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살아남기 - 우리가 몰랐던 신기한 전쟁의 과학
메리 로취 지음, 이한음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제2의 피부(전쟁 때 입는 것)


"폭발로 공기가 가속되어 밀려 빽빽해지면, 사람을 납작하게 짓누를 수도 있다. 더 세부적으로 보면, 압력파는 옷을 피부에 찰싹 달라붙게 하는데, 그러면 전달되는 열이 더 커지고 화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 현재의 방염 육군 전투복 천인 디펜더 M이 내세우는 속성 중 하나는 불이 붙으면 풍선처럼 부풀어서 몸에서 떨어진다는 것이다." "소방관 제복에 종종 쓰이는 노멕스는 방염 성능이 뛰어나다. 그래서 옷에 불이 붙기까지 적어도 5초는 벌게 된다. 모든 군복을 노멕스로 만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습기에 취약해서다. 중동에서 땀을 쏟으면서 달리는 군인들에게는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불꽃이 없어도, 의류는 불이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면의 자연발화 온도는 약 370도다. 중요한 것은 노출 시간이다. 핵폭발 때 생기는 열파는 극도로 뜨겁지만, 빛의 속도로 지나간다." "폭탄이 터질 때 빠르게 지나가는 열파라면, 단 몇 초 동안 견디는 방염 천도 엄청난 차이를 낳을 수 있다."(20-4)


"물이 주성분인 액체는 대부분 표면 장력이 세다. 즉 물을 흘렸을 때 물 분자들이 천의 표면을 이루는 대부분의 분자들보다 자기들끼리 서로 더 강하게 결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다. 알코올처럼 표면 장력이 약한 액체는 물처럼 천 위에 방울을 형성하지 않고, 곧바로 스며들어서 천을 적신다." "초방수 피막은 수련의 잎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수련 잎의 표면을 전자 현미경으로 보면 오돌토돌 미세한 돌기들로 가득 뒤덮여 있다. 마찬가지로 천에 오돌토돌한 작은 돌기들을 붙이면, 천과 그 위에 쏟아지는 액체 사이의 접촉과 상호 작용이 줄어든다." "이 신기술은 화학적/생물학적 방호복에 쓰일 것이다. 초방수 천을 사용한 의복에 닿는 물질의 95퍼센트가 그냥 굴러 떨어져 나간다면, 독성 물질에 결합할 활성탄 수용체가 훨씬 더 적어도 된다는 의미다. 좋은 일이다. 두꺼운 활성탄 층을 가진 의복은 덥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공기 필터를 끼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방호복은 무엇보다도 편해야 한다."(28-30)


2장 붐박스Boom Box(폭발문 지대에서 차량을 모는 사람들의 안전)


"이라크에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 육군은 차량에 멕서스 장갑판을 장착하려 시도했다. 마크는 회상한다. 「그걸로는 로켓포를 막지 못해요.」 육군은 반응 장갑 타일을 덧붙인다는 생각도 했다. RPG에 타격을 입으면, 충전재가 폭발한다. 바깥을 향한 이 폭발은 RPG의 폭발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한다. 문제는 지나가던 사람이 그 폭발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값싸고 더 단순한 방법이 먹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철망형 장갑이라는 튼튼한 강철 격자를 두른 차량이다. 날아오는 RPG 포탄은 격자의 그물코에 주둥이가 박혀서 불발탄이 된다." "철망형 장갑이 너무나 잘 막는 바람에 이라크 반군은 RPG를 대체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사제 폭탄을 만드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라크전 초기에 그들은 사제 폭탄을 도로 양편에 매설했다. 이 사제 폭탄이 차량의 옆쪽을 강타하자, 육군은 차량 옆구리에 장갑판을 덧대고 차 유리를 〈교황 유리〉로 교체했다."(47-8)


