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 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조명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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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제가 만들려 한 국가, 한국인이 세우려 한 나라


"일제는 3·1운동 이후 문관도 조선총독에 취임할 수 있도록 제도를 변경했지만, 대만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 실제로는 육해군 현역 대장만 총독으로 부임했다. 조선총독은 종합행정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재무, 산업경제, 경찰, 문교, 사법, 교통, 통신, 전매 등의 각종 행정권을 총괄했던 바, 조선총독부 각 국부(局部)는 일본의 각 성(省)처럼 독립돼 있지 않았고 일원적으로 총독의 지휘감독을 받았다. 조선총독은 또한 육해군사령관한테 출병을 청구할 수 있었고, 법률을 대신하는 제령(制令)을 발포(發布)할 수 있는 제령제정권(制令制定權)을 보유했으며, 직권 또는 위임에 의해 총독부령을 발하고 1년 이하의 자유형, 200원 이하의 범칙금을 부과할 수 있는 명령권을 행사할 수 있었을 만큼 광범하고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호소카와 가코루는 이와 같이 총독한테 권력이 광범하게 집중된 것이 조선 정치의 근본이라고 조심스럽게 평했다."(37-8)


"일제의 지배정책 중 민족분열정책도 중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인도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정치적·경제적으로 분열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제는 백인 제국주의국가들처럼 분할통치정책을 쓰는 대신 계급분단정책을 썼다. 지주·자본가·유림·교육가·종교가를 비롯한 상층 인사를 회유하고 끌어들이는 한편, 소작인과 노동자들의 농민운동·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가혹한 억압정책을 쓴 것이다. 이러한 민족분열정책은 흥미롭게도 3·1운동 이후 사이토 마코토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여 소위 문화정치를 펴면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는데, 민족분열정책은 문화정치와 표리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사이토 총독은 친일세력과 민족개량주의세력을 육성·후원했다. 또한 자치운동과 참정권운동을 후원했고, 실력양성운동으로 전개된 한국인의 문화운동을 지원했는데, 이것 또한 민족분열정책의 일환이었다."(40)


"일제는 한국이 일본제국에서 결단코 떨어져나가서는 안 되는 지역이지만, 한국인은 강인한 민족의식을 지녔기 때문에 잠재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하여 소요나 쟁란이 발생할 수 있는 지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인은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어 동화정책과는 '모순'되게도 한국인을 사병으로 군대에 입영시키지 않았고, 1944년에 징병제가 실시되었을 때도 독자적인 한국인 부대는 없었다. 영국은 동아프리카에 1개 보병대대만 주둔시켰고, 대만에는 전간기에 보병 2개 연대와 포병부대 하나, 그리고 수개의 요새부대를 두었는데, 일본은 한국 곳곳에 헌병(1919년 이전)과 경찰을 배치하였고, 서울에 조선군사령부를 설치했으며, 나남과 서울 등지에 19, 20사단을 주둔시켰다." "그런데 한국의 '안정'을 위해 강력한 군대의 배치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일제 또는 일본 천황한테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한 동화정책이었다."(48-9)


"일제는 동화정책을 강조했으면서도 한국인은 되도록이면 교육을 적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라우치 총독이 한국인 교육은 오로지 충량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목적 달성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학교 보급에 열의가 없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사실 초등학교도 아주 적었다.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는 더욱 적어, 1918년 5월 현재 관공립 고등보통학교가 4개교, 여자고등보통학교가 2개교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이미 통감부가 설치된 해인 1906년에 관립 외국어학교인 육영공원 등을 폐지했고, 1911년에는 1895년에 세워진 한성사범학교를 폐지했다. 또 숭실학교의 대학과, 이화학당의 대학과도 인가를 취소했다. 사립학교인 경우 강점 초기에는 전문학교 인가도 소수로 제한했다." "대학은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고 1926년에 본과가 설치되었을 뿐이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더 이상 대학이 존재하지 않았다."(54-5)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명시했다. 또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하다고 규정했고(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信敎)·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서신·주소 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享有)한다고 하였으며(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유(有)한다고 하였다(제5조). 제5조는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보통선거제 채택을 밝힌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제3조·제4조·제5조는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부 민주주의국가에서 실현된 자유민주주의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일본제국 헌법이나 정치현실, 특히 한국에서의 정치현실과는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 보통선거제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는 1920년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였고, 해방 후 각 정당 사회단체에 의해 한층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82-3)


"국외에서의 건국준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일제가 패망할 경우 바로 입국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기 때문에 한국인 대다수가 거주하는 국내 상황이 더 중요했다. 이 점에서 건국동맹은 역사적 의의가 있다. 여운형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을 내왕하며 정세를 관찰하고 동지들을 규합했으며, 1942년 초부터 치안대 조직에 착수하고 식량 문제 등에 대비했다. 그해 말 투옥되었다가 6개월 후 석방된 여운형은 한층 동지 규합에 힘을 쏟아 1944년 8월 건국동맹을 조직했다. 건국동맹의 강령은 간략했다. 첫째 각인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를 구축하고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고, 둘째 연합국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일체 독립을 저해하는 반동세력을 박멸하고, 셋째 민주주의적 건설과 노농대중 해방에 치중하겠다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학생·교사·철도원·여성 등도 조직하였고, 징용·징병·학병 거부자들의 조직에 관여하였으며, 공산주의자들과도 연결되어 있었다."(115-6)


2장 해방 직후 여운형의 국가 건설 방향


"여운형은 인민당을 결성해 인민당 노선과 성격을 밝힘으로써 공산당과의 차이점을 명백히 하고 민족통일전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여운형이 밝힌 바대로 인민당은 노동자, 농민을 대변할 뿐 아니라 자본가와 지주까지 망라했다. 좌파 인사와 우파 인사가 함께 당을 차린 것이다. 또한 인민당은 민족통일전선 형성으로 민족 문제를 해결코자 했는데, 그 전선에는 전 근로대중은 물론이고 자본가나 지주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는 공산당과 관련해서는 공산당이 가려는 길이 공식적이고 소아병적일 때에 이것을 교정하고 거부하고, 공산당을 맹목적으로 배제하려는 완고파로 인하여 통일전선에 분열이 생길 때에는 이를 조정하고 거부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공산당의 급진좌경화를 견제하고 비판함과 동시에 민족통일전선에 공산당 참여를 배격하는 것을 반대하고 공산당을 옹호하겠다는 점에서 (여운형의 입장은) 조공에 불리한 것만은 아니었다."(150-1)


"여운형·인민당은 김구 등의 반탁투쟁이 연합국의 유일한 합의인 삼상회의 결정 실행을 방해하고 파탄에 이르게 해 민족분열의 해악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신탁통치 반대 의사는 조공과의 행동통일 문제 때문에 신중히 표출했다. 1945년 12월 말~1946년 1월 초 반탁투쟁의 격랑에서, 12월 28일 여운형이 경솔히 말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을 제외한다면, 그와 이승만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여운형이 장고를 거듭한 것은 삼상회의 결정은 연합국의 유일한 합의이기 때문에 이 결정을 무시하고는 통일독립국가가 실현될 수 없는데, 그 결정에 들어 있는 신탁통치는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와 함께 격렬한 반탁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삼상회의 결정은 미소의 타협과 절충의 산물이어서 일방적으로 좌나 우에 기울어진 정권은 들어설 수 없기 때문에 좌우합작이 성공해야 독립국가가 수립될 수 있었다."(160)


"여운형은 프롤레타리아독재를 반대했고, 영국의 노동당 집권처럼 선거와 의회를 통해 진보세력이 집권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선호했다. 그는 한국인의 일반적 정치의식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고, 지도자건 대중이건 민주주의국가 생활 경험이 없는 점을 중시했다. 이러한 인식 아래 여운형은 일부 반동분자를 제외하고는 노동자, 자본가, 민주당, 공산당이 모두 참여하는 좌우합작을 성사시키고자 했다. 좌우합작은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하고, 11월 23일에 중국에서 김구 등 임정요인들이 환국함으로써 활기를 띠는 듯했다. 그러나 중경 임정 추대 측과 인공 지지 측의 대립은 약화되지 않았고, 기대를 걸었던 김구 등의 임정 요인은 법통을 강하게 고수하여 좌우간의 협력은 좀처럼 진전되지 못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으로 삼상회의 결정에 주체적으로 대응해 반드시 임시정부 수립이 성사되도록 해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었다."(164-6)


4장 이승만의 단정운동·반공국가와 여순사건


"해방 후 지도자들의 좌우대립을 지켜본 한국인들은 분단되면 남북 간의 대립이 극단적으로 심해질 것이고, 뿐만 아니라 극좌극우가 각각 강대국을 등에 업고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1948년에 남북협상을 촉구하거나 지지하는 성명서 등 각종 글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 전쟁에 대한 심각한 우려이다."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전쟁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에, 그에 역비례해서 이승만·한민당·친일파를 주축으로 한 단정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등 단정운동세력이 경원시된 데에는 단정운동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점이 작용했다. 이승만의 단정운동은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불가피한 국내외정세로 어쩔 수 없이 분단정부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의 입장은 우선 단독정부라도 세워놓고 그다음에 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겠다는 태도와도 거리가 멀었다."(211-2)


"1946년 6월 3일 남한에 임시정부 같은 것을 수립하자는 '정읍 발언'을 할 무렵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는 길밖에 없으며, 심지어 당장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단정운동은 미소 대결을 넘어 미소전쟁이라는 대단히 위험한 사고와 직결되어 있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이승만은 1946년 12월 도미하여 올리버 등과 함께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하지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 한다"라고 선동하며 단정수립 여론을 조성했다. 1947년 3월 12일 냉전이 가시화된 '트루먼독트린'이 발표되자, 이승만은 '트루먼독트린'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었다고 찬양하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선전했다. 그는 3월 22일 뉴욕에서 "미국은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조선 독립정부 수립을 용허할 것"이라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미 국무부는 그의 발언이 광신적이며 언어도단이라고 반박했다."(215)


"여수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마자 정부 수뇌층이 발 빠르게 이승만의 정적을 모해하고 탄압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 움직였다는 것은 이승만정권이나 극우반공체제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범석 국무총리는 10월 21일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와 또 하나 대한민국에 반감을 가진 일부 극우 정객 분자가 결탁해서", "미리부터 계획했던 음모를 이번 기회에 구체화시킨 것"이라고 일찌감치 발표했다." "10월 29일 기자가 "반란 사건 배후에 이 총리가 극우진영과 좌익 계열의 합작이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사실인가?"라고 묻자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로부터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을 줄로 믿는다"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이승만정권의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연거푸 거짓말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국민으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으며, 그들이 이 사건과 연관된 일정한 '계획' 또는 '음모'를 공동으로 세워놓았음을 시사한다."(228-30)


"김구는 이범석이 여순사건의 배후를 발표했던 10월 21일에도 기자회견을 통해 유엔총회에서 통일 문제가 적극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승만으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했지만, 그의 통일운동은 이승만의 단정운동을 도덕적인 면에서나 대의명분에서 비수처럼 날카롭게 찔렀다. 김구의 통일운동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가 지방에 내려가면 일하던 농부들조차 일손을 멈추고 그를 따를 만큼 열광적이었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여순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이승만 권력의 핵심이 그를 모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었다. 그런데 김구 암살 행동대원인 홍종만이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1월에 한독당에 입당한 것은 이미 그 무렵에 모해 단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시사한다. 안두희는 홍종만의 추천으로 김학규 조직부장을 소개받아 1949년 2월경 한독당에 입당했다. 결국 김구는 1949년 6월 안두희 소위한테 대낮에 살해당했다."(231)


