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길 - 프랑스 사회사상, 그 절망의 시대: 1930~1960 개마고원 서구 지성사 3부작 2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병익 옮김 / 개마고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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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 막다른 길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 그 자체의 상처─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는 젊음의 손실 때문에 그 어느 곳보다도 상처가 컸다─말고도, 4년동안의 유혈은 프랑스인의 전통적인 가치관에 폭넓은 회의를 키웠다. 그것은 서서히 다가왔다. 양심에 대한 프랑스인의 사회적·정치적 검증이 1930년대로 미루어진 행위의 지체 효과가 문화 영역에도 뚜렷이 나타났다. 봄날처럼 화사한 가을의 영광인 듯 프랑스인과 그 바깥 사람들을 현혹시킨 우월감의 이미지들이 이미 사방에서 위협받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환상의 첫 광휘는 쏜살같이 지나갔다. 루르지역 점령의 불투명한 결과와 1924년 좌파의 총선 승리는 프랑스가 강대국 반열로부터 밀려난 것과 국민적 에너지가 내향화하는 것의 첫 표징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정치 생활의 측면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다음 5년은 본질적으로 여전히 자기 만족과 자부심이 남아있는 시기였다. 프랑스인을 전래의 안정으로부터 뒤흔들어놓은 것은 대공황과 히틀러의 출현이었다."(19)


"프랑스가 폭넓은 지적 교류에서 밀려나게 된 것은 훨씬 더 오래전, 그러니까 1930년대 초부터일 것이다. 고유의 토착적인 가치들을 향한 프랑스인의 몰두가 성마른 방어적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문화적 자부심이야말로 군사 점령이라는 오랜 시련을 거치면서도 그들을 지탱해준 보이지 않은 힘 가운데 하나였다. 1940년 이전에는 프랑스인들이 망명할 이유가 없었다. 그 이후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게다가 자진 망명이란 생각 전반에 대해서는 179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 깊은 편견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인들은 국내에 남았다. 다만 마리탱과 생-텍쥐페리 같은 몇몇 지도적 작가들만이 미국에서 얼마 동안 살았다. 그래서 프랑스인들은 영국과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거대한 사상의 교류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그들 자신의 전통─그들이 언제나 중심 전통이었다고 생각해온─이 갑작스레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었던 것이다."(24-6)


"뒤르켐의 사고 속에 칸트(도덕)와 콩트(실증과학)가 결합했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지적인 문제─그 스스로 몰두하고 제자들에게 권고하는 경험론적 작업을,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여러 사상들의 추상적 도식화 노력에 접합시키려는 소망에 모순이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뒤르켐 그리고 그와 비슷한 사람들은 프랑스 제3공화국에 뜨거운 충성심을 키웠는데 이 공화국은 그들의 생각으로는 자유·민주주의·관용 그리고 인간적 행위의 위대한 추상들이 이룬 구현체였다." "그러나 제3공화국의 가치들과의 밀접한 관련은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희미해졌고 또한 그 꽃도 사라졌다." "적어도, 뒤르켐과 그의 상속자들의 가치체계는 이제 도덕적으로 공허하게 보였다. 소르본의 저명인사들이 외부 사람들에게 얼마나 거드름을 피우며 얼빠져 보였는지를 음미하지 않으면,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사르트르 같은 젊은 철학자가 프랑스의 기성 지식층에 대해 가진 분노─구토감─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30-2)


2장 역사가와 사회질서


"독일이나 영미 세계에서는 최근까지 미슐레를 전혀 위대한 역사가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너무도 조심성이 없었고 너무도 '문학적'이었으며─스타일과 정신에서 너무도 낭만적이었다." "프랑스인에게, 특히 프랑스의 전문 사학자들에게 미슐레를 재발굴하려는 자극은 강렬했다. 프랑스 민중에게 숨어 있는 거대한 힘에 가장 뛰어난 찬사의 글을 바친 이 저자를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그들은 이미 확립된 독일적 방법론의 추종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페브르는 그가 미슐레를 스승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당신은 미슐레를 알고 있습니까?〉라고 그는 그 특유의 활력과 아이러니로 독자들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우리는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가 원하는 바는 〈또 하나의 미슐레─그러나 보다 강한 비판 정신을 갖고 보다 더 잘 갖춘 미슐레 (···) 그처럼 직감적이되 그러나 창조적 천재성 때문에 무절제해지지 않은 미슐레〉가 되는 것이었다."(40-1)


"1929년, 페브르와 블로크는 『연보』를 창간하여 경제와 사회, 지리학과 심리학 모두를 하나로 묶는 폭넓은 기반의 역사학을 위한 광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대를 지나면서 페브르는 이제 경제·사회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완전히 '통일'된, 수식어 없는 역사만이─다시 말해 〈다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과 다양한 창조들에 대한 과학적 방법으로 수행된 연구〉만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연구는 성격상 분명히 '사회적'이다. 페브르는 정치·외교의 연대사가年代史家들이 마치 피지배자들의 보다 깊고 보다 장구한 욕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통치자들의 고급 정책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는 것에 대해 공격해왔다. 그는 사상사가들에 대해서도 거의 비슷할 정도로 신랄했다. 이들 역시 추상적 개념들이 발생하게 된 정서적 분위기는 참조하지 않고 진공 속에서 그것들을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환경' '심성' 분위기'─이것들은 블로크와 페브르가 스스로의 과제를 수행하며 내놓은 용어들이었다."(63)


"『역사가의 재능』은 블로크가 이미 그의 주요 저서에 적용했던 여러 절차들─특히 『프랑스 농촌사의 근본 성격』에서 발전된, 현재의 관찰을 과거에 외삽外揷하는 방법, 그리고 『기적의 군주들』에서처럼 분명한 허위 뒤에 숨은 심리적 실체의 탐색─을 요약했다. 이 같은 구체적 사항들에 대해 블로크의 이 소책자는 엄밀하고 명쾌하다. 또한 역사가에 대한 요구들도 아주 또렷하다. 〈그처럼 많은 역사가들의 잇따른 태도에는 매우 기이한 모순이 있다. 어떤 인간행위가 실제로 일어났는가 안 일어났는가를 확인하는 문제일 때에는 그들은 얼마든지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행위가 있게 된 이유로 넘어가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의 반대쪽보다 더도 덜도 아닌 진실성밖에 없는 상투적인 심리학의 한마디 격언에 근거한 가장 단순한 외형만으로도 만족해버린다.〉" "(그러나 저자의 때이른 죽음으로 인해) 『역사가의 재능』은 역사 설명 작업에 부딪히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난해한 암시만 남겨놓았다."(71-2)


"페브르의 콜레주 드 프랑스 후계자는 16세기의 지중해 연안국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그에게서 걸작이라고 평가받은 브로델이었다." "이 방대한 부피의 연구서에 서술된 지리와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신선한 관찰은 매혹적이리만큼 정밀하고 생생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한 초점이 없었다. 이 저자는 그가 〈정열적으로 사랑한〉 지역에 대한 20년에 걸친 연구과정에서 얻은 갖가지 잡다한 지식을 마구 쓸어넣었다." "브로델의 저서에는 중요한 세 부분─지리·사회 그리고 '사건'을 연속적으로 처리하는─이 결코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논조는 통계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를 잘못 오가며 불안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페브르와 브로델을 지침으로 삼은 젊은 역사학자들이 이루어놓은 연구들의 상당수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었다. 양적으로 엄청나게 길게 늘어난 규모와 낭만적 비상을 이루는 풍요한 운문韻文과의 상호 교차─이것이 새로운 세대가 페브르의 방법을 이해한 방식이었다."(77-8)


"크로체와 베버는, 페브르도 그랬지만, 위대한 역사학 저술은 필연적으로 역사가 자신의 편에서 이루어진 열정적 참여로부터 탄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덧붙여 역사가는 반대편 또는 경쟁자편의 지속적인 참여 속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충분한 '객관성'과 분별력을 갖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음미할 때에만 단순한 파쟁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기상대화' 과정을 블로크와 페브르는 결코 실천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닥친 삶의 선택은 절대로 불투명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너무나 뚜렷한 양심을 갖고 있었다." "블로크와 페브르는 19세기에 파편화한 인간의 연구에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려 했고─부분적으로 성공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념형의 관계 설명에 대한 이론에 맞서서 의미의 핵심을 모색했다. 그들은 역사를 〈소급적 문화인류학〉으로 재정의하고, 시간과 공간에서 다른 이웃과 구별되는, 어떤 사회의 사고와 감정이 지닌 표현과 관용구, 양식에 강조점을 두었다."(81-2)


3장 가톨릭과 인간 조건


"지적 엘리트들의 종교적 관심으로의 회귀는 고립적이며 비개성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에서만 의례적인 것이었다. 서구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가톨리시즘의─혹은 기독교 전반의─처지란 19세기 후반과 별다름 없이 지적인 열정의 주류에서 떨어진 변두리에 불과했다. 명목상으로 가톨릭이란 점에서 프랑스와 비슷한 이탈리아에서는 사상가 거의 대부분이 교회의 바깥에 있었다. 독일 및 미국처럼 종교가 혼합된 나라에서는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 신자들보다 분명한 우위를 장악하고 있었다. 실상,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부활은 프랑스 가톨릭 내에서 일어나고 있던 것과 견줄 수 있는 1920년대의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 폭은 매우 좁았다. 바르트의 신新정통주의는 프랑스의 신토마스주의보다 더 진지했지만 심미적인 것과의 관련 또는 제휴는 거의 없었다. 오직 프랑스에서만 가톨릭 사상가들이 지적·문화적 대화의 중심부에서 그들의 우주관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86-7)


"『진정한 휴머니즘』(1934)에서 마리탱이 제시하는 것은 중세의 영웅적·성자적 가치관을 어떻게 현대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용어로 번역하는가라는 문제였다. 마리탱은 아퀴나스의 방법론에 근거를 두고 이 스승의 건축적 질서로 전개시켜 그가 제안한 휴머니즘의 연원을 추적하고 기독교 사회에 대한 비전을 미래 속으로 기투企投했다. 그는 지난 두 세기 동안의 대중 정치적 신앙에서 무신론의 침식작용만 본다면 그것은 커다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역사적 역할이란 역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분명히 죄악을 품은 자들이 사실은 은혜로운 변화의 예고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예가 마르크스로, 그의 '냉소주의'는 프로이트처럼 상당히 중요한 사실들을 밝혀주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가치관이 지닌 물질주의와 무자비성을 폭로해주었고 노동자 계급을 존엄성과 굴욕감의 인식으로 일깨워주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다.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을 실체화하는 것이었다."(97)


# 기투企投 : 사르트르나 하이데거 실존주의의 기본 개념으로서,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기를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4장 영웅주의의 추구


"1930년대 소설에서 보이는 새로운 진지성의 음조는 오직 시대의 중압이란 관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서구 세계를 움켜잡은 일련의 복합적인 위기들─경제적, 외교적, 이념적─은 어김없이 각성의 효과를 갖고 있었다. 영국 혹은 미국에서도 작가들의 반응은 아주 비슷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이례적인 정열로 다가왔다. 오직 프랑스에서만은 상반된 영웅적 가치의 확인과 부정이 지적 내란의 영역으로 소용돌이쳤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역사와 종교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인식이 행해졌다. 유독 프랑스 작가들만은 드골이 역사의 〈파도〉라고 말했음직한 격동 속에 처한 자기 자신과 자기 국민들의 입장을 설명할 의무를 느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기 선조들의 종교─그들 주위의 모든 것에 새로운 생기의 징표를 부여하는─를 심사숙고해야 했다. 프랑스에서는 역사와 종교가 살아 있는 실체였다. 교육받은 독자층으로부터 관심을 얻으려는 작가들이라면 그것들에 무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124-5)


"1930년대로 넘어오자 모든 것이 변했다. 선배 작가들은 이 사회의 질서(내적 논리)를 발견했지만, 후배 작가들은 모순을─인간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과 불합리한 비극으로 지배되는 세계를 보았다. 〈숙명성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그들은 〈역사란 구제할 수 없이 공허한 것, 진보의 은밀한 법칙 혹은 은총의 뜻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순수한 우연과 우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근원적인 비관주의〉, 의미나 최종 목표는 집단 모험으로 기울어진 〈개인 의식의 번뇌〉─따라서 가톨릭의 지적 혁신과 그 뒤에 따라오는 실존주의 저술 사이에 다리를 놓는 불안의 문학이 나타난다. 이 번뇌의 음조는 마르셀이 제시한 가톨릭판 실존주의의 특색이 되어 앞으로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그것은 1930년대 문학에 팽배했던 긴장과 급박의 분위기 속에 뚜렷이 표명되었다. 이 모든 표현들에 공통된 것은 도덕적 파탄 의식과 그것을 포착할 상징적 공식에 대한 절망적 탐색이었다."(126)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새로운 주제 가운데 영웅주의의 추구는 가장 큰 설득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무관심한 독자들에게는 거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다양한 추구들 간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영웅적 이상은 서구 문학 전통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특이하게도 사회 전반이 의기소침해진 전쟁 시기에 이념계 전반에 걸쳐 동시에 부활한 것이다. 당시 가장 광범위하게 번져오는 확실한 모습들은 친파쇼적 우파의 지지자들이었다. 몽테를랑이나 드리외 라 로셸의 작품들에서 반反의회동맹의 젊은 열성파들은 귀족주의적 열망과 대중에 대한 경멸로 동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몽테를랑에게는 배음으로 깔린 자조와 괴팍한 허무주의가 있었고 이 때문에 젊은이들의 모델로서는 자격을 잃어버렸다. 해방이 된 후 영웅적 이상의 구현체로 나타난 사람들은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거나 그것과 연대성을 선언한 사람들─베르나노스, 말로와 생-텍쥐페리 같은─과 참여소설의 수줍은 선구자인 마르탱 뒤 가르였다."(127)


5장 현상학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


"죽음의 거부, 고상한 인간 행위의 기록을 통한 역사에의 각인─전쟁과 점령과 저항의 시대에 있던 이런 것들이 영웅적 이상의 유일한 선언은 아니었다. 사회정의에 대한 갈증 또한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고 나치 통치의 가혹성이 더욱 심해지면서 그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더 굳게 단결하고 공동의 도덕적 목표를 더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해방의 순간이 다가오자 새로운 프랑스를 어떻게 갱신하느냐는 문제가 절박하게 제기되었다." "두 세대 전의 드레퓌스 사건 때처럼 레지스탕스는 과거와 미래를 심판할 판단 기준, 즉 규준점을 마련했다. 이런 심사 아래 우파 이론가들이 붕괴되었고 이들의 대변자들이 개척한 언어적 고상함도 붕괴되었다. 레지스탕스의 관점으로 보면 언어적 세련성이란 의심스런 여운을 가진 것이었다. 그것들은 세계의 비참과 사회적 갈등을 부드러운 표현 속으로 숨기는 것으로 보였다. 레지스탕스의 글은 전쟁의 고통으로 드러난 인간의 실체를 잔인하고 공포스럽게 재현하는 것이었다."(178-9)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의 기억은 하나의 숭배였고, 그 뒤를 이은 현실에 부닥쳐 그 주요 모습들이 녹슬어버리긴 하지만, 소렐 식의, 하나의 사회적 신화였다. 전쟁 말기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 여론을 뒤흔든 갖가지 '진보된 '사회운동이나 사상 조류들은 직접으로든 간접으로든 거의 다 레지스탕스에서 나왔다. 전위적 지식인들의 영역에서 레지스탕스의 승리는 자기 비판과 그 승리를 기반으로 한 전제들의 검토를 통해 스스로를 옹호했다. 레지스탕스의 고참들이 동료 시인들 혹은 그들과 상응하는 해외 지식인들 간에 자신들에 대한 몰이해와 적의가 높아가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지방주의가 강화되고 엄격한 자기 합리화가 강조되었다. 그 결과는 새로운 고립이었다. 레지스탕스 이후의 사회사상에 주조를 이루는 신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추상의 야릇한 결합이 프랑스 지식인들로부터 각층의 세대들에게 부여된 마지막의, 가장 집중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큰 도덕적 탐구로 곧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180)


"좌파의 새로운 정통파들 사이에 레지스탕스에의 향수감이 전후의 첫 10년 동안을 지배했다. 그러나 공공사업의 국유화와 사회복지 제도의 광범한 확대가 실시된 이후에 프랑스는 중산계층의 의회민주주의라는 낯익은 절차로 돌아갔다." "현실적으로 국민 대다수가 레지스탕스 노선에 추종하기를 거부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어떻든 레지스탕스는 열성적인 소수파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관망주의 태도를 취했다. 최후의 승리가 레지스탕스 우파에게 돌아갔음이 판명되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이 국민들로부터 존경 받은 것은 아니었다. 레지스탕스 퇴역자들이 시민들로부터 불쾌감을 사게 된 것이 아마도 역사적 증거일 것이다. 1944년과 1945년의 승리로 갖게 된 도덕적 우월감으로 치장한 영웅적 소수파들을 냉정한 다수파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우월감은 레지스탕스 중 상당수가 드러낸 정치적 무능력 때문에 이중으로 부당하게 보였다."(188-9)


"1947년─혹은 소련의 강제노동에 대해 격론이 벌어지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늦어도 1950년─에 이르러 레지스탕스 작가들은 주체할 수 없이 분열되었다. 카뮈를 비롯해 상당수의 작가들은 약간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정치적 중도파의 통치와 미국에의 의존을 순응했다. 그러나 레지스탕스 계열 중 좌파 지식인들은 드골주의도, 의회민주주의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들은 마찬가지로 동과 서 사이에 분명한 선택을 하지 않으려 했다. 레지스탕스의 유산을 가장 엄격하게 존중하는 사람들은 중립정책을 지지했는데 이 중립정책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소련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바, 그 제창자들은 공산주의 작가들과의 유대를 깨뜨리는 것을 반대했을뿐더러 정치적 중용과 서구와의 연대라는 정부 노선에 집요하게 대항했다. 이 같은 입장으로 영국과 미국 지식사회의 주류들과 소원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1950년대가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다시 한 번 문화적 고립으로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189)


"사르트르의 대자對自, pour soi는 첫눈에 보면 서양의 철학적·심리학적 전통에 속하는 정신이나 영혼 혹은 자아나 의식과 닮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그 모두와 다른 것으로, 그것은 정의定義가 없다─다시 말해 무無라는 용어로 정의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비개인적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가장 작은 존재의 미립자〉를 거기에 부여한다는 것은 〈결정주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을 예비한다는 것〉, 따라서 〈순수하고 투명한 의식〉의 자유를 깨뜨린다는 것을 뜻한다. 자유를 향한 사르트르의 완강한 탐구는 그 자체의 부정으로 끝난다. 모든 내용물을 〈대자로부터 비워내는 절대적 과정〉 속에서 그는 〈그 자유를 죽여버렸다.〉 의식이 무로 수렴됨으로써 유일하게 남은 근거는 유물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사르트르는 자신의 철학적 정의를 고수하는 데 실패했다. 자아가 없다면, 인간 개체에 대한 관념이 없다면 '실존적 심리학'이란 그의 사상 전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209)


"제2차 세계대전까지 프랑스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 지도자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간략한 개념 정도로 만족했고 그 이론을 독특한 프랑스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프랑스인이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을 따라잡으려면 거의 1세대 기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망명한 러시아인 코제브가 행한 1936년의 헤겔 강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프랑스 청년들은 시기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속편 격으로 마르크스에 다가갔다. 그것도 직접 그에게로 간 것이 아니라 영미에서 경제 불황이 일고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걸맞지 않게 헤겔을 거쳐 그에게로 간 것이었다. 헤겔을 거친 접근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프랑스인의 인식을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관념주의로 만들었다. 독일의 추상성에 대한 이러한 편향은, 몇 년 후 특히 점령기 중에, 전혀 비非마르크스적인 후설과 하이데거의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를 실존주의적 용어로 이해하게끔 촉진했을 때 다시 확인되었다."(214-5)


"메를로-퐁티의 사회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인간 존재의 관점은 정신과 육체를 불가분의 것으로 보고 인간의 의식적인 행위의 전前의식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 관계가 지닌 무한한 복합성에 대해 멀리서나마 설명해줄 적절한 공리─그것이 추상적이든 경험적이든─를 전혀 설정할 수 없는 삶에 충격을 받았다. 메를로-퐁티는 마르셀처럼 자신의 비밀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세계 속을 더듬어 길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세계에는 종교적 신앙이라는 지침도 없었다. 인간 세계란 우연의, 애매모호의 영역이며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의미로 충만해 있지만 그것은 절대적 진실이 결여된, 인간적 의미이다. 이 같은 철학은 현상의 서술에서 극단적인 주관주의를 엄격한 객관주의와 결합하는 것이며, 그 근원적인 태도는 인간 모험의 경이로운 다양성에 대한 놀라움이다. 생애 말기에 메를로-퐁티는 현상의 세계를 뛰어올라 조감도를 만들려는 어떤 철학적·역사적 이론에도 적개심을 보였다."(219)


"메를로-퐁티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의 몸뚱이〉라고 명명한 인식, 곧 존재의 물질적 하부 구조와 그에 관해 인간이 형성한 사고와의 상호 관계를 발견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사고 방법이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훨씬 분명하게 그가 '실존철학'이라고 부르려는 것과 마르크스주의를 연결지었다. 그가 보기에, 헤겔과 마르크스는 본인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 '원초적 실존주의자'였다. 전자는 그의 '과격한 철학'을 관념주의자의 수동적 주체성에서가 아니라 간주체성間主體性의 역동적인 사상 위에 수립했으며, 후자는 자신의 드러난 체계를 뛰어넘어 인간은 자유로운 행위로 자신의 삶을 참여시킬 때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인간관계의 개념을 설정했다.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마르크스주의는 전혀 추상적인 점이 없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 계급 간의 구체적인 관계를 다루며, 그것이 가르치는 도덕성은 형식 윤리학자들과 대립되는 진정한 책임과 정열의 도덕이었다."(222-3)


6장 출구


"카뮈의 레지스탕스 체험은 이후의 그에 관한 많은 오해─사후에까지─의 근원이 되었다. 그가 획득한 지도적 지위, 그리고 해방 후 3년 동안 계속 지켜온 『콩바』 지의 편집자 자리로 인해 그는 공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거슬러가며 모든 주제의 공적 논쟁에 발언해야 할 의무를 느꼈고 그중 상당수는 본래의 관심 영역 밖의 일이었다. 카뮈는 기질에서나 교육에서나 절대로 이념가나 정치 비평가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선 문학인이었고 그 다음이 철학자, 그것도 시적이며 직관적인 철학자였다. 그가 좌파에 이끌린 것은 타고난 윤리적 관용성 때문이며, 이미 자기 고향의 토착민들에 대한 차별에서 경험한 성향이기도 하다. 나치의 범죄는 억압에 대한 숨은 분노와 증오를 결정적인 격분으로 향하게 했으며, 〈순결성의 암살〉이라근 비극 때문에 지하투쟁으로 정력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 도덕적 분노는 거의 언제나 잔혹과 불의에 지상명령적 비판을 가하는 데서 그 분출구를 찾았다."(260)


"해방 직후기에 카뮈 주변으로 몰려든 가장 집요한 전설 중 하나는 그가 실존주의자이며 사르트르의 전우라는 것이었다." "사르트르에게 레지스탕스란 억압받은 사람들 편에 선 필생의 싸움의 시작이었다. 전후의 평온기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자유와 평등을 위한 범세계적인 투쟁이 막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카뮈에게는 전쟁과 점령, 레지스탕스의 체험은 인간 규범을 넘어선 지옥과 같은 것이며, 그래서 그는 자신이 쫓겨난 빛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를 열망했다. 이념적 동기에 목숨을 맡기는 것을 그는 비정상적인 편법으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정당화되고 또 그럴 때나 요구되는 편법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로든 인식의 모든 능력을 실현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르트르가 (전후에) 더욱더 투사적이고 단호해질 때─동시에 공산당에 더욱 접근해갈 때 카뮈는 해방 직후 옳음과 그름의 극단적인 양분 태도를 풀어가면서 관용과 자유제도라는 서구 전통을 재발견하기 시작했다."(261-2)


"블로크와 페브르처럼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에게 그 무한한 다양성을 부여하는 연구모형을 개발하는 데 깊은, 거의 강박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식한 바를 서술하기에 가장 적합한 메타포를 흐름에서가 아니라 구조에서 발견했다. 실제로 그는 이런 유형의 사회연구에서 그의 선배 누구보다도 더 멀리 구조의 개념을 밀고 나갔다. 그는 또한 블로크나 페브르와 달리 자기 작업을 서구사회의 분석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나 말로 같은 창작 문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바다 건너 이민족의 가치관을 열린 마음으로 대면함으로써 프랑스의 전투적인 자민족 우월주의에 도전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말로처럼 비서구사회가 '역사 없이' (혹은 반反역사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의 연구에서 주인공이 될 '원시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사고함으로써 방법적 생기와 철저성에서 영웅주의 작가들보다 훨씬 더 진전하고 있었다."(291)


"레비-스트로스가 구조에 대해서만 주목하며 그 의미들을 철저히 꿰뚫어보는 중일지라도 감정이 끓어오를 때에는 서슴없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발언한다. 그래서 서구 기술의 파괴력 때문에 태평양 제도를 〈정지한 항공모함〉으로 바꾸어놓고 그 〈오물을 (···) 인간의 얼굴에〉 뿌려놓는 데 대해 뜨거운 분개심으로 고발할 수 있었고 〈사라진 진실을 찾도록〉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자기 직업의 아이러니에 애통해할 수 있었다." "요컨대 레비-스트로스의 폭넓은 영향력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은, 자기 재능을 〈생생하고도 엄격한 과학 직업을 수행하는 데 바치는 한편, 동시에 이 작업을 반성하고 그 방법론을 검토하며 그것으로부터 철학적 요소들을 끌어내고, 그러는 가운데,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친구가 되는 일종의 루소와 같은 인물로 남으면서 때로 불교에서 연유한 영혼의 해방과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한 경제적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을 화해시키는 꿈꾸는 사람〉이라는 데 있다."(305)