# 스트라이커Stryker : 미 육군이 쓰는 8륜 장갑차, 교황 유리 : 교황의 순방 행사 차량에 붙이는 두께 약 5센티미터의 투명한 장갑판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도로 옆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에 폭발물을 매설하여 밑에서 차량을 공격하는 방법으로 전환했다. 대부분의 트럭이 그렇듯이, 당시 미국의 전투 차량은 차대가 편평했다. 나중에 나온 차량들은 V자나 이중 V자 모양의 차대로 폭발 에너지가 비껴가도록 한 반면, 편평한 차틀은 폭발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리고 좌석이 승객 칸 바닥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어서, 폭발 에너지가 탑승자의 발, 척추, 골반으로 고스란히 전달되곤 했다." "더 신형 차량은 좌석 밑에 여유 공간을 두고 있다. 그러면 폭발의 힘이 바깥으로 방출되면서 빠르게 줄어든다. 그래도 30~60센티미터 이내에서는 에너지가 대단히 응축되어 있어서 고체 탄환처럼 작용하여 차량 바닥을 뚫을 수 있다. 차체가 뚫리면서 온전했던 원형을 잃는 순간, 부서져 나간 모든 조각과 부품은 발사체가 된다. 육군 병사와 해병 대원은 비행기 조종사가 방호복을 입는 대신에 깔고 앉는 것과 같은 이유로 험비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두곤 했다."(49)


3장 귀를 이용한 전투(군대 소음의 수수께끼)


"수십 년 동안 귀마개를 비롯한 수동적인 청력 보호 수단들은 군 청력 보존 사업들에서 주된 방어 무기가 되어 왔다. 대다수의 귀마개는 소음을 30데시벨쯤 줄여 준다. 꾸준히 들려오는 지겨운 배경 소음을 줄이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브래들리 전투 장갑차가 아스팔트 위를 덜거덕거리며 지나가는 소음(130데시벨)이나 블랙호크 헬기의 푸드득 소리(106데시벨) 같은 것들이다. 30데시벨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중요하다. 시끄러운 소음의 세기가 3데시벨 커질 때마다 청력 손실 위험이 없는 노출 가능 시간은 절반씩 줄어든다. 사람의 맨귀는 85데시벨(고속도로 소음, 혼잡한 식당)까지의 소리에는 하루에 8시간씩 노출되어도 청력 손실이 없다. 115데시벨(사슬톱, 록 콘서트 무대 바로 앞)의 소음은 안전한 노출 시간이 30초에 불과하다. AT4 대전차 화기가 뿜는 187데시벨의 소음에는 1초밖에 견디지 못하는데, 그 짧은 노출에도 보호되지 않은 맨귀는 청력이 영구적으로 저하된다."(67-8)


"귀마개가 제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깊이 꽂기 위해서는 귓바퀴를 잡아당겼다가 놓아야 한다. 전투 헬맷을 쓴 채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여유를 허용하는) 1차원적인 전쟁터는 더 이상 없다. 어디든 최전선이 될 수 있다. 아무런 경고도 없이 IED가 폭발하고 실력 행사가 이루어진다. 귀마개로 청력을 보호하려면, 정찰하는 13시간 내내 끼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 중 95퍼센트는 아무런 큰 소리도 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러니 끼고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팰런은 이렇게 말한다. 「군대에는 소음 문제가 없어요. 조용한 게 문제지요.」" "최고의 임무 수행 능력을 지닌 부대에서는 청력 손실이 어느 정도만 일어나도 〈사살 비율〉(없앤 적의 수를 생존한 부대원의 수로 나눈 값)이 50퍼센트 줄어들었다. 잘 듣지 못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총을 쏘거나 달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 능력이 방해를 받자, 그들은 더 주저하게 되었다."(79, 83)


4장 허리띠 아래(가장 잔인한 총격)


"IED는 두세 개씩 함께 묻는다. 하나는 차량에 탄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다. 다른 폭탄은 도우러 오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화이트는 칸다하르 주의 부비트랩이 가득한 길에서 통로 확보 임무를 맡아서 지휘 통제 차량을 타고 가던 중에 첫 폭발을 목격했다. 그는 전투 공병 소대를 이끌고 있었다. 도로, 벽, 엄폐호, 다리 등을 건설하거나 파괴하는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부대다. 그 분쟁 지역에서 미국과 나토와 협력하는 아프간 육군 병사들이 탄 험비 차량은 앞서 가지 말라는 화이트의 경고를 무시했다. 세 명이 죽고, 세 명이 다쳤다. 차량이 옆으로 넘어지면서 길을 막았기에, 치우기 위해 공병대가 파견된 것이다. 화이트가 묻혀 있던 압력판을 밟는 순간,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10킬로그램짜리 〈희생자 작동형victim-operated〉 IED였다." "「몸을 일으켜서 지혈대를 꺼내 오른쪽 다리에 묶으려 했는데, 다리가 없는 거예요.」 왼쪽 다리는 길이는 온전했지만, 종아리 부위가 찢겨 날아가고 없었다."(89)


