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군대 - 게릴라전, 테러, 반란전과 대반란전의 5천년 역사 KODEF 안보총서 117
맥스 부트 지음, 문상준.조상근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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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2007년 4월 9일, 바그다드 정찰


"이 책에서 테러리즘은 비국가행위자가 주로 비전투원(대부분 민간인이지만 정부 공무원, 경찰, 그리고 복무 중이 아닌 군인도 포함된다)을 위협하거나 강압하여 정부의 정책 또는 구성을 바꾸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게릴라 전술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유로 주로 정부와 정부군을 대상으로 무장단체가 구사하는 치고 빠지기 전술을 말한다." "몇 가지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게릴라는 최소한 짧은 시간만이라도 점령한 영토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테러리스트는 그렇지 않다. 게릴라 군대는 종종 수만 명에 이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테러 조직은 지지자가 수백 명을 넘지 않는다. 게릴라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작전을 확연히 구분되는 교전 지역에 한정해 실시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닌 지역에 공격을 집중한다. 게릴라는 적을 물리적으로 패배시키거나 적어도 약화시키려고 하는 반면, 테러리스트들은 몇 번의 극적인 공격으로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24-5)


제1부 문 앞의 야만인─게릴라전의 기원


1 벳호론 매복 전투─66년, 로마군 대 유대 반란군 게릴라


"로마 군단은 탁 트인 전장에서 적을 만났을 때는 고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이런 로마 군단의 장점은 군단이 애로지형에 빠지거나, 결연한 의지로 무장한 노련한 게릴라들을 만났을 경우 발휘되지 못했다. 케스티우스 갈루스의 부대가 예루살렘에서 지중해 해안 인근 로마령 도시로 가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악지대를 통과할 때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경무장한 유대인 게릴라 부대는 고지에서 돌팔매질을 하고, 투창을 던지거나 낙오자들을 칼과 검으로 공격하는 등 로마군과 현지 동맹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로마군 병사는 1인당 평균 45kg의 중무장 갑옷과 장비를 휴대하고 있어서 민첩한 게릴라를 쫓아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전사자 가운데는 오늘날 미 육군 1개 여단 규모와 비슷한 5,000여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로마군 6군단을 이끈 군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마 군단은 치중대 물품 대부분을 포기해야만 했고, 군수품을 실어 나를 동물도 도살되었다."(40-1)


# 애로隘路 지형: 애로란 산과 산, 언덕과 언덕 사이에 만들어진 좁은 길과 같은 협곡을 말한다.


# 치중대輜重隊: 군수지원을 제공하는 제반 전투근무지원 부대의 집단을 말한다.


2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분쟁들─기원전 426~기원전 132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중앙아시아 원정, 마카베오 일족과 바르 코크바의 반란


"기원전 426년 그리스 북서쪽 해안에 있는 산간지방인 아이톨리아의 날렵한 경무장 원주민들이 어떻게 아테네 중장보병hoplite을 몰살했는지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보자." "평원에 있는 도시국가의 일반적인 장군들이 그런 것처럼, 아테네군 총사령관 데모스테네스는 청동 투구와 중장갑을 장비한 보병 50열로 구성된 밀집대형Phalanx의 전투를 선호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군의 '비대칭' 전술에는 통상적인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초기에 아테네군을 위기로부터 구해준 것은 동맹군 궁수들이 유일했지만, 그나마도 화살이 바닥나자 아테네군은 무너졌다. 아테네군은 퇴각하려 했지만 벳호론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이톨리아군은 수많은 아테네군을 섬멸했고 아테네군은 아이톨리아군의 투창에 쓰러져갔다. 나머지 아테네군 병사들은 통로 없는 도랑과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몰려들어 결국 섬멸되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군은 전투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희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46)


3 고대 원시 전쟁─대량 살육이 자행된 부족 간의 전쟁


"도시 문명 발전 이전, 그리고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현생 인류의 기나긴 피비린내 나는 악전고투의 기간 동안 전쟁은 주로 군기가 엉망이고, 결속력이 약하며, 전면전을 꺼린 경무장한 자원자들로 구성된 집단에 의해 수행되어왔다. 이들은 적을 교란하고 매복해 있다가 습격하고 학살하고 공포에 휩싸이게 만들기 위해 잠행, 기습, 신속기동을 선호했고, 전투력이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적을 만나면 신속히 퇴각하여 사상자를 최소화했다. 이는 현대 게릴라전의 주요 특징이자 국가 발생 이전 원시시대 전쟁의 주요 특징이다." "원시 전쟁은 전체 전사자 수가 아니라(부족 사회의 경우 도시 문명과 비교하면 인구가 매우 작기 때문이다) 전사율 측면에서 문명 사회의 전쟁보다 더 치명적이다." "부족 사회는 매년 발생하는 전투에서 평균적으로 인구의 0.5%를 잃는다. 만약 오늘날 미국에서 이와 비슷한 비율로 인구를 잃으려면 매년 150만 명이 죽거나 9·11 테러와 같은 일이 1년에 500번 발생해야 한다."(56-9)


4 아카드와 반란전의 기원─기원전 2334~기원전 2005년, 메소포타미아


"역사상 최초로 제국을 건국하고 동시에 최초로 상비군을 창설한 사람은 사르곤Sargon이었다. 사르곤은 아카드Akkad를 수도로 정했는데, 아카드는 오늘날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비군은 새 영토를 획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미 복속한 지역을 통제하는 데도 필요했다. 복속된 도시가 계속 제국에 반기를 들곤 했기 때문이다. 현대 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반기에 대응해 아카드군은 〈대량 살육, 노예화, 추방, 도시 완전 파괴〉로 이들을 진압했다." "사르곤은 정복민들, 특히 메소포타미아에 사는 수메르인들을 회유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드어를 보급하고 미술을 장려했다. 사르곤의 딸 엔헤두안나 공주는 시인이자 여사제로서 세계 최초의 작가로 알려진 인물로, 수메르 신과 아카드 신의 통합을 찬미하는 설형문자cuneiform 시를 남겼다. 이는 셈족Semite인 사르곤이 수메르족을 통치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61-4)


5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기원전 512년, 페르시아군 대 스키타이족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영토에 난입한 스키타이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512년경,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병 기술인 부교를 보스포루스 해협에 설치한 후 수십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발칸 반도를 통과하여 현재의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에 상륙했다. 다리우스의 예상과 달리 스키타이인들은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페르시아군을 전장에서 맞아 싸우기에 너무 약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스키타이인들은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좌절한 다리우스는 스키타이의 왕 이단티르수스에게 애처로운 서신을 보내어 묻는다. 〈그대 괴이한 자여, 어째서 계속 도망치는가? ··· 돌아와 전투에 응하라.〉 이단티르수스는 경멸조의 답신을 보냈다. 〈이것이 나의 방식이다. 페르시아인이여. ··· 우리 스키타이인에게는 함락되거나 파괴될 도시도, 경작지도 없다. 우리는 그대와 서둘러 싸워야 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는 한 응전하지 않을 것이다.〉"(69-70)


6 초토화시켜놓고 이를 평화라 부른다─기원전 1100~212년, 아시리아와 로마에서 찾은 대반란전의 기원


"대부분의 고대 제국은 외부 유목민이나 국내 반란군들이 일으킨 게릴라전의 위협에 똑같은 전략으로 대응했다. 이는 간단히 '공포'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고대 군주들은 무장 투쟁을 진압하고 예방하기 위해 최대한 잔인하게 진압했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로마 군단이 점령한 도시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의 시체뿐만 아니라 토막난 개의 시체, 수많은 동물들의 찢어진 사지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두려움을 심어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일어날지도 모를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기 위해 로마는 전 세계에 그들의 무자비함을 알렸다." "만약 로마 제국이 피정복민들에게 죽음과 절망만을 가져다주었다면 로마 제국은 절대로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는 서유럽,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대부분을 450년 동안 다스렸다. 로마 제국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반란은 엄벌한 반면 통치는 관대하게 했다는 것이다."(71, 75, 79-80)


7 로마 제국의 몰락─370~476년, 야만인의 침공


"당대 최고의 제국 로마는 11만~12만 명밖에 안 되는 침략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375년 당시 로마 정규군의 수가 최소 30만 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정도의 침략군은 보잘것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로마군은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거나 로마 내전에 참가하거나 침입자나 게릴라에 대항해 수천 마일에 달하는 국경을 지키고 있었다. 서쪽 야만인과 맞닿은 국경에는 불과 9만 명의 정규군만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들로 야만인의 침입에 대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따라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는 습격대가 로마의 몰락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로마의 몰락에는 내부 분열과 혼란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쓴 것처럼, 〈야만인은 로마를 침략할 때까지 마치 로마의 몸통을 찔러 약하게 만든 다음 서서히 찔린 부위가 부패하게 만듦으로써 로마를 '살해'했다.〉"(89-90)


