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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평점 :
들어가는 말
"1871년 베르사유에서 출범한 도이치 민족국가를 어째서 단순히 '도이칠란트'라 명명하지 않고 '도이치 제국'이라 명명했던가? 그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이 나라가 민족국가 '도이칠란트' 이상의 것이자 그 이하의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하라는 것은 제국이 수많은 도이치 사람들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프로이센이 주도권을 갖는 도이치 제국이었던 것이다. '도이치 제국'이라는 칭호는 이 부족한 부분을 감추어주는 대신, 그것을 넘어선 부분도 암시했다. 즉 중세에 생긴 '도이치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민족을 초월한 유럽 전역의 제국이라는 함의였다. '도이치 제국',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녔다. 먼저 프로이센이 통치할 수 있는 만큼의 도이칠란트, 또는 도이칠란트가 지배할 수 있는 만큼의 유럽 및 세계라는 두 가지 의미였다. 앞의 것이 비스마르크의 생각이고, 뒤의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에 이르는 길은 도이치 제국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 몰락의 역사이다."(19)
도이치 제국의 성립
"프로이센과 도이치 민족주의 진영─이 둘은 모두 도이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프로이센은 1701년에 처음으로 국가로 등장하여, 1756~1763년에 벌어진 7년 전쟁 이후로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1815년 빈 회의 이후 비로소 도이치 강대국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 프로이센은 언제나 강력하게 폴란드를 지향했으며, 1796~1806년 10년 동안은 절반 도이치, 절반 폴란드의 두 민족 국가였다. 1815년에야 비로소 프로이센은 이른바 서방으로 방향을 돌려 도이칠란트에 편입되었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에 생겨났다. 하나의 도이치 민족국가라는 생각은 19세기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13세기부터 신성로마제국은 점점 더 해체되어 난립한 수많은 나라들의 연합체였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이 이를 특별히 부자연스럽게 여긴 것도 아니었으니, 도이칠란트가 응집된 권력체, 즉 하나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거론조차 될 수 없었다."(23-5)
"처음에 이 둘은 동맹을 맺기는커녕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이런 적대감에는 충분한 이유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오늘날의 일반적인 정치 개념을 동원해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프로이센은 '우파'다. 토지는 깨뜨릴 길이 없는 귀족 지배를 받고, 현대적인 절대주의 관료제로 무장한, 아직도 널리 봉건제의 흔적을 지닌 농업국가였다. 귀족 지배와 절대주의 관료제는 오늘날 우리가 분명히 '우파'로 분류하는 특성이다. 그에 비해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좌파' 운동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혁명 프랑스를 모방했다. 덕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처음부터 자유민주주의 운동과 결속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을 통해 비로소 강력해졌다. 나폴레옹은 도이치 사람들에게 상이한 두 가지 반응을 만들어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선 안 돼!〉 하는 반응과,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하고야 말겠어!〉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이었다."(25-6)
"1815~1848년의 도이치 연방은 항상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공동 지배를 받았다. 오스트리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도이치 연방의 강력한 세력이었으며, 언제나 의장 국가였다. 하지만 또 다른 강대국 프로이센이 있었다. 1815년 메테르니히 재상 치하의 오스트리아는 이 다른 강대국과 협조하기로 결심했었다. 1848년 이후로는 더 이상 그렇지가 않았다. 도이치 연방의 재건 자체가 이미 프로이센의 의지에 맞서 오스트리아가 강제한 것이었다. 두 나라는 새로운 연방에서 경쟁국이자 라이벌, 적대국으로 등장했다. 이 경쟁에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가 우세했다. 1848년까지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억압을 받았다. 1848년 이후로 민족주의는 더는 완전히 억압할 수 없게 되었다. 도이치 사람들이 그 사이 역사적인 일순간이나마 도이치 제국의 실현 가능성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경험을 잊지 않았다.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이제 전혀 힘이 없는데도, 항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 인자가 되어 있었다."(35-6)
"프로이센은 도이칠란트 정책을 통해 언제나 '작은 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단순히 북도이칠란트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에 비해 오스트리아는 다민족국가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통일 도이칠란트의 지배 세력도 되기를 바랐으니, 일종의 슈퍼 도이칠란트를 겨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오스트리아의 비스마르크인 슈바르첸베르크 영주가 1850년에 실제로 추진했던 (당시) '7,000만 제국'을 겨냥하는 길이었다. 슈바르첸베르크는 1852년에 갑작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사고방식은 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앞으로 도이칠란트를 놓고 벌어질 싸움에서 프로이센을 격퇴해야 할, 가능하기만 하다면 파괴해야 할 경쟁자로 간주하려는 그의 경향만은 죽지 않았다. 자극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던 비스마르크는 그 사실을 아주 강하게 느꼈다. 그가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던 시절, 오스트리아의 도이칠란트 정책은 직접적인 공격성을 덜 취하고 있었음에도 그랬다."(36-7)
# 대對오스트리아 전쟁의 결과물(1866년)
1. 프로이센의 영토 확장 : 하노버 왕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선제후령 헤센, 나사우 등지를 프로이센 주州로 편입
2. 북도이치 연방 창설 : 보통·평등선거로 선출된 '제국의회'와 한 명의 '제국총리'라는 민주주의-의회주의 요소 포함
3. 남도이치 국가들과 동맹 체결 :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와 군사동맹 및 관세동맹 체결
4. 오스트리아의 변화 : 1,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도이칠란트와 결별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국가로 변모
"1870년에 도이치 민족주의 운동은 나폴레옹 시대 원래의 기원과 결합하였다. 다시 프랑스에 맞서고, 다시 나폴레옹 황제에 맞서게 되었으니, 프로이센, 북도이칠란트, 심지어는 남도이칠란트의 민족주의자들조차 1870년의 프랑스 전쟁을 19세기 처음 10년 동안 나폴레옹이 행한 정복 전쟁에 대한 복수라고 느꼈던 것이다. 19세기 초의 민족적 자부심과 프랑스 증오가 갑작스럽게 모조리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도이치 사람들이 강자였다!" "영국 역사가 테일러는 이따금 (남도이치 국가들의 독자적인 주권을 어느 정도 유지해준) 비스마르크를 제국 건설자가 '제국 훼방꾼'이라 부르고 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민족 통일을 허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도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도이치 제국은 북도이치 연방 시절보다 훨씬 더, 연방국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연합국가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모든 작은 도이치 소망들이 충족되고 나면 가장 먼저 나타날 민족주의 진영의 목표는 큰 도이칠란트였다."(48-50)
비스마르크 시대
"비스마르크는 국내에서 보수주의 진영과 민족주의-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타협에 기반하여 제국을 건설했다. 비스마르크는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적들과 합의를 보고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정직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는 두 가지 근거를 가진 것으로, 첫째로 자기가 자유주의자들의 민족주의 열망을 만족시키고, 둘째로는 화해를 한 다음 그들을 제국의 국내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생각에 근거했다. 비스마르크는 개인적으로 보수적인 군주제 신봉자였다. 하지만 그의 제국이 기반을 두고 있는 헌법의 타협점은 절반 입헌군주제를 지향했고, 그가 제국 건설에서 지향한 정치적 타협은 보수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의 지속적인 연합정권이었다. 1867~1879년에 '철혈 총리'는, 전체적으로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되 자유주의자들과 함께 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1871년 이후로 민족주의 자유주의자들과의 타협이 더는 내부의 만족에 도달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었다."(55-6)
