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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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복음서는 무엇일까?


"그동안 복음서의 장르는 빈번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복음서는 전기傳記가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고 학술논문 또한 아니다. 복음서의 형태는 그것의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초기 신자들의 삶과 기억과 기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복음서는 그 자체로 기도의 한 형태인 것이다. 예수는 전기傳記로 시작되어 교의敎義로 마무리되었다고 얘기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가 진실임을 알고 있다." "부활 직후의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던 초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전기적傅記的인 기억들은 훗날 복음서들이 작성되기 시작할 무렵에 적절하게 조정되었다. 전기적인 기억들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에 부합될 때에만─부활이 바로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했다는─기록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신성한 글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12-3)


"그렇다면 복음서란 무엇일까? 그것은 신성한 글에 기록되어 있는 신성한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의 의미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은 공동의 행위로서,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성찬식에서 생겨났으며 부분적으로는 성찬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들의 설교와 기도를 통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처해 있던 특별한 상황들에, 줄곧 전해져오고 있던 신성한 역사를 적용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은 물론, 예수가 자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겪었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의식에 따라, 구성원들은 '만약 지금 예수가 있다면 어떻게 말했을 것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가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예수의 삶은 지속적으로 그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15-7)


제1장 마가복음 : 예수의 고통받는 몸


"마가의 복음서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들까지 언급되어 있다." "그렇게 특정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참고할 때) 자신들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공동체에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경우엔 그것을 배제했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들 가족 간의 불화에 대한 마가의 유별난 관심, 두려움에 떠는 여성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은 배제되었다. 자신들의 지역과 관련된 내용들 중에서 마가의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박해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가의 청중들에게는 특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마가는 비정상적이라 할 정도로 공동체의 고난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무척이나 모진 말들로 설명한다."(29-30)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텐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출애굽기 3:13-14) 이것보다 더 '고등한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이 한 구절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조사를 받을 때 〈나다〉라고 한 대답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펼쳤던 주장을 제기하는 자들은 누구나 저항을 겪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에 기록된 박해의 진정한 이유이다. 예수의 신비한 몸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제기하는 주장의 불경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마가의 제자들 스스로가 메시아인 것이다."(60-2)


"그렇다면 박해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조엘 마커스는 마가가 제시한 고등 그리스도론 그 자체가 도발이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후반에 예수의 제자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냈던 열심당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세속적인 통치와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지 않는 메시아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가의 시대에 이 문제는 내분의 지속적인 원인이었으며, 그것은 공동체 바깥에 있던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들 내부에서도 박해로 인한 압박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저버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묘사된 제자들과 같은 인물들이 마가의 공동체 내에도 있었던 것이다." "마가의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교도든 상관없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 즉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스러운 대리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박해의 원인이었다."(62-4)


제2장 마태복음 : 예수의 가르침을 주는 몸


"마태의 복음서는 그의 공동체가 바울과 마가에 의해 알려져 있던 것보다 더 형식적인 절차와 체계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집필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안디옥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곳은 바울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의 형제자매들이 섞여 있던 곳이며,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논쟁거리가 되었던 곳으로, 마태복음을 처음으로 인용했던 이그나티우스와 디다케의 저자들이 근거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을 훈련시키는 학교가 있을 만큼 발전된 도시였는데, 체계적이며 교훈적이고 현학적이기까지 한 이 복음서의 특성으로 인해 그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데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활용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 복음서는 그러한 용도에 특히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93-5)


"마태와 누가는 인간들 사이에 나타난 예수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예수의 탄생이 지닌 메시아적 증거들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런 방식으로 탄생 이야기는 수난과 부활 이야기와 함께 '북엔드bookend(세워놓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것)'를 이룬다. 탄생 이야기는 예정되어 있는 유대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편으로는 예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행로를 갖추고 있다. 수난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시작 부분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즉, 이교도에 대한 개방(시작 부분의 동방박사, 끝 부분의 백부장), 무구한 사람들의 고통(시작 부분의 어린아이들, 끝 부분의 예수), 적들로부터 겪게 되는 내키지 않는 시험(시작 부분의 헤롯, 끝 부분의 빌라도), 불길한 징조에 대한 꿈(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끝 부분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아내가 꾸는 꿈) 등이 그러하다."(99)


#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

1. 마태 : 예수가 보여주는 (모세와 다윗 같은) 왕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다윗을 거쳐 내려오는) 예수의 계보를 아브라함에서부터 추적한다.

2. 누가 : 예수 탄생을 반긴 사람들이 보여준 성전 의식儀式을 강조하면서 성직자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예수의 기원을 하나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따로 전승된 요셉과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마태가 서투르게 결합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자신들을 안내하는 별이 있었다. 그들은 왜 여행을 잠시 멈추고 헤롯 왕에게 안내자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의 도살자와 그 동방박사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설픈 이야기 구조는 상징적은 중요성을 품고 있다. 이방인 박사들이 이교도의 배움에 근거해 그 아기를 찾으려 했지만, 신성한 글을 통해 베들레헴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기에게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인 것이다. 즉, 미래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아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예수에게로 인도될 것이다." "마태의 계획은 이처럼 경건한 기억들을 메시아의 유대교적 배경의 일부분으로서, 더 폭넓은 케리그마의 주제들과 연결시키려는 것이다."(115-6)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세례와 제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 대한 묘사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것들을 설명하는, 이 복음서에서 가장 긴 다섯 가지 설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갖춰야 할 도덕성에 관한 개론 혹은 안내서에 가깝지만, 통상적으로 산상설교(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제목으로 책을 썼다)라 부른다." "기독교 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인 마태복음 5~7장에는, 팔복八福(the Beatitudes)과 주기도문 그리고 황금률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한 말씀 중에서도) 소금과 빛, 들판의 백합화, 열매를 보아서 아는 나무,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은 말씀들이 담겨 있다." "모세의 계시는 일련의 금제禁制들로 제시되어 있다('너희는 ~을 하여서는 안 된다'). 반면, 예수는 괴로움 당하는 자, 방치된 자 혹은 박해받는 자들을 향해,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콘솔라시오consolatio(위안)라 불리던 위로의 말로 산상설교를 시작한다."(118-20)


# 팔복八福(the Beatitudes)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 스스로 가난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슬퍼하는 사람 :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과 상실을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3. 순종하는 사람 : 타인을 정복하는 식의 공격적인 태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5.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마음 속이 깨끗한 사람 : 외형적인 의식儀式에 집착하지 않고, 내적인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 : 남들의 곤경을 살피고 의를 행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복이 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는 예수가 산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마무리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8:18-20) 이것은 복음서들 중에서 최초로 명백하게 표명된 삼위일체의 기원祈願이며, 마태의 공동체가 의식을 거행할 때, 세례의 신앙고백으로 인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그 이후로 지속된 기독교 시대를 관통하여, 그의 복음서가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서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었으며, 정전으로 인정된 자료들 중에서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61-2)


제3장 누가복음 : 예수의 조화시키는 몸


"오직 누가만이 착한 사마리아인, 돌아온 탕아, 착한 도둑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인정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어머니뿐 아니라 나인의 과부, 예수의 발을 씻겨준 여인, 오랫동안 등이 굽어 있던 여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적은 돈을 헌금한 과부, 갈릴리로 가는 길에 동행했던 여인들과 골고다로 가던 중에 설교했던 여인들 등 여성들에게 특별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평화주의자 혹은 세계주의자ecumenical로 불리며, 유대와 로마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는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를 원하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단테는 누가에 대해 '그리스도의 상냥함을 표현한 사람'이라 했고, 에른스트 르낭은 누가복음을 '지금까지 존재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했다."(168)


"누가는 (초기 공동체들이 창작한 노래와 전승에 의존해 기술한) 신성한 글 속에서 왕다운 예수보다는 성직자다운 예수의 면모를 드러내는 전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이야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수태 고지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다윗왕의 혈통인 요셉 대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된 성직자 사가랴에게 전해진다. 성소에 들어선 사가랴는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요한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대인의 혈통을 완벽하게 지키는 주님의 섭리는 전혀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종종 상징화된다─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난 경우는 오직 한 쌍의 부부밖에 없다. 그 부부는 이삭을 낳은(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이다."(172-3)


"누가가 메시아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실제로는 행해진 적이 없는─에 연결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당시 예수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대 혹은 90년대에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다. 유대전쟁이 끝나갈 무렵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친 형제자매들은 자신들의 근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는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과 성전에 다시 연결시켜 초기의 계보를 다시 정립하려 한 것이다." "누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자신의 공동체는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펼쳐 보이는 탄생의 무대에는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헤롯 왕의 살육과 같은 피로 얼룩진 장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윗이 목자였던 그 마을에서, 평화로운 목자들은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듣게 된다."(182-3)


"마가와 마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했던 단 한마디의 말만을─버림받음에 대해 울부짖는─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은 각각 서로 중복되지 않는 세 마디의 말을 인용한다. 누가가 전하는 말들은 자신이 일관되게 그려온 예수의 모습과 어울리는, 화해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따지고, 그것을 집행했던 자들을 응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예수 본인의 기도를 거부한다." "후대 역사의 비극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예수의 말을 잊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에게 저질러진 그 같은 가증스러운 행동을 용서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일부 필경사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실제로 복음서에서 없애버렸다는 것이다."(220-1)


"누가의 복음서가 지닌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가 갈릴리를 예루살렘으로 변경하여 부활한 예수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탄생 이야기로 시작되며, 예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승천과 오순절 이야기로 끝이 난다. 누가가 복음서를 작성하기 최소한 10년 혹은 20년 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중요하다. 바울과 함께 시작된 예수 운동의 모든 활동이 그때부터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머물던 디아스포라에서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누가의 집착에는 기원起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보상 욕구가 담겨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의 뿌리를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누가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예루살렘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곳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223-4)