5장 4월혁명 이후 새나라 건설 방향과 혁명입법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함에 따라 외무부장관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장면 부통령이 4월 23일 부통령직을 사임하여 부통령도 궐위 상태였기 때문에 외무부장관이 수석 국무위원으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된 것이다."(249) "허정과도정권이 이승만·자유당체제를 청산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가장 신뢰한 측근의 한 사람이었고, 과도정부의 관리나 경찰, 판검사는 거의 다 이승만정권하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허정은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원흉을 미온적으로 처리해 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재산을 빼돌릴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혁명정신을 냉각시켰다. 그는 부패한 군 고위 지휘관을 숙정하지 않았고, 경관은 자리바꿈만 했으며, 부정 공무원을 그대로 눌러앉혔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고 3개월여 동안 관리내각을 지키고 별 무리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255-6)


"허정과도정권·장면정권 시기는 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자유가 많았고 민주주의가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실행되었다. 1950년대에는 사회 영역이 관권에 의해 지배받아 각종 사회단체 또는 이익단체는 자율성이 미약했고 관권 선거에 동원되었지만, 이승만정권 붕괴 이후 박정희의 쿠데타에 의해 저지될 때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율성이 확대되었다. 상급에서부터 하급에 걸쳐 자행되던 공권력 남용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만큼 공공성이 제고되고 법치주의가 영역을 넓힌 것이다. 4월혁명의 충격과 4월혁명이 열어놓은 공간에 의해, 그간 침체의 늪을 벗어나지 못했던 정신적·지적·사상적 영역이 활기를 찾고 확대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것은 쿠데타세력조차 일방적으로 봉쇄하기 어려웠고, 해방 직후 우익과 좌익 어느 한쪽 편을 들어야 했던 상황과도 차이가 있었다. 그렇지만 장면정권은 보수반공적이고 냉전적 사고에 찌들어 있다는 점에서 이승만정권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294-5)


"민주당 내부의 통합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장면정권은 혁명입법 요구 같은 새로운 사태와 구세력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무기력했고, 장면에게는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리더십이 부족했다." "1950년대에 민주당은 불만에 찬 도시 유권자와 비판적인 언론 덕택으로 야당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사가 극적으로 바뀌었던 4월 19, 25, 26일 시위 장소의 어디에서도 민주당 간부는 찾아볼 수 없었다. 4월혁명에 소극적이었던 민주당은 4월혁명세력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4월혁명 관련 단체와 여론은 이승만정권과 부정축재자를 단죄할 혁명입법을 요구했지만, 장면정권은 보수·반공·냉전 세력을 제거하는 혁명입법에 주저했다. 이 때문에도 장면정권은 집권 초기 몇 개월 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장면정권은 경찰을 비롯해 공무원, 검찰, 군을 대량으로 숙정해야 할 임무를 맡아 부분적으로는 수행했다. 하지만 그것은 보수적인 장면정권의 집행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었다."(295-6)


"통일관에서 이승만정권과 큰 차이가 없었던 장면정권은 통일운동이나 진보적 사회운동, 학생운동을 '북괴'의 '흉계'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4월혁명의 정신에 모순되게 반공법(또는 국가보안법 개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 함으로써 혁신계의 2대악법 반대투쟁을 불러왔다." "언론 자유는 언론의 범람과 횡포를 낳았다. 이승만정권은 언론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악명 높은 '언론 조항'을 삽입한 바 있는데, 장면정권은 혁신계 신문인 『민족일보』에 약간 손댄 것을 제외하고는 언론 규제는 감히 생각조차 못 했다." "언론들은 과장·왜곡 보도하기 일쑤였고, 특히 정쟁을 부추겼다. 언론은 비난을 퍼부어야 주목받았기 때문에 장면정권의 실정과 무능을 쉬지 않고 보도했다. 장면을 지지하는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정부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서울신문』과 KBS조차 정부를 비판하고 나섰다."(297)


"4월혁명으로 여러 변화가 일어났고, 과도기였기 때문에 장면정권은 여러 면에서 어려움에 부딪혔지만, 짧은 존속기간에 비하면 과도기답게 의미 있는 변화와 성취가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4월혁명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및 인권 확대, 사회단체·이익단체의 자율성 확대, 혁명입법, 통일 논의 활성화, 학생들의 민족 자주성 강조와 신생활운동, 노동운동 등 사회운동 활성화, 집단학살 의혹 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운동, 지방자치제 선거 확대 등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장면정권하에서 공무원 사회와 교육계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일정하게 동태성이 부여됨에 따라 '성취형' 관료도 생겨났다. 공무원·경찰 공채도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경찰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경제제일주의 기치 아래 경제 건설이라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것과 테크노크라트, 경제개발 계획, 국토건설 사업, 기간사업 중시 등은 다음 정권으로 인계되었다."(298)


6장 부마항쟁과 박정희 유신국가의 말로


"부마항쟁은 김영삼제명사건이 계기가 되었지만, 주요한 투쟁 목표는 유신체제 타도였다. 10월 15일 부산대 교정에 뿌려진 '민주선언문'에서는 유신헌법을 '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했고, 같은 날 뿌려진 '민주투쟁선언문'에서는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조치 등은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이라고 했다." "부산에서 민심이 유신체제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1978년 12월 12일 치른 총선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지역에서 1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데, 공화당은 4명만 당선되었다. 5명은 신민당 소속이었고, 1명은 무소속의 예춘호였는데, 그는 야당과 행보를 같이하고 있었다." "부산만이 아니었다. 12·12 총선에서 박정희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이 엄혹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도 신민당이 32.82%를 득표해 공화당의 31.70%보다 1.1%나 더 많은 지지를 받았다. 신민당보다 선명한 기치를 내걸었던 통일당이 7% 이상 득표한 것까지 감안하면, 공화당의 패배는 더욱 분명했다."(312-3)


"박정희와 유신체제가 붕괴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경제 문제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박정희의 치적 하면 대부분 경제발전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유신 붕괴 전해인 1978년 12·12 총선에서 공화당이 패배한 데에는 1977년부터 시행된 부가가치세 강행, 노풍(벼 품종) 피해, 재벌·특권층 중심의 경제 운용이 큰 역할을 했다. 김재규가 부마항쟁이 민란 또는 민중봉기의 형태로 일어나고, 다른 5대 도시에도 확산될 것으로 파악한 것은 유신체제 및 정치파동에 대한 불만에다가 물가고·조세저항 등 경제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부산계엄사령부가 중심이 된 합동수사반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경제침체에 의한 서민과 상인층의 불만을 부산항쟁의 첫째 이유로 꼽았고,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과 그에 항의하여 제출한 야당 의원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선별 수리하겠다고 한 정치적 이유가 두번째로 제시되어 있다."(314-5)


"유신쿠데타 다음 해부터 정력적으로 추진되어 산업 구조를 바꿔놓은 중화학공업이 유신체제의 발목을 잡았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재벌의 판도는 정경유착과 관련돼 있었는데, 정부 보증으로 얼마나 큰 규모의 중화학 설비를 위한 차관을 도입하느냐에 의해 판가름 났다. 대재벌들은 자기 자본 없이 무리하게 차입해 중화학산업의 평균 자기자본 비율이 22%에 머물렀다. 과도한 중복투자로 문제가 심각해지자 박 정권은 1979년 5월 총투자 규모의 약 30%나 투자보류 또는 중지시킨 대규모 투자조정을 해야만 했다. 1979~1980년에 창원공단의 중화학공업 가동률은 현저히 떨어져 50% 안팎이었고, 현대양행의 대규모 공장은 가동이 멈춰 세계 최대의 창고라는 말까지 듣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중화학공업계가 불황에 허덕이자 경기는 곤두박질쳤다. 외채가 1979년 말 기준 200억 달러를 넘어서 외채망국론이 제기되었다."(317)


"부마항쟁은 10·26 거사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김재규는 부산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18일 0시가 조금 지난 새벽에 부산계엄사령부에 도착해 보고를 받았다. 김재규는 7년 동안 유신체제의 억압이 계속되는 사이에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졌다고 판단했는데, 그 자리에서 부마항쟁 같은 국민적 항거라는 우려했던 사태가 결국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인했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박정희에게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고 물가고에 대한 반발과 조세에 대한 저항에다가 정부에 대한 불신까지 겹친 민중봉기입니다. 불순세력은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으나, 박정희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10월 26일 저녁에도 부산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했다고 말하면서─여기서 광주사태에 김대중이 개입했다는 전두환·신군부의 주장이 상기될 것이다─부산사태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식당 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이 가담했다고 억지를 부렸다."(331-2)


"(유신체제에서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부마항쟁이 촉발한 10·26 거사는 대규모 유혈참극을 방지하는 데 기여했다. 유신 말기의 정치적 폭주와 독재, 장기집권, 경제 약화, 빈부격차 등으로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은 전국적인 현상이었고, 사태 악화에 따라서 서울, 광주 등 다른 지역에서 제2의 학생·민중 항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히 있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이승만이나 전두환·신군부보다 훨씬 막강한 권력을 가졌고, 박정희와 차지철은 유신체제를 보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유혈참극이라도 불사하겠다는 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10·26 거사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고, 그것은 살얼음판 비슷한 희망이었지만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었다. 학생운동도 노동운동도 활기가 있었다. 전두환·신군부의 5·17쿠데타로 민주화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지만, 그것은 1985년 2·12총선에 부분적으로 표출되었고, 6월항쟁으로 진전하였다."(341)


7장 친일파가 만들려 한 국가


"(친일파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받아 정치행보를 펼쳐나가던) 이승만은 정부수립 이전에 이미 친일파 청산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친일파가 입법의원 의원 등 고위 공직에 취임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 1946년 10월 입법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서울에서 장덕수와 김성수가 당선되는 등 친일행위자들이 당선되자 부정선거 문제와 함께 논란이 일어났고, 김규식 등 좌우합작위원회에서는 이 선거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재선거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입법의원 선거가 정식으로 되었으니 우리 민족이 다 축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친일파 문제는 우리 환경이 해결할 수 없으니 미리 제출되는 것은 민심만 혹란(惑亂)하게 한다"고 말하며 '극렬' 친일 분자라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일파 청산을 완강히 반대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일파 의원 당선자가 포함된 입법의원 선거를 우리 민족이 다 축하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355)


"극우반공주의는 전쟁이 나기 전까지는 굳건하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 경찰이 경원시되거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1950년 5·30 선거가 보여준 대로 애국자는 존경받고 있었다. 극우반공주의는 한국전쟁을 통해 강고히 뿌리를 내렸다. 다른 요인도 작용했지만, 특히 제주 4·3사건에서부터 일어난 군·경에 의한 대규모 주민 집단학살은 극우반공주의를 뿌리내리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력은 오로지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민중은 숨을 죽였다." "일례로 안두희 사건 재판이 열릴 때 재판정 밖에서는 안두희를 '의사'로 치켜세우는 벽보가 붙었고, 변호인은 피고의 행위는 대한민국에서 표창할 일이라고 변론했다. 검찰관이 이를 반박하자 재판장이 검찰관을 제지했다. 안두희는 "국가를 위하여 선생을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나는 단정했다. 만일 이 자리에서 공산당과 한독당이 같은 노선이 아니라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라"라고 있는 대로 소리를 높여 말했다."(360-1)


