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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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1871년 베르사유에서 출범한 도이치 민족국가를 어째서 단순히 '도이칠란트'라 명명하지 않고 '도이치 제국'이라 명명했던가?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이 나라가 민족국가 '도이칠란트' 이상의 것이자 그 이하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라는 것은 제국이 수많은 도이치 사람들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갖는 도이치 제국이었던 것이다. '도이치 제국'이라는 칭호는 이 부족한 부분을 감추어주는 대신, 그것을 넘어선 부분도 암시했다. 즉 중세에 생긴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민족을 초월한 유럽 전역의 제국이라는 함의였다. '도이치 제국',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먼저 프로이센이 통치할 수 있는 만큼의 도이칠란트, 또는 도이칠란트가 지배할 수 있는 만큼의 유럽 및 세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 앞의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길은 도이치 제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 몰락의 역사이다."(19)


도이치 제국의 성립


"프로이센과 도이치 민족주의 진영─이 둘은 모두 도이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프로이센은 1701년에 처음으로 국가로 등장하여, 1756~1763년에 벌어진 7년 전쟁 이후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1815년 빈 회의 이후 비로소 도이치 강대국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프로이센은 언제나 강력하게 폴란드를 지향했으며, 1796~1806년 10년 동안은 절반 도이치, 절반 폴란드의 두 민족 국가였다. 1815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은 이른바 서방으로 방향을 돌려 도이칠란트에 편입되었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에 생겨났다. 하나의 도이치 민족국가라는 생각은 19세기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13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해체되어 난립한 수많은 나라들의 연합체였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이 이를 특별히 부자연스럽게 여긴 것도 아니었으니, 도이칠란트가 응집된 권력체, 즉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23-5)


"처음에 이 둘은 동맹을 맺기는커녕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런 적대감에는 충분한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정치 개념을 동원해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프로이센은 '우파'다. 토지는 깨뜨릴 길이 없는 귀족 지배를 받고, 현대적인 절대주의 관료제로 무장한, 아직도 널리 봉건제의 흔적을 지닌 농업국가였다. 귀족 지배와 절대주의 관료제는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우파'로 분류하는 특성이다. 그에 비해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좌파' 운동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혁명 프랑스를 모방했다. 덕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결속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을 통해 비로소 강력해졌다. 나폴레옹은 도이치 사람들에게 상이한 두 가지 반응을 만들어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 돼!〉 하는 반응과,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하고야 말겠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이었다."(25-6)


"1815~1848년의 도이치 연방은 항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공동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도이치 연방의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언제나 의장 국가였다. 하지만 또 다른 강대국 프로이센이 있었다. 1815년 메테르니히 재상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이 다른 강대국과 협조하기로 결심했었다. 1848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았다. 도이치 연방의 재건 자체가 이미 프로이센의 의지에 맞서 오스트리아가 강제한 것이었다. 두 나라는 새로운 연방에서 경쟁국이자 라이벌, 적대국으로 등장했다. 이 경쟁에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가 우세했다. 1848년까지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억압을 받았다. 1848년 이후로 민족주의는 더는 완전히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도이치 사람들이 그 사이 역사적인 일순간이나마 도이치 제국의 실현 가능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잊지 않았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이제 전혀 힘이 없는데도, 항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 인자가 되어 있었다."(35-6)


"프로이센은 도이칠란트 정책을 통해 언제나 '작은 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단순히 북도이칠란트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통일 도이칠란트의 지배 세력도 되기를 바랐으니, 일종의 슈퍼 도이칠란트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의 비스마르크인 슈바르첸베르크 영주가 1850년에 실제로 추진했던 (당시) '7,000만 제국'을 겨냥하는 길이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1852년에 갑작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 도이칠란트를 놓고 벌어질 싸움에서 프로이센을 격퇴해야 할, 가능하기만 하다면 파괴해야 할 경쟁자로 간주하려는 그의 경향만은 죽지 않았다. 자극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던 비스마르크는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느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던 시절, 오스트리아의 도이칠란트 정책은 직접적인 공격성을 덜 취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36-7)


#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물(1866년)

1.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 : 하노버 왕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선제후령 헤센, 나사우 등지를 프로이센 주州로 편입

2. 북도이치 연방 창설 : 보통·평등선거로 선출된 '제국의회'와 한 명의 '제국총리'라는 민주주의-의회주의 요소 포함

3. 남도이치 국가들과 동맹 체결 :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와 군사동맹 및 관세동맹 체결

4. 오스트리아의 변화 : 1,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이칠란트와 결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로 변모


"1870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 원래의 기원과 결합하였다. 다시 프랑스에 맞서고, 다시 나폴레옹 황제에 맞서게 되었으니, 프로이센, 북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남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들조차 1870년의 프랑스 전쟁을 19세기 처음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행한 정복 전쟁에 대한 복수라고 느꼈던 것이다. 19세기 초의 민족적 자부심과 프랑스 증오가 갑작스럽게 모조리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이치 사람들이 강자였다!" "영국 역사가 테일러는 이따금 (남도이치 국가들의 독자적인 주권을 어느 정도 유지해준) 비스마르크를 제국 건설자가 '제국 훼방꾼'이라 부르고 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민족 통일을 허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도이치 제국은 북도이치 연방 시절보다 훨씬 더, 연방국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연합국가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모든 작은 도이치 소망들이 충족되고 나면 가장 먼저 나타날 민족주의 진영의 목표는 큰 도이칠란트였다."(48-50)


비스마르크 시대


"비스마르크는 국내에서 보수주의 진영과 민족주의-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타협에 기반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비스마르크는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적들과 합의를 보고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정직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는 두 가지 근거를 가진 것으로, 첫째로 자기가 자유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열망을 만족시키고, 둘째로는 화해를 한 다음 그들을 제국의 국내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비스마르크는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군주제 신봉자였다. 하지만 그의 제국이 기반을 두고 있는 헌법의 타협점은 절반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그가 제국 건설에서 지향한 정치적 타협은 보수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연합정권이었다. 1867~1879년에 '철혈 총리'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1871년 이후로 민족주의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이 더는 내부의 만족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55-6)


"중앙당das Zentrum과 사회민주당SPD은 제국 건설과 거의 동시에 창설되었다." "중앙당은 도이치 가톨링당이다. 가톨릭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길이 없이 민족을 넘어선 단체다. 중앙당은 당시 강력하게 로마를 지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당이 이른바 알프스 산맥 너머 로마를 바라보기 때문에, '산맥너머 당'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중앙당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전혀 다른 점이었다. 다른 모든 도이치 정당들은 계급정당이었다. 보수당은 귀족의 정당이고, 자유당은 당시 강력하게 대두하던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의 정당이었고, 방금 등장한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순수한 노동자 정당이었다. 그에 비해 중앙당만은 그 어떤 계급과도 결속되지 않은 채, 모든 계급을 포괄했다." "중앙당의 이런 특성, 즉 계급을 넘어서는 그 구조가 비스마르크에게는 으스스했다." "그래서 그는 1870년대에 중앙당을 그냥 박멸하고 찢어 없애려고 했지만 이 일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다."(56-8)


"사민당은 계급정당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제4계급인 노동자계급도 정치적 조직을 이루어 토론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철저히 이해했다." "비스마르크가 사민당에게 화를 낸 것은 그 계급적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첫째로는 사민당의 국제적인 태도, 둘째로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당시 아직도 사민당이 갖고 있던 혁명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78년부터 사민당에 맞서 가차 없는 전쟁을 펼쳤다." "사민당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후반부에는 고작 절반만 합법이었다. 사민당은 의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할 수 있고, 선거운동을 하고, 실제로 의회에 대표자를 내보낼 수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헌법상의 권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밖에 나머지 모든 일이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박해의 시대에 사민당은 특이할 정도로 꾸준하게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것이 비스마르크 시대를 뒤덮은 무거운 정치적 먹구름의 하나였다."(58-9)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강국 도이칠란트에 맞서 프랑스-영국-러시아 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도이치 제국이 1871년에 이룩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 부딪치게 될 연합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취한 위협의 몸짓이 어디까지나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의 정치가들에게, 특히 러시아 총리인 고르차코프에게 깊은 개인적인 실망감을 드러냈다. 또 다른 점이 더욱 중요했다. 1875년의 '전쟁 코앞까지 가는 위기' 이후로는, 연합의 '악몽'이 프랑스의 복수라는 '악몽'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스마르크가 활발한 평화 정책을 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 방지가 곧 도이치 제국의 이익이라고 보는 정책이다. 오늘날 비스마르크의 명성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평화 정책이지만 그가 도이치 제국이 위험한 상황에 연루되는 일들을 막는 것에 실제로도 성공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65-6)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의 유능함과 최고의 정직한 의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자기 시대에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 자신이 제국 건설 과정에서 강대국 프랑스와의 갈등을 통해 도이치 제국에 지속적인 적, '불구대천 원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베를린 국제회의와 그 이후의 정책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이 동맹을 맺을 길을 닦아놓았다. 동시에 그가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어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 갈등을 속에 지닌 채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럽의 [광대한] 터키 영토를 물려받으려고 했다. 그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는 장래의 갈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도이칠란트는 그의 가장 깊은 의도와는 반대로, 1878~1879년에 이미 이 갈등에 연루되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은 1914년 1차 대전을 만들어낸 직접 원인이 된다."(80-1)


황제 시대


# 비스마르크 퇴임(1890)의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

1. 사회주의자 [박해]법 연장 무산

2. 러시아와의 배후 안전 계약 연장 무산


"1890년대 중반까지도 혁명은 사민당의 강령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향이 차츰 발전되어 나왔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랬다.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회 속으로, 국가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어느 날인가 국가를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회의 영원한 수정주의 논쟁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정기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강해졌다." "황제 시대에는 프로이센 헌법 갈등이나 문화투쟁, 사회주의 박해 같은 것이 없었다. 여러 정당들이 어울린 의회는 국내 정치에서 통치를 위해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정부는 의회에서 새로운 법률안을 계속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민주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그러면 과장이 될 테니까─장래 민주화의 조용한 사전事前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대중 정치화가 이루어졌다."(87-8)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다음에 일종의 '대국大國 감정' 같은 것이 생겨났다. 빌헬름 황제 시대에 매우 많은, 그것도 가능한 모든 계층 출신 사람들이 갑자기 원대한 민족적 전망, 민족적 목적을 눈앞에 그렸다. 〈우리는 세계적 강대국이 된다, 우리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도이칠란트가 전 세계의 앞장에 선다!〉는 전망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애국심은 이전과는 다른 성격이 되었다. 이 시기 도이치 사람들을 고무한 '민족주의'는 이제 스스로 아주 특별한 존재, 미래의 강대국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이었다. 이런 변화는 기술 산업의 발전을 통한 외적 생활의 개선과 보조를 맞추었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은 많은 영역에서 유럽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영국이 아직 느린 속도로, 프랑스는 더욱 느린 속도로 산업화가 계속되었고, 러시아는 이제 겨우 산업화의 초기에 들어서고 있는데, 도이칠란트는 기술-산업 측면에서 놀라운 속도로 현대화되었고, 또한 그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지녔다."(90)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 시대였다. 모든 큰 국가들이 유럽을 넘어 유럽 밖으로 확장하려는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세계 강대국'이 되려고 했다." "당시 유럽 전체에 저항할 길 없는 설득력을 가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타났다. 단순히 유럽에서의 권력 체제와 세력 균형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세계 권력 체제가 들어서고 있다. 이 체제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 패권을 요구해온 유럽의 국가들이 대규모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이 유럽 중심의 세계 세력 균형으로 넘어갈 것이다." "새로운 판에서 도이칠란트도 이전의 식민지 강대국들과 나란히 하나의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한편,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나란히 세계 강대국의 하나라는 지위로 내려와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그들의 눈앞에 떠돌았다. 뒷날의 제국총리 뷜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늘로 밀어넣으려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도 양지로 들어가자는 것뿐이다.〉"(92-3)


# 황제 시대의 세 가지 위기

1. 제1차 모로코 사태(1905) : 프랑스가 이집트를 영국에게 넘기는 대신 모로코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권을 인정받자 도이치 제국은 황제를 탕헤르에 파견하면서 이에 맞섰지만 오히려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을 성사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2.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1908) :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갈등이 발생하자, 도이치 제국은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사태를 종결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비 강화를 촉진했다.

3. 제2차 모로코 사태(1911) : 프랑스가 알헤시라스 조약을 위반하여 남부 모로코로 영토를 더욱 확장하자, 도이치 제국은 또다시 포함砲艦 한 척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영국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제국총리 베트만 홀벡은 전쟁 발발시, 도이치 제국이 승리하려면 오스트리아의 참전, 사민당의 동참, 영국의 중립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 세 조건을 토대로 바라보면, 1914년에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한 후에 갑자기 등장한 상황은 도이치 제국에 유리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도이치 제국의 전쟁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전쟁, 곧 오스트리아 대對 세르비아의 전쟁이 된다.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한다면, 첫째로 오스트리아가 도이치 제국 편에─이는 오스트리아 전쟁이지 도이치 전쟁이 아니니까─설 것이고, 둘째로 도이치 사민당이 차르 러시아에 맞선 전쟁을 승인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셋째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점인데, 영국은 거의 확실하게 이런 동유럽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즉시는 아닐 것이다─실제로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었다. 영국은 역사상 순수한 동유럽의 문제에는 늘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4-5)


"(그러나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제압한다는 슐리펜 작전 계획은) 처음부터 영국을 적의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영국이 개입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영국은 프랑스가 완전히 힘을 잃는 꼴을 그대로 조용히 앉아서 구경할 수만은 없었다. 패배한 프랑스를 포괄하는 도이치 세력권이 영불해협과 대서양까지 뻗어 나온다면, 영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륙의 강력한 세력과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벨기에는 영국을 마주 보는 해안 국가다. 벨기에 해안선을 지배하는 자는 영국을 위협하게 된다. 특히 그것이 빌헬름 2세 치하의 도이칠란트처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나아가 법적인 측면도 있었다. 도이칠란트를 포함하는 유럽의 강대국들은 수십 년 동안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해왔다. 이 중립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벨기에라는 완충 국가가 파괴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117-8)


"물론 대륙의 모든 강대국은 1차 대전을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하면서 제각기 빠른 승리를 희망했지만, 모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갈리치아 지방에서)와 도이칠란트(동프로이센에서)를, 그리고 프랑스가 로렌과 아르덴에서 도이칠란트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또한 도이치 군대가 벨기에와 프랑스를 공격한 것도 실패했다. 전쟁 처음 몇 달 동안에 이미 모든 전장에서─모든 나라 참모부의 확신과는 달리!─1차 대전의 결과에 기본이 되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 당시의 전쟁 기술 수준에서는 방어가 공격보다 우세했다. 공격은 고작해야 토지를 얻을 수 있었을 뿐, 심지어는 적대국이 세르비아나 벨기에 같이 작은 나라라 해도 적국을 전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덕분에 1차 대전은 소모 전쟁의 우울한 특성을 지녔다. 전략적 수확도 없이 거듭 되풀이되는 학살 전쟁이었을 뿐이다."(121-2)


"사민당 내부의 좌익 세력은, 1914년에 벌써 당의 애국적 전쟁 정책을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동참했다. 다음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사민당의 좌익 세력이 더욱 강해지다가, 1917년에 마침내 새로운 '독립 사회민주당'USPED이 갈라져 나왔다. 이 정당은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 채권 발행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의회 안에 두 그룹이 형성되었다. 우파 그룹은 부분적으로 상당히 극단적인 전쟁 목적, 곧 정복과 합병을 추구하면서 거대한 식민 제국, 거대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 그에 비해 중도좌파 그룹은, 그냥 멀쩡한 상태로 전쟁에서 빠져나오기만 해도 기뻐해야 하며, 그렇기에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합의 평화조약, 곧 '영토 합병과 전쟁배상금이 없는'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치 위대한 전쟁 목적만 있으면 이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거나, 아니면 합의할 각오만 하면 벌써 타협에 의한 평화조약을 이룰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논쟁은 몹시 격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129-31)


"도이칠란트는 1917년에 체제가 엉망이 되었다. 겉으로는 헌법상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헌법이 더는 기능하지 못했다. 도이치 제국의 외교는 실질적으로 군 총사령부가 이끌었고, 국내 정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의회 다수파가 이끌었다. 서로 날카롭게 나뉘어 대립하던 이들 두 개의 권력 중심부는 많은 문제들을 두고 서로 협조했다." "의회 다수파는 '총력 동원령'에 동의했으나, 국내 정치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밑바탕에 깔았다. 이른바 '보조 인력법'이 결의되었고, 이로써 처음으로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장래 임금 협상권, 기업체 안에서 노동조합의 협력 등과 같은 일들이 관철되었다. 미래를 포함하는 이런 장치들은 당시 도이칠란트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총사령부는 그것이 못마땅했으나 자신들이 군사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1917년 말 도이칠란트에서 황제와 제국총리는 이미 실세가 아니었고, 한편에 군사령부, 다른 편에 의회 다수파가 실세였다."(132-3)


1918년


"1918년의 시작을 알리는 대형 사건은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곧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이었다." "막 시작된 러시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협상국들의 개입 아래서, 도이치 제국의 실권자들은 갑자기 이 조약을 넘어 러시아 전체를 도이칠란트의 종속 아래 둘 가능성을 보았다. 도이치 군대가 조약에서 확정된 국경선을 훨씬 넘어 진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918년 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북부 나르바에서부터 드네프르 강을 넘어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이르는 긴 선상線上에 섰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의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차지한 만큼이나 멀리 진출한 것이다. 러시아의 거대한 지역을 이미 손아귀에 넣고도, 볼셰비키 통치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진짜 러시아를 도이치 제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도이치 동부 제국은 1918년의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그대로 침몰했고 거대 동부 제국의 환영幻影만 뒤에 남겼다."(137-9)


"서부전선에 집중하게 된 루덴도르프는 미국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이전에 전선戰線을, 그것도 영국 전선을 무너뜨리려고 모든 것을 동원했다." "여기서 1차 대전이 적어도 서부에서는 아직도 보병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떤 군대도 개별 군인의 행군 속도보다 더 빨리 진격할 수는 없었다. 방어군은 배후에 철도를 두고, 철도를 통해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이쪽으로 수송해 올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3월 21일에 도이치 총공격이 시작되어 며칠 동안 대규모 승전보가 나오고, 상당수의 포로와 엄청난 지역의 확보가 이어졌다. 그런 다음 사태 진행이 차츰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도이치군의 공격은 3월 말에는 이미 전략적으로 실패한 공격이 되었다. 말하자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앞이 꽉 막혀버린 것이다. 엄밀히 살펴보면 그로써 이미 겉보기로나 실질적으로나 서부전선에서 도이치군의 승리 가능성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141-3)


"이런 상황에서 루덴도르프는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9월 28일에 그는 휴전 청원을 하기로 힌덴부르크와 합의했다." "외무장관 힌체는 윌슨 대통령의 공감을 얻기 위해 국내 정치 측면에서 휴전 청원을 뒷받침하자고 제안했다. 즉 미국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면 의회 민주주의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민주주의 도이칠란트가 평화를 청하는 것이 좋겠다. 윌슨 자신이 내놓은 평화 강령에 기반을 둔 평화를 말이다! 그러니까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구성하고, 그것 말고도 제국을 의회주의-내각제 군주국으로 만들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 내각제 국가에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장관들과 총리를 해임할 수 있다. 즉 임박한 군사적 붕괴 때문이 아니라, 이런 민주주의 개혁의 측면에서 평화를 청원한다는 인상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9월 29일 총사령부에서, 곧이어 황제가 등장하여, 즉각적으로 의회 다수파 출신 장관들로 구성된 내각제 정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147-9)


"암담한 이 순간에 사민당이 이 돌파구로 뛰어들었다. 이런 특이한 발전은 평화 시에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지만, 이제 다가오는 몇 주와 몇 달 동안 완전히 결정적인 것이 될 참이었다. 사민당은, 적어도 사민당 다수파는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책임을 떠맡을 각오가 되어 있어다. 사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우리더러 책임을 떠맡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돌파구로 뛰어들어야 하고', 도이치 제국에서 아직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민당에게 휴전 청원을 내라는 요구를 하고,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이 이루고자 노력한 것, 곧 나라를 의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에 동의해주었으니 더 말할 게 무엇이랴. 이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와 장관들을 경질할 수 있고, 그 밖에도 이미 시효가 끝난 프로이센의 [납세액에 따라 각기 심한 차별적 권리를 두는] 3등급 투표제를 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민당은 얼마간의 토론과 숙고를 거친 끝에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로 했다."(150)


"11월 초에 발생한 도이치 혁명은, 정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영국 함대에 맞서 한 번 더 거대한 일전을 감행하겠노라는 해군 지휘부의 단호한 결정을 통해 촉발되었다. 도이치 함대 병사 일부가 이 계획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마침내 11월 4일 킬Kiel 시의 대규모 해병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해병 폭동은 시기적으로 '황제 문제' 논쟁─윌슨 대통령이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벌어진 논쟁─과 맞물려 일어난 일로, 정치적으로는 이렇다 할 목표도 없었다. 하지만 함대와 도시를 장악하고 나자 해병들은 폭동을 일으킨 죄로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미 시작한 일을 어떻게든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혁명에는 지도자도 없었지만, 이는 대중에게서 터져 나온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후방의 군대는 제각기 병사 평의회를 결성하고, 공장은 제각기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었다." "더 이상 혁명을 멈출 수 없을 듯이 보였다. 11월 9일에는 수도 베를린마저 혁명 세력이 장악했다."(154-6)


"11월 9일에 총사령부는 대부분 사단장인 39명의 전방 지휘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휴전이 이루어질 경우 군대가 왕좌의 유지를 위해, 즉 황제를 위해 혁명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인지 여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들의 한결같은 판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대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폐하를 모시고 도이칠란트로 돌아갈 각오는 되어 있지만, 밖을 향해서든, 안을 향해서든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뒤이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10월 말에 자기들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그뢰너 장군을 보내, 황제에게 퇴위나 적어도 망명을 권하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11월 9일에 다시금 특이하게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이런 권고를 따랐다. 빌헬름 2세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고, 그로써 자신의 황제 직위뿐만 아니라, 장래의 군주제 부활의 기회도 함께 파묻어버렸다. 11월의 나중에 나온 공식적인 퇴위 선포는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159-60)


"휴전협정은 11월 11일에 발령되었다. 8월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승리의 기분에 젖어 있었다. 10월 초에 휴전 청원의 소식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은, 군 최고사령부가 아닌 제국 정부가 전쟁이 승산이 없다고 선포하고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정부가 순수한 사민당 정부로 바뀌더니 그와 동시에 [해병들의 폭동으로 시작된] 혁명이 성공[=공화국 출발]했고, 영주들은 모조리 퇴위했으며 황제도 퇴위했다는데, 어쨌든 황제는 도망을 갔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별다른 정보가 없던 도이치 대중에게, 순수하게 시간적 경과로만 따지면 사건은 다음과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는 전쟁에 이기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에도 언제나 합의평화만 바라던 약삭빠른 놈들이 정권을 잡더니 전쟁을 포기해버렸다. 그러자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서 우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나중에 이른바 '배후에서 단도 휘두르기'라는 전설이 생겨났다."(162-3)


"1918년은 거대한 거리 전투로 끝을 맺었다. 베를린 전투에서 혁명군인 민간 해병대는 옛날 군대 잔당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를린에서 새해는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주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에 최초의 의용군이 혁명 세력의 새로운 시작을 잔인하게 유혈 진압했다." "12월과 1월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1919년 전반부에 수많은 도이치 대도시들에서 되풀이되었다. 일종의 조용한 내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 내전에서 의용군은, 에버트-노스케 정부의 완벽한 비호를 받아, 이어서 에버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샤이데만-노스케 정부의 비호를 받아, 수많은 대도시에 아직 남아 있던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 출신 행정부 인물들을 피로써 쓸어냈다. 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는, 황제 시대 군대의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여 1918년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 이 혁명에서 단 하나의 결과만 남았으니 곧 군주제의 종결이었다."(167)


바이마르와 베르사유


"1914년 이전까지 도이치 제국은 당시 유행하던 표현대로 하자면 '포위된' 나라였다. 4개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중 세 나라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에 맞서 연합했다. 네 번째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차 대전의 결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대신에 허약한 후속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크기로 보아 전혀 강대국이 될 수 없었으니 조만간 가장 가까이 있는 강대국, 곧 도이칠란트의 영향력 아래 들어올 것이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이 된 러시아는 유럽의 체제 바깥에 존재했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추방된 나라인 도이칠란트와 연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의 결과물인 무장 해제와 전쟁배상금을 통한 약화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은 장기將棋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바, (패전 후에) 전쟁 전보다 더욱 강화된 위치를 갖게 된 것이다."(174-5)


"도이칠란트에서는 내면으로 조약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조건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전반적인 합의를 이룬 가운데, 처음부터 우선순위를 둔 논쟁이 있었다. 무장해제 규정을 비껴가며 먼저 군사 강국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배상금 문제를 떨쳐버리고 우선 경제를 재건해서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나? 앞의 주장은 국방군의 정책으로, 특히 당시 사령관이던 제크트 장군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먼저 관철되었다. 제크트는 비밀리에 재무장 노력을 했고, 아주 분명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오로지 러시아와의 협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아주 일찌감치, 1920년대 초에 벌써 국방군과 붉은군대 사이에 비밀 군사 협력이 이루어졌다. 소련은 도이치 국방군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무기, 탱크, 공군, 화학무기 등을 연습할 땅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국방군은, 당시 아직 건설 중이던 붉은군대에 교육과 도이치 참모부의 여러 방식을 전수했다."(176-7)


"도이치 외교부와 전체 정책에서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재무장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배상금 부담을 털어내고 그로써 도이치 경제를 재건할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목표를 위한 도이치 정책은 사회적 파국을 감수한 것이었다. 바로 국내 정치의 분위기에 파괴적으로 작용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이었으니, 이는 1919년에서 1922년까지 빠른 속도로 커지다가, 1923년에는 질주 속도로 진행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경제적 이점도 있기는 했다. (실질임금이 계속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도이치 산업체는 저축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후에 대규모 병력의 귀환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에서도 생겨난 대량 실업 사태를 피할 수가 있었다. 도이치 산업체는 엄청난 물량을 계속 낮아지는 가격으로 수출하면서 계속 가동되었다. 그러니까 도이칠란트에서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계층은 노동자가 아니라 저축 자산을 가진 중산층이었다."(179-80)


