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발견 : 서구적 사유의 그리스적 기원 까치글방 91
브루노 스넬 지음, 김재홍 옮김 / 까치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서론


"유럽적 사고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초기 그리스 정신 가운데에서 추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인에게서의 사유의 '발단'을 근본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스 인들은 미리 앞서서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사고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대상(과학과 철학 따위)을 획득하고 또 (논리적 절차와 같은) 오래된 방법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처음으로 창출했다. 그리스 인은 보다 활동적이고, 추구하고, 탐구하는 정신으로서의 인간의 정신을 발견─다른 어떤 종류의 형식으로 존재하다가 이 시기에 비로소 정신'으로' 규정된─했다. 그 토대에는 인간의 새로운 자기 이해가 놓여 있다. 정신의 발견이라고 하는 이 과정은 호메로스부터 시작된 그리스 문학과 철학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즉 인간의 본성과 본질을 합리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들인 서사문학, 서정문학, 극문학(희곡) 등은 이 여로 위에 있는 단계들인 것이다."(7-8)


1장 호메로스의 인간 이해


"서구의 먼 장래의 발전을 결정한 인간과 그 깨어 있는 명석한 사고에 대한 관념(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관념)은 그리스에서 만들어졌다. 우리는 기원전 5세기에 성취했던 것이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단계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는 그의 언어가 예시해준다. 이미 관찰된 바이지만, 비교적 원시 언어에서는 추상어가 발전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구체적-감각적 의미를 지닌 언어 중에는 보다 발전된 언어에서는 기이하게 생각될 수 있는 풍부한 구체적 표현법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일례를 들면, 호메로스는 '보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들을 대단히 많이 사용하고 있다. 즉 horan, idein, leussein, athrein, theasthai, skeptesthai, opsesthai, dendillein, derkesthai, paptainein 등이 그 예들이다. 이에 반하여, 호메로스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동사들은 blepein과 theorein이라는 두 말밖에 없다."(18)


"derkesthai라는 말은 특정한 시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뱀(drakon)은 derkesthai로부터 파생된 명사인데, 뱀이 이렇게 불리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의 눈에 섬뜩한 '눈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리한 눈초리로 응시하는 것'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뱀이 특별히 잘 볼 수 있다거나 뱀의 시력이 아주 우수하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것의 눈초리를 그렇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메로스의 경우에 derkesthai라는 말은 눈의 기능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지각되는 눈빛을 말한다. 즉 어떤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은 감정을 표출하는 제스처인 것이다." "theasthai라는 말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동시에 입을 쩍 벌리고 본다는 의미이다. 즉 horan, idein, opsesthai라는 동사들은 결코 '봄' 그 자체의 기능을 표현하는 하나의 통일된 동사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때그때마다 '보다'라는 특정한 방식을 표현하는 몇몇의 동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18-22)


"초기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언어 및 조형예술에서 신체를 통일체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보다'라는 동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다'라는 초기 동사들은 본다는 행위를 그 구상적 양태에 의하여, 즉 그 행위와 결부된 태도 혹은 감정에 의하여 받아들이고 있으나, 후기의 언어는 이 행위 자체의 본래 기능을 어의의 중심으로 보다 강하게 밀어내고 있다. 언어가 점차적으로 사상(事象) 그 자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이 사상이라는 것은 구상적인 것도 아니고, 그것 자체로 특정의 명백한 정서와도 결부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기능이다. 그러나 이 기능이라는 것이 일단 인식되고 명명되자마자, 그것은 존재하게 되며, 그것이 존재한다는 의식은 갑자기 공동의 소유물이 된다. 즉, 신체의 경우처럼 그 숨겨진 통일성이 벗겨지거나 발견되자마자, 그것은 더이상 '사지(四肢)의 총체'가 아니라 '신체 자체'로 인식 가능하게 된다."(26-7)


"이러한 사정은 정신과 영혼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신과 신체, 육체와 영혼은 상호 대립 개념이어서, 이들 개념 각각은 그 대립 개념에 의하여 규정되기 마련이다. 육체에 대한 표상이 없는 곳에는 영혼에 대한 어떠한 표상도 있을 수 없다. 역도 그러하다. 호메로스 역시 '영혼' 혹은 '정신'을 특징짓는 고유한 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후기 그리스 어에서 영혼을 의미하는 psyche라는 말도 원래는 사고하고 감각하는 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호메로스에게서 psyche는 그것이 인간에게 '생기를 주고 있는' 한에서, 다시 말하여 인간의 생명을 지탱하는 한에서 혼일 뿐이다. 혼의 영역을 표현하는 또다른 말인 thymos는 정동(情動, 흥분)을 일으키는 것이며, noos는 여러 가지의 표상(관념, 이미지)을 초래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호메로스의 언어 가운데 하나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 간격은 '신체'를 표현하는 언어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다른 말들에 의하여 채워진다."(28-30)


"영혼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맨 처음 피력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을 psyche라고 부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혼은 신체 및 신체적 기관의 성질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성질을 부여받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질은 호메로스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영혼에 부여하고 있는 속성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호메로스 자신에게는 언어상의 모든 전제가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상의 모든 전제라는 것은 호메로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사이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서정시의 시대에서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단편」 4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모든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 영혼의 끝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영혼의 의미는 깊다〉." "그가 영혼을 무한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신체적인 것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44-5)


2장 올림포스 신들에 대한 신앙


"신앙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항시 불신앙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신앙(credo)'이라는 것은, 이것과 아주 대조되는 허위 신앙, 즉 이단 신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신앙은 사람들이 그 옹호를 위해서든 혹은 그것에 저항해서든 싸워야 하는 도그마와 결부된다. 그러나 그리스 인들에게는 교의(敎義)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신들을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민족이 다른 신앙을 혹은 다른 신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품을 수조차 없었다. 아메리카에 상륙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인디언의 신들이 마땅히 우상이요, 악마로 여겨졌으며, 유대 인들에게도 그들의 이웃 사람들의 신들은 야훼의 적이었다. 이와는 달리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방문해서 거기서 그 지방의 토속적인 신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거기에도 아폴론, 디오니소스, 아르테미스라는 신이 마땅히 있는 것으로 알았다."(54)


