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와 화폐
자크 르 고프 지음, 안수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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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로마 제국의 유산과 기독교화의 유산


"중세 초기에는 화폐, 다시 말해 주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화폐에 관련된 로마 사람들의 관습을 유지하다가 이어 모방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화폐가 주조되었고, 솔리두스 금화가 교역의 주축 통화가 되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 무역의 감소에 적응하기 위해 곧 트리엔스 금화, 그러니까 솔리두스 금화 가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화가 주요 통화가 되었다. 감소하긴 했지만 고대 로마 화폐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사용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야만족'으로 보인 이방인들은 로마 사회로 들어와 기독교 국가의 구성원이 되기 전에 (갈리아족을 제외하고는) 화폐를 주조하지 않았다. 그러한 화폐는 로마 제국에서 탄생한 모든 영토에서 유통되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단일성을 보존하는 진귀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례로 중세 초기에 명목 화폐로 널리 이용된 것은 로마 제국의 은화인 데나리우스, 즉 드니에였다."(19-21)


2 샤를마뉴 대제 시대에서 봉건시대까지


"카롤링거 왕조에서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화폐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화폐 제조에 사용된 금속 광산이 더 활발하게 발견되거나 개발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가장 큰 은광인 푸아티에의 멜 광산을 집약적으로 개발함으로써 화폐 주조가 증가하기도 했다." "봉건제가 출현하고 무엇보다 마르크 블로크가 말한 제2기 봉건시대로 나아감으로써 서구 기독교 사회는 사실상 화폐가 확산되는 태동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카롤링거 제국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쇠퇴했기 때문에 주조 작업이며 주조 작업으로 얻는 수익이 세분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샤를마뉴 대제의 개혁 조치로 결국 중세 초기의 여러 화폐는 사라졌지만 황제가 화폐 주조를 독점한 기간을 짧았다. 9세기부터 백작들이 황제의 독점권을 찬탈했으며 백작이 활개친 중세에는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화폐를 주조했다. 그렇게 화폐 주조자들이 분산된 상황은 봉건제의 맹렬한 기세와 연관되어 있었다."(25-6)


3 12~13세기의 전환기에 비상하는 주화와 화폐


"상업은 얼마간 여러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는 기독교 사회에 큰 수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의 영향으로, 소규모 지역 시장을 넘어 대규모 정기 시장의 개설과 국제적인 활동으로 발전했다." "통화 확대의 또 다른 원인은 도시의 비약적인 성장이었다." "원자재 구매와 물품 판매를 촉진하는 수공업이 발전하고, 임금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커짐으로써 도시에서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도시민의 생활수준이 향상됨으로써 사회계급이 분화되어 부유한 부르주아와 가난한 시민으로 나뉘었다. 십자군 원정에 적지 않은 자금을 댄 영주의 중요성은 약화된 반면 부르주아는 더 부유해졌다." "화폐는 도시의 각종 조합에서 접착제 역할을 했다. 도시에서는 길드, 번성한 도시와 상인들 사이에서는 상인 조합이 창설되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사회의 일부 지역에서는 도시와 상업이 발전했으며, 해당 지역은 성장이 더디고 화폐 유통이 활발하지 않던 지역들과 달리 더 많은 부와 힘을 얻었고 외양도 화려해졌다."(30-2)


4 13세기, 찬란한 화폐의 시대


"화폐는 (도시의 납세 재정과 곡물 수요를 책임지면서) 중세 도시에서 점점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부르주아의 첫 번째 야심이 자유를 얻고 무엇보다 스스로 관리를 하는 것이었다면 다른 주요 관심사는 화폐와 관련된 것이었다." "12세기 말부터 시민들은 시간의 가치에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시간은 곧 돈이라는 관념이 나타난 것이다. 무엇보다 13세기는 수작업을 포함하여 노동의 경제적 가치, 바로 노동의 화폐가치를 점점 더 깊이 인식했다. 도시의 임금 노동자가 확대된 상황이 이와 관련돼 있었다. 〈일꾼이 자기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복음서(누가복음 10장 7절)의 이 구절이 점점 더 많이 인용되었다. 그렇지만 도시 공동체가 결코 얻지 못할 한 가지 권리가 있었으니 바로 영주와 제후가 움켜쥔 화폐 주조권이었다. 하지만 경제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층은 13세기에 영주에게 자기네 화폐의 안정성을 보증해달라고 요구한다."(49, 54)