"(1929년 세계 경제공황으로 등장한) 디플레이션 정책은 배상금을 떨쳐내기 위해, 바이마르 시대 도이칠란트가 떠맡은 두 번째 대규모 사회적 파국이었다. 세계 경제공황은 단순히 도이치 제국만이 아니라 (러시아를 뺀) 서방세계 전체에 타격을 주었다. 경제공황을 맞은 모든 나라들, 특히 미국도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정치적 지불, 즉 한편에는 미국을 향한 유럽 연합국의 부채 상환, 다른 한편에는 서유럽 연합국을 향한 도이칠란트의 배상금 지불은, 점점 더 붕괴하는 세계 경제에 부담일 뿐으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1931년에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이런 모든 정치적 지불의 중단을 요구하고, 우선 1년 동안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을 단행했다." "1932년 로잔에서 30억 마르크의 최종 금액이 합의되었지만, 이 돈을 실제로 갚지도 않았고, 요구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시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은, 도이칠란트를 일부러 가난하게 만들어 배상금에서 벗어난다는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188-9)


"1932년에 도이칠란트는 수정주의 노선에서 또 다른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해에 제네바에서 국제 군축회의가 열렸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서방국가들은, 도이칠란트의 무장해제를 전반적인 무기 감축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었다. 이 규칙이 이번 도이치 정책의 지렛대가 되었다. 도이치 대표는, 서방국가들이 도이칠란트의 강압적인 무장해제만큼 무기 감축을 하든가 아니면 도이칠란트에도 그들과 동일한 정도로 재무장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도이칠란트는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12월 제네바 군축회담에 참석한 서방국가들은, 이제 더는 브뤼닝이 아닌 슐라이허를 수반으로 하는 도이치 정부에, 대등한 군사적 무장의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니까 1932년 말에 도이칠란트는 여러 우회로들을 거쳐서, 1919년 이후로 강대국으로의 부활에 걸림돌이 되던 두 개의 핵심적인 부담, 곧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의 의무와 매우 작은 방어력만 유지할 의무를 털어버린 것이다."(190)


힌덴부르크 시대


"새로운 공화국은 황제 국가의 전체 시설들, 군대, 관료 집단, 사법부, 교회, 대학들, 심지어 대규모 농민들과 사업가들까지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그들이 지금까지와 똑같은 성격과 옛날의 품격, 사회의 기준이 되는 드높은 지위까지 고스란히 지니도록 해주었건만, 그들은 거부의 자세를 견지했다. 거부감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고위 관료와 장관들은 투덜대며 충성했다. 국장급과 서기관급 관리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고 또 쓸모도 있었지만, 옛날 국가에 대해 지녔던 열광을 지니지 않은 채 그냥 임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그들은 공화국 초기에 우파 쿠데타, 곧 1920년의 카프Kapp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일종의 수동적 저항을 통해 쿠데타 정부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고작 이것이 공화국 정부가 옛날 엘리트층에서 찾아낸 가장 호의적인 태도였다. 군대는, 예컨대 카프 쿠데타 때, 고위 관료층과는 달리 합법적 정부와 불법적 정부 사이에서 냉정한 중립을 지켰다."(198-9)


"각종 대학들에서 공화국의 처지는 몹시 나빴다.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들, 고등학교 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은 직립부동의 반反공화파, 군주국 지지, 민족주의, 보복주의 입장이었다. 교회의 경우 이런 태도가 조금 온건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적어도 개신교는 오늘날 좌파인 만큼이나 당시에는 우파였다. 가톨릭 중앙당이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가톨릭교회도 공화국에 대해 극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산업계의 사정은 더 복잡했다. 혁명 직후인 11월에 기업주와 노동조합들 사이에 '슈틴네스-레기엔 협정'이 맺어졌다. 노동조합과의 협조 아래 미래의 임금 조건들을 규정하겠노라는 일종의 평화조약이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기업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적대적인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로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 모든 그룹들의 거부감이야말로, 1919~1924년까지 에버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공화국이 도이치 제국의 지속적인 국가 형태로 굳어질 수 없었던 이유였다."(199-200)


"이어서 중간기인 1925~1929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갑자기 견고해진 듯이 보였다. 이제 처음으로 헌법에 따라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등장했다." "황제 시대의 지배 계층은 공화국에서도 실질적인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국가가 진짜 자기들의 나라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갑자기 달라진 눈길로 이 나라를 바라보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 치하의 공화국은, 힌덴부르크가 최고로 존경할 만한 황제 시대 핵심 인물의 하나로서 세계대전 기간에 이미 일종의 대리 황제 노릇을 했던 사람이니만큼, 에버트와 사민당의 공화국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그때까지 의회에서 국가에 거부감을 가진 가장 강력한 우파 정당, 곧 도이치 민족주의 국민당이 이제 공화국 정부에 동참할 각오를 했다는 사실에서 재빨리 드러난다." "더는 중도-좌파 정당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중도-우파 연합에 의해서도 아주 정상적인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공화국을 견고하게 만들었다."(200-1)


"1929년 10월에 세계 경제공황이 터졌다. (사민당이 주도하고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참여한) 대연정 정부를 이끌어 온 슈트레제만이 매우 불운하게도 바로 이 10월에 죽었다. 그러자 정부는 도이칠란트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악화된 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부가 붕괴되고 1930년 3월에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의 충고를 받아들여 예정대로 브뤼닝을 총리로 지명했다. 브뤼닝은 헌법 48조에 근거하여, 의회를 고려하지 않고 통치할 전권을 대통령에게서 위임받았다. 이 48조 조항은 국가원수가 긴급사태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긴급명령을 통해 의회의 입법권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은 의회 해산 권한을 지녔다. 의회가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철회할 경우, 대통령은 언제라도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 이제 브뤼닝은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 모든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힌덴부르크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군주제 부활을 목적으로 계획한 쿠데타를 위한 과도정부였다."(205)


"브뤼닝 정권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틀을 지켰기에 역설적이게도 브뤼닝이 바이마르 헌법의 최종 수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계 경제공황이 터지자, 브뤼닝은 이제야말로 외교적 측면에서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이는 곧 도이칠란트에서 경제 위기를 의도적으로 과격하게 악화시켜서 전쟁배상금을 털어낼 기회였다. 그것이 처음에는 미리 기획된 쿠데타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1930년 7월에 의회를 해산했고, 9월에 새로운 선거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선거에서 히틀러의 민족주의-사회주의[=나치] 정당이 갑자기 제2정당으로 올라선 것이다. 저 '좋던' 힌덴부르크 시절에는 그냥 소수당에 지나지 않던 정당이었다. 이 정당은 유권자의 19퍼센트에 해당하는 600만 표를 얻어 107개 의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도이치 국내 정치 무대에서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력이 갑자기 나타났다."(206-7)


# 나치당의 급부상 요인

1. 경제공황이 야기한 빈곤을 저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

2. 상처입은 자부심과 원한을 품고 있던 민족주의의 재등장

3. 지도자를 갈망하는 대중의 마음을 점령한 히틀러의 매력


"슐라이허는 브뤼닝에게 히틀러 운동이 더 막강해지기 전에 군주제 쿠데타를 끝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브뤼닝이 꾸물거리자 그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하여 브뤼닝을 밀어내고 새로운 권위주의 헌법으로 넘어가는 일을 완수할 총리를 임명하려 했다. 이 시점에 슐라이허가 찾아냈다기보다 거의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파펜은 브뤼닝과는 반대로, 즉시 쿠데타를 시작했다. 맨 먼저 의회를 해산했다. 7월 말에 선거가 있었고, 나치당이 이번에는 유권자의 37퍼센트를 얻어 도이칠란트 제1정당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강력해졌다. 1932년 7월의 의회는, 시민 계층과 사민당이 아무리 대규모 정당연합을 해도 정부를 구성할 다수가 되지 못한 최초의 의회였다." "이에 앞서 파펜은 총리로 임명된 직후에, 이른바 '프로이센 타격'을 수행했었다. 바이마르 정당연합이 계속 정권을 잡아온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중단시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프로이센의 독립을 진짜로 끝낸 사건이었다."(211-4)


"어쨌든 슐라이허는 11월 말에 파펜의 국가 쿠데타 계획에 동참하지 않고, 파펜을 그대로 몰락시켰다. 이어서 힌덴부르크는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국가 쿠데타를 연기하고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 사이 파펜은 어떻게든 히틀러를 통제해볼 속셈을 계속 품고 있었다." "파펜은 히틀러를 귀족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히틀러는 재능이 있는 평민, 벼락 출세자이니, 이른바 '남작들의 내각'에 청강생으로 참석시켜주면 몹시 기뻐할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히틀러의 훨씬 더 큰 게획들과 훨씬 높은 명예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1933년 1월 말에 민족주의-사회주의당과 도이치 민족주의당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어떤 평론가가 깜짝 놀라고 경악해서 파펜에게 비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뭐라고요, 히틀러를 권좌에 앉혔단 말입니까?〉 파펜은 몹시 거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신 게요. 우리가 그를 참가시킨 거지.〉 그는 얼마나 잘못 생각했던가!"(217-9)


히틀러 시대


"히틀러는 제국총리로 임명되고 난 다음 1933년 2월부터 7월까지 4개월 만에 정치권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고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그때까지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의 권력, 곧 완벽한 전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권력 장악은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1933년 처음 절반의 기간에, 정치 영역을 말끔하게 정리한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정치적 생명체, 곧 바이마르 의회 민주주의 잔재와 새로 나타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가 혼합된 정권이 1933년 1월 30일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3년 7월 14일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당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통령제 정권이나 의원내각제 정권도 없어지고, 그 사이에 새 총리 혼자서 자기 당을 이끌고 통치했다. 그동안 숨이 멎을 정도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는데, 물론 수많은 법률 위반과 끔찍한 일들과 비열한 일들이 행해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1933년 2월 27일의 의회 건물 화재 사건이다."(224)


"2월 28일 체포가 시작되고, 한 주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은 도이치 민족주의당과 합쳐도 겨우 과반을 넘는 52퍼센트 정도를 득표했다. 민족주의-사회주의당 혼자만 따지면 겨우 49.3퍼센트 득표였다. 절대 다수의 표를 얻으리라는 희망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공산당 의원들이 사라지고 나자 나치당은 갑자기 절대 다수파가 되었고, 시민 계층 정당들과 힘을 합치면, 심지어 의회 자체를 없애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2/3 의석이 되었다. 3월 23일에 의회가 의회주의 헌법을 없애는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이 2/3 의석이 성립되었다. 사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이른바 전권 위임법에 찬성했다. 이는 정부가 말하자면 합법적으로, 의회의 협조 없이 법을 만들 권한을 갖는 것으로, 앞으로 4년 동안 유효했다. 이것은 2월 28일의 쿠데타 이후 두 번째 국가 전복 쿠데타였다. 바로 6월과 7월에는 모든 시민 계층 정당들의 완전한 자진 해산과, 사민당 및 공산당의 금지가 진행되었다."(225-6)


"이 기간에 극히 특이한 일은, 시민 정당들이 실제로도 더는 활동하고자 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치적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제대로 정의되거나 경계를 정하거나 확실하게 잡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공중에 떠도는 '가스 형태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런데도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 1914년 8월의 분위기와 똑같이 1933년의 분위기도 큰 의미를 지녔다. 이런 분위기 전환이야말로 앞으로 나타나는 총통 국가의 진짜 권력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감정, 민주주의에서 구원되고 해방되었다는 감정이었다. 국민의 다수가 원치 않는다면 민주주의란 게 대체 무엇인가? 당시 대부분의 민주주의 정치가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우리가 정치적 삶에서 물러난다. 우리가 없어져야 한다. 1933년 6월과 7월에 민주주의 정당들은, 1918년 11월에 도이치 영주들이 보인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226-7)


"이 시기에 일어난 그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 설치나 마구잡이 체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한 반유대주의 정책의 처음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하나의 확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위대한 순간이다.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 신이 보내신 한 사람, 민중 한가운데서 일어선 지도자를 찾아낸 순간이다. 그가 기율과 질서를 찾을 거고,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도이치 제국이 새롭고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줄 거다〉라는 확신. 히틀러가 정치 장면 전체를 실질적인 저항도 없이 깨끗이 청소해버리고, 자신의 대열 밖에 잇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맞서 저항하거나, 계획을 무산시킬 사람이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해준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꼭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을 따랐다기보다는, 지도자[=총통]의 뒤를 따랐다. 당시 벌써 그는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 바로 '획일화'[=관제화] 과정이었다."(228-9)


"권력 장악의 두 번째 단계. 히틀러의 체제는 당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히틀러 체제는 여러 민족주의-사회주의 조직체들을 결합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체들 중 월등하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당의 군사 조직인 돌격대SA였다." "그러나 국방군과 돌격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히틀러는 국방군의 편을 들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중 작은 이유는, 히틀러가 처음부터 대규모 군비 확장과 뒷날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사후에 총리와 대통령의 직함을 하나로 묶는 권력 장악을 완성하기로 굳게 결심한 터였다. 그러려면 국방군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협정을 군대와 맺어야 했다. 그런 협정은 결국 국방군이 새 대통령인 히틀러에게─이전에 힌덴부르크에게 그랬듯이─직접 종속된다는 의미였다."(230-2)


"돌격대 지도부를 무시무시하게 학살한 일도 대부분의 대중만이 아니라 옛날 상류층의 승인을 받았다."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잔인한 기습, 예를 들면 사업장 기습 같은 짓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 지도자가 여기서도 질서를 다시 세웠다는 것, 마침내 정상적인 상태가 돌아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환영했다." "이 두 번의 정치적 쿠데타 행위, 1933년 3~7월의 쿠데타와, 1934년 6~8월의 쿠데타에 뒤이어 평온한 시기가 찾아왔다. 1934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는 '그 좋던' 나치 시대였다. 이 기간에 이전의 테러는 제한되었다. 수용소는 계속 있었지만, 들어간 사람보다 나온 사람이 더 많았다.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이 보였다. 동시에 히틀러의 경제 기적도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933~1937년 사이에 대량 실직 상태를 완전고용 상태로 바꾸어준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로써 히틀러는 옛날 사민당 추종자 거의 전부와 옛날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람의 상당수를 자기 편으로 돌려놓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만들었다."(234-5)


"이 시기에 도이치 제국은 대체 어떤 국가였는가? 자주 이야기되지만, 정당 국가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이치 민주공화국[=동독]이나 소련 같은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구조화가 이루어진 정당 하나의 지배를 받는 국가는 아니었다. 나치 정당은 중앙위원회도 정치국도 없었고, 히틀러는 정당 협의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논의한 적도 없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뉘른베르크에서 매우 화려하게 전당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그런 화려한 과시 말고는 보통 전당대회라 부르는 요소가 없었다. 당대표가 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모여, 당의 정강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런 회의가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조직들, 국가 속의 모든 국가들─이라 부르고 싶다면─이들이 매우 인상적인 시위를 했고, 그런 기회에 오직 히틀러만, 그리고 언제나 다시 히틀러만 연설을 했다. 그 자신은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당이 국가를 통치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주로 당을 통해 통치했다."(236-7)


"또한 오늘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과도 반대되는 것으로, 원래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히틀러의 국가에는 이전의 도이치 제국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 속 국가들이 있었다. 에른스트 프렝켈은 자신의 저서 『이중 국가』에서, 제3제국에는 자의恣意 및 테러 지배의 국가와 나란히, 오래되고 습관이 된 관료국가, 심지어는 법치국가가 있었다고 썼다." "수많은 특수 역할들로 나뉜, 전체주의 아닌 이런 국가가, 어떻게 총통 국가로 남아 있었던가? 그 모든 '권위주의적인 무정부 상태'(당시 사람들의 말대로)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위가 계속 존재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 최고 권위는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장소에서, 언제라도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은 짧게 두 마디 말로 답할 수 있다. 곧 선전과 테러를 통해서였다. 이 두 가지 도구가 히틀러의 나치 제국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237-9)


"잘 알려져 있듯이, 히틀러는 1938년 이후로 유대인 박해를 계속 강화했다. 1938년에 히틀러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위에서부터 기획된 프로그램 한 가지를 시도해보았다." "테스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별로 해롭지 않게 들리는 '수정의 밤'이란 말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대해 반응한 방식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매우 차가운 반응]." "도이치 민족의 대중, 히틀러에 충실한 대중이 실질적인 유대인 박해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히틀러가 '최종 해결'을 결정했을 때,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냈던 것인데, 그 사실은 자주 간과되곤 한다. 최종 해결은 도이칠란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유대인 근절 수용소는 폴란드 동부에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도이칠란트에서 이루어진 일은, 고작 유대인의 수송뿐이었다." "괴벨스가 이끌던 도이치 신문에는 이렇게 보도된 적이 없었다. 〈유대인은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니 하물며 〈유대인은 지금 근절되고 있다〉는 보도는 더욱 없었다."(260-2)


"도이치 여론에 대량 학살을 의도적으로 감춘 일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맞서 아무 일도 안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변명을 해준다." "도이치 사람들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매우 많은 소문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외국에서도 오랫동안 그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근절의 시도를 침묵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고, 이 나라 역사에는 영원한 오욕이다. 하지만 총통 국가의 많은 요소들과는 달리, 이것을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그리고 실제 체제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존재한 요소들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히틀러가 없었어도 1933년 이후에 아마도 일종의 총통 국가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없었어도 아마 두 번째 세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수백만 유대인 학살만은 없었을 것이다."(262-3)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는 1차 대전에서 상당히 분명한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 바가 있었다. 첫째 교훈은, 동부에서 러시아에 맞선 세계대전은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1차 대전에서 전쟁 이전에 생각되던 것보다 더욱 취약했음이 드러났다." "동시에 서부전선에서는 주로 영국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그러므로 영국에 맞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영국은 동맹을 원하지 않았고, 도이칠란트가 러시아를 정복하여 굴복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도이칠란트가 전통적인 대륙 중앙의 위치로 만족한다면, 그러니까 프랑스를 보호하고 러시아도 그대로 놓아둔다면, 엄청난 양보를 해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구상은 영국이 적어도 선의의 중립을 통해, 동부에서 대규모 도이치 정복 전쟁을 방관하는 일이었고, 영국의 구상은 도이칠란트가 더욱 커지고 더욱 만족해서('유화宥和되어') 평화로운 유럽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267-70)


# 영국의 속내 : 유럽의 평화가 깨지면 동아시아, 지중해, 근동에서 '대영제국'의 취약점들이 공격받게 된다는 우려


"뮌헨 협정에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지대를 도이칠란트에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중요한 외교적인 결정에서 도이칠란트는 영국과 협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뮌헨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히틀러로서는 바로 이것이 패배라고 느낀 지점이었다. 그는 동부에서 자유로운 손을 원했었다. 그래서 바로 그 어떤 협의나 경고도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몸통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는 그것을 다시 더 나누었다." "1939년 3월, 체임벌린 내각은 마침내 유화정책의 방법을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약속과 양보만으로 유혹했다면 이제는 위협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동유럽에서 독단적인 확장 정책을 계속한다면, 이제 영국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위협의 상징이 1939년 3월 말에 나온, 영국의 폴란드 보장 약속이었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나온 약속이었다."(273-4)


"그렇다면 소련은 어째서 히틀러의 정책에 함께 했는가? 스탈린은 히틀러의 최종 목적이 소련을 향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고, 히틀러도 스탈린이 그것을 모르게 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1936년 이후로 여러 나라들, 곧 일본, 이탈리아, 몇 개의 작은 국가들과 '반反코민테른'[반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실은 이미 반反소련 동맹이었다. 조약 안에는, 도이칠란트가 소련에 맞선 전쟁을 벌일 경우, 소련과 이미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선의의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스탈린은 전쟁을 피하고 공을 서방으로 떠넘겨서, 도이칠란트가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감으로써, 가능한 한 오랫동안 히틀러를 소련에 대한 전쟁에서 멀리 떼어놓을 기회를 보았다. 이런 전조 아래서 스탈린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히틀러와 함께 소련과 도이칠란트 사이에 자리 잡은 동유럽을 분할했다."(275)


"히틀러의 내면에는 공명심 강한 영웅 노래 요소가 있었다.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최고원수' 괴링이 1939년 8월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생결단만은 하지 말지요.〉 그러자 히틀러가 대답했다. 〈나는 평생 판돈을 몽땅 거는 게임을 해왔소.〉" "그는 언제나 전체와 초超거대를 지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이칠란트를 세계 강대국, 그야말로 유일한 강대국으로 만들 수 없다면, 하다못해 도이치 역사상 최고의 파국이라도 마련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이런 파국을 마지막에 의식적으로 원했다는 징후들이 있다.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드러난 1941년 말에 벌써, 그는 외국 외교관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한 가운데 이런 발언을 했다. 〈도이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릴 만큼 충분히 강하고 또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민족은 스러져서 더욱 강한 다른 세력에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는 도이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오.〉"(286)


"전쟁 마지막에 실제로 히틀러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군사적 패배를 도이치 민족 전체의 몰락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1945년 3월 18일과 19일에 나온 저 유명한 '네로 명령'이 그것인데, 여기서 히틀러는 제국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자원을 주민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모조리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군비 장관이던 슈페어가 이 명령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가로막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사고에서 이 명령은 극히 특징적인 것이다. 그는 분명 자기가 가장 위대한 승리의 제공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도이칠란트에 파괴의 제공자라도 되겠노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히틀러는 언제나 파괴라는 카테고리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유대인을 파괴하려 했고, 소련을 파괴하려 했다. 이제는 이른바 역사적 대히트를 남기려고 도이칠란트의 파괴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입증되지 않는 일이지만, 입증된 히틀러의 여러 발언들 덕분에 설득력을 얻는다."(287)


도이치 제국의 사후事後 역사


"1949년에는 도이치 제국 사후 역사에서 가장 깊은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쪽에는 3개 서방국가 점령 지역의 통합으로 생겨난 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BRD이, 동쪽에는 예전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나온 도이치 민주공화국DDR이 나타난 것이다." "서방국가 총리들은, 새로운 헌법, 즉 오늘날 연방공화국의 기본법을 제정할 의회 위원회의 소집을 망설였다.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가 동부 도이치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동쪽에서 실제로 아무런 마찰도 없이 이루어진 일). 이런 장애의 표현이 바로 많은 논란이 있는 기본법의 전문前文이다. 이 전문에서 기본법의 제정자들은 이른바 양심의 가책을 증언했다. 그들은 새로운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체 도이치 국가, 도이치 제국이 1945년의 줄어든 국경선 안에서나마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이런 소망을 에두른 문구로 표현하였다."(294)


"그러나 연방공화국은 새로운 국가이다. 이 나라는 지리적인 관점에서만 과거 도이치 제국의 부활이 아닌 것만이 아니라, 과거 도이치 제국에서 단편으로 남은 잔재도 아니다.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니더작센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몇몇 주州들도 함께 국가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 몇몇 주에서는 그 또한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당들, 곧 기독교 민주주의 동맹 내지 기독교 사회주의 동맹CDU/CSU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다. 또한 연방공화국은 과거 도이치 제국의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윤곽을 지닌 헌법을 내놓았다.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소련 점령 지역에서 생겨난 국가도 똑같이 새로운 국가이다. 이에 대해 상세한 근거 제시를 할 필요도 없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도이치 제국의 국가 형태와 비슷한 점이 없고, 도이치 제국을 그 어떤 형태로라도 계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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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 -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로빈 디앤젤로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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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는 여기서 저기로 갈 수 없다


"(인종 스트레스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우리[백인 집단]는 인종주의 체제와 우리를 연관짓는 모든 시도를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당한 도덕적 모욕으로 여긴다. 아무리 적은 인종 스트레스라도 우리는 견디지 못한다. 이 사회에서 백인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암시하기만 해도 대개 일군의 방어적 반응을 보인다. 그런 반응에는 분노,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과 논쟁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같은 행동이 포함된다. 우리 백인은 이런 반응으로 도전을 물리쳐 균형을 회복하고, 인종적 편안함을 되찾고, 인종 위계에서의 우위를 유지한다. 나는 이 과정을 '백인의 취약성'으로 개념화한다. 백인의 취약성을 촉발하는 것은 불편함과 불안이지만, 이것을 낳는 것은 백인이 우월하고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식이다. 백인의 취약성은 그 자체로는 약점이 아니다. 실은 인종을 통제하고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강력한 수단이다."(24-5)


제1장 백인에게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부딪히는 난제들


"백인을 상대로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혹시 우리 모두가 같은 대본의 대사를 외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뻔한 반응을 접하곤 한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같은 대본을 들고 있는 셈인데, 우리가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배우들이기 때문이다. 백인 대본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객관적이고도 독특한 존재로 본다는 데서 비롯된다." "우리는 보편적이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은 특수한 문화적 렌즈를 통해 지각과 경험을 이해한다." "우리는 서구 문화를 규정하는 두 가지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특정한) 문화적 준거틀을 탐구하기가 유독 어려울 수 있다. 바로 개인주의와 객관성이다. 간단히 말해 개인주의는 우리가 심지어 우리의 사회 집단 내에서조차 저마다 독특하고 서로 다르다고 본다. 객관성은 우리가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 이데올로기 때문에 백인은 자신들의 집단적 경험을 탐구하는 데 유독 어려움을 겪는다."(35)


제2장 인종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인종은 인종 간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백인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화하고 있는 사회적 관념이다. '백인'이라는 용어는 1600년대 말에 식민지법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미국은 1790년경 인구조사에서 사람들에게 각자의 인종을 말할 것을 요구했고, 1825년경 이른바 혈통의 등급에 따라 누구를 인디언으로 분류할지 결정했다. 1800년대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옴에 따라 미국에서 백인 인종 개념은 더욱 공고해졌다.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후에도 백인성은 대단히 중요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합법화된 인종주의적 배제와 폭력이 새로운 형태로 게속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시민권─그리고 시민권에서 비롯되는 다른 권리들─을 가지려는 사람은 법적으로 백인으로 분류되어야 했다. 비백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법원에 자신을 다시 분류해달라고 청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법원은 어떤 사람이 백인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48-9)