"아낙사고라스와 디아고라스가 국외로 추방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처해진 일 따위의,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그리스의 거의 모든 불신앙에 대한 법률상의 박해는 기원전 431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작에서 기원전 5세기 말까지의 단기간인 약 30년 동안에 발생했다. 더구나 이 기간은 올림포스 신들이 본래적인 생명이 이미 다한 때이다. 이들 재판은 활력이 넘치고 자부심을 지닌 종교심의 치기 어린 불관용이 아니라, 상실된 위치를 회복하려는 경우에 생겨나는 신경과민 현상이었다." "'신을 경외하라'는 법률은 우선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즉 종교에 대한 모독을 하지 않아야 하며, 그 다음에는 제의에 대한 공적인 행사에 참여해야만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은 그를 변호하기 위해서 그가 항시 관례적인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리스에서 종교 생활의 초기 단계에 적용된 이러한 규정들은 신념, 신조, 교의 등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56-8)


"credo quia absurdum(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소위 터툴리아누스적인 말은 그리스적인 것이 아니다. 고전-그리스적 관념에 따르면, 신들 자신이 우주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 호메로스에게서 신들은 항시 지극히 자연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심지어 헤라가 태양신인 헬리오스를 대양에 잠기도록 강요하는 것조차도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반하는 것을 달성하려는 마법이 아니다. 또한 그리스의 신성은 무로부터 무엇인가(有)를 창조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리스 인들에게는 천지창조의 역사라는 것은 없다. 그리스 신성은 단지 사물을 고안하든지 혹은 변형하는 행위만을 할 수 있다. 호메로스에게서도 초자연적인 일은 확고한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들이 (새로운 국면 전환을 일으키기 위해) 세속적인 일에 꼭 개입해야만 할 때에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올바른 법칙이 있다."(60-1)


"「일리아스」의 첫머리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 사이에 불화가 생겼을 적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브리세이스의 인도를 요구하면서 아킬레우스의 격노를 촉발시킨다. 이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그의 검에 손을 얹고 아가멤논을 향하여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생각한다. 바로 그 순간에 아테나가 나타난다(명백하게 말해지고 있는 바처럼 그녀는 단지 아킬레우스에게만 나타난다). 그 여신은 그를 제지하면서 지금은 그가 물러서는 것이 결국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분노를 잠재우도록 경고한다. 즉시 아킬레우스는 여신의 권고에 따라 그의 검을 칼집에 꽂았다." "호메로스에게서 인간은 아직 그 스스로 결단의 발기자라는 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자각은 비극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호메로스의 경우에, 인간이 숙고한 후에 어떤 결단을 내렸을 때 그는 그 결단이 신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63)


"호메로스의 신들은 우리와 너무도 친숙해져 있기 때문에, 이 신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창출되었는가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이 올림포스 신들만이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고, 특히 본토에서는 지하적, 신비적, 황홀적 신성이 버티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새롭게 침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술, 시, 높은 차원의 정신적 관심사는 결국 호메로스적 종교에 의하여 규정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형성된 직후에 그리스의 조형미술은 신들을 위대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들을 위해서 건축된 신전들은 어떠한 숭배 의식이나 혹은 비교 행위(秘敎行爲)에 사용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단지 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위한 아름다운 집 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서도 건축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의 예술은 이 신들을 보다 아름답고, 보다 경탄할 만한 형태로 만들고자 무려 300년 간에 걸쳐서 노력했다."(71)


"이 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낙관주의와는 다르다. 오히려 염세주의에 가까웠던 그들은 인간을 가을의 나뭇잎처럼 비참하게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인생에 대하여 깊은 비탄에 빠져 이야기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들이 하늘에서 편안하고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이 지상 세계의 비참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후기 그리스 인들은 별들이 고착된 궤도에 따라 운행하는 모습을 스스로 관찰하고 경탄하는 것이 허용되었다는 것에 의해서 그들의 지상 생활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론적, '관조적' 삶을 실제적 삶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지상 세계로부터 벗어나게 할 때에도 이 '이론'에는 호메로스적 경탄(thaumazein)으로부터 유래하는 종교적 감정의 여러 흔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철학적 사유로의 전진은 이들 신 자신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73-4)


3장 헤시오도스에게서의 신의 세계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목소리)의 이름에 〈이 뮤즈는 모든 뮤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명성을 알린다거나, 시심(詩心)을 불러일으키는 기쁨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헤시오도스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칼리오페는 왕들이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의 곁에 서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또한 훌륭한 재판관의 '유쾌한' 언변이 어떻게 평화를 초래하는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헤시오도스는 칼리오페의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말할 경우에 비단 기분 좋은 울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말 또한 생각하고 있다. 그에게서 칼리오페는 뮤즈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이는 헤시오도스가 칼리오페를─더군다나 아홉 자매 가운데 오직 그녀만을─시의 내용 및 일반적으로 인간의 언변의 의미와 관련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81)


"헤시오도스의 경우에, 신성의 현현이 우리들에게 정말로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은, 헤시오도스 자신이 시인으로서의 서품을 부여받는 것을 묘사하고 뮤즈들과의 만남을 서술할 때뿐이다. 호메로스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이다. 호메로스는 자신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에서도 신들의 간섭을 받고 있다." "헤시오도스에게서는 정말 신화적인 것조차, 다시 말하여 신들이 특수한 작용을 하는 인격체로서 표현되는 이야기까지도 끌어들이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적인 것에 대한 조망을 주려고 시도하는데, 말하자면 그는 신들을 인간이 그것들을 신들로서 경험하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상황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래서 그는 신들을, 마치 그것들이 식물 혹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우리에게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는 자연에 속하는 것인 양 취급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신들을 일종의 린넨 체계 및 계보도로 압축하고 있다."(86-7)


