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 1987년 민중운동의 장엄한 파노라마
서중석 지음 / 돌베개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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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박종철 고문사망과 동시다발 시위의 등장


"1986년 가을 언제부턴가 전두환은 비상수단으로 친위쿠데타 같은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언론에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지만, 10월 22일 전두환은 11월 4일의 미국의회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11월 7일 비상조치와 계엄령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활동을 정지시키겠다고 언명했다." "비상조치 또는 친위쿠데타는 애당초 현실성에 문제가 있었고,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민주당이 압승하여 레이건 행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등 국내외적인 여건도 작용해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쿠데타 모의'는 이 시기 전두환의 대응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성환 의원 구속, 건국대 사태, 4·13호헌조치도 이 같은 전두환의 대응방식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 계획안은 안기부나 경찰, 행정부, 여당에 대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좋으니 단호히 대처하고 밀고 나가라는 전두환의 의지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과시한 것이었다."(36-7)


"1986년 11월의 건국대 사태가 말해주듯 학생들은 그해 5·3인천사태 이후 끊임없이 붙잡혀갔고, 수배당하고 투옥되었다. 또한 거의 매일같이 대문짝만하게 신문지면과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한 공안 사건을 접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다. 언제 어디서 군홧발에 걷어차일지, 끌려가 어떤 고문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대학가는 탈진상태나 다름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쉴 새 없는 공격에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좌절과 무력감을 느끼며 겨울방학을 맞았다. 그런데 이때 박종철이 서울대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일명 깃발) 사건으로 수배 중인 5년 선배 박종운(사회학과)의 거처를 대라는 대공분실 경찰의 물고문으로 사망한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학생들 누구한테나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그의 사망 이후 정국이 무섭게 변하는 것을 목도했다. 얼어붙은 교정은 〈친구〉, 〈그날이 오면〉을 부르면서 다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32)


"신민당은 박종철 죽음이 '단순한 사망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가닥이 잡혀가자 17일에야 확대간부회의를 열고 대변인이 성명을 발표하는 등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신민당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는 1986년 2월 12일 2·12총선 1주년을 맞아 1,000만 직선제개헌서명운동을 벌여 대대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렇지만 5·3인천사태 이후 내각책임제 개헌을 목표로 한 '합의개헌'이 여당에 의해 추진되었고, 이것에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가 은연중 가세한데다가,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민우가 내각제 개헌을 검토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까지 발표해 야당가는 뒤숭숭했다. 신민당의 실질적 지도자이자 민추협 공동의장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민우의 주장을 제압하려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어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박종철 죽음'이 '박종철 사건'으로 진전되면서 양 김은 재야와 공조하여 이 사건에 직선제 개헌투쟁을 접목시켜 정면공세로 나아갔다. 드디어 국면 돌파의 혈로가 뚫린 것이다."(30-1)


제2장 호헌철폐투쟁으로의 전환과 학생운동의 변화


"4월 13일은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 5월 18일 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국민대회 등과 함께 한국 민주화 여정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날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이날 특별담화를 통해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만료와 더불어 후임자(노태우)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헌 논의는 88올림픽 뒤에 생각할 일이 되었다. 전두환은 이 결정이 얼마나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지 짐작이라도 했을까. 4·13호헌조치는 같은 날 발기인대회를 가진 통일민주당이나 민주화운동 세력뿐만 아니라 전두환 정권과 같은 통치방식은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고, 따라서 대통령 선거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일반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또 민정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4·13호헌조치는 자신들이 그때까지 주장해왔던 합의개헌 논의를 일순간에 부정하는 조치였다."(104-6)


"1986년 5·3인천투쟁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최대의 가두투쟁으로, 군사독재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평가도 있고, 민주화운동사에도 한 획을 긋는 투쟁으로, 민족민주 세력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또 인천에서 여한 없이 싸워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지 않은 5·3인천투쟁 참여자들은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급속히 형성·고양된 관념적 급진성에서 벗어나는 데 수개월 또는 수년이 걸렸다." "1986년 들어 공세적이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야당은 5·3인천사태 이후부터 그해가 끝날 때까지 수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KBS와 MBC에서는 불타는 민정당 당사와 경찰차, 보도블럭 등이 나뒹구는 인천시민회관 일대의 모습을 연이어 방영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경찰은 민민투·자민투 등을 용공조직으로 규정하면서 인천사태를 극렬 좌경용공 폭력 세력에 의한 난동으로 몰아갔다."(161)