"중앙당das Zentrum과 사회민주당SPD은 제국 건설과 거의 동시에 창설되었다." "중앙당은 도이치 가톨링당이다. 가톨릭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부정할 길이 없이 민족을 넘어선 단체다. 중앙당은 당시 강력하게 로마를 지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정당이 이른바 알프스 산맥 너머 로마를 바라보기 때문에, '산맥너머 당'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중앙당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요소는 전혀 다른 점이었다. 다른 모든 도이치 정당들은 계급정당이었다. 보수당은 귀족의 정당이고, 자유당은 당시 강력하게 대두하던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의 정당이었고, 방금 등장한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순수한 노동자 정당이었다. 그에 비해 중앙당만은 그 어떤 계급과도 결속되지 않은 채, 모든 계급을 포괄했다." "중앙당의 이런 특성, 즉 계급을 넘어서는 그 구조가 비스마르크에게는 으스스했다." "그래서 그는 1870년대에 중앙당을 그냥 박멸하고 찢어 없애려고 했지만 이 일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다."(56-8)
"사민당은 계급정당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제4계급인 노동자계급도 정치적 조직을 이루어 토론하고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한다는 것을 철저히 이해했다." "비스마르크가 사민당에게 화를 낸 것은 그 계급적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첫째로는 사민당의 국제적인 태도, 둘째로는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으로 당시 아직도 사민당이 갖고 있던 혁명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78년부터 사민당에 맞서 가차 없는 전쟁을 펼쳤다." "사민당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후반부에는 고작 절반만 합법이었다. 사민당은 의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려 노력할 수 있고, 선거운동을 하고, 실제로 의회에 대표자를 내보낼 수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이런 헌법상의 권리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밖에 나머지 모든 일이 금지되었다. 그런데도 이런 박해의 시대에 사민당은 특이할 정도로 꾸준하게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것이 비스마르크 시대를 뒤덮은 무거운 정치적 먹구름의 하나였다."(58-9)
"대외적으로는 새로운 강국 도이칠란트에 맞서 프랑스-영국-러시아 연합이 결성되었는데, 이는 도이치 제국이 1871년에 이룩한 것을 넘어서는 순간 부딪치게 될 연합이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깊은 모욕감을 느꼈다. 자신이 취한 위협의 몸짓이 어디까지나 방어용이지 공격용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영국과 러시아의 정치가들에게, 특히 러시아 총리인 고르차코프에게 깊은 개인적인 실망감을 드러냈다. 또 다른 점이 더욱 중요했다. 1875년의 '전쟁 코앞까지 가는 위기' 이후로는, 연합의 '악몽'이 프랑스의 복수라는 '악몽'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순간부터 비스마르크가 활발한 평화 정책을 펼쳤다고 말할 수 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 방지가 곧 도이치 제국의 이익이라고 보는 정책이다. 오늘날 비스마르크의 명성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평화 정책이지만 그가 도이치 제국이 위험한 상황에 연루되는 일들을 막는 것에 실제로도 성공했는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65-6)
"비스마르크는 정치가로서의 유능함과 최고의 정직한 의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자기 시대에 완전히 이루지 못했다. 그 자신이 제국 건설 과정에서 강대국 프랑스와의 갈등을 통해 도이치 제국에 지속적인 적, '불구대천 원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베를린 국제회의와 그 이후의 정책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이 동맹을 맺을 길을 닦아놓았다. 동시에 그가 막아보려고 노력하기는 했어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 갈등을 속에 지닌 채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당시 유럽의 [광대한] 터키 영토를 물려받으려고 했다. 그를 통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에는 장래의 갈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도이칠란트는 그의 가장 깊은 의도와는 반대로, 1878~1879년에 이미 이 갈등에 연루되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은 1914년 1차 대전을 만들어낸 직접 원인이 된다."(80-1)
황제 시대
# 비스마르크 퇴임(1890)의 두 가지 직접적인 결과
1. 사회주의자 [박해]법 연장 무산
2. 러시아와의 배후 안전 계약 연장 무산
"1890년대 중반까지도 혁명은 사민당의 강령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방향이 차츰 발전되어 나왔다.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은 이랬다.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사회 속으로, 국가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어느 날인가 국가를 접수할 수 있어야 한다." "당대회의 영원한 수정주의 논쟁에서 수정주의자들은 정기적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강해졌다." "황제 시대에는 프로이센 헌법 갈등이나 문화투쟁, 사회주의 박해 같은 것이 없었다. 여러 정당들이 어울린 의회는 국내 정치에서 통치를 위해 점점 더 중요해졌는데, 정부는 의회에서 새로운 법률안을 계속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민주화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그러면 과장이 될 테니까─장래 민주화의 조용한 사전事前 정지 작업이라 할 수 있는 대중 정치화가 이루어졌다."(87-8)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다음에 일종의 '대국大國 감정' 같은 것이 생겨났다. 빌헬름 황제 시대에 매우 많은, 그것도 가능한 모든 계층 출신 사람들이 갑자기 원대한 민족적 전망, 민족적 목적을 눈앞에 그렸다. 〈우리는 세계적 강대국이 된다, 우리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도이칠란트가 전 세계의 앞장에 선다!〉는 전망이었다. 동시에 그들의 애국심은 이전과는 다른 성격이 되었다. 이 시기 도이치 사람들을 고무한 '민족주의'는 이제 스스로 아주 특별한 존재, 미래의 강대국이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이었다. 이런 변화는 기술 산업의 발전을 통한 외적 생활의 개선과 보조를 맞추었다." "당시 도이치 사람들은 많은 영역에서 유럽의 선두에 서 있었다. 영국이 아직 느린 속도로, 프랑스는 더욱 느린 속도로 산업화가 계속되었고, 러시아는 이제 겨우 산업화의 초기에 들어서고 있는데, 도이칠란트는 기술-산업 측면에서 놀라운 속도로 현대화되었고, 또한 그에 대한 엄청난 자부심을 지녔다."(90)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유럽의 식민 제국주의 시대였다. 모든 큰 국가들이 유럽을 넘어 유럽 밖으로 확장하려는 '세계정책'을 추구하고, '세계 강대국'이 되려고 했다." "당시 유럽 전체에 저항할 길 없는 설득력을 가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나타났다. 단순히 유럽에서의 권력 체제와 세력 균형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바야흐로 세계 권력 체제가 들어서고 있다. 이 체제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세계 패권을 요구해온 유럽의 국가들이 대규모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고, 유럽의 세력 균형이 유럽 중심의 세계 세력 균형으로 넘어갈 것이다." "새로운 판에서 도이칠란트도 이전의 식민지 강대국들과 나란히 하나의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한편, 영국은 다른 나라들과 나란히 세계 강대국의 하나라는 지위로 내려와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그들의 눈앞에 떠돌았다. 뒷날의 제국총리 뷜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늘로 밀어넣으려는 게 아니다. 그냥 우리도 양지로 들어가자는 것뿐이다.〉"(92-3)
# 황제 시대의 세 가지 위기
1. 제1차 모로코 사태(1905) : 프랑스가 이집트를 영국에게 넘기는 대신 모로코 지역에 대한 식민 지배권을 인정받자 도이치 제국은 황제를 탕헤르에 파견하면서 이에 맞섰지만 오히려 영국-프랑스-러시아 연합을 성사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2. 러시아-오스트리아 갈등(1908) :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의 비호를 받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하여 갈등이 발생하자, 도이치 제국은 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사태를 종결시켰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군비 강화를 촉진했다.