"(누구나 편견을 갖고 있고 누구나 차별을 하지만) 어느 인종의 집단적 편견이 법적 권한과 제도적 통제력의 지원을 받을 때, 그것은 인종주의로, 개인 행위자들의 의도나 자아상과 무관하게 기능하는 광범한 체제로 변화한다." "미국 여성의 참정권 투쟁은 제도적 권력이 어떻게 편견과 차별을 억압 구조로 바꾸는지를 잘 보여준다. 누구나 편견을 품고 차별을 하지만, 억압 구조는 개개인을 훌쩍 넘어선다. 미국 여성은 개인적 관계에서는 남성을 상대로 편견을 갖고 차별을 할 수 있었지만, 여성 집단으로서 남성의 시민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미국 남성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여성의 시민권을 부인할 수 있었고 실제로 부인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그들이 모든 제도를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남성이 그 권리를 여성에게 부여하는 길뿐이었다. 여성이 스스로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수는 없었다."(54)


"백인 개개인은 인종주의에 '반대'할지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이 백인 집단에게 특권을 주는 체제로부터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데이비드 웰먼은 인종주의를 〈인종에 근거하는 이점의 체제〉라고 간명하게 요약한다. 이런 이점은 '백인 특권'이라 불리는데, 이 사회학 개념은 같은 환경(정부, 공동체, 직장, 학교 등)에서 백인은 당연시하지만 유색인은 백인과 비슷하게 누릴 수 없는 이점을 가리킨다. 오해를 피하고자 말하자면, 인종주의가 백인에게 특혜를 준다는 말은 백인 개개인이 장벽과 싸우지 않거나 장벽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인종주의의 특정한 장벽에 부딪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종주의는 그 정의상 역사적으로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제도적 권력의 체제다. 인종주의는 유동적이지 않으며, 소수의 유색인 개인들이 가까스로 두각을 나타낸다고 해서 방향을 바꾸지도 않는다."(59-60)


제3장 시민권 운동 이후의 인종주의


"이른바 색맹 인종주의는 문화적 변화에 적응하는 인종주의의 능력을 보여주는 예다. 이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우리가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한다면 인종주의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생각의 근거는 1965년 마틴 루서 킹 박사가 일자리와 자유를 위해 워싱턴으로 행진하던 중에 행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에 포함된 한 문장이다." "마틴 루서 킹 연설의 한 문장─언젠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문장─ 이 특히 백인 대중의 이목을 끌었는데, 킹의 표현이 인종 갈등 문제에 간단하고도 즉각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인종을 보지 않는 척하는 방법으로 인종주의를 끝내는 해법이었다. 그리하여 '색맹'이 인종주의의 해결책으로 홍보되었고, 백인은 자신이 인종을 보지 않는다고, 설령 보더라도 자신에게 인종은 전혀 의미가 없다고 우기기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인종을 인정하는 사람이 곧 인종주의자라는 것이다."(85-7)


"회피적 인종주의aversive racism는 스스로를 교양 있는 진보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이 드러낼 가능성이 더 높은 인종주의의 한 형태다. 이것은 의식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데, 인종 간 평등과 정의라는 의식 수준의 신념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유지할 만한 방식으로(〈나는 유색인 친구가 많다〉, 〈나는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인종주의를 자행한다는 점에서, 회피적 인종주의는 미묘하지만 교활한 형태의 인종주의다." "가령, 한 친구는 자기가 아는 (백인) 부부가 얼마 전에 뉴올리언스로 이사했는데 겨우 2만 5천 달러에 집을 샀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물론 그들은 총도 사야 했고, 조앤은 집 밖에 나가는 걸 두려워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부부가 흑인 동네에서 집을 샀다는 뜻임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경멸감을 대놓고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무서운 흑인 공간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강화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90-1)


"어린이와 인종에 관한 많은 연구는 백인 어린이가 일찍이 취학 전부터 백인 우월의식을 키운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가 백인이 유색인보다 낫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기 때문이다. 다수의 백인 청소년이 인종주의는 과거의 일이며 자신들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여기도록 배웠다고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연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밀레니얼 세대는 인종 색맹이라는 이상에 더 헌신하면서 인종 문제를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로 남겨두고, 인종 간 불평등을 줄이는 조치에 반대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백인 밀레니얼 세대의 41퍼센트가 정부가 소수집단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고 생각하고, 48퍼센트가 백인에 대한 차별이 유색인에 대한 차별만큼이나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다수는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 우리가 탈인종 시대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96-7)


제4장 인종은 백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사회에서 정상적이거나 중립적이거나 유익하다고 여겨지는 사실상 모든 상황 또는 맥락에서 나는 인종적 소속감을 느낀다. 이 소속감은 나와 늘 함깨해온 뿌리 깊은 느낌이다. 소속감은 나의 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나의 일상적인 생각과 관심사, 삶의 지향과 기대지평에 영향을 준다. 내게 소속 경험은 구태여 생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관여하지 않은 이상, 인종주의는 나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이렇게 책임을 면할 자유 덕택에 유색인은 하루 종일 누리지 못하는 인종적 안도감과 정서적·지적 여유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다. 유색인에게 이런 혜택이 없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소수이고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오히려 백인이 수적으로 소수다). 유색인이 백인 우월주의 문화─유색인이 설령 보이더라도 열등한 존재로 보이는 문화─안에서 인종화되기 때문이다."(106-9)


"백인 연대란 백인의 이점을 보호하는 한편 다른 백인이 문제 있는 인종적 언행을 할 때 그것을 추궁해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말자는 무언의 합의를 말한다. 교육 연구자 크리스턴 슬리터는 이 연대를 백인의 〈인종적 유대〉로 묘사한다. 크리스턴에 따르면 백인은 자기들끼리 교류하면서 〈유색인 집단들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정당화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모종의 경계선을 긋는, 인종 관련 쟁점들에 대한 공동 입장〉을 확인한다. 백인 연대는 백인 위치의 이점을 드러내는 모든 것에 대한 침묵과 백인 우월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인종적 단결을 유지하겠다는 암묵적 합의를 둘 다 필요로 한다. 백인 연대를 깨는 것은 곧 대열을 깨는 것이다." "(인종주의적 농담에 대한) 나의 침묵은 인종 위계와 그 속에서의 나의 위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제지받지 않는 모든 인종주의적 농담은 우리 문화 안에서 인종주의를 더욱 퍼뜨린다."(113-5)


"백인의 인종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일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우리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유리하다는 것을 백인 스스로 인정하도록 이끄는 것마저 힘겨운 과제다." "예컨대 나는 백인이 〈나는 그저 피부색 때문에 특권을 가지고 있다〉라고 오만하게 말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이런 발언은 특권을 마치 요행인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관여하거나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그저 우연찮게 얻은 무언가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다." "제우스 레오나르도는 백인의 특권을 무지의 산물로 보는 이 견해에 도전하면서 〈백인의 인종 헤게모니로 일상생활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지배의 과정으로, 또는 백인 주체가 유색인에게 강제하는 법과 결정, 정책으로 그 헤게모니를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특권을 백인이 그저 건네받은 무언가로 보는 것은 능동적·수동적으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유지해야만 하는 인종주의의 체제적 차원을 가리는 것이다."(123-4)


제5장 좋은/나쁜 이분법


"시민권 운동 이후로는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인 것과 인종주의에 가담하는 것이 양립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제 좋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인종주의에 가담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인종주의자라면 나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인종주의를 나쁘게 만드는 것이 긍정적인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이 변화가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 패러다임 안에서는 나에게 인종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이 곧 심한 도덕적 타격─일종의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이 타격을 받을 경우 나는 나의 인격을 변호해야 하고, 나의 행위를 반성하는 일보다 인종주의자 혐의를 벗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좋은/나쁜 이분법은 백인이 인종주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역학을 논의하지 못하거나 우리 안에서 발견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인종주의에 계속 가담할 수밖에 없다."(133-5)


"인종주의와 관련해 사실상 모든 백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방어적 태도의 근간에는 이처럼 인종주의를 불친절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의도적인 개별 행위로 한정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가 있다." "좋은/나쁜 이분법은 분명 인종주의의 구조적 성격을 가리고 그것을 직시하거나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관이 우리의 행위에 끼치는 영향도 문제다. 백인으로서 내가 인종주의를 이분법으로 개념화한 다음 나 자신을 '비인종주의자' 편에 놓는다면, 어떤 행위를 추가로 요구받겠는가?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행위도 요구받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종주의를 나의 문제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인종주의를 우려하지 않을 것이며, 더 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세계관에 서 있을 경우 나는 인종주의에 관해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역량을 키우거나 나의 위치를 활용해 인종 불평등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136-7)


"백인에게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나는 같은 주장들─좋은/나쁜 이분법에 뿌리박은─을 듣고 또 듣곤 한다. 나는 이 주장들을 크게 두 범주로 나누는데, 둘 다 백인을 좋은 사람, 따라서 인종주의자가 아닌 사람으로 분류한다. 첫 번째 범주는 색맹을 주장한다. 〈나는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그리고/또는 인종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따라서 내게는 인종주의가 없다.〉 두 번째 범주는 다양성을 중시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유색인을 알고 있다[그리고/또는 유색인과 가깝게 지내왔다. 그리고/또는 유색인에게 대체로 호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게는 인종주의가 없다.〉 두 범주 모두 근본적으로 좋은/나쁜 이분법에 의존한다. 내가 이런 주장들을 두 범주로 나누긴 하지만, 이것들은 맞바꿔서 사용될 수 있고 흔히 그렇게 사용된다. 꼭 타당한 주장일 필요는 없다. 그저 발화자를 좋은 사람─인종주의가 없는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논의를 끝내기만 하면 된다."(142)


제6장 반反흑인성


"우리는 백인이 우월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 이와 동시에 흑인이 열등하다는 메시지도 끊임없이 유포된다. 그러나 반흑인성은 우리 모두가 흡수하는 부정적인 고정관념 그 이상이다. 반흑인성은 우리의 백인 정체성의 근간을 이룬다. 백인성은 언제나 흑인성에 기반해왔다. 아프리카인 노예화를 정당화할 필요성이 생기기 전까지는 인종이나 백인종 개념이 없었다. 열등한 흑인종을 따로 만들어내는 것은 동시에 '우월한' 백인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백인종 개념은 흑인종 개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백인은 흑인을 필요로 한다. 흑인성은 백인 정체서을 만들어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지금 백인의 집단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백인 개개인은 이런 감정을 뚜렷하게 의식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조금만 도전을 받아도 이런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올라오는지를 느끼면서 자주 놀라곤 한다."(164-5)


"우리는 특히 '건방진' 흑인, 감히 자기 위치에서 벗어나 우리를 동등한 존재로 보는 흑인을 증오한다. 대대로 전해지는 메시지는 흑인은 태생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받을 자격이 없다는 백인의 믿음을 강화한다." "캐럴 앤더슨은 저서 《백인의 분노 White Rage》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백인의 분노를 촉발하는 방아쇠는 다름 아닌 흑인의 전진이다. 문제는 단순히 흑인의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야망, 추진력, 목표, 열망, 그리고 완전하고 평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는 흑인성이다. 복종을 받아들이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흑인성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한다. 〈진실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흑인 남성이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인 전진이었고, 따라서 궁극적인 모욕이었다. 놀랄 것 없는 결과일 테지만, 뒤이어 투표권이 심각하게 축소되었고, 연방정부가 일시 정지되었으며, 다른 선출직 관료들이 놀랍게도 공공연하게, 공식적으로 한 차례 이상 대통령직에 무례를 범했다.〉"(171-2)


제7장 백인의 인종적 방아쇠


"대부분의 백인은 인종주의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모른다. 그들에게는 대학에서 단 한 차례 강연을 듣거나 직장에서 요구하는 '문화적 역량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그들의 인종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도전을 마주하는 유일한 경험일 것이다." "혹시라도 백인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서 인종주의와 백인의 특권을 직접 거론할 경우에는 대개 분노, 퇴장, 무감정, 죄책감, 논박, 인지부조화 같은 반응(이 모든 반응은 진행자가 인종주의를 직접 거론하지 못하도록 막는 압력을 강화한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른바 진보적인 백인은 분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이에 대한 수업을 이미 들었다〉거나 〈이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빠져나갈 것이다. 이 모든 반응은 백인의 취약성─인종적 격리가 지속되어 사회심리적 체력이 약해진 결과─을 구성한다."(179-80)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사회화의 결과로서 행위자들의 반복적인 실천, 즉 그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나머지 사회환경과 주고받는 반복적인 상호작용이라고 말한다. 아비투스는 자신의 지위에 대한 내면화된 의식뿐 아니라 그 지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까지 포함한다." "백인의 취약성이란 아비투스에 최소한의 인종 스트레스만 받아도 참지 못하고 여러 방어적 움직임을 보이는 상태다. 이런 움직임으로는 분노와 두려움, 죄책감 같은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 논박하기, 침묵하기,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등이 있다." "백인이 익숙하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중단될 때 백인의 취약성은 균형을 회복하고 도전으로 인해 '상실한' 자본을 되찾아온다. 이 자본은 자아상과 통제력, 백인 연대를 포함한다. 백인이 불균형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는 균형을 깨뜨린 원인에 분노하기, 죄책감이나 '상한 감정' 같은 감정적 무력화를 차단하기 그리고/또는 드러내고 탐닉하기, 이 반응들 조합하기 등이 있다."(181-7)


제8장 그 결과: 백인의 취약성


"백인이 인종과 관련해 도전받을 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은 자기방어 담론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 담론을 통해 백인은 스스로를 부당한 대우와 혹평, 비난, 공격에 시달리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이는 발화자를 도덕적으로 우월한 사람으로 설정하는 동시에 발화자의 사회적 위치가 갖는 진짜 권력을 가리는 기능을 한다. 또한 사회적 권력을 덜 가진 사람들의 불편함을 비난하고 그런 불편함을 위험한 것으로 그릇되게 묘사한다." "백인은 스스로를 반인종주의적 노력의 희생자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자신은 백인성의 수혜자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백인은 자신이야말로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주장함으로써─백인의 위치가 도전받는다는 이유로, 또는 유색인의 시각과 경험에 귀 기울일 것을 백인에게 기대한다는 이유로─이런 대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시간과 관심 같은)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다."(193)


"분명히 말해두겠다. 인종 위치에 대한 도전을 견디는 백인의 역량이 부족하긴 하지만─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취약하긴 하지만─우리의 반응의 영향은 전혀 취약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제도적 권력과 통제력을 활용하는 까닭에 매우 강력한다. 우리는 도전받는 순간에 우리 위치를 보호하기에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이 권력과 통제력을 행사한다." "또 분명히 말해두건대 '백인의 취약성'은 아주 구체적인 백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다. 백인의 취약성은 단순히 방어적 태도를 보이거나 우는소리를 하는 정도를 훌쩍 넘어선다. 이것은 '지배의 사회학'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인의 취약성은 백인의 우월의식과 이 우월의식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법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과정의 결과다. 이 용어는 불만을 토로하는 집단이나 그 밖에 다른 까다로운 집단에는 '적용되지 않는다'(예컨대 '학생의 취약성'은 성립하지 않는다)."(197-8)


제9장 행동으로 나타나는 백인의 취약성


# 백인의 취약성의 기능

1. 백인 연대를 유지한다.

2. 자기반성을 차단한다.

3. 인종주의의 현실을 대수롭지 않아 보이게 한다.

4. 토론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

5. 백인을 피해자로 설정한다.

6. 대화를 장악한다.

7. 편협한 세계관을 보호한다.

8. 인종을 논외로 한다.

9. 백인 특권을 보호한다.

10.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초점을 맞춘다.

11. 백인을 위해 더 많은 자원을 모은다.


제10장 백인의 취약성과 관여의 규칙


"서구 사회에서 자라는 백인은 백인 우월주의적 세계관에 길들여진다. 그 세계관이 우리 사회와 제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에게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말했든 말든, 당신이 다닌 교외 백인 학교의 복도에 다양성의 가치를 칭송하는 포스터가 걸려 있었든 말든, 당신이 외국 여행을 했든 말든, 당신의 직장이나 가정에 유색인이 있든 없든, 어디서나 우리를 사회화하는 백인 우월주의의 힘을 피할 수는 없다. 의도나 의식, 동의와 거의 또는 전혀 무관한 메시지들이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유포된다. 이 점을 이해하고서 대화를 시작하면 백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우리의 인종주의가 드러나는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드러나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우리에게 인종주의적 패턴이 없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려 애쓰는 일보다 우리의 인종주의적 패턴을 멈추는 일을 훨씬 더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인종주의적 패턴을 가지고 있고, 유색인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224-5)


제11장 백인 여성의 눈물


"인종 간 교류에서 백인 여성의 눈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몇 가지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예컨대 백인 여성의 고통 때문에 흑인 남성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으며, 우리 백인 여성은 이 역사를 동반한다. 우리의 눈물은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이 역사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백인이 이 역사에 무지하거나 둔감하다는 사실은 백인의 중심성과 개인주의, 인종적 겸손의 부족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증거다. 인종 간 교류에서 선의를 가진 백인 여성의 눈물은 겉보기에 무해하기 때문에 백인의 취약성의 더 유해한 형태들 중 하나다. 이런 교류에서 우리가 우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의 인종주의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는 이유로 울 수도 있다. 무의식적인 백인 인종주의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피드백을 도덕적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기분 나빠한다."(229-30)


"백인이 죄책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일종의 방종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백인 여성이 인종주의의 어떤 측면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고 나면 모두의 관심이 즉시 그녀에게로 쏠린다. 인종주의를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할 워크숍 참석자들 전원의 시간과 에너지, 관심이 그녀에게로 향한다. 그녀가 관심을 받는 동안 유색인들은 또다시 관심에서 밀려나고 그리고/또는 비난을 받는다." "반인종주의 전략가 겸 워크숍 진행자인 레이건 프라이스는 비판적 인종 학자 킴벌리 크렌쇼의 저술에 쓰인 비유를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응급처치 요원들이 교통사고 현장에서 보행자를 친 운전자를 위로하러 달려가고 그동안 보행자는 피를 흘리며 거리에 누워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이렇듯 백인은 흔하지만 매우 전복적인 방식으로 인종주의의 관건을 백인의 고뇌, 백인의 고통, 백인의 피해자화化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232-4)


제12장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백인이 내게 인종주의와 백인의 취약성과 관련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을 때, 나는 먼저 이렇게 되묻는다. 〈어떻게 당신은 교양 있는 전문직 성인이면서도 인종주의와 관련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를 수 있죠?〉 이것은 솔직한 질문이다. 주변 어디에나 정보가 있는 마당에 우리는 대체 어떻게 모르는 걸까? 유색인이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에게 말했는데도 말이다." "나의 마지막 조언은 이렇다. 〈당신 스스로 주도해서 찾으세요.〉 백인성의 길들임─인종주의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인종주의를 저지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는 길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백인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훌륭한 조언이 너무나 많다. 유색인이 쓴 조언서도 있고 백인이 쓴 조언서도 있다. 그런 조언을 찾아라. 백인성의 무관심과 결별하고 당신이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246-7)


"차라리 나는 '덜 하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종적으로 덜 억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유색인의 인종 현실에 열려 있고 관심을 보이고 공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다른 인종과 진실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다양하게 맺을 수 있고, 내게 인종주의적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인종주의적 패턴에 방어적 태도를 보이기보다 그것을 개선하기 위해 더 분명하게 확인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 덜 하얀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백인의 침묵과 연대를 깨고, 인종주의로 인한 유색인의 고통보다 백인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행태를 멈추고, 죄책감을 넘어 행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덜 억압적인 패턴은 수동적이지 않고 적극적이다. 궁극적으로 나는 유색인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해방과 정의감을 위해 백인 정체성을 덜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256-7)


"어느 유색인으로부터 내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피드백을 받을 때, 나는 다른 유색인에게 가서 내가 좋은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 행동은 내가 부당한 공격을 받았다는 데 동의하도록 그 유색인을 압박하여 다른 유색인이 아닌 나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형평성 상담가 데번 알렉산더는 유색인을 압박하는 가장 유해한 형태라고 할 만한 것을 내게 알려주었다. 바로 인종주의를 부인하고 방어하는 백인의 태도에 순응하고 백인의 취약성과 결탁할 수 있도록 유색인에게 자신의 인종 경험을 축소하라고 압박하는 형태다. 달리 말하면, 우리 백인이 유색인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그 고통을 우리와 공유하지 말라고 압박하는 형태다. 이 순응 요구에 따라야 하는 유색인은 매우 부당한 비진실성과 침묵을 견뎌야 한다." "결국 백인의 인종주의에 도전하지 않는 것은 곧 인종 질서와 그 질서 내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지탱하는 것이다."(261-2)


※ '인종'을 '젠더'로 변환해서 현재 한국사회를 고찰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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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세기말 빈 - 합스부르크 제국의 마지막 나날과 <논리철학논고>의 탄생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지음, 석기용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문제와 방법에 관하여


"우리가 다루려는 주제는 네 겹으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과 그 책의 의미, 한 인간과 그의 사상, 한 문화와 그 문화의 주요 관심사, 한 사회와 그 사회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그 사회란 로베르토 무질이 자신의 소설 《특성없는 남자》 1권에서 매우 감각적인 냉소를 담아 포착해 낸 바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25년에서 30년 사이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던 빈 사회를 일컫는다. 그 문화란 아직 유아기에 있거나 언뜻 그렇게 보이는 20세기 문화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아돌프 로스, 오스카어 코코슈카, 그리고 에른스트 마흐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1900년대 초반의 '모더니즘' 문화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빈의 으뜸가는 철강 부호이자 예술 후원자의 막내로 태어나 넥타이와 가족의 재산을 벗어 던지고 톨스토이적인 검소함과 금욕의 삶을 택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끝으로 그 책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이다."(14-5)


"학술적인 기준으로 볼 때 우리의 목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주제를 제각기 나머지 주제들을 숙고하고 연구하는 거울로 활용하고자 한다. 우리의 생각이 옳다면 합스부르크 제국의 쇠퇴와 몰락 과정에서 드러난 핵심적인 취약성들은 그곳 시민들의 생활과 경험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고, 그리하여 그것은 가장 추상적인 분야까지 포함하여 당시의 사상계 및 문화계 전역에서 활동하던 예술가와 작가들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관심사들을 형성하고 조건 짓게 되었다. 그 결과 카카니아─(합스부르크) '제국과 황실' 그리고 '똥의 나라'라는 이중의 뜻을 지닌 표현─적인 환경의 문화적 산물들은 그것들이 창작된 사회, 정치 및 윤리적 맥락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조명해 줄 수 있는 어떤 전형적인 특징들을 공유하게 되었다. 앞으로 주장하겠지만, 바로 그런 특징들이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가장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15)


"우리가 《논고》의 출판을 철두철미하게 철학적 논리학의 역사상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건으로만 간주한다면, 그 책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통째로 불가사의한 것으로 남고 만다. 분명히 논리학, 언어 이론, 그리고 수리철학 내지 자연과학의 철학에만 전력투구하는 듯이 보이는 70여 쪽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다섯 쪽의 결말 부분(명제 6.4 이후)에 느닷없이 마주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유아론, 죽음, 그리고 '세계의 바깥에 놓여 있어야만' 하는 '세계의 의미'에 관한 독단적인 논제들과 연달아 부딪히게 된다. 논리철학적인 예비 작업과 막판에 등장한 이들 도덕 신학적인 금언들에 각각 할당된 지면이 완벽한 불균형을 이루는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유혹은, 그 마지막 명제들을 그저 부수 의견이라 치부하고 마치 어떤 법정 판결의 말미에 겉치레로 제기되는 건성의 추가 조항인 양, 그냥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었다."(30)


"그러나 우리가 케임브리지에서 오스트리아로 지역을 옮겨 그곳에서는 《논고》가 흔히 윤리적인 논문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앞서 제기한 의문은 그야말로 생생한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과 가장 친했던 오스트리아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문제를 놓고 고심할 때, 그 문제는 언제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키르케고르의 모습을 곧장 떠올렸다.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눈에 《논고》는 단지 윤리에 관한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이었다. 《논고》는 윤리의 본성을 보여준shown 윤리적인 행위deed였던 것이다." "엥겔만은 다른 모든 종류의 지적인 토대로부터 윤리학을 떼어 내고자 하는 시도가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사유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윤리학은 '말없는 신념'의 문제이고, 확실히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관심사는 바로 그 근본적인 개념에서 나온다고 본 것이다."(30-1)


2 역설의 도시, 합스부르크 빈


"구舊 빈의 온갖 이중성과 역설 중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수백 년 동안 합스부르크의 수도였던 이 도시가 '통상적인 이름조차 없던' 한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이다! 항상 그렇듯 무질이 최고의 해설을 제공한다.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에게 그 나라는 제국-황실이자 제국과 황실이었다.  (···) 국가 제도상으로는 자유주의 국가였지만, 그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다. 통치 체계는 관료적이었지만, 삶에 대한 일반 대중의 태도는 자유주의적이었다.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이 시민은 아니었다. 부여된 자유를 매우 엄격하게 행사하는 의회가 존재하지만, 정작 의회의 문은 대개 닫혀 있었다. 하지만 '긴급 공권력 사용 법안'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그 법안을 이용하면 의회 없이도 일처리가 기능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절대주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순간마다 군주는 이제는 다시 의회 정치로 복귀해야만 할 때라고 선포했다.〉"(50-1)


"누구든 19세기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연구하고 나면, 역사를 이해하는 한 가지 설명 양식인 헤겔주의 변증법의 매력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합스부르크의 역사는 특정한 한 상황이 그 반대의 상황을 낳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라틴어 대신 독일어를 도입함으로써 제국의 행정에 효율을 기하려는 노력은 그 반작용으로 헝가리와 체코의 문화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은 뒤이어 그 민족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였다. 슬라브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는 차례로 독일 민족의 정치·경제적 민족주의를 낳았고 그것이 이번에는 다시 반유대 정책을 낳았으며, 그에 따른 유대 민족의 당연한 반응으로 시온주의가 등장하였다. 얼핏 보아도 이 정도면 머리에 현기증이 나기에 충분하다.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Hausmacht 이념─합스부르크 왕가는 하느님이 부리는 지상의 도구라는 생각─은 군부와 국가 재정에 관한 황제의 절대적인 통제권에 집중되어 있었다."(56)