"가장 미천한 신성에게도 확고한 장소를 할당하는 이 계보도는 신의 본질에 대한 중요한 무엇을 말하고 있다.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이미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또한 어떤 인간이 무엇인가의 기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은 어떤 일 혹은 어떤 식물, 어떤 동물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아주 오래된 확신이다. 이와 같은 신들의 계보에 대한 사색이 기원과 본질에 관한 질문과 오래전에 마주쳤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원시적인 관념들로부터 헤시오도스를 떼어내는 어떤 합리적인 경향이 시사되고 있다. 즉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개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원리와 체계이다. 따라서 그는 철학뿐 아니라,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신론(一神論)의 선구자이며, 개척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만물이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신들은 신적인 것의 하나의 통일체로 묶이고 만다."(89)


"헤시오도스의 계보도는 상호간에 결합되지 않은 두 개의 다른 계통을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다. 단지 밝은 신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누크, 즉 '밤'은 부친 없이 순전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자손을 가지고 있다. 누크이 자손들은 예를 들면 질투, 기만, 노년, 싸움, 노고, 기아, 고통, 살해 등이다. 이것들은 단지 생명에 대하여 악의와 적의의 모습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다른 신들에 대하여 대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이원론은 후에 아낙시만드로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등의 철학자들이─물론 이들 각자의 이론은 상이한 형식이기는 하지만─세계를 설명할 때 대립의 이론을 내놓도록 했다." "그런데 이 밤의 악마적인 힘을 가진 자손들은 우리들의 세계 안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계속적으로 작용을 미치고 있으므로, 제우스가 지배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90-1)


4장 초기 그리스 서정시에서의 개성의 자각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의 시구는 세세한 점에 이르기까지 호메로스와 아주 유사하다는 면에서, 이들 시구로부터 근본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오디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그 모습을 나타내어, 마치 아프로디테가 사포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를 부드럽게 위로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하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경우에 그 회상이라는 것은 현재의 사태에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예전의 체험에만 미치고 있을 뿐이다. 오디세우스는 인생의 변화무쌍한 흥망성쇠와 인간을 지배하는 리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했다. 오디세우스가 고동치는 자신의 심장에 말을 걸기 시작했을 때, 혹은 그의 가슴속에 thymos가 격분했을 때, 이것은 아르킬로코스가 그의 thymos에 말을 걸기 시작한 경우와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 호메로스의 thymos라는 것은─유사하게 마음도─원칙적으로는 신체적 기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정신의 활동 기관에 지나지 않는다."(126-7)


"그런데 서정시인들이 심적인 것(das Seelische)을 또 다른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영혼과 정신이라는 말에 따라 확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가 지닌 단편적인 자료만으로 충분한 것이 못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서정시인들의 이 새로운 사상은 당시에 아직 그 정도로까지 명확한 형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심적인 것을 표시하는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못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정시인들이 이 영혼을 신체적 기관과는 다르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몇몇의 어휘를 통해서 확신을 가지고 추정해볼 수 있겠다. 아르킬로코스가 자신의 thymos를 〈고뇌로 교란되어〉라고 말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대장에 대하여 그는 〈용기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이미 아르킬로코스는 호메로스가 아직 알지 못했던 심적인 것에 대한 추상적인 관념을 표시하는 표현법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127)


"서정시인들이 드러내는 개인적 감정 가운데에는 영혼의 분열과 정신적인 것에서의 공유에 대한 의식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아르킬로코스, 사포, 아나크레온은 정신의 자발성을 비교적 좁은 감각의 영역 안에서 겨우 찾아내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강력한 감정의 움직임은 그들에게는 여전히 신성의 개입이며, 단지 영혼의 곤경만이 자기 고유의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적인 개인적 행위의 영역은 아직 열려져 있지 않았다. 이 영역은 비극에 들어 처음으로 성취되었다. 서정시인들이 발견한 것은 조형 예술가, 사상가, 정치가들에게서도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위대한 개인의 성과는 점차 확산되어가는 크나큰 역사의 흐름으로 운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는 행위와 운명의 실로 짜여 있기에, 그 직물은 한편에서 보면 단지 씨줄로만 짜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집어보면 단지 날실로만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145)


5장 핀다로스의 제우스 찬가


"헤시오도스는 서사시 시대로부터 서정시 시대로의 과도기에 서 있었다. 혹독한 농경 생활과 목자(牧者)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그가 음송 시인으로서 노래해온 영웅 전설의 세계가 그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그 세계보다도 한층 현실적인 주위 세계로 눈을 돌렸다. 그는 신적인 것을, 왕과 영웅의 행위에 제멋대로 간섭하는 올림포스 산의 귀족적 사회 안에서 찾으려 하는 일을 그만두고 세계를 지배하는 것으로서의 이 신적인 것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엄밀히 파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서사시의 전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핀다로스의 경우에도 뮤즈들은 질서 있는 세계가 어떻게 점차적으로 생겨났을까 하는 이 서사시적인 사건을 노래한다. 그러나 뮤즈들의 본래의 임무(기능)는 서사시가 아니고, 오히려 제우스의 업적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존재의 깊은 의미를 폭로하는 서정시를 노래하는 것이었다."(167-8)


"헤시오도스와 핀다로스 사이의 알카익 기의 서정시에는 심적인 것의 긴장, 정신적인 것의 복잡한 상호 관계, 가치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 등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핀다로스는 알카익 기의 대부분의 서정시인들과 달리 그의 개인적 감정과 그와 다른 사람들과의 정신적 결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그는 자신이 어떤 가치를 거부할 것인가를 논의하지 않으며, 자신이 이 세계에서 찬미해야 할 것, 자신이 신적인 것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까, 한계 있는 것은 어떻게 보편적인 것과 영속적인 것에 관여하며, 인간적인 것은 어떻게 초인간적인 것에 관여하는가를 단지 객관적으로 서술할 뿐이다. 따라서 이전 세대의 시인들과 직접적인 교섭 관계를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핀다로스는 초기의 '개인적' 서정시에서 발견된 것을─이것이 본질적으로는 그의 공적인데─제의가에서 성장한 축제시로 결실을 맺도록 하고 있다."(168)


