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1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2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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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벤담의 젊은 시절(1776~1789)


서문


"프랑스 혁명의 백 년은 바다 건너편에서 산업혁명의 백 년에 대응하며, 사법에 주목하면서 영혼을 강조했던 인권의 철학에는 이익의 동질성을 강조한 공리주의 철학이 대응했다. 모든 개인의 이익은 동질적이다─각 개인은 모두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고의 판관이다─그러므로 전통적 제도들이 개인들 사이에 세워놓은 인위적 장벽과, 개인들을 서로로부터 그리고 자신들로부터 보호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가정에 기초한 사회적 제약들을 모두 부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해방철학이다. 장-자크 루소의 감성적 철학과는 영감이나 원리에서 아주 다르지만, 응용에서는 여러 면에서 흡사한 해방의 철학이다. 대륙에서 인권의 철학은 결국 1848년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같은 시기에 영국에서는 이익의 동질성을 주장하는 철학이 맨체스터학파에 의한 '자유거래주의'의 승리를 낳았다." "따라서 우리의 연구는 철학의 역사에 들어갈 하나의 장(章)인 동시에 역사의 철학에 들어갈 하나의 장이기도 하다."(5-6)


# 자유거래주의(doctrine of free trade) : 국제 거래만이 아니라 국내 거래도 포함되며, 교환, 유통, 직업선택 등등 포괄적인 경제활동을 가리킨다.


서언


"1789년 초에 이르면, 사법적 논제들에 관한 한, 공리주의 신조는 모든 세목에서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 신조는 시대를 앞선 것이었다. 공리주의 정치경제학도, 나중에 맬서스와 리카도가 애덤 스미스의 신조에 첨가한 내용을 제외하면, 가치이론이라든지 상업과 산업의 자유주의 같은 핵심 주제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에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던 애덤 스미스의 발상들을 벤담은 채택했다. 『국부론』은 미국 혁명이 일어나고 중상주의가 붕괴하던 시점(1776)에 나왔다. 그만큼 당대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표현하는 책이었다. 아울러, 공리주의자들은 정치에 관해서 회의주의적이면서 권위주의적이었다. 편견을 타파하고 개혁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면 정부가 무슨 수단을 쓰든 개의치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혁명과 소요의 와중에 미래의 급진주의 강령이 이미 형체를 갖춰나가고 있던 시기였다. 정치적 주제에서는 시대가 공리주의 신조를 앞질렀다."(9-10)


1장 / 기원과 원리


"법칙은 오직 일반성을 갖출 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관계가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관계가 항상적이라는 말이다. 외부의 자연에 대해 내가 뭔가 유용한 행동을 하려면, 현상들 사이의 관계를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고, 그 관계가 항상적인 것으로 족하다. 다시 말해, 첫 번째 현상을 일으키면 내가 목표로 삼은 두 번째 현상이 초래되리라고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족한 것이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에 관한 뉴턴의 사고방식이다." "뉴턴의 물리학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실험적 증거에 입각하면서 동시에 엄밀한 과학의 성격을 갖춘 정신의 과학과 사회의 과학이 구성된 다음이라면, 그러한 새로운 학문을 토대로 도덕이론과 법률이론도 과학적인 형태로 정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공리주의 또는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것은 일종의 뉴턴주의라고, 달리 말하자면, 정치와 도덕에 뉴턴주의를 적용하려는 시도라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12-4)


"흄의 방법 안에는 이중성이 내재한다. 어떤 측면을 보면, 그의 방법은 합리주의적이다. 도덕의 영역에서 만유인력이라는 물리적 원리에 상당하는 법칙과 원인을 확정하려 한다. 그는 도덕과학의 창시자로서, 이 도덕과학은 후일 하나의 학파가 만들어져서 연역적이며 체계적인 형태로 조직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연상주의─흄에게 연상주의는 추론을 이어가다 보니 추론 자체에 반기를 들게 되는 추론, 곧 하나의 비합리주의였다─라는 교조는 그에게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그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적 신조도 그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는 우주에서 필연성이라는 관념을 추방할 길을 찾아 나섰고, 새로운 과학을 창시하기는커녕 기성의 과학이 취하고 있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겉모습을 파괴하러 온 회의주의자였다고 일반적으로 간주된다. 궁극적으로 보면, 흄은 오히려 행동하는 권능을 마비시킨다는 이유로 성찰을 문죄한다."(25)


# 연상주의(associationisme) : 하나의 정신 상태가 거기서 이어지는 다른 정신 상태와 결합하는 과정으로 정신작용을 이해하는 발상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과학 자체를 흄이 이해했던 의미가 후일 공리주의 도덕학자들이 이해했던 의미와 달랐다. 그는 의문의 여지없이 뉴턴주의의 경로를 따라 진행한다. 개인적 장점이라는 관념을 분석하는 데 그는 〈실험적 방법〉을 응용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천명한다. 선과 악의 구분과 여타 뚜렷한 심리적 구분 사이에서, 두 구분이 같은 비례로 같은 원인의 영향 아래 함께 변화하고 있다는 공존 관계를 만약 확정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두 구분이 동일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현상들이 서로 달라 보이거나 심지어 모순적으로 보이더라도, 일반법칙은 그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 라인강과 론강은 같은 산에서 발원하지만, 똑같은 인력의 법칙에 따라 상반되는 방향으로 흐른다. 도덕철학에서는 공리의 원리가 만유인력에 해당한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행위가 사회의 이익에 부응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에 따라 그 행위가 도덕적으로 상찬할 만하다고 말한다."(27-8)


"그러나 순수하게 실험적인 방법을 채택하겠다고 천명했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흄은 명령을 발하는 것은 도덕철학자의 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찾아다닌다. 대다수 도덕학자들이 같은 경로를 따라왔으면서도 느닷없이, '있어야 할 당위'를 규정하러 나서는 것은 이상한 순환논법에 빠진 탓이다. 만일 여기에 순환논법이 끼어든 것이라면, 반론은 벤담에게도 해당한다. 왜냐하면 공리의 원리 안에서 하나의 과학적 법칙과 동시에 하나의 도덕적 명령도 발견했다는 것이 정확히 벤담의 중심개념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존재와 당위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명제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본질적으로 비활동적이다. 이성의 유일한 목적은 관념들을 비교하는 데 있기 때문에, 행위에서 선과 악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도덕적 판단이란 관념이 아니라 인상에, 하나의 〈느낌〉에, 기반을 둔다. 도덕학자의 과제는 이 느낌을 분석하고, 도덕적 느낌이 과연 무엇인지 규명하는 데 있다."(28)


# 공리의 원리에서 이기심의 문제

1. 맨더빌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나름대로 화합을 이루면서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한다(그렇다면 왜 이기심을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라 명명하는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2. 하틀리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은 점진적이며 누진적이다. 즉 이기적인 것과 공감적인 것의 (무수한) 결합은 '마침내' 순수한 쾌락의 상태로 나아간다.

3. 벤담(입법자의 과제) : 다양한 갈래의 이기심들은 저절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인의 이익과 일반 이익을 일치시키려면 인공구조물(훌륭한 헌정구조)이 필요하다.


"엘베시우스는 흄의 선례를 따라 〈도덕학을 여타 모든 과학들처럼 취급하고, 도덕학도 물리학 같은 실험과학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가 도덕학에 부여한 원리는 〈공공의 이익, 다시 말해 최대다수의 이익〉이었고, 그는 정의(正義)를 곧 〈더 많은 수에게 유용한 행위의 실천〉과 같은 것으로 만들었다." "몽테스키외의 물리적 결정론 또는 지리적 결정론 대신에 엘베시우스는 하나의 도덕적 결정론을 제출한다. 인간은 지리적 정황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정황의 산물이다─가장 넓은 의미의 교육의 산물이다. 〈정신의 불평등의 진정한 원인은 도덕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이론의 귀결은 인간 본성의 법칙에 관해 획득한 지식 덕택에 인간에게는 인간을 변혁하거나 개혁할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벤담의 제자 제임스 밀과 고드윈의 제자 로버트 오웬 등, 19세기 초의 교육운동가들이 채택하는 이론이 이것이다─교육을 통해 개인들은 자기네 이익을 일반이익과 어떻게 합치시킬지를 배운다."(47-8)


"입법자는 교사, 도덕을 가르치는 교사다. 오로지 좋은 법을 통해서만 덕스러운 사람들이 형성될 수 있다." "도덕학자의 모든 연구는 상급과 벌칙에 어떤 효용이 있을지, 그리고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을 한데 묶는 데 그것들이 무슨 도움이 되는지를 확정하는 데 있다.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의 연합에서 그는 〈도덕학자들이 스스로 목표로 삼아야 할 주된 과제〉를 봤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욱 예리한 문구로 엘베시우스는 벤담이 멀지 않은 후일 실행하려 시도했던 바로 그 설계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그린다. 〈법의 탁월성은 입법자의 통일된 견해, 그리고 법률들 사이의 상호의존에 좌우된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을 확립하려면, 모든 법을 어떤 단순한 원리로 축약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공중을 위한 공리의 원리, 다시 말해, 하나의 정부 형태 치하에서 살아가는 최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공리의 원리 같은 원리로서, 아직 그 범위와 결실이 완전히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도덕과 입법 전체를 망라하는 원리다.〉"(49-50)


"엘베시우스의 신조는 영국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퍼졌다. 이탈리아의 베카리아는 유명한 저서에서 엘베시우스의 철학을 형법이라는 주제에 체계적으로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범죄와 처벌』은 1764년에 나왔다. 벤담은 엘베시우스의 제자인 만큼 베카리아의 제자이기도 하다. 벤담은 사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적용하는 작업을 베카리아가 갔던 지점 너머로 연장했다. 그는 하나의 보편적 법전을 구상하고 작성하기 시작해서, 하나의 포괄적인 형법전을 일궈냈다." "벤담은 베카리아의 작은 책 도처에 산재한 여러 가지 관찰들을 활용해서 공리주의 철학에 하나의 수학적 엄밀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베카리아의 책에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식이 엘베시우스에서보다 더욱 명시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강도, 지속성, 근접성, 확실성 등, 고통의 무게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관한 베카리아의 분석에서 그는 자신의 도덕계산법을 구성하게 될 첫 번째 요소들을 발견했다."(50-1)


"그리고 공리주의 신조가 이즈음에 영국에서 인기를 누렸던 두 사람의 저자들에 의해 거의 최종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성직자로서, 한 사람은 비국교도였던 프리스틀리고 다른 한 사람은 국교도였던 페일리다. 프리스틀리는 1768년에 출판된 논문, 『정부의 첫 번째 원리, 그리고 정치적·시민적·종교적 자유』에서, 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최상위 기준〉으로서 〈국가의 구성원들, 다시 말해, 다수 구성원의 선과 행복〉을 채택하자고 제안했다." "페일리는 1785년에 나온 『도덕정치철학의 원리』에서 공리의 원리를 도덕과 신학의 문제에 적용한다. 그는 쾌락들이 오직 지속성과 강도에서만 차이가 난다고 보면서, 행복을 쾌락의 합계로 정의한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차감한 나머지로 정의한다. 도덕적 행위는 경향에 의해서 부도덕한 행위와 달라지며, 법의 기준은 공리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후 반세기 동안 페일리는 공리주의 도덕의 공식 대변인으로 남는다."(52-4)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은 엘베시우스에서 거의 단어 하나도 바꾸지 않고 베껴온 명제 하나로 시작한다. 〈자연은 인류를 두 개의 주권적 주인, 즉 고통과 쾌락의 다스림 아래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리키고, 우리가 무엇을 하게 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이 두 주인들이다. 한편에서 옳고 그름의 표준도, 다른 한편에서 원인과 결과의 고리도 이 주인들의 왕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공리의 원리'는 이와 같은 종속 관계를 인지하고, 행복이라고 하는 대구조물을 이성과 법의 손으로 축조하는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종속 관계를 대전제로 삼는다. 공리의 원리라 함은 이익 당사자의 행복을 확장하거나 아니면 축소하는 경향, 같은 뜻을 다른 말로 바꾸면, 그 행복을 증진하거나 반대하는 경향에 따라서 모든 행동을 승인하거나 부정한다는 원리를 뜻한다. 나는 모든 행동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적 개인의 모든 행동만이 아니라, 정부의 모든 조치도 포함된다.〉"(65-6)


# 쾌락과 고통을 계량화하는 기준

1. 강도(intensity)

2. 지속성(duration)

3. 확실성(certainty) 또는 불확실성(uncertainty)

4. 근접성(proximity) 또는 거리(distance)

5. 생산성(fecund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같은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질 확률

6. 순수성(purity) : 쾌락 또는 고통이 그것과 상반되는 종류의 감각으로 이어지지 않을 확률

7. 범위(extent) : 쾌락이 도달하는 사람의 수, 다시 말해 쾌락의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수


2장 / 벤담의 법철학


"벤담은 '단순명령적' 법과 '처벌적' 법을 구분한다. 단순명령적 법은 예컨대, 〈도둑질은 금지한다〉와 같은 형식으로 진술되고, 처벌적 법은 〈도둑질을 한 자는 누구든 교수형에 처한다〉는 형식으로 진술된다. 민법은 여러 권리들의 정의(定義)로 구성된다. 형법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 다시 말해, 범죄의 정의로 구성된다. 사법 기능을 행사하는 주체로 간주되는 국가는 여러 가지 의무들을 창설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행위는 형벌로써 억누른다. 이제, 범죄의 존재 자체는 이익 융합의 원리도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도 해당 사안에서는 자명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범죄가 저질러질 때마다, 공감의 정서보다 반감의 정서가 주도한 것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개인들이 적어도 겉보기에는 이웃의 이익을 해치는 데서 자신의 이익을 봤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에게 제기되는 과제는 사적인 이익이 공적인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할 수 있도록 의무와 형벌을 정의하는 일이다."(85)


"벤담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입법자들 그리고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다시 말해,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을 위해 쓰인 철학이다. 벤담은 루소의 나라 그리고 심지어 베카리아의 나라에서 팽배하던 인간주의 철학과 영구적으로 구별되는 색깔을 영국의 개혁철학에 이미 칠해놓았다.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인간을 쾌락과 고통의 능력을 지닌 동물로 여겼고, 입법자를 어떤 법이어야 인간의 감수성이 복종할지를 아는 현자로 여겼다. 그는 고통을 종식시키기를 희망하지 않았고, 차라리 이익의 인위적 일치를 이룩해내기 위해서 형벌을 가할 권력을 몰수하여 무엇이 유용한지를 알고 있는 입법자의 손아귀에 맡겼다. 최종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쾌락의 합계가 고통의 합계를 능가하도록 만드는 일은 입법자가 독재적으로 그리고 엄밀한 절차에 따라 고통을 개인들에게, 그들의 본능적이거나 감상적인 저항은 무시하면서, 부과함으로써 꼼꼼히 살피도록 입법자의 이성에 맡겨진다."(159-60)


"법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공중은 모르며, 따라서 법이 성문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법률가 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다. 영국에서 법의 압도적인 대부분이 법률가들의 용어로 보통법이라 불리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불문법, 옛날부터 내려오는 법정의 법학 이론들로 구성되는 까닭이 이것이다. 불문법은 〈기억할 수 없도록 아득한 옛날부터 오랫동안 사용됨으로써, 그리고 왕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획득했다〉고 블랙스턴은 썼다." "법률가 집단의 구성원들이 공공이익과 상반되는 자기네끼리의 이익을 찾아내는 지점이 바로 이 모호함 안에서다. 모호함 덕분에 그들은 법에 관한 지식과, 새로운 사건이 등장할 때마다 번번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자의적으로 정의할 권력을 독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시민의 보호자인 법이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인간들의 계급보다는 개별적인 개인 각자에게 우호적이기〉를 원한다면, 법은 성문화되어야 한다."(163-5)


"이 당시 영국에서는 체계화된 성문법전에 대한 요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 전역의 개혁가들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계속해서 인용했던 것은 바로 영국의 사법제도였다. 일반적으로 영국은, 정부의 권위가 아니라 신민의 자유가 무제한이라고 간주되는 나라로 비쳤다. 개인의 행동들은, 그것을 불법이라 선언하는 법이 특정되기 전까지는, 합법으로 간주되는 나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소가 이뤄진 다음에 법은 유죄판결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지연시키고 방해하기 위해 모든 주의를 다 기울이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였다. 영국은 심문이나 고문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거기엔 배심재판제가 있었다. 사법제도가 복잡한 것 자체가 신민의 자유를 위한 안전장치로 보였다." "영국은 왕이 찬탈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고 항상 의심을 받고, 그런 왕의 권력에 맞서 법률이라는 직능이 배심원단의 후원 아래 영국인들의 자유를 지켜줄 옹호자라고 전통적으로 간주되어 오던 나라다."(170-1)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개혁과 박애의 거대한 운동이 벤담을 둘러싸고 형성되고 있었다. 박애주의자들과 법률가들과 입법자들을 모두 몰두하게 만든 것은 형법의 문제, 교도소 체제의 문제였다. 경건주의적인 동시에 실천적이고 사회적이며 〈공리주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대변자들은 〈복음주의 교파〉의 사람들, 〈성자들〉, 일종의 감리교도지만 영국교회 안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혈이 낭자한 사냥의 폐지, 일요일 안식의 엄격한 준수, 노예제 폐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개혁을 요구했다." "그 후, 1784년에 의회가 오스트레일리아로 행정적 추방이라는 편법을 개시했을 때, 벤담은 새로운 체제를 제시하면서 종래의 체제에 맞섰다. 추방이라는 발상과 대조적으로, 그는 스스로 『파놉티콘』이라고 명명한 모범 감옥의 설계도를 그려냈다. 이것은 엘베시우스에서 그가 발견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적용한 결과였다."(176-9)


3장 / 경제이론과 정치이론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 우리는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만났던 〈자연〉이라는 단어를 다시 만난다. 벤담에 따르면, 형벌의 〈자연적〉 척도는 판사에 의해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의 양과 범죄로 분류된 행위에서 결과하는 물리적 고통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애덤 스미스에게, 가치의 〈자연적〉 척도는 그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 경험된 고통의 양, 다른 말로 표현하면, 희생된 쾌락의 양과 그 물건을 획득한 결과로, 이 획득이 노동을 통해 직접 이뤄졌던지 아니면 노동에 교환이 뒤따름으로써 간접적으로 이뤄졌든지 상관없이, 기대되는 쾌락의 양 사이의 비교에서 나온다. 형벌이 효과적이려면 형벌의 악이 범죄의 악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노동이 효과적이려면 보상의 선이 노동의 고통을 보상하고 넘쳐야 한다." "다만 벤담의 사법이론에서 쾌락과 고통의 계산은 입법자와 행정관의 의도적인 작업에 의해 인위적으로 확정된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에서는 동일한 계산이 저절로 이뤄진다."(201-2)


"애덤 스미스는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충족되어야 할 모든 조건들을, 물리적 조건이든지 심리적 조건이든지,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앞장섰다. 첫째, 어떤 시점에서든, 도처로부터, 그리고 무한한 양으로, 대상들이 시장에 나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이 더욱 잘 충족될수록 시장가격은 자연가격 언저리에서 일정한 수준으로 더 잘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언제나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완벽하게 깨우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에게는 경제 현상들의 본질이 이 마지막 조건을 충족시켜준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생산물을 얼마만큼의 양으로 시장에 내놓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인지에 관해 판매자들이 틀리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 결산에서는 개별적인 착오들이 상쇄된다." "완벽하게 이기적인 개인은, 일반적인 규칙으로서, 동시에 완벽하게 합리적이라는 가정이 여기에 들어 있다."(209-10)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동은 생산량대로 소비되지 않은 자본을 생성하고, 자본의 소유자는 '이윤'을 고려하면서 그것을 노동자에게 꿔줄 태세를 갖추게 된다. 시간이 또 흐름에 따라 토지는 모두 점유되고, 그러면 지주가 자기에게 속한 땅을 사용하는 대가로 '지대'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윤도 지대도 노동의 '임금'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윤과 지대가 어떤 상품의 가격에 요소로서 포함된다면, 분업에 상응하지 않게 할당되는 이득이 있다는 뜻이다. 이익의 일치를 낳는 것은 교환에 근거한 분업이기 때문에, 이익의 일치는 더 이상 필연적이지 못하고 균열이 발생할 수도 있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어떤 나라에서는 〈지대와 이윤이 임금을 잡아먹는다〉고 말하며, 자기 용어로 상위 계급과 하위 계급 두 계급 사이에 이익의 필연적인 대립을 정립한다." "그리하여 그에 따르면 자연적 독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인위적 독점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교환의 메커니즘을 왜곡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212-3)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상업과 산업의 자유를 제창한 이론가들의 새로운 관점에서는 나약한 정치권력에도 민사를 내버려두고 레세-페르를 실천하고 있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권력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결함, 지출하고 지출을 방치한다는 심각한 결점이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새로운 신조의 지지자들도 정부에게 자기관리를 촉구했다. 정부가 상업과 산업을 규제하기 위한 간섭을 하지 않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세금 징수 역시 간섭의 한 방식이다. 정부는 가능한 한 적게 다스리고 또 적게 지출하는 것이 적당하다─이 두 조건은 하나로 축약된다.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의 원래 의미가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했었고, 1780년까지도 이 의미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국부론』을 쓸 당시의 애덤 스미스, 그리고 경제개혁에 관해 유명한 연설을 행할 때의 버크는 〈정치경제학〉을 〈정치인 또는 입법자의 과학 분야〉로서, 공공재정을 사려 깊게 관리하는 과학이자 하나의 실천 이론으로 이해했다."(221-2)