"빈 부르주아 사회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해 줄 어떤 단일한 요인을 추려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빚어진 자유주의의 실패이다. 아마도 합스부르크 군주국에서 자유주의가 사산아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은 합스부르크가 자도바 전투에서 완패한 후 비스마르크의 처분에 따라 그저 우연히 권력을 쥐게 되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그 기반이 너무나 미약했으므로, 1890년대에 이르자 모든 힘이 바닥났고, 빈 정계를 지배하고 나선 신흥 대중정당들의 약진에 밀려나고 말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하게 구질서의 일부가 되지 못했던 중산층에게, 탐미주의는 사무에 절어 사는 그들이 삶에 유일한 대안이 되었다." "따라서 세기의 전환기에 빈의 탐미주의와 대중적인 정치 운동은 자유주의의 쌍둥이 고아로서 나란히, 그러나 각기 독립적으로 등장하였다."(70-1)


"빈의 이력에서 아마도 가장 기이한 역설은 나치의 '최종 해결책'과 시온주의자들의 유대 국가 정책이 모두 그곳에서 생겨났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헤르츨의 시온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흥미로운 유형의 반유대주의의 소산이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바로 그 유대교로부터의 탈출이 실패함으로써 빚어진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헤르츨의 유대 국가 창도의 직접적 발단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가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를 관람하고 얻은 '경험'이다. 그 오페라가 상연되는 동안 비합리적인 민중 정치학의 진리는 섬광 같은 직관으로 그에게 선명히 다가왔다. 유일한 해답은 유대인이 손님이나 침입자 신세가 아니라 그야말로 진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에 있었다. 헤르츨에게 그 일은 바그너의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을 예술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으로 번안하는 작업에 해당했다."(87-91)


3 카를 크라우스와 빈의 마지막 나날


"《나의 투쟁》의 저자에게 빈이 '가장 고되지만 빈틈없는 학습장'이었던 것처럼, 바로 그렇게 카를 크라우스에게 빈은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크라우스는 빈을 휘젓고 있는 비인간화의 힘을 슈니츨러나 무질보다 좀더 예리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는 달리 단지 증세를 진단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목숨을 건 수술만이 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의 히브리인들처럼 빈 사람들은 정도를 벗어나 방황하고 있었고, 크라우스는 그들의 독선을 질책하기 위해 보내진 예레미야였다. '빈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빈적인' 이 예지자의 무기는 논쟁과 풍자였다. 빈 사람들에게 예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으며, 그중에서도 문학, 연극, 음악이 특히 그러했는데, 이런 주제들에 대한 빈 사람들의 취향은 (크라우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되어 있던 도덕적 이중성을 반영하고 있었다."(102)


"여성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개념은, 그가 존경과 거부를 동시에 표명했던 오토 바이닝거의 작업과 나란히 대비해 가면서 이해해야 한다." "바이닝거에게 '남성의 관념'은 완벽한 합리성과 창조성이다. 반면 남성과 정반대인 '여성의 관념'은 성적 희열을 희구하는, 원리상 충족될 수 없는 매우 음탕한 충동이다. 여성성의 본질은 '대모신magna mater'의 고대 신화 속에 표현되어 있다. 대모신은 우주적인 미완의 생식력을 뜻하며,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비합리성과 혼돈의 원천이다. 여성의 성기가 신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처럼, 그 성적인 관념도 여성의 영혼을 구성하는 자체 가동의 사유이다." "바이닝거는 인간의 역사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성과는 남성적 원리 때문에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모든 예술과 문학과 법률 제도 등은 이러한 남성적 원리에서 샘솟은 것이다. '불멸의 여성성'은 우리를 진보와 발전으로 이끌기는커녕 역사상에 나타난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모든 사건과 경향에 책임이 있다."(109-11)


"한편, 여성에 대한 크라우스의 생각은 (바이닝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달라고의 생각과 비슷하다. 여성의 감정상의 본질은 음탕하지도 않고 무정부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오히려 부드러운 환상에 가까우며, 인간의 경험에 내재해 있는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의 무의식적인 기원으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거기에 모든 영감과 창조성의 원천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성 그 자체는 단지 하나의 테크닉에 지나지 않으며, 남성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보는 여성해방주의자의 그림 자체는 바이닝거의 견해만큼이나 왜곡된 것이며, 바로 문명의 기원을 근절시켜 버리려는 시도인 것이다." "크라우스에게 남자와 여자의 조우는, 이성이 환상의 수원水原에서 풍요를 공급받게 되는 '기원'이다. 이런 조우의 산물이 바로 예술적 창조성과 도덕적 고결성이며, 그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113-5)


"프로이트가 생각하는 무의식은 크라우스가 생각하는 개념과 정확히 반대된다. 프로이트의 이드는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인 충동들이 뒤섞여 들끓는 덩어리로서, 이성이 기껏해야 견제 정도밖에 할 수 없는 대상이다. 미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는 욕구불만의 소산이며 그러한 충동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었다. 크라우스에게 이런 식의 설명은, 개인과 사회가 가진 건전한 모든 것들의 원천인 창조적 환상과의 연관성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새로운 신화는 그것이 바꾸어 놓고자 한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고, 그 신화 자체가 그것이 치유하고자 했던 질병의 또 한번의 발병인─〈정신분석학은 그것이 정신질환의 치료법이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정신질환이다.〉─셈이었다. 사실상 정신분석학은 빈의 중산층을 괴롭힌 정신적인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라기보다 그런 문제들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117)


"카를 크라우스의 삶과 저술을 하나로 통합하는 핵심적인 개념은 사실적 담화의 영역과 문예의 영역 사이의 '창조적 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성격이나 품행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좋은 발상의 효력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사람만이 교조주의자가 될 여지가 있다. 그것은 크라우스의 견해와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크라우스는 이성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고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그의 논쟁이 지니는 인격적 본성의 근거를 형성하는 것이다.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은 그런 발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표현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자신들의 논점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효과만을 추구하는 작가들을 향했을 뿐, 시인 게오르크 트라클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같은 탁월한 표현파 예술가에게까지 확장되지는 않았다. 고결한 인간들, 인품을 갖춘 탁월한 작가들은 어떤 사조에도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137)


"말을 능숙하게 조작하는 작가는 그 재능만큼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고결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한 인간과 그의 작품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한 작가의 사례가 바로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그는 독일어에는 적절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문예란을 독일에 도입한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하이네가 기법의 명수였다는 사실은 그의 사례를 더욱 비참한 것으로 만들었다. 크라우스의 견지에서 볼 때 기법은 이성과 계산의 산물이며, 따라서 언제나 수단에 그쳐야 한다. 그러나 하이네는 그런 기법 자체를 하나의 목적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다." "하이네가 예술 및 도덕의 담론과 사실의 담론을 구분하는 경계선을 분별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셈이었다. 크라우스는 그러한 '창조적 분리'의 실패는 사실적인 것의 위조로 이어지고, 결국은 미적이고 도덕적인 것의 타락이나 왜곡으로 귀결된다고 선언하였다."(137-9)


4 사회 비판과 예술 표현의 한계


"1890년대 중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던 회화 양식은 자연주의naturalism와 관학주의academicism 그림들이었다." "1897년에 구스타프 클림트는 열아홉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예술원을 자퇴한 후 '분리파'를 결성했다. 클림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23년 전에 프랑스의 인상파를 통해 점화된 예술의 혁명이 마침내 오스트리아에까지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는 것이 화가의 목표였던 시대는 지나갔다. 20세기는 그 시대만의 양식을 가져야만 한다. 따라서 그 운동의 구호는 〈시대는 그에 맞는 예술을, 예술은 그에 맞는 자유를〉이 되었다. 클림트가 이 운동에 제공한 것은, 그림이란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고착된 견해가 아니라 다만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향도의 정신이었다. 이러한 비교조적인 접근은 이들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자유에, 그리고 새로운 세기의 정신을 반영하게 될, 이른바 '새로운 예술'에 그야말로 본질적인 것이었다."(146-7)


"분리파 건축가와 설계자들은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열광적으로 수용하였으며, 훗날 철저한 가능성의 추구를 신조로 삼게 되는 사람들만이 이들에 필적하게 된다. 클림트의 장식 양식을 수용한 건축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오토 바그너였다. 한때 예술원에서 건축학 교수를 지낸 적이 있던 그는 1899년에 분리파에 합류하였다. 초창기에 바그너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을 설계하고 역사적인 양식을 옹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당대의 건축 설계의 원천이 다름 아닌 당대의 사회생활과 문화에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스텔 풍으로 채색된 부드러운 외관을 띤 그의 건물들은 곡선보다 직각을 강조했다. 말도 많던 카를 광장 지하철 역사를 설계할 때도, 곡면을 일부 채택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직각의 형태들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물의를 일으킨 우편저축은행 청사 역시 바그너의 기념비적인 상상력이 발휘된 건물이었다."(150)


"분리파 회원들은 그 사회의 기반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과격한 도전을 벌였지만, 예술을 삶에 좀더 밀착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은 결국 목표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그들의 탐미주의는 단지 치장에 관한 당대의 견해를 변화시키는 정도만 성공했을 뿐이다. 그들은 몇 가지 증상을 치유했지만, 질병 그 자체를 고치지는 못했다. '젊은 빈'의 경우도 그랬지만 분리파 회원들 역시 마땅히 그 사회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비롯된 그들의 모반 또한 그 사회의 기존의 여건 안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무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 빈'이 지닌 가치관의 피상성을 폭로하는 작업을 크라우스가 직접 떠맡았던 것처럼, 분리파에게 닥친 슬픈 현실, 즉 그들 역시 기성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는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아돌프 로스의 몫으로 남았다."(153)


"로스는 건축과 설계에 나타나는 모든 형태의 장식에 맞서 싸우는 전쟁을 선포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이 성서로까지 추앙한 논문 〈장식과 범죄〉에서, 로스는 실용적인 물건들에 덧씌운 모든 형태의 장식을 비난했다. 그는 당시 유럽 사람들이 실제로 몸에 문신을 새기고 있다는 사실에서, 동시대 사람들의 타락상을 읽어 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군주국 중산층의, 소위 '훌륭한 취향'은 그들이 세련된 야만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음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한발 더 나아가 로스는 정부가 응용 예술을 가르치는 예술원의 설립을 후원하면서부터 이중 군주국의 정치적 쇠락이 시작되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사물을 더는 실제 모습 그대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회만이 그토록 장식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좀더 건전한 앵글로색슨 세계에서는 용도가 우선이며, 장식은 그야말로 부차적인 치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단언했다."(153-4)


"빈 대학의 음악 교수인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에 따르면, 음악은 결코 '음악적 관념'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주제를 가지지 않는다. 〈주선율 또는 주선율들이야말로 음악 작품의 진정한 주제이다.〉 작곡이란 〈인간 유기체와 소리 현상을 모두 지배하는 어떤 기초적인 법칙들〉에 따라 주선율들을 명료화하는 것이다. 그런 법칙들 중에서 으뜸인 것은 주선율을 전개하고 변주할 때 적용하는 '화성 진행의 근본 법칙'이다. 그것은 작곡의 논리적 기반을 공급한다. 따라서 작곡가는 일종의 논리학자라고 볼 수 있으나, 그의 연산은 어떠한 상위 언어로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가 없다. 음악 자체의 바로 그러한 본성 때문에 작곡가가 만든 것을 말로 기술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음악 작품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고자 하는 사람은, 오로지 그 작품이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서 작품 안에 담겨 있는 선율의 화성구조를 미학적으로 분석할 때만 답을 발견할 수 있다."(166)


"쇤베르크는, 바그너가 지도 동기leitmotif를 사용함으로써 한슬리크가 음악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작곡의 논리'에 나름대로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한슬리크는 지도 동기를 불필요한 꾸밈이라며 무시해 버렸다.)" "그는 바그너가 무대 위의 연기와는 별개로 악보 내부로부터 오페라를 통합하려는 최초의 '의식적인'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음악에 위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쇤베르크는 바그너, 브루크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과 같은 작곡가들이 화성을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한슬리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한 측면은 그들이 효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한 것이었지만, 작곡의 구조는 마땅히 음악적인 것이어야 했다. 여기서 쇤베르크의 견해에 따르면, 이 질병의 진정한 치료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화성 이론뿐이었다. 한슬리크의 어휘를 빌자면, 수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로 '작곡의 논리'였다."(167-8)


"회화에서 코코슈카가 나타나기 위해 먼저 클림트가 있어야 했고, 건축에서 아돌프 로스가 있기 이전에 오토 바그너가 있었던 것처럼, 쇤베르크가 활동의 본거지로 삼았던 도시 빈에는 이번에도 역시 그러한 과도기적인 작곡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바로 구스타프 말러였다." "말러가 쇤베르크에게 남긴 유산은, 소리의 문제에 있어서 '진실성'이 '인습'보다 우위에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작곡가는 듣기 좋은 소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한다는 것이다. 쇤베르크는 그 생각을 충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미래의 작곡가들이 자기 자신을 가장 엄격한 훈련의 대상으로 삼을 때만 비로소 그 길을 열 수 있게 되리라고 주장했다. 말러에게는 자기표현과 자기 훈련이 모두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그의 비범한 일생의 역작들이 설명된다. 모든 진실한 음악의 경우가 다 그렇듯이, 그의 혁신적인 환상은 그의 음악적 관념들이 솟는 원천이었다."(171-3)


"〈세계는 오로지 우리의 감각들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에른스트 마흐는 주장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오로지 감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진다.〉 이어서 마흐는 물리학이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감각 자료들sense data을 연결하고 상호 관련시키는 일종의 속기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호프만슈탈에게 시의 목표는 자아와 세계 간의 통일성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바르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호프만슈탈이 보기에는 만일 마흐의 생각이 옳다면 분명히 시인은 자신의 시구 안에서 과학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실재reality'를 표현하게 되는 것 같았다. 과학자는 감각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다. 왜냐하면 과학자는 수학을 이용하는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그 감각들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인은 가능한 한 철저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자신의 감각을 직접 표현하고자 노력하는 존재인 것이다."(194-5)


"개념과 이미지는 진리의 주관성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 호프만슈탈이 마침내 정주하게 된 예술의 도구는 바로 종합예술이었다. 그것은 모든 분야의 예술을 하나로 통합하여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필적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즉 시와 극, 그리고 음악이 한데 어우러져 청중들에게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경험을 자아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로써 호프만슈탈은 미적으로 완벽한 그림들을 통해 세계를 포착해 내려는 시도를 접은 대신, 마땅히 추구해야 할 삶의 현실적 경험을 전달하는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세계의 인상들을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과 도덕의 본질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지 생각의 교환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모시키는 데 목적을 둔 매체를 채택했다. 이 과제는 단지 글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으며, 아마도 오페라적인 풍유를 통해서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200)


"무질은 프라하 출신은 아니었지만 인간 심연의 그 무엇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언어적 무능력에 관한 우려를 역시 전쟁 이전부터 릴케, 카프카와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관학교 시절을 다룬 자전적인 소설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그의 소설은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무질은 그런 학교들에 만연되어 있던 동성애 문제를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 문제는 소설의 핵심이 결코 아니었다. 소설은 퇴를레스가 학교 당국에 자신의 격렬한 감정을 설명해야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을 때 대단원에 도달한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언어는 가장 진실한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주관성의 심연 속에 영원히 내밀한 것으로 남게 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무질의 인생과 저술 양쪽에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문제였다."(202-3)


5 언어, 윤리, 그리고 표상


"19세기 후반까지 언어철학의 문제들은 근본적으로 이차적인 문제로 남아 있었다. 긴 안목으로 보자면, 이러한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마누엘 칸트였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되고, 뒤이은 백 년의 세월 동안 그의 '비판' 계획에 담긴 여러 함축들은 점차 독일의 철학계와 자연과학계를 지배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결과적으로 언어의 문제들이 철학의 큰 그림에서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모든 철학적 인식론이 최우선적으로 다룬 논제는 '감각지각'과 '사유'였다. 그것들은 최우선적이고 독립적인 경험의 요소들로 간주되었고, 반면 언어는 그렇게 형성된 지식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부차적인 도구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칸트가 지식에 '구조'를 부여하는 '판단 형식'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지금까지 언어와 문법에 부수적인 역할만이 할당되어 온 것에 대한 암묵적인 이의 제기였던 것이다."(208-9)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판단의 논리적 혹은 언어적 형식은 진정한 '경험'의 형식이기도 했다. 지식은 단지 형식 없는 전前개념적인 감각 입력, 즉 인상들의 개념적 해석에만 관련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경험은 그 자체로 인식적인 구조와 더불어 나타난다. 그 구조는 오로지 판단 형식들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으며, 그러한 형식들 자체는 오로지 논리적 문법의 표준 형식들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처럼 지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날것 그대로의 감각 인상raw sense impression에서 시작하는 대신, 이제 우리는 경험의 기본 자료란 구조화된 감각적 '표상들Vorstellungen'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언어와 사유의 공통 형식들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의 감각 경험, 즉 표상들에 끼워 넣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이성의 한계 혹은 범위는 또한 암묵적으로는 표상과 언어의 한계 혹은 범위이기도 하였다."(209)


"마우트너의 유명론적인 '언어비판'을 직접적으로 자극한 것은 그의 주변에서 민중Volk, 정신Geist 등과 같은 어마어마한 추상적 어휘들을 사용해 가며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인 주술을 목격하게 된 데 따른 반발심이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좀더 단순하고 구체적인 어휘들을 이용해 추상적인 어휘들을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문제에 관한 러셀의 견해는, 부분적으로 그가 사회주의에 대해 가진 초창기 관심과 '국가'와 같은 거창한 정치적 추상체들에 대해 가졌던 의구심에서 자극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엄격한 유명론을 견지한 마우트너에게 '개념'은 '개체'의 묶음을 명명하거나 기술하기 위해 채택된 단어들일 뿐이다. 따라서 일반명사는 진정한 '존재자entity'의 이름이 아니라 개체들의 집합의 이름, 혹은 기술description이다. 마우트너는 개념이란 어휘나 말과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결국 개념은 사유와 동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210)


"마우트너를 무엇보다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추상명사나 일반명사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일반인들의 경향이었다. 그는 추상체를 구상화하고자 하는 이러한 자연스러운 경향이야말로 사변적인 혼란의 원천일 뿐 아니라, 세계 내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불의와 사악함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과학에서는 힘, 자연의 법칙, 물질, 원자, 에너지 등과 같은 오도된 개념들이 그런 종류의 것들에 해당한다. 철학에서는 실체, 대상, 절대자라는 개념이, 종교 사상에서는 신, 악마, 그리고 자연법이라는 개념이, 정치와 사회 분야에서는 인종, 문화, 언어 등의 개념과 더불어 그것들의 순수성이나 모독에 대한 강박관념이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구상화는 '형이상학적인' 것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그래서 마우트너는 형이상학과 독단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며 또한 불관용과 불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211-2)


"언어는, 사람들이 '행위'할 때 그들 사이의 매개자가 된다는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사람들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할 때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대양이 대륙을 갈라놓으면서도 동시에 합쳐 놓듯이, 언어 또한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인 동시에 장애물인 것이다. 〈언어는 고독한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오로지 인간들 사이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 두 사람이 그 낱말들로 동일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은유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말 그대로 언어는 그 본성상 애매한 것이다. 그 누구도 자기가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말은 부단한 생성의 과정 속에 있다.〉 언어뿐 아니라 문화 전체도 또한 지속적인 변화의 상태에 있다. 어떤 것도 그대로 있지 않다."(219)


"언어비판이 향해 가는 종착점은 메테를링크의 신성한 침묵이다. 이른바 〈우리가 진정으로 말해야 할 것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침묵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한 가치를 가진다. 이것이 마우트너가 따라간 길의 종착점이다. 그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에크하르트와 쿠사누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만일 어떤 지적인 독자가 회의주의적 개념, 이른바 실재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한 통찰이 단지 여러 가지 부정적 진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국은 긍정할 수밖에 없을 때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지식이다. 철학은 인식론이다. 인식론은 언어비판이다. 그러나 언어비판은 자유로운 사유를 위한 노동이다. 인간은 일상의 언어를 활용하든 철학적인 언어를 활용하든 세계에 대한 은유적인 기술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225)


"에른스트 마흐만큼 자신이 속한 문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모든 지식을 감각으로 환원시키는 마흐의 견해는 그의 모든 사유의 근거가 되는 토대를 형성한다. 모든 과학적 노력의 과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감각 자료를 기술하는 것이다. 실제로 마흐는 감각 자료를 좀더 중립적이고 어물쩍한 어휘인 '원소element'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단순성 혹은 경제성의 측면을 잘 드러낸다. 그러므로 마흐의 관점은 철저한 현상론자의 관점이다. 세계는 감관에 나타나는 것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꿈은 다른 어떤 원소들의 집합과도 다를 바 없이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가 된다. 왜냐하면 '외적' 경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내적' 경험도 경험이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개념, 관념, 표상도 모두 '원소들'의 집합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 주는 종적 개념과 같은 것으로 간주되어, 마찬가지로 감각 자료로 환원된다."(227-9)


"마흐는 물리 이론이란 경험을 단순화하는 감각 자료의 기술들이며, 과학자는 그것을 통해 앞날의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수학의 기능은 그 자체가 지닌 조직화의 힘을 통해 감관이 지각한 것을 단순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이론에 대해서는 그것이 더 유용하다거나 덜 유용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은 참이라거나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이론의 본성이란 감각들을 판단한다기보다 그것들을 기술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 형이상학적인 요소들은 과학의 본질적 특성, 즉 경제성을 거스른다. 뉴턴 물리학에서 나타나는 '절대' 공간, 시간, 그리고 운동이라는 개념은 그저 불필요할 뿐이다. 〈이 절대 시간은 그 어떤 운동과의 비교를 통해서도 측량될 수 없다. 그것은 따라서 실천적인 가치도, 과학적인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것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정당하게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무익한 형이상학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232-3)


"대개 20세기의 과학은 마흐의 '기술記述'보다는 헤르츠의 '모델'을 더 선호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마흐의 실증주의가 미친 영향은, 예를 들면 '관찰 가능한 것'의 우선성에 관한 양자 물리학자들의 논증들(예를 들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논증들) 속에 여전히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러한 불편한 관계가 플랑크에게는 곧 과학 공동체로부터의 도편추방의 시대를 의미했다. 자신의 작업이 헤르츠와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인정한 볼츠만은, 마흐와 오스트발트를 비롯해 그들의 추종자들이 쏟아붓는 가혹한 비판을 견딜 수 없었다." "1906년경 형이상학에 맞서던 그간의 투쟁은 생기를 잃은 채 독단적인 경험론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모든 가설적 구조들은 금기로 여겨지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의 과학계에서 이런 태도가 대체로 사라지고 없다면, 그것은 헤르츠의 후계자들 덕분이다."(246)


# 헤르츠의 모델 : 수학적인 공식이 물리학의 모든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골격을 제공하고 물리적인 실재에 논리적인 구조를 부여한다는 사실, 그런 구조나 모델의 구성 요소들이 지각으로부터 도출될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관찰된 사건들의 가능한 배열들에 대응한다는 관점


"(어떤 이론적 표상의 영역을 그 내부로부터 보여주는) 헤르츠의 방법은 특정한 표상 체계 바깥에 존재하는 더 일반적인 원리들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당 이론에서 의미 있게 표상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의 총합을 규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칸트의 비판 계획이 가지는 본격적인 철학적 위력을 인정할 줄 아는 교육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야말로 헤르츠를 선호하게 된 중요한 요점이었다. 왜냐하면 칸트의 주요한 야심 가운데 한 가지 역시, 외재적인 형이상학적 가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은 채 '이성'의 전반적인 한계 영역을 그 내부에서부터 보여 주는 방식으로 구획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칸트는 (합리적으로 말해서) 형이상학의 의문들이란 그렇게 구획된 이성의 경계선상에 걸쳐 있거나 그것을 넘어서 있기 때문에, 결국 형이상학은 '알 수 없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꼴이라는 사실을, 그냥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247-8)


"'이성의 한계' 이론을 좀더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계Schranken와 한계Grenzen에 대해 칸트가 행한 구분을 주목해야 한다. 칸트는 〈(연장된 존재들 내에서) 경계란 언제나 어떤 한정된 장소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곳을 에워싸고 있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다. 반면에 〈한계는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양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지 않는 한에서 그 양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不定的 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인간의 이성은 경계가 아니라 한계를 수용한다. 즉 이성은 실제로 무언가가 이성과 상관없이 존재하며 이성이 결코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음은 수용하지만, 어떤 시점에 이르면 이성이 자신의 내적인 진보에서 완결을 보게 되리라는 주장은 수용하지 않는다.〉" "수학과 물리학이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의 수는 경계 지어져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견은 현상으로 한계 지어져 있다."(251)


"쇼펜하우어 자신이 칸트주의적인 견해를 넘어섰다고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요점이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순수한 사변적 이성의 영역을 '표상Vorstellung으로서의 세계'로 변환시킨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객체o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전前칸트주의적인 독단론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주체subject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즉각 피히테 식의 관념론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지각의 심적 이미지로서의 표상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표상은 그것으로부터 도출되는 추상적인 개념들, 이른바 종種, 혹은 집합 개념의 표상이나 예술의 대상인 플라톤적인 이데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주체를 세계 내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계가 존재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본 것이다." "객체는 오로지 그것들이 알려지는 한에서만 존재하며, 주체는 오로지 인식자인 한에서만 존재한다."(258-60)


"칸트와는 달리 쇼펜하우어는 도덕성의 기반이 순수한 선험적 개념이 아니라 경험적인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실재하며, 오로지 경험적인 것만이 의지를 움직일 수 있다. 선험적이고 개념적인 어떤 것이 의지를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의지가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자극받아 작용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강력한 논증을 통해 합리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그리고 결과적으로 덕스러운 것이 완전히 합치한다는 칸트의 생각을 혹평한다. 쇼펜하우어에게 합리성은 윤리적으로는 중립적인 의미를 띠며, 따라서 덕스러운 것도 사악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인간이 훨씬 더 다양한 유형의 행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능력을 뜻할 뿐이다. 즉 추상적인 개념을 이용해 주변 환경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사유 능력의 결과, '인간은 자유롭다'고 이야기된다."(262-3)


