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3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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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1장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애와 사상의 발전 


"아테네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죽기 직전에 안티파트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상황(외국인 거주자)에 대해 불편을 느끼던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피력하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동일한 일들이 시민에게서만큼 이방인에게도 적당하지 않다. 아테네에서 지내는 것은 어렵다〉라고.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른 시민들과 더불어 살며 폴리스에 [공동으로] 참여하는(koinonein) 삶 혹은 오히려 정치적 공동체(koinonia)로부터 차단된 외국인과 같은 삶, 이 둘 가운데 어떤 삶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논하고 있다.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오히려 그로 하여금 학문 연구 활동에 전심전력으로 몰입할 수 있게 동기를 부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출신이 아테네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로서 아테네의 현실 정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는 『정치학』에서 중립적 관점에서 당시의 정치 상황을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620) 


"『정치학』 제1권에서 자연적 노예제를 옹호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노예에게도 친절함을 베풀며, 자신을 돌봐준 노예들을 적절한 시점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라고 유언을 남긴 점은 조금은 당혹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언장에 남긴 대로 노예를 해방시켜준 점에 비추어보면, '주인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유라는 보상(athlon)을 얻을 수 있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자연에 의해 그들 양자에게 부여된 상응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때 노예와 주인 서로에게 어떤 유익함과 친애(philia)가 있게〉 된다(1255b12-13)라고 말하는 점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노예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없지만, 인간인 한에 있어서는 그를 향한 친애가 존재한다. ······ 인간인 한에서 친애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1161b2-8)라고 말하는 점을 고려하게 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항이다."(625-6)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 곳곳에 플라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을 도입한 사람들이 우리의 벗들〉이라고 표명하면서 자신이 플라톤의 추종자에 속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가 스승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때조차도 그는 늘 스승에 대한 깊은 존경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애정을 표명하곤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두고 〈사악한 사람은 찬양할 자리를 갖지 못하는 사람으로, 죽어야만 하는 인간들 중에서 누구도 능가할 수 없는 플라톤만이 그 자신의 삶과 자신의 저술 탐구를 통해 인간이 동시에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명확히 보여줬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리학 작품을 가리키는 『오르가논』이 아카데미아 시절에 쓰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플라톤의 학생으로서 스승의 철학에 도전하는 일에 전혀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다."(643-4) 


"『정치학』 제1권 제2장에서 피력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자연주의에 기초하는 세 가지 기본 테제는 이렇다. 첫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둘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셋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개인에 앞선다. 다음으로 그가 냉정하고도 중립적인 태도로 정치체제에 대한 관찰자로서의 정치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은 자신이 아테네에서 거류 외국인(metoikos)으로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옹호하는 정치체제는 다수가 번갈아 지배하는 민주정(인민정, 제3권 제11장 〈다중이 소수인 가장 좋은 사람들[tous aristous oligous]보다도 더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견해가 ······ 어쩌면 어떤 진리마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겠다〉)과 가장 우월한 자가 지배하는 왕정(제3권 제17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자신이 경험한 아테네의 민주정과 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의 절대적 왕권의 영향으로 추정할 수 있다."(655-6) 


# 제4권에서는 귀족정과 폴리테이아가 혼합된 '혼합정'이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류상 제작학에 속하는 수사학을 '오르가논'(논리학)이나 정치학에 포함하는 것이 그 목적에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물론 변증술이나 수사학적 방법이 논증을 만들기 위한 기술(dunameis tines tou porisai logous)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술에 대한 '짝패'(antistrophos)로 보았다. 하지만 수사학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설득적 논증을 고안하는 것 이외에도 연설가는 청중의 심리와 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즉, 연설가의 앎은 학문적 지식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를 향한다. 그래서 수사학은 인간의 감정을 해부해야 하며, 설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 연설가들은 경제적 문제, 군사적인 사항과 제도적인 정보를 포함한 앎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론』의 하나의 곁가지이자, 정당하게 정치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도덕적 성품에 대한 탐구〉라고 말한다(『수사학』 1356a25-27)."(662-3)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은 페리파토스의 지도자였던 안드로니코스가 헬레니즘 시기의 학문 분류 방식을 좇아 편집했다는 것이 일반적 정설이다. 이에 앞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의 크세노크라테스가 처음으로 학문을 삼분(三分)해서 분류했다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의 스토아 철학의 주요 부분도 논리학, 자연학, 윤리학으로 분류된다.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벡커판의 편집 순서도 논리학에 해당하는 『오르가논』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서 자연에 대한 탐구에 해당하는 『자연학』을 비롯하여 생물학에 관련된 작품들, 그 뒤를 잇는 문자 그대로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들'을 의미하는 『형이상학』이 자리하며, 다음으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비롯한 실천 영역에 적용되는 윤리학 저작과 『정치학』이 그 뒤를 잇는다. 맨 끝자리에서는 제작에 관련된 탐구에 해당하는 『수사학』과 『시학』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의 편집 순서는 그의 학문 분류 방식과도 얼추 맞아떨어진다."(671-2)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제6권 제1장에서 인간의 활동을 '안다(본다)', '행한다', '만든다'로 삼분하고 각각 이에 해당하는 앎을 이론지, 실천지, 제작지로 크게 구별한다. 이론지에는 자연학, 수학, 제일철학(혹은 신학), 영혼에 대한 탐구 등의 학문이 귀속되고, 실천지에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그리고 제작지에는 시학과 수사학 등이 포함된다. 이론학(epistemai)은 그 자체적인 앎을 추구하고, 실천학은 개인과 폴리스에서의 행위의 좋음과 관련되며, 제작학은 아름답고 유용한 대상을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가령 선박 건조, 신발, 시(詩), 건강이나 힘과 같은 좋은 성질들이 실천학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오르가논'으로 총칭되는 논리학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모든 학문을 위한 예비학이자 도구였지 결코 독립된 지위를 갖는 학문으로 분류되지 않았으며, 이런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논리학은 이론철학과 자연철학을 탐구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될 수 있다."(672-3) 


"아리스토텔레스는 고결하게 저 높은 세계에 있는 것들에서만 아름다움(kalos)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생물학 탐구자로서 아무리 비천한 생명체들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가 언급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일화를 예로 들어보자. 철학자로 좋은 평판을 받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만나기 위해 그를 방문한 사람들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부엌의 화덕 가에 쪼그리고 앉아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거렸다. 그러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두려워 말라는 듯이 〈들어오시오. 여기에도 또한 신들이 있소이다〉(einai gar kai entautha thous)라고 말을 건넸다. 이 일화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현상세계에서도 진리가 찾아질 수 있음을 보이면서 현상세계에 대한 탐구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모든 동물에도 무언가 본성적이고 아름다운 것〉(tinos phusikou kai kalou)이 있음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저 없이 동물에 대한 탐구에 다가서야만 한다는 것이다."(678-9)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윌리엄 키스 C. 거스리) 


1.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목표를 독단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명료화와 문제 자체들이 포괄하고 있는 난점(아포리아)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일에 두었다. 

2. 직접 관찰한 경험과 상식을 기반으로 학적 탐구를 수행─플라톤과 비교하여 강력한 경험론적 측면─하고 있으며, 관찰과 이론이 일치하는 경우에 그 이론을 타당하다고 판단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정초하는 일반적인 전제를 찾는 방법이 바로 논리학이라고 보았기에, 자기의 학적 인식의 기반을 이루는 논리학을 독립적인 포괄적 체계로 논구했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특징 짓는 사유 형식은 목적론적인 사유 방식이며, 그에 따르면 한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작업은 사물의 목적인을 제시하는 것과 동일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방법(김재홍) 


1. 해당하는 주제에 대한 일련의 엔독사(통념, ta endoxa)를 수집하여 하나의 부류로 분류한다. 여기에 속하는 엔독사는 인간이 함께 공유하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것들이다. 

2. 이것들 중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을 탐지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 작업은 해당 학문의 원리와 사실에 부합하는가와 관찰에 부합하는가라는 '논리적 정합성'에 따라 행해진다. 

3. 부적절한 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부류의 엔독사를 만들어낸다. 가장 유력한 것들을 포함하는 최적의 부류를 선택하기 위해 매듭을 풀고, 왜 그것들이 그런지를 밝혀낸다. 

4. 경험적으로 수집된 '현상'을 개념 분석하여 정교하게 해석한 엔독사는 충분하게 증명된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엔독사는 한 주제의 탐구를 위한 참된 후보가 될 수 있다. 


"『변증론』은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탐구의 중요한 도구가 되는 변증술적 방법(dialektike)을 논하는 저작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인 분야와 경험적 탐구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 방법의 도구라 할 수 있다. 그는 학적 탐구에서 잠정적이고 단계적인 절차를 밟는 접근 방법을 취한다. 그 방법과 절차는 우선, 다루어질 문제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정보를 수집하여 그 문제를 적절하게 형식화하여 진술한 다음, 그 진술들이 문제의 핵심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질문으로 정립되고 있는지를 검토하고, 이어서 그 논쟁점을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원래 사유 방향에 부적합한 것들은 폐기하며 새롭게 문제를 정립해나가는 길을 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적인 탐구의 태도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체계는 독단적이지 않으며, 그의 철학 방법은 진리 탐구 모형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704) 


"인간의 행위와 감정과 관련된 실천철학의 목적은 원칙적으로 〈앎이 아니라 행위〉이다. 앎(gnosis)은 수학과 같은 정확성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행위(praxis)를 목적으로 하는 윤리학은 개연성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1권 제3장에서는 윤리학의 주제와 물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윤리학적 주제들은 늘 어떤 가변성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대강에서 또 개략적으로(pachulos kai tupo) 참을 밝히는 데 만족헤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들에 대해 논의하고 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에, '대부분의 경우에서 그런 것'(결론)들을 추론하는 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윤리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그 주제의 본성(phusis)이 허용하는 한, 그만큼의 정확성을 추구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수학자에게는 엄밀한 '증명'을 요구하며, 수사학자에게는 설득적 논의만을 요구한다."(705)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의 임무가 아포리아의 해소에 있음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철학에 대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정을 떠올리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곳에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법의 발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서 난점을 푸는 일(euporean)은 먼저 난점이 왜 일어나는지를 상세하게 밝혀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diaporean', 즉 난점을 상세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를(aporean)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중에 가서 아포리아를 해소한다는 것은 애초의 아포리아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diaporean'의 과정과 'aporean'의 과정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양자가 동의어로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diaporean'은 난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주어진 난제에 얽혀 있는 사항을 상세히 들춰내는' 작업을 의미한다."(7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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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사 - 헤로도토스에서 현재까지
앨런 라이언 지음, 남경태.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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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권 헤로도토스에서 마키아벨리까지


1부 고전적 이해


1장 왜 헤로도토스인가?


"우리가 아는 정치사상이 아테네에서 생겨난 이유는 아테네인들이 무역을 했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무역을 통해 그들은 민족들마다 사회를 조직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구약성서의 정치사는 정치를 피하기 위해 애쓴 민족의 역사다. 그들은 신이 직접 자신들을 다스린다고 여겼다. 신의 율법에 복종하거나 반항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신이 그들의 부탁을 듣고 왕을 선택하도록 허용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정치사회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관직을 얻으려는 경쟁이나 왕위 계승 같은 낯익은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정치는 전혀 은총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정치는 발전이었으나, 플라톤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결함을 가진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역사가들과 철학자들이 정치의 결함을 분석하기 시작했을 때, 논쟁을 즐기는 아테네인들에게서 정치사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34-5)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에클레시아ecclesia, 즉 민회였다. 이것은 현대의 입법, 사법, 행정기구에 해당한다. 민회의 결정에 항의하려면 다음 민회, 혹은 민회의 일부인 법정을 통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민회는 구성원 총수가 4만 명이었으나 주로 작은 기구들을 통해 활동했다. 500명으로 이루어진 법정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불레boule라는 심의회를 구성하는 500명은 1년간 아테네의 행정을 담당했으며, 30명으로 이루어진 프리타니prytany는 한 번에 한 달 임기로 불레의 운영위원회를 구성했다. 두 기구 모두 엄격한 자격 심사를 거친 사람들 중에서 이름을 추첨해 인원을 발탁했다. 이후 두 세기에 걸쳐 새로운 위원회와 법정이 실험된 결과, 권력이 점차 낡은 귀족기구의 수중에서 민회로 이양되었다." "누구든 공직을 남용하면 민회에 의해 고발되거나 해임될 수 있었다. 검사라는 직함은 없었고, 모든 사건을 개인이 법정에 제출했다."(38-9)


"일부 공직은 종신 임기였는데, 상속이나 추첨으로 선발했다. 군사권에 관한 한 클레이스테네스와 그의 후계자들은 민주적 평등의 원칙을 적용하지 않았지만, 민회는 장군(스트라테고스)이라고 해도 즉각 해임할 수 있었다. 그것이 아테네인과 우리의 중요한 차이다. 우리는 대표를 선출하지만 그들은 시민들 가운데서 무작위로 인물을 발탁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추첨 대상을 적격자로 한했으나, 아테네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면서 적격성을 가문이나 재산으로 제한하는 관행이 사라졌다. 스트라테고스나 기타 행정직의 경우에는 민주주의의 원칙보다 경험, 전문성, 신뢰성이 더 우선시되었다. 펠로폰네소스전쟁 이전부터 전쟁 초기까지 아테네를 이끌었던 가장 유명한 스트라테고스인 페리클레스는 여러 차례 재선되었고 현대의 대통령과 같은 권한을 행사했다. 투키디데스는 그의 생애를 언급하면서, 〈명목상으로 민주주의였던 것이 실제로는 1인자에 의한 지배가 되었다〉고 말했다."(40)


"클레이스테네스의 체제와 현대 민주주의의 차이는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의 차이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민회의 권한에 대해 헌법상의 규제가 없었고, 공적 생활과 사생활 간에 확고한 구별도 없었다. 아테네인들은 추첨에 따른 발탁을 가장 평등한 권력 분배 방식이라고 여겼다. 지금 우리가 배심원을 무작위로 선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테네식 평등은 정치적으로 편협했다. 에우파트리다이eupatridae, 즉 출신이 좋은 사람이 사회적 상위 신분이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했고, 아테네인이 외국인보다 우월했으며, 노예가 사회의 최하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회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민회가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첨꾼에게 홀리거나, 사기꾼에게 속거나, 말만 번드르르하고 교활한 자에게 끌려갈 수 있었다. 일단 궤도에서 이탈하면 민회는 대단히 잔인해졌다."(41)


2장 플라톤과 반反정치


"『국가』의 표면상 주제는 『고르기아스』의 후반부 주제와 마찬가지로, 악을 행하기보다 당하는 편이 과연 언제나 더 나은가, 그렇지 않은가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그렇다고 말하지만, 『국가』는 대체로 정의로운 폴리스를 탐구하며, 개인의 정의와 국가의 정의가 동일하다는 전제를 취하고 있다. 정의로운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은 이 주장을 근거로 삼고, 정의는 소규모보다 대규모로 관찰하기가 더 쉬우므로 개인보다 폴리스에서 먼저 정의를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주장은 아니더라도 괜찮은 수사적 장치다. 폴리스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기 위해 그는 우회로를 택해 칼리폴리스, 즉 아름다운 도시 혹은 유토피아를 상정한다.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완벽하게 정의로운 사회의 지도자들이 받아야 하는 교육, 그리고 과열되고 변덕스럽고 철저히 세속적인 아테네 민주주의와 전혀 다른 사회의 사회·경제제도다."(88)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우리가 타고난 품성에 잘 어울리는 사회적 지위를 차지할 때 행복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조화로운 자연적 위계를 가정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논의는 호소력을 잃는다. 능력주의가 지지를 얻으려면, 타고난 지도자가 책임을 맡아야 사회가 잘 운영되고 일반인들은 권력과 책무를 지는 자리보다 종속적인 지위에 있을 때 더 행복하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야 한다." "플라톤의 논의는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고 평이한 사회학적 진술로 바꿀 수도 있다. 이를테면 폴리스─혹은 현대국가─가 최선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힘없는 노동자, 자신의 직분을 잘 아는 군인계급, 당연히 지배권을 가졌다고 여기는 교육받은 지배계급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계급 구조가 필요하다는 논리다." "그것은 설령 사실이라 해도 그저 사회과학의 사실에 불과하다. 거꾸로 생각하면 이렇게 완벽하게 구조화된 사회는 유토피아라기보다 디스토피아일 것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한다."(106-7)


"정의에 대한 견해 가운데는 플라톤이 고찰하지 않으려 했던 두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첫째는 법치이고, 둘째는 정치적 경쟁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법이 사라진다. 철학자-군주가 지배하면 법이 규제하는 갈등들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정의의 중요한 측면도 사라진다. 정치적 맥락에서 정의의 또다른 의미는 권력의 공정한 배분과 관련된다. 이를테면 신분이 높은 사람이 다스려야 할지, 다수가 다스려야 할지가 그런 문제다. 그 문제에 대해 플라톤은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답한다.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이 국정을 맡으면 그 자신까지 포함해 누구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뜻대로 삶을 영위해가는 가운데 정당한 이해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생각은 플라톤에게 없다. 그것은 정당하면서도 상충하는 이해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비非정치적 정치가 된다. 지배자는 과제와 보상을 올바르게 분배하고 수여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109-10)


3장 아리스토텔레스 : 정치는 철학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자연이 사회적 규범의 근거라고 말한다. '태생적' 노예가 있느냐는 그의 물음은, 남들에게 노예로 봉사하는 것을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삼은 사람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노예제가 있는 이유와 노예가 노예인 것이 좋은(자연스러운) 이유가 다 설명된다. 무엇이 '자연스러운지' 알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과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다 알 수 있다. 게다가 자연은 위계적이다. 모든 사물은 선을 지향하며, 최고의 사물은 최고의 선을 지향한다. 인간 존재는 생물들의 위계에서 맨 꼭대기에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최고의 선을 추구할 수 있느냐는 관점에서 인간 행동을 이해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도 편견에 빠질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 선한 정치의 모델을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자연이 지향하는 것을 알아내려면 자연을 관찰해야 하듯이 자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연구하면 자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한다."(125)


"오늘날 우리는 개인의 권리나 요구를 고찰하면서 어떤 국가가 개인들에게 충성을 요구할 정당한 권리를 가지는지, 혹은 개인들의 행복을 가장 잘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리면, 즉 개인은 국가에 '선행'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은 다르다. 개인은 자연적으로 폴리스 속에서 살도록 되어 있으므로 폴리스가 개인에 '선행'한다. 그 결과, 정치학은 지배적 학문 혹은 지배적 예술이 된다. 정치학의 목적은 최선의 국가가 탄생하고 번영하는 조건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은 그 주인인 인간이 번영을 누리는 데 이바지하는 역할로써 설명된다." "우리는 연극을 이해함으로써 연극의 등장인물들을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폴리스를 이해함으로써 시민을 이해한다. 배우라면 누구나 햄릿이나 리어왕을 연기하고자 하듯이, 자주적이고 지성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폴리스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역할을 하고자 할 것이다."(127-8)


"세 가지 선한 정부 형태는 왕정, 귀족정, 폴리테이아politeia다. 여기서는 하나, 소수, 다수의 지배자가 최고 권력을 소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위해 통치한다." "헌법을 제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편협한 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할 사람들에게 권력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민주파는 가난한거나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시민의 자격이 박탈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의 두 가지 이유에서 틀렸다고 보았다. 빈민과 단순 직업을 가진 사람은 전 사회의 이익을 통찰할 만한 여유가 없다. 계급으로서 빈민은 부자를 증오하며, 온갖 수단을 동원해 부자의 재산을 가로채려 한다. 해결책은 균형 잡힌 폴리테이아의 '제한 민주주의'나 '확대 귀족정'이다." "그 바탕에 깔린 생각은 복잡하지 않다. 헌법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면 분노를 낳고 너무 폭넓어도 마찬가지다.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답이 있다."(151-2)


4장 로마의 통찰력 : 폴리비오스와 키케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폴리비오스와 키케로로 넘어가는 것은 정치에 관한 다른 사고방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철학으로부터 통치술로 전환하는 것이다." "폴리비오스의 『로마제국의 성장』과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실용성, 역사, 경험을 중심으로 하며, 플라톤과 홉스는 정치가들이 즐겨 구사하는 임시변통의 해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오직 경험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거나 우리가 배우는 게 다 어림짐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통치술은 현역 정치인, 정치가, 지배자에게 초점을 맞추며, 정치가가 운용해야 하는 정체와 제도의 실용성을 중시한다. 경험이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혜로운 사람은 경험의 교훈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철학은 정치가가 자기 행동의 도덕성을 평가하고 정체가 다른 지배 형태의 정당성을 평가한다고 본다. 통치술은 경험의 교훈을 가르치기 때문에 경험적 편향이 강하다."(174-5)


"폴리비오스는 로마의 정체에서 집정관을 군주정의 요소로, 원로원을 귀족정의 요소로, 민회를 민주정의 요소로 보았는데, 후대에 그 생각이 일반화되었다. 현대 미국 독자는 미국 헌법의 기원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좀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폴리비오스는 현대와 같은 행정, 사법, 입법의 3권분립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현대 3권분립 원칙에서처럼 견제와 균형을 중시했지만, 권력을 분립하는 특별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또한 로마의 정체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입법부, 분리되고 독립된 사법부에 부응하는 행정부의 노선에 따라 조직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의 요소들이 하나의 느슨한 체계로 혼합되었을 뿐 지금 우리와 같은 행정, 입법, 사법 기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이해하는 것과 같은 권력분립의 관념은 몽테스키외의 시대까지 명확하지 않았다. 아마 몽테스키외 자신도 그다지 명확히 사고하지 않았을 것이다."(190)


"공화정의 본질과 정치의 목적에 관한 키케로의 주장은 공화주의 전통을 확고하게 정의했다. 그것은 결코 작은 성과가 아니었다. 국가의 본질에 관한 그의 정의는 훗날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공적인 것)는 레스 포풀리res populi(민중의 것)다. 레스 푸블리카는 거의 번역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공적인 것'은 다소 투박하고 모호하다. 레스 푸블리카는 기본적으로 제도 전체를 가리키며, 모든 사람의 이익을 추구하는 제도를 유지하는 모레스mores(도덕과 사회적 관행)를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레스 푸블리카는 레스 포풀리, 즉 민중이 국가다. 민중이 공화정을 '소유'하지 않는다면 공화정은 없다. 키케로는 폴리비오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진정한 공화정의 특성을 명료하게 정의하는 한편, 정의가 없으면 국가가 대규모 도둑떼로 전락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을 예고한다. 정부의 제도가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왜곡된다면 레스 푸블리카는 있을 수 없다."(201-2)


