딘 이브라힘은 산유부국과 산유빈국 간에 이루어진 노동력과 자본의 교환 속에서 기인한 〈새로운 아랍 사회질서〉를 발견했다. 깊은 정치적 분열의 시기에 오히려 아랍인들은 경제적인 차원에서 점점 더 상호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새로운 질서는 아랍 국가들 간의 적대감을 넘어설 만큼 유연성이 뛰어났다. 이집트가 리비아와 전쟁에 돌입한 1977년 여름에 40만 명의 이집트 노동자 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추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실용주의는 사다트가 이스라엘과 강화를 맺기 위해서 아랍 대열에서 이탈했을 때도 여전히 유효했다. 이집트 인력에 대한 산유국들의 수요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이브라힘의 결론처럼 석유는 아랍 현대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1970년대 말에 아랍 세계를 사회경제적으로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561)


"뜻밖에도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산유국조차 신생 이슬람 정치 세력에게는 취약한 듯이 보였다. 더 이상 아랍 민족주의적 수사를 믿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아랍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대는 아랍의 왕과 대통령들이 부정부패로 궁전을 짓고, 아랍의 공익보다 개인의 권력을 우선시 하는 것을 보면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소련의 공산주의나 무신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을 아랍 국가들 간의 분할통치를 추구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보다는 이스라엘의 이해관계를 독려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란 혁명에서 얻은 교훈은 이슬람이 모든 적들을 합친 것보다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슬람의 불멸의 진리를 따라서 연대한다면, 전제 군주를 타도하고 초강대국에게도 용맹하게 맞설 수 있을 것이라고 무슬림들은 생각했다. 아랍 세계는 이슬람의 힘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정치와 사회적 변화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562-3)


13 이슬람의 힘


"1981년 10월 6일의 열병식에서 〈나는 파라오를 죽였다〉라고 외쳤을 때,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는 종교보다 인간의 법을 앞세운 세속적인 통치자로서 사다트를 비난한 것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무슬림 사회는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지혜, 이슬람 신학자들의 판결기록에서 추론된 이슬람법의 요체이자 총체적으로 샤리아(sharia)로 알려져 있는 〈신의 법〉에 따라서 통치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연대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속정부를 적으로 보았고, 통치자를 〈파라오〉라고 불렀다. 『구약성경』처럼 『쿠란』도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를 신의 율법보다 인간의 법을 권장한 전제군주로 묘사하며 매우 비판적이었다.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아랍 세계를 지배하는 현대판 파라오에게 맞선 폭력 사용을 세속정부를 전복하여 그 자리에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처라며 옹호했다. 칼리드 알 이슬람불리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고, 쓰러진 대통령을 파라오라 비난하며 사다트 암살을 정당화했다."(565-6)


"카리스마적인 이집트 사상가 사이드 쿠트브는 자신의 저작 『이정표』에서 현대를 규정하는 사회정치적 시스템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과학과 지식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는커녕, 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즉 자힐리야(jahiliyya)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이슬람 이전의 암흑시대를 일컫는 것이었기에 특히 이슬람에서는 그 반향이 컸다. 20세기의 자힐리야는 〈가치를 창조하고 집단행동의 원칙을 규정하며 삶의 방식을 선택할 권리는 신이 규정한 것과는 상관없이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형식을 취한다〉라고 쿠트브는 주장했다. 함축적으로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전은 인류를 현대로 이끌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의 영원한 메시지의 포기는 이 사회를 6세기로 되돌려 놓았다." "쿠트브는 인류를 위한 신의 질서를 완벽하게 진술하고 있는 이슬람이야말로 인간이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진정한 해방신학이라고 생각했다."(570-1)


"이집트 정부는 반체제 이슬람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고문하고 선별적으로 처형했던 반면, 시리아 정권은 대량 말살 정책을 동원했다. 따라서 그 반대급부로 고강도의 훈련과 계획, 규율이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요구되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암살이나 전복으로 무너뜨리기에는 아랍 정부들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다. 세속 정권을 전복하고,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하던 이슬람주의자들은 다른 곳을 찾아야만 했다. 레바논 내전의 갈등은 이슬람주의 일당들에게 이슬람 사회에 대한 이상적인 미래상을 고취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1979년 소련의 침공 이후에는 아프가니스탄도 또다른 선택지가 되었다. 두 지역에서의 투쟁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일당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국제무대로 옮겼고, 그 범위를 넓혀서 이스라엘과 미국, 소련과 같은 중동 지역 및 세계의 초강대국들과 싸웠다. 개별 국가들의 국내 안보 투쟁으로 시작된 일이 세계적인 안보 문제로 비화된 것이었다."(581-2)


"이슬람주의자들은 1979년 이란 혁명의 성공과 이슬람 이란 공화국의 창설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집트에서는 한 분파 조직이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를 암살하는 데에 성공했다. 시리아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이 하피즈 알 아사드가 이끄는 바트주의 정부와의 내전을 시작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은 레바논 시아파의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았고, 레바논에서 양국에게 대대적인 일격을 가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지하드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를 향한 것이었는데, 소련 점령군과 공개적으로 이슬람을 적대시하던 아프가니스탄 공산 정권이 그 대상이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이슬람주의자들은 이슬람 정부 아래 팔레스타인을 이슬람 세계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유대 국가에 대항하는 장기적인 지하드를 주창했다." "그러나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과 아프가니스탄 모두 외부의 적이 퇴각한 이후, 장기 내전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622-3)


14 냉전이 끝나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국제 외교에서 소련과 미국이 협조하는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역사상 처음으로 안전보장 이사회는 냉전 시대의 정치 논리에 구애받지 않고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8월 2일에 결의안 660호가 신속하게 통과된 이후, 4개월 동안 안전보장 이사회는 거부권의 행사로 인해서 부결될 걱정 없이, 총 12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아랍 정치인들─특히 이라크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소련의 태도였다. 아랍 세계는 소련이 쇠약해진 상태이며 워싱턴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걸프 만에 대한 미국의 전략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고려했을 때, 소련은 자신들이 미국을 지지하거나 또는 미국과 대치할 수는 있어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막을 힘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립해본들 얻을 이득이 없었던 소련은 미국에 협조하기로 결정했고, 한때 우방국이었던 이라크를 철저히 외면했다."(639-40)


"미국과 소련이 전례가 없는 협력의 시간을 즐겼던 반면 아랍 세계는 극심한 분열을 겪었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에게는 미국의 개입이 초래할 위협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보다 더욱더 심각하게 여겨졌다. 리비아와 수단, 요르단, 예멘, PLO 지도자들은 모두 알제리 대통령 벤제디드의 우려에 공감을 표했고,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랍의 일치단결을 촉구했다." "카이로 정상회담의 최종 결의안에 대한 투표 결과는 아랍 세계의 분열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결의안은 침공을 비난했고, 이라크의 합병을 부정했으며, 쿠웨이트에서 모든 이라크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자국 영토에 대한 이라크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 아랍에게 군사적 도움을 청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요청도 승인했다. 무바라크는 딱 2시간 만에 결의안에 대한 논의를 중단시키고 전문을 투표에 부쳤는데, 10개국은 최종안에 찬성했고 9개국은 반대했다. 아랍 세계는 첨예하게 분열된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640-1)


"1993년 8월, 이스라엘과 PLO가 가자와 예리코(서안 지구)에서의 팔레스타인 임시 자치를 합의했다고 공표하자, 세계는 놀랐고 예상했던 대로 온갖 비난이 쏟아졌다. 클린턴 행정부는 아랍-이스라엘의 화해 조정에 실패한 미국을 대신해서 노르웨이가 거둔 성공에 매우 당황해했다. 이스라엘에서는 야당인 리쿠드당이 라빈 정부를 배신자라고 비난하며, 정권을 다시 잡으면 이 합의를 무효화할 것을 약속했다. 아랍 세계는 PLO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거래해서 아랍의 대오를 무너뜨렸다고 비난했다." "반면 오슬로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아랍 세계에서 유례없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일단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단독협상을 체결하자 다른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운동을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고도 이스라엘과 자국의 이해관계를 자유롭게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지쳐 있던 대다수의 아랍 국가들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673-5)


15 21세기의 아랍인들


"아랍 국가들은 9/11 이후 해소 불가능한 압박감을 받게 되었다. 만약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반대할 경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게 경제적 고립에서부터 정권 교체라는 노골적인 요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재를 받을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국의 편을 든다면, 빈 라덴의 사례에 고무된 현지의 지하드 조직의 공격 위협에 자국 영토를 노출시키는 격이었다. 2003년 5월부터 11월까지 자국의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수차례의 폭탄 공격으로 125명의 사망자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부상자가 발생하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로코, 터키의 도시들이 요동쳤다. 아랍 세계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데에 굉장히 어려운 선택에 직면했다. 미국과 아랍이 소원해진 만큼 이스라엘과 미국은 더욱 가까워졌다." "이스라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이슬람주의 단체의 자살 폭탄 공격 시도는, 부시 대통령이 미국과 유대 국가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693)


"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 침공은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부시 행정부는 연합군 임시 행정처(CPA)라는 관리기관을 설립했다. CPA가 2003년 5월에 내린 두 건의 초기 결정으로, 전후 이라크의 혼돈은 미국 통치에 맞선 무장 폭동으로 변했다. 첫 번째 결정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바트당을 불법화하고 전(前) 바트 당원들을 공직에서 제외한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것은 5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군과 정보부를 해체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탈바트화(de-Ba'thification)〉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CPA의 조치는 잘 무장된 수많은 군인을 일자리에서 내쫓았고, 이라크의 수니파 무슬림 정치 엘리트들은 나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시아 무슬림들이 득세해가는, 미국이 건설한 새로운 민주국가 이라크에 협력할 이유를 상실했다. 미국의 점령에 맞선 반란과 이라크 지역 사회 내의 종파적 갈등이 잇따랐다. 이라크는 곧 반미, 반서구 활동가들의 보급지가 되었다."(697)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을 통해서 이슬람주의 정당들은 정치적 배당금을 챙겼다. 실제로 유대 국가에 과감한 일격을 지속적으로 가하면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넓은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슬람 땅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싸우는 것이 종교적인 의무라고 믿었다. 2006년 여름에 양 정당은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의 수위를 올렸고, 이는 가자 지구와 레바논 모두에게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006년의 충돌은 미국의 아랍 민주주의에 대한 지원의 한계 및 이스라엘에 대한 무한 지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사실상 부시 행정부는 친서방 정당이 정권을 잡은 선거 결과만 인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미국은 테러와 연계된 정당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이 아무리 부적절해도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성토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 정당들의 국내적 입지는 더욱더 공고해졌다."(702-4)


"2011년 1월과 2월에 발생한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의 봄을 만들었다. 아랍의 봄 봉기에 참여한 각국의 시민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시위대가 성취한 성공을 (자신들도) 거듭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 주장을 받아들였다. 모든 아랍 국가는 동질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혁명 모델이 모두에게 들어맞을 것이라는 생각은 아랍의 봄이 낳은 착각이었다. 국가 기관이 거의 부재했던 카다피의 리비아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종파 문제를 가지고 있던 바레인과 완전히 달랐고, 지역주의의 오랜 역사를 가진 예멘과도 달랐으며, 알라위파라는 소수 종파의 지배하에 있던 시리아와도 달랐음이 곧 명백해졌다. 내부적인 제약과 역내 강국들의 간섭은 2011년 혁명을 경험한 6개국 각각에게 매우 다른 결과들, 즉 반혁명과 내전, 지역 갈등, 초국가적 칼리프 국가의 출현을 가져왔다. 해방 운동으로 시작된 행동이 오늘날 중동을 괴롭히는 최악의 정치적, 인도주의적 위기로 빠르게 악화된 것이다."(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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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사 - 적응과 변화의 긴 여정, 1700~1922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1
도널드 쿼터트 지음, 이은정 옮김 / 사계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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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오스만 제국사를 공부하는가?