3. 제2차 모로코 사태(1911) : 프랑스가 알헤시라스 조약을 위반하여 남부 모로코로 영토를 더욱 확장하자, 도이치 제국은 또다시 포함砲艦 한 척을 보내 무력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영국이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제국총리 베트만 홀벡은 전쟁 발발시, 도이치 제국이 승리하려면 오스트리아의 참전, 사민당의 동참, 영국의 중립이라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 세 조건을 토대로 바라보면, 1914년에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한 후에 갑자기 등장한 상황은 도이치 제국에 유리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은 도이치 제국의 전쟁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전쟁, 곧 오스트리아 대對 세르비아의 전쟁이 된다.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을 들어 전쟁에 개입한다면, 첫째로 오스트리아가 도이치 제국 편에─이는 오스트리아 전쟁이지 도이치 전쟁이 아니니까─설 것이고, 둘째로 도이치 사민당이 차르 러시아에 맞선 전쟁을 승인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셋째로, 그리고 이것이 가장 좋은 점인데, 영국은 거의 확실하게 이런 동유럽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즉시는 아닐 것이다─실제로 이것은 올바른 생각이었다. 영국은 역사상 순수한 동유럽의 문제에는 늘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4-5)
"(그러나 중립국 벨기에를 통과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제압한다는 슐리펜 작전 계획은) 처음부터 영국을 적의 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영국이 개입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영국은 프랑스가 완전히 힘을 잃는 꼴을 그대로 조용히 앉아서 구경할 수만은 없었다. 패배한 프랑스를 포괄하는 도이치 세력권이 영불해협과 대서양까지 뻗어 나온다면, 영국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대륙의 강력한 세력과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벨기에는 영국을 마주 보는 해안 국가다. 벨기에 해안선을 지배하는 자는 영국을 위협하게 된다. 특히 그것이 빌헬름 2세 치하의 도이칠란트처럼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나아가 법적인 측면도 있었다. 도이칠란트를 포함하는 유럽의 강대국들은 수십 년 동안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해왔다. 이 중립성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으로서는 벨기에라는 완충 국가가 파괴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볼 수는 없었다."(117-8)
"물론 대륙의 모든 강대국은 1차 대전을 대규모 공격으로 시작하면서 제각기 빠른 승리를 희망했지만, 모든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하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갈리치아 지방에서)와 도이칠란트(동프로이센에서)를, 그리고 프랑스가 로렌과 아르덴에서 도이칠란트를 공격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또한 도이치 군대가 벨기에와 프랑스를 공격한 것도 실패했다. 전쟁 처음 몇 달 동안에 이미 모든 전장에서─모든 나라 참모부의 확신과는 달리!─1차 대전의 결과에 기본이 되는 사실이 드러났다. 곧 당시의 전쟁 기술 수준에서는 방어가 공격보다 우세했다. 공격은 고작해야 토지를 얻을 수 있었을 뿐, 심지어는 적대국이 세르비아나 벨기에 같이 작은 나라라 해도 적국을 전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준이 되지 못했다. 덕분에 1차 대전은 소모 전쟁의 우울한 특성을 지녔다. 전략적 수확도 없이 거듭 되풀이되는 학살 전쟁이었을 뿐이다."(121-2)
"사민당 내부의 좌익 세력은, 1914년에 벌써 당의 애국적 전쟁 정책을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동참했다. 다음 몇 해가 지나는 동안 사민당의 좌익 세력이 더욱 강해지다가, 1917년에 마침내 새로운 '독립 사회민주당'USPED이 갈라져 나왔다. 이 정당은 전쟁을 거부하고 전쟁 채권 발행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의회 안에 두 그룹이 형성되었다. 우파 그룹은 부분적으로 상당히 극단적인 전쟁 목적, 곧 정복과 합병을 추구하면서 거대한 식민 제국, 거대한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다. 그에 비해 중도좌파 그룹은, 그냥 멀쩡한 상태로 전쟁에서 빠져나오기만 해도 기뻐해야 하며, 그렇기에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합의 평화조약, 곧 '영토 합병과 전쟁배상금이 없는'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보았다." "마치 위대한 전쟁 목적만 있으면 이미 승리를 거둘 수 있다거나, 아니면 합의할 각오만 하면 벌써 타협에 의한 평화조약을 이룰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논쟁은 몹시 격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129-31)
"도이칠란트는 1917년에 체제가 엉망이 되었다. 겉으로는 헌법상 바뀐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헌법이 더는 기능하지 못했다. 도이치 제국의 외교는 실질적으로 군 총사령부가 이끌었고, 국내 정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의회 다수파가 이끌었다. 서로 날카롭게 나뉘어 대립하던 이들 두 개의 권력 중심부는 많은 문제들을 두고 서로 협조했다." "의회 다수파는 '총력 동원령'에 동의했으나, 국내 정치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밑바탕에 깔았다. 이른바 '보조 인력법'이 결의되었고, 이로써 처음으로 기업가와 노동조합의 장래 임금 협상권, 기업체 안에서 노동조합의 협력 등과 같은 일들이 관철되었다. 미래를 포함하는 이런 장치들은 당시 도이칠란트에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는데, 총사령부는 그것이 못마땅했으나 자신들이 군사 프로그램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이처럼 1917년 말 도이칠란트에서 황제와 제국총리는 이미 실세가 아니었고, 한편에 군사령부, 다른 편에 의회 다수파가 실세였다."(132-3)
1918년
"1918년의 시작을 알리는 대형 사건은 볼셰비키 러시아와의 평화조약, 곧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이었다." "막 시작된 러시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그리고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협상국들의 개입 아래서, 도이치 제국의 실권자들은 갑자기 이 조약을 넘어 러시아 전체를 도이칠란트의 종속 아래 둘 가능성을 보았다. 도이치 군대가 조약에서 확정된 국경선을 훨씬 넘어 진군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918년 여름에 도이치 군대는 북부 나르바에서부터 드네프르 강을 넘어 '돈 강변의 로스토프'에 이르는 긴 선상線上에 섰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의 2차 대전 때 히틀러가 차지한 만큼이나 멀리 진출한 것이다. 러시아의 거대한 지역을 이미 손아귀에 넣고도, 볼셰비키 통치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진짜 러시아를 도이치 제국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도이치 동부 제국은 1918년의 나중에 일어난 사건들로 인해 그대로 침몰했고 거대 동부 제국의 환영幻影만 뒤에 남겼다."(137-9)
"서부전선에 집중하게 된 루덴도르프는 미국이 대규모로 개입하기 이전에 전선戰線을, 그것도 영국 전선을 무너뜨리려고 모든 것을 동원했다." "여기서 1차 대전이 적어도 서부에서는 아직도 보병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어떤 군대도 개별 군인의 행군 속도보다 더 빨리 진격할 수는 없었다. 방어군은 배후에 철도를 두고, 철도를 통해 다른 전선에서 병력을 이쪽으로 수송해 올 수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3월 21일에 도이치 총공격이 시작되어 며칠 동안 대규모 승전보가 나오고, 상당수의 포로와 엄청난 지역의 확보가 이어졌다. 그런 다음 사태 진행이 차츰 느려지다가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도이치군의 공격은 3월 말에는 이미 전략적으로 실패한 공격이 되었다. 말하자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앞이 꽉 막혀버린 것이다. 엄밀히 살펴보면 그로써 이미 겉보기로나 실질적으로나 서부전선에서 도이치군의 승리 가능성은 물 건너간 일이었다."(141-3)