"화이트의 수술에서는 한 가지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간호사가 황갈색의 표준 살균제를 수술 부이에 바르고 있다. 그런데 사타구니가 아니라 얼굴에 바르고 있다. 보조 외과의인 몰리 윌리엄스 소령은 요도를 늘이는 데 쓸 조직을 화이트의 볼 안쪽에서 띠 모양으로 떼어 낸 조직으로 만들 것이라고 설명한다. 입 조직은 우수한 요도 대체물이 된다. 무엇보다도 털이 없다. 소변에는 광물질이 들어 있어서, 요도에서 털이 자라면 엉겨 붙어 쌓일 것이다. 요로결석은 소변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끊고, 소변을 눌 때 엄청난 통증을 일으키는 골칫거리다." "집도의인 제임스 제지어는 말한다. 「또 입은 오줌을 견뎌 냅니다.」 그는 입이 본래 축축한 곳에 알맞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팔뚝 아래쪽이나 귀 뒤쪽의 털이 없는 피부로도 요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지만, 소변에 자주 젖다 보면 손상될 수 있다. 일종의 기저귀 발진이 요도 안에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염증이 조직을 먹어치우면서 구멍이 난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결과다."(93)


5장 기이해질 수 있다(성기 이식에 바치는 찬사)


"간이나 콩팥과 달리, 얼굴이나 손은 피부, 근육, 점막의 다양한 집합, 즉 복합 조직이다. 음경이라면, 거기에 발기 조직도 추가된다. 몸은 한두 종류의 조직만 받아들이고 다른 조직은 거부할 수도 있다. 피부는 특히 문제를 일으킨다. 피부는 보호 장벽이기 때문이다. 면역학적으로 삼엄한 경계 상태를 유지한다. 이 몸의 보초병을 속이기 위해, 환자에게 기증자의 골수를 주입한다. 골수는 면역 세포를 만드는 일을 한다. 기증자의 골수는 환자 자신의 골수를 대체하지는 않지만, 면역 체계를 얼마간 재프로그래밍 한다. 몸은 새로 이식된 부위를 점점 수상쩍게 여길지 모르지만, 통째로 제거하는 일까지는 하지 않는다. 거부될 위험이 더 낮다는 것은 면역 억제제가 덜 필요하다는, 따라서 투여량을 더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부작용도 더 적어지고 환자도 더 건강해진다. 골수 주입 같은 신기술들은 목숨을 구하는 용도가 아닌 형태의 이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윤리적 균형의 저울을 기울였다."(110-1)


"이식된 부위에는 죽음의 기운이 어려 있다.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소생되었기 때문이다. 환자가 그 점을 얼마나 불편하게 느낄지 상상할 수 있다. 콩팥이나 허파 같은 내부 장기는 이식의 심리적 영향이 대체로 적다. 눈에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지니까." "성형 및 재건 외과의인 데이먼 쿠니의 경험은 달랐다. 「나는 그것이 몸이 온전한 사람의 오만임을 깨달았어요. 당신과 나는 두 손을 지니고 있기에, 다른 사람의 손을 얻는 것이 부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한 손을 잃은 채로 사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거든요.」 쿠니는 자기 수술진이 손을 이식한 환자 6명 모두가 수술에서 깨어난 즉시, 그 손을 자신의 손으로 여기는 것을 보았다. 아직 감촉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도 그랬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이식 받았을 때에도 당사자는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만큼 심란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식의 대안이란 얼굴이 아예 없는 채로 사는 것이니까."(115-6)


6장 포화 속 살육(의무병은 어떻게 대처할까?)