"1960년대의 레비-스트로스의 후계자들은 그의 연구에서 모럴리스트적인 내용을 제거하고 그의 구조적 방법론에만 절대적인 관심을 보였다." "언어·논리 그리고 약호화가 그 자체의 목적이 되면서 프랑스 사상은 〈30년 동안의 지체로 논리적 실증주의의 위기〉에 부닥친다. 이는 곧 한 세대 전에 영미 철학계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변화를 겪는 셈이었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그 역할을 감당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었다." "구조주의자들의 저술에는 훌륭한 분석철학의 영문 저서에서 보여주는 문학적 취향과 담화체 문체가 부족했다. 그것은 지나치게 토론적이고 지나치게 현학적이며 감정적이고 과장적이며 비의적인 말놀이─그 말의 가장 나쁜 뜻에서의 '지식인'적이었다. 사회사상이라는 수식어로 비추어보면 구조주의 혁명은 철학이란 엄격성 아래 오랜 프랑스적 정신의 폐해를 새로이 도입하는 감상적인 효과를 갖는다. 그리고 이런 약점들 때문에 푸코와 같은 사람이 보여주었던 풍요함과 독창성마저 흐려져버렸다."(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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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냉전 : CIA와 지식인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 지음, 유광태.임채원 옮김 / 그린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서문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에, 미국 정부는 서유럽에서 문화를 이용한 선전선동 활동cultural propaganda이라는 비밀 첩보 프로그램에 막대한 자원을 투입했다.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문화 분야에서는 선전선동 활동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 그 자체였다. 프로그램의 운영은 CIA에 의해 철저히 그리고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비밀 첩보 작전의 중심에는 1950년부터 1967년까지 CIA 요원 마이클 조셀슨이 주도했던 세계문화자유회의CCF가 있다. 활동 기간 동안의 성과는 엄청났다. 활동이 가장 활발했을 즈음, 이 단체는 35개국에 지부를 두고, 수많은 직원을 거느렸으며, 유력 잡지 20종 이상을 발행했다. 또한 미술 전시회를 개최했고, 뉴스 통신사를 소유함과 동시에, 세간의 이목을 끄는 국제 컨퍼런스를 조직했으며 음악가와 미술가들에게 수상 기회와 공연 기회를 제공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서유럽의 지식인들을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의 매혹에서 벗어나 '미국의 방식'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15-6)


1장 우아한 시체


"1947년 당시 대중들에게 비난의 대상이었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가 임명한 여러 고위직을 차지했을 뿐 아니라, 제3제국이 유지되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국립오페라단을 계속 지휘했지만, 연합국공동관리위원회는 그의 소련 망명을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또한 미심쩍은 전력에도 불구하고 쉽게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예술가들이 당대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나치 청산 프로그램의 일관성 없는 방식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었다." "반공주의 세력을 결집시키는 상징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요구가 나치 제국에 협조한 용의자들의 혐의를 벗겨 줘야 한다는, 시급하면서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적 지상 과제를 만들어 냈다. 파시즘과 가까웠다는 혐의도 관용의 대상이 되었다. 그 대상이 공산주의에 맞서는 데 이용될 수만 있다면 말이다."(36-9)


"문화를 정치적 설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데 전문가였던 소련은 냉전 초기에 '문화적 냉전'이라는 중심 패러다임을 확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탈린 체제가 경제력 면에서 미국에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인간 정신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미국은 뉴딜 시기에 예술 분야에 대한 막대한 통제가 있기는 했어도, 문화 투쟁 분야에서는 숙맥이나 다름없었다. 한 정보 장교가 색다른 전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예측한 것이 1945년에 이르러서인데, 그 전략은 이미 소련이 채택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정보 장교는 전략사무국OSS의 도너번 장군에게 (새로운 냉전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 바 있다. 〈원자폭탄의 발명은 국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평화적' 수단과 '전쟁'이라는 수단 사이의 불균형을 불러올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평화적' 수단의 중요성이 확연히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해야 합니다.〉"(42)


"각 점령국들이 선전전에서 서로 점수를 올리듯이 경쟁했기 때문에, (당시 유럽의 비참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세련된 문화생활이 왜곡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문화 투쟁에서 소련이 주도권을 잡아나가자, 영국 측에는 열람실 난방에 필요한 석탄이 부족했던 그때, 미국은 '미국의 집'을 개관함으로써 소련에 대담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국 문화의 전진기지'로 설립된 이 기관은 혹독한 기후를 피해 안락한 환경 속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열람실과 영화 상영, 음악 연주회, 토론회와 미술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있었다. 모두 〈압도적으로 미국 문화를 홍보하는〉 내용이었다." "주로 소련에서 나온 정치선전의 영향으로, 미국은 문화적으로 척박한 나라, 껌이나 질겅질겅 씹고 쉐보레 차를 몰면서 뒤퐁 나일론으로 휘감고 다니는 속물들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미국의 집'은 이러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했다."(43-6)


"소련의 거짓말이 전 세계에 걸쳐 빛의 속도로 전파되고 진실은 아직 드러날 기미조차 없던 와중에 멜빈 조너 래스키는 분연히 일어나 미국의 정치선전 전략에 혁신을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멜빈 래스키 제안서'로 명명된 이 문서는 래스키가 문화적 냉전을 수행하기 위한 독자적 청사진의 근간이 되었다." "래스키가 언급한 〈실재하며 중대한〉 공백은 〈결국에는 사회에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리더십을 제공하는 교양 계층, 즉 문화적 소양을 갖춘 계층의 마음을 얻는 것〉에 대한 실패, 다시 말해 그들을 미국적 이상으로 이끌지 못했던 실패를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결핍은 새로운 학술지를 발간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학술지는 〈공식적인 미국 민주주의의 대표자들 뒤에는 위대하고 전위적인 문화와 예술, 즉 문학, 철학, 기타 모든 문화 분야에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이어 주는 풍부한 성과물이 있다고 설명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60-2)


# 월간지 『데어모나트』Der Monat 창간


2장 운명의 선택


"'미국의 과업'은 이미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에서 분명하게 표현된 바 있다. 이제 미국의 첫 평화 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국CIA 창설과 함께 냉전의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1947년 7월 26일 국가안전보장법에 의해 창설된 CIA는 군사적·외교적 첩보 활동을 조율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다. 결정적으로, 또한 지극히 모호한 용어로 CIA는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명시되지 않은 〈공통의 관심사가 되는 사안〉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정하는 〈여타의 기능과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1947년 법 어디에도 CIA가 다른 국가 내정과 관련하여 정보를 수집하거나 은밀하게 개입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명확한 조항은 찾을 수 없다〉라고 훗날의 정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융통성 있는 해석이 가능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여타의 기능' 부분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CIA를 스파이 행위, 비밀 공작 활동, 준군사작전, 적국의 기술 정보 수집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65)


"이제 깃털이 나기 시작한 CIA의 위계를 채워 줄 사람들은 유서 깊은 엘리트들로, 미국 기업의 이사회, 고등교육기관, 주요 신문 및 미디어, 로펌, 정부 등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아이비리그 출신자들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워싱턴에 집중된 100여 개의 부유층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혈거인들'cave dwellers로, 가문 대대로 영국성공회 또는 장로교적 가치를 보존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들이었다. 탄탄한 지식, 출중한 운동 능력, 상류사회의 예의범절, 확교한 기독교 윤리라는 원칙 아래 교육을 받은 이들은 피바디 신부Reverend Endicott Peabody 같은 인물을 모범으로 삼았다. 피바디는 이튼, 해로, 윈체스터 등의 영국 사립학교와 같은 원칙으로 그로턴스쿨을 설립하여 미국의 수많은 국가 지도자들을 배출한 바 있다. 기독교적 가치와 특권에서 나온 의무를 익혀 온 그들은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주도적인 계층이었지만, 무한정한 평등주의에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71-2)


"미국 엘리트들에게 공통된 신념의 핵심적 대변인이 바로 조지 케넌이었다. 그는 외교학자면서 마셜플랜의 기획자이자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이었고, CIA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하나였다. 1947년 케넌은 이탈리아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지지했다." "그해 7월 케넌은 소련의 위협이 진정 어떠한 성격인가 하는 문제보다 소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자신의 관점을 수정했다. 그리고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에 그 유명한 'X'라는 필명으로 논문을 기고해 냉전 초기를 지배했던 명제들을 도출해 냈다. 케넌은 크렘린이 〈광신적인 이데올로기〉로 〈세계의 힘이 몰려 있는 구석구석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절대 불변의 대항 세력〉, 〈경계를 늦추지 않는 굳건한 견제〉 정책을 펼치자고 제안했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케넌이 특히 주안점을 뒀던 내용은 〈선전선동술과 정치전 기술 개발의 극대화〉였다."(75-6)


3장 월도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시드니 훅은 1902년 12월, 뉴욕의 윌리엄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당시 견줄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브루클린의 빈민 지역이었기에, 훅은 어릴 때부터 공산주의 지지자가 되었다." "미국 공산당을 도와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초판 번역을 준비하기도 했던 훅의 신념은, 많은 뉴욕 지식인들의 태도 변화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현실에 대한 일련의 폭로들로 약화되기 시작한다. 1936~37년에 일어난 레온 트로츠키의 반역 재판, 1939년의 독소불가침조약, 그리고 재판·이론·정책과 관련하여 재앙에 가까운 스탈린의 실책이 잇따르자 결국 신념을 배신해 버렸던 것이다. 결국 공산당의 '공공의 적'이 되어 '반反혁명의 파충류'로 비난을 받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십이지장충'Hookworm으로 폄하되었다. 1942년에 이르러 훅은 작가이자 편잡자인 맬컴 카울리의 동향을 FBI에 고발하기도 했다. 윌리엄스버그의 혁명가 훅이 이제는 보수 진영의 귀염둥이가 된 것이다."(100-1)


4장 민주주의 진영의 데민포름


"소련의 선전이 늘어놓은 거짓 주장에 대한 영국의 대응은 한 발 늦게 이루어졌다.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이 공산주의 진영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정보조사국IRD을 설립한 것이 1948년 2월에 이르러서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조직은 당시 외교부 산하 조직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IRD 설립을 기획했던 당시 외교부 장관 어니스트 배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오로지 물질적인 성장이라는 측면에 기반해서 공산주의를 비난함으로써 공산주의가 격퇴될 수 있다는 생각은 미망에 불과하다. 유럽의 기독교적 정서가 가진 위력을 고려하면, 기존의 민주주의적·기독교적 원칙에 긍정적인 성격이 보태져야 한다. 바로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하나의 도전이었다. 서유럽 정부들이 소련의 핵실험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내부의 시스템에서,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통해 공산주의의 대안이 될 미래상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106-7)


"초기 IRD의 가장 중요한 자문역 중 한 명이 헝가리 태생의 작가 아서 쾨슬러였다. 쾨슬러는 소련에 있을 때, 전쟁 전 설립된 전위 선전조직망(지휘자였던 빌리 뮌첸베르크의 이름을 따서 '뮌첸베르크 사단'으로 알려져 있다)의 배후에서 책사로 활동했기 때문에, 소련의 정치선전 조직들이 내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를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쾨슬러의 가르침 덕에, IRD는 좌파라는 정치적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권력의 중심과 대립한다고 여겨지는 연구 기관 혹은 개인을 다시 권력의 입맛에 맞게 활용하는 일이 얼마나 유용한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한 포섭의 목적은 이중의 소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진보적인' 단체를 가까이 둠으로써 그들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었으며, 둘째는 진보 단체의 내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혹은 내부 구성원들을 [진보적인 체할 뿐인] 유사한 주제로, 더 나아가 은근히 덜 급진적인 토론의 장으로 끌어들여 단체의 영향력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109-11)


"당시 CIA는 어떤 아이디어에 골몰하고 있던 상태였다. 바로 〈공산주의와 맞서 싸우는 데는 예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더 낫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쾨슬러와의 협의 끝에 이 아이디어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쾨슬러의 주장에 따르면, 공산주이 신화를 파괴하는 유일한 수단은 비공산주의적인 좌파 인물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쾨슬러가 얘기했던 사람들은 이미 국무부와 정보기관이 '비공산주의 좌파'Non-Communist Left, NCL라는 하나의 그룹으로 분류를 마친 상황이었다. 이로써 아서 슐레진저가 '조용한 혁명'이라 일컬은 바와 같이, 공산주의의 환상에서는 벗어났지만 사회주의의 이상에 여전히 빠져 있던 지식인들과 그들이 사상에 대해서 정부 차원의 이해와 지원이 증가하게 되었다." "〈칩 볼런, 아이재이어 벌린, 니콜라스 나보코프, 에이버럴 해리먼, 조지 케넌 모두 비공산주의 좌파의 결집을 독려하는 제 주장을 열렬하게 지지했습니다.〉 슐레진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114-5)


5장 이념의 십자군


"1950년 6월 26일, 베를린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의 개회식이 열렸다. 나흘간 계속 토론회가 열렸고, 브란덴부르크 문과 포츠담 광장과 베를리 동서 분계선을 둘러본 뒤에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다시 칵테일파티와 특별히 마련된 콘서트에 참여했다. '과학과 전체주의', '예술, 예술가와 자유', '자유 사회의 시민', '평화와 자유 수호', '자유세계의 자유 문화'의 다섯 가지 주요 주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토론이 시작되자마자 공산주의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극단적인 의견 대립이 나타났다. 쾨슬러는 서구 지식인들이 진용을 갖추어 투쟁 그룹Kampfgruppe, 즉 공산주의를 전복시키겠다고 무조건적으로 맹세한 전투 집단을 형성할 것을 호소했다. 〈슐레진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무미건조하고 감정 없는 연설을 했습니다. 쾨슬러가 온 마음을 다해 연설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이었어요. 쾨슬러가 분위기를 바꿔 놓았던 거죠.〉 로런스 드 네프빌의 기억이다."(138)


6장 '회의'라는 이름의 작전


"위즈너는 세계문화자유회의를 상설 독립체로 확립할 계획을 세우고 OPC 프로젝트 검토 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1950년 11월 말 브뤼셀에서 회합을 가진 운영위원회는 래스키가 밑그림을 그린 조직안을 채택했다. 조직안에 나온 대로 25명으로 구성된 국제위원회와 5명의 명예의장단이 지명되었다. 그들은 다시 5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의 지도를 받는다. 상임위원회는 행정국장, 편집국장, 조사국장, 파리 지국장, 베를린 지국장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다시 사무총장의 통제를 받는다. 래스키의 이 조직도는 코민포름의 조직도를 그대로 빼닮은 것이다. 〈그들의 조직명은 공산당의 조직명과 같았죠.〉 한 역사학자가 지적했다. 〈CIA는 이 문화 재단을 공산당의 거울 조직으로 구성했는데, 그 핵심에 비밀 조직이 있는 것까지 똑같았습니다. 마치 두 조직이 그렇게 하기로 짜놓은 듯이 말이죠.〉 니콜라스 나보코프는 문화자유회의를 주재하는 상임위원회를 두고 〈우리 정치국 동지들〉이라고 농담 삼아 부르기도 했다."(157)


# OPC : CIA 정책조정실


"〈인간의 정신으로 겨루게 될 때, 진실은 미국만의 특유한 무기이다.〉 미 국무장관 에드워드 바렛은 이렇게 선언했다. 〈진실은 고립된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의 설파는 구체적인 행위나 정책과 연결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고도로 숙련되고 효과적인 방식을 택한다면, 진실을 위한 활동은 우리에게 공군만큼이나 필수적인 무기가 될 것이다.〉 진실은 미국의 것이다. 진실을 도모하기 위해 속임수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라. 그것이 바로 쾨슬러가 말한 〈절반의 진실로 전적인 거짓말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었다." "좌파 세력을 지원해 주는 목적은 그들을 지배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신중하게 접근하고 그들 집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어느 정도 울분을 해소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면서, 극단적인 상황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나올 경우에는 그들의 주장이 알려지지 않도록 막고, 가능하다면 활동마저 제한하는 것이었다."(171-3)


7장 캔디


"마셜플랜 초기, 아직 혁신적인 움직임이 남아 있었을 때, 마셜플랜의 자금이 이중적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금의 수혜국들이 각각 미국으로부터 받은 돈에 비례한 일정 금액을 자국의 중앙은행에 예치해 해외 원조 프로그램에 기여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수혜국과 미국의 상호 조약에 따라 이 자금은 양자가 공동으로 이용하는 자금이 된다. 대부분의 자금(95퍼센트)은 수혜국 정부의 자산이 되지만, 나머지 5퍼센트는 예치와 함께 미국 자산이 된다. 바로 이 '대충자금'─매년 대략 200만 달러에 이르는 비밀 자금─은 곧 CIA의 활동 자금으로 유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충자금을 지출 관리하는 경제협력처는 1949년 4월, '독재와 전쟁에 대한 국제적 저항의 날' 집회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48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그들이었다. 이제 어빙 브라운은 마셜플랜이라는 '캔디'를 통해 CIA의 비밀 자금을 대거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183-5)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CIA가 그들을 '지도'하면서, 그리고 즉흥적 활동을 억제하면서 관료 체계를 확립했던 것이다." "고상한 탄생 과정에도 불구하고, 문화자유회의가 CIA의 지도를 받았다는 사실은 곧 문화자유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워싱턴의 의중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여기에는 호혜의 원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CIA가 미국 외교정책의 목표를 전달해 주면, 그 대가로 서유럽의 지적 흐름에 깊이 관여하는 지식인 집단이 이 목표들을 명료화formulate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이나 주장을 쉽게 표현해 주거나 심지어는 수정해 주기까지 했다. 그러면 CIA는 즉시 그들의 의견을 반영해 주었다. 조셀슨은 CIA의 지휘 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문화자유회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임무도 착실히 수행했다. 그 일은 해내기 어려운 임무였고, 신뢰감을 주며 수행하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지만, 조셀슨은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186-8)


8장 이 미국의 축제날에


"1951년 초 나보코프는 어빙 브라운에게 대형 예술 페스티벌의 기획에 관해서 비밀 메모를 보냈다. 〈유럽에 있는 미국 최고 수준의 예술가 단체와 유럽의 예술가 단체가 처음으로 공동 작업 하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는 미국과 유럽 문명 간의 문화적 연대와 상호 의존성을 보여 줌으로써 자유세계의 문화생활에 전방위적 효과를 불러오게 될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퍼뜨리는 데 성공한) 미국 문화가 열등하다는 유럽의 치명적인 통념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이 페스티벌은 성공일 것입니다. 이 페스티벌이야말로 전체주의 반反문화에 대한 자유세계 문화의 도전이며 용기의 원천이자 '도덕적 교정'이 될 것입니다.〉" "CIA 국제조직국IOD의 톰 브레이든은 이 계획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우리의 문화가 주는 효과나 의미에 대해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논쟁해 봤자 문화 그 자체가 낳은 결과물에는 비할 수 없다〉라는 나보코프의 주장에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이다."(195-6)


"1952년 4월 1일, '20세기의 걸작' 페스티벌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봄의 제전」을 연주하는 가운데 파리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의 첫머리를 장식한 것은 히틀러나 스탈린에 의해 공연이 금지된 작곡가들의 작품이었다(개중에는 알반 베르크처럼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에게서 금지 처분을 받은 영광의 인물도 있었다). 1933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퇴폐적 음악'을 작곡했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쫓겨났으며, 소련의 음악 '평론가'들이 〈반反미학, 반反화성, 혼란과 무의미〉로 규정해 버렸던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작품도 무대에 올랐다. 그 밖에 나치 독일을 떠난 또 다른 망명자이자 스탈린주의자들이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사이비 모더니스트들의 맹종을 부른 사이비 대위법〉 유파의 창시자라고 조롱하던 파울 힌데미트, 소련의 음악 저널 『소비에츠카야무지카』가 〈인상주의라는 나무〉 아래 〈모더니즘이라는 악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했던 클로드 드뷔시의 작품도 마찬가지였다."(201-2)


"회화 및 조각 전시회 큐레이터는 미술 평론가이자 뉴욕현대미술과MoMA의 부관장을 역임한 제임스 존슨 스위니가 맡았다. 4월 18일, 미국이 수집한 마티스, 드랭, 세잔, 쇠라, 샤갈, 칸딘스키를 비롯한 20세기 초기 모더니즘 대가들의 작품이 추려졌다. 스위니가 언론에 발표한 보도자료의 내용을 보면, 전시회 측이 체제 선전의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그 작품들은 〈자유라는 조건 아래 다양한 나라에서〉 창작된 것들로, 작품 자체가 〈현대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생활하고 작업하는 것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지〉 웅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전시가 예정된 걸작들은 나치 독일이나 현재 소련, 그리고 그 위성국과 같은 전체주의적 체제 아래에서는 탄생할 수도, 전시 허가를 받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전체주의 정부가 우리가 전시하려는 회화·조각 작품을 '퇴폐적인 것' 혹은 '부르주아적인 것'이라고 딱지를 붙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204-5)


9장 컨소시엄


"문화의 자유는 싸게 먹히는 장사가 아니었다. 17년이 넘도록 CIA는 세계문화자유회의와 그 관련 프로젝트에 수천만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CIA는 사실상 미국의 문화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화를 냉전의 무기로 활용하려는 CIA의 시도에서 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은 '민간' 단체들이나 '후원자들'의 네트워크를 체계적으로 조직해 비공식적인 컨소시엄(민간-정보기관 복합체)을 만드는 것이었다. 컨소시엄은 박애주의 재단, 기업체, 기타 기관이나 개인이 연합해 만든 기업형의 조직으로, 서유럽에서 비밀 첩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 CIA와 밀접하게 협력해, 엄폐물을 제공하고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이 '후원자들'은 국내외적으로 정부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용되었지만, 겉보기에는 자신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개인과 단체들은 자신의 '사적인' 지위를 유지하면서 실상은 CIA가 선정한 냉전의 벤처 투자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221)


"박애주의를 표방한 재단들은 수혜자가 돈의 출처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대규모 자금을 CIA 프로젝트에 조달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한 수단이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재단들을 통해서 CIA의 대규모 개입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진짜' 재단들, 이를테면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뉴욕카네기재단 등은 〈자금 모금을 위장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단체〉로 여겨졌다. 1966년, CIA에 대한 한 연구 조사에 따르면 이 위장술은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기관일수록 특히 효과적이었는데, 그들에게 적대적인 비판자들은 물론 내부 사정을 잘 모르는 재단 구성원들이나 후원자들에게 재단이 순수하고 부끄럽지 않으며 민간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CIA가 〈1950년대 초반부터 청년 단체, 노동조합, 대학, 출판사, 기타 민간 기관을 가장하여 거의 무제한적인 범위의 첩보 활동〉을 벌여 왔기에 자금을 모으기 유리했다는 점은 확실하다."(229-30)


10장 진실 알리기 캠페인


"1950년대 초반, 미국의 문화 전쟁에서 의제를 설정하는 데 가장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은 바로 전미자유유럽위원회 위원장으로, 이후 아이젠하워의 심리전 특별 자문 역을 맡았던 C. D. 잭슨이다." "C. D.의 첫 번째 임무는 미국의 첩보전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심리전과 정치선전 활동의 주체는 국무부, (마셜플랜을 운영하던) 경제협력처, 군 정보부, CIA, 그리고 CIA 내부 조직이지만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던 위즈너의 정책조정실OPC로 분리되어 있었다." "비밀 첩보 활동의 범정부적인 내부 분열과 갈등 확산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부와 CIA는 심리전 활동 조정 업무를 총괄할 독립 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했다. 국무부의 저항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 제안을 적극 지지했던 조지 케넌이 1951년 4월 4일 심리전전략위원회PSB를 설치하는 기밀 명령에 트루먼 대통령의 서명을 받는 데 큰 역할을 했다. C. D. 잭슨이 그토록 바라던 '정책 청사진'을 그려 줄 위원회가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247-51)


"찰스 버턴 마셜은 PSB가 '비합리적 사회 이론'에 기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파레토, 소렐, 무솔리니 등을 언급〉시킨다는 것이다." "마셜에 따르면, PSB는 엘리트 집단의 구성원들을 〈정책 기획자들의 세계관〉에 경도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특히 토착 엘리트들을 포섭하면, 이러한 계획을 미국이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자생적인 발전에 따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PSB의 교조적인 문서를 뒷받침하는 엘리트 이론은 비공산주의 좌파 지식인들을 포섭하고 세계문화자유회의에 대한 지원을 정당화하는 CIA와 아주 똑같은 사고방식이다. '정책 기획자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엘리트 지식인들이 동원된 것에 대해서, CIA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CIA가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고취하려고 했던 태도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추론과 확신'을 통해서 미국 정부가 하는 일은 무엇이든 옳다고 믿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252-3)


11장 새로운 합의


"1952년에 열린 『파르티잔 리뷰』 심포지엄의 주제는 '우리의 국가, 우리의 문화'였다. 편집자가 직접 설명한 이 심포지엄의 목적은 〈미국의 지식인들이 국가와 국가기관에 대해 새로운 안목을 얻었다는 자명한 진실〉을 조망해 보는 것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흔히 미국은 예술과 문화에 비우호적이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점점 바뀌기 시작했고, 많은 작가와 지식인들은 이제야 자신의 국가와 문화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 정치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미국식 민주주의가 고유하고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단순히 자본주의자들의 환상이 아니라, 소련의 전체주의에 맞서 지켜내야 할 현실이라는 뜻이다. ······ 유럽은 더 이상 안전한 피신처가 아니다. 비판이든 옹호든 미국식 삶에 풍부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해 주었던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운명의 바퀴가 돌고 돌아, 이제 미국이 서양 문명의 수호자가 된 것이다.〉"(268-9)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혁명 이후 처음으로 지식인 사회의 주요 인원들이 더 이상 꼭 필요한 반대 세력이 아님을 보여 준 사례였을 겁니다. 자기네 국가를 지지한다고 해서 지성적 또는 예술적 진실성의 격이 낮아지지는 않는다는 얘기죠.〉 이 점에 주목했던 역사학자 캐럴 브라이트먼의 말이다. 『타임』이 '파르나소스, 대서양 연안에서 태평양 연안까지'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게재하면서 이렇듯 새로운 지식인데 대한 개념이 확정되었다. 〈저항하는 인간은 ······ 긍정하는 인간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긍정하는 인간은 국가가 새로운 모습을 갖췄을 때 비로소 지식인들의 참된 역할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반체제 인사refusniks에서 '체제 옹호자'all-rightniks로 변신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자유주의자에서 급진주의자로, 미적지근한 공산주의 동조자에서 열렬한 반스탈린주의자로 변신하던 그 빠른 속도는 여전히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드와이트 맥도널드가 남긴 기록이다."(270-1)