"이런 상황에서 루덴도르프는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9월 28일에 그는 휴전 청원을 하기로 힌덴부르크와 합의했다." "외무장관 힌체는 윌슨 대통령의 공감을 얻기 위해 국내 정치 측면에서 휴전 청원을 뒷받침하자고 제안했다. 즉 미국 대통령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면 의회 민주주의 정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새로운 민주주의 도이칠란트가 평화를 청하는 것이 좋겠다. 윌슨 자신이 내놓은 평화 강령에 기반을 둔 평화를 말이다! 그러니까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구성하고, 그것 말고도 제국을 의회주의-내각제 군주국으로 만들도록 헌법을 고쳐야 한다. 내각제 국가에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장관들과 총리를 해임할 수 있다. 즉 임박한 군사적 붕괴 때문이 아니라, 이런 민주주의 개혁의 측면에서 평화를 청원한다는 인상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9월 29일 총사령부에서, 곧이어 황제가 등장하여, 즉각적으로 의회 다수파 출신 장관들로 구성된 내각제 정부를 만들기로 결정했다."(147-9)
"암담한 이 순간에 사민당이 이 돌파구로 뛰어들었다. 이런 특이한 발전은 평화 시에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지만, 이제 다가오는 몇 주와 몇 달 동안 완전히 결정적인 것이 될 참이었다. 사민당은, 적어도 사민당 다수파는 다른 어떤 정당보다도 책임을 떠맡을 각오가 되어 있어다. 사민당 당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우리더러 책임을 떠맡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돌파구로 뛰어들어야 하고', 도이치 제국에서 아직 구할 수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민당에게 휴전 청원을 내라는 요구를 하고, 수십 년 전부터 그들이 이루고자 노력한 것, 곧 나라를 의회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에 동의해주었으니 더 말할 게 무엇이랴. 이제 의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와 장관들을 경질할 수 있고, 그 밖에도 이미 시효가 끝난 프로이센의 [납세액에 따라 각기 심한 차별적 권리를 두는] 3등급 투표제를 폐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민당은 얼마간의 토론과 숙고를 거친 끝에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로 했다."(150)
"11월 초에 발생한 도이치 혁명은, 정부에 아무 보고도 하지 않은 채로 영국 함대에 맞서 한 번 더 거대한 일전을 감행하겠노라는 해군 지휘부의 단호한 결정을 통해 촉발되었다. 도이치 함대 병사 일부가 이 계획에 반대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마침내 11월 4일 킬Kiel 시의 대규모 해병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해병 폭동은 시기적으로 '황제 문제' 논쟁─윌슨 대통령이 군주제 폐지를 요구하면서 벌어진 논쟁─과 맞물려 일어난 일로, 정치적으로는 이렇다 할 목표도 없었다. 하지만 함대와 도시를 장악하고 나자 해병들은 폭동을 일으킨 죄로 사형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미 시작한 일을 어떻게든 끝까지 밀고 나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혁명에는 지도자도 없었지만, 이는 대중에게서 터져 나온 통제하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후방의 군대는 제각기 병사 평의회를 결성하고, 공장은 제각기 노동자 평의회를 만들었다." "더 이상 혁명을 멈출 수 없을 듯이 보였다. 11월 9일에는 수도 베를린마저 혁명 세력이 장악했다."(154-6)
"11월 9일에 총사령부는 대부분 사단장인 39명의 전방 지휘자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휴전이 이루어질 경우 군대가 왕좌의 유지를 위해, 즉 황제를 위해 혁명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인지 여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들의 한결같은 판단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군대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폐하를 모시고 도이칠란트로 돌아갈 각오는 되어 있지만, 밖을 향해서든, 안을 향해서든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다는 것이다. 그에 뒤이어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10월 말에 자기들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임명한 그뢰너 장군을 보내, 황제에게 퇴위나 적어도 망명을 권하기로 결심했다. 황제는 11월 9일에 다시금 특이하게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이런 권고를 따랐다. 빌헬름 2세 황제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고, 그로써 자신의 황제 직위뿐만 아니라, 장래의 군주제 부활의 기회도 함께 파묻어버렸다. 11월의 나중에 나온 공식적인 퇴위 선포는 실질적으로 거의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159-60)
"휴전협정은 11월 11일에 발령되었다. 8월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승리의 기분에 젖어 있었다. 10월 초에 휴전 청원의 소식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은, 군 최고사령부가 아닌 제국 정부가 전쟁이 승산이 없다고 선포하고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11월 9일에는 정부가 순수한 사민당 정부로 바뀌더니 그와 동시에 [해병들의 폭동으로 시작된] 혁명이 성공[=공화국 출발]했고, 영주들은 모조리 퇴위했으며 황제도 퇴위했다는데, 어쨌든 황제는 도망을 갔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별다른 정보가 없던 도이치 대중에게, 순수하게 시간적 경과로만 따지면 사건은 다음과 같은 모양새였다. 우리는 전쟁에 이기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동안에도 언제나 합의평화만 바라던 약삭빠른 놈들이 정권을 잡더니 전쟁을 포기해버렸다. 그러자 혁명이 일어났고, 이어서 우리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드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런 토양 위에서 나중에 이른바 '배후에서 단도 휘두르기'라는 전설이 생겨났다."(162-3)
"1918년은 거대한 거리 전투로 끝을 맺었다. 베를린 전투에서 혁명군인 민간 해병대는 옛날 군대 잔당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베를린에서 새해는 이른바 '스파르타쿠스 주간'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기간에 최초의 의용군이 혁명 세력의 새로운 시작을 잔인하게 유혈 진압했다." "12월과 1월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1919년 전반부에 수많은 도이치 대도시들에서 되풀이되었다. 일종의 조용한 내전이 진행된 것이다. 이 내전에서 의용군은, 에버트-노스케 정부의 완벽한 비호를 받아, 이어서 에버트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샤이데만-노스케 정부의 비호를 받아, 수많은 대도시에 아직 남아 있던 노동자 평의회와 병사 평의회 출신 행정부 인물들을 피로써 쓸어냈다. 사민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 다수파는, 황제 시대 군대의 반혁명 세력과 결탁하여 1918년의 혁명을 실질적으로 없었던 일로 만들었다. 이 혁명에서 단 하나의 결과만 남았으니 곧 군주제의 종결이었다."(167)
바이마르와 베르사유
"1914년 이전까지 도이치 제국은 당시 유행하던 표현대로 하자면 '포위된' 나라였다. 4개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 중 세 나라인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1차 대전에서 도이치 제국에 맞서 연합했다. 네 번째 강대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차 대전의 결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 대신에 허약한 후속 국가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크기로 보아 전혀 강대국이 될 수 없었으니 조만간 가장 가까이 있는 강대국, 곧 도이칠란트의 영향력 아래 들어올 것이다. 이제 소비에트 연방이 된 러시아는 유럽의 체제 바깥에 존재했다. 러시아는 서방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또 다른 추방된 나라인 도이칠란트와 연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전쟁의 결과물인 무장 해제와 전쟁배상금을 통한 약화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러니까 제국은 장기將棋 게임에서 흔히 말하는 바, (패전 후에) 전쟁 전보다 더욱 강화된 위치를 갖게 된 것이다."(174-5)
