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의 역사 - 근대 영국사회와 생산, 언어, 정치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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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공장으로의 귀환


"20세기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대공장들이 사회를 지탱한 시대였다. 포디즘이 단순히 새로운 생산조직의 의미에서 더 나아가 20세기 자본주의, 즉 '무거운 근대성', 또는 달리 말해서 '중후장대重厚長大식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된 것은 근거가 있다." "사실 '무거운 근대성'은 자본과 노동을 하나로 결합해 그들의 상호의존성을 심화시켰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자본에 의존하는 임노동자의 지위에 길들여졌고, 기업가 또한 자본의 재생산과 성장을 위해 임노동에 기댔다. 그들의 모임에는 고정된 장소가 있었다. 양측의 어느 쪽도 쉽게 다른 곳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대공장의 벽은 두 당사자들을 감옥처럼 둘러쌌다.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종신서약한 부부처럼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는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공장은 그들 공동의 거주지였다. 여기에는 어떤 형태든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동거양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법, 담합구조, 복지국가 모델은 모두 이 동거양식과 관련된다."(10-1)


1부 전前시대의 유산


"수공업길드의 발젼은 도시화와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일단 생산의 전문화에 걸맞게 직종별 길드도 분화하기 시작했다." "조합원 모두를 서로 규제하는 길드 조직의 근본적인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길드의 본질은 〈살그머니 앞질러 나가는 것〉에 제동을 가하는 데 있었다. 수공업길드 조례는 수호성인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 상호부조에 관한 내용 이외에, 은밀히 이익을 추구하는 모든 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특정한 시간 전후의 판매를 금지하고 가격경쟁이나 덤핑행위 또는 저가매수 자체를 막았다. 즉 시장을 둘러싼 생산자들 사이의 경쟁을 약화시킴으로써 조합원 자신이 성실하게 생업에 종사하기만 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였다. 이는 고도의 정태적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길드제도의 극단적인 평등주의는 그 대신 경제활동의 심각한 예속을 대가로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시사회에 변화의 요인이 작용할 경우 쉽게 취약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32-3)


"길드제도 아래서 마스터가 몇 명의 직인과 도제를 데리고 영업하는 전형적인 영업장은 하나의 가족을 이루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형태를 확대가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혈연적 친족가족의 외피에 직인과 도제 또는 한 두 명의 하녀를 포함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비록 길드제도가 도제-직인-마스터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하더라도 마스터로 상승하는 것은 대다수 도제들에게는 〈비현실적 전망〉에 지나지 않았다. 길드제 자체의 배타적인 속성 때문에 영업장 개설 허가를 받기도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업장 개설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한 숙련공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선대상인이 생산을 주도하면서 독립적인 영업장을 운영하는 일은 더 어려워졌다. 직인 가운데 상당수는 선대상인의 하청을 받아 생산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더욱이 선대상인들이 대량수요에 발맞추어 직인들에게 특정 공정에 해당하는 일거리만을 주문하면서, 완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조차 점차 사라졌다."(36)


"수요 증가가 당시 원산업화proti-industry 지역의 수공업생산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요의 자극을 받은 원산업노동자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이전의 생활과 다른 노동윤리를 발전시켰고, 기본 생산단위인 가정에서 생산자원을 재배치함으로써 생산 증가를 꾀했다. 적어도 18세기 후반 랭커셔 면업지대에 관한 한, '근면혁명'과 비슷한 변화가 가내수공업자들의 삶과 노동세계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장 드브리스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원산업화 지역의 생활태도 또는 삶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드브리스는 특히 18세기 가내경제가 전통적인 생활수준을 지향하면서도 일단 그 수준에 도달하면 더 심한 노동보다는 여가를 선택하는 전산업적 패턴을 벗어나기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전과 달리 가내노동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채우기 위해 과외소득을 올리려 하고, 실질소득이 감소하는 시기에도 이러한 태도를 견지했다는 것이다."(61-2)


2부 산업혁명과 공장의 원형


"18세기 말 이래 증기기관은 사회를 극적으로 변모시켰다. 사실 회전굴대엔진이 처음 출현했을 때 기술적 호응을 얻은 것은 탄광이었다. 이전에 뉴코맨 식 엔진을 사용해온 분야에서는 와트의 방식이 매우 효율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수력에 익숙해 있던 섬유 분야에서는 도입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와트의 기관어 얼마나 효율적인지 비교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증기력의 사용을 일반인들의 뇌리에 각인시킨 것은 증기기관차의 출현이다." "눈으로 직접 보는 증기기관차며 증기선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 원동력이 증기기관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가치관이 되었다." "아마 우리는 1830~40년대에 이루어진 영국 철도망의 발전에서 증기력 시대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836년 당시 철도망은 보잘 것 없었지만 10여 년이 지난 후 철도망은 영국인의 교통수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101-4)


"18세기 말 이래 공장형태의 주류가 수력방적공장에서 증기력공장으로 급속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산업혁명사 연구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면업 분야에서는 특히 동력 뮬 방적기가 도입되면서 증기기관을 설치한 방적공장이 급증한다." "증기력의 승리는 한 세대라는 짧은 시기에 결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증기동력을 회전운동으로 바꾸어 방적기에 연결하는 과정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증기기관 자체의 진동이 컸고, 그 진동을 견딜 수 있는 방적기를 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18세기 말 수력방적공장은 기술적으로 매우 정교한 동력 전달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수량이 풍부할 경우 수차와 동력 전달장치와 방적기를 연결한 공장 시스템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가동되었으며, 고품질의 면사를 생산했다." "증기력과 수력 겸용 공장의 상당수가 사실상 수력공장의 전통을 잇는 형태라고 가정할 경우 증기력의 결정적인 승리보다는 점진적인 우위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113-6)


"산업혁명 초기에 공장은 사람들에게 낯익은 곳이 아니었다. 공장은 빈민원이나 감옥과 같은 혐오스러운 곳이었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특히 아크라이트 식 공장은 수력을 이용할 수 있는 강변이나 계곡 외딴 곳에 세워졌기 때문에 노동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수력방적공장이 외진 곳에 세워진 것은 한편으로는 물길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리낌 없는 공장활동에 대한 엄밀한 조사와 규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공장을 본격적으로 가동한 후에는, 연소자나 어린이의 수요가 늘었다. 공사장 노동자들 중에서 미혼이거나 식구가 단출한 가장은 또 다른 공사판으로 옮겨갔지만 여러 자녀가 딸린 사람들은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수력방적공장에서 연소자와 어린이는 가장 중요한 노동력이었다. 사실, 이들을 광범하게 고용하는 것은 수력공장뿐만 아니라 그 이후 다른 형태의 면공장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었다."(130-1)


"우리는 산업혁명기의 경제를 근대적 부문과 전통적 부문으로 나누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기계와 증기력에 개방적이고 그 영향으로 빠른 성장을 계속했을 것이다. 반면, 후자는 점차로 또는 급속하게 쇠락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동시대 문헌은 대부분 이 전통적 부문의 쇠퇴와 조락에 초점을 맞췄는데, 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동시대인에게 가장 먼저 다가오는 인상은 번영보다는 쇠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앞에 클로즈업 된 산업화의 풍경은 기계와의 경쟁에서 탈락한 수공업자, 생활수단을 상실한 농민, 일자리에서 쫓겨나고 도시 슬럼가에서 어슬렁거리는 빈민의 행렬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공업도시와 공장은 사람들의 삶에 낙관적인 전망보다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칼라일은 기계화와 공장제도의 도입을 단지 생산의 영역에만 국한해 바라보지 않았다. 이제 기계와 공장제도는 사람들의 행동양식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와 감정 양식마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148-9)


"(반反공장주의를 표방한) 토리주의적 정서는 산업화 이전의 노동세계를 이상화하고 있다. 그 노동세계는 주로 토지와 공동체와 교회와 계서제에 기초를 둔 농촌사회를 가리키지만, 가내수공업의 경우에도 인간과 자연, 노동과 여가, 자립과 도덕이 조화를 이룬 세계로 나타나고 있다. 전산업사회의 가내수공업자들이 누렸던 독립적인 생활과 산업화 이후 공장노동자들의 신체적·도덕적 전락을 대비하는 반산업적 감정은 특히 개스컬의 《장인과 기계》(1836)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개스컬이 보기에, 증기력과 기계는 건강하고 도덕적인 노동자집단을 무너뜨렸지만, 그 대신에 그들 못지않은 인간과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지닌 집단을 창출하는 데는 실패했다." "개스컬이 가장 개탄한 것은 노동자들의 가난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노동자가족이 미숙련노동자로 공장에 진출함으로써 야기되는 가족적 가치의 파괴와 도덕의 타락을 우려했다. 공장생산은 무엇보다도 인간성을 앗아가는 해악이었다."(154-5)


"1830년대 초 방적공 지도자들이나 급진파 인사들은 기계에 관해 토리-래디컬과 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우선, 방적공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오언주의자들은 기계와 공장이 초래한 병폐를 비판하면서도 그것이 경쟁이라는 사회관계의 산물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구성원들이 경쟁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기계는 노동자들을 억압하는 악덕이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이 경쟁을 의식해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기계와 노동자는 영원한 적대자다. 그러나 경쟁을 지양하고 자본가와 노동자들 모두 포함하는 단일한 생산계급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기계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협동으로 나아가는 수단이 된다. 기계가 노동자를 내쫓고 실업자를 유발한다는 주장은 자본주의에만 들어맞는다. 협동사회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오히려 노동자의 작업을 쉽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오언주의자들은 (여가시간을 늘려주는) 기계의 유용성에 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224)


"1830년대 공장 관련 문헌을 저술한 배비지와 유어는 오랫동안 그저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 4편의 각주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유령과 같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배비지와 유어는 기계의 도입과 공장제의 발전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갖는다. 그들의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향이 가져올 '생산력'의 발전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과학의 이용을 강조하면서 나아가 작업장 조직과 과학기술의 결합을 내세웠다. 그들의 저술은 공장의 기계적 원리와 공장운영에 관한 경제의 원리를 종합한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과학기술과 정치경제학의 기본원리를 실제 노동의 공간이자 생산의 산실인 공장의 분석에 원용함으로써 얻은 일련의 지식체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공장제가 노동자의 삶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무시하거나,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이들의 저술은 (당대의) 공장에 대한 비판적인 사회여론에 대응하는, 이른바 공장제 옹호론이기도 했다."(171-4)


"공장제에 관심을 가진 당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기계와 기술의 성공이 어느 정도 생산 공정을 통제하고 장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통제는 기계 자체의 질서와 정확성과 '규모의 경제' 등을 통해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배비지는 기계를 사용함에 따라 대공장으로 이행하는 경로를 강조하면서, 생산비의 최소화 문제를 중시한다." "배비지가 기계의 생산 통제를 염두에 둔 것과는 달리, 유어는 기계의 통제를 넘어 자본가의 생산 통제 가능성을 바라보았고 이를 위해 중앙집중적인 자동화공장의 전망을 내놓았다." "배비지와 유어가 공장에 대해 서로 다른 전망을 제시한 것은 두 사람이 생각한 공장생산 및 운영의 기본원리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배비지가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기 위한 공장생산의 원리로서 스미스 식의 분업론에 집착했다면, 유어는 그의 자동장치의 개념─기계가 작업의 주체가 되어 노동자를 지배하게 된다는─에서 보듯이 자본가의 노동자 통제를 중요하게 여겼다."(184-8)


"배비지가 새로운 공장 모델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연대와 공동 이해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유어는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완벽한 통제와 지배에서 오히려 노동자의 안정과 발전 가능성을 찾는다." "유어는 공장 어린이의 과도노동이 주로 숙련노동자의 비도덕성에서 비롯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자동장치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비도덕적인 숙련노동자의) 노동력을 쫓아낼 근거를 마련했다. 공장의 노동자들을 좀 더 유순하고 순응하는 사람들로 교체한 이후에는 자동장치는 단순한 기계를 넘어서 인간 전체를 통제하는 지배자로 군림한다. 유어가 자동장치automat를 경우에 따라서는 전제군주autocrat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유어는 어떠한 일탈도 없이 거의 완벽하게 기계적 리듬에 따라 작동하는 상태를 공장의 질서이자 유토피아로 인식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공장의 질서가 인간의 질서로 전화하는 것을 목격한다. 즉, '생산성에 대한 압력'이 유토피아적 전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196-7)


"한편, 대공장주가 공장아동의 규제와 노동시간 단축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공장법을 지지한 까닭은 무엇인가. 마벨은 1833년 공장법이 중소자본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자 하는 대자본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에 따르면, 1833년 입법의 목적은 〈많은 중소 섬유공장의 생산비를 높여 그들의 생산을 감축하는〉 데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섬유류 가격의 상승을 가져와 공장법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자본의 준지대準地代가 증가할 것이다. 피해를 입을 부류는 농촌의 수력 공장주, 그에 따른 반사적 이득은 증기력 공장주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력공장은 증기력공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동 고용의 비율이 높았으므로 1833년 공장법의 아동고용 제한 및 보호규정은 특히 수력공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터였다. 이 법의 제정을 반대한 자본가들의 주류는 바로 중소 수력 공장주였다." "결국, 1833년 공장법은 대자본과 중소자본의 이해관계 대립을 암묵적으로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212-3)


"인간의 생체리듬에 들어맞지 않는 가혹한 공장노동에 대한 항의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항의는 주로 개량방적기 그 자체를 향한 것이었다. 1820년대부터 주기성을 띠며 나타난 경기변동과 그에 따른 실업을 겪으면서, 그리고 단조로운 공장노동의 변화(실질적 종속 경향)를 감지하면서 방적공들의 항의는 기계라는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가계급을 향해 조직적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830년대 방적공의 정치는 그 이전이나 그 이후와 달리 급진적인 방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방적공의 시간단축운동은 그것이 보여준 격렬함과는 상관없이 조만간 '표준노동일'을 지향하는 대자본의 이해와 맞부딪쳐 상쇄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운동의 의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1830년대 방적공들은 시간단축운동의 전개과정에서 그들 나름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그 운동을 통해 의식의 고양과 함께 더 활성화된 대중적 조직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226-7)


3부 무거운 근대성과 공장제도


"테일러의 담론은 공리주의 전통이 깊고 자본주의 시장이 한층 팽창하던 세기 전환기 미국 경제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테일러는 생산증대를 필요로 하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읽었다. 그것은 특히 미국적 상황에서 나타나는 분위기였다. 세기 전환기 미국은 대불황 이후 촉발된 새로운 이민 물결로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함과 동시에 시장팽창을 겪고 있었다. 인구증가뿐만 아니라 급격한 도시화 또한 시장팽창을 더욱 자극했다. 이러한 팽창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공장생산의 대규모화를 넘어서 새로운 조직 원리를 필요로 했다. 테일러는 미국적 실용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는 사측의 입장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그는 생산증대를 가져올 새로운 조직화가 두 세력의 상호적대를 완화할 수 있는 완충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생산성 증대가 한쪽에는 고임금을, 다른 한쪽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동비용을 허락해주기 때문이다."(260-1)


"테일러의 '과학적' 접근은 결국 노동과정에서 '시간'과 '동작'의 문제로 귀결된다. 테일러는 시간과 동작 연구에서 직접 생산증대를 지향하기보다는 피로를 경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는 생산증대를 목표로 할 경우 오히려 여러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노동자의 동작에서 기본적인 것은 속도가 아니라 리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전제 아래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의 '불필요한 동작'이 '불필요한 시간' 또는 '게으른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설파했다. 노동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이런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노동자 개인의 욕망, 정체성, 성별 등 다양한 차원을 무시하고 인간을 단지 연구대상으로 객관화하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 관리에서 노동자의 개인적 차이는 무시된다. 이것이 테일러가 권장하는 접근방식이다. 테일러는 개별 노동자의 동작과 작업을 분석할 때 그 사람을 감정과 이성을 가진 주체적 인간이 아니라 작업수단으로 인식했다."(263)


"자동차생산 분야에서 시작되어 내구소비재 일반뿐만 아니라 공장생산의 성격을 크게 변모시킨 이른바 포디즘 생산방식은 20세기의 성격을 규정짓는 의미로 사용된다. 대량생산─대량소비가 가능한 시장을 전제로 하는─은 포디즘 생산방식에 의거해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다." "포디즘은 일단 〈일관작업 생산방식, 기술적 분업, 부품 및 생산물의 표준화에 바탕을 둔 대규모 경제 추구〉로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부연 설명하면 그것은 수직적 통합과 공간적 집중화라는 특징을 지닌다. 챈들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드 사는 세계에서 가장 잘 통합된 자동차회사였다. 거대한 공장 설비를 통해 끊임없이 가장 절절하게 계획된 물류를 이루고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포드는 철강, 유리, 부품, 보조제품 생산에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다.〉 이와 함께 고임금을 제공해 노동자에게 안정된 소비 패턴의 기회를 제공했다. 포디즘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계급 소비의 규범을 만들었던 것이다."(268-73)


"영국 기업가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조직화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 초기 군수물자의 차질 없는 생산이 필요했던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했다. 1915년 6월 군수물자부를 신설하고 군수물자법을 입안한 후에 정부는 직영 군수공장과 조선소는 물론, 재정 지원을 계속하는 기업들에 대해 〈기술 및 관리 면에서 최신의 이론〉을 도입할 것을 권고했다. 이는 자동 및 반자동 기계설비를 도입하고 제품의 표준화와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뜻했다. 이미 미국에서 널리 일반화된 테일러주의 또는 과학적 관리의 방식을 통해 이전의 구태의연한 경영관행을 타파하려는 취지였다. 군수물자부는 무엇보다 전시에 생산성 제고와 노사 평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회경제적 재건은 자본과 노동의 상호 신뢰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생산 증가와 노동조건 개선은 동전의 양면〉이었던 것이다."(289-90)


"1차 세계대전 이전 시기 미국의 자동차기업과 비교할 경우 영국 기업의 특이성은 한 기업이 자동차 제작에 필요한 전 부품을 자체 조달하려 했다는 점이다. 미국 자동차회사는 조립생산자로 출발했다. 상당수 부품을 외부에서 공급받는 것이 관행이었다.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났을까? 당시 영국 자동차공장 숙련공들은 오랫동안 금속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로서 금속 가공에 관련된 다양한 기계를 능숙하게 다뤘다. 따라서 그들은 한 작업장 안에서 여러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는 생산방식에 더 적합했고, 한 사람이 여러 공정에 참여할 능력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노사관계에서도 다른 관행을 낳았다. 영국 자동차회사는 조립라인 위주의 미국 회사들보다 훨씬 더 복잡한 자체 생산단위와 더 많은 노동자집단을 조절해야 했다. 노사관계의 평화가 자동차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특이성은 1920년대 영국 기업들이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미국과 다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297-8)


"비교적 신사업 분야였기 때문에 자동차회사 노동자들은 다른 철강, 조선, 탄광 분야에 비해 조직 결속력이 약했다. 점차 미숙련노동자의 고용비율도 높아졌다." "미숙련공을 충원하는 추세가 일반화될수록 노동조합의 성장에 장애가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국 자동차공장에서 기업주의 반노조 성향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자동차산업 분야의 노동조합은 전투적인 성향은 덜했지만, 그럼에도 사용자측과 협상파트너로서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주었고 그에 상응하는 기득권을 인정받았다. 그들은 임금 인센티브제나 보너스제도 등 다양한 성과급제도를 통해 고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자본측의 경영전략이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포디즘체제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대량생산을 지향하면서도 노동자와 타협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자동차회사들간의 경쟁과, 그리고 영국 시장의 특성상 무제한의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302-3)