12장 잡지 'X'


"1953년부터 1990년까지 발행된 『인카운터』Encounter는 전후 지성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잡지였다. 이 잡지는 문학계의 칵테일파티라고 할 만큼 매력과 활력이 넘쳐났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들, 아널드 토인비, 버트런드 러셀의 평론 등 당대 최고 지성의 글들이 이 잡지를 통해 출판되었고, 영국과 미국은 물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문화를 주제로 잡다한 소재들을 다루면서도, 허다한 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침묵하거나, 단지 외면하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보나, 이 잡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확고한 반공주의 냉전 사상의 정수였다. 그렇지만 재정 면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겨 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심각한 적자 상태로 운영되었다. 적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발행 부수가 두 배는 되어야 했다. 이 잡지의 성격은 지적intelligent이었다. 그와 동시에 첩보intelligence의 세계와도 심각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277-8)


"영국 정부 내의 정보기관들도 『뉴스테이츠먼』이 '아둔한 논조'와 '끔찍한 단순화'를 고루 갖춘 잡지라 판단하여,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목소리를 내는 데 공을 들이고 있었다. 영국 정보조사국IRD이 『트리뷴』을 지원하고 해외의 요원들이 그 내용을 발췌해 국제적으로 배포한 것도 그러한 연장선상의 몸부림이었다. 맬컴 머거리지와 우드로 와이엇은 1950년 4월, 주간지 『트리뷴』의 편집자 토스코 파이벌을 만나서 잡지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결과 머거리지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잡지가 심각한 파산 위기에 처해 있음은 명백했다. 나는 그들에게 계속 냉전의 관점을 대변하여 『뉴스테이츠먼』에 강력하게 대응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내 마음에 들었던 『뉴스테이츠먼』의 의제 하나를 예로 들면, 『뉴스테이츠먼』이 정치선전을 위한 매체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좌파는 곧 지성인이다, 역으로 지성적인 사람은 좌파임이 분명하다'라는 의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279)


13장 성스러운 윌리들


"소비경제의 호황과 안정적인 사회를 이룬 미국의 이면에는 또 다른 미국이 있었다. 음울하고, 어둡고, 어딘가 불편한 미국, 예일대의 역사학자들이 공저자로 참여한 교과서 『미국 역사 탐험』이 있는 미국이 있었다. 이 교과서는 어린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미국의 어린이들은 각자가 공산주의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다른 미국인을 목격할 경우, FBI 담당 부서에 즉시 신고토록 합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렇게 썼다. 〈어린 고자질쟁이에 대한 칭찬은 전체주의 사회의 징표였고, 냉전은 이러한 고자질을 '미국적 전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마블Marvel의 만화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공산주의자, 스파이, 배신자, 외국의 비밀 요원은 들어라! 내 뒤의 모든 충성스러운 자유인들과 함께, 너희들 마지막 하나하나까지 찾아내 비열한 인간쓰레기임을 낱낱이 밝힐 때까지, 캡틴 아메리카는 너희들을 찾아 싸움을 벌일 것이다!〉"(320-2)


"바로 이것이 매카시의 '간악한 2인조', 로이 콘과 데이비드 샤인의 미국이었다." "1953년 봄, 로젠버그 재판의 충격 때문에 유럽에서 미국인들에 대한 분노가 널리 퍼져 나가고 있을 때, 마침 콘과 샤인은 유럽에 소재한 미국의 정보 분야 전초기지들로 시찰을 떠났다. 3월 5일, 스탈린의 사망 소식이 크렘린에 의해 공식 발표된 이후, 이 두 사람의 다음 행보만큼 그 사상적인 측면에서 소련 밖에 있는 그 어떠한 것들보다 스탈린주의의 고약한 입 냄새를 충실하게 재현해 내는 것은 없었다. 7개국의 미국 공보원USIS 도서관을 방문한 그들은 200만 권의 도서 중 30만 권이 '친공산주의' 작가의 작품이라고 규정하고, 책을 모두 없애 버리도록 요청했다." "유럽에 소재한 미국 정부 기관과 재외 공관들이 매카시에 굴복해 버리자 미국 문화의 평판은 바닥을 쳤다." "멈추지 않는 폭주 기관차 같은 매카시의 문화대청소 작업은 표현의 자유를 선도한다는 미국의 위상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322-4)


"〈연방정부의 거의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의심의 대상이었다.〉 매카시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 CIA 감찰관으로 일했던 라이먼 커크패트릭의 말이다. 〈당시 분위기는 맹렬한 비난과 공판이 단두대로 이어지던 프랑스 혁명 때와 비슷했다. 워싱턴의 실제 단두대는 없었지만, 개인의 경력이나 삶 전체가 파괴된다는 점에서 단두대보다 훨씬 심한 상황이었다.〉 국무부의 사기를 심각하게 꺾어 놓은 매카시는 이제 CIA로 눈을 돌렸다. CIA는 〈주요 타깃이자 훨씬 중요한 타깃이었다. 특히 그에게 더 큰 유명세를 불러올 수 있다는 계산에서라면.〉" "중대한 순간이 다가왔다. 이 순간은 매카시의 재야 반공주의가 CIA가 가장 공을 들이고 가장 효과적으로 조직한 비공산주의 좌파의 전위 네트워크를 붕괴시켜 침몰로 몰아갈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매카시가 CIA의 비공산주의 좌파 프로그램 주위에서 사냥개처럼 냄새를 맡고 다니자 CIA는 가능한 한 몸을 사려야 했다."(329-31)


"그러나 매카시도 결국은 1954년 말부터 서서히 몰락해, 1957년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덜레스의 CIA는 매카시의 공격에 맞서 승리를 거뒀지만, 미국은 한동안 매카시가 키워 놓은 악마에 퇴마의식을 하느라 애써야 했고, 여전히 〈매카시가 신봉하던 가치와 그가 벌인 십자군 운동의 바탕이 되었던 근거 없는 가정들이 대부분 그 유산으로 남겨졌다.〉"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트루먼 독트린 없이 매카시즘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진실에 대한 확인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에서 멀어지고, 공포와 적개심으로 판단이 흐려지고, 머리 켐턴이 말한 〈과격함에 대한 과도한 참여〉가 이루어져 사람들이 이제는 〈정상적인 것이 나쁜 것인 양〉 착각하게 되는 사태야말로 냉전 사상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우리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문제를 다룰 때만큼은 증거와 추론이라는 정상적인 법칙에서 벗어나게 된다〉라고 훗날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주장했다."(353-4)


14장 음악과 진실을,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미국문화자유위원회가 카라얀이나 푸르트벵글러 같은 개인에 대해 보여 준 바와 같이 도덕적으로 일관성도 없고 모순된 태도로만 눈을 감고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제가 보기에, 교향악 연주회의 가치는 지휘자가 한때 어느 정권에 줄을 댔느냐 하는 사실과는 무관합니다.〉 조지 케넌의 말이다." "미국의 문화적 냉전주의자들은 곧 그들이 위험한 역설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곳에서는, 예술로부터 정치를 열심히 떼어 놓고 있었지만 공산주의를 다룰 때는 그렇게 구별해서 보지 않았다. 이런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태도는 1940년대 후반 독일의 나치 청산 과정에서 처음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 프루트벵글러는 에후디 메뉴인과 함께한 연주회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멜빈 래스키의 『데어모나트』를 통해 조롱을 받았다. 문화적 냉전에서 세계문화자유회의가 내건 전제 조건은 작가와 예술가들이 이데올로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379-80)


"미국문화자유위원회가 그렇게 색출해 내고자 했던 공산주의 동조자나 중립주의자에게 관용이 돌아갈 몫은 없었다. 적어도 195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 내에서 문화의 자유를 짓밟는 주적이 공산주의라는 사실에는 누구도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른 전문 직업인들처럼 반공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 틈을 타 자신의 시장을 방어 내지 확장하고자 했다." "자유유럽방송 국장이었던 조지 어번은 많은 냉전주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와 맺는 적대적 공생contrapuntal 관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주제와는 거의 상관없이, 논쟁하고, 편 가르고, 싸움을 벌이도록 강요하는 충동〉이 이러한 문제를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냉전주의 지식인들의 주장은 너무나도 격렬하고, 냉소는 너무나도 삭막하며, 또한 그 분석은 예전에 그들이 포기했던 세계상에 너무나 얽매여 있다. 그들은 부정不定의 발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지만, 그 발걸음은 언제나 똑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라고 덧붙였다."(381-4)


15장 랜섬의 아이들


"〈책이 다른 모든 정치선전 매체와 다른 이유는 한 권의 책이 독자의 태도와 행동의 변화에 미치는 영향이 다른 어떤 매체보다 크기 때문이다.〉 CIA 비밀작전팀장에 따르면, CIA는 고유의 비밀 출판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었고, 그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은 속내를 가지고 있었다. 〈해외에서 책을 출간하거나 배포하라. 그러나 미국의 영향은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해외 출판업자나 서적상에게 은밀히 지원금을 지급하라. 미국 정부와 공공연한 관게로 엮인 단체의 책이 아닌 '오염'되지 않은 책을 출간하라. 특히 작가의 정치적 성향이 '미묘하여 노골적이지 않은' 책이라면 더욱 좋다. 작전상의 이유가 있을 때 책을 출간하라. 상업적 고려는 하지 말라. 해당 국가의 기관이나 국제기구에 보조금을 지급해 책을 출간·배포하게 만들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책은 해외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로 하여금 쓰게 하라. 작가에게 직접 후원금을 지급하거나, 비밀 계약이 가능할 경우 출판 대행인이나 출판사를 통해 후원금을 지급하라.〉"(417-8)


16장 양키 두들


"미주리 주 공화당 의원 조지 돈데로는 추상표현주의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를 보았지만, 미국 문화계의 주류 인사들에게 추상표현주의 작품은 반공주의, 자유, 자유 기업가 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예술의 비구상적 성격과 정치에 대한 침묵은 추상표현주의가 바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척점임을 말해 준다. 그것은 소련이 증오해 마지않았던 예술 형태 중 하나였지만, 앞으로 추상표현주의가 맡을 역할은 그 이상이 될 터였다." "일찍이 1946년에 평론가들은 이 새로운 미술에 박수를 보내며 〈독립적이며 자존적이고 국가의 의지, 영혼, 성격을 드러내는 진실된 표현〉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이 평론가들 눈에 〈새로운 미술은 그 미학적 특성을 보아, 어중간한 지성으로 해외의 '이론'을 조립하고 편집하고 소화하는 방식으로 단순하게 이식해 놓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예술이 더 이상 유럽의 영향에 종속되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 새로운 국가적 발견의 주요 대표자는 잭슨 폴락이었다."(432-3)


"이제는 붓조차 들기 힘든, 무기력에 빠져 늙어 가는 유럽 모더니즘의 대표자 마티스의 옆으로 혈기 방장한 폴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폴락은 '액션페인팅'이라 알려진 기법을 들고 나타났다. 땅바닥 위에 거대한 캔버스를 놓고(야외면 더 좋았다) 그 위에 온통 물감을 뿌리면, 흩뿌려진 물감이 만드는 불규칙한 선들의 덩어리가 캔버스 위를 가로지르고, 물감이 경계 밖으로 넘쳐 나오면, 그는 마치 아메리카 대륙을 다시 발견하려는 듯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술로 충전되어 자유분방하고 무아지경에 빠진 폴락의 손이 빚어낸 모더니즘은 엄청난 열광을 몰고 왔다. 어느 평론가가 〈술 취한 피카소〉라고 평했음에도,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앞다투어 〈미국 회화의 승리〉라며 찬사를 보냈다. 폴락의 찬미자들에게 미국은 활기 넘치고 건강하고 자유분방하며 거대한 나라였다. 그리고 폴락의 작품은 위대한 미국의 신화, 즉 두려움을 모르는 개인이 홀로 외치는 자유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434)


"좌파 예술가들은 후원해 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주류 인사들의 믿음은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들에게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시끄러운 소리는 후원자가 기부하는 땡그랑 동전소리에 묻혀 잠잠해질 수 있었다. 예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아방가르드와 키치」라는 글에서 깨어 있는 후원자들의 후원이라는 이데올로기적 타당성을 역설했다." "CIA가 민간의 투기 자본가들과 함께 한 후원 활동들 또한 바로 이 원칙에 따른 것이다. 특히 톰 브레이든이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그들을 먹여 살릴 엘리트를 필요로 한다는 그린버그의 제안에 매료되었다. 마치 르네상스 시절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브레이든이 말하는 후원이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마땅히 그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지도하고 교육할 의무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무식한 사람들, 또는 좀 더 좋은 말을 쓰자면 그저 이해를 못할 뿐인 사람들과 항상 싸워 나가야 합니다.〉"(440-1)


"추상표현주의라는 거인 앞에서 자기가 왜소해졌다고 느낀 사람은 비단 유럽의 예술가들뿐이 아니었다. 애덤 고프닉은 〈특대 사이즈의 추상 수채화는 미국 미술관의 유일한 스타일이 되어 버렸고, 두 세대에 이르는 사실주의자들을 지하로 몰아넣어 정물화를 마치 지하출판물samizdat처럼 돌려 보게 만들었다〉라고 썼다. 1959년, 존 캐너데이도 〈당시는 추상표현주의가 최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때로, 뉴욕에서는 뉴욕파 화가들의 화풍을 닮지 않은 무명 화가의 작품은 전시회를 열고자 해도, 마땅한 갤러리를 한 군데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라고 했다. 12년 간의 외유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온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 운동 전체가 거대한 비즈니스 투자 사업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추상표현주의는 이러한 역사를 통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체계화되어, 한때는 도발적이고 학계의 관례에 이질적이었던 모습을 버리고, 공인된 매너리즘 혹은 공식 예술의 지위로 축소되었다."(466-7)


17장 분노의 천사들


"추상표현주의가 냉전의 무기로 이용되고 있을 즈음, 미국은 더욱 강력한 무기를 발견했다. 그 무기의 이름은 하나님이었다. 도덕률에 입각한 종교적 신념은 1789년 미국 헌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었지만, 미국이 호산나 소리 높여 외치는 하나님 찬양을 얼마나 유용한 무기로 쓸 수 있는지 알게 되었을 때는 바야흐로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신은 어디에나 있었다. 1954년 성경풍선프로젝트에 따라 철의 장막 위를 떠다니던, 성경을 넣은 1만 개의 풍선 속에도 신이 있었다. 1954년 6월 14일, 국기에 대한 맹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미국〉이라는 문구를 포함하도록 의회의 결의가 있던 순간에도 신의 윤허가 있었다. 아이젠하워의 말에 따르면, 그 문구는 〈미국의 유구한 전통과 미래를 아우르는 종교적 신념의 우월성〉을 되새기도록 해주었다. 신은 심지어 달러 지폐에도 등장하여, 1956년 미 의회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In God We Trust라는 구절을 국가의 공식 모토로 삼기로 결정했다."(474-5)


"라인홀트 니부어는 세계문화자유회의의 명예 홍보대사였고, 냉전의 '현실주의자'로, 정확한 계산을 통해 권력의 균형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엘리트들만의 권위로 배타적인 책임을 지는 대외 정책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니부어 또한 그러한 엘리트들의 일원으로서 권위에 익숙한 인물이었다. 한편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니부어로부터 '잠재적인 악惡'을 교훈으로 얻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원죄라는 교리는 정치적 도구로 성공적인 탈바꿈을 하고 〈하나님을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삼자는 주장으로 니부어는 시드니 훅의 인정을 받았다. 실제로 종교의 의무는 모든 주요 냉전 강령에 서서히 스며들었고, 1950년대 미국의 모든 권력 체계는 어떤 일원론적이면서 근본주의적인 선언에서 비롯되는 듯 보였다. 그 선언이란 미래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과 하나님을 경배하는 인간이라는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결정됨을 의미했다."(477-8)


"극비 문건에 따르면, '전투적 자유Militant Liberty'는 〈공산주의 치하의 실상을 단순한 용어로 표현하고, 자유세계에서 생활양식의 근거가 되는 원칙들을 설명하도록〉 고안된 개념으로, 〈자유세계가 직면한 위험성의 규모를 자유 시민들이 이해하도록 일깨워주고, 그리하여 이러한 위험에 대항해 싸울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투적 자유'는 미국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제국으로서의 책임의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한 지상 과제(그리고 그것을 위한 희생)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는 의무, 집단, 명령에의 복종, 남성적 대담성의 우월함 등을 찬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정상적으로 오랜 기간 병역을 회피했던 존 웨인이 미국 군인의 전형이자 미국지상주의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듀크'Duke 존 웨인은 개척자의 모습으로 세계를 굴복시켰다. 1979년 의회는 그에게 명예 훈장을 추서했다."(483-7)


"소련은 미국의 약점인 인종 문제를 내세우면서 이를 줄곧 물고 늘어졌다. 특히 1946년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 제임스 번스에게 '당혹감과 낭패감'을 안겨준 좋은 예가 있다. 그가 발칸반도 국가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하지 않는 소련 측에 항의하자, 즉시 이런 대답이 되돌아 온 것이다. 〈번스 선생네 나라를 보시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흑인들도 똑같이 권리 없기는 매한가지 아니오?〉 할리우드에서 벌인 알섭의 활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차별, 저임금, 불평등, 폭력에 대한 소련의 비판을 무력화하기 위해서 벌인 광범위한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무부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던) 작전조정위원회OCB 내의 심리전 전문가들은 흑인 예술가들의 해외 투어 기획을 주 업무로 하는 비밀 조직인 문화공연위원회를 설립했다. 이 기간에 이루어진 다양한 인종 및 흑인 예술가들의 공연은 이렇듯 비밀스럽게 기획된 '수출'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494-5)


18장 새우가 휘파람을 불 때


"1956년 11월 4일 일요일, 오전 8시 7분이 되자 라디오부다페스트는 침묵에 잠겼다. 밤사이에 수도로 밀어닥친 소련 군대는 10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유럽의 '억류 국가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근 10년 동안 계획을 짜고 분석하고 정보를 수집하던 미국은 이제 넋이 나간 듯 꼼짝없이 서서 소련의 완력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투쟁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고 혁명의 승리만을 함께 향유하려 하는 자유세계에 절망하며 헝가리 혁명은 숨을 거뒀다.〉 11월 11일 마네 스페르버는 비통해하며 이런 글을 남겼다." "미국 정부의 전략가들과 정보기관의 최고위 관리들이 이미 헝가리 봉기와 같은 사건을 수년에 걸쳐 계획하고 있었지만, 결국 현실에 직면하고 나니 이러한 탁상공론은 '용두사미'처럼 소용없게 되어 버렸다." "〈어느 누구 하나 현실에 맞춰 계획을 짜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때 그 일이 터진 겁니다.〉 1954년 자유유럽방송에 배치되었던 로런스 드 네프빌의 말이다."(512-4)


19장 아킬레스의 뒷꿈치


"CIA에서 흔히 쓰이는 말로, '자산'asset은 〈작전을 수행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정보기관이 상황에 맞게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자원〉을 의미했다. 정보기관에서는 작전 운용의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이란 톰 브레이든에 의해 공식화된 것으로, 그 산하 조직들이 CIA의 지원은 받더라도 굳이 〈미국의 공식적인 정책들을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좌파적인 의제도 『인카운터』 같은 기관지를 통해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반면에 영국 철학자 리처드 월하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한 의제는 좌익적 성격을 띠되, 좌익적이라는 인상만 줄 뿐이었고요. ······ 제 생각에, 그렇게 하는 목적은 『인카운터』에 게재된 모든 의견들이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떤 정도에 이르면 글을 여지없이 삭제해 버렸어요. 그 주제가 미국 외교정책상의 이해관계와 결부될 때 특히나 그러했지요.〉"(531-2)


20장 문화적 NATO


"영국 노동당의 명성은 제2차 세계대전 말, 압도적인 드표를 기록하며 처칠을 실각시켰던 1945년 총선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1947년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열기가 시들해졌고, 냉전으로 인해 당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노동당 우파는 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합심했던 반면, 노동당 좌파는 반스탈린주의 진영과 소련을 옹호하는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이 노동당 우파는 『소셜리스트커멘터리』Socialist Commentary라는 학술지를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가장 눈에 띄는 인사로는 데니스 힐리, 앤서니 크로슬랜드, 리타 힌든, 휴 게이츠켈 등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그 유명한 국유화에 관한 당헌 4조─생산·분배·교환수단의 공동소유를 명시한─의 폐지를 포함하여 전력을 다해 노동당을 현대화시키려 했던 사람들로 이른바 '수정주의자들'로 알려진 집단이었다. 당시 CIA는 유럽에서 자신들의 구상에 맞게 영국의 정치계와 사상계를 옭아매고 싶어 했는데, 이 집단이 바로 그러한 활동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555-6)


"통합된 유럽, 그리고 미국 간의 동반자적 관계라는 개념을 증진하기 위해서 주요한 압력 집단으로 활동했던 단체는 유럽운동이었다. 윈스턴 처칠, 에이버럴 해리먼, 폴앙리 스파크가 주도했던 이 단체는 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감독을 받았으며, 거의 대부분의 활동 비용을 (유럽통합추진미국위원회라는 위장 단체를 통해) CIA에서 제공받았다." "이러한 조직들은 CIA의 지도를 받아, 유럽인들이 보다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선봉에서 정치선전 활동을 전개하고 좌익 정치운동 단체들의 급진성을 완화시키는 일을 했다. 워싱턴 측은 국제주의적 자유주의자들, 즉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따르지 않고 유럽 고유의 원칙에 의거하여 유럽을 통합할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을 그저 중립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CIA와 심리전전략위원회PSB는 다름 아닌 이러한 이단 행위를 〈분쇄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획과 대중매체를 이용하라〉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았다."(556-7)


21장 아르헨티나의 시저


"세계문화자유회의는 남미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년에 걸쳐 노력 중이었다. 문화자유회의가 남미에서 관여한 잡지는 『콰데르노스』로, 편집장은 (1921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공산당을 창건했고, 코민테른의 지하 조직망에서 일한 바 있는) 훌리안 고르킨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 '극심한 불신'을 퍼뜨리는 일이 그의 임무였다. 고르킨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꾸준히 미국을 욕하면서 사르트르나 파블로 네루다가 쓴 시구나 글귀를 암송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CIA를 등에 업은 1954년의 과테말라 쿠데타나 1958년의 쿠바 혁명은 고르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국 정부의 남미 개입 여파로, 이 시기는 〈라틴아메리카 공산주의자들과 그 동맹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호시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르킨은 이 적대적인 상황에 둘러싸인 채, 남미에서 문화자유회의의 주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홀로 분투하고 있었다."(588-9)


"1963년 초, 존 헌트는 파블로 네루다가 1964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제보를 입수했다. 이러한 형태의 내부 정보 유출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왜냐하면 노벨상 수상 선정위원회는 철저한 보안을 유지한 상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1963년 12월 네루다를 중상모략하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문화자유회의의 역할은 신중하게 은폐되었다." "스톡홀름은 노벨상 수상자 선정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말했지만, 결국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했다. 네루다는 196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상자가 발표되었을 때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작전의 성공을 기뻐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수상자가 장 폴 사르트르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네루다가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기 위해서는 1971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시 그는 친구이자, 민주적으로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를 대표해서 주프랑스 칠레 대사로 재직하고 있었다."(592-5)


"1964년 8월,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하원의원 라이트 패트먼의 주도하에, 미국 민간 재단의 면세 지위에 대하여 의회 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조사를 통해, 수많은 재단들이 CIA가 설립한 위장 조직임이 밝혀졌다. 가텀 재단, 미시건기금, 프라이스기금, 에드셀기금, 앤드루해밀턴기금, 보든신탁, 비컨기금, 켄트필드기금 등이 그것들이다. 이 재단들은 CIA가 다른 곳으로 자금을 전달할 때 합법적인 외양을 띠도록 설립된 유령 조직으로, 주소지만 등록된 '우편사서함'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CIA가 이 계좌로 돈을 이체하면, 이 재단들을 통해 '재전달' 내지는 '자금 경유'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위장 재단이 합법적 활동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재단들에게 '기부'의 형식으로 자금을 전달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어떠한 질문도 있을 수 없었다. 『휴스턴포스트』의 회장이자 하비재단의 이사인 윌리엄 하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야 그 사람들이 알아서 잘하리라 믿는 수밖에요.〉"(600-1)


22장 펜클럽 친구들


"1964년은 냉전의 전사들에게는 불운한 해였다. 그들이 의지해 왔던 신화들이 체계적으로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첫걸음으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가 출간되었다. 존 르 카레는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보면서 끝없이 계속되는 크나큰 환멸감〉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당시 CIA의 비밀 작전을 지휘하던 리처드 헬름스는 이 소설을 몹시 싫어했다." "그 뒤를 이어, 냉전 이데올로기의 광기를 풍자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가 나왔다. 루이스 멈퍼드는 『뉴욕타임스』에 보낸 서한 형태의 칼럼에서 이 영화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이 나라 전체를 단단히 옭죄고 있던 냉전 시대의 강박적인 광기를 처음으로 깨뜨렸다. ······공개적인 토론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고, 그런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 우리나라가 도덕적이고 민주주의 국가인 체하는 것이야말로 욕지기가 나는 일 아닌가.〉"(609-10)