제4장 요한복음 : 예수의 신비한 몸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마태복음(3:7, 11)에 등장하는 성난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의 세례자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비난하며 그들의 죄를 태워 없애버릴 것이라고 약속한다('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누가복음의 세례자를 개량한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군인들에게 그들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3:14), 예수가 불이 아닌 오직 성령만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절대로 예수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물로 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공개적으로 선언된다.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개인적인 계시를 간직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를 아들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본 그 순간 성령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것을 세례 요한만이 보게 된다."(243-4)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어떻게 내쫓았는지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가 체포되기 직전인, 그의 공생애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여, 이 사건을 예수가 죽음을 맞게 되는 원인으로 만든다. 반면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 일어난 것으로 배치한다." "예수가 성전의 희생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그가 요한의 복음서에서 거듭해서 펼쳐보이게 될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믿음은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이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형식적이고 겉치레일 뿐인 순종을 거부한다." "이로써 사랑받은 제자의 공동체는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이 바로 예수가 세워놓은 성전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인식이다."(247-51)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 직전에 등장하여, 수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설명해준다.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는 행위는 예수가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갚아야만 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성전의 권위자들을 격노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 행위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1:47-48).  이 이야기의 역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고뇌하는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동일하다. 즉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14:33)은, 예수가 죽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매우 놀라고(ekthambeisthai) 괴로워했다고(ademonein) 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기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면서 〈마음이 비통하여(enebrimesato) 괴로워했다(etaraxenheauton)〉."(272-3)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약속들 가운데 한 가지는 보혜사保惠師의 약속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14:15-17) '보혜사'는 문자 그대로 〈보호하기 위해 부름받다(para-kletos)〉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신의 주장을 옹호해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왜 이것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사랑받은 제자의 무리가 남긴 또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자신이 이 제자들의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옹호자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와 하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될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가기 전에 그렇게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것이다."(290-2)


"예수는 처음부터 목적지(telos)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완벽하게 다가섰다. 그의 사명은 죽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때(kairos)에 맞춰 이동했다." "이 죽음이 지니고 있는 유월절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유월절 희생양의 뼈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뼈는 부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병사 한 명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여기서 물과 피는 예수가 인류에게 가져온, 죽음으로부터 소생한 생명을 상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포도나무이며, 포도나무는 가지를 통해 자양분을 내보낸다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브를 창조하기 위해 첫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과, 그를 믿는 자들의 몸통인 '신부'를 창조하기 위해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97-8)


맺는 말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왜 네 가지 복음서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묵상하면서 서로 다른 네 가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의 박해받는 구성원들에게 예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다. 마태는 일목요연한 방법으로 말씀들을 수집해놓는다. 누가는 예수의 사명이 지닌 치유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특성들은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다 드러나 있으며, 다만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복음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불가사의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이러한 시각들 모두가 필요하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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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2
게리 윌스 지음, 김창락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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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나쁜 소식 전달자〉


"독일의 위대한 학자 하르낙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란 무엇인가?》에서, 바울이 〈복음이야말로 유대교라는 율법 종교를 폐지하는 하나의 새로운 힘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바울은 어떻게 예수의 메시지를 그렇게도 일찍이 또 그렇게도 철저하게 전복시킬 수 있었을까?" "사실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신 일들이나 말씀들에 관한 명시적인 언급이 별로 없다. 그는 조국 유대에 대해 아는 바가 변변치 못했으므로 디아스포라에서 그에게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께 온 관심을 집중한다. 바울 비평가들에 따르면, 바로 이 디아스포라 지역이 바울이 자신의 신학 사상의 구성 요소들을 수집하여 하나의 새로운 종교 속으로 엮어 넣는 작업을 한 곳이다." "바울은 자신이 사적으로 받은 계시 외에는 예수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도 없었지만, 대담하게 원래의 열두 제자들과 의견을 달리하고 그들을 비판했다."(11-3)


"자기 자신의 종교를 창설하는 사람에게 걸맞게 바울은, 초기 비평가들의 눈에는 '이단들의 원조'가 되었다." "무엇이 바울을 이같은 불화의 사과가 되도록 만들었을까? 바울 자신의 말 속에 그 문제의 기원起源이 있다." "바울 서신들은 특정한 지방의 위기를 처리하기 위하여 써 보낸 임기적臨機的인 글들이다. 바울은 여러 가지 투쟁의 한복판에서 수신인들 편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변을 하거나 적대자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이 편지들을 구술하고 받아쓰게 했다. 그의 답변 속에 적대자들의 모습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바울이 상대쪽이 무엇을 외치는지 알지 못하면서 바울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는다. 바울이 사용하는 매정한 말들 중 일부는 그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보이지 않는 그의 비평가들에게 부딪쳐서 울리는 반향이었다." "즉, 바울은 냉정하고 담담한 철학자가 아니라 전투태세를 갖춘 사자使者였다."(13-7)


# 바울의 서신 분류

1. 바울이 쓴 서신 :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2. 바울의 추종자들이 쓴 서신 : 골로새서, 에베소서

3. 바울의 서신을 재진술한 서신 : 데살로니가후서

4. 바울과 다른 관점에서 쓴 서신 : 디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1장 바울과 부활하신 예수


"예수와의 교제를 시작한 초기의 바울은 유대교 율법에 헌신했던 이전의 삶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본 경험을 화해시켜야 했다. 바울은 예수(의 역사)를 유대교 율법의 성취로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완성이다〉(롬 10:4)." "그리스어로 Khristos(그리스도)는 Kyrios(주님)처럼 하나의 칭호이다. 이것은 히브리어 'Messiah'(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두 낱말─Messiah와 Khristos─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바울은 때때로 예수를 가리켜 '그 메시아'로, 혹은 단순히 '메시아', 또는 '예수 메시아', '메시아 예수'로 칭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예수의 칭호이다. 칭호는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의 유대적 운명과 연합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울에게 믿음의 기본적 계시는 언제나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다(고전 15:3-4)."(48)


2장 바울과 부활 이전의 예수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예수의 삶에 대해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서신은 예수의 삶의 의미에 대한 해설이 아니다. 바울이 자기가 손수 세운 교회 공동체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러한 일─예수 삶의 의미를 해설하는─에 종사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서신들은 특수한 당면 문제들을 놓고 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한 문제들을 말하는 데 필요한 경우에만 예수의 삶에서 끌어낸 자료를 사용했다.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요구되는 경우에 바울은 그 말씀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주님의 만찬(Kyriakon Deipon, '성만찬'을 가리킴), 이혼 문제, 음식 규례의 준수, 전도자가 재정적 원조를 받는 문제에 관해 그렇게 적용했다. 이러한 직접적인 인용을 통해 바울이 제시한 것이 복음서들에 제시되어 있는 후대의 기록들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에 아마도 더 가까울 것이라는 사실이 논증되었다."(71)


"예수께서는 자기의 몸이 성전을 대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셨는데, 바울은 이 주장을 되받아 예수의 몸 안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을 대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시기(oikei, 거처를 정하다, 거처하다) 때문이다. 성령은 더 이상 하나의 물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oikei) 것을 알지 못합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전 3:16-17, 비교: 고전 6:9, 고후 6:16)." "바울의 말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만남의 장소를 대치하는 (새로운 참된) 성전이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 사실은 (기원후 70년)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더 정확히는 복음서들이 씌여지기 전에─이 전승이 신도들 가운데 유포되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80-1)


"바울은 율법의 정수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예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갈 5:14).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8-10).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2)." "이것이 진정한 핵심이다. 바울의 사상은 사랑이 넘치는 예수의 사상에 덧씌운 이질적인 사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동일한 사랑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 셈이다."(83-4)


3장 여행자 바울


"바울은 어느 면으로 보나 영웅적인 여행자였다. 그는 어림잡아 적어도 13,000km나 되는 거리를 여행했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도보 여행이었다." "이 여행은 항상 쉽거나 전적으로 안전하지 않았다. 육지의 산적들, 바다의 해적들, 오만한 관리들, 거친 날씨, 시시때때로 부닥치는 위험, 언제나 뒤따라오는 적개심은 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고된 여행은 어쩔 수 없이 꼭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바울은 항상 여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동역자들 또는 그가 세운 교회 공동체의 신도들과 오직 편지로만 의사 전달을 했다는 오해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러 달 동안 끈기 있게 자기가 아는 각 공동체들과 함께 지냈다." "바울이 여러 교회 공동체들과 맺는 관계는 너무나 밀접해서,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는 데 가장 친밀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는 신도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부르며 언제나 형제처럼 느꼈다."(90-5)


4장 바울과 베드로


"베드로와 바울이 안디옥에 있을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로부터 경고가 내려왔다. 그것은 베드로에게 이방인 형제들과 함께 음식 규정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야고보가 내린 이 지시에 순응했다─이것이 바울을 격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바울에게 주님의 식사(=성찬식의 음식)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형제들을 위한 통합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이는 바울에게 단순히 주님의 성찬에서 부여되는 통합이 위험에 처한 것이 아니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안디옥 교회 안에 세례 받은 모든 사람들 속에 임재하셔서 그들이 그의 신비한 몸을 이루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의 임재에서 물러난 것은 예수를 배격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장벽을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연장하는 것을 거부한 그 장벽과 관련이 있다."(128-30)


5장 바울과 여인들


"형제자매들의 처음 공동체들은 그 시대에 가장 평등한 집단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의 자매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보호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숨기거나 축소시키려는 노력을 수세기에 걸쳐서 협력할 터였다. 그 예로 사람들이 (바울의 여성 동역자인) 유니아에게 한 것─역사에서 그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보다 더 극적인 것은 없다. 유니아는 배경상으로 바울의 친구이며, 감옥 동료이며, 동료 사도이며, 바울보다 먼저 그리스도교에 들어온 사람이었다(롬 16:7)." "처음 공동체들에는 직제는 없이 단지 직능들만 있었고, 바울은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받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위계를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세 개의 큰' 은사─사도, 예언자, 교사(고전 12:28)─중에서 사도들(apostoloi)을 목록의 첫번째로 넣었다. 유니아가 단지 사도들 가운데 포함된 것이 아니라, 뛰어난(episemoi) 사도들 가운데 포함된다는 것은 아주 높은 명예이다."(138-40)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쓰기를 그곳의 예배 모임에서 여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고전 11:5), 바울은 예배 모임에 입고 올 옷을 두고 일어난 싸움을 말하고 있다." "남자는 하나님의 직접적 형상이기 때문에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고도 다닐 수 있다. 그런데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남자─의 형상이고, 남자 다음에 창조되었으며 남자의 조력자가 되도록 예정되었다(고전 11:7-9). 남자가 이러한 문화, 즉 유대 사회와 로마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성차별주의의 갖가지 찌꺼기들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울이 자기와 함께 일하는 여자들에게 사도, 예언자, 봉사자(diakonoi)라는 여러 유형의 영예를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들은 그가 관여하는 공동체들 속에서 혹은 그녀들을 위해 제시하는 이상 사회에서 2등 시민이 아니다."(148-50)