"도이칠란트에서는 내면으로 조약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니 조건이 수정되어야 마땅하다는 전반적인 합의를 이룬 가운데, 처음부터 우선순위를 둔 논쟁이 있었다. 무장해제 규정을 비껴가며 먼저 군사 강국이 되어야 하나, 아니면 배상금 문제를 떨쳐버리고 우선 경제를 재건해서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어야 하나? 앞의 주장은 국방군의 정책으로, 특히 당시 사령관이던 제크트 장군의 정책이었다. 이것이 먼저 관철되었다. 제크트는 비밀리에 재무장 노력을 했고, 아주 분명히 보이는 일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오로지 러시아와의 협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아주 일찌감치, 1920년대 초에 벌써 국방군과 붉은군대 사이에 비밀 군사 협력이 이루어졌다. 소련은 도이치 국방군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금지된 무기, 탱크, 공군, 화학무기 등을 연습할 땅을 제공했다. 그 대가로 국방군은, 당시 아직 건설 중이던 붉은군대에 교육과 도이치 참모부의 여러 방식을 전수했다."(176-7)
"도이치 외교부와 전체 정책에서는 우선순위가 달랐다. 재무장이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배상금 부담을 털어내고 그로써 도이치 경제를 재건할 기회를 갖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목표를 위한 도이치 정책은 사회적 파국을 감수한 것이었다. 바로 국내 정치의 분위기에 파괴적으로 작용한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정책이었으니, 이는 1919년에서 1922년까지 빠른 속도로 커지다가, 1923년에는 질주 속도로 진행되었다." "물론 일시적인 경제적 이점도 있기는 했다. (실질임금이 계속 떨어지고는 있었지만) 도이치 산업체는 저축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전후에 대규모 병력의 귀환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에서도 생겨난 대량 실업 사태를 피할 수가 있었다. 도이치 산업체는 엄청난 물량을 계속 낮아지는 가격으로 수출하면서 계속 가동되었다. 그러니까 도이칠란트에서 인플레이션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계층은 노동자가 아니라 저축 자산을 가진 중산층이었다."(179-80)
"(1929년 세계 경제공황으로 등장한) 디플레이션 정책은 배상금을 떨쳐내기 위해, 바이마르 시대 도이칠란트가 떠맡은 두 번째 대규모 사회적 파국이었다. 세계 경제공황은 단순히 도이치 제국만이 아니라 (러시아를 뺀) 서방세계 전체에 타격을 주었다. 경제공황을 맞은 모든 나라들, 특히 미국도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정치적 지불, 즉 한편에는 미국을 향한 유럽 연합국의 부채 상환, 다른 한편에는 서유럽 연합국을 향한 도이칠란트의 배상금 지불은, 점점 더 붕괴하는 세계 경제에 부담일 뿐으로 더는 지속할 수 없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1931년에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이런 모든 정치적 지불의 중단을 요구하고, 우선 1년 동안 이른바 '후버 모라토리움'을 단행했다." "1932년 로잔에서 30억 마르크의 최종 금액이 합의되었지만, 이 돈을 실제로 갚지도 않았고, 요구도 없었다. 그러니까 당시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은, 도이칠란트를 일부러 가난하게 만들어 배상금에서 벗어난다는 자신의 정책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188-9)
"1932년에 도이칠란트는 수정주의 노선에서 또 다른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해에 제네바에서 국제 군축회의가 열렸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서방국가들은, 도이칠란트의 무장해제를 전반적인 무기 감축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었었다. 이 규칙이 이번 도이치 정책의 지렛대가 되었다. 도이치 대표는, 서방국가들이 도이칠란트의 강압적인 무장해제만큼 무기 감축을 하든가 아니면 도이칠란트에도 그들과 동일한 정도로 재무장할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으로 도이칠란트는 성공을 거두었다." "1932년 12월 제네바 군축회담에 참석한 서방국가들은, 이제 더는 브뤼닝이 아닌 슐라이허를 수반으로 하는 도이치 정부에, 대등한 군사적 무장의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러니까 1932년 말에 도이칠란트는 여러 우회로들을 거쳐서, 1919년 이후로 강대국으로의 부활에 걸림돌이 되던 두 개의 핵심적인 부담, 곧 엄청난 전쟁배상금 지불의 의무와 매우 작은 방어력만 유지할 의무를 털어버린 것이다."(190)
힌덴부르크 시대
"새로운 공화국은 황제 국가의 전체 시설들, 군대, 관료 집단, 사법부, 교회, 대학들, 심지어 대규모 농민들과 사업가들까지 거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그들이 지금까지와 똑같은 성격과 옛날의 품격, 사회의 기준이 되는 드높은 지위까지 고스란히 지니도록 해주었건만, 그들은 거부의 자세를 견지했다. 거부감은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고위 관료와 장관들은 투덜대며 충성했다. 국장급과 서기관급 관리들은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고 또 쓸모도 있었지만, 옛날 국가에 대해 지녔던 열광을 지니지 않은 채 그냥 임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그들은 공화국 초기에 우파 쿠데타, 곧 1920년의 카프Kapp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도, 일종의 수동적 저항을 통해 쿠데타 정부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고작 이것이 공화국 정부가 옛날 엘리트층에서 찾아낸 가장 호의적인 태도였다. 군대는, 예컨대 카프 쿠데타 때, 고위 관료층과는 달리 합법적 정부와 불법적 정부 사이에서 냉정한 중립을 지켰다."(198-9)
"각종 대학들에서 공화국의 처지는 몹시 나빴다. 당시 대학생들과 교수들, 고등학교 교사들과 고등학생들은 직립부동의 반反공화파, 군주국 지지, 민족주의, 보복주의 입장이었다. 교회의 경우 이런 태도가 조금 온건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적어도 개신교는 오늘날 좌파인 만큼이나 당시에는 우파였다. 가톨릭 중앙당이 정부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가톨릭교회도 공화국에 대해 극히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산업계의 사정은 더 복잡했다. 혁명 직후인 11월에 기업주와 노동조합들 사이에 '슈틴네스-레기엔 협정'이 맺어졌다. 노동조합과의 협조 아래 미래의 임금 조건들을 규정하겠노라는 일종의 평화조약이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기업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적대적인 계급적 이해관계를 도로 날카롭게 만들었다." "이 모든 그룹들의 거부감이야말로, 1919~1924년까지 에버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공화국이 도이치 제국의 지속적인 국가 형태로 굳어질 수 없었던 이유였다."(199-200)
"이어서 중간기인 1925~1929년 사이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갑자기 견고해진 듯이 보였다. 이제 처음으로 헌법에 따라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등장했다." "황제 시대의 지배 계층은 공화국에서도 실질적인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국가가 진짜 자기들의 나라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러던 그들이 이제 갑자기 달라진 눈길로 이 나라를 바라보았다. 힌덴부르크 대통령 치하의 공화국은, 힌덴부르크가 최고로 존경할 만한 황제 시대 핵심 인물의 하나로서 세계대전 기간에 이미 일종의 대리 황제 노릇을 했던 사람이니만큼, 에버트와 사민당의 공화국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그때까지 의회에서 국가에 거부감을 가진 가장 강력한 우파 정당, 곧 도이치 민족주의 국민당이 이제 공화국 정부에 동참할 각오를 했다는 사실에서 재빨리 드러난다." "더는 중도-좌파 정당들에만 의존하지 않고, 중도-우파 연합에 의해서도 아주 정상적인 정부를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공화국을 견고하게 만들었다."(200-1)
