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 -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ㅣ 한국 현대사 산책 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평점 :
3장 병영국가의 건설 / 1961년
"군사정권은 민심의 호응을 얻기 위해 포퓰리즘 수법을 동원하였다. 물론 일시적인 이벤트로서의 포퓰리즘이었다. 법치(法治)니 인권(人權)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들도 많았지만, 이 당시의 한국 사회가 그걸 따질 수준이나 조건이 아니었기에 그마저도 박수를 받았다. 법을 밟고 서 있는 군사정권으로선 아주 쉬운 일이었다. 민심이 불만을 느꼈을 법한 세력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4·19를 촉발시킨 데에 책임 있는 자유당 사람들과 그 시절의 부정축재자들, 그리고 혁신계 인사들까지 '용공'의 올가미를 씌워 감옥이 미어터지도록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13) "5월 23일에 사람들을 가장 감동시킨 건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정화' 방안의 발표였을 것이다. 이 조치의 결과, 전국 916개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39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이 남게 되었다."(15-6)
"군사정권의 청교도적 접근방법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440명의 뚜쟁이를 체포하고 4천 411명의 매춘부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조치도 보기에 화끈했고, 수입 사치품들을 수거해 불태우는 데엔 10년 먹은 체증까지 내려가는 것 같았다. 또 군사정권은 도시 엘리트의 상류생활을 비난함으로써 풍요로부터 소외된 민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었다. 군사정권의 공무원들은 청교도적인 모범을 보여야 했다." "5월 29일 서울시 교육감은 과외수업과 교내외의 특별학습을 금지시켰다. '금지'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다방에도 (커피와 양담배 판매 불허라는) 사실상의 금지령이 떨어졌다." "6월 5일 치안당국은 떠돌이 고아들을 체포했는데 그 수가 보름 동안 1만여 명에 이르렀다. 6월 10일 내무부 산하에서만 첩을 둔 축첩(蓄妾) 공무원 510명이 쫓겨났다. 또 이날 최고회의는 최고회의법, 중앙정보부법, 농어촌고리채법을 공포했다."(17-9)
"5·16 쿠데타 한 달을 맞아 『경향신문』 6월 16일자는 한 면을 〈빛나는 혁명 한 달의 일지〉라는 제목의 특집을 마련했다. 이 특집의 서문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한 달 ····· 동안에 혁명정부가 이룩해 놓은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비록 짧은 한 달이나마 10여 년에 걸쳐 쌓인 부정과 부패는 깨끗이 씻겨져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신문들은 박정희의 지도자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언론플레이'에도 호응하였다. 『조선일보』 6월 27, 28일자엔 박정희의 특별기고 〈지도자도(指導者道)〉가 실렸다. 이 글에서 박정희는 〈우리나라 국민의 대부분은 강력한 타율에 지배받던 습성이 제2의 천성으로 변하여 자각, 자율, 책임감은 극도로 위축되어 버렸다〉고 진단했다. 이 점에 관한 박정희의 '철학'은 시종일관 '한국인은 두들겨 패야 말을 듣는다'는 일본인들의 신념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제2의 천성을 하루아침에 고칠 순 없으니 앞으로 강력한 타율을 행사하더라도 이해하라는 것이었다."(32-3)
"이상우는 5·16 군정은 '군인의 정치'인 동시에 '대학교수의 정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군정 동안은 군인과 대학교수라는 두 개의 아마추어 그룹이 이 나라의 정치를 좌우했던 시기였다. 군인들은 앞장을 서고 그 뒤에서 교수들이 머리를 제공했다. 대소의 국가정책으로부터 정당조직 새 헌법 제정 등 모든 작업이 '고문' '자문' '기획위원' '정책위원' 등등의 타이틀로 층층이 구축된 대학교수 그룹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인과 교수들의 아마추어 세력의 의해 추진된 국가 정책은 많은 실적과 함께 시행착오를 남겼다. 그리고 '어용'이라는 달갑잖은 풍조를 낳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4·19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들의 상당수가 쿠데타 정권에 참여하거나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사 사무엘 버거는 훗날(66년)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지식인들과 언론인, 그리고 정치인들이 쿠데타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좋은 일이었다고 느꼈다〉고 썼다."(40-1)