8 동양의 전쟁 방식?─손자 이후 고대 중국의 전쟁


"흔한 통념과 달리, 유럽인들은 본질적으로 야전에서 보병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동양인들은 게릴라전을 선호한다고 정의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두 중국 군사사학자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과 서양의 전근대 전투수행방식의 차이는 사실 중국의 고전 병법서들처럼 우리를 믿게 만드는 권위 있는 문헌들에 나와 있는 내용만큼 그렇게 크지 않다. 여러 문헌에서 전투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회피를 강조하지만 고대 지중해 지역이나 중세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중국에서도 전투는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게릴라전은 〈동양 문화〉의 산물이 아니다. 아시아는 단일 문화권이 아니기 때문에 동양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적절하다. 게릴라전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강적에 대항해 싸우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다. 일반적으로 정규군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것은 보통 부족 집단의 역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93-4)


9 유목민과 중국인─기원전 200~48년, 흉노 대 한나라


"흉노가 아는 것이라고는 전쟁뿐이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그들이 농경민인 중국인보다는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한무제는 흉노의 유목민 이웃 부족과 관계를 개선하고, 이들을 관례적으로 한군 기병대에 편입시키는 정책을 펼쳤다. 이이제이以夷制夷는 로마도 선호했던 방법이다. 한군은 이와 같은 폭넓은 군사개혁을 통해 70만의 병력을 양성했다. 농부를 1~2년 동안 징집하여 운용하는 징병제 체제로는 멀리 떨어진 국경지대로 장기간 부대를 파병하는 것이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1~2년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기병 전술이나 궁술 숙달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 같은 이유로 로마에서도 같은 군제개혁이 이루어졌다. 제국을 평정하기 위해서는 농장에서 임시로 징집되는 시민군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게릴라들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직업군인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96, 100-1)


10 게릴라의 역설─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이유


"성공한 게릴라라 하더라도 능력이 생기면 정규군 전술로 전환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보병, 포병, 기갑, 공병 및 기타 전문 병과로 구성된 부대는 기병 운영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서 싸울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성벽 파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기동성이 빠른 유목민 전사는 방어 전투에 적합하지 못했고, 새로 정복한 영토의 행정과 정책 수립에도 적합하지 못했다." "한 역사가는 유목민이 정착민들 속에서 살게 되면서 〈유목민들은 뛰어난 개인의 재능과 조직의 결속력을 빠르게 잃어버렸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유목민, 적어도 그들의 자식 또는 손자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일종의 트레이드-오프trade-off(맞교환)였다. 정착 생활이 그 이전의 유목 생활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편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대안이 있다면 그 어느 누구도 언제나 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게릴라로서 싸우기를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106-8)


11 스코틀랜드 반란군─1296~1746년, 스코틀랜드 대 잉글랜드


"중세시대 유럽인들은 문화적으로 습격전에 친숙하지 않았다. 사실 유럽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근접전투를 중요시했다. 이들은 순수하게 실리적인 이유로 슈보시를 채택했다. 슈보시란 적의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방화, 약탈, 강간, 납치. 무차별 살해 등을 저지르는 것을 뜻했다. 곳곳에 구축된 성채 때문에 세트피스set-piece와 같은 전투는 드물었고, 전투가 일어나면 패한 쪽은 보통 성채로 퇴각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전투도 드물었다. 하지만 15세기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성채는 돌파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던 반면에, 성벽 안에 숨어드는 측의 성 인근 농지는 방어가 허술해서 적의 습격에 취약했다. 슈보시는 손쉽게 수행할 수 있고 수익성이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슈보시로 얻은 전리품은 봉급이나 식량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병사들에게는 생계 유지 수단이었다. 봉급을 받지 못한다거나 식량을 보급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또한 불쌍한 농민을 노리는 산적과 탈영병의 좋은 구실이 되기도 했다."(111-2)


12 역사책 속의 대반란전─대반란군의 이점


"17세기에 이르러, 화약 제국들(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튀르크, 인도, 중국)은 막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행정력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갔다. 활과 화살을 잘 다루는 유목민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엄청난 군수지원을 받는 대규모 부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18·19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정치적 이념과 전술에 완전히 적응하여 진화된 게릴라가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대 정규군을 강력하게 만든 무기체계와 전투기술을 동일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물리치기 쉽지 않았다. 고대나 중세시대와 달리, 현대에 들어와 생긴 게릴라들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과거 시대의 게릴라들로부터 배우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책과 인쇄물이 보급되고 나서 문자 해독율이 높아지자 반란군들은 앞선 게릴라들의 경험을 글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었고, 강대국이 무릎을 꿇게 만들 수 있는 기발한 기술을 개발해낼 수 있게 되었다."(122-4)


제2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자유주의 혁명의 대두


13 '이성의 시대'의 비정규군─1648~1775년, 후사르, 판두르, 그리고 유격대


"중세 시대 동안 모호했던 정규전과 비정규전의 차이는 30년 전쟁 이후 상비군, 국민군의 확산으로 인해 뚜렷해졌다. 이러한 차이는 민족국가의 성장과 그 궤적을 같이하면서 변화하다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랐다. 이때부터 병사들을 수용할 병영, 이들을 훈련시킬 교관, 이들을 지휘할 전문 직업군인, 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제공할 군수체계, 이들을 입히고 장비를 갖추게 할 공장, 그리고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을 때 이들을 돌봐줄 병원과 참전용사 수용시절이 등장했다. 1700년경 프랑스는 약 40만 명의 상비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1775년 영국의 북미 식민지에서 일어난 혁명보다 더 강력하게 게릴라전의 이념, 선전, 그리고 비교적 새로운 요소들의 중요성을 보여준 것은 없었다. 미국 독립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신호탄이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 한 세기 동안 유럽과 이주 식민지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간 일련의 자유민주주의 대격변에는 상당히 많은 게릴라전이 포함되었다."(129-30)


14 미국 독립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민병대와 민심─1775~1783년, 차세대 게릴라들이 학습하고 적용해야 할 교훈을 남긴 미국 독립전쟁


"미국 독립전쟁을 설명하는 대부분의 글에서 간과되는 것은 요크타운 전투 이후에도 영국군은 계속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군은 요크타운에서 단지 8,000명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여론'을 고려했을 때 병력을 증원하는 대응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구한 게릴라전의 역사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의원내각제 정부는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 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적의 저항의지를 꺾기 위해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반란군의 능력은 당시 정권이 누리고 있는 장점을 상쇄하고 반란군에게 훨씬 더 큰 성공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인류의 견해를 적절히 고려〉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이러한 선전전에서 아주 성공적인 무기였다. 모든 영국 신문들은 독립선언문을 그대로 옮겨 실었다." "1782년 2월 28일, 반전여론에 지친 영국 의회는 투표 결과 근소한 차인 234 대 215로 공세적 작전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153-6)


15 목숨을 건 사투─1808~1814년, 반도전쟁 당시 프랑스군 대 스페인 게릴라


"미국 독립전쟁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치러진 반도전쟁은 정규군과 비정규군이 합동작전을 실시하여 강력한 점령군이 어느 쪽 위협에도 대처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에서는 정규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수행했다. 스페인에서는 비정규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소화했다. 6년의 전쟁 기간 동안 프랑스군이 입은 피해 대부분은 비정규군 활동으로 인한 것이었다." "스페인 국민은 나폴레옹의 몰락에 일조한 것을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가는 컸다. 중심 권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페인은 수십 년간 도적떼와 정치적 혼란에 시달렸다. 1820년대부터 1870년대까지 스페인은 도시 자유주의자 대 농촌 보수주의자 간의 내전으로 분열되었다. 자유파는 마드리드를 거점으로 삼았고, 보수파는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런 혼란은 100년 후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계속된 스페인 내전에서 정점에 달했다. 사회 구조의 분열은 장기간의 반란에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다."(174)