"핀다로스가 테베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아티카에서는 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어갔다. 비극은 이 세계에 정의가 행해져야 한다는 근본적인 요구를 내세운다. 따라서 비극은 인간에 대하여, 더욱이 신들에 대하여 사회적인 훌륭한 행위를 넘어서라는 다양한 요구를 내놓는다. 거기에는 찬양의 목소리가 그쳐버린다. 핀다로스는 이와 같은 사상에서 의식적으로 멀찍히 물러서고, 이와 같은 사상을 불손한 것으로 간주한다. 때때로 그는 전승하는 전설의 어느 한 구절이 신적인 것의 찬란함을 흐릿하게 한다고 생각될 때에는 기꺼이 그것을 고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지상적인 것이 그에게 얼마나 미약하고 무력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삶의 질서와 미에 대해서는 결코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는 또한 현존하는 것을 변화시키려고 의도하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귀한 침착성을 유지한 채 세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169-70)


6장 그리스 비극에서의 신화와 현실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보고하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음직한 일을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유명한 명제(「시학」 제9장 2절 1451a)는 역사 기술과 시작(詩作)이─기원전 5세기에 실제로 그랬던 바처럼─서로 분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작은 역사 기술보다도 〈더 철학적이다.〉 시작은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의식은 기원전 5세기에 처음으로 형성되었다." "그리스 비극은 합창대의 노래에서 발생했다. 초기의 합창대 노래는 신화적 사건을 직접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노래했기 때문에, 이미 드라마적인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은 알려진 바대로이다. 그 결과로 신화와 현실, 시작과 진실이 서로 관련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것은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호메로스적인 노래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171-2)


"합창 서정시와 드라마의 시원에는 제의적 품이 있었고, 이 춤에서 신적 세계는 현재의 지상적 현실과 합치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서사시에서 보고하는 사태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 현실이란 일찍이 있었던 일로, 그것은 참으로서─혹은 허위로서─'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화적 사태가 실제로 연기됨에 따라서 재현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연기는 연기자와 구경꾼에게서 신화적 사건(die Mythische Begebenheit))으로 '실재하고 있다(ist).'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주인공이 지금 아무개에 의하여 연기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적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신화적 현실은 '의의'를 지닌 사태여서, 그 의의는 몇번이라도 현재화시킬 수 있는 것이며, 그 사태는─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비단 개별적인 것을 목표로 할 뿐만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80)


"비극은 신화의 사건들을 엄격하게 반영하지도 않으며, 서사시에서 제재로서 사용하고 있는 사건을 역사적 진실로서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비극은 인간의 행동 중에서 사태의 동기를 추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필요하다면 사실을 버리는 일조차 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를 심적 과정의 결말로서 파악한 맨 처음의 사람은 아이스킬로스이다. 그는 첨예화된(인위적인) 상황 가운데에서 인간 행동의 핵심이 되는 것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표현하려고 한다. 일상적인 현실의 행위 가운데 수많은 동기가 뒤섞여 흐르고 있어서 참된 행위의 근본 형식, 즉 자유로운 결단은 단지 희미한 반성의 형태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비극은 거의 같은 정도로 중요한 두 개의 요구 사이에 인간을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정의와 운명에 대해서 정통한 바탕 위에서 고귀한 죽음을 선택하도록 행동의 저 근본적 형식을 순수하게 구성할 수 있는 것이다."(190-1)


"아이스킬로스가 그려낸 인물들이 처하게 되는 부자연스럽고 첨예화된 여러 상황은 정상적이고 악의 없는(순진한) 인간에게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일을 행할 때에 인간은 항시 자유롭다고 자각하는 곳에서, 이들 인물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모델을 그리고 그들의 행위 가운데서 가장 고유하고 내면적인 이상적 상황을 찾아낸다." "호메로스 세계의 인간은 아직 흔들림 없는 세게에 보호되고 있으며, 그 세계는 분명하게 인간에게 말을 걸고, 인간 편에서도 분명하게 답변을 한다. 신적인 것은 인간적인 것보다 위대한 것인 한에서, 물론 초월적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통찰력과는 독립적으로 확실하고 또 항상적으로 거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스킬로스에게서 이 신들의 세계는 한층 모호하게 된다." "이제 인간은 신적인 것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근거로 하는 만큼 더욱더 독자적으로 되어간다."(192-3)


"이미 아이스킬로스는 존재자의 관념을 정의의 관념과 연결시켰다. 즉 가상은 hybris(오만함)에 속한다." "에우리피데스 시대에 이르러 이 대립은 이미 여러 면에서 인식 비판, 신화 비판, 도덕 비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대립은 에우리피데스의 전체 사고를 꿰뚫고 있으며, 우리가 극히 피상적인 의미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파악하고 있는 그 태도에 미치기까지 이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색채가 풍부하고 화려한) 사치스러운 단장이 아이스킬로스의 특색이었다고 한다면, 특정한 인물들의 누더기 옷이 에우리피데스의 특색이다. 경험적 관조에 나란히 사회적 관념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 사회적 관념들이 보여주는 바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신적인 것이 주어진 현상 세계의 빛 가운데 나타난다는 신앙이 퇴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의 행동이라는 문제가 적법한 것에 대한 사변을 더욱 강하게 규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94-5)