"정치경제학은 하나의 '과학'과 함께 하나의 '예술'을 담고 있는데, 과학이 예술에게 아슬아슬하게 복속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벤담은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벤담은 정치경제학을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정의했다: 그것은 〈입법의 예술의 한 분야〉로서, 민족의 부를 이끌어갈 최선의 방향에 관한 지식이자, 〈최대행복이라는 더욱 일반적인 목적이 최대의 부와 최대의 인구를 생성함으로써 촉진되는 한, 최대행복을〉 생성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찾아낼 지식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명제 아래에서 노동자들, 자본가들, 지주들로 구성된 사회 안의 부의 분배를 검토해보면 이익은 자연스럽게 균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벤담은 이 질문을 파고 들어가지 않는다." "제네바의 뒤몽에 따르면, 〈이런저런 지점에서 법이 어떠해야 하는지, 민족의 번영이 가능한 최고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법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이것이 벤담이 제안하려는 목표였다."(227-8)


"1785년 무렵에, 벤담은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 자신의 사법이론을 융합─고리대금업을 옹호하고 식민지 보유에 반대하면서─하는데 성공했다고 봤다. 그 두 이론은 국가의 기능에 대한 정의에서 일치했다. 모를레는 셸번 경에게 이렇게 썼다. 〈자유는 자연적 상태고 제약은 반대로 강박의 상태이므로, 도둑과 살인자들만 계속해서 잡아낸다면, 자유를 돌려줌으로써 모든 것이 제자리를 되찾고 만사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 가졌던 견해를 경구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과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부를 직접 증가시키고 자본을 직접 조성하는 것은 국가의 기능이 아니다. 국가의 기능은 부가 일단 획득된 다음에 부의 소유에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완수해야 할 사법적인 기능이 있지만, 국가의 경제적 기능은 최소한으로 축소되어야 한다. 애덤 스미스의 이론들을 채택함으로써 벤담은 40년 후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구성으로 이어지게 될 이념체계의 형성에 첫걸음을 떼었다."(245)


"프리스틀리가 1768년에 『정부의 제일 원리』에서 채택한 것은 이익의 인위적 일치라는 원리였다. 그가 이 책에서 공리의 원리와 민주주의 이념을 의식적으로 융합했기 때문에, 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을 연구할 때 이 책이 중요하다. 하나의 국가에 상관되는 모든 일의 기준은 〈어떤 국가든 구성원들의, 다시 말해 구성원 다수의, 복리와 행복〉이다. 그러므로 최선의 정부 형태는 〈현재 인류의 행복에 가장 도움이 되고, 미래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다. 따라서 하나의 정부를 세우려고 할 때의 관건은, 흄이 이미 지적한 바 있듯이, 통치자들의 이익과 피치자들의 이익을 일치시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위태로운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이익 일치를 어떻게 확보할까? 〈그런 군주들을 한계 안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경쟁자에게 우호적일지 모를 반란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뿐이다. 다시 말해, 인민에게서 애호를 받는 것이 그들 자신의 이익이 되게끔 만드는 것뿐이다.〉"(267-8)


# 동시에 프리스틀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기능을 선출할 권리를 부여할 수는 없다고 하여, 정치적 자유에 제한을 두었다.


"1776년에 출판한 『정부에 관한 단상』에서 벤담은 블랙스턴이 제시했던 민주주의의 고전적 정의, 즉 〈모두에 의한 정부〉를 고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형태의 정부는 모든 정부에 대한 부정에 해당한다며 반대한다." "민주주의 체제가 자연상태에 가장 가까운 근사치라는 견해를 토머스 페인은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이념을 공리의 원리라는 관점에서, 그 의미는 여러 갈래지만, 해석하려는 이런 시도들은, 일단 당시에는,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시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에 영국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전반적인 근거로 삼았던 것은 계약의 개념, 흄과 벤담이 공리의 개념을 제시하여 대조했던 상대 개념인 바로 그 계약의 개념이었다. 보통선거권 또는 임기 1년의 의회를 요구했던 개혁가들은 그런 개혁에 효용이 있다는 이유보다는,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확립된 역사적 규약의 원래 조항들과 그것이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존중할 만한 하나의 전통과 부합한다는 이유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세웠다."(272-3)


"그러나 원초적 계약의 이론가들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정부의 역사적 기원을 하나의 협약에서 찾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현재의 정부들이 행사하는 권위의 기초도 이 협약에서 찾는다. 만일 우리가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주권자가 신민에게 정의와 보호를 제공하는 정도에 정확히 비례해서 신민의 의무도 부과한다는 조건부 약속이 군주나 정부를 구속하지 않는 한, 어떤 군주나 어떤 정부에도 복종을 바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명제는 일반적인 의견에 상반된다. 정부에 대한 자신의 복종이 하나의 계약에 달려있고, 정부가 그 계약의 조건들을 이행한다는 조건에 연동되어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정부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하나의 원초적 계약 위에 구축하는 이론은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부합하지 않는 하나의 추상적 이론에 불과하다.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277-9)


"홉스의 전통에 충실했던 벤담은, 자기가 보기에는 여전히 만들어진 추상이자 법률적 허구일 뿐이었던 '권리'의 개념 또는 '자연권'의 개념을 위한 자리를, 자신의 사법체계에서는 허용하지 않는 편을 선호했던 것이 명백하다. 의무와 범죄는 실정법이 창조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정부가 설치된 까닭은 사람들이 권리를 가져서가 아니라 아무 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할 수 없는 옛날부터 권리가 있어서 바람직했다고 말하고 싶으면 말해도 되지만, 문제 되는 그 권리가 그때 아직 존재하지 않았음을 바로 그런 주장 자체가 증명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민주주의자들은 보통 원초적 계약과 자연권이라는 관념들을 자기네 요구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조가 공리주의 신조의 창시자들에게 안겨줬을 역겨움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다. 처음에 미국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음에는 프랑스를 장악한 인권 이론은, 공리의 원리 위에 입지를 세우고자 했던 버크와 벤담으로부터 완강한 반대를 겪어야 했다."(288-91)


"벤담이 보기에, 하나의 〈정치사회〉라는 개념, 여러 가지 제약들이 강요되고 경험되는 하나의 체제는 실증적인(positive) 개념이다. 그러나 하나의 정착된 정부에 복종하는 습관이 없는 하나의 〈자연상태〉라는 개념은, 그리고 제약의 부재를 뜻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 개념도 마찬가지로, 순전히 부정적인(negative) 개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유는 〈우리에게 제약이 부과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되고, 안전은 〈남들에게 제약이 부과되는 것〉을 뜻한다고 이해된다. 공리에 관해 말하라. 각자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과 인위적으로 일치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도 제약에 복속해야 함을 저 개인이 납득할 것이다. 자연권에 관해, 자연법에 관해 말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양심을 완강히 붙들고, 그리고 공감과 반감의 원리가 부추기는 대로 넘어간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거슬린다고 생각되는 모든 법에 맞서서 무기를 들라고 초대하는 셈이다. 공리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자유의 철학이 아니다."(299-301)


"1788년 말 무렵에 벤담은 다가오는 삼부회 선거를 준비하고 있던 프랑스에 자신의 성찰들로써 도움을 줄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모든 개인은 행복을 향해 평등한 욕구를 가진다. 모든 개인들에게, 어느 한 물건이 행복을 증진하는 경향을 가늠하는 능력이 그 행복과 같다면, 〈최선의 정부 형태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아주 간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 사회의 모든 개인에게 투표권을 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리하여 미성년자, 정신병자, 그리고 (약간 다르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여성을 빼면, 선거인에게 필요한 지적인 역량의 정도를 확정하는 데 적당한 규칙이 없는 터라서,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수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인권의 이론이 공리의 언어로 표현되는 일종의 번역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논리 연습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루소의 평등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벤담은 그것을 위한 공리주의적 공식을 찾아내보자 애썼던 것이다."(308-9)


"무정부주의적 명제를 지지하기에는 엘베시우스의 제자로서 그는 과학의 통치를 너무 많이 신봉했다." "통치자들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벤담이 의지하는 유일한 제재는 도덕적 제재뿐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기가 〈공론의 재판정〉이라고 부른 상시적인 관할권 아래 통치자들이 복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그의 태도는 엘베시우스나 볼테르, 또는 왕이 저술가들의 조언을 듣고 비판을 받고 그리고 〈계몽되어야〉 한다면서, 필요한 개혁을 실현해주기를 그리고 특권적인 단체들의 사욕에 사로잡힌 완고함을 무찔러주기를 왕에게 의존했던 대륙의 모든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면 벤담은,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처럼, 통치자들의 이익은 피치자들의 이익과 같다고 확인하고, 따라서 통치자들을 개혁의 명분으로 개종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진정한 이익에 관해 그들을 계몽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할 태세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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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흑역사 - 부지런하고 멍청한 장군들이 저지른 실패의 전쟁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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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양이 사자의 탈을 쓰면? -로돌포 그라치아니와 이집트 침공


"그라치아니는 젊은 시절 촉망받는 군인이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알프스산맥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싸우면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최연소 대령으로 진급했고 두 번이나 부상을 입기도 했다. 그라치아니가 명성을 떨치게 된 비결은 리비아 반란 진압과 에티오피아 정복이었다. 여기에는 나치 못지않은 잔혹함이 숨어 있었다. 1930년 그는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베두인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만 2000여 명이 처형되었으며 키레나이카 주민 절반에 달하는 10만여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강제수용소 환경이 워낙 열악하여 수감자 절반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코란을 가르치는 교사 출신으로 저항운동의 수장이었던 오마르 알무크타르는 지형을 이용하여 20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치며 이탈리아군을 괴롭혔다. 하지만 끝내 그라치아니에게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의 골칫거리 하나를 해결해주었지만, 아랍인들은 '페잔의 도살자'라고 부르며 그를 증오했다."(25)


"무솔리니는 새롭게 리비아 총독에 임명된 그라치아니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1940년 8월 8일까지는 이집트로 진격하라고 닦달했다. 대경실색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과 싸우는 일은 베두인족 게릴라를 상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솔리니의 등쌀에 내몰린 그라치아니는 처음부터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조차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다 할 전투가 거의 없었는데도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영국군이 측면을 기습할 수 있다는 핑계로 시디바라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더이상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후퇴를 고려하거나 영국군의 반격에 대비하지도 않았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으려는 노력도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상대였던 리처드 오코너 장군은 물론이고 로멜, 몽고메리 등 앞으로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칠 다른 장군들에 비해 어떠한 인상도 남기지 못했다."(44-9)


"전후 에티오피아 정부는 그라치아니를 전범으로 기소했다. 에티오피아 침략 당시 조직적인 학살과 독가스 사용으로 수많은 에티오피아인을 살해했다는 죄목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탈리아인들을 전범으로 단죄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지중해에서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는 데 이탈리아의 협력이 필요했던 영국은 그라치아니가 실제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법정은 그라치아니에게 나치에 협력한 죄로 19년 형을 내렸다. 하지만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변호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4개월 만에 풀려났다. 연합군의 방관과 냉전 속에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라치아니는 네오파시스트 이탈리아 사회당을 조직하여 명예 당수가 되었다. 죽는 날까지 어떤 처벌이나 책임 추궁조차 받은 일이 없이 1055년 로마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로 평온하게 사망했고 로마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 아필레에 묻혔다."(57-8)


2장 일본군은 초식동물, 쌀 없으면 풀 먹으면 되지 -무다구치 렌야와 임팔작전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가 초식동물이다. 이만큼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임팔작전을 입안하며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1944년 2월)" "〈제군, 사토 사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지 않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작전을 훈시하면서(1944년 7월 10일)"(61-2)


"1937년 7월 7일 밤 베이핑 교외 루거우차오에서 야간 훈련중이던 현지 일본군 부대가 중국군의 도발로 병사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허위 보고를 했다. 무다구치 렌야는 처음에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에 참모를 파견했다. 하지만 공명심에 눈이 멀어서 마음을 바꾸고는 본국의 허락도 없이 반격을 지시하여 사건을 확대했다. 이것이 8년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루거우차오사건이었다."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 월권이자 군법재판에 회부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문제삼지 않았다." "바꾸어 말해서 무다구치 렌야 한 사람의 자의식 과잉이 수천만 명의 사상자와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 중일전쟁을 초래한 셈이었다. 그때까지 무다구치 렌야는 야전에서 실전을 경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쟁을 모르면서 전쟁을 떠드는 군인이었다. 내세울 공은 없는 주제에 윗선의 눈에 들어 꽃길만 밟아온 터라 거만과 허세로 가득했다."(71-2)


"임팔작전은 단순히 중과부적으로 패했다기보다 기획 단계부터 개인적인 공명심에 눈이 먼 무책임한 졸속작전이었다. 여느 나라였다면 무다구치 렌야와 주요 지휘관, 참모들, 직속상관이 가와베 마사카즈, 데라우치 히사이치 모두 군법재판에 회부되어 엄중한 문책을 받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처벌은커녕 군법재판조차 열리지 않았다. 일이 시끄러워지고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잠시 예비역에 편입된 뒤 몇 달 후에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육군예과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종전을 맞이했다. 가와베 마사카즈는 본토의 중부군 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 가와베 마사카즈의 뒤를 이어 버마 방면군의 지휘를 맡은 기무라 헤이타로 중장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에게 워낙 잔혹하여 '버마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떨쳤다." "일본 패망 후 무다구치 렌야는 싱가포르에서 포로 학대 죄목으로 BC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지만 증거 부족을 이유로 1년 6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88-9)


3장 나야말로 히틀러의 X맨 -모리스 가믈랭과 프랑스 전역


"제1차세계대전 당시 가믈랭은 마른 전투의 작전을 기획했고 풍전등화였던 파리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제11사단을 맡아 다른 프랑스군 지휘관들처럼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에 매몰되어 병사들의 목숨을 무익하게 희생하게 하는 대신 뛰어난 전술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프랑스 북부 누와용을 탈환했다. 1918년에는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원수를 보좌하여 독일군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후 해외 주재 무관과 식민지 주둔군을 지휘했다. 1931년에는 베강을 대신하여 프랑스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가믈랭은 세계대공황이라는 매우 불리한 여건 속에서 프랑스군의 재무장과 마지노 요새의 건설을 추진했다. 이때만 해도 유럽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심지어 독일 장교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에서 그는 예전의 명성에만 연연할 뿐 변화에 둔감하고 우유부단한 고집불통의 어리석은 노인이었다."(99)


"가믈랭이 독일과의 싸움에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이유는 1914년의 악몽 때문이었다. 총사령관이었던 조프르 원수를 비롯하여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복수심에 불타 있었던 프랑스군 지휘관들은 광적으로 전쟁을 외치며 프랑스인들을 전란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근거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현실적으로 프랑스가 독일을 이길 힘이 있는지에 대해, 전란이 불러올 엄청난 참사나 고통에 대해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공세제일주의는 수많은 병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프랑스는 영국·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나긴 싸움 끝에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한 세대가 사실상 파멸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얻은 것이라고는 상처투성이 영광뿐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정치인들과 장군들은 이전의 호전적인 모습과는 정반대로 완전히 위축되었다.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오랜 격언을 잊은 듯이 공격이라는 말은 쏙 들어가고 이번에는 방어만이 능사라는 식이었다. 그 상징이 마지노 요새였다."(102)


"'D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면 즉각 영불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벨기에에 파병하여 독일군과 결전을 벌인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가믈랭은 프랑스군 최강부대로 구성된 22개 사단을 벨기에 북부로 진격시켰다. 독일군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기도 전에 성급하게 주력부대를 출동시킨 진짜 이유는 위기에 처한 동맹국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가믈랭은 벨기에를 전장으로 삼아서 제1차세계대전 때처럼 자국 영토가 또 한번 전쟁터가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한마디로 기왕 싸워야 한다면 내 집 마당이 아니라 남의 집 마당에서 싸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얄팍한 잔머리는 도리어 프랑스가 패망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가믈랭은 독일군이 자신의 함정에 빠졌다고 믿었지만 정작 함정에 걸려든 쪽은 자신임을 깨닫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를 향해 신나게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진짜 공세는 아르덴에서 시작되었다."(112)


4장 사디스트가 사단장이 되다 -하나야 다다시와 하호작전


"어릴 때부터 군인의 길을 택한 하나야 다다시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정통 엘리트 코스인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차례로 졸업했다. 그는 관동군 사령부와 도쿄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같은 사관학교 동기생이라도 학교 성적에 따라 이후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 일본군이었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제아무리 전장에서 뛰어난 공적을 쌓고 실력 있는 유능한 장교라 하더라도 사관학교에서 성적이 나빴다면 영원히 열등생으로 낙인찍힌 채 만년 대위나 소령에 머물러야 했다. 진급에 필수적인 육군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보니 나중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를 상관으로 모셔야 했다. 반면 공부 잘하는 우등생은 사고를 치고 말썽을 부려도 '엘리트'라는 이유로 출셋길이 보장되었다. 성적이 곧 신분이었고 인간의 가치 척도였다. 하나야 다다시도 일본군의 성적 지상주의 문화가 만들어낸 수많은 괴물 중 한명이었다."(135)


"1944년 2월, 일본 버마 방면군은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의 건의에 따라 인도 동부의 요충지 임팔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북부 버마를 침공한 중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버마에서 연합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별도로 양동작전이 수립되었다. 남부 버마를 맡은 제28군 산하 1개 사단이 국지적인 공세로 연합군의 시선을 속여 제15군의 진격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호작전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역할을 맡은 부대가 하나야 다다시의 제55사단이었다." "하나야 다다시는 무조건 공격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영국군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준비 부족이 아니라 일선 장병들의 의지 부족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겼다." "하나야 다다시는 불리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해당 지휘관을 불러 정신력 탓을 하면서 몇 시간씩 두들겨팬 뒤 자결을 강요했다. 단 한번도 전선을 시찰하지 않은 그의 작전 지도는 전황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비현실적인 명령만 반복했다."(144-8)


"하호작전은 졸속작전과 영국군의 강력한 저항 앞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지만 어떤 문책이나 조사도 없었다. 오히려 버마 방면군 사령부는 임팔작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대신 3월 8일 당초 계획대로 밀어붙였다. 결과는 제15군 전체의 괴멸이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마 탈환을 시작했다. 제55보병사단은 또 한번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나야 다다시의 사령부가 있는 버마 중부 핀마나도 풍전등화였다. 제33군 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하나야 다다시에게 후퇴 불가와 옥쇄를 명령했다. 그동안 하나야 다다시가 부하들에게 강요했던 짓을 자신이 당하게 된 꼴이었다. 그러나 하나야 다다시는 참모장이 더이상의 손실을 줄여야 한다며 철수를 건의하자 냉큼 받아들이고 동쪽으로 후퇴하여 전선 붕괴에 일조했다. 물론 이번에도 무단 후퇴의 처벌이나 문책은 없었다. 이후 타이 주둔 제18방면군 참모장으로 부임하여 그곳에서 평온한 종전을 맞이했다."(150-1)


5장 동토의 땅에서 혼쭐이 난 스탈린의 간신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겨울전쟁


"1924년 1월 레닌이 죽었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는 트로츠키였다. 트로츠키는 레닌에 비견되는 혁명 지도자이자 소련 건국의 공신이었다. 냉혹하면서 탁월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언변, 군사적 재능을 두루 갖추었으며 군권까지 쥐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이상으로 권력욕과 냉혹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오만한 성격의 트로츠키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간부들과 손을 잡으며 은밀하게 세력을 모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헌신적인 충복이 보로실로프였다. 1년 뒤 소련 혁명군사위원회 의장이자 스탈린의 정적이었던 미하일 프룬제가 죽자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그 자리에 추대했다. 우직하고 충성스러웠던 그는 스탈린을 도와 트로츠키에게 군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공을 잊지 않았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비호 아래 출세 가도를 달렸다. 1935년 11월에는 세묜 부됸니, 바실리 블류헤르,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더불어 소련 5대 원수 중 한 명이 되었다."(167-9)