"1929년 10월에 세계 경제공황이 터졌다. (사민당이 주도하고 우파 자유주의자들이 참여한) 대연정 정부를 이끌어 온 슈트레제만이 매우 불운하게도 바로 이 10월에 죽었다. 그러자 정부는 도이칠란트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악화된 이 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정부가 붕괴되고 1930년 3월에 힌덴부르크는 슐라이허의 충고를 받아들여 예정대로 브뤼닝을 총리로 지명했다. 브뤼닝은 헌법 48조에 근거하여, 의회를 고려하지 않고 통치할 전권을 대통령에게서 위임받았다. 이 48조 조항은 국가원수가 긴급사태라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긴급명령을 통해 의회의 입법권을 무시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은 의회 해산 권한을 지녔다. 의회가 대통령의 긴급명령을 철회할 경우, 대통령은 언제라도 의회를 해산할 수 있었다. 이제 브뤼닝은 대통령의 이름으로 이 모든 권한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힌덴부르크의 배후에 있는 세력이, 군주제 부활을 목적으로 계획한 쿠데타를 위한 과도정부였다."(205)
"브뤼닝 정권은 형식적으로는 헌법의 틀을 지켰기에 역설적이게도 브뤼닝이 바이마르 헌법의 최종 수호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세계 경제공황이 터지자, 브뤼닝은 이제야말로 외교적 측면에서 절호의 기회를 보았다. 이는 곧 도이칠란트에서 경제 위기를 의도적으로 과격하게 악화시켜서 전쟁배상금을 털어낼 기회였다. 그것이 처음에는 미리 기획된 쿠데타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는 1930년 7월에 의회를 해산했고, 9월에 새로운 선거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선거에서 히틀러의 민족주의-사회주의[=나치] 정당이 갑자기 제2정당으로 올라선 것이다. 저 '좋던' 힌덴부르크 시절에는 그냥 소수당에 지나지 않던 정당이었다. 이 정당은 유권자의 19퍼센트에 해당하는 600만 표를 얻어 107개 의석을 차지했다. 이로써 도이치 국내 정치 무대에서 앞으로도 계속 만나게 되는 새로운 세력이 갑자기 나타났다."(206-7)
# 나치당의 급부상 요인
1. 경제공황이 야기한 빈곤을 저지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현
2. 상처입은 자부심과 원한을 품고 있던 민족주의의 재등장
3. 지도자를 갈망하는 대중의 마음을 점령한 히틀러의 매력
"슐라이허는 브뤼닝에게 히틀러 운동이 더 막강해지기 전에 군주제 쿠데타를 끝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브뤼닝이 꾸물거리자 그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하여 브뤼닝을 밀어내고 새로운 권위주의 헌법으로 넘어가는 일을 완수할 총리를 임명하려 했다. 이 시점에 슐라이허가 찾아냈다기보다 거의 만들어낸 인물이 바로 프란츠 폰 파펜이었다." "파펜은 브뤼닝과는 반대로, 즉시 쿠데타를 시작했다. 맨 먼저 의회를 해산했다. 7월 말에 선거가 있었고, 나치당이 이번에는 유권자의 37퍼센트를 얻어 도이칠란트 제1정당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강력해졌다. 1932년 7월의 의회는, 시민 계층과 사민당이 아무리 대규모 정당연합을 해도 정부를 구성할 다수가 되지 못한 최초의 의회였다." "이에 앞서 파펜은 총리로 임명된 직후에, 이른바 '프로이센 타격'을 수행했었다. 바이마르 정당연합이 계속 정권을 잡아온 합법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중단시킨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는 프로이센의 독립을 진짜로 끝낸 사건이었다."(211-4)
"어쨌든 슐라이허는 11월 말에 파펜의 국가 쿠데타 계획에 동참하지 않고, 파펜을 그대로 몰락시켰다. 이어서 힌덴부르크는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국가 쿠데타를 연기하고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했다." "그 사이 파펜은 어떻게든 히틀러를 통제해볼 속셈을 계속 품고 있었다." "파펜은 히틀러를 귀족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히틀러는 재능이 있는 평민, 벼락 출세자이니, 이른바 '남작들의 내각'에 청강생으로 참석시켜주면 몹시 기뻐할 거라고 여긴 것이다. 그는 히틀러의 훨씬 더 큰 게획들과 훨씬 높은 명예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1933년 1월 말에 민족주의-사회주의당과 도이치 민족주의당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어떤 평론가가 깜짝 놀라고 경악해서 파펜에게 비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뭐라고요, 히틀러를 권좌에 앉혔단 말입니까?〉 파펜은 몹시 거만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신 게요. 우리가 그를 참가시킨 거지.〉 그는 얼마나 잘못 생각했던가!"(217-9)
히틀러 시대
"히틀러는 제국총리로 임명되고 난 다음 1933년 2월부터 7월까지 4개월 만에 정치권력을 거의 완벽하게 장악했다. 그러고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그때까지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종류의 권력, 곧 완벽한 전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권력 장악은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 단계는 1933년 처음 절반의 기간에, 정치 영역을 말끔하게 정리한 일이었다.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정치적 생명체, 곧 바이마르 의회 민주주의 잔재와 새로 나타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가 혼합된 정권이 1933년 1월 30일에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3년 7월 14일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정당들은 존재하지 않았고, 대통령제 정권이나 의원내각제 정권도 없어지고, 그 사이에 새 총리 혼자서 자기 당을 이끌고 통치했다. 그동안 숨이 멎을 정도의 사건들이 진행되었는데, 물론 수많은 법률 위반과 끔찍한 일들과 비열한 일들이 행해졌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1933년 2월 27일의 의회 건물 화재 사건이다."(224)
"2월 28일 체포가 시작되고, 한 주 뒤에 치러진 선거에서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은 도이치 민족주의당과 합쳐도 겨우 과반을 넘는 52퍼센트 정도를 득표했다. 민족주의-사회주의당 혼자만 따지면 겨우 49.3퍼센트 득표였다. 절대 다수의 표를 얻으리라는 희망은 무산되었다. 하지만 공산당 의원들이 사라지고 나자 나치당은 갑자기 절대 다수파가 되었고, 시민 계층 정당들과 힘을 합치면, 심지어 의회 자체를 없애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2/3 의석이 되었다. 3월 23일에 의회가 의회주의 헌법을 없애는 문제를 다루게 되었을 때, 이 2/3 의석이 성립되었다. 사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들이 이른바 전권 위임법에 찬성했다. 이는 정부가 말하자면 합법적으로, 의회의 협조 없이 법을 만들 권한을 갖는 것으로, 앞으로 4년 동안 유효했다. 이것은 2월 28일의 쿠데타 이후 두 번째 국가 전복 쿠데타였다. 바로 6월과 7월에는 모든 시민 계층 정당들의 완전한 자진 해산과, 사민당 및 공산당의 금지가 진행되었다."(225-6)
"이 기간에 극히 특이한 일은, 시민 정당들이 실제로도 더는 활동하고자 하지 않고, 말하자면 정치적 무無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제대로 정의되거나 경계를 정하거나 확실하게 잡히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공중에 떠도는 '가스 형태의' 성격을 지녔지만, 그런데도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 1914년 8월의 분위기와 똑같이 1933년의 분위기도 큰 의미를 지녔다. 이런 분위기 전환이야말로 앞으로 나타나는 총통 국가의 진짜 권력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감정, 민주주의에서 구원되고 해방되었다는 감정이었다. 국민의 다수가 원치 않는다면 민주주의란 게 대체 무엇인가? 당시 대부분의 민주주의 정치가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우리가 정치적 삶에서 물러난다. 우리가 없어져야 한다. 1933년 6월과 7월에 민주주의 정당들은, 1918년 11월에 도이치 영주들이 보인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226-7)