"레스 푸블리카가 가능하려면,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의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과제가 되도록 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공동 이익이 이성에 따른 행복의 추구라고 말한다. 정치는 그에 걸맞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을 숙성시켜야 한다. 키케로는 사회를 도구적으로 설명하는 플라톤을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를 좇아 인간 존재는 본성상 사회적이며, 서로간의 협력으로부터 얻는 현실적 보상과 무관하게 그저 함께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두 공동 이익을 공유하며 그것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때로는 우리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타인이나 공동의 이해관계와 상충할 수도 있다. 좋은 제도는 공동의 이해관계가 개인적 이해관계에 침식되지 않도록 하고, 개인적 이해관계의 충돌이 파멸로 나아가지 않도록 방지한다. 그런 제도가 과연 무엇인지가 정치이론의 주제다."(202)


5장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


"아우구스티누스는 알라리크의 침략군이 로마를 약탈한 지 3년이 지난 413년에 『신국』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신국』에서 키케로를 뒤집어 그리스도교 정치신학을 만들어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이성을 가졌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 『신국』을 쓸 무렵에는 이성이 인간에게 늘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해준다고 믿지 않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매우 제한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볼 때 이성은 우리가 이러저러한 죄의 길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줄 따름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에 관한 키케로의 설명이 정의의 본질에 관한 정확한 설명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즉 모든 사람을 정당하게 대우하려는 확고한 의지가 바로 정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부인하는 것은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현실의 모든 국가가 키케로적 의미에서 참된 레스 푸블리카가 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현실의 모든 사람들은 키케로적 의미에서 현실의 정의를 실행하는 정치 공동체의 포풀루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232-3)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는 모든 세속 국가들이 폭력적이고 자기기만적인 사람들의 놀이터일 뿐이고 세속적 영광은 덧없다. 얼핏 생각하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적 삶에 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듯하고 국가를 오로지 경멸스럽게만 바라본 듯하지만, 우리는 그를 그렇게 바라보려는 유혹을 버려야 한다."(242) "세속의 왕국은 이 세계에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세계에서 취하는 선(이익, 재화)은 신과의 통일에서 얻는 궁극적인 선과 무관하지만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현세의 평화는 우리가 장차 신과 함께함으로써 누리게 될 평화와 무관하지만 그 평화도 대단히 중요한 선이다. 우리와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창조물이다. 이 세계에 사는 동안 우리는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 그런 현실 가운데 하나는 종교가 세속의 악을 막아주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도는 로마의 몰락에 책임이 없었고 마르스는 로마의 번영에 책임이 없었다. 세속적 성공과 실패는 세속적 원인을 가진다."(244)


"정말 아우구스티누스다운 견해에 따르면, 국가란 과도한 무질서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세속적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그 열망은 늘 무질서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리 많은 법도 그것을 종식시키지는 못한다." "우리가 주교의 품성을 따지지 않고 그가 집전하는 성사를 그냥 수용하듯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이유는 그가 지배자이기 때문이지 훌륭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세속도시의 제한된 용도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과, 교회를 포함한 모든 세속 조직의 혼합적 성격에 관해 그가 말한 모든 내용을 연관시켜보면, 자연스럽고 즉각적인 결론이 나온다. 그것은 국가의 과제가 외부를 돌보는 데 있다는 것, 즉 평화를 지키고, 재산을 단속하고, 법정을 만들어 분쟁을 해소하는 것과 같은 유용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심층적인 것, 삶의 의미나 덕의 궁극적 보상 같은 문제는 다른 데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254-5)


2부 그리스도교 세계


6장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아퀴나스까지


"정치권력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견해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언한 것에 근거한다.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것〉이다." "왕의 직위는 신이 정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점이 현재의 왕에게 어디까지 복종해야 옳은지의 문제에 답을 주지는 못했다. 16세기까지 전승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지배자가 신민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명했다면 신민은 따를 필요가 없었다. 그 이외에는 지배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따르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적법한 지배자를 타도할 수 있는 적극적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수동적 복종과 짝을 이루는 것은 수동적 불복종이었다." "그렇다면 지배자가 신의 보증을 잃은 것을 누가 판단하는가? 신민에게서 지배자에 대한 복종을 해제해줄 권리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 당연히 교황은 이단이나 도덕적 타락을 이유로 자신이 왕의 신민에게서 충성을 면제해줄 수 있으며, 자신이 왕을 파문할 경우 신민의 복종 의무도 사라진다고 주장했다."(273-6)


"암묵적으로 이것은 교황에게 라티오네 페카티ratione peccati(죄로 인해)를 구실로 왕을 해임하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교황은 당연히 그 권한을 내세웠다." "교황이 가진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위의 이미지는 폐위의 법적 과정조차 금지하는 듯했고 심지어 사임조차 금지하는 듯했다. 교황의 권력에 관한 이론에 따르면 모든 교황은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권력을 받았다. 교황은 베드로의 계승자였으며, 베드로 이전에는 교황이 없었다. 교황은 모두 절대적인 존재였다. 어떤 교황도 후계자를 구속할 수 없었으며, 한 교황이 내준 허가는 다른 교황에게 통용되지 않았다. 교황으로 선출될 때 교황은 베드로의 플레니투도 포테스타티스plenitudo potestatis, 즉 그리스도가 부여한 매고 푸는 힘을 받았다. 하지만 세습 귀족들은 추기경단과 달리 왕이 내준 허가가 후임 왕들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절대군주정보다 법치에 관심이 있었다. 추기경들은 교황이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므로 동기가 달랐다."(279-80)


"중세 초기 정치사상의 지적 장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5세기 후반 교황이 쓴 겨우 두 문단짜리 눈에 띄는 산문이었다. 겔라시우스 1세는 492년에서 496년까지 4년 동안 재위한 교황인데, 그때는 마침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서방의 마지막 로마 황제는 16년 전에 폐위되었고, 가톨릭교회는 이단과 이교도에 포위되었다. 로마는 전염병에 시달렸고, 교리상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상급자였던 교황의 권위가 크게 흔들렸다. 총대주교는 황제의 비호를 받았다. 황제는 총대주교를 임명하는 위치였으므로 자연히 교황의 권위가 총대주교보다 높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논쟁의 일환으로 494년 겔라시우스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것이 훗날 두 자루 검의 교리라고 알려진 내용이다. 편지에서 그는 세속권력보다 영적 권력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종국적으로 교황은 황제의 도덕에 관해 신과 교감하기 때문이었다."(294-5)


7장 아퀴나스와 종합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그리스도교 신앙과 화해시키려 했다. 그리스도교와 철학의 미묘한 관계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당시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신앙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비합리주의에 빠지게 되고, 이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이성은 자연의 빛이지만, 자연적 이성은 우리를 너무 먼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 아퀴나스의 유명한 말인 그라티아 나투람 논 톨리트 세드 페르페키트gratia naturam non tollit sed perfecit는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완성한다〉는 뜻이다. 이성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전부 밝혀줄 수 없지만, 우리는 신이 준 그 도구를 나름의 한계 내에서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아퀴나스가 적절한 범위 안에서 이성의 이용을 확신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더 극단적인 태도와 크게 대비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이 기본적으로 우리를 미혹시킨다고 말한 바 있으며, 명석하게 논증하다가 오히려 논증의 명석함을 잃어버리는 철학자의 예를 들었다."(314-5)


"아퀴나스는 재화와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인정한다. 신은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므로 외부세계에 대해 한 가지 지배 형태─소유권보다 주권으로 이해하는 게 더 낫다─만 가진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세계를 인간에게 내주면서 이용하고 개선하도록 했다. 또한 신은 인간에게 열등한 생물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었다. 그것은 곧 외부세계에서 인간의 삶에 유용한 것이면 무엇이든 전유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다. 개인의 사유재산이 가지는 장점에 대해 아퀴나스는 그것이 다른 종류의 재산보다 더 효율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를 상기시킨다. 사람들은 공동재산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잘 돌보며, 자기가 어떤 것을 돌봐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인간은 필요할 때 진정으로 남들과 공유할 수만 있다면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 그러나 자신의 법적 소유권을 단단히 움켜쥔 채 남들의 생존 수단을 부인하면 결국 그 소유권도 무효가 된다."(332-3)


"아퀴나스의 『군주의 통치에 관하여』는 온건한 군주정을 소박하게 옹호하는 내용이다." "1인 지배는 그 고유한 원칙에 부응한다면 최선의 정부 형태지만, 그 반대인 1인 실정 혹은 폭정은 최악의 정부 형태다. 폭군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폭군의 지배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경우는 오로지 폭군을 타도하려는 시도가 더 나쁜 악을 유발하게 될 때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수동적 복종이나 수동적 불복종의 주장은 없다. 또한 키케로처럼 정치적 살해에 대한 열정도 없다. 왕의 권력은 공동체의 합의에 근거하므로 왕을 왕위에서 몰아내는 것도 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공동체의 행위여야 한다. 이 명백하게 현명한 견해는, 아퀴나스는 언급하지 않았어도 다른 사람들이 언급한 의문을 제기한다. 누가 공동체를 대변하는가? 1680년 로크는 혁명을 논의할 무렵 '하늘에 대한 호소'라는 말을 만들었다. 한 세기 뒤에 많은 미국 혁명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344-5)


8장 14세기 공위 시대


"14세기 벽두에 정치사상이 발달하게 된 배경은 교회와 국가, 특히 교황령과 제국의 낯익은 다툼에 있었다." "겔라시우스가 제기한 두 자루의 검 이론은 교회법과 민법 법률가들에게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까다로운 문제들─이를테면 영적 검이 우월하다는 것은 그 검을 가진 사람이 세속의 지배자에게 명할 수 있다는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교황은 모든 사람에게, 특히 황제에게 어떤 일이든 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교황이 일상적인 사법적·행정적 역할의 측면에서 세속의 지배자를 대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없었다. 검은 한 자루가 아니라 엄연히 두 자루였다. 또한 영적 검이 우월하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영혼이 신체보다 우월하고 신성한 사안이 세속의 사안보다 우월하다는 것도 부인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성직자에 앞서는 세속 법정의 권리, 교회 법정의 강제력, 과세 문제 등의 쟁점들은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349-50)


"『제정론』 1부에서 단테는 오로지 이성만을 바탕으로 군주정을 정당화하며, 3부에서는 교황이 세속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전거가 성서에 없다고 논증한다. 단테가 경멸하는 것은 교황의 영적 권력이 아니라 그것이 세속의 분야까지 지나치게 뻗어가는 현상이다." "그가 거부한 것은 교황이 황제와 기타 군주들보다 법적·정치적 상급자라는 보니파키우스 8세의 주장이었다." "(단테가 보기에 선한 정부와 선한 삶의 성취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노력으로 될 수 없다. 종種 전체가 함께 달성해야만 한다. 뭔가를 성취하려면 당연히 서로 간의 동료애와 도움이 필요하지만, 완성을 지향한다면 작고 제한된 조직에 만족할 수는 없다. 우리는 인류 전체가 완성을 추구하는 보편적 인간의 상태를 상상해야 한다. 〈인류 안에 무수한 개인들이 있어야 하며, 이들을 통해 이 잠재성이 실현될 수 있다.〉 우리가 충성을 바쳐야 하는 대상은 이러저러한 왕, 백작, 공작이 아니라 바로 보편적 군주정이다."(359-61)


"파도바의 마르셀리우스가 쓴 『평화 옹호자』는 교황이 절대권력을 행사하거나 세속 정치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오랜 기간 치밀하게 연구한 결과 세속권력의 토대가 피지배자의 동의에 있다고 보았다." "마르실리우스는 더욱 대담하게, 이것은 도시와 왕국을 다스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동시에 교회를 다스리는 방식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요한네스 22세는 그것을 이단으로 보았지만, 실은 완전히 새로운 주장도 아니었다. 초기 교회는 수많은 공의회를 열어 교리상의 문제를 비롯한 각종 쟁점들을 해결했다. 그중 하나인 니케아공의회는 심원하고 까다로운 사안인 삼위일체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새로운 것은 마르실리우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이론을 이용해, 권력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려면 대중의 동의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는 아마 그런 생각이 현실적 힘을 가지게 만든 최초의 저자일 것이다."(367-8)


9장 인문주의


"인문주의는 보통 페트라르카로부터 시작된 문학운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관점은 시와 문학이 인문주의적 감수성 안에 위치한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인문주의적 정치사상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또다른 관점으로, 우리는 스콜라철학에 대한 인문주의의 반감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인문주의는 삼단논법의 형식주의와 모든 도덕적·정치적 사안을 신학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논법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합리주의적 논증에 대한 욕구라거나 이교 사상에 대한 갈망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당대의 사상가들이 고대의 관습을 성찰하고 그리스도교로부터 상당히 벗어난 결론을 도출하기를 바랐는데, 그런 점에서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등을 돌린 인문주의자들은 대부분 종교화된 플라톤주의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비정통적이었지만, 신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 신학의 오랜 연계에 어긋나지는 않았다."(394)


10장 종교개혁


"95개 조항은 루터의 사상이 진화하는 과정의 중간점이자 프로테스탄트 정치사상의 기원이었다. 인간의 구원과 천벌이 자의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놓고 수년간 고뇌하던 루터는 1513년 이신칭의以信稱義(오직 믿음)의 개념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서 자발적인 믿음만 있으면 죄 많은 평범한 사람도 저절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신이 부여하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임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을 열어두는 것 말고는 없다. 물론 그것도 신이 그 믿음을 준다고 전제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믿음은 은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므로 은총과 별개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구원받았다는 증거로서 구원에 대한 각자의 확신에 의존하도록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대담하게 죄를 저지르는 것이 매력적으로 여겨지고, 마음 속에 반율법주의를 품게 된다. 그래서 엄격한 칼뱅파는 그런 확신 자체가 망상이자 자만심의 징표라고 주장했다."(443-4)


"루터가 전격적으로 입장을 바꿔 큰 파장을 일으킨 논쟁거리로는 무저항주의를 들 수 있다. 처음에 그는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치우친 상태로 바울의 정통 교리를 이용했다. 즉 우리에게는 오로지 수동적인 불복종만 허용된다는 것이다. 사실 허용이라기보다는 강제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정한 자들의 악행을 돕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만큼이나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루터의 무저항 신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손발이 묶인 채로 가톨릭 세력에 대항해야 했을 것이었다." "1529~30년에 들어서면서 필요하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독일을 가톨릭교회로 복귀시키려는 황제 카를 5세의 의도가 명확해지자, 루터의 후견인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이 적법한지 루터에게 물었다.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적법하다고 주장했고, 루터도 비폭력을 신봉하지는 않았다."(455-6)


"황제의 반대파는 자기방어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견해들을 검토했다.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만약 황제가 휘하의 복음주의 신민들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곧 법을 어기는 행위이므로 그 경우 황제에게 저항하는 것은 법을 준수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루터는 부당하게 무력을 사용하는 지배자는 더이상 지배자가 아니라 우리를 공격하는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도덕적으로 볼 때 신뢰를 저버린 탓에 폐위된 지배자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대체로 루터는, 황제가 가해자일 경우 법적 질서에 반기를 든 것은 바로 그 황제이므로 그에 대한 저항이 적법하다는 법치주의적 주장을 받아들였다. 사람에 따라 두려워하는 정도가 달랐지만, 루터가 특히 두려워한 것은 신민들 개개인에게 저항권을 부여하는 교리였다. 바로 여기서 로크나 후대 법치주의자들과의 비교가 무의미해진다. 로크의 저항권은 '대중'이 본래 가진 것이다."(457-8)


"(칼뱅이 꿈꾼, 하향식 입법 제도를 갖추고 공인된 기구에 권력이 부여된 정치 공동체에서) '하급 정무관'은 지배자가 선을 넘어 폭군이 되었을 경우 법에 따라 더이상 지배자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칼뱅은 정당한 저항의 근거를 제시하면서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나쁜 지배자를 감내해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주장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이 조언을 따르면서 얻는 위안이라고는 기껏해야 신이 사악한 인간들을 그들이 전혀 상상하지도 못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는 믿음밖에 없다. 여기서 칼뱅은 기어를 바꾼다. 〈고삐 풀린 폭정에 대한 처벌이 설령 신의 복수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그 복수를 요청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런 다음에 그는 〈늘 그렇듯이 개인에게 해당하는 사항〉이라고 덧붙인다." "칼뱅이 문을 연 법치주의 저항이론과, 지배자가 신뢰와 권위를 잃었는지를 '개인'이 판단할 수 있는 계약주의를 통합하는 일은 후대 칼뱅주의자들의 몫으로 남았다."(464-6)


11장 마키아벨리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의 정치적 역량(비르투)에 의지하는 사람과 타인의 힘이나 운에 의지하는 사람의 중대한 차이를 보여준다. 전자는 운명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거나 동료들이 곤경에 처한 자신을 팽개친다 해도 결정적인 타격을 입지 않는다. 체사레 보르자는 이 이분법에 들어맞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뛰어난 비르투를 발휘하는, 따라서 운명에 덜 종속된 사람이야말로 영웅이라고 부를 만한다. 모세, 테세우스, 키루스, 로물루스가 그런 영웅들이지만 그들이 실존 인물인지는 마키아벨리도 인정하듯 확실치 않다. 마키아벨리는 한동안 그 네 영웅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사보나롤라의 운명을 성찰하는데, 여기서 그의 가장 유명한 경구가 나온다. 자신의 힘으로 군주국을 차지한 사람들을 성찰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한다. 〈무장한 예언자는 전부 성공하는 반면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실패한다.〉 이 언명은 20세기 정치 분석에서 사용하는 수사 어구다."(492-3)


"마키아벨리의 비르투 개념에 관해서는 무수한 논의가 있었다. 비르투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미덕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보통 비르투는 정치적 성공을 가져오는 능력이나 자질을 총칭한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마키아벨리의 논의는 신앙심이 깊은 저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덕망 있는 군주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현실적 성공을 촉진하는 자질에 관한 성찰이다."(499)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을 유발하는 편이 낫다고 토로한 바 있다(사람들은 선한 지배자에게는 거리낌없이 저항하는 반면 냉혹하고 엄격한 지배자에게는 저항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목적에 합당할 때만 신의를 지키라는 마키아벨리의 충고는 놀랍지 않다. 정직은 미덕이고 정직한 사람은 마땅히 칭찬을 받아야 하지만, 정직하지 말아야 할 때 정직한 군주는 적의 제물이 될 뿐이다."(502)


"마키아벨리는 전제군주만이 국가를 건설하거나 재건할 수 있다는 견해를 고수한다. 새로운 질서가 뿌리내리는 창건의 순간은 있어야 하며, 마찬가지로 위기를 맞은 국가가 혁명적인 재건을 통해 초기의 원칙으로 복귀할 경우 재건의 순간도 있어야 한다." "『로마사 논고』에서 강조하는 것은 마키아벨리가 오르디니ordini(법 혹은 질서)라고 부르는 개념인데, 이 말은 '법'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후대에 루소가 정치제도의 기본법과 '법령'을 구분하는 것처럼, 마키아벨리도 법치질서를 정의하는 법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성문법을 가진 국가라면 익숙한 사고이며, 실제로 오늘날 독일 헌법은 '기본법Grundgesetz'이라고 불린다. 시작하는 것과 유지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건국 영웅의 변칙적이고 이따금 폭력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은, 법에 따라 정기적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어야 한다."(511)


# 『로마사 논고』에 나오는 마키아벨리의 세 가지 주장

1. 공화정에서 약간의 혼란은 자유에 도움이 된다.

2. 귀족 공화정(베네치아)보다는 대중 공화정(피렌체)이 낫다.

3.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업적은 소멸한다.


