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그렇게 전해지지 않았다 - 개정판 게리 윌스의 기독교 3부작 3
게리 윌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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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복음서는 무엇일까?


"그동안 복음서의 장르는 빈번한 논쟁거리가 되어왔다. 복음서는 전기傳記가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고 학술논문 또한 아니다. 복음서의 형태는 그것의 쓰임새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초기 신자들의 삶과 기억과 기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되었다. 복음서는 그 자체로 기도의 한 형태인 것이다. 예수는 전기傳記로 시작되어 교의敎義로 마무리되었다고 얘기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 우리는 그 반대의 경우가 진실임을 알고 있다." "부활 직후의 예수를 알게 되고, 믿게 되었던 초기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전기적傅記的인 기억들은 훗날 복음서들이 작성되기 시작할 무렵에 적절하게 조정되었다. 전기적인 기억들은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지만, 예수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에 부합될 때에만─부활이 바로 그가 메시아임을 증명했다는─기록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납득시키기 위해 신성한 글에 지속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다."(12-3)


"그렇다면 복음서란 무엇일까? 그것은 신성한 글에 기록되어 있는 신성한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예수의 의미에 대한 묵상이다. 이 묵상은 공동의 행위로서, 부분적으로는 초기의 성찬식에서 생겨났으며 부분적으로는 성찬식에서 사용하기 위해 많은 기독교인들의 설교와 기도를 통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처해 있던 특별한 상황들에, 줄곧 전해져오고 있던 신성한 역사를 적용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예수의 생애에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은 물론, 예수가 자기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겪었던 삶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내재內在하고 있다는 의식에 따라, 구성원들은 '만약 지금 예수가 있다면 어떻게 말했을 것인가'는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늘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수가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물었던 것이다. 예수의 삶은 지속적으로 그의 구성원들 사이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15-7)


제1장 마가복음 : 예수의 고통받는 몸


"마가의 복음서는 특정한 공동체 내에서,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를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역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들까지 언급되어 있다." "그렇게 특정한 사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마태와 누가는 (마가복음의 내용을 참고할 때) 자신들이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공동체에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경우엔 그것을 배제했다. 따라서 예수의 형제자매들 그리고 그들 가족 간의 불화에 대한 마가의 유별난 관심, 두려움에 떠는 여성 제자들의 행동에 대한 언급 같은 것들은 배제되었다. 자신들의 지역과 관련된 내용들 중에서 마가의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은 박해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가의 청중들에게는 특별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마가는 비정상적이라 할 정도로 공동체의 고난에 철저하게 집중하고 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제자들이 겪어야 할 일들을 무척이나 모진 말들로 설명한다."(29-30)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텐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출애굽기 3:13-14) 이것보다 더 '고등한 그리스도론high Christology'은 있을 수 없다. 사실 이 한 구절 때문에 우리는 예수가 대제사장에게 조사를 받을 때 〈나다〉라고 한 대답의 중요성을 더욱 깊게 생각해야 한다." "예수가 펼쳤던 주장을 제기하는 자들은 누구나 저항을 겪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마가복음에 기록된 박해의 진정한 이유이다. 예수의 신비한 몸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제기하는 주장의 불경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마가의 제자들 스스로가 메시아인 것이다."(60-2)


"그렇다면 박해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조엘 마커스는 마가가 제시한 고등 그리스도론 그 자체가 도발이었다고 지적한다. 60년대 후반에 예수의 제자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냈던 열심당원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세속적인 통치와 같은 것들을 가져다주지 않는 메시아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가의 시대에 이 문제는 내분의 지속적인 원인이었으며, 그것은 공동체 바깥에 있던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제들 내부에서도 박해로 인한 압박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적 주장을 저버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묘사된 제자들과 같은 인물들이 마가의 공동체 내에도 있었던 것이다." "마가의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이교도든 상관없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 즉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스러운 대리자라는 것을 믿지 않는 현실에 직면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박해의 원인이었다."(62-4)