"오스만 제국은, 우연히 근대에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여러 서유럽 국가들에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자리 잡았던 까닭에 긴 세월 동안 유럽의 군사·정치·이데올로기적 팽창의 직접적인 예봉에 맞서게 되었다. 이러한 근접성은 오스만 측과 유럽 모두의 정체성 형성에서 심오한 영향을 주었다. 양측의 근접성은 거부와 끌림의 과정을 거치면서 복합적인 정체성 형성을 구축했다. 오스만 제국은 초창기부터 이후에 유럽이 된 지역의 일상생활, 종교, 정치와 서로 얽혀 있었다. 대개의 경우, 이처럼 서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거리에 반비례한다. 어쨌든 한 인간은 자신을 특별하고 독특한 성격을 가진 뚜렷하고 개별적인 존재로 인식할 때, 자기 자신은 무엇이고, 마찬가지로 무엇이 아닌지 정의하는 데 자주 '타자(他者)'를 잣대로 이용한다. 비잔티움, 발칸, 동부와 서부 유럽들을 상대하면서, 오스만인들은 간혹 (어쩌면 힌두교도를 적으로 대했던 무굴인들처럼) 이슬람교를 수호하는 무슬림 전사들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30-2)


"오스만인들은 유럽인의 상상의 방앗간에 수많은 곡식을 제공했다. 종교 개혁기와 17세기 프랑스의 공상문학에서 적그리스도와 강적의 이미지는 오스만 왕조의 군사적 위축기를 거치면서 보다 단순한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18세기의 예니체리 음악과 튀르크 풍을, 그 다음에는 어디에나 있는 동방의 카펫과 영화관에 따라붙어 있는 19세기의 이국풍과 에로티시즘을 볼 수 있다. 비록 오스만 제국은 사라졌지만, 지금도 유럽과 그 연장선상에 있는 문화 세계에서는 그 문화적 유산들이 남아 있다. 말기의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점유했던 서유럽 제국주의의 절정기를 버텨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대륙의 바깥에 겨우 한 줌밖에 안 되는 독립국가만 있었을 뿐이다. 중국, 일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은 그나마 힘을 가지고 살아남은 대단히 중요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립국가로서 그들은,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식민화된 여러 민족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37-8)


2 오스만 제국의 기원에서 1683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13세기에서 14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즈음해 소아시아라고도 불리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쪽 귀퉁이에서 태동했다. 15세기 중엽까지 아나톨리아 반도의 비잔티움 제국과 비잔티움 봉건 영주들 치하의 정주민들의 삶은, 홍수처럼 밀려와 나름대로 작은 국가를 형성한 튀르크인 유목민들 사이에 놓여 있는 '섬'에 비유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는 튀르크멘 소공국들이 흥기했다 사라졌고, 비잔티움의 통제력에도 기복이 있었다. 아나톨리아는 확장과 축소를 거듭하는 작은 튀르크멘 또는 비잔티움 공국들과 소국들로 이루어진 조각 이불이 되었다. 간혹 비잔티움의 저항은 제국적 수준이든 봉건 영주의 수준이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기독교 영토에서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한 아나톨리아는 불가피하게 장기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겪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튀르크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과 혼돈의 분위기는 오스만 국가의 출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44-5)


# 오스만 제국 탄생의 배경

1. 소아시아에서 비잔티움 중앙 정부의 통치를 무너뜨린 튀르크 유목민들의 침입

2. 변방에 혼란과 인구압을 가져온 몽골의 중동 침입

3. 종교와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다수의 지지자를 모았던 실용적이고 유연한 정책들

4. 유목민들의 발칸 반도 접근을 통제하여 더 많은 지지자들을 모을 수 있었던 지리적 위치


"오스만 1세는 그 이름을 딴 오스만 왕조의 개창자이지만, 변방에 있는 여러 튀르크멘 집단 가운데 한 지도자였을 뿐 가장 세력 있는 인물은 확실히 아니었다." "1300년 당시 그런 튀르크멘 공국들은 수십 개에 달했으며, 이 모든 것은 튀르크멘 유목민들이 아나톨리아의 해안선을 압박하여 마침내 평야지대를 점령했던, 보다 광범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오스만 왕조가 승리를 거두었고, 나머지는 이내 사라졌다." "국가 형성에 성공한 것은, 물론 오스만인들의 특별한 유연성, 즉 변화하는 조건에 실용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과 준비를 갖췄기 때문이다. 이 떠오르는 왕조는, 부계에 따른 혈통의 기원은 튀르크계였고, 기독교도와 무슬림, 튀르크어와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상당히 뒤섞인 지역에서 태동했다.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모두 아나톨리아와 그 너머에서부터 오스만의 깃발 아래로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은 물론이고 지위와 권력)을 얻으려고 모여들었다."(46-7)


"1300년경에서 1683년 사이에 오스만 국가는 형태와 행정 기구 안에서의 권력 집중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급격한 진화를 겪었다. 이 기간의 앞부분인 1300년에서 1453년 사이에 엘리트는 변방의 영주(베이[bey])들, 튀르크멘 지도자들, 왕자들이었고, 이러한 지도자들은 오스만 군주를 동등한 권력자들 가운데 제일인자(primus inter pares)로 받아들였다. 자신의 수행원, 군대 그리고 술탄에게서 독립적인 지지자들을 이끌고 오스만 국가에 봉직하게 된 이 엘리트들은 오스만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더 많은 권력과 부를 얻었기 때문에 오스만 국가를 따랐다. 술탄은 이처럼 거의 동등한 엘리트들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그들과 협상을 했다." "14세기 초부터, 술탄은 그저 거의 동등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튀르크멘 지배자라기보다는 이론적으로 절대적 군주라는 논리가 진화하고 있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엄청난 권위를 갖게 된 술탄 메흐메드 2세는 군주의 절대적 권력의 논리를 법제화했다."(67-8)


"메흐메드 2세(재위 1451~1481)와 쉴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의 재위 기간 사이의 1세기 중 어느 시점에선가 아마도 관료들과 신민들 사이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의식이 널리 퍼져나갔던 듯싶다." "가장 기본적으로, 강역 내의 사람들은 적들로부터 술탄의 보호를 받았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공격을 받았다. 나아가 오스만 국가 내에 존재한다는 의식은 부분적으로 술탄이 신민들의 충성을 강화하려 한 무수한 행위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또 다른 차원에서, 세금의 정규화와 오스만 관료들이 지방을 자주 방문했다는 사실 또한 신민들이 같은 세계에 속한다는 의식을 강화시켰다. 더욱이 메흐메드 2세와 쉴레이만은 신민들의 행동에 대한 술탄의 기준과 규법을 규정한 법전을 반포했다. 그리하여 공통된 법 체제, 세금 그리고 모든 신민에게 안전을 제공하는 공통의 군주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통된 '오스만' 국가 정책에 동참한다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68-9)


"일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창건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 거의 단절 없이 이어져온 전사 군주는 술탄 쉴레이만 대제의 재위 기간에서 끝났다. 이 시기의 성숙한 제국에서는 정복전이 차츰 주춤해짐에 따라, 이제는 전쟁하는 술탄이 아니라 정권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술탄이 필요했다." "이제 술탄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서 관료적 명령을 정당화해주되 자신은 정책을 입안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17세기 절반의 기간(1656~1691) 동안 유명한 쾨프륄리 가문이 사실상 국정을 좌우했고 가끔 대재상(vezir, 재상 또는 장관을 의미)으로 봉직했다." "새로운 집단지도 체제, 즉 민간인들의 과두제가 등장하고 옛 관례들이 새로운 관례들로 대체되었지만, 술탄들은 표면적으로 연속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중앙 정부는 실제로 통치권을 여전히 갖고 있었지만 군주가 아닌 사람들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이는 서유럽과 중유럽에서 군주들이 권력을 다지고 있었던 것과는 정반대 상황이었다."(69-71)


3 1683년에서 1789년까지의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이 과거보다 훨씬 더 불운했던 이 시기의 특징은 군사적 패배와 영토 축소였다. 18세기 오스만의 패배와 영토 상실은 매우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 사이에 경쟁이 없었다면 더욱 심각해졌을 껏이다. 유럽 외교관들이 전후 협상에서 경쟁자들이 너무 많은 이권을 차지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수차례에 걸쳐 오스만의 편을 들어 개입함으로써 패배한 오스만인들이 잃어버릴 뻔했던 영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쐐기를 마련해주었다." "패전의 시기는 1683년 빈에서 시작하여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과 함께 끝났다. 1683년 빈 포위의 실패로 오스만군은 패배하여 도망쳐야 했으며, 잇달아 이스탄불 정권에 끔찍한 재난을 안겨준 사건들이 일어났다." "1798년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침공으로 오스만 제국은 나일 강 유역의 요지이자 부유한 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고 결국 무함마드 알리 파샤와 그의 후손들 치하에서 별도의 국가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74-9)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술탄은 대개의 경우 상징적인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 부문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변화 또는 행동들을 추인하기만 했다." "술탄들이 국내의 정치적 우위를 둘러싼 싸움에서 패배함에 따라 그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도구와 기술들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8세기 초부터 중앙 정부는 그 자체의 정통성을 고양하고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성지 메카와 메디나로 가는 순례로를 재정비했다. 이른바 튤립의 시대(1718~1730) 동안의 변화는 술탄들이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련된 방법들을 더욱 확실하게 설명해준다." "루이 14세의 궁정처럼 당시 튤립 시대의 오스만 조정은 엄청난 소비의 현장이었다. 술탄 아흐메드와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이스탄불 엘리트들을 소비면에서 선도하느라 애썼고, 모방 대상으로서의 그들 자신의 입지를 사교 생활의 중심에 확립했다. 이는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정통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82-4)