16 흑인 스파르타쿠스─1791~1804년, 아이티 독립전쟁과 생도맹그 노예 반란


"아이티의 성공에는 모기가 창궐하는 열대기후가 한몫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기가 말라리아와 황열병을 옮긴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다. 어느 잡지에 따르면, 〈이 해충 전사들이 모든 적 중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유럽에서 온 부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열병으로 인한 비전투손실이었다. 또한, 아이티의 지정학적 위치(아이티는 프랑스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반란 시기(나폴레옹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였다), 노예와 노예주의 인구 차이(노예는 50만 명, 백인은 4만 명)도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결의에 가득 찬 노예들과 그들을 이끈 걸출한 지도자 흑인 스파르타쿠스였다." "프랑스가 무자비한 살육을 서슴없이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할 수 없었다는 점은 심지어 아무런 제한이 없는 대반란전 전략조차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교훈은 200년이 지난 후 프랑스가 알제리와 인도차이나에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189)


17 그리스인과 그리스 독립 지원자들─1821~1832년, 그리스 독립전쟁


"그리스 망명자들은 오늘날 정보전의 영역으로 알려진 분야에 매우 뛰어났다. 이들은 서양 지식인들이 예부터 그리스인들에 대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과 서양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전쟁으로 인한 튀르크인과 중동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개입이 그리스의 대의를 되살렸다. 외부 세력이 반란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전혀 새롭지 않았다. 프랑스는 미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도와 영국에 대항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서 프랑스와 싸우던 스페인 게릴라를 돕고 그 이전에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1568~1648년)에 대항한 네덜란드 반란군을 지원했다. 하지만 모두 전략적인 이유에서 지원한 것이었다. 반면,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도 어느 정도는 일말의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리스에 개입했다. 물론, 이 세 국가들이 도덕적 만족 이외에 자신들의 동맹인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커 얻은 것은 거의 없었다."(196-9)


18 두 대륙의 영웅─1833~1872년, '20세기 게릴라들의 선구자' 주세페 가리발디와 이탈리아 통일 전쟁


"가리발디는 1860년 4월 4일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에 대항하여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촉발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다음 단계에서 중심 역할을 할 운명이었다. 그의 붉은셔츠단은 기적 같은 승리를 이어가면서 부르봉 왕가의 군대를 토벌해나갔다." "가리발디의 평생의 목표였던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1861년에 현실화되었다. 베네치아는 1866년에 프로이센과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전쟁에서 가리발디는 다시 한 번 북이탈리아에서 게릴라전에 나섰다가 부상을 입었지만 정규군보다도 많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가리발디는 20세기 게릴라들의 선구자였다. 그는 전투를 수행하면서 일관되게 인간성과 자제력을 보여주었고 결코 자신을 위해 권력이나 부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게릴라 지도자들보다 더 칭찬받을 만했다. 그는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업적으로 전무후무한 게릴라 지도자의 모범이 되었다."(214-6, 219-20)


19 자유주의 혁명의 결과─이상은 실현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더 쉽다


"프랑스 혁명은 프랑스 인권 선언으로 시작해서 전쟁과 공포정치로 끝이 났다. 그리스 독립전쟁은 영국 시인 셸리 같은 그리스 독립 지지자가 상상한 〈위대한 시대〉나 〈또 다른 아테네〉로 안내한 것이 아니라 바이에른 왕국의 왕자 오토가 그리스 왕으로 옹립된 후 1862년에 쿠데타에 의해 퇴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티 독립 후에 남은 백인들이 대학살되었고 오늘날까지도 불안정은 계속되고 있다. 스페인은 프랑스를 몰아내고 불경기와 내전을 겪었다. 스페인은 197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민주주의 체제로 탈바꿈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자 호세 데 산 마르틴과 시몬 볼리바르는 그들의 투쟁의 결과에 가리발디보다 훨씬 더 큰 환멸을 느꼈다. 혁명 후에 등장한 군사독재, 부패, 내전은 볼리바르가 말년에 〈소름끼치는 독재정치〉라고 비판한 것들이다." "산 호세, 볼리바르를 포함한 수많은 혁명가들의 사례는 이상은 실현시키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222-3)


제3부 유점(油點) 확산 전략─제국의 전쟁


20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전쟁─유럽인 정복자에 비해 군사 및 전투 기술 면에서 뒤처졌던 비유럽인은 왜 게릴라전이 아니고 정규전을 선택했는가?


"비서양 국가들이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서양 국가들의 전투력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줄루족이 수족Sioux의 교훈을 배우고 그 교훈을 적용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반대로 선진국 군대는 다른 나라의 전투를 보고 배울 수 있었다." "비정규전을 수행할 만한 의지가 있었다 하더라도 원주민들에게는 이념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애착을 갖고 있었지만, 그 애정의 주된 대상은 가족, 씨족, 부족이었지 국가가 아니었다. 원주민 국가의 지도자들은 종종 유럽인들에게 분개한 만큼 다른 부족이나 분파에 속한 사람들에게도 분노를 느꼈다. 민족주의는 18세기에 유럽인들이 확립한 개념으로, 19세기까지 미주 대륙의 유럽인 정착 식민지들을 넘어서까지 널리 퍼지지 않았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현대식 무기가 없어서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민족의식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229-31)


21 게릴라 전술의 정수, 매복공격─1622~1842년, 정착 초기 북미 동부의 '인디언 전쟁'


"17세기와 18세기 동부해안을 따라 벌어진 '삼림 전쟁'에서 왜 북미 인디언들은 결국 패배했을까? 그것은 두 가지 치명적인 부족 때문이었다. 하나는 인구의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단합의 부족이었다. 처음에 북미 인디언들은 북미 개척자들보다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았다. 하지만 엄청난 수의 이주민들이 계속 들어온 반면 북미 인디언의 인구가 (전사·병사·아사 등으로) 계속 감소하기 시작한 18세기경부터 정착민의 인구가 북미 인디언의 인구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구가 줄어 약해진 북미 인디언들은 무자비하게 전쟁을 일으키는 탐욕스러운 유럽인들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북미 인디언의 인구 감소세는 내분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상륙했을 때 북미 대륙 인디언들은 600여 개의 '자치구'로 분산되어 있었다." "따라서 매번 북미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일 때마다 백인들은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를 원하는 수많은 자발적 협력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241-3)


22 서부에서의 승리─1848~1890년, 북미 인디언 전사 대 미군의 전투


"서부에서 미군의 작전 목적은 인디언 토벌이 아니라 보호구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서부의 두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집단 수용은 백인들에게 사리사욕을 충족하고 숭고한 자선산업을 펴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리사욕 충족이란 백인들이 원하는 땅에서 인디언들을 몰아내어 1873년에 내무부 장관이 언급한 '빈번한 잔학행위, 일탈행위, 만민의 평화를 깨뜨리는 행위'를 예방하는 것이었다. 자선사업(인류애와 박애를 위한 위대한 업적)이란 〈인디언들에게 농경술과 문명화에 필요한 부수적인 일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영국군, 프랑스군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가장 효율적인 전술은 커스터가 1868년에 실시한 것처럼 인디언들의 식량차고, 말, 티피를 목표로 삼아 부족들이 덜 활동적인 겨울에 이것들을 집중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북미 인디언의 자급자족 경제를 고려할 때 이들을 기아의 위기에 빠뜨려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게 만드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254-5)


23 동방에서의 승리─1829~1859년, 체첸과 다게스탄에서 러시아 제국을 상대로 벌인 성전


"1856년에 캅카스 총독으로 부임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바리아틴스키 공작은 난관에 부딪힌 대반란전에 종지부를 찍을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반란군 지도자) 샤밀이 사형집행자와 함께 다녔던 반면, 바리아틴스키는 재무담당자와 함께 다니며 부족 지도자들에게 뇌물을 제공했다. 또한 이 부족 지도자들은 제국 체제 내에서 더 많은 자치권을 얻었고 광신적인 무리드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바리아틴스키는 〈나는 신정주의 원칙에 반하는 칸khan들을 복권시켰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이슬람교 성직자들에게 샤밀을 배교자라고 비난하고 비폭력 교리를 전파하도록 독려했다. 지역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단순히 모든 사람을 죽이는 대신 여성과 어린이는 포위된 요새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심지어 여성에게 더 많은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후원했다." "그는 무익한 징벌적 원정을 수행하기보다는 다게스탄의 모든 반군 거점을 체계적으로 축소했다."(278)