"포디즘 생산조직 자체는 부품 표준화와 일관작업생산으로 상징되지만, 노사관계의 측면에서는 관리자층에게 막강한 권위를 부여해 노동자에 대한 체계적이고 직접적인 통제를 가하는 체제다. 여기에는 청원경찰을 통한 노동자 감시, 위법에 대한 즉각적인 해고, 무급휴업, 노동자의 비정규직화 등의 내용을 포함한다. 이것이 미국식 포디즘이다. 포디즘 생산방식은 처음 등장했을 때, 생산과정을 마치 〈천체가 일렬로 정돈된 것 같은 상황〉으로 만들었다." "톨리데이의 표현을 빌리면, 포디즘에서 진정 혁신적인 내용은 〈숙련노동의 적절한 공급이 없는 상태에서도 생산량 및 생산성의 급속한 증대〉를 달성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는 데 있었다. 미국에서 포디즘이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민노동자층의 공급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을 유럽 여러 나라들이 도입하려 했을 때 기존 공장에서 노동자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노동과정 통제, 조직노동운동과 충돌할 위험이 있었다."(304-5)


"과연 영국 기업가들은 노동자 저항에 직면해 새로운 생산시스템을 포기할 것인가. 영국 기업가들의 전략은 오히려 영국의 협소한 자동차시장과 조직노동운동의 전통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노동자의 노동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성과급 체제를 정착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궤도 위를 이동하는 차체에 단계별로 작업을 시행하는 조립생산라인을 도입하면서도 조립과정 자체는 반자동기계보다는 훈련된 노동인력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들은 포디즘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1920년대에 확립된 영국식 생산체제는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토대로 둘 사이의 안정된 동거양식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무거운 근대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기에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하고 전후에 본격적으로 사회복지 모델을 구체화한 것은 바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무거운 근대성이 널리 퍼져나간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다."(308-11)


4부 탈공장의 시대


"산업 자본가들의 전통 지향적 태도는 위너의 《영국문화아 산업정신의 쇠퇴》(1981)가 출간된 후 영국 학계에서 열띤 논란거리가 되었다. 위너는 영국의 쇠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신사문화가 기업정신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검토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영국의 신사문화는 원래 반산업적 특징을 지녔는데, 이런 경향이 사립학교를 비롯한 제도교육을 통하여 기업가 2세들에게 전수되었고 이들이 지주층에 동화됨으로써 기업활동이 쇠퇴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위너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19세기에 부르주아적 가치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토지귀족은 강력했고 그러면서도 부를 축적한 기업가라면 신사층gentry의 대열에 쉽게 합류할 수 있는 길이 뚫려 있었다. 전통적 지배세력은 역사적 사형선고를 모면하고 그들의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를 다시 확보했으며, 나아가 중간계급을 자신의 모습대로 주조할 수 있었다. 영국의 근대화는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었다."(362-3)


"영국 제조업 분야에서 거대기업의 성장은 주로 기계·전기·화학 분야의 기술 진보가 주도했다. 전기 기기를 주로 생산하던 회사들은 전기설비뿐만 아니라 항공기, 선박엔진, 운송설비, 중장비 기계류까지 생산 분야를 넓혔다. 전기에서 기계까지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달성한 것이다." "요컨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비해 1950년대 영국의 산업구조는 소수의 거대기업이 특정 산업 분야의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는 과점적 성격이 좀 더 뚜렷해졌으며, 산업별 전문화 대신에 그 경계를 넘나드는 다종생산 기업이 등장했다. 거대기업간의 합병과 상호투자도 잇달았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국의 기업가나 노동자, 정책 결정을 담당하는 관료와 정치인에게 이르기까지 불과 10여 년 후에 영국 제조업이 파국적인 결말을 맞으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없었다. 번영의 시대에 영국 제조업은 여전히 상당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0년대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해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다."(370-1)


"일례로, 1950년대 철강업계는 비교적 호황을 누렸다. 승용차 및 건축 분야의 호황으로 철강재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이 전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후 수년간 영국 철강업계는 유럽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이래 영국 철강산업은 침체국면에 접어들었다." "영국 철강업의 침체는 새로운 기술혁신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1950년대 세계 철강업계는 '염기성 순산소제강법'을 개발, 보급하기 시작했다. 이 공법은 선철을 강철로 정련하는 과정에서 공기 대신 순수한 산소를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순산소제강법은 거대한 설비 투자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대량생산체제에 적합했다. 이 개량공법의 도입과 더불어 중소 고로 위주의 소규모 기업들은 갱쟁력을 갖추기 어려웠다. 전후에 새로운 설비투자를 단행한 독일과 일본 등은 후발성의 이점을 살려 새로운 제조공정을 도입했다." "중소 고로시대가 저물면서 영국의 철강회사들은 점차 경쟁력을 잃었다."(372-3)


"이 주장은 독일과 일본은 순산소제강법을 응용한 새로운 설비를 비교적 손쉽게 도입할 수 있었던 반면, 미국이나 영국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발성의 이점만으로 한 산업 분야의 쇠퇴를 간단하게 정리할 수는 없다.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생산성과 효율성이 높은 새로운 공법 도입은 정책적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영국 철강산업은 혁신을 뒤로 미룬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도입된 고율의 보호관세, 유럽석탄철강공동체 가입 거부 등이 이 산업 분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67년 국유화 조치는 신공법을 도입할 만한 투자 여력이 없는 중소기업이 속출했기 때문에 부득이 단행한 조치였다. 사실 국유화는 철강산업의 군살을 빼고 구조조정을 통해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한 조치였으나, 그 결과는 반대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국유화 없이 정부 지원 아래 사기업들의 경쟁구조를 유지하면서 혁신을 추구할 수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374-5)


"영국 제조업의 쇠퇴는 한편으로는 영국 경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량생산체제의 황금시대가 종국을 맞은 1970년대 초부터 나타난 세계적 현상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대량생산체제의 무게중심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국가에서 새로운 산업국가로 이동하고 있다. 물론 독일이나 일본과 같이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공생관계가 굳건한 나라에서 그 징후는 아직 부분적으로 나타나지만, 스미스-유어-마르크스로 이어지는 대량생산의 성장담론이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산업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대량생산의 원리가 장인생산을 모두 구축하지는 않았다. 독일과 일본에서 광범하게 뿌리를 내린 소기업주의는 장인생산의 이상이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집중화된 영국 제조업이 쇠퇴한 반면, 일본이나 독일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의 대안으로서 장인생산의 원리를 다시 성찰할 필요성을 느낀다."(381-3)


"(현대자본주의에 익숙한) 우리는 자본주의의 물신적 성격, 이윤추구의 비인간적 속성만을 주목하고 비판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자본주의 이전부터 지속되었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 경제활동 안에는 전자본주의 시대부터 내려온 어떤 속성이 있는 법이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특히 산업사회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작동기제 아래 움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이윤추구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성향들, 이를테면 노동의 습관, 미래의 보상을 위해서 현재의 만족을 기꺼이 참으려는 태도, 상호신용의 관습과 성취 등 전자본주의 세계에서 유래한 여러 성향들에 의존했다. 좀 더 넓게 말한다면 그것은 이전 시대부터 내려온 권리와 상호의무, 선행, 희생과 양심 등 일반적인 도덕률에 바탕을 두고 발전해왔다. 이윤추구와 자본축적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주의는 반드시 자본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성공했던 것이다."(386-7)


"일례로, 루터와 칼뱅이 가르친 기존 사회의 종교적 전통, 즉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직업에 매진하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와 관련이 없으면서도 그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어떤 임계선을 넘어 팽창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차로 사람들의 생활 전반에서 전자본주의적 도덕률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원래 자본주의는 삶을 둘러싼 모든 사물과 모든 조건들을 시장경제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 아래서는 전통적인 것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해체된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구현체라고 할 수 있는 대량생산사회의 불안정성이 갈수록 높아지는 현상은 바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의 급속한 쇠퇴와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공기가 희박해졌을 때 생명과 공기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전자본주의적 성향들이 약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387-8)


종장 탈공장의 시대와 인간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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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과 사회 -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역사 대우학술총서 신간 - 문학/인문(논저) 609
이영석 지음 / 아카넷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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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근대사회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낳은 지적 기반은 이 지역의 대학제도에서 마련되었다. 16,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지도자들은 교회 자체의 개혁에서 더 나아가 대학교육을 통해 지역 젊은이들이 영적 갱신과 함께 새로운 지식과 도덕을 고양하기를 소망했다. 18세기에 에든버러대학, 글래스고대학, 애버딘대학, 세인트앤드루스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까지 널리 퍼졌다. 다른 한편,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산업화 초기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새로운 사회경제적 변화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변화의 진원지에서 약간 떨어져 있었다. '중심'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변화는 대체로 중심보다는 변두리에서 오히려 더 빨리 발견되고 또 더 분명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스미스가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는 관점에서 국민경제를 이해하려고 한 것이나, 퍼거슨이 시민사회라는 새로운 개념을 통해 산업사회의 변화를 인식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19)


"또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문화적 성취는 정치적 종속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 대(大)브리튼의 문화 창달자임을 자부하는 이중적 의식구조를 보여준다. 아마도 현실 정치에서 잉글랜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스코틀랜드의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초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의 화두는 근대사회 형성과 근대사회에서 인간 삶의 변화였다. 이들이야말로 '근대성' 문제를 탐구의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지식인집단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퍼거슨과 스미스가 보기에, 근대 상업사회란 시장의 위력에 인간의 삶이 그대로 노출된 사회였다. 인간과 시장의 관계, 원시사회에서 상업사회까지 이르는 사회 진보의 역사와 같은 문제야말로 이들이 눈여겨본 핵심 주제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대학에서 강의한 '도덕철학'은 상업사회 아래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이면서도 현재적인 질문을 위한 성찰의 주 무대였다."(20-1)


제1장 에든버러, 18세기의 풍경


제2장 종교와 대학


"존 녹스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버윅에서 성공적으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설교자로 이름을 떨쳤다. 1550년대에 종교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망명했다가 1559년 귀국했다. 망명 시절 독일, 프랑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들과 교류하면서 장 칼뱅의 신학에 경도된 그는 에든버러를 비롯해 스코틀랜드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종교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녹스와 그의 동료들은 장로교회를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국교로 만들었다. 가톨릭은 짧은 시일 안에 소수 종파로 전락했으며 이제 칼뱅주의자들 사이에 교회조직을 둘러싸고 장로파와 주교파가 서로 대립했다." "17세기 중앙권력의 부재라는 특이한 상황 때문에 장로교회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그 권력을 대신하는 정치적·사회적 권위를 갖게 되었다. 즉 교구의 개별 교회에서 전국 차원의 총회까지 교회는 위계적인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이 조직체계가 교육과 구빈 행정을 맡으면서, 장로교회가 중앙권력이 없는 스코틀랜드 사회에서 정치적 권위를 갖게 된 것이다."(60-1)


# 주교파(감독파) : 칼뱅주의 교리는 수용하되, 교회조직에 관해서는 가톨릭의 주교 제도를 따르는 영국국교회의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종파를 말한다.


"18세기에 들어와 스코틀랜드 목회자들 사이에서는 장로교의 엄격한 교리와 생활윤리를 시대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당시 장로교 전통에 충실한 사람들로부터 '중도파'라고 불린 이 일단의 목회자들은 광신과 지나친 종교적 열광을 멀리하면서, 합리적인 사상과 풍조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정치적으로는 휘그파 정부에 협조관계를 유지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영국화'를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중도파는 당시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새로운 사상과 고급문화를 통해 교회를 성찰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교회의 표준적 교리와 의식은 그대로 따랐지만, 그 대신에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고 신학상의 논쟁은 가능하면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오히려 문필가로서의 활동에 관심을 갖거나 또는 문필가들을 존중했다. 아울러 현실생활에서 도덕과 윤리의 지침을 마련하는 것이 종교생활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다."(66-7)


"(세속화의 문제에 전향적으로 접근한) 중도파 목회자들의 기본적인 태도는 종교와 사회의 화합이었다. 이들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며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조건과 그 통치에 필수적인 제도라고 생각했다. 교회와 사회의 불가분 관계를 강조하면서도, 사회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더 중시했다." "윌리엄 로버트슨, 휴 블레어를 비롯한 중도파 인사들은 세련되고 계몽된 가치, 종교적 중도와 관용, 과학 및 문학 분야의 성취 등을 존중했는데, 이는 바로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기본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제 교회는 일상생활에 대한 간섭을 포기했다. 이는 교회가 종래 장로교회의 전통을 넘어서 세속생활의 자율권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젊은 목회자들은 세계가 설교와 신의 징벌 때문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지적 진보 때문에 나아진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면 종교와 계몽운동이 서로 수렴된 것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교회와 계몽운동을 분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75-6)


제3장 정치에서 문화로


"스코틀랜드 내에 브리튼 정체성 형성을 가속시킨 것은 18세기 프랑스와 벌인 일련의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인들이 프랑스의 가톨릭에 적대적이었던 것은 종교적 관용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을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가치를 일깨우는 힘이자 자신들의 자유 및 부의 원천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스코틀랜드인들이 더 강렬했다. 또한 가톨릭 프랑스와의 대립은 제국의 문제와 관련된다. 영국의 식민지무역이 활발해질수록 유럽에서 무역적자를 해속하고 경제적 활력을 배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이 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독립전쟁도 종교적 대립구도는 아니었지만, 전쟁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고, 왕정주의자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백인정착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 지배계급의 통합을 이루고 통합 왕실에 대한 충성을 자극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110-2)


"1745년의 사건─재커바이트 세력이 스코틀랜드 고지대 사람들과 연합하여 스코틀랜드를 점령한 사건─은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에게 두 방향으로 영향을 끼쳤다. 첫째, 그들이 보기에 시대착오적인 재커바이트 운동은 오히려 문명화에 대한 당위성을 더욱더 강화시켜주었다. 존 흄과 윌리엄 로버트슨은 문명화과정이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여기에서 문명화는 '영국화'와 거의 같은 의미다. 문명화 역사의 근저에는 강력한 주권국가의 형성이 있다. 그런 면에서 1707년의 합병은 역사적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둘째, 재커바이트 운동의 실패는 종교적으로는 가톨릭뿐 아니라 주교파와 장로교회 기존 교권주의자들 모두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 사건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갱신이 이제 시대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 적극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목회자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이 바로 신이 부여한 섭리였다."(122)


# 재커바이트(Jacobite) 운동 :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난 제임스 2세와 그 직계 후손을 복위시키려는 일련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이 단순히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넘어서 '영국화'를 대안으로만 삼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1745~46년 사건의 비극적 종말은 한편으로는 이들에게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다시 성찰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수천여 희생자가 발생하고 다수 스코틀랜드인들이 패퇴한 그 사건에서 스코틀랜드 중도파 목회자와 지식인들은 그 비극을 다른 형태로 승화해나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스코틀랜드는 더 이상 잉글랜드와 정치적으로 대결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영국과 영국문명이 바람직하고 뒤따를 만한 이미지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그 문명은 물질적 진보의 길로 나아가면서도 바탕을 이루어야 할 도덕과 새로운 가치체계 및 문화를 갖추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 있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었다. 잉글랜드의 문명화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오히려 그 문명을 한 차원 더 높게 고양하겠다는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122-3)


제4장 중심과 주변


"16~17세기 유럽인의 대양 진출이 활발해지고 그 결과로 유럽 경제권이 확대되었을 때 영국만이 아니라 에스파냐,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여러 유럽 나라들이 해외무역을 주도해나갔다. 여기에서 영국이 다른 나라와 달랐던 점은 이 나라만이 신대륙 무역과 동방 무역을 적절하게 서로 연결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에스파냐는 주로 신대륙 무역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인도 및 동아시아를 포함하는 동방 무역에 집중했다. 오직 영국만이 두 무역 네트워크를 연결할 수 있었다." "대니얼 디포는 당대의 세계사적 시각에서 영국의 번영을 가져올 수 있는 무역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아메리카 식민지 및 카리브 해 연안을 영국의 시장 확대를 위한 텃밭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이미 디포의 시대에 출현했다. 디포가 보기에, 두 무역 네트워크의 연결은 단순히 중개무역과 상품시장의 확대로 끝나지 않고, 영국의 재정과 국부 문제를 직간접으로 해결하는 대안을 제공할 수도 있었다."(128-31)


# 대니얼 디포 : 『로빈슨 크루소』(1719~22)와 『몰 플랜더스』(1722)로 유명한 소설가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그리스 고전철학 전통의 일부를 이어받아 덕의 완성에서 행복을 찾고, 완전한 행복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세의 고통과 천국의 보상을 연결함으로써 행복의 내용에 세속적 요소를 포함시켰다." "잉글랜드에서 행복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한 것은 르네상스시대의 일이었다. 르네상스 지식인들의 상상력은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더 소망하는 태도를 낳았다. 르네상스시대 유토피아 사상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그들이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현실의 시간적·공간적 연장선에서 자신들의 기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현세는 더 이상 '눈물의 골짜기'가 아니며 따라서 지상의 삶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종교개혁가 특히 칼뱅주의자들의 의도는 이처럼 현세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경향에 제동을 걸려는 데 있었다."(156-7)


"18세기 행복론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존 로크의 저술이다. 그는 내란기에 크롬웰을 지지했으나, 정통 칼뱅주의자가 아니었다. 그가 『인간오성론』(1689)에서 제시한 메타포 '백지장(tabula rasa)'은 원죄의 타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란 원죄와 관련이 없이 기쁨과 고통의 지각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로크는 이 책 제2권에서 '행복의 추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낙하하는 돌이나 큐로 맞힌 당구공과 마찬가지로 자기 삶의 공간을 뚫고 앞으로 나가나는 추진체다. 로크는 그 추진력을 행복에의 열망에서 찾는다. 행복의 열망이 고통과 기쁨을 중력처럼 밀고 당기는 작용을 한다. 〈우리 안의 기쁨이 윌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우리 안의 고통은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완전한 행복이란 결국 인간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지고의 기쁨과 동의어가 된다. 로크는 인간이 이성의 인도를 받아 행복을 합리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고 본다."(157-9)


"그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역사가들이 '감성적 개인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삶의 태도의 출현이었다." "이런 풍조를 선도한 집단은 지식인 외에 아무래도 해외무역과 상업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하고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상인들이었다. 물론 개인주의와 자유로운 일탈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히 강했다. 개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돔과 고모라, 바빌론과 로마, 이 모두는 급기야 멸망으로 이르지 않았는가. 계몽주의시대 영국 지식인들은 〈자아해방과 쾌락 추구〉가 〈도덕적 폐해와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음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명예혁명이야말로 군주의 전제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장받은 정치적 기제이며, 시장경제 또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조화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이들은 나아가 인간의 본질이 기쁨과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작동하는 기계와 같다는 기계적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161-2)


"잉글랜드 사회의 급속한 변화에 비하면,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정체되고 후진적인 사회였지만 합병 이후에 드디어 수 세기 동안 계속된 만성적 빈곤과 후진성에서 벗어날 호기를 맞았다." "그러나 에든버러를 비롯한 동부 저지대는 글래스고의 상황과 상당히 달랐다. 이 지역에서는 대외무역과 상공업의 변화를 가져올 계기가 적었다. 결국, 합병의 혜택은 서부지역에 돌아간 셈이었다." "이와 같이 에든버러는, 중앙정치권력은 실종된 도시였지만, 최고법원과 전통 있는 교회들이 있고 에든버러대학의 평판이 갈수록 높아졌기 때문에 합병 이후에 전문가집단이 급속하게 증가했다. 18세기 중엽 법률가 수는 같은 세기 초보다 2배 늘었고, 중앙정치 무대로 진출하지 못한 채 영지에서 농업 개량에 몰두했던 지주들도 농한기를 비롯해 수시로 에든버러에 모습을 드러냈다. 목회자, 법률가, 교수 등 전문가집단이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직접 문필 활동을 하거나 문필가 주위를 에워싼 독서층 또는 청중을 형성했다."(170-2)


"오늘날 중심과 주변은 경제적 맥락에서, 그리고 중심부 시각에서 주로 인식된다. 주변부에서 보면 중심은 언제나 따라잡기의 무대이자 대상이지만 중심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부여되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성취는 이런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변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했다. 그것은 도덕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후일의 경제학과 사회학이었다. 이들 학문은 유럽사의 근대 국면, 그리고 산업혁명 직전까지 유럽 지식인과 정부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중농주의와 중상주의의 개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에게 잉글랜드의 변화는 곧 미래에 나타날 보편적 변화였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정부, 사회, 과학, 여론에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의 원형을 발견했다. 이를 포착하고 관찰함으로써 상업(산업)사회의 본질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가설과 검증이라는 뉴턴의 방식이 사회 관찰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175-6)