"군사정권은 61년 5월 16일 오후 8시를 기해 각급 지방의회를 해산하였다. 52년 4월 정략적 음모로 탄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걸음마 단계의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데에 필수적이었던 지방의회가 탄생 9년 1개월 만에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군사정권은 6월 6일 비상조치법 20조에 의거하여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 및 인구 15만 이상인 시의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승인을 얻어 내각이 임명하고 기타 지방자치단체장은 도지사가 임명하도록 했다. 9월 1일자로 공포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은 읍·면제를 폐지했다. 군사정권은 지방자치뿐만 아니라 농협이나 농지개량조합의 조합장 선거 등 자치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모조리 폐지하였다. '정치의 죽음'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박정희와 그 일행의 확고한 소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치를 낭비로 간주했다. 빈 자리의 상층부는 모두 군인들로 채워졌다."(54-5)
"기존의 정치를 대체한 건 중앙정보부였다. 1961년 6월 10일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법은 〈그 후의 이 나라 역사에 헌법만큼이나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으로서 대형(大兄)이 지배하는 병영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병영국가란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가 하는 식으로 국가안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 그 목표 완수를 위해 〈폭력의 전문가들이 대거 국가의 전략적 엘리트로 등장〉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중앙정보부는 그런 '폭력의 전문가'들이 모인 집단으로 그들은 폭력의 기획에서부터 행사까지 모든 걸 전담하는, 정부 위에 존재하는 비밀 정부로 군림하게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부장 김종필을 비롯하여 쿠데타 주체인 육사 8기생들의 독무대였는데, 이게 나중에 중앙정보부 자체가 치열한 권력투쟁의 무대로 변질되는 주요 이유가 되었다."(55)
"61년 7월 17일 조직된 경제재건촉진회는 한 달 후인 8월 16일 박정희가 지명한 이병철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한국경제인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68년 3월 28일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훗날 이병철은 자신의 묘석에 다른 이름이나 단체의 일을 한 것은 다 쓰지 않더라도 이 단체의 회장을 지낸 것은 새기도록 미리 밝혀두었을 정도로 이 단체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첫 번째 과업은 군사정권이 부과한 벌금에 대한 협상이었다. 이병철은 박정희를 만나 벌금을 현찰로 납부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공장을 지어 주식으로 납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이게 받아 들여졌다." "이는 군사정권이 '부정축재 처벌'에서 '부정축재 이용'으로 돌아섰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공장 헌납은 당초 금액의 5%에 불과한 벌금 지불로 둔갑하였다. 벌금은 깎이고 또 인플레 때문에 무의미하게 되었다."(80-1)
4장 구악(舊惡)을 뺨친 신악(新惡) / 1962년
"박정희는 1962년 2월 3일 열린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울산의 건설은 빈곤의 역사를 떨치고, 민족의 숙원인 부귀를 마련하기 위한 의지가 깃든 우리나라 공업화라는 거대한 작업의 첫 출발입니다. 서독 루르의 기적을 초월하고 신라의 영성(榮盛)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곧 민족 부흥의 터전을 닦는 것이며,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를 마련하고,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하는 민족적 궐기인 것입니다.〉 '신라의 영성'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하겠다는 것일까? 군사정권의 방식은 군사작전식이었다." "경제와 사회를 군사작전의 대상으로 삼는 군사문화엔 명암이 있었다. 군사문화는 '명령의 효율성에 대한 과신'과 더불어 '정치의 전쟁화'를 꾀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건 그 어떤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화끈하고 신속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군사문화는 한국 사회 곳곳에 스며들기 시작했다."(126-8)
"박정희는 62년 4월 29일 기자회견 석상에서는 〈자율적 정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부패 언론인의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경고했다." "6월 28일 군사정권은 새로운 '언론정책'을 내놓았다. 이 정책은 언론자유와 책임, 언론인의 품위와 자질, 언론기업의 건전성, 신문체제의 혁신, 언론정화 등 5개 항의 기본 방침과 20개 항의 세부 지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사정권은 입법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요했다. 이 정책으로 인해 신문발행 요건이 까다로워져 사실상 신규 언론사의 출현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하루에 두 번을 내던 조석간제가 조간 또는 석간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루에 한번 신문을 내는 단간제로 바뀌었고 일요일자 신문발행이 금지되었다."(145) "1962년 10월 13일 (살아남은) 신문들은 한국신문발행인협회를 만들어 신문 면수나 구독료, 광고료 등을 담합 결정하는 카르텔을 형성하였다."(148)