"1937년의 대숙청은 이전처럼 스탈린을 위협하는 몇몇 정적이나 반혁명분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이 보기에 2억 명에 달하는 소련 인민 자체가 잠재적인 적이었다. 소련체제를 유지하려면 자신이 나서서 당과 인민들을 더욱 옥죄어야 한다고 여겼다. 스탈린의 광기 속에서 숙청은 계급과 지위를 막론하고 소련 사회 전 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체포하고 처형하느냐였다. 스탈린은 그 숫자까지 정해주었다. 지역 책임자들은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서로 더 많이 잡아들이려는 실적 경쟁을 벌였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편집광적인 숙청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히 거역할 배짱도 없었다. 그는 스탈린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워 장교들의 처형 명령서에 쉴새없이 서명했다. 다섯 명의 원수 중 보로실로프 자신과 부됸니를 제외한 세 명이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총살당했다."(172)


"부작용은 금방 드러났다. 서쪽에서는 야심을 드러낸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여 4주 만에 정복했다. 무솔리니도 발칸의 약소국 알바니아를 손쉽게 손에 넣었다 그동안 유럽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영국, 프랑스는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스탈린은 자신도 이참에 히틀러를 흉내내어 영토 확장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손바닥만한 발트 3국을 집어삼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총 한 발 쏠 일 없이 호통 한번으로 굴복시킨 스탈린의 다음 목표는 동토의 나라 핀란드였다. 하지만 핀란드는 단호히 거절했다. 말로 안 되면 다음은 주먹이었다."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자신만만하게 승리를 장담했다. 1939년 11월 30일 전 전선에 걸쳐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소련군이  한 달이 넘도록 승리는커녕 한 발도 전진하지 못한 채 핀란드의 동토에 갇혀서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자 스탈린은 분통을 터뜨렸다. 1941년 1월 7일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자리에서 쫓아냈다."(174-80)


# 1941년 3월 12일 평화조약 체결


6장 국민과 군대보다 내 목숨이 우선 -피에트로 바돌리오와 이탈리아 패망


"전쟁보다 처세에 능했던 바돌리오는 무솔리니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20년 동안 군부의 수장으로 지냈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좌충우돌 사고를 치면서 이탈리아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졌다." "무솔리니는 뮌헨회담 때만 해도 자신이 뒤를 봐주었던 히틀러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거두자 질투심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기보다는 동업자의 승리에 숟가락 얹을 궁리만 했다. 프랑스 침공은 겨우 체면치레라도 했지만 그 후에는 모조리 재앙으로 끝났다. 이집트로 진격한 그라치아니는 영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대패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의 통치자였던 아오스타 공작은 영국령 소말리아를 점령하여 반짝 승리를 거두었지만 영국군이 반격하자 파국에 직면했다. 바돌리오는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데 6개월이 걸렸지만 영국군은 3개월 만에 승리했다. 50여 년에 걸친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 지배도 끝장났다. 제일 손쉬워 보였던 그리스 원정조차 참패였다."(216-7)


"시칠리아전투가 한창이던 1943년 7월 25일 밤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무솔리니의 불신임을 전격 선언했다. 다음날 무솔리니는 국왕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그가 22년이나 파시스트들의 지지를 받으며 철권통치를 했다는 점에서 내전을 촉발할 수도 있었지만 정권 교체는 의외로 순탄했다. 무솔리니에게 충성하던 파시스트단체들은 침묵했고 자신들의 수령을 구출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바돌리오는 자신을 쫓아낸 무솔리니에게 복수하고 권력의 정점에 앉았다. 그는 입으로는 여전히 독일 곁을 지키면서 연합군과 싸우겠다고 했지만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독일에게 승산이 사라진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를 원하는 이탈리아인들은 없었다." "무솔리니의 실각 소식에 깜짝 놀란 히틀러는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지금의 폴란드 켕트신)의 사령부 '볼프스샨체(Wolfsschanze, 늑대 소굴)'에서 급히 장군들을 모은 다음 〈돼지들을 그곳에서 끌어내야 한다〉라며 길길이 날뛰었다."(226-7)


"9월 8일,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에서 만슈타인을 만난 뒤 라스텐부르크로 돌아와 저녁 7시 50분 영국 BBC를 통해 이탈리아 항복 뉴스를 들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이텔에게 '악세 작전(Operation Achse)' 발동을 명령했다. 이탈리아의 점령과 유럽 각지의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하라는 명령이었다. 로멜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3시간 뒤인 밤 11시가 되자 각지에 주둔한 이탈리아군 부대에서 독일군이 행동에 나섰다는 보고와 명령 요청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상황은 급박했다. 그 순간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 각료들, 군 수뇌부의 선택은 싸우는 것도, 독일과 협상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치졸하게도 국민과 군대를 버리고 본인들만 도망칠 참이었다. 바돌리오는 국왕을 찾아가 당장 로마에서 탈출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한 장군이 떠나기 전에 내릴 명령이 있냐고 묻자 〈없소, 나는 바로 떠날 것이오〉라고 말하고 국왕 일행과 함께 야반도주하듯이 로마에서 빠져나갔다."(231-4)


7장 군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이름과 성욕뿐 -나폴레옹 3세와 스당전투


"여론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시작되기만 하면 나폴레옹 이래 유럽 최강을 자랑하는 대육군의 후예들이 베를린을 또 한번 짓밟아 프랑스의 위세를 보여줄 것이라며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군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소규모의 직업군인제를 선호했던 장군들은 프로이센식 대규모 징집제도를 도입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진짜 군인이지 쓸모없는 신병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쟁 직전에야 '기동근위대'라는 이름의 예비군제도가 도입되었다. 이론적으로는 전시에 4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무기는 구식이었으며 치안 유지 이외에는 유명무실한 존재였다. 징병제의 가장 큰 걸림돌은 장군들과 정치인들이 프랑스 국민들을 무장시키기를 꺼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민중은 애국자가 아니라 언제라도 혁명을 일으켜 체제를 전복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에 지나지 않았다."(292-4)


"나폴레옹 3세는 두 가지 결정적인 오판을 저질렀다. 첫번째는 전쟁이 시작되면 4년 전의 복수를 꿈꾸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호응하여 프로이센을 협공하리라는 것이었다. 또한 바이에른을 비롯한 독일 남부의 친오스트리아 왕국들도 가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스트리아는 참전을 주저했고 독일 남부 왕국들은 프랑스를 편들기는커녕 오히려 프로이센 편에 서서 프랑스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다." "프로이센이 운이 좋았다기보다 오스트리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물밑에서 설득하고 반프랑스 감정을 선동하여 독일 전체를 하나로 결집하는 데 성공한 비스마르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덕분이기도 했다." "두번째는 프로이센의 부대 동원 능력에 대한 오판이었다. 프로이센의 동원 속도는 프랑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이는 몰트케가 이끄는 참모본부가 지난 수년 동안 얻은 귀중한 경험을 활용하여 전쟁 계획과 병력 동원, 철도 수송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준비한 성과였다."(296-7)


"유럽 최강자의 자리를 놓고 벌어진 결승전은 프로이센의 완승으로 끝났다. 1871년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배상금으로 50억 프랑을 5년 내에 납부하되, 그것을 갚을 때까지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해야 했다. 프랑스인들 입장에서 더욱 치욕적인 일은 라인강 서쪽의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겼다는 점이었다. 면적 1만 4000제곱킬로미터에 프랑스 산업이 집중되어 있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독일인 입장에서는 그 옛날 신성한 독일의 일부였으며 2세기 전 루이 14세에게 부당하게 빼앗긴 땅을 230여 년 만에 되찾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가 두 번 다시 일어서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이번에는 그의 오판이었다. 프랑스는 2년 만에 배상금을 모두 지불함으로써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강적임을 증명했다. 알자스로렌의 할양은 양국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 40년 뒤 제1차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309-10)


8장 흑인들에게는 희망을, 백인들에게는 조롱을 -오레스테 바라티에리와 아두와 전투


"이른바 '빅토리아시대'라고 불리던 그 시절(19세기 중후반) 유럽 열강은 너도나도 아시아, 아프리카를 경쟁적으로 침략하면서 식민지를 확장해나갔다. 유럽인들에게는 황금기였다. 잘 훈련된 유럽 군대와 현대적인 무기, 강철 군함의 함포 앞에서 중국이나 인도처럼 가장 오랜 역사와 거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비(非)유럽권 국가들조차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탈리아 역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탈리아는 비록 통일은 했지만 열강의 반열에 들기에는 여전히 약하고 가난했다. 하지만 식민지를 얻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포르투갈, 벨기에처럼 유럽에서는 변변찮은 약소국도 자국보다 훨씬 넓은 땅을 식민지로 경영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시선이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동아프리카였다. 지형적으로 툭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코뿔소의 뿔을 닮아 '아프리카의 뿔'이라고도 불렸다. 그때까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손길이 아직 뻗치지 않은 아프리카의 몇 안 남은 지역이었다."(323)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 국경의 작은 마을 아두와에서 오레스테 바라티에리 장군이 지휘하는 이탈리아군 4개 여단 1만 4000여 명은 1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군에게 포위 섬멸되었다. 그것도 유럽인들이 미개하다며 깔보던 아프리카인들에게 패했으니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그때까지 유럽 여느 나라들, 벨기에나 포르투갈 같은 약소국조차 아프리카인들에게 그 같은 참패를 당한 경우는 없었다. 국회의장 도메니코 파리니는 일기에 〈이탈리아는 끝났다〉라고 썼다. 프란체스코 크리스피 내각은 총사퇴했다. 국왕 움베르토 1세는 3월 14일에 자신의 52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대신 '애도의 날'로 정했다. 이탈리아는 온 유럽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로마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무모한 원정을 강행한 정부를 비난하는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아두와전투가 이탈리인들에게 절망을 주었다면 유럽의 침략에 시달리던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럽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섣부른) 자신감을 주었다."(319-21)


9장 미군, 1라운드에서 KO패 당할 뻔하다 -로이드 프레덴들과 횃불작전


"1943년 1월 아르님 휘하의 독일 제10기갑사단과 제334보병사단, 이탈리아 제1보병사단 '수페르가'는 로멜과의 통신선을 확보하기 위해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 프레덴들이 내린 명령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생뚱맞은 소리였다. 그는 미 육군의 표준 명령 규약을 무시하고 자신이 만든 기묘한 은어로 명령을 내렸다. 보병대는 '워킹 보이(walking boy)', 포병대는 '팝건(popgun)'이라고 불렀다. 인명과 지명에 대해서는 〈~로 시작하는〉이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붙였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에서 프레덴들의 해괴한 행태는 부하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알쏭달쏭한 명령을 해석하느라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명령 하달. 땅개 소년들, 장난감 총, 베이커의 팀과 베이커의 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은 현재 귀관의 위치에서 북쪽에 있는 M으로 갈 것. 가능한 한 당장. 귀관의 상관은 M에서 왼쪽으로 다섯번째 사각형 격자 판에 있는 D로 시작하는 장소에서 J로 시작하는 이름의 프랑스 신사에게 보고할 것.〉"(388-9, 373)


"2월 14일 미 제1기갑사단 A전투단과 제34사단 제168연대 보병들이 지키고 있는 시디부지드를 향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평야와 언덕 여기저기에 분산 배치된 미군을 손쉽게 포위했다. 프레덴들이 현장에 와보지도 않고 지도만 보고 배치한 결과였다. 제168연대장 토머스 드레이크 대령이 프레덴들에게 당장 철수해야 한다고 했지만 프레덴들은 구원부대를 곧 보낼 테니 진지를 굳건히 지키라고 엄명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꾸물대며 시간을 낭비했다. 다음날에야 제1기갑사단 C전투단이 출동했다. 미군 전차부대는 마치 열병식을 하듯 대오를 이루고 행군을 하던 중 독일 공군의 폭격과 매복에 당해 전차 46대와 차량 130대, 자주포 9문을 잃었다. 전차 4대만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 한번의 전투로 사단 전력의 3분의 1이 전멸한 셈이었다. 프레덴들은 그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포위된 미군 병사들에게 내린 명령은 그냥 알아서 탈출하라는 것이었다."(390-1)


"미 제2군단 전체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독일군은 1000명의 사상자와 전차 20대를 잃은 반면, 미군은 전사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를 포함하여 3000여 명이 넘었고 3700여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또한 전차 183대, 600여 대의 차량도 격파되었다. 굴욕적인 패배 소식에 워싱턴이 들끓었다. 충격을 받은 루스벨트는 〈우리 병사들이 싸움을 할 줄은 아는가?〉라고 물었다. 영국군은 경멸감을 드러내며 미군을 가리켜 〈우리의 이탈리아군〉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프레덴들은 비겁하게 모든 책임을 워드에게 떠넘겼지만 아이젠하워는 직접 제2군단을 방문했다. 그로서도 자신의 앞날이 걸린 문제였고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는 부사령관 브래들리를 비롯하여 일선 지휘관들을 일일이 만났다. 그리고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 프레덴들에게 있음을 깨달았다. 프레덴들은 해임되었다. 워드도 함께 쫓겨났다. 워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군대식 연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불행이었다."(393)


10장 식초 조, 중국을 망치다 -조지프 워런 스틸웰과 버마작전


"스틸웰은 사령부에서 군림하던 프레덴들과는 정반대로 '병사들 중의 병사'였다. 그는 고위장성에 걸맞지 않게 항상 허름한 군복을 입고 야전에서 병사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직접 소총을 메기도 했다. 그런 탈권위적 모습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귀족적인 군인보다 서민적인 군인을 선호했던 미국의 젊은 좌파 언론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스틸웰이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그는 일개 사단장이나 연대장이 아니라 장제스의 참모장이자 연합군 전선의 한 축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전술적인 역량보다는 외교관의 유연성과 전략가의 시야, 조직가의 수완이 더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었다. 외교관으로서 빵점이라면 전략가로서는 최악이었다. 그렇다고 패튼이나 로멜, 구데리안과 같은 특출한 재능을 지닌 위대한 야전군인도 아니었다 그는 버마 전선에서 정글전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다. 현대전에서 전차와 항공기가 차지하는 중요성도 알지 못했다."(402-3)


"따라서 스틸웰은 굳이 전선에 나와 익숙지 않은 전투를 지휘하기보다 차라리 충칭에 남아 중국군을 돕고 자신과 미국에 대한 중국인들의 신뢰를 쌓는 데 노력하는 편이 최선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영웅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쪽이었다. 스틸웰은 중국에 오자마자 장제스를 압박하여 최정예부대를 얻어낸 뒤 버마에서 무리한 작전을 펼쳤고 재앙적인 패배를 초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핀에서 쫓겨난 맥아더가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스틸웰 역시 명예를 회복하겠다면서 버마 탈환에 매달렸다. 그에 따르는 희생과 대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치러야 할 몫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권한을 악용하여 원조 물자의 대부분을 중국에 제공하는 대신 인도에 쌓아두었다. 이 때문에 스틸웰이 직접 지휘하는 인도 주둔 중국군 부대 이외에 중국 본토에 남은 대다수 중국군은 전쟁 내내 미군의 원조 물자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404)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양국 관계는 파국 직전에 이르렀다. 결국 루스벨트는 1944년 10월 대선에 악영향을 끼칠까 우려하여 스틸웰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여 두 사람의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장제스도 승자는 아니었다. 중국의 실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루스벨트는 스틸웰의 악선전만 믿고 〈왜 장제스의 군대는 전혀 싸우지 않는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중공의 교묘한 심리 전술에 넘어간 이들은 장제스보다 마오쩌둥이 더 다루기 쉽고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고 착각했다. 트루먼은 공산주의에 덜 유화적이었지만 그 역시 누가 진짜 친구이고, 누가 진짜 적인지 혼란에 빠졌다. 자신이 평화 중재자 노릇을 하겠다며 국공의 싸움에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가 장제스가 수세에 몰리자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손을 떼었다. 1년 뒤 한반도에서 맥아더가 마오쩌둥 군대에게 여지없이 패한 뒤에야 비로소 중국 공산당이 미국의 친구가 아님을 깨달았다."(406-7)


11장 가벼운 주둥이가 프랑스군을 결딴내다 -로베르 니벨과 니벨 공세


"프랑스군에게 베르됭전투는 단순히 그때까지 수없이 반복된 여느 전투의 하나가 아니었다. 양군은 거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총력전이나 다름없는 싸움을 벌였다. 승리에 도취된 프랑스인들은 드디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찾았다고 우쭐했다. 그 비결이란 위대한 명장 니벨과 그가 자랑하는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이었다. 헤이그와 달리 니벨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페탱의 강력한 병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베르됭전투 내내 프랑스군이 독일군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는 사실은 무시되었다. 10개월 동안 독일군은 35만 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프랑스군은 4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손실되었다. 제아무리 니벨이 승리를 장담한들 독일군은 일석일조에 무너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니벨과 망징은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라면 프랑스 청년들이 제아무리 죽어나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인들은 결과에 열광했다."(491)


# 이동탄막전술(creeping barrage) : 보병이 돌격하기 직전에 포병이 적군 진지에 엄청난 양의 포탄을 쏟아 부은 뒤 보병의 진군 속도에 맞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탄막을 전진하여 적진을 파괴하는 방식


"베르됭전투가 끝나자마자 정치인들은 조프르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새로운 총사령관에 니벨을 임명했다. 니벨은 너무 자신만만한 나머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을 어겼다. 바로 보안이었다. 평소에도 자기 과시에 열을 올리던 그는 극비를 유지해야 할 계획을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세부 계획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작전 지도까지 보여주었다. 런던 방문중에는 한 사교클럽에서 자리를 함께 했던 귀부인들에게도 신나게 떠벌렸다. 니벨의 계획은 영국과 프랑스 언론을 통해 모두 공개되었다. 더이상 공격이 언제 어디서 어느 부대에 의해 시작되는지는 비밀이 아니었다. 니벨의 보안 위반은 일반 병사들에게는 매우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비밀 유지 명령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공세 성공이 기습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나사 빠진 행동이었다. 게다가 일선부대에 너무 빨리 작전 계획서를 배포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독일군 정보부는 니벨 공세의 전모를 손쉽게 파악했다."(495)


"루덴도르프는 전선 일부를 축소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방어를 한층 강화하고 최일선에 배치된 일부 병력을 예비대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방어선의 이름은 '지크프리트선(힌덴부르크 선)'이었다." "니벨은 독일군이 제 발로 점령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철수중이라는 정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하물며 자신의 가벼운 입 때문에 정보가 독일군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리 없었다. 어쨌든 영불 연합군은 피를 흘리지 않고 잃은 땅 일부를 찾은 셈이지만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니벨의 목적은 단순히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것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포격으로 독일군의 주력을 박살내고 적진을 돌파하여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물러나면 작전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니벨은 독일군의 철수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대신 당장 자신의 계획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만 불쾌하게 여겼다. 그에게는 전략가로서의 사고가 없었다."(496-7)


"4월 16일에 개시된 니벨 공세는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실패로 돌아갔고, 마침내 5월 9일 모든 공세는 중단되었다. 15일 동안 프랑스군은 2만 8500명의 포로와 187문의 대포를 노획했으며 최대 6, 7킬로미터를 전진했다. 독일군은 16만 3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프랑스군도 18만 7000명을 잃었지만 겨우 수백 미터를 전진하려고 수만 명씩 죽어나가던 당시 기준에서 보면 큰 손실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1년이나 2년 전이었다면 니벨의 공세는 충분히 성공이라고 평가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계에 직면한 프랑스군으로서는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니벨은 결정적인 승리를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실망한 프랑스군은 내부에서부터 붕괴될 뻔했다. 니벨의 실패는 다른 장군들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내서가 아니라 애초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론이 급격히 약화되고 항명과 반란이 이어졌다. 5월 15일 니벨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511)


12장 내 군단은 어디로 갔나? -유재흥과 현리전투


"1949년 3월 2일 유재흥은 새로운 보직을 받았다. 막중하면서도 민감한 임무였다. 제주지구 전투사령관이 되어 지옥이나 다름없던 제주도에서 (1년여 전에 일어난) 공산 반란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 시절 육지에서 좌우익의 격렬한 대립과 반미 시위로 무정부의 혼란에 빠져 있었던 것에 비하면 제주도는 오히려 조용한 편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진행되었고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휩쓸었던 1946년 '10월 항쟁(대구 10·1사건)' 때도 제주도는 참여하지 않았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보다 이념색이 약했던 이유는 토지 집중화 현상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 전체의 소작농 비율이 43퍼센트에 달했던 반면, 제주도에서는 자작농 비율이 72.8퍼센트였다. 소작농은 겨우 6.3퍼센트에 불과했다. 따라서 육지와 달리 제주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좌익에 물들었다는 주장은 근거 없는 억지였다."(531-3)