24 어둠의 골짜기─1838~1842년, 제1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영국은 대반란전에서 최대 목표보다는 최소 목표를 지향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 독립운동 시의 오스만 제국이든, 미국 독립전쟁 기간의 영국이든, 점점 커지는 민족주의 반란에 직면한 대반란전 수행 주체들은 타협하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오스만 제국이 초기에 더 많은 지역 자치권을 기꺼이 허용했다면, 북미 식민지에서 영국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에 대한 통치권을 어느 정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이후 피해가 커지고 전쟁이 양쪽 모두에게 감정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그러한 타협은 생각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반면, 아프가니스탄에서 영국은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촉발할 수 있는 큰 통제권을 생각지 않고 러시아 개입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도의 통제권만을 얻었다. 이는 뉴질랜드와 캐나다와 같은 정착민 식민지를 대영제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치국가로 전환하기 위해 법적 조치와 비공식적인 방법을 동시에 사용했던 것과 유사하다."(290)


25 북서쪽 국경─1897~1947년, 영국과 파슈툰족


"아프가니스탄인들보다 영국인들에게 더 골치 아픈 문제는 1896년에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그어진 듀랜드 선Durand Line을 기준으로 인도 제국 쪽에 살고 있는 파슈툰족이었을 것이다. 영국은 1849년에 펀자브를 합병한 후 이 지역을 통제했지만, 다음 세기동안 매우 독립적이고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이 부족을 완전히 제압할 수는 없었다." "영국이 파슈툰족을 상대로 싸운 전쟁은 1947년에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10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반란군은 지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교착상태는 정부에게 유리하다. 영국은 인도의 통치권을 유지하는 한편 소수의 영국 지원병들로 하여금 주로 인도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감독하게 함으로써 파슈툰족을 처리 가능한 사소한 골칫거리 정도로 만들었다. 부족민의 신뢰를 얻은 로버트 워버튼 대령 같은 지식이 풍부한 관료들도 문제를 관리 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291, 296-7)


26 문명화 사명─1912~1925년, 모로코의 리요테


"1899년, 인구가 2억 5,000만 명이었던 인도에는 영국군이 겨우 6만 8,000명이 주둔해 있었고, 인구가 4,100만 명인 아프리카를 포함한 나머지 대영제국 식민지에는 영국군 5만 1,000명이 주둔해 있었다. 19세기 유럽인들은 고대 로마인과 마찬가지로 원주민의 반란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대응하면서 그들의 통치는 묵인해주는 호의적인 조치를 취했다. '민심' 또는 '인본주의'에 기반한 대반란전 학파로 불리게 된 이 정책의 위대한 이론가는 프랑스 원수 루이 위베르 곤잘브 리요테였다." "그는 〈군사 점령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행군하는 점령군에 의해 이루어진다〉 고 말했다. 점령군은 〈파괴를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그 대신 시장과 학교를 건설하고 〈주민의 자발적인 항복〉을 받아내기 위한 다른 프로젝트들을 계획하는 데 주력하는 장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는 이 임무가 본국의 부대가 적에 대해 수행하는 일반적인 전투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주장했다."(298, 302)


27 보어인 코만도─1899~1902년,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게릴라와 영국군


"다른 많은 노련한 게릴라와 마찬가지로 보어인은 기동의 대가였다. 종종 영국군은 보어군을 잡으려다가 허공에 헛주먹질만 날리곤 했다. 답은 보어군이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방법은 국내 통행권 발급(러시아 차르와 구소련 인민위원회가 모두 선호한 방법)부터 (인디언 전쟁에서 미군이 자주 했던) 조랑말 무리 학살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흑인과 보어군 탈영병은 영국의 대반란전 수행 부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적의 위치를 즉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0년 전 시에라 마드레 산맥을 뚫고 제로니모를 추격할 때 거추장스런 치중대 없이 작전하는 소규모 분견대의 유용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었다. 보어 전쟁에서 가장 성공한 영국군 지휘관들도 '보어 형제'처럼 성가신 치중대 없이 초원을 누비는 경기병 부대를 이끌고 싸웠다. 그들은 대大부대보다 훨씬 더 많은 포로를 잡았다."(325-8)


28 제국주의의 전성기─제국주의는 왜 자기파괴의 씨앗을 퍼뜨렸는가?


"보어 전쟁과 필리핀 전쟁에서 반란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두 전쟁으로 인해 제국주의는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과거의 소규모 분쟁과 비교해 전사자가 늘었고, 얼마 되지 않던 직업군인의 수마저 줄었을 뿐 아니라 중산층과 상류층의 전시 자원입대자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과거에 '원주민'의 저항을 경멸했을지도 모르는 군인들이 게릴라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파괴의 씨앗을 퍼뜨렸다. 서구 행정가들은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서구 교리를 널리 퍼뜨리는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본래 의도와는 다르게 1920년대부터 그들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을 자극했다. 서양인들은 사상뿐 아니라 무기도 전파했다. 유럽인들은 TNT부터 AK-47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은 무기를 만들어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20세기의 반란세력이 이전의 반란세력들보다 훨씬 더 잘 무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333-5)


제4부 폭탄 투척자들─국제 테러리즘의 태동


29 암살 자객─1090~1256년, 근대 이전 가장 성공적인 테러 집단 아사신


"19세기 중반 대중매체의 확산으로 테러리스트는 불과 몇 번의 폭력행위로 엄청나게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입소문을 통해 뉴스가 전파되던 시대에는 도저히 달성하기 어려운 효과였다." "학교와 대학의 확산은 테러리스트들이 신입 단원들을 모집하고, 독재국가로 남아 있는 러시아 같은 나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더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수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 세계 대학은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무정부주의, 민족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등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의 배양 접시petri dish 역할을 했다." "비교적 성공적인 19세기, 20세기 초반의 테러 단체로는 쿠 클럭스 클랜(KKK단)부터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제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과 일본에서 나타난 군국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심지어는 러시아 혁명도 암살과 '몰수'로 로마노프 왕조를 무너뜨리지는 못했지만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국가 전복에 기여했다."(346-7)


30 존 브라운, 흑인 노예들의 모세─1856~1859년, 미국 남북전쟁을 일으킨 테러리스트


"존 브라운은 게릴라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남부에 군사적 위협을 조금이라도 가할 수 있을 만한 병력을 보유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자신의 위업과 발언이 신문 전면에 실리게 만든 최초의 테러리스트였다. 그는 사후에 더 큰 명성을 얻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성경 속의 선지자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브라운의 감동적인 법정 연설(1859년 12월 2일 교수형 집행)로 북부에서는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그는 다음과 같은 화려한 표현으로 법정 연설을 마무리했다. 〈자, 정의의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나의 목숨을 빼앗고, 내 피를 내 아이들의 피와 사악하고 잔인하며 불공정한 법률로 인권이 무시되고 있는 이 노예국가에서 살아가는 수백만 명의 피와 더 섞어야 한다고 판단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말하겠소.〉 당시 아직 노예제도 폐지론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조차도 정당한 명분만이 그러한 자기 희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58)


31 재건의 파괴─1866~1876년, 해방노예의 인권을 유린한 테러 집단 KKK단과의 전쟁


"인종차별주의자들은 후대가 〈서사전battle of the narrative〉이라고 부르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재건을 방해하는 데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남북전쟁 이후의 진정한 희생자는 해방노예가 아니라 전 노예 소유주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림으로써 서사전에서 성공했다. 이는 『국가의 탄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유명한 책과 영화에서 구체화되었는데, 이미 1870년대에는 남부뿐만 아니라 북부에서도 같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KKK나 이후에 나타난 조직들이 연방 정부를 전복하거나 심지어 연방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훨씬 더 작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연방군과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것은 결국 백인이 이끄는 연방 정부가 그들의 요구를 쉽게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북부인들은 연방 탈퇴에 대해서는 죽을 때까지 맞서 싸울 용의가 있었지만,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370)


32 행위를 통한 선전─1880년경~1939년경,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


"무정부주의자들은 분열되어 있었지만 외견상 매우 강력해 보였기 때문에 많은 나라가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과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된 해인 1881년 《뉴욕 타임스》가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은 억압적인 조치로 대응했다." "러시아 비밀경찰은 프랑스 정부의 동의를 얻어 파리에서 대규모 작전을 수립했고, 이탈리아는 전 세계의 이탈리아 출신 무정부주의자들을 추적하기 위해 형사들을 파견했다. 이러한 조치는 1923년 국제형사경찰기구인 인터폴Interpol의 설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카메라 덕분에 대중매체는 테러리스트의 테러 사진을 게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가해자인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목적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으며, 경찰은 용의자를 촬영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대에 '머그샷mug shot', 지문감식, 법의학 연구소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테러리스트들은 임무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383-4)