"전두환·신군부는 수구체제를 보위하기 위해 입법회의를 통해 노동관계법을 개악하고 민주노동조합을 파괴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돌리고 '위장취업자'를 단속해 노동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자 했다. 전두환 정권은 공장에서 지나치게 친절하거나 겸손한 자, 자주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는 자, 오른쪽 손가락 셋째 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자, 그리고 안경을 쓰거나 말을 잘하는 자, 생활이 너무 검소한 자 등이 '위장취업자'일 수 있다는 공문을 발송하여 자체 감시 기능을 강화하도록 조처했다. 그러나 경찰이 1986년 6월 경인지방 노동자들의 자취방을 덮친 것은 '위장취업자'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1계급 특진의 포상이 따르는 5·3사태 수배자들을 체포하게 위해서였다. (서울대 의류학과 출신의 위장취업자인) 권인숙이 경찰서에 끌려온 다음 날부터 담당 형사가 5·3사태 수배 노동활동가에 관해서 묻기 시작했고, 3일째부터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추악한 성적 고문을 가했다."(127)


"5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이민우 신민당 총재는 6월 임시국회에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할 것에 합의를 보았다. 현특 구성 문제를 앞두고 노태우는 자신들의 복안이 내각제라는 것은 밝히지 않았지만, 직선제는 나라를 망치고 극심한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고 강조해 신민당의 직선제 개헌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다음 날 임시국회는 헌특 구성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폐막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던 7월 7일 청와대에서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모여 내각제 개헌안을 야당에 제시하되, 야당이 거부할 경우 기존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 국민의 뜻을 물어 개헌을 하겠다는 정국 운영 방안에 합의했다. 야당이 내각제를 받아들일 리 만무한 이상 사실상 헌특이 필요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전두환은 다수당이 되는 것은 선거법이나 부정선거 방법으로 얼마든지 보장받을 수 있으므로, 내각제로 하면 영구집권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165-6)


"전두환의 초강경 초토화 공세는 박종철 고문사망 앞에서 맥없이 무너져내렸다. 크게 위축되었던 야당은 고양된 분위기에서 정치공세를 펴며, 5·3인천사태 이후 있었던 앙금을 털고 민주대연합을 앞장서서 제기했다. 야당으로서는 박종철 고문사망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개헌 문제에 연계시켜 체육관 대통령이나 변형된 내각제가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더 나아가 김영삼·김대중은 직선제 개헌투쟁을 선명하게 전개하기 위해 4월에 들어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4월 13일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를 가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전두환이 합의개헌을 위해 노력했다는 시늉도 별반 보이지 않은 채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 날에 맞춰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4·13호헌조치는 3·3평화대행진 이후 뚜렷한 이슈가 없어 약화되었던 민주화운동을 크게 자극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5·3인천사태 이후 잠복해 있던 개헌 열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170-1)


"학생운동권은 1986년까지 야당에 대단히 비판적이었고, 민주대연합에 그다지 열성을 보이지 않았다. 학생운동권이 1985년 2·12총선 유세장에서 김대중·김영삼의 신당 후보를 지원한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야당후보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미·일 파쇼정권'의 장기집권 음모를 분쇄하고 대중들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개헌 문제가 제기되자 학생운동권은 야당을 혹독히 비판하면서 직선제 개헌론과는 다른 개헌 주장을 폈고 5·3인천사태에서 야당은 거의 모든 운동권에게 두들겨 맞은 동네북이었다. 그러한 학생운동권과 야당의 관계가 1987년에 들어와 바뀌었고, 학생들은 6월 항쟁에서 직선제 개헌 쟁취를 들고 나왔다. 6월 항쟁이 그토록 거대한 민중시위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이 민주대연합에 적극적이었고, 시위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로 단순화된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189-90)