"중앙의 이스탄불과 기타 오스만 도시들에서는 엘리트 내부의 정치적 우위를 위한 경쟁뿐만 아니라 엘리트와 민중 사이의 투쟁도 있었다. 이 투쟁에서 그 유명한 예니체리 군단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에 이르러 예니체리의 무기와 훈련은 너무도 급격하게 퇴조하여 크림 타타르와 기타 지방 군사력이 그들을 대신하여 군의 전투에 중심이 되었다. 한때 화약무기로 무장한 엘리트 보병이었던 이들의 상징인 기율과 엄격한 훈련이 1700년경에 이르러 사라졌고, 이리하여 예니체리 군단은 외적의 공포의 대상에서 술탄의 공포의 대상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엘리트적이면서도 민중적인─민중 계층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엘리트에 연결되는─예니체리의 정체성은 그들에게 국내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그들은 반복해서 술탄을 즉위시키고 또 폐위시켰으며, 대재상과 기타 관료들을 임명하고 해직시켰는데, 이는 엘리트 내부의 투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했지만 가끔 민중을 대변하기도 했다."(85-7)


# 데브시르메 :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의 기독교인 마을들과 보스니아의 무슬림 집단에서 소년들을 선발하여 예니체리의 일원으로 키우는 어린이 공납제도


"중앙에서의 정치 권력의 중심 이동─술탄에서 술탄의 가문으로, 다시 베지르와 파샤 가문들로, 다시 또 거리로─은 지방 정치의 중요한 변동과 궤를 같이했다. 전체적으로 17~18세기에는 지방정치 권력이 중앙의 통제에서 보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듯이 보였다." "지방 명사들은 그들이 중앙의 임명에서부터 유래했든, 오스만 이전 시대의 엘리트 출신이든, 맘루크 출신이든 일반적으로 지역 내의 상인과 지주들뿐만 아니라 종교학자 집단인 울레마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유지했다." "그렇지만 지방 명사 가문의 권위 확립은 대개 오스만 중앙 권위에 대한 반란이 아니었다(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은 달랐다)." "지방 명사들은 나름대로 중앙 정부와 술탄이 정치 권력과 공무상의 조세 수입원에 대한 공식 승인을 해줌으로써 명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리 확보 경쟁을 중재해주기를 기대했다. 이들은 '지방의 오스만인'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오스만 체제의 일부가 되고자 했으며, 그 체제의 일부였다."(87-90, 93)


4 19세기


"제국 내에서는 많은 지방 명사들이 18세기에 등장하여 오스만 왕조와 국가의 기본적인 정통성을 인정하면서도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했다. 반란자들은 오스만 제국을 파괴하거나 분리 독립하려고 시도한 적이 거의 없었다. 반란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개 체제 안에서 움직였으며, 반란의 목표는 세금 면제나 정의의 보장 등으로, 오스만 세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부터 특정 지역을 분리시켜, 독립적이고 그 어떠한 상위의 정치적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주권국가를 세우려는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아랍 지역에서 모두 나타났다. 더욱이 거의 모든 경우에 열강 가운데 어느 한 세력이 19세기의 반란을 지원했으며, 그 열강의 도움은 실제로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반란은 오스만 신민들의 통치자에 대한 반란이었으며, 많은 영토 상실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이전과 다르다고 할 것이다."(99)


# 오스만 제국의 주요한 영토 상실

1. 무함마드 알리의 이집트 장악(1805)과 독립 시도(1832~1838, 유럽 연합군의 저지로 실패)

2. 세르비아인의 반란(1804)과 이에 따른 세르비아인 군주의 세습 통치 승인(1817)

3. 그리스 독립전쟁(1821~1830)을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군이 승인하면서 그리스 독립 쟁취

4. 오스만-러시아 전쟁(1877~1878) 이후 맺어진 베를린 조약의 결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가 (공식적으로) 독립,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로 편입

5.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늘날의 이라크·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 지역은 영국으로, 시리아·레바논 지역은 프랑스로 편입,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탄생(1932)


"예전의 관점에서는, 민족주의─독자성, 우월감 그리고 독립을 주장하는 감정들─는 국가보다 우선했으며 마침내 국가를 탄생시켰다. 각 개인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 권리를 빼앗겼고, 여전히 빼앗기고 있는 억압된 민족의 일원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오스만의 지배에서부터 독립한 국가의 권리를 요구했다. 근래의 학설에서는, 국가가 먼저 존재했고 민족주의는 그 뒤에 나타났다고 한다. 즉, 새로운 국가가 그 자체를 보존하기 위해 국경 안에서 민족적 정체성 형성을 지원하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리 직전의 발칸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쇠퇴한 것이 아니라 번영했다. 그러나 그 후의 신생국가들이 무모한 토지 재분배 계획 같은, 정치적으로는 인기있지만 경제적으로는 파괴적인 정책들을 펼치면서 결과적으로 독립 후의 경제가 독립 전보다 악화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는 경제적 쇠퇴로는 분리주의 운동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121-2)


5 오스만인들과 그 주변 세계


"일반적으로 18세기까지는 그 어떤 국가도 오스만 제국과 동등하게 교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606년 시트바 토록 조약에서 술탄이 여느 때와는 달리 합스부르크 군주를 동등한 자격으로 대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오스만 국가는 주위에 동등한 국가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체제는 한 세기가 더 지날 때까지 사실상 바뀌지 않았다. 이처럼 '전근대적' 외교에서 국가들 간의 전쟁이라는 조건은 구체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 경우가 아니면 당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평화라고 인정한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전쟁의 중지만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술탄은 경고도 하지 않고 마음대로 전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스만 세계에서는 이러한 영구적인 전쟁의 관념은, '전쟁의 영역'과 '이슬람의 영역'이라는 분할에 따라 이론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와 똑같은 영구적인 전쟁 개념은 중국이나 유럽에서도 지배적이었고 그곳에서는 법적인 정당화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130)


"이른바 카피툴레이션이라는 것도 오스만 제국 국제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술탄의 영토에서 얼마 동안을 살든 거류 외국인들의 대우에 관한 규정이었다. 자국에 외부인들이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격조 높은 독특한 법이 있다는 생각에 따른 카피툴레이션의 관념은 오스만 측의 개념일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 예를 들어 중국에서도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오직 오스만 신민들만이 오스만 법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오스만] 군주는 카피툴레이션을 외국인에게 일방적이고 비상호적인 방식으로 하사했다." "카피툴레이션은 제국 내의 외국인들을 법적으로 보호했다. 카피툴레이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모든 오스만 제국의 세금과 관세에서 완전히 면제를 받았다. 당연히 카피툴레이션은 인기가 높아, 프랑수아 1세 이후 다른 군주들이 요청해올 정도였다. 카피툴레이션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힘이 강했을 때는 전혀 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 후에는 오스만 주권을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131-2)


# 카피툴레이션capitulation : 오스만 제국이 유럽 국가들과 체결한 시혜적인 통상조약으로, 유럽 세력이 커진 18세기 말 이후에는 그 성격이 불평등 조약으로 변모했다. 


"국제관계와 외교 수행을 규정하는 또 다른 형태가 르네상스 말에 등장해,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당시 서유럽과 중유럽으로, 그 후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근대적'이라고 불린 이 양식은 국제관계와 외교 방식이 지속적이고 상호적이며, 호혜·치외법권·주권 평등 등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었다. 약하든 강하든 각각의 국가는 국제관계에서 만날 때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등했다. 오스만 군사력이 약화되면서 이러한 개념들의 채택이 점차 늘어났고, 외교는 오스만 제국의 생존을 위한 무기창고에서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술탄 마흐무드 2세(재위 1808~1839)는 외무부를 공식적으로 설치했고, 1834년 외국으로 영구적인 사절단을 보내기 위한 외교 기구를 승인했다. 이 시기는 아주 절묘했으니, 이스탄불이 1829년 러시아인들의 점령과 1833년 무함마드 알리 파샤 군대의 점령을 겨우 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에서 군대는 국가를 구하는 데 실패했고, 이제 국가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외교뿐이었다."(132-5)


"오스만인들은 외교를 수행할 때 칼리프 위(位)라는 독특한 도구를 갖고 있었다. 칼리프 위는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7세기에 새로운 이슬람 국가에서 정치 지도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000년에서 1258년 사이, 누가 정치적 실권을 가졌는지에 상관없이 칼리프는 매우 권위 있지만 주로 상징적인 인물로서 무슬림 공동체를 통합하는 역할을 했다. 오스만 시대에 술탄들이 칼리프 칭호를 간혹 사용했지만, 이 칭호는 실제로 그 어떤 중요성도 띠지 않았다." "19세기에 이르러 인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수많은 무슬림들이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술탄은 그들에게, 그리고 그 자신의 신민들에게 칼리프로서 호소했으며 저항과 충성을 위한 구심점이 되었다. 칼리프라는 개념은─그 역사적 권위, 명예, 그리고 더 좋았던 과거의 이슬람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담았으므로─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무슬림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다."(138-9)


6 오스만 제국의 통치 방법


"18세기에 오스만 정권은 전에 없이 무슬림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18세기 전반에 술탄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성스러운 도시들(메카와 메디나)로 이어지는 순례로를 보호함과 동시에 강화하려고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그러한 목적으로 요새들과 이를 보완하는 군사 주둔지들을 세웠다. 18세기에 아라비아의 와하비 반군들은 오스만 왕조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순례 여행을 교란시켰으며 1803년에는 메카를 정복했다. 술탄 마흐무드 2세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군단을 요청해 와하비 세력을 일시적으로 제압했다. 압뒬하미드 2세는 칼리프로서의 위상을 드높이고 순례자들의 여행을 편리하게 하고 시리아-아라비아 지역을 중앙에 귀속시키기 위해 19세기 말 히자즈 철도를 개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영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고 하자즈 철도를 끊으려고 한 것은, 와하비들의 공격처럼 전 이슬람 세계에서 오스만 왕조의 권위를 격하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161)


"그런데도 오스만 술탄으로서 통치 기간 중에 성스러운 도시들을 순례한 술탄은 아무도 없다. 게다가 왕실의 일원으로서 순례한 사람은 대여섯 명도 채 안 된다." "신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모든 무슬림의 기본적 의무인 순례를 오스만 왕조가 등한시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술탄 오스만 2세 시대에 울레마는, 술탄은 순례에 가기 위해 수도를 비우기보다는 남아서 정의를 수호해야 한다고 공식적인 종교적 의견서(파트와[fatwa]. 법률자문역 무프티의 의견서로, 구속력은 없지만 경우에 따라 상당한 권위를 가진다)에서 말했다. 당시 울레마는 오스만 2세의 통치에 적대적이었고, 오스만 2세가 순례를 계획하면서 비밀리에 다른 일을 꾸미는 것을 두려워했다(오스만 2세가 예니체리를 폐지하고 군을 대폭 개혁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이처럼 술탄이 순례를 가지 못하도록 한 이 의견서는 상당히 특수한 것이다. 결국 오스만 왕조가 순례에서 완전히 발을 뺐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161-2)