33 차르 암살 시도─1879~1881년경, '인민의 의지파' 허무주의자들의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인민의 의지파Narodnaya Volya' 집행위원들은 모두 30세 미만의 지식인으로, 주로 중산층이나 하급 귀족 출신이었다. 문맹률이 높았던 당시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이들 대부분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이반 투르게네프가 1862년에 쓴 소설 『아버지와 아들』에서 대중화된 용어인 허무주의자Nihilist로 알려졌지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행동강령agenda에 언급되어 있듯이 '포퓰리스트-사회주의자'였다. 국가를 파괴하고자 했던 무정부주의자와 달리 그들은 국가의 통제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어느 역사가는 허무주의자들이 〈사람들이 동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농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정확하면서도 신랄하게 썼다. 그녀와 다른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 많은 인화물질이 축적되어 있어서 작은 불꽃으로도 쉽게 타올라 결국에는 거대한 화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황제이자 독재자인 차르 암살보다 더 좋은 불꽃은 없었다."(386-7)


# 1881년 3월 1일 일곱 번째 시도 만에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성공


34 통제 불가능한 폭발─1902~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구체제(1897~1917년) 하의 20년 동안 테러 공격 횟수는 엄청났다. 러시아 제국 전역에서 1만 7,000명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했다고 추정되며, 대부분의 테러 공격은 1905-1910년에 발생했다. 차르의 처남은 〈수많은 총독들이 혁명가들에게 암살되었다. 총독으로 임명되는 것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라고 썼다." "볼셰비키 독재 정권 하에서 스탈린은 젊었을 때 캅카스에서 도적으로 활동하며 배운 방법을 훨씬 더 큰 규모로 적용하여 소련 전체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차르 정권이 권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 '마지막 처리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소수의 폭탄 투척자들이 무너뜨릴 수 없는 더욱 강력한 경찰국가를 만들었다. 이처럼 반反차르 테러리스트들은 국가 전복이라는 목표를 즉시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러시아와 세계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401, 404)


35 신페인당과 필러스─1919~1921년, 아일랜드 독립전쟁


"1921년 12월 6일에 체결된 영국-아일랜드 조약에 따라 26개 남부 카운티는 캐나다처럼 대영제국의 자치령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었고 북아일랜드의 6개 카운티는 영국의 일부로 남게 되었다. 북아일랜드가 배제된 것도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다수의 공화주의자들은 아일랜드 의원들이 '조지 5세 폐하'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것에 더 크게 실망했다." "1923년 5월 조약 찬성파가 대승을 거두면서 내전은 끝이 났다. 그들은 영국이 제공한 무기를 포함하여 더 많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여론이 그들의 편이었으며(1923년 선거에서 유권자 중 27.4%만이 조약 반대파 후보를 지지), 영국인보다 더 가혹했기 때문에 승리했다." "여기서 방데의 교훈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대중의 지지를 얻은 국내 정권은 거센 저항에 맞닥뜨린 외국 군대보다 저항 세력을 다루는 데 더 가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국군이 변덕스러운 국제 및 지역 여론에 민감한 선출된 정부의 통제를 따르고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419-21)


36 테러리스트의 마음─죄인인가, 성자인가?


"현대 테러리즘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가 1세기 전에 출현했던 극단주의자들과 얼마나 합치하는지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앨런 크루거는 〈테러리스트는 교육을 잘 받은 중산층 또는 고소득 가정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빈곤이 아니라면 무엇이 테러리즘을 유발하는가? 그는 '시민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의 억압'을 지적하면서 〈비폭력적 항의 수단이 축소되면 불만이 테러 전술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확실히 러시아 차르 시대와 심지어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테러리스트들이 만연한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크루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테러와의 전쟁 또는 반란과의 전쟁에서 정치 개혁이 때로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적인 복지 및 노동법은 프랑스와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테러를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그런 것이 없었던 러시아에서는 훨씬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430-1)


제5부 사이드쇼─제1·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게릴라와 특공대


37 30년 전쟁─1914~1945년, '젊은 보스니아', 돌격대, 그리고 혈맹단


"지그문트 노이만은 1914~1945년 사이의 기간을 '제2차 30년 전쟁'으로 명명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20세기 저강도 분쟁 신봉자들과 실제 적용을 통해서 영향력을 얻은 유명한 교리들이 탄생했다. 그들의 활동은 상당수가 대규모 전쟁의 궁극적인 결과에 미미한 영향을 미친 '사이드쇼'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드쇼들은 불멸의 유산을 남겼다. 그들은 모든 현대 군대의 중요한 한 축인 '특수작전부대'(즉,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게릴라)를 남겼다. 그들은 외부 지원을 받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있어 가장 가혹한 대반란 정책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상당수의 '원주민'을 동원하고 무장시켜 유럽의 아시아 및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강대국들을 숨이 가빠 헐떡이게 만든 근대 30년 전쟁의 결말은 수십 년 동안 게릴라들의 대중적 명성을 새로운 정점으로 치솟게 할 탈식민화 전쟁을 촉발시켰다."(445-6)


# 사이드쇼sideshow: 서커스 등에서 손님을 끌기 위해 따로 보여주는 소규모 공연


38 사막 게릴라전 전문가로 변신한 고고학자─1916~1935년, '아라비아의 로렌스'


"T. E. 로렌스는 종전 후 프랑스군이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군이 팔레스타인, 이라크, 트랜스요르단을 점령한 후 깊은 환멸을 느꼈다." "부분적으로 그의 교묘한 책략 덕분에 파이살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세 주를 병합한 이라크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파이살의 형 압둘라는 또 다른 새로운 국가인 트랜스요르단의 왕이 되었다. 이들의 아버지 후세인은 1924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개국한 이븐 사우드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헤자즈를 통치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시온주의자들의 의제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지 않았던 로렌스는 파이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팔레스타인에 대한 하심가의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은 1922년 승인된 국제연맹의 결의안에 따라 〈유대인의 고향〉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진 영국이 관리하는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따라서 로렌스는 현대 중동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460-1)


39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작전부대의 등장─제2차 세계대전 때 탄생한 특수작전부대


"독일군의 유럽 진격은 적의 복장으로 위장하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브란덴부르크 특공대의 선도로 이루어졌다." "1943년 SS(친위대) 오토 슈코르체니 소령은 이탈리아 산 정상에 있는 산장에 연금된 무솔리니를 구출한 유명한 작전에서 글라이더를 사용했다." "프랑스가 함락되던 1940년 5월 총리직을 맡은 처칠은 육군 코만도와 정부 산하 비밀조직인 특수작전집행부SOE를 창설했다." "영국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장거리사막정찰대, 육군 공수특전단SAS, 팝스키 별동대를 운영했다." "1941년 12월 미국이 참전했을 때, 미국 정부는 영국의 선례에 따라 〈와일드 빌〉 도노반 장군이 지휘하는 전략정보국OSS을 창설해서 정보 수집부터 선전에 이르는 임무를 맡겼다." "미 육군은 1942년에 특공대와 유사한 레인저Rangers를 창설했다. 특공대처럼 레인저는 종종 재래식 공격에서 선봉대 역할을 했다. 소련 역시 많은 파르티잔과 스페츠나츠Spetsnaz를 조직해 독일군 후방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하게 했다."(468-74)


40 윈게이트의 전쟁─1936~1944년, 팔레스타인·아비시니아·버마에서 활약한 '다루기 힘든 군사천재'


"윈게이트는 랑군이 함락된 지 몇 주 후인 1942년 3월 인도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확실히 통제하고 있어서 단기간에 재래식 전력으로 반격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팔레스타인과 아비시니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주민군을 활용할 가망도 없었다. 일부 고산 부족은 영국인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대부분의 버마인들은 과거 자신들을 식민통치한 영국을 위해 싸울 마음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게이트는 일본군이 기드온 부대와 같은 '장거리 침투'부대의 공격에 취약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적 후방에는 신장, 횡격막, 목에 해당하는 무방비상태의 지점과 다른 취약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므로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부대의 목표는 적의 해부학적 구조상 가장 중요하고 부드러운 지점이다〉라고 기록했다. 그러한 군사행동의 핵심은 〈공중으로 전력을 투사하고 무선으로 지휘하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에는 일반적인 전술이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아이디어였다."(488)


# 기드온 부대Gideon Force: 1935년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를 상대로 활약한 비정규부대. 윈게이트는 이 부대명을 고대 이스라엘 전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 친디트Chindits: 1943~1944년 당시 버마 전역에서 활동한 영국군 및 인도군 특수작전부대. 윈게이트가 자신의 '장거리 침투작전' 개념을 실전에 적용하기 위해 창설했다.