"칸트적인 사유에 남아 있는 스콜라주의의 잔재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공격은 도덕성을 감정과 의도에 직접 의존하게 만드는 수순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칸트가 구분하기는 했지만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었던 사실과 가치의 영역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는 더욱 확고하게 분리되었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사상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다리를 놓을 수도 없을 정도로 깊은 골이 된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타인의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는 인간만이 진정으로 도덕적이다. 반대로 키르케고르는 진정한 도덕성은 비사회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도덕성은 사람들 각자가 신과 직접적으로 맺고 있는 절대적인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적인 인간의 목적은 '부조리 속으로의 도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의 도약을 통해 유한한 인격체는 자기 자신을 무한한 자에게 전적으로 위탁하게 된다. 이런 관계 하에서라면 친구나 동료 인간은 불필요한 타자가 되는 것이다."(265-6)


"개인이 오직 하나뿐인 책임의 담지자이며, 종교와 도덕적 경험의 오직 하나뿐인 주체이다. 이런 개인이 질식할 것만 같은 군중 속에서 길을 잃었으며,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암울한 상황에 주목하게끔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보았다. 케리케고르는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사회에 맞서 방대한 논쟁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논쟁이 그가 말한, 소위 간접적 의사소통의 본질적인 요소를 형성하였다." "간접적 의사소통, 혹은 '반성의 수단으로서의 의사소통'은 소크라테스의 양식에 의거한 지적이고 도덕적인 산파술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앎의 문턱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스스로 그 문턱을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다." "사변은 '객관적인 진리'에 관심이 있지만, 기독교는 주관적인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주관적인 진리라는 개념은 키르케고르의 모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다."(268-70)


"19세기 말에 그러한 결론을 가지고 일반적인 대중 독자층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사람이 바로 소설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였다. 그의 작품과 키르케고르의 저술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그들의 개념과 '간접적 담화'와 '삶의 의미'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는 분명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톨스토이는 도덕성이란 본질적으로 감정에 근거하며, 예술을 '감정의 언어'라고 보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말은 이성적 사유의 매개체였다. 따라서 톨스토이에게 예술은 도덕적 교훈을 널리 퍼뜨리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매개체였다. 그러나 도덕적 삶에 관한 톨스토이의 견해를 자세히 보면,그는 키르케고르보다는 쇼펜하우어와 일치하는 면이 더 많다. 톨스토이의 경우, 만일 도덕성이 사회적이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예술은 인간의 삶의 조건이며 인간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감정의 전도체이다."(272)


"칸트의 비판철학으로부터 톨스토이의 우화에 이르는 역사적인 연속성이 완전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지만, 그 안에는 쇼펜하우어가 착수하고 키르케고르가 완성한 어떤 논리적인 발전이 존재한다." "행위의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성의 한계를 구획하려는 시도로 시작한 이 작업은 가치의 영역에서 이성의 타당성에 대한 즉각적인 부인으로 결말을 맺었다. 그러므로 이성의 범위에 한계를 설정하려는 시도는 궁극적으로 가치, 도덕, 그리고 삶의 의미가 오로지 합리적인 사유의 경계선을 넘어서 있는 정서의 영역 안에서 간접적인 수단에 의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러한 발전 과정에 관계된 모든 사람은 사상가, 예술가, 그리고 사회비평가들로 이루어진 빈의 한 세대 전체에 자연스러운 매력을 발산하였다. 그 세대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가치관으로부터 아예 자신들의 계층 전체가 소외되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276-7)


"헤르츠와 볼프만은 물리과학의 논리적 명료화와 체계적 이론의 경험적 적용이 실제로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bildiche Darstellung을 제공하는지 보여 주었다. 여기서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어구는 마우트너가 의미했던 '은유적인 기술'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서, 이른바 수학적인 모델을 가리킨다. 그것은 제대로만 적용된다면 세계에 대한 참되고 확실한 지식을 산출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칸트의 근본적인 반형이상학적 요구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이른바 물리 이론에 담긴 언어의 한계를 전적으로 '그 내부로부터' 구획함으로써 그 임무를 수행해 왔다. 따라서 헤르츠와 볼츠만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적 견해에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다시 말해 그들의 도움으로 과학 이론의 기술적記述的인 언어가 어떻게 물리학의 사실적인 탐구에서 '표상적인' 용법을 획득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하나의 합당한 후속 단계(언어 비판)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279-80)


6 다시 생각해 본 《논리철학논고》


"앞선 장에서 우리는 당대 합스부르크 빈 사회의 교양을 갖춘 모든 사유하는 인간들에게 후기 칸트주의의 비판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보여 주었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우리는 1) 빈에서는 전반적인 철학적 '언어비판'의 필요성이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쓰기 15년 전쯤부터 대두되고 있었다는 사실과 2) 그러한 포괄적인 언어비판을 처음 시도했던 마우트너의 이론적 결함이 한 가지 해소되지 않는 매우 구체적인 난점을 남겼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헤르츠와 볼츠만의 물리학을 키르케고르와 톨스토이의 윤리학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을 단일하고도 일관된 설명 속에서 찾을 수만 있다면, 그러한 난점이 극복될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우리의 분석을 통해 도달한 가설은 매우 간단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몰두해 있는 문제이자 《논고》의 집필이 지향할 목표를 결정해 준 문제란, 바로 그 '일관된 설명'을 찾는 문제였다는 것이다."(284-5)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자체에 관한 글은 상대적으로 적게 읽었던 것 같다. 음악의 쇤베르크와 회화의 코코슈카처럼 그는 직업주의를 중시하지 않았고, 그저 무신경하게 자기 자신을 독학으로 공부한 철학자라고 생각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계속해서 그에게 감명을 준 몇 안 되는 철학 저술가 중 한 명은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였다. 18세기에 괴팅겐 대학교의 자연철학부 교수였던 리히텐베르크는 크라우스의 존경을 받았고 마흐에게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당시에 유행하였던 금언체 양식의 철학함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쇼펜하우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런 점에서 보면 《논고》에 담긴 금언들 역시 단지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일 뿐이다. 리히텐베르크는 이론물리학과 언어철학 양쪽에 모두 저술을 남겼는데, 실제로 그 기저에 깔린 정신은 (폰 브릭트가 말한 대로) '비트겐슈타인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보인다."(297)


"공학도 비트겐슈타인은 마우트너 같은 사람의 철학적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표상적인' 언어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최소한 물리학에서, 마우트너에게 은유적인 기술을 뜻했던 'bildiche Darstellung'이라는 표현을 헤르츠적인 의미로 극단적으로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통해 자연현상을 의미 있게 표상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물리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얘기하는 똑같은 원리들이 기계를 제작하는 데도 실제로 적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열렬한 헤르츠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역학에서 그림, 즉 '모델'의 형태로 공적 용법의 표상Darstellungen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역학이 물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분과로 간주될 수 있다는 확신은, 물리학자가 역학의 현상을 나름대로의 '모델'로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상에 부여하게 되는 수학적 구조의 귀결이었다."(302-3)


"더 나아가 그러한 표상은 그 자체의 수학적 형식에 의해 그 적용 범위가 대체로 결정된다는 측면에서 자기한계적self-limiting이라는 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최소한 한 분야의 언어는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역학의 언어로서,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다시 말해 세계의 '표상'을 수학적인 그림의 형태로 제공하기에 충분한 일의성과 올바른 구조를 갖춘 언어이다." "그래서 만일 누구든 그에 상응하는, 그러나 완벽하게 포괄적인 '언어의 수학'을 확립할 수만 있다면, 마흐나 마우트너처럼 역학적 개념의 심리적·역사적 발전을 연구하는 대신에, 헤르츠가 역학의 수학적 구조를 고려하여 역학을 철학적으로 안전한 기반 위에 올려놓고 결과적으로 역학 비판을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적인 언어의 본성과 한계를 '그 내부로부터' 설명해 줄 '언어비판'을 수행하는 일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303-4)


"비트겐슈타인이 자연스럽게 프레게와 러셀의 작업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었던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왜냐하면 러셀의 초기 저술들에 나타난 철학적인 기획은 일반화된 형태로 헤르츠 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시적으로 정의된 형식적 모델에 입각하여 명제들의 진정한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명제 계산법propositional calculus'에 도달하였다. 그로부터 귀결된 형식주의는 실제 세계의 '대상들'을 한데 묶어 '사실'로 만들어 내는 상응하는 구조들을 언어의 내부적인 구조가 어떻게 표상하는지 보일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므로 명제의 참된 논리적 형식은 종종 자연 언어의 오도된 문법적 외관에 가려져 있으며 그러한 참된 형식은 《수학 원리》에 담긴 논리적 기호들로 표현될 때 가장 잘 포착된다는 러셀의 주장은, 비트겐슈타인에게 근본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였다."(305)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명제들은 어떤 상황이나 대상들의 배열(더 일상적으로는 '사실fact'이라고 불리는)에 대해 우리가 구성한 표상들이다. 명제는 그러한 사실의 정확한 재현물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사실의 본질적인 측면, 다시 말해 이름들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들과 관계사들에 의해 표상되는 대상들 간의 논리적 관계들을 재현하는 것이다." "원리상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대상들에 관해, 그것들을 명명하고 그것들의 배열을 기술하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다. 이름 혹은 기호들 간의 확정적인 관계가 바로 명제의 뜻sense이다. 〈모델이 표상하는 것은 그것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델이 기호들에 관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이름 혹은 기호가 지칭하는bedeuten 대상들이 실제로 그렇게 배열되어 있다면, 그 명제는 참이고 그 모델은 옳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명제는 거짓이고 그 모델은 옳지 않다. 어느 경우든 〈한 모델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모델을 실재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310-1)


"따라서 두 가지 점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모델 이론에 본질적이다. 하나는 진리대응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언어 사용을 허용하고 정당화해 주기에 충분한 '동형성Verbindung'이 언어와 실재 사이에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언어의 논리적 구조는 우리가 대상들의 특정한 배열이 '가능하거나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끔 해 준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체계 안에서 '진리표truth table'가 수행하는 기능이다. 진리표는 어떤 모델이든 그 모델의 선험적인 진리 가능성들을 확립한다. 한 명제에 들어 있는 기호들에 가능한 모든 '진릿값truth value'이 부여되고 나면, 그중에서 어떤 것이 참인 가능성들인지 결정될 수 있고, 그 명제의 뜻, 다시 말해 그 기호들 간에 성립된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되는 관계가 무엇인지 주어질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어떤 한 모델이 논리적 공간에서 어떠한 상황을 나타내는〉 방식이다."(311)


"비트겐슈타인에게 결국 언어와 세계의 관계 그 자체는 다른 모든 비사실적인 숙고의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명제들은 모델화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를 기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명제는 동시에 자신이 실재를 어떻게 기술하는지를 기술할 수 없다. 그러지 않고 그것을 굳이 기술하려고 한다면,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 되어서 결국에는 무의미해지고 말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모델은, 모델이 말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 주었다. 모델은 사물들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방식을 모델화하였고, 따라서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모델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은 모델 그 자체의 본성으로 볼 때 분명한 것이다. 모델은 사실적이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감히 표상할 수 없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318-9)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이 착수한 문제는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는 일반적인 언어비판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논리학과 과학에는 일상적인 기술적 언어 안에서 수행하는 적절한 역할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수학적 모델에 어울리는 세계의 표상을 산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 가치, 그리고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질문들은 이 기술적 언어의 한계 바깥에 놓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간접적'이거나 시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일종의 신비적 통찰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첫째 부분은 헤르츠가 물리과학의 언어에서 모델과 표상에 대해 시도한 분석을 확장함으로써 성취되었고, 그는 이러한 확장을 위하여 프레게와 러셀의 명제 계산을 그 기본 골격으로 활용하였다. 그가 수행한 작업의 둘째 부분은 부정적인 방식 외에는 말로써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319-20)


"사실의 세계에 가치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의 밖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에 수수께끼란 없다. 세계의 의미는 사실적인 것의 바깥에 있다. 이러한 가치와 의미의 영역에는 명제도 없고 사실도 없다. 오로지 역설과 시가 존재할 뿐이다. 크라우스의 말처럼 〈해결책 없는 수수께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 오직 그 자가 예술가다.〉 논리학이 어떻게 세계를 표상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세계의 의미에 대한 의문이 함께 '신비로운 것'을 구성한다. 두 영역 모두, 명제들이 결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영역들이다. 따라서 '보여 줌'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세계와 논리가 맺는 관계,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과 세계의 뜻, 혹은 의미가 맺는 관계가 그것이다. 이런 측면을 명제들의 논리적 구조 내부로부터 보여 주는 일의 미덕은, 그럼으로써 사실의 영역과 가치의 영역이 과학적으로 단호히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이다."(324)


"이성과 환상을, 물리학자의 수학적 표상과 시인의 은유를, 직접적인 기술적 언어와 '간접적 의사소통'을 분리시킴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했다. 모델 이론은 어떻게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이론의 수학적(논리적) 기반은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그것들의 한계를 보여 주는지, 다시 말해 어떻게 명제들의 구조가 과학적(합리적) 탐구의 한계를 결정하는지 설명해 주었다. 모델 이론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삶의 의미'가 말해질 수 있는 것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삶의 의미'는 문제라기보다 수수께끼로 언급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해결하거나 답해야 할 질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델 이론은 삶의 의미가 이성의 범주들을 통해서는 논의될 수 없는 주제라는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확인한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삶의 의미는 더는 학문적인 질문이 아니었다."(331-2)


7 인간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후기 철학


"빈학파의 논리실증주의가 모양을 잡아 가고 있던 1920년대 중반의 매우 중요한 시기에, 그 학파에 관여한 철학자와 과학자들은 모두 비트겐슈타인과 《논고》의 권위를 깊이 존중하였다. 그렇지만 정작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방관자인 채로 남아 있었고, 점차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30년대 초에 이르자, 그는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그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간주하고 있는 생각과 주장들로부터 스스로 완전히 결별하고 말았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논고》에 담긴 은유들을 〈뚫고, 올라가, 넘어서서〉 마침내는 그것들을 '정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애초에 언어에 관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바로 그 난점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래의 난점들은 해결하지도 못하고 내버려 둔 채,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철학적 학설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한 《논고》의 논증을 전혀 새로운 주장의 원천으로 변모시키고 있었다."(361-2)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뉴턴 식의 역학이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이 우리에게 실제로 말해 주는 것은 이것이다. 즉, 그런 이론은 우리가 실제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 그대로 세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마흐가 흄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칸트의 역할을 맡은 셈이다. 비트겐슈타인은 흄에 대한 칸트의 반격을 재연하면서, 다만 인식론적이라기보다는 언어적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이용할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었던 '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라는 결정적인 착상은 미혹일 뿐이었다. 언어적인 영역과 세계 사이의 관계들, 이를테면 의미, 사용, 혹은 언어 사용에 수반되는 일종의 사용 설명서 같은 것들은 형식적 정의에 관한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단지 '터득해야' 하는 것일 뿐이다."(364-5)


"난파 중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치와 문화 속에서 자란 중부 유럽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이러한 철학적인 개혁은 신선한 공기를 쐬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대략 《논고》의 5분의 4는 굳이 명백한 오해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직설적이고 근엄한 실증주의적 표어들의 원천으로 사용될 수 있었다. 이들 젊은이들이 독해한 바대로, 그 책은 웅장하고 매우 전문적이었으며 외형상으로는 미신에 대한 최후의 탄핵 선고였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단 실증주의자로 낙인찍히고 나자, 사람들은 그에게서 다른 어떤 빛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가 1929년 이후로 철학에 복귀하여 이전과는 대조되는 두 번째 철학함의 국면으로 점차 접어들게 되었을 때에도 그의 새로운 방식은 실증주의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초기의 실증주의적 입장을 새롭고 심도 깊은 기반 위에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비추어졌다."(366-7)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사실 그 이전부터도 《논고》가 실증주의적이기는커녕 정확히 그 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를 바랐다. 빈의 실증주의자들이 '중요한' 것을 '검증 가능한' 것과 동치로 보고, 모든 검증 불가능한 명제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처리해 버렸을 때, 《논고》의 결론부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만이 홀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고 분명히 주장되었다(비록 소귀에 경 읽기인 셈이기는 했으나). 《논고》는,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로 포착해 내기에 부적절한 것들 안에서만 '더 높은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명제'로 '그릴' 수 있는 '사실'이란 우리의 도덕적 복종이나 미적 승인에 관한 그 어떤 본질적인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로 내뱉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비트겐슈타인이 택한 침묵은 실증주의자들의 것과 같은 조롱의 침묵이 아니라, 존경의 침묵이었다."(367-8)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은 더는 언어의 '형식적인 구조'에 있지 않았고 '명제'와 '사실' 사이에 상정되는 구조적인 유사성 같은 것에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를테면 물리학 내에서라면, 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그림적' 표상을 제공해야 할 특별한 이유들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명제들을 '사실의 그림들'로 간주해야 할 이유가 덜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것들 대신 행동으로서의 언어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는 상이한 표현들의 사용을 지배하는 실천적인 규칙들, 그러한 규칙들이 적용하는 언어게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런 언어게임들에 유의미성을 부여하는 더 폭넓은 차원의 삶의 형식들을 분석하는 데 몰두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초월적인' 문제의 핵심은 더는 언어적 표상의 형식적인 성격 안에 놓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것은 '인간의 자연사' 속의 한 요소가 되었다."(373)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더욱 심오한 문제들은, 심지어 수학에서조차, 수학적인 계산의 내적 정연함이 아니라 그런 계산이 외재적인 적절성을 획득하게 되는 규칙 순응적인 행동을 고려할 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특정한 발화의 '의미'는 바로 그 표현들이 관례적으로 사용되는 규칙 순응적이고 기호 사용적인 활동('언어게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차례로 그러한 기호 사용적인 활동들은 더욱 폭넓은 활동의 패턴들(즉 '삶의 형식들')로부터 그 유의미성을 이끌어 낸다. 삶의 형식은 그러한 활동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활동들은 삶의 형식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이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초월적인' 문제에 대한 최후의 해결책은, '삶의 형식'이 '언어게임'을 위한 합당한 맥락들을 창조하는 그 모든 다종다양한 방법들과, 그럼으로써 그 언어게임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경계를 어떻게 정하게 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 된다."(375)



8 직업주의와 문화: 현대 사조의 자살


"후기 합스부르크 빈이 (크라우스가 표현한 것처럼)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비트겐슈타인 세대의 지적인 청년들에게 그곳이 가혹한 시험대였던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이중 군주국, 합스부르크의 하우스마흐트, 이교도인 투르크족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하기 위해 300년 전에 형성된 이래 경쟁국인 오스만 제국에 인접한 상태로 조용히 화석화되어 온 포 계곡에서부터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는 길게 뻗은 엄청나게 넓게 펼쳐진 영토, 그리고 무엇보다도 1800년 이전에 프란츠 황제가 처음으로 이룩했고 메테르니히와 프란츠 요제프가 영구화한 중앙집권적 전제정권 등 모든 정치적 권위와 사회적 통제의 전체적인 친근한 발판들이 갑작스레 해체되어 버렸고, 이에 따라 빈 사람들은 사지가 잘려 나간 자신들의 공화국을 위해 1920년대의 유럽에서 자신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401-2)


"실용주의적인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침내 찾아온 사회 정치 운동의 건설적인 가능성들을 잘 이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제도와 사회적 관행을 건설하는 일에 착수한 그들은 더는 소외의 원인을 (특히 키르케고르적인 형태의 극단적인 소외의 원인을) 이전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생 오스트리아에서는 지성인들이 수행해야 할 적극적인 활동들이 많았다." "헌법의 뼈대를 갖추어야 했고, 의회를 세워야 했으며, 효과적인 사회민주주의 체계가 순조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합스부르크의 극단적 보수주의라는 사회 전반의 장애물은 마침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실용주의자들은, 지금은 미래를 지향하고 건설적인 일들을 찾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에게 마흐의 역사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실증주의는 그 형이상학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호소력을 지녔다."(403-4)


"실용주의적 태도를 가진 1920년의 사람들에게 《논고》에 담긴 언외言外의 요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인 도덕적 개인주의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쓸모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적을 놓고 볼 때, 그 책에서 중요하게 보인 것은 오로지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부분들, 이를테면 그 책에서 소개한 형식적인 기법들, '그림들'의 체계로서의 언어에 대한 이론적 모델, 진리표 그리기 방법뿐이었다."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는 실증주의와 실용적인 기술적 문제들을 지향하는 자연스러운 전환이 목격되었다. 삶, 사유, 예술의 모든 영역이 새로운 부흥을 요청했다. 중요한 것은, 활용 가능하고 효과적인 최신의 과학적 기법들을 건설과 개혁이 위대한 과업에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여기, 그야말로 이론과 지적 활동의 핵심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논리실증주의의 성서로서 얼토당토 않은 호소력을 발휘하게 되었다."(410)


"1920년대에 성취한 예전 취향과 인습으로부터의 해방은 자연과학과 여타의 지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예술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가히 폭발적이라 할 만한 기술적 혁신을 자극하였다. 예전의 합스부르크 영토와 독일과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낡은 독재 권력이 힘을 상실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시와 문학, 회화와 영화 제작, 음악과 건축 등의 분야들이 강렬한 기법상의 실험 단계로 돌입하였고, 그러는 동안 예술가와 작가들은 이전까지 향유해본 적이 없었고 또 그때 이후로도 (특히 러시아에서는) 향유하지 못하게 되는 고도의 자유를 만끽하였다. 당시는 모든 예술의 분양에서 새로운 시작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적 언어나 음악이나 회화가 과연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표상할 수나 있는 것인지에 관한 전쟁 이전의 모든 비판적 의심들은 파기되었다. 실증주의적 태도는 행동을 낳았다. 해야 할 일은 단지 주어진 과제를 제대로 진척시키는 것뿐이었다."(413)


"문화 할거주의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이제 예전의 낡고 진부한 정통적 관행들은 말끔히 잊혀졌다. 그러나 크라우스적인 '고결한 인간들'이 각기 스스로 판단해 선택한 매체와 절차를 통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창조적 환상을 펼쳐 갈 수 있는 문화적 민주주의가 그 빈자리를 차지하는 대신, 예술의 전문 직업화 또는 결국은 낡은 정통적 관행 대신에 새로운 정통적 관행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러한 새로운 직업적 정통성의 관행은 특별한 일련의 기법들을 통해 규정되었다. 이제 직업적으로 훌륭한 행동이란 자신이 특별한 스타일이나 방법을 숙달했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1890년대의 탐미주의는 약 30년이 지난 후의 매우 다른 환경에서, 그리고 매우 다른 인식론적 토대에서, 예술의 전문 직업화 속에 사회학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화가는 화가는 화가이고, 음악가는 음악가는 음악가이다.〉)"(415-6)


# A painter is a painter is a painter while a musician is a musician is a musician.


"음악에서건 건축에서건, 1914년 이전에 쇤베르크와 로스라는 '비판적' 세대가 수행한 기술적인 혁신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형식화되었고, 그럼으로써 결국에는 그들이 제거하고자 했던 지나치게 장식적인 양식만큼이나 인습적인 것이 되어 버린 강압적인 반장식적 양식의 기반이 되었다." "시와 문학, 회화와 조각, 그리고 심지어는 물리학과 순수수학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각 경우마다 이를테면 공리화, 혹은 도약률sprung rhythm, 조작주의, 혹은 비구상 예술 등의 새로운 기법들은 처음에는 19세기 후반으로부터 떠넘겨진 예술적이고 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입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흥미롭고도 합당한 새로운 수단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었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현대 시인, 추상 미술가, 철학적 분석가 등 새로이 전문 직업화된 학파들이 사고파는 물건이 되어 버림으로써, 결국에는 도리어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423)


# 도약률sprung rhythm : 하나의 강세가 넷까지의 약한 음절을 지배하며, 주로 두운, 중간운 및 어구의 반복에 의하여 리듬을 갖추는 일종의 운율법


9 후기: 소외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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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경제적 이성의 광기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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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장 운동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시각화


"맑스는 가치를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정의한다. 내가 타인이 사서 사용할 재화를 만드는 데 쓰는 노동시간은 사회적 관계다. 그래서 그것은 중력이 그렇듯이 비물질적이면서도 객관적인 힘이다. 이 관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맑스에 따르면 〈물질적 요소들이 자본을 자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자본이 또다른 측면에서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점, 즉 비물질적인 어떤 것, 그 물질적 일관성과는 무관한 어떤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가치의 본질에 대한 모종의 물질적 표상, 우리가 만지고 잡고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절실한 요구가 생겨난다. 이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가치의 한 표현 또는 표상으로서의 화폐의 존재다. 모든 사회적 관계는 직접적인 물질적 탐구를 비켜 간다. 화폐는 이런 사회적 관계의 물질적 표상이고 표현이다."(24-7)


"생산수단은 다양한 형태로 주어지는 상품들로, 자연에서 무상으로 직접 채취된 원료, 자동차 부품이나 실리콘칩 같은  공장과 도로, 하수도, 상수도 같은 주변 물리적 기반시설의 사용권 등이다. 그중 일부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상품들 대부분은 시장에서, 그 가치를 표상하는 가격에 구매해야 한다. 그러므로 화폐제도와 노동시장이 이미 존재해야 할 뿐 아니라 자본이 이용할 정교한 상품교환체계와 적절한 물리적 기반시설이 있어야 한다. 자본은 이미 확립된 화폐·상품·임금노동의 순환체계 내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맑스가 역설한 이유다. 순환과정의 이 지점에서 가치는 변신(metamorphosis)을 한다. 애초에 자본은 화폐 형태를 지녔다. 이제 화폐는 사라졌고, 가치는 상품의 외양, 즉 배치를 기다리는 노동력과, 조합을 이루어 언제라도 생산에 이용될 수 있는 생산수단의 외양을 하고 나타난다."(28-9)