"알카익 기의 서정시의 신화는 승리, 혼례, 제의적 축제에 따라 시공간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비극의 신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내었다. 따라서 그 관심은 철학적인 색조마저 띠고 있다. 비극이 목표로 하고 있는 인간 행위에 대한 문제성이 인식의 문제가 되며, 소크라테스가 이 문제를 선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해결하기를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는 그리 먼 장래의 일이 아니었다. 그 경우 현실적인 것은 목적론적 개념으로서 완전히 추상적으로 파악된다. 이제 의미를 주는 층(신적 세계)과 의미를 수용하는 층(인간 세계)은 보편과 특수라는 관계로 접어들게 된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러한 경지와는 아직 떨어져 있었다. 그는 시인이지 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생명 있는 인물들에게서 보았던 것이지, 개념으로 보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197)


7장 아리스토파네스와 미학


"시인의 목적과 의의가 인간의 개선에 있다는 사상으로의 전환을 처음으로 제시한 자는 아리스토파네스이다. 즉 시인들은 교사였다. 오르페우스는 신성과 제의의 교사였고, 무사이오스는 의술과 신탁의, 헤시오도스는 농경의, 신에 필적하는 호메로스는 영광과 명예의 교사였다. 이 시인들과 성인들의 관계는 교장(교사)과 어린이들의 관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을 예술 및 더 나아가 모든 문화의 참된 요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오늘날에도 또 하나의 예로 삼고 있다. 이 도덕상의 요구를 물려받은 것은 플라톤이지만, 다만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소크라테스를 심판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견해와 크게 다르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이러한 철학상의 요청에 반해서, 비극은 단지 감각적 쾌락에만 호소할 뿐이라는 경험적 발견을 끄집어내놓고 있다."(203)


"아리스토파네스는 에우리피데스를 비단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궤변을 늘어놓는 소피스트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빈틈 없는 교활함과 약삭빠름을 비난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야말로 인간의 내부에 감추어진 비합리적인 힘들을 제시한 최초의 극작가이다. 메데이아와 파이드라가 바로 그녀들의 격정 때문에 위대한 여성이었기에, 에우리피데스는 편협한 이성의 옹호자나 계몽가일 수는 없다." "에우리피데스는 신들이 박탈된 의미를 잃은 세계 안에서 홀로 비틀거리며, 현실에 눈을 고정시키며 서 있는 이 두 사람─「아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의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형제─의 호메로스적 영웅들의 정체를 혹독할 정도로 단호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기대야 할 곳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의 결과이다. 즉 인간은 허무 위에 서 있으며, 인생의 우연사에 절망적으로 내맡겨지고 있다는 것이다."9220-1)


8장 인간의 지식과 신의 지식


"음유시인(Rhapsode) 크세노파네스는 본질적인 것과 실재하는 것을 질료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신적인 것에서 규정하려고 함으로써, 그는 탈레스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헤시오도스의 길을 걷고 있다. 그래서 그는 eis theos, 즉 〈신은 오직 하나이다〉(「단편」23)라는 극히 중요한 발견에 도달한다. 크세노파네스는 여러 다양한 의인적 신들을 폐기하려고 한다. 그에게서 최초로 신적인 것이 포괄적인 통일체(umfassende Einheit)로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가 파악한 신은 역시 분명하게 그 자신과 닮았고, 그가 얻으려고 노력한 것(이상)과 비슷하다. 다시 말하여, 그가 생각하는 신적인 것은 음유시인으로서 그가 파악한 인간적인 것에 대한 보족이며, 그가 생각하는 지혜는 인간에게 갖추어진 최고의 것인 까닭에 그것은 신성에게도 갖추어진 최고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지 불완전한 지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으나, 신은 더욱더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233)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적인 것을 정신보다도 더욱 순수한 것으로 파악하는 한편, 또 달리 인간의 지식에서도 바로 그 일자(一者)로 향하는 경향을 크세노파네스 이상으로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이것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는 광범위한 지식 대신에 집중적인 지식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을 꿰뚫어 모든 것을 이끌어가는 통찰력을 이해하는 지혜는 오직 하나이다.〉(「단편」41)" "또 그는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해서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단편」55)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눈과 귀는 나쁜 증인이다. 만일 그것들이 오랑캐적인 영혼(barbarous psychas)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단편」107)" "설령 경험이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경험이 로고스, 즉 의미의 철저한 이해에 이르지 못한다면 무가치하다. 로고스는 모든 말의 근저에 놓여 있으며, 모든 적절한 말의 그 객관적 존재를 명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237-8)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인간은 알크마이온의 경우처럼 감각 지각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인식으로 올라가 일자인 존재의 사고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은 어떤 종류의 은총에 의해서 지식에 도달한다." "신성은 파르메니데스를 '순수한' 사고로 이끈다. 그는 이 사고에 의해서 순수한 존재를 파악한다. 알크마이온이 감각 지각 및 인간의 지식에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나아가는─귀납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반면에,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에 여신은 감각적 지각과 그것에 의해서 파악되는 생성을 미망으로서 배제하도록 가르친다. 여신은 인간적 지식에서 신의 지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지 않고, 존재에 대한 유일한 큰 (직관적) 인식으로부터, 사고와 존재, 존재와 비존재 등에 대한 진리를, 즉 그 길의 목표를 연역한다. 그래서 예지계는 그 독립된 실재로서 발견된다."(242-4)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우주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어떤 필연성에 따라 천계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가 하는 문제 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회상록」 1, 1, 11행 이하). 소크라테스는 신적인 일에 몰두하는 대신에, 인간은 최우선적으로 인간적인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신적인 일은 인간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고, 모든 탐구자는 각기 신적인 일에 대해서 각양각색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자연법칙에 대한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인간은 바람이나 비 그리고 사계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이에 반해서 인간사(人間事)에서, 이를테면 경건, 미, 정의 등의 경우에는 그 덕을 획득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호메로스로부터 출발해서 고찰해왔던 전통과 단절해서, 키케로의 극단적인 표현을 빌리면 '철학을 천상으로부터 지상으로' 끌어내렸던 것이다."(245-6)