"신좌파와 비트족처럼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 머물러 왔던 문화적 반역자들이 주류에 진입하면서, 왕년의 반공 투사들을 경멸하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조지프 헬러는 자신의 소설 『캐치22』에서 미국이 제정신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제로는 광기였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앨런 긴즈버그는 1956년에 비가悲歌 「아우성」을 발표해 황폐하게 변해 버린 세월을 애도했다. 〈나는 우리 세대 최고의 지성들이 광기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보았네〉라고 말이다. 긴즈버그는 공개적으로 동성애와 '페요테의 고독'의 환각이 빚어내는 기쁨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비트족은 LSD를 씹어 먹고, 육체적 흥분을 노래하며, 나체로 시를 읽고, 벤제드린과 헤로인이 만들어 내는 흐릿한 안개 속에서 세상을 유영하면서, 노먼 홈스 피어슨 같은 꼰대들의 손에서 월트 휘트먼을 되찾아와 히피들의 원조로 숭배했다. 그들은 『인카운터』 같은 잡지들이 격식에 집착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질서에서 혼돈으로의 회귀를 꿈꾸는 추저분한 반항아들이었다."(611-2)


# 페요테 :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 선인장


"마이클 조셀슨 또한 새로운 정신적 경향의 등장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또한 '미국의 과업'에 대해 점점 커지는 환멸을 감추려고 몹시 애썼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속에 품었던 환멸이 실체를 갖추기 시작하자 이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몇 년 후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1960년대의 절반쯤 접어들자 우리의 개인적인 가치와 이상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과 여타의 무분별한 정책들로 인해 파괴되어 갔다.〉 미사일 격차 선언, U-2기 격추 사건,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등 이 모든 제국주의적 실책들 때문에 미국의 세기,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책임이 있는 미국 정부에 대한 조셀슨의 믿음은 약화되고 있었다." "데탕트의 이념을 수용하기 시작하던 시기에, 조셀슨은 세계문화자유회의가 상호격리주의apartheid라는 냉전적 관습을 버리고, 동구권과 대화를 모색하도록 방향을 제시하려 했다. 무엇보다도 국제펜클럽과의 관계를 통해서, 바로 그 이상적인 준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613-4)


# 미사일 격차 : 소련이 핵탄두 보유 수에서 미국을 능가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미국이 엄청난 군비 증강에 나섰던 일


23장 문학계의 피그스 만 침공


"『인카운터』가 세계문화자유회의의 자산이라는 치명적인 주장을 불식시키려는 조셀슨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이었다. 이제 조셀슨이 탄 배에 물이 새는 구멍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파리와 뉴욕, 그리고 런던의 사교계에서 떠돌던 추문들이 이제 확고한 사실로 드러났다." "어째서 CIA는 문화자유회의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것일까? 문화자유회의는 자체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꾸려 갈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비밀 첩보 작전에는 깨뜨리기 어려운 관료주의적 계기가 있다. 지난 20년간 CIA의 정보요원들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비대해져 가는 작전 중심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첩보 '기반'을 비대한 규모로 확장하는 데 필요 이상으로 몰두한 나머지, CIA는 이러한 기반의 노출 위험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작은 것이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훗날 톰 브레이든의 평가이다."(637-8)


24장 방벽에서 내려다본 광경


"1966년 초, CIA는 캘리포니아에서 발행되는 『램파츠』Ramparts라는 잡지가 CIA의 위장 조직 네트워크를 앞장서서 파헤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CIA가 『램파츠』를 파괴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워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램파츠』가 살아남아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CIA가 두려워했던 대로, 『램파츠』는 한술 더 떠 CIA의 비밀 첩보 활동에 대한 취재 내용을 출판해 버렸다. 1967년 4월에 출판된 이 잡지의 취재 내용은 전국 유력 신문에 즉각 게재되었고 '폭로의 향연'이 뒤를 이었다. 이를 지켜본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머지않아 미국의 모든 정치 단체, 복지 재단, 대학 동아리, 야구 팀이 CIA의 일선 조직이라고 정체를 밝힐 날이 올 것이다.〉 미국 국내의 조직들만 노출된 것이 아니었다. CIA의 세계문화자유회의 후원에 얽힌 세부 사항들과 잡지들과의 관계는 물론 오브라이언이 『인카운터』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다."(646-8)


25장 그렇게 허물어지는 마음


"1967년 5월 14일, 마침내 세계문화자유회의의 공식 성명서가 보도자료로 배포되었다. 〈세계문화자유회의 국제총회는 ······이 자리에서 미 중앙정보국의 자금을 사용해 왔다는 확인된 보도 사실에 직면하여 깊은 유감을 표명하고자 한다. ······본 회의의 사무총장을 비롯하여 회의에 속한 어느 누구도 그러한 사실에 무지한 채로 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국제총회는 1950년에 설립된 이래로, 문화자유회의가 이룩한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다. 또한 문화자유회의의 활동이 어떠한 재정적 후원자의 영향력이나 압력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웠음을 확신하며, 업무에 협력해 왔던 모든 분들의 독립성과 고결함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공표하고 싶다. ······본 총회는 이러한 비난이 지성계의 담론이라는 우물에 독을 풀어 넣는 행위와 다를 바 없음을 밝혀 두려 한다. 따라서 본 총회는 사상의 세계에서 이러한 방식을 차용하여 비난을 가하려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한다.〉"(668-9)


"이 진실을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고 간주되는 사람들의 명단에는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스튜어트 햄셔, 아서 슐레진저, 에드워드 실즈(나타샤 스펜더에게 이 사실을 1955년부터 알고 있었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드니 드 루즈몽, 대니얼 벨, 루이스 피셔, 조지 케넌, 아서 쾨슬러, 정키 플레이시먼, 프랑수아 봉디, 제임스 버넘, 빌리 브란트, 시드니 훅, 멜빈 래스키, 제이슨 엡스타인, 메리 매카시, 피에르 에마뉘엘, 라이오넬 트릴링, 다이애나 트릴링, 솔 레비타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솔 스타인, 드와이트 맥도널드 말이다. 이 모든 사람이 기만 행위를 알고서witting 참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사실을 '눈치챘거나',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니콜라스 나보코프는 CIA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에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저는 모두 부인하겠습니다. 세계문화자유회의는 ······CIA와 어떠한 직간접적인 관계도 맺은 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소련이 짜놓은 계략 아닙니까?〉"(670-2)


"그러나 믿었던 톰 브레이든마저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에 글을 기고해서 조셀슨의 화를 돋웠다." "브레이든은 부정확한 정보를 바로잡는 데 그치지 않았다. 대신에 지금껏 어떠한 방식으로도 절대 공개된 적이 없었던 비밀 정보들을 자진해서 내놓았다." "CIA의 기술적인 용어로 '말썽'flap이라고 알려진 일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식으로 관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아무리 봐도 이상스럽다. 톰 브레이든은 아무런 심의도 받지 않고 글을 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에서 폭로된 비공산주의 좌파 프로그램에 밀접한 관계가 있던 요원들은 경력상에 아무런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코드 마이어와 그의 동료들 모두 더 높고 더 나은 자리를 찾아 신속히 움직였다(마이어의 경우, 서유럽에서 CIA의 모든 작전을 총괄하는 책임자인 런던 지부의 부장으로 영전했다). 오로지 비공산주의 좌파 진영에서 충원된 인력들만이 용도 폐기의 운명을 맞았다."(675, 687)


26장 값비싼 대가


"1967년 폭로 사태는 기왕에 일어났던 일을 덮으려고 의도된 것이거나 그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소설가 리처드 앨먼은 CIA가 자행한 '문화계의 조작 행위'를 통해 〈선동에 넘어가거나 원조를 받은〉 지식인들이 책임의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욕지기를 느꼈다." "프리모 레비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보다 정교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거짓말하는 사람들, 즉 현실 자체를 냉철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잠시 또는 영원히 실제의 기억에서 벗어나거나 떠나가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을 위해서 편리한 기억을 지어낸다. ······ 이렇듯 거짓에서 교활한 기만으로 조용히 이행하게 되면, 이는 유용한 수법이 된다. 따라서 확신을 갖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거짓을 보다 자세히 말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그를 쉽게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705-6)


"지식인들은 특정한 결과를 얻어 내려는 목적에서 편향된 태도를 선택한 뒤, 사람들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발휘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혼동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자유를 교조주의적 이념으로 추구했지만, 그 결과는 다른 이데올로기로 나타났다. 바로 '맹목적 자유주의'freedomism 또는 자유에 대한 자기도취적인 성향으로, 이러한 태도는 이단적인 시각마저 포용하는 고결한 정치적 주장이 되었다. 〈물론 '진정한 자유'는 단순히 자유라고만 짧게 줄여서 말하는 것보다 더 나은 명칭일 뿐이야.〉 소설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화자인 앤서니가 한 말이다. 〈'진정한'이라는 말은 마법의 단어지. 이 말이 '자유'라는 또 다른 마법의 단어와 결합하면, 그 효과는 끝내 주거든. ······ 꼬치꼬치 알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라면 진정한 진리true truth 같은 말 따위는 꺼내지도 않는다고. 나도 그건 진짜 괴상한 말 같아. 진정한 진리, 진정한 진리 ······ 아니, 그런 말은 없어. 그건 '베리베리'나 '와가와가' 같은 말이거든.〉"(707-8)


# 베리베리beri-beri나 와가와가Wagga-Wagga는 동어반복에 불과한 내용 없는 공허한 수사를 가리킨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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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만드는 사람들 (반양장) - 인권과 국제질서
니콜라 기요 지음, 김성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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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민주화의 세계 정치


"오늘날 저명한 법률가들은 민주주의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글로벌 스탠더드를 통해 수행되는 국제법의 필수 요소〉, 즉 국가의 자격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기준으로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온갖 유형의 통치를 정당화할 것으로 기대되는 원칙이 됨으로써〈점차 집단적인 국제 과정에 따라 촉진되고 옹호될······범세계적인 권리 부여(global entitlement)〉라는 보편적 권리가 된다." "전통적으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연대에 토대를 둔 인권운동가들, 다양한 저항 인사들, 비정부기구들, 네트워크들, 그리고 때로는 교회들이 민주적 개혁운동을 위한 채널이었다. 그러나 싱크탱크, 박애주의 재단, 행정기관, 유엔이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 민간 컨설팅 회사, 직능단체, 법률 운동가, 학자 등과 같이 다양한 제도적·개인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자원과 전문성을 팽창하는 이 장(field)에 점점 더 투자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민주주의 촉진과 옹호의 '집단적인 국제 과정'을 주제로 한다."(21-2)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의 연결에서 이러한 계획이 모호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주창 그룹(advocacy group), NGO, 이슈 네트워크 등은 가장 엄격한 의미로 시민적 미덕(civic virtue) 안에서 작동한다. 고전적인 정치 전통에서 미덕이었던 공화주의적 언어는 자유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권리 개념과 대립된다. 후자가 자유(liberty)를 구속에서의 자유(freedom)로 파악한다면[통치권(imperium)에 반대되는 자유(libertas)], 전자는 권력에 대한 참여를 자유(liberty)가 실행되는 조건으로 만든다[통치권에 참여하는 자유]. 시민적 미덕은 정확하게는 공동선(common good)의 생산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시민적 미덕의 개념은 언제나 귀족적 유형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다. 시민적 미덕은 동기가 순수하고 무욕적인 것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지배적 사회 신분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잘 사용한다. 도덕의 언어는 귀족 지배의 언어이기도 하다."(26-7)


"이러한 것들을 분류하는 어려움은 국제 무대가 극심하게 변동하고 있고 근대성(modernity)이 생산해온 상징적 경계들(도덕성과 정치, 국내 행위자와 국제 행위자 등)이 지속적으로 변하거나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낡은 국민국가의 세계 질서와 그것에 대한 정치 '과학'의 범주들로 이 새로운 현실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때 권력 비판의 무기였던 인권과 민주주의는 이제 권력 자체의 무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정치의 절대적 한계로서 발전한 인권 독트린은 인권 정치가 탄생하게 만들었다. 자율성과 참여의 지속적인 증가로 민주주의는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더 이상 권력 비판의 토대를 제공하지 않는 민주주의 촉진과 인권 옹호는 세계 권력의 핵심 언어가 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17세기 정치 이론가 조반니 보테로가 '국가이성(Ragion di Stato, Reason of State)'이라고 부른 것, 즉 권력의 공고화를 지향하는 도구적 합리성의 새로운 형태를 대표하게 되었다."(30-1)


제1장 냉전의 전사에서 인권운동가로


"냉전은 안정과 세력 균형을 유지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은 전적으로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것(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풀뿌리 수준에서 공식적인 권력 구조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를 재구성하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경제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인 것이 있다. 그러므로 좌익 반스탈린주의에서 냉전적 반공주의로 이동하고 그 후 자신들의 혁명적 국제주의에 개입했던 과거를 신보수주의 진영에서 지배적 정치 질서에 순응하게 하는 방법으로 바꾸어놓은 정치운동가들을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이 중요한 전문성의 배출구가 되어왔으며 이들 정치운동가 범주의 형성에도 기여했다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이 정치운동가들 중 많은 이에게 미국 외교정책은 1988년 조지 부시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위해 작성된 몇몇 문건에서 제안된 바와 같이 '해방의 독트린'이 되어야 했다."(64)


"엔조 트라베르소는 전체주의 개념이 전후에 국제관계의 중심 개념으로 발전하면서 급격한 의미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전체주의 개념은 1930년대처럼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기보다 이제 서구의 질서를 변호하는 기능을 갖추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이데올로기'로 변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의 변화는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이 1950년대 자유주의적 컨센서스의 효과적인 지지자이자 공산주의 조직들에 대한 공격적인 비판자로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의 적이었던 독일이 과거의 동지였던 소련의 적이 되자 한때 열세에 놓인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갑자기 전략적 지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소련을 '전체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했던 과거의 인물들은 냉전을 향한 미국 외교 정책을 지휘하는 인사들과 노선을 같이했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1930년대에 비공산주의 좌파들이 쌓아둔 공산주의 비판의 경험과, 공산주의의 영향력에 맞서 투쟁했던 그들의 능력은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72-3)


"사실 비공산주의 좌파들의 역설적인 정치 여정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냉전의 논리에 따르고 우익을 향한 현실적인 이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좌파의 특징이었던 전투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정치 문화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적 반스탈린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반공주의(그리고 그 후에는 신보수주의)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도 유지되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 개념과 이 운동가들의 이데올로기적 기본 틀은 비록 새로운 방식을 통해 사용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똑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다. 반스탈린주의 좌파를 냉전의 주요 선수로 만든 것은 이처럼 특수한 정치 문화였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확고하게 속해 있었지만, 1950년대 무렵에는 대부분 이미 계급투쟁의 전망을 포기하고 개량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컨센서스에 가담한 이 '민주적 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보다 공산주의와 투쟁하기 위한 무기를 더 잘 갖춘 사람은 없었다."(74)


"'민주주의 코민테른' 모델은 민주주의 촉진을 둘러싼 구조화된 국제적인 장의 출현에서 처음부터 핵심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이 주도한 민주주의 성전이 취한 조직의 형태는 이 성전이 패배시켜야 할 적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성전의 조직 형태는 똑같은 역사의 상이한 결과물이었으며, 간접적으로는 공산주의 문화의 깊은 영향력에 의해 형성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노력에서 프로파간다 개념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 걸친 민주주의의 수호와 촉진은, 당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반스탈린주의 진영의 다른 좌파들이 확고하게 믿은 것처럼 서구가 민주주의의 진정한 형식을 대표하고 공산주의 체제보다 노동계급의 권리를 더 잘 보장할 수 있다면, 이러한 장점들이 더 고차원적인 민주주의 형태와 더 나은 노동계급 이익을 옹호한다는 소련의 주장과 뚜렷하게 대조되고 더 강한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가정에 기반을 두었다."(84-5)


"'민주적 사회주의' 사고의 노선은 혁명 정치의 포기, 자유민주주의 환경 안에서 노동계급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개혁적 전략, 경제의 자본주의적 성격 수용, 복지국가 건설에 대한 참여, 스탈린주의 고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사회 개혁을 위한 도구로서의 경험적 사회과학 촉진, 자본주의 이후에 초점을 맞추고 공동 경여의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운동의 비전을 담고 있었다. 이 노선은 1950년대의 정치적 시대정신(zeitgeist)을 통해 가장 잘 표현되었으며 '이데올로기 종말론'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데올로기 종말의 주제는 1955년에 '자유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개최된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천명되었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지적 경향이 다양한 비공산주의 좌파(예를 들어 대니얼 벨, 시모어 마틴 립셋, 시드니 훅, 아서 슐레진저) 출신인 반면, 이들의 유럽 파트너들은 옛 공산주의자(아서 케스틀러에서 자유주의자[레몽 아롱]와 보수주의자[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지평이 다양했다."(88-9)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 성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 동맹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통 시각과 두 그룹이 활용한 전략적 자원들의 상호 보완적인 특징으로 유지되었다. 한편은 국가권력을, 다른 한편은 지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적이고 매우 전략적인 성격 때문에 이와 같은 관점의 수렴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관점의 수렴은 전적으로 외교정책 이스태블리시먼트─가문, 학문, 재력을 바탕으로 한 미국의 주류 상층계급─의 응집성에 의존했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고 그들의 정치권력을 보존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반에 이스태블리시먼트의 이데올로기적 통일성과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그리고 사회적 재생산 메커니즘은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또 다른 얼굴을 드러냈으며, 이스태블리시먼트는 반공이라는 이름하에 잔혹한 비밀 전쟁에 개입했다."(93-4)


"사회학, 정치학과 같이 우리의 역사적 재구성에 더 상응하는 분야에서 이주 학자들은 전 유럽에 걸쳐 권위주의의 발전과 독일 나치즘의 경험에 동요한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한 형태를 수입했다." "이와 동시에 이주 학자들은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실패와 전체주의 운동에 동원된 형체가 없는 '군중'이 되어버린 중산계급의 원자화를 특수한 입장(미국 학문 기관들의 입장)에서 숙고했다." "문화적 관점에서 미국의 중산계급은 대중 이데올로기에 결합되어 있으며, 거대 자본과 사회주의에 모두 반대한다고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 사회계층은 그 어떤 독점자본의 집중이나 자본의 국가 장악, 즉 파시즘의 가능성에 대항하는 방파제로 보였다. 또 그들은 진보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사회 연구는 결국 중산계급을 실질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이자 수호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산계급의 민주적 미덕에 대한 경험적 발견은 이민 사회과학자들의 점진적인 정치적 변화에 부합하기도 했다."(108-9)


"이 점에서 시모어 마틴 립셋의 저작들은 매우 시사적이다. 〈세속적인 개혁적 점진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중산계급의 미덕에 대한 그의 찬양은 '노동계급의 권위주의'라는 주제와 함께 그의 저작에 공존한다. 좌파와 미국 중산층, 그리고 미국의 예외주의의 만남은 구좌파가 사회적 착취보다는 유동성과 성취에 토대를 두고, 봉건적 과거가 없는 자본주의 형태의 역동적이고 개량주의적인 미덕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실 피에르 그레미옹처럼 많은 좌익 인물의 시각에서 볼 때 〈미국은 생산력 발전에 대한 부르주아의 장애에서 해방된 사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영구 혁명의 아이디어에 내용을 제공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미국은 결국 혁명 국가였다." "전후 사회과학은 비공산주의 좌파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국제적 투쟁에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했다. 즉, 사회주의를 위해서 미국 민주주의가 수호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10-1)


제2장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 새로운 자유주의적 컨센서스를 둘러싼 전문 영역의 형성


"냉전 국제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의 신보수주의적인 전략은─문화적 자유를 위한 협회의 재정 지원에서 CIA의 배후 역할이 폭로되었던 1960년대 중반에 침체를 겪은 이후─새롭게 출범한 레이건 행정부의 지원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사실 1980년대의 민주주의 선전 프로그램들은 트로츠키주의, '국무부 사회주의', 우익 사회민주주의의 옛 정치 전통에서 훈련받은 정책운동가, 조직가, 그리고 기타 냉전 이데올로그들의 네트워크로 형성되었다. 미국민주주의재단의 설립과 레이건의 인권 정책의 형성에서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의 각별한 공헌은 낡고 전통적인 국익 개념─협소한 의미에서 헨리 키신저의 지정학적 이익의 의미─을 '이상주의적이고 보편적인 인권의 언어'로 재구성한 것이었다. 전통적인 현실주의 독트린은 새롭고 강력한 도덕성의 형태를 취했으며, 미국 권력의 확장은 인권이라는 면에서 진보와 동일시되었다."(121)


"그러나 '민주주의' 수호에 있어서 외교정책의 활용과 인권의 정의를 위한 이와 같은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들을 바꾸고 확장한 강력한 전문화 과정도 고려되어야만 한다. 특수한 기관들과 보조적인 대학 과목들의 설립으로, 그리고 민주주의를 촉진하거나 인권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한 지식 및 기교의 생산과 이러한 활동을 개척한 정책 서클의 외부에 있는 인력의 충원으로, 민주주의의 촉진은 점차 이데올로기적 기원에서 멀어져갔다. 미국민주주의재단이나 휴먼라이드워치 같은 기관들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방식을 통해 이러한 전문화 과정의 선봉에 섰다." "가령, 미국민주주의재단은 민주화 과정에 내재된 '기술적'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면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의 전문화에 기여했다. 이 같은 전문성의 전략은 다른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장을 안정되게 만들고 그것을 개척한 세대를 넘어서까지 이 장의 재생산을 가능하게 했다."(124-6)


"지미 카터의 재임 기간에 인권이 미국 외교정책의 지도적 원리로 도입되었을 때, 인권은 처음에 국제 조약과 협약에서 중시되는 법률 규범과 동일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인권법은 국제법의 한 부분이었고, 미국 인권 정책은 적어도 공식적인 성명에 따르며, 국제적인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그러한 원리들에 따를 것과 일반적으로 미국의 국제적 책임의 준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미국에 대한 구속력도 가졌다." "레이건 행정부의 초기 반응은 이 정책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의 외교 정책에 대한 신보수주의자들의 각별한 기여는 인권 담론을 그들의 자유주의적 적수들에게 넘겨주기보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고 법률적인 인권 개념에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인권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인권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런 작전은 '인권의 초점을 국제적 평등에서 국내의 제도와 사회구조로 옮김으로써' 수행되었다."(129-30)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인권의 이해에 반대해 인권이 〈구조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해석, 즉 민주정치체제와 법률 시스템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해석을 내세웠다. 본질적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은 민주주의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에 대한 관심이어야 했다. 이 개념은 인권을 국가권력의 절대적인 제한을 반영한다거나 국가권력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권이 '국가의 도덕적 본체이자 토대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 기초했다." "인권을 수호하고 촉진하는 것은 인권을 기본적인 전제로 하는 정치체제를 수립하고 촉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인권은 이제 초국가적(supranational) 규범으로 간주되지 않고, 혁명 직후의 고전적인 18세기 헌법과 그것의 현대판, 즉 실정법에 각인된 일련의 권리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이론이 국가 수준의 우월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국제연합의 틀에 직접 대립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인권을 '국가화'하려는 시도였다."(131)


"1980년대 초반 신보수주의자들과 냉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발전시킨 인권 독트린─한때 국제 법률의 표준이었던─은 이제는 미국의 특수성에 따라서, 또는 적어도 미국의 이익에 순응하도록 다른 나라들을 개조하는 도구가 되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인권이 제국주의적 통제 방식으로 변형됨으로써' 촉진되었다. 돌이켜보면 레이건 행정부가 인권 개념을 거부하지 않고 채택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강경한 정책 어젠다는 미국이 군사적으로 재무장해야 함을 시사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재무장을 내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 개념은 인권운동 내부에 있는 반대파들에 의해 새로운 정부에 강요된 것만은 아니었다. 또한 미국 헤게모니를 재구축하고 미국의 도덕적인 자원들을 동원함으로써 헤게모니를 복원하려고 한 정책 논리에 포함되기도 했다. 인권은 일단 국제법에서 분리되어 '민주국가의 도덕적 개념'으로 재공식화됨으로써 이 작업을 완벽하게 수행했다."(139)


제3장 발전 엔지니어에서 민주주의 의사로: 근대화 이론의 성공과 실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재건이 완성되자 미국 외교 및 원조 정책은 점차 제3세계를 지향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의 탈식민화 과정이 미국과 소련의 대립을 야기했다. '발전'의 문제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였다. 발전은 무엇보다도 자본의 국제적인 순환을 확장하고, 해외 잉여를 수취하여 미국의 번영을 유지한다는 두 가지 문제에 답해야 했다. 초기부터 기업과 박애주의 세계의 통찰력 있는 부문들은 미국 경제의 취약성을 인식했고, 해외 무역과 투자를 증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제3세계에서의 반식민 민족주의의 발흥은 이러한 목표에 위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이라는 망령을 깨움으로써 국제 질서의 안정에도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이제 제3세계 민족주의를 범죄시했던 과거의 전략은 점차 민족주의를 (잘 통제할 수 있다면) 소련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잠재적 방어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간주하는 긍정적 접근으로 대체되었다."(171)


"또한 옛 식민국가에서 '국가 건설' 과정에 대한 원조는 정치적인 유대 관계를 발전시키고 이 나라를 안정화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발전 유형을 촉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개발원조는 로버트 우드가 '방어적 근대화(defensive modernization)'라고 부른 것을 촉진하기 위해 고안된 주요한 정책 도구였다. 핵심은 개발도상국들이 냉전적인 지정학적 균형을 와해하는 사회적 격변을 겪지 않으면서 사회적·경제적 근대성과 국가 건설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근대화 이론이 세계정세에 대한 미국의 인식을 반영한 것은 이 연구 프로그램이 외교정책 이스태블리시먼트와 그들이 지배한 박애주의 재단들의 직접적인 감독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박애주의 재단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CIA를 비롯한 안보 기관들과 협력하여 지역들의 정치적·사회적 현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지역연구와 비교정치 분야의 학문 기관들을 설립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했다."(172)