"박정희 유신체제를 만들고 수호한 고위 관리는 거의 다 친일파 또는 친일행위와 관련 있는 자였다. 유신 수호의 첨병인 유정회의 초대 회장인 백두진은 일제의 국책은행인 조선은행 간부였다." "제2대 회장인 태완선 역시 조선총독부 국책은행인 식산은행 등에서 근무했다. 제3대로 유신 말기 회장인 최영희는 일제가 패망하던 해에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하여 공병 소위로 임관했다. 유신체제에서 6년이나 국회의장을 맡은 정일권은 만주 봉천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정일권은 박 정권 초기에 6년 7개월이나 국무총리를 지냈다. 1978년 12월까지 10년 이상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는 친일파 거두 민병석의 아들로 조선총독부 판사였다. 유신 말기에 대법원장이 된 이영섭은 해방되던 해에 경성지법 판사였다. 이처럼 유신체제는 박정희를 포함해 3부의 장과 유정회장이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친일파이거나 친일행위와 관계가 있었다."(365-6)


"일본이 우경화하고 전쟁국가로 치닫는 것은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긴장을 고조시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과거사 청산을 어렵게 한다. 특히 일본의 극우와 한국의 극우가 결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기시 등 일본의 '친한파'는 유신체제를 붕괴할 때까지 지원했는데, 10·26정변 이후 전두환 등 신군부가 집권해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다시 지원했다. 일본은 12·12쿠데타 이후 1980년 5월 10일까지 최소한 여섯 차례에 걸쳐 출처가 불분명한 북의 남침설을 전달해 전두환의 권력 강화를 도왔고, 5·17쿠데타를 일으키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게 했다.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던 5월 20일에는 마에다를 특명전권대신으로 파견했고, 6월과 8월에는 세지마 류조가 비공식 특사로 방문했다. 일본은 미국과 함께 광주 유혈사태의 방조자였다. 나카소네 정권은 전두환 정권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오늘날에도 두 나라의 극우는 상당수가 손을 잡고 있다."(3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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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8
정재정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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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일본제국의 유산과 남북 분단국가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키치가 보건대,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한국강점을 '일한 양국이 대등하게 합일'하는 것처럼 이해하여 '합방'이나 '합병'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자가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인이 정말로 일본인과 동일한 대접을 해달라고 달려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완전히 폐멸로 돌아가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폐멸'이나 '식민지' 같은 노골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냐고 항의한다거나, 외국이 일본에 대해 한국을 침략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해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폐멸'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선택하여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양두구육'이라는 고사성어가 딱 어울리는 작태였다."(35)


# 일제와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한국의 입장

1. 강폭·협박에 의해 강제로 맺어졌다.

2. 조약 정본에 황제의 서명날인이 없다.

3. 조약에 대한 비준서가 없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부당한 강점(군사점령)이다.


# 한국(당시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일본의 입장

1. 강제행위가 있었더라도, 국가 대표자에 대한 협박인지, 국가 자체에 대한 협박인지 국제법상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2. 조약서 정본에 기명 조인하는 사람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특명전권대사, 공사 또는 외무대신인 경우가 통례이다.

3. 모든 국제협정에 비준서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비준서가 없다는 사실이 무효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2장 한일조약 체결과 국교재개


# 한일조약과 부속협정

1. 기본조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 부속조약 : 청구권협정,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 어업협정, 문화재협정


# 한일회담의 역사

1. 예비회담(1951. 10. 20~1952. 2) :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와 어업 문제 해결 등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거부함

2. 제1차 회담(1952. 2. 15~1952. 4. 21) : 일본이 한국의 대일 청구권과 연합국의 대일 배상청구를 상쇄할 목적에서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함

3. 제2차 회담(1953. 4. 15~1953. 7. 23) : 한국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 철회를, 일본은 평화선 철폐를 요구함

4. 제3차 회담(1953. 10. 6~1953. 10. 2) :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식민지배가 정당했다는 망언을 하면서 무산됨

5. 제4차 회담(1958. 4. 15~1960. 4) : 기시 노부스케가 구보타 발언을 철회하고, 106점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등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으나 재일한인 '북송' 문제와 4·19 혁명으로 중단됨

6. 제5차 회담(1960. 10. 25~1961. 5. 15) : 5·16 군사정변으로 중단됨

7. 제6차 회담(1961. 10. 20~1964. 4) : 동아시아 안전보장을 위한 경제협력론이라는 전제 하에서 진행. 청구권을 경제 협력 방안의 하나로 다루는 선에서 합의함

8. 제7차 회담(1964. 12. 3~1965. 6. 22) : '기본조약' 내용을 최종 검토하고 문서를 작성함


"6차 한일회담에 임한 이케다 정부가 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정부의 의중을 꿰뚫은 것이었다. 이케다 정부는 경제적 곤란과 개발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부에 유상·무상으로 일본 역무役務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선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1962년 10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여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와 담판 짓도록 했다. 이때 작성된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메모에는 자금의 명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93-4)


"7차 회담에서 한국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이 일본의 패전 혹은 대한민국의 수립까지는 유효하며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은 한반도 전역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주장했고, 일본은 북한을 고려해 유엔 총회 결의에 명시된 범위의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결국 구舊조약 무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유일 합법성 문제는 '유엔 총회 결의 제195(3)호에 명시된 바와 같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문구를 채택했다. 한국 정부는 '이미'라는 시점을 구舊조약을 체결한 때부터로, 일본 정부는 일본의 패전 이후로 해석했다. 한국의 관할권도 한국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일본 정부는 38도선 이남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후처리의 근본과 관련된 역사인식의 괴리를 메우지 못한 채 마무리된 '기본조약'은 두고두고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화근을 남겼다."(96)


"한일 간의 청구권 논의는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후처리 협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다. 곧 미국의 대일 강화 방침인 배상요구 포기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방패삼아 한국에 법적 근거에 입각한 청구권 문제 제기를 요구하고 경제협력 방식의 채택을 유도했다. 미국 주도의 전후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개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구권협정'에서 불거진 문제는 민간 차원의 보상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국가보상의 방법을 채택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청구권자금을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정부는 국내에서 개인보상의 액수를 줄이고 시기를 늦추며 청구권자금을 경제개발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개인보상은 1974년에 관련법을 만들어 불충분하게나마 시행했다. 이로써 개인의 청구권과 재산권이 국익에 종속된 형태로 처리된 셈이다."(116-7)


# (청구권협정, 제2조)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


"한일조약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총체적으로는 한국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먼저 정치적·국제적 효과를 살펴보자.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공산당·사회당 등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좌파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대체로 남북한 문제에서 음으로 양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집권 자민당 안에도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나 국교수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 논거가 바로 '기본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유일한 합법정부' 조항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북한과의 정치적 교류를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121)


"다음은 경제적 기여의 측면이다. 한국 정부는 회담 초기에 '변제권'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다가 막판에 '청구권'으로 선회함으로써 6억불 이상의 경제개발자금을 획득했다. 국내적으로는 청구권자금이라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주장했다." "청구권자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일본 상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할 것을 감안하면 일본 정부에게도 큰 부담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이 자유 진영의 반공국가로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일본의 안보방벽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한일 간의 청구권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미국 정부도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동북아시아에 한·미·일 협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는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환영했다."(122-3)


"한일회담은 애초부터 '과거사' 청산을 제기할 만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의 민족 간 대립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반공을 국가수호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반공논리는 친일논리와 연결되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둘째, 일본 안에서 과거를 반성하는 세력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므로 일본 측에서 보더라도 한일회담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셋째,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반공논리에 기초하여 일본에게 배상책임을 지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회담에서도 '과거사'를 청산하는 조약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결국 한국은 '과거사' 청산이 불가능한 조건 아래서 한일회담을 추진한 셈이었다."(126)


"1965년 한일조약의 체결에는 한일 양측 모두 '만주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은 만주국 산업부 차장, 오히라 마사요시, 시나 애쓰사부로, 오노 반보쿠 등의 막전막후 인물들은 만주국 관리나 관동군 출신이었다. 전후 한일 인맥의 원류를 이룬 이들은 양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내세워 공생했다. 정일권-김종락 라인, 고노-우노-시마모토 라인은 한일교섭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아울러 '독도밀약'이라는 공동전략을 수립하고, 기시-야쓰기 라인과 경쟁하면서 '파트너십'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비공식적 조정활동을 통해 한일회담 타결에 큰 역할을 하고, 한일조약 체결 이후에는 밀월시대를 구가했다." "만주인맥은 양국의 협력과 공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책결정자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 네트워크로 기능했다."(134)


3장 재일한인과 남·북·일 관계


"재일한인이 귀환을 망설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미·소 점령하에 있던 한반도의 정황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아래 일본 정부가 송환 정책을 마련하면서 귀환할 때의 소지금과 수하물을 제한한 것이었다. 재일한인이 현금 1,000엔, 화물 250파운드 이상을 가지고 귀국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재일한인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일한인 중에서 한반도로 일단 귀환했다가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사례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또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인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냥 일본에 주저앉는 재일한인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60만 명 가량의 재일한인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재일한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현실을 생각하면 당장은 일본에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166)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귀환의 물결이 한 고비를 넘긴 1946년에 접어들어서도 재일한인의 국적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반면에 일본 정부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한인은 일본 국적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재일한인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말 선거법을 개정하여 대만인과 한국인의 참정권을 정지시켰다. 또 1947년 일본국헌법 발효 전날에는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시행하고, 재일한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재일한인에게도 외국인등록이나 강제퇴거 등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재일한인을 일본 국적자로 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외국인으로 관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대했던 셈이다."(168)


"재일한인들은 한민족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1945. 10~1949. 9)은 당시 재일한인 최대의 상호부조단체로서 이런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조련은 나중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1955. 5~현재)로 계승되었다. 조련이 주력한 것은 민족교육이었다."(168-9) "재일한인들은 한반도 정세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반응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영·소·중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가 결정되자, 신탁통치 반대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민족단체로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 1946. 10. 결성)을 조직했다. 민단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조직명을 개칭했다. 민단은 강령 첫머리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준수한다"라는 조문을 두어 한국 국민이라는 주지主旨를 분명히 밝혔다. 민단은 1994년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171)


"1955년에 출범한 조총련은 재일조선인운동의 임무에 대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활동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재일조선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이고, 본국 동포와 단결하여 조국통일과 민주적·민족적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일본공산당과의 공동투쟁을 중지하고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조총련이 이러한 주의주장을 실천에 옮긴 상징적 사업이 바로 재일한인 '귀국운동'이었다." "북한이 주거·교육·의료와 식량까지 무료로 지급한다, 실업이나 차별의 걱정은 전혀 없다, '귀국' 동포는 조국의 공민이 된다는 등의 장밋빛 선전은 빈곤과 차별 속에 허덕이던 재일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일본에서 고생할 거라면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며 고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6년 생활보호비 삭감 이래 체험한 궁핍한 생활과 북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이 선명하게 대비되었다."(180-1)


# 북한이 북송을 추진한 의도

1. 중국 지원군의 귀국 공백을 메울 노동력 확보

2. 재일한인의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성취

3. 한미일 관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효과

4. 선전선동에서 남한을 제압하는 효과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과 더불어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해방 전부터 일본에 살아온 한국 국적자와 그의 자손(2세)에 한해 일본영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협정영주자'에게는 강제퇴거명령의 적용을 완화하고, 국민건강보험 가입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재일한인의 재류조건이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한인보다 조금 유리하게 개선되었다. 이런 연유도 있어서 그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재일한인의 수가 늘어나 '조선' 국적의 재일한인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1970년의 외국인등록에 기입된 국적란을 보면, 한국이 약 33만 명(54%), 조선이 약 28만 명(46%)이었다." "그런데 '협정영주자'가 되어도 강제퇴거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조차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틀 밖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3세 이하 후손들의 영주권은 협정 발효 이후 25년 이내(1991년까지)에 다시 협의하도록 미뤄두었다."(190-1)