9장 덕의 권유─그리스 윤리 사상에 대한 소고


"행복과 유용한 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초기 그리스에서 행복한 인간은 'olbios'이다. 즉 그러한 인간은 충만한 상태에 있으며,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는 호사와 화려함의 빛에 잠겨 있다. 그는 'eudaimon'하다. 즉 그는 만사를 훌륭하게 성취시켜 주는 선한 다이몬(Daimon, 靈)을 자기 편으로 하고 있다. 헤시오도스가 그의 형제 페르세스에게 덕을 권하고 그 보답으로 그에게 행복한 생활을 약속하는 경우에, 그는 부와 번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덕이란 이득이라든지 유용이라는 것과 거의 같다. 그러나 그후 알카익 기에 이르게 되면, 영광의 순간에 인간적인 것을 넘어 신의 영역에 접하고 신과 같이 되는 인간이 eudaimon하고 olbios이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이 광채와 인간 존재의 확대를 알고자 노력한다. 행복으로의 권고를 할 필요는 없어진다. 누구라도 그것을 성취하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255)


"arete(덕)와 agathos(선)라는 말은 애초에는 아직 유용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초기에는 전혀 도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호메로스가 어떤 한 인간은 'agathos'하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도덕상으로 비난할 만한 여지가 없다든가, 혹은 마음이 선량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우리가 훌륭한 군인과 우수한 도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처럼 유용하고, 소용 있고, 수완(능력) 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arete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품위, 공적, 성공, 신망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들은 '행복'이나 '유용'처럼, 단지 그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더 일반적인 타당성을 요구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도덕 현상으로의 경향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arete는 '훌륭하고', '유능한' 남자, 다시 말하여 agathos한 사람에게서 기대되는 '능력'과 '공적'이다."(255-6)


"정의(법)는 도덕에서 기대되는 것을 실현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도덕에 관한 사색을 깊게 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 '타인에게 손해를 주면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웃의 불행을 대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타인의 희생 위에서 자신의 명망과 권력을 얻지 않는다'고 하는 이 도덕상의 원칙들은 법률의 토대가 되며, 폴리스의 성문법을 통해서 인간에게 의식되게 된다." "이러한 격언들은 일체의 공리주의적 고려들을 넘어서고 있다. 자신의 행동을 타인의 행동과는 다른 척도로 추정하지 말라는 요구는 그리스 인들에게는 벌써부터 법(정의)의 관념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dike는 개개인이 받아야 할 몫이다. 실정법적 준칙으로는 'suum cuique(각자에게 그 몫을 주시오)'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dikaiosune는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각자가 자신의 몫을 지키고, 타인의 세력 범위를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력이다."(270)


"솔론은 인간이 걷는 길이 아무리 불확실하다고 할지라도, 이 한 가지 일은 절대로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정의는 설령 그 사람의 손자 대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처벌되어야만 한다." "아르킬로코스는 위대한 것(영화로운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말했지만, 솔론은 부정의에 의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은 사라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영속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정의를 행하는 것이 최고의 덕이다. 솔론이 왜 이와 같이 정의를 옹호하고 있는가 하는 그 근거라는 것이, 이미 정의에 대해서 헤시오도스나 혹은 아르킬로코스가 이야기했던 바를 훨씬 넘어선 곳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다시 말하여, 그는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어도, 또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정의에 대한 분노에 의해서도 아니라, 부정의에 대해서 과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이해 관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질서와 공평성을 수호하는 것이다."(277)


"소크라테스는 알카익 기-고전기의 도덕 사상에서 후기 고전기-헬레니즘 기의 도덕 사상으로의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소크라테스가 선을 성찰할 때 완전한 공정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행위를 눈앞에 두고 스스로 그것과 대결해야 하는 순간을 고찰한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는 박식하고 지혜로운 교사인 양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그 자신이 사용하는 노골적인 비유를 통해서 산파술(Hebammenkunst)을 행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즉 그는 누군가가 자력으로(자기 자신으로부터, aus sich) 획득해야만 하는 지식을 다 드러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아티카 비극이야말로 처음으로 인간의 행동을 심적 결단이라는 계기에서 해석했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행위라는 의식을 개화시켰다. 소크라테스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인간은 의식을 가지고 제 힘으로 행위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을 발견하도록 스스로 노력하라."(282-3)


10장 비유, 비교, 은유, 유추─신화적 사유에서 로고스적 사유에로의 길


"신화적 사유와 논리적 사유의 대립은 이것을 자연의 인과적 설명에 적용하는 경우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자연에 대한 인과적 설명의 영역에서도 신화적 사고에서 논리적 사고로의 변화가 행해지고 있음은 곧 명백해진다. 즉 원래에는 신들, 영들, 영웅들의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 후에 이르러 그 충분한 근거가 합리적으로 추구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경우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과학적 인과성이 파악할 수 있는 자연의 사건만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물(物)의 기원과 생명에 관심을 기울임에 따라 그 원인이 정밀하게 규정될 수 없는 현상으로 향해지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이상으로 신화의 인과적 설명은 자연 영역을 멀찍이 넘어선 곳에까지 이르고 있는데, 이는 사상, 감정, 소망, 결의 등의 기원도 역시 신들의 개입으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 존재의 이해에도 기여하기 때문이다."(336)


"신화적 사고는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의 형태로 한 사고와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이 두 개의 사고의 형태는 심리학적으로는 논리적 사유로부터 구별되는데,그 까닭은 논리적 사유가 탐구를 그 목적으로 하는 데 반해서, 신화와 비유의 이미지는 상상력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즉 논리적 사유에서의 진리는 추구되고, 탐구되거나 혹은 인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으로, 그것은 모순율의 엄격한 고려를 통해서 방법적으로 정확하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의 미지수 X이다. 그리고 그 해답은 만인이 승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신화적 여러 형태는 의미 깊은 것으로서(als sinnvol und bedeutend) 직접적으로 나타나며, 비유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직접 이해될 수 있는 살아 있는 언어를 말하고 있다. 즉 그것들의 이미지는 뮤즈의 선물로서 (시인이나 청자의) 마음 속에 직관적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337)