제2장 마태복음 : 예수의 가르침을 주는 몸


"마태의 복음서는 그의 공동체가 바울과 마가에 의해 알려져 있던 것보다 더 형식적인 절차와 체계를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마태는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집필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안디옥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의견을 같이한다. 이곳은 바울의 시대에는 유대인과 이방의 형제자매들이 섞여 있던 곳이며, 베드로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논쟁거리가 되었던 곳으로, 마태복음을 처음으로 인용했던 이그나티우스와 디다케의 저자들이 근거로 삼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을 훈련시키는 학교가 있을 만큼 발전된 도시였는데, 체계적이며 교훈적이고 현학적이기까지 한 이 복음서의 특성으로 인해 그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데 활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활용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 복음서는 그러한 용도에 특히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93-5)


"마태와 누가는 인간들 사이에 나타난 예수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예수의 탄생이 지닌 메시아적 증거들로부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런 방식으로 탄생 이야기는 수난과 부활 이야기와 함께 '북엔드bookend(세워놓은 책들이 쓰러지지 않도록 지지해주는 것)'를 이룬다. 탄생 이야기는 예정되어 있는 유대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한편으로는 예수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는 두 가지 행로를 갖추고 있다. 수난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시작 부분에 이미 제시되어 있다 즉, 이교도에 대한 개방(시작 부분의 동방박사, 끝 부분의 백부장), 무구한 사람들의 고통(시작 부분의 어린아이들, 끝 부분의 예수), 적들로부터 겪게 되는 내키지 않는 시험(시작 부분의 헤롯, 끝 부분의 빌라도), 불길한 징조에 대한 꿈(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요셉의 꿈, 끝 부분에 등장하는 빌라도의 아내가 꾸는 꿈) 등이 그러하다."(99)


# 마태와 누가의 차이점

1. 마태 : 예수가 보여주는 (모세와 다윗 같은) 왕으로서의 메시아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다윗을 거쳐 내려오는) 예수의 계보를 아브라함에서부터 추적한다.

2. 누가 : 예수 탄생을 반긴 사람들이 보여준 성전 의식儀式을 강조하면서 성직자 예수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예수의 기원을 하나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다.


"따로 전승된 요셉과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마태가 서투르게 결합했다는 사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자신들을 안내하는 별이 있었다. 그들은 왜 여행을 잠시 멈추고 헤롯 왕에게 안내자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린아이들의 도살자와 그 동방박사들을 연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설픈 이야기 구조는 상징적은 중요성을 품고 있다. 이방인 박사들이 이교도의 배움에 근거해 그 아기를 찾으려 했지만, 신성한 글을 통해 베들레헴의 중요성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아기에게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울리는 일인 것이다. 즉, 미래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메시아의 약속을 받아들일 때 예수에게로 인도될 것이다." "마태의 계획은 이처럼 경건한 기억들을 메시아의 유대교적 배경의 일부분으로서, 더 폭넓은 케리그마의 주제들과 연결시키려는 것이다."(115-6)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세례와 제자들의 첫 번째 모임에 대한 묘사 이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것들을 설명하는, 이 복음서에서 가장 긴 다섯 가지 설교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비록 기독교인들이 갖춰야 할 도덕성에 관한 개론 혹은 안내서에 가깝지만, 통상적으로 산상설교(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제목으로 책을 썼다)라 부른다." "기독교 성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부분인 마태복음 5~7장에는, 팔복八福(the Beatitudes)과 주기도문 그리고 황금률이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유명한 말씀 중에서도) 소금과 빛, 들판의 백합화, 열매를 보아서 아는 나무, 모래가 아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은 말씀들이 담겨 있다." "모세의 계시는 일련의 금제禁制들로 제시되어 있다('너희는 ~을 하여서는 안 된다'). 반면, 예수는 괴로움 당하는 자, 방치된 자 혹은 박해받는 자들을 향해,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는 콘솔라시오consolatio(위안)라 불리던 위로의 말로 산상설교를 시작한다."(118-20)