"초기 인류로부터 진화한, 우리의 뇌에 새겨진 생존 전략은 위협이 닥치면 아드레날린을 분출하고, 아드레날린은 코르티솔이 혈액으로 왈칵 쏟아지도록 자극한다. 코르티솔은 허파에는 산소를 더 많이 빨아들이라고, 심장에는 두 배 또는 세 배 더 빨리 뛰어서 그 산소를 더 빨리 온몸으로 보내라고 재촉한다. 한편 간은 포도당을 토해 냄으로써, 그런 일들에 쓸 연료를 공급한다.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신체 부위로 산소와 연료를 보내기 위해, 팔과 다리의 큰 근육에 있는 혈관들은 팽창하는 반면, 우선순위가 더 낮은 기관들(위장과 피부 같은)로 뻗은 혈관들은 수축된다.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주요 기관인 전두엽도 배급 제한을 받는다." "설상가상으로, 근육의 능력 발휘를 충돌질하는 아드레날린은 신경 활동도 증진시킨다. 그래서 몸이 덜덜 떨리게 된다. 여기에 구급 헬기의 움직임과 진동까지 고려하면, 위생병이 얼마나 힘겨운 도전 과제에 직면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136)


"터널시tunnel vision라는 전문 용어는 주의가 협소해진다는 뜻이다. 그것 역시 선사 시대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지금은 생존 스트레스 반응의 재앙을 일으키는 한 요소다. 다른 것들을 다 배제하고 오로지 위협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가리킨다. 브루스 사이들은 어느 의사와 불안해하는 인턴의 재미있는 사례를 들려준다. 의사는 교통사고 환자의 찢긴 상처를 꿰매라고 인턴을 응급실로 보냈다. 인턴은 꿰매는 일에만 너무 몰두하다 보니, 환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투 치료의 주된 스트레스 요인은 모든 훈련 시뮬레이션에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위생병을 훈련시키는 또 다른 방법은 자동적으로 하게 될 때까지 어떤 기술을 무수히 연습시키는 것이다. 전두엽이 무단 외출할 때, 이성이 결석할 때, 근육 기억이 남아서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연습을 충분히 반복하면, 극도의 생존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응급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말이다."(143, 149)


7장 땀 흘리는 총알(열기 속 전쟁)


"땀은 시원하지 않다. 피만큼 따뜻하다. 본질적으로 땀은 피다. 땀은 혈장에서 나온다. 혈장은 피에서 주로 물로 이루어진 무색의 성분을 가리킨다. 땀은 증발을 통해 열을 식힌다. 열을 공기로 내보내는 것이다. 이런 식이다. 몸이 과열되기 시작할 때, 피부의 혈관은 확장되어서 피가 피부로 더 많이 향하게 된다. 피부의 모세 혈관으로부터 뜨거운 혈장이 땀샘─약 240만 개의─을 통해 몸의 표면으로 스며 나와서 증발된다. 증발을 통해 몸에서 수증기 형태로 열이 빠져나간다." "땀을 흘리면서 계속 일하면, 그들이 쓰는 근육은 몸이 땀을 흘리는 데 쓰는 혈액을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혈액을 차지하려는 이 경쟁의 가장 약한 결과는 열 탈진과 열 실신이다. 피가 몸을 식히기 위해 피부로 흐르는 한편으로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산소를 전달하기 위해 근육으로도 흐르다 보면, 피를 뇌로 보내는 데 필요한 혈압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산소를 운반하는 피가 뇌로 충분히 공급되지 않으면, 기절한다."(155-8)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헐거운 옷을 입으면 더 시원한 이유는 전도로 설명할 수 있다. 헐렁한 셔츠는 뜨거워지지만, 옷이 피부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에 꽉 끼는 티셔츠와 달리 몸으로 열을 전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공기가 수분으로 포화되어 있을 때에는 땀이 증발할 곳이 없다. 피부에 물방울처럼 고였다가 얼굴과 등을 따라 흘러내린다. 더 중요한 점은 땀이 몸을 식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온이 섭씨 33.3도 미만일 때, 몸은 더 차가운 공기로 열을 발산함으로써 저절로 식을 수 있다. 이 온도를 넘어서면 열은 발산되지 못한다. 발산의 짝은 대류다. 우리의 몸이 주변에 형성하는 가열된 축축한 공기의 구름은 피부로부터 위로 올라가고, 그 빈자리를 더 차가운 공기가 와서 메운다. 그리고 더 건조할수록, 더 많은 땀이 증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들바람은 몸이 주변에 만들어 내는 습한 공기 막을 날려 버림으로써 몸을 식힌다. 밀려드는 공기가 더 차갑고 더 건조할수록, 몸은 더 빨리 식는다."(163, 160-1)


8장 질질 싸는 네이비실(국가 안보 위협 요소로서의 설사)