"문제는 이념이 아니라 미군정 산하에서의 생활고였다. 맥아더는 남한보다 일본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흉작으로 일본의 식량 사정이 나빠지자 미 본토에서 가져오는 대신 남한에서 대량의 식량을 강제 공출했다 남한 역시 식량 사정이 나쁘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였다." "그중에서도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는 제주도는 특히 고통이 심했다. 그런데도 미군정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조선인들은 쌀이 없어도 생선과 해초로 능히 살아갈 수 있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발표하여 분노를 사기도 했다. 결국 제주도민들도 폭발했다. 육지에서 이미 10월 항쟁과 미군정의 탄압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인 1947년 3월 1일 제주 읍내에서 2만 명의 주민이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여섯 명이 죽었다." "미군정 조사팀은 〈제주도는 전체 인구의 70퍼센트가 좌익 세력에 동조하는 좌익 거점〉이라는 허위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군정이야말로 제주도민들을 자극하여 좌익들의 온상으로 만드는 장본인이었다."(533-5)


"유재흥이 제주도에 내려온 때는 이미 광기의 피바다가 섬 전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그는 전임자들의 무분별한 섬멸전 대신 보다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불만이 온상이었던 극우단체들의 행패부터 금지했다. 유재흥의 선무 활동은 대번에 효과를 드러냈다. 산속에서 궁지에 몰려 있던 주민들은 그제야 내려오기 시작했다. '물'을 잃은 게릴라들의 세력도 빠르게 약화되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불과 두 달 남짓 있었지만 육지로 떠나는 5월 초에는 대부분의 반란이 종식되면서 모처럼의 평화가 찾아왔다." "당시는 유재흥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조차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면서 모르는 척 침묵을 지키거나 오히려 과잉 충성을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유재흥이 20대의 젊은이답지 않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제주도민의 민심을 안정시킨 사실만큼은, 그가 한국전쟁에서 군인으로서 보여준 과오를 떠나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541-2)


"한국전쟁 당시 의정부 방면을 맡은 유재흥의 제7사단은 북한군 주력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았다. 북한군은 3개 사단 및 1개 기갑여단 등 3만 2000여 명에 달한 반면, 제7사단은 2개 연대 7000여 명에 불과했다." "유재흥이 평생 처음 경험하는 '진짜 전쟁'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동두천을 맡은 제1연대는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격퇴했다. 하지만 더이상 버티지 못한 채 그날 밤 밀려났다. 포천 방면의 제9연대도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채 후퇴했다. 육군 본부에서는 부랴부랴 제3연대는 다시 제7사단에 배속하여 전선으로 출동시켰지만 병력의 대부분이 자리에 없었기에 실제 병력은 1개 대대에 불과했다. 그들 역시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압도적인 공격에 간단하게 분쇄되었다. 그 와중에도 대통령 앞에서 큰소리쳤던 채병덕은 직접 전선으로 나와 사단장들에게 즉각 반격하여 적을 격퇴하라고 닦달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시작된 반격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개전 이틀 만에 제7사단은 붕괴되었다."(544-5)


"중국군의 제2차 춘계 공세(1951.5.16~25)를 가장 먼저 받은 쪽은 한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이었다." "현리는 공세에 밀려 철수중인 두 사단의 병력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당장 오마치 고개를 탈환하지 못한다면 철수는커녕 독 안에 든 쥐가 될 판국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은 2개 사단이 아직 건재하여 오마치 고개를 충분히 탈환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 그는 군단장으로서 일선에서 직접 전황을 살피고 독려하는 대신 제3사단장 김종오에게 모든 지휘를 맡기고 사령부로 돌아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 모습이 결정적이었다. 이미 적에게 퇴로가 막혀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은 〈군단장이 달아난다!〉며 패닉에 빠진 채 너도나도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리 주변은 남쪽으로 무질서하게 달아나는 한국군 병사들로 가득했다. 중화기는 모조리 버려졌다. 손에 쥐고 있는 무기는 소총에 불과했다. 게다가 패잔병의 태반은 험준한 산속에서 길을 잃은 채 탈진과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추격해온 중국군의 포로가 되었다."(559-61)


"유재흥은 하진부리에서 일단 잔여 병력을 수습하고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 밴 플리트는 유재흥에게 더이상 한 발짝도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다. 또한 폭격기를 출격시켜 맹폭격을 퍼붓고 미 제2사단과 한국군 제1군단에서 병력을 빼내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보강했다. 스스로 무너진 제3군단과 달리 백선엽의 제1군다는 북한군의 공세를 잘 막아내 동부 전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결국 중국군의 5차 공세로 괴멸한 부대는 유재흥의 제3군단밖에 없었다. 게다가 5월 21일 유재흥은 중국군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하고 또 한번 돌파당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미 폭격기들은 한국군이 버리고 간 장비와 탄약을 폭격하여 파괴해야 했다. 분노가 폭발한 밴 플리트는 참모총장 정일권과 함께 직접 제3군단 사령부를 찾았다. 그는 유재흥을 크게 질책하고 그 자리에서 지휘권 박탈과 한국군 편제에서 제3군단을 아예 지우겠다고 선언했다."(561-2)


"아무리 유재흥의 추태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고 해도 밴 플리트의 조치는 냉철하거나 불가피하다기보다는 다분히 감정적이었다. 또한 미군의 우월적인 지위를 남용한 횡포이기도 했다. 그는 전후 사정을 살피고 우리측 입장을 들어보는 대신 마치 분풀이하듯이 일방적인 결정을 내렸다." "유재흥은 그 자리에서 밴 플리트에게 맞서느니 일단 참고 쓸데없는 마찰을 피하는 쪽이 일을 더 키우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일본군에서 일본인을 주인으로 섬겨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하는 일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머슴이 불만을 품을 수는 있으되 감히 대들 수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저자세가 오히려 밴 플리트의 마지막 인내심을 건드리면서 더 큰 분노를 사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유재흥은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아니라 참모총장인 정일권, 제1군단장 백선엽과 더불어 한국군 전체를 대표하는 장군이었다."(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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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여성, 신령들 - 1970년대 한국 여성의 의례적 실천
로렐 켄달 지음, 김성례.김동규 옮김 / 일조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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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장 전씨 가족의 굿


"한달 전쯤 전씨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함께 나들이를 갔다. 거기서 술을 마시고 배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시작됐는데, 차츰 고질병으로 악화되었다. 전씨 할아버지는 마을 약국에서 지어온 조제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고, 병원에서 여러 번 비싼 주사를 맞아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자 전씨네 할머니가 몇 년 동안 단골로 다니던 떠벌이만신을 찾아 점을 치게 되었다. 전씨네 할머니의 짐작대로 대신大神할머니가 굿을 원하고 있었다. 전씨네 할머니는 조상 중에 무당이 있었는데, 그녀가 전씨 가정의 만신전萬神殿에 대신할머니로 자리잡고서 현재 전씨 집안의 가정사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인 성격의 대신할머니는 가족을 보호하고 복을 주지만, 가족들은 그 신령을 위해 대략 3년에 한 번씩 굿을 해서 대접하고 놀려 주어야 한다. 전씨네 할머니 부부는 5~6년 동안 굿을 하지 않았다. 전씨 할아버지의 병은 의례를 할 시기가 늦어졌다는 경고다. 더 늦어지면 더 큰 불행이 따를지도 모를 일이다."(31-2)


"굿은 기본적인 구조에 따라 진행된다. 이 구조는 집에 거주하는 신령과 조상들이 각각 적절한 장소와 순서에 따라 등장하는 장소인 집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집은 굿의 배경이자 동시에 핵심적인 은유로서, '집'에는 인간 구성원뿐 아니라 만신이 집 이곳저곳을 다니며 드러내보이는 신령들도 함께 거주한다. 만신은 떡시루, 신복神服, 돼지 다리를 마루와 방 쪽으로 식구들에게 건넨다. 신령들은 부채질을 통해서 주머니 안과 옷 속으로 복을 몰아다 준다. 또한 곡식, 밤, 여러 가지 씨앗으로 치마를 채워 준다. 가족은 좋은 운을 붙잡아 집 안에 간직한다. 만신은 부정, 잡귀귀신, 해로운 기운을 없애고 대수대명代壽代命을 위해 닭을 대문 밖으로 보낸다. 만신은 칼을 던져 칼끝이 대문 바깥쪽을 향하는지를 보고 부정한 기운이 집 밖으로 나갔는지를 확인한다. 그러나 굿의 체계적인 점에 치중해서 묘사하게 되면, 하나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굿 드라마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즉흥적이고 독특한 점들이 필연적으로 간과된다."(57-8)


"한 가족이 사회적으로 처한 상황 및 초자연적 존재들과 관련된 문제들은 바로 그 가족과 무당 사이의 모든 거래와 굿이라는 드라마를 형성하고 채색한다." "샤먼으로서 한국의 만신은 신령과 조상들을 눈으로 보고 불러들여 그들의 말을 대신 할 수 있다고 한다. 만신은 자신의 단골과 그 집안의 초자연적 존재들 사이에 있는 역동적인 관계를 확인시킨다. 만신은 점을 치는 동안 경험하는 환시체험을 통해서 신령과 조상들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결정한다. 떠벌이만신은 전씨네 대신할머니의 뜻과 바라는 것을 전씨 가족에게 전달해 주는 연결고리다. 굿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은 살아 있는 인물로서 인식되고 만신은 트랜스(드러내다, manifest)에 빠진 채 정형화된 인물의 역할과 완성되지 않은 대본에 따른 대화를 하면서 고객 가족의 전통을 환기시킨다. 만신들은 전씨 할아버지가 회복되고 아들은 성공할 것이며 손주들은 공부를 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확언하기 위해서 전씨 집안의 신령과 조상들의 권위를 사용했다."(58-9)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전씨 할아버지를 위해 거행된 행사에서 전씨 할아버지가 최소한만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굿은 여성들의 잔치였다. 전씨네 할머니가 굿을 처음부터 준비하고 신령 및 조상과의 농담을 주도했다. 신령들 또한 며느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는데, 아들의 가정 역시 그 굿을 통해 복과 운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씨 집안 사람이 아닌 여성들도 굿을 보러 왔다. 전씨네 할머니의 여동생, 즉 신나게 춤을 추던 이모는 열성적인 참여자이자 씀씀이가 후한 재정적 기부자였다. 전씨 할아버지의 여동생, 즉 이미 출가한 또 한 명의 전씨 집안 여성 역시 무감을 서고 공수를 받았다. 이 모든 여성들은 종종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면서도 자신들이 바친 만큼의 재수를 신령들에게 받았다. 굿의 혜택은 이웃과 친구들에게도 미친다. 이들 모두 조금씩 돈을 썼으며, 무감을 서고 굿의 유쾌한 열기를 맛보았다. 이 여성들은 결코 소극적인 구경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모두 애정을 가지고 하나의 코러스를 이루었다."(60-1)


# 무감 : 굿의 각 거리 사이사이에 굿을 의뢰한 가정의 식구들이나 참여자들이 무당의 신복을 입고서 춤을 추는 행위


# 공수 : 무당이 신이 내린 채 신의 의지를 전하는 말


제2장 유교적 가장과 활기 넘치는 여성


"전씨 가족의 굿에서 여러 종류의 신복神服을 입은 신령들이 나타난 곳은 여성의 세계이다. 여성 만신들이 신령을 청하여 신의 말을 전하고, 만신이 아닌 일반 여성들은 신령에게 소원을 빌고 흥정을 하거나  때로는 언쟁을 벌이기도 한다. 가정신령들household gods이 잠잠해지면, 일반 여성들은 만신의 옷을 입고 자신들의 몸주신에 실려 춤을 추면서 가벼운 희열 상태에 들어간다. 한국 여성들의 신들림에 대한 열광은 다른 수많은 민족지의 사례들과 부합하는데, I. M. 루이스는 이것을 〈신령의 성적性的 편향성〉이라고 부른다." "인류학자들은 여성이 초자연적인 것에 이끌리는 현상의 원천으로서 이른바 여성의 히스테리 성향이나 '음陰-암흑'의 성질이 가지는 신비로운 힘, 그 외의 주술-과학적 설명을 배제하는 대신에 사회적 관계들에 주목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담한 루이스에 따르면 신들림 컬트는 〈페미니스트 하위문화〉의 전위 조직으로서, 그 안에서 여성은 남성 세계에 완곡한 형태로 저항한다."(66-8)


"하위문화로서의 신들림 컬트라는 루이스의 정의는 〈지배적 도덕성의 종교〉와 〈주변적 컬트〉라는 이원론적 구분에 근거한다. 전자는 정치적 권위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는, 단순하고 동질적인 사회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샤먼은 지대한 영향력을 지니며 샤먼의 신령들은 도덕적 질서를 뒷받침한다. 반면 〈주변적 컬트〉는 복합 사회의 지배적인 도덕 종교 외부에 존재한다. 이 컬트의 신령들은 공식적으로는 폐기된 고대 신앙의 잔존물이며, 여성의 〈주변적인〉 사회적 위치에 대한 보상으로서 여성의 세계에 남아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시각은 뒤르켐의 연구에서 비롯되는데, 뒤르켐은 공동체가 가진 열망이 가장 잘 표현된 것으로서의 〈교회〉와 개인적 상황과 필요에 따른 주술의 구체적 적용들로서의 〈컬트〉를 구분한다. … 나는 이러한 의례와 이 의례를 주관하는 여성들이 주변적이라는 것과는 상반된 주장, 즉 전씨 가족의 굿에 등장한 신령과 혼령들이 한국의 가족과 마을 종교에 필수적인 요소임을 밝히고자 한다."(68)


"15세기 초 건국된 조선왕조의 신유학 개혁가들은 한국 사회의 철저한 변화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매우 상이한 사회 질서를 위에서 아래로 강요하는 것이었다. 현재 우리가 '전통적인 한국'이라고 연상하는 사회 패턴은 불과 16세기 혹은 17세기까지도 확고하게 뿌리내리지 못했다. 상당히 최근까지도 한국의 친족은 부계에 제한된다기보다는 방계를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 양반 계층의 딸들은 땅과 노비를 상속받았고, 가끔은 부친 조상의 신위神位에 제사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상속받았다. 조상숭배는 아직까지 엄격하게 유교적인 의례가 아니었다. 딸의 자식들은 출가한 집안의 족보뿐 아니라 친정의 족보에도 기록되었다. 남편은 부인의 친정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여성은 남편의 친족에 어머니와 부인으로서 합류하여 시어머니의 자리를 계승하거나 혹은 여성 자신의 가정을 형성했다." "한국 여성이 실천한 비유교적 의례들은, 유교와 한국인 사이에 이루어진 타협을 이해하는 데 유리한 점들을 제공한다."(70-1)


"조상숭배의 영향력과 윤리적 중요성 때문에 한국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사회과학자들은 남성의례 영역의 형태와 그 사회적 의의를 탐구해 왔다." "남성들이 인류학자와 어린이들에게 조상숭배를 설명하면서 가지는 자부심과는 대조적으로, 마을 여성들은 자신들의 의례에 대한 민족지학자의 관심에 혼란스러워했다. 그들은 이렇게 묻곤 했다. 〈그게 왜 알고 싶은데?〉 〈그런 건 알아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비교 연구의 가치를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나는 미국 여자들이 한국 여자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해 보기도 했다. 결국 이 여성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연구를 이해하게 된 것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였다. 〈한국의 제사를 연구할 때에는 남학생들을 보내요. 제가 여자라서, 여러분이 무엇을 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 저를 보낸 거예요.〉 이 여성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내재된 사회적·의례적 노동분화를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에 내 연구 관심이 나의 성性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75-6)


제3장 영송리


"관아에서 사무원이나 병사 업무를 주로 담당했던 낮은 등급의 아전은 그 지역의 엘리트들이었다. 지역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하고 〈마치 양반인 양 행세했던〉 아전들은 지역 유지로서 권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노인들은 〈그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양반'이라고 불렀다〉라고 말해 주었다. 이 서술이 피상적이긴 하지만, 한국의 역사 기술에 등장하는 하급관리로서 아전의 모습, 즉 부당한 착취와 부당 이득의 기회를 잘 이용했던 그들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실제로 대중의 상상 속 아전은 만신의 대감거리에서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걷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방관을 보좌하는 아전처럼, 대감신령들은 좀 더 위엄 있는 산신, 장군, 또는 대신Great Spirit에게 봉사한다. 위격이 높은 이 신들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제물을 요구하지 않는다. 부채를 펼쳐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위격이 낮은 대감신령들은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그들의 욕심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만하다."(95)


"전통적인 엘리트의 시각에 의하면, '무속'과 '미신'은 교육수준이 낮고 심하게 억압받는 하급 계층에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의 몇몇 관찰자들처럼 나 역시 경기도 북부의 여러 마을들에서 양반 가문임을 공언한 몇몇 가정에서 열린 성대한 굿을 여러 차례 관찰했다." "만신은 양반 가정에서 굿을 할 때에도 여느 다른 가정의 신령들을 다루듯이 그 가정의 신령들, 조상들, 귀신들을 다룬다. 이러한 신앙은 공통적이다. 여느 가정들에서처럼 양반 가정의 특정한 초자연적 역사가 약간 변형된 상태로 그 가정의 만신전에서 드러난다. 용수 엄마의 손님들 중 몇몇 가정은 어떤 양반 종족의 지파에 속해 있었다. 그 종족의 시조와 후손들 중 높은 벼슬에 올랐던 먼 조상들이 배우자들과 함께 이들 가정에서 벌어지는 굿에 온다. 이들은 그 종족에 속한 가정들의 만신전에서 특별한 대왕신이다. 그 종족의 지파들 역시 대왕굿이라 불리는 주기적인 굿을 후원하여 왕들을 대접하고 친족들 간의 평화를 증진한다."(105-6)


제4장 신성한 관계: 만신과 단골


"만신의 신당은 '신당'혹은 불교 용어인 '법당'이라고 불린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용수 엄마는 자신의 신당을 '할아버지방'이라고 부른다. 내가 처음 용수 엄마를 방문했을 때 나는 할아버지라는 말을 단수형으로 오해하여 그녀가 어떤 노인에게 방을 임대해준 줄 알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존칭어이지만 극존칭에 해당하는 용어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모든 늙은 남성과 여성을 세월이 그들에게 부여한 지위를 감안하여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라고 공손하게 부른다. 신령들 역시 어렴풋하게 친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령들은 힘과 지위 면에서 모두 조상보다는 상위에 위치하지만, 전씨 가족의 대신할머니처럼 어떤 신령은 이름난 조상이기도 하다. 신령은 광범위한 의미의 할아버지, 할머니인 것이다." "용수 엄마는 신령들의 분노를 두려워하며 그들의 뜻이 무엇인지 걱정하기도 하지만, 마치 한국의 어린아이가 조부모의 너그러움을 기대하듯이 신령들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한다."(116-7)


"남편이 없기 때문에 용수 엄마의 집은 마을 여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모임장소다. 그들은 틈날 때마다 용수 엄마의 집에 들러 학교 등록금, 허술한 마을 치안, 이웃마을의 계 모임에 대해 수다를 떨고 한담을 나눈다. 심지어 '미신'을 경멸하고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이장 부인조차 각자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고 수다스런 이 모임을 찾는다." "그러나 용수 엄마의 삶은 늘 잠재적인 모욕의 그늘 아래 놓여 있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얼마 전까지는 아이들조차 무당에게 반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지만, 싸움이 날 때면 용수 엄마의 직업이 여전히 들먹여진다." "만신은 매혹적이지만 도덕적으로는 애매한 여성 주변인들, 즉 여배우, 여성 연예인, 창녀에게 주어진 불명확한 신분의 고통을 함께한다." "만신은 주부들을 위한 의례 전문가이기에 집안에 머무는 참한 여성들에게도 필요한 존재이다. 만신은 참한 여성들 가운데에서 나와 그들처럼 살아가며 그들이 가진 근심과 희망을 이야기한다."(126-8)


"무당은 사기꾼이며 탐욕스럽다는 오해로 고통받기도 한다. 만신은 신령의 뜻을 해석하고 그 존재를 드러내 보여 줌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신령들이 보내는 최후통첩으로 인해 만신의 주머니는 현금으로 두둑해진다. 굿의 희극적인 부분은, 좀 더 많은 돈을 바라는 탐심 많고 욕심 많은 신령들과, 이에 고집스럽게 저항하고 반박하며 마지못해 항복하고 마는 주부 사이의 밀고 당기는 싸움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놀이이며, 이 놀이의 규칙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경기도 북부에서는 만신과 손님이 굿의 비용을 미리 정한다. 손님은 굿을 하기 며칠 전에 한 다발의 돈을 만신의 신당으로 가져온다. 굿을 하는 날 만신은 장구에 붙은 천 주머니에 기본 금액을 넣는다. 나머지 돈은 주부에게 돌려주는데, 주부는 굿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 돈을 별비로 삼아 끊임없이 요구하는 신령과 조상들에게 조금씩 지불한다. 주부가 이런 놀이에 전투적인 자세로 참여하지 않으면, 만신은 그 굿 〈맛이 심심하다〉고 말한다."(129)