2권 홉스에서 현재까지


"정치에 관한 근대적 사고방식은 홉스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 상태라는 개념이 하나의 토대가 된다. 국가가 무엇인지─즉 국가의 정통성이 어디에 있는지, 권력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신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에 관해 명확히 알려면 국가가 없는 세계를 상상해보라는 것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아울러 그 생각을 순수와 자연스러운 사회성이 지배하던 지나간 황금시대에 대한 공상이 아니라 사고실험으로서 이용하는 것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누구나 그것이 유익한 혁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정치가 생겨나기 이전의 '자연스러운' 상태의 관념에 호소한다고 해서 누구나 그 자연스러운 상태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은 아니다. 홉스, 로크, 루소 등 그 계열의 유명한 사상가들 역시 자기들끼리도 동의한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인 국가가 자연 상태보다 더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이라는 생각은 국가의 목적, 권력, 한계에 관한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간다."(536-7)


1부 근대


12장 토머스 홉스


"전쟁 시기에 왕당파와 의회파는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던 끝에 이윽고 1647년에 의회파가 승세를 잡았다. 찰스는 체포를 피해 왕좌에 복귀하려 했다가 결정적 패배를 당한 뒤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1650년 1월 30일에 처형되었다. 왕당파에게 그것은 순교였으며, 신이 임명한 자를 불경스럽게 살해한 것이었다." "이 무렵에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썼다. 오늘날 많은 독자들은 그 책이 절대 군주정을 옹호하는 내용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 책은 군주정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이 부여받은 절대권력을 옹호하고 있다. 홉스는 분명히 군주정이 최선의 정부 형태라고 믿었지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증명했다고 여긴 것은 정치권력이 절대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리바이어던』의 도덕은 어떤 정부든 평화를 보장하고 정부의 노력을 통해 번영을 가능케 한다면 신민들은 그 정부에 복종하고 지지할 의무를 가진다는 것이었다."(548)


"『리바이어던』은 정치과학을 찬양하고 홉스가 '신중함'이라고 부른 것을 폄하한다. '신중함'은 홉스가 고전적 통치술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인데, 고전적 통치술이란 역사를 분석하고 어려운 상황에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관찰해 안전한 정치적 행동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말한다." "홉스는 투키디데스를 '역사상 가장 정치적인 역사 편찬자'라고 여겼으며, 민주주의가 본래 불건전한 정부 형태라는 투키디데스의 견해에 동의했다. 그러나 17세기 영국에서는 역사가 위험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공화주의 저자들은 역사의 독해를 통해 폭군 살해를 옹호하고자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대중적 공화정에서만 정치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게 바로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라고 주장했다. 홉스가 보기에 그들은 그저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역사적 암시로 치장해 자신이 얼마나 박식한 지 자랑하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수사로 생각을 대신했다."(551-2)


"홉스는 선과 악의 본질, 나아가 궁극적 선, 지고선summum bonum의 존재 같은 곤란한 주제의 본질에 관해서도 놀랄 만큼 주관적으로 설명한다. 심지어 그는 이런 주장으로 유명세를 얻었다. 〈누구든 무엇을 욕망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선이란 사물의 질이나 상태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 악이라고 부르는 것, 무관심한 것은 홉스의 17세기식 용어에 따르면 '경멸의 대상'이다. 실재하는 것은 우리의 소망과 두려움이다." "홉스가 조심스럽게 '이 삶의 행복'이라고 부른 것은 변화하는 욕망들을 가급적 하나씩 차례로 충족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이차적' 욕망도 있다. 다른 욕망이 충족되어야만 충족될 수 있는 욕망, 다른 사람들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충족될 수 있는 욕망, 이를테면 자비심 같은 것이다. 이 이차적 욕망들 가운데 특히 강력한 것은 안전에 대한 욕망이다."(563-4)


"인류를 위한 최고의 선이라는 관념에 관해서는 합의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최고의 악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 최고의 악이라는 생각은 홉스에게 거의 물리적인 진리와 같다. 자기 보존적 기계인 우리는 우리를 정지시키려 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도록 '조직화'되어 있다. 홉스는 죽임을 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합리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누차 말한다. 내가 스스로 죽겠다거나 나의 죽음을 허용하겠다는 약속 또는 계약은 효력이 없다." "갑작스럽고 난폭한 죽음을 궁극적인 악으로 설정한 홉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에 관한 견해를 상당부분 전도시킨다. 우리가 함께 모여 정치사회를 수립한 것은 선한 삶을 공동으로 추구하려는 사교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서로에 대한 비사교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모든 악들 가운데 최고의 악을 피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국가가 없으면 우리는 공동생활에서 즐거움은커녕 고통을 느끼게 된다."(566-7)


# 홉스의 자연법 : 모두의 안전에 도움이 되는 것에 관한 공리公理


13장 존 로크와 혁명


"로크는 인간이 자유롭고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전제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이 말은 곧, 도덕적으로 중요한 여러 가지 관계들은 합의나 약속에 의존하지 않지만 정치적 관계들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크는 정치사회의 목적과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정치권력이란 법을 만드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사형을 비롯한 각종 형벌을 정하는 법, 재산을 통제하고 보호하기 위한 법, 그런 법들을 집행하고 외국의 위해로부터 국가를 방어하는 데 공동체의 무력을 이용하기 위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공익에 있어야만 한다.〉 로크에 의하면 정치권력은 인간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가 말하는 재산이란 '생명, 자유, 토지'를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재산'을 '생명, 자유, 토지'보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만, 로크는 습관적으로 재산이라는 용어를 현대적이고 좁은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정부가 보호해야 할 '모든 외부 재화'를 포괄하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의미에서도 사용한다."(608-9)


"정부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고 지배자의 권력이 그 목적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제한적이고 법치적인 정부를 설명하기 위한 토대를 얻은 셈이다. 로크는 군주의 지배에 아무런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었으므로, 군주의 권력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논증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정치권력을 자연법 안에 집어넣음으로써 그 한계를 정했다. 그는 우리가 이미 법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이 법이 곧 자연법이다."(610) "(이성으로 파악 가능한) 자연법을 엄밀하게 법이라고 믿기 위해서는 입법자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다." "신은 우리 모두를 같은 조건에서 창조했으므로, 우리 모두가 과도하게 우리 자신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이익을 증진시키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목적론적 이해인데, 홉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깝다."(612-3)


"로크는 획득에 관한 노동 이론labor theory of acquisition에 의지함으로써 소유 문제를 설명하는 동시에 혼란스럽게 만든다. 로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개인적으로, 즉 다른 사람들의 허가 없이 '혼합mixing'으로써 재산을 획득할 수 있다. 그 혼합이란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고 명명백백하게 우리 것인 요소, 즉 우리의 노동을 부가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이 만들어내는 차이는 생산적이고 유용한 차이여야 한다. 그와 달리 세계를 손상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는 애초부터 금지되어 있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 논의는 상당히 흥미롭다. 신은 인간에게 풍요한 세계를 주면서 이용하고 향유하게 했다. 하지만 세계가 이용되고 향유되려면 각 개인이 그 열매를 소비해야만 한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그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사물들이 공유재산으로부터 사적 소유로 넘어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그 이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소유자에게서 재산을 빼앗는 게 잘못된 행위가 된다."(627-8)


"로크가 전반적으로 의지하는 사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떤 개인이나 기관도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리만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의 존엄성이 있기 때문에 정부는 다른 사람들을 방어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고를 합치면 제한정부 이론이 성립한다."(635) "홉스처럼 로크는, 우리가 동의했다면 지배자에게 복종하는 의무를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고 싶었다. 반면 홉스와 달리 그는 조건부 동의를 원했고, 정부 혹은 정부에서 파생된 입법기구가 적법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제약하고 싶었다. 일상적 목적을 위해 그 동의는 우리의 대의代議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생명과 자유, 통상적 의미에서의 재산은 우리의 것이며, 우리 자신의 동의나 대의에 의거하지 않으면 남이 손대거나 과세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또한 우리의 대표가 신뢰를 위반하면 그 자격을 잃게 된다."(637-8)


14장 공화주의


"해링턴은 '균형'에 집착했다. 공화주의 이론에 대한 그의 독특한 기여는 정치적 균형을 토지 재산의 균형과 연결시킨 것이었다."(660) "해링턴은 영국내전으로 봉건제의 전체 구조가 붕괴했으나 그 몰락의 뿌리는 15세기 말 헨리 7세가 취한 조치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인구 법령은 소규모 독립 농부의 수를 증가시켰고, 자작농 법령은 소농들을 대영주의 휘하에서 해방시켜 영주들이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양도 법령은 자유 보유 토지를 팔기 쉽게 만들어 봉건제의 관에 마지막 못을 박았다. 이 시점에서 귀족은 〈무장해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무장해제된 귀족들은 평민들의 침탈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왕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제도가 귀족정이었으므로 귀족정의 균형은 무너진 반면 토지소유 유형은 평민들에게 유리해졌다. 해링턴은 바로 이 평등이 대중적 공화정 이외의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 표현은 색다르지만 논의 자체는 240년 동안이나 미국인들에게 수용되었다."(665)


"몽테스키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국가의 '정신'이다." "공화정에 활기를 주는 정신은 도덕이고, 군주정에는 명예, 전제정에는 공포다." "가장 자연스러운 공화정의 형태는 민주공화정 혹은 적어도 대중적 공화정이다. 그 사상은 이렇다. 공화정에서는 국민이 주권자다. 매우 작고 단순한 공화정의 국민은 대표 없이 직접 자치한다. 어떤 경우든 공화정은 국민주권으로 정의된다. 공화정에서의 지배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말처럼 〈황제를 기쁘게 하는 것은 법의 힘을 가진다〉가 아니라 그 정반대인 〈국민을 기쁘게 하는 것은 법의 힘을 가진다〉이다. 이 견해는 루소와 칸트가 상세히 설명했다. 헌법의 지배를 받고 일관되게 공익을 추구하는 국가는 설령 행정권력이 군주의 수중에 있다 해도 공화국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 만약 국민이 스스로의 동의에 의해 형성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배받는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곧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즉 공적인 '것',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다."(684-5)


"몽테스키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좇아, 대중적 공화정의 시민들이 평등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고 보았다. 이 생각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도 관철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 세계에서 그 본질은 경제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었다. 그것은 평등한 정치적 지위에 대한 열망이었으나 경제적 결과도 초래했다. 이를테면 부자들에게 군비 부담을 더 지게 한다든가, 축제와 놀이의 경비를 지불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등한 기회나 사회적 이동성 같은 근대적 이념이 아니었다. 근대적 이념은 정치적인 게 아니라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것이다. 몽테스키외에 의하면 고전 도시국가와 고전적인 도덕을 갖춘 시민은 역사적 가능성으로서 사라졌다. 그러나 로마는 적어도 계몽된 유럽인들이라면 저버릴 수 없는 유산을 남겼다. 그것은 자의적인 학대를 당하거나 다른 사람의 변덕에 휘둘리지 않고, 법적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 대우를 받겠다는 요구다."(689)


15장 루소


"루소는 혁명에 반대했고, 온갖 형태의 급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도 거부했다. 그는 근대 세계의 사회·경제·지리적 이동성에 적대적이었다. 그의 정치사상은 고전적이거나 고전에 가까웠다. 그는 공화주의적인 『로마사 논고』의 마키아벨리를 찬양했으며, 『군주론』의 마키아벨리는 왕위 찬탈자와 날강도를 조심하라는 조언으로 꾸며졌다고 생각했다." "루소가 『사회계약론』 말미에 제시하는 정치제도의 원형은 로마식이다. 그는 로마와 스파르타의 시민권 이념을 찬앙했다. 그 자신이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여러 세대에 걸쳐 민주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준 것은 사실이었다." "루소가 제시하는 난제는, 그가 프랑스혁명의 진행 과정은커녕 발발을 결정하는 데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17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회·정치적 급진주의자들에게 활기를 주는 혁명의 이념을 명료하게 밝혔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는 급진적 후계자들이 건설하고자 애쓴 사회에 내내 적대적이었다."(700-2)


"루소가 이룬 최대의 혁신은 인간의 조건을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조건으로 분석했다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인간에게서 원죄의 짐을 제거하고, 그것을 사회의 부담으로 전가했다." "루소는 처음으로 인간존재가 사회의 손에 쥐어진 진흙 덩어리라고 보았으며, 사회가 우리를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시켜 자멸로 이끈다고 비난했다. 비록 그 자신은 결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지만, 루소는 원죄의 부담을 사회조직에 밀어넣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지난 두 세기 동안 횡행했던 급진적 정치운동이 신봉한 유토피아적 낙관주의로 가는 길을 닦았다. 만약 우리의 악덕이 자연적인 게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정하기가 더 쉬우리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사가 증명하듯이 그것은 큰 잘못이다. 급진주의자들은 지난 200년 동안 바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회적 원인'이라는 말이 곧 '예방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다."(703-4)


"루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지배자에게 무제한으로, 전적으로 내주고 모든 구성원들을 지배하는 절대권력으로 '도덕체moral body'를 만들어내는 계약을 상상한다. 〈우리는 일반의지의 가장 높은 통제 아래 각자 자신의 신체와 모든 권력을 공유한다. 단일한 집체로서 우리는 각각의 구성원을 전체의 보이지 않는 일부로 간주한다.〉 이 도덕체, 혹은 '집체'는 홉스의 군주처럼 의지를 가진 존재이고, 그 의지는 일반의지다. 이것은 전체 공동체의 의지이며, 공동체의 이익, 즉 공동의 이익을 지향한다. 레스 푸블리카는 곧 레스 포풀리res populi(민중의 것)이고, 포풀루스는 자연히 자체의 이익을 추구한다." "국가는 일반의지와 개별의지가 충돌할 경우 개인적 의지의 포기를 요구한다. 어느 한 사람이 군림할 경우 다른 모든 사람들은 충성심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한 홉스처럼, 루소는 계약이 개인을 구속하려면 모두가 예외 없이 구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33-4)


"영국 의회를 조롱한 루소에게는 실례인 얘기지만, 그의 합법성 이론은 사실 대의제 정치체제 및 의원내각제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자유민주주의국가와 맥을 같이한다. 그런 국가는 선출직 귀족이 중심인 정치체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국가는 주민이 어떤 형태의 의회든 의회 구성원들을 선출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주민의 의지를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소의 원칙에 따라도 법은 법이다. 인민이 인정하지 않으면 법률은 죽은 문서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와 무수한 지역 정치체가 모종의 형태로 공존하는 것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잘못된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이 신봉한 미덕이 근대 프랑스에서 더 발전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런 오류 때문에 그들은 낭패를 봤다. 반면 루소를 관심 있게 읽은 미국의 혁명가들은 프랑스보다 먼저 최초의 근대 공화국을 제도화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752-3)


16장 미국 건국


# 건국의 아버지들의 입장 차이

1. 알렉산더 해밀턴 : 중앙집권형 연방주의 국가 지향

2. 토머스 제퍼슨 : 권한을 위임받은 소공화국들의 연합체 지향

3. 제임스 매디슨 : 해밀턴 버전과 제퍼슨 버전의 절충


"연방헌법의 목적은 좀더 강력한 중앙정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압제적인 중앙집권국가(영국)에 대항해 13개 주가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창설된 나라이기 때문에, 연방헌법의 요체는 중앙정부가 각 주 또는 그 주민들에게 독재를 행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 경험적으로 보면, 각 주는 민주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들을 제어할 별도의 힘이 없으면 잘못된 행동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것이 바로 다수 독재였다. 여기서 말하는 독재는 토크빌이 미국의 자유에 최대의 위협이 된다고 본 여론 독재가 아니라 견제 받지 않는 '파벌' 지도자의 독재였다. 필요한 것은 상호 견제 시스템을 정교하게 구축하고 강력하게 집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진정으로 새로운 제도가 나타났다. 연방헌법이 이중 주권 체제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중 주권 체제는 별개의 대등한 두 당국(연방정부와 주정부)이 시민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체제였다."(775-6)


"매디슨은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나 취약한 인간의 본성과 정치적 상황에서 특히 잘 드러나는 인간의 사악함을 무 자르듯 확실히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제임스 밀과 달리 군주들이 이유 없이 잔학 행위를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았다. 밀은 귀족제는 비용이 많이 들지만 군주들은 무자비하게 인민을 죽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매디슨은 홉스나 마키아벨리와 달리 순수한 자기 권력 강화 경향도 우려하지 않았다. 매디슨이 진실로 우려한 것은 합리적 탐욕이었다. 물론 그는 통화가치를 일부러 떨어뜨리거나 자산을 평준화하는 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며, 따라서 사악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핵심은 매디슨이 인간의 본성을 취약하다고 봤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근절하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대로 된 제도들이 자기 이익 추구 행위를 견제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782-3)


"공화국의 생존은 시민들이 발휘하는 비범한 미덕에 달려 있다는 명제는 몽테스키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리고 공화국은 혼합정체에서 멀어지고 순수 민주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파벌 투쟁과 불안정에 흔들릴 위험이 커진다는 견해는 전통적인 지혜 같은 것이었다." "매디슨은 모든 형태의 공화정을 극단적인 민주주의와 결합하려는 사람들을 논박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공화국은 전혀 불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파벌주의에 대한 최고의 방어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대규모 공화국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들이 형성되기 때문에 특정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다수 파벌이 형성될 가능성이 상당히 줄어든다. 게다가 대규모 공화국은 파벌과 파벌이 다투는 것을 용인함으로써 파벌들은 서로 싸우다가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공화국 전체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공화국 보전을 위해 시민들에게 비범한 미덕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논리였다."(786-7)


17장 프랑스혁명과 그 비평가들


"버크가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펼친 주장의 논거는 '사회는 신념과 정서라고 하는 관습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버크는 이를 '편견' 또는 우리가 굳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사회를 처음부터 다시 건설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는 행위다. 버크는 〈한 개인의 알량한 이성을 토대로 인간의 삶과 관계를 규정하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얘기다. 왜냐하면 우리들 각인은 사회 전체가 가지고 있는 이성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나눠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돼 온 지혜, 즉 법률과 전통 속에 구현된 인간 경험의 총체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신념과 기대, 복종과 협조의 관습 같은 것을 깨게 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버크가 보기에) 프랑스혁명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시도로서 재앙으로 끝이 날 게 뻔했다."(820)


"버크에게 권위라는 이미지는 종종 연극과 같은 강렬한 심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어떤 것이다." "반면 메스트르는 권위가 저항 의지를 꺾음으로써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미치기를 원한다. 그가 보는 신은 절대적인 지배자이며, 그 지배자가 내린 명령은 불가사의한 것이고, 그가 취하는 조치들은 그저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이것이 바로 메스트르가 생각하난 권위의 본질이다. 프랑스에 필요한 것은 무오류의 교황이 뒷받침해주는 절대군주였다. 메스트르는 반동적인 사상운동인 반反계몽주의의 창시자였다. 반계몽주의는 백과전서파 작가들은 물론이고 존 로크 같은 계몽주의의 선구자들까지 논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권위는 도전받아서는 안 되며, 권위의 힘은 머릿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열정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열정이 한번 플려나가면 파괴는 당연히 따라오는 결과다. 메스트르는 혁명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루소를 규탄한다."(831-2)


# 좌파 혁명을 우파 폭력으로 제압한다는 생각의 결과 : 파시즘


"페인은 인간 본성에 관해 몇 가지 낙관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정치제도와 그 개혁 문제에 관해서도 합리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의 논리의 출발점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서로에게 우호적이며, 미신에 현혹되거나 지배자들에게 겁박당하지 않는 한 문제를 협조적·효율적으로 풀어나간다는 것이었다. 사회는 거의 언제나 하나의 축복이다. 반면에 정치는 아무리 최상의 형태라고 해도 일종의 필요악이다. 정말로 반드시 필요한 정부 같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페인의 말대로 사회는 우리의 필요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정부는 우리의 사악함에서 생겨난다. 상업과 산업을 보호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국가가 필요하다." "페인은 인간의 평등을 하나의 당연한 사실로, 그리고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을 또하나의 당연한 사실로 여겼다. 그러고는 서슴없이 '정부는 인민의 동의에 입각한 정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835-7)


"생시몽은 종교적 색채를 띤 조합주의자corporatist였다. 그는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는 유기적인 사회이고, 이는 사회가 '능력'을 중시하는 권위의 위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고 봤다."(849) "생시몽의 분석에 따르면, 혁명이 발발한 가장 큰 이유는 낡은 정치체제가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구체제의 권위는 중세적 권위이지 근대적 권위가 아니었다. 귀족이 됐든 군주가 됐든 세습 원칙은 혈통을 토대로 하고 군사적 재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대는 이미 과학적 지성, 관리 기술, 생산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혁명을 아래로부터의 대격변이라고 설명하는 반면 생시몽은 귀족제와 왕정의 몰락은 엘리트층이 실패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생시몽이 제시한 것, 또는 공감하는 독자들이 그의 저작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것은, 후일 '산업사회'라고 불리게 되는 현상에 대한 그림이다. 생시몽의 그림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852)


18장 헤겔 : 근대국가-정신의 구현


"종교가 미신이 아니고 법의 지배가 전제정치를 눈가림하는 은폐물이 아닌 사회에서는 자유가 제대로 실현된다. 우리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의 의미는, 페르시아의 전제군주가 자유로운 존재라거나 아테네 시민들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하는 것의 의미와는 다르다. 우리의 자유는 이성을 근거로 한 자율이다. 전제군주의 자유처럼 자의적인 것도 아니고, 아테네 시민들의 자유처럼 정치체에 대한 충성심에 매몰된 것도 아니다." "이성에 입각한 자유를 촉진하는 데에 로마제국이 기여한 부분이 있다. 법의 지배, 그리고 영혼은 없을지 모르지만 공적인 문제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로마의 관리 체제가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가 기여한 부분도 많다. 세속적 욕망을 멀리하고 신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하는 형태의 자유에 대한 추구가 중요하다는 점이 각인되었다. 로마와 기독교는 융합됐고, 그것이 바로 근대 개인주의의 토대라고 헤겔은 생각했다."(880)


"헤겔은 가족을 인류학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사회적 삶의 최초의 형태 내지 기원적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핵가족화된) 근대의 가족은 근대 입헌국가가 가동한 법적 장치들에 의해 설정되고 보호된다. 마찬가지로 시민사회는 로크가 '자연 상태'를 설명하면서 구상한 자발적 교환으로 이루어지는 몰정치적 사회가 아니다. 시민사회는 정치가 스며들어 있으며, 법률에 의해 구조화되고, 효율적인 행정 국가의 제도들에 의해 관리된다. 시민사회는 경제학자들이 연구하는 교환 체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법률, 문화, 제도, 근대 경제생활에 적합한 태도도 포함된다. 헤겔은 과거의 사상가들이 국가와 시민사회를 혼동했고, 국가의 본질을 진정한 시민사회의 그것으로 잘못 파악했다고 말한다. 이는 로크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이다." "국가가 정체성 보전을 위해 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그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하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898)


"사회계약론에 대한 헤겔의 적대감은 개인과 국가 사이에 계약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발상 자체에 대한 거부권에서 비롯됐다. 철학자들의 상상력 바깥에 존재하는 계약이란 그런 계약을 강제할 수 있는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경우든, 계약이란 양자 사이의 거래이며, 조건에 좌우된다. 우리는 이익을 얻기 위해 계약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 이익을 수용하지 않으면 계약은 성립되지 않는다. 칸트는 사회계약은 순수하게 가상적인 계약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계약에 대한 의무 이행이 정당하게 철회될 수 있는 시점(즉, 국가의 권위를 끝낼 수 있는 시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헤겔은 국가의 본질은 국민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국가는 우리의 목숨을 손에 쥐고 있다. 우리를 전쟁에 내보낼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907)


"궁극적 차원에서 보자면,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사회들은 세계사 속에서 행동하는 행위자이다. 그리스의 폴리스가 없었다면 그리스식 자유 개념이 구체적인 사례로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 제국들이 없었다면 개인의 의지가 자의적인 자유라는 방식으로 극적으로 표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의적인 자유는 〈한 사람만 자유로운〉 단계라고 하는 헤겔의 개념 속에 농축돼 있다. 한편 근대국가가 없었다면 자유의 보편성이 표현될 공간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는 우리에게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헤겔의 도식에서 국가는 좀더 큰 틀의 역사적 과정의 도구로 간주된다. 모든 세계사적 개인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일단 때가 다하면 폐기된다. 국가라는 존재가 봉사하는 더 큰 목적은, 국가가 보호하는 문화들에 의해 촉진되는 정신의 자유다. 그리고 그런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종교와 예술을 통해 표현된다."(909)