"활동하는 인간 정신이 발견한 알카익 기는 극도로 경험에 굶주린 시대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말처럼,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피로하지 않은 눈'을 가지고 세계를 돌아다보고 있다. 처음에는 여전히 새로운 경험이 풍성하고 번창하고 있는 신화와 자주 혼합하고 있는데, 이것은 결국에 가서 신화가 시에, 경험은 막 싹트려고 하는 과학에 소재를 제공하는 분리가 확립될 때까지 행해진다. 그러나 아티카의 비극에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것에 대한 기쁨이 정신적-심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 앞에서 움츠려들게 되면서 풍부한 경험을 즐긴다는 것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고전기의 철학자들에게 점점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은 사고를 통해서 통제될 수 있고, 반복 가능성, 인식에 의한 두 대상간의 동일성의 확증 그리고 모순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등에 따르는 엄밀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경험적 사실들만이다. 여기서 많은 것이 제거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생하게 생명적인 것이었다."(338)


11장 그리스 어에서의 자연과학적 개념의 형성


"과학적 개념 형성을 위한 언어상의─이것은 동시에 정신적이라는 의미도 포함하는데─모든 전제는 그리스에서 이미 매우 오래된 시대에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 예로 만일 그리스 어에 정관사가 없었다면 그리스에서 어떻게 해서 자연과학과 철학이 발생할 수 있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이 '물이라는 것(물, to hundor)', '차가운 것(차가움, to psuchron)', '생각하는 것(사고, to noein)' 등과 같은 어법이 없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정관사가 이른바, 이와 같은 '추상 개념'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보편을 특수로 상정하거나, 형용사적인 것 혹은 동사적인 것을 개념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상 키케로도 (그리스어에서 간결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아주 단순한 철학 개념을 라틴 어로 재현하는 데 노심초사했다. 그것은 단지 관사가 그에게(라틴 어에) 있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이었다."(342)


"고유명사와 사물명사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세게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원래 언어 속에 있는 두 개의 형식이다. 실체사는 구체적인 것을 표시하는(지시하는) 이상의 기능을 가진다. '사고', '보편자'와 같은 추상명사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추상명사의 복수형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추상명사가 설령 실체사의 독립적인 형태로서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하더라도, 추상명사는 그것들과 동일한 근원적 형태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추상명사는 발전된 사고의 단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일반 정관사의 출현과 더불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 언어에서도 사물명사 및 고유명사와 명확하게 대조되는 추상명사의 전형태가 보이고 있다. 후기에 이르러 추상명사로서 파악되는 많은 말들은 원래는 (신화적인) 고유명사였다. 가령 호메로스의 경우에 공포는 Daimon(초자연력)으로서, 즉 위협하는 자 Phobos로서 나타난다."(345)


"자연과학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는 그 본질을 설명하려고 하는 '사물'과 관련을 맺고 있다. 만물의 기원과 본질은 '물'이라고 탈레스는 말했다. 그는 이 경우에 오케아노스는 신들의 원천(genesis, 아버지)이라고 말한 호메로스의 말(「일리아스」 제14가 201행)을 따르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신화적 고유명사 대신에 사물명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보다 앞서 이미 헤시오도스는 모든 신들과 정령들을 계보학적 체계로 정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다양한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세우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때 헤시오도스는 사물명사가 아니라 신화상의 고유명사를 사용한다. 탈레스는 만물 가운데 있는 공통의 물질을 상정함으로써 개물(個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물질에 대한 이와 같은 표시법은 흙, 물, 공기, 불을 '원소'로 규정하게 됨으로써, 그리스 초기 철학 더욱이 자연철학적 사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354)


12장 인간성의 발견과 그리스 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


"그리스 인들은 그들의 고전 예술에서 다양한 우연적인 모습을 동반하는 임의의 인간을 묘사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플라톤 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이데아'를 묘사했다고 종종 이야기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비그리스적이며, 비플라톤적이다. 어떤 그리스 인들도 결코 인간의 이데아에 대해서 진지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플라톤이 단 한번 불과 물의 이데아와 결부시켜 인간의 이데아를 서술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농담거리로 말해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어서 머리카락의 이데아, 먼지의 이데아, 오물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파르메니데스」 130C). 기원전 5세기의 조상(彫像)을 그 시대의 말을 빌려 묘사하고자 한다면, 그 조상은 아름다운 혹은 완전한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거나, 또 달리 고대의 서정시에서 인간을 찬미하는 데 자주 사용되는 말을 이용한다면, '신과 같은' 인간을 묘사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366)


"플라톤과 동시대인이었던 이소크라테스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설명하는 대목(15, 253=3, 5)에서 이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는 도시, 법률, 기술, 기예 등, 요컨대 전문화(全文化, die ganze Kultur)는 ('교육(교양, paideia)'에 의해서 숙달될 수 있는) 연설과 설득 능력에 따라서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키케로는 인간적인 것, 말하는 능력과 교양(교육), 즉 키케로 자신이 생각하는 이 휴머니티의 중요한 요소들을 이소크라테스로부터 직접 물려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페트라르카에게 넘겨주고 있다. 이소크라테스의 경우 인간임(Mensch-Sein)에 대한 그의 긍지는 그리스 인이며, 아테나이 사람인 국민적 자부심과 결부되어 있는데, 페트라르카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 인은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간'인 셈이다. 이들 두 사람은 그들 자신을 가장 잘 교육받은(교양 있는) 민족의 구성원, 다시 말하여 가장 잘 연설하는 민족의 구성원으로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366-7)