5 상업 혁명이 일어난 13세기의 교역, 은, 화폐


은광 개발은 당시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상업에 부응해 주화 보급을 늘려주었다. "13세기에 동방세계에 수출된 주요 화폐는 영국의 스털링, 프랑스의 투르에서 주조된 드니에, 베네치아의 그로소였다. 이탈리아인들이 유럽에서 수출하고 재수출하는 동방세계의 상품 수량이 늘어난 결과 통화량도 증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구사회의 화폐는 아주 먼 거리를 오가며 동방세계의 각종 물품을 교역하는 데 쓰였다. 이를테면 러시아 모피, 소아시아 명반같이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서 취득한 것들을 거래했지만, 긴 13세기 동안 무역상들은 중국에 도달해 비단을, 인도 동부에 이르러 향신료와 보석을, 그리고 페르시아 만에 도달해 진주를 거래했다. 여기서 13세기의 서구사회에서 혹은 서구사회를 통해 화폐가 대대적으로 확산된 이유 중 하나가 서구사회, 영주 사회 그리고 특히나 도시 사회에서 상류층 부르주아 계급의 사치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62-3)


"(은화의 확대, 금화의 재등장과 더불어 세 번째 층위의 화폐로 등장한) 낮은 가치의 화폐, 즉 저품위 보조화폐는 특히 도시에서 일상생활의 갖가지 필요를 충족시켰다. 그러한 보조화폐는 종종 '검은 돈'이라 불렸다. 그렇게 해서 베네치아에서는 엔리코 단돌로 총독이 13세기 초에 2분의 1데나로에 해당하는 작은 동전을 주조했다. 우리의 긴 13세기 말에 피렌체에서 가장 빈번하게 주조된 화폐는 콰트리노, 혹은 일반적으로 둥그스름한 빵 하나의 가격에 해당하는 4데나로짜리 동전이었다. 통상 이 작은 주화로 자선을 베풀기도 했다. 13세기에는 자연스러운 사회변화에 의해, 그와 동시에 탁발수도회의 가르침과 설교의 영향을 받아 자선 행위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왕령으로 파리에서 주조된 드니에는 '자선 행위의 드니에'가 되었다." "가치가 낮은 주화는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이는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상당히 소소한 거래에까지 화폐 사용이 확대되었음을 입증한다."(73)


6 화폐와 여러 정체의 탄생


"시기상 가장 앞서고 압도적인 체제이자 화폐를 제일 많이 조달받은 것은 교회, 다시 말해 교황청의 정체였다. 교황청은 토지에서 그리고 교황의 직접 지배를 받는 도시들에서 나오는 소득을 거두었으며 이러한 수입은 일명 성 베드로의 재산이었다. 교황청은 한편으로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특별한 십일조를 받았다. 사실 십일조는 기독교 사회 전역에서 성직자들이 생계를 보장하는 데, 예배당을 유지하는 데,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는 데 쓰였다. 각종 경비가 증가하면서 교황청에 십일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교황청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의 계율 32에서 의무로 부과되는 십일조의 성격을 상기시켰다. 교황청에 지불해야 할 최소한도의 금액도 정해두었다. 교황청은 13세기에 구조조정을 실시했으며 생계의 원천인 여러 세원(稅源)은 교황과 교황청의 재량에 달려 있었다." "교황제의 재무와 세제 틀은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렀던 14세기에 최적화되었다."(80-1)


"13세기에 기독교를 믿는 주요 군주정에서 왕의 재무를 관리하는 특별 기구가 발달했다. 대개 그렇듯이 영국 군주정이 가장 빠르게 움직였다. 영국의 군주정은 노르망디 공국에서 탄생한 선구적인 기구를 도입해 세련되게 다듬었다. 그렇게 해서 12세기부터 플랜태저넷 가 출신의 헨리 2세(1154~1189)는 어떤 관리 기구를 마련했다. 정당하게도 그에게는 '유럽의 첫 번째 화폐 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헨리 2세의 자문관이었던 솔즈베리의 존은 《폴리크라티쿠스》에서 군주정의 세제 문제를 다루었다. 그에게는 경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관건이었다. 당시 경제에 관한 관점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왕국의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화폐 유통을 보장하고 감독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통치자의 부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올바르게 통치하는 것이었다. 군주정의 세제는 경제 문제가 아니라 정치 윤리의 문제와 연관돼 있었다."(81-2)