"굿하는 비용은 가족이 이웃과 친척들에게 아침식사와 술을 정성껏 대접하는 백일잔치나 돌잔치 비용과 맞먹는다. 만신은 신령의 권위로 그 가족에게 푸닥거리, 신당치성, 굿을 하는 데 돈을 쓰라고 충고한다. 또한 신령의 요구가 있으면 단골에게 신복, 방울, 신칼, 악기 등을 바치라고 이야기해 준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신령의 말을 전달하는 것과 사기를 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공존하는데, 특히 신령의 요구가 무당의 수입과 위신을 올려 주는 경우에 그렇다. 만신은 생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단골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령들은 많은 것을 요구하지만 만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염려한다. 용수 엄마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탐심 많은 신령들과 자신을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단골들이 신당에 가져온 과일과 사탕 일부를 되돌려 보낸다. 또한 굿 비용에 대해 있을 수 있는 잠재적인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굿하는 집 가장의 호주머니에 술값을 찔러 넣어 주기도 한다."(130)


"어떤 만신이 경험을 쌓아 가면서 굿을 잘한다는 명성이 알려지면 다른 만신들이 굿을 할 때 그 만신을 자신들의 팀에 끌어들인다." "만약 한 만신이 다른 만신을 초청했는데 그 호의 가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중에 다른 사람을 부른다. 또한 초청을 받아 가게 된 굿에서 자기 노력을 적절히 보답받지 못했다고 느끼면, 자신이 당주 역할을 맡은 굿에서는 자신을 초청했던 만신을 부르지 않으며 추후에 있을 그 만신의 굿에도 참여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굿에서 만신들이 이루는 조합은 개방적이고 유동적이다. 이 조합은 굿에 따라서 새롭게 형성되며, 한 명의 만신은 1년 동안 여러 다양한 만신들과 함께 일한다." "자주 협력하여 일하는 만신들은 긴밀한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그들은 서로의 점을 쳐주고 서로의 신령들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임의적인 수고비 분배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잠재적으로 불안한 직업적 관계이기도 하다. 질투와 뒷담화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136-40)


제5장 목신동법, 귀신, 해로운 기운


"만신은 병이 낫지도 않고 그 병이 해로운 기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괘가 나오면 손님들에게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푸닥거리의 절차는 비교적 간단하다." "푸닥거리를 준비할 때 주부는 조粗 한 줌을 환자의 머리맡에 3일 동안 놓아둔다. 거친 곡물인 조는 그다지 맛 좋은 곡물이 아니기에 거렁뱅이 같은 귀신들에게 적당하다. 푸닥거리를 행하는 여성은 3일 동안 놓았던 조 한 줌을 환자의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고 나서 환자의 가슴을 누르면서 〈비나이다. 누구누구의 아픈 것을 멀리 가져가시오〉라고 빈다. 그러고 나서 환자를 향해 조를 세차게 뿌린다. 또한 환자에게 들린 귀신을 꾀어 몰아내기 위해 환자의 옷가지, 보통은 옷깃이 있는 셔츠 종류의 옷을 밖으로 던진다. 점괘에 환자가 〈죽을 운〉이 있다고 나오면 만신은 주부로 하여금 환자의 옷으로 닭을 묶게 한다. 만신은 환자의 몸 주위를 닭으로 둘러낸 다음, 대수대명을 위해 닭을 문 밖으로 던진다. 죽은 닭은 시체를 매장하듯이 산허리에 매장한다."(164-5)


"저승사자가 벌써 도착하여 혼령을 내놓으라고 할 정도로 상황이 긴박한 경우라면, 만신은 저승에서 온 특사를 속이는 데 필요한 작은 허수아비 인형을 손님 가족에게 준비하라고 한다. 이들은 인형에 환자의 이름, 나이, 생일이 적힌 종이를 집어넣고 환자가 입던 옷을 입힌 후, 마치 시체를 묶을 때처럼 일곱 번 묶어 준다. 이웃 사람들이 환자 주위에서 무덤 팔 때 부르는 노래를 부른다. 이때 환자는 인형을 꼭 쥐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다. 〈무덤 파는 사람들〉은 허수아비를 멀리 내가서 〈산 위에〉 묻는다." "이렇게 하여 병든 자아는 죽어서 지푸라기 인형과 함께 묻히고, 치료 과정에 들어선 새로운 자아가 다른 길을 통해 몰래 집으로 들어온다. 해를 입힌 귀신이 환자 가족의 혼령인 경우, 환자 집에서는 '영산다리'라고 불리는 긴 베를 제공한다. '영산'은 지옥에서 나와 극락으로 가기 위해 영산다리를 건너야 한다. 만신은 베로 환자의 몸을 휘감을 후 베를 세로로 찢는데, 이것은 혼령이 다리를 건너간다는 것을 뜻한다."(165)


"개인의 운세가 해마다 바뀌기 때문에 가족 중 누군가는 어떤 특정한 해에 초자연적인 문제들에 더욱 취약해진다. 희생자가 반드시 초자연적 존재의 분노를 일으킨 직접적인 대상일 필요는 없다." "개인의 운세와 초자연적 존재의 악의 사이에 놓인 상호작용에 대한 만신의 설명은 질병 접촉과 관련된 과학적 지식과 유사한 데가 있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감염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어떤 사람들은 영향을 받고 또 어떤 사람들은 탈이 나지 않는다. 만신과 그녀의 단골들은 개인의 취약성을 설명하기 위해 운세 관념을 사용하지만, 전체적인 진단과정을 꽉막힌 운명론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개인적인 운세 때문에 특정한 개인이 고통받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통의 무대는 가정 전체이다. 개인의 질병은 지붕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잘못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있는 조상, 귀신, 해로운 기운 등이 약해진 방어막을 뚫고 침입하는 것이다."(177-8)


"동법으로 말미암은 재앙─목신동법 또는 지신동법의 침입─은 추상적인 우주론적 원리들과 두 가지 측면에서 관련된다. 첫째, 누군가 손損 있는 날 잠재적으로 위험한 행동을 하거나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건을 집안으로 들이는 것은 시간과 방향의 원리들을 위반하는 행위이다. 둘째, 가족 중 한 명이─불길한 행동을 한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불길한 운세 때문에 동법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만신은 잡귀귀신과 해로운 기운을 몰아낼 때 환자에게 붙어 있는 목신동법과 지신동법을 몰아낸다. 하지만 쑥을 태워 집 전체를 소독하고 끓는 가마솥 안에 동법들을 잡아넣기 전까지는 만신의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전히 그 기운이 집 안에 남아 가족 중 누군가가 동법에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 만신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동법의 침입에 대한 예방조치로서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곳들에 부적을 붙인다. 만신은 이런 모든 활동을 통하여 그 집의 경계를 보호한다."(181-2)


# 목신동법 : 나무로 만든 제품이나 나무를 집안으로 들여오고 난 뒤에 식구 중에 누군가가 아프게 되면 '동티가 났다'라고 한다.


# 지신동법 : 지신은 토지신을 말한다. 이 신에게 고하지 않고 흙을 함부로 옮겨 건축한다거나 집수리를 하면 '지신이 발동한다'고 한다.


"죽은 자들─안식을 취하지 못하는 조상(조상말명)과 익명의 귀신(영산, 잡귀)─은 고통의 흔한 원인이 된다." "만족스럽지 못한 죽음 때문에 이들은 분노와 좌절 속에서 자신들의 비통함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조상은 영산이나 잡귀보다 훨씬 운이 좋은 존재로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으며 살 만큼 살다가 가족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한 조상들조차 한恨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만신에 실려 자신들이 살아 있었을 때 이루지 못했던 모든 것으로 인해 통곡한다." "한국인의 사회 통념에 따르면 이러한 모든 욕망은 정당하지만 운명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족의 영적靈的 방어수단이 약해지거나 가정신령들의 보호가 멈출 때면 이러한 조상들 중 누군가가 들썩거리게 되며 결과적으로 가족이 위험해질 수 있다. 만신은 〈조상손은 가시손이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조상이 산 사람들의 몸을 만질 때마다 상처가 생기게 된다."(182-3)


# 바깥에서 온 해로운 기운들

1. 홍액紅厄 : 각종 불행이 발생한 현장에서 비롯한다. 사람들을 둘러싼 불행이 응집된 것이며 질병이나 재앙을 악화시킨다.

2. 상문喪門 : 죽음 혹은 죽은 자를 위한 의례와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을 따라 집으로 들어오는 부정한 기운을 가리킨다.

3. 살煞 : 출산금기를 어겼을 때 발생한다. '보이지 않는 화살'처럼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곤란함을 야기한다.


"집 담장은 최후의 방어선이다. 하지만 담장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집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면 가족은 의례적 위험에 놓이게 된다. 집 담장을 수선하거나 창고를 짓고 지붕을 손보거나 가구를 재배치하는 일 때문에 가족은 목신동법이나 지신동법의 침입이라는 위험을 맞닥뜨린다. 가정 전체가 이사하면서 살림살이를 다른 집으로 옮기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 우주론이 약속하는 바는, 세상에는 질서가 존재하며 이 질서를 따르면 안전하다는 것이다. 잠재된 위험도 사람들이 손 없는 날의 순환에 맞추어 중요한 행동과 여행을 한다면 피할 수 있다. 건축과 재배치가 집이라는 물리적 몸체에 혼란을 준다면, 결혼이나 환갑 혹은 장례는 가정의 사회적 관계에 혼란을 준다." "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가정에서 여성들은 보호의 의무를 담당한다. 무당과 주부는 가정의 신령과 조상을 모시고 달래며 때로는 회유하면서, 집을 하나의 방어 보루로서 공고히 만든다."(196-8)


제6장 가정의 신령과 양가 친족의 신령 모시기


"한국 여성의 의례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한국인의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야 한다. 집 안으로 들어가도 신령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의 가정신령들은 가옥 구조 안에 숨어 있다. 성주는 대청 위 대들보에, 삼신할머니는 안방에, 터줏대감은 뒷마당에, 본향산신과 칠성신은 집 뒤편 장독대에, 조왕신은 부엌에, 변소각시는 물론 화장실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신이 있고 수문은 대문 문턱에 자리한다. 오방터전은 집 담장 안에 있는 모든 방, 창고, 가축우리에 있으며, 도시의 집들에서는 개집에까지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신령은 개별 주거지와 주거지 주변의 특이성 때문에 모셔지기도 한다. 이런 신령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무당의 점괘가 나오면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집 앞 한쪽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 가정은 '가게대감'이나 '상업대감'을 모신다. 만신은 '살육대감'이 다니는 길이 집터를 관통하고 있는지도 판단해 준다. 어떤 가정에서 '도깨비대감'은 집 옆에 있는 수풀 속에 숨어 있다."(201-3)


"집과 집터의 신령들은 '고사'라고 불리는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고사 음식은 가족의 성찬sacrament이다. 쌀이 담긴 남성 가장의 밥그릇과 수저를 성주 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중에 가장은 이 쌀로 지은 밥을 먹을 것이며, 성주에게 바쳤던 술은 아내와 함께 나눠 마실 것이다. 아이의 밥그릇과 수저는 삼신할머니 상에 올려놓는다. 아이는 이 그릇 안에 든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삼신할머니와 칠성신 상에서 내려진 옥수를 마신다." "가족에게 문제가 일어났지만 굿을 할 만큼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경우나 경제적 여유가 없는 경우, 도시의 이웃이 무당의 장구 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에도 고사를 추천한다. 만신의 고사는 주부가 지내는 조용한 고사와 화려한 굿 사이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신령들이 말을 하고 가족들에게 공수를 주지만, 굿에 필요한 신복, 장구, 춤, 대규모의 드라마, 무언극은 없다. 비교적 저렴한 방식으로 신령의 뜻을 알고 그들이 가정에 내리는 재수를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다."(203-7)


"터줏대감은 현재의 가정, 즉 집 담장 안의 여러 장소를 순찰하며 그 자리에 거주하는 가족의 부와 재수를 통제한다. 터줏대감은 추상적인 풍수원리들이 인격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풍수에 따른 집터나 묏자리는 원래부터 좋거나 나쁜 것으로서, 가족의 재수를 통해 좋은지 나쁜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터줏대감을 다른 집 터의 대감과 비교하여 더 좋다거나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특정한 집 대감이 다른 집 대감보다 더 세거나 활발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좋고 나쁜 것이 뒤섞인 복福이다. 즉, 영향력이 강한 초자연적 대감은 주기적으로 바치는 재물에 만족했을 때에만 가족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었는데 대감에게 고하지 않는다면 기분이 상한 대감이 벌을 내린다." "온전한 떡시루, 소 다리, 돼지머리, 또는 소의 육중한 머리는 대감신령들이 합당하게 여기는 제물이다. 예상할 수 있듯이, 터줏대감도 술을 많이 마시고 돈을 요구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211-2)


"만신전 내에서 특별히 강력한 신령은 여성들이 적절한 옷을 바치면 좌정하며, 분노에 찬 적대적 존재에서 자비로운 보호자로 변화된다. 옷에는 단골의 이름을 새겨 만신의 신당에 보관한다. 여성이 신당에 옷을 바치고 난 후 굿에서 만신이 그 옷을 입고 춤을 추면 신령은 즐거워한다. 하지만 옷을 바친 여성의 의례적 책임은 늘어난다. 이렇게 바쳐진 옷을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신령이 가정에 있음을 의미한다. 신령은 수년에 한 번씩 하는 굿으로는 점점 만족하지 못하게 되며, 만신의 신당에서 정기적으로 치성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신령은 옷이 낡아 해지면 새것을 요구한다. 전씨네 굿에서 대신할머니는 자신의 옷과 전씨네 할머니의 주름치마를 비교하고 억지를 쓰며 불평했다. 배씨 가정의 굿에서는 불사가 주부의 귀를 잡아 흔들며 그 여성이 수년 전 바쳤던 하얀 장삼이 이제는 온통 좀먹었다고 화를 냈다. 이 여성은 굿이 끝나고 3일째 되던 날, 새 장삼을 짓기 위해 흰색 옷감을 끊어 만신의 신당에 바쳤다."(234-5)


"만신전에서 특별히 강한 영향력을 가진 신령은 보다 넓은 가족 전통에서 나오므로 이러한 신령의 영향력은 개별 가정을 넘어서 확산된다." "이런 전통을 영속하는 데 주요한 인물은 여성이며, 신적 영향력은 부계로 구성된 집의 경계를 넘어선다. 동자별상과 호구는 출가한 누이나 언니를 따라가 새집에서 불길한 존재가 된다. 다른 신령들도 여성을 따라 남편의 집으로 가서 어떻게 대접받느냐에 따라 그 가족에게 이득이 되거나 해를 끼친다." "여성은 영향력이 강한 신령들을 보살피고 대접하는 방법을 시어머니와 만신에게 배워서 자신의 의례적 가족을 보호한다. 하지만 어떤 여성의 관심은 가끔 의례적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친정과 출가한 딸의 가정에까지 미친다. 이런 여성의 신령들은 그 영향력이 여러 가족을 가로질러서 모든 가능한 방향들에까지 확산되는 친족의 신령들이다. 한국의 여성의례 영역에서는 신령이나 조상 그리고 귀신 어느 하나도 남성을 중심으로 정의된 친족의 경계선 앞에서 멈추지 않는다."(237-41)


# 동자별상 : 홍역이나 마마에 걸려 단명한 어린아이이고 호구는 결혼하기 전이나 결혼 직후에 죽은 처녀이다. 


제7장 조상 모시기


"조상들은 만신의 입을 통해서 필수적인 혹은 바람직한 의례의 형식을 조율한다. 만신은 엄격한 조상숭배 구조에 필수적인 융통성이라는 요소를 삽입한다. 남성들이 의례적 지침과 정통적 관습에 따라 조상제사를 모신다면, 여성들은 조상들과 실랑이를 벌이거나 흥정을 하면서 기어코 그들과 화해하여 그들을 가족의 품 안으로 이끈다. 경계가 명확한 몇 분의 제한된 조상들만이 제사에서 모셔지는 것과 달리 만신의 점, 푸닥거리, 굿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조상'이 등장한다. 여성들은 제사에서 모실 수 있는 조상 집단을 구별해 주는 배타적인 부계 원리에 의문을 갖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신과 상담할 때 여성들은 가정의 제사상에서 대접받을 자격이 없는 온갖 종류의 조상들도 가족의 재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여성의 친정에서 따라온 조상과 귀신이 시댁 집안 구성원들의 건강과 재산, 행복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며, 출가한 딸의 혼령이 죽은 후 친정으로 돌아오기도 한다."(256-8)


"딸들은 결혼을 해서 나가지만 죽었든 혹은 살았든 이방인이 되지는 않는다. 역으로 부인의 친정집에서 비롯된 조상과 귀신의 영향이 남편 집 담장 안으로 들어온다. 여성의 친정 부모(혹은 조부모까지)가 굿의 조상거리에서 등장한다. 여성의 죽은 형제들도 자주 나타나는데, 그들의 결혼 여부는 상관 없다. 만신은 부부 간의 문제를 결혼하지 못하고 죽거나 혹은 아이 없이 죽은 형제의 영향 탓으로 돌린다." "결혼식 전날 신부의 집 조상과 귀신들을 대접하는 여탐은 제멋대로인 귀신들을 좌정시켜 결혼할 딸을 의례적으로 순수하고 부정적인 초자연의 기운이 정화된 상태로 만드는 의례이다. 여탐 의례는 신부를 자신의 집에서 분리하는 결혼식이라는 의례 과정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 선택적 의례로서 여탐이 의미하는 바는, 적절히 예방하지 않으면 가족의 조상과 귀신들이 신부를 따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한 지 수년 후, 만신의 점괘에서 집안 갈등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죽은 형제들을 발견한다."(270-1)


"아내의 친정으로부터 온 조상과 귀신들이 어디에서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가정한다면, 무속의례에서 이들의 등장은 남성 중심적 가치, 즉 결혼한 여성들은 자신의 친족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가치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부인과 친정 사이의 지속적인 유대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모순되기 때문에 의례상 위험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내가 받은 인상에 따르면, 부인 측에서 비롯된 조상과 귀신의 영향이 남편 측에서 비롯된 그러한 존재들의 영향보다 더 부정적이지는 않다. 실제로 신랑의 가족도 자기 가족의 조상과 귀신들을 위해서 여탐을 한다. 어떤 가족들은 환갑잔치 전에 여탐을 하기도 한다. 안정되지 못한 망자들과의 긴밀한 접촉이 위험하다는 이 원칙은 남편과 아내의 친족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남편과 아내 측 모두는 의례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들로부터 죽은 자들을 분리하며, 죽은 자들은 잘 달래졌을 때 각각의 친족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271-2)


"조상에 대한 모순된 관념은 사회 조직의 상보적 원리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남성 제사의 조상과 여성의 굿의 조상은 서로 대조적이지만 중요한 가족 관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부계 가족은 자원과 충성심을 가족 안으로 집중시킨다. 결혼을 통해 들어온 부인 그리고 결혼을 통해서 나가는 자매와 딸들은 그 가족에게 분산된 양측 친족을 연결하는 방사형의 바퀴살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이 (후원자 역할을 하는) 친정 친족에게 빈번하게 의지한다면, 남성들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들의 친인척에게 의존한다." "남편의 친족과 여성의 친족 모두는 잠재적인 도움의 저장소이지만, 동시에 이들은 서로의 자원을 고갈해 버릴 수도 있다. 친척과의 관계는 망자를 대하는 것처럼 양면적이며 잠재적으로 위험하다. 친척이나 망자와 관련된 모든 문제는 신중하게 처리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결속을 확인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모여야 한다. 또한 이들을 적절하게 대접해야 하며 도움을 구할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멀리해야 한다."(276-7)


제8장 여성의례


〈이 장에서 제시한 종류의 일반화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비교 측면에서나 한국 농촌의 다양성과 변화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순진한 기획이었다. 지금의 나는 이 장을 지금과는 다른 시기의 인류학이 만들어낸 가공품으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부분을 생략하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한국어판 서문(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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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무속고 - 역사로 본 한국 무속,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서남동양학자료총서
이능화 지음, 서영대 옮김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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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조선무속고」 역주


1장 조선 무속의 유래


"조선 민족은 상고시대에 신시(神市)가 있어 자신들의 종교로 삼았으며, 천왕환웅(天王桓雄)과 단군왕검(壇君王儉)을 하늘에서 내려온 신, 혹은 신과 같은 인간이라 했다.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으므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무당이라는 말을 왕자(王者)의 호칭으로 삼았고[차차웅次次雄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하는데, 고유어로 무당을 뜻한다], 고구려에는사무(師巫)라는 명칭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한의 천군(天君)·예(濊)의 무천(무天)·가락(駕洛)의 계욕(계浴)·백제의 소도(蘇塗)·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에 이르기까지 단군 신교의 유풍(遺風)과 잔존 민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것이 이른바 무축의 신사(神事)이다. 후세로 내려와 문화가 진화하고 유교·불교·도교가 연이어 수입되어, 유교에는 길흉의 예(禮), 불교에는 분수(焚修)의 법, 도교에는 초제(醮祭)의 의식이 있었고, 이 외래의 종교들이 고유의 풍속과 뒤섞이게 되었다."(71-2)