41 저항과 협력─1941~1948년, 유고슬라비아 그리고 대게릴라전의 한계


"대반란군, 특히 비자유주의 국가에서 파견한 세력은 무장한 민간인의 저항을 근절하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수단을 사용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한다. 이로 인한 단기적인 영향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 나팔총 전술은 일반적으로 저항을 진압하기보다는 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켜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나중에 일본, 이탈리아, 독일도 알게 되겠지만, 그러한 방법은 희생자가 된 특정 지역이나 국가의 대중이 반격을 도와줄 외부 동맹을 찾을 수 있다면 훨씬 더 비생산적이다." "마크 마조워는 〈유고슬라비아는 유럽에서 파르티잔이 통제권을 장악한 유일한 곳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티토가 교활하고 무자비하며 끈질겼다 하더라도 나치 최고사령부가 유고슬라비아에 자원을 장기간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파르티잔은 아마 무너졌을 것이다." "발칸 반도 이외에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 대부분의 저항운동들은 그저 방해 효과만 있었을 뿐이다."(502, 509)


# 나팔총 전술blunderbuss tactics: 짧은 거리에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명중률이 높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표적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나팔총의 단점에 빗댄 근시안적 전술


42 특수작전부대에 대한 평가─특수작전부대는 효과가 있었는가?


"전쟁 초기의 문제 중 하나는 특수작전을 위한 훈련과 교리, 협조 및 계획이 아직 초기 단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에도 전문적인 부대조차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높았다." "적 후방지역에서 실시되는 특수작전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아마 심리적 충격이었을 것이다. 선전가들에게 특수작전은 그야말로 신나는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한 노다지와도 같았다. 그들은 사실이 어떻든 간에 모든 특수작전이 엄청난 역경을 딛고 승리했다고 묘사했다. 그로 인해 암울한 시대에 서양 대중의 전의는 고양되었고, 자신들의 해방을 도왔다고 믿게 된 점령지 사람들의 자부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양의 관점에서 후자의 결과는 은총이자 저주였다. 대리전을 수행하는 군대는 지원 세력이 항상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때때로 통제 불가능했다. 연합군 특수작전 요원들은 현지 저항세력을 무장시키고 지원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곧 총을 쥐어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514-5)


제6부 제국의 종말


43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세계─축소되어가는 유럽의 영향력


"1945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해외 식민지 전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심했더라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둘 다 본질적으로 파산상태였기 때문이다. 둘 중 어느 나라도 장기간 대반란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었다. 특히 세계 무대에서 이들의 자리를 빼앗은 신흥 초강대국의 적대감을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소련, 그리고 나중에 중국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민족해방운동'에 무기와 훈련, 자금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미국은 서유럽의 재건을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해외 식민지 지배 연장 시도에 거의 동조하지 않았다. 《라이프》지의 편집자들이 1942년에 영국 국민들에게 〈우리는 대영제국을 하나로 묶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직설적으로' 언급했듯이 실제로 미국은 영국에게 인도부터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일련의 식민지들에 대한 통치를 끝내도록 압력을 가했다. 나중에 냉전이 치열해지면서 미국 정부는 입장을 수정했다."(521)


44 붉은 황제의 부상─1921~1949년, 권력을 향한 마오쩌둥의 대장정


"마오쩌둥이 옌안 시기(1937~1947년)에 쓴 가장 유명한 책은 『논지구전論持久戰』이다." "『논지구전』은 태초부터 원시시대 반란군이 사용해온 단순한 치고 빠지기 전술이 아니라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란군 지침서와 마찬가지로 『논지구전』은 여러 곳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게릴라전의 법칙을 설명했다기보다는 어느 한곳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한 것에 불과했다. 중국에서도 소련 '동지들'의 의도적인 지원과 '왜적'─중국인들이 일본인을 무례하게 얕잡아 부르던 호칭─의 의도치 않은 지원이 없었다면 중국 공산당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공산당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사례는 마오쩌둥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외부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강도 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인 중 외부 지원보다 중요한 요인은 없다."(546-9)


45 잘 있거라, 디엔비엔푸여!─1945~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게릴라전 전략가 보응우옌잡


"이론적으로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로 인도차이나에 있는 프랑스 연합군 총병력의 3%만을 잃었기 때문에 전투를 계속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권자의 표심에 의존하는 의회 정부 하에서 국민의 지지 없는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전쟁이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재정적 비용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전체 국방 예산 3분의 1이 소모되었다. 전쟁으로 지친 가난한 프랑스인들에게 디엔비엔푸 전투의 손실은 한계 상황을 의미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를 넘어 프랑스인들에게 심각한 심리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참패는 식민지 전쟁에서 현대 서구 제국이 겪은 최악의 패배로, 〈자신들이 우월한 인종〉이라는 가정 하에 식민지인들을 지배했던 백인들에 대해 '유색인종' 전투원이 열등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허세와 엄포 전략으로 값싸게(국내 여론이 용인하는 유일한 방법)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럽의 민낯이 단번에 드러났다."(576)


46 설득이냐, 강요냐─1954~1962년, 알제리 독립전쟁


"1954년 11월 1일에 시작된 알제리 독립전쟁은 1959년에 이르러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의 공격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프랑스군이 군사적으로는 거의 이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실용주의자였던 드골 대통령은 국민 대부분의 희망에 반하여 알제리 반란을 영구적으로 진압하는 것은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랑스가 전쟁 폐허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국제 무대에서 주요국으로 떠오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기에 전쟁은 귀중한 외교적 자본을 침식시키고 있었다. 알제리 독립은 유엔뿐만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서도 큰 지지를 얻고 있었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전선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를 통해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데는 성공했고, 마침내 1962년 7월 3일 공식적인 독립을 쟁취했다." "알제리 전쟁은 1820년대 그리스 혁명 이후로 전장에서 패한 게릴라 조직이 '홍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590-5)


# 피에 누아르pieds noir: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이주하여 살던 프랑스인과 그 2세들


47 사람과 계획─1948~1960년, 브릭스, 템플러, 그리고 말라야 비상사태


"1948년 6월 27일 영국령 말라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게릴라 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은 말라야에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말라야 고등판무관 겸 작전책임자로 임명된 템플러는 동적 전쟁보다는 정치적 전쟁에 치중함으로써 대반란전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다. 그는 〈무력으로 해결이 가능한 것은 문제의 25%에 불과하다. 나머지 75%는 이 나라 사람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해답은 정글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데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얻기 위해서는 불법거주자를 재정착시키는 것과 같은 강압적인 조치도 실시해야 했다. 친디트 부대 출신 로버트 톰슨은 전쟁은 인기 경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는 〈농민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정부가 전쟁에서 진정 승리하고자 하는가?'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군을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603-5)


48 영국의 독특한 대반란전 접근방식─영국이 대반란전에서 성공한 이유


"20세기 이전과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식민국들은 일반적으로 두둑한 금전적 보상을 받아야 협력하는 소수 사회지도층을 제외한 '현지 주민'은 거의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충분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새로운 형태의 언론 매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확산으로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했다." "군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치적 차원에서 동시에 대반란전을 벌어야 한다는 점은 탈식민화 시대의 영원한 교훈 중 하나이며, 초기 제국주의의 '소규모 전쟁' 시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반란군에게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었다. 마오쩌둥과 그 뒤를 이은 호찌민은 선사시대부터 일반적이었던 비정치적 습격 전술이 아니라, 군사적 조치와 결합된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들이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반란 지도자 2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614-5)


제7부 래디컬 시크─낭만에 사로잡힌 좌파 혁명가들


49 동전의 양면─1960~1970년대 게릴라 신비주의


"게릴라전과 테러의 발생률은 유럽 제국의 붕괴와 함께 감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쿠바의 카스트로가 집권한 1959년부터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가 집권한 1979년까지는 좌파 반란의 황금기였다. 오만, 아덴, 모잠비크, 앙골라, 기니비사우에서 몇 차례의 식민 전쟁이 발생했고, 식민지 이후 국가 형태를 결정하는 내전이 벌어졌던 콩고, 동티모르,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지역과 같은 곳에서 수많은 민족 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충돌의 주 요인은 사회주의 이념이었으며, 바스크 ETA(바스크 조국과 자유), 쿠르드 PKK(쿠르드 노동자당),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심지어는 미국 흑표범당Black Panthers과 같이 강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적 분리주의가 혼합된 경우가 많았다. 자신을 제2의 마오쩌둥, 호찌민, 피델 카스트로 또는 체 게바라로 자처한 급진파들은 AK-47을 들고 시골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수행하거나 또는 대부분의 경우 이 두 가지를 전부 수행했다."(619-20)