"정치학의 재조직은 (포드 재단으로 대표되는) 박애주의 재단이 촉진한 경험적 응용사회과학의 오랜 전통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통은 '사회 통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연과학과 유사한 형태로 사회과학을 모델화하는 것이었다. 또 지역연구에서 전통적인 교육을 과학적으로 만들려고 한 행태주의는 포드 재단의 매우 실용적인 전략적 관심을 사회과학적 언어로 바꾸어놓을 사람들의 훈련을 촉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1950~1960년대에 근대화 이론은 외교정책 입안자들의 전략적 신조와 정치학자들의 가설 사이의 수렴을 제도화했다. 사회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기술적·도구적 능력에 대한 자유주의적 믿음은 이 연구 어젠다와 개발원조 정책 프레임의 공통된 토대였다. 그것은 당시에 특징을 이루었던 (정치적) 독트린과 (학문적) 이론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학문적 지위, 국가 관료 기구, 박애주의 재단, 국제기구 간에 똑같은 인력의 순환으로 관점의 수렴이 촉진되었다."(174)


"신흥 공업국들에서 산업화 과정은 국내 공산주의를 격퇴함과 동시에 정치적인 격변을 피하기 위해 느리고 점진적인 속도를 유지해야 했다. 민중 부문의 통합은 공산주의 선전이 유리한 토대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하층계급은 잠재적인 민주주의의 잡단 행위자라기보다 파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립셋은 『정치적 인간』에서 권위주의에 이끌린 노동계급의 사회적인 성향을 설명했다." "'노동계급의 권위주의'라는 주제에 대한 립셋의 연구는 특히 저개발국가에서 공산주의 위협과 관련되어 있었다. 월터 리프먼과 새뮤얼 헌팅턴으로 통하는 미국 정치학 내부의 모든 엘리트 전통에 따라, 대중이 상대적인 물질적 복지를 누리며 정치적 무관심 속에 계속 머무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엘리트주의적 시각에서 지식계급은 〈민주주의를 대표하고 자유롭게 만들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182-3)


"발전 노선의 수렴은 민주화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을 바꾸는 데 기여했다. 민주주의는 처음에는 종속변수로서 근대화 이론에 포함되었다. 즉, 민주주의는 발전 정책들이 성장시키기를 원했던 구조적 사회 진화의 결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만드는 것은 발전을 촉진하는 것과 동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1960~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전역에 걸친 권위주의 체제의 구축은 근대화의 과학적 내러티브에 대한 심각한 충격이었다. 근대화는 권위주의적 근대화 행위자들, 즉 관료·기술관료·군부가 수행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동시에 근대화 이론가들의 연구 어젠다는 민주주의보다 안보와 안정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이에 맞서 근대화 이론과 이것의 이데올로기적 편향을 거부한 학자들은 〈미국·라틴아메리카 학문 외교〉를 해체하기는커녕,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새로운 초국가적 정책 네트워크의 행위자로 등장하게 되었다."(188-9)


"일군의 라틴아메리카 학자들은 프레비시의 불균등 교환 이론과 수입 대체 산업화를 종속자본주의의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 급진화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남아메리카의 산업화 과정은 불균등한 교환에서 자신들의 자원을 이끌어냄으로써, 한편으로 민족적인 경영계급과 중산계급 분파를 포함하는 근대적인 부문과 다른 한편으로 전통적인 부문 간의 균열을 발생시키는 사회계급의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균열은 균형발전을 가로막았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주류 분석 틀에 대한 남아메리카의 반대는, 해외 원조와 안보 정책을 학문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비판과 함께 수렴되면서 배가되었는데, 이 비판은 대부분 라틴아메리카 연구자와 학자에게서 나왔다." "1960~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권위주의 정부와 군사 정부의 출현으로 이어진 근대화 계획의 위기는 미국 학문의 장에 이미 존재하던 모순들을 명확하게 드러냈고 이것들을 격화했을 뿐이었다."(191-3)


"여기에서는 종속이론에서 발전한 국가에 대한 구조적 분석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의 분석에 투자되고 민주주의의 촉진을 이론화하기 위해 사용된 정책 지식을 산출하는 데 기여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데이비드 레만이 주장한 것처럼, 이러한 경향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민주적인 경향을 재발견했고 1980년대 후반 사회민주주의의 지지자로서 출현했다.〉 또한 이 경향은 정치적 실천과 행위의 이론들을 강조했으며, 이 정치학자들의 정치 활동은 '민주주의의 문제'와 민주주의로의 이행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관리된 이행 과정의 종착지라는 생각이 자리 잡으면서, 거시구조적 접근 또는 다양한 형태의 계급 분석은 상대적으로 무용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들은 행위 과정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결정론적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가 끝나갈 무렵, 이러한 학문적 지식은 워싱턴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전개한 민주주의를 위한 새로운 국제 성전을 지지하는 공식적인 독트린이 된다."(197, 204)


"1950~1960년대에 미국 이스태블리시먼트가 추구했던 사회과학에 대한 투자 전략은 〈효율적이고, 전문적이며, 온건하고〉 경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범세계적 엘리트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는 통치와 사회변동에 대한 접근을 목표로 했다. 비교정치학과 지역연구 분과는 이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근대화 이론의 형태로 학문적 근거를 산출했다. 특히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에서 두드러진 이 패러다임의 위기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대안적 수단을 모색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역설적으로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근대화 패러다임의 포기였다. 결국 전문적이고 온건한 정치 변동의 개념을 더욱 촉진한 정치 '네트워크'와 초국가적 학문 네트워크의 중추를 제공한 것은 바로 학문 기관들과 재단들의 뒷받침을 받은 미국과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적인 근대화 이론 비판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치학은 국가 전문성과 개혁 정치의 장 내부에서 중시되는 일종의 자본이 되었다."(210)


제4장 민주화 연구와 새로운 정설의 구성


"근대화론의 종식은 종속적인 발전, 권위주의, 그리고 미국 외교정책의 유착을 비판한 학자들의 공격의 결과였다. 그러나 이 학자들과 정치적이고 지적인 그들의 동맹자들은 결국 과거의 이스태블리시먼트가 계획한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국제적인 '엘리트 네트워크'를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비판적인 입장과 연결되어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책임감은 그들의 자유주의 스폰서들뿐만 아니라 미국 행정부와 국제기구들의 관심에 잘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온건한 태도를 향해 이동했다. 민주화와 포괄적인 사회변동 개념을 분리한, 민주주의 이행에 관한 연구는 협상되고 질서 정연하며 궁극적으로 관리 가능한 정치 변동의 개념에 의지했으며, 여전히 사회적·경제적 변동과의 구분과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의 학문적 생산은 메틴 헤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점진적이고 통제된 체제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오랫동안 이스태블리시먼트가 추구한 목표들을 되풀이했다."(214)


"(권위주의 통치로부터의) 이행(transiton) 시리즈에 담긴 라틴아메리카 연구자들의 분석은 방법론적 관점에서 종속이론 패러다임에서의 점진적인 이탈과 일반적으로는 체제 변동에 관한 구조주의적 설명에서의 이탈로 해석되었다. 그 대신 때때로 합리적 선택이론이나 게임이론에 가깝고 정치적인 것의 상대적 자율성을 가정한 미시적 엘리트 분석이 민주주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접근의 기치가 되었다.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저명한 기고자 몇몇의 과거 연구와 정치 활동이 종속이론 학파와 관련을 맺은 상태에서 이행 시리즈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의 불가피성을 이론화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시리즈는 강력한 국제 경제의 정설하에 온건한 케인스주의적 개혁을 수행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이 점을 노골적으로 강조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그들은 1970년대의 지식운동과 관련된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정치학의 경향들을 자본주의적 경제조건하의 비혁명적 변화의 규범이론으로 바꾸어놓았다."(218)


"『권위주의 통치로부터의 이행(Transitions from Authoritarian Rule』(1986) 시리즈는 최선의 전략적 선택으로서 온건한 정치 과정을 제시할 것으로 보이는 민주적 변화에 대해 진정한 책임의식을 강조한다. 산업화와 근대화가 1950년대 정치사회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반드시 민주주의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반대로 종속적인 발전이 오도넬과 종속이론가들이 1970년대에 주장한 바와 같이 반드시 여러 나라를 권위주의로 이끈 것이 아니었다면, 민주주의는 예란 테르보른의 말처럼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특수한 단계의 정치체가 아니라 상황에 따른 결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화적인 변동의 산물이 아니라 특수하고, 이행을 겪으며, 역전 가능한 정치적인 힘의 구현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구조적인 요인들에서 상대적으로 독립된 결과이고, 따라서 적절한 정치 행위자 간에 충분한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언제든지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운동가적 시각이었다."(227)


"민주적인 개혁을 위한 가장 안전한 동맹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통제하고 지배계급이 권위주의 환경에서 이끌어내는 이익을 위협하지 않는 온건한 목표들을 향해 동원을 이끄는 것이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부의 재분배 요구를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민주화 과정에 대해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반대자로서', 더 바람직하게는 그들의 지지자들을 관리하는 반대자로서 기여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성공적 이행에 〈조직된 노동자들의 순응성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셰보르스키의 변화는 전체적인 정치적·지적 변화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주류이자 학문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는 도구인 합리적 선택이론과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대한 성찰을 결합했다. 그 결과는 클라이드 베로가 주장한 바와 같이, 노동계급에게는 〈생산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대가로 자본이 제시하는 구체적인 양보들을 협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었다."(231-3)


"우드로 윌슨 센터의 정치학자들은 민주화를 순전히 '절차적인' 측면에서 정의하고 경험적으로 연구하려고 했다." "정치학에서 이와 같은 주류 전통으로의 복귀는 결국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분석을 '조작화(perationalization)'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의 학문적 규율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종속이론의 비과학적인 특징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러한 기준에 입각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 엘리트들의 전략적 선택에 대한 연구, 상호 경쟁하는 파벌 간의 결합 게임에 대한 분석, 불확실성의 상황(또는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불완전한 정보의 상황)엣 선호의 형성에 대한 질문, 학문적인 도구로서 '거래비용'과 '인센티브' 같은 개념들의 활용은 탄생 중에 있던 이 정치학의 하위 분과가 경제학의 형식적인 자질뿐만 아니라 전문적 정당성을 모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견고한 구조주의에서 합리적 선택이론과의 결합으로 이동한 셰보르스키 같은 사람들의 계속된 연구들은 이 두 번째 측면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다."(236-7)


"신보수주의 정책 전문가들과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비판적 학자들을 대립시킨 상징적 갈등은 그 격렬함 때문에 경쟁자와 어젠다 간의 유사성이 빈번하게 은폐된 완벽한 '세력 확보 싸움'의 사례였다." "신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근대화는 소련과의 긴장 완화와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는 '범세계주의'와 동일시되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동조한 진보 정치학자들은 카터 행정부 정책 중 몇 가지를 냉전 국제주의의 연속이자 다른 수단을 통한 미국 제국주의로 간주했다. 그 결과, 카터 행정부에 대한 그들의 시각도 신보수주의자들의 시각과 마찬가지로 비판적이었다. 신보수주의자들에게 근대화 이론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의 한 분파였던 반면에, 진보 정치학자들에게 그것은 '발전주의' 형태로 적용되는 권위주의 실험의 원인이었다. 양측 모두에게 구조주의가 제공한 광범위한 분석 틀은 정치적으로 무익하거나 위험한 것으로 거부되었다."(248-50)


제5장 국제관계 이론과 인권 네트워크의 해방적 담론


"물질적인 권력 개념에 기반을 둔 낡은 국가들의 세계에 반대해 새로운 '초국가적' 관계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의사소통 과정과 아이디어의 세계이다. 국제관계의 현실주의 모델을 강조한 도구적 합리성에 대해 새로운 접근 방법들은 자유로운 발화 상황이라는 이상을 불러일으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대립시켰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계들은 본질적으로 '아이디어의 힘(power of ideas)'으로서 권력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상징권력은 이러한 권력의 양상에 대해 더 적합한 표현이 될 것이다. 부르디외에게서 빌려온 상징권력 개념은 분할과 구분 짓기, 그리고 위계질서를 '정당한 것'(으로 보이도록) 강요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NGO, 초국가적 이슈 네트워크, 운동가, 도덕 사업가 등 '아이디어 권력'의 국제적 투사들은 대부분 일종의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헤게모니적 현대 권력관계의 정의에서 핵심적인 요소인 경우가 많다."(262)


"여기서 비정부 행위자들은 도덕적인 행위자로, 나아가 국제적인 생활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행위자로 설명되는 경향이 있다. '아이디어의 힘'을 대표하는 국제운동가 네트워크들은 암묵적으로 추상적인 인권의 보편성이든 구체적인 환경의 보편성이든 간에 특수한 보편성을 담지한 행위자의 역할로 개조되었다. 이것은 '아이디어의 힘'이 세계화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실현한다는 식의 일종의 제3섹터의 헤겔주의라 할 수 있다. 그 결과는 앞에서 검토한 연구들이 이 초국가적 운동들을 위해 규범적으로 편향되는 것이었다." "이 담론에서 세계화는 무엇보다 해방의 과정이고, 민주화는 그것의 가장 뚜렷한 양상 중 하나이다. 민주화는 점차 복잡한 정치·사회·경제 발전의 결과라기보다 아이디어의 '확산'이나 '전염'의 과정으로 해석되었고,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경계들을 가로질러 확대된 의사소통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초국가적 주창 네트워크'에 의해 전파되는 기준이 되었다."(263)


"사회적 구성주의의 특이한 경향 중 하나는 사실 책임감을 이끄는 아이디어들이 이것(아이디어)들이 옹호하는 데 기여하는 사회적 정체성과 물질적 인식에 대해 존재론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권운동가들이나 '규범 기획자들'의 네트워크 출현을 인과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네트워크 멤버들의 사회적인 성향과 계산 또는 더 광범위한 구조적 요인들이 아니라 네트워크들이 뒷받침하는 인권이나 기타 가치들의 본질적 타당성(intrinsic cogency)이 된다. 또한 인권운동에 대해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관점'이나 대중적인 의미가 원인으로서 작동하기 위해 그러한 실천에 관여하는 개인들의 동기와 혼합된다. 아이디어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특수한 투자와 계산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없이 그 자체로서 동기가 된다. 그 결과, 이러한 집단적 국제 행위자의 사회적 구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지적 자만은 이론상으로는 그들이 옹호하는 아이디어나 가치에 의해 완벽하게 충족된다."(272-4)


"이처럼 〈부활하고 있는 관념론(resurgent idealism)〉이 정치학에 미친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첫째, 무엇보다 이러한 부활하는 관념론(사회적 구성주의)은 암묵적으로 사회적 실천에서 독립된 영원한 진리로서(sub specie aeternitatis) 자율적인 아이디어의 존재를 가정한다. 실천은 심지어 아이디어의 타당성이라는 원인의 결과로 간주되기도 한다. 따라서 정치학 용어에서 아이디어는 '독립변수'로 간주되어야 한다. 아이디어의 사회적 생산에 대한 탐구의 가능성이 언급될 때조차도 이 가능성은 즉시 회피된다." "둘째, 사회적 구성주의는 한편에 있는 특정 행위자들을 신념에 헌신하는 네트워크에 합체하는 동기와 다른 한편에 있는 그 신념 자체를 혼합함으로써 어떤 행위의 합리성과 이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된 이유나 그것의 정당화 간의 경계를 흐리게 하는 방법론적 걸작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전략적 행위자들의 자기 서술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성찰 없이 과학적 언어로 번역된다."(274-6)


"운동과 외교정책에 대한 관념적 이론들─가령, 인권의 도덕적인 성격에서 정당성을 이끌어내려는─은 아이디어가 기본적으로 〈경쟁에 사로잡힌 개념〉, 즉 상호 경쟁하는 행위자 집단 간의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되는 의미임을 모르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는 국제적 법률 조항이 되기 이전에 실증적이고 다각화된 헌법적 현실로서 출현했다. 따라서 인권과 민주주의는 상호 경쟁하는 해석들과 이해들의 상황에 따르는 대상이 된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의미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실천과 담론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그 결과, 레이건 행정부가 인권의 '의미를 파괴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 외교정책을 위해 이 권리와 이것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심도 깊고 지속적으로 변화시킨 자신만의 인권 독트린을 적극적으로 생산했다. 무엇보다 '아이디어의 힘'을 이해하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은 사실 레이건 행정부의 정치 지도자 집단이었다."(280-1)


제6장 '시장민주주의'의 구성을 위한 재정 지원: 세계은행과 '굿 거버넌스'의 범세계적 감독


"세계은행은 (경제이론을 빌려오고, 처리하며, 적용하는) 학계와 (자신의 주요 후원자의 외교정책과 자신의 활동을 분리할 수 없는) 미국 행정부, 그리고 (금융시장에 갈수록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는) 은행들의 교차점에 위치함으로써 상이한 권력의 지위들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복잡한 기관이다."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세계은행은 '굿 거버넌스' 개념을 받아들여 정치적 참여, 투명성, 책무성, 또는 법의 지배 촉진에 관여하는 규범적인 기관이 되었다." "학식 있는 민주주의 옹호자들의 성공은 세계은행이 공식 파트너가 되고, 참여와 권능 강화의 테마와 인권과 환경보호의 테마를 만든 NGO들의 성공과 만나게 되었다. 초국가적 이슈 네트워크의 '사회적 구성주의' 이론의 생산은 올바른 신념과 피지배 집단을 대변하는 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적 전환'은 전적으로 경제적 구조조정과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혁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296-8)


"'굿 거버넌스' 어젠다로 마련된 새로운 개발운동은 도덕적이면서도 법률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공공 부문의 순수성과 정치인들의 책무성을 위한 부패와의 전쟁을 포함했고, '실패한 국가'와 저개발의 문제들에 대한 치료약으로서 '법의 지배'라는 미덕을 강하게 신뢰했다. 또한 정책 결정 과정뿐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문제도 새로운 개발 어젠다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생기 있는 '시민사회', '투명한' 제도와 참여가 통치자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행정가들을 책임 있게 만들기 위해 요구되었다. 그 결과, 세계은행은 자신의 임무 때문에 기술적·비정치적 방법을 통해 이 정책들을 수립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지만, 이러한 발전운동은 자유주의 체제의 출현을 촉진한 친민주주의 정책과 쉽게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으로 편협하고 정치적으로 위험한 구조조정에 대한 관심과의 단절로 간주되었다. 또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반민주주의적 칼날을 가지고 있음을 명시해야 했다."(323)


"이 같은 세계은행의 '진보적'이고 해방적이며 민주적인 전환은 NGO들의 새로운 역할의 발전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거버넌스 개념이 옹호하는 수많은 주제는 이러한 비정부 행위자들의 관심을 명확하게 반영했으며, NGO들의 전문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정치제도, 법률 환경, 민중의 참여, 권리, 시민사회의 역할에 맞추어진 강조를 넘어서, 이 개념은 때때로 호소력 있는 해방의 언어를 전달하기도 했다." "또 세계은행이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되는) 최소국가의 촉진과 거리를 두었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1997년 세계은행 개발 보고서는 최소국가의 편협한 주장을 비판하고 개발을 위해 시장 지향적 전략을 적용하는 데 〈국가들은 이따금 이 목표를 과도하게 달성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시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0년 전에 제3세계 국가가 구조조정을 충분하게 실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세계은행을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주장이었다."(324-5)


"즉, 정부를 통한 더 적은 통치는 세계은행이 추구한 구조조정 방식에 내재한 문제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거버넌스' 정의에 대한 잇따른 연구들은 정책 작성과 실행에 적절하다고 간주되는 영역들을 (국가-사회 관계의 모든 시스템이 걸려 있는 지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특징이 있다. 강조점은 가격 메커니즘과 무역 및 통화 문제로부터 제도, 법률, 이익집단, 책무성, 정치적 자유, 인권을 향해 계속해서 이동했다. 즉, '굿 거버넌스'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목표들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세계화와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의 주요 신봉자들을 좇아 국가를 새롭게 개조함으로써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실행을 수정함을 의미했다. NGO에 대한 개방,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인기 없는 이 정책들을 정당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게 해주었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수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구성 인자들과 이익 주창자들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대되었다."(327-8)


"'거버넌스' 개념은 세계은행의 목표를 경제에서 정치와 사회로 이동하게 하면서 경제학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과거의 초점과 대조되는 사회적·경제적 발전 메커니즘에 대한 조사·연구·실험의 영역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영역을 장악하는 것은 정통 경제학의 틀에서 벗어나고 수학적 공식화와 계량적 변수로의 환원에 몰두하지 않는 지식 생산을 의미했다. 그것은 행정과 이익집단 간의 연계, 비공식적인 사회구조와 코드화된 규범들의 상대적인 비중, 정치적·경제적 행위에 대한 가치 체계의 역할, 법률 시스템과 정책 결과 간의 관계, 정책 과정 공개의 정도를 탐구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반대로 미디어의 지위와 대중 참여의 경로, 나아가 정치적 자유와 권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치체제의 성격을 포함했다. 즉, '거버넌스'를 향해 문제를 전환하는 것은 정통 경제학 이외의 다른 전공에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치학과 정치경제학은 이렇게 해서 경제학과 경쟁할 수 있는 자원이 되었다."(328)


"1980년대 내내 지속되었고 워싱턴 컨센서스를 강조한 지식의 서열은 구조조정 정책을 향한 변화와 세계은행으로 대표되는 이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들을 연구한 비경제학자들의 비판적 태도를 설명해준다. 권위와 정당성이 결여된 이 비경제 전문가들에게 NGO는 단순화된 형태로나마 그들의 연구 내용을 광범위하고 다양한 청중에게 전파할 수 있는 효과적인 '브로커'로 보였다. 반대로 많은 NGO들은 쉽게 '시민사회'나 '참여'의 전문가로 대표될 수 있는 학자들을 영입함으로써 그들의 전문적인 프로필을 강화하려고 했다." "학계에 대한 NGO의 개방은 1980년대에 일어난 비정부운동의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수많은 NGO에게 그것은 그들이 부족했던 과학적 신뢰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그뿐만 아니라 학자들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기부자들과 개발은행 또는 다른 NGO들을 지원하기 위한 서비스 제공을 위해 전문성의 자본을 증가시키는 방법이기도 했다."(332-3)


"구조조정의 구호가 '가격을 정당하게 만들기'였다면,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개발 어젠다의 공고화는 이 구호를 '정치를 정당하게 만들기'로 대체한 것으로 보였다. 제도의 '투명성'을 증가시키고 법률적인 틀을 강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 계획들은 더는 경제적인 면이나 비용·이윤 분석을 통해 평가되지 않는다. 이것보다 필요한 것은 '시민사회'의 자율성 정도나 정치제도의 개방도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들과 정책 결정 절차에 대한 제도적이고 사회학적인 연구들, 즉 사회과학자들이 경제학자들보다 쉽게 제공할 수 있는 지식들이다." "'거버넌스' 어젠다는 인권, 민주적 발전, 빈곤 완화, 환경, 소수자의 권능 강화, 인종적 문화 등을 민영화, 서비스 및 사회관계의 공동 조정, 그리고 글로벌 시장을 향한 개방과 조화롭게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어젠다에 내포된 갈등이나 모순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확대를 해방과 권능 강화의 힘으로 각색하려는 전략이 성공했음을 보여준다."(336-7)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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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그들의 정치 -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이슨 스탠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솔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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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나는 권위주의적 지도자의 인격이 국가를 대표하는 여러 종류(민족, 종교, 문화)의 초국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 '파시즘'이라는 명칭을 선택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7월 공화당 전당대회 연설에서 〈나는 당신들의 목소리다〉라고 선언한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 책에서 내가 말하려는 주된 것은 파시스트 정치이다. 특히 구체적인 관심사는 권력을 얻기 위한 메커니즘으로서의 파시스트 전술이다. 그러한 전술을 쓰는 사람들이 일단 권력을 잡고 나면, 그들이 세운 정권의 형태는 상당 부분 각 나라의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파시스트 정치에는 신화적 과거, 프로파간다, 반지성주의, 비현실성, 위계, 피해자의식, 치안, 성적 불안, 전통에 대한 호소, 공공복지와 통합의 해체 등 서로 다른 많은 전략들이 있다. 특정 요소들의 옹호는 합법적이고 때로 정당화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것들이 하나의 정당이나 정치운동으로 합쳐지는 때가 존재한다. 바로 이때가 위험한 순간이다."(15-6)


1 신화적 과거


"파시스트 정치가 하나같이 자신의 기원을 찾았다고 주장하는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그것은 바로 과거다. 파시스트 정치는 비극적으로 파괴된 순수한 신화적 과거를 들먹인다. 국가가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 그 신화적 과거는 종교적으로 순수할 수도 있고, 인종적으로 순수할 수도 있고, 문화적으로 순수할 수도 있으며, 그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파시스트적 신화화에는 공통된 구조가 있다. 모든 파시스트의 신화적 과거에는, 불과 몇 세대 전까지도 극단적인 형태의 가부장적 가족이 군림하고 있었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신화 속 과거는 애국적인 장군들이 이끄는 정복전쟁, 동포들로 가득한 군대, 집에서 다음 세대를 키우는 아내를 둔 강건하고 충성스러운 전사들로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국가의 시간이었다. …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은, 세계주의나 평등 같은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존중 때문에 이러한 영광스러운 과거가 굴욕적으로 상실되었다고 한다."(25-6)


"대개 이러한 신화들은 실재하지 않은 과거의 순일성에 대한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는 자유주의에 물든 도시적 퇴폐에 상대적으로 덜 오염된 작은 마을과 시골 지역의 전통 속에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이러한 (언어적·종교적·지리적·민족적) 순일성은 일부 민족주의 운동에서는 아주 평범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파시스트 신화는 선택받은 민족의 구성원들이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여 문명을 건설하고 지배한 영광스러운 민족사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주의 운동과 구별된다." "파시스트 신화 속에서 과거는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인 이데올로기를 떠받치는 특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과거 사회들이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묘사하는 것만큼 가부장적이거나 실제로 영광스러웠던 경우는 드물지만, 이러한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이 상상된 역사가 현재에 위계를 부여하는 일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공하고, 현재의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고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한다는 점이다."(26-7)