제5장 문필공화국: 명사회에서 사변협회까지


"명사회나 사변협회 같은 모임은 일종의 담론공동체였는데, 1750년대 이후 활발하게 결성되었다. 이는 이전에 지연과 학연 또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망을 통해 비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지식인들의 토론문화가 좀 더 공식적이고 정기적인 활동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시기의 토론문화와 담론공동체는 계몽운동의 산물이자 동시에 계몽운동을 낳은 바탕이기도 했다. 저명한 문필가뿐만 아니라, 직접 문필 활동을 펼치지 않더라도 지식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목사·교수·의사·변호사 등 에든버러 식자층이 모임의 회원이었다. 이러한 정규모임은 엄격한 회원 자격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폐쇄적이었다. 그러나 일부 모임은 자주 공개토론이나 공개강연을 개최했다. 공개토론과 공개강연은 에든버러 시민 누구나 방청할 수 있었다. 계몽운동이 문필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독자층의 상호 관계망을 통해 전개된다고 한다면, 18세기 중엽 에든버러야말로 그 전형적인 공간, 즉 '문필공화국'이었다."(182-3)


"명사회(Select Society)는 계몽운동기 에든버러의 가장 대표적인 담론공동체였다. 이 모임이 결성된 계기는 종교 갈등이었다. 1753년 조지 앤더슨이라는 교구학교 목사가 데이비드 흄과 또 다른 저명한 법조인 헨리 흄을 비난하는 팸플릿을 발간했다. 이 책자에서 그는 이들 〈무신론자들을 신성한 일에서 자신과의 교류와 동료관계뿐 아니라 다른 주제에 관한 긴요하지 않은 모든 대화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전체 기독교인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로버트슨과 블레어 등 중도파 젊은 목사들은 이러한 비난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세속 지식인들과 정기적인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성을 느꼈다. 명사회는 이를 계기로 결성된 모임이었다." "명사회는 10여 년간 에든버러 지식인운동의 중심축을 형성했다. 애덤 스미스나 벤저민 프랭클린 같은 외지인이 이 무렵에 에든버러에 매료당한 것도 이 도시에 자리 잡은 '학자와 사상가들의 공동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사회는 10여 년이 지난 후 점차 활력을 잃었다."(193-7)


"포커 클럽(Poker Club)은 1757년 명사회 회원 일부가 시민군법 조항을 심의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회합을 가진 데서 유래했다. 이들은 민주적인 시민군이 국가의 존엄에 필수적이라는 인식 아래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퍼거슨에 따르면, 상업은 시민의 덕목과 '사회적 정신'의 쇠퇴를 가져온다. 이는 전쟁술을 전문기술로 만들어 시민의 삶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전문화된 전쟁술은 결국 참여적 덕목을 위협할뿐 아니라, 그 전문화를 사회정신의 중심에까지 확대시킨다. 결국 시민적 덕목의 쇠퇴를 막을 치유책은 고대적 자유의 토대를 되살리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시민군의 전통이 그것이다." "반면,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의 쇠퇴를 우려하면서도, 시민군제도가 전 시대의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에게 훈련, 복종, 용기 등의 덕목은 당대에 절실한 가치가 아닌 것이다. 스미스도 포커 클럽의 회원이었지만, 그의 시민군에 대한 견해는 분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맥락이 같다."(198-201)


"사변협회(Speculative Society)는 일단의 박식한 문필가와 전문직업인, 스코틀랜드 교회 목사들이 다수 참여한 단체였다. 프랑스 계몽운동에서 상당수가 회의주의자였던 것과 달리, 사변협회는 인간·사회·세계에 관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반종교적 성향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는 목회자들의 협회 참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회원들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지식인 문화가 굳건한 도덕적·종교적 토대와 양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윌리엄 로버트슨은 〈기독교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우리의 행동을 품위 있게 만든다〉고 말했다. 휴 블레어 또한 〈종교가 인류를 문명화한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근대성과 기독교의 밀접한 관련을 믿었고 또 그렇게 설파했다. 개신교 전통이 강한 에든버러 사회에서 사변협회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에든버러가 지적 활력을 점차 잃어갔음에도 사변협회는 여전히 토론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갔다."(206)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전 편찬자들은 당대의 지식을 집대성함으로써 '대브리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백과사전의 편찬과정을 살펴보면,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문학, 예술, 사회과학, 생물학, 의학, 화학, 지질학 등 여러 학문분야를 일련의 조직화된 학문체계로 바꿔 후대에 전수하려는 열망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지식체계를 당대의 젊은이와 후대에 전하는 교육적 사명을 중시했다. 강의와 설교와 문필을 통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 것이다. 이들의 지적 생활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데 있었다. 백과사전의 편집자들 또한 처음부터 이 같은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했다." "백과사전은 어느덧 영국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 즉 영국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백과사전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졌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221-5)


제6장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계몽운동기 스코틀랜드 지식인과 문필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질 수 있었던 배경은 공적 토론의 자유다. 이런 면에서 특히 에든버러의 문필가들은 동시대 어느 나라 지식인 못지않게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문필가들은 대체로 칼뱅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 자라났다. 그들은 인간 자신과 인간 사회의 불완전성을 당연시했다. 계몽지식인들은 인간의 본성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자기애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과 동감을 통해 소통하고 연대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이 인간의 내면과 본성에 깊은 관심을 쏟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시선은 바로 상업사회에서 살고 활동하는 독립적인 개인을 향해 있었다. 이들은 공동체와 집단에 매몰된 존재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활동하는 그 개인의 내면과 본성에 대한 이해를 높임으로써 상업사회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229-30)


프랜시스 허치슨은 섀프츠베리, 존 로크, 토머스 홉스 등 17세기 잉글랜드 사상가들에게서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는 로크에게서 인간은 '생득관념'이 없으면 오직 경험으로부터 관념을 형성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 허치슨은 홉스의 사회관을 수용하고 있다. … 인간은 원래 이기적인 존재다. 허치슨이 생각하기에, 인간은 제어와 통제 없이는 자기 헌신과 희생을 할 수 없다. 허치슨은 이러한 기능을 국가만이 아니라 도덕률도 갖는다고 본다. 도덕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사회적 형성물이다. 허치슨은 도덕성의 근거를 '도덕감각'에서 찾는다. 이는 말하자마녀, 오감 이외의 다른 감각이라 할 수 있다. …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감적으로 선한 행위를 선으로 인식하는 도덕감각을 지녔으며, 이에 힘입어 사회의 질서와 조화가 가능한 것이다. 허치슨이 보기에, 도덕감각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자신을 보존하려는 자기애(self-love)와 다른 사람에 대한 자혜심(benevolence)이었다. 230-2)


문필가들은 '세련'으로 나아가는 진보 혹은 발전에 내포된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소망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생활의 상업화를 뒤따를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사치, 사익 추구, 도덕적 해이, 시민적 덕목의 쇠락 등이 그런 위험에 해당했다. 정치경제학을 수립하면서, 사회이론가들은 새로운 경제에 지배되는 사회에서 도덕적 행동의 문제를 설파했다. 흄과 스미스는 시급한 경제 발전과 필수적인 사회윤리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려고 사회적 삶의 전 부문을 포함하는 이론을 세웠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에게 시급한 것은 〈옛 윤리와 새로운 경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다. …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은 오늘날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 분야, 이를테면 인류학·사회학·심리학·경제학·역사학 등의 진정한 창조자였다. 이들 학문이 분화되기 전에 전체를 포괄하는 탐구 분야를 당대 사람들은 '도덕철학'이라 불렀다. 236-7)


당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도덕철학'을 원래 어의(語義)와 다르게 사용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철학 일반에 해당하며, 그 말 자체가 철학의 인식론을 탐구하는 '자연철학'과 대비되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독일 관념론의 전통에서는 인간과 자연은 서로 분리된 존재로 이해된다. 자연은 인간이라는 인식 주체의 인식대상, 즉 객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서 인간과 자연은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이 동일하다는 인식이 영국의 지적 전통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인간본성(human nature)'이라는 영어식 표현도 그것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연으로서의 인간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결국 도덕철학은 사회현상을 일으키는 소수의 일반원리를 밝혀내고 그 원리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 학문이다. 스미스가 도덕철학을 과학이라 부른 것은 이런 의미다. 과학적 탐구로 그 원리를 밝히는 것이 도덕철학의 과제였다. 238-9)


흄은 다른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홉스와 허치슨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다. … 그는 『인성론』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사회를 바라보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감(sympathy)'을 사회 성립의 또 다른 토대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바로 동감(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개인을 넘어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과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는 이중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 인간의 이성은 수학과 같은 학문과 지식세계에서나 엄밀하게 작용한다. 사회에서 합리적이라고 불리는 것도 관행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이 합리성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 인간의 도덕적 판단은 특정한 사안에 대한 승인과 부인의 문제이고, 이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직접 연결된 것이다. 자명한 도덕원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은 이성의 작용보다는 감성, 흄의 표현으로는 정념의 결과다. 242-3)


스미스는 인간의 이타적인 감정 가운데 '자혜'를 특히 중시한 허치슨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 관련된 개인의 다양한 감정을 탐색한다. 연민과 동정 같은 감정 외에도 동류의식(fellow-feeling), 동감, 단정함(politeness), 관용(generosity) 등의 감정은 다른 사람과 적극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초가 될 것이다. 반면에 증오나 분개 같은 비사회적 감정도 있다. 여기에서 스미스는 개인이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통까지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동류의식'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존재다. 다른 사람이 직면한 상황을 연상하고, 자신이 그 상황에 처했을 경우를 가정할 수 있다. 즉 자신과 상대방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 행위자와 관찰자 사이의 동감을 얻기 위한 성찰, 상호노력이라는 경험의 축적과정에서 인간 행위의 적정성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 즉 도덕의 판단기준이 성립된다는 것이 스미스의 결론이다. 248-52)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감정과 행위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수준에 맞추려고 한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에는 제각기 그와 같은 '공정한 관찰자'의 상이 깃들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 공정한 관찰자를 마음에 간직함으로써 자신의 모든 감정과 행위가 그 상상 속 관찰자의 수준에 맞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 마음속의 공정한 관찰자를 가정할 경우, 인간은 대부분 그 공정한 관찰자가 부정하는 행위를 피하고 인정하는 행위를 적극 실행해야 한다는 규칙이 성립된다. 스미스에 따르면, 관찰자가 부정하는 것을 회피하는 규칙이 정의이고, 인정하는 것을 적극 행하는 규칙이 자혜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바로 이들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며 이것이 바로 의무감, 곧 '도덕감'이다. 스미스에게는 이 의무감(도덕감)이야말로 사회 형성과 존립의 토대가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원칙〉이기 때문이다. 252-3)


제7장 사회와 역사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계약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임을 인정했지만 사회성을 이성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은 사회계약론이 가설과 추측에 의존할 뿐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며 경험적으로도 그러한 증거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퍼거슨이 생각하기에, 홉스와 같은 이론가들은 사실(fact)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일반원리를 수립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설(hypothesis), 추측(conjecture), 상상(imagination), 운문(poetry)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데이비드 흄 또한 계약에서 비롯된 정부는 〈이 세계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든지 역사적으로나 또는 경험적으로 정당화된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사회의 기원에 대한 계약론적 설명이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면, 정부의 정당성이 개인의 동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258-60)


"애덤 퍼거슨은 근대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개인이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더 넓은 장이 마련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상업사회는 개인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개인의 창발성이 높아지고 인간의 개성 또한 극대화된다. 이와 같이 상업사회는 진보, 개인의 자유, 정치적 안정, 법의 지배 등을 가져왔지만, 아울러 개인들이 무가치하고 비인간적인 일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낳아 시민적 덕목이 약화되었다. 근대사회는 오히려 개인이 전통적 덕목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기이익만 쫓도록 만든다. 근대사회의 위협은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열정이 정치적 열정, 즉 시민적 덕목을 앞지르기 시작할 때 비롯한다." "역설적으로, 정치적 열정의 쇠퇴는 시민사회 안에서 평화의 시기가 오래 지속되는 시기에 주로 볼 수 있다. 상업은 개성을 고양하고 시민 개인의 자유를 신장하지만, 시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적 전통을 무너뜨린다. 근대 상업은 바로 이런 경향을 가속시킨 것이다."(275-6)


# 퍼거슨의 해결책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의하는 협약〉, 곧 법을 통해서 이기심을 제어하고 일탈을 방지하는 것이다.


"퍼거슨은 상업사회의 진보와 경제성장을 이끈 분업의 이중적 특징에 주목한다." "퍼거슨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직업의 분리가 〈기술적 개량〉을 약속하고 실제로 모든 기술적 생산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적으로 〈사회집단들〉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상업사회에서 정치적 열정을 생산적 열정이 대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많은 기계적 기술들은 어떤 탁월한 능력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감정과 이성을 완전히 억압한 상태 아래서 최상의 결과를 얻는다. 무지는 미신만이 아니라 제조업의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다. (···) 따라서 제조업은 정신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곳에서, 그리고 상상력의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은 채 작업장이 각 부분을 인간으로 채워 넣은 어떤 동력기관으로 여겨지는 그런 곳에서 가장 번영한다.〉" "스미스는 맨더빌과 마찬가지로 분업의 사회적 기여에 좀 더 비중을 둔 반면, 퍼거슨은 인간 및 인간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결과들을 깊이 성찰했다."(278-80)


"데이비드 흄은 『잉글랜드의 역사』(1754~1762)를 집필해 당대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이 책은 영국인의 자유의 발전에 관한 서사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영국인의 자유는 예절, 교양, 사교, 법과 재산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하며, 이러한 자유의 발전은 영국의 상업, 기술, 과학의 발전과 동일한 궤도를 그리며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흄은 단순히 자유의 발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상업과 무역을 진흥시키며 기예와 과학을 장려한 근대적 정부와 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문명화 및 문명 개념의 확산을 중시함과 동시에, 폭력과 국제질서를 독점한 국가의 발전에 주목한다. 흄은 영국 상업사회의 발전을 국가주권의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18세기 영국 문명의 성취, 이를테면 입헌군주정, 시장의 지배, 국제무역의 헤게모니, 국민적 자유의 신장 등을 잉글랜드의 발전과정을 넘어 근대 유럽인이 지향해야 할 '근대성'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286-9)


"윌리엄 로버트슨의 역사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를 5세 시대사』(1769)다." "15세기 유럽 여러 지역에서 공통으로 나타난 현상을 봉건제도의 급속한 쇠퇴다. 이는 군주권의 강화 및 상비군의 확대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로버트슨은 이 시기에 〈유럽 체제에 속해 있는 모든 국가들 사이에 적절한 권력 배분〉이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근대체제의 변화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종교적 관용 및 가톨릭 쇠퇴와 더불어 급속하게 전개된다. 이것이야말로 유럽에서 국제적 세력균형의 중심축이었다." "브루스 버컨에 따르면, 로버트슨의 역사서술은 데이비드 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경험, 귀족층의 몰락, 상업 발달, 관용과 예절의 확산, 국가 주권의 확대 등을 문명화과정의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이들이 서로 어떻게 결합되었는가를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와 함께 국제적 세력균형 또한 중요한 변수의 하나다. 세력균형이야말로 유럽 문명화과정의 추진 궤도라는 것이다."(289-90)


"퍼거슨은 진보가 인류의 자연사적 과정이라는 점을 받아들였지만, 그 추동력을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는 특히 사유재산제도의 대두, 발전 및 변화를 중시했다. 즉 사회 형태의 발전은 사적 소유의 구조와 발전에 크게 힘입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퍼거슨의 계급갈등론은 사회 진보의 동력 가운데 하나를 찾는 선에서 멈춰 있다. 퍼거슨과 마르크스 사회이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퍼거슨은 단지 소유관계가 변화하는 방식과 발전단계를 관련짓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특정 유형의 경제활동을 기준으로 발전단계를 제시하는 스미스의 방식을 비판한다. 그 대신에 퍼거슨은 사유재산제도를 중심으로 이 제도가 없는 시대, 제도가 나타나지만 법적으로 구현되지 않은 시대, 사적 소유의 제도화를 이룩한 시대로 구분한다. 이들 시대는 각기 미개, 야만, 문명 단계에 상응할 것이다." "퍼거슨에게 문명은 진보를 뜻하고, 그 진보야말로 근대성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298-9)


# 사회갈등은 '비의도적'으로 전개되지만,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


제8장 계몽과 근대성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에 관해 간결한 정의를 내린다. 〈계몽이란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성숙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 미성숙이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한 것은 이성 자체의 결핍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없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계몽사상은 그 내용이 아니라 사유의 형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를 계몽하려는 의도보다는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계몽운동의 사회적 차원을 상정할 수 있다. 계몽은 의지의 자유는 물론, 사회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필요로 한다. 칸트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공적 영역에서 토론의 자유와 인간 이성에의 의존이다."(305-8)


"'근대성'이란 근대라는 시대를 가리킨다기보다 그 시대에 형성된 삶의 양식, 문화형태 전반을 뜻하는 용어다. 근대성은 자율적, 주체적 인간(개인)과 세계에 대한 기술적 지배 욕망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또한 근대성은 기적과 불가사의와 신화의 세계를 제거하고 확실하고 실증적이며 경험적인 사실을 중시한다. 한편으로는 탈신화화 또는 신비주의로부터 해방을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합리성/합리주의의 지배를 의미한다. 근대성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통해서도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삶과 경험 모두가 역사적 시간의 맥락에서 재구성된다. 이러한 '시간의 역사화'는 궁극적으로 인류사에 대한 진보의 시각을 낳았다. 공간적으로는 자연의 해방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또는 기술 지배의 추세와 관련된다. 궁극적으로 근대성이란 근대적 인간, 즉 이성적 주체이자 욕망하는 주체인 개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다층적 문화형태를 일컫는 개념이다."(311-2)


"인간의 자기이익과 동감, 이 두 성향은 '이기적 정념'과 '사회적 정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의 사회성과 사회적 연대 및 참여는 모두 이 사회적 정념─이를테면 관용, 인간다움, 친절, 우정, 존경─등의 작용에서 비롯한다. 스코틀랜드 문필가들은 이 두 성향의 공존이 가능하리라고 여겼다. 개인이 집단과 공동체의 외피를 쓰고 있을 때에는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기존의 도덕률, 집단 또는 공동체의 규제, 그리고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제도와 관행에 의해 제약받았다. 개인이 집단의 규제에서 해방되기 시작하면서 자기이익의 추구 경향이 두드러졌고, 이는 곧 주체적 개인의 욕망을 끝없이 발산하는 과정과 동일한 궤적을 그렸다. 헤겔은 시민사회의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시민사회의 중요한 특징으로 바라보았다. 욕망의 표출은 기본적으로 자기이익의 추구에 따른 결과다. 이와 대조적으로 퍼거슨은 욕구의 분출과 충족으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풍조에 우려의 눈길을 보냈다."(317, 321)


제9장 계몽운동과 오리엔탈리즘


"백과사전의 '인도' 항목은 인도 자체에 관한 정보를 별로 제공하지 않는다. 인도의 역사도, 인도인의 생활과 관습도, 종교와 문화도 소개하지 않는다. 오직 고대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인의 인도 진출과 지배를 연대순으로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는 영국의 인도 지배를 유럽인의 인도 진출 역사의 중요한 과정이자 완결점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인도 지배의 필연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말하자면, 고대 이래 유럽인들은 동방으로 진출하려는 뚜렷하고도 일관된 경향을 보여왔다. 무수한 민족과 국가들이 제각기 여건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았다. 중세시대에 이슬람 세력의 확대와 함께 그 움직임이 멈춰졌지만, 그것은 중세 후기에 되살아났다. 베네치아, 제노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에 뒤이어 인도 진출의 사명은 영국인의 손에 넘겨졌다는 것이다. '인도' 항목의 필자에 따르면, 영국인은 그 사명을 완수하였고 이는 오랜 역사 과정의 마침표를 뜻하는 것이다."(352-3)