7 오스만 경제: 인구·교통·무역·농업·제조업


"오스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이주(移住)는 언제나 인구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이주는 정치적·경제적인 여러 이유로 발생했다. 경제적 이주의 사례 가운데 하나는 항구 도시들의 성장이다. 19세기 동안, 당시 제국에서 성장하고 있던 국제 무역과 관련된 항구 도시들의 발전에 따라 (내륙 인구는 감소하고) 해안 지역에 그나마 인구가 밀집되었다. 이러한 항구 도시에 경제적인 이유로 내륙의 오스만 신민들이 이주했으며, 이즈미르의 경우에는 인접해 있는 에게 해의 섬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즈미르, 베이루트, 알렉산드리아, 살로니카에는 오스만 내륙의 이주민들뿐만 아니라 지중해를 건너온 말타·그리스·이탈리아·프랑스 출신의 이주민들도 있었다. 그들에 힘입어 항구 도시들은 세계 시민적이고 다언어적인 '레반트'(레반트[Levant]란 동지중해 연안 지역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는 특별히 오스만 제국의 일부분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지중해 세계의 일부였다."(188)


"경제적인 이주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이주들은 극적인 성격을 띠었으며 해당 지역에 오늘날까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합스부르크-오스만 전쟁의 인구학적 영향을 예로 들어보자. 전투를 피하기 위해 세르비아 정교회 신도들은 코소보 인근의 고향을 떠나 북쪽으로 간헐적인 이주의 물결을 이루었다. 그때까지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으나 알바니아인들이 점차 이주해와 그 공백을 메웠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동부로 이주했는데, 그 결과 그곳에서 다수를 이루던 무슬림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내주었다. 또 어떤 세르비아인들은 계속 북쪽으로 이동하여 합스부르크 영토로, 예를 들어 1736~1739년 전쟁에서 오스만 측이 승리한 이후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이주민을 내보낸 사회나 받아들인 사회나 모두 종교적으로 더욱 동질화되었다. 이것이 1990년대의 보스니아와 코스보 위기에 관한 오스만 시대의 배경이다."(189)


8 오스만 사회와 민간 문화


"일찍부터 국가와 신민들 모두 인정했던 복장 규제법은 사회 이동의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고, 관료들 사이 또는 관료와 신민 사이, 그리고 신민 계층들 사이의 차이를 표시해주었다. 각각의 특정한 위계에 있는 사람들의 특정 모자와 겉옷이 법으로 규정되었고, 그 가운데 모자가 특히 강조되었지만 옷, 구두, 허리띠 등등의 색과 유형으로도 구별했다. 이러한 법은, 특정 복장으로 사람들을 각각 분리된 집단으로 나누고, 그런 특정 복장에 따라 모두 자기 분수를 알고 명사들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하는 의도를 띠었다." "사회적 변화와 신분 상승이 너무나도 극단적이고 너무나도 국가의 통제력에서 벗어난 부분이라 1829년 술탄 마흐무드 2세는 하루아침에 완전히 두 손을 들었고, 복장에 기반한 오래된 사회적 소속의 표지들을 폐지해버렸다. 그 대신 새로운 규정들을 내세워, 모든 관료들은 페즈를 똑같이 쓰라고 명령했다. 각기 다른 다양한 터번과 명예로운 예복들이 모두 사라졌다(종교 계층은 예외였다)."(227, 232)


"상당수의 사람들이, 왜곡되고 결국 무너져버린 케케묵은 복식상의 표지가 마침내 사라진 것을 환영했다. 이제는 법적인 제약이 없어졌으므로 주로 비무슬림들이었던 많은 부유한 상인들은 의복의 차이로 간혹 벌어졌던 차별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새로운 의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른 오스만 신민들은 통일된 복장으로 새로운 사회적 표상을 세우려는 노력을 거부했다. 사회적 위계에서 가장 끝부분에 있었던 근로자들은 무슬림이든 비무슬림이든 페즈를 거부하곤 했다. 이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평등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수단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근로자들이 계층적 차이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며, 길드의 특권을 공격하면서 그들의 보호자였던 예니체리를 없애버리고 또한 오래도록 길드에 속한 근로자들에게 특혜와 보호를 제공해준 경제 정책들을 해체하고 있던 국가에 반발하는 연대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많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근로자들은, 그들을 특별 집단으로 표시해주었던 모자를 계속 고집했다."(233-4)


9 집단 간의 협동과 갈등


"온갖 부정적인 고정관념과 선입견 속에서도 오스만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 집단 간의 관계는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수세기 동안 오스만 영토에서 소수자들은 프랑스 왕국의 땅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있는 소수자들보다 온전한 권리와 더 많은 법적 보호를 누렸다." "지금까지 정형화된 인식은, 오스만 신민들이 15세기 이래로 명확하게 구분되고 서로 침투 불가능한 '밀렛'이라는 종교 집단들로 서로 분리되어 살아간다는 인상을 준다. 이런 부정확한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집단들은 서로 인접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고립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맺힌 증오가 널리 퍼져 있었다. 최근 학술 연구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거의 모든 면에서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음을 보여준다. 오스만의 비무슬림들을 '밀렛'이라고 부른 것은 먼 옛날이 아니라 19세기 초 마흐무드 2세의 치세 당시부터였다. 그 이전에 밀렛은 제국 내의 무슬림들이나 제국 '바깥'의 기독교인들을 의미했다."(267-8)


"물론 오스만 세계의 사람들은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차이를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무슬림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슬림들은 이미 오스만 왕조와 오스만 국가 기구를 이루는 대부분의 성원과 종교적 믿음을 공유했다. 국가 자체에 여러 가지 속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슬람 국가라고 일컬었고, 많은 술탄들은 그들의 칭호 가운데 '가지', 즉 이슬람 신앙을 위해 싸우는 전사라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특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선택받은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되는 '고임'(goyim)─비유대인, 타자─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무슬림들에게, '딤미'(dhimmi)라는 개념은 차이에 대해 말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 경우 무슬림들은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무함마드 이전에 신의 계시를 받았던 까닭에 불완전한 '경전의 사람들'(즉, 딤미)로 생각했다. 그들은 신의 계시를 일부만 받았기 때문에 무슬림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고 무슬림보다 열등했다."(270-1)


"점차 늘어가는 서구의 경제·정치·사회·문화적 힘이 오스만 제국의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는 변화를 촉발시켰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세기 동안 세 가지의 사회적 위계 질서 사이에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이전 수세기에 걸쳐 존재했고 19세기 초까지 유지되었던 위계 질서로, 이는 비무슬림 위에 무슬림들을 정치적·법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8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외국 기업의 모델로, 외국인들을 정상에, 두 번째 등급에 비무슬림들을, 그리고 무슬림들을 바닥에 놓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오스만주의적 모델로, 이는 모든 종교적·종족적 집단들에서 충원된 국가 행정 관료계가 통치하며, 법과 국가 앞에서 모든 성원들을 평등한 사회로 통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옛 질서는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질서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19세기 오스만 사회는 진화하고 있었지만, 그와 같은 변화는 1922년 제국의 붕괴로 미완성으로 남았다."(284-5)


"튀르크인들이 타민족의 혐오와 민족주의로 비난받는 것을 이해하는 열쇠는 부분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들에서 찾을 수 있다. 열강은 강제로 제국을 분할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들을 그들끼리 나눠가졌고, 국제연맹 체제에서 위임통치 정권을 수립하여 그들의 감독 아래 두었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여러 가지 구실을 들어가며 통치를 계속했다.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큰 덩어리를 아테네에 있는 그들의 하수인들에게 넘겨주고 알맹이 빠진 오스만 제국을 남겨두려고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저항 세력이 집결했고, 제국을 재건할 수 없었던 그들은 아나톨리아의 나머지 땅에 제국보다 작은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는 나중에 튀르크 민족국가(즉, 터키 공화국)가 되었다. 아랍과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오스만 제국의 잔해 속에서 국가를 창설하여 민족을 일으키는 데 전력했다. 특히 터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이집트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그러한 예이다."(294)


"튀르크 민족주의자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각각의 민족주의적 정체성들을 창안하고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들 각각은 오스만 후기에 튀르크 민족주의의 요소를 고안해내고, 찾아내고 또 확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했던 튀르크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튀르크 국가를 정당화하고 역사적 뿌리를 부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랍 국가와 민족의 건설자들에게는, 튀르크인들의 악행이 그들의 분리된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고 정당화해주었으며, 아마도 자신들의 동의 없이 벌어졌던 열강의 점령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반튀르크적 해석은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제국 파괴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했다. 따라서 1918년 이전에 의미 있는 튀르크 민족주의가 존재했다는 주장은 영국, 프랑스, 터키, 그리고 독립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아랍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많은 문제들을 조장했다."(294-5)


10 오스만 제국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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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환경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유전체에 관한 행동 후성유전학의 놀라운 발견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 아몬드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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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이것은 혁명일까


"후성유전학은 우리의 DNA '위에'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epigenesis 과정은 우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17-8)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오히려 우리의 형질은 우리가 한 개체로서 발달하고 생을 살아가는 동안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유전자들, 즉 DNA의 분절된 단위들은 항상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어떤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최종적으로 그것이 나타내는 표현형 사이에 절대적인 인과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다. 형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비유전적 요인들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마주한 맥락의 '결과'이다. 의사가 우리 유전자의 구성 방식을 살펴보고 특정 질병이 발생할지 아닐지 '확률' 이상을 알려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지가 삶에서 어떤 결과가 생길지에 언제나 일부 역할을 담당하므로, 유전자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단언할 수 없다."(28-9)


"오늘날의 생물학자들이 쓰는 정의에 따르면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유전자(의 작용)을 바라보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하며, 딱 맞는 열쇠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33-4)


"일반적으로 어떤 개인의 유전체genome, 즉 그 사람의 세포 속에 들어 있는 유전 물질의 총합은 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제외하면 우리가 수정될 때 받은 DNA 염기서열 정보는 죽을 때 몸속에 있는 정보와 똑같다." "이 때문에 전통적으로 생물학자들은 '발달'이란 유전체가 아닌 유기체의 특성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단 DNA의 일부가 시기에 따라 다르게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우리의 유전체가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역동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유전체가 기능하는 방식의 차이가 DNA의 화학적 구조 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즉 사람의 유전체가 살아가는 동안 확실히 변화한다는 점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개인의 몸속에 있는 유전 물질이 평생 변화하지 않는다는 기존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발달 중인 유전체', 주위 환경이 맥락에 반응하여 변화하는 유전체를 가지고 태어난다."(35-6)


"고전적 개념의 분자 유전자란, 세포질 안에서 물리적으로 단백질을 생산하는 세포소기관에게 염기서열 정보를 제공하는 DNA 분절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DNA 안에는 〈OO단백질을 부호화하는 분자 유전자가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별개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유전자라는 말을 쓸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단백질(또는 어떤 생물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산물)을 만드는 데 쓰이는 서열 정보를 품고 있는 DNA의 분절 혹은 분절들이다. 현대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야기할 때는 어느 특정한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게 아니며, 유전자는 근본적으로 가설상의 개념으로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자. 우리 내부에는 신체와 정신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일련의 안내서, 이를테면 '청사진'이나 '조리법' 비슷한 것이 들어 있다는 흔한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틀렸다. 오히려 DNA 분절에는 많은 경우 모호한 정보가 담겨 있으며, 이런 정보를 사용하려면 먼저 맥락에 따른 편집과 재배열을 거쳐야 한다."(56-7)