"파시스트 사회에서, 국가의 지도자는 전통적인 가부장제 가족의 아버지와 유사하다. 가부장제 가족에서 아버지의 힘과 권력이 자녀와 아내에 대한 궁극적인 도덕적 권위의 원천인 것처럼, 지도자는 국가의 아버지이며 그의 힘과 권력이 그의 법적 권위의 원천인 것이다." "국가의 과거를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모습으로 그려냄으로써 파시스트 정치는 중앙집중적으로 조직된 위계적 권위주의 구조에 향수를 부여하고 그것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표준으로 만든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영국의 나치즘 역사학자인 리하르트 그룬베르거는 〈여성 문제에 대한 나치사상의 핵심〉을 〈인종 간의 불평등이 불변하는 만큼이나 성별 불평등도 불변한다는 신조〉로 요약한다." "파시스트 정치에서, 자유주의적 이상의 침해로 위협받는 가부장적 과거의 신화는, 남성과 지배집단이 자신의 순수성과 지위를 외국의 침범으로부터 보호할 능력이 없으면 사회적 지위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한다."(29-30, 37)


2 프로파간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정책을 대놓고 추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치 프로파간다의 역할은 명백히 문제가 있는 정치적 목표를,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상으로 가려서 숨기는 것이다. 권력을 위한 위험하고 불안정한 전쟁이 안정과 자유를 목표로 하는 전쟁으로 둔갑한다. 정치 프로파간다는 고결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렇지 않았더라면 반대할 만한 목적들을 지지하도록 사람들을 결속시킨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은 문제가 있는 목표를 고결한 목표로 가린 좋은 예이다." "닉슨의 비서실장 홀더먼은 1969년 4월 수첩에 닉슨의 말을 인용해 적었다. 〈자넨 정말로 모든 문제의 원인은 흑인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해. 관건은, 그렇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 사실을 감안한 시스템을 고안하는 것이지.〉 닉슨은 범죄 억제라는 강령이 그의 행정부의 국내 정책 배후에 있는 인종차별적 의도를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55-6)


"파시스트 운동은 몇 세대에 걸쳐 '적폐청산'을 내걸어왔다. 그 자신이 부정행위에 관여하면서도 거짓 부패 혐의를 공표하는 것은 파시스트 정치의 전형적인 특징이며, 반부패 캠페인이 파시스트 정치운동의 핵심이 되는 경우도 많다." "파시스트 정치인에게 부패란 사실 법의 부패라기보다는 순결의 부패이다." "많은 백인 미국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틀림없이 부패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가 백악관을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일종의 전통적 질서의 부패였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보통 남성들을 위해 마련된 정치권력의 자리에 오를 때(혹은 이슬람인, 흑인, 유대인, 동성애자 또는 '세계시민주의자'가 보건의료와 같은 민주주의 공공재의 혜택을 입거나 공유했을 때), 그것은 부패로 인식된다. 파시스트 정치인들은 지지자들이 그들 자신의 진짜 부패에 대해서는 눈감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경우에는,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들이 정당한 자신의 몫을 가져가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56-9)


"파시스트 정치가 반부패라는 명목으로 법치를 공격하듯이, 그것은 자유를 수호하고 개인의 자유권을 보호한다고 자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어떤 집단을 억압하는 조건으로 얻어진다." "노예제 관행을 옹호하기 위해 남부연합이 자유의 개념을 사용하고, 노예제를 옹호하기 위해 남부 주들이 '주의 권리'를 요구했을 때, 그리고 히틀러가 독재 통치를 민주주의로 표현했을 때, 자유민주주의적 이상들은 그 자체를 잠식하는 가면으로 사용되었다. 그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반자유주의적 목표가 사실은 자유주의적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허울 좋은 논증을 발견할 수 있다." "요제프 괴벨스 나치 선전부장관은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농담은 항상 이런 것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는 자신을 파괴하는 수단을 그 불구대천의 원수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파시스트들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이용하여 그 자신과 대립하도록 만드는 이런 비법을 언제나 잘 알고 있었다."(61-6)


3 반지성


"파시스트 정치는 자율적인 반대 목소리를 지지하는 기관들의 신뢰를 훼손시키려고 한다. 그러한 목소리를 거부하는 언론과 대학으로 그 기관들을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한 가지 전형적인 방법은 위선에 대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다. 바로 지금, 오늘날의 우익운동은 대학들이 표현의 자유에 대해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대학들이 표현의 자유를 가장 존중한다고 주장하지만 우익의 목소리에 대한 항의 시위를 캠퍼스에서 허용함으로써, 좌편향되지 않은 목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 캠퍼스의 사회정의운동에 대한 비판자들은 자신들을 항의 시위의 피해자로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시위자들이 그들 자신의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학자들이 만들어내는 작업물에는 분야에 따라 정치적 함의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우익의 공격은 허용 가능한 연구의 선을 통제하려는 우익의 욕구를 분명히 드러낸다."(75-6, 80)


"파시즘이 위협을 가할 때에는 언제나, 그 대변자들과 조력자들은 대학과 학교를 '마르크스주의의 세뇌'의 원천이라고 비난하는데, 이는 파시스트 정치의 대표적인 겁주기 방식이다. 대개는 마르크스나 마르크주의와 상관없이 쓰이는 이 표현을, 파시스트 정치는 평등주의를 비방하는 방법으로 사용한다. 아무리 작아도 소외된 관점들에 어느 정도 지적 공간을 주고자 하는 대학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온상이라고 비난을 받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파시즘은 지배적인 관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파시즘 시기 동안에는 지배적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가르치는 학문들을 비난하는 인물이 강력한 지지를 얻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연구나 젠더 연구, 또는 중동 연구 같은 분야가 그런 비난을 받는다. 지배적인 관점은 종종 진실로, 즉 '진짜 역사'로 둔갑하고, 대안적 관점을 위한 공간을 허용하려는 시도들은 모두 '문화적 마르크스주의'라는 조롱을 받는다."(81-2)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자문이나 토의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본다. 전문지식의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파시스트 정치인들은 지적으로 세련된 논쟁을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든다. 현실은 우리가 그것을 나타내는 방식보다 항상 더 복잡하다. 과학 언어는 그것 없이는 보이지 않는 구별을 나타내기 위해 훨씬 더 복잡한 용어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현실은 적어도 물리적 현실만큼 복잡하다. 건강한 자유민주주의에서, 구별을 나타내기 위한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가진 공공언어는 필수적인 민주주의의 기구이다. 그것 없이는 건강한 공적 담론이 불가능하다. 파시스트 정치는 정치 언어의 질을 떨어뜨리고 저급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파시스트 정치는 현실을 가리고자 한다." "건강한 자유민주주의에서 언어는 정보의 도구이다.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의 목표는 단지 정책에 대한 활발하고 복잡한 공적 논쟁을 조롱하고 비웃는 것만이 아니다. 그런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 그 목표이다."(94-5)


4 비현실


"파시스트 정치는 현실을 특정 개인이나 특정 정당의 발언으로 대체한다. 명백한 거짓말을 수시로 반복하는 일은 파시스트 정치가 정보 공간을 파괴하는 과정의 일부이다. 파시스트 지도자는 진실을 힘으로, 결국 무의미한 거짓말로 대체할 수 있다." "철학자 줄리아 나폴리타노는 음모론을 내집단의 이익을 위해 외집단을 '표적' 공격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음모론은 그 표적물을 문제 있는 행위와 (주로 상징적으로) 관련 지음으로써 폄하하고 퇴출시키는 기능을 한다. 음모론은 보통의 정보처럼 기능하지 않는다. 때로는 너무 억지스러워 아무도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오히려 음모론의 기능은 그 표적의 신뢰성과 도덕성에 대한 막연한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음모론은 주류 언론의 신용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용되는 중요한 장치이다. 파시스트 정치인들은 거짓 음모들을 취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론을 편향적이라고 비난한다."(101-3)


"음모론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경험을 쉽게 무시하기 때문에, 음모론이 거짓이라는 것이 입증되어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 2017년 6월 텍사스 주지사 그레그 애벗이 서명한 텍사스 하원 법안 45호 '미 법원을 위한 미국법'은 무슬림들이 이슬람 법을 텍사스주 안으로 들여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무슬림들이 텍사스를 몰래 이슬람 공화국으로 바꾸려 한다는 것은 정말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실제로는 무슬림인데 미국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기독교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가설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음모 이론들은 효과가 있는데, 보통은 원한이나 외국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이 비이성적이라고 여겨지지만, 지금은 위협이 감지된 상황이니 그럴 만하다는 단순한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일단 대중이 자신들의 비이성적인 공포와 원한에 대한 설명을 음모론의 위안에서 찾으면, 정치적 문제를 숙고할 때 이성의 인도를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111-2)


"밀의 『자유론』과도 연관되는, '아이디어의 시장' 개념은 간섭 없이 놔두면 거짓을 몰아내고 지식을 생산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자유시장 개념과 같은 '아이디어의 시장'이라는 개념은 소비자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해에 기반한 것이다. 아이디어 시장이라는 은유의 경우에는, 대화가 근거들의 교환에 의해 작동한다는, 즉 한쪽 당사자가 이유를 제시하면 상대방이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 그렇게 결국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된다는 유토피아적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대화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만이 아니다. 대화는 관점을 가로막고, 두려움을 일으키고, 편견을 높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아이디어의 시장'을 옹호하는 논증은 말이 〈기술적, 논리적 또는 의미론적〉으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정치에서, 그리고 특히 파시스트 정치에서, 언어는 단순히 (또는 심지어 주로) 정보 전달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된다."(113-5)


5 위계


"〈인간의 운명은 평등하지 않다. 인간은 건강과 부, 사회적 지위 또는 그 밖의 것들에서 서로 다르다. 단순한 관찰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은, 그런 모든 상황에서 더 혜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지위를 '정당한' 것으로, 자신의 특권을 '자격 있는' 것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의 불이익을 그들의 '잘못'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볼 필요성을 끊임없이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 차이가 순전히 우발적인 원인 때문이라는 것이 아무리 명백하다고 해도, 여전히 그러하다〉(막스 베버, 『경제와 사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보기에, '자연'은 자유민주주의 이론이 전제하는 평등한 존중과 단적으로 모순되는 권력과 지배의 위계를 부과한다. 위계는 파시스트 정치가 손쉽게 악용하는 일종의 집단 망상이다." "그들이 위계를 정당화하는 원리는 자연 그 자체이다. 파시스트에게 평등 원칙은 자연법칙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연법칙은 남성을 여성보다, 파시스트의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을 다른 집단들보다 우선시한다."(129-31)


"개빈 에반스는 2018년 3월 『가디언』의 기고문 「인종과학의 반갑지 않은 부활」에서 정치학자 찰스 머레이와 하버드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와 같은 인물을 통해 어떻게 〈인종과학이 주류 담론에 스며들고〉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 에반스에 따르면, 2005년 핑커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선천적으로 특별히 똑똑하다〉라는 견해를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에반스는 이 견해를 〈인종과학의 웃는 얼굴〉이라고 말한다.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선천적으로 특별히 똑똑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자들이 다른 집단의 '선천적 지능'에 대한 결론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한다. 2007년 온라인 출판물 『디 엣지The Edge』에 기고한 글에서 핑커는 '정치적 올바름'이 연구자들이 '위험한 생각'을 연구하지 못하게 했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종류의 글쓰기의 문제는, 불평등의 원천을 자연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평등에 대한 가슴의 호소를 이성에 따라 거절하는 용감한 진실 추구자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134-5)


"파시스트에 따르면 평등은 자유주의의 트로이 목마다. 유대인, 동성애자, 무슬림, 비백인, 페미니스트 등 다양한 이들이 오디세우스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평등의 신조를 퍼뜨리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 이념에 감염된' 호구이거나, 실제로는 비자유주의적인 기만적 목적으로만 자유주의의 이상을 퍼뜨리고 있는 국가의 적이다. 파시스트 프로젝트는 참된 '민족' 구성원들의 지위 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혐오의 대상이 되는 소수집단의 평등이 인정된다는 두려움과 결합한다." "위계에서 혜택을 받고, 그러한 혜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우월한 존재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며, 이 신화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가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관용과 포용을 요청하는 자유주의자들의 탄원을 불신할 것인데, 그러한 탄원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가면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파시스트 정치는 위계적 지위의 상실이 억울한 피해자를 낳는다는 피해자의식을 먹고 산다."(142-4)


6 피해자의식


"파시스트 정치에서는, 평등과 차별이라는 반대되는 개념이 서로 뒤섞인다. 1866년 민권법은 새로이 해방된 남부 흑인들을 미국 시민으로 만들고 그들의 시민권을 보호했다. 그 법은 1866년 3월 14일 상원과 하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달 말,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이 법이 수립한 유색 인종 보호를 위한 안전조치는 정부가 백인 인종을 위해 제공한 그 어떤 조치보다도 훨씬 더 크다〉라는 이유로 민권법을 거부하였다. W. E. B. 듀보이스가 지적했듯이, 존슨은 미래의 흑인 평등을 향한 출발점이 되는 최소한의 안전조치를 '백인에 대한 차별'로 인식했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소수자였던 집단의 구성원들이 더 큰 대표성을 얻게 되면 지배집단들은 이를 위협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에 대한 많은 연구가 수행되어왔다." "시민권과 권력을 소수집단과 공유하게 된다는 전망이 등장할 때, 지배집단이 갖게 되는 피해자의식을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 국제 파시스트 정치의 보편적인 요소이다."(149-52)


"파시스트 프로파간다는 지배적 지위의 상실에 동반되는 괴로움에 대해 애달픈 송가를 부르게 마련이다. 파시스트 정치는 그 느낌만은 진짜인 이 상실감을 조작해 억울한 피해자의식으로 바꾸어서, 과거의 억압이나 현재 계속되는 억압 또는 새로운 형태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한다. 구조적인 경제적 원인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백인 노동자계급 남성이 '당신의 특권을 봐라Check your privilege'라는 말을 들으면, 도리어 백인 우월주의 운동에 관심이 쏠릴 수도 있다. 백인 우월주의 의제를 평평한 운동장에 대한 요구로 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파시스트 정치는 이러한 진지한 자유주의적 명령을 크게 조롱한다." "되레 이 문구는 공적 영역에서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할 때 사용되는데, 백인 민족주의 프로파간다가 보기에는 2017년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발견되지 않고 오히려 백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많이 발견된다고 하기 때문이다."(156-7)


# Check your privilege : 2014년 미국 대학 사회에서 퍼져나간, 사회적 불평등과 특권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캠페인


"민족주의는 파시즘의 핵심이다. 파시스트 지도자는 집단적 피해자의식을 이용하여, 자유민주주의의 국제주의 정신이나 개인주의에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집단 정체성의 감정을 조성한다." "헝가리 총리 오르반은 이른바 유럽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헝가리의 신화적 과거를 이용하여 이민자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부채질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유주의 엘리트들('유럽의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이 이민자들의 파도가 밀려오도록 내버려두는 바람에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종교'가 내부로부터 무너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고는 위태로운 기독교 유럽을 방어할 수 있을 만큼 용감한 전사 지도자로 자기 자신을 내세운다. 잔혹한 전쟁을 피해 탈출한 난민들은 오르반의 눈에는 기독교 유럽의 성벽 안에 '이적 집단'을 수립하려는 강력한 침략 세력으로 보일 뿐이다." "그는 야만적이고 무법한 무리들에 맞서 헝가리를 다시 영광스러운 과거로 되돌려놓을 때, 자신의 뒤에 서달라고 촉구한다."(166-8)


7 법질서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는, 모든 시민을 평등하고 공정하게 대우하는 법률에 의해 다스려지며, 치안유지의 임무를 맡은 이들을 포함하여 사람들 사이의 상호 존중의 유대감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이 구사하는 소위 '법질서law and order' 수사법은 시민을 대놓고 두 계급으로 나누고자 한다. 천성적으로 합법적인 선택받은 민족과, 본래 무법하고 선택받지 못한 민족으로 나누는 것이다. 파시스트 정치에서 전통적인 성 역할에 맞지 않는 여성, 비백인, 동성애자, 이민자, 지배적인 종교를 믿지 않는 '퇴폐적인 세계시민주의자들'은 그 존재 자체가 법질서 위반이다. 미국의 선동가들은 흑인들을 법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함으로써, 비백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는 백인 국가 정체성이라는 강력한 감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이민자들에 맞서 주민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공포에 기반해 친구와 적의 구별을 만들어내는 비슷한 전술이 사용되고 있다."(172-3)


"'범죄자'라는 단어에는 물론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있지만, 다른 울림을 주는 의미도 있다. 즉, 본질적으로 사회의 규범에 둔감하고, 사리사욕이나 악의로 법을 어기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저 범법을 저질렀다고 해서 범죄자인 것도 아니다. '범죄자'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 특정 유형의 성격을 부여하는 말이다. 심리학자들은 '집단 간 언어 편향'이라고 부르는 관행을 연구해왔다. 우리가 '우리'의 하나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와, 우리가 '그들'의 하나로 간주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 상당히 다르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잘 차려입은 백인 미국인이 수갑을 차고서 경찰차 뒷좌석에 있는 모습을 백인 미국인이 본다면, 그는 아마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가 저렇게 체포되었는지를 궁금해할 것이다. 반면 수갑을 찬 흑인 미국인이 경찰차 뒷좌석에 있는 것을 백인 미국인이 본다면, 그는 경찰이 어떻게 '저 범죄자'를 잡았는지를 궁금해할 것이다."(176-8)


# 좋은 행동에 대해서는 정반대로 '우리'의 선행은 성격적 특성으로 묘사되고, '그들'의 선행은 구체적 행동으로 묘사된다.


"선동적인 언어는 단지 공적 담론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민들 전체의 판단과 인식에 뿌리 깊이 영향을 미친다. 범죄자는 성격에 결함이 있는 사람으로, 그 본성상 사회가 어떻게 구제할 수 있는 가망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파시스트 프로파간다는 그들이 표적으로 삼은 집단의 구성원을 그저 범죄자로만 내세우지는 않는다. 이러한 집단들에 대한 공포를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구성원들은 파시스트 민족에 특정 종류의 위협이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순수성에 위협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결과 파시스트 정치는 한 가지 종류의 범죄를 강조한다. 파시스트 프로파간다가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본적인 위협은, 표적 집단의 구성원들이 선택된 민족의 일원을 강간하여 그 '피'를 오염시킬 것이라는 위협이다. 집단 강간의 위협은 동시에 파시스트 민족의 가부장적 규범, 민족의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진다."(189-92)


8 성적 불안


"역사학자 키스 넬슨은 1970년 논문 「'라인강의 검은 공포':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외교의 한 요소로서의 인종」에서, 1919년 프랑스군 소속 아프리카 군인들이 라인란트를 점령했을 때 독일이 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혔던 일을 기록한다.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온 프랑스 군인들이 독일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는 가상의 사건에 대한 독일의 프로파간다는 들불처럼 퍼져나갔고, 기사는 에스페란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다. 이 프로파간다는 '인종에 민감한' 미국에서 특히 성공적이었다." "히틀러에 따르면, 흑인 군인들을 이용하여 순수한 아리안 여성들을 강간함으로써 '백인종'을 파괴하려는 음모의 배후는 유대인들이었다. 1920년대에 미국의 KKK 역시 흑인 남성들이 백인 여성을 집단 강간하도록 유대인들이 의도적으로 일을 꾸몄다는 공상을 공공연히 주장했다." "미국에서 흑인 남성을 린치하는 관행은 백인 미국 여성의 순수성을 방어할 필요성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었다."(196-8)


"가부장적 남성성은 사회가 남성들에게 가족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부양자의 역할을 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극심한 경제적 불안의 시기에, 성소수자를 공격하는 선동은 성평등의 증가 때문에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해 이미 불안해진 남성들을 쉽게 공황에 빠뜨릴 수 있다. 여기서 파시스트 정치는 불안의 근원을 의도적으로 왜곡한다.(즉, 경제적 어려움의 근본 원인은 도외시된다.) 파시스트 정치는 경제적 불안으로 고조된 남성의 불안을 뒤틀어서, 전통적 가족구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족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는 두려움으로 바꾼다. 다시금 여기서도, 파시스트 정치는 성폭행의 잠재적 위협을 무기로 사용한다." "파시즘이 트랜스 여성을 공격하고, 이 두려운 타자를 민족의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묘사하는 것은, 남자다움이라는 생각 자체를 정치적 관심의 중심에 놓고, 물리력을 통한 지배와 위계의 파시스트적 이상을 공공영역에 점차 도입하는 방법이다."(204-7)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를 행사하는 일이다. 여성이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자유의 행사이다. 파시즘 정치는 임신중절을 어린이에 대한 (그리고 남성의 통제에 대한) 위협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유주의적 자유의 이상을 의문시한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권리는 자유의 행사다. 이종혼의 가능성 때문에 특정 종교나 인종의 구성원을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내는 것은 자유주의적 자유의 이상을 의문시하는 일이다." "여성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남자의 능력이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하면, 파시스트 정치인들에게 어려운 정치적 문제가 해결된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정치인은 대중들에게 지지를 얻기 어렵다. 그래서 성적 불안을 조장하는 정치적 전술은 안전이라는 미명하에 이 문제를 피해가는 한 가지 방법이다. 이 방법을 사용하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공격하고 훼손하면서도 대놓고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208-10)


9 소돔과 고모라


"국제적 대도시와 그 문화적 생산물에 대한 히틀러의 비난은 파시스트 정치의 표준이다." "파시스트 정치에서, 가족 농장은 국가 가치의 초석이고 가족 농장 공동체는 군대의 근간이 된다. 국가 가치의 이 생명 중추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도시로 유입되는 자원들을 농촌 지역으로 돌려야 한다. 농촌 사회는 민족의 순수한 피의 원천이기 때문에, 이민을 통해 외부의 피가 섞여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2017년 4월 21일 『가디언』에 실린 한 기고문은 국민전선과 그 대선 후보인 마린 르펜의 근거지를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와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르펜의 '강경 안보와 반이민' 메시지는 당에 대한 농촌의 지지가 급증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런 지역에서는 〈심지어 이민자가 거의 없는 곳인데도〉 반이민 정서가 깊이 만연해 있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의 거친 반이민 언사는 이민자가 거의 없는 농촌 지역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218-21)


"파시스트 정치는 대도시 바깥의 사람들을 겨냥하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 메시지는 193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것처럼, 경제력이 신흥 세계경제의 중심지인 대도시 지역으로 이동하는 세계화 시대에 특히 반향을 일으킨다. 파시스트 정치는 세계화된 경제가 시골 지역에 끼치는 피해를 강조하며, 자유 도시들의 성공이 전통적인 시골의 자급자족 등의 가치를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협에 처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이뿐만 아니라 파시스트 정치는 열심히 일하는 시골 주민들이 게으른 도시 거주자들의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돈을 내고 있다는 모욕적인 신화를 부채질한다. 그래서 그 성공 기반이 시골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시스트 정치인들이 도시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주장의 정확성 여부는 그들의 성공에 딱히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러힌 메시지는 도시에 살고 있지 않은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키지만, 도시 거주자들에게 호소할 필요는 없다."(221-3)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서, 도시는 민족의 구성원들이 자식도 없이 늙어 죽으러 가는 장소이며, 그들을 둘러싼 경멸스러운 타자들의 거대한 무리가 통제 불능으로 번식하여 그 자녀들이 국가에 영구적인 부담을 주는 곳이다. 파시스트 세계관에서 도시는 사람들이 생존과 안락을 위해 공공 기반시설인 '국가'에 의존하고 있는 집단 기업이다. 도시 거주민들은 파시스트 신화에서와 같이 사냥이나 식량 재배를 하지 않는다. 가게에서 구입할 뿐이다. 이는 농촌의 농업 자급자족이라는 파시스트적 이상과 배치된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서 부양을 담당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민족이다. 공동체로 활동하는 자족적 개인들로 이루어진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순수한 작은 공동체들이 그것이다." "파시스트 정치에서, 도시에 사는 소수민족의 게으름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은 강제 중노동을 시키는 것밖에 없다.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중노동은 태생적으로 게으른 인종을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230-2)


10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서, 위기와 궁핍의 시기에 국가는 선택된 민족의 구성원들을 위한 지원을 마련해둔다. '그들'이 아닌 '우리'를 위한 지원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한결같다. '그들'은 게으르고 직업윤리가 결여되어 있어 국가 자금을 믿고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자이고 국가 부조금만 받아먹고 살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 정치에서, '그들'의 게으름과 도둑질은 강제 중노동으로 고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의 출입문에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구호가 쓰여 있었던 이유이다." "국가와는 대조적으로. 민족에는 '복지'와 같은 장치가 없다. 히틀러는 복지를 맹비난했는데, 개인이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국가는 근면한 시민의 부를, 우성優性 민족이나 종교 공동체 밖에서 편승하고 있는 '자격 없는' 소수자들에게 재분배하는 일을 맡아서 하는 것이다."(237-8)


"'근면' 대 '게으름'의 이분법은 '준법자' 대 '범죄자'의 이분법처럼 '우리'와 '그들' 사이의 파시스트적 분열의 핵심에 놓여 있다. 이러한 수사법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전형적으로 파시스트 운동은 사회정책을 통해 '그들'에 대한 신화를 현실로 바꾸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난민정책에서 이를 흔히 볼 수 있다." "멸시받는 소수집단의 구성원들을 잔혹하게 대하고 국경 너머 난민으로 쫓아 보내면서, 파시스트 운동은 소수집단의 구성원들이 게으르고 국가 원조나 사소한 범죄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외관상의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파시스트 정치를 효과적으로 만드는 조건들도 다른 나라로 수출하는 것이다." "파시스트 정치와 파시스트 정책은 서로 쉽게 분리될 수 없다. 파시스트 정치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단 권력을 잡게 되면, 한때 허황했던 발언들을 점점 더 그럴듯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직권을 사용하려는 강한 유혹을 받게 된다."(240-2)


"우리/그들의 분열을 가로막는 하나의 장애물은 계급 내의 단결과 공감이다. 잘 단합된 노조의 백인 노동자계급 시민들은 흑인들을 혐오하기보다는 흑인 노동자계급 시민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런데 파시스트 정치인들은 분열적인 정책에 저항하는 이러한 연대의 효과를 이해하고 있기에 노동조합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엘리트들'을 비난하면서도, 파시스트 정치는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노동조합은 다양한 차원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묶는 주요한 장치다. 노동조합은 협력과 공동체의식, 그리고 임금 평등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의 급변으로부터 보호를 제공하는 장치이다. 그러나 파시스트 정치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반드시 파괴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개별 노동자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바다를 혼자 헤쳐나가도록 남겨져서, 결국 당이나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될 준비가 갖춰져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에 대한 반감은 파시즘 정치의 주요 주제이다."(253-4)