19장 공리주의 : 제러미 벤담, 제임스 밀, 존 스튜어트 밀


"존 스튜어트 밀은 〈쾌락의 양이 동일하다면, 아이들 장난이나 시詩나 똑같이 좋다〉라는 벤담의 유명한 발언으로 대표되는 벤담식 공리주의의 단순 무식함이 민주주의가 초래할 수 있는 최악의 부작용을 조장한다고 보았다." "토크빌을 읽기 전에도 밀은, 자기 시대는 사적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학을 신봉하고 과거의 종교적 질곡은 이제 거의 다 사라졌다고 봄으로써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지만 기실은 대중의 여론과 행동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시대라고 확신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대중이 되어 행동에 나선 것이다. 이런 밀의 의구심을 강화해준 것이 토크빌이었다. 토크빌은 미국에 대해 사상의 자유가 실질적으로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덜 보장된 나라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미국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교한 법적 장치인 「권리장전」을 보유하고 있고, 변경 지역을 개척하려는 집단적인 열정이 있었다. 토크빌에 따르면 미국은 개인의 자율적 사고를 권장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다."(933-4)


"공리주의는 정의를 논함에 있어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의는 대단히 직접적으로 개인들에 관한 문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의 문제, 엄격한 의무화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공리(효용)는 일정한 범위의 개인들의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의 문제이며, 공리의 의무화는 엄격한 것이라기보다는 '다소 유동적'이다. 밀은 정의의 요구는 근본적으로 공리주의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특별히 중시하고 강력히 강제하는 이유는 정의가 촉진하는 공리의 종류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안전이다." "따라서 당위로서의 정의는 모든 미덕 가운데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밀은 한 사회가 그 구성원을 규제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낙관적이었다. 그가 우려한 것은 근대사회가 그 구성원들을 지나치게 규제함으로써 개인의 적극성과 자신감을 박탈하는 잘못을 저지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처방으로 집필한 것이 『자유론』이다."(939-40)


"밀 이전의 사상가들은 근대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처럼 파벌로 쪼개지고 걸핏하면 서로 싸우는 양상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밀은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을 오히려 우려했다. 대중민주주의 시대가 되면서 여론이라는 강력한 힘이 사회 구성원 모두를 압박하는 상황을 걱정한 것이다. 대중민주주의는 새로운 종류의 억압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개개인 상호 간을 억압하는 형태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억압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유론』에서 특히 눈에 띄는 발상은 우리가 획일적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라게 되면 여론을 내면화한다는 대목이다. 획일적 민주주의는 잔인하지도, 폭압적이지도, 우리가 익히 아는 방식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차단한다. 당당히 발언하고 싶은, 또는 머릿속이라는 사적 공간에서나마 이단적인 사상을 가지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에도 우리는 뒷걸음질하게 된다."(941)


20장 토크빌과 민주주의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 1권 서두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려면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다는 말로 장식했다. 그가 제시한 것은 후일 막스 베버가 '이상형ideal type' 분석이라고 규정한 것에 해당한다. 토크빌은 일부 경험적 현상은 강조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방식을 통해 민주주의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했다. 근대사회를 더욱 평등주의적인 방향으로 몰아가는 힘을 그림처럼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것은 '조건들'의 평등의 확대 과정에 관한 내러티브다. 조건의 평등Equality of condition이 토크빌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조건의 평등을 만드는 것은 무엇이며, 그 정치적 결과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 핵심이다." "비판자들은 토크빌이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를 평가절하했다고 불평한다. 이는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그러나 토크빌은 자기 나라와 미국의 파이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미국인이 자신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981-2)


"미국인들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열심히 제공하려고 애쓰는 후견인 역할을 자신들의 중앙정부가 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조직화함으로써 필요한 것을 마련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다. 배심원 제도는 배심원으로 뽑히는 미국인들에게 공적인 문제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도록 강제하며, 일종의 정치교육의 장이 된다. 수많은 지역 신문들은 그러한 정치교육을 강화한다. 신문의 다양성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여론의 획일성을 지속적으로 끊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무리 다수 여론이라도 반대 의견에 맞서 항상 스스로를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주는 토크빌의 처방은 '의견 대립'을 보호할 뿐 아니라 그런 대립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의견 대립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다. 미국 사회는 흡사 '논쟁하는 사회' 같았다. 토크빌은 정치적 논쟁의 뿌리는 경제적 삶에 있다고 본다. 미국은 전형적인 기회의 나라였다."(989)


"토크빌은 (공적인 문제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가정을 중심으로 한 좁은 영역에 안주하게 만드는 압력에 저항하지 않을 경우 어떤 난관이 발생하느냐와 동시에 그런 저항을 가능케 하는 힘은 무엇이냐에 대해 상세히 논했다. 그런 힘 가운데 하나가 미국인들의 결사 조직 능력이다." "결사는 미국 민주주의에 긴요한 존재였다." "다양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사를 조직하게 만드는 힘은 일종의 자기 이익에서 발생한다. 토크빌은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이익은 '올바로 이해된 자기 이익', 곧 장기적으로 공동의 이익을 염두에 둔 이익이다. 토크빌은 그런 자기 이익이 개인주의를 상쇄하는 힘이라고 봤다." "개인들이 결국은 국가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하도록 만들려는 유혹에 굴복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획일적인 해결책을 찾고 목적을 위해 권력을 중앙집중화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그런 흐름에 강력히 저항했던 것이다."(996-8)


21장 카를 마르크스


"헤겔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가 낯선 것으로 경험되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정신의 표현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계를 정신의 구성물로 이해할 때 우리는 현실을 우리의 현실로 바라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파생된 소외 개념을 정치·사회적 장치로 확대 적용한다." "자유는 필연의 의식이라는 발상 또한 헤겔 사상의 핵심이며 마르크스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이성적인 인간은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행한다. '의무'란 자의적인 강요가 아니라 명료하게 사유할 경우 그가 처한 상황과 그 자신의 정신과 목표의 논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의 내적 논리를 이해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고, 사물을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당장의 현실을 억압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화해가 아닌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의 최종 목표는 진정으로 이성적인, 우리가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의 창조이다."(1023)


"마르크스는 (관료집단이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보편계급'이라는) 헤겔의 생각이 본의 아니게 다른 어떤 것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국가 자체가 소유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관료와 그 주인들은 국가를 일종의 재산으로 장악한 것이다. 상품이 우리의 생산력의 소외된 객관화라면, 국가는 우리의 집단적·협력적 의사 결정력의 소외된 객관화다. 우리가 창조하고 서로 교환하는 것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려면 사적 소유와 시장을 폐기해야 하며─이런 주장을 하던 시기의 마르크스는 어떻게 폐기하느냐, 새로운 생산질서의 기초는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진정한 민주주의를 수립해야 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공화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공화정은 경제적 분열에 대해 정치적 통합을 강요한다. 분열은 경쟁하는 자산 소유자들 간의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그런 토대 위에 설립된 정치질서는 무산자에 맞서 유산자의 이익을 보호해줄 따름이다."(1032-3)


2부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


"모든 유형의 보수파들은 현대 민주주의가 양적인 차원에서는 인상적이지만 질적인 차원에서는 별로 그렇지 못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불안해진 자유주의자들은 '거대한' 사회가 '위대한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됐다. 그런 불안에는 최소한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개인이 군중 속에 매몰돼 삶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다. 개인은 거대한 산업 기계라고 하는 톱니바퀴의 톱니에 불과하고, 지도자를 뽑을 때가 되면 투표소에 들어가는 머리 하나에 불과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형태는 정부가 현대 산업사회라고 하는 광대하고 복잡한 기계장치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다. 호황과 불황이 반복되는 급격한 경기 변동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와 대척점을 이루는 불안은 정부가 과다하게 개입해 현대 산업사회를 통제하려 들지 모른다는 것이었다."(1068-9)


22장 20세기 그리고 그 너머


"대중사회에 대한 불안감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첫째는 현대사회는 개성이 발양되기에는 대단히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는 우려다. 이런 생각은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 체제 속의 인간은 군중 속으로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대중사회에 대한 두번째 불안감은, 산업 프롤레타리아가 역사 진보의 담지자라고 생각했는데 평균적인 프롤레타리아는 역사가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불만이다. 더 나쁜 측면은, 보통 사람은 굳이 번영을 약속하는 식으로 매수할 필요조차 없다는 발견이다." "대중사회에 대한 세번째 불안감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스페인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란』에 넘치게 드러나 있다. 그가 표출한 불안감은 문명화된 엘리트와 문명화될 수 없는 대중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귀족주의적 비평의 모습을 띤 20세기 문화비평의 상식이었다."(1081-3)


"베버에 따르면, 현대 세계는 비인격적인 대규모 관료제가 문제를 관리하는 것이 일종의 숙명이지만, 정치적 방향을 설정하는 일은 불가피하게도 특수한 재능과 정치감각을 지닌 소수의 수중에 맡겨진다. 이 소수 집단의 정점에 있는 지도자들은 '카리스마charisma'를 보유함으로써 권위를 확보해야 한다." "베버에게는 현대 세계의 거의 모든 것이 관례화되고 합리화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문제는 문화의 목적과 가치관, 최종 목표─이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부, 생명까지 희생하는 일이 요구될 수도 있다─를 제시하는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정치나 행정조직 자체가 그런 원천일 수는 없다. 조직은 수단을 제공하지 목표를 설정하는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정치사회 전체를 위해 권위 있는 방식으로 목표들을 설정할 수 있는가였다. 답은 카리스마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가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1100)


"19세기 말 이탈리아 사상가 파레토와 모스카는 '엘리트의 순환' 이론을 제시했다. 두 사람은 극소수만이 한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시했다는 의미에서 '엘리트이론가'였다. 두 사람 다 엘리트는 어떤 윤리적인 미덕이나 기타 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엘리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어떤 분야든 엘리트란 위기 상황에서 수완을 가장 잘 발휘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마키아벨리가 엘리트의 순환이라는 개념에 기여한 부분은 좋은 지도자는 사자와 여우를 닮아야 한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그러나 후대의 시각은 여우형 엘리트는 폭력의 재능을 가진 또다른 엘리트에 의해 파멸될 수 있기 때문에 실패하고, 사자형 엘리트는 꾀많은 엘리트에 의해 잠식당함으로써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를 보는 하나의 방식은 민주주의를 반란이나 쿠데타 없이 엘리트를 순환시키는 장치라고 간주하는 것이다."(1103)


"'과두제의 철칙'을 말한 미헬스가 제기한 의문은 '왜 독일 사민당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정당임을 자처하면서 실제로는 개혁주의정당에 불과한가'라는 것이었다." "대중운동이 추구하는 목표가 무엇이든 조직이 필요하다. 그런데 조직은 지도자들에 의해서만 결속력을 가질 수 있다. 확고한 리더십이 힘을 잃게 되면 구성원들은 곳곳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그 결과는 지리멸렬로 이어진다." "미헬스는 레닌이 보지 못한 것과, 레닌의 후계자들이 경험을 통해 겨우 발견한 것을 처음부터 간파했다. 일단 조직이 확립되고 나면, 조직을 보전하고 당 관료들의 특권을 보전하는 일이 당의 공식 목표를 제치고 사실상의 목표로 들어선다. 그런 사태를 차단하는 조치를 누군가 취하지 않는 한 소련 공산당 같은 정당은 보수적이 되기 십상이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당의 혁명 열정은 갱신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숙청 작업을 한 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끔찍한 일이었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1104-5)


23장 제국과 제국주의


"바텔은 영국이 북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는 것을, 거기에는 문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이유로 용인했다. 간단히 말하면 북아메리카의 야만인들은 땅을 경작해 소출을 내야 한다는 자연법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유물은 있으되 자연법상의 토지소유권은 없었다. 이처럼 문명인과 비문명인의 구별은 식민지화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활용됐다." "문명인과 비문명인 구별의 현대판은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문명화되지 않은 종족들에게 문명화의 축복을 베풀 권리 내지는 의무가 있다는 식의 관념이다. 그런 축복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최소한 기독교 국가들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인식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 나아가 원주민들은 인류애와 합법성이라는 문명의 기준에 따라 통치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원주민들을 검은 피부의 유럽인으로 탈바꿈시켜 유럽의 문화와 유럽의 정치 이상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1130-1)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제국의 등장보다 더 이상한 현상은 제국주의가 20세기 중반 들어 급속히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족국가 차원의 기획이던 현대 제국주의가 몰락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제국주의 세력이 식민지의 신민이 아닌 본국의 신민들에게 민족국가의 당당한 시민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심어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의 탈식민지화 및 제국의 종언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실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를 압도했다는 것이다."(1146-7) "민족주의는 식민 세력이 본의 아니게 식민지 피지배자들에게 준 위험한 선물이었다. 식민주의에 반대해 봉기를 추구하는 운동은 항상 민족해방운동으로 묘사됐다." "제국과 제국주의 세력을 비판한 20세기의 급진파들 거의가 철저한 세속주의자였다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그 어떤 이론가도 예상치 못했던 대목이 있다. 그것은 불행하게도 탈식민지화의 이론적 기초에서 벗어난 '이슬람 원리주의'의 등장이다."(1151-2)


24장 사회주의들


2차대전 이후 선진 산업사회의 요체의 일부가 된 다양한 형태의 개량주의적 사회주의 내지는 복지국가는 이제 불가피한 선택이 되었다. "완전한 사회주의는 일종의 집단적인 경제적 합리성이 가능하다고 상정한다. 이는 경제의 중심에서 전지전능하게 통합 관리를 할 수 있는 지성을 전제로 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지성이 법률과 통치라고 하는 강압적 시스템을 대신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자기모순에 가깝다. 설령 자기모순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앙 계획의 강점에 대한 무조건적 합의를 전제로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 주요 대기업의 사적 소유 철폐, '시장의 무정부 상태'의 중앙 계획으로의 대체 같은 사회주의의 핵심 요구들이 실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면에서 사회-주의social-ism의 한 형태다. 개인의 복지에 대한 집단적 책임을 사회 및 그 운영 주체인 당대의 정부에게 부과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1160-1)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를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큰 발전을 이룬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복지국가의 평등주의적 요소는 복지국가 옹호자들이나 그 비판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미하다. 복지국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부유하게, 부자들을 더 가난하게 만들려고─이것이 사회주의의 핵심 요소다─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사람들이 건강할 때 병에 걸릴 경우를 대비하도록, 직장이 있을 때 돈을 떼어두었다가 실업에 대처할 수 있도록, 성인들이 자신과 남의 자녀들의 교육에 기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는 소득을 여러 단계의 삶에 고루 배분하는 정치이지 계급들 간에 배분하는 장치가 아니다. 복지국가와 사회주의의 또다른 중요한 차이는 사회보험은 노동과 노동관계를 변혁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전히 유산자는 재산을 몰수당하지 않고, 이윤을 내는 것은 불법이 아니며, 협동조합식 공동 관리가 위계적인 경영을 대신하지도 않는다."(1193-4)


25장 마르크스주의, 파시즘, 독재


"정치이론이 죽었다는 말이 떠도는 한편으로 20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세기라는 말도 나왔다. 그런 맥락에서 '이데올로기'는 청중에게 사고를 촉구하기보다는 청중을 선동해 행동에 나서게 하는 힘을 가진 일련의 관념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비합리성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월터 리프먼은 여론은 지적인 주장보다는 그림 같은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에 민감하다고 지적했다. 촉발된 행동은 현 상태를 방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신화적인 과거나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세속주의적인 것일 수도 있고, 기독교의 천년왕국처럼 대단히 종교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이데올로기는 행동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논의가 진행된 시대적 맥락은 전체주의 체제의 등장과 몰락, 그리고 그런 체제의 유지에 힘을 보탠 이데올로기 창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지식인들의 문제였다."(1203-4)


"혁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레닌의 답은 소수 정예 혁명운동가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하나로 묶는 혁명적 정당을 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민주집중제는 각급 당 지도자는 민주적으로 선출하되 정책은 중앙에서 입안하고, 모든 당원은 그 정책을 익히고 따른다는 원칙이다." "민주집중제는 노동 계급을 혁명의 전위와 일반 구성원으로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당이 전위가 되어서 대중 속으로 선동선전활동을 하면서 실제 혁명을 주도할 순간이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반면 많은 민주사회주의자들은 오랜 교육과정을 거쳐 압도적인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광범위한 정당을 원했다. 트로츠키도 결국 이 구상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는 전위론이 따르면 노동계급의 부재 상황을 당이 대체하게 되고, 민주집중제가 힘을 발휘하면 당은 다시 중앙위원회가 대체하고, 중앙위원회는 결국 제1서기가 대체하게 될 거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제1서기는 스탈린이다."(1215)


"파시즘이 부정적인 정서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시즘이 상황에 따라 좌파 운동이 될 수도 있고 우파 운동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파시즘의 적은 의회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이며, 의회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논쟁을 거쳐야 하는 통치를 참지 못하는 급진파와 혁명가들의 공격에 대단히 취약하다." "파시스트와 민족주의자는 분명한 타도 대상이 있었다. 국가를 개인보다 덜 중요하게 보는 19세기식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자유주의국가는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준다는 사실로부터 정당성을 획득했다. 개인이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국가가 개인의 충성을 받을 권리보다 우선했다." "파시스트들은 자유주의가 오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헤겔의 개념을 차용하면서 전쟁은 국가의 '윤리적 건강'을 보전한다는 사상과 더불어 조합주의까지 흡수했다."(1229-30)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 그리고 스탈리식 공산주의를 '전체주의'라는 딱지 하나로 묶는 것은 오류다. 나치즘은 거의 전적으로 비지성적인 기획이었고, 반유대주의는 나치즘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였다. 이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에는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세 체제의 공통점은 카를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고 규정한 것, 즉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가르는 행태였다." "슈미트는 모든 체제에 독재적인 요소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는 그 어떤 의회 체제보다 더 진실한 인민의 대표자이고, 모든 권위에는 초월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관념을 바보같은 발상이라고 단정하기에 앞서 우리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1917년 볼셰비키 쿠데타를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혁명으로 잘못 규정했고, 조지프 슘페터도 한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절대왕정이 복원되면서 낡은 귀족 중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239-40)


26장 현대 세계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가 고대 민주주의보다 덜 '순수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결함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는 비전제적이고 자유로우며 대중적인 혼합정체이다. '비전제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다수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않고 헌법의 견제를 받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가 '대중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정부가 대중 일반에게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또 '혼합정체'라고 하는 것은 일인의 지배, 소수의 지배, 다수의 지배를 대통령이나 총리가 이끄는 행정부, 수백 명으로 구성된 의회와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적극적인 주도권은 허용되지 않는다. 유권자의 권력은 통치자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 힘이고, 그 영향력은 통치자들이 유권자가 자신들을 퇴출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데서 나온다. 국가수반이 대통령이냐 입헌군주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질적인 행정부의 수반이 인민에게 책임을 지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1249)


"슘페터는 민주주의란 '인민'이 공동선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대표를 내보내 그 견해를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시스템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상의 이미지를 먼저 던져놓는다. 그러고 나서 그런 이미지를 정반대의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로 그의 '현실주의'다. 민주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의에는 암묵적으로 도덕적 평가가 담겨 있었다. 민주주의는 공동선을 달성하기 위한 의사 결정 방법이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체제와 달리 합법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민주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적 정의는 그런 식의 윤리적 평가는 배제하면서, 민주주의적 방법은 엘리트가 인민의 표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싸워서 의사 결정권을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결국 슘페터가 말하는 현실주의의 요체는 '첫째, 엘리트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에서의 엘리트란 권력 획득을 위해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표 얻기 경쟁을 해야 하는 직업 정치인들이다'라는 것이다."(1268-9)


27장 세계 평화와 인류의 미래


"로베스피에르의 '지고의 존재 숭배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19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은 '인간의 종교'와 그것을 제도화하는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의 종교라는 개념은 생시몽의 『새로운 기독교』에서 사작돼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에서 다채로운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 기본 발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즉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실존의 의미를 묻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늘 그런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한 시점에 어떤 과제에 몰두하고, 습관이든 애정이든 돈을 벌기 위해서든 또는 재미로든 어떤 일을 하는 존재다. 그러나 인생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면 답을 원한다. 종교와 종교 대용품들은 답을 제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 체제에서 정교화된 마르크스주의는 대용품으로서의 종교였고,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 문제는 전통적인 기독교나 신의 섭리를 강조하는 답변이 설득력이 없어졌을 때 답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였다."(1296)


"프랑스적 전통의 지적 정점은 에밀 뒤르켐의 정치사회학이었다. 뒤르켐에게 종교의 본질은 개인이 자신보다 위대한 영적인 힘과 대면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회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런 힘은 사회 자체였고, 종교의 신화들은 가장 단순한 것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것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체의 영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었다. 사회의 본질은 도덕적 속성에 있는 것이지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하는 외양에 있지 않다." "그는 일종의 시장사회주의─또는 윤리적인 자본주의─가 경제와 정치적 삶에 정신적 깊이를 더해줄 수 있기를 기대했다. 현대사회의 종교적 기초는 개인의 존엄이다. 개인에 대한 존중은 계약관계에 대한 존중, 나아가 시장에 대한 존중을 강화한다. 그러나 시장은 정치적 틀에 의해 규제되어야 한다. 정치적 틀은 시장을 거기서 산출되는 결과가 자의적이지 않고 공정하게 되도록 만들어줌으로써 시장의 정신적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기제다."(1298-9)


"우리는 행복한 인간은 종교적 신앙도 종교의 철학적 대용물도 필요치 않다는 마르크스의 확신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세속화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에 주목해야 하겠다. 과학 지식의 폭발과 과학을 응용한 기술의 발전은 종교적 신앙의 입지를 약화시키지 않았다.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강력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세속화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미국은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국가적 모토를 화폐에 새겨놓고, 공적인 영역에서도 그런 신념을 진지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국의 18세기 국교제 폐지 옹호론자들은 그런 상황을 일찍이 예견했고, 토크빌도 그런 사태가 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반성직자주의가 활개를 치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교회와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한통속일 경우다. 이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에 대항한 16~17세기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시기에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확인되는 사실이다."(1300-1)


#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열정도 마찬가지 양상을 보여준다.