"이른바 〈현대 의학의 아버지〉인 윌리엄 오슬러는 1892년에 이질이 〈병사들에게 화약과 총알보다 더 치명적이었다〉라고 썼다. (〈이질〉은 병원체가 창자의 내층에 침입하여 세포와 모세 혈관의 내용물이 새어 나오게 하고, 이질 특유의 증후군을 일으키는 감염병을 포괄하는 용어다). 1848년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인 1명이 전투로 사망할 때마다 7명이 병으로 죽었으며, 대부분은 설사 때문에 죽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설사나 이질로 죽은 병사는 95,000명이었다. 베트남 전쟁 때는 말라리아에 걸려서 입원한 군인보다 설사병으로 입원한 군인이 거의 4배 더 많았다." "해군 대령 로버트 필립스는 재수화액에 포도당을 첨가하면 장의 염분과 물 흡수력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는 병원에 가서 정맥주사로 수액을 맞는 대신 재수화액을 마시는 방법으로도 수분을 보충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이 방법으로 의료 시설이 부족한 오지에서 싸우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178-9)


"세균성 이질을 일으키는 주된 병원체인 시겔라와 캄필로박터는 독소를 전달하는 〈분비 기구〉를 휘두른다. 피하 주사기 겸 총검으로 장 내층의 세포에 독소를 주입함으로써, 세포들을 죽이고 그 내용물이 흘러나오게 만든다. 이 유출은 설사를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퇴역하는 세포들이 아주 많아지면, 장 전체가 물을 흡수하는 본래의 임무를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다. 그 결과 음식 찌꺼기는 소화관을 따라 가면서 점점 물기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묽은 상태로 남아 있다. 장관 응집성 대장균ETEC이라는 세균은 다른 방식으로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이 세균을 장을 뒤덮어서 흡수를 막는 세균 밀집 대형, 살아 있는 비닐 랩이 된다. 콜레라균과 장관 응집성 대장균은 화학 무기 공격도 가한다. 둘 다 세포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펌프를 약탈하여 독소를 만드는 데 쓴다. 징발된 펌프는 환자가 물을 마셔서 보충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세포로부터 물을 빨아내기 시작한다."(182)


9장 구더기 역설(전쟁터의 파리, 좋은 쪽과 나쁜 쪽)


"〈상처 부위의 옷을 제거하는 순간, 상처에 수많은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에 나는 경악했다. ······너무나 혐오스러웠다. 나는 서둘러서 이 끔찍해 보이는 생물들을 씻어 냈다. 그리고 상처를 식염수로 씻자, 놀라운 광경이 드러났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분홍빛 육아 조직이 상처를 채우고 있었다.〉 1917년, 미국 원정군의 외과의 윌리엄 베어는 일부러 상처에 구더기를 들끓게 해서 치료를 돕는다는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는지를 그렇게 설명한다. 지저분한 파리 유충은 죽은 고기나 썩어 가는 고기를 좋아한다. 그 고기가 열린상처의 일부라면, 먹는 행위는 일종의 자연적인 죽은 조직 제거 기능을 수행한다. 죽었거나 죽어 가는 조직을 제거하면 감염이 억제되고 치유가 촉진된다. 죽은 조직에는 혈액 공급이 안 되어서 면역 방어 기능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세균이 들끓기 쉽다. 그 결과 건강한 조직에도 감염이 일어나고 염증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치유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208-9)


# 분홍빛 육아 조직 : 빠르게 불어나면서 상처를 치료하는 어린 조직


"구더기의 입 부위는 삐걱거리면서 움직이는 휘어진 커다란 낫처럼 보인다. 구더기의 몸에서 유일하게 키틴질로 된 부위다. 축축하고 하얗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다른 부위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갈색의 단단한 부위다. 다행히도 죽은 조직 제거 구더기 요법을 받는 환자의 상처 깊숙한 곳에 있는 조직─죽은 조직이든 살아 있는 조직이든─에는 감각 신경이 없다. 감각 신경은 피부의 맨 위쪽 층에 깔려 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세균과 죽은 조직의 잔해까지 다 제거하고 싶다면, 구더기를 외과의로 택하라.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펙은 폭발로 입은 상처의 죽은 조직을 초기에 제거하는 데 구더기를 쓰자는 주장을 결코 한 적이 없다. 구더기는 치료가 한참 진행된 군인에게 쓰일 것이다. 즉 아마도 흙 같은 곳에 숨어 있던 어떤 유별나고 강력한 항생제 내성 균주가 폭발로 상처에 아주 깊이 다량으로 침투해서, 난치성 감염이 일어날 때 말이다. 이런 합병증은 자주 나타난다."(214-5)