4장 경제발전과 상호의존


"한일 경제관계는 다음과 같이 몇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① 한일교역의 재개부터 6·25전쟁을 거쳐 장면 정부가 붕괴된 1960년까지, ② 5·16쿠데타 이후 한일조약 체결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③ 신군부 집권부터 민주화 과정을 지나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까지, ④ 민주화 실현 이후 여야 정권교체를 경험하고 국제금융위기를 거친 2013년까지이다. 이 시기구분은 한국의 정치변동을 지표로 삼은 것처럼 보이지만, 각 시기마다 한일간의 경제관계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①의 6·25전쟁은 한국 경제가 다시 일본 경제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고, ②의 한일조약은 경제관계의 밀월을 창출했으며, ③의 플라자합의(1985)는 3저호황의 배경이 되었고, ④의 외환위기는 일본의존에서 탈피하는 전기가 되었다. 각각의 시기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는 한일 경제관계의 양적·질적 변화와도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210)


"패전 이후 곤경에 처해 있던 일본 경제를 단숨에 부흥시킨 것은 1950년 한국에서 벌어진 6·25전쟁이었다. 미국이 대량의 군수물자를 일본에 주문함으로써 일본 경제는 고도성장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른바 '6·25전쟁 특수'였다."(213) "6·25전쟁의 특수수입으로 일본의 국제수지는 흑자로 돌아서고 외화보유고는 급증했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1950년 10월에 이미 아시아-태평양전쟁 전(1934~1936) 수준을 돌파했다. 1953년도에는 6·25전쟁 발발 이전보다 85%나 증가했다. 실질국민소득도 1951년도에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수준을 넘었고, 1953년도에는 6·25전쟁 시작 이전보다 38% 상승했다." "그리하여 일본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3종의 신기神器'라 불린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를 마음껏 사용하며 소비와 안락의 꿀맛을 즐기게 되었다. 6·25전쟁을 현장에서 겪은 한국과 한국인의 비참한 신세와는 너무나 다른 일본과 일본인의 처지였다."(215-6)


"박정희 정부(1961~1979)는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고 근대화 정책을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박정희는 만주경험 등의 배경을 살려 메이지유신의 부국강병 이념을 수용하고, 일본의 개발국가형 발전전략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은 사양화된 섬유산업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의 하청생산과 가공무역을 통해 섬유산업을 발전시켰다. 일본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섬유 이외에도 화학, 철강, 자동차, 전자산업 등이 하청, 설비이전, 기술이전, 합작, 직접투자 등 다양한 형태로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은 일본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학습하여 물건을 생산했다. 핵심기술, 핵심부품 및 자본재 등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거나 일본에 의존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이같은 기술 수준과 산업발전단계의 차이는 수출구조, 투자내용, 소득 수준 등 경제 전반에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켰다. 이른바 수직적 분업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220-2)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라는 이른바 '3저'에 힘입어 침체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저달러'는 쌍둥이 적자(재정적자, 무역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이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용인한 데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엔고현상'이 나타난 해외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되었다." "각국은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침체에 빠진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금리인하 정책을 펼쳤다. 플라자합의에 의한 달러화의 평가절하는 그 추세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더욱 다행스럽게 1985년 12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시장점유율 확대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저유가' 현상이 나타났다." "(3저는 한국 경제에 수출 증대와 외채상환 부담 경감은 물론) 생산비 절감과 가격경쟁력 회복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도 흑자를 기록했다."(241-2)


"198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조성된 '3저'라는 호조건 속에서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한일 간의 수직적 분업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기술도입 및 투자유치를 다각화했고, 일본은 부메랑 효과를 두려워하여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박정희 정부 붕괴 이후 기존 네트워크의 약화와 정치정세의 불안이 일본의 대한對韓 투자를 감소시켰다. 1986년 이후 일본의 대한 투자건수가 3~4년 동안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강세와 자본잉여로 일본 자본이 해외로 적극 진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0년대 들어서 직접투자의 핵심시장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으로 전환했다. 그에 따라 대한 투자건수와 평균 투자금액도 점차 감소했다. 1992년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한 이후 일본 자본의 해외진출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245-6)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외국 자본 유치를 원활하게 하고자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압력 하에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외국 자본의 투자지분 50% 상한선 철폐, 외국 자본에 의한 인수합병 자유화 등이 단행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이래 시행해온 수입 다변화제도를 해제함으로써(1999) 자동차 등을 포함한 일본 수입품이 한국 시장에 대거 몰려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2월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개정하여 외국 자본이 부동산 및 주식시장에도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 하향일로에 있던 외국인 투자가 다시 상승기조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부동산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수익률이 높아질 것을 예상하고 투자를 확대했다. 문화·오락사업에도 일본의 직접투자가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가 IT 및 문화산업을 두텁게 지원한 것이 일본 자본의 투자를 촉진했다."(249)


5장 인간왕래와 문화 교류


"1960년대 들어 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과 문화 교류를 시작했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이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해 일본의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반면에 국민감정에 거부감을 주는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했다. 한국 유학생은 일본에 보내되, 일본 가수는 한국에 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의 필요에 맞게 선택적으로 일본 문화를 수용한 셈이다. 한국의 여론은 언제나 일본의 대중문화가 '저질', '퇴폐'라는 이유를 들어 유입을 금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공산주의나 반정부사상이 침투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외국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 1961년 '반공법'에 기초하여 '공연법'을 만들었다. 그 골자는, 외국인이 상업적인 공연을 하거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공연의 경우 정부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277-8)


"1988년 서울올림픽은 문화개방 정책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사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 한국은 일본 음악이나 영화 등의 대중문화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문화부장관도 구 공산주의권 문화까지 수용하는 마당에 일본 대중문화만 금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외무부도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게 좋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 일각은 여전히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수준이 낮다,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속관계에 빠질 수 있다 등이 그 이유였다. 때마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후 50주년 결의' 문제 등이 부상하여 반일여론이 조성되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실행에서 멀어져갔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에 휩쓸리면서 한일 문화 교류는 시급한 우선과제가 될 수 없었다."(280-1)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을 마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그해 10월에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제1차 개방(1998. 10. 20)은 영화, 비디오 소프트 분야는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어판 만화와 잡지는 모두 공식적인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제2차 개방(1999. 9. 10)은 영화, 비디오의 개방 기준이 되는 공인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70개로 확대했다." "제3차 개방(2000. 6. 27)은 연극, 영화에 대해서는 성인용을 제외하고 전면 허락했고, 대중가요 공연은 전면개방되었다." "제4차 개방(2004. 1. 1) 때는 일본 영화 상영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앴다. 음악 CD, 게임소프트 분야도 완전 개방되었다.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규제가 풀렸다."(281-3)


6장 역사갈등과 평화공영


"한국에서는 일본의 주요인사, 곧 고위관료나 유명 정치인이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비뚤어진 언사를 늘어놓는 것을 '망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을 매도하기 위해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한일 간에 불거지는 역사갈등은 대개 이 '망언'에서 비롯된다." "일본 요인의 '망언'에 담긴 역사인식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합의에 따라 '합법적'으로 '합방'했다. ②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③ 일본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발전과 한국인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 '수탈'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실과 어긋난다. ④ '창씨개명', '일본어교육', '징병' 등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똑같이 대우하려는 '일시동인', '내선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였다. ⑤ '한일합방'과 그 후의 일본통치는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293-5)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연립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서'라는 수상 담화를 발표했다(1995. 8. 15).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각의결정을 거쳤다는 점, 근대에 일본이 근린 제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종래 수상 개인의 소신 표명보다 내용과 형식이 크게 진일보한 것이었다. '종전 50년'을 맞아 전후 결산의 일환으로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그런데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다. '근린 제국'이라고 뭉뚱그려 표시한 것이다. 이를 한국으로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수상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었다(1998. 10. 8).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성한) 오부치 수상의 발언은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298-9)


"그 후 일본의 역대 정부와 수상은 공식적으론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역사인식을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일본 정부와 역대 수상의 역사인식에서 또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병합 백 년'을 맞아 민주당의 간 나오토 수상이 발표한 담화(2012. 8)였다. 여기서 간 수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면서 "3·1운동 등의 심한 저항에서도 보였던 대로, 정치적·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해 행해진 식민지 지배로 인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병합조약'의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의사를 무시한 강제적 행위였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간 나오토 수상의 담화는 민주당 정부가 급격히 몰락함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잊혀져버렸지만, 그 선진성만큼은 좀 더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299-300)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조약에 의해 국가배상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공식 견해를 견지했다. 전후 일본에서 분리된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배상 문제가 없을뿐더러, 분리에 따른 재산·청구권 문제는 한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청구권 협정의 법적 효력범위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밝혔다(2005. 8. 26). 곧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정부·군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원폭 피해자, 사할린 잔류 한인 등의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종래와 다르게 별도의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안들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의제로 등장하지 않았거나, 한일조약 체결 이후 새롭게 부각된 사안이라는 게 한국 정부의 주장이다."(318-9)


"최근 한국의 사법부는 일제하의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 잇달아 엄중한 판결을 내려 소송운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였다.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한일청구권협정의 규정에 따라 해결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행위(이른바 부작위不作爲)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2011. 8. 30). 곧 이 문제들이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법적으로 해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일 사이에 해석상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가 정해진 절차에 의거하여 분쟁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행위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 이미 소멸되었다고 여겨져온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민사사건 차원에서 살아 있다고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2012. 5. 24). 2013년 들어 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에 의거하여, 피소된 일본 기업은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332)


7장 미래와 세계를 향한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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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4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5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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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중산층 신화와 공안정국의 결탁 / 1989년


"1989년 2월, 정부는 대학생의 비영리 과외를 전면 허용하고 중고교 재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수강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35) "대학생 과외 전면 허용은 (명문대와 비명문대) 학생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과외 산업이 활성화되면서 입시 학원들은 80년대 내내 누려보지 못한 최고의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과외 허용 조치 이후로 (속셈학원 같은) 새로운 형태의 준입시 학원들도 생겨났다. 원칙적으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입시 학원의 기능을 발휘하는 학원이었다."(37-9) "중산층은 '계급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 어떤 비리와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감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대학생 과외에서조차 벌어지는 명문대생과 비명문대생의 현격한 수입 격차는 평생 영향을 미칠 계급적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으니, 망설일 게 없었다."(41)


"4월 13일에 실시된 동해 보궐선거에서의 후보 매수 사건은 김영삼과 민주당의 발목을 잡는 대형 악재로 떠올랐다. 이는 민주당측이 공화당 후보 이홍섭을 1억 5천만 원에 매수한 사건이었는데, 민주당 사무총장 서석재가 5월 30일 구속되고 김영삼의 사전 공모설이 유포되면서 김영삼의 정치 생명이 끝장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용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총재는 정부측에 코가 꿰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 총재는 민정당이 중간평가를 유보한 이후 기세 좋게 나갔으나 후보 매수 사건이 터지면서 형세가 역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은 이후 한국의 정치사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제2야당 총재로 김대중에게 눌려지내는 치욕을 감수하기 어려웠던 김영삼은 이 사건으로 6공 정권에게 결정적인 약점이 잡히자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결행하게 된다."(59)