"가치와 잉여가치는 생산된 물질적 상품의 형태로 응결되어 있다." "여기서 (맑스가 즐겨 부른 대로) '돈주머니 씨'(Mr.Moneybags)를 따라 시장에 가기 전에, 생산의 숨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 생산되는 것은 새로운 물질적 상품만이 아니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사회적 관계도 거기서 생산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사용될 물질적 상품의 생산뿐 아니라 자본가의 이익을 위한 잉여가치의 생산도 수반한다. 결국 자본가들은 화폐적 이윤으로 실현될 잉여가치에만 신경을 쓴다. 자기가 생산한 특정 상품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자본순환의 이 계기는 상품의 생산뿐 아니라 잉여가치 형태를 띤, 자본과 노동 간의 계급관계의 생산과 재생산도 포함한다." "생산은 맑스가 자본의 '가치증식'(valoris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나는 마술적 순간이다."(32-3)


"상품은 판매를 위해 시장으로 보내진다. 성공적인 시장거래의 과정을 통해 가치는 화폐 형태로 되돌아간다.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지불능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한 욕구나 필요나 욕망(유효수요)이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아래서의 욕구·필요·욕망 창출의 길고 복잡한 역사가 있다. 게다가 유효수요는 곧 다루어질 화폐분배의 실상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맑스는 가치 형태의 이 핵심적 전이를 '가치실현'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가치가 상품에서 화폐 형태로 전화되는 변신은 부드럽게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령 특정 상품을 아무도 원하거나 필요로 하거나 욕망하지 않는다면 그 상품의 생산에 아무리 많은 노동시간이 투입되었더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다. 그리하여 맑스는 가치의 흐름이 유지되려면 생산과 실현 사이에 반드시 성립해야 할 '모순적 통일'에 대해 말한다."(34)


"임금 형태로 노동자에게 흘러가는 화폐는 임금재 형태로 생산되는 상품들에 대한 유효수요의 형태로 자본의 전반적 순환으로 되돌아간다. 이 유효수요의 힘은 임금의 수준과 임금노동 인구의 크기에 달려 있다. 하지만 화폐가 순환으로 되돌아갈 때 노동자는 일하는 자가 아니라 구매자의 역할을 떠맡고 자본가는 판매자가 된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서 나오는 유효수요가 표현되는 방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소비자 선택권이 작동한다. 여기서 문화적 표현의 여지, 노동인구 내에 사회적으로 계발된 선호사항─자본은 이에 반응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이 추구될 여지는 상당하다." "임금재(노동자가 생존과 재생산을 위해 필요로 하는 재화)가 (값싼 수입품과 기술변화 등을 통해) 점점 더 저렴해지면서 가치 중의 몫은 줄면서도 물질적 생활수준은 높아질 수 있다. 이것이 최근 자본주의 역사의 핵심적 특징이었다."(37-6)


"분배는 잉여가치 생산의 수동적인 최종 산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맑스의 설명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금융과 은행업은 화폐 형태로 생산된 잉여가치 지분의 수동적 수령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을 통해 화폐가 잉여가치 생산에 재투입되는 화폐순환의 능동적 중재자이자 행위자이다. 중앙은행을 정점으로 하는 은행제도는 생산을 통한 가치 창출에는 무관심한 화폐 창출의 용광로다. 그렇기 때문에 금융업자와 은행가는 과거 잉여가치 생산의 수혜자인 만큼이나 추가적인 가치순환의 추동자다. 소유에 따른 재산권에 기초해 수익을 요구하는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으로 인해, 이제까지 운동하는 가치의 단일한 흐름으로 개념화된 것이 이중성을 띠게 된다. 산업자본가는 이 이중의 역할을 내재화한다." "이 사태의 모순적 측면은 금융제도 내부로부터의 부채 창출이 추가적 축적의 집요한 추동력이 된다는 것이다."(43-5)


# 자본의 전반적인 순환과정

1. 자본이 생산에서 잉여가치 형태로 생산되는 가치증식의 과정

2. 가치가 상품의 시장교환을 통해 화폐 형태로 다시 전화되는 실현의 과정

3. 다양한 청구자들 사이의 가치와 잉여가치 분배의 과정

4. 청구자들 사이에 유통되는 화폐 일부를 포획하여, 이후 가치증식을 통과하는 자신의 길을 계속 가도록 그것을 화폐자본으로 다시 전화시키는 과정


2장 『자본』이라는 책


제1권


〈생산의 발전을 위한 위한 모든 수단은 변증법적으로 전화되어 생산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의 수단이 되며, 노동자를 파편화된 인간으로 기형화하고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며, 그의 노동을 고통으로 바꿔놓아 노동의 실제 내용을 파괴하며, 과학이 독립된 힘으로서 노동에 결합되는 것에 비례하여 노동과정의 지적 잠재력을 노동자에게서 소외시키며, 그의 노동조건을 왜곡하고, 비열해서 더욱 가증스러운 전제(專制)에 그를 종속시키며, 그의 일생을 노동시간으로 전화시키며, 그의 처자식을 자본이라는 거대한 수레의 바퀴 밑에 밀어넣는다. 그러나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한 모든 방법은 동시에 축적의 방법이며, 역으로 축적의 모든 확대는 잉여가치 생산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수단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축적되는 데 비례하여 노동자의 상황은 급여가 많건 적건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 (···) 그것은 부의 축적에 상응하는 곤궁의 축적을 필연적인 상황으로 만든다.〉 57)


제2권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순 : 노동자들은 상품의 구매자로서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자기 상품─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들을 자본주의 사회는 최저 가격에 묶어두는 경향이 있다. 또다른 모순 : 자본주의적 생산이 자신의 모든 힘을 발휘하는 시기는 어김없이 과잉생산의 시기로 나타난다. 생산력의 사용은 가치의 생산만이 아니라 가치의 실현에 의해서도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품이 판매, 상품자본의 실현, 따라서 또한 잉여가치의 실현은 사회 일반의 소비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언제나 빈곤한, 그리고 언제나 빈곤 상태에 있어야만 하는 사회의 소비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노동계급이 보상적 소비주의 속에서 길을 잃을 운명에 처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본이 자기 시장을 온전하게 유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잠정적인 결론은 그 가정들에 의존한다."(64-5)


제3권


# 잉여가치의 분배 양상

1. 개별 자본가들 사이의 가치분배 : 완전경쟁 하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 자본가는 자본가 계급의 재생산을 위협하는데, 그 이유는 개별 자본가들이 잉여가치 생산의 극대화보다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도록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2. 계급 분파로서의 산업자본가 : 산업자본가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일부를 상인에게는 이윤 형태로, 부동산 소유주에게는 지대 형태로, 그리고 은행가와 금융업자에게는 이자 형태로 건네주어야 한다.

3. 상업자본가 : 생산물을 시장에서 판매하는 데 드는 시간은 상실되는 시간이며 시간은 돈이다. 따라서 산업자본가는 온전한 가치에서 할인된 가격에라도 상품을 상업자본가에게 인도하고자 하며, 이 할인이 상업이윤의 원천이다.

4. 지주와 지대 : 자본은 인클로저와 사유화를 통해 토지에 대한 노동자의 접근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임금노동을 재생산한다. 또한 자본은 토지와 건물 개량으로 완전 경쟁 시장으로 가는 길을 매끄럽게 닦아준 지주에게 지대를 지급한다.

5. 은행과 금융기관 : 산업자본가들은 상품을 생산할 때 투입물과 산출물 사이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회전시간들을 조율하기 위해 은행과 금융기관에 신세를 진다. 이때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상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시간성들을 취하여, 시간에 따른 금리로 환원한다.

6.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 : 순환하면서 이자를 낳는 자본은 생산에 능동적으로 기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재산권에 의거해서 잉여가치 중의 자기 몫을 청구한다. 즉, '상품으로서의 화폐'는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데 사용가치가 있다.


"자본순환 과정 내부의 그 상이한 계기들은 기능적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면서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기보다는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관련을 맺고 있다. 〈총체로서의 이 유기적 체제 자체는 자신의 전제들을 가지고 있으며, 총체로의 그것의 발전은 바로 사회의 모든 요소를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데, 또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결여된 기관들을 사회로부터 창조해내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그것은 이런 방식으로 총체가 된다. 이러한 총체가 되는 과정은 그것의 과정, 그것의 발전의 한 계기를 이룬다.〉" "여기서 말하는 총체는 인간 신체 같은 단일한 유기체의 총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태계적 총체로서, 거기에는 경쟁하거나 협력하는 다수의 활동 종(species of activity)이 있으며, 진화의 역사는 침공에, 새로운 분업과 새로운 기술에 대해 열려 있다. 그것은 어떤 종과 하위체계가 멸종되는 사이에 다른 것들이 형성되고 번성하며, 동시에 에너지의 흐름이 온갖 방식의 진화 가능성을 가리키는 역동적 변화를 창조하는 체제다."(82-3)


3장 가치의 표상으로서의 화폐


"가치는 사회적 관계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물질적이면서도 객관적'이다. 가치의 〈유령 같은 객체성〉이 생겨나는 것은 〈가치로서의 상품의 객체성에 단 한조각의 물질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로서의 상품의 지위는 〈물리적 객체로서의 상품이 지닌 거칠고 감각적인 객체성〉과 대조된다. 〈하나의 상품을 아무리 돌리고 뒤집어보아도 그것을 가치를 지닌 사물로 파악하기는 여전히 불가능하다.〉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삶의 다른 많은 특징들─권력, 명성, 지위, 영향력이나 카리스마 같은─처럼 물질적 표현을 갈망하는 비물질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다. 가치의 경우 이 필요는 맑스가 '눈부신'(dazzling) 화폐 형태라고 부르는 것을 통해 충족된다. 맑스는 화폐를 거의 전적으로 가치의 '표현 형태' 또는 '표상'이라고 지칭한다." "화폐와 가치는 자율적이고 상호독립적이지만 변증법적으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94)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이미 맑스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치란 생산에서 자본에 의해 착취되고 가격 결정 시장에서 사유재산과 상품교환에 의해 확보되는 소외된 노동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외적 계급권력에 지배되는 소외된 노동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맑스가 볼 때 화폐는 (소외된) 노동가치를 표상했다. 그러므로 〈생산관계는 그대로 두고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가격 형성의 불합리성을 제거하려는 것은 본질상 실패를 자초하는 일인데, 그것은 가격 형성의 불합리성이 그 표현인 가치생산의 불합리성 자체를 마치 없는 것처럼 가정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치법칙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관계를 비판하지 않고 (시간 전표 같은) 소외된 노동에 대한 더 나은 방식의 표상을 구하는 것은 그저 그 소외가 계속되도록 놓아두는 것이었다. 맑스의 생각에 수많은 리카도주의 사회주의자들과 더불어 프루동과 그 추종자들이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던 일은 그것이다."(99-100)


"프루동이 자기 범주들을 이끌어낸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의 세계는 1840년대 파리의 작업장들이었다. 대체로 이것들은 자기 자신의 노동과정을 통제하는 장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사업체로서 뒤쪽에는 작업장이, 앞쪽에는 가게가 있었다. 주로 마주치는 자본 형태는 상업자본으로, 상인들은 작업장에서 물건을 사서 (1850년대에 생겨난 백화점의 전신인) 자신들의 포목점에서 통합 판매하곤 했다. 장인들은 자신들의 노동과정을 통제했으므로 노동과정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생산 시점에 노동은 소외되지 않았다. 그들의 주된 불평거리는 상인이 제시하는 낮은 가격과 선대제도(a putting out system)를 통한 상인 지배의 강화였다." "그들의 노동의 가치는 시장에서 강탈(소외)되고 있었다. 화폐와 시장에 관한 프루도의 주장은 이 청중들에게 직관적 차원에서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것으로 여겨졌다."(101)


4장 반(反)가치: 가치저하 이론


"『자본』 제1권 1장 1절을 끝맺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떤 것도 사용의 대상이 되지 않고는 가치가 될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쓸모가 없다면 그것에 내포된 노동 역시 그러하다.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되지 않고, 따라서 어떤 가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한번의 예리한 발언으로 맑스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인도한다. 즉, 자본의 순환은 취약하고, 갑자기 멈춰 설 수 있으며, 그 순환의 과정 중에 가치저하의 위협, 가치상실의 위협이 언제나 그 위를 맴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품에 내포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노동에 의해 부가된 가치가 상실되면서 같이 상실된다. 상품 형태에서 가치의 화폐적 표상으로의 이행은 위험이 수반된 이행이다." "맑스는 〈살아 있는 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 반면 자본의 순환은 가치를 실현한다〉는 점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생산과 실현 사이에 필연적으로 성립하는 통일성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의 사유가 녹아들어 있는) 〈모순적 통일성〉이다."(123-4)


"맑스에게 반가치 개념은 자본의 핵심에 속하는 심층적이고 지속적인 특징이다." "자본은 운동하는 가치이며, 어떤 이유로든 이 운동이 잠시 멈추거나 심지어 속도를 늦추는 것은 가치의 상실을 의미하고, 자본의 운동이 재개되는 때에만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 가치를 되살릴 수 있다. 자본이 특정한 형태─생산과정,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생산물, 상업자본가의 손에서 유통되는 상품, 이체되거나 재투자되기를 기다리는 화폐 등의 형태─를 취할 때 자본은 〈잠재적으로 가치저하된다.〉 이들 중 어느 하나의 상태에서 〈쉬고 있는〉 자본은 '부정된'(negated), '유휴'(fallow), '휴면'(dormant), '고정된'(fixated) 자본 등 여러가지로 일컬어진다. 〈자본이 완성된 생산물의 형태로 동결되어 있는 한 그것은 자본으로서 활동적일 수 없다. 그것은 부정된 자본이다.〉 이 '잠재적 가치저하'는 자본이 자신의 운동을 다시 시작하자마자 극복되거나 '중지된다'."(125-6)


"실현된 가치는 생산으로 돌아가서, 생산을 위한 노동의 추가적 사용을 통해 '가치 증식됨'으로써만 자본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자본이 소외되고 반항적인 노동자의 형상을 한, 능동적 부정의 또다른, 더 집요한 위협을 마주하는 것은──화폐가 노동과정에서 다시 자금을 대기 위해 돌아가는─가치증식의 지점에서다. 노동계급(이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은 반가치의 화신이다. 이런 소외된 노동의 개념에 기초해서 트론티와 네그리, 그 밖의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은 생산의 지점에서 나타나는 노동자의 저항과 계급투쟁에 관한 자신들의 이론을 구축한다. 노동 거부 행위는 인격화된 반가치다. 이 계급투쟁은 생산의 숨은 공간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실현의 계기에 지배적인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정치와는 아주 다른 정치를 수반한다. 잉여가치를 생산함으로써 노동자는 자본을 생산하고 자본가를 재생산한다. 노동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둘 다를 거부하는 것이다."(130)


"어느 경우든 대출된 화폐─발생된 부채─는 이자 낳는 자본으로 신용제도 내부를 순환하는 일종의 반가치가 된다. 부채의 거래는 금융제도 내의 한 능동적 요소가 된다. 이는 더 많은 유동성을 창조하며, 회전시간이 서로 크게 다른 자본들이 만들어내는 연속적 순환의 방해물을 우회할 수 있도록 돕는다." "신용 개입의 즉각적인 역할은 비축된, 따라서 '죽은' 화폐자본을 되살려 다시 운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채는 미래의 가치생산에 대한 청구로서, 이는 가치생산을 통해서만 상환될 수 있다. 미래의 가치생산이 부채가 상환되기에 불충분할 경우 위기가 온다. 가치와 반가치의 충돌은 주기적으로 화폐·금융 위기를 촉발한다. 결국 자본은 부채 경제와 신용제도 내부에 쌓여가는 반가치를 상환하기 위해 미래의 가치에 대한 갈수록 불어나는 청구와 마주해야 한다. 자본이 초래하는 것은 가치와 부의 축적이 아니라 상환되어야 할 부채의 축적이다. 가치생산의 미래는 압류된다."(133-4)


"부채라는 반가치는 가치와 잉여가치의 추가적인 생산을 보장하는 주요 유인이자 수단 중 하나가 된다. 자본순환을 추동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전통적·관습적 시각의 답은 언제나 개별 자본가의 이윤추구(탐욕)였다." "그러나 이윤 극대화의 추구가 잉여가치 생산의 극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윤의 신호는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를 오도한다. 그런 신호를 쫓아가는 것은 이윤의 저하와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음을 맑스는 보여준다. 그렇다면 두 가지 해결책이 떠오른다─경쟁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기업으로의 자본집중, 그리고/또는 유효수요의 창출과 실현 조건의 조작을 통해 축적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 국가와 민간의 부채금융(debt-financing)은 가치생산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자본주의 세계의 대부분에 걸쳐 1945년부터 1980년까지의 기간이 그런 경우였다."(134-5)


"맑스는 위기에 대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환기한다. (1) 사용가치의 물리적 파괴(destruction)와 하락(degradation), (2) 교환가치의 강제적인 화폐적 평가절하(depreciation), (3) 과잉축적의 불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방법으로서, 앞의 가능성들에 수반하는 가치의 가치저하(devaluation). 여기서 나오는 용어에 주목하자. 연관된 각각의 형태─사용가치, 교환가치, 가치─는 특정 형태의 부정에 종속되는데, 한 형태가 자동적으로 다른 형태를 함축하지 않는다. 가치저하와 교환가치의 평가절하가 반드시 사용가치의 물리적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용가치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부활에 쓰일 무상 재화─가령, 가치가 평가절하된 주택의 사용가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가령 부동산 시장에서) 교환가치의 급격한 절상(appreciation)이 반드시 가치의 그 어떤 증가를 함축하지는 않으며, 또 그것은 사용가치의 그 어떤 실질적 향상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143-4)


"가치의 계산에 지식과 과학, 무급 가사노동, 자연의 '무상 증여물' 등을 포함시키는 것이 최근 비판적 평론의 크나큰 관심사였다. 그런 것들은 결국 가치의 원천이 아닌가? 맑스의 답변은 그것들이 기계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노동력의 생산성에 기여하는 한에서 자본가계급을 위한 상대적 잉여가치의 원천이지만 자본이 규정하는 가치의 원천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사태를 완전히 오도한다. 그것은 대항정치에서 비가치나 반가치가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노동과 처분 가능한 시간이) 행하는 변증법적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 비가치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공간으로부터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고유의 가치 형태 및 그 소외들에 대한 심오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가치 및 잉여가치의 생산자가 되는 것은 맑스의 말에 따르면 축복이 아니라 '불행'이다."(150-1)


"반가치는 자본순환의 연속성이 깨질 가능성을 예고한다. 그것은 어떻게 자본의 위기 경향이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고 하나의 계기(가령 생산)에서 또다른 계기(가령 실현)로 옮겨다닐 수 있는지를 예시(豫示)한다. 위기는 반드시 자본주의의 종말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갱신의 장을 마련한다고 맑스는 (많은 통념에 반하여) 말한다. 자본의 재생산에서 반가치가 수행하는 변증법적 역할이 가장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위기는 기존 모순의 일시적이고 폭력적인 해결책, 흐트러진 균형을 잠시 회복시키는 폭력적인 폭발 그 이상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본의 재구성은 불안하며, 한계가 있다. 부채(미래의 가치생산에 대한 청구)의 축적은 미래의 가치 및 잉여가치 생산 능력과 실현 능력을 넘어설 수 있다. 부채가 성공적으로 상환된다 해도 그것을 갚아야 할 의무가 대안적 미래를 압류한다. 부채노역은 개인의 미래와 경제 전체의 미래에 족쇄를 채운다."(154)


5장 가치 없는 가격


"가치와 가격 사이의 질적 불일치는 곤혹스러우며, 맑스가 인정한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둘 사이의 모순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첨예해졌을지 모른다. 투자자가 가치와 잉여가치 창출에 투자하는 대신, 가격 결정 시장에서 (예술품이나 통화 선물先物, 탄소배출권 선물 같은) 가치가 없는 자산에 대한 투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우, 이는 가치가 (가치 전유와 대비되는) 직접적인 가치생산이 이뤄지지 않는 가공의 시장에서 화폐로서 순환되도록 자본의 전반적 순환으로부터 걸러져 나올 수 있는 경로를 나타낸다. 가격신호(price signals)가 그것이 표상하게 되어 있는 가치를 배반할 때 투자자는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만일 부동산시장이나 그밖의 자산투기 형태에서 화폐적 이윤율이 가장 높다면 합리적인 자본가는 생산활동의 영역보다 거기에 자기 화폐를 배치할 것이다. 그 결과는 경제 전체의 장기 침체 경향이 심화되는 것일 수도 있다."(157-8)


"이를 상쇄할 만한 것은 어떤 사용가치들이 '무상 증여물'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진입한다는 사실이다. 〈금속, 광물, 석탄, 석재 등의 경우처럼 노동의 대상이 (···)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어떤 것〉일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자본은 자연과의 신진대사적 관계에 물질적으로 의존하지만 이는 자연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님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연은 자본이 어떤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무상 증여물들의 저장소다. 그러나 그런 사용가치가 울타리쳐져 다른 이의 사유재산이 되면 그것은 가격을 지닐 수 있다. 그러면 그것이 가치를 지니지 않더라도 그 소유자는 그 자원으로부터 화폐지대(money rent)를 추출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구축된 환경, 개척·경작지, 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가공물도 마찬가지다. 간혹 '제2의 자연'으로 지칭되는 것도 생산에서 사용가치로 기능할 무상 증여물의 보고(寶庫)다."(158)


"맑스는 가치의 한 형태로서의 지식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지식과 정신적 능력─인간 본성의 무상 증여물─이 어떻게 가치를 생산하는 고정자본에 편입되고 그럼으로써 가치생산의 동인인 노동이 쓸모없게 될 정도로 노동생산성을 끌어올리는지(우리 자신의 시대에 나타나는 인공지능으로의 전회轉回가 그 한 예다)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노동가치론을 쓸모없게 만들 것임을 맑스는 암시한다. 맑스의 연구 대상은 고정자본이지, 지식 그 자체가 아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생산력의 향상으로 순환에 투입되는 물리적 상품의 양이 급속히 증가함에도 가치와 잉여가치가 감소하거나 심지어 순환에서 사라져버릴 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생각하게 된다. 물리적 상품생산 및 가격 책정의 증가와 가치 및 잉여가치의 사회적 생산의 감소 사이의 간격은 파국적으로 벌어지고, 많은 맑스주의자가 보기에 이는 자본주의의 최종적 붕괴를 향한 불가피한 경로를 선명히 제시한다."(162-7)


"자본을 '운동하는 가치'가 아니라 '운동하는 화폐'로 정의하는 것은 오늘날 자본축적이 맞닥뜨린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는 복잡하긴 해도 중요한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유럽중앙은행은 양적 완화를 시행할 때 가치가 부재한 상태에서 화폐를 창출한다. 그 화폐가 이자 낳는 자본으로서 유통될 때 그것은 미래의 가치 및 잉여가치 생산에 의해 상환되어야만 하는, 그리고 상환되리라고 추정되는 반가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방출된 화폐가 부동산시장, 주식시장, 미술시장 같은 자산시장으로 유입되면 거부(巨富)는 투기로 더더욱 부유하게 되더라도 그 반가치는 청산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앞서 발생한 반가치를 청산하기 위해 더 많은 반가치를 창출해야 할 강한 유인이 존재한다. 그 결과는 가치생산에서의 장기 침체일 뿐 아니라, 근래에 우리가 걸어온 위험한 길, 즉 끝없는 화폐 확대의 길인 폰지 자본주의의 창출이다."(173-4)


6장 기술의 문제


"자본가에게 기계는 그것의 진정한 본질, 즉 초과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자본가는 기계는 가치의 원천이라고 추론한다. 맑스는 결코 그럴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기계는 죽은 자본 또는 불변자본이며, 따라서 기계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다. 기계 가치의 일부는 상품 가치로 이행하지만 그것은 불변자본(사용을 통해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자본)으로서 그렇게 한다. (과거의 노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노동이 잉여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다. 기계는 그저 노동력의 생산성이 향상되도록 도와서, 총가치는 그대로인데 개별 상품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그 결과는 역설이다. 기계가 노동과 결합하면, 생산된 가치는 불변하더라도 기계는 자본가를 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대부분의 자본가는 (대중과 마찬가지로) 기계가 가치를 생산한다고 믿으며, 이 믿음에 따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181-2)


"많은 혁신은 시장에서나 노동과정에서나 노동자를 무력화하도록 고안된다. 기술은 (여성과 아이들도 수행할 수 있는 종류의) 탈숙련화된 직무구조로써 숙련노동을, 그리고 어떤 기량들(skills)에 따른 독점적 권력을 축출하는 바, 그것은 계급투쟁의 중요한 무기다. 〈그러나 기계는 언제나 노동자를 불필요하게 만들 태세인 우월한 경쟁자로서만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이며, 자본은 이 사실을 큰 목소리로, 의도적으로 선언하고 또 이용한다. 기계는 파업, 즉 자본의 전제(專制)에 대한 노동계급의 주기적 반란을 억누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기술로 유발되는 실업을 통한 실업 노동자 산업예비군의 형성은 노동을 절감해주는 기술적 적응(technological adaptations)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능률과 공조를 향상시키는, 또는 생산과 유통 모두에서 회전시간을 가속화하는 혁신은 자본을 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산출한다."(183-4)


"기술(technology) 그 자체가 하나의 사업이 되면서, 이제 우리가 다루는 것은 어떻게 특정한 생산시설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발명하고 혁신함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킬까 고민하는 개별 기업가가 아니라, 혁신을 전문으로 하며 혁신을 다른 모든 사람(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판매하는 데 몰두하는 거대한 산업 부문이다. 길모퉁이 식료품점이나 철물점은 재고를 관리하고 판매·구매·세금 문제를 챙기기 위해 어떤 정교한 사무기기를 들여놓도록 꼬드겨지고 설득되고 마침내는 (세무 당국에 의해) 강요된다. 그런 기술에 대한 비용 부담은 작은 가게들을 문 닫게 만들고, 슈퍼마켓과 할인매장이 번성하게 하며, 그럼으로써 자본의 점진적 집중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혁신들 중 많은 것의 채택 여부는 그것이 얼마나 노동자를 훈육하고 무력화하며,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생산과 유통에서 자본 회전의 능률과 속도를 증가시킬 수 있는가에 달렸다."(196-7)