"그러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노동조합을 표적으로 삼는 데는 더 많은 이유가 있다. 파시스트 정치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조건에서 가장 효과적이다." "파시즘은 공포와 원한을 동원해 시민들을 서로 대립시킬 수 있는 경제적 불확실성의 상황에서 번성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은 파시즘 정치가 발판을 얻는 것을 막는 장치가 된다." "오늘날, 미국 28개 주에서 통과된 소위 '노동권' 법안은 노동조합이 회비 납부를 원하지 않는 직원에게 회비를 청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비를 납부하지 않기로 한 직원들의 권리도 조합이 동등하게 대표하고 변호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법률 제정의 의도는 노동조합의 자금원을 막음으로써 노조를 파괴하는 것이다. '노동권'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교섭 능력을 공격하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빼앗는 법률의 오웰식 명칭이다. 미국 노동자들의 중서부 보루인 위스콘신과 미시간에서 노동권 법이 통과된 후, 주의 정치는 급격히 우경화되었다."(255-8)


"우리는 파시즘이 획일적인 대중으로부터 힘을 끌어온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흔히 반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히틀러는 개인의 가치와 능력주의라는 이상을 거듭 찬양했다. 개인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다윈주의의 개념은 파시스트적 위계에 구조를 부여하고 게으름에 대한 비난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파시즘에서 집단은, 노동과 전쟁에서 성과를 내어 다른 집단보다 우위에 서는 능력에 의해 등급이 매겨진다. 히틀러가 자유민주주의를 매도하는 까닭도, 자유민주주의가 자연스러운 능력주의적 투쟁에서 거둔 승리와 무관하게 가치를 부여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개인성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민주주의를 맹비난한다.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경쟁적 투쟁을 통해 다른 개인들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파시즘적 시각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유지상주의적 개념과 유사하다. 경쟁할 권리는 있지만 꼭 성공한다거나 살아남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262-3)


"파시스트 정치의 끌어당기는 힘은 막강하다. 그것은 인간 존재를 단순화시키고, 우리에게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그들'을 주고서는, 그들을 게으른 자로 비난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탁월함과 규율을 돋보이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자격 없는' 인간들에게 시원하게 일갈을 날리는 강력한 영도자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부추긴다." "파시스트 정치는 인간의 약점을 먹이로 삼는다. 그 약점이란 내가 내려다보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면, 내가 겪는 고통도 견딜 만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상황에서 부유한 소수만이 자유주의적 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다양한 문화와 규범을 접할 수 있을 때, 자유주의적 관용은 엘리트의 특권으로 쉽게 그려진다. 너그러운 (그러나 값비싼) 자유주의적 비전들은 파시스트 선동가들의 손쉬운 표적이 된다. 그러한 조건들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규범들이 번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일 따름이다."(269-71)


에필로그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파시즘이 빠르게 정상이 되는 생생한 사례들을 보고 있다. 정상화는 도덕적으로 이상한 것을 평범한 것으로 바꾸는 일을 한다. 그것은 마치 일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전에는 견딜 수 없었던 일을 참을 수 있게 만든다. 반대로, '파시스트'라는 단어는 과장된 잘못된 경고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정상'이라는 말뜻 그대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정상화는 '파시즘'에 대한 고발을 과잉반응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심지어 이러한 우려스러운 방향으로 규범이 변화하고 있는 사회에서조차도 그럴 것이다. 정확히 말해 정상화란,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단적인 상황들이 잠식해 들어오는 것이 정상적인 일로 보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상황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것이 파시즘이라고 고발하는 일은 언제나 극단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극단적인' 용어를 정당하게 사용하기 위한 골대가 정상화로 인해 계속해서 움직이기 때문이다."(277-8)


"난민, 페미니즘, 노동조합과 인종적, 종교적, 성적 소수자 등 파시스트 정치의 직접적인 표적들을 살펴본다면,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해 어떤 방법이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파시스트 정치는 특정한 청중을 염두에 두고서 그들을 주요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시스트 정치는 이 청중을 환상으로 꽉 움켜잡아서 그들의 국가에 등록시키려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이 국가에서 자신들만이 인간의 지위를 '누릴 가치가 있다'라고 여기며 점점 더 집단 망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그 청중의 지위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은 세계 여기저기의 캠프에서 대기 중이다. 강간범, 살인범, 테러리스트의 역할이 맡겨질 보잘것없는 남녀들 말이다. 파시즘 신화에 현혹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서로를 자유롭게 포용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결함이 있고, 우리는 모두 생각과 경험과 이해가 부분적으로 치우쳐 있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악마가 아니다."(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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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덮기 - 역사적 관점에서 본 이행기 정의
욘 엘스터 지음, 최용주 옮김 / 진인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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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이행기 정의의 세계


제1장 기원전 411년과 403년의 아테네


"완전한 형태의 아테네 민주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시민들이 민회의 결정을 실행할 사람들─추첨이든 선출이든 모든 행정관─에게 행사하는 통제의 정도일 것이다." "BC 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잇따른 개혁으로 통제되지 않은 대중권력이 남용될 개연성이 점점 커졌다. 마틴 오스트발트 저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테네인들은 인민으로서 주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아직 법 지배의 골격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발트가 기술한 바와 같이, 한동안 〈페리클레스의 지적, 심리적, 그리고 정치적 통찰력이 비이성적 정책이 집행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훌륭한 지도력이 창출하는 결과만으로 제도의 견고함을 판단할 수는 없다. 계몽된 정치가가 항상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약하고 신중하지 못한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제도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체제 안에 몇몇 통제장치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결정 영역에서는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18-9)


"411년의 정권교체는 정권 내부붕괴와 반란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403년에는 스파르타의 통제 아래 타협적 이행이 있었다." "411년 이행기 정의의 주된 목적은 응보적 조치에 있었다. 참주들의 처형과 관련해서 그들을 투옥해서 무해화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아테네에는 감옥이 없었다) 물리적으로 무력화하는 것이 주된 동기였을 것이다. 403년에는 응보적 조치와 억제 효과도 작용했을 수 있으나, 주된 목표는 화해였다. 광범위하게 소추를 면제하고 사면이 곤란한 사람에게 망명선택권을 제공하는 등 화해조약을 통해 매우 온건한 형태의 이행기 정의를 구현했다. 아테네사람들은 이전 경험을 통해 가혹한 처벌이 원래 목적에 반해 억제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키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온건한 조치는 ① 스파르타에 의해 주어졌거나, ② 권력을 포기한 대가로 참주들이 요구조건으로 내걸었거나 ③ 아테네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37-8)


"411년 이후, 참주들은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군인들은 400인체제 기간 동안 아테네에 남아있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403년 이후, 살인교사는 사면대상이었지만, 그 살인에 직접 가담한 경우는 제외되었다. 30인 폭군이 통치하는 동안, 기병이나 평의회 의원을 지낸 경력이 있으면 공직후보자가 될 수 없었다. 위법행위(그리고 위법행위로 얻은 이득)에 대한 제재는 처형, 벌금, 면직, 시민 및 정치적 권리의 상실 등이었다. 403년의 화해조약은 참주들에게 추방을 택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비록 자발적으로 선택했더라도 제재의 일종으로 받아들였다." "이행기 정의는 사적 개인의 실천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기소, 공직후보자에 대한 이의제기, 임기만료된 공직자에 대한 고발 등이 있다. 배심원들은 대체로 시민들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했지만, 403년 이후 사후조사를 담당하는 배심원은 참주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편성되었다. 이것을 〈패자의 정의〉라 부를 수 있다."(38-9)


"403년 후 승리한 민주주의자들은 노예와 그들 편에서 싸운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을 폐지할 때 자제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도시의 권력균형이 패배한 참주들을 도외시하는 것을 방지했다. 참주들이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사면조약 위반으로 연결되는 소송제기의 위험부담을 늘리는 절차를 도입하여 온건한 조치를 더 강화했다. 이때 소급입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행기 정의는 합법적 형태로 수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행기 정의는 사법개혁과 헌정질서 개혁으로 보완되었다. 411년 이후, 주요 목표는 쿠데타를 획책하려는 참주들에게 부정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403년 이후, 목표는 과거에 전권을 행사한 민회에 제약을 가하여 의원들에게 주어진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403년 이후에는 추방됐던 민주주의자들이 몰수당한 재산을 반환받을 수 있는 조항을 마련했다. 다만 개인에게 팔린 유동자산(노예를 포함하여)은 돌려받을 수 없었다."(39-40)


제2장 프랑스의 1814, 1815년 왕정복고


"두 차례의 왕정복고는 타협적 이행이었고, 연합국 세력의 후원 아래 전개되었다. 연합국 세력은 또한 이행기 정의를 통제했는데, 한편으로(1814년) 복귀하는 부르봉 왕조를 자제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1815년) 나폴레옹 지지자들의 숙정을 요구했다. 1814년 이행을 수행해야 했던 나폴레옹 정권 하 상원의원들은 과거의 정치적 행위와 견해들에 대한 사면, 처벌의 형태로서 몰수 효력의 폐지, 혁명기간 동안에 몰수되어 개인에게 매각된 자산 인정 등을 요구하면서 자기이익 중심적 동기에 따라 행동했다. 이는 사회적 평화와 화해를 열망하던 루이 18세의 의도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국유재산의 전前소유자에 대한 배상을 제안하거나 지지투표한 사람들 일부는 이기심이 동기가 되기도 했다. 재산구매자는 배상이 소유권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자산가치가 높아지게 되므로 이해관계가 동일했다. 자유주의자만이 구입자들의 불안에 의존(그리고 자극)했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상충했다."(69-70)


"배상계획은 여러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① 재산이 매각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재산을 돌려받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만 받았다. ② 몰수된 교회재산은 매각되지 않았음에도 반환되지 않았다. ③ 보상은 몰수된 현물자산에만 한정되었고, 훼손된 자산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양한 배상계획을 여러 주장들이 옹호했다. ① 이주자에 대한 배상은 대부분 엄격하게 자격의 문제와 관련되었다. ② 그 중 일부, 재산의 원상회복 또는 구입자가 조성한 기금으로 배상 받는 행위는 구입자에 대한 징벌적 조치의 일환이었다. ③ 혁명에서 피해를 입은 여러 집단들에 대한 차등적 대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고통을 가장 심하게 겪은 사람들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④ 일부는 또한 자격이나 과거의 고통보다는 현재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⑤ 많은 사람들은 국가이익에 기여하는 복구가 우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70-1)


"1815년 6월 28일 루이 18세는 징벌적 조치를 의회에 위임한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연합국 세력과 이주자의 압력으로 그는 7월 24일에 제한적이지만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거로 하원을 장악하게 된 급진왕당파는 루이 18세에게 모든 '국왕살해 재범자'들을 축출할 압박했고, 더 급진적인 조치를 도입하는 데 거의 성공했다. 백일천하 기간 중 나폴레옹에 합세한 사람들에 대한 이주자들의 1815년의 분노는 국왕살해(1793년) 가담자에 대한 이전(1814년)의 처벌요구보다 더 강했다. 정부는 공공행정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을 단행했다. 현직에 남아 있던 추종자 때문에 나폴레옹의 복귀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정부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1815년 여름의 〈백색테러〉에서 수백 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학대 받았다. 루이 18세는 그의 조카가 남부에서 자신과 대립하는 독립행정부를 수립하면서 국가에 대한 통제력을 잠시 잃었다."(71)


제3장 이행기 정의의 새로운 세계


"식민지 지배 하에 있던 나라들이 독립전쟁에 성공하면 대체로 식민지권력과 함께 했던 내부부역자들을 처벌대상으로 삼는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세력은 이전 동맹 상황을 완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 한 예로 미국과 알제리의 독립전쟁을 잠깐 살펴보자. 미국의 경우 내부협력자들은 영국정부 충성파(Loyalist) 또는 〈토리당〉이었고, 알제리에서는 〈하르키스〉(harkis)였다. 각각의 경우, 이 협력자들은 전 인구의 15% 정도에 달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점령국에서 적과 협력했던 사람들의 비율보다 훨씬 많았다. 충성파와 하르키스파는 각각의 평화조약에 따라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미국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알제리에서는 아예 무시되었다. 이런 장기화된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는 건 어렵다. 알제리해방전선(FLN)은 의도적으로 온건파 알제리인들과 프랑스인들을 암살대상으로 지목했다. 미국에서도 역시 〈무관심과 중립은 지지받을 입장이 아니었다.〉"(81-2)


# 하르키스 :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 군대에 협력한 알제리 무슬림인들


"2차대전 이후 몇몇 국가에서는 〈국가모독〉이라는 새로운 범죄를 적용했다. 이 범죄는 〈국민박탈〉─즉 시민적, 정치적 권리의 상실─의 형벌을 받는 하급반역의 한 형태였다. 프랑스에서 이 자격박탈은 투표권, 피선거권, 공공부문 취업금지, 법조계와 교적을 비롯하여 준공기업, 은행, 신문, 라디오 등의 분야 진출금지 등을 포함했다." "벨기에에서는 자격박탈의 범위에 정치적 권리를 포함하여 의사, 변호사, 성직자, 언론인, 교사직은 물론이고, 조직 형태와 관계없이 그 조직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는 것 자체를 금지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법원이 부역자의 투표권, 피선거권, 군복무, 공무원 진출 등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었고 특정분야로의 진출도 금지할 수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투표권, 피선거권, 병역의무가 박탈되고, 공공부문에 진출할 수 없고, 변호사와 의사 또는 기타 자격증이 필요한 직종과 교사, 성직자로 일할 수 없었으며, 영화, 극장, 신문사 등의 관리직과 경리직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89-90)


"스페인은 민주주의 이행에서 이행기 정의를 실행하지 않기로 결정한 유일한 사례다. 1976년 7월, 정부는 부분적 사면을 선언하여 약 400명의 정치범을 석방했다. 다음으로, 〈1977년 10월의 사면법은 새롭게 들어선 민주정부가 의회 지지로 승인한 최초의 정치적 조치로 다음 두 가지를 달성했다. 첫째, 대부분의 정치범이 석방되었는데, 여기에는 폭력 혐의로 기소된 사람도 포함되었다. 둘째, 물러나는 정권 인사들에 대한 전면적 기소중지를 승인했다.〉 또한 실직 공직자들의 복직과 연금지급을 승인했는데, 실직기간 중 받지 못한 급여는 보상하지 않았다. 비밀경찰의 기록은 전부 봉인했다(왜 소각하지 않았을까?). 이 법은 공산당 합법화와 새 헌법에 대한 합의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과도기 협상의 일부였다. 스페인 사례는 헝가리나 폴란드 등에서 하나의 모델로 구상되기는 했으나, 과거를 문제삼지 않기로 한 이 타협적 결정을 실제로 직접적으로 모방한 사례는 없었다."(92-3)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이행은 대부분 퇴장하는 군사정권 인사들이 자신들의 면책을 보장받기 위해 벌인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아르헨티나는 군 간부들을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한 두 국가 중 하나이지만, 수많은 기소에 반발한 군부의 무력시위 이후 도입된 '기소전면금지법'과 '명령준수법'으로 대다수가 기소면제된 반면, 소수 고위급 장교만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볼리비아는 오랜 지연 끝에 몇몇 군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하여 유죄를 선고한 또 다른 국가다. 유죄선고를 받은 48명 중 11명만 실제로 수감되었고, 나머지는 도피했다." "브라질에서는 군장성들이 1978년에 자기사면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브라질의 민주주의로의 긴 여정이 1990년 카르도소 대통령 선출로 이어질 때까지 유효했다." "칠레에서는 피노체트가 설계한 상원, 국가안전보장회의, 헌법재판소 그리고 대법원으로 구성된 중추적 세력집단들이 민주적 개혁과 이행기 정의의 실행을 방해했다."(93-6)


"2차대전 이후 서유럽의 이행기 정의와─그리고 그 가해행위의 규모와─비교해볼 때, 탈공산주의 이행에서는 재판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몇몇 지도급 인사들이 기소되기는 했지만, 유죄판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탈공산주의 사회에서 공공부문 숙정은 여러 형태를 취했다. 구 동독에서는 부패관리 해고라는 전통적인 방식이 관찰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이 지역의 여러 국가들이 〈정화〉(lustration)라는 명목의 인적 청산 방식을 채택했다." "정화조치의 동기는─최소한 공식적인─보안분야에 몸담고 있던 고위급 공산당간부와 협력자들이 새로운 체제에서 중요직책을 맡는 것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조치는 해고, 자격상실, 또는 단순한 경력공개 등을 포함했다." "폴란드에서는 고위 선출직 또는 임명직 후보자는 1945년부터 1990년 사이에 자신이 〈적극적인 협력자〉였는가 여부를 선서해야 했다. 이를 인정하면 기록 공개 말고는 다른 조치가 취해지지는 않았다."(98-100)


"남아프리카는 민주주의로의 타협적 이행의 산물인 진실화해위원회라는 독특한 과거청산 방식을 제시하였다." "사면(형사 및 민사소송 면제)은 신청인의 행동이 ① 악의나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아닌 정치적 동기로 이루어졌고, ② 그 행동을 촉발한 경우와 비례적으로 관련이 있음이 증명될 때 가능하다. 또한 신청인은 자신이 관여한 행위와 관련된 명령계통의 증거를 비롯한 범죄에 대한 완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사면을 신청하지 않은 사람은 기소나 소송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소명 메커니즘은 자신의 행위가 ①과 ②의 조건을 만족한다고 주장하거나 완전한 진실을 말할 의사가 있다고 나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사면청문회에서는 불법행위를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가해자의 이름도 공개하였기 때문에 대중의 보복이 두려워서 신청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다. 한 평가에 따르면 〈많은 수의 가해자들은 신청하지 않았다. 이것은 앞으로도 기소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03-4)


"민주주의 이행에 선행하는 독재체제는 국가 그 자체에서 기원하거나 아니면 외세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행기 정의의 과정은 새로운 체제가 스스로 시작하거나 아니면 외부의 퉁제 아래 진행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사회가 '스스로를 정리해야 하는' 이중으로 내생적인(내생적 독재 체제와 내생적 이행기 정의) 경우다. 이행 이후에도 구체제의 지도자와 행위자들은 여전히 사회조직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폭력수단이나 투표함을 이용하는 직접적인 방식이든 경제재건과 발전에 갖는 비중에서 기인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든 할 것 없이 그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사회는 아무리 결함이 있더라도 일단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열린 바다에서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관들이 민주주의 이전 체제와 깊이 관여됐더라도 그들을 활용하거나 아니면 그들 중에서 가장 덜 타협적인 인물과 타협하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대안이 없을 수 있다."(105-7)


제2부 전환기 정의의 분석학


제4장 이행기 정의의 구조


"나는 (정의의 개념과 집행에 영향을 미치는) 동기의 삼분법─이성, 이익 그리고 감정─을 18세기 프랑스 도덕주의자들, 특히 라브뤼예르에서 차용한다." "프랑스 왕정복고의 경우, 현물배상을 원한 원소유자들에게 추상화된 신성한 재산권 개념(이성), 구입자들을 향한 복수의 욕구(감정), 그리고 재산을 되찾고 싶어하는 욕구(이익) 동기가 동시에 작용했다. 물론 이성적 동기가 사실은 감정이나 이익추구 동기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1789년 이후 왕당파 출신으로서 귀족도 이주자도 아닌 베르가세 역시 똑같이 현물보상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런 의구심이 다소 줄어든다. 1989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현물보상을 원칙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유주의 사상가들이 사익을 기대하고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사익을 바라는 사람들이 공평의 원칙을 주장한다 해서 그들을 위선적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정말 그런지를 확인하려면 그들의 행위를 다른 맥락에서 관찰할 필요가 있다."(122-3)


"정의실현의 욕구가 이행기 정의 행위자를 추동하는 여러 동기들 가운데 하나의 동기에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사회에는 1차 동기에 메타동기를 유발하는 '동기화의 규범적 위계'(normative hierarchy of motivation)가 있다. 예를 들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폴리스의 선을 고취하는 열망이 가장 가치 있는 동기였으며, 두번째는 적에 대한 복수의 열망이고, 세번째는 사익추구, 그리고 질투의 동기가 최악으로 간주되었다. 동기의 위계를 전제할 때, 낮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마치 높은 수준의 동기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들의 참된 동기가 자신들에게 제시하는 그런 행위를 하고 싶어 한다. 사람은 개인적인 이익에 이끌려 행동하면서 동시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자기의 행동이 그런 동기에 이끌리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욕구가 작동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1차동기화와 메타동기화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 각각 고유한 전략적 배열을 사용한다."(123)


# 이행기 정의의 제도적 유형

1. 사법적 정의

2. 행정적 정의(사법적 정의와 정치적 정의 사이의 연결지점)

3. 정치적 정의


"내가 〈순수한 정치적 정의〉라 부르는 유형은 새로운 정부(또는 집권세력)의 집행기구가 일방적으로 그리고 상대방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고 가해자를 지목하고 처리절차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1815년에 연합군세력이 나폴레옹을 세인트헬레나로 유배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순수한 정치적 정의는 '극장재판'(show trials) 형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미 재판의 결론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합법성은 허구에 불과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한 연합국 간의 합의과정에서 소련은 재판정이 단지 주요전범의 형량만 결정하는 극장재판을 원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 재판은 사법적 정의의 두가지 본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즉 적법절차의 준수와 재판결과의 불확실성(23명의 피고 중 3명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처럼)이 그것이다." "반면, 도쿄재판은 순수한 정치적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사례다.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용어는 도쿄재판에서 가장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125-7)


# 순수한 사법적 정의의 특징

1. 법을 가능한 한 모호하지 않게 규정해야 한다. 

2. 사법부는 정부의 다른 기구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

3. 판사와 배심원들은 법을 해석할 때 편견이 없어야 한다.

4. 적법절차─변호사 선임 권리, 항소권, 무죄추정의 원칙, 반대심문과 공개 청문 등─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 이행기 정의의 행위자들

1. 가해자(wrongdoers)

2. 피해자(victims)

3. 가해행위의 수혜자(beneficiaries)

4. 가해행위를 막고자 노력한 조력자(helpers)

5. 가해자들에게 대항하고 투쟁한 저항자(resisters)

6. 가해자, 피해자, 조력자, 저항자도 아닌 중립자(neutrals)

7. 이행 이후 이행기 정의의 옹호자와 조직가인 촉진자(promoters)

8. 이행기 정의의 집행을 반대, 방해하고 지연하는 파괴자(wreckers)

※ 하나의 행위자는 연속적, 동시적으로 하나 이상의 행위자 범주에 중첩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진주만 공습, 북아프리카, 스탈린그라드, 시실리 침공 이후 독일 점령국가의 많은 지도자들과 부역자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1944년 봄, 출판계의 거물인 장 프로보스트는 거액의 자금을 레지스탕스에게 제공하고 받은 영수증을 고등법원에 증거로 제출해서 자신의 행위를 '속죄'받으려고 했다. 1944년 1월, 어느 피고는 감동적인 사직 편지(라발Laval이 수취인이었다)를 보냈는데 〈아마도 언젠가는 자신의 행동과 태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또 어떤 사람은 〈SS 대원들에게 동료들이 죽을 때 르노 공장의 옥상에 삼색기를 게양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영웅적인(의도는 불분명하지만) 행위를 인정받아 1944년 8월에 무죄방면되었다. 당시 고등법원에서 재판 받은 사람들 중에는 독일 패전이 가까워오자 재빨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해 무죄를 받은 경우도 제법 있었다."(145-6)


"저항자들은 그들 행동이 전체주의 정권의 복수를 촉발하면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종전이 다가오면서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에 대항하는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지만, 1944년에 독일로부터 야만적인 보복행위를 당했던 이탈리아 중북부의 세 마을의 경우는 달랐다. 50년이 지난 후에 이뤄진 인터뷰에 따르면, 〈빨치산을 향한 세 마을 일부 주민들의 적대감은 여전했다.〉 이 마을에서 빨치산은 학살에 간접적 또는 심지어 '실제로' 책임이 있다고 간주됐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었다. 저항자들은 또한 자신이 속한 조직 또는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저항조직에게 가해자로 비치기도 한다. 프랑스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레지스탕스 집단은 〈독일에 정보를 제공한 부역자로서 '명백히' 반역자이기 때문에 처벌해야 한다〉고 비난받았다. 각 집단은 자기들만의 블랙리스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집단의 블랙리스트가 다른 집단과 연계된 사람을 포함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151)


"피해자임을 강조하면서 가해행위를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1954년 독일헌법재판소가 1945년의 공직자 지위는 제3제국에 협조한 행위이므로 박탈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대법원은 해당 관리들이 〈사실상 피해자인 자신들에게 가한 부당한 조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나치 가해자들도 다른 의미에서─요컨대 히틀러체제가 아니라 전후 처리 과정에서─피해자임을 강조했다. 1950년, 일부 연방의회 의원들은 나중의 모호한 기준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엄격한 기준 때문에 이른 시기에 탈나치정책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같은 시기에 〈나치에게 억압받은 사람에게 보상을 실시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된 용어인 '회복'(Wiedergutmachung)이 탈나치화 과정에서 해고당한 관리들의 복직에도 적용〉되었다. 결국 이런 나치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처음에는 히틀러, 나중에는 연합군에게 부당하게 피해받은 〈이중의 피해자〉로 간주했다."(151-2)


"새롭게 들어선 민주체제가 과거와 직면하게 되면 대답해야 할 수많은 질문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정의와 진실'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그 중 하나다.(다소 약하기는 하지만 정의보다 진실을 우선시하는 결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낮은 기소율과 과거의 가해행위에 대한 정보제공 간에는 간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 1982년 이후 설립되어 활동한 20여 개가 넘는 진실위원회는 대부분 가해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처벌을 제안하지도 않았다. 남아프리카진실화해위원회는 대표적인 예외인데, 여기서도 정치적 동기로 자행된 가혹행위는 기소를 면제했다. 엘살바도르의 진실위원회는 가해자 실명을 공개했으나,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간된 지 5일만에 의회는 전면적인 사면을 결정했다. 브라질에서 상파울로 교구가 실명을 공개한 444명의 고문행위자들은 이미 사면된 상태였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1990년대에 등장한 〈진실재판〉은 사면법 때문에 기소로 이어지지 못했다."(162-3)


제5장 가해자


# 가해자의 범주 분류

1. 기회주의자 :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2. 패배자 : 자기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중요한 존재로 비치기를 바라는 심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

3. 악당들 : 적이나 경쟁자가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것에 만족하는 자

4. 순응주의자 : 물질적 손실에 대한 두려움이 동기로 작동하는 자

5. 광신자 :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자

6. 원리주의자 : 광신자와 유사하지만 특정이념이나 가치가 없거나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경로를 변경하는 자

7. 무無사유자 : 무관심과 부주의가 행위의 동기를 형성하는 자


"대부분의 독재정권 하에서 하위직급 가해자는 순응자와 무사유자인 경우가 많은데, 주로 원리주의자들이 이들을 후원하고 결속한다. 엘리트 가해자들은 대부분 광신자들이다. 기회주의자와 악당은 가해자정권을 유지하는 동력이 아니라 거기 빌붙는 기생세력이다. 독일민주주의공화국 말기처럼 정권이 주로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면 체제는 오래 유지되지 못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들은 분노(anger)와 격분(indignation)을 유발하고, 광신자와 악당은 증오를 촉발하며,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경멸을 자극한다. 순응주의자와 무사유자는 그들의 '행위'가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데 반해서, 그 외 다른 유형은 그들의 '존재' 때문에 감정을 유발한다. 후자 중에서 광신자와 악당은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에 증오를 유발하고, 기회주의자와 패배자는 허약하기 때문에 경멸의 대상이 된다. 가해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적 대응은 이러한 정서적 반응과 연계된 내재적 행위경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204-5)


# 가해혐의의 반사실적(counterfactual) 정당화

1. 차악적 정당화 1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했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2. 차악적 정당화 2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일이 벌어졌을 것이며, 더 나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3. 도구적 정당화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억압적인 체제에 효과적으로 대항할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대체적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그걸 했을 것이다.