# 팔복八福(the Beatitudes)

1. 마음이 가난한 사람 : 스스로 가난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슬퍼하는 사람 :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고통과 상실을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3. 순종하는 사람 : 타인을 정복하는 식의 공격적인 태도를 거부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5. 남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마음 속이 깨끗한 사람 : 외형적인 의식儀式에 집착하지 않고, 내적인 순수함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 : 남들의 곤경을 살피고 의를 행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복이 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마태는 예수가 산꼭대기에서 제자들에게 위대한 사명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마무리한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28:18-20) 이것은 복음서들 중에서 최초로 명백하게 표명된 삼위일체의 기원祈願이며, 마태의 공동체가 의식을 거행할 때, 세례의 신앙고백으로 인용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마태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그 이후로 지속된 기독교 시대를 관통하여, 그의 복음서가 가장 영향력 있는 복음서였으며,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었으며, 정전으로 인정된 자료들 중에서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161-2)


제3장 누가복음 : 예수의 조화시키는 몸


"오직 누가만이 착한 사마리아인, 돌아온 탕아, 착한 도둑과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복음서 저자들 중에서 가장 인정 많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의 어머니뿐 아니라 나인의 과부, 예수의 발을 씻겨준 여인, 오랫동안 등이 굽어 있던 여자, 혈루증을 앓는 여인, 동전을 잃어버린 여인, 적은 돈을 헌금한 과부, 갈릴리로 가는 길에 동행했던 여인들과 골고다로 가던 중에 설교했던 여인들 등 여성들에게 특별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또한 그는 평화주의자 혹은 세계주의자ecumenical로 불리며, 유대와 로마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 사이의 조정자 역할을 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그는 보다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는 예수를 원하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단테는 누가에 대해 '그리스도의 상냥함을 표현한 사람'이라 했고, 에른스트 르낭은 누가복음을 '지금까지 존재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책'이라고 했다."(168)


"누가는 (초기 공동체들이 창작한 노래와 전승에 의존해 기술한) 신성한 글 속에서 왕다운 예수보다는 성직자다운 예수의 면모를 드러내는 전승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의 이야기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수태 고지는 마태복음과는 달리 다윗왕의 혈통인 요셉 대신,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을 맡게 된 성직자 사가랴에게 전해진다. 성소에 들어선 사가랴는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요한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유대인의 혈통을 완벽하게 지키는 주님의 섭리는 전혀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종종 상징화된다─리브가(창 25:21), 라헬(창 29:31), 한나(삼상 1:2). 하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남편과 아내 두 사람 다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지난 경우는 오직 한 쌍의 부부밖에 없다. 그 부부는 이삭을 낳은(창 18:11) 아브라함과 사라이다."(172-3)


"누가가 메시아의 탄생을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인구 조사─실제로는 행해진 적이 없는─에 연결시키려고 했던 이유는 당시 예수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던 예수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70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 이후인 80년대 혹은 90년대에 복음서를 작성하고 있다. 유대전쟁이 끝나갈 무렵 팔레스타인에서 도망친 형제자매들은 자신들의 근거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누가는 믿는 사람들을 예루살렘과 성전에 다시 연결시켜 초기의 계보를 다시 정립하려 한 것이다." "누가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자신의 공동체는 로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서 펼쳐 보이는 탄생의 무대에는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었던 헤롯 왕의 살육과 같은 피로 얼룩진 장면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다윗이 목자였던 그 마을에서, 평화로운 목자들은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천사들로부터 듣게 된다."(182-3)


"마가와 마태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했던 단 한마디의 말만을─버림받음에 대해 울부짖는─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은 각각 서로 중복되지 않는 세 마디의 말을 인용한다. 누가가 전하는 말들은 자신이 일관되게 그려온 예수의 모습과 어울리는, 화해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한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23:34).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따지고, 그것을 집행했던 자들을 응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예수 본인의 기도를 거부한다." "후대 역사의 비극은 일부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예수의 말을 잊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자신에게 저질러진 그 같은 가증스러운 행동을 용서하려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일부 필경사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실제로 복음서에서 없애버렸다는 것이다."(220-1)


"누가의 복음서가 지닌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가 갈릴리를 예루살렘으로 변경하여 부활한 예수의 삶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복음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있었던 탄생 이야기로 시작되며, 예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의 승천과 오순절 이야기로 끝이 난다. 누가가 복음서를 작성하기 최소한 10년 혹은 20년 전에 예루살렘이 파괴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중요하다. 바울과 함께 시작된 예수 운동의 모든 활동이 그때부터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유대인들이 머물던 디아스포라에서 전개되었다." "예루살렘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누가의 집착에는 기원起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일종의 보상 욕구가 담겨 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의 뿌리를 잃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누가는 바울이 자신의 서신을 통해 증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자주 예루살렘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곳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223-4)