"20세기 초 과학자들은 배아가 발달함에 따라 배아의 세포들이 분화한다는 것, 즉 그 세포들로부터 여러 성숙한 세포들에 전형적인 변별적 특징들이 발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분화가 끝난 정상적 세포들은 다능성을 잃는다. 뉴런이 된 세포는 계속 뉴런으로 남으며, 저절로 간세포나 다른 어떤 세포로 변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잠재력을 상실하는 이유에 관한 한 가지 설명은, 세포들이 성숙하고 분화하는 동안 다른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58년에 프레더릭 스튜어드가 성숙한 식물에서 채취한 뿌리 세포 하나로부터 새로 완전한 식물이 생성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 식물, 그리고 이후 밝혀진바 모든 생물의 분화된 세포들은 원래의 정보를 전혀 잃지 '않는다'. 이리하여 생물학자들은 우리 서재의 읽지 않은 책들 속 정보처럼, 모든 종류의 세포가 되는 데 필요한 정보가 분화된 세포들 속에도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7)


"염색체가 비활성화될 수 있다는 발견은 다능성과 분화의 수수께끼에 해답을 제시하는 듯했다. 특히 만약 염색체 중에서 (분자 전체가 아니라) 일부 '분절'만 비활성화될 수 있다면 말이다. 실제로 이는 자연이, 동물이 진화에서 생겨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 바로 다세포 동물의 성체가 자신이 살면서 발달시켰던 다양한 세포 유형을 자식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낸 방식이었다." "자연은 우리가 단 하나의 다능성 세포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그 세포의 세포핵 속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정보의 다양한 조각들을 사용하여 모든 세포 유형을 '발달시킬' 수 있게 했다. 일단 어떤 유전자들은 활성화하고 또 다른 유전자들은 비활성화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 일부 줄기세포는 이런 방식으로, 다른 줄기세포는 저런 방식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과학자들은 X-비활성화를 연구함으로써 유전자 발현 '조절'이 발달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79-80)


2부 후성유전학의 기본 개념들


"일란성monozygotic(MZ) 쌍둥이는, 정자 하나와 난자 하나가 수정되어서 생기는 하나의 수정란(접합자)에서 발달하기 때문에 백 퍼센트 동일한 DNA를 공유한다."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이 후성유전적 상태도 서로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거가 보였다. 즉,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112-4)


# DNA 메틸화 : DNA 한 가닥에 '메틸기'라는 분자 하나가 달라붙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 발현을 중단시키는(다른 말로 하면, RNA 전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 히스톤 아세틸화 :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정을 가리키며, 유전자를 '침묵'시키기도 하고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다만 차이를 만드는 것이 환경 요인일 때 '어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 속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 상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 표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119)


"환경이 후성유전체에 영향을 준다는 발견은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바로 환경 요인이 어떻게 '우리 내부로' 들어와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주는가 하는 질문이다. 꿀벌의 경우 로열젤리 속 특정 단백질이 꿀벌의 몸속 호르몬 농도를 높인다. 이와 비슷하게 포유류의 경험, 그러니까 우리의 경험은 몸속 호르몬 방출을 부추기고, 그 호르몬 분자들이 DNA 근처로 이동해 후성유전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환경은 감각기관을 자극함으로써 우리 내부 상태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둘 다 우리 몸 속에 후성유전적 효과를 이끌 수 있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환경에서 생겨난 자극은 감각기관의 뉴런, 혈류 속 호르몬, 세포핵 속 유전자 등 여러 측면에서 생물학적 활동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경험했는가, 다시 말해 우리의 마음, 몸, 세포, 기관, 유전자가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가다."(122-3)


"아동기의 방임이 성인기의 불안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들에게 자녀를 방임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만약 방임이 '어떻게' 불안으로 이어지는지 안다면 그 외에도 의지할 수단들이 많을 것이다. 발달상 결과의 '기계적' 원인을 추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다. N(방임)이라는 조건이 A(불안)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와 연관된다는 것을 안다면, 할 수 있는 일은 N에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N이 D를 초래하고, D는 W를 초래하며, W는 P를 초래하고, 이것이 A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면, 앞선 네 단계 중 어느 단계에 개입하더라도 그 좋지 않을 결과를 피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식의 연쇄적 인과, 그러니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초래하며 아주 긴 연쇄를 이루는 일은 생물계에서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생물학자들에게는 이를 가리키는 단어가 따로 있을 정도이다. 바로 '캐스케이드cascade'다."(152)


"우리가 후성유전에 관해 확실히 아는 한 가지는 세포마다 후성유전적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후성유전 메커니즘은 자연이 분화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마련한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볼 안쪽에서 면봉으로 채취한 볼세포(협측 세포)의 DNA를 살펴봄으로써 인간 유전체를 검토했다. 우리의 모든 세포에는 동일한 유전정보가 들어 있으므로 유전정보에 접근하고 싶다면 '아무' 세포나 들여다보면 된다. 하지만 '후성유전정보'에 관해서 만큼은 볼 안쪽에서 가져온 세포와 뇌에서 가져온 세포가 서로 다른 그림을 보여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포가 경험의 후성유전적 영향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답은 뻔할 수도 있다. 이전 경험에 반응하여 자체의 구조와 기능을 변경함으로써 경험을 '학습할' 수 있는 세포일 것이다. 어떤 종류의 세포에 이런 능력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클까? 바로 뉴런이다. 어쨌든 학습에 관해서라면 뇌가 가장 좋은 출발점 아니겠는가."(180-1)


"2009년에 미니 연구실의 패트릭 맥가윈과 동료들은 세 범주의 사람들의 뇌에서 추출한 DNA 연구에 관해 보고했는데, 그 세 범주는 어렸을 때 학대(성적 접촉, 심한 신체적 학대 그리고/또는 심한 방임)를 경험한 자살자들과, 아동기에 학대를 경험하지 않은 자살자, 학대를 전혀 경험하지 않았으며 자살이 아닌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대조군이었다. 중요한 것은 맥가윈과 동료들이 해마 세포를 검토했다는 점인데, 해마는 쥐들이 갓 태어난 시기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받는 경험이 영향을 미치는 바로 그 뇌 영역이다." "이 연구를 통해 생애 초기 경험이 사람의 후성유전적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나왔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동기에 학대받은 자살자들은 사망 원인과는 무관하게 학대당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GR 촉진유전자가 심하게 메틸화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오래전 나쁜 양육을 경험한 사람들은 뇌에서 스트레스를 조절하는 단백질들이 덜 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183)


"공학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논리적으로 조립되고 용도에 딱 들어맞는 요소들을 갖췄다는 인상을 준다. 반대로 만약 어떤 생물학적 특징이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기능을 했을법한 잡동사니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 이유는 바로 자연선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억이기 때문이다. 분화된 세포가 다른 세포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 이유는 후성유전 상태가 반영된 특유의 유전자 발현 프로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세포들이 분열할 때는 항상 그 특유의 후성유전 상태를 각자의 '딸세포'에게 전달함으로써 딸세포들도 모세포와 동일한 '유형'의 세포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 세대 세포 속에 존재했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209-10)


"물론 후성유전적 표지가 운반하는 세포 '기억'과, 우리 뇌가 사실 정보와 자전적 정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심리적 기억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아마추어 실험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연선택은 세포분열의 맥락에서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활용해 다른 맥락에도 그 시스템을 가져다 쓸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자연선택에서는 워낙 전형적이어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전략에 따로 굴절적응exaptation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다."(210-1)


"음식 섭취가 후성유전 상태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DNA를 메틸화하는 메틸기를 우리 몸이 어디서 얻는지 생각해보면 명백해진다. 메틸기는 바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온다. DNA 메틸화가 진행되는 동안 메틸기를 공급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은 s-아데노실메티오닌, 일명 SAM이라는 분자다. 궁극적으로 SAM은 메틸기 대부분을, 그러니까 DNA 메틸화 동안 DNA에게 내어주는 바로 그 메틸기들을 비타민 B2, B6, (엽산 또는 폴산이라고도 하는) B9, B12 그리고 콜린을 함유한 식품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섭취하는 식품에 이 영양소들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으면 메틸기 공급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이 영양소들은 그 화학적 조성에 힘입어 몇 가지 생물학적 과정에 필요한 원재료를 공급하는데, 시리얼에 이 영양소들이 보충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즉, 콜린이나 엽산을 충분히 먹지 않으면 SAM 농도 저하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DNA와 히스톤 모두의 메틸화를 감소시킬 수 있다."(249-50)


"한 연구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겨울 기근에 노출된 사람들을 살펴보고 임신기를 전후해 일어난 후성유전적 사건이 그 인구 집단 내에 불균형한 비만율에 원인을 제공했을지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들은 태아의 성장을 촉진하는 특정 호르몬 생산에 관여하는 DNA 분절 하나를 분석했다. 기근기에 태내에 있었던 이들은 태아기에 기근에 노출되지 않은 동성의 형제자매와 비교해 이 DNA 분절의 메틸화가 상당히 감소해 있었다. 흥미롭게도 태아기 후반에 기근에 노출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형제자매들과 유사한 메틸화 프로필을 보였으므로 기근의 영향은 수정 시기와 가까운 더 이른 때에 확립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 연구가 2000년대 중반에 실시되었으니 기근 노출은 그로부터 60년 전에 일어난 일이었음을 명심하자. 그러니까 수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경험의 영향이 60세 정도 된 사람들에게서 감지되었다는 말이다(물론 영양 이외의 스트레스 요인들도 비만의 원인을 제공했을 수 있다)!"(253-4)


3부 대물림의 의미와 메커니즘


"1880년대에는 (획득형질이 세대간에 유전된다는) 라마르크의 주장이 널리 존중받고 있었는데, 이 무렵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이라는 독일의 한 생물학자가 대물림이 일어나는 '방식'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주장은 현대 생물학에서, 생식세포(정자/난자)와 체세포(우리 몸을 구성하는 나머지 모든 세포)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된 경계선을 뜻하는 '바이스만 장벽'이라는 개념으로 고이 모셔졌다. 이 장벽은 체세포에 생긴 변화가 장벽 너머 생식세포에 영향을 주는 일을 방지함으로써, 획득된 형질이 유전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의 유전'의 예가 되려면 연습을 통해 커진 역도선수의 '근육'세포가 그 선수의 아들이 어떤 경험을 하든 상관없이 큰 근육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선수의 '정자'세포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바이스만이 보기에, 연습을 통해 누군가의 체세포에 일어난 영향이 그 사람의 생식세포에 영향을 줄 수 없다면 획득 형질의 유전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287-9)