5. 강압의 변명 : 내가 그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해당하거나 심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6. 무익의 변명 : 내가 그걸 거절했더라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을 것이다. 


"차악적 정당화 주장은 자기보호를 위한 위장이 태반이지만, 많은 경우 진실을 포함하기도 한다." "독일점령하 프랑스에서 페탱에게 충성맹세를 거절한 판사는 괴팍한 딱 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잡혀온 레지스탕스들이 자신들보다 더 페탱에 충성하는 법관들에게 재판을 받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비시 정권에 충성한 광신자들에게 재판받아 사형을 선고받는 사태는 피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독일인들은 중형을 선고해서 인질로 잡으려고 했으며, 반면에 무죄판결을 받으면 격리나 추방 등이 뒤따를 수도 있기 때문에 판사들은 때때로 변호인의 요청에 따라 〈중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사임한 법관들은 임무수행을 포기한 군인 또는 중환자의 고통을 외면한 의사에 비교되었다. 덴마크에서도 점령세력이 사법제도를 장악하여 결국은 자국민들에게 더 많은 해를 입힐 것을 방지하기 위해 법관들이 독일과 협력한 사례가 있었다."(206-7)


"1989년 이후 동유럽에서 반사실적 정당화의 변종이 등장했다. 즉 〈우리가 반대파를 호되게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소련이 침공했을 것이고 그 결과는 훨씬 참혹했을 것이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1981년 계엄령 주모자의 기소 가능 여부를 조사한 폴란드의회 위원회가 이 조사를 철회했을 때, 이 주장이 주된 이유의 하나였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야루젤스키는 계엄령이 차악의 선택이었으며, 그것은 소련의 침략뿐만 아니라 국가를 파멸시키는 경제적 무정부 상태에 비교해서도 차악의 선택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을 관심을 끄는 추가적 특징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실 야루젤스키가 계엄령 발동에 실패했더라도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행 이후 〈폴란드 법학자 대다수는 위험을 초래하는 잘못된 판단이 졸속과 부주의 때문이 아니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잘못된 신념도 행위 당시에 획득가능한 증거로 잘 설명된다면 용인할 수(정당화는 안되더라도) 있는 것이다."(209-10)


"'적'의 존재는 개별적으로 보면 가해로 비칠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축소하면서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만행을 볼셰비즘과의 전투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어느 영국인은 〈(서)독일인들은 수세기 동안 아시아의 야만에서 유럽문명을 지키는 것을 자기가 부여받은 역사적 사명으로 간주했다〉고 썼다. 따라서 어떤 사람은 그들을 기소하기보다 연합국은 그들이 한 일에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독에서 과거의 나치즘은 〈신뢰할 수 없고 부정직한 사람들에 대한 전후 독재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다.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은 진부할 정도로, 때로는 진지하게, 공산주의와 테러리즘, 그리고 게릴라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억압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을 만행의 정당화로 삼기 어려운 것은 그 적이 가해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점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 폭력은 그에 대한 무장저항에 선행했다."(213-4)


"나치와 공산정권 인사 중에서 광신자 또는 기회주의자는 더 엄하게 처벌되어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비인간적 이념에 대한 개인적 헌신은 가중처벌 사유인가 아니면 정상참작 사유인가?" "똑같이 나쁜 이상을 신봉하고 실행했더라도 경력이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런 행위를 한 기회주의자가 더 나쁘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덴마크 검찰총장은 독일을 위해 급여를 받는 일에 종사한 행위는 군인으로 복무한 것보다 〈윤리적 관점에서 훨씬 나쁘다〉고 지적했다." "기회주의보다는 광신주의에 대한 선호(이렇게 불러도 된다면)는 악독한 반유태주의 프랑스 정치인 자비에르 발라에 대한 고등법원 재판에서도 잘 나타났다. 검사는 〈발라의 행위에 광신주의 요소가 있지만, 그것이 저급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이뤄지지는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것이 검사가 발라는 '중형'을 받아야 하지만 '극단적인 제재'는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근거다. 곧 광신주의는 경감사유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224-5)


제6장 피해자


"고통의 원인이 되는 가해행위는 피해자(또는 제3자)에게 두 가지 반응을 일으킨다. 첫째는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가해자에게 부과하려는 욕구다. 이른바 눈에는 눈이다. 둘째로는 피해를 가능한 한 수준에서 원상회복하려는 욕구가 있다. 영국의 속죄금(Wergeld) 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균형을 회복하려는 이 두 가지 방법은 서로 대체 가능하다." "범죄자가 속죄금을 지불할 수 없으면 처벌이 그 대체물이 된다. 그러나 현재 법제도에서 처벌은 피해자의 요구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가해행위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가해자 처벌과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보상절차는 전체적 또는 부분적으로 징벌적 목적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프랑스의 왕정복고 과정에서 일부 이주자들은 자기 재산을 구입한 사람에게 처벌적 목적의 배상금을 부과하기 원했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현금보상이나 바우처 대신 현물배상에 치중했는데, 그 목적 중 하나는 재산이 과거 특권계급에 귀속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241-2)


# 피해자의 고통의 유형

1. 물질적 고통 : 개인재산의 손실

2. 신체적 고통 : 신체 또는 자유 등에 걸친 피해

3. 무형의 고통 : 기회 박탈이나 기회 상실


"파괴된 재산은 몰수된 재산보다 인색하게 보상되는 경향을 보였다. 1815년 이후 프랑스에서 국왕을 위해 싸우다가 재산이 파괴된 방데 반란 가담자들은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한 반면, 왕에 대한 충성보다 자신들의 안정을 더 중요시하다가 재산을 몰수당한 이주자들은 나중에 보상을 받았다. 이 차이는 결국 국가가 재산 몰수와는 다르게 재산 파괴에서는 이익을 얻지 못했다는 걸 의미한다. 일부를 대상으로(상대적으로) 완전한 보상을 실시하는 대신 모두를 대상으로 부분적인 보상을 선택할 수도 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1945년 이후, 많은 독일 점령국가에서 파괴된 재산을 개인별로 보상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 그러나 이 조치의 개념적 기초는 보상 권리가 아니라 필요와 연대였다. 노르웨이에서도 전쟁피해에 대한 '회복적 보상(regressive compensation) 원칙이 확립되었다. 즉 〈모든 국민이 고통을 겪었으며, 각자의 고통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정서가 일반화되어 있었다.〉"(245)


"몰수의 경우에는 흔히 제기되는 이중소유라는 골치 아픈 쟁점이 있다. 국가가 몰수재산을 선의로 구매할 의사를 밝힌 사적 개인에게 팔았을 경우, 새 소유자는 취득한 재산이 법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이 재산을 원래 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보상하기 위해서 불의를 행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래의 잘못이 초래한 불의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 잘못을 교정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불의와 사회적 분열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증가하게 되며 결국에는 최초의 불의를 지배하게 된다." "부당취득 후 한 세대가 지났을 때에만 새로운 소유자에게 재산을 보유할 자격이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와 1990년 이후 구동독에서 새로운 소유주가 〈정직한 방식〉으로 취득했을 때 몰수재산 반환에 예외가 가능하다는 예외조항을 둔 독일의 통일 조약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영국의 왕정복고 때 재산은 대부분 원래 소유자에게 반환되었다."(247-8)


"과거의 고통과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필요 중 무엇이 타당한 보상근거일까? 두 사람의 피해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과거에 심하게 고통을 겪었지만 현재는 회복되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정상적인 상태로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또 다른 사람은 과거에 고통을 덜 받았지만, 회복되지 못하고 지금은 일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 목표가 과거의 후생손실을 보상하는 것이라면 첫 번째를 우선시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후생에 관심이 있다면 두 번째 사례가 더 강력한 근거를 갖는다. 프랑스 왕정복고 과정에서 나온 이 질문은 나치만행을 둘러싼 보상논쟁에서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1953년에 독일 최초의 보상법이 제정됐을 때, 피해자배상권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인 오토 퀴스터는 필요를 보상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 정부관리와 정당 대표들을 비판했다. 퀴스터는 박해당한 사람은 자신들만의 특수한 상황에 기초한 특수한 권리를 갖는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고통에 대한 정당한 보상권이다.〉"(253)


"무형의 고통은 기회의 결여 또는 상실로 구성된다. 직관적으로, 모든 기회의 박탈을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고통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 기회─예를 들면 법조인 경력 취득─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의 후생은 기회의 존재 유무와 관계없이 변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회의 박탈이 피해로 간주되는 이유 또한 다양하다. 만일 그 사람이 법률적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당했다는 것을 안다면, 이 경력을 향한 욕망의 결여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부재에 기인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불확실성도 피해로 간주된다. 특정 측면에서 무가치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 역시 피해의 유형에 속한다.(이 효과는 모든 사람이 박탈당한 상태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좀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후생 자체보다는 후생의 기회가 도덕적으로 더 중요한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배상·보상 프로그램은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을 포함하지 않는다."(256-7)


제7장 제약요인


"사면 또는 관대한 처분이 포함된 타협을 통해 체제 이행이 시작되는 경우, 차기정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이행기 정의를 구현할 자유가 제약된다." "새로운 세력은 성공적인 이행과 이행기 정의라는, 상충하는 두 가지 열망을 갖는다.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물러나는 지도자들과 협상을 하면, 두 번째 목표를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협상자가 자신들이 차기 첫 정부를 구성하고 일정기간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믿으면 사면과 불처벌 약속은 평판에 대한 의식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퇴장하는 엘리트가 이행 이후 협상자가 나중에 그 약속에 구속되지 않는 다른 사람들로 대체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 메커니즘은 성공하지 못한다. 또한 구엘리트가 미래의 법원과 입법부가 독립적인 지위를 잡게 될 것이라고 믿으면 최종협상 역시 성사되지 않을 수 있다. 모순적이지만, 법원이 부패해 있거나 과거체제와 얽혀 있을수록 면책 약속은 더 신뢰를 받는다."(272-5)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이행기 정의는 복합적인─서로 충돌하기도 하는─제약 요인에 사로잡혀 있었다. 몇몇 연합국은 독일인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특히 그 생산기반의 철저한 파괴─만이 독일군국주의의 부활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봤다. 모겐소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독일이 1810년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독일에 대한 징벌적 조치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않으며, 이런 〈카르타고적 평화〉는 비생산적이라고 보는 측도 있었다. 또 서유럽 전체가 경제적으로 곤궁한 상태에 있는데, 그 산업적 기반을 파괴해 독일을 응징하는 행위는 유럽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옳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위협은 연합국으로 하여금 초기의 엄격한 대독일 조치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가장 분명한 것은 소비에트연방의 도발에 맞서기 위한 완충지대로서 강력한 독일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전범기소와 보상조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282-3)


"1945년 이후 독일에서 이행기 정의의 핵심적 딜레마는 베르사이유조약에 대한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평가에서 이미 잘 드러나 있다. 〈관대함과 공정 그리고 평등한 대우에 입각한 평화만이 독일재건 기간을 단축하고 독일이 또다시 수많은 우수한 자원과 기술을 프랑스에 내던지는 날을 늦추는 효과를 가져온다. 따라서 '보증'이 필요한데, 각각의 보증은, 독일의 점점 커지는 분노와 거기서 이어질 일련의 보복 가능성 때문에 또 다른 추가적인 조항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 카르타고적 평화에 대한 요구는 필연적이다.〉 관대하게 다루면 독일은 새로운 침략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자원〉을 갖게 되고, 혹독하게 다루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1945년 8월 초에 클레이 장군은 독일인을 궁핍으로 몰아넣는 정책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1,500 칼로리의 공산주의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1,000 칼로리의 민주주의 신봉자가 될 것인가 사이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293)


"경제적 제약요인은 또한 정권 퇴진(1815년의 프랑스 또는 1945년 이후의 유럽처럼)이나 정권 붕괴(1989년 이후의 동유럽)에 따른 이행과정의 처벌과 보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만일 새로운 체제가 광범위한 보상을 실시(1815년 이후)하거나, 경제재건을 추진(1945년 이후처럼)하거나, 또는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촉진한다면(1989년 이후처럼), 이행과정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과제들은 이행기 정의를 심대하게 제약할 것이다." "1945년 이후, 독일에 협력했거나 또는 점령됐던 국가에서 경제적 협력자에 대한 기소는 활발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경제재건과 나치청산 사이의 선택〉은 전자를 선호하는 쪽으로 귀착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중앙(산업 부문)숙정위원회는 경제협력자가 경제재건에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라고 판단되면 숙정대상에서 제외했다.〉 벨기에에서 적과 경제적으로 협력한 행위를 다소 관대하게 다룬 1945년 5월 25일의 특별법은 경제재건과 사회적 화합을 명분으로 정당화되었다."(294)


"이행기 정의의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의 급박한 특성을 감안하면 신속한 재판에 대한 요구가 과도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신속함에 대한 열망은 철저함과 정의(절차적 공정의 의미에서)를 동시에 추구하는 열망과 자주 충돌한다." "법의 지배가 제약요인(또는 파괴되는)이 아닌 때에도 사법제도의 제한된 능력 때문에 신속함과 철저함에 대한 열망이 상호배타적 관계에 놓일 수 있다." "사법부는 재판을 받아야 할 정권의 일부이자 나아가 그 핵심 세력인 경우가 아주 많다. 1945년 이후의 독일사법부는 나치범죄자(특히 나치판사들)의 기소를 방해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나아가 유죄판결이 자신들의 유죄증거를 없애는 인센티브로 작용하는 문제가 있다. 가해자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으면 한결 수월하게 그 기회를 갖는다. 패전 이후 〈종전과 점령 간의 상당한 지연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와 기록을 조직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제공했다.〉"(299-300)


제8장 감정


"감정은 그 고유의 '행동 경향' 때문에 신중하게 고려된 행동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가장 중요한 방해기제가 감정의 두 가지 특성과 관련있다고 주장한다. 긴급성(urgency)과 조급성(impatience)이 그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조급성은 후일 보상보다 조속한 보상에 대한 선호, 즉 시간 할인율을 1 이하로 낮추려는 경향이고, 긴급성은 나중 행동보다 조속한 행동에 대한 선호이다. 조급성은 신중함과 양립 불가능하며, 장기적인 이기심에 따른 행동으로 이해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늘 비루하고, 잔인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긴급성은 신중함과 양립할 수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신중함의 요청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을 때,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진출하는 기회비용은 엄청나게 비쌀 수 있다. 자기방어를 위한 행위는 지체를 허용하지 않지만, 응보적 행위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311-2)


"감정의 세 번째 특징은 감정의 짧은 반감기다. 예를 들어 폴 에크만은 그가 〈기본감정〉이라고 정의한 특징 중에서 〈급발진〉(sudden onset)과 〈짧은 지속〉(brief duration)을 제시한다. 많은 헌법의 핵심적 이념, 즉 양원제가 속도조절 및 냉각효과로 정당화된다는 논리는 이와 같은 감정기제에 의존하고 있다. 감정 소멸과 기억 소멸 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이 개입한다. 일반적인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소멸한다. 감정이 기억에 의해서 촉발되는 한, 감정 소멸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감정이 개입된 사건의 기억은 좀 더 느리게 소멸한다. 〈감정은 망각을 늦추기는 하지만 제거하지는 않는다〉는 진술은 이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기억이 관련된 감정의 행동 경향을 촉발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가 여부다. 모욕의 기억이 총천연색에서 흑백 상태로 희미해지면, 사건의 정확성은 유지할지 모르나, 그 생생함과 동기부여의 힘은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313)


"많은 이행에서 즉각적인 정의실현에 대한 긴급한 요구가 관찰된다.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경제재건과 같은 다른 문제들이 우선 과제일 수 있다. 주관적인 차원에서는 이전체제의 독재자들과 협력자들의 처벌이 더 시급한 과제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초법적 처벌은 한 가지 설명지표를 제공한다. 프랑스는 사람들이 자의적 기준으로 직접 정의를 집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약식 군사재판정을 설치했다. 모라스 롤랑은 〈정부는 철도 건설보다 정의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속한 재판 요구가 감정으로 촉발된 긴급성과 연결되는 한, 즉각적인 재판결론에 대한 요구는 재판에 임하는 우리가 느끼는 조바심과 연결되기도 한다. 따라서 법적 절차를 단순화하는 작업은 단지 다뤄야할 사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복수에 대한 열망을 즉각적으로 충족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실제의 경우 긴급성과 조급성의 효과를 각각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315-6)


"감정이 그것을 촉발한 사건 이후에 시간경과에 따라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이탈리아, 덴마크, 프랑스에서는 1942~43년 이후 새롭고 더 억압적인 점령정권이 등장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퇴각하는 과정에서 초토화 전술을 펼쳤다. 이런 최근의 기억은 부역자 처벌요구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다.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1945년 여름에 독일 강제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그간 다소 침잠해있던 처벌 요구가 최고조에 달했다. 반대로, 1989~1990년 동유럽의 공산당정권이 몰락할 당시, 이 체제는 이미 50년이나 이어졌고, 최악의 만행은 비교적 먼 과거에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이었던 스탈린시대는 1953년에 끝났다. 무력으로 진압된 항쟁(1953년의 동독, 1956년의 헝가리), 침공(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계엄령(1981년의 폴란드)은 상대적으로 오래된 과거에 속했다. 따라서 1945년 이후와 같은 처벌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 없었다."(317-8)


# 기억과 감정의 소멸을 막는 기제들

1. 가해행위의 피해자 간 소통

2. 피해자에게 복수를 요구하는 사회의 명예 규범

3. 가해 행위를 상기시키는 물리적 흔적

4. 가해 행위가 초래한 사건의 영속성


"체코의 반정부활동가였던 작가 야힘 토폴은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94년에 나는 수사과정에서 나를 고문했던 공산당비밀경찰(StB)의 주소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내 친구 중 하나를 죽이고 다른 하나를 감옥에서 강간했다. 나와 두 동료는 그를 처벌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그 전직 비밀경찰을 납치해 은밀한 장소로 옮겼다. 우리는 그를 죽일 생각이었다. 잠시 그와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그가 너무나 두려워하고 낙담한 상태여서 그를 풀어주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한 짓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세 개의 동기부여가 작동한다. 복수를 향한 열망, 실질적인 응보적 정의를 향한 열망, 그리고 실질적 정의의 실행에서 절차적으로 정확한 원칙을 따르려는 열망이 그것이다."(329-30)


"많은 경우 절차적 정의를 향한 열망과 실질적 정의를 향한 열망─자신을 이전체제와 구분하려는 열망과 그 체제를 엄중하게 처벌하려는 열망─간에는 갈등이 있다." "내 견해로는, 새롭게 들어선 민주주의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첫째, 소급입법의 금지나 공소시효 연장 등 기본적인 사법원칙의 존중을 강조할 수 있다. 1989년 이후 헝가리 헌법재판소의 일관된 접근방식이 그 예다." "둘째, 새로운 체제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는 이 원칙을 파괴해야 할 필요를 솔직하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덴마크와 네덜란드는 소급입법을 채택했다." "셋째, 가장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절차인데, 위장술을 사용해 위 두 방법을 모두 시도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법무부는 특정범죄에 대해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것은 그 가해자가 전쟁 전의 법체계에서도 똑같은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소급입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31-2)


"이행 이후, 중립을 지켰던 사람들은 자신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표적이 될 수 있으며, 분노와 경멸적 행의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설사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죄책감은 가해자들에 대한 이행 이후의 공격이 마치 이행 이전의 그들의 소극성을 마술적으로 무효화할 수 있는 것마냥 응징에 대한 요구를 강화한다. 협력과 저항 사이의 회색지대에 놓여있는 중립자들이 오히려 더 보복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1944년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부역자로 의심받던 판사들이 자신들의 애국심을 증명하기 위해 더 엄하게 재판에 임했다." "프랑스에서 해방 이후 초기의 법원선고가 엄중했던 이유를 〈많은 배심원들이 레지스탕스에 늦게 가담했으며 그들이 이전에 증명하지 못한 열의를 증명하고 싶어한 사실〉로 설명하기도 한다." "알제리 독립 과정에서 가장 늦게 민족해방정선에 참여한 사람들이 무슬림 알제리인(하르키스) 살해에 가장 열성적으로 가담했다."(336-8)


제9장 정치


"정당은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여 표획득(vote seeking)에 전념한다. 또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안을 거부할 가능성이 있는 측의 선거권을 빼앗는 표저지 전략(vote denying)을 구사─전후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원의 선거권 박탈─할 수도 있다." "프랑스 왕정복고 정치에서 소수의 자유주의 진영 의원들은 재산환수에 반대했고 국유재산 구입자의 권리를 옹호했다. 따라서 몰수된 재산을 둘러싼 의혹과 불확실성의 구름을 걷어내기 위해 의원들은 원래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고객은 자기 이익이 관철되었다고 생각하면 계속 고객으로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같은 논리로 선거에 임하는 의원들의 관심사는 지지자의 경제적 이익증진에 있지 않았다.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재산환수 소문을 퍼뜨리는 등 사실을 왜곡한 선거전략을 동원하여 재산구입자들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지지로 연결되기를 원했다.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착취행위였다."(351-3)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 톨그리아티는 모스크바 망명 시절에는 숙정과 재판의 필요성에 대해 강경노선을 취했다. 1944년 봄, 귀국했을 때 그의 입장은 다소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탈리아 공산당을 주력정당으로 키우고 〈탈파시즘 정책의 추진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게 자명한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톨그리아티는 북부에서 일어난 이른바 〈야만의 숙정〉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1946년, 법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그는 이탈리아의 이행기 정의를 거의 종식시킨 사면법을 제안했다. 이 법은 특히 법원에 재량권을 크게 위임하였다. 〈파시스트와의 거래에서 항상 단호했던 사회주의자들은 사면반대 투쟁에 앞장 섰다. 물론, 공산당과 양립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다음 해에 연립정부를 떠났을 때, 그들은 비타협적인 노선으로 돌아섰으며, 사면을 반동세력의 작태로 규정하고 강경한 어조로 반대했다."(354-5)


"〈퇴장하는〉 엘리트들은 의회정치에 참여하는 유권자의 힘을 빌려야 했다. 이 전략은 이전의 독재체제가 정치적 추종세력이나 협력자를 광범위하게 구축할 만큼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었거나, 새로운 체제가 자신들에게 정당 또는 압력단체를 조직하여 기존 정당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치적 기회를 제공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1989-90년 이후에도 구공산권 국가에서는 공산당을 계승한 정당들이 합법인 가운데 정화법(lustration law) 제정은 동유럽 이행기 정의 정치의 주요 골격을 이루었다." "헝가리에서는 이행 이후 첫 번째 정부가 1994년 3월에 1만 2천명이 심사대상이 되는 가혹한 정화법을 통과시켰지만, 같은 해 12월에 헌법재판소가 폐지했다. 1994년 5월의 선거 이후, 후기 공산주의자들이 집권에 성공했다. 헌법재판소가 이미 정화법을 위헌 처리했기 때문에 새 정부도 그대로 따를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헝가리 정부는 1996년에 600명을 심사대상으로 하는 온건한 수준의 정화법을 새로 제정했다."(364-5)


"모니카 날레파는 이러한 자기징벌 조치는 사실상 차기정부가 더 강력한 숙정법을 제정하지 못하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선제적 조치'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숙정문제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차기정부가 더 가혹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소 온건한 조치를 도입하면 선제적으로 예방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선제적 조치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째, 아래로부터의 개정 전망이 없도록 정부가 독점적으로 법안을 도입해야 한다. 둘째, 후기공산주의자들은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잃겠지만, 강경파인 반공산주의 세력이 의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어야 한다. 반공산주의 세력이 집권하기 위해서는 강경파보다는 덜하지만 후기공산주의자에 비해서는 엄격한 이행기 정책을 선호하는 온건파 주류정당의 지지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후기공산주의자들은 집권기간 동안 온건한 법을 제정할 인센티브를 가진다."(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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