10장 죽이지 않는 것은 악취를 풍기게 할 것이다(냄새 폭탄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정보기관이었던 OSS는 국방 연구 위원회NDRC 무기 개발자들의 지원을 받아서 악취 물질을 직접 개발하러 나섰다. 회고록에 나온 바에 따르면, 러벌이 원래 받은 명령은 〈심한 설사를 일으키는 역겨운 냄새〉 물질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누구, 나?〉는 러벌이 SAC-23 계획에 붙인 위장 명칭이었다." "NDRC는 추가 요구 조건을 정했다. 〈역분사가 일어나지 않으면서〉 퍼지는 〈범위〉가 적어도 3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행할 때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야 한다.〉또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한다. 빗물, 비누, 용매에 씻기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군사적으로 〈악취제malodorant〉, 곧 비살상 악취 무기는 그보다는 〈지역 거부terrain denial〉을 일으키는 데 더 널리 쓰인다. 사람들이 표적지인 땅에서 기어 나오도록(또는 그 땅을 피하도록) 하는 용도다. 베트콩 땅꿀, 테러리스트의 은신처, 무기 저장소 등에서 말이다."(230-3)


"1944년 11월 9일에 〈누구, 나?〉의 최종 검사 보고서가 나왔다. 아서 D. 리틀의 1945년 2월 19일 자, 〈누구, 나?〉 최종 보고서 목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양인을 진료한 경험이 많은 한 해군 의사와 논의한 끝에, 확실하게 혐오감을 일으킨다고 할 수 있는 악취는 단 두 종류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스컹크 냄새와 시체 냄새다. 〈누구, 나?〉를 토대로 삼지만, 대변 냄세를 스컹크 냄새로 대체함으로써 우리는 〈누구, 나?〉Ⅱ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지독한 냄새를 지니며, 침투성과 지속성이 더 강하다. 일본인에게 요구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킬 것이 확실하다.〉 마침내 〈누구, 나?〉 500개와 〈마크Ⅱ 오리엔탈 누구, 나?〉 100개가 제조되었다. 하지만 전선으로 보내진 것은 한 병도 없다. 이유는? 국방 연구 위원회가 일본인에게 쓸 지속성과 침투성이 훨씬 큰 무기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 나?〉의 두 번째이자 최종 보고서가 나오기 17일 전,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렸다."(241-2)


11장 옛 친구(상어 기피제를 시험하는 방법)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군 역사상 열대 해역과 그 상공에서 전투를 벌인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침몰하는 배나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탈출했다가 상어에게 공격을 받고 잡아먹힌 이야기가 해군과 공군에 떠돌기 시작했다(제1차 세계대전이 펼쳐진 북대서양의 차가운 물에는 그들을 잡아먹을 존재가 없었다)." "미 해군은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비록 고위 인사 중 한 명이 해군 중에서 상어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한 공식 기록이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들이 걱정한 것은 군의 사기였다.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상어가 무섭다는 이유로 비행기를 타려는 병사들이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스튜어트 스프링어는 그 터무니없는 역설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는 되었지만, 조국을 위해 잡아먹힐 준비가 되었느냐는 다른 문제다.〉 적어도 기피제는 상어를 겁내는 비행사를 위한 심리 치료제 역할을 할 터였다."(251-4)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내내, 해군 고위층에서는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해군 의료국 국장인 로스 T. 매킨타이어 소장은 포장지에 굵은 대문자로 찍힌 샤크체이서라는 글자가 그것을 보기 직전까지 탈수, 굶주림, 익사, 열기, 추위 같은 해양 생존의 진정한 위협들에 몰두하고 있던 마음에 공포의 씨앗을 뿌림으로써, 사실상 사기를 높이기보다는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극히 타당한 문제를 지적했다. 매킨타이어의 말을 빌리자면, 상어가 해군 병사에게 가하는 〈위협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얼마나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일까? 다양한 견해가 나와 있지만, 진행 과정의 어느 시점에 남태평양 함대 사령관은 모든 해군 기지와 병원선에 〈상어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은 진정한 사례〉가 있으면 알려 달라는 통신문을 보냈다. 취합해 보니, 단 두 건이었다. OSS는 정보기관의 전통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보고서를 없애 버린 것이다. 그것은 OSS에게 또 하나의 악취 폭탄이었다."(259-60)