"노태우와 김영삼의 '밀월관계'가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5월 31일에 열린 노태우·김영삼의 청와대 회담이었다. 김영삼은 이 회담에서 '초당적 북방외교'에 합의했다. 김영삼은 6월 중 소련과 미국을 방문했는데, 6월 6일 소련에서 청와대가 주선해준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허담과의 회담에 응하고 이 회담에서 정부측 입장을 지지해줌으로써 3당 통합으로 나아가는 길을 밟아갔다." "김영삼은 잇따라 터진 임수경, 서경원 사건에 대해서도 노태우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1989년 8월 18일에 실시된 영등포 을구 재선거는 김영삼의 3당 통합 결심을 확실하게 굳혀주는 또다른 사건이 되었다. 공안정국으로 인해 김대중과 평민당이 위기에 처해 있던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 이원범의 득표율은 2등으로 낙선한 평민당 후보의 득표율 3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8.8%로 나타났기 때문이다."(61)


"1988년 12월 5일 문교부장관으로 취임한 정원식은, 취임 직후부터 사학분규를 비롯해 학원문제에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정원식은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마련했는데, 89년 4월 11일 서울 동부와 남부지역 18개 대학 보직교수와 학부모 간담회에서 직접 〈학생들의 점거 농성 사태가 장기화되면 계고-임시휴업-전원유급-폐교의 단계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한 뒤, 경기대와 한림대 등에 계고 조치를 취했고, 고려대와 서울교대에는 임시휴업을 지시하기도 했다. 5·3 동의대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은 바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89년 5월 3일 새벽, 부산 동의대에서 학생들이 점거농성 중이던 도서관에 불이 나 진압하려 들어갔던 경찰관 7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알려진 5·3 동의대 사건은 학생운동 역사상 단일 대학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구속자와 제적생, 그리고 최대 형량 등의 기록을 낳은 만큼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90-1)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학생 임수경은 전대협의 대표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리는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1989년 6월 21일에 서울을 출발, 도쿄와 베를린을 경유하여 6월 30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6월 30일 전대협 의장 임종석과 축전준비위원장 전문환은 한양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대협의 공식대표로 임수경을 평양 청년학생축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파견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들은 전대협의 평양축전 대표 파견이 비공개적으로 이루어진 불가피한 과정을 조국통일의 단심으로 이해해주길 바라며 아울러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불순한 마음도 없는 우리의 통일을 향한 평양행을 지지해 줄 것을 부탁드린다.〉 그러나 경찰은 바로 그 날 평양축전 참가 출정식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무려 7천 5백여 명의 병력을 한양대로 진입시켜 학생 2천여 명을 강제 연행했다."(118-9)


# 1990년 9월 26일 대법원은 임수경, 문규현에게 각각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함


"89년 하반기 들어 학생운동 진영은 NL(민족해방)·PD(민중민주주의)라는 두 계열로 결집 및 분화되었다." "임수경의 방북은 NL과 PD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처음부터 전대협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에 반대했던 PD 계열의 학생운동권은 평축 참가 투쟁이 ① 반파쇼 투쟁 도중에 깃발을 내린, 민중에 대한 반역 행위이며, ②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평축에 참가하자는 무원칙적 투쟁이자 개량주의적 통일운동이며, ③ 적이 파놓은 구덩이에 스스로 빠진 어리석은 투쟁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전대협은 NL 노선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민족분열주의라고 반박하였다. 89년 2학기 말의 총학생회장 선거에선 NL파가 퇴조하고 PD파와 비운동권 세력이 부상해 이후 학생운동은 NL, PD, 비운동권의 3각 구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적어도 87년 이후 학생운동 정파간 갈등은 매우 치열하고 격렬했다. 분명히 과잉이었다."(128-31)


"6공 정권은 1988년 8월 1일 〈집시법 위반자의 경우 실형 3년 이하는 징집〉하던 기존의 시행령을 〈실형 1년 또는 집행유예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만을 징집하는 것으로 개정했다. 6공 정권은 시행령을 개정한 지 불과 7개월만인 89년 3월 25일 공안정국을 틈타 〈실형 2년 미만을 선고받은 자는 모두 징집〉하는 것으로 오히려 '개악'해 버렸다. 더욱이 개정된 시행령에는 살인, 강도, 강간범 등 일반 사범의 경우 〈군 사고예방과 군 지휘부담을 감안하여 입영 순위를 후위로 조정한다〉는 단서를 붙여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일반사범은 사실상 입영이 면제되게 되었는데 이는 형평의 원칙에 어긋날 뿐 아니라 시국사범에 대한 녹화사업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6공은 5공의 그 악명 높은 '강제징집과 녹화사업'을 그대로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걸 한 단계 발전시킨 이른바 '학원 프락치 공작'을 유감없이 구사하였다."(146-7)


# 학원 프락치 공작 유형(김동훈)

1. 정보기관에서 선발해 조직적인 교육을 받고 경찰상황실(이른바 'CP')를 통해 활동하는 경우 : 동아대 CP사건, 부울총협 사건

2. 안기부나 경찰에 붙잡힌 운동권 학생이 회유와 협박 끝에 프락치로 전락한 경우 : 국민대 김정환 사건

3. 입대한 운동권 학생이 보안사(기무사)의 회유와 협박으로 프락치가 되는 경우 : 윤석양 이병 사건

4. 정보를 넘겨주는 댓가로 돈이나 신분보장을 받는 유급프락치 유형 : 한성대 교직원 프락치 사건, 전남대 나윤성 의경 사건

5. 범죄를 저지른 재수생에게 범죄 무마를 조건으로 학원 내 정보원 활동을 시킨 경우 : 성균관대, 한양대 프락치 의혹 사건


"신문들의 치열한 경쟁이 말해주듯이, 노 정권 하에서의 언론 민주화는 왜곡된 시장 민주화였을 뿐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노 정권에서 재벌들의 신문 소유가 크게 늘어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국화약이 『경향신문』을, 롯데가 『국제신문』을, 대우가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으로 개제)를, 대농이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를, 갑을이 『영남신문』을 인수하였으며, 현대가 『문화일보』를 창간하였다. 또한 재벌들은 앞다투어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문화재단을 설립하였지만 대부분 변칙 상속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였다. 재벌의 광고를 통한 언론 통제는 종합광고대행사의 계열화를 통해서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되었는데, 8대 대행사의 4대 매체 광고물량 처리액은 4대 매체 총 광고비의 40.8%에 달했다." "아울러 재벌들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정치 권력과의 통혼(通婚) 관계를 통해서도 한국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186-7)


"89년 12월 15일 청와대에서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4당대표가 모여 영수회담을 열었다. 여기서 12월 31일에 전두환의 증언을 듣고 5공 특위를 마무리짓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노태우는 백담사에 있던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국회에 출석해 증언해 줄 것을 설득했다." "12월 31일, 자신의 은둔지인 백담사에서 새벽에 출발한 전두환은 오전 10시부터 국회에 출석하였다. 이 날 전두환이 증인으로 출석한 국회청문회는 14시간여나 진행되었으나, 전두환의 증언 시간은 모두 합해봐야 두 시간도 채 안되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흥분한 야당 의원들의 규탄과 이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맞대응으로 채워졌고 그래서 일곱 차례에 걸친 정회가 이루어졌다." "전두환이 퇴장한 뒤 노무현 의원은 증언대를 향해 명패를 집어던졌다. 그는 이 같은 '품위 잃은 행동'을 사과했지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증언의 내용과 저의 행위 중 어느 것이 더 비난받아야 하는지·····.〉"(193-4)


"이 당시의 중산층 의식은 상당 부분 소비 자본주의 체제의 진입으로 인한 변화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거품'이었다. 정권안보 차원에서 강력 추진된 '스포츠 과소비'는 제쳐놓더라도, 각종 가전제품과 백화점의 과시적 소비문화, 그리고 3대 붐(마이카, 증권투기, 부동산투기)에 대한 희망 욕구가 가세했다." "컬러 텔레비전은 이미 80년대 중반에 보유율 90%를 넘어섰고 냉장고와 세탁기의 보급도 대단히 빨랐다. 80년에 37.8%였던 냉장고 보급률은 90년에 93%를 넘어섰다. 백화점 건설 붐은 89년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이는 거의 모든 재벌들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재벌들이 앞다투어 백화점 사업에 뛰어든 이유는 높은 현금 수익 외에도 백화점 그 자체가 엄청난 부동산이었기 때문이다." "백화점은 〈가장 적은 세금을 내면서 가장 값비싼 땅을 보유하고 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훌륭한 재산증식 수단〉이었다."(200-1)


"30대 재벌그룹의 경우 88년 말 현재 10조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였으며, 지가 상승에 비례해 이들 그룹에 막대한 자산 소득이 돌아갔다. 특히 삼성, 롯데 등 일부 재벌그룹들은 85년부터 88년까지 4년 사이에 총 보유 부동산의 70% 이상을 집중 매입하였다. 삼성은 이 기간 동안 기업투자 2천388억 원의 약 4배인 1조 원 상당의 부동산을 매입하여 총 보유 부동산의 74%를 차지했고, 롯데그룹은 기업투자 1천168억 원의 약 5배인 6천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사들여 88%를 차지했다. 그밖에도 기아, 금호, 두산 등이 각기 기업 투자액의 3~4배에 이르는 수천억 원을 부동산 매입에 사용하였다. 자기 돈으로 땅을 사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 다 은행에서 빌린 돈이었다." "박세길은 이렇게 말한다. 〈(권력이 미리 언질을 준) 개발이 진행된 이후 땅값이 엄청나게 뛰어오름으로써 막대한 투기 이익을 얻게 된 재벌은 당연히 그 답례로서 권력에게 상당한 자금을 바치는 게 기본 상식이다.〉"(218-9)


"1980년대는 광주학살과 더불어 극심한 호남 차별이 판을 친 시대였다. 5·6공 모두 대구·경북 중심의 이른바 TK 정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극심했던 정부 인사에서의 호남 차별은 5공을 거치고 6공 들어서 더욱 심화되었다. 노태우는 대통령 취임 전 〈임기 중에 호남 출신 참모총장을 내겠다〉고 했던가 하면 취임 연설에서는 〈이제 지역감정은 새로운 출발의 광장에 묻자〉고 선언했지만, 호남 차별을 심화시키는 데에 골몰했다. 골몰까지 하지 않았다면, 공공성 의식이 없는 패거리주의라는 '시장 논리'에만 모든 걸 맡겨 두었다. 5공 시절 차관급 이상 관료 155명 중 43.6%인 67명이 경상도 출신(호남 출신은 9.6%)이었으며, 6공시 영남 출신은 전 각료의 48%, 차관급에서 60%에 이르렀다. 또 어느 부처를 막론하고 주요 실국장 등 요직은 대부분 대구·경북 출신이 차지했고, 특히 청와대와 검찰은 영남 출신이 거의 독점했다."(227-9)


맺는말 한국인의 '정치와의 전쟁'