"군사정권이 언론을 강력 통제하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김종필의 중앙정보부는 63년에 치러질 대선을 염두에 두고 62년 1월부터 비밀리에 정당을 조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정치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그건 바로 '부정부패'였다. 증권·워커힐·새나라·빠찡꼬 등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이었다. 이건 언론이 침묵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문의 입에 재갈을 물렸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신당인 민주공화당은 1963년 2월 26일에 창당되지만, 4대 의혹 사건이 불거지게 된 건 62년부터였다. 워낙 가공할 부정부패라 덮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4대 의혹 사건은 박정희와 김종필의 합작품이었지만, 그 모든 책임은 김종필에게 돌아가게끔 되어 있었다. 나중에 김종필은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외유를 떠나게 되고, 그가 떠난 지 2주일 만인 63년 3월에 수사결과를 발표해 15명을 구속하지만, 그건 '정치 쇼'였다."(152)
# 4대 의혹
1. 증권 파동 :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주가조작 사건
2. 워커힐 : 워커힐 공사자금의 상당부분을 횡령한 사건
3. 새나라 자동차 : 일본산 소형차를 무관세로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비싼 값에 팔아넘긴 사건
4. 빠찡꼬 : 빠찡꼬 기계 수입 및 영업 허가 과정에서 돈을 챙긴 사건
5장 '권력투쟁'과 '색깔전쟁' / 1963년
"박정희는 10·15 대선 때까지 번의(飜意, 생각을 뒤집어 마음을 달리 먹음)에 번의를 거듭함으로써 〈변덕스러운 박씨〉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민주공화당 창당 대회 다음 날인 63년 2월 27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정치를 민간인에게 넘기고 대통령 출마를 않겠다는 이른바 2·27 선서라는 것을 하여 많은 사람들을 또 한번 감동시켰다. 박정희는 2월 27일 시민회관에서 3군 참모총장과 재야정치인 앞에서 자신의 민정 불참을 선언하는 이른바 2·27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3천여 명의 방청객이 현장에서 지켜보고 방송으로 중계된 선서식에서 박정희는 또 눈물을 흘렸고, 언론이나 정치인들은 군정이 종식되는 것처럼 흥분했다." "박정희의 눈물이 처음부터 의도된 '정치 쇼'였는지 그건 단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눈물로부터 20일이 지난 후에 '군정 4년 연장'이 나왔기 때문에 그리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178-9)
"박정희가 분야별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집필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은 〈혁명 기간에 지향하는 민주주의는 서구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해나가야 할 것인데, 그러한 민주주의는 다름 아닌 행정적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다. 이는 부패 일소, 민생고 해결,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과도기 단계에서는 민주주의를 정치적으로 달성할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한국화' '한국적 민주주의'와 교체 가능한 용어였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라는 빛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종국적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가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아세아에 있어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성패와 장래를 결정하게 될 유일한 관건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204-5)
"공화당(박정희)은 〈새 일꾼 바로 뽑아 황소같이 부려보자〉, 민정당(윤보선)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 잡자〉는 구호를 내걸었지만, 10·15 대선은 사상 논쟁이 지배한 선거였다." "9월 23일 박정희는 방송연설에서 〈이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대결〉이며,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의식의 확립 위에 외국의 주의·사상·정치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말했다. 9월 24일 윤보선은 전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여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으며 이번 선거야말로 이질적 사상과 민주사상의 대결〉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박정희 후보가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220-1)