2장 고구려의 무속


"고구려의 무속을 살펴보면 무당은 사람이 병에 걸리게 된 원인을 말하고, 뱃속의 아이를 점치고, 재이(災異)에 대해 말하고, 인귀(人鬼)가 자기에게 내렸다고 말하며, 시조 왕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사무(師巫)라는 것은 주(周)나라의 태사(太師)가 국가를 위해 길흉을 점쳤다거나, 살만(薩滿, shaman의 한자 표기)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한 것과 같다. 그리고 사무는 왕에게 덕을 닦아 재앙을 물리칠 것을 권했는데, 그 말이 대단히 이치에 맞았다. 만약 이 말이 『좌전(左傳)』이나 『한서(漢書)』 속에 있었다면 현명한 신하나 좋은 관리가 재이에 대해 논하는 것과 그 뜻이 서로 비슷하여, 당연히 조금도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말이 무당의 입에서 나온 까닭에 사람들이 모두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새겨 보면 당시에 왕의 사표(師表)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에 재이가 있으면 반드시 사무에게 물었던 것이다."(85-6)


3장 백제의 무속


"백제 무속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여, 마지막 왕의 마지막 해에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독한 기록이 하나 있을 뿐이다. 대개 백제는 본디 부여·고구려에서 나왔으므로, 백제의 무속이 고구려와 같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에서는 무당이 여우의 변괴를 설명한 것이 있고, 백제에는 무당이 거북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 있는데, 이러한 것이 동일 계통에서 나온 것임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溫祚王) 25년(AD 7) 봄 2월 왕궁의 우물물이 넘쳐흐르고, 한성(漢城)의 인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이었다. 일자가 말하기를 〈우물물이 넘쳐흐른 것은 대왕께서 발흥할 징조이며, 소가 머리 하나에 몸뚱이가 둘인 것은 대왕께서 이웃 나라를 병합할 조짐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마침내 진마(辰馬, 진한과 마한)를 병탄할 마음을 가졌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일자(日者)라고 한 것도 아마 무당일 것이다."(91-2)


4장 신라의 무속


"신라 말로는 무당을 차차웅(次次雄)이라 했다. 웅(雄)을 가리켜 무당이라 함은 반드시 신시(神市)의 환웅(桓雄)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니, 대개 환웅의 신시란 곧 고대 무축(巫祝)의 일이기 때문이다. 또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하는 까닭에 단군(檀君)이라 했으니, 단군은 곧 신권천자(神權天子)이다. 신라인은 차차웅이 제사를 받들고 귀신을 섬기는 까닭에 이를 두려워하고 공경했고, 마침내 웃어른을 차차웅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고유어는 삼한에서 시작되었다. 환(桓)과 한(寒)은 음이 서로 가깝고 한(寒)의 훈은 차(次)이다."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신라 제2대왕)은 단지 무당이라는 칭호만 빌렸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곧 제사를 주관하고 신을 섬기는 자였으니, 그 또한 한 사람의 단군이라 할 수 있다." "남해차차웅은 그의 친누이인 아로(阿老)로 시조묘(始祖廟)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대개 신라의 풍속에서는 무당이 제사를 숭상하고 귀신을 섬겼으니, 아로 또한 필시 무당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93-4)


5장 고려시대의 무속


"무당을 모아 비를 빈 것은 바로 고대에 무당으로 하늘에 제사한 증거이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말하기를 〈환웅(桓雄)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세상에 머물면서 통치를 했다. 바람 신[風伯], 비 신[雨師], 구름 신[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을 주관했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재했다. 그의 아들 단군왕검(檀君王檢)이 나라를 열어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바람 신과 비 신을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을 주관하며, 하늘과 귀신을 제사한 것은 곧 고대의 신권군주(神權君主)가 백성의 생명을 위해서 풍년을 기원하고 비를 빌던 무축적 신사(神事)였다고 하겠다. 이것이 후세에 하늘이 가물어 기근이 들었을 때 무당을 모아 비를 빌었다든지, 시장을 옮겼다든지 하는 것의 근원이다. 고려는 국초부터 마지막 왕에 이르기까지 무릇 가뭄을 만나면 반드시 무당을 모아 비를 빌거나, 혹은 시장을 옮기곤 하였다."(96-7)


6장 조선시대의 무속


"승려나 무당이 비를 비는 것은 고려시대에도 이미 그러했지만, 대개 고대에는 비단 무당으로 비를 빌었을 뿐만 아니라 무릇 하늘과 땅, 일월과 성신, 산천 제사에서부터 바람 신·비 신에 대한 제사에 이르기까지 무당을 쓰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의 옛 무당은 이집트의 제사장이나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브라만)과 마찬가지로, 제사와 기도 등 일체의 의례를 주관하던 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단 3교[유교·불교·도교]가 수입된 다음부터는 승려·도사·무격이 신을 제사하는 데 함께 쓰이게 되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기우 의식에 대하여 논하기를 〈성안의 집집마다 병에 물을 담고 버들가지를 꽂았다〉고 했고, 『인조실록』에서는 〈마을의 집집마다 물병을 마련하여 버들가지를 꽂아놓으며, 눈먼 무당이 기원을 한다〉는 말이 있다.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대자대비하여 고난을 구제할 때 버들가지로 감로수를 뿌린다고 한다. 물병에 버들가지를 꽂고 승려나 무당이 비를 비는 것은 곧 이런 뜻에서이다."(116-8)


7장 궁중에서도 무당을 좋아함


"태종 18년 무술(戊戌=1418) 봄 2월 임진(11일), 형조에서 무녀를 처벌하기를 청하면서 아뢰었다. 〈성령대군(誠寧大君)의 병환에 대해 국무 가이(加伊)는 기양(祈禳)해도 화를 면하게 하지 못했고, 무녀 보문(寶文)은 병세를 살피지 않고 궁궐에서 잡신을 옳지 못한 방법으로 제사하여 불측한 일을 초래했으니, 법으로 다스리기를 청합니다〉라 했다. (『태종실록』)" "세종 2년 경자(庚子=1420) 여름 6월 신해(14일), 무당을 시켜 별을 제사했으니, 대비의 뜻이었다. 계해(16일)에 임금께서 대비를 모시고 선암(繕巖) 아래 개천가로 납시어, 무당에게 명하여 장막에서 신에게 제사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성종이 일찍이 병에 걸리자 대비가 여자 무당을 시켜 기도하면서 반궁(泮宮, 성균관의 별칭)의 벽송정(壁松亭)에서 음사를 했다." "왕(연산군)은 무당굿을 좋아하여 스스로 무당이 되어 음악을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추어 폐비(廢妃, 그의 어머니 윤씨이다)가 빙의된 형상을 하였다. (『연산군일기』)"(126-30)


"중종 10년 을해(1515) 윤 4월 을해(18일), 이때 무녀(巫女) 돌비(乭非)가 스스로를 국무라 하고 대궐을 드나들면서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빌기도 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선조 8년(1575), 인순왕후(仁順王后)가 편찮았다. 그때 요망한 무당이 대궐을 출입하면서 오로지 기도와 현혹을 일삼았고 약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에 속아서 큰 변고를 초래했다." "이익(李瀷, 영조 때 사람이다)의 『성호사설』에서 이르기를 〈가까이는 서울에서부터 멀리는 주읍(州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무(主巫)가 있어[대궐을 출입하는 자를 국무녀(國巫女)라 하고, 주읍에 출입하는 자를 내무당(內巫堂)이라 한다] 마음대로 출입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풍속이 이를 따르게 되었다〉고 했다." "고종 때 두 무녀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성이 이씨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윤씨였다." "이·윤씨 뒤에 또 수련(壽蓮)이라는 여자 무당이 있어 대궐을 출입하며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의례를 했고, 두 아들은 모두 고관이 되었다."(131-4, 139-41)


8장 무격이 소속된 관서(官署)


"조선시대 초기를 보면 국무(國巫)를 성수청(星宿廳)에 두었는데, 아마도 이 제도는 고려시대에 유래된 듯하며, 이것은 곧 무당이 도교와도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격을 활인서(活人署, 의료기관)에 두어 병자의 치료를 맡겼는데, 이것은 무당이 의술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대개 옛날에는 무당이 의약을 주관했음은 『산해경』에 보이며, 그러므로 의(醫)라는 글자는 무(巫)자를 따랐으니, 조선시대에 무로써 병을 치료한 것 역시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세종 18년(1436) 여름 5월 정축(12일), 삼정승인 황희, 최윤덕, 노한 등을 불러 정사를 논의하였다." "황희와 최윤덕 등이 아뢰기를 〈율에 따라 다스리지 않고 갑자기 놓아주면 요망한 무당들이 자신의 죄가 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오니, 율대로 다스려서 그 죄를 알게 하고, 그 다음으로 특별한 은혜로써 감등해서 죄를 결정하여 활인원에 소속시키면 어짊과 위엄이 함께 행해질 것이며, 요망한 무당들도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했다. (『실록』)"(142-7)


9장 무업세(巫業稅)와 신포세(神布稅)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말했다. 〈민간의 풍속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기도와 축원을 하면서 이를 신사(神事)라 하는데, 법으로 능히 금하지 못하고 있다······무릇 무녀들은 모두 세금을 내고, 관에서는 그 물건으로 이득을 보는데 무녀의 재물은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는 모두 기도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니, 그래서 금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긍익(영조 때 사람)의 『연려실기술』에서 말했다. 〈우리 동방은 서울로부터 두루 8도에 이르기까지 무격의 번성함이 거의 남초(南楚)보다도 심한데, 이것은 부녀자들과 어리석은 백성들이 지성으로 믿고 부지런히 섬기는 탓이다. 재산을 없애고 풍속을 그르치며 나라의 기강을 경멸하고 거리와 마을을 음란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여러 읍의 수령들 중에 간혹 그것을 몹시 싫어하는 자가 있어 마음속으로는 쫓아내고 철저하게 금지하고자 하지만, 해마다 무포를 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 까닭에 이를 탐하여 감히 다스리지 못하니 개탄할 일이다.〉"(171-4)


10장 무병(巫兵) 제도


"고려 말에 무당으로 하여금 말을 내게 하여 군용에 충당하라는 명령이 있었고, 조선조 말에는 무당을 병사로 삼았다." "고종 9년 임신(1872) 5월 15일 무술(戊戌)에 충청수영의 포과(砲科) 설치 요청을 허락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수사 이규안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의 무부(巫夫) 가운데 대포에 정통한 자 3백명을 엄선하여 난후포수라 이름하고 청(廳)을 설치하여 교대 근무시키려고 한다 하니, 보고한 바에 따라 윤허하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해서, 이를 윤허했다. (『일성록』)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서 말했다. 〈병인양요에서 교훈을 얻은 대원군은 대대적으로 군비를 정돈했는데, 전담기관을 설치하여 대포를 주조하고 화약을 제조했다. 팔도의 배우[배우는 또한 광대라고 하는데, 곧 무부(巫夫)이다]와 놀이패의 무리들을 대오로 편성하여 총포에 대한 기술을 연습하도록 하고, 난후군이라 이름하여 여러 고을[州郡]에 배치하였다.〉"(179-81)


11장 요망한 무당과 음사(淫祀)를 금하다


"태조 7년 무인(1398) 여름 4월 경인(3일), 요망한 인물[妖人] 복대(卜大)가 처형당했다. 복대는 문주(文州) 사람으로, 여자 옷을 입고 무당 노릇을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하고 어지럽혔다. (『실록』)" "태종 11년(1411) 12월 기미(9일), 예조에서 아뢰기를 〈사전(祀典)을 살펴보면 주작의 신만 따로 남방에서 제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그것을 없애라고 명령했다. (『실록』)" "세종 12년(1430) 8월 갑오(2일),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런 말에 현혹되어 병이나 초상이 나면 곧 야제(野祭)를 행하고, 야제가 아니면 재앙의 원인을 풀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남녀가 무리를 이루고 무격을 불러 모아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려 놓습니다. 예를 깨고 풍속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수령으로 하여금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관리나 리(里)의 정장(正長)·색장(色掌) 등도 함께 그 죄를 다스립시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실록』)"(183-85, 191)


"성종 9년 무술년(1478) 정월 경인(27일), 사헌부(司憲府)에 전지(傳旨)하시기를 〈음사를 금하는 법은 『경국대전』에 기재되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즉 도성 안에서 야제를 행하는 자,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친히 야제 및 산천·성황사(城隍祠)의 제사를 행하는 자, 사노비를 사찰이나 무격에게 바치는 자, 임금의 행차 때 길가에서 신에게 제사하는 자, 조부모나 부모의 영혼을 무당의 집에 맞이하여 혹은 지전(紙錢)을 쓰거나 혹은 형상을 그려 제사를 지내는 자, 상인(喪人)이 무격에게 가서 음사를 행하는 자, 공창무격을 믿고 따르는 자 같은 것은 이미 금지했다. 그러나 담당 관청에서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데 점점 해이해지고 있으니, 앞으로는 한결같이 『경국대전』에 의하여 엄하게 조사하여 금지하도록 하라〉 했다. (『실록』) 『대전회통』[형전(刑典)][속(續)] 신을 제사하는 것을 금한다[서울 안팎의 대소 음사는 성 밖 10리로 한정한다. 관에 신고하고 제사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199)


12장 무당을 도성 밖으로 쫓아내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8년(1533) 2월 16일(기축)조에 '용산강(龍山江) 무녀의 집' 운운이라는 기록이 있고, 근세에는 서울 남대문 밖의 우수현과 용산강의 노량진에 무격이 모여서 사는데[정조 때 무격을 강 밖으로 쫓아냈다. 강 밖이란 노량(露梁)을 말한다], 이는 모두 서울에서 쫓겨나 부락을 이룬 것들이다. 조선시대 이래로 유학자들의 무리가 이단을 공격하고 좌도(左道) 배척을 과업으로 삼아 무격을 쫓아내어 도성 안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하고, 승려들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자는 의견을 개진하면서 '좌도와 이단은 백성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몰아내자'고 했다. 그렇다면 경성 문밖의 땅은 왕의 땅이 아니며, 경성 문밖의 백성은 왕의 신하가 아니라는 말인가." "고종 을미년(1895)에 내린 단발령의 경우에도, 성문 밖의 백성은 불문에 부쳤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만 도성 안만 법을 세우고 정치를 행하는 구역이고, 문밖의 8도 360주는 교화의 범위 밖에 두었다는 의미이다."(204-5)


13장 무격의 술법


1. 공중에서 소리를 냄[空唱] : 귀신이 공중에서 지르는 소리를 무당이 받아 사람의 화복을 말하는 것

2. 신탁(神托) : 신이 몸에 내리는 것

3. 거울을 걸어둠[掛鏡] : 신이 안에 있는 거울을 걸어두는 것

4. 부적[符呪]

5. 운명을 점침[卜命]

6. 쌀점[米卜]

7. 무당의 점복[巫卜]

8. 고리짝(대나무나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 긁기 : 신에게 기도할 때 노래의 반주로 삼음

9. 접살법 : 사람이 죽으면 대략 사흘 뒤에 살신(저승사자)과 함께 돌아오는데, 이때 사자와 살신을 잘 대접하는 의식

10. 칼날 위를 뛰면서 추는 춤

11. 강신술(降神術)

12. 죽은 영혼을 위해 길귀신을 내리게 하다 : 죽은 넋에게 길을 알려주는 길귀신을 내려주는 의식


14장 무고(巫蠱)


"우리말에 무고(巫蠱)나 저주하는 일을 '방자(方子)'라고 하는데, 저주로 번역되는 것이 이른바 무고이다." "조선시대 여러 임금 때도 궁중에 또한 무고의 변괴가 많았고, 그때마다 당쟁에 이용되었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도 늘 저주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는 모두 여자 무당들의 짓이었다." "이러한 풍속이 대단히 성행했는데, 남의 집의 종이나 첩들이 조금이라도 원한이 있으면 곧 새나 짐승, 썩은 뼈나 허수아비 등의 물건을 사용하여 온갖 술법을 꾸며서 담 밑이나 부엌과 굴뚝에 묻어서 다른 사람에게 병이 전염되도록 한다. 이를 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가끔 죽게 되며, 혹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어서 시주병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는 자가 잇달아도 오히려 줄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무격 가운데 저주를 잘 다스리는 자는 남의 집에 들어가면 바로 흉물(凶物)이 있는 곳을 알아 끄집어내서 없애버리며, 또 범인의 이름을 말하기도 하는데,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맞지 않기도 한다."(239-43)


# 시주병(尸주病) : 죽은 사람의 혼이 딴 사람의 몸에 붙어서 생기는 병


15장 무축(巫祝)의 용어와 의식(儀式)


1. 어라하만수(於羅瑕萬壽) : 백제 고유어로 왕을 어라하(於羅瑕)라 한다. 우리 임금님 만세라는 뜻이다.

2. 강남조선(江南朝鮮) : 중국의 강남 일대는 무격을 숭상하고 귀신 섬기기를 좋아했으니, 그곳에 빗댄 말이다.

3. 일출세계(日出世界)·월출세계(月出世界)·사해세계(四海世界) : 조선 태조가 도읍을 청할 때 왕사인 무학이 이를 점쳐서 한양에 도읍함에 따라 태평의 기상이 깃들어있음을 송축하는 말이다.

4. 만신(萬神) : 동이 민족의 고대 신사(神事)의 기록에 나온 것으로 추정하며, 우리 동방을 '신들의 집'이라 칭한 것에 근거를 둔다.

5. 삼신(三神) : 단군의 삼대인 환인(桓因)·환웅(桓雄)·왕검(王儉)을 가리킨다.

6. 시왕(十王) : 무속의 도교화 혹은 불교화를 보여주며, 명계(冥界)의 10대왕(제5가 염라대왕)을 가리킨다.

7. 삼불(三佛) : 무당이 사용하는 부채에 그려진 세 부처, 곧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가리킨다.

8. 만명(萬明) : 신라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을 신으로 삼은 칭호이다.

9. 칠금령(七金鈴) : 무당이 노래할 때 손에 들고 흔드는 7개의 금속제 방울이다.

10. 신단(神壇) : 무당이 굿할 때 부르는 노래말에 들어 있는 초단(初壇)·이단(二壇)·삼단(三壇)을 가리킨다.

11. 강신(降神)

12. 어비대왕(魚鼻大王)과 바리공주[鉢里公主] : 어비대왕은 『삼국유사』에 기재된 처용랑(역신에게 부인을 빼앗겼으나 이를 보고도 물러난 자)를 가리키며, 그의 일곱번째 딸이 바리공주이다(처용의 아내라는 설도 있다).

13. 법우화상(法祐和尙) : 지리산의 엄천사를 창건한 화상으로 불법 수행이 대단했다고 알려져 있다.