제10장 지적 전통의 마지막 세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과 문화운동은 민족감정에 기반을 두고 전개되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면,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을 주도했던 문필가들은 사거하거나 또는 문필 활동을 중지했다. 19세기 브리튼 문화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토머스 칼라일, 월터 스콧, 프랜시스 제프리, 헨리 브루엄 등은 모두 1790년대에 사변협회를 주도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과 한 세대 선배 간의 가교 역할은 듀갈트 스튜어트가 맡았다." "이 밖에도 젊은 시절 에든버러에서 지적 세례를 받고 문필가로 활동한 인물은 무수하게 많다. 이들 모두가 스코틀랜드 계몽운동의 마지막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주로 1780~90년대에 에든버러대학에서 공부한 이력을 공유한다. 특이한 것은 전 세대의 인물들과 달리 이들은 젊은 시절을 에든버러에서 보낸 후, 기회가 닿으면 잉글랜드, 대부분 런던으로 진출했다는 점이다. 이들 가운데 제프리와 스콧만이 스코틀랜드를 떠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에든버러의 지적 잠재력의 쇠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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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국의 초상 -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을 읽는 아홉 가지 담론들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4
이영석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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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사회 연대기


"19세기 후반은 평론지review와 잡지의 황금 시대였다. 저명한 학자는 물론, 정치가와 성직자, 재능 있는 문필가들이 앞 다투어 평론지에 글을 썼다. 그리고 주로 중간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독자가 이들의 글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공공 여론을 형성했다." "독자의 지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지식도 소개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전통적인 문필가들의 작업 외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새로운 학문 분야들이 태동하고 있었다. 각 분야에서 지적 탐구를 계속해온 학자들이 전통적인 문필가 집단에 뒤이어 새로운 기고자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성서 연구, 새로운 과학, 과거 역사에 관한 많은 논설들이 실리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의 현실 문제 또한 각별한 관심을 끌었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의 평론지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지성지知性誌이자 현실 문제를 예리하게 진단하고 분석하는 시사 잡지라는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17-8)


1부 사회와 개인


1장 민주주의에 관한 성찰


"영국 의회가 자유당과 경쟁 구도로 정착된 19세기 중엽 헌정제도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과 월터 배저트다. 우선 밀은 대의정부야말로 공공업무를 잘 수행하고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이는 선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기서 대의정부란 주민 전부 또는 다수가 정기적으로 선출한 대표를 통해 궁극적인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뜻한다. 밀에게는 대의정부가 바로 민주주의를 의미했다. 그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성인이 정치 참여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릇된 민주주의false democracy'라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선거제에 바탕을 둔 대의제를 최선의 정부 형태로 꼽았다고 하더라도, 밀은 정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서도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우월한 투표자의 견해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9-51)


"배저트는 영국의 헌정제도를 '위엄 부분'와 '능률 부분'으로 나눈다. 앞의 것은 국민의 존경과 충성심을 유발하는 왕실과 상원을 뜻하며, 뒤의 것은 실제 행정과 통치를 맡는 하원과 내각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능률 부분, 특히 내각이다. 내각제는 행정부가 입법부 의원으로 구성되는 반면, 의회 해산권을 보유해 둘이 결합되는 장점을 지닌다. 이렇게 보면 영국 헌정은 군주제를 가장한 공화정인 셈이다. 유능하고 규율 잡힌 입법부와 잘 짜인 행정부, 즉 서로 협조하는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가 바로 내각제의 산물인 것이다." "배저트는 선거권 문제에 관해서는 밀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그는 대의제와 민주주의를 구분한다. 민주제는 하층민이 권력을 행사하는 제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 보통선거권에 제한을 두어야 할 것이었다. 밀이 여성을 포함한 보통선거권을 주장하면서 지식인의 역할에 가중치를 두기 위해 복수투표제를 제안한 것과 대조적이다."(51-4)


"로버트 월리스는 자신의 논설 〈자유주의의 철학〉(1881)에서 자유주의, 자유당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의 관계를 명료하게 설명한다." "자유당의 정치는 보통선거권 확대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자유당의 정치는 결국 인간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그런 한계를 고려하면서도 인간을 중심에 두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월리스는 민주주의의 지향점을 신학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신학적으로 인간은 타락한 존재다. 예수의 출현은 인간이 타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렇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가 간섭하고 개입한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도덕을 강조하고 불의보다는 정의, 억압보다는 자유를 더 높은 가치로 보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다."(64-5)


"1880~90년대에 민주주의에 비판적인 논설을 기고한 지식인들은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된 선거권 확대를 되돌리려 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맹목적인 선거권 확대가 초래한 정치적 혼란을 되풀이해 강조한다. 사실 1886년 이후 보수당은 바로 증가한 유권자와 농촌 선거구 덕택에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질서, 제국 정책, 애국 등의 슬로건을 내세워 새로 선거권을 획득한 바로 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한 것이다. 하층민의 상당수가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이끌리거나 선동에 넘어가기 쉽다는 비판은 오히려 당시 보수당의 전략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로 하층계급 유권자들에게는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적절하게 계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릇된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보수당 정치의 정당화와 직접 연결될 수 있었다."(70)


#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교육과 사회 발전을 통해 유권자들 간의 능력 차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은 그 격차를 해소하는 방안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1880~90년대 반민주주의 담론의 불을 지핀 것은 현실 정치에서 승리한 보수당의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 논설에서 나타나는 반민중주의, 인간 능력에 대한 불신이 과거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당의 정치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수주의 이념은 인간 능력의 불평등 그리고 그에 따른 엘리트 지배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단 당시의 엘리트주의는 한 세기 전 귀족적 이상과 상당한 거리를 보여준다. 엘리트란 출신과 배경에 직접 연결되기보다는 간접적으로 연결될 뿐이다." "물론 이들 능력 있는 실세의 대다수가 전통적 지배세력 출신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능력'이 엘리트의 외피를 장식하면서, 새로운 대중정치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제도의 성취를 그대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 제도를 통해 엘리트 지배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여러 전략과 방안들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73-4)


2장 경제 불황과 여론


"19세기 대부분의 문필가들은 불황과 저물가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그 불황이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다. 현재이 상황을 단순한 경기변동 과정으로 바라보거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에서 나타난 혼란으로 볼 경우에는 미래를 좀 더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었다. 반면 그 불황이 영국 경제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면, 좀처럼 쉽게 회복될 수 없는 것이었다." "왕립위원회(이즐리 위원회)의 다수가 서명한 〈다수보고서〉는 불황을 경기 순환의 측면에서 파악하고 앞으로의 전망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으며, 〈소수보고서〉는 불황을 가져온 영국 경제의 구조적인 요인에 주목하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나타냈다. 1880년대의 경제 논설 또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이즐리 위원회 보고서와는 대조적으로, 1880년대의 논설에서는 낙관론이 소수이며 다수 논설은 불황의 심각성과 지속성을 강조한다."(81-2)


"패터슨에 따르면, 산업화 이전에도 인간은 자연의 힘이나 주위의 동력을 이용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 자신의 노동 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산업화와 더불어 기술은 더욱 더 급속하게 발전했다." "웰즈는 기계화만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나타나는 기업 형태의 변화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기계는 생산 증대를 가져온다. 반면 모든 생산물 가운데 가장 비싸다. 기계를 구입하고 사용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이런 조건 때문에 거대 기업 또는 주식회사가 성장한다. 그것은 결합자본이 조직화된 형태다." "이러한 낙관론자들도 기술 혁신에 따른 혼란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 모든 변화는 〈낡은 생산 방식의 커다란 혼란〉을 낳았으며, 개별 측면에서는 〈자본의 손실과 직업의 상실〉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는 과도기적 현상일 뿐이다. 근래의 불황은 어디까지나 혁신과 진보에 따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이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라는 것이다."(85-6)


"기펀은 당시의 논란이 결국 사람들의 주관적인 견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사실 불황이 심각하지 않고 일시적인데도 사람들이 이를 깊이 느끼는 것은 이 과장된 언어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기펀은 여러 통계를 동원해 지난 50년간 이루어진 부의 축적과 생활수준 향상을 입증한 후, 그럼에도 왜 불황에 관한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가를 추적한다. 사람들은 이들 언어의 영향 아래서 불황을 체감한다. 그는 이런 언어의 대표적인 원천으로 중산계급 지식인의 사회적 양심, 노조 지도자들의 실업 항의, 다른 나라의 산업 발전에 대한 경고, 재정 위기 및 은행 파산에 대한 우려, 물가 하락으로 피해를 입은 계층의 불만 등을 차례로 언급한다. 그의 결론에 따르면, 〈불황에 관한 일반적인 언어는 과장되고 잘못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즐리 위원회와 같은 의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이러한 불평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성공을 거두었음을 뜻한다."(86-7)


# 불황의 원인에 관한 담론

1. 기술 혁신에 따른 생산비 절감 및 과잉 생산

2. 해외 시장(특히 독일과 미국)의 경쟁

3. 금본위제의 부정적 영향(금 가치 상승에 따른 물가 하락)


3장 이스트 엔드, 가깝고도 먼 곳


"전통적인 도시에서 상인과 부유한 사람들은 도심에서 살았고 빈민은 도시 외곽에 머물렀다. 런던의 경우 18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구조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은 구 런던 시 서쪽 교외로 이주한 반면, 많은 노동자와 빈민이 구 런던 시 바로 인근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19세기에 이스트 엔드의 인구 증가는 공사판, 부두 하역 작업, 이민, 고한제─sweating system, 열악한 수준의 좁은 작업장에서 저임 노동자들을 고용한 '소규모' 생산방식으로 의류·제화·가구제조업 분야에서 등장했으며, 공장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었다─등과 직접 연결된다.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세기 숙련 노동자들의 정체성을 뜻하는 자조나 체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임금, 비정규노동, 실업 등의 문제는 항상 또는 간헐적으로 이들의 삶을 괴롭혔다. 이들이 거리의 술집이며 부랑아며 범죄자들의 이미지와 겹치면서 이스트 엔드는 단순한 지리적 실체를 넘어 빈곤을 상징하는 언어로 자리잡았다."(113-6)


"이스트 엔드를 다룬 논설들은 이 지역이 직면한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대부분 빈민과 노동자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실 겉으로 보면 그들은 '버려진' 존재였다. 특히 1880년대는 주기적 불황, 농업 공황, 이민, 치열한 생존경쟁이 점철된 시기였다. 음주, 조혼, 무모한 다산, 만성질환 등으로 시달리는 극빈층은 실제로는 '가망 없는 계급hopeless classes'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씌어졌다. 1888년에 이 지역의 실태를 다룬 찰스 부스도 처음 사회 조사를 시작할 때에는 가난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진정한 노동계급'과 극빈층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수 논설들은 그 극빈층에서도 개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가난, 질병, 저소득 등 여러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일반의 편견과는 달리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다만 인구 과잉과 조혼과 이민이 빈곤의 악순환을 가져오는 주된 요인일 뿐이었다."(130)


"자선조직협회COS는 1833년 신빈민법New Poor Law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은 단체였다. 그들은 공적 구호와 개별적인 자선을 엄격하게 구별했으며,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와 이에 바탕을 둔 합리적 대안을 강조했다. 그들은 1870년대 이후 여기저기 난립한 개별 자선단체들이 오히려 신빈민법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특히 사적 자선은 '자선을 받을 만한' 빈민에게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다. '자선을 받을 수 없는' 빈민pauper이 바로 공적 구호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별하는 기준은 '인격character'이었다. 인격을 가진 빈민은 자조를 통해 빈곤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선은 그들의 자조를 돕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바넷이나 힐과 같은 COS의 주요 인물들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개별적인 자선 행위, 즉 원외구호가 오히려 빈민을 더 나태와 타락으로 빠뜨리고 부도덕을 낳고 있다고 생각했다."(134)


"1880년대 이스트 엔드에 관한 논설을 쓴 지식인들의 언어에는 진화론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포터, 마셜, 윌리엄 부스 등이 도시 빈민을 가리키는 언어로 즐겨 사용한 '찌꺼기residuum'라는 말은 다윈의 '자연도태' 개념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1882년 앤드류 먼즈가 자신의 책 제목에 처음 사용한 이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버려진 런던outcast London'이라는 말도 이에 해당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사람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 과정에서 생존에 적합한 사람들이 승리를 거두는 반면, 적합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도태된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메울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지닌 빈곤층이 광범하게 자리 잡고 있는 기묘한 현실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였다. 도태된 사람들이 생존한 것은 문명이 그들을 방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의 세계와 다른 점이었다."(134-5)


"찰스 부스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사회진화론의 관점에서 자본가와 기업가들은 '자연선택'의 구현체였다. 기업가들의 이기심이야말로 〈생산, 분배, 경영〉의 추진 동력이며, 그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맡지 않는다면 사회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박애주의나 체계적인 사회 조사를 표방한 도덕주의자들의 이면에는 이와 같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적 다윈주의를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내세웠다. 인간은 자신의 물질적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만일 환경이 악화되었을 경우 사람들은 이에 적응해 타락한 존재로 변모할 것이다. 타락한 환경 아래서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까지도 결국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바넷이나 힐은 국가의 지원을 주장하면서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노력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모색했다."(135-6)


4장 유대인 문제


"근대 초기만 하더라도 유대인은 유럽 여러 나라의 수도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17세기 중엽 이래 이들이 런던의 시티와 이스트 엔드에 홀동 및 주거 공간을 마련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다. 당시 영국은 대륙의 다른 나라에 비해 유대인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런던에 정착했다고 해서 특별히 법적 근거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법은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신분을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영국의 다른 비국교도와 마찬가지로 차별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 국교도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17세기 후반 런던으로 이주한 유대인 집단의 주류는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들은 런던의 상업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구 런던 시, 즉 '시티'야말로 그들이 상업적 자질을 발휘하는데 걸맞은 지역이었다. 물론 그들이 자유로운 영업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시티의 영국 상인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에 대해 여러 제약을 가했다."(145-6)


"18세기에 런던의 웨스트 엔드로 주거지가 확대되면서, 부유한 유대인들은 이스트 엔드를 떠나 좀 더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스트 엔드의 화이트채플이나 스텝니에는 좀 더 가난한 새로운 유대인들이 밀려왔다. 이들은 대부분 세프라딤이 아니라 동유럽 출신의 '아슈케나짐'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아슈케나짐의 이민 물결은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전쟁기에 장기간 중단된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이민 1세대보다 영국 태생 유대인의 숫자가 더 많아진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보인다. 18세기만 하더라도 부유한 세파르딤은 동유럽 유대인들을 경멸했으며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영국 출생이라는 의식과 정체성이 두 집단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더욱이 아슈케나짐계 유대인 가운데 상업 및 무역 분야에 진출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증가하면서 이들에 대한 경멸감도 사라졌다."(146)


"유대인에 대해 비판적인 논설들은 당시 유럽에 만연한 유대인 혐오증의 기원을 그들의 '종족적 배타성'에서 찾는다. 스미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편협하게도 자민족 위주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이 혐오증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했다. 유대인은 그들만의 고유한 종교적 우상에 집착하고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민족의 기질이나 성격에 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실제로는 특정한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1880년대 이전에 영국의 지식인들은 유대인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 문제를 다룬 공적 언어를 내놓지도 않았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 또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잠겨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이르러 이러한 상황은 뒤바뀐다. 유대인 문제가 공적 담론의 주제로 등장하면서,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내밀한 의식에 깃들어 있던 편견이 새롭게 구조화되기 시작한 것이다."(166-8)


5장 딸들의 반란?


"19세기 말 영국 식자층의 논설에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언어로 널리 쓰인 것은 '신여성new woman'이다. 이 말은 1894년 미국의 새러 그랜드가 처음 사용했으며, 곧바로 영국 문필가들 사이에서도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관계없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에 해당하는 여성은 19세기 후반 중등교육의 확대와 더불어 나타났을 것이다. 신여성이라는 말은 박애주의적인 사회봉사에 거침없이 나서고 자신의 소득원을 가질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진보적 견해를 나타내는 젊은 여성을 가리켰다.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신여성은 일반적으로 독립적이고 가정의 구속을 덜 받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전 세대와 차이가 있었다. 물론 신여성이 당시 여성성의 변화를 뜻하는 유일한 말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점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ist, 급진적 여성참정권론자suffragett 등의 말이 새롭게 등장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억센 여성'이나 '딸들의 반란' 같은 자극적인 표현들이다."(171-2)


"19세기 중엽 중간계급의 가정생활은 기독교 복음주의의 도덕률과 산업적 경제 원리 사이의 긴장을 풀어주는 데 기여했다. 가정은 공사 영역 간의 〈효율적인 도덕적 균형〉을 유지하는 공간이었다. 〈고상한 가정생활〉을 영위해 가족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아내에게 부여된 사명이었다." "'억센 여성'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집안의 천사로 형상화된 중간계급 여성의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을 조롱하는 뜻으로 쓰였던 것 같다." "《19세기》에 '억센 여성'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린턴이 보기에, 이들은 의도적으로 여성적인 것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이다. 린턴은 특히 여성 참정권론자들을 조롱한다. 이들이 신기하게도 일반인과 다른 성징性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거뭇거뭇 털이 난 턱, 낮은 목소리, 평평한 가슴과 같은 볼품없는 모습〉이 그것이다. 린턴은 이러한 성징에서 곧바로 그들이 여성 고유의 모성maternity을 갖추지 못했다고 단언한다."(174-7)


"케어드를 비롯해 '이른바 억센 여성'의 지지자들은 기본적으로 전통 결혼 제도에 냉소적이다. 이 시기 《웨스트민스터 리뷰》에는 결혼 제도를 비판하는 여성 문필가들의 에세이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특히 신성한 배우혼과 가정생활이라는 이미지가 허구일 뿐이고, 역사 속에서는 본질적으로 '여성성의 구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이 제기된다. 케어드에 따르면, 여성을 묶어놓은 가정이라는 틀과 배우혼의 관습은 실제로 매춘과 분리될 수 없다. 이들은 방패의 앞뒷면과 같다. 여류 박물학자인 앨리스 보딩턴도 비슷한 견해를 내세운다. 가족 제도의 지속은 기본적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의 보호 감정 그리고 더 중요한 것으로는 성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여성이 남성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일종의 허위의식에 바탕을 둔다. 이와 함께 여성 스스로 정숙함이라는 덕목에 지고지순의 가치를 부여한다. 결국 결혼의 강제 존속은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180)


"그렇다면 여성의 모성을 강조해 온 이른바 가정의 신화는 계속 퇴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일에는 상쇄하는 힘이 작용한다. 이 시기의 사회적 요인들이 가정의 신성성에 충격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충격을 완화하는 또 다른 북원 기제가 작동할 수 있었다. 바로 우생학이다. 19세기 말 제국 팽창기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출산율 하락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더욱이 보어전쟁 당시 징병 검사에서 드러난 하층 계급 젊은이들의 허약한 신체등급과 체력이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의 우생학 담론들은 건전한 모성과 가정 그리고 여성의 건강한 임신과 출산을 장려하는 등 오히려 19세기 말 가정의 신성화에 기여했다. 그러니까 19세기 말 새로운 여성성의 도전에 직면한 전통 가정은 한편으로 약화와 해체의 위기에 접어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가정의 신성화를 복원하는 이중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고 있었다."(200-1)


2부 지식과 시선


6장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


"영국의 초등교육은 잉글랜드 국교회와 비국교회Non-conformists 등의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day school에 의해 이루어졌다. 1830년대 공장법은 13세 미만의 공장 아동의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정규교육을 시행할 것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주간학교의 수요가 급증했다. 종교 단체가 설립한 주간학교들은 늘어나는 교육 수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단체 자체 재원과 기부금만으로 새로운 교육 시설을 확충하고 교사를 채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정부에서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주간학교에 교부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1833년 휘그 정부는 국교회나 비국교회의 구분 없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학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에 잉글랜드 및 웨일스 지역 주간학교 지원액은 80만 파운드를 넘어섰다. 1858년 초등교육에 관한 왕립위원회가 주안점을 둔 것은 바로 이 증가하는 교부금의 절감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210-1)