7 대출, 부채, 고리대금


"13세기는 화폐의 사악한 본질에 새로운 모습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위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 모습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3세기 지성사의 대발견이었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뒤쫓아 〈돈은 새끼를 만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따라서 고리대금은 자연에 반하는 죄이기도 했다. 자연은 이제 스콜라 신학자들이 보기에 신의 창조물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시 고리대금업자의 운명은 어떠했는가? 돈이 가득한 주머니를 목에 걸고 그를 아래로 끌고 가는 모습이 새겨진 여러 조각이 보여주듯이 구원 가능성이 전혀 없었으며 지옥의 사냥감이었다. 이를테면 5세기에 교황 레오 1세(대大레오)가 이미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리대금의 수익금은 곧 영혼의 죽음이다.〉 1179년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는 기독교 사회의 도시에 있는 이방인들이며 그들에게는 기독교식 장례가 거부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98-9)


"실뱅 피롱은 resicum이라는 용어가 12세기 말과 13세기 초에 어떻게 지중해 지역 공증인과 상인들에게서 나타났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 단어는 카탈루냐 페냐포르트 출신으로 도미니쿠스 회 수도사인 라이문도의 중개로 스콜라 신학자들의 어휘와 사고 속에 들어왔다. 그는 '해상 대출'에 resicum을 사용했다. 중세인들은 오랫동안 바다를 몹시 두려워했다. 육상 여정이 통행세를 거두어들이려는 영주들에게 가로막히고, 특히 숲 속을 지날 때는 도적들의 위협을 받긴 했지만, 여러 그림과 봉헌물에 나와 있듯이 바다는 실로 위험한 곳이었다. 바다는 상인의 생명이나 상품의 무사 배달을 위협했으며, 해적보다 조난 위험 때문에 그 보상으로 이자 징수 및 고리대금 행위가 정당화되었다. 이자를 거둬들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이유는 대출 기간에 대부금으로 직접 이익을 취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그 돈은 노동의 대가였다."(111-2)


8 새로운 부와 가난


"새로운 부자들은 기독교 사회의 유력자들 가운데 자리 잡았다. 새로운 부에 대면하여 새로운 가난이 그들의 활동을 탐욕과 악덕이 아니라 내가 언급한 '카리타스'와 미덕의 반열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부에 새로운 가난이 대립되었다. 이 가난은 더이상 원죄의 결과도 욥의 가난도 아니었고, 기독교의 영성에서 예수상의 변화와 관련해 가치가 부여된 가난이었다. 예수는 점점 초기 기독교 교리에서 구현된 옛 모습, 다시 살아난 신인(神人)이자 죽음의 위대한 정복자라는 옛 모습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헐벗음으로 상징되는 가난의 모델을 제공한 신인이 되었다. 1000년 이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사도들에게 돌아가자는 모든 움직임을 강력하게 선동한 것은 근원 회귀에 의한 갱신, '벌거벗은 채 벌거벗은 그리스도'를 따르자는 권고였다. 즉, 감내하는 가난과 자발적인 가난이 있었다."(115-7)


"무엇보다 탁발수도회, 주로 프란체스코 회는 자발적인 가난을 통해 새로운 부를 가난한 사람들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영적·사회적 수단을 찾아내려 했다. 13세기에 교회와 힘있는 속인들은 수도회의 영향 아래 한 가지 특별한 활동으로 새로운 부와 투쟁하고 새로운 가난을 장려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언제나 우선 교회의 주된 사업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그럴 만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기독교인들의 활동이었다. 바로 자선사업인데, 중세에는 일반적으로 자비로운 일이라고 했다. 인간의 자비의 기초가 신의 자비였다. 이러한 자비는 특히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는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틀림없이 다시 살아나는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13세기에는 기부에 의한 병원 설립과 운영이 특히 발달했다." "자선 행위의 진화는 프란체스코 회가 겪었던 것처럼 새로운 부와 가난의 등장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118-20)