6장 바울과 문제투성이 공동체들


# 바울의 서신 중재

1. 데살로니가전서 :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가난한 형제자매들과 자신들을 분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훈계함

2. 갈라디아서 : 할례 받은 신도들과 할례 받지 않은 신도들 사이의 갈등을 훈계함

3. 빌립보서 :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에게 훈계함

4. 빌레몬서 : 빌레몬에게 그의 노예 오네시모가 행한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여주기를 요청함

5. 고린도서 : 교리, 훈육, 환상, 계급, 성, 인품 등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이에 대응함

6. 로마서 : 로마의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관용과 화해의 정신을 베풀 것을 요청함


7장 바울과 유대인들


"바울의 시대에는 그리스도 교회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었다. 예수를 유대인들이 약속된 메시아로 보는 유대 사람들과 이에 더해서 예수를 유대인들이 약속된 메시아로 보는 이방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바울은 이 이방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었다. 바울은 자기의 추종자들을 아무것도 없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성서로부터 가르쳤으며 그 메시아를 유대교 계약의 성취로 제시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집단 사이에 하나의 연속체를 발견할 수 있다: 1.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 2.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 3.예수를 유대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비유대인들. 여기에는 유대교적 맥락 밖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즉 전체 유대인에게 대적하는 집단은 하나도 없다. 여호화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와 분열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 싸움을 보고 있는 것이다."(187-8)


"바울을 읽는 데 가장 기본적인 것 중 하나는 그가 '유대인들'을 언급할 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이다. 우리는 매번 바울을 오해한다. 즉 바울이 위에서 제시한 2번 집단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1번 집단의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한다. 2번 집단의 유대인들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율법을 부과하려고 해서, 바울과 계속 부딪히면서 갈등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따라서 바울이 유대인들이 〈우리가 이방 민족들에게 구원받는 방법을 말해주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고 말할 때에, 그는 〈할례주의자들〉 같은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교의 음식 규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신도들의 단체 안에 임재해 계시는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을 죽이려 했던 것과 같다(과거에 바울은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189-90)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교 율법의 모든 의식적 요구사항을 준수할 의무는 없다 하더라도, 유대교의 율법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계 형제들에게, 예수가 성취하신 약속들은 유대교의 약속들이고 그 약속은 율법의 보호 아래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했다.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롬 3:1-2). 이방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예수가 성취한 복음의 보관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이라는 줄기에 접붙임 받은 것이다. 그 줄기가 없다면, 이방인들은 세계와 그것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허공에 표류하고 있을 것이다. 스텐달이 적절히 지적하듯이, 이방인 형제들에게 내리는 (바울의) 이러한 주의사항은 그리스도교가 반셈주의가 되는 것에 대항하는 최초의 그리고 최선의 경고이다."(197-8)


"어떤 이들은 바울이 세상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 유대인들의 회개가 선행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줄기를 가지에다 접붙이는 것이다. 바울은 형제들이 유대인의 약속, 역사, 운명에 연결되어 있다고 하지, 그 반대로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교의 율법을 폐하신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두 노선〉의 구원을 믿는다고 주장한다. 이방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될 것이고 유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율법을 가지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이방 사람들만이 예수를 의지해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예수를 유대교의 계약 그리고 그 성취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좀 후대 세대들은 예수에게 귀의하는 것을 하나의 분리된 종교, 즉 '신약성서'의 종교에 귀의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신약성서라는 것과, 유대 백성이 받은 약속 안에 들어 있는 구원 외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202-3)


8장 바울과 예루살렘


"예루살렘 교회를 상대로 한 바울의 지속적 투쟁은 예루살렘 교회와 일으킨 첫번째 충돌 때 합의한 것을 이행하려는 그의 열의 속에 명백히 드러난다─그때의 합의사항은 그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편지들의 상당 부분은 예루살렘을 위한 큰 자금을 모으는 일에 관련되어 있다. 이 일은 바울에게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바울은 그 모금을 유대에 있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연결되는 하나의 가교로 보았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유대인 전체에 연결되는 가교일 것이다. 그는 그 모금을 거대한 규모로 조직하고 있었는데, 매년 예루살렘으로 유입되는 수백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막대한 성전세 납부와 견줄 만한 그러한 규모였다." "바울에게는 공동체들 사이에 서로 주고받는 이러한 거래가 예수의 몸에 속한 각 지체의 상호성에 대한 물질적 표현, 바로 그것이었다."(207-11)


"왜 예루살렘 형제들은 자신들을 위해 모금한 막대한 헌금을 불쾌하게 여겼을까? 슈미탈스는 야고보와 그의 동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과─그들의 적개심은 머지않아 야고보 자신의 목숨까지 요구하게 될 것이었다─대별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울 일행은 대부분 할례 받지 않은 형제들인 이방인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들이 가지고 온 물질적 자금을 받는 것은 그의 처지를 훨씬 더 어렵게, 심지어는 변호될 수 없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 내에 선교 사업을 펼칠 마지막 기회를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때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기부금을 받는다면, 유대인들이 눈에는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의 연대성을 천명하는 것으로 비칠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 자체의 선교 가능성을 파괴하게 하는 위협이었다.〉"(216)


9장 바울과 로마제국


"바울이 로마서를 쓴 이후로, 우리는 바울이 한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다. 그의 예루살렘 여행과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로마 여행에 대해서는 누가의 사도행전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는 누가의 주장을 의심할 이유는 많이 있다. 바울은 자기가 유대인들에게 다섯 번 매를 맞은 것 말고도, 로마 관리들에게 세 번 채찍질 당했다고 했다(고후 11:25)─그러나 로마 시민을 채찍질 하는 것은 위법이었다. 키케로가 베레스의 2차 공판에 부쳐 말했다: 〈로마 시민을 사슬로 매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로마 시민을 채찍질하는 것은 범죄다. 로마 시민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실지로 일종의 존속살해 행위이다.〉 이러한 보호장치에 몇몇 예외사항이 있었던 게 발견된다. 그렇지만 그런 예외를 바울의 경우에 적용하려면 여덟 가지 서로 다른 계기에(아마도 여덟 군데의 다른 지역에서) 예외적 상황이 발견되었다고 상상해야 할 것이다."(228-30)


"바울은 유대인 형제자매들을 위해 모금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었다. 바울은 야고보가 그 헌금을 기꺼이 혹은 고맙게 받아주지 않을까봐 걱정했다─누가는 그들을 만나게 했으면서도 그 문제에 대해 논의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야고보가 기꺼이 받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분명히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그 일은 누가의 의도를 난처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기록에서 그것을 삭제해야 했다. 그 대신 야고보가 유대인들의 적개심에 대해 바울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고보는 유대인들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는 바울이 성전에 가서 몸을 정화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 조언 역시 역효과를 낸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바울이 체포당한 것은 성전 안에 있는 동안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신문하고 사형 선고를 받도록 로마인들에게 넘긴다."(232-3)


"로마 공동체의 불명예스러운 내부 분열과 거기서 생긴 가장 위대한 두 사도의 죽음에 대해 신도들 측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보존되어 있지 않다. 유일한 직접적 증거는 이교도 타키투스의 증언이다. 클레멘트와 이그나티우스는 단지 간접적인 (신중한) 증거를 제공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은, 형제들 사이의 갈등을 처리하게 위해 돌아온 바울이 밀고자들과 네로의 더러운 거래의 희생자가 되어 죽임을 당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마지막 한 가지 점에서 자신의 거룩하신 스승을 따른 셈이 된다. 그 두 사람을 죽인 것은 종교였다." "두 사람이 네로 치하에서 죽었다면, 베드로는 거꾸로든 똑바로든 십자가 처형을 당하지 않았으며, 누가가 바울에게 씌운 로마 시민 신분은 그의 죽음과 아무 관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쓴 채 갈기갈기 찢기거나 네로의 정원에 장식용 횃불로 사용되는 끔찍한 방식으로 죽었을 것이다."(242-3)


맺는 말 바울 잘못 읽기


"종교는 예수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무른 것처럼 바울의 유산을 접수하여 입맛대로 주물렀다─왜냐하면 예수와 바울은 둘 다 종교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율법의 외형적 준수나, 성전이나 교회, 성직계급 또는 성직자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내면적 사랑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들은 둘 다, '종교'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고 그 짐을 벗어던지려고 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사람들과 반목 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비록 관습적인 정치의 밑바닥을 파고들거나, 관습적인 정치를 뛰어넘는 방법을 취하긴 했지만, 급진적인 평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었다. 그들은 부자들의 속을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오직 두 가지 기본적인 도덕적 의무,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만 보았다. 그들은 둘 다 풀어주는 자였지, 가두는 자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들은 갇혔다. 그래서 그들은 죽임을 당했다."(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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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와 화폐
자크 르 고프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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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기독교화의 유산


"중세 초기에는 화폐, 다시 말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화폐에 관련된 로마 사람들의 관습을 유지하다가 이어 모방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화폐가 주조되었고, 솔리두스 금화가 교역의 주축 통화가 되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 무역의 감소에 적응하기 위해 곧 트리엔스 금화, 그러니까 솔리두스 금화 가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화가 주요 통화가 되었다. 감소하긴 했지만 고대 로마 화폐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용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야만족'으로 보인 이방인들은 로마 사회로 들어와 기독교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갈리아족을 제외하고는) 화폐를 주조하지 않았다. 그러한 화폐는 로마 제국에서 탄생한 모든 영토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단일성을 보존하는 진귀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례로 중세 초기에 명목 화폐로 널리 이용된 것은 로마 제국의 은화인 데나리우스, 즉 드니에였다."(19-21)