50 조용한 미국인─1945~1954년, 대반란전 해결사 에드워드 랜스데일과 필리핀 후크발라합 반란


"대반란전 해결사인 에드워드 랜스데일은 미국 육군 및 공군 장교로 근무했으며, 전략정보국(OSS)과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서 여러 가지 비밀작전을 수행했다. 비밀작전과 심리전의 선구자였던 그는 1950년대 초 필리핀에서 후크발라합 반란을 진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랜스데일이 필리핀에서 만난 가장 중요한 친구는 라몬 막사이사이다. 두 사람이 함께 펼친 민사작전의 핵심은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였다. 막사이사이와 랜스데일은 후크발라합 반군이 1949년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부정투표로 실망한 대중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정투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그들은 1951년 의회 선거와 1953년 대통령 선거에 필리핀군을 투입했다. 대선의 승자는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은 라몬 막사이사이였다." "〈평화적이고 깨끗한〉 선거는 사람들이 〈무장투쟁의 즉각적인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했던 후크발라합 반군에게는 최후의 일격과도 같았다."(626-31)


51 남베트남 건국─1954~1956년, 랜스데일과 응오딘지엠


"CIA의 사이공 군사 업무 책임자로 임명된 랜스데일 대령의 임무는 '자유베트남'의 존속을 돕는 것이었다. 랜스데일은 남베트남 정치인 응오딘지엠에게 미국 혁명의 원리에 대해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랜스데일은 〈우리는 점점 깊이 신뢰하고 서로에게 솔직한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응오딘지엠이 나의 베트남 친구들을 투옥하거나 추방했기 때문에 우리의 우정이 '맹목적인 우정'은 아니었다〉라고 덧붙였다." "몇 년 후 그는 응오딘지엠의 후계자들은 〈아주 이기적이고 그저그런 평범한 사람들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간 나라에서 권력을 놓고 다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응오딘지엠이 1963년 미국의 묵인 하에 축출되어 살해된 후 남베트남에 발생한 '정치 및 안보 공백'을 돌이켜볼 때 이는 앞을 내다본 정확한 예측이었다. 훗날 CIA 국장 윌리엄 콜비는 응오딘지엠의 실각을 〈베트남에서 미국이 저지른 가장 큰 (아마도 최악의) 실수〉라고 보았다."(634, 639-40)


52 또 다른 전쟁─1960~1973년, 베트남 전쟁에서 화력 투입만이 능사가 아니었던 이유


"랜스데일이 떠난 후 어떠한 미국 대표도 까다로운 응오딘지엠 대통령과 그런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엘살바도르의 호세 나폴레옹 두아르테, 아프가니스탄의 하미드 카르자이, 이라크의 누리 알 말리키를 상대해야 하는 미래 세대의 미국 관료들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표면상으로만 주권을 가진 동맹국을 외부 세력이 통제하지 않고 지원하는 대반란전에서 흔히 겪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미군이 배우지 못한 과거 게릴라전 교훈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베트남 군사지원사령부 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은 반란에 대한 해결책으로 '화력'이라는 한 단어를 제시했다." "대반란전은 〈또 다른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고 미국 자원의 95%를 소비하는 탐색격멸작전의 부차적인 보조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남베트남에서 무분별하게 진행된 파괴적인 탐색격멸 임무는 상당한 노력을 투입하여 얻은 반군 캠페인의 이득을 상쇄하는 역효과를 낳았다."(646-51)


53 7·26운동─1952~1959년, 카스트로의 게릴라 혁명군


"카스트로는 1895년 오리엔테 상륙 직후 《뉴욕 헤럴드》와의 인터뷰를 주선한 호세 마르티를 의식적으로 따라하고 있었고 에드거 스노우를 슬기롭게 이용했던 마오쩌둥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했다. 그의 대필자는 사설 기자 허버트 L. 매튜스였다." "순진한 매튜스는 카스트로의 이야기를 《뉴욕타임스》 1면에 그대로 옮겼다. 바티스타가 일시적으로 검열을 해제한 틈을 타서 카스트로의 이야기는 쿠바 신문에 그대로 실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카스트로의 살해 소식을 한 번 이상 들었던 쿠바인들은 이제 〈이상, 용기, 뛰어난 리더십의 화신 '미스터 카스트로가 이미 시에라 마에스트라를 장악했으며 바티스타 장군이 카스트로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튜스의 주장은 과장되었지만, 결국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었다. 이는 현대 게릴라전에서 '정보작전'이 아주 중요하며 그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최근의 사례이다."(673-4)


54 비현실적인 혁명거점이론(FOCO)─1965~1967년, 체 게바라의 돈키호테적인 모험


"맛있는 음식과 술을 좋아하고 거물 노릇을 하는 카스트로와는 달리 체 게바라는 지나치게 금욕적이어서 권력이나 특권에는 관심이 없었다. 체 게바라는 이상주의자였거나 '성 칼'을 숭배하고 자신을 〈북아메리카 방식으로 로마제국과 싸우는〉 초기 기독교인들에 비유한 광신자였다." "1960년에 그는 좌파 혁명가들을 위한 교범인 『게릴라전』을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혁명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했다. 〈반란으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거점이론은 낭만적이고 영감을 주는 것이었지만, 어느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도시 지하조직과 바티스타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대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무시한 '상당히 왜곡된 쿠바 사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거점이론이 그것의 발상지인 쿠바에서조차 효과가 없었다면, 다른 곳에서 어떤 효과가 있었겠는가? 거점이론은 결국 최고의 혁명투사를 묘비 없는 무덤으로 이끄는 신기루나 마찬가지였다."(682-3)


# 성 칼Saint Karl: 칼 마르크스를 말한다.


# 거점이론foco theory: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풍미했던 시골 게릴라 전략.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쿠바 혁명 때 사용한 전략을 발전시킨 것으로 주민들과의 친목, 자원봉사 등을 통해 거점을 만든다는 전략이다.


55 1970년대 국제 테러 사건─엔테베 특공작전과 1970년대 테러 단체


"악시옹 디렉트(프랑스), 바더-마인호프단(독일), 붉은여단(이탈리아), 공산주의전투조직(벨기에), 일본 적군파, 급진파 IRA, 바스크 ETA, 그리그 혁명조직 11월 17일, 퀘백해방전선, 흑표범당, 웨더맨, 공생해방군 등은 동시대 라틴아메리카 테러 조직이나 러시아 허무주의 테러 조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대학생이나 대학중퇴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1960년대의 가장 급진적인 단원들은 평화적인 시위, 건물 점거, 징집 영장 소각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가 체계'에 대한 분노로(사실대로 말하자면 모험과 반란에 대한 호기심으로) 진압 경찰에 대한 공격, 유리창 깨기, 그리고 일부의 경우에는 은행강도, 살인, 인질극을 저질렀다. 유럽의 수많은 테러 조직을 지원한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 고위인사 마르쿠스 볼프는 이들을 〈주로 중상류층 출신의 버릇없고 제정신이 아닌 아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들은 폭력적인 혁명이 '아메리카Amerikkka' 같은 부패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유일한 방법이라고 규정했다."(704-5)


56 아라파트의 오디세이─아라파트가 테러로 달성한 것과 달성하지 못한 것


"아라파트는 적어도 무장투쟁 초기에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유대인도 끊임없이 공격하면 팔레스타인에게 주권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알제리와 베트남을 모두 방문했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과 베트콩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때 그의 대리인이었던 아부 이야드는 이렇게 썼다. 〈파타 창설 5년 전에 시작된 알제리의 게릴라전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우리가 꿈꾸던 성공을 상징했다.〉 이들은 중요한 차이점을 놓치고 있었다. 프랑스와 미국은 국가적으로 큰 손해를 보지 않고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에서 일어나는 분쟁을 포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항복은 또 다른 홀로코스트와 다름없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군이 전멸하지 않는 한 고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보잘것없는 군사력으로 맞서기에는 어림도 없었다."(729)


57 좌파 반란의 쇠퇴에도 사라지지 않는 게릴라전과 테러─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테러 단체의 종말