제4장 요한복음 : 예수의 신비한 몸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마태복음(3:7, 11)에 등장하는 성난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 마태복음의 세례자는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 비난하며 그들의 죄를 태워 없애버릴 것이라고 약속한다('성령과 불에 의한 세례'). 누가복음의 세례자를 개량한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군인들에게 그들의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며(3:14), 예수가 불이 아닌 오직 성령만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말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절대로 예수에게 세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물로 세례를 받고 난 후에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공개적으로 선언된다. 요한복음의 세례자는 개인적인 계시를 간직하고 있다. 다른 세 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후에야 그를 아들이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본 그 순간 성령이 예수에게 내려오는 것을 세례 요한만이 보게 된다."(243-4)


"예수가 성전에서 환전상들을 어떻게 내쫓았는지 설명하는 대목을 보면 다른 세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가 체포되기 직전인, 그의 공생애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하여, 이 사건을 예수가 죽음을 맞게 되는 원인으로 만든다. 반면 요한은 이 사건이 예수가 사역을 시작할 때 일어난 것으로 배치한다." "예수가 성전의 희생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그가 요한의 복음서에서 거듭해서 펼쳐보이게 될 행동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에서 예수는 믿음은 내면적인 마음의 문제이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직접 만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형식적이고 겉치레일 뿐인 순종을 거부한다." "이로써 사랑받은 제자의 공동체는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이 바로 예수가 세워놓은 성전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고전 3:16)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인식이다."(247-51)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 직전에 등장하여, 수난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설명해준다.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는 행위는 예수가 자기 자신의 생명으로 대신 갚아야만 하는 그런 일이었다. 그러한 행위는 성전의 권위자들을 격노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은 그 행위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1:47-48).  이 이야기의 역할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가 고뇌하는 이야기가 공관복음서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과 동일하다. 즉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마주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가복음(14:33)은, 예수가 죽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매우 놀라고(ekthambeisthai) 괴로워했다고(ademonein) 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자기 친구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면서 〈마음이 비통하여(enebrimesato) 괴로워했다(etaraxenheauton)〉."(272-3)


"최후의 만찬에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약속들 가운데 한 가지는 보혜사保惠師의 약속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리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14:15-17) '보혜사'는 문자 그대로 〈보호하기 위해 부름받다(para-kletos)〉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당신의 주장을 옹호해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왜 이것을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일까? 그 대답은 사랑받은 제자의 무리가 남긴 또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자신이 이 제자들의 보혜사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기 제자들의 옹호자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지만, 제자들은 버림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와 하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게 될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가기 전에 그렇게 제자들을 안심시키고 있는 것이다."(290-2)


"예수는 처음부터 목적지(telos)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완벽하게 다가섰다. 그의 사명은 죽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에게 정해져 있는 때(kairos)에 맞춰 이동했다." "이 죽음이 지니고 있는 유월절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유월절 희생양의 뼈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뼈는 부러지지 않는다. 그 대신 병사 한 명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니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19:34)." "여기서 물과 피는 예수가 인류에게 가져온, 죽음으로부터 소생한 생명을 상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가 포도나무이며, 포도나무는 가지를 통해 자양분을 내보낸다는 것에 주목한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브를 창조하기 위해 첫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과, 그를 믿는 자들의 몸통인 '신부'를 창조하기 위해 두 번째 아담의 옆구리를 열었던 것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97-8)


맺는 말 복음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왜 네 가지 복음서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삶과 메시지의 다양한 측면으로부터 가르침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신비한 몸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들에 대해 묵상하면서 서로 다른 네 가지 깨달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가는 자신의 박해받는 구성원들에게 예수의 의미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다. 마태는 일목요연한 방법으로 말씀들을 수집해놓는다. 누가는 예수의 사명이 지닌 치유하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의 신성을 언제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복음서가 강조하고 있는 특성들은 네 복음서 전체에 모두 다 드러나 있으며, 다만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는 것이 있을 뿐이다. 복음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불가사의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예수의 의미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이러한 시각들 모두가 필요하다."(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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