"위원회는 많은 학교에서 읽기reading, 쓰기writing, 산수arithmetic, 즉 '3R 교육'이 부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매년 시험관이 개별 학생을 대상으로 만족할 만한 학업 성취를 이루었는가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교부금을 책정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에는 3R에 효율적인 교육을 촉구하면서 그와 함께 납세자의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이 제안에 따라 정부는 1864년부터 교부금 지원을 받는 모든 주간학교에 대해 평가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시험은 정부 직속의 시험관들이 학년 말에 각 지역의 학교들을 방문하여 실시했다. 이들은 구술 또는 필기시험으로 학생들의 학력 수준을 평가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했다. 정부는 평가 결과에 따라 교부금 지원액을 삭감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른바 '시험 결과에 따른 지원'이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이다." "시험 제도는 교부금 지원액을 적절하게 삭감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212-3)


"그렇다면 옥스-브리지 장학생시험 및 퍼블릭 스쿨 입학시험은 어떻게 도입되었는가." "중등교육에 대한 정부의 각별한 관심을 반영한 톤튼 위원회 보고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우선 사회적 재생산의 중요한 요소로서 교육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부모는 자녀들이 자신의 지위와 비슷한 직업을 갖기를 열망한다. 다음으로, 최고 수준의 고전 교육이 높은 지위로 올라가는 데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퍼블릭 스쿨의 랭킹과 평판이 엘리트로 상승하는 빠른 경로를 제공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 톤튼 위원회는 클러랜든 스쿨을 제외한 다른 퍼블릭 스쿨을 정확하게 평가하여 등급화함으로써, 중등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당시 일류로 분류된 학교들은 클러랜든 스쿨에 뒤이은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출신과 추천에 의한 입학이 줄어들고 그 대신에 입학시험제를 도입하기 시작했다."(216-7)


"《19세기》에 실린 항의서한과 뒤이은 몇 편의 논설들은 대부분 시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한다. 문제는 시험만능주의가 교육 자체를 끊임없이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지식의 파편화, 암기 위주의 학습, 개인의 창의성 억압, 대학에서의 고시 열풍, 학원 과외 성행 등이다. 특히 대학교육의 경우 기말시험과 고시 열풍이 똑똑한 범인만을 양산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한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엘리트는 오히려 시험 제도 아래서 소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교육의 왜곡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교과서보다는 시험지가 실제 공부하는 과목이 된다. 학생들의 목표는 교사 및 교장의 내면이 아니라 시험관의 내면을, 그가 공부하는 과목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숙련을 알아치리는 데 있다. 이에 따라 또 다른 전문 집단, 학원 강사crammer가 증가한다. 그들의 일은 가르치거나 학습 내용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에 합격하도록 하는 것이다.〉"(227-9)


"이러한 시험 제도는 전통적 관행 주위에 수재 임용이라는 새로운 보호막을 둘러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의 시기라면 자본주의 시장원리가 사회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었을 것이다. 경쟁은 시장의 기본원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시험 제도의 도입은 시장의 확산과 심화라고 하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일 수 있다. 특히 이를 통해 능력 있는 중간계급 출신 엘리트가 자신의 삶을 개척할 기회가 더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전통적 지주 세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학벌을 토대로 경쟁하는 제도였다. 연줄(출신)-학벌-경쟁으로 이어지는 연결선은 기존 질서를 재생산하는 데 유리한 것이었다. 경쟁시험에서 희랍어와 라틴어 고전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시험 제도보다도 시험 과목이야말로 재생산 구조의 본질을 반영한다. 적어도 19세기 후반 영국의 교육에서 연줄과 경쟁은 대립항이 아니라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221)


7장 과학과 과학 지식인


"19세기에 독자들이 과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학 자체보다도 그 지식 체계가 기존의 종교, 기존의 신앙과 배치되며 신앙의 토대를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탓이었다. 특히 다위니즘이 창조론으로 자연을 해석한 전통 기독교 신앙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학은 종교를 대신해 도덕과 사회질서를 지탱할 책무를 부여받기에 이른다." "열역학 이론 또한 진화론 못지않게 사람들의 종교적 심성에 충격을 주었다. 힘과 에너지를 동일한 개념으로 파악하고 에너지는 전화할 뿐 소멸하지 않는다고 본 에너지 보존의 개념은 성서의 메시지, 이를테면 성서에 나타나는 아마겟돈Armageddon 전쟁과 같은 역사의 종말이 없을 것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높은 온도를 가진 물질에서 낮은 온도의 물질로만 열이 전도될 수 있다는 제2법칙의 개념, 달리 말하면 열에너지의 비가역성 또한 종말론적 사유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243-6)


"한편, 19세기 일반 독자층의 과학 지식이 전문가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입되었는가 아니면 독자 스스로 전유專有했는가라는 근래의 논의 또한 종교 문제와 관련지어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의 견해는 과학 엘리트가 과학 지식의 발전을 주도하고, 문필가는 단지 이를 수동적으로 단순화해 독자에게 전달할 뿐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 반면 뒤의 견해는 엘리트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 과정 이외에 대중 스스로 그 유포된 지식을 번역하여 주체적으로 변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중시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 지식은 유포 과정에서 〈암묵적인 저항〉을 포함함과 동시에 〈문화접변〉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과학 지식과 종교의 화해를 적극 추구한 문필가들은 전유의 추세를 보여준다. 반면 과학 전문가이자 동시에 문필가로 활동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둘 사이의 화해보다는 과학 지식의 전달에 초점을 맞추었고, 자연스럽게 과학 지식과 기독교적 세계관의 충돌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었다."(248-9)


8장 신앙의 위기


"영국사에서 18세기를 강조하는 역사가들은 이 시기에 세속주의 경향이 생각보다 더 깊숙하게 사회 저변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우선 종교적 관용은 기존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주의에 뿌리를 두고 나타났다. 이전에 지배적이었던 프로테스탄트 성서주의scripturalism에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성경의 모든 말이 성령의 계시로 씌어졌다는 믿음〉은 〈절대자 아래서 인간 운명에 대한 좀 더 낙관적인 모델을 수반하는 새로운 합리적 신앙〉으로 바뀌었다." "종교가 이성에 종속되면서 기독교는 더 이상 '주어진' 것이 아니었고 이제는 분석과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위기는 이전 시대와 얼마나 달랐는가.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이성과 신앙은 하나이며 함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했다. 그러나 18세기에 종교와 신앙은 이성을 통해서 분석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객관화 또는 객체화가 바로 종교적 관용과 다원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는 주장이다."(276-7)


"정통 신앙의 옹호자들은 신학적 전거를 통해 기독교 비판에 맞섰지만, 근대 사회의 변화에 맞게 종교와 신앙 형태도 변해야 한다는 자성적인 논설들도 있었다." "라언 램지는 고대에서 근대까지 기독교를 비롯한 고등 종교의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근래 신학 연구가 종교의 전통적인 토대를 오히려 무너뜨리는 현실을 인정한다. 이는 어쩌면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신학이 〈초자연을 이미지화하고 신을 해부하며 이상적인 것을 구체화하는〉 반면, 종교는 초자연적 존재를 불가사의한 것으로 바라보며, 〈이상적인 것이 확대되고 성장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때문이다." "램지는 절대적 의미의 종교성 대신에 종교의 변화를 당연시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의 도덕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높이 평가한다. 다만, 신개념 자체가 인격신이자 유일신으로서의 최고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근원적 주재자로서, 모든 것을 주관하는 초월적 존재로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284-5)


"진화론의 전도사로 널리 알려진 헉슬리는 과학 지식을 좀 더 낯익은 사회적 언어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일례로, 그가 보기에 생명 에너지는 신이 부여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자연에서 축장된 에너지 양에 지나지 않는다." "스펜서는 기독교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성찰함으로써 현재 기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 능력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종교성은 높아질 수 있다. 지적 능력이 높아짐에 따라 비가시적 존재에 대한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그것을 더 정교하게 상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전제 아래 원시 사회에서 초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개념화되었는가를 고찰한다. 요컨대 1880년대에 이르면 진화론적 관점에서 기존 종교와 신 관념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저명한 문필가들의 논설에서 자주 나타났다. 이들의 문필 활동은 잡지의 전성시대에 독서층의 종교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285-8)


"매닝 추기경은 종교의 세속화가 장래의 종교와 신앙에 미칠 나쁜 영향을 우려했다. 그는 초등교육의 세속화를 앞서 이룩한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를 검토한다. 미국의 경우 자력으로 자녀 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부유한 학부모도 교육세를 납부하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교육할 권리를 박탈당하며, 부모 자신의 도덕적·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매닝은 가톨릭 국가 프랑스에 대해서도 불길한 미래를 감출 수 없었다. 1875년 쥘 페리가 제출한 교육법 수정법안 7조는 국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교회나 종교 단체의 교육 권리를 박탈하는 내용이었다. 이제 프랑스에서도 초등교육 세속화의 길이 열렸다." "궁극적으로 그가 우려한 것은 공교육이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자원적 제도 교육을 위축시킴으로써 젊은 세대에 대한 종교 교육 일반이 타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292-3)


9장 동아시아를 보는 눈


"1880년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들은 조선의 산하가 아름답고 깨끗하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나 도시와 농촌의 풍경에 대해서는 불쾌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서술에는 아름다운 본래의 자연과 불결한 농촌이 겹쳐 나타난다. 마을은 불결하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지만 〈처마가 깊이 팬 갈색 지붕이 과수원 속이나 완만한 경사면 또는 반짝이는 냇물 둑〉에 어우러져 있는 풍경에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도시는 너무 불쾌한 곳이었다. 서울에서 〈검게 썩은 물이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청계천과 덕지덕지 붙은 〈가옥 바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비숍은 북경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서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생각했다. 한편, 궁핍이 서민의 일상을 지배했기 때문에 식재료는 너무 빈약했다. 쌀이 주식이기는 하지만, 양반층에게나 해당될 뿐이고 서민은 수수나 보리 또는 콩을 주식으로 사용했다."(321)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증폭된 것은 역시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의 일이다." "1880년대 일본에 관한 논설이나 저술을 남긴 지식인들은 무엇보다도 메이지유신 이후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일본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유럽인만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역사 인식은 오랫동안 내려온 전통이었다. 1868년 일본의 혁명은 지도층의 주도 아래 봉건 사회 일본을 근대 사회로 개혁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결과였다. 프랜시스 콘더는 그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일본에서] 근래 발생한 변화, 그 진보적인 변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순간 일본은 지구상의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더 교훈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특히 봉건영주제 폐지가 일본 농민에게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그에 따르면, 그 조치는 농민의 생산 의욕을 고취했으며 그에 따른 국가의 세수 증대는 거의 기하급수적이었다."(327-9)


"(유럽중심주의를 내면화한) 19세기 말 영국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은 바로 문명을 이루지 못한 타자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조선 민중의 비참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비극은 문명을 이루지 못한 그들의 무능력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영국 문필가들은 때때로 조선 민중의 순박성과 친절함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습속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문명인이 잃어버린 원시성에 대한 동경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나는 유순함과 인내심 같은 것은 그들의 유럽중심적 시각을 강화하는 촉매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이런 점에서 보면 일본은 부분적으로 예외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일본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하고 사회 진보를 이룩한 점에 관한 한, 영국 지식인 스스로도 예외성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일본인의 문화와 습속을 다룰 때 타자의 차이를 끊임없이 확인하곤 했다."(337-8)


에필로그_한 세기의 끝에서


"사실 오랫동안 영국의 근대 사회 형성 과정은 근대화의 전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근래의 해석들은 근대 영국 사회의 발전을 주도한 여러 계기들의 혁명적 성격을 부정함과 동시에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튜더혁명은 허구이고 영국혁명도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이 벌인 단순한 내란이 지나지 않았다. 농업혁명에서 생산성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영국만의 특유한 개량도 아니었다. 더욱이 농업에서 상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발전 자체가 새로운 사회세력보다는 시장을 통한 자본 축적의 방식을 일찍 깨달은 전통적 지배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산업혁명도 기계와 공장제의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 않았다. 경제 전반에 걸쳐서 전통적 부문과 근대적 부문이 공존하는 불균등 발전의 모습을 나타냈을 뿐이다. 노동계급의 형성 또한 점진적이었고 노동운동 및 그 운동의 이념에서 핵심을 이룬 것은 전前세기의 급진적 정치이념의 전통이었다."(344)


"영국 근대사에서 이 같은 모호성을 낳은 원인은 너무 일찍 시작된 근대화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후기야말로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 시기가 아닐까 싶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을 것이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제국의 동요를 가져왔던 것이다."(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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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3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4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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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권 / 철학적 급진주의(1815~1848)


서언


"벤담은 『정치적 오류들』에서 이렇게 썼다.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인간은 항상 두 갈래의 이익에서 영향을 받는다. 〈전체 공동체의 (중략) 행복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공적인 이익과, 〈공동체 전체보다 작은 일부분의 복지에 그가 참여한 몫으로써 구성되는〉 사적인 이익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자신의 사적 이익이 일반이익과 충돌할 때, 일반이익에 등을 돌리고 자기가 소속한 개별적 단체의 이익을 기필고 옹호하길 원할수록 오류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이 일치하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고, 그러한 일치의 실현을 위해 일하는 것이 개혁가들이 노력하는 방향이다.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와 같은 이익의 일치가 이미 달성되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통치하는 단체에 속한 모든 회원들이 말하는 방향이다. 평화가 회복된 이후로 마침내 얘기를 들어줄 청중까지 생긴 참에, 철학적 급진파는 보수파 세력들의 모든 오류들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한목소리로 공격한다."(3-4)


# 평화의 회복 : 나폴레옹 전쟁의 종결을 가리킨다.


# 보수파의 오류

1. 경제적 오류 : 보호무역주의는 생산자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머지 시민들에게 고통을 부과한다. 따라서 집단이익은 일반이익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 방식은 모든 개인들 사이에 모든 생산물의 자유로운 교환이다.

2. 정치적 오류 : 정치 및 사법제도의 복잡성은 인민의 자유가 아니라 귀족의 특권들을 지켜주는 방호벽이다. 따라서 보통선거를 시행하여 집행자들은 의회에 의존하고, 의회는 인민 다수에게 의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3. 철학적 오류 : 귀족제는 희생의 도덕을 가르치고,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상반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이기적으로 수호함으로써 전체의 번영을 실현하라고 안내한다.


1장 / 경제사회의 자연법칙


"리카도는 정치경제학을 이제 더 이상 〈부의 본질과 원인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부가 일단 생산된 다음에 그것을 만드는 데 함께한 계급들 사이에서 그 부가, 교환과는 상관없이, 분배되는 방식에 관한 탐구로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따져 물을 때, 리카도의 경제철학 내부에서, 정태적 관점과 동태적 관점을 구분해야 할 것으로 우리는 믿는다. 리카도에서 교환이라고 하는 정태적 법칙만을 중시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를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이는 가치의 법칙이 실제 작동에서는 수많은 방해 요인들 때문에 한계를 만나며 리카도 자신이 그런 요인들을 엄밀하게 정의하려 애쓰고 있지만, 리카도의 신조가 낙관주의가 된다. 리카도에서 인구와 지대와 임금과 이윤의 동태적 법칙을 분석해내려는 사람이 보기에는, 리카도의 신조는 반대로 상대적 비관주의가 되고, 그러한 비관주의의 근거가 되는 원리는 이익의 자연적 균열 원리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15-6)


"〈상거래에서는 판매자와 구매자가 동등하게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지주와 일반 공중 사이의 관계는 그런 거래와 같지 않다. 한쪽은 온전히 손해만 보고, 다른 한쪽은 온전히 이득만 본다〉.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에서 새로운 국면이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여기다." "이제 지대의 운동법칙이 정치경제학의 근간이 된다. 그 법칙이 일정한 〈계급〉 이익들 사이의 괴리에 관한 법칙인 만큼 정확히 그러하다. 우리는 이제 사회 안에서 자기네 노동의 산물을 서로서로 자유롭게 교환하는 개인들만이 아니라 계급들도 고찰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들은 자연적으로 일치하는 이익들을 정부가 서로서로 맞서게 만들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작용한 결과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윤곽만을 그려 놓았던 부의 분배 이론과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을 리카도가 풀어낸 것은 차액지대의 동태적 법칙을 기반으로 삼고, 그것이 다양한 경제적 〈계급들〉의 형성에 기여하는 경로를 연구한 덕택이었다."(37-8)


# 조세 부담의 귀착 이론 : 조세를 외견상 납부하는 사람 말고, 궁극적으로 조세 부담이 귀착되는 경제 주체가 누군지에 관한 이론. 리카도가 보기에 오직 지대에 비례한 토지세만이 지주들의 부담으로 귀착된다.


"이윤과 임금이 역비례로 변동하게 되는 법칙은 자본가 계급과 임금소득자 계급 사이에 이익의 자연적 괴리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이윤의 축적이 임금 하락의 핵심적 원인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리카도에 따르면, 이윤의 운동법칙은 궁극적으로 인구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된다. 지대의 징수는 생산물의 가치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분배되어야 할 부분을 모든 구획의 토지에 대하여 평준화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와 반면에 인구가 증가하고 더욱 척박한 토지에도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인간 생계에 필요한 식량의 가격은 끊임없이 올라가기 때문에, 노동의 자연가격도 동일한 비율로 상승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자본가가 챙길 수 있는 몫은 끊임없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생산물의 '가치'에서 이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언제나 줄어든다. 생산물의 '이윤율'은 더욱 급격한 속도로 하락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빈곤 덕에 부유해지는 것은 제조업자가 아니라 지주다."(44-6)


"지대, 이윤, 그리고 임금의 움직임을 규율하는 법칙들은 이런 식으로 경제적 세계의 세 계급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이익의 갈등을 산출한다. 리카도의 추상적인 공식들은 그 자신의 시대가 보여주는 광경을 신실하게 표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균열은 1815년 이후에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대륙에서 산업이 재개되었다. 유럽에서 영국의 산업 생산물은 전만큼 필요하지 않았다. 영국 산업은 전만큼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낮은 임금을 받게 된 노동자들은 빵이 비싼 체제를 더 이상 참아낼 수 없었다. 과거의 토지 귀족과 새로운 상업과 산업과 금융의 귀족들 사이에 궁극적인 융합이 이뤄질 수 있을지 의문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토지 귀족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와 민중, 자본가들과 노동자들의 동맹이 1832년의 정치개혁과 1846년의 경제개혁으로 이어진 운동의 공식이었다. 리카도가 제창한 부의 분배 이론은 영국의 경제사에서 이렇게 획기적인 시기의 표현이었다."(49-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도는 국가가 경제적 관계들에는 가능한 한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바랐다. 신조에 차이점들이 있지만, 이 점에서 그는 케네와 애덤 스미스의 전통에 충실했다." "리카도는 산업화 수준이 높은 나라들에서 심각한 위기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정부의 책략에 의해 그런 위기를 방지하거나 단기에 종식하려 시도하면 안 된다. 〈[그런 위기는] 부유한 민족이 감수해야 하는 악이다. 이에 관해 불평한다는 것은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이웃의 오두막은 그런 위험으로부터 안전한데 자신의 선박은 바다의 위험에 노출된다고 한탄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리카도에 있어서, 경제적 자유의 이론은 많은 경우에 자연에 대한 신념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을 공격하는 재앙을 인간이 교정할 수 없다는 무력함의 인정이다. 이것은 낙관론이라기보다는 운명론이다. 정부는 경제적 관계들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가 시도하는 치유책이 그 폐단보다 어쩌면 더 나쁠 수가 있기 때문이다."(51-7)