"(박종철 고문사망 사건 이후)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 등 정국이 격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지만, 학생회는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제약된다는 이유로 가두시위나 연대시위는 가급적 자제했다. 그런데도 천주교와 개신교 측의 성직자와 신자, 대학교수, 문화인, 언론인, 재야단체, 여성단체, 정당에서는 4·13호헌철폐투쟁을 줄기차게 벌였고,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터졌을 때는 다시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고 6·10국민대회를 가질 것을 결의했다. 전두환이 파악한 것과 같은 세상이었더라면 4·13호헌조치나 5·18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 6·10민정당 대통령 후보 선출이 큰 저항이나 반응 없이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과거에 학생운동이 했던 역할을 이제는 상당 부분 행동하는 시민이 하게 되었다. 이처럼 6월 항쟁으로 진전되도록 추동하는 힘이 민주화 열망 속에 새롭게 쌓여갔다."(228-9)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5·18박종철 고문사망 은폐조작 폭로가 큰 쟁점이 된 이후 학생들이 민주화투쟁의 대열에 적극 나서게 된 데에는 미안함이나 죄책감도 작용했다. 일제강점기 학생·청년의 반제항일 변혁운동, 4월 혁명, 그 이후 학생운동에서 학생들은 어느 계층보다도 강한 정의감, 뜨거운 인간애(동포애)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한국의 학생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에 미안함이나 자괴감, 자책감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호남 출신이 더 심했지만, 198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광주에 대해 무언가 갚아야 할 것이 있다, 죄를 지은 것 같다, 미안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는 학생들이 많았다. 5월 그날이 올 때마다 격렬한 시위가 전개된 것은 그러한 마음의 빚과 무관하지 않다." "6월 9일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빈사상태에 빠진 것도 학생들이 가슴을 무겁게 누르며 가열한 투쟁에 나서게 하는 한 축으로 작용했다."(237-8)


제3장 6·10국민대회에서 6월 항쟁으로


"초기에는 민주당도 1986년의 경험 때문인지 재야와 직접적으로 한 조직에서 같이 활동하는 것을 망설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협의 끝에 모든 민주 세력을 망라하자는 천주교 측의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대중노선을 주장한 학생들로서는 이 단체에 적극 참여하거나 협력하게끔 되어 있었다. 드디어 4월 혁명 이후 가장 강력한 민주대연합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호헌철폐·민주쟁취를 위한 공동투쟁기구는 부산에서 먼저 조직되었다. 5월 20일 부산 당감성당에서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부민협)와 종교계, 통일민주당, 학생과 재야, 노동자 등 100여 명이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를 결성했다." "부마항쟁이 일어난 곳이자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 이러한 단체가 출발했다는 것은 부산지역이 6월 항쟁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했다. 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은 노무현이, 상임집행위원은 김상찬·문재인 등 16명이 맡았다."(258)


"6·10국민대회는 민주화운동사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에서도 한 획을 그었다. 3·1운동 이후 같은 날 여러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시위가 벌어진 적이 없었다. 4·19혁명의 경우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사망자도 많았지만 6·10국민대회처럼 많은 지역이 참여하지는 않았다." "국본의 평화투쟁 호소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부산·대구·마산·전주 등 여러 지역의 시위에서 공권력을 부정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투쟁을 벌였다는 것도 중요하다." "경찰은 처음으로 규모가 큰 전국 동시다발 시위를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정권 안보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서울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서울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없었다. 2만 2,000여 명이 배치된 서울과 부산·성남 등 몇몇 지역에서는 경찰이 무장해제를 당하는 등 경찰력만으로 6·10국민대회에 대응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마산 시위는 부마항쟁을 방불케 했다."(307-9)


"6·10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상승·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명동성당농성투쟁과 넥타이 부대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6·10대회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대단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명동성당농성투쟁이 운동권에 의해 조기에 해산될 뻔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사의 방향'이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명동성당농성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사람은 대체로 활동가나 학생운동 지도부와는 거리가 있는, 문자 그대로 시민과 일반 학생으로 구성된 민중이었다."(312-3) "명동성당 농성 자리에 있던 40대 중년 남자의 말을 『말』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더 이상 학생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 우리 시민들이 희생이 돼서 이 군부독재를 끝장내야 한다. 저들은 학생들을 극렬주동자로, 우리 시민들은 단순가담자로 분류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을 구속시킬 것이다. 우리가 앞장서자. 그리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하자.〉"(318)