"유전 물질은 경험 요인에서 영향받을 수 없다는 이 개념은 '경성' 유전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표현형은 반드시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널리 퍼진 원인이기도 하다. 또한 이 개념은 20세기 초기 생물학자들이 다윈의 진화 개념에, 새롭게 등장한 유전학 개념들을 끼워 맞춘 이른바 현대 종합설modern synthesis의 중심 믿음이다." "유전자 결정론이 불완전한 관념인 이유는 유전자가 진공 속에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현형은 유전자들이 더 넓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는 주변의 비유전적 요인들과 상호작용함에 따라 전개된다." "적응에 유리한 특징은 언제나 특정 맥락 안에서 발달하므로, 맥락과 무관하게 자연선택이 독립적으로 유전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연선택은, 어떤 동물을 번식할 때까지 생존할 수 있는 동물로 만드는 유전자-환경의 '조합'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로운 세대는 조상이 물려준 원재료(발달 자원)로 그 형질들을 '구축'해야만 하는 것이다."(290-3)


"적응에 유리한 형질들은 특정 환경 안에서만 발달한다. 한 번 생겨난 그 형질들은 이후 후손에게도 한결같이 정상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유전적 요인과 비유전적 요인 '둘 다'의 세대 간 이동(세대 간 대물림)을 반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의심의 여지없이 도움을 주므로 적응에 유리한 능력인 언어 능력을 생각해보자. 야생에서 자라 의사소통의 고립 상태에서 성장한 탓에 언어 능력을 발달시키지 못한 일부 아이들의 비극적인 예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언어 능력은 의사소통할 줄 아는 타인이 존재하는 맥락 안에서만 발달한다. 따라서 이 능력의 발달은 경험 의존적이다. 그러나 평범한 환경에서는 언어 능력에 세대마다 한결같이 나타난다. 보통 아이는 언제나 언어적 상호작용을 제공하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길러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달기에 언어 능력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어지는 세대가 그 능력을 발달시키는 데 필요한 DNA와 사회적 요인 모두를 정상적으로 제공받기 때문이다."(295)


# 이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형질은 '획득 형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 내장 속에 사는 어떤 미생물들은 건강 유지를 위한 비타민을 합성하고 지방 저장 방식을 조절하거나 채소의 어떤 성분을 분해한다. 또 병을 앓은 후 회복을 돕는 화학물질을 만들어준다고 알려진 미생물도 있다. 우리를 돕는 이런 세균들을 우리는 기생충이 아니라 '공생자symbiont'라 부른다." "이 생물들은 4만 종이나 되며 모두 합하면 수백만 개의 유전자를 품고 있어서 2만 개 정도인 '우리 자신'의 세포 속 유전자보다 훨씬 더 많다." "이 밀항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생리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은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외래 생물들이 소화계의 정상적 발달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실제로 우리의 내장과 장내 미생물은 함께 진화한 것으로 보이며, 그 결과 세균 공생자들은 일부 내장 세포 속 '우리의' 유전자를 발현시키고, 내장 발달을 돕는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미생물들은 우리의 DNA를 메틸화하거나 히스톤을 수정하지 않더라도, 넓은 의미에서 '후성유전적'이라고 간주해야 마땅하다."(301-2)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컷 쥐(즉 높은 LG[licking/grooming]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핥기와 털 고르기를 많이 받은 쥐들의 뇌 영역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만드는 DNA에 메틸화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핥기와 털 고르기는 암컷 새끼 쥐들에게 뇌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 수를 증가시키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증가한 수용체는 이 새끼 쥐들이 어미 쥐가 되었을 때 '자기 새끼'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게 유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LG 표현형은 다음 세대로 효과적으로 전달됐다."(308-9)


4부 숨은 의미 찾기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이는 방식에는 '다른' 형태의 결정론들을 부추기는 마뜩찮은 방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행동 후성유전학과 관련해 강한 설득력을 발휘한 발견 가운데 몇 가지가 생애 초기 경험의 장기적 영향에 관한 연구에서 나왔다는 점 때문에, 아기가 초기에 한 경험이 반드시 그들의 특징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암시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미래의 고통을 예방하는 '접종'이라는 주장은 대체로 경계해야 한다. 영양이 풍부한 섭식과 질 좋은 환경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사람의 발달은 결정론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성숙한 상태에서 우리가 지니는 특징들을 유전이 결정하는 게 아니듯 후성유전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후성'유전적 결정론, 다시 말해 한 유기체의 '후성'유전적 상태가 반드시 어느 특정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또 하나의 결정론이며, 유전자 결정론보다 아주 조금 덜하기는 하지만 위험한 생각이기는 마찬가지다."(362)


"오늘날 후성유전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연구 대상은 아마 암일 것이다. 이는 현재 과학자들이 암세포의 DNA가 일반적으로 정상 세포의 DNA에 비해 메틸화가 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생쥐를 이용한 여러 연구에서 비정상적으로 낮은 DNA 메틸화 정도가 종양을 일으키는 일과 과련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앤드루 파인버그에 따르면 후속 연구들은 〈줄기세포의 후성유전 상태 이상이〉 암의 원인을 설명하는 〈통합적 공통 주제〉이며, 유전체의 메틸화 변화는 〈암 초기의 모든 암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암이 DAN '저'메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직관과 반대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메틸화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DNA 분절이 메틸화되는가이다. 암과 관련해 말하자면, 우리 세포 속에는 과다 발현될 경우 통제할 수 없는 세포 증식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 이런 유전자들이 탈메틸화되는 것은 악성종양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377)


# 행동 후성유전학의 핵심 교훈

1. DNA 혼자 형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생물학적, 물리적, 문화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다).

2.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수정되어야 한다.

3. 후성유전 상태는 역동적이다(생물학적/정서적 경험 및 환경 요인과 상호작용한다).

4. 유전자에 관한 은유는 부정확하다(가령, 유전체는 청사진/조리법/컴퓨터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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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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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탄화수소 시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의 90%를 생산해야 했지만, 이것은 곧 미국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출국으로 남아 있을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유정 상당수를 폐쇄하는 동안, 이 지역의 잠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될 석유가 향후 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전후 페르시아 만에서 값싼 석유가 유입되면 1930년대 초 텍사스 동부의 석유 분출만큼이나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내 석유의 고갈을 우려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쟁 전의 규제를 타파하고, 특히 사우디를 위시한 중동에서 최대한 생산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식은 공급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유럽은 미국을 포함한 서반구가 아니라 중동에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미국의 매장량은 미국 자체의 수요와 안보용으로 보전된다는 의미다."(22-3, 32)


# 미국(&영국) 석유회사들의 행보

1. 소칼, 텍사코, 뉴저지, 소코니로 구성된 100% 미국계(영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븐 사우드 국왕의 의사도 반영된) 회사들로 아람코 합병 완결(1948. 12) → 적선협정 폐지

2. 걸프사(쿠웨이트 석유회사의 지분 절반 소유)는 유럽을 위시한 동반구 지역의 판매망 확보를 위해 로열더치 쉘(사실상 미국의 석유 이권 파트너가 된)과 장기 구매 협정 체결

3. 이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석유 이권 확보를 함께 추진하는 소련에 맞서 미국과 영국 정부가 협력. 앵글로-이란과 뉴저지, 소코니 간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1947. 9)


"중동의 석유는 전후 황폐화된 유럽을 복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가격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가가 1948년 전후 최고치를 기록하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중동산 석유는 미국의 걸프 만 표준가격 이하로 인하되었다. 이는 20년 전 아크나캐리 성의 가격 회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고, 전쟁 전 '현상유지' 체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비록 그때까지는 유럽 경제가 석탄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에너지 수요 증가에 따라 석유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중동의 석유 생산량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이다. 1946년에는 유럽에 공급된 석유의 77%가 서반구에서 수입되었으나, 1951년에는 80%가 중동에서 수입될 것으로 에상되었다. 유럽의 수요와 중동 석유의 개발이 시기적으로 일치함으로써 강력하고도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졌다."(66-70)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걸쳐 석유회사의 산유국 정부는 결제 조건을 둘러싸고 수차례 교섭했고 그 결과 전후 석유 질서가 만들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자원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 즉 '렌트Rent'(지대)를 배분하는 데 있었다. 교섭의 성격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 동기는 동일했다. 석유회사와 석유회사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비국 정부들만 이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산유국에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산유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배권도 똑같은 문제였다." "1950년 12월 30일, 아람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새로운 협정에 조인했다. 핵심은 베네수엘라와 같은 '이익반분(50:50)'의 원칙이었다. 이후 걸프 석유는 쿠웨이트 석유의 동업자인 앵글로-이란의 회장 프레이저 경의 완강한 반대를 무마하고, 쿠웨이트에도 이익의 절반을 주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에서도 1952년 이익 반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란에서는 사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았다."(80, 106-7)


"1940년대 말, 이란은 경제 파탄으로 심한 빈곤과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대상은 외국인들, 특히 영국인에 대한 증오였다. 영국은 이란의 국토를 지배·착취하는 초자연적인 악마로 규정되었다. 이란 정치가들은 파벌에 관계없이 정적이나 반대자들을 비난할 때 영국의 첩자라고 매도했다.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은 현대화 된 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였다." "1951년 4월 28일, 의회는 국유화법을 시행하라는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앵글로-이란의 최고 반대 세력인 모사데그를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했다. 국유화 법안은 국왕의 서명을 받아 5월 1일부로 효력이 발생했다." "1951년 9월 25일, 모사데그는 아바단 섬에 남아 있는 영국인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아바단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년간 대영제국의 기반 쇠퇴 중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동 지역 최초의 석유 이권이 최초로 무효화되었다."(112, 118-9, 131-2)


"1952년 말, 영국 정부는 이란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공동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미국에 타진했다. 방법은 쿠데타였다." "1953년 8월 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모사데그는 체포되었다." "이란에서 운영될 컨소시엄 설립은 의미가 큰 전환점이었다. 외국인이 소유한 석유 이권이 교섭과 상호 합의에 의해 산유국으로 되돌려진 최초의 사례였다. 멕시코의 경우가 일방적인 국유화 조치였다면, 이란에서는 관게자 모두가 석유자원은 원칙적으로 이란 소유라는 것을 인정했다. 새로운 계약은 이란 국영 석유회사가 이란 내의 석유자원과 시설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컨소시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이란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생산된 석유를 구입하는 일은 계약대로 컨소시엄이 맡았다." "한편 국왕은 석유 수입이 늘어나자 확고부동한 이란 국왕으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세계를 향한 야심을 가진 독선적인 군주로 변신했다."(138, 142, 152-5)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답은 석유다. 1956년 7월, 나세르의 운하 점거로, 석유 부족 사태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세브레에서 합의한 대로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고, 10월 30일 런던과 파리는 최후통첩을 내리고 운하 지대의 점거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소련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영국 공군이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황급히 시나이 반도를 거쳐 철수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작전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선거 캠페인 때문에 남부 지역을 순회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했다. 이든이 그를 배신하고, 동맹국들은 그를 교묘하게 속인 것이다. 그들의 경솔한 행동이 소련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포함한 광범한 국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이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로 들끓고 있는 중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166, 174-5)