"리카도는 지주를 농업종사자, 다시 말해, 제조업자처럼 자본가이면서 동시에 노동자인 사람으로 여기고 싶어 했다. 그가 역설한 유일한 이익의 대립은 모두 자기 각자의 생산물을 가급적 비싸게 팔고 싶어 하는 생산자 집단들과 소비자 전부, 다시 말해, 모든 생산물들이 최저가격에 팔리기를 누구나 예외 없이 신경 쓰는 모든 개인들 전체 사이의 대립뿐이었다. 생산자들의 집단 모두의 이익 하나하나를, 서로 모순될 것이 뻔한 일련의 세세한 법률들에 의거해서, 한꺼번에 보호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이익, 이런저런 경제적 카스트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개인들로 고찰되는 모든 개인들의 이익을 과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운 학파는 개인주의적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 학파는 일반이익을 서로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많은 집단이익들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치하는 지점에서 개인이익들의 총합으로 보기 때문이다."(58-9)


"사회의 번영에 대해 이토록 순조롭지 않은 여건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물들의 정상적인 진행에 인위적인 수단으로써 대응하여 평형을 잡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교환의 자연적 작동에, 자생적인 분업에 〈공급과 소비〉를 규율하는 필수적인 기능을 맡겨야 하는가? 애덤 스미스 이래 모든 경제학자들의 고전적 명제가 그것이었다. 제임스 밀도 스스로 애덤 스미스의 제자라고 선언했었다. 그러나 여기서 제임스 밀은 분업이 일을 잘 못한다고 꾸짖는다. 그 까닭은 정확히 분업이 〈흔히들 일컫듯이 실천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우연에 의해서, 개별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개인들이 지내다 보니 알게 된 것들 덕분에 어떤 특정한 이득을 이런저런 분야에서 얻을 수 있겠다고 눈치채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이 질문을 논제로 올리고, 분석과 종합에 의해서 업무들을 체계적이고 숙고를 거친 방식으로 재분배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97)


"제임스 밀은 지주의 이익과 공동체의 여타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괴리를 지대에 대한 과세를 통해 교정하는 가능성을 리카도보다 더욱 명료하게 지각했다."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는 거기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체계가 바로 그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구획되기 이전까지, 토양의 생산력은 공동체의 공동 재산이고, 그러므로 공동의 또는 공통의 목적과 요구를 위해 특별히 맞춰진 하나의 기금이다〉." "그렇다면 제임스 밀은, 자기 아들이자 제자였던 스튜어트 밀도 옹호했고, 헨리 조지 학파의 농업사회주의자들도 옹호했던, 단일토지세를 통한 해결을 옹호했을까? 전혀 아니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처럼, 애덤 스미스가 정리한 원리에 끝까지 충실했다. 〈공정하게 작동하는 세금이란 납세하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상대적 조건을 납세 이후에도 납세 이전과 동일하도록 놔두어야 한다〉는 것이, 〈국가의 임무 수행을 위해 요구되는 액수〉와 관련한 〈진정한 분배의 원리〉다."(99-101)


"이제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할 일이 남았다. 소득이 일단 국가에 의해 몰수되었다고 할 때, 그것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자본으로 전환할 것인가?" "가장 확실한 방법, 시행했을 때 가장 꾸준하게 효과를 보일 것으로 확인되는 방법은, 간접적이며 도덕적인 방법들이다. 입법자는 대중에 의한 제재라는 강력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다." "구빈법은 구걸 상태를 어떤 의미에서 합법화하고 재가해주는 법률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국가가 설립해야 할 것은 이 지구 위에서 심리와 생리와 물리의 법칙들이 결합해서 인간에게 제공한 실존의 조건들에 관해 사람들을 가르치는 하나의 교육체계다. 나아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제임스 밀이 맬서스의 관점에서 이론을 마련해준 저축은행이나 공제조합 같은 기관들도 마찬가지로 결혼 시기를 연기하고, 출산 횟수를 줄이며, 자본을 축적하는 성향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사람들을 신중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기 위한 성격이었다."(102-4)


"그렇지만 제임스 밀이나 플레이스의 신-맬서스주의에서 콩도르세의 낙관론까지는 머나먼 길이다." "콩도르세는 조건의 절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항상적인 경향, 그리고 자연의 후원을 받는 경향을 인류의 역사에서 자기가 인지했다고 믿었다. 반면에 공리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의 자연법칙들이 절대적 평등에 상반되는 방향으로 설치한 난제들을 극복할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벤담은 언제나 평등을 입법에서 단지 부차적인 목표로 간주했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를 때, 재화의 평등한 분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야말로 정부가 필요한 근거 아니겠는가?" "자연은 조건들을 불평등하게 설정해 놓았고, 경제학자들은 어떤 법칙들이 작용해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만약 폭력으로 이 불평등을 파괴한다면, 그 대신에 더 나쁜 불평등 또는 보편적 빈곤이 자리를 잡을 뿐이다. 폭력에 맞서서 재산의 불평등을 보호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에게서 차용한 벤담의 정의에 따를 때, 정부의 존재 이유이자 본질이다."(108-10)


# 신-맬서스주의 : 건강에 해롭지 않은 임신 방지 예방법을 명확하고, 자유롭게, 공개적으로 적시해야만 인구의 과잉 증가를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이들로 스튜어트 밀과 그의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경제적 진보에 관해 리카도와 맥컬럭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두 가지 상반되는 사고방식은 어쩌면 두 가지 상이한 심리학, 다시 말해서, 근본적인 경제적 동기를 생각하는 두 가지 상반되는 방식에 기인한다. 맥컬럭은 이렇게 쓴다: 〈올라가려는 야망이 사회에 활력을 주는 원리다. 모든 시대 인류의 커다란 목표는 아버지들의 여건에 만족하며 지내기보다는 그보다 위로 올라가는 것─부의 저울에서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반면에 리카도와 제임스 밀이 중시한 것은, 일단 획득한 경제적 위상을 향상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유지하려는 욕구로 구성되는 동기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인간은 지적인 존재로서 무한한 진보의 역량이 있다. 인간은 지적인 자본을 무한히 축적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자로서, 인간은 단지 작은 범위에서만 저축하고 축적할 역량이있다." "이와 반대로 맥컬럭에 따르면, 자본의 축적은 쉽고 자연적이다. 그리하여 진보의 철학은 다시 한번 거의 무제한적인 낙관론이 된다."(114)


2장 / 정의의 조직과 국가의 조직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하고, 누구나 다른 사람의 변호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프랑스 사법기관의 조직을 위한 법률안 초안」(1791)에서부터 벤담이 늘 표명한 바람이었다." "이는 〈개인 각자가 자기 이익의 최고 판관〉이라는 경제적 격률을 떠올리게 하며, 〈사람은 각자가 사제〉라는 루터의 공식과 연결되는 격률이기도 하다. 자유거래의 최초 이론가들이 상업의 자유를 향한 요구에서 일종의 상업적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목도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벤담과 그 주변의 반교권주의 집단은 자기네 공리주의에서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주의에 의해 시작된 해방 운동의 마지막 단계를 목도했다. 사제의 자격과 법률가의 자격은 하나다. 판사들에 의해 제작되는 법률은 사제들에 의해 제작되는 종교와 매한가지다." "여기서도 공리의 규칙은 곧 단순성의 규칙이다. 사법개혁을 일궈내려면 기술적 체계의 복잡성에서 자연적이고 가족적인 체계의 단순성으로 탈바꿈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141-2)


"몽테스키외의 증언에 따르면 문명 세계 전체에 걸쳐서 신성시되고 있던, 자유주의적 편견들 또는 자유주의적이라고 간주되던 편견들에 벤담주의자들의 단순주의는 충격을 안겼다. 단순한 제도는 독재국가에 알맞고 자유국가에는 복잡한 제도가 어울린다는 것이 자유주의 파당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절차의 문제에 있어서, 벤담은 증언과 증거를 평가할 때 판사의 의견을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든 규칙, 그리고 몽테스키외의 제자들이 보기에는 피고인의 자유를 지켜줄 수많은 안전장치에 해당하는 그 모든 규칙들을 폐기해야 한다고 항상 요구했다. 사법부의 조직에 관해서는, 벤담은 여러 명의 판사가 재판하는 체제를 부정하고, 자신의 책임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한 판사가 단독으로 주재하기를 바랐으며, 영국 자유주의의 자랑거리였던 배심제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였고, 법정 공방의 공개만으로도 판사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구현할 것이라며 만족할 수 있었다."(127-8)


"공론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적 책임감의 핵심을 구성한다. 이는 벤담이 일찍이 도달했고 끝내 버리지 않았던 확신이다. 〈(판사들을 공론으로 통제하는) 공개가 없다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헛되게 된다. 공개에 비하면, 여타 모든 견제장치가 보잘것없다. 영국의 절차 체계가 최악이 되지 않고, 지금까지 존재했던 것 가운데 가장 덜 나쁜 체제로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타 모든 사항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더욱 공개의 덕택이다. 사법의 영역에서 프리드리히와 예카테리나가 선의를 가지고 노력했지만 목표로 삼았던 과녁에 그렇게 한참이나 못 미친 채 실패로 끝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원칙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벤담이 『헌법전』에서 사법조직 체계의 기초로 삼은 동기는 40년 전 『파놉티콘』에서 교도소 행정 체계의 기초로 삼았던 동기와 같았다: 〈영향력이 가장 강하고, 가장 지속적이며, 가장 획일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동기, 곧 가장 광범위한 공개에 의해서 교정되는 개인적 이익〉이라는 동기였다."(181-2)


"벤담의 신조에 의해 구상되는 판사는 자기 재판정 안에서 홀로 고립된 일종의 군주로서, 공론에 의해 그에게 행사되는 순수한 도덕적 통제 말고는, 결과적인 권력 남용을 예방할 실질적으로 효과가 있는 어떤 통제도 없이, 그리고 어떤 법률적 형식도 없이, 자기 나름의 선고를 내린다. 하지만 이런 신조는 이른바 자유주의적 신조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신조의 어법은 19세기에 카이사르주의자들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를, 그리고 그것이 한 인물에 의한 정부인 만큼만 책임을 지는 정부를, 세우자고 요구했을 때 사용한 어법과 거의 동일하다. 벤담은 가족의 비유 그리고 가정의 다스림에 대한 비유를 호출한다. 17세기에, 로버트 필머 경은 동일한 비유를 기초 삼아 하나의 신정적인 군주정 체제의 이론을 건축했었고, 로크에 의해 반박당했다. 《에든버러 평론》에 따르면, 벤담의 급진주의는, 사법절차와 사법조직의 영역에서, 절대군주제를 옹호했던 로버트 필머가 주창한 가부장 체제의 복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82-3)


# 벤담의 정치철학의 세 가지 원리

1.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원리 : 입법자는 그 정치사회를 구성하는 최대 다수(모든 개인의 최대 행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의 최대 행복을 지향해야 한다.

2. 자기-선호의 원리 : 모든 개인은 본질적으로도 자연적으로도 이기주의자다. 따라서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의 일치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3. 이익의 연합 원리(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 : 따라서 정부는 정치사회의 구성원들을 사적 이익과 일반이익이 일치하는 여건들 아래에 위치시켜야 한다.


"벤담에 따르면, 모든 쾌락들은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르고 구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두 개의 악 중에서 더 작은 악을 선택해야 한다〉가 아마도 공리주의 철학의 근본적인 격률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정치 분야에서) 〈행복을 최대한 가져오기 위해서〉는, 또는 벤담의 다른 표현으로는,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오직 두 가지 방법만이 있다: 공직자의 적성이 최대화되어야 하고, 비용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형용사적인 법률의 근본 문제를, 약간 수정된 형태지만, 여기서도 인지할 수 있다. 정부의 기능이 잘 수행되기 위해서는, 보수가 가능한 한 많이 지급되어야 하며, 비용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이 가장 광범위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비용은, 고통을 담고 있거나 쾌락의 박탈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악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비용이 가능한 한 적을수록 바람직하다. 그리하여 문제는 이윤과 손해를 계산하는 수학적인 형태로 환원된다."(188-9)


# 형용사적인 법률 : 벤담은 법률을 〈실체적〉인 법률들과 〈형용사적〉인 법률들로 나눈다. 여기서 형용사적인 법률이란 문법에서 형용사가 실사(實辭, substantive)와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듯이, 실체적인 법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절차에 관한 법률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인 사안은 통치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권력이 결과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는 보장책이다. 통치자들이 더욱 지성적이고 더욱 활동적일수록, 남용은 어쩌면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적절한 도덕적 적성의 최대화〉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여야 한다. 정부의 모든 구성원은, 처벌하거나 보상하는, 협박하거나 약속하는,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는, 두 겹의 권력을 자기가 부여받은 사실을 안다. 그는 이 권력을 악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선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 그가 이 권력을 선을 위해 사용하고 악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끔 만사를 편성하는 것이 과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단일한 규칙에 달려있다: 〈신임을 최소화하라〉. 그런데 벤담이 최대행복의 원리에 접목하는 이 규칙은 기실 영국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에게 익숙한 것이다. 피치자들이 통치자들을 불신해야 한다는 것은 휘그파 중 가장 소심한 부류에서부터 급진파 중 가장 완강한 부류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신념이었다."(189-90)


# 벤담이 헌법을 제시한 민주국가는 삼권분립의 국가가 아니라, 모든 성인 시민들을 대표하는 기관인 입법부가 〈전능한〉 힘을 발휘하는 국가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도덕적 비관론에 근거한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의 진정한 이익이나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정부는 악하다. 가장 덜 나쁜 헌법이란 정부 조치의 집행에 맞서서 장애물을 가장 많이 설치해 놓은 헌법일 것이다. 여기서 혼합헌정 또는 복합헌정이라는 발상이 일어난다." "반면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해서 정의된 급진적 국가는 주권을 인민에게 부여하는 국가다. 그 후에 인민은 일정한 수의 정치적 기능들을, 인민 스스로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거나, 주권의 일부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의지를 표명하고 이어서 그 집행을 더욱 효과적이고 더욱 집중되게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선출된, 소수의 개인들에게 위임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된다. 그런 다음에는 인민의 대표들이 자기들을 권력의 자리에 앉혀준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주권 전부 또는 일부를 훔쳐가지 못하게 방지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193)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담의 체계에서 인민의 주권은 불가항력적인 장애물에 봉착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인민주권은 모든 시민들의 주권을 의미하고, 만장일치의 투표를 함축한다. 그러나 헌법적으로 최고 권위를 가지는 의견의 분포가 분열되어 나타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가 십상이다." "이에 대해 플레이스는 〈공리의 원리는 계몽된 사람들에 의해서만 명료하게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임스 밀은,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진술한 바 있었다: 〈이성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증거를 저울질해보고, 무게가 더 나가는 쪽으로 인도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익숙하다. 다양한 결론들이 나름의 증거를 가지고 동등한 정성과 동등한 수완에 의해 제출되었을 때, 비록 극소수 몇몇은 잘못 이끌려 갈 수도 있으나, 대다수는 바르게 판단할 것이고, 증거의 가장 강력한 힘이 어디에 있든지 튀어나와 가장 강력한 인상을 산출하리라는 도덕적 확실성이 있다〉. 벤담주의자들은 다수의 주권을 이런 식으로 정당화했다."(194-6)


"벤담은 의회에 진출한 대표들에게 다섯 가지 〈보장〉을, 유권자들과의 관계에서, 요구한다. 이중 둘을 그는 〈일차적 또는 주된〉 보장이라고 보는데, 유권자들에 대한 의존과 왕과 궁정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차적 또는 도구적〉인 보장도 둘인데, 매년 재선거에 임해야 한다는 조건과 공무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서, 이것들은 주된 보장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무한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보장은 벤담의 용어로 〈출석의 보편적 항상성〉이다. 다음으로는 의회의 선거인들이 규정되어야 한다. 벤담은 자신의 계획을 네 가지 요점으로 정리한다: 사실상의 보통선거권, 실천적인 평등 선거권, 투표의 자유 또는 진정성, 비밀투표." "벤담은 단순화의 원리를 적용한 결과로 〈세대주 참정권〉에서 〈사실상 보통선거권〉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했고, 그 뒤로는 그 운동의 공인된 이론가가 되었다. 〈보통선거권〉, 〈매년 의회선거〉, 그리고 〈비밀투표〉가 급진파 모임에서 으레 등장하는 공식이었다."(204-6)


"정치경제학에서, 공리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여건들을 자연적이고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다. 그들은 또한 정치적 권리들을 평등하게 만드는 제도를 확립하더라도 경제적 여건의 불평등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부자가 빈자에게 미치는 《필연적이면서 자연적인》 영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봤다." "공리주의자들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 시장으로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고, 비유적으로 말해서 정치적 시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에도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서, 이는 곧 각자가 자신의 부와 재능과 평판에 의해서 부여받는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수가 사회의 진정한 이익에 해를 입히면서 엄청난 재산을 지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독점이나 특권에 의해 이 자연적 불평등이 인위적으로 악화되면 안된다. 왜냐하면, 경제적 진보를 결정할 자본의 축적에 더욱 역량이 나은 계급, 즉 중간계급이 많이 형성되는 것이 사회에 이익이기 때문이다."(224-5)


"새로운 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모든 개인은 각자가 자신의 이익에 관한 최선의 판관이며, 모든 개인의 이익은 하나의 일반적 규칙으로서 동일하다고 말한다. 벤담이 추천한 체제는 이 동일성이 발현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체제에서 정부 권위는 인민으로부터 직접 발출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집행권은 모든 이해당사자들의 의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헌법전』에서는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만이 끊임없이 적용된다. 벤담은 한편으로 개인들의 이익을 체계적으로 보호할 정부를 조직하고자 권위와 행정권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자들을 피치자에게 복속시킴으로써 그들의 개별적인 이익을 민족의 이익에서 결코 분리할 수 없도록 예방할 일련의 헌법적 장치들을 처방했다. 벤담이 구상한 국가는 개별적인 존재로 이해되는 개인 각자가 모든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의 통제로부터 단 한 순간도 벗어나지 못하게끔 잘 축조된 하나의 기계다."(231-2)


"벤담과 제임스 밀의 〈대의민주주의〉란 단지 순수한 민주주의를 하나의 거대한 민족의 실존적 필요에 맞춰 적응한 결과일 뿐이었다. 영국인들로 하여금 유럽에서 자유로운 인민의 본보기가 되게 만들어준 지방자치제에 영국인들이 긍지를 가지고 있던 그 시기에, 공리주의 급진파들은 대체로 프랑스의 체제에서 영감을 받아 행정적 중앙집권체제를 옹호했다. 개인의 행위든 정부의 행위든, 모든 행위는 두 가지 계기를 함축한다: 행위에 앞서는 숙고와 행위 자체의 집행이다. 권위주의자들은 의회의 일상적 절차를 단순화함으로써, 정부 조치의 집행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만들고자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헌법적 조직들을 복잡하게 편성함으로써, 행위에 앞서는 숙고의 기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기를 바랐다. 벤담은 자유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박애주의적 개혁을 위해 항상 안달이 나 있던 그는, 군주적 권위주의에서 민주적 권위주의로, 앵글로색슨의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중간 단계에 머무른 적 없이, 곧바로 건너갔다."(128-9)


3장 / 사유의 법칙과 행동의 규범


"철학적 급진주의자들은 사회과학을 하나의 합리적인 과학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든 사회 현상들이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고, 사회 세계의 모든 법칙들은 다시 〈인간 본성의 법칙들〉에 의해 해명될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법칙들은 그 자체로 두 종류다: 물리학자와 지질학자와 생물학자가 정의해 놓은 것을 경제학자와 법학자가 빌려와야 하는 물리적 법칙과, 그런 법칙이 있는지 여부가 아직 질문거리로 남아있는 심리적 법칙이다. 자연과학의 유형에 맞춰서 구성되는 어떤 과학적 심리학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마저 의문시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과학적 심리학이 가능함을 보여주기 위해 제임스 밀은 그것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존재하기 시작한 다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방식을 취했다." "이 새로운 심리학의 역사에서 제임스 밀이 수행한 역할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역사에서 리카도가 수행한 역할(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 맬서스의 혁신을 포함한)과 흡사하다."(233-4)