"지금에 와서 플라톤이 제시한 안경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는 운좋게도 홉스를 놀라게 만들었던 정치질서에 대한 위협들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핵무기의 발명 때문에 우리는 골치 아프게도 홉스의 상호 억지 논리에 대한 통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운명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은 일종의 서사시다." "지금은 훨씬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삶에 대한 나름의 개념을 가지고 자율적이고 당당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인 동시에 시민이다.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적인 것보다는 대부분 사회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질서가 잡힌 나라가 많다는 것, 그리고 시민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성취다. 그러한 인류의 성공 가운데 일부는 우리 선조들은 전혀 몰랐던 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정치적 틀이 없었다면 1945년 이후 세계가 거둔 그 모든 성공은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1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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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는 인간의 탄생 - 인종주의는 역사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나인호 지음 / 역사비평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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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타자 증오의 이론적 원천으로서의 인종주의 역사관


"인종주의자는 낯선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 자체를 혐오하고 미워한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인종주의가 단순히 우발적이거나 비합리적이고 일탈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양에서 발원하여 전 세계로 퍼진 대표적인 근대사상 혹은 체계적인 근대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는 것이다. 미국 역사가 모스가 적절하게 지적했다시피 인종주의는 광기의 우발적인 표출이나 편견의 산발적인 표현, 혹은 단순히 억압의 메타포가 아니다. 인종주의는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등과 마찬가지로 고유의 독특한 구조와 담론 양식을 지닌 완전히 발달된 근대적 사상체계이다. 인종주의는 과학에 대한 믿음, 근대적 철학과 종교사상, 시민계급의 도덕, 민족주의 등 서양의 근대정신을 대표하는 주류 사조와 결합되어 있으며, 근대 서양인들의 경험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이자 근대 세계를 특징짓는 중심적 현상이다."(9-10)


제1부 계몽사상과 인종 우월주의 세계사의 탄생 : 크리스토프 마이너스를 중심으로


"근대적 인종주의의 등장은 거대한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다. 콜럼버스 이후 끊임없이 계속된 대항해와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유럽인의 세계에 대한 인식 지평의 확대는 평화로운 교류를 통한 것이 아니라 정복과 문화파괴, 학살 같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엔코미엔다(encomienda)와 수천만의 살상, 그리고 전통문화의 파괴로 대표되는 에스파냐인들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폭력적 정복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으나 인종주의의 역사에서 더욱 중요한 결과를 낳은 폭력적 현상이 있었는데, 당시 막대한 이문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검은 상아(black ivory)로 호명된 흑인노예무역과 흑인노예제로 특징지어지는 초기 자본주의 발전이 그것이다. 이러한 근대 초의 역사적 변화와 근대적 인종주의의 출현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행되었다."(28-9)


"15세기 중엽에 등장한 '유대인raza'라는 표현은 'raza'라는 용어의 두 가지 뜻, 즉 '혈통'과 '천의 얼룩진 부분'이 결합하여 '세례를 통해서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을 지닌 유대인 혈통'의 의미로 쓰였다." "16세기 이후에는 또다른 인종 차별적 어휘들이 출현하고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메스티소'(백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혈), '물라토'(흑백 혼혈, 원래 말과 당나귀의 잡종인 노새를 지칭하던 단어), '니그로'와 같은 단어들이 그것이다." "17세기까지 인종 개념은 단순히 '가계', '혈통'을 뜻하면서 주로 신분/계급과 관련된 사회적 용어로 쓰이거나, 이러한 용례의 연장선상에서 점차 타종족이나 종교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소수집단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18세기 계몽의 시대에 들어와 근대적 인종 개념이 탄생했다. 이제 인종 개념은 과학적(생물학적) 학술용어로 격상하면서 전 세계의 인간을 분류하는 보편적 기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30-2)


# 당시의 신생학문인 자연사(박물학)가 인종차별적 믿음을 하나로 묶는 '공통의 줄기'나 관념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


"마이너스는 독일 계몽사상의 충실한 대변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세계 지혜(Weltweisheit)" 교사로 불렀다. '세계 지혜'라는 개념은 독일 계몽주의 철학의 거두 볼프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철학' 개념을 대체하여 종종 쓰이곤 했다. 볼프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인 '신의 지혜'에 대비되는 세속적 전체 지식이 '세계 지혜'였다. 특별히 '세계 지혜'라는 개념에는 특정한 철학적 입장이 담겨 있다. 이에 의하면 추상적 사변은 비난받아야 하고,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란 곧 실용성, 진보, 이성의 독립성, 국가의 위엄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이너스는 인간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기대할 때 그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계몽〉이라고 했다. 여자들이 언어나 수학을 배우거나 농민들이 학술저서를 읽는 경우가 그러하다는 것이다." "정치·사회적 비판이 결여된 마이너스는 계몽사상이 실제로 얼마나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사례가 된다."(47-9)


"인류사적 세계사로 구체화된 계몽주의의 역사관은 무엇보다 환경결정론에 입각해 있었다. 당대의 박물학자, 철학자 및 역사가 사이에서는 환경결정론이 인류의 역사를 자연사와 결합시키는 매개체로 각광을 받았다. 이는 그다지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환경 조건들과 정신(psyche)의 관계를 탐구했고, 이러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마이너스는 인류사 서술에서 '인종의 위계 서열', '유전/피', '자연법칙으로서의 인간 불평등'이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했는데, 그것이 인종결정론이다. 다수의 계몽사상가들이 인종 또한 환경의 산물이라는 대전제를 쉽게 넘어서지 못했고, 자신들의 백인종 우월주의적인 시각을 단지 애매모호하게 표현하고 있을 때, 마이너스는 자신의 역사관에 근거하여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내부로 전위시켜 보편적인 인종 우월주의를 정초하려 했다."(62)


# '존재의 대연쇄'라는 형이상학적 자연질서를 '인종의 대위계'라는 경험과학적 자연질서로 대체


"다른 자연사가들이나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종 차별적 언사들은 무수히 발견된다." "특히 〈니그로와 타인종 일반은 백인종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하다〉는 흄, 〈니그로는 검기 때문에 우둔하다〉고 주장하고 〈백인종의 순수함을 보존〉할 것을 염원한 칸트, 노예제는 자연법칙에 위배됨을 지적하면서도 심지어는 〈흑인들이 인간일 수가 없다〉고 말한 몽테스키외 등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발언들은 계몽사상이 인종 편견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대부분의 계몽사상가들은 인종 담론을 통해 타지역의 후진성과 대비되는 유럽의 문명적 성취 및 진보에 대한 자부심, 다시 말해 유럽중심주의를 표현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의 인종 담론은 인종의 불평등보다는 인종의 다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인종의 해부학적 특징과 지적·도덕적 소질을 직접적으로 결부시키는 데 조심스러웠으며, 무엇보다 인종결정론이 아닌 환경결정론에 의해 주도되었다."(68-70)


# 인류의 인종적 차이의 근본적 원인은 기후/환경이라는 관점


제2부 혁명의 시대와 염세적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탄생 : 아르튀르 고비노를 중심으로


"이 책은 고비노가 ('인종주의의 아버지'라는) 모든 기억들과는 달리 그가 계몽사상기의 인종 우월주의와 제국주의 시기, 특히 19/20세기 전환기의 인종 증오주의를 매개하는 인물이란 점을 부각시키고자 한다. 그는 인종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인종주의의 매개자였다." "또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고비노가 결코 독창적인 인종이론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내용적으로 인류학, 언어학, 역사학 등 당대의 다양한 학문적 성과의 종합이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역사가 모스는 고비노를 "인종주의의 조합자"라고 불렀다." "고비노의 역사철학은 염세주의적 문명비판, 귀족의 인종주의, 반민주적·반혁명적인 정치·사회사상을 당시로서는 새로웠던 인종 이론과 결합시킴으로써, 구체제와 봉건적 신분질서를 옹호한 당대의 보수반동 이데올로기를 근대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89-90)


"특별히 프랑스에서는 전문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종'이 역사서술을 위한 용어로 부각되었다. 역사를 '인종 간 투쟁'으로 정의하고, '인종'과 '계급'을 동일시하면서 지배 인종과 피지배 인종의 불평등성을 강조한 티에리에서부터 '인종'을─크건 작건 간에─역사진행에 대한 설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로 파악한 샤토브리앙, 기조 등을 거쳐, '단지 선사시대 및 상고시대의 역사에 있어서만 인종이 역사적 요소'로서 중요하다고 본 미슐레에 이르기까지 그 입장은 다양했지만, 역사서술을 위해 '인종'은 이제 무시할 수 없는 범주가 되었다." "당대의 이러한 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고비노의 『인종불평등론』은 '전체 역사' 혹은 '역사 자체'의 보편적 의미를 성찰함으로써 인종론적 역사해석을, 특별히 인종주의적 성격의 역사해석을 일종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단계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당대의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94-5)


"『인종불평등론』은 세계사, 정확히 말해 세계 문명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특별히 프랑스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르네상스 시기부터 자국의 역사를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해석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의하면 프랑스 역사는 한편으로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과 다른 한편으로 피정복민인 갈리아족(켈트족) 혹은 갈로-로마족이라는 두 종족(ethnos) 간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다. 종족 간 투쟁의 역사는 훗날 여기에 '인종' 개념이 들어오면서 지배계급인 프랑크(게르만) 인종과 피지배계급인 갈로-로마 인종의 대립과 투쟁의 역사로 재해석되었다." "특히 프랑스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정복민인 프랑크(게르만)족(인종)의 후손임을 내세워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과 봉건제적 정치체제의 적법성을 이러한 역사해석으로부터 이끌어냈다. 이것이 바로 '계급'과 '인종/종족'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귀족의 인종주의'라는 프랑스 특유의 이데올로기다."(115-6)


"고비노는 '귀족의 인종주의'를 특유의 염세적 기조 속에서 '아리아 인종주의'로 업그레이드시켰다. 그는 귀족의 지배계급으로서 정당성을 위한 역사적 전거를 중세 초에서부터 시작된 프랑스 역사에서 선사시대부터 시작하는 세계사로 확장했으며, 게르만주의를 아리아주의로 추상화하고 일반화했다. 이른바 '외래 인종에 의한 정복'이라는 것은 프랑스사의 시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동일한 현상이 나머지 세계에도, 즉 "인류의 아리아적 기원"에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문헌학자 존스는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켈트어, 게르만어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언어들 사이에는 공통된 어머니 언어가 있는데 그것을 '아리아어'라고 했다. 존스의 연구는 인종사상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언어군이 하나의 인종과 일치하는 것으로 믿었다. 이로써 '아리아 인종' 관념과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피의 신화가 탄생했다."(122-3)


"1894년 2월 12일 독일에서 고비노협회가 창설되면서 고비노는 명실상부한 인종주의 역사철학의 아버지로서 부활했다." "고비노 르네상스는 제국주의가 그 절정으로 치닫던 시기에 일어났다. 고비노의 염세적인 인종주의 역사철학은 이제 인종 증오주의를 위한 무기로 변화되어갔다. 고비노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 각국의 수많은 인종 과학자들, 인종 신비주의자들은 그의 인종 퇴화론을 진지한 현실의 경고로 받아들여 민족의 인종적 재생, 나아가 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 매진했다. 제국주의적 팽창과 민족의 몸을 해하려는 안팎의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 및 박해는 이러한 민족 재생 프로젝트와 동전의 앞뒷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세기말의 인종 증오주의 속에서 고비노의 역사철학적 기본 개념, 이론 틀과 명제들, 그리고 역사 내러티브는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통해 수정되면서 다양하게 수용되고 변형되었다."(154-6)


제3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1 : 유대인의 위험


"급진적 민족주의와 결합된 인종주의는 자신들의 민족 혹은 인종을 위협하는 '적대 인종'을 향해 '사탄주의적' 메타포를 사용했다. 1860/70년대 이후 1900년을 거치면서 서양의 인종주의 담론은 전통적 반유대주의를 새롭게 포장했을 뿐만 아니라, 황화론과 결합되면서 진행되었다. 여기서 한편으로는 유대인이,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 민족들, 즉 황인종이 위험한 '적대 인종', 나아가 무시무시한 '악마적 인종'으로 표상되었다. 이른바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 담론과 황화론은 종말론적 플롯을 지닌 인종투쟁의 역사관과 결합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이전의 우월주의나 염세주의에서 벗어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했다. 그러나 '적대 인종'에 대한 두 담론은 내용적으로는 명백히 상호모순 관계에 있다. 전자가 유대인으로 체화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있다면, 후자는 황인종에 맞서 서양이 성취한 근대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수호하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160-1)


"그렇다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어떤 점에서 새로웠는가?"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혹은 사회적·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유대인의 특정 측면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유대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 존재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 유대인을 '우리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의 원흉인 악마적 인종', 그것도 모든 것을 '유대화'할 정도로 가공할 능력을 지닌 '악마적 인종'으로 추상화시켰다. 이에 상응하여 이러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의 논리적 근거와 도덕적 정당성을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찾았다. 역사는 빛의 세력인 '우리 민족공동체'와 어둠의 세력인 유대 인종과의 투쟁의 역사이며, 현재는 유대 인종의 최종적 승리와 '우리 민족공동체'의 멸망을 바로 목전에 둔 역사의 마지막 환란 단계라는 종말론적인 인종투쟁 사관이 그것이다."(168-9)


"마르는 유대인을 악마적 인종으로 형상화하면서 매부리코나 안짱다리 같은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을 정형화시키는 전통적 토포스(topos)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의 인종적 특징을 정신적인 것, 18세기 식으로 말하면 타고난 자질과 성향(Anlage)에서 찾는다. 특히 "유대화"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유대 인종의 내적인 소질과 성향이 독일인마저 오염시킬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게 유대 인종이란 단순히 생물학적 혈연집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악마적인) 영적·정신적 실체를 의미했다. 이 같은 논리를 따를 경우 생물학적으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유대화"되었다면 그는 정신적 혹은 내적인 유대인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자유주의자든 민주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혹은 특정 자본가든, 나아가 근대 문명 전반을 대변하는 세력이든, 자신이 적대하는 모두는 유대화된 존재 혹은 내적인 유대인이며, 따라서 공동체의 순결성을 파괴하는 악마 세력인 것이다."(171-3)


"독일과 서유럽에서 반유대주의 선동이 기대했던 정치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새로운 반유대주의 선동의 파도가 밀려왔다. 보다 완결된 형태와 스토리를 갖춘 유대인 세계지배 음모론이 그것이다. 이 음모론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비밀정부 지휘하에─정부회합은 프라하의 공동묘지에서 밤에 열리는데─정치·경제·문화적 권력을 이용하여 각국을 다양한 위기와 혼란에 빠트리면서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한층 진화하게 되었다. 유대인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 가능한 무서운 능력을 지닌 채 모든 악의 원흉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처럼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의 진원지는 러시아였다. (러시아 비밀경찰의 지휘 아래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위서僞書인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은 이러한 음모론의 최상의 표현이자 유포 수단으로 기능했다."(192-3)


"『시온 장로들의 프로토콜』에 상세한 주석과 실증적 고찰이라는 살을 입혀 유대인 세계정부 음모론을 보다 그럴듯하게 스토리텔링하고 전 세계에 확산시킨 사람은 '자동차 왕'이라 불리는 미국의 기업가 포드였다. 포디즘(Fordism)으로 대량생산체제와 소비자 사회를 창조한 이 미국의 '국민영웅'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의 반유대주의의 성장과 확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평화주의자로서 평화선을 유럽에 보내 전쟁을 중지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의 회고에 의하면, 그 평화선에서 이 전쟁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유대인 금융자본가들의 음모로 인해 벌어졌음을 듣게 되었고, 이후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문건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위서임을 주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문건의 사실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대변했다."(194-5)


제4부 인종 증오주의와 '악마적 인종'의 발명 2 : 황인종의 위험


"황화 담론 속에 '황화黃禍(Yellow Peril)'라는 표어가 등장한 것은 1895년 청일전쟁이 종식될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황화' 표어의 등장과 확산은 황화 담론의 대중화 과정을 알 수 있는 지표에 불과하다. 이 표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황화 담론이 대중적 담론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화'라는 표현이 없다 하더라도 황화 담론은 이미 청일전쟁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이 담론 속에서 아시아 민족들의 위험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슬로건이 다양하게 동원되곤 했다. 예를 들어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나치 이데올로기의 주요소 가운데 하나였던 '생활공간(Lebensraum)'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라첼은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중국인 이민문제와 관련하여 1876년 '엄청난 인구를 가진 몽골 인종의 걷잡을 수 없는 홍수라는 의미'에서 "황색공포(Gelber Schrecken)"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미국에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황색유령(Yellow spectre)"이라는 표어가 등장했다."(215-6)


"계몽사상의 시대는 유럽인들이 동아시아인을 백인종에서 황인종으로 변화시킨 시기이기도 하다. 16/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의 선교사, 상인, 여행가들은 대체적으로 동아시아인을 '백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린네 같은 박물학자들은 동아시아인을 백인에서 퇴화된 변종인 '황색인'으로 분류했고, 블루멘바흐는 형질인류학적 관점에서 '몽골 인종'으로 규정했다. 우리는 마이너스가 블루멘바흐의 영향을 받아 동아시아인을 '못생긴 몽골 인종'의 하위 범주로 분류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윽고 19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인을 '황색 몽골로이드'로 규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유럽인의 역사의식 속에 확고히 뿌리박힌 훈족, 헝가리, 몽골의 침입에 대한 기억과도 연관이 있다. '러시아가 유럽을 정복할 것이고 나중에는 러시아 역시 타타르족에 의해 정복당할 것', '타타르인의 지역에서부터 새로운 민족이동이 일어날 것'과 같은 토포스들이 반복되곤 했다."(217-8)


"세기말의 인종주의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대 인종들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악마화시키면서 타자에 대한 차별의 이데올로기에서 증오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해갔다. 이제는 타자에 대한 우월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공동체의 타락/쇠퇴/몰락에 대한 염세주의적 우려 또한 악마적 적대 인종에 대한 공포와 증오의 감정을 북돋우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유대 인종의 '황금색 위험'이나 황인종의 '황색 위험' 이외에도 이른바 남아프리카의 헤레로(Herero) 부족과의 전쟁으로 촉발된 '흑색 위험'(흑인종의 위험), '적색 위험'(사회주의의 위험), '색깔 없는 위험'(인종 간 혼혈의 위험), '아메리카의 위험', '러시아의 위험' 등 온갖 위험을 강조하는 표어들이 난무했다. 이처럼 끊임없이 가상의 적을 찾아 헤매던 폭력적 인종주의는 국가와 민족들 간의 무한투쟁이라는 제국주의의 문법 앞에서 민족주의와 결합되었을 때 그 파괴력이 극대화되었다."(250)


제5부 내적 인종 증오주의의 탄생 : 민족주의에서 국가인종주의로


"인종주의는 이제 단순히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차별주의에 머물지 않고 공격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진화했다. 이러한 인종 증오주의는 외부의 적에 대한 국민/민족의 단결과 내적 통일을 강조했음에도, 혹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내적인 인종 증오주의로 발전했다. 이러한 과정은 '국민/민족을 엘리트 인종으로 만들기'라는 인종 재생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제 내부의 적과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인종 재생 프로젝트는 인종주의가 과학 담론의 틀에서 벗어나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 담론의 영역으로 확대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시기 수많은 다양한 과학적 인종이론들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 혹은 인종위생학이라는 공리를 공유하면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 정치와 직접적으로 결합했다. 인종적 재생의 정치는 한편으로 국가적 효율성과 시민적 도덕규범의 이름으로 시민계급 여성에 대한 출산 강요 등 국민/민족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을 규제하고 억압했다."(255-6)


"19/20세기 전환기에 이르러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밀접하게 결합했다. 이 시기에 들어와 민족/국민의 인종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용어들이 홍수를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는 과학적 인종주의의 전성시대였다. '생존투쟁', '자연선택과 최적자의 생존', '우수한/열등한 유전자', '인종 개량' 같은 사회다원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의 공리를 공유한 수많은 인종이론이 유행했다." "이러한 과학적 인종주의는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매개로 사유럽, 북유럽, 중부 유럽 및 남동 유럽의 여러 나라, 나아가 북미 지역의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제 한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이 그 민족/국민의 성격을 결정하며, 조국의 장래와 안녕은 민족/국민의 인종적 자질의 향상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 민족주의자들과 제국주의자들 사이에서 일반화되어갔다. 특별히 이들은 우생학/인종위생학을 "민족주의의 과학"으로 간주했다."(271-2)


"또한 급진민족주의 담론에서는 '민족의 몸'과 이를 위협하는 '낯선 몸들'이라는 메타포가 빈번히 쓰이고 있었다. 원래 몸의 이미지는─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 공동체를 '신성한 몸'으로 표현한 것처럼─전통적으로 공동체의 올바른 질서, 기원, 목표 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몸의 메타포는 종교적·정치적 공동체의 단결을 호소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급진민족주의자들은 몸의 메타포를 통해 생물학적, 의학적, 인종위생학적 개념들과 유추들을 사용하면서 민족공동체의 인류학적 확립을 의도했다. 나아가 '민족의 몸' 메타포는 푸코가 말한 이른바 '생명정치'의 영역으로 전위되었다. 남녀 성역할, 성정치, 인구정책 등에서 정치·사회적으로 건강한 민족의 몸을 재생산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남녀 고유의 역할이 장려되었으며, '민족공동체'를 위해 투쟁하는 민족주의적 남성성이 강조되었고, 이러한 '남성'과 '남성 아닌 자'의 구별 속에서 여성성이 혐오되었다."(273)


"인종과학자들은 국가인종주의에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종종 그들의 상상력의 지평은 일반 수준의 민족주의자들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곤 했다. 특히 인종과학자 가운데 일부는 인종 개량의 최종 목표로서 단순히 '인종의 순수한 보존'과 '건강한 민족의 몸'을 넘어서서 '완전한 인간', 즉 '초인超人으로서의 민족'을 지향했고, 이러한 사회생물학적 유토피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배제, 억압, 통제뿐 아니라 말살의 수단까지 고려했다. 이와 같은 급진적인 국가인종주의야말로 문자 그대로 한 사회 내에 〈살아 마땅한 자와 죽어 마땅한 자〉를 나누는 "생명 권력"(푸코)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물론 국가인종주의를 인종과학자들의 과학적 인종주의로만 한정시킬 수는 없다. 인종 신비주의에 입각한 민족(인종)종교운동 역시 국가인종주의의 한 형태다. 그러나 과학적 국가인종주의가 제국주의 시대의 공공여론과 정부정책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275-6)