"그러므로 경제적 불안정성이라는 현재의 딜레마에 대해 어떤 기술적 해결책을 구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그리고 물신주의적인) 것이리라. 거의 확실히 해답은 주어진 사회적 목표에 적합한 기술적·조직적 변화와 더불어 사회·정치적 관계의 변화에서, 또 정신적 관념, 생산체제, 그밖에 진화과정 상의 다른 모든 계기들에서 유발되는 변화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기술적 해결책에 대한 물신주의적 믿음은 기술적 진화는 불가피하고도 유익하며, 우리가 그것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집단적으로 통제하고 그 방향을 바꾸는 것도 결코 가능하지 않고 그렇게 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자연주의적 관점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사회적 행동을 신화적 믿음에 개방하는 것이야말로 물신 구성물이 지니는 성격에 속한다. 이러한 믿음은 물적 토대를 지닐지 모르지만 물질적 제약은 재빨리 벗어나고, 일단 현실에 적용되면 또 뚜렷한 물질적 결과를 지닌다."(198)


7장 가치의 시간과 공간


"가치법칙은 세계시장을 형성하고 자본 자신의 형상대로 생산과 소비의 지형을 바꿔놓으라는 이 요구를 내면화한다." "여기에서 마찰 없는 공간적 세계에서 작동하려는 자본의 유토피아적인 꿈(지금 사이버머니의 이동성과 더불어 대체로 성취된)이 생겨난다. 이것이 지리적 차이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 차이의 중요성을 높이는데, 왜냐하면 이제 화폐자본은 초과이윤을 얻을 목적으로 생산조건의 작은 차이라도 활용하기 위해 비용 없이 옮겨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전세계의 노동인구는 서로간의 경쟁에 내몰린다. 화폐자본의 초(超)이동성에 의해 형성된 노동공급 세계시장은 갈수록 더 현저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국제무역에 대한 물리적 장벽의 제거가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장벽의 제거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대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유무역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헤게모니를 지니는 이유다."(213-4)


"일단 특정 장소의 토지에 투자자금이 투입되면 자본은 그 자금이 가치저하를 겪지 않도록 그것을 그 장소에서 이용해야 한다. 자본의 운동은 계속해서 더 넓은 공간적 범위로 자본의 유동적 운동을 확장하는 임무를 띤 바로 그 투자에 의해 공간적으로 제한된다. 시간에 의한 공간의 소멸은 세계시장의 상대적 시공간(relative space-times)을 개조하려는 충동 내부의 중요한 현상이다." "그러나 『자본』에서 맑스는 확실히 공간보다 시간의 연구를 우선시한다. 가치는 세계시장에서의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으로, 이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다수의 구체적인 시계-시간과 대조된다. 잉여가치는 한가지이나, 자본이 작업장 안팎에서 온갖 술수를 동원해 가능한 한 많은 추가 노동시간을 절취함에 따라, 필요노동시간과 과잉노동시간으로의 노동일의 분할(그리고 절대적 잉여가치를 증가시키는 노동일의 길이)이 어떻게 이뤄지느냐를 두고 매일같이 싸움이 벌어진다."(215-222)


"자본은 과잉인구(산업예비군)와 과잉생산물(실현의 문제에 직면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고정자본의 형성을 초래하는 조건을 체계적으로 생산한다. 고정자본의 규모가 클수록 더 많은 과잉노동과 과잉자본이 흡수될 수 있다. 〈그리하여 기계류를 만드는 데보다 철도, 운하, 수로, 전신 등등을 만드는 데 더 많이 [동원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려면 자본이 모여 화폐력의 집중 형태를 구성해야 한다." "어떤 특별한 종류의 고정자본에 대해 생각해보면 이 경향은 한층 더 분명해진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리적 기반시설(그중 일부는 공공재의 성격을 지닌다)은 자본주의 형태의 발전을 위한 사용가치로서 긴요하다. 이 기반시설 중 많은 것(주택, 학교, 병원, 쇼핑몰 등)은 생산보다 소비의 목적에 이용되는 반면 철도와 고속도로 같은 다른 것들은 생산과 소비에 똑같이 잘 이용될 수 있다." "우리 시대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확실히 후자의 투자가 커다란 중요성을 띤다."(238-9)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을 통해 공급되는 반가치의 '암흑 물질'은 미래의 가치생산에 대해 자기 몫을 요구하는데, 미래의 가치생산은 복리이자 지급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증가해야 한다." "자본가가 고정자본을 구매하거나 빌릴 때 그는 그것의 가치가 완전히 상환될 때까지 그것을 사용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가치저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부동 고정자본은 그것의 수명 전 기간에 걸쳐 그 가치가 상환되려면 본래의 위치에서 사용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자본 일반의 공간적 이동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떤 장소에 자리잡는 물리적 기반시설을 제공하도록 계획된 자본 형태는 결국 고정자본이 규정하는 그 공간으로 자본이 흘러들 것을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고정자본의 가치가 저하되면서 그것에 자금을 댄 이자 낳는 자본(가령 연금기금)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이것이 자본의 위기 경향이 첨예화되는 강력한 방식들 가운데 하나다."(240-1)


8장 가치체제의 생산


"198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기술적·조직적 혁신의 물결은 지역 가치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해왔다. 관세와 그밖의 국경 장벽들이 축소되거나 선택적으로 제거됨에 따라 운송비가, 한층 더 중요하게는 조정시간(coordination times)이 점차 줄어들어왔다. 생산과 유통에서의 속도 향상은 시대가 추구하는 물신적 목표였다. 세계적 생산사슬의 창출로 국경을 넘어서는 생산의 조합이 가능하게 되며, 이 경우 가령 미국의 기업은 디자인과 조직 및 마케팅 기술을 제공하고 여기에 멕시코의 저가 노동이 결합되는데, 이는 독일 기업이 폴란드에서 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방식이다. 멕시코와 폴란드로서도 얼마간 수익이 생기지만 가치는 대부분 미국과 독일 기업들 차지가 된다─비록 미국과 독일의 노동자들은 외국 노동자들과 훨씬 더 격렬한 경쟁을 벌이게 되고 그 재조직화로부터 (어쩌면 더 값싼 소비재를 누린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말이다."(262-3)


"자연과 인간 본성의 무상 증여물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제공된 잠재적 사용가치들에 대한 자본주의적 가치평가에 의존한다. 천연자원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이용할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한 경제적·기술적(technical)·사회적·문화적 평가물이다. 한동안 수력에 대한 접근이 중요했으나 증기기관의 등장은 그런 위치상의 제약에서 자본을 해방했다. 우라늄은 원자력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무의미한 자원이었다." "1970년대 이전, 산업화된 지역에서 완벽하게 연마된 노동 기량은 그 이후 그 기량을 기계기술과 자동화 속으로 흡수한 기술변화로 인해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문화적 소양은 세계의 어떤 시장들에서 나타내는 구별짓기, 계급, 좋은 취향 등의 표지에 대한 열광적인 추구를 지탱하는 어떤 소비주의의 진화에 중요하다." "그것들은 생산되고 또 계속 변하고 있으며, 자본 자체가 그 생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결과는 세계적 동질성이 아니라 지역적 다양화다."(264-5)


"사회적·물리적 기반시설에 대한 투자는 상대적 이점의 지리적 집중을 초래하며, 자본은 여기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자연 및 인간 본성의 무상 증여물은 먼저 생산되어야만 자본에 선물로 주어질 수 있다. 고유한 지리적 가치체제들의 불균등발전 뒤에서 작동하는 원형적(cicular)·누적적(cumulative) 인과과정을 깨뜨리는 어떤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 한, 빈곤 지역은 더 빈곤하게 되고 부유한 지역은 대개 갈수록 더 부유하게 된다. 장기간 지속되는 이점은 고정자본의 가치나 소비자금이 상환되는 날을 훨씬 넘겨서까지 유지된다. 미국에서 고등교육에 대한 초기 투자는 1970년대 이후로 제조업에 피해를 입힌 탈산업화에 맞서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등의 인터넷·첨단기술 기업은 재빨리 세계적 독점 기업으로 자리잡았는데, 물론 그 혜택은 늘 그렇듯이 노동이 아닌 자본으로 흘러간다."(268-9)


"우리는 가치의 운동법칙이 관철되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 탐색을 상당히 개연성 있는 주장, 즉 세계시장을 정복하고 구축하는 것은 자본 자체의 본성에 속한다는 주장으로 시작했다. 그 법칙이 작동해야 하는 모순적 영역을 가로질러 온 우리는 이제, 집단적 인간 역사를 피로 얼룩지게 하는 인간의 온갖 비이성적 결함들과는 별개로, 세계시장의 통일성, 동질성, 초감각적 합리성을 이질성, 차이, 지리적 불균등발전의 잠재적으로 위험하고 공존 불가능한 수많은 파편들로 산산조각 내는 것 역시 자본의 본성에 속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세계적 차원의 파워블록들 간에 벌어지는 지정학적 투쟁의 문제로 변형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이제까지 자본주의의 지정학적 역사는 상당히 추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변별적 가치체제들의 창조로부터 생겨나는 고려사항들은 그 역사지리학에서 미묘한 역할을 수행한다."(273)


9장 경제적 이성의 광기


"상품생산의 직접적인 목적은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상품의 관점에서 교환가치는 〈다만 일시적인 관심사〉다. 교환의 세계에서 화폐는 교환을 용이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자본 및 잉여가치 생산의 세계에서 화폐는 아주 다른 성격을 띤다. 여기서  가치는 〈증대를 통해서만 자신을 보존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의 양적 장벽을 뛰어넘어 돌진함으로써만 자신을 보존하는 것이다. (···) 그리하여 부유하게 되는 것은 그 자체로 목적이다.〉" "바로 이 점이 자본주의하의 화폐를 다채로운 전(前)자본주의적 화폐 형태들 모두로부터 구별시켜준다. 〈어떤 금액으로서의 화폐는 그 양으로 측정된다. 이런 측정됨은 무량한 것(the measureless)을 지향해야 하는 그 성격과 모순된다.〉 화폐는 결코 제어되거나 제약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헤겔이 '악무한'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이는 종결이 없는, 그리고 신의 지혜처럼 인간의 모든 이해를 넘어서는 무한의 형태다."(277-8)


"『자본』 제3권에서 맑스는 이 광기의 또다른 차원을 들춰낸다. 이자 낳는 자본이 〈모든 정신 나간 형태의 근원〉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 경우 화폐는 상품의 역할로 되돌아가지만, 그 상품의 사용가치는 그것이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타인에게 무한한 양으로 대출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교환가치는 이자다. 가치의 표상인 화폐 자체가 화폐가치를 획득한다. 이자는 〈처음부터 불합리한 표현〉이다. 그 결과는 〈부조리한 모순〉으로서, 여기서 〈자본의 내적 경향은 타인 자본이 그것에 가하는 강제로 현상한다.〉 여기서 반가치가 지배하게 된다. 이자 낳는 자본의 순환(주식 및 채권 소유자의 권력)이 가치를 계속 운동하게 하는 최상의 힘이 되면 〈이로써 자본의 물신적 성격과 이 자본 물신의 표상은 완성된다.〉 경제적 이성의 광기는 화폐가 쉼없이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마술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나타나는 물신 형태에 의해 은폐된다."(279-80)


"부르주아적인 경제적 이성의 광기는 가치와 그것의 화폐적 표상 사이의 적대성이 커져감에 따라 더욱 확대된다는 점을 맑스는 발견한다. 화폐가 필연적으로 일체의 (금·은 화폐상품과 같은) 물적 기반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워지면서, 화폐의 관념적 구성물(달러·유로·엔화 등의 숫자)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화폐가 점점 더 신용화폐 형태로 현상하는 사태는 인간 판단의 변덕에 취약해지며, 권력의 고삐를 쥔 모든 자의 무절제한 행위와 조직에 노출된다. 〈단순한 유통수단으로서 (···) 종의 역할을 하던 화폐는 갑자기 상품세계의 지배자이자 신으로 변모〉하는데, 이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태로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있다. 부채가 타인의 미래 노동에 대한 청구인 것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화폐는 타인의 사회적 노동에 대한 개별화된 청구다. 화폐는 그 소유자에게 〈사회에 군림하는 권력, 만족과 노동 등등을 포괄하는 세계 전체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선사한다."(281-2)


"『열일곱가지 모순과 자본주의의 종말』에서 나는 현시대에 자본주의의 생존에 분명한 현재적 위험을 초래하는 모순이 세가지 있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우리 관계의 악화였다(지구온난화에서 서식지와 종의 파괴, 물 부족, 환경 악화에 이르는 모든 것). 두번째는 지수 성장곡선─J자 형태를 그리는 지수함수적(기하급수적) 성장곡선─ 상의 변곡점에 도달한 영구적 복합성장으로,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가 갈수록 부족해지는 마당에 그 성장곡선이 계속 유지되기는 점점 더 어렵다는 사실이 빠르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무한히 늘어날 수 있는 저 한가지 형태의 자본, 특히 통제 불가능하게 되어가는 듯한 신용 형태의 화폐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세번째는 내가 보편적 소외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맑스에게 가치는 소외된 사회적 필요노동이다. 자본은 운동하는 가치이므로 자본의 순환은 소외된 형태들의 순환을 동반한다."(307-8)


"그러나 이 문제에는 다른 차원들이 있다. 노동자들은 개별적으로 고용되며 일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그들은 자기 자질을 홍보하는 한편 자기 경쟁자들의 자질을 축소하고 심지어는 헐뜯음으로써 자신을 노동력의 담지자로서 자본에 팔아야 한다.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협력을 좌절시키고 계급연대의 형성을 방해한다. 그것은 온갖 방식의 분열을 가져온다. 노동자들은 서로 소원해진다. 여기에 노동시장에서 인종차별주의, 젠더차별, 성적이거나 인종적(ethnic)이거나 종교적인 적대성(자본이 열심히 조장해온 역사가 있는 분열들)이 스며들면 그것은 한층 더 흉측하게 된다. (광범위한 실업과 세계 노동인구의 더 긴밀한 공간적 통합이라는 조건하에서) 고조된 경쟁은 도처에서 노동인구 내부의 이 분열과 긴장을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탈산업화를 통해 과거의 사회적 연대가 해체되어 온 상황 속에서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낳고 있다."(310)


"엄청난 경쟁의 압박이 자본순환의 가속화를 부추긴다면 이는 소비속도의 증가를 요구한다." "자본은 소비에서 회전시간을 가속화하기 위해 계획적 노후하에서 광고의 압력과 유행을 설득수단으로 동원하는 데 이르기까지 온갖 전술을 전개한다." "한순간에 소비되는 덧없는 생산물의 일종의 시장 성장을 보장하기 위해 자본이 '스펙터클의 사회'를 조성한 것도 별로 놀랍지 않다. 이것의 사회적 결과는 광범위하고도 이중적이다. 생활양식, 기술, 사회적 기대 등에서의 빠른 변화는 사회적 불안정성을 배가하며 여러 세대 사이, 다양화하는 사회집단들 사이의 사회적 긴장을 증가시킨다." "문화적 의미의 착근성(rootedness)은 당대의 환상에 따라 임의적으로 재구성되기도 하며, 정체성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애착의 바다에서 떠다닌다. 자본이 끝없는 복합성장의 요구에 부응하려면 그런 상태에 상응하는 사람들과 생산물이 필요하다. 무한한 자본축적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 소비'는 바로 이렇게 보인다."(312-3)


"기회주의적 형태의 자본은 또한 정당한 몫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전유하려고 실현의 순간에 개입한다. 헤지펀드가 제약회사를 인수하거나 압류된 주택을 대량으로 사들인 뒤에 방향을 바꿔 그것을 빈궁한 소비자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에 내놓을 때 실현은 강탈에 의한 축적의 체계적 조직을 위한 순간이 된다." "실현의 순간에 일어나는 부의 추출에 연루된 정치는 생산을 둘러싸고 생성되는 정치와는 다르다. 그런 투쟁은 이론화하거나 조직하기 어렵다." "더구나 자본은 실현으로부터 많은 부를 추출하지만 분배로부터는 더 많은 부를 빨아들인다. 가장 뻔뻔한 형태의 재분배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국민생산에서 노동의 몫이 감소하는 점, 특히 근래에 노동이 생산성 향상에서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하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 대신 노동은 기술변화로 인한 실업과 노동의 질의 빠른 저하로 고통 받아왔다. 국가와 기업 내부의 과도한 관료화가 동반된, 생산적 노동에서 비생산적 노동으로의 이행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314-5)


"온갖 종류의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을 인간의 부가 갈수록 화폐력이라는 단일한 측정기준에 갇힌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편협한 부르주아적 형태가 벗겨지고 나면, 부란 개인의 필요, 능력, 쾌락, 생산력 등등의 보편성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 창조적 잠재력의 절대적 발현, (···) 하나의 특정성 속에서 자신을 재생산하는 대신 자신의 총체성을 생산하는 것, 이미 형성된 어떤 모습을 유지하려 애쓰는 대신 되어감(becoming)의 절대적 운동 속에 있는 것[이 부가 아닌가]?〉 부르주아 경제학에서─그리고 이에 조응하는 생산 시기에─인간적 내용의 이러한 완전한 발현은 완전한 비움(emptying-out)으로, 이 보편적 대상화는 총체적 소외로, 모든 편협한 일면적 목표의 해체는 완전히 외적인 목적에 대한 인간적 목적 자체의 희생으로 나타난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환상을 무색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정신 나간, 심히 우려되는 세계다."(322-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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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까치글방 91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론


"유럽적 사고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초기 그리스 정신 가운데에서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인에게서의 사유의 '발단'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스 인들은 미리 앞서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사고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대상(과학과 철학 따위)을 획득하고 또 (논리적 절차와 같은) 오래된 방법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창출했다. 그리스 인은 보다 활동적이고, 추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정신을 발견─다른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이 시기에 비로소 정신'으로' 규정된─했다. 그 토대에는 인간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놓여 있다. 정신의 발견이라고 하는 이 과정은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인 서사문학, 서정문학, 극문학(희곡) 등은 이 여로 위에 있는 단계들인 것이다."(7-8)


1장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


"서구의 먼 장래의 발전을 결정한 인간과 그 깨어 있는 명석한 사고에 대한 관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관념)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원전 5세기에 성취했던 것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단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그의 언어가 예시해준다. 이미 관찰된 바이지만, 비교적 원시 언어에서는 추상어가 발전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구체적-감각적 의미를 지닌 언어 중에는 보다 발전된 언어에서는 기이하게 생각될 수 있는 풍부한 구체적 표현법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례를 들면, 호메로스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horan, idein, leussein, athrein, theasthai, skeptesthai, opsesthai, dendillein, derkesthai, paptainein 등이 그 예들이다. 이에 반하여, 호메로스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동사들은 blepein과 theorein이라는 두 말밖에 없다."(18)


"derkesthai라는 말은 특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뱀(drakon)은 derkesthai로부터 파생된 명사인데, 뱀이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눈에 섬뜩한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뱀이 특별히 잘 볼 수 있다거나 뱀의 시력이 아주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의 눈초리를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경우에 derkesthai라는 말은 눈의 기능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지각되는 눈빛을 말한다. 즉 어떤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theasthai라는 말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본다는 의미이다. 즉 horan, idein, opsesthai라는 동사들은 결코 '봄' 그 자체의 기능을 표현하는 하나의 통일된 동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때그때마다 '보다'라는 특정한 방식을 표현하는 몇몇의 동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18-22)


"초기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언어 및 조형예술에서 신체를 통일체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보다'라는 동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다'라는 초기 동사들은 본다는 행위를 그 구상적 양태에 의하여, 즉 그 행위와 결부된 태도 혹은 감정에 의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나, 후기의 언어는 이 행위 자체의 본래 기능을 어의의 중심으로 보다 강하게 밀어내고 있다. 언어가 점차적으로 사상(事象)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사상이라는 것은 구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로 특정의 명백한 정서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라는 것이 일단 인식되고 명명되자마자, 그것은 존재하게 되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갑자기 공동의 소유물이 된다. 즉, 신체의 경우처럼 그 숨겨진 통일성이 벗겨지거나 발견되자마자, 그것은 더이상 '사지(四肢)의 총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로 인식 가능하게 된다."(26-7)


"이러한 사정은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과 신체, 육체와 영혼은 상호 대립 개념이어서, 이들 개념 각각은 그 대립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기 마련이다. 육체에 대한 표상이 없는 곳에는 영혼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있을 수 없다. 역도 그러하다. 호메로스 역시 '영혼' 혹은 '정신'을 특징짓는 고유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후기 그리스 어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psyche라는 말도 원래는 사고하고 감각하는 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호메로스에게서 psyche는 그것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고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하여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한에서 혼일 뿐이다. 혼의 영역을 표현하는 또다른 말인 thymos는 정동(情動,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며, noos는 여러 가지의 표상(관념, 이미지)을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호메로스의 언어 가운데 하나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간격은 '신체'를 표현하는 언어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28-30)


"영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맨 처음 피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psyche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체 및 신체적 기관의 성질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질은 호메로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에 부여하고 있는 속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호메로스 자신에게는 언어상의 모든 전제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상의 모든 전제라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서정시의 시대에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모든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영혼의 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혼의 의미는 깊다〉." "그가 영혼을 무한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신체적인 것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44-5)


2장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항시 불신앙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신앙(credo)'이라는 것은, 이것과 아주 대조되는 허위 신앙, 즉 이단 신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신앙은 사람들이 그 옹호를 위해서든 혹은 그것에 저항해서든 싸워야 하는 도그마와 결부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에게는 교의(敎義)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민족이 다른 신앙을 혹은 다른 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아메리카에 상륙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디언의 신들이 마땅히 우상이요, 악마로 여겨졌으며, 유대 인들에게도 그들의 이웃 사람들의 신들은 야훼의 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서 거기서 그 지방의 토속적인 신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거기에도 아폴론,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라는 신이 마땅히 있는 것으로 알았다."(54)


"아낙사고라스와 디아고라스가 국외로 추방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일 따위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불신앙에 대한 법률상의 박해는 기원전 431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의 단기간인 약 30년 동안에 발생했다. 더구나 이 기간은 올림포스 신들이 본래적인 생명이 이미 다한 때이다. 이들 재판은 활력이 넘치고 자부심을 지닌 종교심의 치기 어린 불관용이 아니라, 상실된 위치를 회복하려는 경우에 생겨나는 신경과민 현상이었다." "'신을 경외하라'는 법률은 우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즉 종교에 대한 모독을 하지 않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제의에 대한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가 항시 관례적인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에서 종교 생활의 초기 단계에 적용된 이러한 규정들은 신념, 신조, 교의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56-8)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소위 터툴리아누스적인 말은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다. 고전-그리스적 관념에 따르면, 신들 자신이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호메로스에게서 신들은 항시 지극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심지어 헤라가 태양신인 헬리오스를 대양에 잠기도록 강요하는 것조차도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것을 달성하려는 마법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의 신성은 무로부터 무엇인가(有)를 창조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 인들에게는 천지창조의 역사라는 것은 없다. 그리스 신성은 단지 사물을 고안하든지 혹은 변형하는 행위만을 할 수 있다. 호메로스에게서도 초자연적인 일은 확고한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이 (새로운 국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세속적인 일에 꼭 개입해야만 할 때에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올바른 법칙이 있다."(60-1)


"「일리아스」의 첫머리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 적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아킬레우스의 격노를 촉발시킨다. 이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그의 검에 손을 얹고 아가멤논을 향하여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에 아테나가 나타난다(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는 바처럼 그녀는 단지 아킬레우스에게만 나타난다). 그 여신은 그를 제지하면서 지금은 그가 물러서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분노를 잠재우도록 경고한다. 즉시 아킬레우스는 여신의 권고에 따라 그의 검을 칼집에 꽂았다." "호메로스에게서 인간은 아직 그 스스로 결단의 발기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자각은 비극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경우에, 인간이 숙고한 후에 어떤 결단을 내렸을 때 그는 그 결단이 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63)


"호메로스의 신들은 우리와 너무도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 신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창출되었는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올림포스 신들만이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고, 특히 본토에서는 지하적, 신비적, 황홀적 신성이 버티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새롭게 침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 시, 높은 차원의 정신적 관심사는 결국 호메로스적 종교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형성된 직후에 그리스의 조형미술은 신들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들을 위해서 건축된 신전들은 어떠한 숭배 의식이나 혹은 비교 행위(秘敎行爲)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한 아름다운 집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예술은 이 신들을 보다 아름답고, 보다 경탄할 만한 형태로 만들고자 무려 300년 간에 걸쳐서 노력했다."(71)


"이 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염세주의에 가까웠던 그들은 인간을 가을의 나뭇잎처럼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하여 깊은 비탄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들이 하늘에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이 지상 세계의 비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후기 그리스 인들은 별들이 고착된 궤도에 따라 운행하는 모습을 스스로 관찰하고 경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에 의해서 그들의 지상 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관조적' 삶을 실제적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지상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에도 이 '이론'에는 호메로스적 경탄(thaumazein)으로부터 유래하는 종교적 감정의 여러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철학적 사유로의 전진은 이들 신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73-4)


3장 헤시오도스에게서의 신의 세계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의 이름에 〈이 뮤즈는 모든 뮤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명성을 알린다거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기쁨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헤시오도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칼리오페는 왕들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의 곁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훌륭한 재판관의 '유쾌한' 언변이 어떻게 평화를 초래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의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말할 경우에 비단 기분 좋은 울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서 칼리오페는 뮤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는 헤시오도스가 칼리오페를─더군다나 아홉 자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을─시의 내용 및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변의 의미와 관련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81)


"헤시오도스의 경우에, 신성의 현현이 우리들에게 정말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은, 헤시오도스 자신이 시인으로서의 서품을 부여받는 것을 묘사하고 뮤즈들과의 만남을 서술할 때뿐이다. 호메로스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이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에서도 신들의 간섭을 받고 있다." "헤시오도스에게서는 정말 신화적인 것조차, 다시 말하여 신들이 특수한 작용을 하는 인격체로서 표현되는 이야기까지도 끌어들이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적인 것에 대한 조망을 주려고 시도하는데, 말하자면 그는 신들을 인간이 그것들을 신들로서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신들을, 마치 그것들이 식물 혹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우리에게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에 속하는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신들을 일종의 린넨 체계 및 계보도로 압축하고 있다."(86-7)