"토머스 벨셤이나 프리스틀리 같은 여러 저술가들은 하틀리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심화해서, 그 원리들을 새로운 문제들의 해결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의식의 상태를 탐구자의 엄밀한 관찰을 통해 포착할 수 있게 해줄 모종의 유형적 등가물을 찾기 위해서, 어떻게든 생각을 물체로 번역해보려는 고유한 경향이 이 철학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신경의 요소를 의식 상태의 표식 또는 원인 또는 심지어 본체와 같은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단어 역시도 관념의 표식 또는 어떤 경우에는 관념의 본체인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다. 정신 현상에 관해서 에라스무스 다윈은 하나의 생리학적 이론을, 그리고 혼 투크는 하나의 언어학적 이론을 제시했다. 그들의 두 갈래 이론은 오늘날에는 불신의 대상이지만, 20여 년 동안 영국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다윈과 투크는 제임스 밀의 사상이 발전하는 데 영향을 미쳤고, 그를 통해서, 연상주의 심리학의 부활에도 영향을 미쳤다."(245-6)


"제임스 밀은 유명론의 명제를, 로크나 하틀리처럼, 수많은 결합된 관념들을 지칭하는데 〈복합관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원래 구분되는 여러가지 관념들이 하나의 단일한 관념으로 합쳐질 때, 진정한 심리적 결합이 존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화학은 자연에 관해 관해 뉴턴의 체계가, 데카르트의 물리학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맞다고 확인해줬다. 다시 한번, 인과의 고리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이해할 수 있는 연계가 아닌 것처럼 보였고, 원인을 보고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의 속성들로부터 물의 속성을 예측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자연의 법칙들이 인력의 법칙이라는 단일한 법칙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는 희망을 뉴턴의 과학이 지탱해준다손 치더라도, 한편으로는 원소들과 법칙들의 수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순한 기계적 과정만으로 원소를 분리해낼 수 없는 경우에, 새로운 물체들이 결합을 통해 생성된다고 인정해야 할 것처럼 보였다."(260-1)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 의해서, 제임스 밀이 인간 정신에 관한 〈해명〉 또는 〈이론〉이라고 부른 것이 벤담주의자들에게 확립되었다. 이론가는 〈관찰되는 사안들을 관찰하고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에 자신을 국한하기를 그는 바랐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불행히도 이론이라는 단어는 이와 아주 다른 작업을 가리키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살펴보는─관찰하는─부분이 대체되고, 그 대신에 본질적으로 상정(想定)하는 일, 그리고 상정된 사안을을 관찰된 사안들이라고 내세우는 일에 해당하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이론은 기실 가설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론〉은 현상들을 관찰하는 데에만 목표를 두고, 생각에서 나오는 자의적인 요구들을 현상에 부과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설〉과 구분된다. 그러나 적어도 관찰된 현상들을 배열하는 과제, 그리고 가급적 손에 쥘 수 있고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지식이 산출되도록 고안된 계획에 따라서 그것들을 배열하는 과제는 이론 자체의 몫으로 남는다."(266, 272)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최초로 알리고〉, 의지와 행동의 심리학에 해체될 수 없는 결합의 원리를 최초로 적용한 사람이 바로 제임스 밀이다." "복잡한 쾌락들은 자체의 본질을 가진다. 복잡한 쾌락들은 새로운 쾌락들이고, 인간 본성을 가장 잘 음미해준다. 그것들이 그러함을 우리의 내부적 경험이 말해준다." "단순한 쾌락들은, 서로서로 결합해서 그리고 자신들의 원인에 관한 관념들과 결합해서, 정감을 생성한다. 정감은 동기를 생성하고 동기는 성향을 생성한다. 만약 우리의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우리의 쾌락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러한 성향들이 발휘되고 이러한 습관들이 획득되기에 이르는 것이라면, 우리의 사심 없는 느낌들이, 우리에게 자체로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우리 안에 자라나는 것을 이기주의 도덕이 왜 방해하겠는가? 제임스 밀의 분석은, 이런 식으로 인식된다면, 복잡한 느낌들을 파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생산할 이유와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다."(296-7)


"제임스 밀은 인류의 진보를 믿었고, 이 진보가 필연적인 법칙들에 맞춰서 일어나는 것으로 여겼다. 이를 최초로 정형화한 사람 중 한 명인 프리스틀리에 의하면, 이 진보의 법칙은 다름 아닌 관념결합(연상)의 법칙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이 법칙에 따라서 사회에서 쾌락의 총합은 고통의 총합을 능가하는 경향을 항상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밀은, 『인간 정신 현상 분석』에서, 가장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부터 인류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감의 느낌들이 어떻게 하나의 필연적인 과정에 의해서, 한 느낌이 다른 느낌으로부터, 생성되는지를 보이고자 시도한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관계들이 증가하고 긴밀해짐에 따라, 개인은 자신의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도록, 이기적 느낌과 공감적 느낌 사이의 구분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그리고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기가 더 이상 불가능해질 때까지, 사세(事勢)에 의해서 점점 더 빡빡하게 속박을 받을 것이다."(300-1)


"자기 부모와의 긴밀한 관계 안에서, 그들의 행복은 아이에게 욕구의 대상이 되고, 그들의 불행은 기피의 대상이 된다. 제임스 밀에 따르면, 이 자연적 진보를 장려하고, 그만큼 그 아이의 주변에서 우연의 역할이나 개인적 변덕의 역할이 가능한 한 제거되도록, 그리고 공감적 정감들이 아주 세세한 대목에서까지 그 자체의 발전의 일반법칙에 부합해서 이뤄지도록, 제반 사정들을 조합하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다." "개인이 자신의 개인적 보존에서 얻는 이익은 다른 사람의 보존에서 얻는 이익에 비교할 때 무한히 크다. 그러나 그 개인이 자신의 보존을 위해 맘대로 쓸 수 있는 힘은 다른 모든 개인들이 연합해서 그에게 대항해서 쓸 수 있는 힘과 비교할 때 무한히 작다. 그렇다면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자신의 사회적 실존 조건들에 맞추는 것이 그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행동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해석한다면, 도덕은 일종의 낙관적 운명론이 되고, 체념과 희망이 대등한 비율로 들어가 섞인 합성물이 될 것이다."(301-2)


#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소수에 비해 다수의 수가 더 많아지는 데 비례해서,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근접한다.


"개인적 이익과 집단적 이익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자들의 시도는, 자기희생을 격하하고 이기주의를 복권하려는 시도가 그들의 철학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했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그대의 선행이 언제나 그대 자신의 이익에 간접적으로 복무한다는 조건 아래에서, 선의를 가지고 선을 행하라─덕에 관한 벤담과 제임스 밀의 이론 전부를 이 공식이 요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이기주의는 도덕의 기초 그 자체에 자리를 잡았다. 연상주의 심리학의 모든 노력은 이기주의가 원초적 동기로서 영혼의 모든 정감들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이어진 복합물들임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상응하여, 공리주의 도덕학자의 모든 노력은, 이기적이든 아니면 사심이 없든, 감성적인 충동들을 하나의 성찰적 이기주의에 종속시키기 위함이었다. 행복의 총합은 개인적 단위들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가 이기적이기만 하면 충분하지 않겠는가?"(305, 310-1)


"공리주의자들의 도덕은 명령문으로 번역된 그들의 경제심리학이었다. 두 세기 전에 홉스는 공리의 신조 위에 사회적 독재의 완전한 체계 하나를 세웠었다. 그리고 실제로, 벤담의 사법이론의 근거가 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는 공리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해석을 정당화했다: 이익과 의무의 연관을 개인을 위해 확립해주는 것은 주권자가 강요하는 처벌의 위협이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경제학이 성장하고 승리함으로써, 부지불식간에, 그 신조 안에 다른 원리가 주도적인 자리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본성에 부합하는 사회 안에서 이기주의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원리였다. 이 새로운 관점에서 보면, 공리주의 이론가들에게 도덕의 근본적인 개념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교환의 개념이었다. 도덕적 행동의 동기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신뢰였다. 공리주의 도덕학자는 입법자가, 사회 안에 이기주의들의 조화를 실현하기 위해 챙기는 일 말고는, 그 이상의 개입은 불필요하게 만들었다."(312-3)


4장 / 결론


"벤담과 그 제자들에 따르면, 윤리는 하나의 고된 기예다. 나아가, 우리가 그들을 믿는다면, 윤리라는 기예의 기초는 합리적인 과학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공리주의자들은 〈경험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방식 역시 그들 철학의 근본적 특질과 관련해서 오해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들은 로크 학파에 속했고, 본유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두 경험에서 차용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연역적 또는 종합적 방법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확인하는 데 조금이라도 인색했던 것은 아니다. 만유인력이라는 뉴턴의 법칙은 경험에서 추출된다. 그러나 일단 그 법칙이 공표되면, 단지 그 법칙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 끊임없이 그 법칙의 응용을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이 정당하고 유익하다." "이제, 벤담주의자들의 야심은 모든 사회과학들을 연역적 과학의 모델에 맞춰 확립하는 것이었다."(343)


"진실을 말하자면,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을 정당화하기보다는 당연한 전제로 여겼다. 하나의 사회과학이 가능하려면, 행복이 쾌락들의 총합으로 여겨지기를, 또는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쾌락들의 총합이 고통들의 총합을 상쇄하고 남는 초과분이 행복이라고 여겨지기를 그들은 원했고, 이러한 쾌락들과 고통들의 계산이 가능하기를 그들은 원했다." "벤담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주체들이 서로 다른 행복을 합산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엄밀하게 고찰하면 허구적이지만, 그래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모든 정치적 추론이 중단되어야 하는 대전제다〉." "그러나 만일 허구가 성공적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실재로 취급하는 편이 낫다. 그리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허구임을 번번이 되새기지 않는 편이 낫다. 벤담에 의하면, 공리주의 신조의 합리주의적 전제는, 만일 수많은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하고 과학적 정치의 확립을 초래할 역량을 그것이 진실로 가지고 있다면, 그 결과에 의해서 정당화된다."(345-7)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에 관한 틀림없는 판관이고, 자신의 이익을 자유롭게 제약 없이 추구할 수 있다.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에 따르면, 개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이익의 조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입법자의 선의와 역량이 기대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공리주의는, 자체로 모순이 아니라손 쳐도, 실현되기 위해 거의 하나의 기적과 같은 우연을 전제한다. 실지로, 모든 이익들을 조화롭게 만들기에 필요한 지성적·도덕적 적성을 주권자가 가진다는 어떤 보장이 우리에게 있는가? 벤담과 그 친구들이 1807년 이후 채택한 해법의 취지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주권을 인민 전체, 또는 적어도 다수에게 귀속시켰다. 어떤 자유들은 희생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런 자유들은 언제나 소수의 자유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런 권력을 가진 다수는 공리주의 경제학자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계몽되어 있어서 보편적 이익을 위해서 국가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알 것이다."(364)


"벤담과 그 제자들의 신조는 이제 우리 앞에서 그 모든 복잡한 실상을 드러냈다. 그것은 분명히 쾌락의 도덕인데, 스스로를 확립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정의된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를 전제하는 쾌락의 도덕이다. 이 두 가지 기초 위에 세워진 이 신조는, 어떤 의미에서 이 체계 내부에서 서로 경합하는 이 두 가지 상이한 원리에 끊임없이 호소한다. 한 원리에 따르면, 자연적으로 갈라지는 이익들을 일치시키기 위해 입법자의 과학이 간섭해야 하고, 다른 원리에 따르면, 이기주의들의 조화에 의해서 사회 질서가 자생적으로 실현된다. 공리주의자들이 자기네 논리체계에 의해서 이들 두 원리 가운데 한쪽 또는 다른 쪽에 호소할 자격이 얼마나 있느냐가 질문거리다. 공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비난받을 일은 아니고, 오히려 자신들의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로부터 필연적인 결론들을 어쩌면 모두 도출하지 않은 점 때문에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367)


"벤담이 사망한 지 20년 후에, 벤담의 제자라기보다는 훨씬 더 애덤 스미스의 제자들로 바뀐 공리주의자들은 이제, 정부나 행정을 통한,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더 이상 자기네 신조에 포함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종류의 규제와 법률도 적대시했던 이 새로운 이론가들의 사회적 사고방식은 자유거래의 이념 그리고 이익의 자생적 일치라는 이념으로 요약되었다." "다윈이 맬서스의 법칙을 모든 생물종에게 연장하는 와중에, 버클은 역사의 철학 전부를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의 원리로 환원하고 있었다. 『사회정학』에서 허버트 스펜서는 경제학자들의 자연법칙들과 법학자들의 자연법을 명시적으로 동일시했다. 그리고 법의 원천이 실정법과 정부의 의지인 것으로 만들었던 벤담주의를 반박하는 데서 자기 철학의 기초를 놓았다." "공리주의가 기초로 삼았던 두 가지 원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은 이제 명백해졌다. 그때는 이미 영국의 사상사 그리고 입법사에서 철학적 급진주의가 그 힘을 다 소진한 다음이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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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급진주의의 형성 2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93
엘리 알레비 지음, 박동천 옮김 / 한국문화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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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 공리주의 신조의 진화(1789~1815)


서언


"정치 분야에서 벤담과 그의 제자 뒤몽은, 〈인간의 권리 선언〉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반면에, 매킨토시와 페인과 고드윈의 경우에는, 평등한 권리의 원리보다는 이익 일치의 원리가 항상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들의 공리주의는 장래의 철학적 급진주의를 예시한다. 경제 분야에서, 고드윈은 개인재산이 사라짐으로써 모든 개인들이 필요한 만큼의 생계를 평등하고 풍요롭게 제공받게 될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았다.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서 언제나 근간이었던 노동의 법칙을 역설하면서, 공리의 원리를 기반으로 삼아 어두운 면을 지적했다. 인간이 본능을 억제할 줄 모르는 한, 소비자 수가 가용한 생계자원의 양보다 계속해서 빨리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행복은 이처럼 고통스러운 조건에 종속된다. 이와 같은 두 갈래의 공리주의 중에서, 정통 교리가 되는 쪽은 고드윈의 것이 아니라 맬서스의 것이었다."(5)


"자유주의 이념들이 영국에서 재신임을 얻고 있던 시기였던 만큼, 자유주의 이념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세상 사람들 모두가 말하는 언어였던 공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 1808년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만남이라는 특별한 사정이 추가된다. 오랫동안 휘그당 내 진보파였던 제임스 밀은 벤담을 자유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고, 종내에는 정치적 급진주의의 명분으로 개종시켰다. 제임스 밀은 리카도에게도 이념을 주입했다. 리카도가 경제적 신조 전체를 통일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애덤 스미스의 정치경제학에다가 맬서스의 두 가지 진화법칙을 결합한 것은 밀의 지령과 감독에 따른 일이었다. 결국, 제임스 밀은 가능한 모든 출판 수단을 통해서 스스로 벤담주의의 열렬한 선전가가 된다. 오랫동안, 18세기부터, 서로 격리된 개인들이 여기저기서 선전해왔던 이념들이, 이제야 비로소 제임스 밀 덕택에 그리고 벤담의 후원 아래, 공리주의 학파로 집중되었다."(5-6)


1장 / 정치적 문제


"흄과 애덤 스미스와 벤담은 저항권이라는 발상과 결부시켰기 때문에 사회계약이라는 발상을 비판했었다. 버크는 반란이라는 수단을 꾸짖을 하나의 이유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봤기 때문에 사회계약론을 받아들였다. 사회계약이란 사람들이 서로 묶여있다는 뜻이지, 다수파에게 자기네 맘대로 사회적 연대의 끈을 풀어버릴 자유가 있다는 뜻이 아니다. 일반적 공리라는 관점을 취하는 사람에게는 인민주권의 교의는 오류다: 〈누구도 자신의 대의명분에 관해 스스로 판관이 될 수 없다〉. 다수의 의지가 다수의 이익과 일치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인민주권이란 다수파의 절대 권력일 뿐으로, 한 사람의 절대 권력을 뜻하는 군주주권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법을 농단하는 것이며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버크는 공리주의 철학에서 반민주주의 정치를 연역했다. 그가 보기에, 인권의 이론은 비현실적인 〈형이상학〉이었고,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는 저자들, 문사들, 필로조프들의 작품이었다."(12-3)


"벤담은 한때 공화주의 쪽으로 기운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위기는 극히 짧았고 극히 피상적이었다. 제헌의회 연설가들의 〈망상〉과 〈열광적인 웅변〉은 이미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루이 14세 시절에 박해받은 신교도의 후손들에게 조상의 재산을 돌려주는 등의 시책은 그가 보기에 안전의 원리를 위배하는 것이었다." "1793년에 아직 영국을 떠나지 않은 탈레랑에게 벤담은 『식민지를 해방하라!』는 제목의 소책자 한 부를 증정했다. 이 책은 원칙에 관한 논의에서 시작하여, 식민제국의 소유가 인권이라는 신조의 관점에서 불의할 뿐만 아니라, 식민을 하는 나라의 이익에도 식민지의 이익에도 무용하고 해로움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남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공격하는 어리석음은 무엇 때문이냐고 1797년에 상원에서 그는 캐물었다." "벤담은 이것이 자신의 자코뱅주의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제외하면, 벤담은 반-자코뱅파였다."(40-2)


"1789년 초에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의 말미에, 미국의 인권선언들, 특히 버지니아와 캐롤라이나의 인권선언을 비판하는 내용의 주석을 첨가했다. 이 두 선언은 제1조에, 〈사람들이 사회계약을 형성할 때 후손들에게 수여할 수도 없고 박탈할 수도 없는 일정한 자연권이 있다. 재산을 획득하고 소유하고 보호할 수단, 행복과 안전을 추구하고 확보할 수단을 가지고 생명과 자유를 향유할 권리가 거기에 포함된다〉고 확인했다. 이것은 〈한 사람에게서 '생명 또는 자유의 향유를 박탈하는' 모든 법률과 기타 명령은 무효〉라는 말과 같다─다시 말해서, 모든 형법은 예외 없이 무효라는 말인 것이다." "벤담이 생각하기에, 인민은 자신을 구속할 수 없다. 인민의 선량한 즐거움만이 오직 인민을 제어할 수 있고, 어떤 다른 고삐도 거기에 추가될 수 없으며,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 무효화될 수도 없다. 벤담은 박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획가였다. 그러나 그는 공화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었다."(44-5, 52)


"벤담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의 초점을 모은다. 첫째, 인권선언의 언어가 잘못되었다. 사람들이 평등하고, 법은 시민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억압된 평등을 회복하고 위협받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인권선언문에서 서술문으로 표현된 내용은 명령문으로 적혔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평등'해야 하고', 법은 자유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어야 하는 것이다. 법에 대한 〈합리적 검열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 균형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차이가 이것이다. 합리적 검열자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법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법의 폐지를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는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변덕을 법으로 세우면서, 인류 전체를 초대한다." "벤담이 보기에, 한 민족 전체가 숙고해서 고안했다고 자처하는 헌법은, 영국 헌정 같은 〈우연의 합성〉보다 덜 지혜롭고, 행복의 생산성도 낮다."(45-6)


"둘째, 인권선언은 네 가지 자연권의 존재를 인정한다: 자유, 재산, 안전, 그리고 억압에 대한 저항. 그런데 이 네 가지 자연권은 벤담의 민법철학에서 지목된 네 가지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다. 자유?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유를 자의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자유를 제약하지 않는 법, 따라서 이 불가양의 권리에 대한 위협이 아닌 법은 없다. 하지만 악을 행할 자유 역시 자유가 아니던가?" "재산? 재산은 법이 확정한다. 그러나 모든 세금과 모든 벌금은 재산권에 대한 공격이고, 따라서 저항과 봉기를 정당화한다. … 안전? 제약을 가하거나 처벌을 위협하는 법은 모두 안전에 대한 공격이다. 억압에 대한 저항권? 이 권리는 다른 권리들과 같은 근거에서 나오는 근본적인 권리가 아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여길 때 자신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수단이다." "이 권리의 정의는 그 이론의 반역적이고 반사회적인 성격을 특히 정확하게 보여준다."(46-8)