2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서 봉건시대까지


"카롤링거 왕조에서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화폐 제조에 사용된 금속 광산이 더 활발하게 발견되거나 개발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가장 큰 은광인 푸아티에의 멜 광산을 집약적으로 개발함으로써 화폐 주조가 증가하기도 했다." "봉건제가 출현하고 무엇보다 마르크 블로크가 말한 제2기 봉건시대로 나아감으로써 서구 기독교 사회는 사실상 화폐가 확산되는 태동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카롤링거 제국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쇠퇴했기 때문에 주조 작업이며 주조 작업으로 얻는 수익이 세분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샤를마뉴 대제의 개혁 조치로 결국 중세 초기의 여러 화폐는 사라졌지만 황제가 화폐 주조를 독점한 기간을 짧았다. 9세기부터 백작들이 황제의 독점권을 찬탈했으며 백작이 활개친 중세에는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화폐를 주조했다. 그렇게 화폐 주조자들이 분산된 상황은 봉건제의 맹렬한 기세와 연관되어 있었다."(25-6)


3 12~13세기의 전환기에 비상하는 주화와 화폐


"상업은 얼마간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는 기독교 사회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의 영향으로, 소규모 지역 시장을 넘어 대규모 정기 시장의 개설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했다." "통화 확대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원자재 구매와 물품 판매를 촉진하는 수공업이 발전하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짐으로써 도시에서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시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사회계급이 분화되어 부유한 부르주아와 가난한 시민으로 나뉘었다. 십자군 원정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댄 영주의 중요성은 약화된 반면 부르주아는 더 부유해졌다." "화폐는 도시의 각종 조합에서 접착제 역할을 했다. 도시에서는 길드, 번성한 도시와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인 조합이 창설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의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와 상업이 발전했으며, 해당 지역은 성장이 더디고 화폐 유통이 활발하지 않던 지역들과 달리 더 많은 부와 힘을 얻었고 외양도 화려해졌다."(30-2)


4 13세기, 찬란한 화폐의 시대


"화폐는 (도시의 납세 재정과 곡물 수요를 책임지면서) 중세 도시에서 점점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부르주아의 첫 번째 야심이 자유를 얻고 무엇보다 스스로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주요 관심사는 화폐와 관련된 것이었다." "12세기 말부터 시민들은 시간의 가치에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간은 곧 돈이라는 관념이 나타난 것이다. 무엇보다 13세기는 수작업을 포함하여 노동의 경제적 가치, 바로 노동의 화폐가치를 점점 더 깊이 인식했다. 도시의 임금 노동자가 확대된 상황이 이와 관련돼 있었다.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복음서(누가복음 10장 7절)의 이 구절이 점점 더 많이 인용되었다. 그렇지만 도시 공동체가 결코 얻지 못할 한 가지 권리가 있었으니 바로 영주와 제후가 움켜쥔 화폐 주조권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층은 13세기에 영주에게 자기네 화폐의 안정성을 보증해달라고 요구한다."(49, 54)


5 상업 혁명이 일어난 13세기의 교역, 은, 화폐


은광 개발은 당시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상업에 부응해 주화 보급을 늘려주었다. "13세기에 동방세계에 수출된 주요 화폐는 영국의 스털링, 프랑스의 투르에서 주조된 드니에, 베네치아의 그로소였다. 이탈리아인들이 유럽에서 수출하고 재수출하는 동방세계의 상품 수량이 늘어난 결과 통화량도 증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구사회의 화폐는 아주 먼 거리를 오가며 동방세계의 각종 물품을 교역하는 데 쓰였다. 이를테면 러시아 모피, 소아시아 명반같이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취득한 것들을 거래했지만, 긴 13세기 동안 무역상들은 중국에 도달해 비단을, 인도 동부에 이르러 향신료와 보석을,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 도달해 진주를 거래했다. 여기서 13세기의 서구사회에서 혹은 서구사회를 통해 화폐가 대대적으로 확산된 이유 중 하나가 서구사회, 영주 사회 그리고 특히나 도시 사회에서 상류층 부르주아 계급의 사치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62-3)


"(은화의 확대, 금화의 재등장과 더불어 세 번째 층위의 화폐로 등장한) 낮은 가치의 화폐, 즉 저품위 보조화폐는 특히 도시에서 일상생활의 갖가지 필요를 충족시켰다. 그러한 보조화폐는 종종 '검은 돈'이라 불렸다. 그렇게 해서 베네치아에서는 엔리코 단돌로 총독이 13세기 초에 2분의 1데나로에 해당하는 작은 동전을 주조했다. 우리의 긴 13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주조된 화폐는 콰트리노, 혹은 일반적으로 둥그스름한 빵 하나의 가격에 해당하는 4데나로짜리 동전이었다. 통상 이 작은 주화로 자선을 베풀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자연스러운 사회변화에 의해, 그와 동시에 탁발수도회의 가르침과 설교의 영향을 받아 자선 행위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왕령으로 파리에서 주조된 드니에는 '자선 행위의 드니에'가 되었다." "가치가 낮은 주화는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이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당히 소소한 거래에까지 화폐 사용이 확대되었음을 입증한다."(73)


6 화폐와 여러 정체의 탄생


"시기상 가장 앞서고 압도적인 체제이자 화폐를 제일 많이 조달받은 것은 교회, 다시 말해 교황청의 정체였다. 교황청은 토지에서 그리고 교황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도시들에서 나오는 소득을 거두었으며 이러한 수입은 일명 성 베드로의 재산이었다. 교황청은 한편으로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특별한 십일조를 받았다. 사실 십일조는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성직자들이 생계를 보장하는 데, 예배당을 유지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각종 경비가 증가하면서 교황청에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교황청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의 계율 32에서 의무로 부과되는 십일조의 성격을 상기시켰다. 교황청에 지불해야 할 최소한도의 금액도 정해두었다. 교황청은 13세기에 구조조정을 실시했으며 생계의 원천인 여러 세원(稅源)은 교황과 교황청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교황제의 재무와 세제 틀은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렀던 14세기에 최적화되었다."(80-1)


"13세기에 기독교를 믿는 주요 군주정에서 왕의 재무를 관리하는 특별 기구가 발달했다. 대개 그렇듯이 영국 군주정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영국의 군주정은 노르망디 공국에서 탄생한 선구적인 기구를 도입해 세련되게 다듬었다. 그렇게 해서 12세기부터 플랜태저넷 가 출신의 헨리 2세(1154~1189)는 어떤 관리 기구를 마련했다. 정당하게도 그에게는 '유럽의 첫 번째 화폐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헨리 2세의 자문관이었던 솔즈베리의 존은 《폴리크라티쿠스》에서 군주정의 세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에게는 경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관건이었다. 당시 경제에 관한 관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화폐 유통을 보장하고 감독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의 부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이었다. 군주정의 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윤리의 문제와 연관돼 있었다."(81-2)


7 대출, 부채, 고리대금


"13세기는 화폐의 사악한 본질에 새로운 모습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 모습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 지성사의 대발견이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쫓아 〈돈은 새끼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고리대금은 자연에 반하는 죄이기도 했다. 자연은 이제 스콜라 신학자들이 보기에 신의 창조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돈이 가득한 주머니를 목에 걸고 그를 아래로 끌고 가는 모습이 새겨진 여러 조각이 보여주듯이 구원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지옥의 사냥감이었다. 이를테면 5세기에 교황 레오 1세(대大레오)가 이미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리대금의 수익금은 곧 영혼의 죽음이다.〉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는 기독교 사회의 도시에 있는 이방인들이며 그들에게는 기독교식 장례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98-9)


"실뱅 피롱은 resicum이라는 용어가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어떻게 지중해 지역 공증인과 상인들에게서 나타났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 단어는 카탈루냐 페냐포르트 출신으로 도미니쿠스 회 수도사인 라이문도의 중개로 스콜라 신학자들의 어휘와 사고 속에 들어왔다. 그는 '해상 대출'에 resicum을 사용했다. 중세인들은 오랫동안 바다를 몹시 두려워했다. 육상 여정이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려는 영주들에게 가로막히고, 특히 숲 속을 지날 때는 도적들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여러 그림과 봉헌물에 나와 있듯이 바다는 실로 위험한 곳이었다. 바다는 상인의 생명이나 상품의 무사 배달을 위협했으며, 해적보다 조난 위험 때문에 그 보상으로 이자 징수 및 고리대금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자를 거둬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출 기간에 대부금으로 직접 이익을 취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 돈은 노동의 대가였다."(111-2)


8 새로운 부와 가난


"새로운 부자들은 기독교 사회의 유력자들 가운데 자리 잡았다. 새로운 부에 대면하여 새로운 가난이 그들의 활동을 탐욕과 악덕이 아니라 내가 언급한 '카리타스'와 미덕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부에 새로운 가난이 대립되었다. 이 가난은 더이상 원죄의 결과도 욥의 가난도 아니었고, 기독교의 영성에서 예수상의 변화와 관련해 가치가 부여된 가난이었다. 예수는 점점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구현된 옛 모습, 다시 살아난 신인(神人)이자 죽음의 위대한 정복자라는 옛 모습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헐벗음으로 상징되는 가난의 모델을 제공한 신인이 되었다. 1000년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사도들에게 돌아가자는 모든 움직임을 강력하게 선동한 것은 근원 회귀에 의한 갱신, '벌거벗은 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권고였다. 즉, 감내하는 가난과 자발적인 가난이 있었다."(115-7)


"무엇보다 탁발수도회, 주로 프란체스코 회는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 새로운 부를 가난한 사람들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영적·사회적 수단을 찾아내려 했다. 13세기에 교회와 힘있는 속인들은 수도회의 영향 아래 한 가지 특별한 활동으로 새로운 부와 투쟁하고 새로운 가난을 장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언제나 우선 교회의 주된 사업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그럴 만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기독교인들의 활동이었다. 바로 자선사업인데, 중세에는 일반적으로 자비로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의 자비의 기초가 신의 자비였다. 이러한 자비는 특히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틀림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13세기에는 기부에 의한 병원 설립과 운영이 특히 발달했다." "자선 행위의 진화는 프란체스코 회가 겪었던 것처럼 새로운 부와 가난의 등장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118-20)