16장 무당이 행하는 신사(神事)의 명칭


"무당이 행하는 신사(神事)를 통칭해서 '굿'이라 하는데, 대개 우리의 속어에는 흉하고 험한 일을 가리켜 '굿'이라 한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비가 오는 날을 '궂은 날'이라 하고, 초상이 나면 '궂은 일'이라 한다. 이로 미루어 무당이 신사를 행하는 것은 그 목적인 흉사나 재난을 기원을 통하여 물리치려는데 있다 하겠고, 그런 까닭에 이를 이름하여 '굿'이라 하지 않았는가 한다. '굿'의 다른 이름은 '풀이' 혹은 '석'이라 한다." "'석'의 음을 한자로 옮기면 '석(釋)'인데, 이는 곧 석방과 해탈이라는 의미이다. 대개 인간의 운명은 본래부터 재난과 고통에 속박되어 있으므로 신에 대한 제사의 힘을 빌려 석방·해탈의 길을 얻는다는 말이다. '석'이라는 말의 근본은 불교의 용어에서 나왔다. 대개 우리 한국의 사찰에서는 새벽에 종을 치고 범패(梵唄)를 창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석(釋)이라 한다. 그 뜻은 곧 지옥의 중생이 이 종소리와 범패를 들으면 해탈과 석방을 얻고, 그 고뇌를 면한다는 것이다."(282-4)


1. 성주신사(城主神祀) : 10월 농사가 끝난 후 속칭 무오(戊午) 말의 날에 행하는 신사

2. 낙성신사(落成神祀) : 방이나 집을 다 짓고 난 후에 행하는 신사

3. 제석신사(帝釋神祀) : 제석은 곡식을 주관하는 신으로서, 농사가 끝난 후 성주신사와 같은 시기에 행하는 신사

4. 칠성신사(七星神祀) : 인간의 탄생과 수명 등을 관장하는 칠성신(북두칠성을 신격화한 신)에게 행하는 신사

5. 조상신사(祖上神祀) : 조상신을 청하고 대접하는 신사

6. 삼신신사(三神神祀) : 태(胎)를 지켜주는 삼신에게 행하는 신사

7. 지신석(地神釋) : 토지신을 위안하기 위한 신사

8. 성황제(城隍祭) : 성황당(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으로서, 소망을 기원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에서 행하는 신사

9. 당신신사(堂神神祀) : 특정 지역을 진호(鎭護)한다고 여겨지는 산신에게 행하는 신사

10. 별신사(別神祀) : 봄이 여름으로 바뀔 때 산과 강의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1. 도액신사(度厄神祀) : 정월 보름 전에 1년의 재액을 예방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2. 예탐신사(豫探神祀) : 약혼한 남녀에게 흉액이 있을 때, 재액을 예방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3. 마마신사(마마神祀) : 천연두 신을 내보내기 위해 행하는 신사

14. 용신신사(龍神神祀) : 해상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면서 밤과 쌀로 밥을 지어 물고기들에게 공양하는 신사

15. 초혼석(招魂釋) : 혼신을 불러 편안하게 하며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행하는 신사

16. 지로귀산음신사(指路歸散陰神祀) : 산 사람들이 현세에서 좋은 일을 하고 이를 망자에게 돌리기 위해, 곧 망자의 극락천도를 빌기 위해 행하는 신사


17장 성황(城隍)


"성황은 본디 『주역』의 태괘(泰卦) 상육(上六) 효사(爻辭)에서 나온 것으로, 성지(城池)를 말하는 것이며, 전(傳)에 이른바 '해자의 흙을 파서 높이 쌓아 성을 만든다'라 한 것이다. 추측하건대 성지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성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이로 하여금 옳게 죽지 못한 귀신들을 이끌도록 한 것인 듯하다." "이익은 『성호사설』 성황묘조(城隍廟條)에서 〈성황신에 고하여 여러 영혼들을 소집해서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을 권해드리니, 너희들 여러 귀신은 와서 이 음식을 흠향하고 전염병과 재앙으로 사람들의 화기(和氣)를 해치지 마라〉고 했다." "이익은 또한 〈우리나라 풍속은 귀신 섬기기를 좋아하여 혹은 꽃 장대를 만들고 여기에 지전(地錢)을 어지럽게 걸고, 마을마다 무당이 돌아다니면서 성황신이라 하면서, 백성들을 속이고 재물을 빼앗을 계책으로 삼고 있으나, 어리석은 백성은 이것이 두려워서 앞을 다투어 재물을 바친다. 그런데도 관에서는 금령을 만들지 않으니 괴이하구나〉라고 하였다."(310-4)


18장 서울의 무풍(巫風)과 신사(神祠)


"우리나라 풍속에 무릇 사람이 노래와 춤을 하면서 흥을 북돋우면 '신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대개 무당에서 비유를 취한 것이다. 여자가 장차 무당이 되려면 먼저 수십일 병을 앓는데,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고, 반드시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춘 다음에야 마음이 시원하게 되며, 이것으로 무신(巫神)이 있어 그렇게 시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면 여러 집을 다니면서 쌀을 얻어다가 떡과 과자를 갖추고 무당에게 스승이 되어줄 것을 청하는데, 이를 불러 신어미라 하고, 큰 굿을 행하는데 이를 몸굿이라 한다. 이 여자가 한바탕 펄쩍펄쩍 뛰면서 춤을 추면 무신이 접하고 병은 씻은 듯이 나으며, 이때부터 신어미로부터 무업(巫業)을 배운다. 서울에서는 무당을 만신(萬神)이라 하는데, 대개는 빌지 않는 신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서울 무당이 받드는 신에는 부군신(付君神)·군왕신(君王神)·대감신(大監神)·전내신(殿內神)이 있으며, 또 남산 국사당(國師堂)·인왕산(仁王山)·칠성당(七星堂) 등이 있다."(321-2)


1. 부근당(付根堂) : 서울의 관청마다 있는 신사(神祠)를 부근당이라 하는데, 이 말이 와전되어 신당의 네 벽에 남자 성기처럼 나무로 만든 막대기를 매달아놓기도 한다.

2. 군왕신(君王神) : 고려 군왕의 신이라고도 하고, 군왕으로서 정상적인 죽음을 하지 못한 자(사도세자 같은)라고도 한다.

3. 대감신(大監神) : 대감은 집안에 재복을 가져다주는 신들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4. 망량신(망량神) : 망량은 도깨비를 가리킨다.

5. 전내신(殿內神) : 관성제군(關聖帝君), 곧 관우를 가리킨다.

6. 손각씨(孫閣氏) 귀신 : 손씨 집안의 규수가 출가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를 일컬어 손각씨 귀신이라 한다.

7. 목멱산신사(木覓山神祠) : 목멱산은 남산을 가리킨다.

8. 백악산(白岳山) 정녀부인묘(貞女夫人廟)

9. 숙청문(肅淸門, 서울 도성의 북문)의 신상 : 숙청문기둥에 여러 신상을 걸어놓고, 연초에 여염집 부녀자들이 복을 빌었다.

10. 인왕산(仁王山)의 칠성당(七星堂)

11. 가택신(家宅神) : 집에는 호신이 있고, 부엌에는 조신이 있으며, 땅에는 토신이 있고, 우물에는 우물신이 있으니, 이들 모두를 합쳐 가택신이라 한다. 성주신(城主神) 역시 가택신 모두를 관할하는 명칭이다.

12. 천연두 신

13. 태자귀(太子鬼) 혹은 명도귀(明圖鬼) : 신에 의탁해서 말을 전하고 점을 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신령한 노파를 가리킨다. 민간에서는 어린아이나 천연두에 걸려 죽은 자의 영혼이 붙은 노파라고 생각했다.


19장 지방의 무풍(巫風)과 신사(神祠)


1. 경기도 : 송악신사(松岳神祠)는 성황(城隍), 대왕(大王), 국사(國師), 고녀(姑女), 부녀(府女)를 모신다. 그 밖에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 적성 감악산의 신사등이 있다.

2. 황해도 : 해주 구성산의 신사, 장산도의 천비(天妃) 등이 있다. 천비는 해난(海難)을 구제해주는 바다의 여신이다.

3. 함경도 : 안변의 선위대왕신(宣威大王神), 경원의 두만강신사, 숙신각씨의 신사 등이 있다.

4. 충청도 : 충주의 월악신사(月岳神祠, 몽고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진천 길상산의 김유신사, 진천의 용왕신 및 삼신당, 속리산의 대자재천왕신(大自在天王神), 제천 등지의 김부대왕신(金傅大王神,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말한다) 등이 있다.

5. 강원도 : 원주의 치악산사, 고성신사(정월 보름 전에 귀신을 쫓는 의식을 행한다), 삼척의 오금잠신(오금잠은 쇠로 만든 비녀를 말한다), 태백신사(太白神祠) 등이 있다.

6. 경상도 : 합천의 정견대왕사(대가야국의 왕후 정견(正見)을 모신다), 군위의 김유신사, 진주 지리산의 성모사(聖母祠, 왜구들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안동의 오금잠신, 경주의 두두리신(목랑[木郞]에게 제사 드린다) 등이 있다.

7. 전라도 : 광주의 무등산신사, 나주의 금성산신사, 전주의 용왕제, 고군산도(古群山島, 군산시 해상에 위치한 섬들)의 최고운신사(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을 말한다) 등이 있다.

8. 제주도 : 광양당(廣壤堂, 한라산신의 동생이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한다), 차귀당(遮歸堂, 목축·농경신의 성격을 띤 뱀에게 제사 드린다), 가상명혼(시집 못간 처녀와 장가 못간 총각의 혼백을 맺어준다) 등이 있다.


20장 부록: 중국 무속사의 대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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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마술, 그리고 마술의 쇠퇴 3 나남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365
키스 토마스 지음, 이종흡 옮김 / 나남출판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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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주술


14장 잉글랜드 주술 : 범죄와 주술의 역사


"주술은 마술의 나머지 종류들과 뚜렷이 구분할 수 없다. 성직자들이 마술이란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이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밀스런 수단을 이용해 (또는 이용하는 척하면서) 일반적으로 용인되기 힘든 방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종류의 '주술'만을 따로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주술은 불행을 누군가의 은밀한 개입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주술사는 성별을 불문하고 (여성이 훨씬 많았지만) 은비한 수단으로써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자를 뜻했다. 그녀가 끼칠 수 있는 해악은 전문용어로 'maleficium'(저주염력)이라 불리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타인의 신체를 손상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가축을 해칠 수도 있었고, 자연을 거슬러 젖소의 젖이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버터나 치즈나 맥주의 실내제조를 좌절시킬 수도 있었다. 잉글랜드에서 주술혐의를 받은 활동은 대체로 이런 죄목들 중 하나에 속했다."(11-3)


"중세 말에 이르면 유럽은 다른 원시주민들의 주술신앙과는 구별되는 주술 개념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주술사의 능력이란 악마와 계획적인 밀약을 맺은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개념이었다. 그녀는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적에게 앙갚음할 초자연적 수단을 얻는 것으로 믿어졌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볼 때, 주술의 본질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측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마숭배라는 이단성에 있었다. 주술이 오래전부터 기독교 이단이라는 최악의 죄로 취급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숙적에게 충성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저주염력'은 부차적 활동, 즉 그 거짓 종교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타인을 해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주술사는 하나님을 배신한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한 자였다. 바로 이런 개념에 의존해 제례 형태의 악마숭배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정립되었고, 이는 특히 주술사들이 함께 모여 그들의 주인에게 경배하고 그와 성행위하는 야간집회, 즉 '사바스'를 겨냥한 것이었다."(16-7)


"그러나 주술을 악마와의 밀약에 기인한 능력으로 보는 편협한 신학적 정의는 잉글랜드에서 완승을 거둔 적이 없었다. 많은 영어 논고들 및 주요 판례보고서들을 통해 대륙적 관점이 널리 보급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조차 그러했다." "비록 법원에서는 대륙 노선에 따라 사건을 처리하는 편파성이 증가하고 있었지만, 민간에서의 주술 개념은 결코 악마숭배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 않았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이 시골마을에서 고발을 자극한 것도 아니었다. 대다수에게 '주술'의 본령은 여전히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능력이었다." "대륙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에서도 백주술과 흑주술을 싸잡아 비판하는 태도는 민간신앙에서 근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에식스의 성직자 조지 기퍼드가 1587년에 강조했듯이, 주술사를 향한 사람들의 증오심은 악마와의 가상된 제휴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증오심이 아니라, 이웃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증오심이었다."(34-5)


15장 주술과 종교


"당시 종교가 스스로의 권위에 의해 인간적이고 내재적인 악마라는 관념을 뒷받침해 주지 않았다면, 악마와의 밀약을 다룬 이야기들도 유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탄은 원래 구약성경에서는 중요성이 덜했으나 훗날 유대교와 기독교에 의해 우주 내 하나님의 강력한 적수라는 위상으로 제고되었다." "중세 신학자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정교하고 세련된 악마론을 개발했던바, 대중에게는 그것이 한층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형태로 스며들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가 보기에) 이런 악마 개념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오래전에 소멸되었다. 하지만 기성 종교가 전력을 다해 인간적 사탄의 관념을 형성해온 수세기를 거친 16세기에는, 사탄을 가장 심지 굳은 마음마저 장악할 만큼 강력한 현실성과 직접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이런 개념을 약화시켰다기보다 강화시켰음이 거의 분명하다. 루터 자신이 가시적인 현실세계와 육신은 전적으로 이승의 주인인 마왕의 소유물인 것처럼 자주 언급했다."(74-6)


"악의 화신에 대한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위대한 신 존재 증명들 중 하나로 격상될 만큼 큰 중요성을 가진 것이었다. 그 교리를 부정하면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선하다면 왜 세상에 악이 존재해야 하는가를 설명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은 유일신 개념이 승리를 거둔 이후의 일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마왕은 완전한 신격이라는 개념을 보완해 줄 수 있었다." "신의 화신과 악의 화신이 동일한 토대에 의존했던 만큼, 그 두 개념은 불가분으로 얽혀 있었다. 하지만 마왕이 실재함에 대한 이 같은 강조는 마니교의 이원론에 가까운 성질을 띠고 있었다." "어디든 악마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다양한 사회적 목적에 기여했다. 낯선 질병이나 동기 없는 범죄나 이채로운 성공에 대해 사탄은 편리한 설명 수단이었다." "사탄이 일상사에 개입한 일화들은 성직자들, 특히 퓨리탄 성직자들이 신도교화용으로 퍼트린 '심판' 및 '섭리'에 관한 이야기들과 동일한 목적에 기여했다."(86-8)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살아간 사람들 대다수에게 악령의 존재는 여전히 생생한 현실이었다. 성직자들이 악령을 막는 전통적 보호기능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금식과 기도를 신봉한 프로테스탄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국교회에 속한] 프로테스탄트들은 퇴마능력이 가톨릭교회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수수방관했던 것 같다. 일부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무속인들과 마법사들에게 의존했다." "국교회 성직자들은 악마추방이라는 중요한 과제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특권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당시 식자층이, 이를테면 존 셀던처럼 퇴마의례란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을 확보하기 위해 고안된 〈현란한 요술에 불과하다〉고 냉소하기는 쉬웠지만, 성직자에 대한 존경심은 퓨리턴들이나 가톨릭교도들에 비해 국교도들이 훨씬 약했다. 실제로 가톨릭 국가들에서는 사제의 마술능력에 대한 농민들의 믿음이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116-7)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은 일관된 신앙심이 인간 영혼에 대한 마왕의 공격을 빈틈없이 막아주지만 인간 육신과 재화에는 그런 보호막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왕이 인간의 물질적 재화를 강탈하면서 추구하는 진짜 목적은 그의 신앙심을 약화시켜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배신해야겠다고 변심하도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저주염력'은 사탄이 인간 영혼을 사로잡기 위해 임시로 제공하는 미끼였다. 마왕의 희생양은 마왕의 물질적 공격을 피하려고 마술에 의존하며, 일시적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끔찍한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욥(Job)처럼 굳센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재화와 육신이 철저히 파괴되더라도, 그의 영혼은 오히려 그 역경을 거쳐 더욱 단단해지지 않았던가." "따라서 저주염력을 물리치기에 적합한 행동은 수동적 인내였고, 마왕이 사람 몸이나 재화에 무슨 짓을 하든 결코 불멸의 영혼만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인내를 뒷받침해야 했다."(125-6)


"종교는 확실한 보호책을 내놓지 못하면서도 대항마술을 금했다. 따라서 주술에 의한 피해를 저지하는 최종 책임은 법원 몫으로 돌아갔고, 주술사에 대한 법적 기소는 자칫 총체적 난관으로 치달을지 모를 상황에서 벗어나는 유일하게 확실한 길이 되었다." "중세인들도 주술이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교회의 마술적 대책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감도 그만큼 강했다. 중세 잉글랜드에서 사람들은 교회의 처방을 준수하는 한, 주술사에게 피해를 입을 일이 없었다. 교회 처방을 준수하지 않으면 불평하기도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교회마술에 대한 신뢰는 주술사 기소를 저지한 것이기도 했다. 레키는, 〈사람들이 별 변화 없이 미신에 물들어 있었더라면, 그들의 미신은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로 주술을 막아 준 장벽은 크게 위축되었다. 교회마술이 산산조각 나면서, 이제 막 위협을 가하기 시작한 주술의 위험에 대해, 사회는 법적 조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129-30)


16장 주술사 만들기


"(특정한 유형의) 저주에 효험이 있다는 지속적 믿음의 진정한 원천은 신학이 아니라 민심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들은 비록 저주의례의 적절성과 효험 모두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저주를 유발한 가해 정도가 지나치게 가증스러우면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지지하실 것이라는 믿음도 자주 보여주었다. 그 무엇보다 효과를 발휘한다고 여겨진 것은 가난한 자와 상처받은 자의 저주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모든 저주들이 예외 없이 효력을 발휘한다. 이는 극적 효과를 노린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자들에게는 없어도 가난한 자들과 상처받은 자들에게만은 그런 보복능력이 있다는 믿음, 이것은 일종의 도덕적 필연이었다. 이렇듯 튜더-스튜어트 시대의 종교이념들은 사회 하층민들이 발하는 저주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잉글랜드 국교회의 법원기록이 보여주듯이, 저주와 기도를 구분하는 경계는 극히 애매했고, 저주는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142-8)


"저주는 분노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좌절과 무력감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휴 래티머는 우리들이 곤경에 처할 때 일부는 무속인을 찾아가며, 〈또 일부는 욕하고 저주한다〉고 말했다." "피해 당사자가 초자연적 응징을 비는 대안에 의지했던 것은, 그가 너무 약해서 혼자로는 더 이상 확실하게 복수할 수 없는 경우에 한해서였다. 저주란 약자가 강자에게 사용한 것이었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었다. 부친의 저주라는 두려운 무기가 적용된 것은, 자녀의 머리가 커져 부모의 일상적 통제수단을 벗어났을 때였다. 거지가 적선을 거부한 부자에게 달려드는 것은 일상적 구걸이 실패로 끝났을 때였다. 가난한 자들의 전형적인 죄는 〈그들이 스스로 바란 만큼 얻지 못했을 때 내뱉는 욕설과 저주〉였다. 단지 악의만으로는 그런 저주가 나올 수 없었다." "이웃의 적대감에 직면해도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 대안적 보상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의례형 저주는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에게 피난처가 되었다."(151-2)


"사법 관련 기록은 고발된 주술사들에 관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준다. 첫째는 그들이 가난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들이 대체로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높은 학식을 지닌 권위자들은 더 심약한 성별이 사탄의 유혹에 더 빠지기 쉽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백들이 한 목소리로, 피고인들이 대체로 무기력과 절망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내비쳤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그들의 가장 공통된 동기는 한없는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이라 여겨졌다. 마왕은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을 약속했다." "홉킨스의 일부 희생자들의 자백들을 검토해 보면, 빈곤만이 아니라 종교적 좌절감도 마왕의 유혹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왕은 메리 베케트 앞에 나타나 그녀의 죄가 너무 커서 〈그녀를 위한 천국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종교적 강박과 물질적 빈곤이 결합해서 야기한 절망감은, 이단적인 구원수단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의지하는 태도를 키울 수 있었다."(172-5)


"튜더-스튜어트 시대 마을생활 기록들이 남긴 단 하나의 인상이 있다면, 그것은 마을 여론의 독재, 그리고 사회부적응이나 사회적 일탈에 대한 불관용이었다. 시골 사회에는 개인의 권리, 사생활 같은 현대적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골 풍습은 기쁜 일과 슬픈 일, 결혼과 장례를 공동체 전원이 공유할 것을 요구했다. 휴일 관념도 없었다. 개개인의 가장 사사로운 일조차 공동체 전체의 정당한 관심사라는 견해에 도전하는 것도 일체 없었다." "이웃 여론의 중요성은 사회 전체적으로 인정되었다. 나쁜 평판은 교회법상 기소사유가 되기에 충분했거니와, 관습법 법원에서도 배심원들을 불편부당한 심사자들이 아닐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죄인과 같은 마을에 살기 때문에 마을 내에서 죄인의 전반적 위상을 잘 아는 주민들일 수 있다는 것이 여전히 허용되었다." "주술사는 마을공동체가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고자 일관되게 가혹한 조치를 취해온 악의적인 자나 부적응자의 극단적 사례였다."(186-91)


"공동체 내 나머지 성원들과 사이가 틀어져 외톨이가 된 노파에게는, 단 하나의 또다른 복수수단, 주술만큼 매력적이면서도 잘 발각되지 않는 수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방화였다. 다른 시대에도 마찬가지지만, 17세기에 방화는 이웃에게 해를 입었다고 믿는 자들의 흔한 보복수단이었다. 그것은 큰 체력이나 재원을 요구하지 않았고 은폐하기도 쉬웠다. 그렇지만 불길은 일단 발화되면 쉽게 번진다는 점에서, 방화는 무차별적인 보복수단이기도 했다." "방화나 악담, 주술 같은 저항들이 얼마나 비효과적이었는지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다. 주술사도 방화범도 자신의 생활고를 이웃주민들의 인격적 결함 탓으로 돌렸을 뿐, 개인과 무관한 사회적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양자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쇄신이나 사회개편을 추구하기보다, 타인에게 사적인 위해를 가함으로써 자신의 고난을 앙갚음하려 했다. 그들의 태도는 정치적 급진주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가 결국 그것에 의해 폐기되었다."(194-7)


17장 주술과 사회환경


"주술은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일상생활 속 불행들을 설명해 주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돌연사한 자식, 잃어버린 암소, 일상 가정사에서의 이런저런 실패들, 이 모든 예기치 못한 재난들은 어떤 악의적인 이웃의 영향 탓으로 돌려질 수 있었다. 딱히 주술 탓으로 돌리지 못할 개인적 불행의 유형 같은 것은 없었기에, 때로 피해목록은 잡다한 내용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초자연적 설명이 특별한 매력을 발휘한 것은, 위험의 다양함에 비해 인간의 무능력이 너무도 뚜렷한 의료영역이었다. 예컨대, 오늘날 암이나 심장병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돌연사들에 대해 당시에는 만족할 만한 설명방법이 없었다." "병의 원인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식의 설명에서 만족을 느낀 것은 서민들만이 아니었다. 주술 신앙은 당시 개업의들이 약점을 감추는 데도 일조했다." "당시 의사들이 주술이라는 진단을 암시하거나 확인해 준 사례들은 문헌사료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는 것들만 추려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200-2)