"이 시기에 일어난 그 온갖 불법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 설치나 마구잡이 체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분명한 반유대주의 정책의 처음 징후들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하나의 확신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위대한 순간이다. 민족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 신이 보내신 한 사람, 민중 한가운데서 일어선 지도자를 찾아낸 순간이다. 그가 기율과 질서를 찾을 거고, 민족 전체의 힘을 하나로 모아, 도이치 제국이 새롭고 위대한 시간을 맞이하게 해줄 거다〉라는 확신. 히틀러가 정치 장면 전체를 실질적인 저항도 없이 깨끗이 청소해버리고, 자신의 대열 밖에 잇는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맞서 저항하거나, 계획을 무산시킬 사람이 없는 상황을 만들도록 해준 것은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꼭 민족주의-사회주의당을 따랐다기보다는, 지도자[=총통]의 뒤를 따랐다. 당시 벌써 그는 지도자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일어난 것이 바로 '획일화'[=관제화] 과정이었다."(228-9)
"권력 장악의 두 번째 단계. 히틀러의 체제는 당으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히틀러 체제는 여러 민족주의-사회주의 조직체들을 결합한 것이었는데, 이 조직체들 중 월등하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당의 군사 조직인 돌격대SA였다." "그러나 국방군과 돌격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자 히틀러는 국방군의 편을 들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랬던 것 같다. 그중 작은 이유는, 히틀러가 처음부터 대규모 군비 확장과 뒷날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사후에 총리와 대통령의 직함을 하나로 묶는 권력 장악을 완성하기로 굳게 결심한 터였다. 그러려면 국방군이 자신을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니까 히틀러는 자신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협정을 군대와 맺어야 했다. 그런 협정은 결국 국방군이 새 대통령인 히틀러에게─이전에 힌덴부르크에게 그랬듯이─직접 종속된다는 의미였다."(230-2)
"돌격대 지도부를 무시무시하게 학살한 일도 대부분의 대중만이 아니라 옛날 상류층의 승인을 받았다." "그들이 예측할 수 없는 잔인한 기습, 예를 들면 사업장 기습 같은 짓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 지도자가 여기서도 질서를 다시 세웠다는 것, 마침내 정상적인 상태가 돌아왔다는 것을 사람들은 환영했다." "이 두 번의 정치적 쿠데타 행위, 1933년 3~7월의 쿠데타와, 1934년 6~8월의 쿠데타에 뒤이어 평온한 시기가 찾아왔다. 1934년 가을부터 1938년까지는 '그 좋던' 나치 시대였다. 이 기간에 이전의 테러는 제한되었다. 수용소는 계속 있었지만, 들어간 사람보다 나온 사람이 더 많았다. 삶은 정상으로 돌아온 듯이 보였다. 동시에 히틀러의 경제 기적도 이 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1933~1937년 사이에 대량 실직 상태를 완전고용 상태로 바꾸어준 경제의 활성화인데, 이로써 히틀러는 옛날 사민당 추종자 거의 전부와 옛날 공산당에 표를 찍은 사람의 상당수를 자기 편으로 돌려놓거나, 적어도 중립으로 만들었다."(234-5)
"이 시기에 도이치 제국은 대체 어떤 국가였는가? 자주 이야기되지만, 정당 국가는 아니었다. 오늘날의 도이치 민주공화국[=동독]이나 소련 같은 국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구조화가 이루어진 정당 하나의 지배를 받는 국가는 아니었다. 나치 정당은 중앙위원회도 정치국도 없었고, 히틀러는 정당 협의회를 소집하여 문제를 논의한 적도 없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뉘른베르크에서 매우 화려하게 전당대회가 열리곤 했지만, 그런 화려한 과시 말고는 보통 전당대회라 부르는 요소가 없었다. 당대표가 당 출신 의원들과 함께 모여, 당의 정강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회의가 없었던 것이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런 회의가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든 조직들, 국가 속의 모든 국가들─이라 부르고 싶다면─이들이 매우 인상적인 시위를 했고, 그런 기회에 오직 히틀러만, 그리고 언제나 다시 히틀러만 연설을 했다. 그 자신은 어떤 말도 듣지 않았다. 당이 국가를 통치한 것이 아니었다. 히틀러가 주로 당을 통해 통치했다."(236-7)
"또한 오늘날 자명하게 여겨지는 것과도 반대되는 것으로, 원래 의미에서의 전체주의 국가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 반대였다. 히틀러의 국가에는 이전의 도이치 제국보다 훨씬 더 많은 국가 속 국가들이 있었다. 에른스트 프렝켈은 자신의 저서 『이중 국가』에서, 제3제국에는 자의恣意 및 테러 지배의 국가와 나란히, 오래되고 습관이 된 관료국가, 심지어는 법치국가가 있었다고 썼다." "수많은 특수 역할들로 나뉜, 전체주의 아닌 이런 국가가, 어떻게 총통 국가로 남아 있었던가? 그 모든 '권위주의적인 무정부 상태'(당시 사람들의 말대로)에도 불구하고 최고 권위가 계속 존재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인가? 그 최고 권위는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시간과 장소에서, 언제라도 자기 의지를 관철시킬 수가 있었다. 이것은 짧게 두 마디 말로 답할 수 있다. 곧 선전과 테러를 통해서였다. 이 두 가지 도구가 히틀러의 나치 제국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이었다."(237-9)
"잘 알려져 있듯이, 히틀러는 1938년 이후로 유대인 박해를 계속 강화했다. 1938년에 히틀러는 제국 전역에 걸쳐, 위에서부터 기획된 프로그램 한 가지를 시도해보았다." "테스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별로 해롭지 않게 들리는 '수정의 밤'이란 말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대해 반응한 방식을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매우 차가운 반응]." "도이치 민족의 대중, 히틀러에 충실한 대중이 실질적인 유대인 박해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히틀러가 '최종 해결'을 결정했을 때,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냈던 것인데, 그 사실은 자주 간과되곤 한다. 최종 해결은 도이칠란트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유대인 근절 수용소는 폴란드 동부에 있었다. 다른 나라들과 도이칠란트에서 이루어진 일은, 고작 유대인의 수송뿐이었다." "괴벨스가 이끌던 도이치 신문에는 이렇게 보도된 적이 없었다. 〈유대인은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니 하물며 〈유대인은 지금 근절되고 있다〉는 보도는 더욱 없었다."(260-2)
"도이치 여론에 대량 학살을 의도적으로 감춘 일은, 도이치 사람들이 그에 맞서 아무 일도 안 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 변명을 해준다." "도이치 사람들이 유대인의 대량 학살에 대해 알았느냐 몰랐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적으로만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이다. 물론 매우 많은 소문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믿었는지는 모르겠다. 외국에서도 오랫동안 그것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유대인 박해와 유대인 근절의 시도를 침묵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어난 일이고, 이 나라 역사에는 영원한 오욕이다. 하지만 총통 국가의 많은 요소들과는 달리, 이것을 도이치 제국의 역사에서 그리고 실제 체제의 역사에서 처음부터 존재한 요소들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히틀러가 없었어도 1933년 이후에 아마도 일종의 총통 국가가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가 없었어도 아마 두 번째 세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수백만 유대인 학살만은 없었을 것이다."(262-3)
제2차 세계대전