9 13~14세기, 위기에 처한 화폐


"중세의 여러 화폐는, 일반적으로 화폐 주조권과 유통권을 가진 공권력이 정해진 법정 시세에 따라 유통시켰다. 그러니까 영주, 주교, 그리고 제후와 왕이 그런 공권력이었다. 이러한 법정 시세 말고도 업계가 정한, 부차적이고 유동적인 '거래상의' 혹은 '자발적인' 시세가 존재했다. 오랫동안 이 이중 시세는 상당히 안정된 채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말에 화폐 주조권을 가진 권력은 한편으로는 통화 단위로, 또 한편으로는 금속 무게로 표현되는 교환 가치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동은 화폐 유통을 경제 현실에 맞추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으며 제후들, 특히 그저 불완전한 세제를 갖추었던 프랑스의 왕에게는 자신의 부채를 줄이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상인들과 임금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했으므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수차례의 화폐 변동은 14세기 민중 봉기와 정치 소요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31-2)


10 중세 말에 개선되는 재무 체계


새로운 화폐 수요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킨 두 가지 주요 수단은 어음과 보험이었다. 이를 다루는 은행가들 간의 계약 체결은 때로 갱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사체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콤파니아'의 경우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 긴밀이 연결되어 있었고 위험, 희망, 손실과 이익을 공유했다. '소시에타스 테라에'는 '코멘다'와 가까웠다. 대부업자는 혼자 위험을 떠안았고 이득은 일반적으로 반씩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항은 유연했다. 투자 자본은 상당히 다양하게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직이 지속되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한 사업, 한 여행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1년, 2년, 3년, 대개 4년─ 따라 정해졌다." "일부 상인, 일부 가문, 일부 집단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힘있는 조직들이 발달했는데,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조직에 '컴퍼니'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조직은 피렌체의 저명한 가문들이 운영했다. 페루치가, 바르디 가, 메디치 가 말이다."(152-3)


11 중세 말의 여러 도시와 통치 체제 그리고 화폐


"도시는 15세기 사회의 주요 시련 가운데 하나를 겪었다. 부채를 진 것이다. 이는 분명 공동의 부채, 그러니까 공채거나 개인의 빚이었으며 무엇보다 공채 판매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부채는 사회 계층 간에 적대감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상호 신뢰를 무너뜨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시민의 마음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도시들은 권한을 침해하는 제후와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채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의 힘과 이미지를 약화시켰다. 중세 유럽은 13세기에 상당히 도시화되었는데, 재정에 관련된 문제로 점차 제후들에게 예속되었다. 중세 도시는 충분한 재정 능력을 갖지 못했다. 도시는 화폐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보유하지 못한 반면, 그런 수단을 갖고 있었던 제후들은 나중에 화폐가 우세해졌을 때 국가 지도자 위치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혜택을 입은 사람은 채권자들 뿐이었으며, 그들에게서는 정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부자의 모습이 보였다."(157-8)


12 14~15세기의 가격과 임금 그리고 주화


"전쟁은 격렬한 전투나 소규모 교전 그리고 노략질 형태로 15세기 중반까지 거의 모든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왕정 체제 혹은 (도시 같은) 공동의 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금은 인정받기 어려웠고 제후들은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차입금은 기독교 사회를 항상 위기로 몰아갔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피렌체의 바르디 가에서 돈을 차용했으며 이로써 바르디 가는 파산하게 된다. 백년전쟁 후에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하여 샤를 7세는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빌렸는데, 나중에 그 돈을 상환하지 않기 위해 자크 쾨르를 투옥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막시밀리안 황제가 뉘른베르크의 명가인 푸거 가문에서 돈을 차용했다. 푸거 가문은 황제의 도음을 타이롤과, 심지어 에스파냐의 새로운 구리 광산과 은 광산의 개발에 이용했다. 푸거 가문은 샤를 캥과 에스파냐 펠리페 2세를 돕는 은행가가 되었으나, 에스파냐 군주정의 국가 파산으로 몰락하고 이어 16세기에는 사라지게 된다."(173-4)


13 탁발수도회와 화폐


"현대 및 동시대 역사학자들은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가 역설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이라는 개념에서 '시장 사회'에 영감을 줄 화폐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프란체스코 회가 하층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제공하기 위해 신용대출 기관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15세기 말에만 그렇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가난은 중세 말까지 여전히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다니엘라 랑도는 공영 전당포를 〈담보물의 보증과 저금리 지불이라는 수단으로 도시의 노동 계층에게 단기 대출을 보장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로 정의했다." "공영 전당포를 이끄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대출을 보장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매우 낮은 이자율, 약 5퍼센트를 유지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공영 전당포는 맹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보면 고리대금 형태가 보였기 때문이다."(195-7)


14 인문주의와 메세나 그리고 화폐


"기독교 교리는 화폐에 다소 주저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보였다. 교회가 중세의 모든 영역에서 주요 권력 기구였기 때문에 화폐를 불신하는 교회는 적어도 14세기까지 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인도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변화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화폐에 대해 사실상 사고를 전환했다고 보았다. 이 시대에 부자의 정의가 변했으며 부가 화폐와 동일시되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소수의 문화적·사회적 엘리트 계층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를 부인할 수는 없다. 중세 말에 등장한 그러한 엘리트 계층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문화적 전환을 촉발한 것은 상인에 대한 태도 변화일 것이다. 일찍이 교회는 우선 지옥에 내던져질 운명에 처했던 상인을, 주로 그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13세기에 정의의 요구에 포함되는 일부 가치를 준수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203-4)


15 자본주의 혹은 카리타스?


"중세 유럽에 존재하지 않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귀금속이든 이미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지폐든 간에 화폐를 충분히,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는 수차례 통화 기근 위기에 몰렸고 15세기 말에도 그랬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 많은 양의 귀금속이며 금과 은이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운송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에 대한 첫 번째 욕구가 충족되었다." "자본주의가 정착되는 데 요구되는 두 번째 조건은 다양한 시장 대신 단일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장이 열려 곳곳에서 다양한 주화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과 롬바르디아 사람들은 주화 사용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단일시장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구성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세 번째 체제는 어떤 기관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15세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1609년 마침내 암스테르담에 설치된 상품 및 증권 거래소이다."(216-7)


"폴라니는 중세에 독립적인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가 종교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경제 역시 그 속에 얽혀 있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화폐는 중세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경제적인 실체가 아니다. 화폐의 본질과 사용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니타 게로잘라베르는 요한의 사도서한(5, 4, 8, 16)에 따라 중세사회를 지배한 신은 '카리타스'였다고 상기시켰으며 〈자비는 기독교인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덕목으로 보인다. 자비에 반한 행동은 신에 반한 행동이며 자비를 거스르는 죄는 논리적으로 가장 중대한 죄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인 고리대금이 어떻게 가장 중대한 죄 가운데 하나로 단죄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리타스'는 중세의 인간과 신 사이에 그리고 중세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했다." "따라서 중세에 확산되는 화폐 문제는 기부의 확대와 연관지어야 한다."(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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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 현대의 지성 101
로버트 달 지음, 조기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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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1부 근대 민주주의의 근원


# 민주주의의 네 가지 근원

1. 고대 그리스

2. 중세 로마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유래한 공화적 전통

3. 대의정부의 사상과 제도

4. 정치적 평등의 논리


"근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의 정치 제도들과 유사성이 별로 없다 해도, 우리들의 사상은 그리스, 특히 아테네인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스의 데모크라티아demokratia가 어떤 형태로든 평등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종류의 평등인가? '민주주의'가 널리 통용되기 전에 아테네인들은 이미 어떤 종류의 평등, 즉 모든 시민들의 의회에서의 발언권의 평등isegoria, 법 앞의 평등isonomia을 그들 정치 체계의 바람직한 특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계속 사용되어서 '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간주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전반 '인민the people' (the demos)이 점차적으로 지배에 있어 유일하게 정당한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민주주의'─인민에 의한 지배─란 단어도 또한 이 새로운 체계에 가장 적절한 명칭으로 입지를 확보하였다."(40-1)


# 아테네 민주주의의 조건들

1. 시민들이 공유하는 공동선이 있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2. 시민들은 고도로 동질적이어야 한다.

3. 시민체의 규모가 작아야 한다.

4. 시민들이 직접 법률을 정하고 정책을 결정한다.

5. 시민 참여는 도시 행정에 참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6. 도시국가는 자율적(자기충족적)이어야 한다.

※ 근대 민주주의의 특징은 조화가 아니라 정치적 갈등이다.


"조각조각의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아테네의 정치는 다른 도시들처럼 격하고 어려운 게임이었다. 문제들은 종종 개인적 야망에 따라 처리되었다. 근대적 의미의 정당들은 없었지만 가족이나 우호 관계로 엮어진 분파들은 명백히 강력한 역할을 하였다. 공동선의 실현이라는 추정상의 강력한 요청은 실제적으로, 가족과 친구라는 더욱 강력한 요청 앞에서 무력하였다. 분파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적을 10년 동안 추방하기 위하여 민회에서의 투표를 통한 오스트라시즘 ostracism (패각 추방)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사례에서 보듯, 정치 지도자들이 국가를 적나라하게 배반한 사례도 알려져 있다."(55-6)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리스 민주주의의 결정적 한계 가운데 하나는,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시민의 자격이 근대 민주주의가 그렇게 된 것과는 달리 포괄적이 아니라 고도로 배제적이었다는 것이다."(58)


"공화주의적 신조는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시민의 덕이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는 한편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의 이상과 실제를 재확인하는 것을 넘어) 덕의 허약성, 시민이나 그 지도자가 부패하고 그 결과 시민의 덕이 쇠퇴하여 부패의 나락에 빠지고 공화국이 불가능하게 될 가능성을 그만큼 혹은 그 이상 강조하였다. 공화주의자의 견해로는 시민의 덕에 대한 주된 위협은 파당과 정치적 갈등에서 생겨난다. 즉 '국민the people'은 동일한 이익을 지닌 완전히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귀족적 혹은 과두적 구성소들과 민주적 혹은 인민적 구성소들로─소수와 다수로─나누어져 서로 다른 이해 관계에 놓인다." "그러므로 공화주의자의 임무는 민주정과 귀족정, 군주정의 3요소가 궁극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실현하도록 고안된 혼합정을 만들기 위해 하나와 소수와 다수의 이익 사이에 일종의 균형을 이룬 헌법을 기초하는 일이다."(64)