"나세르가 운하를 봉쇄할 경우 발생할 석유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 계획을 수립하던 수개월 동안, 영국은 미국이 석유를 공급해줌으로써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긴급 석유 지원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석유는 워싱턴이 서유럽 동맹국을 단죄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수에즈 위기가 영국의 쇠퇴를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영국은 더 이상 열강이 아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 따른 상처와 국내의 분열이 재정을 악화시켰고 신뢰감과 정치적 의지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든은 수에즈 위기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믿었다. 수년 후 「런던 타임스」는 앤서니 이든에 대해 '그는 영국이 강대국이라고 믿은 마지막 수상이자, 영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님이 드러나는 위기에 대처한 최초의 수상이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묘비명인 동시에 대영제국의 묘비명이기도 했다."(175-6, 184-5)


"석유는 떠오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최고 관심사였다. 1950년대 초반 이래 중동에서는 '아랍 석유 전문가'의 모임이나 접촉이 수없이 시도되었다. 초창기 주요 의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제재였다.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석유 봉쇄부터 블랙리스트 공개, 협박 및 이권 몰수의 위협에 의한 국제 기업들에 대한 제재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제의 범위는 넓어졌다. 이집트는 석유 수출국이 아니었지만 나세르는 그 모임을 석유 정책 수립과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활용했다. 그는 주권 문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을 무기로 여론을 결집했고 석유와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1957년 봄, 이집트에서 열린 아랍석유전문가회의에서 대표들은 국내 정제 능력의 증강과 지중해로 가는 아랍 유조선단 및 파이프라인의 설치를 제안했다. 또한 중동 석유 생산을 관리해 수입을 증가시키고, 해외 석유 기업들에 맞설 수 있는 아랍 '국제기구' 혹은 '국제 컨소시엄'의 창설을 논의했다."(205)


"소련이 가격 인하 및 구상 거래 등으로 서방에 대한 석유 판매에 박차를 가하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한 결과, 석유의 과잉 공급 사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련은 농산품과 산업용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달러와 다른 서방국의 화폐가 필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석유 수출품은 그들이 서방에 판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경제적 조건만으로 소련의 석유 가격을 쉽게 제한할 수 없었다." "1959년처럼 기업들이 전체 공급 과잉과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격 인하라는 경쟁적 대응이었다. 그런데 무슨 가격이냐가 문제였다. 만약 시장가격만 인하한다면 석유업체들이 전체 손실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시가격을 다시 인하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힘들었다. 처음 공시가격을 인하했던 1959년 2월, 아랍석유회의는 분기탱천했고 이에 따라 신사협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대응한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몰랐다."(221-2)


"1960년 8월 9일, 뉴저지는 수출국에 통고도 없이 중동산 원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14센트까지, 약 7%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산유국의 반응은 '유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 갑자기 자신들의 수입을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재정 상태와 국가 위신을 상당히 손상시키는 결정을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버렸다." "분노와 격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는 정치적 기회를 포착했다. 압둘 카림 카셈 혁명정부는 이라크가 중동 내에서 나세르의 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공시가격 인하는 나세르가 여러 아랍위원회 및 아랍리그를 지배함으로써 석유 정책을 좌지우지해온 영향력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라크는 이번 사태를 비아랍 국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석유 수출국만의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는 촉매제로 이용하고자 했다." "9월 14일, 마침내 국제 석유회사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바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설립되었다."(225-7)


"석유가 석탄을 압도한 이유 중 하나는 환경 문제였다. 런던은 석탄에 의한 환경오염, 특히 가정의 개방식 연소에 의해 발생한 '살인적 안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짙은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 없었던 운전자들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잔디밭으로 차를 몰기도 했다. 안개가 수그러질 때면 런던의 병원들은 급성 호흡기 질환에 걸린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가정 난방용으로 석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연 지역'이 지정되었고, 의회에서는 석유 사용을 고무하는 '청정 대기법'이 입법되었다. 하지만 석유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가격이었다. 석유 가격은 계속 하락했으나 석탄 가격은 꿈쩍하지 않았다. 1958년 후로는 산업용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석탄보다 저렴했다. 각 가정은 석유에서 전력으로, 그 후에는 천연가스로 연료를 바꾸었다. 석탄산업은 '생활의 불'이라는 콘셉트의 대대적 광고 전략으로 대응했지만, 석탄의 불씨는 식어가고 있었다."(260)


"1967년 6월 5일, 제3차 중동 전쟁인 '6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랍 국가들 간에는 석유를 무기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10년 이상이나 진행되어왔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6월 6일, 아랍국의 석유장관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왔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리비아 및 알제리가 미국, 영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서독에 대해서도 수출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엄청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6일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67년 7월, '아랍의 석유 무기화'와 '적대국가에 대한 석유 공급'이 원활해졌다.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쪽은 금수조치를 내린 국가들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포기했지만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다." "석유 부족 위험은 다소 쉽게 해결되었지만, 미 국무부는 위기관리를 주제로 한 보고서에서 공급원 다양화와 수송 능력 확충을 지적했다."(294, 297-8)


5장 주도권 쟁탈전


"1960년대 영국은 경제 불황에 빠졌다. 전후 영국의 최대 과제는 '대영제국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였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의 위상을 지켜주었던 것은 6,000여 명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 부대였다. 이를 유지하는 데는 연간 1,200만 파운드가 들었다. 영국의 석유회사들이 그 지역에 해놓은 엄청난 투자를 생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의 보험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힐리를 움직인 것은 경제적 필요성만이 아니었다. 중동의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중동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영국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설립을 지원했는데, 이는 작은 나라들 몇 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그들에게 방위수단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업이 끝나자, 영국은 1971년 완전히 짐을 싸서 페르시아 만을 떠났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르시아 만의 가장 근본적 변화이자, 1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안보 체계의 종식을 의미했다."(309-10)


"1969년 9월 1일,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후 마침내 석유산업에 손을 뻗쳤다." "리비아는 리비아 외에는 대안이 없는 옥시덴탈을 공략했다. 그들은 그 회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옥시덴탈은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긴 협의 끝에 리비아인들은 로열티와 세금 20% 증액이란 성과를 얻어냈고, 옥시덴탈은 계속 리비아에 남아 사업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저하던 다른 회사들도 9월 말까지는 모두 승복했다. 그러나 공시가격의 30% 인상과 리비아가 챙기는 이윤이 50%에서 55%로 증액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리비아의 계약은 산유국 정부와 석유회사 사이의 역학 관계를 결정적으로 역전시켜버렸다. 석유 수출국에는 리비아가 거둔 승리가 아주 고무적이었다. 석유의 실질적 가격 하락을 순식간에 반전시켰으며, 동시에 석유 수출국들이 주권과 주도권 장악을 위한 행동을 다시 추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331-4)


# 산유국과 석유회사 간의 새로운 협의

1. 테헤란 협의(1971. 2. 14) : 산유국 정부의 최소 몫을 55%로 정하고, 석유 1배럴의 가격을 35센트 인상한다.

2. 트리폴리 협의(1971. 4. 2) : 석유 1배럴의 가격을 90센트 인상한다.


"곧이어 산유국들의 '소유권 참여' 문제가 불거졌다. 1972년 10월,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석유회사들 간에 '소유권 참여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현재 25%의 참여 비율에서 1983년까지 51%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소유권 참여를 통해서든 전면적 국유화에 의해서든, 석유회사를 강력하게 통제하게 되면서 수출국들은 가격보다 더 큰 힘을 얻었다. 회사들은 새로운 공동전선을 구축할 능력이 없었다. 각 회사의 모국 정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기보다 협조를 구하고, 그 나라들이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 동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적 반역 세력의 제압을 지원해달라는 오만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인 채 지역 경찰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비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상승하는 석유 가격과 페르시아 만의 새로운 안보 체계라는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42-4)


"1973년 10월 6일은 유태교 최고의 신성한 축제일인 속죄일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킬 무렵, 이집트군 제트기 222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공격 목표는 수에즈 운하 동안東岸과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사령부와 군사기지였다. 수분 후 국경 전역에 걸쳐 3,000문이 넘는 야포가 불을 뿜었다. 같은 시각, 시리아군 전투기가 이스라엘 북부 국경 지대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대포 700문이 포문을 열어 포탄을 퍼부었다. 제4차 중동전쟁, 소위 '10월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전쟁은 중동 전쟁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격전이었고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양 진영의 무기는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공급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중동만의 특성인 '석유'였다. 석유는 생산 삭감과 금소조치라는 형태로 무기화되었다." "당시 석유는 세계 산업 경제의 활력소가 되었고, 채굴되는 즉시 남김없이 송출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약간의 추가적인 수요 압박만 있어도 세계적인 위기가 닥칠 상황이었다."(348-9)


"10월 16일, 걸프 지역 국가(아랍 국가 5개와 이란)의 대표들은 쿠웨이트 시에서 만나, 비엔나의 야마니 숙소에서 끝내지 못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들은 석유회사의 답변을 더 이상 기다릴 태세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치를 취했다. 공식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된 5.11달러로 높여, 광분하고 있는 현물시장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하나는 가격 인상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수출국이 석유회사와 협상하는 것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이제 수출국이 석유 가격을 결정했다. 석유회사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수출국은 기껏해야 거부권을 가지던 체제에서 수출국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지니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다. 가격 결정 후, 야마니는 쿠웨이트 시에 있던 다른 대표단의 한 사람에게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품에 대한 주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378)


"10월 19일, 닉슨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발표는 사전에 몇몇 아랍 국가들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별다른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어느 쪽도 우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없으므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리비아는 미국으로 가는 모든 석유 공급선을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 원조에 대한 보복으로 점진적 삭감안을 철회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전면적 공급 중단을 의미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미 했거나 하고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석유가 하나의 무기로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길거리의 폭도들에 의해 통치 기반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원이 공개됨으로써, 강경파 아랍 국가들이 미국에 행동을 취할 충분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383-4)


"1973년 12월 말, 테헤란에 모인 석유장관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이란 국왕의 (가격 인상) 입장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가격은 11.65달러가 될 것이고, 이 가격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식가격은 1970년 1.85달러에서 1971년 2.18달러, 1973년 중순에 2.90달러, 1973년 10월에 5.12달러, 그리고 이제 11.65달러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친 인상으로 가격은 4배가 되었다."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가 촉발한 석유 가격의 급등과, 석유 가격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산유국들의 인식은 세계 경제의 구석구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석유 수출국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1972년에 230억 달러이던 것이 1977년에는 1,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서방 공업국들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들은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무기 판매에 적극 공세를 펼쳤다."(410, 425)