"물론, 불행에 대한 설명대안들 중 가장 명백한 것은, 불행이란 죄를 처벌하기 위해, 혹은 신자를 시험하기 위해, 혹은 알 수는 없으나 틀림없이 정당한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야기해온 것이라는 신학적 견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편안히 받아들일 만한 교리가 아니었다." "불행에 대한 신학적 설명에서 가장 큰 난점은, 점성술적 설명을 위시한 여러 설명들과 공유한 난점으로, 진단이 주어져도 시정할 수단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하나님께 구제를 기도할 수는 있어도 확실한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어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술신앙의 매력은 바로 그 시정의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각자의 불행을 자기 것으로 개인화함으로써 상황을 시정할 수 있었다. 우선, 상투적인 마술적 보호수단들 중 하나를 이용해서 닥쳐올 공격에 대비할 수 있었다." "주술사가 이미 공격하고 난 이후라면, 그녀 스스로 정체를 드러내 주문(呪文)을 철회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항주물들도 많이 있었다."(213-5)


"주술사 사건들에서, 최초 고발로부터 최종판결에 이르는 모든 절차가 매 단계마다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 있으니, 사람들은 이미 참이라고 믿은 것에 대해서는 높은 수준의 증명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사법절차에서 피고 측은 죄목이 무엇이든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지만, 주술 유죄판결에 필요한 증거기준은 특히 부실했다. 17세기 악마론자들은 그 기준을 높이려 했지만, 주술이라는 불능범죄에서 단순한 〈추정〉과 확실한 〈증명〉을 구별하려 한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수준에서는 용의자의 유죄를 손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 마왕의 낙인을 조사해 보면, 그녀의 몸은 반점이나 사마귀를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이 안 보인다면, 그녀가 잘라내 버렸거나, 마술로 감추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마왕의 낙인은 신비롭게도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주술사가 자백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백을 거부하면 그녀에게는 위증죄가 추가되었다."(228-9)


"옛 장원체계는 고유한 구빈시스템에 의해 과부들과 노인들을 성심으로 배려했다. 빈민에 대해서도 지역마다 다양한 관습적 특혜들이 있었다. 하지만 튜더-스튜어트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배려들 중 다수가 쇠퇴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인구증가는 많은 관습적인 소작인 권리들을 파괴하는 압력으로 작용해, 공유지 점유를 초래했고 경쟁적인 소작료 인상을 가져왔다." "공동체 내 빈민층의 처지가 열악해지고 있었던 것과 동시에, 상부상조라는 오랜 전통도 침식되고 있었다. 토지 확장, 가격 상승, 농경전문화의 진척, 도시 성장, 상업적 가치의 증가 등 새로운 경제적 발전 때문이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영주법원과 종교 길드들이 과거에 제공했던 마을 갈등 해소 메커니즘들도 소멸되었다. 많은 동시대인들은 그들이 분열의 시대를 살아간다고 믿었고, 이를 중세의 사라져 버린 조화로움과 대조했다. 일례로 로버트 버튼은 소송사건이 유례없이 늘어난 것을 오랜 사회적 유대들이 쇠퇴한 탓으로 돌렸다."(248-50)


18장 주술의 쇠퇴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는 주술 기소도 현저히 줄었고 주술적 범죄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론도 확산되었다." "주도적인 회의론 저자들은, 주술이 악마숭배라는 '대륙적' 관점은 성경에 정당한 근거를 둔 것이 아니어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사탄의 대중적 이미지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았음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회의론자들은 당시의 새로운 철학 조류로부터도 강력한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데카르트 추종자들과 토마스 홉스 같은 유물론자들은 무형적 실체라는 개념 자체를 용어모순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렇게 그들은 악마들을 자연세계 밖으로 쫓아냈다." "주술 기소 반대자에게 중요한 것은 마왕에게 아무 세속적 권력도 없다는 교리였다. 마왕은 육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그의 공격은 영적인 것으로 한정되었다." "공위기에 여러 신흥종파들이 이런 사고방식을 조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마왕은 억압된 욕망을 표상할 뿐, 정말로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이 될 수는 없었다."(263-6)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해석은 정통파 집단들 사이에서도 한층 수용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 경은 악령이란 마음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교 스틸링플리트는, 기독교 도래 이전에는 악마들이 물리적 힘을 행사했을 수도 있지만, 이제 사람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으니 그들 자신에서든 자식들에서든 재화에서든 더 이상 악마들로부터 해를 입을 리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추세를 두드러지게 보여준 것은 지옥의 몰락이었다. 많은 17세기 지식인들은 육체적 고통의 특화된 장소로서의 지옥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을 어떤 정신상태, 즉 내면의 지옥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왕을 지옥 왕국에서 추방한 것 자체만으로도 주술사들이 마왕과 밀약을 맺을 가능성을 논박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어떤 노파가 마왕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마음먹는다 하더라도, 그 보답으로 그녀에게 초자연적 능력이 주입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266-8)


"근본적으로 새로운 태도가 두 방면에서 성장하고 있었다. 첫째는 우주란 질서 있고 규칙적인 것이어서 하나님이나 마왕이 무시로 개입해 뒤바꿀 수 없다는 가정이었다. 이런 세계관은 새로운 기계론 철학에 의해 강화되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신학자들에 의해 오래전부터 진척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질서정연하게 일하시며, 인간의 연구로 접근가능한 자연적 원인들을 이용해 역사하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적을 논하는 것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회의론적 태도를 뒷받침한 두 번째 가정은, 이제껏 미궁으로 남은 일들도 하루 안에 자연적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낙관적 확신이었다." "17세기에 과학자들이 이룬 진보는 거의 모든 동시대인들이 자연지식의 응용력을 자각하도록 만들고, 나아가 일부 동시대인들에게는 인류의 미래 성장 잠재력에 대한 엄청난 확신을 심어 줄 정도로 극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주술이 수행해온 설명 역할을 추호도 미련 없이 폐기할 수 있게 해 주었다."(276-8)


"회의론적 태도는 단기적으로는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유행한 신플라톤주의 우주관, 즉 수많은 비가시적이고 은비한 영향력들이 교차하는 우주라는 개념으로부터 큰 지원을 받았다. 많은 저자들이 주술을 회의했던 것은, 주술 외의 다른 문제에서 경박한 믿음을 유지한 덕이었다. 그들은 감응치료나 원거리 작용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광석은 숨은 속성들을 갖는다, 사체는 살인자가 접근하면 피를 흘릴 수 있다, 눈에서 어떤 빛을 방출해 다른 사람을 〈흘릴〉 수 있다고 믿어졌다. 존 웹스터가 주술을 회의하면서도, 무기연고, 별의 영(星靈), 사티로스, 피그미, 인어, 바다괴물 등을 믿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 회의론자들이 신비한 사건들에 대한 설명수단에서 주술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연현상으로 가정한 범위가 그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학풍의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 비해, 그들은 훨씬 쉽게 주술사의 저주염력을 〈자연적 원인에 의해〉 설명할 수 있었다."(278-9)


"이러한 지적인 원인 못지않은 사회적 원인도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자주 주술사 고발을 일으켰던 자선과 개인주의 간 갈등이 17세기 후반부터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전국적 구빈법이 체계를 갖추면서, 빈민구제가 법적 의무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빈민구제는 더 이상 도덕적 의무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에 주술혐의를 유발했던 사회적 긴장과 죄책감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었다. 어떤 사람이 이웃을 빈손으로 쫓아 돌려보내도 그의 양심에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할 다른 수단들이 존재한다고 자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술고발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이라면 그가 느꼈을 양심의 가책을 이제는 더 이상 느낄 필요가 없었다. 주술고발은 상부상조라는 공동체적 규범과 자조(自助)라는 개인주의적 윤리 간의 갈등을 반영했다. 그렇지만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갈등은 거의 해소되고 있었다. 상황이 변하면서, 주술고발을 자극해온 요인 자체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284-6)


제6부 관련 믿음들


19장 유령들과 정령들


"가톨릭 신학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반동종교개혁 이론가들은 영혼들이 몸을 떠나면 세 범주들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첫째 범주와 둘째 범주는 구원받은 자들과 저주받은 자들로, 이들이 되돌아올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셋째 범주는 연옥에 배정된 자들로 구성되는데, 가톨릭교시에 따르면 이들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되돌려질 수 있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유령에 대한 믿음을 가톨릭교회의 사기와 기만에서 나온 결과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주치는 허깨비들은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은 그것들이 영적 존재들로 인정될 수는 있으나 몸을 떠난 영혼들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들은 극히 드물게만 선한 영들이요, 대체로는 마왕이 덫을 놓아 사람들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보낸 사악한 영들이었다. 따라서 그것들이 믿을 만한 존재들인지는 엄밀하게 검증되어야만 했다. 단호한 회의적 태도만이 그것들의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대책이었다."(294-5)


"그렇지만 대체로 신학자들은 가시적인 영들의 완전 폐기를 꺼렸다. 그들이 유령이라는 개념에 공감을 표한 것은, 무신론이 가톨릭교회보다도 참된 종교에 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인 랠프 커드워스가 지적했듯이, 그런 영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무신론자를 막는 보루였다. 〈일단 가시적인 유령들이나 영들이 영원한 존재들로 인정되기만 하면, 그들과 세상 전체를 관장하는 유일하고 지고한 영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도 손쉽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보스웰의 《존슨 전기》에 수집된 이야기들이 보여주듯이, 18세기 많은 지식인들에게 유령의 존재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합리주의자들이 아무리 그들을 비웃었을지라도 말이다." "심오한 철학수준에서는 그 출현가능성이 신플라톤주의자들, 파라켈수스주의자들, 뵈메주의자들 등의 비학(秘學) 이론들에서 생생하게 유지되었다. 그들이 믿기에, 육체가 소멸되어도 별로부터 온 영은 그 주변을 계속 맴돈다는 것이었다."(298-300)


"당시 사람들은 유령을 위시한 허깨비들이 실존한다고 배웠기에 그것들을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유령은 아무 곳이나 정처 없이 떠돈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반드시 뭔가 목적을 갖고 등장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무슨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결론내기 힘들 때도 있었지만 말이다. 주술사들처럼 유령들도 늘 동기를 갖고 움직였고,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일례로 셰익스피어 희곡들에서 많은 유령들은 늘 어떤 목적을 갖고 등장한다. 그들은 보복수단이나 보호수단이 되기도 하고, 예언하기도 하며, 제대로 된 매장을 염원하기도 한다. 그들은 늘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 유령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코미디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거니와, 18세기 이전에는 가벼운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 편에서 보면, 유령에 대한 믿음이 수행한 역할은 한층 뚜렷해진다. 그 믿음은 초자연적 존재에 의해 발각될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범죄를 막는 추가 억지수단이 될 수 있었다."(308-13)


"유령은 윤리기준들을 전체적으로 지원함으로써, 화목한 인간관계를 편들고 죄인의 잠을 방해했다. 하지만 유령은 조상을 향한 의무를 강화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 망자를 존경하도록 만드는 것, 유해를 훼손하거나 유언에서 원한 바를 이행치 않으려는 자들을 포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유령의 최우선 과제였다. 이런 기능이 모든 사회들에서 똑같이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중세 가톨릭교도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 미사가 봉헌되지 않으면 그 영혼이 연옥에 머물게 된다고 믿었던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각 세대가 앞 세대의 영적 운명에 무관심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 모든 개개인은 각기 대차대조표를 유지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지은 죄를 후손들의 기도에 의해 속죄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함축된 것은, 이제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의 관계를 철저히 원자론적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조상의 명복을 우선시한 의례집행에 그토록 많은 재원을 할애하지 않게 되었다."(320-3)


20장 시간과 징조


"길일과 흉일에 대한 믿음은 최소한 고전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인들은 그들에게 고유한 '불용일'을 유지했고, 중국을 위시한 고대 동양에도 비슷한 개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길흉일에 대한 관념은 산업화 이전 사회라면 어디서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중세교회는 시간들 각각에 고유한 성질을 부여한 이런 미신들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연중 모든 날들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장본인이었다. 시간이 균질적이지 않다는 확신을 강화한 면에서 교회력(敎會曆)을 능가한 것은 없었다. 종교개혁 이후에조차 교회 역년(曆年)은 일자에 따라 금해야 할 것들과 지켜야 할 것들로 점철되었다. 모든 금요일들과 사순절 동안 육식을 금한 것은 특정 시점에 특유한 식습관을 조장했다. 모든 노동이 금지된 성인축일들은 시골 주민들 삶에서 의외의 결과를 가져왔따. 1년이 축일들을 경계로 분할되어, 어떤 과업이 연중 어느 시점에 수행되어야 하는지를 더욱 편리하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었다."(345-50)


# 불용일(不容日)은 국가의 공식행사가 열려서는 안 되는 날을 뜻한다.


"퓨리턴들은 교회축제들로 불규칙하게 점철된 전통 교회력 대신에, 6일간의 규칙적 일과와 뒤이은 하루의 안식일을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해, 17세기 말에 이르면 사회 전체가 고루 받아들이게 되었다. 노동습관에서의 이와 같은 변화는, 사회가 점차 비균질적이고 불규칙한 원시적 시간감각을 포기하고 시간이 균질적으로 운동한다는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유대교 안식일이 모든 일과가 금지된 금기일로 출발했던 것처럼, 퓨리턴들 사이에서도 일요일은 철두철미하게 준수되어야 할 엄격한 규칙으로 출발했다. 아무리 불편해도 상관이 없었다." "1651년 서리에서 어떤 젠틀맨 장례식 설교를 위해 초청된 목회자는 고인이 일요일에 병에 걸리자 의사를 부르지 않았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노라고 칭송했다. 이 장면에서 보이듯이, 합리적 계산에서 안식일을 지킨 측면은 그보다 훨씬 원시적인 가정에 의해 잠식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357-8)


결론


21장 상호연관성


"종교, 점성술, 마술은 어떻게 불행을 피할 것인지, 불행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가르침으로써, 일상문제들에서 사람들을 도우려는 의도를 보였다. 이 요점을 강조한다고 해서, 종교가 폄하되거나 마술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당시 기독교는 인간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기독교의 정교한 자기충족적 의례들은 인간 경험을 전체적으로 반영하는 상징체계를 형성했는데, 이 상징체계가 사회와 심리에 영향을 미친 범위는, 기독교의 마술적 측면들이 적용된 특수하고 제한된 범위를 훨씬 능가했다. 잉글랜드에서 민간마술이 수행한 기능들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것은 주술을 막는 보호를 제공했고, 질병, 도난, 불행한 인간관계 등에 대해 다양한 치료법들을 제공했다. 그러나 민간마술은 포괄적 세계관을 제시한 적도, 인간존재를 설명하거나 내세를 약속한 적도 없었다. 기독교 신앙이 삶의 구석구석을 지도한 원리였다면, 마술은 갖가지 구체적 난관들을 극복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383-4)


"불행에 대한 비종교적 설명들은 대체로 신학자들과 동일한 윤리적 가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고통은 누군가의 도덕적 과오에 기인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특히 고통받는 자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기인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목회자들은, 비록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재앙을 내리는 이유를 하나님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이 받는 고통은 받을 만하기에 받는 것이라는 가정으로 되돌아갔다. 마찬가지로, 정령들과 유령들도 사회적 의무를 저버린 사람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강했다. 본인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씌우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 있는 주술조차도, 피해자 자신에게 어느 정도 도덕적 자책감이 없다면 이용하기 힘들었다. 이렇듯 불행과 죄책감 사이에 함축된 상관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정신건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도덕적 과오를 반성하게 함으로써, 기존 사회규범들 강화에 일조했다. 이 점에서 마술과 종교는 공히 중요한 사회 통제수단이 될 수 있었다."(386)


"비록 이 책에서 다룬 시대는 종교가 마술에 승리한 것으로 끝났지만, 승리한 종교는 처음과는 다른 종교였다. 이제 성직자들은 점차 불행한 사건들을 개별적으로 설명하길 꺼리게 되었고, 보상 없는 고통도 흔하다는 것을 차츰 인정하게 되었다. 스코트는 불행을 주술 탓으로 돌리는 자들에 대한 논박을, 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했었다. 욥은 무고했으나 하나님만이 아는 불가해한 목적을 위해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지 않았던가. 이런 맥락에서 자연신학이 이룬 업적은 바로 죄와 불행을 잇는 고리를 최종적으로 끊어 버린 점이었다. 죄와 불행을 연관 짓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한 많은 원시적 믿음들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니 말이다. 이런 변화에 편승해 17세기 후반의 기계론 철학은 정통교리와 편안하게 동행할 수 있었다." "마왕이 지옥에 유폐된 것만큼 하나님도 자연원인들을 통해서만 역사하는 존재로 제한되었다. 〈특별섭리〉나 개인적 계시는 자연법칙을 지키는 섭리 개념에 굴복했다."(389-90)


22장 마술의 쇠퇴


"마술의 쇠퇴를 가져온 한 가지 조건은 17세기 과학·철학혁명을 이룬 일련의 지적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식자(識者) 엘리트층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일반대중의 사고와 행동으로 영향력을 확장해갔다. 그 혁명의 핵심은 기계론 철학의 승리였다. 기계론 철학은 중세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뿐만 아니라, 한때나마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자리를 넘보던 신플라톤주의 이론도 거부했다. 소우주 이론이 붕괴하면서, 점성술, 수상술, 연금술, 관상술, 점성마술 등 관련 마술들의 지적 토대도 모두 파괴되었다. 우주 삼라만상이 불변적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한다는 관점은 기적 개념에 치명상을 가했고, 기도로 육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약화시켰으며, 신이 직접 계시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위축시켰다. 데카르트의 물질 개념은 악령이든 신령이든 모든 영들을 영계에 유폐시켰는데, 영을 불러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유의미한 야망이 될 수 없었다."(396)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합리주의적' 태도는 갈릴레오나 뉴턴의 작업보다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16세기 초 파도바학파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피에트로 폼포나치는 자연세계 규칙성, 기적 불가능성, 영혼 필멸성 등을 주장했으며, 이런 주장은 16세기 이탈리아, 17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자유사상가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이 작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은 새로운 과학이라기보다 고전고대 합리주의적 저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종교적 설명이나 마술적 설명이 쇠퇴하면서 발생한 공백을, '자연적'이기는 해도 그릇된 원인들로 대체한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감-반감 같은 신비한 영향력에 의존한 설명을 추구했다. 그들은 온갖 경이로운 것들을 모두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연인식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과학혁명이 한 일은, 바로 이 같은 추론 방식을 극복하고 기계론 철학에 기초한 훨씬 안정적인 지적 토대로 고대 합리주의적 태도에 버팀목을 제공한 것이었다."(403-5)


"주술사, 유령, 하나님 섭리 같은 견지에서 불행을 설명하는 신비주의 설명법을 대체할 새로운 지식도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 못지않게 중요했다. 갓 태어난 경제학과 사회학은 이 기간에 큰 진전을 이루었다. 개인의 경제적·사회적 곤경은 개인 외적인 원인들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것, 인적·계급적 차이는 교육 및 사회제도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것, 17세기 말에 이르면 이런 자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미 상식으로 통했다. 그것은 계몽운동의 핵심 주제들 중 하나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과학 분과들은 점성술의 설명력을 대체해갔다. 사회현상이 우연히, 제멋대로 발생한다는 관념은 거부되었다. 모든 사건에는 숨어 있을지언정 뭔가 원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베이컨은 '포르투나'(운명)을 비존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제 운명은 새로운 역사법칙으로 대체될 터였다." "제임스 해링턴은 〈땅이나 하늘뿐만 사회에도 필연적 결과를 낳는 자연원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420-1)


"역설적이게도 잉글랜드에서는 적절한 기술적 해법이 마술을 대체하기 이전에 이미 마술은 매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마술을 포기한 것이 기술의 분출을 가져왔지, 그 역은 아니었다." "따라서 17세기에 진행된 것은 기술적 변화라기보다 정신적 변화였다." "이 새로운 기대를 구체화한 것은 그 누구보다 과학자들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염원하는 것들'을 열거한 목록에는, 수명연장, 회춘, 불치병 치료, 고통 경감, 자연과정 단축, 새로운 식량자원 발견, 날씨 통제, 감각적 쾌락 증진 같은 것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점복이 자연에 근거하기를 원했다." "그가 염원한 것은 점성술사나 마술사나 연금술사가 염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설계한 방법론은 달랐다. 베이컨은 저들의 비밀주의 관행을 혐오했다. 저들의 믿음은 〈인간 이성보다는 인간 상상력에 협력하고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목적하거나 표방하는 것들〉만은 〈고귀하다〉는 점을 인정했다."(424, 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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