"민주적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혼합 정부를 그려내는 일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공화주의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항상 명확한 입장은 보인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사실상 이들은 혼합 정부라는 고대의 사상을 새로운 사상으로 바꾸어버렸다. 그것은 몽테스키외에 의해 널리 알려진 대로 입헌적, 제도적으로 권력을 세 종류, 즉 입법, 행정, 사법으로 분할하는 것이었다. (귀족적 공화주의자든 민주적 공화주의자든 권력 집중은 항상 위험하고 그러므로 회피되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이 세 종류의 권력을 하나의 중심에 집중하는 것에 바로 독재의 본질이 있으며, 따라서 이 권력들은 분리된 제도에 자리잡고 서로를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 정체론의 공리가 되었다. 갈등하는 이익의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문제가 결코 없어진 것은 아니었지만(이것은 예컨대 매디슨 견해의 핵심 내용이다) 입헌적 과제는 정부의 세 가지 주된 기능 혹은 '권력'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보장하는 것이었다."(67)


"영국 내란 중에 청교도들이 군주제 대신 공화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 이론과 실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들의 상당수를 제기하였다. 선거권의 확대, 광범위한 선거인단에 대해 책임지는 정부의 요구를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수평파들은 대의 제도의 정당성을─그 필요성도─포함하여, 민주주의 사상의 미래의 발전을 앞서 말하였다." "대의 제도는 실제로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발명된 것이 아니라 중세의 군주정 정부 그리고 귀족제 정부의 제도로서 발달되었다. 군주나 혹은 때때로 귀족 자신들이 국가의 중요한 문제들, 즉 세수, 전쟁, 왕위 계승 등등의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소집한 회의들에서 대의 제도의 시작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소집된 사람들은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나왔으며 자신의 계층을 대표하도록 고안되었고 각 계층의 대표들은 각각 별도의 회합을 가지는 것이 전형적 형태였다."(70-1)


# 인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사상과 대의 제도라는 비민주적 실제의 결합


제2부 부정적 비판자들


# 무정부주의 명제

1. 모든 국가는 필연적으로 강압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쁘다.

2. 1의 이유로 우리는 어떤 국가에 대해서도 복종하거나 지지해야 할 의무가 없다.

3. 1, 2의 이유로 모든 국가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없는 사회는 실현 가능한 대안이다.

4. 민주적 국가도 여전히 국가이고, 여전히 강압적이고, 여전히 나쁘다.

5. 만장일치는 어느 누구도 강압받지 않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에 만장일치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결사체는 국가가 아닐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강압은 곧 사라지거나 참을 만한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판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면, 국가가 없더라도 강압이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면, 그리고 무정부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국가를 일소하는 것─이 강압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정당화된다면, 그때는 그들의 딜레마에 대한 해답이 없을 것이며, 무정부주의의 입지는 적어도 크게 약화될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가 없을 때 강압이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해 잘못 생각했다면, 거꾸로 강압을 제한하고 규제하기 위해 좋고 만족스런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의 입지가 크게 강화될 것이다. 국가를 창출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손실을 넘어설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내린다면, 그때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국가를 선호하는 것이 온당하다."(98)


# 무정부주의 견해의 난점

1. 국가를 전복하는 수단으로 강압이 정당화된다면, 충분히 좋고 중요한 목적에 사용되는 강압 또한 정당화된다.

2. 부정적인 강압(가령, 범죄자의 행위)이 발생한다면, 그 사용을 허용하거나, 그 행위를 막는 강압을 허용해야 한다. 이는 자기 모순이다.


# 수호자주의 명제

1. 공공선과 그것을 달성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은 객관적이고 타당한 진리들로 구성된 과학이다.

2. 소수의 성인들만이 이러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다.


"수호자주의의 옹호자들은 수호자들이 민주주의 체계에서 권위가 위임된 관리들 이상으로 그들의 권위를 남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호자주의 이론은 우리가 권위를 지배자들에게 위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배자들의 권위는 전혀 위임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지배의 권위는 영원히 양도된 것이지 위임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법적으로나 헌법적으로나, 혹은 내 생각으로 합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결정하여도 권위를 회복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혁명에 의거할 수 있을 뿐이다. 민주적 질서에서 대중에 의한 통제가 때때로 결함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수호자들은 이 대중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민주적 가치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으로 가정된다. 확실히 수호자들은 대중의 의견을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경멸할 뿐이다."(160-1)


# 수호자주의 견해의 난점

1. 높은 수준의 전문지식을 얻기 위해서 요구되는 전문화는 본질적으로 지식의 폭을 제한한다(다른 분야에 무지하다).

2. 바람직한 정책 수립에 요구되는 도덕적·도구적 이해를 결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증명한 학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3. 전문가들의 도구적 판단 역시 기술적·과학적 가정에 그치거나 일종의 존재론적 판단(경향상 그러할 것이다)을 포함한다.


제3부 민주적 과정 이론


# 민주주의 가치 정당화 이론

1. 전체적으로 실행 가능한 최선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는 민주주의

2. 본질적 평등 사상

3. 실행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민주주의

4. 인간 발달의 도구로서의 민주주의


"로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본질적 평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상황과는 명백히 관계가 없지만 어떤 목적, 특히 통치의 목적을 위해서는 명확히 결정적인 것이다. 로크가 독특한 형태의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는 적어도 집합적 결정을 요구하는 문제들에 대해서 '모든 남자 성인들'은 (혹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의미에서 동등하다고 생각되어진다 혹은 생각되어져야만 한다는 근본적인 믿음을 많은 다른 사람들과 공유한다." "본질적 평등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정확히 말하는 것보다 로크가 한 것처럼 본질적 평등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더 쉽다. 로크에게 본질적 평등은 명백히,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그의(혹은 그녀의) 의지나 권위에 따르도록 할 자연적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 자신의 동의 없이 타인의 정치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다〉가 이어진다."(173)


"민주주의는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방식으로 자유와 독특한 관련을 맺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한 법 아래서 살 기회를 실행 가능한 최대한까지 확장한다." "민주주의는 결사체 구성원 사이의 자기 결정의 기회를 최대화한다." "자기 결정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를 정당화하는 논지는, 로크 이래, 통치는 피치자의 동의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 모두가 공감을 표했던 대목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다른 형태의 통치는 그 어느 것도, 통치의 구조나 과정 그 자체가, 그리고 그것이 적용하고 부과하는 법이 피치자의 진정한 동의에 의미 깊게 의거하도록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그리고 단지 민주주의에서만 다수에 의해 헌법과 법률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실행 가능한 것은 모두가 소수로 하여금 이 중요한 쟁점들을 결정하도록 한다."(181-2)


# 민주적 과정의 기준

1. 효과적 참여 :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시민들은 적절하고 평등한 참여 기회를 가져야 한다.

2. 결정적 단계에서 투표의 평등 : 집단 결정의 결정적 단계에서 각 시민들은 동등한 비중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3. 계몽된 이해 : 각 시민은 시민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가 여부를 알아내고 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적절하고 평등하게 가져야 한다.

4. 의제의 통제 : 비민주적 지배자들이 의제를 통제하지 못하도록 시민들은 (구속력 있는 결정이 필요한) 의제를 선정하는 배타적 기회를 가져야 한다.


제4부 민주적 과정의 여러 문제


# 다수결 정당화 논리

1. 자기 결정의 극대화 : 집단 결정에서 자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극대화한다.

2. 온당한 필요조건들의 귀결 :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고, 평등한 투표권을 보장하며, 각 안건이 평등하게 다루어진다면 토론과 숙고를 거친 다수결이 좋은 결과를 낸다.

3. 올바른 결정 가능성 향상 : 어떤 주장의 진위를 판별할 때 다수가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은 소수가 올바른 선택을 할 가능성보다 크다.

4. 효용의 극대화 : 다수의 이득은 소수의 손실보다 크기 때문에 평균적 이득을 극대화한다.


"거의 모든 결정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결함은 이들이 바람직한 결과를 산출하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옳은 과정도 때로는 결과가 옳지 않을 수 있다." 민주적 절차가 해로운 결과를 산출하거나 공동선을 실현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실질적 결과가 과정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극단적으로 전개하면 곧 수호자주의를 비민주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될 뿐이다. 그리고 '실질적 민주주의'는 사실상의 독재를 속이기 위한 명칭에 불과하게 된다.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에 보다 적실성이 있는 논쟁은 민주주의 전통 내에서, 최선의 국가는 민주정 과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라고 굳건히 믿고 과정적 가치와 실질적 가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민주적 과정에 대해 실질적 관점에서의 제약이 어느 정도 부과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일어나는 논쟁들이다."(314-5)


"바람직한 실질적 결과를 보장하는 데 민주적 과정이 실패했다고 보는 것은 중요한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우리는 실질과 과정을 대비하는 것을 거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종종 민주적 과정을 위협한다고 잘못 이해되는 실질적 권리, 선, 이익들이 민주적 과정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자기를 통치할 권리가 들어 있다. 이것은 사소한 권리가 아니며 너무도 근본적인 권리여서 미국 독립 선언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이것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고 하였다." "민주적 과정은 '단순히 과정적'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실질적'인 것도 아니다. 민주적 과정이 '단순히 과정적'인 것이 아닌 까닭은 그것 또한 하나의 중요한 분배적 정의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과정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권력 자원과 권위의 분배를 결정한다. 그리하여 다른 모든 결정적 자원들의 분배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자원과 제도들이 결여되면 그만큼 민주적 과정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335-6)


제5부 민주주의의 한계와 가능성


# 도시국가에서 민족국가로의 변환이 가져온 결과

1. 대의체들이 고대 도시국가의 민회를 대부분 대체했다.

2. 민주주의 국가의 규모에 대한 장벽이 없어졌다.

3. 효과적이고 충분한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졌다.

4. 정치 생활과 관련된 분야가 갈수록 다양해졌다.

5.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갈등과 균열을 키웠다.

6. 폴리아키(근대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발달을 도왔다.

7. 정부에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 집단이 많이 생겨났다.

8. (법에 명시된) 개인적 권리의 엄청난 신장이 현실화되었다.


# 폴리아키의 일반적 특징

1. 공직자 선출

2.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3. (사실상 모든 성인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선거권

4. 공직 출마권

5. 표현의 자유

6. (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원

7. 결사의 자유


# 한 국가에서 폴리아키가 등장할 수 있게 해주는 기반

1. 폭력적 강압(대표적으로, 군대와 경찰력)을 문민 통제하에 둔다.

2. 서로 관계된 특성들을 많이 지니고 있는 사회 조직이 다원화되어 있다(권력 분산과 민주적 태도 육성).