# 국가인종주의의 양대 이론적 지주 : 사회다윈주의와 우생학


"1883년 다윈의 조카 골턴은 인종 재생을 목표로 우생학이라는 신생 학문을 탄생시켰다. 우생학의 밑바닥에는 '역선택'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었다. 이미 「유전적 재능과 형질」(1865)이라는 논문에서 골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미개 상태에서는 생존경쟁에 의해 퇴화해야 할 허약한 개체가 문명사회에서는 살아남는다. 궁핍한 가정의 건강한 사람보다 유복한 가정의 병약한 사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길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다. (···) 문명사회에서는 자연선택의 법칙과 그 법칙에 의한 정당한 희생자 사이에 화폐와 제도가 방패막이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문명화의 결과로서 '역선택'이 일어나고, 이는 곧 인종의 질적 하락을 가져온다는 것이 골턴의 비관적 진단이었다." "'역선택'을 막는 처방과도 같은 우생학은 온 국민을 '정상'과 '비정상' 혹은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구분하고, '비정상' 혹은 '부적격자'를 제거하며, '정성' 혹은 '적격자'의 결혼과 생식을 장려하는 인종 재생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284-5)


제6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1 : 루트비히 볼트만의 인류학적 역사론


"급진민족주의는 특히 해외 식민지가 적었거나 없었던 나라들에서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범민족주의(pan-nationalism)로 발전해갔다. 범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 대동아공영권 이념으로 발전한 범아시아주의 등이 제국주의 전쟁의 파노라마에 등장했다. 범민족주의는 자민족을 세계를 지배할 자격이 있는 선민 내지 초인적 지배 인종으로 내세우면서, 자민족의 지도하에 문화적 혹은 혈연적 연관이 있다고 여겨진 여러 국가의 국민을 모아 새로운 제국을 만들거나, 최소한 이들에게 '세계정책적' 헤게모니를 행사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적 기획이었다. 범민족주의에는 종족적·문화적 민족주의, 인종주의, 제국주의가 결합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독일어가 모국어인 사람들, 나아가 게르만 인종에 속하는 모든 민족의 단결을 주장했던 범게르만주의는 이 세 가지가 삼위일체를 이룬 범민족주의의 결정판이었다. 범게르만주의는 분열된 독일민족운동 진영을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접착제 역할을 했다."(327-9)


"'역사·사회인류학' 학파는 바세르 드 라푸즈의 인류사회학에 준거하여 코카서스 인종, 즉 백인종을 그 형태학적 특징에 따라 유럽 인종, 알프스 인종, 지중해 인종으로 나누었다." "이들은 이러한 가장 인종주의적인 인종이론을 독일 민족주의와 결합시켰다. 먼저 이 학파는 인도게르만(아리아) 인종의 기원을 아시아가 아닌 고대 게르만족의 원거주지로 추정된 중서부 독일이나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의 북유럽이라고 주장했다. 볼트만은 이러한 학설이 "새로운 시대를 연 진보"라고 자찬했다. 그동안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근거한 이 인종의 아시아 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학파는 언어학 이론과 인종사상의 결합물인 '아리아 인종'이라는 말보다는 '인도게르만 인종'이나 '북유럽(북방) 인종'이라는 인류학적 용어를 더 선호했다." "아울러 오랫동안 독일 민족의 우월함의 근거가 된 게르만 신화를 인종주의적으로 재구성하여 게르만 인종 우월신화로 변모시켰다."(348-9)


# 역사·사회인류학 학파의 주요 논지

1. 인류는 인종 간 육체적·정신적 고유성에서 불평등하다.

2. 인류가 출현한 홍적세 이후로 각 인종들의 근본적 속성은 불변하다.

3. 인종과 사회계급은 일치한다. 즉 인종 등급에 따라 사회적 위계질서가 구성된다.


"볼트만은 역사를 '우수한 자들에 의한 문명의 발전─문명의 발전으로 인한 우수한 자들의 퇴화와 사멸'이라는 반복적 사이클이 연쇄적으로 이어진 끝없는 순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 이러한 진보와 몰락의 순환사관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그가 말하는 역사적 인종 진화 관념은 다윈의 무목적적인 진화 관념에 충실하다. 볼트만은 인류 전체의 끝없는 문화/문명적 진보와 완성을 주장하는 계몽사상가들과 일부 사회다윈주의자들의 진보낙관주의를 "환상적인 표상방식", "미신" 등으로 폄훼했다. 그의 진보낙관주의에 대한 비판과 순환사관은 문명발전을 이룰 수 있는 재능과 천재성은 일부 인종에게만 한정되어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자연민족'들은 유럽인 및 문명과 조우하면 필연적으로 사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볼트만은 그 멸망의 주원인으로 특히 절멸전쟁을 꼽았는데, 이 논리를 따르면 '자연민족'들에 대한 절멸전쟁은 역사법칙을 따르는 정당한 행위가 된다."(356-7)


제7부 범민족주의의 역사철학 2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인종투쟁의 문화사


"1900년을 전후로 사회인류학과 사회생물학 연구 분야 전반에서 인종 개념 자체에 대한 신념이 도전받고 있었다. 피르호는 게르만 인종과 유대 인종을 가르는 순수한 인종의 경계란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두개골 측정학 연구의 결론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처럼 인종과학이 위기를 맞고 있던 상황에서 인종주의의 비합리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른바 "인종 신비주의"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다. 우생학, 사회인류학, 인종사회학 등 유물론적·실증주의적 인종과학은 인종 이념에 합리성과 객관성의 외피를 덧씌웠다. 인종 이념은 결국 믿음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고, 인종에 대한 믿음을 갖느냐 아니냐는 궁극적으로 세계관의 문제였다.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인종 신비주의는 인종의 신화적 기원과 인종의 고유한 성격을 만들어낸 정신적 혹은 영적인 실체를 내세웠다. 이를 신봉하는 자들은 인종문제에 대한 과학적 검증이 실패했을 때에도 여전히 인종의 신화, 상징, 신비에 대한 믿음을 확고하게 견지했다."(371-2)


"이러한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주의는 특히 반유물론적·반실증적인 지적 조류가 널리 퍼져 있던 독일어권 중부 유럽에서 유행했다. 이곳의 시민계급 문화는 전통적으로 도덕과 가치의 보루였던 기독교와 교회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나타난 세계관적 방황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합리주의, 물질주의, 도시화, 기술화 및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근대성에 대한 전반적 불쾌감 속에서 많은 사람은 새로운 신, 새로운 예언자를 찾아 헤매었다. 이들 독일어권 시민들의 "방랑하는 종교성"은 자유주의 신학 및 자유종교 공동체, 자유사상가 운동뿐만 아니라, 수많은 세속화된 종교들, 즉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일원론에서부터 쇼펜하우어 컬트, 신적 진리의 신비한 체험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신지학神智學 및 인지학人智學 등의 비교秘敎들을 거쳐 채식주의 및 생활개혁 운동, 반더포겔 운동, 사회개혁윤리협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체종교와 유사종교들에서 안식을 찾았다."(372-3)


"체임벌린은 인종주의를 구원하기 위해 인종 개념을 과학적 인식의 대상에서 깨달음의 대상으로 변화시켰고, '모든 것은 인종으로 귀결된다'는 신념이 기반하는 세계관적 토대를 유물론에서 관념론, 형이상학, 종교의 영역으로 전위시켰다. 그에 의하면 인종은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총체적 '형상'을 관조하는 것이었고, 인종의 의미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체험되고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것, 다시 말해 '직관'과 '본능'을 통해 '이해'되는 것이었으며, 인종의 고유한 성격은 본질적으로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구축하고자 했던 새로운 인종이론에서 중요했던 것은 인종문제에 관한 검증 가능한 지식이 아니라, 이 문제가 현재의 삶을 위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19세기의 기초』 서문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모든 지식보다 더 높고 신성한 것은 바로 삶 자체이다. 여기에 기록된 것들은 체험된 것들이다.〉"(398)


"괴테와 칸트에게서 체임벌린은 게르만적 세계관/종교의 사상적 주춧돌을 발견했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의 선구자이자 자연연구가로도 유명한데, 무엇보다 자연을 수학과 인과율의 원리에 가두어버린 기계론적 자연관에 반대하면서, '예술가적·건축가적 상상력'을 매개로 예술과 과학을 결합한 독특한 자연철학을 전개했다." "체임벌린이 괴테의 이러한 자연신비주의를 통해 실증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식론적 무기를 얻었다면, 독일 관념론의 시조가 되는 칸트를 통해서는 유물론에 대항할 수 있는 세계관적 무기를 얻을 수 있었다. 칸트의 비판철학은 과학적 인식론의 공세 앞에서 도덕과 종교의 근거가 되는 형이상학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체임벌린에게 칸트는 유물론적 일원론의 공세에 맞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믿음의 세계를 보호해준 이원론적 세계관의 수호신이었고, 이성을 넘어서 신비주의로 빠진 자신의 비합리적이고 주관적인 인종이론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준 스승이었다."(400-1)


"『19세기의 기초』에서 체임벌린은 무엇보다 서양의 근대적 역사철학의 기본 공리인 "인류의 진보" 개념을 강하게 부정하면서 오로지 "게르만 인종의 발전과 번영"만이 실제적 진보라고 역설한다. 이때 이러한 '진보'는 역사의 '완성'을 전제로 한 채 역사진행 과정을 해석하는 보편적인 개념이 아니라, 특정 인종의 뛰어난 문화적 성취 능력과 고유한 발전 방향만을 강조하는 특수 개념이면서, 동시에 '퇴화' 개념과의 내적 연결성 속에서 적대 인종과의 대립과 갈등을 고무하고 정당화하는 투쟁 개념으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그의 진보 개념은 인종 우월주의와 인종 증오주의를 동시에 표현하는 폭력적인 사회다윈주의의 슬로건이었다. 물론 당대의 많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 전체의 진보를 노골적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체임벌린은 인류 진보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을 무엇보다 진보낙관론적 사회다윈주의자들, 나아가 고비노와 같이 생물 분류학적·형태학적 인종 개념에 근거한 인종주의자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했다."(417-8)


보론 : '독일 민족의 범게르만적 세계제국' 프로젝트


에필로그 : 인종주의 역사관의 특징과 20세기의 조망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에 서양의 인종주의는 민족주의, 제국주의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본격적인 증오 이데올로기로 발전했다. '우리'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동시에 신체적·지적·도덕적으로 인종적 퇴화에 직면해 있다는 위기의식이 인종 증오주의의 원천이었다. 이 시기 인종 증오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역사 서사는 그 다양한 결에도 불구하고 역사진행을 묘사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생존투쟁'과 '자연선택' 및 '역선택'으로 요약되는 다윈주의와 우생학의 기본 개념에 준거했다. 이제 기존의 '융합', '혼혈', '퇴화' 개념은 이러한 개념들의 의미 장場 속에 편입되었다. 이를테면 잘 관리된 혼혈은 자연선택, 잡혼은 역선택에 속한다. 인종 증오가 표현된 역사 서사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역동적인 역사상을 제시했다. 역사란 '우리 민족/인종'과 '사악한 적대 인종(혹은 모든 우리의 적)' 간에 벌어지는 '생존투쟁'과 '자연선택'의 항구적인 과정으로 묘사되었다"( 464-5)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에 상응하여 그것이 인종 증오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거로 활용되면 될수록, 점점 더 허구와 사실, 신화와 역사 간의 경계가 사라진 역사 판타지로 바뀌어갔다. 이 속에서 인종 간 투쟁은 마니교적인 세계관에 입각하여 '신적인 존재'와 '동물적 존재', 나아가 선과 악의 대립으로 묘사되었다. 물론 인종주의 역사 서사는 본질적으로 신화를 지향했다. 예를 들어 '아름답고 우월한 존재'와 '못생기고 열등한 존재' 혹은 '고결한 피'와 '천한 피'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전자의 찬란한 성취와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는 인종 신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종신화는 가능한 한 '실제 일어난 것(res gestae)'으로서의 역사에 기반하곤 했다. 동시에 이러한 신화적 역사는 자신의 권위와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 성과와 이론을 끌어들였다. 이제 더 이상 역사의 신화화가 아니라 신화의 역사화가 인종주의 역사 서사를 특징짓게 되었다."(465-6)


"인종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백인 인종주의에 맞서는 저항적 인종주의도 출현하곤 했다. 저항적 인종주의는 백인종을 만악의 근원으로 규정하지만, 동시에 백인 인종주의의 역사관과 서사 및 논리를 모방한다." "19/20세기 전환기에 일본이 주창한 범아시아주의가 그러하다. 악마 혹은 귀축鬼畜과도 같은 백인종에 맞서기 위해 황인종의 단결을 주장했던 일본인의 인종주의가 개화사상가로 시작해 친일부역자로 일생을 마친 윤치호에게 거의 그대로 수용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보다 덜 알려진 사실은 『환단고기』를 숭배하는 자칭 민족주의 역사가들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저항적 인종주의의 포로라는 것이다. 이들은 마치 고비노, 볼트만과 체임벌린 같은 범민족주의적 인종주의자, 나아가 서양의 여러 인종 신비주의자들을 모방한 듯 우리 민족은 수메르 문명을 비롯한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문명의 건설자요 지배자인 환족의 후예라는 역사 판타지를 만들어내고 있다."(4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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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의 끝과 시작 -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
강유원 지음 / 라티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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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은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있다. 그러면 이 자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정초된 것이다. 단적인 시원始原(Anfang)이다. 이 시원은 자연사적 맥락에서 추상화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상황에서 도출해 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매개적인 것이다. 헤겔이 이것을 기독교에서 이끌어 내고 있기는 하다. 그는 예수가 단적으로 인간의 자유, 세계의 자유를 천명하였다는 통찰을 청년기에 설파한 바 있다.

 그러나 철학사적인 문맥에서 고찰한다면 이는 데카르트의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기원한 개념이다. 데카르트는 일체의 외면적 사태로부터 철저하게 내면으로 퇴각한(소극적 부정적 계기), 그리하여 단독적 자기로써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적극적 긍정적 계기) 〈이 정신··· 나 자신〉을 정립하였다. 이로써 유한자인 '나 자신'은 바로 그 유한성을 계기로 무한자인 신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무한자인 신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던 유한자인 인간은 무한자인 신의 인식에 이르는 필연적 계기로서 성립하였다. 인간이 자기의식으로써 신을 인식할 때에만, 바로 그때에만, 인간이 초월론적인 만큼, 인간이 스스로 초월적인 것을 관조할 수 있는 존재하고 이론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만큼, 꼭 그만큼만 인간은 초월적일 수 있는 것이요, 바로 그러할 때에만 신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 자신의 자유를 자각하고 있다는 것에는, 바로 그렇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바로 그것과 함께 또는 바로 그런 까닭에) 정신의 자유 일반을 세계에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자신의 자유에 대한 자각이 정신의 온전한 자기 실현의 가능태라면 그러한 가능태는 이 세계 안에 자신의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가능태를 현실태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 이는 자연사가 아닌 인간사의 시작이다. 인간사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정신화精神化(Begeisterung)된다.

 인간사에서는 정신적 세계가 실체이고, 물리적 자연적 세계는 그것에 종속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정신의 자유가 세계에 실현되어야 함을 자각하여 온 과정이므로 물리적 세계에 매몰된 것은 선행하는 단계요, 정신적 세계의 건립은 〈사변적으로 표현하면〉, 이 선행하는 단계의 〈진리〉이다. 진리의 성립은 목적을 실현하려는 운동, 즉 활동이 있음으로써 가능해진다.

 가능태의 실현은 활동 또는 운동을 요구한다. 물론 물리적 자연적 세계에도 운동이 있다. 식물은, 가능태인 씨앗이 현실태인 나무로 성장하려면 환경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식물은 이 환경을 자신의 활동으로써 조성할 수 없다. 자연의 우연적 여건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태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실현의 활동, 즉 노동(Arbeit)은 인간 개인의 활동이면서 동시에 세계사적 노고이기도 하다. 이 노동이 '근대'라는 시대를 이끌어 간 추동력이다.

-제3부 〈시대를 읽는 주제 서평들〉, 1. 세계의 궁극목적과 역사 中에서, pp.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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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 1914년 유럽은 어떻게 전쟁에 이르게 되었는가
크리스토퍼 클라크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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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어떻게'라는 물음은 특정한 결과를 낳은 상호작용의 연쇄를 면밀히 살펴보도록 이끈다. 그에 반해 '왜'라는 물음은 제국주의, 민족주의, 무장, 동맹, 거액 금융거래, 국가의 명예 관념, 동원의 역학 같은 범주별 원인遠因들을 조사하도록 이끈다. '왜' 접근법은 특정한 분석적 명확성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실상을 왜곡해 허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 허상 안에서는 인과적 압력이 꾸준히 증대하고, 사태를 내리누르는 요인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정치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통제 바깥에 있는 오래된 세력들의 한낱 실행자가 된다. 그에 반해 이 책에는 행위능력으로 가득하다. 핵심의사결정자들(국왕들, 황제들, 외무장관들, 대사들, 군 사령관들, 그외 수많은 관료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계산을 해가면서 위험을 향해 나아갔다. 전쟁 발발은 어느 정도 자기반성을 할 줄 알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인정했으며, 입수 가능한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최선의 판단을 내린 전쟁 행위자들의 연쇄 결정의 정점이었다."(31-2)


1부 사라예보로 가는 길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1903년 6월 11일 오브레노비치 국왕 시해는 세르비아 정치사에서 새 출발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는 1804년 민중봉기를 이끌어 세르비아에서 오스만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1813년 오스만이 반격에 나서자 오스트리아로 피신해야 했다. 2년 뒤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두 번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유연한 정치적 수완가인 밀로시는 오스만 당국과 협상해 세르비아의 공국 지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망명지에서 귀국한 카라조르제비치는 오스만의 묵인 아래 오브레노비치의 명에 따라 암살되었다. 주요 정적을 제거한 오브레노비치는 오스만으로부터 세르비아 공 칭호를 받았다."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끊이지 않았다. 19세기 세르비아 통치자들 가운데 재위 중에 자연사한 이는 놀랄 만큼 적다."(42-3)


새로 즉위한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가 입헌군주제를 천명하면서 "세르비아왕국은 이제 진정한 의회제 정치체, 즉 군주가 존재하되 통치하지 않는 정치체가 되었다." "정당은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언론은 오브레노비치 가문 치하에서 규범이었던 검열에서 마침내 벗어났다. 정치권은 대중의 요구에 더 부응하고 여론에 더 호응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세르비아는 정치적 실존 면에서 새 시대의 문턱에 있었다. 그러나 1903년 쿠데타로 해묵은 문제들이 해소되기도 했지만, 장차 1914년 사태를 무겁게 내리누를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왕가 살해를 위해 결성된 음모단 네트워크가 차츰 와해되기는커녕 세르비아 정치와 공적 생활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남았다." "새 정권이 음모단의 유혈사태에 기대어 존속한다는 사실은 음모단 네트워크가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맞물려 공개 비판을 어렵게 만들었다."(54-5)


"야심차고 재능 있는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지 못하는 세르비아 경제에서는 군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사실 역시 민간 당국이 군 지휘구조의 도전에 취약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세르비아 정부에는 19세기 다른 나라들에서 의회제를 지탱한 대규모 지식계급과의 유기적 연계마저 없었다. 이런 정부에게 민족주의는 강력한 정치적 도구이자 문화적 힘이었다. 되찾지 못한 세르비아 땅을 병합하려는 세르비아인들의 열의는 민중문화에 스며든 신화적 열망뿐 아니라 농지 면적과 소출이 줄어들어 살기 힘들어진 농민층의 토지 갈등에도 기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르비아의 경제적 곤경은 빈의 가혹한 관세와 목조르기 탓이라는 정부의 주장(아무리 미심쩍더라도)에 국민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리 없었다. 외세의 속박 탓에 베오그라드 정부는 바다로 진출하여 후진성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하구를 확보하는 데 집착하게 되었다."(82-3)


"1908~1909년 겨울 모든 열강은 베오그라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편입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단념하고 불가피한 결과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다." "(세르비아 통일이라는 이념에 얽매인) 온건파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근본적인 입장 차이를 보였던 쟁점은 국가가 당면한 곤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는 문제 하나뿐이었다. 온건파라 해도 민족주의 프로그램 자체를 부인할 수는 없었다(부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민족주의 논쟁의 어휘를 택한 극단파의 수사법이 언제나 유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파는 극단파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고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외부 관찰자는 정치 엘리트들 사이에 어떤 입장차가 있는지 분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실상과 달리 겉보기에 그들은 견고한 만장일치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이 위험한 역학이 훗날 1914년 6월과 7월에 베오그라드에 다시 출몰할 터였다."(88-9)


"(1차 발칸전쟁 이후) 베오그라드가 새로 획득한 영토에 살던 대다수 사람들은 세르비아의 통치가 시작되자 괴롭힘과 억압을 당했다." "정복된 지역들은 한동안 식민지의 성격을 띠었다. 정부는 새 영토의 문화적 수준이 너무 낮아서 자유를 줄 경우 나라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이런 결정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정부의 주요 관심사는 여러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비세르비아인들을 민족정책에서 배제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에게 이것은 두 종류의 전쟁이었다. 다시 말해 정규군 부대만이 아니라 이 시절에 아주 흔했던 빨치산 무리와 자유계약 전사까지 싸우는 전쟁이었다. 새로 획득한 지역들에서 공식 당국과 비공식 집단의 결탁은 소름 끼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교와 목욕탕, 모스크 같은 오스만 건물들이 숱하게 파괴되었다." "1913년 10월과 11월에 영국 부영사들은 병합 지역에서 세르비아인들이 자행하는 조직적인 위협, 자의적인 구금, 구타, 강간, 마을 방화, 학살을 보고했다."(98-9)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 표적이 된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내 슬라브족 소수집단에게 어떤 적의를 보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암살한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말대로 〈향후 군주로서 그가 모종의 개혁을 추진하여 우리의 통일을 방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영토회복주의자들 중 다수는 (슬라브족의 땅에 자치권을 더 많이 주는) 이 개혁안이 영토회복주의 계획에 치명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스스로를 개혁하여 빈에서 연방제 노선을 따라 통치하는 삼중 국가로 변모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래서 이를테면 자그레브가 부다페스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수도가 된다면, 세르비아는 남슬라브족의 피에몬테라는 선봉 역할을 빼앗길 위험이 있었다. 요컨대 대공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테러 운동들의 논리 중 변치 않는 한 갈래, 즉 명백한 적과 강경파보다 개혁파 및 온건파를 더 우려하는 갈래를 예증한다."(106-7)