"박정희는 사상논쟁에 대해 〈낡은 매카시즘의 찌꺼기〉라고 주장하면서 사실 관계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건 진상을 아는 왕년의 극우 인사들이 굳게 침묵하였거나 오히려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는 점이다. 원용덕이나 윤치영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는 한국의 극우가 색깔보다는 '힘의 관계'에 더 민감하다는 걸 말해준다." "윤보선 측이 색깔 공세에 맛을 들인 반면, 박정희 측은 영남 지역주의에 호소하는 수법을 썼다. 박정희는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는 '구악 일소' 등 개혁주의 메시지를 강조한 반면, 영남 지역에서는 지역성에 호소하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민정 이양 과정을 거치면서 박정희 주변에 경북 출신, 특히 경북고(전신은 대구고보) 출신 정치인들이 대거 몰려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박정희 측은 지역감정 선동과 더불어 윤보선을 '귀족'으로 몰고 박정희를 '서민'으로 부각시키는 민중주의 전략도 구사하였다."(225-7)
"'보수야당' 대 '진보여당'의 대결 구도는 지역주의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한의 진보 및 민족주의 세력은 쿠데타에 지지를 보내거나 적어도 저항은 하지 않았으며, 이 같은 호의적 태도는 63년 대통령 선거에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으며 나중에 민중운동에 헌신하게 되는 박현채 같은 이도 1963년에는 박정희에게 투표했다. 심지어 쿠데타권력에 의해 투옥 중이던 혁신계 인사들마저 면회 온 가족들에게 박정희를 찍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윤보선의 집요한 색깔 공세는 이미 박정희가 저지른 '혁신계 죽이기'마저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박정희는 윤보선 측의 색깔 공세에 대해 〈저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려한다〉고 분노했지만, 빨갱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거나 탄압하는 건 이제 곧 박정희의 특기로 자리 잡게 된다. 또 박정희를 지지했던 혁신계 인사들은 곧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236-7)
"수출산업 육성에서 한국이 비교우위를 자랑할 수 있는 건 싼 노동력뿐이었다. 정부가 기업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계속 싼 임금을 그대로 묶어주는 것이었고, 군사정권은 이에 적극 응했다. 군사정권은 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껍데기만 남아있던 노동절을 그 이름마저 '근로자의 날'로 바꿔 버렸다." "값싼 노동력만 있다고 수출산업 육성이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돈이 필요했다.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나라에는 차관을 줄 수 없다고 버텼고, 일본은 아직 국교 수립이 안 된 상태였다. 군사정권은 경제사절단을 서독에 파견해 차관 제공을 요청했다. 4천만 달러의 상업차관 제공이 결정되었다. 문제는 지급보증이었다. 이 문제는 서독에 인력수출을 하여 그들의 3년간 급여를 서독은행이 코메르츠방크에 매달 강제 예치하는 담보방식으로 해결하기로 하였다."(255-6)
# 1977년까지 광부와 간호사 총 1만 2천여 명 파견
6장 '민족 신앙'에서 '수출 신앙'으로 / 1964년
"4·19를 어떻게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의미의 투쟁'으로서 사실상 '권력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문제는 4·19 직후부터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5·16 주체세력은 4·19의 좋은 이미지만을 차용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4·19를 '4·19 의거'로 격하시키면서 그 수준으로만 묶어두려고 하였다. 그들의 4·19 이용은 '4·19 마케팅'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상품 판매를 위한 마케팅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4·19 찬양 수사(修辭)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지만, 그건 반드시 5·16의 '판매'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281-2) "박정희는 63년 9월 1일에 낸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는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4·19=5·16"이라는 등식이 "4·19<5·16"으로 바뀐 셈이다."(284)