"6월 12일 12시 45분경 농성시위대는 대열을 갖춰 명동거리로 나서기 위한 시위를 벌였다. 최루가스와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허기에 지치고 햇볕에 검게 그을린 시위 대열이 나타나자 명동 일대는 거대한 축제를 치르는 듯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면서 농성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애국가를 부르고 만세삼창을 반복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건물의 창문이 활짝 열리면서 시민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통째로 뜯어 거리로 날려 보냈다. 명동 일대가 온통 하얀 꽃으로 뒤덮였다. 어떤 이들은 옥상에 올라가 손을 흔들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시위를 지켜보기도 했다." "부근에 있던 은행·증권회사·보험회사 사무원들은 상업은행 쪽에서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자 함께 따라 외쳤다. 경찰이 명동성당 시위대와 합세하지 못하도록 길목으로 밀어붙이자 아쉽다는 듯이 사무실로 들어갔다. 본격적인 넥타이 부대의 등장이었다."(326-8)


"6월 10일 밤부터 6월 15일까지 지속된 명동투쟁은 호헌철폐, 군부독재타도의 강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6·10국민대회를 이어받아 그것을 더욱더 강력히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의식적·의식적인 역사적 힘의 결집이었다." "명동성당 농성시위대가 15일까지 버티다가 해산한 효과는 바로 그날부터 드러났다. 13일 토요일, 14일 일요일이 지나 15일 월요일이 다가오면서 시위는 다시 격화되었다. 14일 아침에 고건 내무장관과 권복경 치안본부장은 전두환에게 경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며 월요일에 12일 정도의 많은 사람이 나와도 경찰 능력으로 진압할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전 같은 대도시나 진주·천안 같은 중소도시에서의 월요 시위는 정부가 호언장담하며 예상한 결과와는 전혀 달랐다. 쏟아져 나온 시위대에 비해 경찰 병력은 역부족이었다. 경찰은 시위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군부파시스트 독재정권이 강력하게 내세우는 철벽 같은 치안 유지가 여러 도시에서 허물어진 것이다."(354-6)


제4장 항쟁의 격화─기로에 선 전두환·신군부체제


"이 시기에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할 '결심'까지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 그보다는 군을 출동시키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경찰의 치안 능력 한계가 심각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공권력이 거세게 도전받았던 6월 17일 저녁 민정당 당직자와 안기부장이 있는 자리에서 전두환은 "군부를 동원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그런 걸 반복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라고 말해 만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군 출동은 자제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미국 때문에 군이 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6월 항쟁 이전이라면 몰라도 6월 항쟁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이 출동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 비슷하게 대단히 격렬했다. 더구나 6월 항쟁은 광주항쟁과도 다르게 전국에 걸쳐 거의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군이 출동했을 경우 자칫하면 엄청난 새로운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430-1)


"민정당은 18, 19일 시위를 목도하고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전두환의 얼굴만 쳐다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부산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의 사태가 4·19시위를 방불케 했고, 부마항쟁·광주항쟁을 떠오르게 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4월 혁명 후 이승만 정권의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가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더구나 6월 20일은 토요일인데도 격렬한 시위가 계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어서 마음을 놓았던 광주·전주·익산·순천·목표 등 호남지역에서 시위가 대단한 기세로 커지고 있었다. 전두환 또한 혼자 독단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너무나도 위중한 상황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정당은 비상조치를 바랄 수 없었다. 군이 전면에 나서면 노태우 정권 출현이 뿌리째 뒤틀리고 뒤집어질 수 있었고, 민정당은 1980년 5·17쿠데타 이후의 공화당 신세로 전락할 수 있었다."(444-5)


"김영삼과 김대중은 4·19시위 때 속해 있는 파벌은 달랐지만 민주당의 중견 간부였는데, 4·19 혁명 그날의 민주당 간부들과는 다르게 월등히 용기가 있었다. 두 야당 지도자는 민주대연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6·26평화대행진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 김대중·김영삼은 직선제 쟁취를 가져올 방법에 대해서 아무런 실질적 방안이 서 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의 '폭력투쟁'으로 비상조치가 선포되어 그나마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입지조차 지난 1980년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상실할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6·26대회는 한판 판갈이 싸움으로, 사자성어로 말하면 건곤일척의 전쟁이었고 진검승부처였다. 6·26대회가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민권이 위대한 승리를 거둘 것인가, 군부독재가 용기를 얻어 시간을 끌면서 다른 간특한 방책을 내놓을 것인가가 판가름 나게 되어 있었다."(478-9)