"다수 한국인들은 광주학살과 호남 차별 문제를 '김대중'으로 의인화시키는 데에 공모했다. 호남인들 역시 그들의 한(恨)을 '김대중'으로 의인화하였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호남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실적 방안에 주력했던 반면,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에게 다급한 건 자신들도 잘 깨닫지 못하는 일종의 면책 심리였다. 그들에게 한동안 '정치와의 전쟁'은 상당 부분 '김대중과의 전쟁'이기도 했다. 비호남 다수 한국인들은 정권을 잡기 위한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의 음모와 공작 수준의 것으로 폄하하고 매도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아니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을 핑계 삼아 자신들의 군사독재 정권 지지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조갑제의 논리를 원용하자면, 김대중의 욕심과 정략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보는 자신들의 눈을 '다소 맑게 해주었다'는 자기 기만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273-4)


"정의와 풍요는 결코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가지 않는다." "아울러 기득권은 막강한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건 아니다. 80년대의 불의와 모순에 순응하고 타협했던 사람들에게도 최소한 '정서적 기득권'이라는 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정서적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맹목적인 당파성은 80년대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광주의 피로 얼룩진 80년대는 모든 걸 뒤틀어지게 만들어 버렸으며, 변화의 원동력이라 할 정치를 시궁창에 처넣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우리가 80년대에 이룬 경제적 업적과 성과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그걸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그 이면의 고통과 희생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국민화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전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80년대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최대의 교훈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제대로 깨닫는 일일 것이다."(2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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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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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대통령 직선제를 향하여 / 1986년


"직선제 개헌투쟁을 위해 뭉친 신민당과 재야단체 간의 합의가 깨진 것을 두고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주화연합은 대중동원을 통한 협상테이블을 여는 데 성공했으나 협상의 정치가 열리자마자 각기 다른 민주화 전략의 차이로 연합은 해체되었다. 이러한 민주화연합의 분열은 5·3 인천사태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5월 3일의 직선제 개헌추진을 위한 인천대회는 4월 30일의 타협이 이뤄지기 전에 예정된 것이었다. 타협이 이루어지자 신민당은 대회의 규모를 축소하고 대회를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이끌어낸 성공을 자축하는 축제로 이끌어가려고 한 데 반해, 사회운동 세력은 신민당과 정권간의 보수대연합 움직임에 쐐기를 박기 위한 선제공격의 기회로 이용하려 하였다. 사회운동 세력은 직선제 개헌투쟁이라는 신민당 주도의 민주화를 거부하고 현정권 타도와 민중의 권력을 창출할 수 있는 민중민주헌법의 제정을 요구하는 최대강령주의 전략을 고수했다.〉"(28)


"19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의 경기·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는 바로 그런 배경을 깔고 있었다. 신민당의 집회를 1시간 앞두고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다. 신민당이 개헌 현판식을 하기 위해 시민회관에서부터 신민당 인천시지부까지 행진할 계획이었는데, 그러한 폭력 사태로 인해 신민당 총재 이민우, 상임고문 김영삼 등은 최루탄에 범벅이 되어 시민회관 밖으로 몰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국의 조직적 유도와 일부 언론의 왜곡보도가 없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인천사태는 급진좌경 세력에 의한 '민중봉기'로 비춰지게 되었다.〉" "공안당국은 5·3 인천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의 반정부 폭력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물론 재야 세력에 대한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은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 및 학생운동 진영의 제휴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도였다."(28-31)


"1986년 6월 4일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학생 권인숙은 위장 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경기도 부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5·3 인천사태 관련 수배자들의 소재를 집중 추궁하던 담당 형사 문귀동으로부터 6월 6일과 7일 두 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했다." "7월 16일 검찰은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전두환 정권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운동권이 마침내 성까지 혁명의 도구화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언론에겐 보도지침을 통해 '부천서 성폭행 사건'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부천서 사건'이라고 보도할 것을 지시했다.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언론의 부도덕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언론은 인권단체와 시민단체들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하고 검찰에서 배포한 '보도 자료'와 군사정권의 '보도지침'에 따른 왜곡된 보도만을 내놓았다."(37-9)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한 광범위한 통제와 포섭으로도 모자라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매일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내 사실상 언론의 제작까지 전담하고자 하는 기이한 작태를 연출하였다. 후일 밝혀진 바에 따르면,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은 실제로는 청와대 정무비서실 지휘하에 있었다." "정대수는 이 보도지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제도언론(신문)은 취재한 뉴스의 비중이나 보도 가치에 구애됨이 없이 '절대 불가'면 기사를 주저없이 빼고, '불가'면 조금 미련을 갖다가 버리며, '가'면 안심하고 서둘러 실었다. 이같은 빈틈없는 지시와 충실한 이행과정 속에서 당시 상황은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둔갑하는가 하면, '작은 것이 큰 것으로, 큰 것이 작은 것으로' 뒤바뀌는 어이없는 대중조작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던 실로 미개 사회의 암흑을 방불케 했다.〉"(47-8)


"1986년 10월 28일 오후 1시부터 건국대 민주광장에선 전국의 29개 대학 학생 2천여 명이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발족식을 열었다. 3시 20분쯤 학생들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나카소네 일본 수상 등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학교 주변에 포위하고 있던 1천5백여 명의 경찰들이 불시에 최루탄을 난사하며 밀려들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섰으나 힘에 밀려 건물 안으로 피신하였고, 경찰은 건물을 에워싸고 물샐틈없는 경비를 폈다. 이런 상황이 되자 학생들은 건물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학교측은 학생들이 '안전한 귀가를 보장하면 자진 해산하겠다'는 입장이라며 경찰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전두환 정권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언론을 동원해 학생들을 '친북 공산혁명분자'로 매도하였다. 학생들이 단수와 단전 그리고 초겨울의 한파를 버텨내며 농성에 돌입한 지 나흘째 되던 31일, ‘황소 31 입체작전’이라 명명한 대규모 진압작전이 펼쳐졌다."(90)


# 단일 사건으로 1290명 구속이라는 세계 기록 달성


11월 5일 돌연 발표된 "김대중의 불출마 선언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전두환은 11월 7일에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해 대선에서 이 불출마 선언은 대통령 후보 김대중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었다. 그의 정적(政敵)들이 김대중을 '거짓말 잘하는 정치인'으로 매도하는 데 이 선언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김영삼은 그런 추궁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김영삼도 85년 3월 7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다〉고 말했으며, 그 이후로도〈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여러 번 되풀이했다. 또 김영삼은 서독에서의 발언에서도 〈'당신이 나이도 위이고 하니 사면복권이 되면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겠다'고 얘기했으며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후 계속 불출마 발언 번복의 장본인으로 김대중만 지목되었다."(106-8)


8장 6월항쟁과 대통령 선거 / 1987년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진 후 3월 13일 하원에 전달된 정책교서에서 레이건은 '미국 정부는 친소좌익 정권의 독재자는 물론 반공친미 독재자에게도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요컨대, '독재정권'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만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전술을 적용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한국에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점차 가열되어 동북아의 보수적인 지배구조가 흔들릴 조짐을 보이자 이른바 '보수대연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레이건 집권2기의 제3세계 정책인 친미(親美)의 범위 내에서 '민주적 변화'를 추구한다는 신개입주의의 한국적 적용이었다. 그리하여 슐츠, 시거, 솔라즈 등 국무부의 고위관리들이 수차례 한국을 방문해 전두환 정권에게 '보수대연합'을 종용하였다. 이른바 '이민우 구상'도 바로 그런 '보수대연합'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나, 이는 '국민적 민주열망에 의해 와해'되고 말았다."(138-9)


"6·10 항쟁에서도 4·19 혁명 때처럼 한 장의 사진이 큰 기여를 하였다.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 중이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탄(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다."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출정식을 갖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하여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도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후 6시경에는 학생과 야당의원들이 노상 규탄대회를 열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했고, 가두시위를 벌이다 경찰에게 쫓기던 학생 1천여 명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후 명동성당은 6월항쟁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이 날의 시위는 전국 514곳에서 연인원 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는데, 경찰은 이 날의 국민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에 나섰지만, 국민들의 성난 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157-9)


"범국민적인 항쟁의 결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이른바 '6·29 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민정당 대표위원 노태우는 6월 29일 기자회견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폭탄선언'을 하였다. 전두환에게 건의 형식으로 제안된 이 선언에서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외에 김대중 사면·복권 및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관련 사범의 석방, 대통령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 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당시 노태우는 광주학살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고 했지만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에 철회했다." "그건 아주 잘 꾸며진 한 편의 '쇼'였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만든 각본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전두환이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조치를 취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 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171-2)


"12월 16일 대선을 2주일여 앞둔 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경, 대한항공 소속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근해 안다만 해역에서 공중 폭발해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비행기는 전날 밤 11시 27분(현지시각)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 아랍에미리트의 수도인 아부다비를 기착한 뒤 방콕을 향하던 중이었다. 29일 오후 2시 1분경 이 비행기는 미얀마의 뱅골만 상공인 어디스에서 방콕공항으로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 비행 중 이상은 없다〉는 무선보고를 하였으나, 그로부터 4분 후에 그런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12월 1일 바레인에 머물던 용의자들은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가 위조여권이 적발되어 붙잡혔다. 이 순간 이들은 담배 필터 속에 숨겨둔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 이로 인해 남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지만, 여자는 바레인 여자 경찰관의 날렵한 동작으로 인해 미처 치사량을 삼키기도 전에 담배를 빼앗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204-5)


"하치마 마유미라는 가명으로 KAL 858편에 탑승, 폭발물을 설치했던 김현희에 따르면 김정일은 1987년 10월 7일 이들에게 〈88올림픽 참가 신청 방해를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를 폭파하라〉고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11월 10일에 〈11월 28일 23시 30분 바그다드발 서울행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하라〉는 최종 지령을 받았다. 이들은 라디오에 시한폭탄과 액체 폭약을 몰래 숨겨 탑승해 9시간 뒤에 폭발하도록 장치한 후 기착지인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소련에 이어 중국까지 서울올림픽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느낀 북한의 내부 국면 전환용으로 기도한 사건이었던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또 이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하필이면 김현희가 서울로 이송된 날이 선거 하루 전인 12월 15일이었다."(207)


"1987년 7월 17일엔 김대중의 계보조직인 민권회가 '11·5 불출마 선언' 백지화를 결의함으로써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가 기정사실화 되었다. 김대중은 8월 8일 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고문에 취임하였다. 양김은 8월 11일 회동을 갖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209-10) "10월 27일 거행된 국민투표에서 신헌법은 93.1%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다음날 김영삼은 〈당총재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김대중에게) 경선을 제의했으나 이를 거부한 것은 국민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며 자신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김대중은 10월 30일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과 함께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11월 12일 평화민주당(평민당)의 총재 및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민주당은 11월 9일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이 임시전당대회에선 전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영입돼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다."(214)


# 13대 대통령 선거 득표율 :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


"87년 대선은 지역주의가 강하게 드러난 선거였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그건 5공 정권의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부추겨진 것이었다." "후일, 『조선일보』 기자 방준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김영삼 후보의 광주 유세 때 돌멩이를 투척해 지역감정을 부추긴 사건, 당시 이 공작을 주도한 사람은 H처장(준장)이었다. 그는 보안사 내에서 '흑색 선전의 귀재'로 불리는 사람으로 80년 광주사태 때 전두환 사령관의 특명을 받고 전남도청에 있던 폭약의 뇌관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H씨는 87년 대선 때 보안사 본부에서 김모 소령을 광주에 직접 내려보내 '돌멩이 투척 사건'을 지휘하도록 했다. 한 보안사 장교는 '이상하리만큼 YS를 집중 공략했었다'고 말했다.〉" "중요한 건 텔레비전이었다. 그런 폭력 사태가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의 안방에 전달되었을 때 유권자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233-5)