"(대공 암살 실행자로 뽑힌 자들은) 근대 테러 운동들이 먹이로 삼은, 이상은 넘치고 경험은 부족한 젊은이 특유의 바로 그 음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성과 연애를 하고 싶어하면서도 젊은 여성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족주의 시詩와 영토회복주의 신문 및 팸플릿을 읽었다. 청년들은 세르비아 민족의 고통에 대해 오랫동안 숙고했고, 세르비아인을 뺀 모두가 그 고통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비천한 동포들의 수모와 치욕을 그들 자신의 일인 양 느꼈다. 특히 오스트리아 때문에 보스니아 동포들이 쥐는 경제 악화에 대해 곱씹어 생각했다(보스니아가 실은 세르비아의 심장부 대부분보다 더 산업화되었고 1인당 소득도 더 높다는 사실은 간과한 불평이었다). 희생은 주요 관심사, 거의 강박관념이었다." "프린치프와 차브리노비치 두 사람은 코소보 신화에서 아주 중요한 자살 암살자 인물형에 심취했거니와 더 넓게 보면 자신을 범세르비아 운동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108-10)


2장 특성 없는 제국


"두 차례 군사적 재앙이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반세기 동안 그 궤적을 규정했다. 1859년 솔페리노에서 프랑스-피에몬테 동맹군은 10만 병력의 오스트리아군과 싸워 승리함으로써 신생 이탈리아 민족국가 창건의 길을 열었다. 1866년 쾨니히그레츠에서 프로이센군은 24만의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여 신생 독일 민족국가에서 합스부르크제국을 몰아냈다. 이 두 차례 충격은 오스트리아 영토 내부의 생활을 바꾸어놓았다. 패전에 휘청거린 신절대주의적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탈바꿈했다. 1867년 타결된 대타협에 따라 지배적은 두 민족, 즉 서부의 독일인과 동부의 헝가리인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 결과 마치 노른자가 두 개 든 쌍란처럼 오스트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흔히 '치스라이타니엔'이라 불린 영토와 헝가리왕국이 반투명한 외피 안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독특한 정치체가 출현했다."(130-1)


"남동유럽 지역은 전략적 이해관계를 가진 두 강대국이 경쟁하는 긴장 지대가 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둘 다 오스만이 물러난 이 지역에서 패권을 행사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예부터 튀르크족에 맞서 유럽의 동쪽 관문을 지킨 수호자였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해 발칸반도의 신흥 슬라브계(특히 정교회) 민족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후견 세력 사이에 자연스러운 공통 이해관계가 있다고 역설했다. 또 오스만이 후퇴하면서 러시아정책수립자들에게 전략적으로 극히 중요한 타키 해협(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향후 통제권 문제가 불거졌다. 그와 동시에 서로 충돌하는 이해관계와 목표를 가진 야심찬 신생 발칸 국가들이 출현했다. 이 요동치는 지형 곳곳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한 수 둘 때마다 상대방의 이점을 상쇄하거나 줄이려는 체스 선수처럼 책략을 썼다."(149-50)


"발칸전쟁은 발칸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안보 지위를 파괴하고 더 크고 더 강한 세르비아를 만들어냈다. 세르비아왕국의 영토는 80퍼센트 이상 확장되었다. 2차 발칸전쟁 기간에 최고사령관 푸트니크 휘하의 세르비아군은 인상적인 규율과 주도권을 보여주었다. 그 전까지 합스부르크 정부는 베오그라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해 논의할 때면 무시하는 투로 말하곤 했다. 한 예로 언젠가 에렌탈은 세르비아를 오스트리아의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치는 "짓궂은 아이"에 비유했다. 그런 경솔한 언행은 더 이상 불가능했다. 1912년 11월 9일 참모본부 보고서는 세르비아의 급성장한 공격력에 놀라움을 표했다. 1912년 초부터 추진한 철도망 개선, 무기와 장비의 현대화, 전방부대 수의 엄청난 증가(모두 프랑스 차관으로 자금을 마련했다)의 결과로 세르비아는 만만찮은 교전국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세르비아 병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182)


2부 분열된 대륙


3장 유럽의 양극화, 1887~1907


"1907년 유럽 동맹 지도를 보면 삼국동맹은 (1887년 체제) 그대로였다(다만 이탈리아의 신의는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양국동맹 협정문에는 삼국동맹의 어떤 국가든 군대를 동원할 경우 두 조인국은 〈이 사건의 소식을 듣는 즉시 사전 협의를 거칠 필요 없이〉 전군을 동원하여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싸울 수밖에 없도록 신속히〉 배치한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화친 협정(1904)과 영국-러시아 협약(1907)을 통해 프랑스-러시아 동맹에 연결되어 있었다." "유럽 지정학적 체제의 양극화는 1914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었다. 1887년이었다면 오스트리아-세르비아 관계가 위기가 아무리 심각했다 해도 유럽을 대륙 전쟁으로 끌고 가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양분 구도는 전쟁 이전 수년간 분쟁을 고조시킨 것 못지않게 완화했다. 그러나 두 블록이 없었다면 1차 세계대전은 실제 발발한 대로 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213-4)


"베를린이 이 위협을 막을 방법은 러시아를 자국의 동맹체제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은 1873년 오스트리아·러시아와 함께 삼제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둘 다 포함하는 모든 동맹체제는 발칸반도에서 두 강국의 이해관계가 겹친다는 것을 고려하면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국 간 긴장을 억제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될 경우,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만약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선택한다면, 프랑스와 러시아의 협력관계를 막는 장벽이 사라질 터였다. 1890년 3월 사임할 때까지 독일제국의 수석 설계자이자 외교정책의 제1입안자였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은 이 문제를 충분히 의식했다."(216) "그렇지만 비스마르크식 외교로 달성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삼제동맹이라는 허술한 얼개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발칸에서의 이해관계를 가진 러시아와 관련해 그러했다."(218)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는 왜 1890년대 초 프랑스의 접근을 환영했을까? 분명 독일은 러시아의 친독일파 외무장관 니콜라이 기르스가 기존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재보장조약 갱신을 거절함으로써 러시아가 정책 방향을 전환하도록 부추겼다. 1890년 6월 평시 독일군 병력을 1만 8574명 늘리자는 온건한 군사 법안이 조약 비갱신 결정에 뒤이어 제출되었던 것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불안감을 자아냈다." "프랑스의 거액 차관을 좋은 조건에 제공받을 전망도 러시아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를 움직인 결정적 촉매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영국이 삼국동맹에 가담할 두려운 가능성이었다." "(1890년대 초의 정세는) 극동과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영국이 러시아의 강력한 서쪽 인접국인 독일과 힘을 합치고 더 나아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경쟁국인 오스트리와와 협력하기 직전처럼 보였다."(222-3)


"(유럽 세력균형의 새로운 판도를 열어젖힌)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영국 정치인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독일의 흥기가 아니라 영국의 숙적 러시아가 크림전쟁(1853~1856) 이후 강요받은 합의로부터 풀려날 전망이었다.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가 정한 1856년 파리조약의 조항들에 따라 흑해의 물길은 흑해 연안을 소유한 국가들의 군함에도, 다른 어떤 국가의 군함에도 〈공식적으로 영원히 차단〉되었다. 이 조약의 목표는 러시아가 동지중해를 위협하거나 영국의 영토와 인도행 해로를 교란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전으로 1856년 조약의 정치적 토대가 무너졌다. 새로 수립된 프랑스공화국은 크림전쟁 합의를 깨고 흑해에서 러시아의 군사화에 반대하던 입장을 포기했다. 영국 혼자서는 흑해 조항들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는 흑해 함대 건설을 밀어붙였다."(233)


"(적대적인 강대국 연대의 출현을 저지하는) 비스마르크 전략에는 대가가 따랐다. 독일은 항상 자기 체급보다 약한 펀치를 휘둘러야 했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지에서 제국들의 식민지 쟁탈전에 끼어들지 말아야 했고, 다른 강국들이 세계 세력권을 두고 다툴 때 방관자로 남아야 했다. 또한 베를린은 이웃 강국들에 모순적인 약속을 해야 했다. 그 귀결은 독일제국의회의 구성을 결정하는 유권자들이 원치 않는, 무력한 국가라는 의식이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방대한 제국의 주변부라는), 본국에 비교적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교환하고 거래할 수 있는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독일은 그런 제안을 믿을 만하게 할 수가 없었는데, 이미 붐비는 테이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 애쓰면서도 거래할 것이 전혀 없는 벼락부자 같은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변변찮은 남은 몫을 차지하려던 독일의 시도는 기성 제국 클럽의 강경한 저항에 부딪혔다."(240-1)


"1890년 독일이 러시아와의 재보장조약을 포기한 것은 어느 정도는 스스로 부과한 비스마르크 정책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1890년의 태도 변화(비스마르크 실각, 레오 폰 카프리비의 재상 취임,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제국 정치의 핵심 행위자로 부상)는 독일 대외관계의 새로운 단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1890년대 초의 '신노선'은 본래 협의하여 의도한 방침이라기보다는 우유부단과 좌고우면의 결과였다. 비스마르크가 갑작스레 퇴장하면서 생긴 공백은 그대로 남았다." "자유재량 정책은 독일에 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은 중대한 위험을 수반했다." "(별다른 안보 이득을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친교가 깊어감에도 영국이 독일과 더 가까운 관계를 추구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영국 정책수립자들은 먼저 프랑스와, 그 후에 러시아와 유화하는 정책의 이점을 고려하기 시작했다."(243-4)


"1907년부터 등장한 새로운 국제 체제가 유독 독일에게 불리하기는 했지만 이것이 유럽 강국들의 의도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프랑스의 경우에만 독일 견제를 우선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 초에 유럽 국가들이 체결한 일련의 협정은 세계사적 변천의 결과로 생각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런 변천으로는 중일전쟁과 지역 강국 일본의 부상, 아프리카 분쟁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레이트 게임으로 인한 재정 부담, 아프리카와 남서유럽에서 오스만 권력의 쇠퇴, 강대국들의 중국 쟁탈전뿐 아니라 그에 따른 중국 국내의 대격동까지 포함한 중국 문제 등이 있었다. 독일의 '안절부절'과 벼락부자처럼 끈덕진 요구가 당시 정세의 일부이긴 했지만, 이 시대를 재조정한 과정들을 더 폭넓게 분석한 연구들은 독일이 터무니없는 국제적 행위로 고립을 자초했다는, 한때 널리 수용되었던 견해를 뒷받침하지 않는다."(266)


4장 유럽 외교정책의 뭇소리


"20세기 초 유럽은 군주국들의 대륙이었다. 가장 중요한 여섯 강국 중 다섯이 이런저런 군주국이었고, 한 나라(프랑스)만 공화국이었다. 발칸반도의 신생 민족국가들(그리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마, 루마니아, 알바니아)은 모두 군주국이었다. 고속순양함, 무선전신, 전기 시가라이터의 이면에는 크고 복잡한 국가들을 인간의 예측 불가능한 생명활동에 얽어매는 이 고색창연한 제도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 각국 집행부들의 중추는 여전히 이런저런 남녀가 차지하고 앉아 있는 왕위였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서 각료들은 황제에게 임명받았다. 세 황제는 국가 문서에 무제한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각국 군대에 공식 권한을 행사했다. 왕조들의 제도와 인맥은 국가 간 소통을 구조화했다." "군주들은 정치적 행위자일 뿐 아니라 상징적 행위자였으며, 이 역할로 집단 감정과 연상작용을 사로잡고 집중시킬 수 있었다."(282-3)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든 안 했든, 유럽 대륙에 군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제관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일부분만 민주화된 체제에서 모든 공문서와 인사에 접근할 수 있고 모든 집행 결정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주권자, 각국 정부의 중심점으로 추정되는 군주의 존재는 모호함의 원인이었다. 군주들이 서로 만나서 국가의 큰일을 해결하는 순전한 왕조식 외교정책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았다. 허사로 돌아간 비외르쾨 회담이 그 증거였다. 그럼에도 군주를 집행부의 키잡이 겸 화신으로 보고픈 유혹은 외교관, 정치인, 특히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강력했다. 군주들의 존재는 정책 수립 과정의 중심축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계속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국왕들과 황제들은 국제관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원천이 될 수 있었다. 그 귀결인 불명확성은 확실하고 투명한 국가 간 관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을 계속 방해했다."(301-2)


"언론에 집착하는 태도의 밑바탕에는 그와 상반되는 태도가 있었다. 각료와 관료, 군주는 언론을 대중의 감정과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이자 드러내는 채널로 생각했고, 이따금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외무장관이라면 누구나 적대적인 언론 캠페인에 노출될 경우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다." "부정적인 기사에 대한 두려움은 숱한 외무부들이 비밀을 엄수한 한 가지 이유였다." "대다수 정책수립자들은 언론을 영리하고 분별력 있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언론이 휘발하는 성질이 있다고, 즉 금세 잦아드는 단기적인 선동과 광란에 휘둘리기 쉽다고 보았다. 민심이 상반되는 자극들에 의해 움직이고, 정부에 현실적인 요구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표현을 바꿔 말하자면, 여론은 대개 〈고삐 풀린 혀와 대책 없는 손을〉 결합한다고 보았다. 여론은 광란적이고 곧잘 공포에 휩싸였지만, 몹시 변덕스러웠다."(363-4)


"정책수립자들이 여론을 통제했던 것도, 여론이 그들을 통제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론과 공적 생활의 상호성에 대해,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정책수립자들은 때때로 여론을 알맞은 방향으로 유도하려 하면서도, 자신들의 자율성과 정책수립 과정의 통합성을 신중하게 보호했다." "더욱 근본적인, 그리고 더욱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는 심성구조의 변화였다. 이 변화는 강경한 입장이나 대립을 요구하는 쇼비니스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전쟁을 받아들이는 깊고도 광범한 마음가짐으로 표출되었다. 이제 전쟁은 국제관계의 본성상 확실히 일어날 사태로 인식되었다. 이렇게 쌓인 마음가짐의 무게는 1914년 7월 위기 동안 공세 계획 성명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민간 지도자들의 웅변적인 침묵을 통해 드러났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에 살았더라면 강대국 간 전쟁이야말로 최악의 사태라고 지적했을 법한 사람들이었다."(380-1)


5장 얽히고 설킨 발칸


"발칸반도에 대혼란을 가져온 연쇄 전쟁은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 1911년 이탈리아의 리비아 침공은 오스만 주변부에 대한 발칸 국가들의 전면전에 청신호를 보낸 격이었다. (당시 영국령이었던) 이집트와 (사실상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와 달리, 나중에 리비아라고 알려진 3개 주(빌라예트)는 오스만제국에 속한 지방이었다. 오스만의 마지막 아프리카 영토인 이 지방들에 대한 이탈리아의 전혀 정당하지 않은 공격은, 당대의 어느 영국인 관측자의 표현대로, 발칸 국가들에게 〈돌파구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자는 이야기만 무성하던) 발칸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침공 이후에야 비로소 싸울 마음을 먹었다. 세르비아 외무부의 정치적 수장이었던 미로슬라브 스팔라이코비치는 1924년에 이 사태를 되돌아보면서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과정을 개시한 사건으로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공격을 꼽았다. 〈뒤이은 모든 사태는 그 첫 공격의 진전에 지나지 않습니다.〉"(387)


"오늘날 대체로 잊힌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은 몇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유럽 국제체제를 교란했다. 이탈리아의 점령에 맞선 리비아의 투쟁은 현대 아랍 민족주의의 출현을 자극한 중요한 초기 촉매들 중 하나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리비아를 강탈하려는 이탈리아의 대담한 행보를 부추긴 반면, 이탈리아의 삼국동맹 파트너들은 마지못해 묵인했다. 이런 국제정세는 중요한 진실을 드러내 보였다. 삼국협상 국가들의 개입으로 삼국동맹의 약점이, 아니 지리멸렬함이 노출되었다. 이탈리아의 행동이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칸반도 전체의 안정을 깨뜨릴 것이라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거듭된 경고는 무시되었다. 이탈리아는 명목상으로만 그들의 동맹인 것처럼 보였다." "이탈리아가 훗날 삼국협상에 붙을 뚜렷한 기미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이탈리아는 서로 모순되는 약속들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는 복잡하고 모호한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395)


"삼국동맹의 콩가루 상태 이면에는 근본적으로 더욱 중요한 추세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침공하면서 유럽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미지근한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정세였는데, 친오스만 유럽 연대가 전면적으로 해체되었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출현한 유럽 열강의 협조체제는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강탈하려던 러시아를 견제했다(그 결과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이 연대는 러시아-오스만 전쟁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다른 형태로 재편되었고, 1880년대 중반 불가리아 위기 때 재조정되었다. 이제 이 연대를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탈리아와 전쟁을 시작할 무렵 오스만제국은 영국에 동맹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소원해지고 싶지 않았던 런던 정부는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뒤이어 발칸전쟁으로 유럽 협조체제는 수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중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396-7)


"발칸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은 옛 동맹 패턴의 반전에 지나지 않았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불가리아를 지원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를 비호했다. 1914년 이 구도가 뒤집혔다." "이 발칸 지정학 재편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몇 년씩 걸리는 장기지속 현상이 아니라 급변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적응하는 단기 현상이었다." "세르비아는 이제 발칸에서 러시아의 돌출부였다. 이것은 필연적이거나 자연스러운 결과가 전혀 아니었다." "발칸의 정교회 '자녀들'을 대신해 행동하겠다는 러시아의 주장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약화하고,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터키 해협의 발칸 배후지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민족주의 언론에 인기가 있었을지 몰라도, 히틀러의 생활권Lebensraum 개념과 비교해 정치행위의 신조로서 딱히 더 정당한 것은 아니었다."(438-40)


"1913년 10월 세르비아와의 교착상태를 겪으면서 오스트리아가 향후 위기에 대처할 때 준거로 삼을 몇 가지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실제로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양국 사이에 위기가 폭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그 전례들에 따라 대처했다. 가장 명백한 전례는 최후통첩의 효과가 입증된 듯 보였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10월 17일 통첩은 언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으며, 세르비아군이 마침내 알바니아에서 철수했다는 소식에 빈 사람들은 희열을 느꼈다." "두 번째 전례는 세르비아가 빈과의 소통을 관리하면서 장차 화근이 될 인상을 남겼다는 것이다. 주도면밀하게 도발하고 불순응하는 정책을 다정함에 가까운 간사한 정중함으로 포장한다는 인상이었다." "베오그라드는 빈이 온갖 모욕을 침착하게 감내하면서 계속 몰아붙여야만 굴복하고, 오스트리아가 압박을 늦추는 즉시 도전과 도발을 재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세르비아는 궁극적으로 무력만을 이해한다는 공리가 더욱 힘을 얻었다."(452-3)


"푸앵카레가 고위직에 취임할 무렵 프랑스에서는 역사가들이 '민족주의 부흥'이라 부르는 정치 기조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공화국 정치인들은 방어주의 안보정책, 즉 국경 요새화, 중포重砲, '국민무장군'으로 개념화된 군대의 짧은 훈련 기간에 역점을 둔 안보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에 반해 아가디르 사건 이후 프랑스는 군대의 직업적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훈련 기간을 늘리는 한편 지휘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일원화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다음번 전쟁에 명백히 공격적인 태세로 대비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1905년 팽배했던 대중의 평화주의적이고 반군사적인 분위기가 한결 호전적인 태도에 자리를 내주었다. 프랑스인 모두가 민족주의 물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지만(주로 젊고 지적인 파리 사람들이 새로운 호전주의를 받아들였다) 군사력 회복은 공화국 정치의 되살아나는 신조들 중 하나가 되었다."(464-5)


6장 마지막 기회: 데탕트와 위험, 1912~1914


"전전 막판 러시아-독일 데탕트는 발트항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거둔 성과는 보잘것없었다. 양국은 우호적으로 대화하면서도 실질적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언론에 배포된 공동성명은 알맹이 없는 일반론이었으며, 회담에서 "새로운 협정"을 맺지 않았고, 〈균형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입증된 국가들의 집단화에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독일은 실제로 오스트리아에 자제를 촉구하여 빈에서 베를린의 동맹 약속이 과연 확고하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반면, 러시아는 발칸 피후견국들을 이미 책동했고 앞으로도 책동할 예정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곤경을 이용할 의도가 러시아에 없고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역사적 임무'가 이제 옛일이라는 사조노프의 확언은 줄잡아 말해도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러시아-독일 양해의 기반이었다면, 실로 위태로운 토대였다."(496-7)


"데탕트는 복잡한 방식으로 동맹 블록들의 유동적인 구조와 상호작용했다. 데탕트는 핵심 정치행위자들의 위험 의식을 낮춤으로써 결과적으로 위험 수준을 높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레이는 런던 대사회의(1차 발칸전쟁을 종식하기 위한 정전회담)를 주재한 뒤 위기를 해결하고 "평화를 지키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는데, 결국 이 자신감 탓에 후일 1914년 7월 사태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영국과 독일의 발칸 데탕트로부터 독일이 맹방 오스트리아를 계속 억제할 거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억제할 거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야고브와 베트만도 런던 정부가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 정책의 진짜 성격을 마침내 알아차렸고 설령 이 지역에서 러시아가 분쟁을 일으키더라도 중립을 지킬 거라는, 똑같이 미심쩍은 통찰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유럽 국제체제에서 일부 국가들이 데탕트 국면을 조성하면 다른 국가들의 연대가 공고해지기도 했다."(507-8)