"1980년대에 이르자 마르크스주의 통치자들의 눈에도 마르크스주의가 파탄이 났음이 명백해 보였다." "쿠바나 북한 같이 아주 당당하게 공산주의 국가로 남은 몇 안 되는 나라들은 경제가 엉망이 되었다. 골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이렇게 가난하고 억압된 나라에서 미래가 있으며 그들의 비참한 사례를 모방하기 위해 무장운동을 개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소련과 중국의 구 정권 몰락은 반군 단체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보조금, 무기, 훈련과 같은 귀중한 자원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IRA 같은 민족주의 운동은 외부 지원의 감소로 인해 어려움을 겪으면서 반란에 대한 외부 원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좌파의 반란은 쇠퇴하고 있었지만 게릴라전과 테러리즘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뿌리 깊은 인종과 종교에 대한 불만을 품은 새로운 무장 단체로서 기존과 달리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방식을 취했다."(734-5)


제8부 신의 살인자들─급진주의 이슬람의 대두


58 세계를 놀라게 한 50일─1979년 11월 4일~12월 24일, 테헤란, 메카, 이슬라마바드, 카불


"세계를 뒤흔든 50일은 1979년 11월 4일에 시작되었다. 약한 비가 내리던 그날 아침, 시위대는 테헤란의 타크테 잠쉬드 거리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건물의 벽돌담을 오르기 시작했다." "붙잡힌 52명의 인질은 카터가 퇴임하고 로널드 레이건이 취임한 1981년 1월 20일(444일만)에야 비로소 석방되었다." "1979년 11월 20일 새벽,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주제를 전복시킬 일으키려는 수백명의 무장세력이 관 안에 넣어 밀반입한 소총과 자동화기로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이슬람에서 가장 성스러운 신전)를 점령했다." "11월 21일, 주헤이만이 그랜드 모스크를 점령한 지 하루 만에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의 미국 대산관 앞에 집결한 군중은 〈미국 개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몇 주 전 테헤란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위대는 비교적 큰 저항 없이 대사관을 점거했다. 반란의 중심이 좌익운동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로 전환된 것이다."(740-3)


59 러시아의 베트남─1980~1989년, 붉은 군대 대 무자헤딘 게릴라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교과서적인 급습을 시작했을 때 지하디스트 반란군이 그렇게 강력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반란군은 영국군과 맞서 싸웠던 19세기의 조상들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점을 누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 무기를 공급받고 조직원을 훈련시킬 수 있는 안전한 기지를 확보한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보국은 페샤와르 국경 지역 마을에 본부가 있는 7개 주요 저항세력에게 무기를 제공하고 훈련을 지원했다. 페샤와르 국경 마을은 〈엄청나게 큰 지하드 행정 기지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파키스탄 국경 지역에서 총은 트럭, 말, 노새 또는 무자헤딘의 등에 실려 언론인들이 〈지하드 트레일jihad trail〉이라고 부르는 길을 따라 아프가니스탄으로 밀반입되었다. 소련군은 이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지만, 미군이 호찌민 루트 차단 작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운이 없었다. 게릴라 전투원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산길이 너무 많았다."(745-7, 759)


60 A팀─1982~2006년, 정규전 전술과 비정규전 전술을 결합한 하이브리드전의 최전선에 선 레바논 헤즈볼라


"코란이 자살과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명백하게 금지하고 있음에도 헤즈볼라는 동일한 순교 정신을 테러 작전에 도입했다. 헤즈볼라의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1998년에 〈우리 모두는 노소를 막론하고 국토를 침략하고 점령한 유대인의 몸을 찢어버리기 위해 기쁘게 내 한 몸을 날려버릴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헤즈볼라는 〈조직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무장은 더 잘 되어 있지만, '겁 많고 비겁한' 이스라엘인과 같은 더 유약한 적을 정복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이후 다른 많은 이슬람 단체가 인용했다. 그러나 많은 후발 조직과 달리 헤즈볼라는 자살공격을 군사 목표로 제한했다." "이러한 공격은 단순히 잔인함이나 살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미국 및 기타 서방의 영향력을 레바논에서 몰아내고 이란과 그 동맹국들이 우세한 위치에 서고자 고안한 계산된 전략의 일부였는데,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773-4)


61 국제 테러리스트─1988~2011년,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


"자신보다 강력한 적과 싸우기 위해 비대칭 수단을 사용하겠다는 빈 라덴의 결심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우리가 본 것처럼 국가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충동이었다. 빈 라덴의 종교적 광신주의는 비정규 전사들 사이에서는 드문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테러 집단은 유대교 광신도와 무슬림 아사신이었다. 그러나 과거 게릴라 및 테러리스트 조직은 대부분 공격 대상을 인접국으로 제한했으며 파멸적인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폭력의 강도를 조절했다. 빈 라덴은 더 원대한 야망을 갖고 있었다. 전 세계인이 〈알라의 가르침을 최고로 떠받들게 하고〉 중동 전역에 있는 미국의 동맹국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주곡으로서 미국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최초로 진정한 세계적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정교한 최신 기술과 조직 관리 기법을 이용하는 천재성을 보여주었으며, 자신처럼 종교적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최신 기술에 정통하고 현대 문물에 익숙한 많은 동지들을 끌어모았다."(790-1)


62 자르카위와 이라크 알카에다의 자살폭탄 테러─2003년 이후 이라크 알카에다


"이라크 알카에다의 설립자는 아부 무사브 알-자르카위이다. 그의 가장 파괴적인 행동은 이라크에서 벌인 자동차 자살폭탄 테러였다. 2003~2008년에 이라크에서는 역사상 그 어느 나라에서보다 더 많은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피터 버겐은 〈2008년 4월까지 자살폭탄 테러로 이라크인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라고 기록했다." "2006년 9월 라마디 인근 부족장들이 미 지상군 및 미 해병대와 협력하여 이라크 알카에다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은 반전되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수니파 교도들의 반알카에다 세력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부족들 사이에는 불만이 있었지만, 이라크 알카에다는 항상 불만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또한 당시 미국 국민 대다수가 원했던 대로 2007년에 미군이 철수했다면 이 반란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2006년 말,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2만 명을 추가 파병하기로 결정했고, 그 수는 최종적으로 3만 명으로 늘었다."(810-5)


63 대반란전의 재발견─2007~2008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와 증파


"퍼트레이어스가 주도해서 작성한 『대반란전 야전교범』은 다음과 같은 대반란전의 기본원칙을 가장 먼저 제시했다. 〈대반란전COIN 작전의 주요 목표는 군사적 수단과 비군사적 수단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효과적인 거버넌스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적절한 수준의 무력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5명의 반란군을 제거하면서 부수적 피해로 인해 반란군 50명이 늘어난다면 이 작전은 비생산적인 작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 『대반란전 야전교범』은 정보작전, 정치적 행동,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반란군의 최고 무기 중 하나는 총을 쏘지 않는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또한 〈때로는 아군 부대를 더 많이 보호하면 할수록 덜 안전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는 거대한 방폭벽 뒤에 은폐한 채 주민과의 접촉을 삼가면서 기지 밖으로 나갈 때마다 급조폭발물IED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던 이라크에 있는 미군 부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825)


64 '보이지 않는 군대'와의 싸움은 세계화된 21세기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의 현실─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 세계 이슬람 반군과의 전쟁


"알카에다나 기타 테러리스트 조직들이 중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사마 빈 라덴이 모든 무슬림의 '종교적 의무'라고 규정한 핵무기, 화학무기 또는 생물학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다. 테러리스트 조직들은 세상에 종말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대량살상무기 없이도 알카에다가 9·11테러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게 만든 것처럼 국가를 새로운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을 레바논에 개입시켜 국가 간 분쟁을 일으켰으며, 파키스탄에 기반을 둔 지하드 네트워크는 인도 영토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전쟁을 촉발시킬 뻔했다. 테러 행위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테러리스트가 핵보유국 간의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보이지 않는 군대invisible army'와의 싸움은 이제 세계화된 21세기에 피할 수 없는 전쟁의 현실이 되었다."(835-7)


에필로그─2011년 10월 23일, 마자르 회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상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거의 유사한 전술, 기술 및 절차(무력과 우호의 병존)를 적용하여 대반란전을 수행하고 있으며 똑같은 좌절과 똑같은 성공의 기쁨을 경험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지난 5천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라크 알카에다와 탈레반은 아카드 및 기타 메소포타미아 국가들을 괴롭힌 페르시아 고원 부족의 정신적 후계자들이었고, 브루나이와 슈미트는 아카드의 사르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반란전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었다. 양측은 과거로부터 반란과 대반란전에 대처하는 방법─정부를 전복시키는 방법과 정부 전복을 막는 방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워왔다. 이러한 교훈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중요한 교훈으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끊임없이 거듭되어온 불변의 상수와도 같은 게릴라전이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든 필연적으로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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