"두말할 필요 없이 87년 대선에선 텔레비전이 큰 영향을 미쳤다. 노태우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비호남인으로 늦게 결정한 사람들이 많았고, 텔레비전을 정보원으로 비교적 더 많이 활용하였으며, 텔레비전의 영향은 노태우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KBS와 MBC가 오직 노태우의 이미지 메이킹만을 위해 기능했다면 문제는 덜했겠지만,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투표가 임박한 시기에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와 함께 캄보디아·월남의 공산화와 필리핀의 사회 혼란을 다룬 프로를 집중 방영하였으며, 『TV 특강-민중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프로그램을 여러 차례에 걸쳐 방영하였다. 아니 그런 이데올로기 공세를 하는 데에만 머물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호남인을 과격·체제 전복세력으로 반복 선전하여 타지역에) 반(反)호남 정서를 유포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었다."(238-40)


9장 서울올림픽의 빛과 그림자 / 1988년


"전두환 정권하에서 전 정권의 정당화와 예찬에 가장 앞장섰으며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에도 크게 기여한 『조선일보』가 80년대에 가장 큰 성장을 했다는 건, 권언유착이 신문의 성장과 직결된다고 하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80년 매출액에 있어서 『조선일보』는 161억 원으로 『동아일보』(265억 원)와 『한국일보』(217억 원)에 비해 한참 뒤처지는 신문이었다. 그러나 5공을 거치고 난 88년에 이르러 『조선일보』의 매출액은 914억 원으로 『동아일보』(885억 원)와 『한국일보』(713억 원)를 압도하게 되었다. 권언유착을 신문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아 재미를 본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권력 창출에 앞장서는 '정치 신문'으로서 가능하게 되었다." "후일 90년대까지 『조선일보』는 자사 기자 출신으로 14명의 장관을 배출할 정도로 정언(政言) 분리를 하지 않는 강한 당파성을 가진 신문이었으며, 이 나라를 정쟁(政爭)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다."(261-3)


"7월 7일 노태우는 6공화국의 주요 외교 이념이라 할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7·7선언'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공동번영을 모색하고, 이를 대전제로 '북방외교'를 추진함으로써 '북한과 한국의 우방들 간의 관계 개선을 적극 도우며, 동시에 한국도 중·소 등 공산국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가겠다'는 것이었다. 7·7 선언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88년 상반기 학생들과 재야 단체의 올림픽 공동개최 투쟁으로 인해 통일 열기가 확산되는 가운데 노태우 정부는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유도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즉, 7·7 선언으로 대표되는 북방외교로 공산주의 국가들의 올림픽 참여에 방해가 되는 정치적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계산이었다."(281-2)


"노태우 정부는 '7·7 선언'의 후속 조치로 대북 비난 방송의 전면 중지, 통일 논의의 제한적 허용, 북한 관계 자료의 부분적 공개, 북한 외교관과의 적극적 접촉 허용, 북한과의 교역에 대비한 대북 경제조치 등을 발표하였다. 노태우는 더 나아가 8·15 경축사와 10월 18일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 행한 유엔 연설을 통해 '남북불가침선언'을 비롯하여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 군축,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의 증진 방안 등을 논의하기 위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였다. 그와 동시에 '동북아 6개국 평화협의회의 구성'과 '비무장지대 내 평화촌 건설' 그리고 '남·북한 무력불사용 원칙' 등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노태우의 이런 모든 선언은 '쇼'였음이 곧 드러나게 된다. 이 일련의 선언들에 고무돼 다음해 방북을 한 인사들에 대해 가혹한 탄압을 하면서 온 나라를 살벌한 공안정국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284)


"소련, 동독, 미국에 이어 4위를 차지한 〈올림픽은 우리 국민의 위대한 저력을 보여줘 자존심, 자부심, 미래의 가능성을 심어주고 성숙시켜 주었다. 올림픽 이후 고양될 국민의 자부심,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의 쿠데타와 극렬 좌경세력의 민중혁명을 있을 수 없게 할 것이다.〉 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일을 맞아 김영삼이 한 발언이다. 여론은 김영삼의 견해를 뒷받침해주었다. 올림픽 폐막 직후인 10월 4일 한국갤럽조사연구소는 '서울올림픽에 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는데, 이에 따르면 한국인의 95.4%가 올림픽을 잘 치렀다고 응답했다.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는 한국의 이미지 개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걸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불안한 분단국'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라는 이미지를 털어냈고,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비수교국이었던 32개국이 참석해 외교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308-9)


"88년 11월 23일 전두환 부부의 백담사 '유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5공 청산' 신호탄이었지만, 어찌됐건 공식적으론 전두환 정권이 청산의 대상이라는 걸 상징적으로 선언하는 의미에서 민주화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물론 언론도 어설픈 하이에나가 되어 그 분위기에 엉거주춤 편승하였다. 전두환의 백담사행을 전후로 하여 언론청문회가 개최되었다. 국회 문공위(위원장 정대철·평민당) 주관으로 11월 21, 22일, 그리고 12월 12, 13, 31일 등 5일 간에 걸쳐 열린 청문회는 신군부에 의한 80년 언론학살과 5공의 언론탄압 및 통제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일정 성과를 거두었지만 언론사주들의 '오리발 작전'으로 모든 걸 속속들이 파헤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청문회가 5공 비리를 속시원하게 밝히기에 역부족이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비리를 밝혀내야 할 청문회 의원들이 (재벌들에게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또다른 비리와 연루돼 있었기 때문이다."(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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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2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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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충성경쟁과 마법의 주문 '86·88' / 1981년


"5공은 정치권을 떡 주무르듯이 하기 위해 '관제야당' 설립을 꿈꾸었다. 그런 음모의 일환으로 1980년 11월 12일 국보위는 10대 국회의원 835명을 정치규제 대상자로 발표했다. 이들 가운데 569명이 재심을 청구했고 그 가운데 268명이 구제됐다. 정치인들이 재심을 청구해 규제대상에서 풀린다는 건 5공에 대한 협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군부의 이런 조치는 관제야당 창당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전두환은 1981년 1월 15일 자신을 총재로 한 민주정의당(민정당)을 창당하였으며, 이로부터 2일 뒤 유치송을 총재로 한 민주한국당, 1월 23일에는 김종철을 총재로 '공화당 이념을 계승'한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아니 정권이 야당을 창당하다니! 그러나 그건 엄연한 사실이었다. 민한당과 국민당은 '관제야당'이었기 때문에, 정가에서는 '1대대(민정당) 2중대(민한당) 3소대(국민당)'이라는 말이 떠돌았다."(17)


"광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정권은 피로 얼룩진 정권 이미지에 부드러운 가면을 씌우고 국민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각종 화려한 이베트와 조치를 양산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1년 5월 28일부터 6월 1일까지 5일간 열린 '국풍 81'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조작 이벤트였다. 일본의 극우에 심취한 허문도가 일본의 가미카제 정신을 본따 이름을 붙이고 적극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도 '국풍'(國風)이었다. 그 정신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은 젊은이들의 행렬이나 배의 노를 합심해 젓는 그림 등으로 모자이크된 포스터가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어용화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한 이 행사는 행사장인 여의도를 통행금지까지 해제시켜가면서 유사 이래 가장 거대한 '놀자판'으로 만들었다. 아니 '난장판'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48-9)


"서울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개최도시로 선정된 직후부터, 전두환정권에게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였다. 아니 '전가의 보도'였다. '86· 88'은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를 보도한 『조선일보』 81년 10월 2일자가 주장했듯이, 올림픽은 '민족우수성 과시, 국제적 위치 입증, 세계 속의 한국부각'의 기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반민주적이고 억압적인 조치들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후일(86년) 『말』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86은 88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소위 제5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86·88'은 현정권이 통치명분으로 내세운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 야릇한 관제 조어(造語)는 관제 매스컴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선전되면서 대중세뇌의 핵으로 등장하여 대중을 그야말로 '입만 벙긋하면 86·88'을 읊조리는 백치와 같은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65)


"전두환 정권은 대학 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조사한 다음, 곧바로 군대에 입영시켰다. 신체검사를 통하여 신체상의 결격사유 학생들마저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혔으면 입영시켰으며, 입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도 입영시켰다. 이들 강제징집자들은 '순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 낙인이 신상카드에 찍혀서 군 수사기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돼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제대를 앞둔 강제징집자들에겐 '녹화사업'이라는 가공할 만한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물을 빼고 푸른 물을 들이는 순화작업'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심사를 통해 활용가치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퇴계로의 진양상가 분실에서 교육을 시킨 뒤 대학가의 동향을 파악해 보고하도록 했다."(70-2)


"녹화사업에 따라 강제징집자들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성장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대한 분량의 자술서를 작성하고, 이를 통해 의식화의 정도를 측정받으며, 이후 체제를 긍정하도록 보름에서 두 달 간 이른바 '역의식화' 교육을 받게 되었다. 더욱 악랄한 것은 보안사가 이 작업 이후 그러한 교육성과의 검증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에게 이른바 '프락치' 임무를 맡기는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녹화사업으로 인해 사망자가 잇달아 발생하자 84년 3월에 열린 제적생과 해직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이것은 곧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었는데, 결국 정부는 여론에 밀려 84년 9월 '소요관련 대학생 조기입영제'를 폐지하고 녹화사업을 전담했던 보안사 3처5과를 해체하고 사업을 공식 중단했다. 그러나 녹화사업과 학원프락치 공작은 6공정부에 이르기까지 비밀리에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72-3)


3장 밤의 자유와 프로야구에 취해 / 1982년


"1945년 9월 7일 미군정 치하에서 미군사령관 하지의 군정포고 1호로 시작된 통행금지가 그로부터 36년만인 1982년 1월 5일 밤 12시를 기해 전방 접경지역과 후방 해안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해제되었다.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자, 국민들은 해방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해방감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발길이 자정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야간통금에 구애받지 않았던 경찰, 군인, 기자들의 특권이 사라졌다. 보통사람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 31일 제야(除夜)였다. 이 때만 되면 사람들은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통행금지 해제는 1년 365일의 '크리스마스화' 또는 '제야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와 같았으니, 통금이 해제되었을 때 사람들이 느낀 흥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83-5) 


"통금해제가 가져다준 해방감은 민주화 쪽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통금이 해제된 후,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건 본격적인 밤문화와 성적 욕망의 배설구들이었다."(87-8) "그랬다. 많은 사람들에게 해방감은 꼭 정치적 해방감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런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탱크로 광주를 깔아뭉개며 등장한 전두환정권은 폭압과 자유화라는 양날의 정책을 썼다. 교복과 통행금지 폐지 그리고 두발 자유화는 전두환정권의 선물이다. 충무로에 대한 전두환정권의 선물은 에로영화에 대한 검열 완화였다. ····· 당시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낮에는 전두환의 폭압정치에 맞서 돌을 던지고 밤에는 전두환의 자유화정책에 발맞춰 싸구려 에로영화를 보며 킬킬댔던 것이다.〉"(90-1)


"〈어린이에게 꿈을, 젊은이에게 정열을, 온 국민에게는 건전한 여가선용을!〉 이런 슬로건을 내세운 프로야구가 82년 3월 23일 출범했다. 5공이 '스포츠공화국'임을 입증하겠다는 듯 올림픽 유치와 더불어 야심작으로 내놓은 작품이었다. 이미 3일 전인 3월 20일, 5공은 체육부를 신설하고 장관에 5공의 제2인자라 할 노태우, 차관에 이영호를 임명하였다.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전두환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경기로 첫발을 뗀 프로야구는 개막전부터 관중석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프로야구 출범이 전두환의 지엄한 명령이긴 했지만, 재원마련이 문제였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우병규와 마산상고 동기이던 전 MBC 해설위원 이호헌은 우병규로부터 프로야구 출범안을 문의받고, 정부가 돈 한푼 들이지 않은 채 프로야구를 출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기업들이 야구단 운영을 맡는 방법이었다."(104-5)