9 13~14세기, 위기에 처한 화폐


"중세의 여러 화폐는, 일반적으로 화폐 주조권과 유통권을 가진 공권력이 정해진 법정 시세에 따라 유통시켰다. 그러니까 영주, 주교, 그리고 제후와 왕이 그런 공권력이었다. 이러한 법정 시세 말고도 업계가 정한, 부차적이고 유동적인 '거래상의' 혹은 '자발적인' 시세가 존재했다. 오랫동안 이 이중 시세는 상당히 안정된 채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13세기 말에 화폐 주조권을 가진 권력은 한편으로는 통화 단위로, 또 한편으로는 금속 무게로 표현되는 교환 가치를 변경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동은 화폐 유통을 경제 현실에 맞추기 위한 조치만은 아니었으며 제후들, 특히 그저 불완전한 세제를 갖추었던 프랑스의 왕에게는 자신의 부채를 줄이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방편이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상인들과 임금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했으므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수차례의 화폐 변동은 14세기 민중 봉기와 정치 소요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31-2)


10 중세 말에 개선되는 재무 체계


새로운 화폐 수요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킨 두 가지 주요 수단은 어음과 보험이었다. 이를 다루는 은행가들 간의 계약 체결은 때로 갱신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사체 결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령 '콤파니아'의 경우 계약 당사자들은 서로 긴밀이 연결되어 있었고 위험, 희망, 손실과 이익을 공유했다. '소시에타스 테라에'는 '코멘다'와 가까웠다. 대부업자는 혼자 위험을 떠안았고 이득은 일반적으로 반씩 나누어 가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조항은 유연했다. 투자 자본은 상당히 다양하게 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직이 지속되는 기간은 일반적으로 한 사업, 한 여행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일정시간─1년, 2년, 3년, 대개 4년─ 따라 정해졌다." "일부 상인, 일부 가문, 일부 집단을 중심으로 복잡하고 힘있는 조직들이 발달했는데,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이러한 조직에 '컴퍼니'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가장 유명할 뿐 아니라 널리 알려진 조직은 피렌체의 저명한 가문들이 운영했다. 페루치가, 바르디 가, 메디치 가 말이다."(152-3)


11 중세 말의 여러 도시와 통치 체제 그리고 화폐


"도시는 15세기 사회의 주요 시련 가운데 하나를 겪었다. 부채를 진 것이다. 이는 분명 공동의 부채, 그러니까 공채거나 개인의 빚이었으며 무엇보다 공채 판매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부채는 사회 계층 간에 적대감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상호 신뢰를 무너뜨렸다. 도시를 사랑하는 시민의 마음도 시들해졌다. 그리고 도시들은 권한을 침해하는 제후와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채는 여러 측면에서 도시의 힘과 이미지를 약화시켰다. 중세 유럽은 13세기에 상당히 도시화되었는데, 재정에 관련된 문제로 점차 제후들에게 예속되었다. 중세 도시는 충분한 재정 능력을 갖지 못했다. 도시는 화폐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강제력을 보유하지 못한 반면, 그런 수단을 갖고 있었던 제후들은 나중에 화폐가 우세해졌을 때 국가 지도자 위치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혜택을 입은 사람은 채권자들 뿐이었으며, 그들에게서는 정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부자의 모습이 보였다."(157-8)


12 14~15세기의 가격과 임금 그리고 주화


"전쟁은 격렬한 전투나 소규모 교전 그리고 노략질 형태로 15세기 중반까지 거의 모든 서구사회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왕정 체제 혹은 (도시 같은) 공동의 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세금은 인정받기 어려웠고 제후들은 차입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차입금은 기독교 사회를 항상 위기로 몰아갔다.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는 피렌체의 바르디 가에서 돈을 차용했으며 이로써 바르디 가는 파산하게 된다. 백년전쟁 후에 프랑스를 재건하기 위하여 샤를 7세는 자크 쾨르에게 돈을 빌렸는데, 나중에 그 돈을 상환하지 않기 위해 자크 쾨르를 투옥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막시밀리안 황제가 뉘른베르크의 명가인 푸거 가문에서 돈을 차용했다. 푸거 가문은 황제의 도음을 타이롤과, 심지어 에스파냐의 새로운 구리 광산과 은 광산의 개발에 이용했다. 푸거 가문은 샤를 캥과 에스파냐 펠리페 2세를 돕는 은행가가 되었으나, 에스파냐 군주정의 국가 파산으로 몰락하고 이어 16세기에는 사라지게 된다."(173-4)