"히틀러는 1차 대전에서 상당히 분명한 두 가지 교훈을 이끌어낸 바가 있었다. 첫째 교훈은, 동부에서 러시아에 맞선 세계대전은 승리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러시아는 1차 대전에서 전쟁 이전에 생각되던 것보다 더욱 취약했음이 드러났다." "동시에 서부전선에서는 주로 영국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 그러므로 영국에 맞선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지만 영국은 동맹을 원하지 않았고, 도이칠란트가 러시아를 정복하여 굴복시키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냥 도이칠란트가 전통적인 대륙 중앙의 위치로 만족한다면, 그러니까 프랑스를 보호하고 러시아도 그대로 놓아둔다면, 엄청난 양보를 해줄 각오는 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구상은 영국이 적어도 선의의 중립을 통해, 동부에서 대규모 도이치 정복 전쟁을 방관하는 일이었고, 영국의 구상은 도이칠란트가 더욱 커지고 더욱 만족해서('유화宥和되어') 평화로운 유럽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267-70)
# 영국의 속내 : 유럽의 평화가 깨지면 동아시아, 지중해, 근동에서 '대영제국'의 취약점들이 공격받게 된다는 우려
"뮌헨 협정에서 영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지대를 도이칠란트에 그냥 넘겨준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는 모든 중요한 외교적인 결정에서 도이칠란트는 영국과 협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영국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아마도 뮌헨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히틀러로서는 바로 이것이 패배라고 느낀 지점이었다. 그는 동부에서 자유로운 손을 원했었다. 그래서 바로 그 어떤 협의나 경고도 없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몸통을 군사적으로 점령하고는 그것을 다시 더 나누었다." "1939년 3월, 체임벌린 내각은 마침내 유화정책의 방법을 바꾸었다. 지금까지는 오로지 약속과 양보만으로 유혹했다면 이제는 위협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동유럽에서 독단적인 확장 정책을 계속한다면, 이제 영국이 그것을 방해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위협의 상징이 1939년 3월 말에 나온, 영국의 폴란드 보장 약속이었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맞서 동맹을 맺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나온 약속이었다."(273-4)
"그렇다면 소련은 어째서 히틀러의 정책에 함께 했는가? 스탈린은 히틀러의 최종 목적이 소련을 향한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고, 히틀러도 스탈린이 그것을 모르게 하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1936년 이후로 여러 나라들, 곧 일본, 이탈리아, 몇 개의 작은 국가들과 '반反코민테른'[반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실은 이미 반反소련 동맹이었다. 조약 안에는, 도이칠란트가 소련에 맞선 전쟁을 벌일 경우, 소련과 이미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선의의 중립을 지킬 것이라는 비밀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에 스탈린은 전쟁을 피하고 공을 서방으로 떠넘겨서, 도이칠란트가 영국 및 프랑스와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감으로써, 가능한 한 오랫동안 히틀러를 소련에 대한 전쟁에서 멀리 떼어놓을 기회를 보았다. 이런 전조 아래서 스탈린은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히틀러와 함께 소련과 도이칠란트 사이에 자리 잡은 동유럽을 분할했다."(275)
"히틀러의 내면에는 공명심 강한 영웅 노래 요소가 있었다.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최고원수' 괴링이 1939년 8월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생결단만은 하지 말지요.〉 그러자 히틀러가 대답했다. 〈나는 평생 판돈을 몽땅 거는 게임을 해왔소.〉" "그는 언제나 전체와 초超거대를 지향한 사람이었다. 그는 도이칠란트를 세계 강대국, 그야말로 유일한 강대국으로 만들 수 없다면, 하다못해 도이치 역사상 최고의 파국이라도 마련해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이런 파국을 마지막에 의식적으로 원했다는 징후들이 있다. 처음으로 실패의 가능성이 드러난 1941년 말에 벌써, 그는 외국 외교관들을 개인적으로 접견한 가운데 이런 발언을 했다. 〈도이치 민족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릴 만큼 충분히 강하고 또 희생의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면, 이 민족은 스러져서 더욱 강한 다른 세력에게 파괴되어야 합니다. 나는 도이치 민족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이오.〉"(286)
"전쟁 마지막에 실제로 히틀러는 동료들이 경악하는 가운데, 군사적 패배를 도이치 민족 전체의 몰락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1945년 3월 18일과 19일에 나온 저 유명한 '네로 명령'이 그것인데, 여기서 히틀러는 제국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자원을 주민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까지, 적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모조리 파괴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군비 장관이던 슈페어가 이 명령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가로막았다. 하지만 히틀러의 사고에서 이 명령은 극히 특징적인 것이다. 그는 분명 자기가 가장 위대한 승리의 제공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도이칠란트에 파괴의 제공자라도 되겠노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히틀러는 언제나 파괴라는 카테고리로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유대인을 파괴하려 했고, 소련을 파괴하려 했다. 이제는 이른바 역사적 대히트를 남기려고 도이칠란트의 파괴를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입증되지 않는 일이지만, 입증된 히틀러의 여러 발언들 덕분에 설득력을 얻는다."(287)
도이치 제국의 사후事後 역사
"1949년에는 도이치 제국 사후 역사에서 가장 깊은 분기점이 나타났다. 서쪽에는 3개 서방국가 점령 지역의 통합으로 생겨난 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BRD이, 동쪽에는 예전 소련의 점령 지역에서 나온 도이치 민주공화국DDR이 나타난 것이다." "서방국가 총리들은, 새로운 헌법, 즉 오늘날 연방공화국의 기본법을 제정할 의회 위원회의 소집을 망설였다.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가 동부 도이치 국가의 성립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동쪽에서 실제로 아무런 마찰도 없이 이루어진 일). 이런 장애의 표현이 바로 많은 논란이 있는 기본법의 전문前文이다. 이 전문에서 기본법의 제정자들은 이른바 양심의 가책을 증언했다. 그들은 새로운 서부 도이치 국가를 세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전체 도이치 국가, 도이치 제국이 1945년의 줄어든 국경선 안에서나마 다시 세워져야 한다고 굳게 믿었고, 이런 소망을 에두른 문구로 표현하였다."(294)
"그러나 연방공화국은 새로운 국가이다. 이 나라는 지리적인 관점에서만 과거 도이치 제국의 부활이 아닌 것만이 아니라, 과거 도이치 제국에서 단편으로 남은 잔재도 아니다.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니더작센이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몇몇 주州들도 함께 국가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들 몇몇 주에서는 그 또한 도이치 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당들, 곧 기독교 민주주의 동맹 내지 기독교 사회주의 동맹CDU/CSU이 가장 강력한 정당이다. 또한 연방공화국은 과거 도이치 제국의 헌법이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윤곽을 지닌 헌법을 내놓았다.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소련 점령 지역에서 생겨난 국가도 똑같이 새로운 국가이다. 이에 대해 상세한 근거 제시를 할 필요도 없다. 이 나라는 처음부터 도이치 제국의 국가 형태와 비슷한 점이 없고, 도이치 제국을 그 어떤 형태로라도 계속한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