3. (윤리·종교·인종·언어·지역 등으로 구분된) 하부 문화 집단 간의 갈등이 국민들의 일체감을 해칠 정도로 다양하지 않다.

4. 정치 활동가들이 폴리아키를 향한 신념을 갖고 있다.

5. 부정적인 외국의 영향과 통제(가령, 동유럽을 장악한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제6부 제3의 변환을 향하여


"민주적 과정은 다른 통치 방식에 비해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우월하다. 첫째, 민주적 과정은 어떤 대안보다 자유를 증진한다. 민주적 과정이 고무하고 허용하는 도덕적 자율의 수준으로,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 자기 결정이라는 형태의 자유를 증진한다. 이것은 민주적 과정에 내재되어 있거나 아니면 민주적 과정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서 존재하는, 아니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민주적 과정의 이념과 실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또한 다른 자유들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또 다른 광범위한 자유 속에 자리잡고 있다. 둘째, 민주적 과정은 적어도 자기 결정, 도덕적 자율,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에 있어 인간의 발달을 촉진한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과정은 인간이 타인과 공유하는 이익과 재화들을 보호하고 증진시키는 (비록 완전한 방법은 결코 아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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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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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박종철 고문사망과 동시다발 시위의 등장


"1986년 가을 언제부턴가 전두환은 비상수단으로 친위쿠데타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언론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지만, 10월 22일 전두환은 11월 4일의 미국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11월 7일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겠다고 언명했다." "비상조치 또는 친위쿠데타는 애당초 현실성에 문제가 있었고,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압승하여 레이건 행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등 국내외적인 여건도 작용해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모의'는 이 시기 전두환의 대응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성환 의원 구속, 건국대 사태, 4·13호헌조치도 이 같은 전두환의 대응방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 계획안은 안기부나 경찰, 행정부, 여당에 대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좋으니 단호히 대처하고 밀고 나가라는 전두환의 의지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과시한 것이었다."(36-7)


"1986년 11월의 건국대 사태가 말해주듯 학생들은 그해 5·3인천사태 이후 끊임없이 붙잡혀갔고, 수배당하고 투옥되었다. 또한 거의 매일같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지면과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한 공안 사건을 접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 어디서 군홧발에 걷어차일지, 끌려가 어떤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대학가는 탈진상태나 다름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쉴 새 없는 공격에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며 겨울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이때 박종철이 서울대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일명 깃발) 사건으로 수배 중인 5년 선배 박종운(사회학과)의 거처를 대라는 대공분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학생들 누구한테나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그의 사망 이후 정국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목도했다. 얼어붙은 교정은 〈친구〉, 〈그날이 오면〉을 부르면서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32)


"신민당은 박종철 죽음이 '단순한 사망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17일에야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1986년 2월 12일 2·12총선 1주년을 맞아 1,000만 직선제개헌서명운동을 벌여 대대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렇지만 5·3인천사태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목표로 한 '합의개헌'이 여당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것에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은연중 가세한데다가,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민우가 내각제 개헌을 검토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까지 발표해 야당가는 뒤숭숭했다. 신민당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민우의 주장을 제압하려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박종철 죽음'이 '박종철 사건'으로 진전되면서 양 김은 재야와 공조하여 이 사건에 직선제 개헌투쟁을 접목시켜 정면공세로 나아갔다. 드디어 국면 돌파의 혈로가 뚫린 것이다."(30-1)


제2장 호헌철폐투쟁으로의 전환과 학생운동의 변화


"4월 13일은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 5월 18일 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국민대회 등과 함께 한국 민주화 여정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이날 특별담화를 통해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노태우)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헌 논의는 88올림픽 뒤에 생각할 일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 결정이 얼마나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지 짐작이라도 했을까. 4·13호헌조치는 같은 날 발기인대회를 가진 통일민주당이나 민주화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같은 통치방식은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고, 따라서 대통령 선거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또 민정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4·13호헌조치는 자신들이 그때까지 주장해왔던 합의개헌 논의를 일순간에 부정하는 조치였다."(104-6)


"1986년 5·3인천투쟁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투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고, 민주화운동사에도 한 획을 긋는 투쟁으로, 민족민주 세력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인천에서 여한 없이 싸워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5·3인천투쟁 참여자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급속히 형성·고양된 관념적 급진성에서 벗어나는 데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렸다." "1986년 들어 공세적이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은 5·3인천사태 이후부터 그해가 끝날 때까지 수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KBS와 MBC에서는 불타는 민정당 당사와 경찰차, 보도블럭 등이 나뒹구는 인천시민회관 일대의 모습을 연이어 방영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경찰은 민민투·자민투 등을 용공조직으로 규정하면서 인천사태를 극렬 좌경용공 폭력 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몰아갔다."(161)


"전두환·신군부는 수구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입법회의를 통해 노동관계법을 개악하고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리고 '위장취업자'를 단속해 노동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했다. 전두환 정권은 공장에서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겸손한 자, 자주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자, 오른쪽 손가락 셋째 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자, 그리고 안경을 쓰거나 말을 잘하는 자, 생활이 너무 검소한 자 등이 '위장취업자'일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하여 자체 감시 기능을 강화하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경찰이 1986년 6월 경인지방 노동자들의 자취방을 덮친 것은 '위장취업자'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1계급 특진의 포상이 따르는 5·3사태 수배자들을 체포하게 위해서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위장취업자인) 권인숙이 경찰서에 끌려온 다음 날부터 담당 형사가 5·3사태 수배 노동활동가에 관해서 묻기 시작했고, 3일째부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악한 성적 고문을 가했다."(127)


"5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6월 임시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현특 구성 문제를 앞두고 노태우는 자신들의 복안이 내각제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지만, 직선제는 나라를 망치고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고 강조해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다음 날 임시국회는 헌특 구성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폐막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7월 7일 청와대에서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모여 내각제 개헌안을 야당에 제시하되, 야당이 거부할 경우 기존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 국민의 뜻을 물어 개헌을 하겠다는 정국 운영 방안에 합의했다. 야당이 내각제를 받아들일 리 만무한 이상 사실상 헌특이 필요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두환은 다수당이 되는 것은 선거법이나 부정선거 방법으로 얼마든지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내각제로 하면 영구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165-6)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는 박종철 고문사망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크게 위축되었던 야당은 고양된 분위기에서 정치공세를 펴며, 5·3인천사태 이후 있었던 앙금을 털고 민주대연합을 앞장서서 제기했다. 야당으로서는 박종철 고문사망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개헌 문제에 연계시켜 체육관 대통령이나 변형된 내각제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더 나아가 김영삼·김대중은 직선제 개헌투쟁을 선명하게 전개하기 위해 4월에 들어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4월 13일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두환이 합의개헌을 위해 노력했다는 시늉도 별반 보이지 않은 채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 날에 맞춰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3호헌조치는 3·3평화대행진 이후 뚜렷한 이슈가 없어 약화되었던 민주화운동을 크게 자극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5·3인천사태 이후 잠복해 있던 개헌 열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170-1)


"학생운동권은 1986년까지 야당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민주대연합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운동권이 1985년 2·12총선 유세장에서 김대중·김영삼의 신당 후보를 지원한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야당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미·일 파쇼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분쇄하고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개헌 문제가 제기되자 학생운동권은 야당을 혹독히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론과는 다른 개헌 주장을 폈고 5·3인천사태에서 야당은 거의 모든 운동권에게 두들겨 맞은 동네북이었다. 그러한 학생운동권과 야당의 관계가 1987년에 들어와 바뀌었고, 학생들은 6월 항쟁에서 직선제 개헌 쟁취를 들고 나왔다. 6월 항쟁이 그토록 거대한 민중시위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이 민주대연합에 적극적이었고, 시위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로 단순화된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189-90)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 이후)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 등 정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지만, 학생회는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제약된다는 이유로 가두시위나 연대시위는 가급적 자제했다. 그런데도 천주교와 개신교 측의 성직자와 신자, 대학교수, 문화인, 언론인, 재야단체, 여성단체, 정당에서는 4·13호헌철폐투쟁을 줄기차게 벌였고,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터졌을 때는 다시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고 6·10국민대회를 가질 것을 결의했다. 전두환이 파악한 것과 같은 세상이었더라면 4·13호헌조치나 5·18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이 큰 저항이나 반응 없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과거에 학생운동이 했던 역할을 이제는 상당 부분 행동하는 시민이 하게 되었다. 이처럼 6월 항쟁으로 진전되도록 추동하는 힘이 민주화 열망 속에 새롭게 쌓여갔다."(228-9)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큰 쟁점이 된 이후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적극 나서게 된 데에는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작용했다. 일제강점기 학생·청년의 반제항일 변혁운동, 4월 혁명, 그 이후 학생운동에서 학생들은 어느 계층보다도 강한 정의감, 뜨거운 인간애(동포애)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에 미안함이나 자괴감, 자책감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호남 출신이 더 심했지만, 19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광주에 대해 무언가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죄를 지은 것 같다, 미안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5월 그날이 올 때마다 격렬한 시위가 전개된 것은 그러한 마음의 빚과 무관하지 않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빈사상태에 빠진 것도 학생들이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가열한 투쟁에 나서게 하는 한 축으로 작용했다."(237-8)


제3장 6·10국민대회에서 6월 항쟁으로


"초기에는 민주당도 1986년의 경험 때문인지 재야와 직접적으로 한 조직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을 망설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모든 민주 세력을 망라하자는 천주교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대중노선을 주장한 학생들로서는 이 단체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하게끔 되어 있었다. 드디어 4월 혁명 이후 가장 강력한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호헌철폐·민주쟁취를 위한 공동투쟁기구는 부산에서 먼저 조직되었다. 5월 20일 부산 당감성당에서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와 종교계, 통일민주당, 학생과 재야,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했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곳이자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 이러한 단체가 출발했다는 것은 부산지역이 6월 항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했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이, 상임집행위원은 김상찬·문재인 등 16명이 맡았다."(258)