13 탁발수도회와 화폐


"현대 및 동시대 역사학자들은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가 역설적으로 자발적인 가난이라는 개념에서 '시장 사회'에 영감을 줄 화폐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프란체스코 회가 하층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제공하기 위해 신용대출 기관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15세기 말에만 그렇게 하긴 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가난은 중세 말까지 여전히 탁발수도회, 특히 프란체스코 회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다니엘라 랑도는 공영 전당포를 〈담보물의 보증과 저금리 지불이라는 수단으로 도시의 노동 계층에게 단기 대출을 보장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로 정의했다." "공영 전당포를 이끄는 사람들은 무상으로 대출을 보장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매우 낮은 이자율, 약 5퍼센트를 유지하는 선에서 그쳤을 뿐이다. 공영 전당포는 맹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어찌 보면 고리대금 형태가 보였기 때문이다."(195-7)


14 인문주의와 메세나 그리고 화폐


"기독교 교리는 화폐에 다소 주저하고 심지어 적대감을 보였다. 교회가 중세의 모든 영역에서 주요 권력 기구였기 때문에 화폐를 불신하는 교회는 적어도 14세기까지 사상가들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을 인도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변화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화폐에 대해 사실상 사고를 전환했다고 보았다. 이 시대에 부자의 정의가 변했으며 부가 화폐와 동일시되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소수의 문화적·사회적 엘리트 계층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를 부인할 수는 없다. 중세 말에 등장한 그러한 엘리트 계층을 인문주의자라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문화적 전환을 촉발한 것은 상인에 대한 태도 변화일 것이다. 일찍이 교회는 우선 지옥에 내던져질 운명에 처했던 상인을, 주로 그의 유용성을 인정하고 13세기에 정의의 요구에 포함되는 일부 가치를 준수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203-4)


15 자본주의 혹은 카리타스?


"중세 유럽에 존재하지 않은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일까? 첫 번째는 귀금속이든 이미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던 지폐든 간에 화폐를 충분히, 정기적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세는 수차례 통화 기근 위기에 몰렸고 15세기 말에도 그랬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된 후, 많은 양의 귀금속이며 금과 은이 정기적으로 유럽으로 운송된 다음에야 비로소 자본주의에 대한 첫 번째 욕구가 충족되었다." "자본주의가 정착되는 데 요구되는 두 번째 조건은 다양한 시장 대신 단일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중세에는 시장이 열려 곳곳에서 다양한 주화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과 롬바르디아 사람들은 주화 사용을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단일시장은 16세기에 접어들어 비로소 구성되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세 번째 체제는 어떤 기관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15세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인정받지 못했으나, 1609년 마침내 암스테르담에 설치된 상품 및 증권 거래소이다."(216-7)


"폴라니는 중세에 독립적인 경제가 존재하지 않았고 사회 전체가 종교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경제 역시 그 속에 얽혀 있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화폐는 중세 서구사회에서 하나의 경제적인 실체가 아니다. 화폐의 본질과 사용은 다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역사학자 아니타 게로잘라베르는 요한의 사도서한(5, 4, 8, 16)에 따라 중세사회를 지배한 신은 '카리타스'였다고 상기시켰으며 〈자비는 기독교인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덕목으로 보인다. 자비에 반한 행동은 신에 반한 행동이며 자비를 거스르는 죄는 논리적으로 가장 중대한 죄에 속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폐가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행위인 고리대금이 어떻게 가장 중대한 죄 가운데 하나로 단죄되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카리타스'는 중세의 인간과 신 사이에 그리고 중세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중요한 사회적 관계를 구성했다." "따라서 중세에 확산되는 화폐 문제는 기부의 확대와 연관지어야 한다."(2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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