4장 '땡전뉴스'가 대변한 '전두환 공화국' / 1983년


"2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69명(미국인 51명, 일본인 28명 포함)을 태우고 뉴욕에서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KAL) 정기여객기 007편은 중간 귀착지인 앵커리지 공항을 8월 31일 밤 9시 58분에 이륙한 직후부터 조금씩 우측(북쪽)으로 항로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KAL 007기는 소련영공을 침범해 세 시간 가까이 비행하다 소련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선 어떻게 받아들여졌던가? 놀랍게도 이 사건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겐 엄청난 행운으로 작용했다. 레이건이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강조한 바 있는 국가안보상의 '위기'가 현실로 입증된 듯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KAL기 격추 이전 MX미사일과 빅아이(BIGEYE)라고 하는 독가스 무기의 생산에 대한 미 의회의 견해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KAL기 격추사건은 미 의회의 반대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핵무기 감축마저도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152-5)


"이 비극적인 사건은 엉뚱하게도 5공치하에서 방송이 얼마나 권력의 주구로 유린됐는지를 웅변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자국민 수백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인데도 그게 톱뉴스가 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5공치하에서 신문과 방송은 5공정권 홍보와 미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런 일에 신문에게 선두자리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방송사들의 맹활약은 이른바 '땡전 뉴스'(또는 '뚜뚜전 뉴스')로 나타났다." "〈유린된 방송을 상징하는 사건 중의 하나를 살펴보면, 방송들은 83년 KAL기 실종 뉴스와 대통령 동정 중 어느 것을 톱뉴스로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결국 한 방송사에서는 뚜뚜··· 하는 신호음에 뒤이어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 ·····' 하고 뉴스를 시작하고 말았다. 그 TV 화면에 전씨가 서울 어느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를 하는 모습이 비쳤다. 뉴스시간에 뉴스는 뒤로 밀리고 권력이 판을 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156-7)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에서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이 발생했다. 애초에 17박 18일로 계획되었던 전두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길에는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판에 미얀마가 추가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미얀마 방문은 외무부가 아닌 다른 정부기관의 지시에 의해 추가되고 준비되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미얀마는 여러모로 남한의 대통령이 방문할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비록 남북한 동시수교를 하고 있었지만, 남한과는 별다른 거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쪽에 편향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얀마 순방계획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당시 5공의 핵심부가 미얀마의 통치체제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었다고 증언했다. 그 통치체제란 바로 『정권교체준비연구』에 나타난 섭정식 영구집권체제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 바로 미얀마체제였던 것이다."(163)


"1983년 12월 21일 전두환정권은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른바 유화(宥和)정책이었다." "학원자율화 조치는 우선 당장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병력이 철수하는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100명 가까운 해직교수와 1천3백여 명의 시국관련 제적생을 복직, 복학시켜줌으로써 사람들을 적지않이 헷갈리게 했다. 전두환 정권의 준비도 제법 치밀했다. 전정권의 지시를 받은 대학은 학생선도위원회와 홍보위원회를 설치하여 학생시위에 대처키로 했다." 그러나 모든 게 전정권의 뜻대로 돌아가진 않았다.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결성되고 "대학에 자율적인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광주문제가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광주문제는 지하유인물 형식이나, 구전형식으로만 전해졌었다. 그러다가 84년 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보다 체계적이고 시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광주민주화운동 알리기에 나선 것이다."(171-3)


5장 저항의 불꽃은 타오르고 / 1984년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노동조건을 개선해보려고 애쓰기는커녕 오히려 대학출신의 노동자 및 민주노조 운동 경력이 있는 운동가들을 노동현장에서 쫓아낸다는 목적 아래 84년부터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각 단위사업장에 배포했다. 이 '블랙리스트'는 정부는 물론이고 기업, 노동부, 국가정보기관이 힘을 합해 작성한 것으로서, 125개 사업장의 해고자 681명, 복직자 60명, 재취업자 57명에 대한 신상명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조사, 정리한 것이었다 후일(87년 10월 27일)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와 인천지역 해고노동자협의회가 공개한 또다른 '블랙리스트'에는 78년의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124명과 태창섬유, YH무역 등에서 해고된 노동자 1662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이 '블랙리스트'로 인해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원천적으로 취업할 수 없었으며, 사업장에서는 불법적인 해고가 자행되었다."(182)


"얼굴 없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83년 황지우, 김정환, 김사인 등이 꾸려가고 있던 동인지 『시와 경제』 2호에 〈시다의 꿈〉, 〈하늘〉, 〈그리움〉 등 총 6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박노해의 등장에 대해 최재봉은 이렇게 말한다. 〈박노해의 노동시들은 특히 민중문학 진영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의 시를 접한 많은 지식인 문인들은 어쩔 수 없는 위축감을 맛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체험의 직접성이 가져온 충격이자 위축이었다. 채광석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민중주의자들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저주하면서 노동자계급에의 복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반드시 그들과 같은 견해를 지니지 않은 이들일지라도 지식인문학의 한계와 위선에 대한 반성은 시대의 유행과도 같았다.〉"(205-6)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이 나온 지 한 달 후인 1984년 10월엔 이문열의 『영웅시대』가 나왔다. 박노해는 노동자들의 한을 토로했던 반면, 이문열은 '선진조국'과 '번영의 조국'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였다."(210)


6장 탄압과 고문의 광기 속에서 / 1985년


"양 김씨는 2·12 총선을 불과 20여일 앞둔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열고 신민당(신한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선거 4일 전에는 미국에 사실상 망명중이던 김대중이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신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 '국정감사권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및 노동관계법 개폐' 등의 선거공약을 확정하고 창당 25일 만에 총선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에 대해 임혁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2월 12일의 총선은 사회운동세력들의 전략적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일단 선거유세가 시작되자마자 유세장은 정권에 의해서 금기되어왔던 언어가 분출하는 공간으로 화하였다. 집권자의 광주학살 관련, 영부인의 금융스캔들 관련 사실이 공개적으로 신당후보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기존의 충성스런 야당들은 '1중대, 2중대, 3중대'라는 언어로 비하되었다. 선거공간은 반대세력의 언술의 경계를 넓혀주었고, 2·12 총선을 개별 국회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에 대한 국민투표로 변모시켰다.〉"(223)


"2·12 총선은 11대 때의 78.4%를 훨씬 상회하는 84.2%의 높은 투표율을 보이면서 〈5·16 이후 최대 투표율〉이라는 기록을 남긴 가운데 신민당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신민당이 관제야당 민한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함으로써 민한당 의원들은 대거 신민당에 입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선거 결과에 민정당만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게 아니었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건 신군부 중심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민주화로 기울고 있었다. 2·12 총선 후 그간 '민중민주운동협의회'와 '민주통일국민회의'로 갈라져 있던 사회운동의 통합이 급진전되어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으며, 1985년 하반기부터 민통련과 신민당은 광범위한 국민 대중의 지지와 참여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개헌투쟁에 임하게 되었다."(224-5)


"2·12 총선에서 분 신민당 바람엔 학생들의 적극적인 총선참여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학생들은 2·12 총선에 영향을 미친 동시에 역으로 2·12 총선결과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2·12 총선 후 대학가엔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선거열풍이 몰아쳤는데, 이에 대해 이경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총학생회 구성의 하이라이트는 후보자들의 합동유세였다. 후보들은 '강력한 민주투쟁'과 '학내문제의 우선해결'로 정견이 갈라졌으나 대체로 강력한 민주투쟁론자들이 당선되었다. 그것은 학원의 민주화투쟁이 격렬해지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학생세력 연합도 모색되었다. (···) 4월 17일 고려대에서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 결성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대통령의 방미성토대회를 갖고 '현정권에 보내는 경고장'을 채택하며 '매국방미 결사반대' '수입개방 결사반대' '경제종속 결사반대' '군부독재 퇴진하라'는 등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였다.〉"(231-2)


"전두환은 정치헌금을 뻔뻔하게 받는 걸로 유명했는데, 재계 순위 6위이던 국제그룹 해체 이후 재계에 공포 분위기가 감돌면서 정치헌금이 잘 걷혔다." "그렇게 돈을 뜯긴 재벌들은 노동자들로부터 그 몫을 짜내야 했고 노동자들이 저항하면 그 때엔 돈 받은 정권이 나서서 해결해주었다. 5공은 '조폭정권'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의 공격적인 정치자금 수금은 사실상 자신의 평생집권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10월 아웅산사건 때 희생된 유족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추진된 일해재단이 전두환의 퇴임 후 위상과 관련된 연구소로 탈바꿈한 사실 자체가 그걸 잘 말해준다." "국제그룹 해체의 의미에 대해 김호진은 이렇게 분석한다. 〈자본가계급은 이러한 전(全)정권의 강압정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정부정책에 순응하고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것은 곧 재벌이 전정권과 지배연합을 형성하고 정경유착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246-8)


"1985년 5월부터 광주문제는 민주화세력의 본격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성명서를 낸 데 이어 5월 23일 12시 서울대 학생 함운경을 포함한 73명의 학생들은 미문화원 2층 도서관을 72시간 동안 점거해 농성을 벌였다. 이는 82년 3월 18일 문부식을 비롯한 부산 고신대생들에 의해 이뤄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에 뒤이은 것으로 광주학살을 외면하고 신군부를 지지한 미국에 대한 항거이자 응징이었다."(259) "이 점거사건은 당사자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두환정권은 이 기회에 여론으로부터 학생운동을 격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 사건을 언론을 통하여 크게 부각시켰지만, 오히려 이러한 언론의 대서특필은 국민들로 하여금 광주학살과 미국이 관련 가능성을 깨닫게 하는 역반응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순히 학생들에게만 반향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미국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262)


"1984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운동은 1985년 4월 10일 '노동운동탄압 저지투쟁위원회'(노투)가 결성돼 지역단위 투쟁조직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서 지역적 연대와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6월 1일에는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구민연)이 결성되었다. 그러한 노동운동의 성과를 근거로 85년 6월 24일부터 일주일에 걸쳐 이른바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다. 구로동맹파업은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본격적인 동맹파업이었다. 이 동맹파업은 개별기업 단위의 노동조합주의, 조직보존주의를 뛰어넘는 연대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초보적이기는 하나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노동대중 스스로의 조직적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차원의 노동운동이 탄생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8월 25일에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이 창립되면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과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283)


"1985년 10월 29일 5공정권은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학생들의 지하단체인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라는 조직이 있음을 밝혀냈으며, 이 단체의 위원장 문용식(26, 서울대 국사학과 졸)과 문용식의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 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흔히 '깃발사건'(혹은 민추위 사건)으로 불려져 왔는데, 이는 민추위가 내세운 '노학연대'로 인해 학생운동이 노동운동으로 비화될 것을 우려한 5공정권이 급조해낸 것이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고문을 당했으며, 이후에도 민청련이 배후 조종세력으로 몰려 김근태 등이 혹독한 고문을 당했고 서울대생 박종철은 이 사건의 마지막 수배자인 박종운을 하숙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물고문을 받다가 숨지는 비극을 겪게 된다."(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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