"가장 미천한 신성에게도 확고한 장소를 할당하는 이 계보도는 신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어떤 인간이 무엇인가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떤 일 혹은 어떤 식물, 어떤 동물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아주 오래된 확신이다. 이와 같은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기원과 본질에 관한 질문과 오래전에 마주쳤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원시적인 관념들로부터 헤시오도스를 떼어내는 어떤 합리적인 경향이 시사되고 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리와 체계이다. 따라서 그는 철학뿐 아니라,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신론(一神論)의 선구자이며,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신들은 신적인 것의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고 만다."(89)


"헤시오도스의 계보도는 상호간에 결합되지 않은 두 개의 다른 계통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단지 밝은 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누크, 즉 '밤'은 부친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을 가지고 있다. 누크이 자손들은 예를 들면 질투, 기만, 노년, 싸움, 노고, 기아, 고통, 살해 등이다. 이것들은 단지 생명에 대하여 악의와 적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다른 신들에 대하여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후에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의 철학자들이─물론 이들 각자의 이론은 상이한 형식이기는 하지만─세계를 설명할 때 대립의 이론을 내놓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밤의 악마적인 힘을 가진 자손들은 우리들의 세계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작용을 미치고 있으므로, 제우스가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90-1)


4장 초기 그리스 서정시에서의 개성의 자각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시구는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와 아주 유사하다는 면에서, 이들 시구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그 모습을 나타내어, 마치 아프로디테가 사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부드럽게 위로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 그 회상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태에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예전의 체험에만 미치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인생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와 인간을 지배하는 리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에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혹은 그의 가슴속에 thymos가 격분했을 때, 이것은 아르킬로코스가 그의 thymos에 말을 걸기 시작한 경우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호메로스의 thymos라는 것은─유사하게 마음도─원칙적으로는 신체적 기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정신의 활동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126-7)


"그런데 서정시인들이 심적인 것(das Seelische)을 또 다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영혼과 정신이라는 말에 따라 확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지닌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충분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정시인들의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에 아직 그 정도로까지 명확한 형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심적인 것을 표시하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정시인들이 이 영혼을 신체적 기관과는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몇몇의 어휘를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아르킬로코스가 자신의 thymos를 〈고뇌로 교란되어〉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대장에 대하여 그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가 아직 알지 못했던 심적인 것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표시하는 표현법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27)


"서정시인들이 드러내는 개인적 감정 가운데에는 영혼의 분열과 정신적인 것에서의 공유에 대한 의식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아르킬로코스, 사포, 아나크레온은 정신의 자발성을 비교적 좁은 감각의 영역 안에서 겨우 찾아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감정의 움직임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성의 개입이며, 단지 영혼의 곤경만이 자기 고유의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적인 개인적 행위의 영역은 아직 열려져 있지 않았다. 이 영역은 비극에 들어 처음으로 성취되었다. 서정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조형 예술가, 사상가, 정치가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위대한 개인의 성과는 점차 확산되어가는 크나큰 역사의 흐름으로 운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행위와 운명의 실로 짜여 있기에, 그 직물은 한편에서 보면 단지 씨줄로만 짜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단지 날실로만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145)


5장 핀다로스의 제우스 찬가


"헤시오도스는 서사시 시대로부터 서정시 시대로의 과도기에 서 있었다. 혹독한 농경 생활과 목자(牧者)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가 음송 시인으로서 노래해온 영웅 전설의 세계가 그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보다도 한층 현실적인 주위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신적인 것을, 왕과 영웅의 행위에 제멋대로 간섭하는 올림포스 산의 귀족적 사회 안에서 찾으려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이 신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사시의 전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핀다로스의 경우에도 뮤즈들은 질서 있는 세계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생겨났을까 하는 이 서사시적인 사건을 노래한다. 그러나 뮤즈들의 본래의 임무(기능)는 서사시가 아니고, 오히려 제우스의 업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를 폭로하는 서정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167-8)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 사이의 알카익 기의 서정시에는 심적인 것의 긴장, 정신적인 것의 복잡한 상호 관계, 가치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 등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핀다로스는 알카익 기의 대부분의 서정시인들과 달리 그의 개인적 감정과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 결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그는 자신이 어떤 가치를 거부할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찬미해야 할 것, 자신이 신적인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한계 있는 것은 어떻게 보편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에 관여하며, 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초인간적인 것에 관여하는가를 단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따라서 이전 세대의 시인들과 직접적인 교섭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핀다로스는 초기의 '개인적' 서정시에서 발견된 것을─이것이 본질적으로는 그의 공적인데─제의가에서 성장한 축제시로 결실을 맺도록 하고 있다."(168)


"핀다로스가 테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아티카에서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갔다. 비극은 이 세계에 정의가 행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운다. 따라서 비극은 인간에 대하여, 더욱이 신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훌륭한 행위를 넘어서라는 다양한 요구를 내놓는다. 거기에는 찬양의 목소리가 그쳐버린다. 핀다로스는 이와 같은 사상에서 의식적으로 멀찍히 물러서고, 이와 같은 사상을 불손한 것으로 간주한다. 때때로 그는 전승하는 전설의 어느 한 구절이 신적인 것의 찬란함을 흐릿하게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그것을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적인 것이 그에게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의 질서와 미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또한 현존하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의도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귀한 침착성을 유지한 채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169-70)


6장 그리스 비극에서의 신화와 현실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시학」 제9장 2절 1451a)는 역사 기술과 시작(詩作)이─기원전 5세기에 실제로 그랬던 바처럼─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작은 역사 기술보다도 〈더 철학적이다.〉 시작은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합창대의 노래에서 발생했다. 초기의 합창대 노래는 신화적 사건을 직접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노래했기 때문에, 이미 드라마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대로이다. 그 결과로 신화와 현실, 시작과 진실이 서로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것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호메로스적인 노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171-2)


"합창 서정시와 드라마의 시원에는 제의적 품이 있었고, 이 춤에서 신적 세계는 현재의 지상적 현실과 합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서사시에서 보고하는 사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 현실이란 일찍이 있었던 일로, 그것은 참으로서─혹은 허위로서─'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화적 사태가 실제로 연기됨에 따라서 재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연기는 연기자와 구경꾼에게서 신화적 사건(die Mythische Begebenheit))으로 '실재하고 있다(ist).'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이 지금 아무개에 의하여 연기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신화적 현실은 '의의'를 지닌 사태여서, 그 의의는 몇번이라도 현재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 사태는─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비단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80)


"비극은 신화의 사건들을 엄격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서사시에서 제재로서 사용하고 있는 사건을 역사적 진실로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극은 인간의 행동 중에서 사태의 동기를 추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필요하다면 사실을 버리는 일조차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를 심적 과정의 결말로서 파악한 맨 처음의 사람은 아이스킬로스이다. 그는 첨예화된(인위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인간 행동의 핵심이 되는 것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행위 가운데 수많은 동기가 뒤섞여 흐르고 있어서 참된 행위의 근본 형식, 즉 자유로운 결단은 단지 희미한 반성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한 두 개의 요구 사이에 인간을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정의와 운명에 대해서 정통한 바탕 위에서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행동의 저 근본적 형식을 순수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190-1)


"아이스킬로스가 그려낸 인물들이 처하게 되는 부자연스럽고 첨예화된 여러 상황은 정상적이고 악의 없는(순진한) 인간에게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일을 행할 때에 인간은 항시 자유롭다고 자각하는 곳에서, 이들 인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모델을 그리고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가장 고유하고 내면적인 이상적 상황을 찾아낸다." "호메로스 세계의 인간은 아직 흔들림 없는 세게에 보호되고 있으며, 그 세계는 분명하게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 편에서도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보다 위대한 것인 한에서, 물론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통찰력과는 독립적으로 확실하고 또 항상적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에게서 이 신들의 세계는 한층 모호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신적인 것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근거로 하는 만큼 더욱더 독자적으로 되어간다."(192-3)


"이미 아이스킬로스는 존재자의 관념을 정의의 관념과 연결시켰다. 즉 가상은 hybris(오만함)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시대에 이르러 이 대립은 이미 여러 면에서 인식 비판, 신화 비판, 도덕 비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대립은 에우리피데스의 전체 사고를 꿰뚫고 있으며, 우리가 극히 피상적인 의미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태도에 미치기까지 이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색채가 풍부하고 화려한) 사치스러운 단장이 아이스킬로스의 특색이었다고 한다면, 특정한 인물들의 누더기 옷이 에우리피데스의 특색이다. 경험적 관조에 나란히 사회적 관념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사회적 관념들이 보여주는 바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신적인 것이 주어진 현상 세계의 빛 가운데 나타난다는 신앙이 퇴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행동이라는 문제가 적법한 것에 대한 사변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4-5)


"알카익 기의 서정시의 신화는 승리, 혼례, 제의적 축제에 따라 시공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비극의 신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관심은 철학적인 색조마저 띠고 있다. 비극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문제성이 인식의 문제가 되며, 소크라테스가 이 문제를 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해결하기를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그리 먼 장래의 일이 아니었다. 그 경우 현실적인 것은 목적론적 개념으로서 완전히 추상적으로 파악된다. 이제 의미를 주는 층(신적 세계)과 의미를 수용하는 층(인간 세계)은 보편과 특수라는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경지와는 아직 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인이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생명 있는 인물들에게서 보았던 것이지, 개념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197)


7장 아리스토파네스와 미학


"시인의 목적과 의의가 인간의 개선에 있다는 사상으로의 전환을 처음으로 제시한 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즉 시인들은 교사였다. 오르페우스는 신성과 제의의 교사였고, 무사이오스는 의술과 신탁의, 헤시오도스는 농경의, 신에 필적하는 호메로스는 영광과 명예의 교사였다. 이 시인들과 성인들의 관계는 교장(교사)과 어린이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예술 및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참된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오늘날에도 또 하나의 예로 삼고 있다. 이 도덕상의 요구를 물려받은 것은 플라톤이지만, 다만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소크라테스를 심판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이러한 철학상의 요청에 반해서, 비극은 단지 감각적 쾌락에만 호소할 뿐이라는 경험적 발견을 끄집어내놓고 있다."(203)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비단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빈틈 없는 교활함과 약삭빠름을 비난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야말로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비합리적인 힘들을 제시한 최초의 극작가이다. 메데이아와 파이드라가 바로 그녀들의 격정 때문에 위대한 여성이었기에, 에우리피데스는 편협한 이성의 옹호자나 계몽가일 수는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이 박탈된 의미를 잃은 세계 안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현실에 눈을 고정시키며 서 있는 이 두 사람─「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호메로스적 영웅들의 정체를 혹독할 정도로 단호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대야 할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의 결과이다. 즉 인간은 허무 위에 서 있으며, 인생의 우연사에 절망적으로 내맡겨지고 있다는 것이다."9220-1)


8장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


"음유시인(Rhapsode) 크세노파네스는 본질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질료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에서 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는 탈레스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헤시오도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그는 eis theos, 즉 〈신은 오직 하나이다〉(「단편」23)라는 극히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여러 다양한 의인적 신들을 폐기하려고 한다. 그에게서 최초로 신적인 것이 포괄적인 통일체(umfassende Einheit)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가 파악한 신은 역시 분명하게 그 자신과 닮았고, 그가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상)과 비슷하다. 다시 말하여, 그가 생각하는 신적인 것은 음유시인으로서 그가 파악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보족이며, 그가 생각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최고의 것인 까닭에 그것은 신성에게도 갖추어진 최고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으나, 신은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233)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적인 것을 정신보다도 더욱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편, 또 달리 인간의 지식에서도 바로 그 일자(一者)로 향하는 경향을 크세노파네스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광범위한 지식 대신에 집중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을 꿰뚫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통찰력을 이해하는 지혜는 오직 하나이다.〉(「단편」41)" "또 그는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단편」5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눈과 귀는 나쁜 증인이다. 만일 그것들이 오랑캐적인 영혼(barbarous psychas)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단편」107)" "설령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경험이 로고스, 즉 의미의 철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가치하다. 로고스는 모든 말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모든 적절한 말의 그 객관적 존재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237-8)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알크마이온의 경우처럼 감각 지각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인식으로 올라가 일자인 존재의 사고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어떤 종류의 은총에 의해서 지식에 도달한다." "신성은 파르메니데스를 '순수한' 사고로 이끈다. 그는 이 사고에 의해서 순수한 존재를 파악한다. 알크마이온이 감각 지각 및 인간의 지식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귀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반면에,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에 여신은 감각적 지각과 그것에 의해서 파악되는 생성을 미망으로서 배제하도록 가르친다. 여신은 인간적 지식에서 신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유일한 큰 (직관적) 인식으로부터, 사고와 존재, 존재와 비존재 등에 대한 진리를, 즉 그 길의 목표를 연역한다. 그래서 예지계는 그 독립된 실재로서 발견된다."(242-4)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어떤 필연성에 따라 천계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상록」 1, 1, 11행 이하).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일에 몰두하는 대신에, 인간은 최우선적으로 인간적인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적인 일은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탐구자는 각기 신적인 일에 대해서 각양각색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인간은 바람이나 비 그리고 사계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인간사(人間事)에서, 이를테면 경건, 미, 정의 등의 경우에는 그 덕을 획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호메로스로부터 출발해서 고찰해왔던 전통과 단절해서, 키케로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 '철학을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245-6)


9장 덕의 권유─그리스 윤리 사상에 대한 소고


"행복과 유용한 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초기 그리스에서 행복한 인간은 'olbios'이다. 즉 그러한 인간은 충만한 상태에 있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는 호사와 화려함의 빛에 잠겨 있다. 그는 'eudaimon'하다. 즉 그는 만사를 훌륭하게 성취시켜 주는 선한 다이몬(Daimon, 靈)을 자기 편으로 하고 있다. 헤시오도스가 그의 형제 페르세스에게 덕을 권하고 그 보답으로 그에게 행복한 생활을 약속하는 경우에, 그는 부와 번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덕이란 이득이라든지 유용이라는 것과 거의 같다. 그러나 그후 알카익 기에 이르게 되면, 영광의 순간에 인간적인 것을 넘어 신의 영역에 접하고 신과 같이 되는 인간이 eudaimon하고 olbios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광채와 인간 존재의 확대를 알고자 노력한다. 행복으로의 권고를 할 필요는 없어진다. 누구라도 그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255)


"arete(덕)와 agathos(선)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은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 있고, 수완(능력)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행복'이나 '유용'처럼, 단지 그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타당성을 요구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도덕 현상으로의 경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arete는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 다시 말하여 agathos한 사람에게서 기대되는 '능력'과 '공적'이다."(255-6)


"정의(법)는 도덕에서 기대되는 것을 실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도덕에 관한 사색을 깊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명망과 권력을 얻지 않는다'고 하는 이 도덕상의 원칙들은 법률의 토대가 되며, 폴리스의 성문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의식되게 된다." "이러한 격언들은 일체의 공리주의적 고려들을 넘어서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과는 다른 척도로 추정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리스 인들에게는 벌써부터 법(정의)의 관념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dike는 개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다. 실정법적 준칙으로는 'suum cuique(각자에게 그 몫을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dikaiosune는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몫을 지키고, 타인의 세력 범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력이다."(270)


"솔론은 인간이 걷는 길이 아무리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이 한 가지 일은 절대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정의는 설령 그 사람의 손자 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처벌되어야만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위대한 것(영화로운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말했지만, 솔론은 부정의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영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솔론이 왜 이와 같이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가 하는 그 근거라는 것이, 이미 정의에 대해서 헤시오도스나 혹은 아르킬로코스가 이야기했던 바를 훨씬 넘어선 곳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어도,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에 의해서도 아니라, 부정의에 대해서 과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이해 관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와 공평성을 수호하는 것이다."(277)


"소크라테스는 알카익 기-고전기의 도덕 사상에서 후기 고전기-헬레니즘 기의 도덕 사상으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선을 성찰할 때 완전한 공정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위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그것과 대결해야 하는 순간을 고찰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박식하고 지혜로운 교사인 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자신이 사용하는 노골적인 비유를 통해서 산파술(Hebammenkunst)을 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누군가가 자력으로(자기 자신으로부터, aus sich) 획득해야만 하는 지식을 다 드러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아티카 비극이야말로 처음으로 인간의 행동을 심적 결단이라는 계기에서 해석했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행위라는 의식을 개화시켰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제 힘으로 행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을 발견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라."(282-3)


10장 비유, 비교, 은유, 유추─신화적 사유에서 로고스적 사유에로의 길


"신화적 사유와 논리적 사유의 대립은 이것을 자연의 인과적 설명에 적용하는 경우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영역에서도 신화적 사고에서 논리적 사고로의 변화가 행해지고 있음은 곧 명백해진다. 즉 원래에는 신들, 영들, 영웅들의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 후에 이르러 그 충분한 근거가 합리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과학적 인과성이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사건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물(物)의 기원과 생명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그 원인이 정밀하게 규정될 수 없는 현상으로 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상으로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 영역을 멀찍이 넘어선 곳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는 사상, 감정, 소망, 결의 등의 기원도 역시 신들의 개입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존재의 이해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336)


"신화적 사고는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의 형태로 한 사고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사고의 형태는 심리학적으로는 논리적 사유로부터 구별되는데,그 까닭은 논리적 사유가 탐구를 그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서, 신화와 비유의 이미지는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즉 논리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추구되고, 탐구되거나 혹은 인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그것은 모순율의 엄격한 고려를 통해서 방법적으로 정확하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의 미지수 X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만인이 승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신화적 여러 형태는 의미 깊은 것으로서(als sinnvol und bedeutend)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비유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해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즉 그것들의 이미지는 뮤즈의 선물로서 (시인이나 청자의) 마음 속에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337)


"활동하는 인간 정신이 발견한 알카익 기는 극도로 경험에 굶주린 시대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말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피로하지 않은 눈'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 풍성하고 번창하고 있는 신화와 자주 혼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에 가서 신화가 시에, 경험은 막 싹트려고 하는 과학에 소재를 제공하는 분리가 확립될 때까지 행해진다. 그러나 아티카의 비극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에 대한 기쁨이 정신적-심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앞에서 움츠려들게 되면서 풍부한 경험을 즐긴다는 것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고전기의 철학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은 사고를 통해서 통제될 수 있고, 반복 가능성, 인식에 의한 두 대상간의 동일성의 확증 그리고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등에 따르는 엄밀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경험적 사실들만이다. 여기서 많은 것이 제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생하게 생명적인 것이었다."(338)


11장 그리스 어에서의 자연과학적 개념의 형성


"과학적 개념 형성을 위한 언어상의─이것은 동시에 정신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는데─모든 전제는 그리스에서 이미 매우 오래된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만일 그리스 어에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리스에서 어떻게 해서 자연과학과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물이라는 것(물, to hundor)', '차가운 것(차가움, to psuchron)', '생각하는 것(사고, to noein)' 등과 같은 어법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정관사가 이른바, 이와 같은 '추상 개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보편을 특수로 상정하거나, 형용사적인 것 혹은 동사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키케로도 (그리스어에서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아주 단순한 철학 개념을 라틴 어로 재현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것은 단지 관사가 그에게(라틴 어에) 있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342)


"고유명사와 사물명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세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원래 언어 속에 있는 두 개의 형식이다. 실체사는 구체적인 것을 표시하는(지시하는)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사고', '보편자'와 같은 추상명사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추상명사의 복수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명사가 설령 실체사의 독립적인 형태로서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더라도, 추상명사는 그것들과 동일한 근원적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추상명사는 발전된 사고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일반 정관사의 출현과 더불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언어에서도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명확하게 대조되는 추상명사의 전형태가 보이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 추상명사로서 파악되는 많은 말들은 원래는 (신화적인) 고유명사였다. 가령 호메로스의 경우에 공포는 Daimon(초자연력)으로서, 즉 위협하는 자 Phobos로서 나타난다."(345)


"자연과학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 그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만물의 기원과 본질은 '물'이라고 탈레스는 말했다. 그는 이 경우에 오케아노스는 신들의 원천(genesis, 아버지)이라고 말한 호메로스의 말(「일리아스」 제14가 201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신화적 고유명사 대신에 사물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헤시오도스는 모든 신들과 정령들을 계보학적 체계로 정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세우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때 헤시오도스는 사물명사가 아니라 신화상의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탈레스는 만물 가운데 있는 공통의 물질을 상정함으로써 개물(個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물질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법은 흙, 물, 공기, 불을 '원소'로 규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 초기 철학 더욱이 자연철학적 사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354)


12장 인간성의 발견과 그리스 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고전 예술에서 다양한 우연적인 모습을 동반하는 임의의 인간을 묘사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이데아'를 묘사했다고 종종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비그리스적이며, 비플라톤적이다. 어떤 그리스 인들도 결코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플라톤이 단 한번 불과 물의 이데아와 결부시켜 인간의 이데아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농담거리로 말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머리카락의 이데아, 먼지의 이데아, 오물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파르메니데스」 130C). 기원전 5세기의 조상(彫像)을 그 시대의 말을 빌려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 조상은 아름다운 혹은 완전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거나, 또 달리 고대의 서정시에서 인간을 찬미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말을 이용한다면, '신과 같은'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366)


"플라톤과 동시대인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설명하는 대목(15, 253=3, 5)에서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도시, 법률, 기술, 기예 등, 요컨대 전문화(全文化, die ganze Kultur)는 ('교육(교양, paideia)'에 의해서 숙달될 수 있는) 연설과 설득 능력에 따라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인간적인 것, 말하는 능력과 교양(교육), 즉 키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 휴머니티의 중요한 요소들을 이소크라테스로부터 직접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페트라르카에게 넘겨주고 있다. 이소크라테스의 경우 인간임(Mensch-Sein)에 대한 그의 긍지는 그리스 인이며, 아테나이 사람인 국민적 자부심과 결부되어 있는데, 페트라르카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인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간'인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을 가장 잘 교육받은(교양 있는) 민족의 구성원, 다시 말하여 가장 잘 연설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366-7)


"신들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그리스 인들에게는 세계는 Kosmos(질서, 질서 있는 세계)이고, 엄격한 질서가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인들은 이 '자연'의 존재를 비단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자연을 명확히 파악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이 신들의 배후에는 생(生)에 풍부한 내용과 의미 그리고 근거를 주는 한층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더 명확히 이해했다. 유럽의 문화는 이 질서를 인식하는 자에게는 법칙성으로서, 감각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으로서, 행위하는 자에게는 정의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그리스 인들의 발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비록 그것들이 이 세계에 숨겨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진리, 미,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 인의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381-2)


"그러나 그리스 인이 우리의 모델이라는 복고주의적(혹은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신앙은 본질적인 점에서 한정되어야만 한다. 고대 고전주의는 더 이상 고대의 조형예술, 문학, 철학의 여러 작품들 및 정치적 제도들이 정말로 완전해서 그것들이 시간을 초월한 타당성이 있고, 우리의 창조 활동을 위한 도전받을 수 없는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서구적 사고, 시작(詩作), 조형의 모범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신앙은 지난 1세기 반에 걸친 역사적 연구에서 파괴되어버렸다. 고고학 자체가 대개는 그리스 및 로마 문화의 역사적 제약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즉 고대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바로 이 고대의 완전무결한 성과는 우리와 대단히 이질적인 여러 정신적 전제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성과가 더 위대하고 더 의미가 충만하면 충만한 만큼 그 성과는 '시대의 정신'이라는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382)


13장 칼리마코스에게서의 유희에 대하여


14장 아르카디아 : 어느 정신적 풍토의 발견


# 아르카디아 : (베르길리우스가 창안한) 목자(牧者)들의 나라, 사랑과 시의 나라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화를 역사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신화와 역사라는 두 영역은 비극과 역사 기술이라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 이제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경향이 전승에서 해방된 신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 한 가지는 옛날 시대의 영웅들과 사건들이 한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 그것들이 점차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전설상의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 경향의 일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신화를 상연하는 경우에 형편을 낫게 하는 새로운 극적 상황이 고안되는 경향이다.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신화적인 인물들의 심리학적인 해석을 한층 밀고 나아가 그들을 이전보다도 더 자연주의적인 환경으로 옮겨놓았다. 이와 반대되는 다른 쪽의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항상 (이렇듯 현대풍으로 각색된) 신화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강조한다."(413)


"일찍이 그리스 인에게서도 정치적으로 비참한 시대에는, 정치는 이론과 실천으로 분열했었다. 플라톤은 참된 정치적 관심에서 출발했으며, 그의 사회적 입장과 그 자신의 성향은 자신을 정치가로서 활동하도록 방향지웠다. 그런데 그는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서 자신이 활동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기존의 국가 제도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체념하고 정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현존하는 국가 제도에서는 몸둘 장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모든 정치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당면했다. 완전한 국가의 성립을 방해하는 반정신적 요소, 요컨대 부정의, 격정, 권력욕 등이 항시 되풀이해서 그의 사고를 움직이게 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심사숙고해서, 그는 끝까지 객관적으로 정의는 무엇인가, 선은 무엇인가, 이것들에 대한 지식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424)


"베르길리우스는 이 가혹하고 악의에 찬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 현실을 배후로 돌려놓고 있다. 그가 아르카디아로 떠나갈 때, 이 혼란한 시대를 개탄하는 그의 마음에는 이 시대를 다소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나아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원망(願望)조차 없었다. 보다 나은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사고나 의욕이 아니라, 그의 감정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친하고 화목하게 함께 생활하는 목가적인 평화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사이좋게 지내고, 모든 대립을 풀어 하나로 화합하고, 모두가 큰 사랑 가운데 화합하는 황금 시대였다. 이러한 일은 기적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훗날 그가 「농경가」를 지었을 때, 그는 아우구스투수의 업적에서 이 기적을 보았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카디아의 꿈을 실현한 것처럼) 이탈리아에 다시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되찾아주었다."(425)


"그리스 문학에서 알레고리와 상징은 서로 화해하고 있어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한 그리스 시인이 헤파이스토스에 대하여 서술하는 경우, 그것은 불을 의미한다. 이 표현 형식의 발달 경로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도시를 파괴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신이 불의 모습으로 되어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 사조는 이렇게 가르쳤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지 '불'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시인은 반드시 생생하게 묘사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헤파이스토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아름답고, 시적인 것이라고. 신들의 이름의 이와 같은 '환유적(metonyumischen)' 사용의 배후에는 한편으로는 합리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시론과 시적인 수식 욕구가 숨어 있다."(439)


15장 이론과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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