제5장 무릎 꿇은 전두환·신군부체제─ 6·25대행진에서 6·29선언으로


"김영삼 민주당 총재는 물론 서울과 지방의 의원들이 시위에 들어가려고 하자마자 경찰에 당했던 바와 같이, 6·10대회 때와는 다르게 전두환의 직접 지시에 의해 경찰이 시위를 초동 단계에서 꺾어버리려는 초강경 진압정책을 썼는데도 6·26평화대행진은 전두환 정권이 대규모 시위에 경찰력으로 대처하는 데 역부족임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날 시위는 과격함은 적었고 전반적으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장 격렬하게 시위가 전개되었던 서울역 광장의 경우 시위대는 차도점거투쟁, 경적 유도에 의한 시민 끌어내기 '투쟁'에 힘을 기울였고, 최루탄 발사에도 투석 등으로 대항하기보다는 흩어졌다 다시 모여 구호를 외치는 방식을 택했다(『조선』). 전체적으로 6·10대회에 비해 시위의 규모·횟수·지역 등이 훨씬 커졌거나 늘었지만 방화나 폭력사태는 줄어 시위 양상은 덜 과격했던 것으로 경찰이 분석했다고 보도한 것도(『경향』) 이러한 시위 양상에 근거한 것이다."(532-3)


"6월 29일 오전 9시가 조금 지나 발표한 노태우의 6·29선언은 특별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보적인 것도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폭넓게 확장하고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를 제외하면 15년 이전의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지방자치의 경우 4월 혁명기 장면 민주당 정부 수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럼에도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 그리고 국민을 놀라게 한 것은 6·29선언이 전두환·군부독재정권의 정책과 너무나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었고, 6·29선언의 핵심인 대통령직선제는 그동안 전두환과 민정당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박정희 유신 권력과 전두환·신군부 세력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정책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12·12쿠데타 때부터 대체로 전두환 다음의 위치에 있었고, 민정당 대표위원이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가 제시했다는 점에서 장기간 혹독한 탄압만 받아왔던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542-3)


# 6·29선언의 핵심 요지

1.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에 평화적으로 정부를 이양하겠다.

2.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도록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3. 김대중을 사면·복권하고 시국 관련 사범들을 다수 석방해야 한다.

4. 구속적부심 전면 확대 등 기본권을 강화하고 인권 침해 사례를 시정하는 등 제도적 개선을 촉구한다.

5. 언론 자유 창달을 위해 인론기본법을 개정 혹은 폐지하고 프레스카드제도 또한 폐지한다.

6.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보장하고 대학 자율화와 교육 자치도 조속히 실현되어야 한다.

7.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를 마련해야 한다.

8.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강구하여 폭력배를 소탕하고 각종 비리와 모순을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


"6·29선언은 왜 나왔을까. 많은 사람이 예상했던 바와는 다르게 계엄령이나 친위쿠데타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월 항쟁에서 군 출동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그 시기가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교체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주화운동 세력과 민주당이 요구하는 직선제 개헌이 민주화와 직결되어 있고,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었다. 차기 대통령선거 등 정권의 교체기에는 차기 정권 담당자의 입장이나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것이 대규모 시위투쟁으로 표출된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반대하면 반대할수록 전두환·신군부 통치체제가 고립되고 끝내는 벼랑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에 군이 출동할 수 없었던 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있다. 한시라도 잊을 수 없는 광주의 기억이 그것이다."(549-51)