"권리는 사회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생성된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법률적 구성이 완성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의 인권선언문을 작성하는 것이 순서이다. 그때까지는 '자연법'이니 '자연권'이니 하는 문구들은 장광설의 구름 속에 자신의 무지를 감추는 교사들에게나 편리한 〈무의미한 전문용어〉에 불과하다.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는 '일반이익'이다. 공리가 지고지상의 목표로서, 법과 덕과 진리와 정의를 그 안에 포섭한다〉. 그것만이 하나의 객관적 과학으로서 도덕에 관한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공리의 원리 위에서 추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의견 차이가 오래 가는 경우가 확률상 드물다. 그들은 경험에 즉각 의거해서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자의 판단을 교정할 규칙이 쉽고 단순하고 오직 한 갈래의 진로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지를 금세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논쟁을 매조지하는 굉장한 비결이다.〉"(54)


2장 / 경제적 문제


"〈모든 물건의 진정한 가격, 모든 물건이 그것을 취득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진실로 드는 비용은 그것을 취득하는 데 따르는 땀과 고생〉이라고 애덤 스미스는 말했다." "윌리엄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이어받아, 인간의 노동 이외에 어떤 다른 부(富)도 세상에서 인정하지 않고자 했다. 그는 부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불리는 것은 다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게끔 강제하도록 일정한 개인들에게 사회의 제도가 부여해준 권력〉일 뿐이라고 봤다." "〈부의 소유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권력은 (중략) 구매의 권력, 그 시점에 시장에 있는 모든 노동 또는 노동의 모든 산물에 대한 일정한 장악력이다. 그의 재산이 많은지 적은지는 이 권력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것 덕분에 그가 구입할 수 있게 된 또는 장악할 수 있게 된,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양 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의 산물의 양에 비례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의 말이다. 고드윈도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112-4)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보기에, 부의 불평등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적 정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정부가 그러한 불평등의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 분배는 부의 생산 자체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자연적 현상이다. 반면에 고드윈은 자본주의와 토지재산에서 상속의 효과, 다시 말해서 하나의 적극적 제도, 정부가 만든 하나의 인공물의 효과를 봤다. 〈우리의 개인적 용도에 활용되어야 할 물건들과 관련해서, 또는 우리의 근면으로 얻은 생산물과 더더욱 관련해서, 재산 또는 영구적 지배권이라는 발상은 그것을 보장해주는 모종의 법 또는 관행이라는 발상을 불가피하게 시사한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재산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재산은 어떤 형태를 띠든지 제도의 직접 간섭에 의해서 지탱된다.〉 그러므로 애덤 스미스가 정의하듯,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에 따라 받는 상태만이 아니라, 공리의 원리에 부합하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115-6)


"고드윈은, 애덤 스미스가 단지 혼동된 방식으로만 지각했던 실제 사회에는 이익의 조화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부가 불평등하게 분배된 사회 상태가 주어졌다면, 빈궁한 사람은 오직 부자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할 때만 생계수단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부자들이 자기네 부를 소비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쓸데없는 일들을 새로 발명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모든 정교한 사치품, 수많은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경향이 있는 모든 발명은 행복의 확산에 정면으로 역행한다.〉 사치품이 하나 발명되었다는 것은, 일시적인 차원 이상으로는 임금이 늘어나지 않은 채, 사회의 최하위 계급에게 강요되는 노동의 양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대다수 구성원들의 노동을 사거나 팔 권력을 사기 또는 무력으로써 찬탈한 자들은 '노동자들이 생계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관리하는 데 충분히 이골이 나 있다.〉"(119-20)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일단 토지가 점유되고 자본이 축적되고 나면, 노동자는 더 이상 자기 노동의 생산물을 전부 누리지 못한다. 그의 임금은 그 자신과 고용주 사이에서 맺어진 흥정의 결과로 정해진다. 이 흥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주인이 유리하다. 고용주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한계에 의해 제지될 때까지 임금을 낮춘다." "이제 부자가 빈자의 생계를 허락하는 것은 일과 교환한 대가다. 똑같은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교환이 이뤄지는 조건들이 교환을 불공정하게 만들고, 이익의 일치를 훼손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 애덤 스미스가 단지 희미하게만 감지했던 이 사실을 최초로 드러낸 사람 중 한 명이 고드윈이었다." "이처럼 개인재산 제도 위에 세워진 실제 사회에서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는 손상되지 않는다. 개인재산 자체가 현실 속의 정부 제도에 근거하며, 인위적 문명의 상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121-3)


"문명화된 동시에 평등주의적인 사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노동의 산물을 소유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의 노동의 산물도 소유하지 않는 사회, 다만 각자가 공동 노동의 산물을 자신의 필요에 비례해서 향유할 뿐인 사회, 추구해야 할 목표는 그런 사회다.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려면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결정적으로) 일어나야 할 변화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성향이 바뀌어, 자기가 소유할 때보다 이웃 사람이 소유했을 때 더 큰 공리를 생산할 것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되는 변화다: 이런 성향이 풍미하게 될 시대는 아직 머나먼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팽배한 사회가 이치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리고 만사의 자연적 진보로 말미암아 인간의 지성도 항상 더 강화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대가 올 것이다. 고드윈은 이익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조건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이기적이기를 멈추고 분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반드시 이 최종적 상태를 지향한다고 여겼다."(123-5)


"1786년, 벤담과도 알았던 조지프 타운센드라는 경제학자가 〈인구의 원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입장에 근거해서 구빈법의 문제를 다룬 한 편의 〈논문〉을 제출한다. 타운센드는 살기 위해서는 노동이 필요하고, 근로의 의무를 부과하는 모든 법률적 질서는 굶주림이라는 자연의 제재에 비해 약하고 실효성이 없다는 원칙을 바탕에 깔면서 출발한다. 가난한 사람들, 다시 말해, 미래를 대비할 줄 모르고, 사회적 기능 가운데 가장 〈굴욕적이고 더럽고 비천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다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로써 〈인간 행복의 재고량〉이 최종적인 회계에서 증가한다. 굶주림, 빵을 얻으려는 욕망은 가장 힘든 일도 받아들일 수 있고 부드럽게 만든다. 반면에, 구빈법은 〈세상의 본질과 구성 자체에 의해 실현될 수 없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나서는 셈으로, 어불성설과 접경지대에서 걸치는 원칙들에서 추진된다〉. 〈사회가 진보하는 와중에서〉, 누군가는 궁핍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이다."(144-5)


1797년 2월, 벤담은 피트를 상대로 「구빈법안에 관한 관찰」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의 태도가 호기심을 자아낸다. 그 법안을 비난하는 데는 그것이 하나의 평등주의적인 조치임을 증명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평등화 체제가 임금에 적용되었을 때 근면과 그리고 이어서 재산에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위협을 가하는 정도는 그것이 재산에 적용될 때 재산과 그리고 이어서 근면에 위협을 가하게 될 정도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 하나의 표준임금을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확립하려는 모든 시도를 그는 비난했고, 특히 피트의 법안에서 〈능력 부족 조항 또는 보조임금 조항〉이라 명명한 대목을 비난했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불운일 뿐인 어떤 약점 때문에 이웃들보다 더 열악한 상태로 그를 내버려두기는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벤담이 보기에, 이런 감상주의는 모든 종류의 엄밀한 법과 어울릴 수 없다."(152-4)


"구빈법의 취지를 옹호하던 맬서스가 〈맬서스주의〉로 개종하게 된 것은 1797년 고드윈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었다." "콩도르세는 물었다: 〈(인간 근면 진보의 법칙과 인구 진보의 법칙) 이 두 가지 대등하게 필연적인 법칙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킬 단계, (중략) 사람 수 증가가 생계수단의 증가를 능가하는 단계가 틀림없이 오지 않을까?〉 물론 고드윈과 콩도르세에 따르면, 인구와 인간 번영에서 그와 같은 퇴보는 지극히 머나먼 일이었다. 그러나 맬서스는 이렇게 말한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생계수단의 분배에서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치유할 권력이 사회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생계의 권리가 있고, 따라서 동료로부터 도움받을 권리가 있다─모든 사람에게는 생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연은 계속 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에 충분한 양의 생계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계의 권리는 착각 속의 권리이며, 만사의 본질 안에 근거하지 않는다."(157-9)


"인간의 산업이 진보해서 풍요가 일단 실현되었다고 하면, 재산이라는 제도와 교환이라는 현상이 사라짐과 동시에 이기주의가 쓸데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분업에 기초한 이익조화의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재산, 교환, 이기주의 등의 개념들을 함축한다. 맬서스는 이익 융합의 원리를 거부했다. 선의의 감성은 이기주의로부터 점진적 진화에 의해 파생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기주의 대신에 선의로 사회의 작동 원리를 바꾸게 되면, 오늘날 단지 소수만이 느끼는 결핍의 아품을 전체 사회가 느끼도록 만드는 결과밖에 없을 것이다. 맬서스에 따르면, 문명사회를 야만사회와 구분해주는 모든 것은 확립된 재산 체제 덕분이고, 편협한 것처럼 보이는 겉보기에도 불구하고, 이기주의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점과 관련해서, 맬서스는 애덤 스미스의 전통을 충실하게 물려받은 수탁인으로 보인다." "이 신조를 적용한다는 것은 곧 도움받을 권리를 규탄하는 것이고, 그 권리를 인정해주는 구빈법을 규탄하는 것이다."(162-3)


"맬서스는 국가에게 교육의 기능이 맡겨지기를 바랐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이, 가난한 집의 아동들이 초등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구 학교를 운영하는 체제를 그는 옹호했다. 기존의 소규모 〈자선학교〉와는 달리, 이런 학교에서는 더욱 실천적인 성격의 교육이 이뤄져야 하고, 기하학과 역학의 요지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애덤 스미스는 이미 요구한 바 있었다. 맬서스는 이보다 나아가, 정치경제학을 인민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기존의 움직임에 공리주의적 공식을 마련해줬다. 교회개혁파들은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하기 때문에 성경에 관해, 신의 법에 관해, 그리고 도덕의 법칙에 관해, 지식을 가능한 한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이 '정의'롭다고 주장했다. 맬서스는 자연이 그들의 처분에 맡긴 쾌락의 양의 증가에 맞춰 자기네 필요의 증가를 어떻게 규율해야 할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이 인간 종의 발전과 증가를 결정하는 물리적 법칙을 아는 것이 '유용'하다고 주장했다."(168-9)


"이제 우리는 맬서스의 지적 태도를 정의할 수 있다. 자신의 신조로부터 그려지는 인간 삶의 모습은 〈암울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수동적 복종의 정치이론이나 악에 대해 체념하는 도덕이론이 거기서 도출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인생이라는 것이 〈더 높은 행복의 상태를 준비하기 위한 시련의 상태이자 덕의 수련장〉이라는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신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잘되기를 원한다. 육체적 필요는 정신을 발동시켜 진보의 역량을 일깨울 목적을 가진다. 인구가 식량보다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끔 예정된 것은, 지구 전체를 경작지로 만들도록 인간을 제약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자극제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인구와 식량의 증가 법칙이 같았다면, 인간은 결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맬서스는 속죄라고 하는 초자연적 이념에 반해서 진보라는 인간적 이념의 편에 섰다. 실제로 그는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였고, 언제나 자유주의자이자 휘그파로 남았다."(169-70)


3장 / 벤담, 제임스 밀, 벤담주의자


"제임스 밀과 알게 된 1808년에 벤담은 예순 살이었다. 그렇지만, 괴이하게도, 영국의 공중에게 법과학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개혁가로서 그의 면모는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기로는, 『파놉티콘』을 쓴 사람이라는 점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한 가지 구상의 제창자〉 가운데 한 명쯤으로 치부되었을 뿐인데, 그런 사람은 당시 영국에 무척 많았다. 농업 공산주의를 설파한 스펜스, 보통선거권을 옹호한 카트라이트, 사각형 모양의 마을 구조를 통해서 인간의 도덕적 갱생을 제창한 로버트 오웬 등등이 있었다. 또는, 벤담은 어떤 보편적 해결책을 제창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감옥 개혁가 하워드라든지, 노예제에 반대했던 윌버포스와 같은 유형의 박애주의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1808년으로 접어들 무렵, 벤담은 자신의 박애주의 운동을 실패한 것으로 여겼다. 실망으로 끝난 박애주의는 그의 마음 안에서 인간에 대한 일반적 불신으로 탈바꿈했다."(188-9)


"제임스 밀은 여러 해 전부터 휘그당원이었고, 아마 휘그당원 중에서도 진보파였을 것이다. 그는 무한한 완성 가능성의 이론을 지지했다. 그는 가톨릭 해방을 요구한 점에서 《에든버러 평론》의 출판인들과 뜻이 같았다. 의견과 언론의 자유는 그가 가장 열렬히 옹호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런데 벤담은 제임스 밀과 만나게 된 때부터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특히 언론의 자유라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임스 밀은 휘그 자유주의의 전통적 명제로 가까이 간다. 그보다 앞서 프리스틀리가 그랬던 것처럼, 제임스 밀은 정부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일단 전제하면 정부 자체도 하나의 조직된 통제에 복속하는 것이 순서라고 요구하기 위해, 이익의 인위적 일치 원리를 기초로 삼았다. 하지만 제임스 밀은 아직 무척이나 소심했다! 그는 미국에게 하나의 민주적 헌법을 부여할 태세는 되어 있었지만, 애당초 그 헌법의 '형태를 갖추는' 임무를 인민에게 맡길 만큼 신임하지는 않았다."(198-9, 203)


"벤담은 오랫동안 민주주의 이념에 무관심했거나 심지어 적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 환경의 영향 아래, 벤담의 내면에서 민주주의 이념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벤담은 카트라이트와 같은 신조를 자신도 제창하도록 모르는 사이에 이끌려왔음을 깨달았다. 단체의 혼은 정의상으로 일반적 공리의 원리에 적대적이고, 정치적 귀족계급은 하나의 폐쇄적인 단체였다. 이 귀족계급이 자신의 박애주의적 기획을 향해 보여준 무관심 때문에 벤담은 오랫동안 고통을 겪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 운동의 다름 아닌 중심지에서 살고 있었다. 거기서 그는 제임스 밀을 만났고, 밀을 통해서 프랜시스 버데트 경과 플레이스와 카트라이트를 만났다." "그러나 벤담이 한 명의 급진파로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급진당의 성격 자체가 변하게 된다. 1814년에 급진적 개혁가였던 브롬은 1818년에 버데트에 의해서 대변되고 있던 벤담과 결별한다."(215-6)


"기성 정부들을 폭력 혁명을 통해 전복하자는 요구는 이제 논외였다. 머지않아 벤담은 코베트나 헌트 같은 선동가와도 말다툼을 벌인다. 지성이 자연스럽게 진보하면 모든 정부가 쓸모를 잃고 폐지되는 날이 오리라는 고드윈과 같은 사람의 동경도 논외였다. 벤담과 밀은 정책적 사안에 이익의 자연적 일치 원리가 아니라 인위적 일치 원리를 적용했다. 보통선거 제도를 통해서 그들은 일반이익, 즉 통치자와 피치자 사이에 이익의 조화가 입법부에서 채택되는 결정으로부터 틀림없이 귀결될 그런 조건 아래 대의적인 정권을 조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식으로 해석된 대의제 정권의 급진적 이론은, 궁극적으로, 전통적인 영국 자유주의의 명제와 동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 당파는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상실하는 경향, 그리고 부르주아 소신가들의 당파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당파는 15년이 지나면, 〈급진적 지식인들〉의 당파 또는 〈철학적 급진파〉로 불리게 된다."(216-7)


"리카도와 애덤 스미스는 〈정치경제학〉이라는 표현을 같은 의미로 이해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에게 정치경제학은 산업계와 상업계의 현상에 관련된 일정 개수의 관찰들의 실천적 응용의 총합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로 이해된 정치경제학의 구성에서 '예비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그리고 오로지 예비적인 부분에 불과한,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연역추론이 귀납과 뒤섞이는데 각각의 비율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흄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한 명의 관찰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역사가로서 진행하기를 원했던 것이 확실하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예비적이었던 것이 리카도에게는 정치경제학의 핵심이 된다. 이제, 정치경제학은 실천에서 유리된, 나중에 어떤 실천적 결과를 빚게 되든지 상관없이, 하나의 이론이다." "리카도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의 목적은 '법칙들'이다. 애덤 스미스에게는 정치와 입법의 한 분과였던 정치경제학이 리카도에게는 부의 자연적 분배 법칙의 이론이 된 것이다."(222)


"리카도의 정치경제학의 체계적이고 연역적인 성격은, 벤담과 제임스 밀의 매개를 통해 소개된,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벤담에 관해서는, 이 여부는 매우 불확실하다. 세와 리카도가 의도했듯이, 벤담도 애덤 스미스의 〈뒤범벅〉에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러시아의 정치인 스페란스키가 벤담의 『정치경제학 교본』의 원고를 1804년에 뒤몽으로부터 받아보고 칭찬한 표현들은 한 마디도 바꿀 필요 없이 그대로 세의 책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시야의 범위, 분류의 명료함과 정밀함, 그리고 편제의 체계적 성격〉을 그는 칭송했다." "그러나 벤담이 정치경제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채택한 관점은 세와 리카도의 관점과는 정면에서 상반된다. 벤담에게 공리의 원리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하나의 격언, 의무체계의 기초였다. 일반적 공리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의 일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입법자의 기예고, 정치경제학은 그 한 분과다."(230)


# 리카도식 정치경제학의 법칙적 성격은 진보의 철학을 설파한 (콩도르세의) 계몽 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 그렇기에 이 법칙들은 정태적인 균형의 법칙만이 아니라, 동태적인 진화와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


"1818년의 「교육」이라는 기사에서 제임스 밀은, 인간 본성의 유용한 자질들 중에 교육의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이 어느 정도고, 속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썼다. 엘베시우스에 따르면, 불완전하고 명백히 평균 이하로 태어난 상대적으로 제한된 수의 개인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탁월해질 수 있을 만큼 대등하게 민감하다고 간주할 수 있고, 그들의 불평등을 치유할 수 있는 원인도 찾아낼 수 있다. 이런 의견을 가진 것은 확실히 엘베시우스뿐이었다." "엘베시우스의 이론을 최초로 실험을 통해 검증하려고 제임스 밀은 자신의 맏아들 존 스튜어트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스튜어트 밀이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벤담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버지는 스튜어트 밀을 엘베시우스와 벤담의 신조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사상가이자 시민이자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더욱 힘든 길을 따라, 온 힘을 쏟았다."(253-6)


"그러나 벤담의 제자이자, 말하자면, 자기 주군에게 봉사하는 수상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했던, 제임스 밀은 개인적 교육이라는 고립된 경험에 자신의 노력을 국한하지 않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교육의 보편화가 그 자체로 선이라는 점이었다." "《에든버러 평론》에 기고한 글에서 제임스 밀은, 고향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긍지를 담아, 인민 교육이라는 발상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왔음을 되새긴다. 인민에 대한 강습이 공공 서비스여야 하느냐는 질문에 관해, 그는 가급적 정부의 간섭을 멀리하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원칙에 부합할 것이며 경험에서 오는 교훈과도 어울린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인민이 극도로 무식하고 강습을 받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수 없도록 가난한 현실에서는, 국가가 개입해서 이 사업에 추동력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위임받은 권력을 국가가 남용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일종의 지성적 독재체제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보장책, 곧 언론의 자유만으로 족하다."(259, 268-9)


"철학적 급진주의라는 것이 진실로 1832년경에 있었다면, 이와 같은 집단적 교조주의가 형성된 데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일반적인 근거들이 있다. 정치와 경제와 사법의 질서에서 일정한 개혁들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18세기 말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1815년에는 여론의 상당한 일부가 모두 비슷한 강도로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런 세력은 날마다 커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지적인 존재인 인간이 이 모든 개별적인 요구들을 하나의 단일한 원리 안에 체계화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는 것은, 이때부터 필연적이었다. 그런 원리가 공리의 원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거의 필연이었다. 왜냐하면, 그 원리가 영국적 지성의 근거였으며, 보수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공산주의자든 세습적 사유재산을 지지하는 자든, 자유거래의 산봉자든 보호주의자든, 영국의 사상가라면 모두 본능적으로 그 원리로 돌아가 준거를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보면, 벤담이 그 운동의 우두머리로 선택된 것이다."(3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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