"신들이 만물의 척도라는 것은, 그리스 인들에게는 세계는 Kosmos(질서, 질서 있는 세계)이고, 엄격한 질서가 만물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인들은 이 '자연'의 존재를 비단 믿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것을 파악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 자연을 명확히 파악하면 할수록 그들은 그만큼 더 이 신들의 배후에는 생(生)에 풍부한 내용과 의미 그리고 근거를 주는 한층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더욱더 명확히 이해했다. 유럽의 문화는 이 질서를 인식하는 자에게는 법칙성으로서, 감각하는 자에게는 아름다움으로서, 행위하는 자에게는 정의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그리스 인들의 발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비록 그것들이 이 세계에 숨겨진 채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에 진리, 미, 정의가 존재한다는 신앙이야말로 그리스 인의 잃어버릴 수 없는 유산이다. 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힘을 유지하고 있다."(381-2)


"그러나 그리스 인이 우리의 모델이라는 복고주의적(혹은 의고주의적[擬古主義的]) 신앙은 본질적인 점에서 한정되어야만 한다. 고대 고전주의는 더 이상 고대의 조형예술, 문학, 철학의 여러 작품들 및 정치적 제도들이 정말로 완전해서 그것들이 시간을 초월한 타당성이 있고, 우리의 창조 활동을 위한 도전받을 수 없는 모범이 된다는 의미에서 서구적 사고, 시작(詩作), 조형의 모범이 되지는 않는다. 이 신앙은 지난 1세기 반에 걸친 역사적 연구에서 파괴되어버렸다. 고고학 자체가 대개는 그리스 및 로마 문화의 역사적 제약성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즉 고대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지는 만큼 바로 이 고대의 완전무결한 성과는 우리와 대단히 이질적인 여러 정신적 전제들에서 생겼다는 것이 더욱더 분명하게 되었다. 어떤 성과가 더 위대하고 더 의미가 충만하면 충만한 만큼 그 성과는 '시대의 정신'이라는 특성을 더욱 강렬하게 띠고 있기 때문이다."(382)


13장 칼리마코스에게서의 유희에 대하여


14장 아르카디아 : 어느 정신적 풍토의 발견


# 아르카디아 : (베르길리우스가 창안한) 목자(牧者)들의 나라, 사랑과 시의 나라


"초기 그리스 인들은 신화를 역사로서 받아들이고 있지만, 기원전 5세기경에 이르면 신화와 역사라는 두 영역은 비극과 역사 기술이라는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 이제 무엇보다도 다음의 두 경향이 전승에서 해방된 신화를 발전시키게 된다. 그 한 가지는 옛날 시대의 영웅들과 사건들이 한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 결과 그것들이 점차 현실적인 삶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는 경향이다. 예를 들면 전설상의 인물들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이 경향의 일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옛날 신화를 상연하는 경우에 형편을 낫게 하는 새로운 극적 상황이 고안되는 경향이다.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신화적인 인물들의 심리학적인 해석을 한층 밀고 나아가 그들을 이전보다도 더 자연주의적인 환경으로 옮겨놓았다. 이와 반대되는 다른 쪽의 헬레니즘 시기의 문학은 항상 (이렇듯 현대풍으로 각색된) 신화의 새로운 미적 가능성을 강조한다."(413)


"일찍이 그리스 인에게서도 정치적으로 비참한 시대에는, 정치는 이론과 실천으로 분열했었다. 플라톤은 참된 정치적 관심에서 출발했으며, 그의 사회적 입장과 그 자신의 성향은 자신을 정치가로서 활동하도록 방향지웠다. 그런데 그는 아테네의 민주 정치에서 자신이 활동할 여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기존의 국가 제도에는 지나칠 정도로 부정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체념하고 정의를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현존하는 국가 제도에서는 몸둘 장소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모든 정치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당면했다. 완전한 국가의 성립을 방해하는 반정신적 요소, 요컨대 부정의, 격정, 권력욕 등이 항시 되풀이해서 그의 사고를 움직이게 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심사숙고해서, 그는 끝까지 객관적으로 정의는 무엇인가, 선은 무엇인가, 이것들에 대한 지식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다."(424)


"베르길리우스는 이 가혹하고 악의에 찬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그 현실을 배후로 돌려놓고 있다. 그가 아르카디아로 떠나갈 때, 이 혼란한 시대를 개탄하는 그의 마음에는 이 시대를 다소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도, 나아가 그렇게 하고자 하는 원망(願望)조차 없었다. 보다 나은 나라를 추구하는 것은 그의 사고나 의욕이 아니라, 그의 감정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은,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친하고 화목하게 함께 생활하는 목가적인 평화이며, 사자와 어린 양이 사이좋게 지내고, 모든 대립을 풀어 하나로 화합하고, 모두가 큰 사랑 가운데 화합하는 황금 시대였다. 이러한 일은 기적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훗날 그가 「농경가」를 지었을 때, 그는 아우구스투수의 업적에서 이 기적을 보았다. 즉 아우구스투스는 (아르카디아의 꿈을 실현한 것처럼) 이탈리아에 다시 안녕과 평화와 질서를 되찾아주었다."(425)


"그리스 문학에서 알레고리와 상징은 서로 화해하고 있어서 문제될 만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한 그리스 시인이 헤파이스토스에 대하여 서술하는 경우, 그것은 불을 의미한다. 이 표현 형식의 발달 경로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헤파이스토스는 어느 도시를 파괴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 신이 불의 모습으로 되어 맹위를 떨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몽 사조는 이렇게 가르쳤다.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단지 '불'만이 현실적인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시학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시인은 반드시 생생하게 묘사해야만 한다. 따라서 불이라고 말하기보다는 헤파이스토스라고 말하는 편이 더 아름답고, 시적인 것이라고. 신들의 이름의 이와 같은 '환유적(metonyumischen)' 사용의 배후에는 한편으로는 합리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시론과 시적인 수식 욕구가 숨어 있다."(439)


15장 이론과 실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