"1970년대 초, 닉슨과 키신저는 '백지수표' 정책을 통해 이란 국왕이 원하는 대로 미국산 무기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핵무기가 아니라면 최신형 무기도 구매 대상에 포함되었다.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한 이후, 그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지주支柱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주에 해당했다. 미국 관리의 말대로라면, 두 국가 중 이란이 최대 지주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의 절반을 이란이 차지했다."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는 하나의 통일된 기조가 있었다. 이란은 중동에서 주요한 안보 역할을 하는 동맹국이므로 국왕의 명예와 영향력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닉스, 포드, 키신저는 전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국왕을 편애했다. 1973년 국왕이 미국에는 석유 금수를 하지 않았고, 이란이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도 했다."(441-2)


"한편 열광과 도취, 오일 달러의 홍수, 석유 붐은 이란의 경제와 사회 체계를 파멸시키고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명백했다. 혼돈, 낭비, 인플레이션, 타락, 정치적·사회적 긴장의 심화, 그리고 이들로 인한 반체제 분위기의 확산이었다." "1976년 말, 국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를 직시했다. 이제 그는 돈이 구제책이 아니라 그의 제국이 안고 있는 많은 병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격 온건 노선을 취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OPEC은 소폭의 가격 인상을 두 차례 단행했다. 1973년 10.84달러에서 1975년 11.46달러로 올랐고, 1977년 말 12.7달러로 다시 올랐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므로 실질 가격은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978년의 석유 가격은 수출 금지 직후인 1974년에 비해 10% 하락했다. 석유는 더 이상 가격이 가격이 낮아질 수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만큼 치솟지도 않았다."(443-5)


"처음에 석유회사들은 공급 계약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쿠웨이트에 있던 그들의 과거 이권과 어느 정도 연계되었지만, 수출국과 수입국 정부의 다각화 정책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고리는 약화되었다." "석유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지하 석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이권 소유자'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발견한 석유를 생산 출하하는 과정 중 일부의 권리를 받는 '생산 분배' 계약을 통해 단순한 '계약자'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계약은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와 칼텍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석유 탐광, 생산, 판매에 대한 '기술 및 인력 제공'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를 반영해 관련 기술용어들은 영어에서 산유국 언어로 바뀌었다. 산유국의 주권은 각국의 국내 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인정되었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물은 사라졌고, 석유회사들은 단순히 고용된 인부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생산 분배 계약이 세계 도처에서 일반화되었다."(454-5)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OPEC은 1970년대에도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했다. 1973년에는 자유세계 석유 생산의 65%를 점유했고, 1978년에는 62%를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지만 OPEC의 결속력이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 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물가 상승 불안, 엄청나게 확대된 통화량, 투자가들의 열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적 석유 확보 사냥에 열광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 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던 곳들이다."(476-7)


"1970년대 중반, 이란은 석유 수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일 달러는 터무니없는 현대화 계획에 남용되면서 낭비와 타락을 조성했고 경제 혼란과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불러왔다. 지방에서 도시로 인구 유입이 계속되어 농업 생산은 저하되고 식료품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으로 국민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테헤란에 거주하는 중간 관리나 공무원은 월급의 70%를 주택 임차료로 지출해야 했다. 이란의 주요 기간시설들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개발이 지연된 철도는 마비 상태에 빠졌고, 도로는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국가 송전망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테헤란 일부와 몇 개 도시는 정기적으로 단전되기도 했다. 단전은 산업 생산과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국민들의 분노와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이란 국민들은 국왕 체제와 성급한 현대화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힘을 얻은 주인공은 호메이니였다."(490)


# 1979년 1월 6일, 국왕의 해외 망명으로 팔레비 왕조 마감


"새로운 석유 파동의 1단계는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한 1978년 12월 말 시작되어 1979년 가을에 끝났다. 이란의 생산 감소분은 다른 지역의 증산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세계 석유 수요를 일일 5,000만 배럴로 계산해도 부족분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 4~5%의 부족분이 어떻게 150%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을까?"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였다. 의심, 불안, 혼란, 공포, 비관 등의 감정이 혼란기의 행동을 지배했다. 사태가 완료된 후, 과거의 수치들을 정리해 수급 균형을 분석해보니 그러한 감정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백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세계 석유 체계 전체가 붕괴된 것처럼 인식되었다. 실제로 제어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열정적 민족주의와 결부된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란 혁명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 하나가 서구와 현대 세계에 대한 거부였음은 명백했다."(506-9)


# 2단계는 이란의 미대사관 점령 사태와 인질극(1979. 11. 4)이 야기한 석유 공급망 혼란 사태, 3단계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1) 발발에 따른 석유 수출 급감이다.


"이제 석유시장에서는 두 가지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생산자들끼리 가격을 서로 올리는 '추월'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요자들 간에 공급 확보를 위한 '쟁탈' 경쟁이었다. 공급을 중단당한 회사들, 즉 석유 구매자, 정제업자, 정부, 새로운 부류의 무역상, 메이저 회사들은 수출국들의 환심을 사려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해롭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도 새로운 공급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경쟁 심화로 가격만 상승할 뿐이었다." "서구 제국은 수요를 절감해 가격 상승을 막으려고 했지만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본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저가의 석유 확보였고, 다른 하나는 가격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급 확보였다. 한때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가지 목표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각국 정부는 저가격 확보를 정책 방향으로 삼다가, 국내 수요가 증가하면 안정 공급으로 선회했다."(514-7)


"드디어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다. OPEC은 1977년 말까지 자유세계 석유의 3분의 2 이상을 생산해왔다. 1982년 처음으로 비OPEC 국가가 OPEC의 산유량을 따라잡았다. 실제로 일일 100만 배럴 이상 앞섰고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했다. 심지어는 소련까지 유가 상승을 이용해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탈피하기 위해 서방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계속 증가시켰다. 새로 개발된 석유, 특히 북해산 석유가 현물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체 석유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OPEC은 그들의 가격 구조 붕괴와 그에 따르는 더 큰 경제적·정치적 손실, 즉 권력과 영향력의 감소를 우려해서 가격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가격을 지키려면 생산 수준을 감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요는 회복되지 않았고, 비OPEC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고, 현물시장 가격은 또다시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생산량 쿼터에도 불구하고 OPEC은 여전히 과잉 생산 상태였으며, 게다가 가격은 높았다."(562-4)


"1985년 독일의 본에서 열린 경제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각국 정상의 최고 관심사는 선진국들 간의 통상에서 문제가 되는 보호무역주의, 달러화의 가치, 일본의 경제 도전에 대한 대응 등이었다. 한마디로 '서-서西-西' 문제였다. 석유와 에너지 문제, 남북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60년대처럼 석유와 에너지는 더 이상 세계 경제 성장의 제약 요인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의 석유 공급은 일일 1,000만 배럴 초과 상태로, 이는 자유세계 총소비의 2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게다가 미국, 독일, 일본은 상당한 양의 전략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안정 공급분'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정상회담에서 석유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지도자들은 에너지 문제를 정상회담의 주요 주제에 포함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603-4)


"1986년 12월, 제네바에서 회합을 가진 OPEC 회원국들은 마침내 '진땀' 나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석유 수출국들은 몇 개 유종의 복합 가격에 근거해 설정된 '기준 가격' 18달러에 동의했다." "비록 시장으로부터 반복적이면서 때때로 강도 높은 압력이 있었지만, 상당한 조정을 통해 합의된 내용은 1987년부터 89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졌다. OPEC의 가격은 정확하게 18달러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15달러에서 18달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가격은 불안정해서 때로는 다시 급락할 듯 보이기도 했으며, 몇 번에 걸쳐 쿼터량 준수가 파기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기로에 직면할 때마다 산유국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OPEC 회원국들은 '진땀'의 고통을 잊지 않았고,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낮은 수준으로 구성된 새로운 석유 가격은 4년 전 시작된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동시에 물가 수준을 낮춰주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오랜 위기는 확실히 종식되었다."(637-8)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경제 제재 조치로 인해 세계 석유시장에서 400만 배럴의 원유 부족 사태가 발생했는데, 1873년과 1879년 석유 위기 시에 발생했던 부족분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공급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분쟁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었다. 후세인이 사우디의 석유 공급 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던 1990년 9월 말, 석유의 선물거래 가격은 배럴당 40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위기 발생 이전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는 달리, 미국은 석유시장을 규제하지 않았고 공급 상의 왜곡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유국에 대해 증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 12월경에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생산 감소분만큼 증산이 이루어져 석유시장의 수급은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경기 침체로 석유 소비가 감소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654-5)


에필로그


"1990년대를 통해 석유는 대형 전략적 이슈로서의 의미가 약화되었다. 공급은 넘쳐났고, 가격은 떨어졌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고,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서서히 부상했다. 그러나 1997~98년, 통화의 흐름과 부동산 투기로 확대된 아시아 경제는 과열로 이어지더니 태국에서 발화한 경제 위기로 폭발했다. 결국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치명적인 결과를 전염시켰다." "국내총생산의 붕괴는 석유 수요의 급락으로 이어졌다. 석유 저장 탱크는 석유를 추가로 더 보관할 곳이 없을 때까지 가득 채워졌다. 1986년처럼 다시 한 번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달러를 향해 추락했고 일부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곤두박질쳤다. 석유 수출국들은 1986년과 같은 혼란 상태에 다시 한 번 내던져졌다. 석유 가격의 붕괴는 독립국이 된 지 겨우 7년째 되는 러시아를 채무 불이행과 파산 상태로 이끌었다. 또한 외국과의 관계에서 고통스러운 재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몰아갔다."(669-70)


"신경제와 인터넷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석유를 다시 중요하게 만들었다. 2003년에서 2007년 사이의 기간은 매우 의미 깊은데, 한 세대에서 최대의 경제 성장이 목격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인도, 중동 및 기타 신흥국의 높은 경제 성장과 괄목할 만한 소득 증가는 산업에 동력을 제공했고, 전기를 생산하고, 자동차와 트럭 등 급격하게 증가하는 운송수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급격한 석유 수요의 증가는 소비국들뿐 아니라 세계 석유산업 자체에도 놀라움을 선사했다. 앞서 수십 년간 석유 수요가 더디게 증가하자 석유산업은 새로운 석유와 가스 공급 시설에 대한 투자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추었다. 1990년대 후반과 21세기 초반 수 년 동안, 월스트리트는 석유산업에 대해 '제어되어야' 하고, 투자에는 매우 조심스럽거나 자제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석유산업은 늘어난 수요에 맞추어 새로운 생산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674-5)


"효율성 문제는 석유와 기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중요하고도 공통적인 정책 목표다. 20세기를 이끈 산업사회는 현재 1970년대보다 두 배나 높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고 있다. 미래 효율성 증대의 잠재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성장, 소득 증가, 인구 증가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많은 석유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사반세기 동안에는 40% 혹은 그 이상의 석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술혁신이 그 숫자를 감소시킬 수 있는데, 그 답은 연구 개발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책과 기술 거래 시장에 달려 있다(기술 혁신이 에너지 사용량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인하여 2040년에는 2015년 대비 1백만 배 이상의 정보량을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이 높거나 낮거나 중간 어디쯤에 있거나에 관계없이, 석유는 앞으로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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