"6월 시위에 군이 나서면 제2의 광주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많았다. 노태우는 그의 회고록 상권에서 충성심 강한 군 간부들도 '군이 출동하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는 의견들이었다고 기술했는데, 군이 출동했을 경우 부산·대전·광주·전주·성남 등 여러 지역에서 뜻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일어나 엄청난 비극적 사태가 파국이 초래될 수 있었다." "그러한 온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군홧발로 누르다가 돌발사태가 발생해 광주참극 같은 파국적 사태를 맞이하게 될 경우 군은 어디에서 서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명확해졌다. 군 상급 지휘관들이 두려워한 것이 또 하나 있었다. 4월 혁명에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될 때 계엄군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고 중립을 지켰는데, 6월 항쟁에 동원된 군이 상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고, 12·12쿠데타처럼 하극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보장도 없었다."(557-8)


"6·29선언에서 제일 궁금한 것은 노태우와 전두환이 야당에서 대통령이 된다고 예상했을 경우에도 과연 6·29선언을 발표했을까 하는 점이다." "노태우에게 직선제가 사지死地라는 것은 누가 봐도 명약관화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에게는 승리가 절대적으로 요구되었다." "노태우와 전두환은 특단의 다른 조치도 강구해봤겠지만 야당 후보가 반드시 두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노태우는 6월 24일 전두환과 직선제 문제를 논의했을 때 그 자리에서 〈직선제를 한다. 김대중 씨를 사면·복권한다〉는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다고 강조했다. 왜 이 두 가지만 합의를 보았을까. 김대중을 사형대에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공정한 정치 룰을 실현시키기 위해 그렇게 합의했을 리는 만무했다. 직선제를 받아들인다면 바늘에 실 가듯이 반드시 김대중을 사면·복권시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머릿 속에 철칙 중의 철칙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589-91)


제6장 6월 항쟁 탐구


"4월 혁명 후의 개헌처럼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통일민주당이 합의하여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국민투표를 거쳐 10월 29일 공포되었다. 6·29선언 이래 야당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가 이루어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지만, 대다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출마하는 바람에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소선거구제가 17년 만에 부활되어 1988년 4월에는 총선이 치러졌다. 1987년 12월 대선은 지역주의가 투표 성향을 압도적으로 지배했다. 극심한 지역주의는 1988년 4월 총선에서 더욱 거세게 표출되었다. 특히 총선은 특정 정당 정치인의 특정 지역 공천만 따내면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것이어서, 선거 행위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색케 했다." "지역 이기주의는 장기간에 걸쳐 권위주의 통치를 하는 동안 주입된 비인간적인 반공·냉전의식과 결합된 개인 이기주의가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시민의식 또는 공공의식이 마멸된 것이 기본 바탕이었다."(675)


"1990년 2월 노태우·민정당이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자유민주당이라는 거대 여당을 만듦으로써 정치계는 상당 부분 과거로 회귀하여 6월 항쟁에 대한 반동의 바람이 불었다. 이로써 지역주의가 만들어낸 여소야대 국회는 해소되었고, 독재정권의 하수인이었던 정당 당원과 십수 년간 그 정당과 싸웠떤 정당 당원이 한 정당 안에서 기묘하게 동거하게 되었다. 경제발전의 주역이면서 그것에서 소외되었고, 최소한의 기본 권리조차 통제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자들이 6월 항쟁 이후 어느 부문보다도 먼저 일어나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투쟁을 벌인 것은 6월 항쟁의 후속조치나 다름없는 자연스러운 진전이었다." "1987년 11월에는 여야 합의로 노동관계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노조설립 요건은 완화되었지만, 제3자 개입 금지, 복수노조 금지, 노조 정치활동 금지 등은 그대로 남았다."(676-7)


"6월 항쟁은 통일운동 고양과 남북관계 개선의 길을 열었다. 정부 수립 이후 수구냉전 세력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분단을 공고히 하고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권력과 기득권의 영속화를 기도했다." "그렇지만 4월 혁명으로 통일운동이 전개되었던 것과 흡사하게 6월 항쟁으로 통일운동은 활기를 띠었고 남북관계 또한 크게 변화되었다. 1988년 3월 서울대 학생회장 후보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통일운동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호응을 받으면서 그해 여름 판문점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을 뜨겁게 달구었다. 1989년은 문익환 목사와 전대협 대표 임수경의 방북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이 두 사건은 통일운동의 발판을 마련하고 남북 화해·교류의 길을 여는 데 기여했지만, 수구냉전 세력의 거센 반격에 직면해야 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비판이 있었다."(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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