군사 및 경제 원조를 무기 삼은 미국의 압력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은 "64년 3월 들어 한일회담을 재개하면서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비준' 방침을 밝혔지만, 그런 강행 의지만큼이나 강한 야당과 학생들의 반발이 폭발하고 있었다. 야당, 사회·종교·문화단체 대표 2백여 명은 3월 6일부터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구국선언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3월 24일, 4·19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서울에서 발생했다." "이후 시위는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고등학생 및 일반 시민들까지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 투쟁은 미국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미국 외교계의 실력자인 조지 케넌은 『뉴욕타임스』 64년 3월 25일자를 통해 〈우리는 이제까지 한일 양국뿐 아니라 자유세계 전체의 큰 이익이 될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희망하여 왔다〉고 말하고 한국의 반일 학생운동을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289-90)
"3월 28일 박정희 정권은 김종필의 귀국 조치와 함께, 그간 야당이 백지화를 요구해온, 한일회담 타결의 핵심으로 간주되던 비밀문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였다. 이는 62년 11월 12일에 중앙정보부 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작성된 메모였다. 메모의 내용은 한일회담 타결의 조건으로 일본이 한국에게 제공할 돈의 액수를 밝힌 것이었다. 무상공여 3억 달러, 유상공여 2억 달러, 상업 차관 1억 달러 등이었다. 이 메모는 기본적으로 한국이 요구해 온 청구권을 포기시키는 해결방식이었으며, 어업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상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철폐하는 것에 합의한 것이었다. 이 메모는 자금 제공의 명목에 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아 쌍방이 각자 그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청구권'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그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해석했다."(291)
"6월 3일 전국적으로 10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는 김종필 화형식이 거행되었고, 훈련을 마치고 군가를 부르며 학교로 돌아온 ROTC 후보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하였다. 오후 4시경, 경찰 백차와 트럭을 탈취한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거리를 장악했다. 서울시내 몇 개의 파출소들은 시위대의 투석으로 박살이 났다. 시위대는 청와대 앞의 최후 저지선까지 위협하였다. 이날 밤 9시 40분을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8월 3일 하루 동안 시위대 200명이 부상당했고, 1천200명이 체포되었다." "7월 29일 계엄이 해제되기까지 55일 동안에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 등 모두 348명이 구속되었다." "7월 27일 38세의 이동원이 외무장관으로 취임했다. 이동원은 김종필에 이어 '제2의 이완용'이라는 매도에 굴하지 않고 이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맹활약을 하게 된다."(300)
"(근본적인 언론 통제책을 모색하던)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공화당은 계엄 해제 다음 날인 7월 30일에 (언론윤리요강으로 보도내용을 심사하는)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 악법 반대 투쟁 과정에서 8월 17일 한국기자협회가 탄생하였지만, 언론사에 대한 정부의 압력 강화로 이탈자가 속출하였다." "박 정권은 8월 31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언론윤리위원회법 시행을 가로막는 기관이나 개인에 대해 특혜나 협조를 일제 배제키로 결정했다. 그 결과로 바로 그날 『조선일보』『동아일보』『경향신문』『대구매일신문』 등 이 법의 시행에 반대한 4대 신문에 대해 정오부터 1시간 동안 정부부처와 산하 금융기관, 각급 행정관서들이 신문구독을 중지토록 행정 압력을 가하였다. 박 정권은 신문구독 중지와 아울러, 은행융자 제한 및 기존대출자금 회수, 신문용지 가격의 차별대우, 극장협회와 기업체들에 대해 광고게재 중단 압력, 취재활동 제한 등 모두 다섯 가지 보복조치를 취하였다."(309-11)
"개발독재 체제하의 시장은 새로운 전장이었다. 공정하고 법이 지배하는 시장이 아니었다. 폭력과 협박과 온갖 권모술수가 지배하는 곳이었다. 강력한 권력을 중심으로 연고와 정실이 난무했다. 빽과 줄이 총동원되곤 했다. 63년 3월에 이루어진 군부의 '알래스카파'(함경도 출신) 숙청과 함께 백남일, 함창희, 조성철, 이용범 등 재계의 알래스카파 역시 몰락했다. 60년 12월 국내 도급순위 1위에 오른 현대건설은 '알래스카 토벌'시에 한꺼번에 휩쓸려 현대건설까지 존폐의 기로에 섰다. 현대건설의 사주인 정주영은 강원도 출신인데도 '토벌' 대상에 오른 건 건설업계의 정치 싸움 때문이었다. 아마도 정주영은 '범 이북파'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이미 자유당 시절부터 권모술수에 찌든 재계에 5·16 쿠데타는 한 수 더 높은 권모술수를 가르쳐준 것이다. 이제 박정희의 고향인 영남 연고 재벌이 승승장구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