"삼국협상의 연대가 헐거워질지 모른다는 우려에 단기적으로 동맹 약속이 단호해졌으며, 유럽 곳곳에서 호전적인 정책 파벌들이 부상하면서 이 추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런 시기에) 독일인들도 러시아의 굉장한 경제 성장과 활력에 감명을 받았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사령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지정학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한 방향으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 명약관화했다. 슐리펜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이 된 헬무트 폰 몰트케는 초지일관 암울하고 호전적인 관점에서 독일의 국제 상황을 전망했다. 그의 전망은 공리를 닮은 두 가지 가정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두 동맹 블록 간 전쟁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 둘째, 시간은 독일 편이 아니다. 장차 독일의 적이 될 나라들, 특히 급속히 팽창하는 경제와 사실상 무한한 인력을 가진 러시아는 해가 갈수록 군사력을 키울 것이고, 결국 도전할 수 없는 우위를 점한 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510-1)


"세계 제국들의 무대에서 독일의 선택권은 아주 제한되었고, 동맹 블록들로 나뉜 유럽의 상황은 비교적 닫혀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전쟁 없는 세계정책'에 관심 있는 독일 정치인들의 이목을 끌어모은 지역이 있었다. 바로 오스만제국이었다. 제국들이 특히 험악하게 각축을 벌인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정책은 전통적으로 다소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1880년대 들어 베를린은 한층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영국의 이집트 점령(1882)으로 영국과 소원해진 콘스탄티노플 정부는 베를린에서 적극적으로 파트너를 구하며 독일 정부의 관심을 부추겼다. 독일 은행, 건설사, 철도회사는 술탄의 제국에서 개발이 덜된 지역들부터 진출해 사업권과 이익영역을 확보했다." "이런 모험사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초기에는 다소 변덕스러웠지만 점차 확실하고 일관된 지원으로 바뀌어갔다. 1911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독일 대사는 오스만제국이 독일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이익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523)


# 러시아 측의 안보 우려를 증폭시키는 계기로 작용


"삼국협상 정치인들의 수사에서 오스트리아의 쇠락이 불가피하다는 서사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유용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서사는 세르비아를 이중군주국의 구닥다리 구조를 쓸어버릴 현대성의 전령으로 묘사하며 세르비아의 무력투쟁을 정당화하는 기능을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문화와 행정, 산업 면에서 유럽 현대성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반면 발칸 국가들(특히 세르비아)은 경제적 후진성과 생산성 하락의 악순환에 여전히 갇혀 있었음을 보여주는 차고 넘치는 증거를 은폐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거대 서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의사결정자들로 하여금 그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지어 그들 자신에게도 숨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다면, 정치는 저마다 다른 미래를 내포하고 있는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일을 의미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역사의 비인격적 전진 운동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 된다."(544-5)


"발칸 반도에서 프랑스와 러시아가 합동 작전을 펼친다는 전략은 시나리오이지 계획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독일에 미칠 법한 영향을 놀라울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프랑스 정책수립자들은 군사적 위협의 균형이 얼마만큼 독일에 불리하게 기울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1914년 6월 프랑스 참모본부는 〈군사적 상황이 독일에 불리하게 변경되었다〉라고 만족스러운 투로 지적했으며, 영국의 군사적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방어적인 것이고 적에게만 공격적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던 까닭에, 핵심 정책수립자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베를린의 선택지를 줄일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관계 이론가들이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상황, 즉 한 국가가 자국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가 〈다른 국가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준다."(549-50)


"세기말적 남자다움에 호소하는 표현이 이 무렵의 서신과 메모에서 워낙 광범하게 나타나므로 그 영향이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 해도 이런 표현은 분명 유럽 남성성의 역사에서 아주 특정한 순간을 반영한다. 젠더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19세기 말 수십 년과 20세기 첫 10년 동안 욕구 충족(음식, 섹스, 상품)에 집중하던 비교적 폭넓은 형태의 가부장적 정체성이 더 좁고 냉정하고 금욕적인 정체성으로 대체되었다고 지적한다. 그와 동시에 종속되고 주변화된 남성성들(예컨대 비백인 프롤레타리아의 남성성)과의 경쟁에 직면한 엘리트층 내에서 '진정한 남성성'의 표현이 강조되었다. 특히 군 지휘부 집단들 사이에서 체력, 강인함, 의무, 아낌없는 봉사가 그전까지 강조되었던 상류층 출신이라는 사실을 점차 대체했다." "페미니스트 사상가 로자 마이레더는 1905년에 〈그들은 전통적인 남성성의 규범에 들어맞기만 하면 패배의 참혹함이나 행위의 순전한 부당함에 무감각하다〉고 썼다."(559-60)


3부 위기


7장 사라예보 살인사건


"때때로 역사가들은 대공이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암살 자체는 사태의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고 기껏해야 더 먼 과거에 뿌리박은 결정의 구실이었다고 추론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실상을 호도하는 것이다. 우선 인기가 있었든 없었든, 제위계승자의 에너지와 개혁 열의는 널리 인정받았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오스트리아 공사는 세르비아인 동료에게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보기 드문 활력과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국정에 완전히 헌신했으며 죽지 않았다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공은 제국의 존속을 보장하려면 〈국내 정책 분야에서 방침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이해한 사람들〉 전부를 자기 주변으로 모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대공 암살은 단순히 그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지 않고 그가 상징하던 것, 즉 왕조의 미래와 제국의 미래, 그리고 둘을 통합한 '합스부르크 국가 이념'까지 타격을 받았다는 중요한 사실을 의미했다."(587)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기는커녕 파시치(더 나아가 세르비아 당국)는 관습적인 자세와 태도로 되돌아갔다. 다시 말해 이번 사건으로 세르비아인들 자신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에서 피해를 입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자업자득이다, 세르비아인들은 말로써, 필요하다면 무력으로써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는 등 이런저런 주장을 폈다." "이 견해에 따라 베오그라드 정부는 세르비아의 평판을 깎아내리는 오스트리아의 비난을 정당한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으로 묘사했고, 공식적으로 도도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 세르비아의 적절한 대응책이라고 밝혔다. 이 모든 주장은 베오그라드 정치라는 렌즈를 통해서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지만, 세르비아가 오만과 기만, 책임 회피로 일관한다고 여긴 오스트리아를 격분시킬 수밖에 없었다. 참사에 대한 세르비아 국가의 공동 책임이 추가로 확인되자 오스트리아가 분개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604)


8장 확산되는 파문


러시아는 자신들이 발칸의 불안정에 기여한 역사는 도외시한 채,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가 평화롭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쨌거나 런던과 파리 모두 사라예보 사건에 대한 러시아의 서사에 반대할 의향이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인기 없고 전쟁을 도발하던 엄격한 차기 군주가 오랜 치욕과 학대에 격분한 자국 시민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가 대표하던, 부패해 무너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정권이 애석할 것 없는 그의 죽음의 책임을 떳떳하고 평화로운 슬라브족 이웃에게 덮어씌울 태세였다. 사라예보 사건에 이런 틀을 씌우는 것이 러시아의 행동 결정을 공식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틀 짓기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발생할 경우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저지할 장애물 중 일부가 제거되었다. 발칸 개시 시나리오가 일촉즉발 가능성이 되었던 것이다."(634-5)


"독일 지도부는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공격을 계기로 러시아가 개입하고,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가동되고, 결국 대륙 전쟁이 발발할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일부 역사가들은 빌헬름과 베트만, 그들의 군사고문들이 일촉즉발 사라예보 위기를 독일에 유리한 조건에서 다른 강대국들과 분쟁을 벌일 기회로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 물음에 답하자면, 먼저 독일 핵심 의사결정자들이 러시아가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지도 않았고 개입을 유발할 생각도 없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7월 말까지 위기에 대처하는 동안 독일 정부의 특징이었던 군사적 대비를 꺼리는 태도에는 현재 대비태세에 대한 군부의 자신감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겠지만, 분쟁을 발칸반도로 국한하려는 독일 지도부의 바람 또한 반영되어 있었다. 다만 이 정책으로 분쟁을 국한하는 데 실패할 경우 독일의 군사 대비태세가 위태로워질 위험이 있었다."(640-1)


"오스트리아는 의사결정 이론가들이 말하는 '중대 결정', 즉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해관계가 걸려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변혁적 결과를 가져오고, 결정자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발목을 잡을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시 위기를 과거의 역사에 비추어 평가했고, 여러 요인과 위험에 대해 논의했다. 오스트리아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는 세르비아 당국, 이런 사건을 중재할 수 있는 국제 사법기구의 부재, 향후 베오그라드에 순응을 강요할 수 없는 당시 국제 정세 등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가 덜 과격한 해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스트리아의 대응은 (1914년의 다른 어떤 행위자들보다 더한 정도로) 근본적으로 기질과 직관에 따른 비약,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현재 어떤 상태이고 강대국으로 존속하려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공통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적나라한 결정 행위'였다."(662)


9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프랑스인들


"(7월 21일~23일간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푸앵카레는 강경함이라는 복음을 전도했고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맥락에서 강경함이란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조치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의미했다. 자료들이 시사하는 대로, 푸앵카레도 러시아 대담자들도 대공 암살 이후 모종의 조치를 정당하게 취할 자격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임기응변도, 새로운 정책 성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푸앵카레는 그저 1912년 여름부터 구상해온 방침을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푸앵카레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숱한 대화를 나누며 예견한 발칸 대응 정책을 평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불렀는데,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불요불굴 연대에 직면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십중팔구 물러설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설령 모든 예측이 어긋나더라도, 전쟁보다 나쁜 상황은 강력한 러시아가, 그리고 바라건대 영국의 육군력과 해군력, 상업력이 감당할 것이었다."(690-1)


10장 최후통첩


"오스트리아 수뇌부는 최후통첩 시나리오를 논의하는 회의는 물론 다른 회의들에서도 오늘날 말하는 출구전략을 조금이나마 닮은 것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조용히 지내는 이웃들 사이에 있는 불량국가가 아니었다. 인접국 알바니아는 여전히 매우 불안정했으며,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통제 아래 있는 마케도니아 영토를 먹어치우기만 하면 예전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언제나 있었다.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지역 병합과 루마니아를 영토 보상으로 달래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오스트리아는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오스트리아 정치 엘리트들은 여전히 베오그라드와의 분쟁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더 폭넓은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푸앵카레가 서파리에게 세르비아에게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례적인 경고를 했다는 소식이 빈에 도착했을 때조차 베르히톨트는 방침 변경을 고려하지 않았다."(694-6)


"베오그라드에서 숙명론 분위기를 쫓아버리고 최후통첩 요구에 순응해 전쟁을 피해보려던 각료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러시아에서 들려온 소식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경해지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 각료들은 세르비아의 주권을 양보하지 않는 선에서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최대한 순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답변서를 다듬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세르비아의 답변서는 지저분해 보였을지 몰라도 외교적 얼버무림의 걸작이었다." "답변서 작성자들은 (자신만만한 자화자찬으로 시작되는) 자신들의 응답으로 양국 사이의 모든 오해가 풀릴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사적 개인들의 행동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언론이나 〈협회들의 평화로운 업무〉를 직접 통제하지 않는 까닭에 빈에서 제기한 혐의에 놀라고 고통받은 터였다. 작성자들은 최후통첩의 각 항에 답변하면서 수락과 조건부 수락, 회피, 거부를 절묘하게 혼합했다."(711-3)


"1914년 7월 28일 오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비트이슐에 있는 황제 별장의 집무실 책상에서 타조 깃펜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문에 서명했다." "이즈음이면 베오그라드는 이미 인구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벌써 군복무 연령의 모든 남성이 징집되고 많은 가족이 친척과 함께 내륙으로 피난을 떠난 뒤였다. 7월 28일 오후 2시 정각에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든 신문의 호외가 행상들이 거리로 가져가기 무섭게 팔려나갔다. 이날이 지나기 전에 도나우강에서 탄약과 지뢰를 운반하던 세르비아 증기선 두 척이 오스트리아 공병들과 경비원들에게 몰수되었다."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는 소식에 58세의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한껏 흥분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 자신을 오스트리아인으로 느끼고, 썩 희망적이지 않은 이 제국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은 기분이다. 나의 모든 리비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바친다.〉"(720-2)


11장 경고사격


"7월 24일 열린 러시아 각료평의회는 다섯 가지를 결의했다. ①오스트리아 측에 최후통첩의 시한 연장을 요청한다. ②세르비아 측에 국경에서 전투를 개시하지 말고 군대를 자국 중부로 후퇴시킬 것을 권고한다. ③차르에게 키예프, 오데사, 카잔, 모스크바 군관구의 동원을 "원칙적으로" 승인할 것을 요청한다. ④육군장관에게 군사장비 비축을 가속할 것을 지시한다. ⑤현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투자 중인 러시아 자금을 회수한다. 이튿날, 더욱 엄숙한 각료평의회 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전날 각료평의회에서 결정한 사항들을 확인하고 정교한 추가 군사조치들에 동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각료평의회가 '전쟁 대비기간'이라고 알려진 일군의 복잡한 규제를 승인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동원에 대비한 많은 계획을 포함한 이 조치들은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군관구들만이 아니라 유럽 러시아 전역에 적용될 예정이었다."(729-30)


"상술한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사조노프와 그의 동료들은 위기를 고조시키고 유럽 전면전의 가능성을 대폭 끌어올렸다. 우선 러시아의 사전동원은 세르비아 정계의 공감대를 바꾸어놓았다. 원래 최후통첩 수락을 진지하게 고려했던 베오그라드 정부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압력에 굴복하는 일을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사전동원은 러시아 국내에서 행정부에 대한 압력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군복 입은 남자들의 광경과 러시아가 세르비아의 운명을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소식에 민족주의 언론이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사조노프는 왜 그렇게 했을까? 사조노프는 처음부터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군사적 조치가 러시아의 반격을 촉발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최후통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그의 이전 언행과 완전히 일맥상통했다. 그는 세르비아의 영토회복주의에 대항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권리를 인정한 적이 없었다."(737-8)


12장 마지막 날들


"러시아의 총동원은 7월 위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 중 하나였다. 이것이 1차 세계대전의 첫 번째 총동원이었다. 이 시점에 독일 정부는 러시아가 7월 26일부터 시행 중이던 '전쟁 대비기간'에 상응하는 '전쟁 위급상황'을 아직 선포하기도 전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여전히 세르비아를 물리치는 데 초점을 맞춘 부분동원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 사건 순서는 훗날 프랑스와 러시아의 정치인들을 꽤나 불편하게 했다.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정부가 7월 위기 동안 자국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펴낸 오렌지북Orange Book에서, 편집자들은 러시아의 총동원이 다른 나라의 조치에 대응한 결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총동원령 날짜를 3일 앞당겼다." 프랑스 역시 러시아의 동원령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동원조치'에 맞선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독일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7월 위기 내내 상대적으로 차분한 하나의 섬이었다."(780-1)


"오스트리아가 굼벵이처럼 대응한 탓에 국지화 정책의 성공에 필요한 전제조건 중 하나가 무너졌다면, 독일 정부는 이 정책을 왜 그토록 악착같이 고수했던 걸까?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무력 개입을 방지하는 더 깊은 구조적 요인들(러시아의 무장 프로그램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사정 같은)을 믿었다는 데 있다." "독일 정부가 국지화에 전념한 다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대안이 부족했다는 데 있다. 합스부르크 맹방을 포기하는 방안은 논외였는데, 평판과 권력정치 때문만이 아니라 독일 의사결정자들이 세르비아를 고발하는 오스트리아의 정당성을 정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군사적 공격력의 균형이 독일에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면, 독일의 유일한 강대국 맹방을 잃을 경우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독일 계획자들은 이미 이탈리아를 실질적은 자산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신뢰할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792-4)


"러시아가 부분동원령을 공포한 7월 29일에 열린 회의에서도 독일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팔켄하인 육군장관은 전쟁 위급상황 선포에 찬성한 반면, 헬무트 폰 몰트케 육군참모총장과 베트만 재상은 중요한 운송체계에서 경비 근무를 확대하는 방안에만 찬성했다." "7월 31일 군사적 조치를 놓고 또다시 갈팡질팡하는 차에 모스크바의 푸르탈레스 대사로부터 러시아가 전날 한밤중에 총동원을 명령했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카이저는 즉시 전화를 걸어 전쟁 위급상황 선포를 명령했고, 7월 31일 오후 1시 이 명령이 팔켄하인을 통해 군대에 하달되었다. 이제 먼저 동원한 책임은 분명히 러시아에 있었다. 이는 베를린 지도부에게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독일 일부 도시들에서 일어난 평화주의 시위를 감안하면, 독일의 참전이 방어적 성격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했다." "러시아 정부가 총동원령 철회를 거부하자 독일은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804-6)


"외교의 시간이 끝나가고 군인의 시간이 시작되는 참이었다. 베를린 주재 바이에른 군사전권위원은 동원령 발표 이후 육군장관을 방문했을 때, 〈복도에서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악수하는 이들을 어디서나〉 보았다. 〈누군가 장애물을 넘었다고 자축했다.〉 7월 30일 파리에서 이그나티예프 대령은 〈프랑스 측에서 생각하기에 유리한 전술적 상황을 이용할 기회를 잡은 데 대한〉 프랑스 동료들의 "숨김없는 기쁨"을 보고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은 전쟁이 임박했다는 생각에 고무되었다. 7월 28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든 것이 파국과 붕괴를 향해 나아가고 있소. 나는 흥이 나고 대비가 되어 있고 행복하다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쾌활한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은 제정의회 의원 대표단에게 독일이 조만간 괴멸될 것이고 전쟁이 러시아에게 "호재"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를 믿으세요. 신사분들, 만사형통일 겁니다.〉"(843-4)


"다가오는 싸움에 열광하는 쇼비니즘적 표현들이 드문드문 있기는 했지만 이는 예외적이었다. 유럽 남자들이 증오스러운 적을 물리칠 기회를 덥석 붙잡았다는 신화는 그동안 철저히 타파되었다. 대부분의 장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원 소식은 엄청난 충격,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리고 도심지에서 멀어질수록, 장차 전쟁에서 싸우거나 죽거나 불구가 되거나 일가친척을 잃을 사람들이 동원 소식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차르의 말이 전해지자, 독특한 군사적 소명과 전통을 지닌 카자크인들은 〈적과 싸우고자 불타올랐다.〉 그런데 그 적은 누구인가? 아무도 몰랐다. 동원 전보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없었다. 소문이 넘쳐났다. 처음에는 모두 중국과 전쟁하는 게 틀림없다고 상상했다. 〈러시아가 몽골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바람에 중국이 전쟁을 선포했대.〉 이내 다른 소문이 퍼졌다. 〈잉글랜드랑, 잉글랜드랑 싸운대.〉 이 견해가 한동안 우세했다."(845-6)


결론


우리는 의사결정자들에게 작용한 객관적 요인들과 그들이 서로 나눈 이야기들을 구별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나이 많고 참을성 강한 이웃을 끊임없이 도발하고 못살게 구는 젊은 비적들과 국왕 시해자들로 이루어진 민족에 관한 이야기가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지 냉철하게 판단하는 것을 방해했다. 반대로 세르비아에서는 탐욕스럽고 막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이 자신들을 희생시키고 억압한다는 공상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에서는 침공과 분할을 예상하는 어두운 미래상이 1914년 여름 내내 의사결정을 괴롭혔다. 러시아에서는 동맹국이 러시아를 거듭 욕보였다는 이야기가 과거를 왜곡하는 동시에 현재를 명료하게 하는 등 비슷한 결과를 가져왔다.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고 널리 회자된 이야기는 오스트리아가 중부유럽과 동유럽에서 안정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는 기존의 전제를 점차 대체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쇠락이 역사적으로 불가피하다는 서사였다."(852)


"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연구에서 폴 케네디는 교전국들 전부를 탓하거나 아무도 탓하지 않는 식으로 범인 색출을 회피하는 것은 "물렁한"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케네디의 말대로라면 더 딱딱한 접근법은 손가락질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책임 지우기에 중점을 둔 서술의 문제는 결국 엉뚱한 국가에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서술에 전제들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책임에 초점을 맞춘 서술은 첫째로 상호작용하며 갈등을 빚은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한 주역은 옳게 행동하고 다른 주역은 잘못 행동한 것이 틀림없다고 전제하는 경향이 있다." "고발 서사의 또 다른 단점은 다자간 상호작용의 과정보다는 특정한 한 국가의 정치적 기질과 구상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시야를 좁힌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책임을 지우려는 수사관은 의사결정자들의 행위를 일관된 의도에 따라 계획한 행위로 해석하기 쉽다는 문제가 있다."(855-6)


"1914년 전쟁 발발은 온실 안에서 연기 나는 권총을 손에 쥔 채로 시체를 지켜보는 범인을 발견하며 끝나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 이야기에는 연기 나는 총이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주요 인물들 모두가 연기 나는 총을 쥐고 있다. 이렇게 보면 1차 세계대전 발발은 범죄가 아닌 비극이었다. 이를 인정한다고 해서 프리츠 피셔와 그의 역사 서술을 지지한 동료들이 올바로 주목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정책수립자들의 호전성과 제국주의적 피해망상을 꼭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인들만 제국주의자였던 것도 아니고, 그들만 피해망상에 굴복했던 것도 아니다. 1914년에 전쟁을 불러온 위기는 유럽 국가들이 공유한 정치문화의 소산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극적이고 진정으로 상호적인 위기이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1914년에 정치인들이 얻고자 다투었던 상들 가운데 그 무엇도 뒤이은 대재앙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지 않았다."(856-7)


"그들은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을 실감하기도 했을까? 이것은 1914년 이전과 1945년 이후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의사결정자들과 일반 대중 모두 핵전쟁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위에 생긴 버섯구름 이미지가 일반 시민들의 악몽에 나왔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비 경쟁이 벌어졌음에도 초강대국들 간 핵전쟁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1914년 이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많은 정치인들의 마음속에서 단기전에 대한 기대와 장기전에 대한 두려움은 이를테면 서로를 상쇄하여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막았다." 우리는 전전 유럽 어디서나 이렇게 기대와 두려움이 상쇄된 견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1914년의 주역들은 눈을 부릅뜨고도 보지 못하고 꿈에 사로잡힌 채 자신들이 곧 세상에 불러들일 공포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몽유병자들이었다."(8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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