"6·10국민대회는 민주화운동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3·1운동 이후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4·19혁명의 경우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사망자도 많았지만 6·10국민대회처럼 많은 지역이 참여하지는 않았다." "국본의 평화투쟁 호소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부산·대구·마산·전주 등 여러 지역의 시위에서 공권력을 부정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투쟁을 벌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경찰은 처음으로 규모가 큰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정권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서울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서울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2만 2,000여 명이 배치된 서울과 부산·성남 등 몇몇 지역에서는 경찰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등 경찰력만으로 6·10국민대회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마산 시위는 부마항쟁을 방불케 했다."(307-9)


"6·10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상승·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6·10대회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명동성당농성투쟁이 운동권에 의해 조기에 해산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방향'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명동성당농성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사람은 대체로 활동가나 학생운동 지도부와는 거리가 있는, 문자 그대로 시민과 일반 학생으로 구성된 민중이었다."(312-3) "명동성당 농성 자리에 있던 40대 중년 남자의 말을 『말』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더 이상 학생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우리 시민들이 희생이 돼서 이 군부독재를 끝장내야 한다. 저들은 학생들을 극렬주동자로, 우리 시민들은 단순가담자로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구속시킬 것이다. 우리가 앞장서자. 그리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자.〉"(318)


"6월 12일 12시 45분경 농성시위대는 대열을 갖춰 명동거리로 나서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최루가스와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허기에 지치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시위 대열이 나타나자 명동 일대는 거대한 축제를 치르는 듯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면서 농성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반복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건물의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시민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뜯어 거리로 날려 보냈다. 명동 일대가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였다. 어떤 이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시위를 지켜보기도 했다." "부근에 있던 은행·증권회사·보험회사 사무원들은 상업은행 쪽에서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자 함께 따라 외쳤다. 경찰이 명동성당 시위대와 합세하지 못하도록 길목으로 밀어붙이자 아쉽다는 듯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넥타이 부대의 등장이었다."(326-8)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지속된 명동투쟁은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의 강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6·10국민대회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더 강력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의식적·의식적인 역사적 힘의 결집이었다." "명동성당 농성시위대가 15일까지 버티다가 해산한 효과는 바로 그날부터 드러났다. 13일 토요일, 14일 일요일이 지나 15일 월요일이 다가오면서 시위는 다시 격화되었다. 14일 아침에 고건 내무장관과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에게 경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월요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전 같은 대도시나 진주·천안 같은 중소도시에서의 월요 시위는 정부가 호언장담하며 예상한 결과와는 전혀 달랐다. 쏟아져 나온 시위대에 비해 경찰 병력은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시위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군부파시스트 독재정권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철벽 같은 치안 유지가 여러 도시에서 허물어진 것이다."(354-6)


제4장 항쟁의 격화─기로에 선 전두환·신군부체제


"이 시기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할 '결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군을 출동시키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찰의 치안 능력 한계가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공권력이 거세게 도전받았던 6월 17일 저녁 민정당 당직자와 안기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라고 말해 만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군 출동은 자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미국 때문에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6월 항쟁 이전이라면 몰라도 6월 항쟁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이 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 비슷하게 대단히 격렬했다. 더구나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도 다르게 전국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이 출동했을 경우 자칫하면 엄청난 새로운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430-1)


"민정당은 18, 19일 시위를 목도하고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전두환의 얼굴만 쳐다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부산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의 사태가 4·19시위를 방불케 했고, 부마항쟁·광주항쟁을 떠오르게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4월 혁명 후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6월 20일은 토요일인데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어서 마음을 놓았던 광주·전주·익산·순천·목표 등 호남지역에서 시위가 대단한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전두환 또한 혼자 독단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위중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당은 비상조치를 바랄 수 없었다. 군이 전면에 나서면 노태우 정권 출현이 뿌리째 뒤틀리고 뒤집어질 수 있었고, 민정당은 1980년 5·17쿠데타 이후의 공화당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다."(444-5)


"김영삼과 김대중은 4·19시위 때 속해 있는 파벌은 달랐지만 민주당의 중견 간부였는데, 4·19 혁명 그날의 민주당 간부들과는 다르게 월등히 용기가 있었다. 두 야당 지도자는 민주대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6·26평화대행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김대중·김영삼은 직선제 쟁취를 가져올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실질적 방안이 서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폭력투쟁'으로 비상조치가 선포되어 그나마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입지조차 지난 1980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상실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6·26대회는 한판 판갈이 싸움으로, 사자성어로 말하면 건곤일척의 전쟁이었고 진검승부처였다. 6·26대회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민권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인가, 군부독재가 용기를 얻어 시간을 끌면서 다른 간특한 방책을 내놓을 것인가가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다."(478-9)


제5장 무릎 꿇은 전두환·신군부체제─ 6·25대행진에서 6·29선언으로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물론 서울과 지방의 의원들이 시위에 들어가려고 하자마자 경찰에 당했던 바와 같이, 6·10대회 때와는 다르게 전두환의 직접 지시에 의해 경찰이 시위를 초동 단계에서 꺾어버리려는 초강경 진압정책을 썼는데도 6·26평화대행진은 전두환 정권이 대규모 시위에 경찰력으로 대처하는 데 역부족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날 시위는 과격함은 적었고 전반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되었던 서울역 광장의 경우 시위대는 차도점거투쟁, 경적 유도에 의한 시민 끌어내기 '투쟁'에 힘을 기울였고, 최루탄 발사에도 투석 등으로 대항하기보다는 흩어졌다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는 방식을 택했다(『조선』). 전체적으로 6·10대회에 비해 시위의 규모·횟수·지역 등이 훨씬 커졌거나 늘었지만 방화나 폭력사태는 줄어 시위 양상은 덜 과격했던 것으로 경찰이 분석했다고 보도한 것도(『경향』) 이러한 시위 양상에 근거한 것이다."(532-3)


"6월 29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발표한 노태우의 6·29선언은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폭넓게 확장하고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를 제외하면 15년 이전의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방자치의 경우 4월 혁명기 장면 민주당 정부 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럼에도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 그리고 국민을 놀라게 한 것은 6·29선언이 전두환·군부독재정권의 정책과 너무나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었고, 6·29선언의 핵심인 대통령직선제는 그동안 전두환과 민정당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유신 권력과 전두환·신군부 세력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정책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12·12쿠데타 때부터 대체로 전두환 다음의 위치에 있었고, 민정당 대표위원이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제시했다는 점에서 장기간 혹독한 탄압만 받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542-3)


# 6·29선언의 핵심 요지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에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

2.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3. 김대중을 사면·복권하고 시국 관련 사범들을 다수 석방해야 한다.

4.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을 강화하고 인권 침해 사례를 시정하는 등 제도적 개선을 촉구한다.

5. 언론 자유 창달을 위해 인론기본법을 개정 혹은 폐지하고 프레스카드제도 또한 폐지한다.

6.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대학 자율화와 교육 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7.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8.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하여 폭력배를 소탕하고 각종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


"6·29선언은 왜 나왔을까.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계엄령이나 친위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월 항쟁에서 군 출동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 시기가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교체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과 민주당이 요구하는 직선제 개헌이 민주화와 직결되어 있고,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의 교체기에는 차기 정권 담당자의 입장이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것이 대규모 시위투쟁으로 표출된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전두환·신군부 통치체제가 고립되고 끝내는 벼랑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에 군이 출동할 수 없었던 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있다.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기억이 그것이다."(549-51)


"6월 시위에 군이 나서면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많았다. 노태우는 그의 회고록 상권에서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고 기술했는데, 군이 출동했을 경우 부산·대전·광주·전주·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비극적 사태가 파국이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러한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군홧발로 누르다가 돌발사태가 발생해 광주참극 같은 파국적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경우 군은 어디에서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명확해졌다. 군 상급 지휘관들이 두려워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4월 혁명에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때 계엄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는데, 6월 항쟁에 동원된 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12·12쿠데타처럼 하극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557-8)


"6·29선언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노태우와 전두환이 야당에서 대통령이 된다고 예상했을 경우에도 과연 6·29선언을 발표했을까 하는 점이다." "노태우에게 직선제가 사지死地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승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특단의 다른 조치도 강구해봤겠지만 야당 후보가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노태우는 6월 24일 전두환과 직선제 문제를 논의했을 때 그 자리에서 〈직선제를 한다.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다고 강조했다. 왜 이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을까. 김대중을 사형대에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공정한 정치 룰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렇게 합의했을 리는 만무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면 바늘에 실 가듯이 반드시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머릿 속에 철칙 중의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589-91)


제6장 6월 항쟁 탐구


"4월 혁명 후의 개헌처럼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합의하여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공포되었다. 6·29선언 이래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출마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소선거구제가 17년 만에 부활되어 1988년 4월에는 총선이 치러졌다. 1987년 12월 대선은 지역주의가 투표 성향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극심한 지역주의는 1988년 4월 총선에서 더욱 거세게 표출되었다. 특히 총선은 특정 정당 정치인의 특정 지역 공천만 따내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것이어서, 선거 행위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색케 했다." "지역 이기주의는 장기간에 걸쳐 권위주의 통치를 하는 동안 주입된 비인간적인 반공·냉전의식과 결합된 개인 이기주의가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시민의식 또는 공공의식이 마멸된 것이 기본 바탕이었다."(675)


"1990년 2월 노태우·민정당이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듦으로써 정치계는 상당 부분 과거로 회귀하여 6월 항쟁에 대한 반동의 바람이 불었다. 이로써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여소야대 국회는 해소되었고,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정당 당원과 십수 년간 그 정당과 싸웠떤 정당 당원이 한 정당 안에서 기묘하게 동거하게 되었다.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 그것에서 소외되었고, 최소한의 기본 권리조차 통제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6월 항쟁 이후 어느 부문보다도 먼저 일어나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벌인 것은 6월 항쟁의 후속조치나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진전이었다." "1987년 11월에는 여야 합의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노조설립 요건은 완화되었지만, 제3자 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은 그대로 남았다."(676-7)


"6월 항쟁은 통일운동 고양과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수구냉전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분단을 공고히 하고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권력과 기득권의 영속화를 기도했다." "그렇지만 4월 혁명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던 것과 흡사하게 6월 항쟁으로 통일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남북관계 또한 크게 변화되었다. 1988년 3월 서울대 학생회장 후보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호응을 받으면서 그해 여름 판문점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을 뜨겁게 달구었다. 1989년은 문익환 목사와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이 두 사건은 통일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 남북 화해·교류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지만, 수구냉전 세력의 거센 반격에 직면해야 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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