12장 가라앉는 느낌(바다 밑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감압병을 이해하려면, 부엌의 탄산 가스 발생기를 떠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거품이 이는 물은 감압병에 걸린 수돗물이다. 액체가 든 용기에 압축 공기를 불어넣으면, 기체 중 일부는 액체에 들어간다(그 기체는 평형이라는 더 큰 대의를 위해 〈용액으로〉 들어간다). 이제 통 속의 압력을 갑작스럽게 해방시킨다고 하자. 병이 열렸거나 잠수부가 수면으로 쑥 헤엄쳐 올라올 때처럼 말이다. 공기 압력을 통해 액체에 불어넣은 기체 분자들은 이제 용액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빠져나온 기체 분자들은 서로 결합하여 공기 방울을 형성한다. 그냥 그렇게 뭉친다. 이제 이제 당신은 쉬이익 소리가 나는 청량한 물 한 잔을 얻는다. 아니면 시야가 어른거리는 감압병 증상을 얻거나. 감압병은 공기 방울들이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피떡처럼 작용하면서 중요한 기관으로 향하는 혈액의 흐름을 막거나, 조직을 찢어서 통증을 일으키거나, 혹은 양쪽 다 하거나 등등의 일을 한다."(296-7)


"잠수부는 천천히 올라옴으로써 감압병을 피할 수 있다. 그러면 혈액에서 생겨나는 기체가 허파로 보내져서, 내쉬는 숨을 통해 그냥 몸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이 공기 방울의 주범은 질소다. 공기에는 질소가 아주 많이 들어 있고, 질소는 지방에 녹아들어서 숨어 있곤 한다). 잠수부가 가압된 공기를 호흡하는 시간이 더 길수록, 공기가 더 강하게 압축되어 있을수록, 내보내야 하는 질소의 양도 더 많아지고, 따라서 더 천천히 올라와야 한다." "아주 깊이 내려간 상태가 아니라면, 비상 탈출구 안에서 1분쯤 가압 공기를 호흡하는 것 정도로는 시간이 짧아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잠수함이 침수된다면, 유입된 물이 쓰레기 압축기처럼 공기를 압축할 것이다. 수심 240미터에서는 비상 탈출구의 공기를 심하게 가압해야 하므로(바깥의 수압과 평형을 이루어서 해치를 열 수 있게 하려면), 그 공기를 1분 동안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감압병 위험을 일으킬 수 있을 만큼 많은 질소가 몸에 녹아들 것이다."(297-8)


13장 위와 아래(잠수함 승무원은 잠을 자려고 애쓴다)


"그렉 벨렌키 대령은 수면 시간이 하루 8시간에서 4~5시간으로 줄어들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안다. 며칠에 걸쳐 인지력이 감소하다가, 새로운 안정 상태에 들어선다. 수면 시간이 더 줄어들수록, 정신적 능력이 퇴화하다가 안정 상태에 들어가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더 늘어난다. 어떤 정신 능력을 말하는 것일까? 대부분의 능력이 그렇다. 수면이 부족하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사고, 의사 결정,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담당하는 신경망도 약해진다. 벨렌키는 이렇게 말했다. 「일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그냥 포기할 때가 있지요? 그런데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르고요? 잠이 하는 일이 바로 그겁니다. 뇌를 정상 수준으로 돌려놓는 겁니다.」" "『군 작전 노트 소식지』는 여기서 더 크고 굵은 활자에 밑줄과 기울임체까지 써서 강조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매일 방해받지 않고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며칠 사이에 피로가 쌓여서 술 취한 것과 비슷한 기능 결핍 상태가 된다.〉"(305-6)


"햇빛은 가장 강력한 체내 시계 조정자다. 우리 몸에는 눈의 막대 세포와 원뿔 세포 외에 제3의 광수용체가 있다. 이 광수용체는 햇빛의 청색 파장에 맞추어져 있다. 이 빛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정보는 솔방울샘으로 들어간다. 솔방울샘은 몸의 천연 수면제인 멜라토닌을 만드는 곳이다. 햇빛은 멜라토닌 생성을 중단시키고, 그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하루 주기 변경에 따른 생체 시계 이상은 수면 시간 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각성도와 수행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편이 공정할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잠수함 부대는 〈6시간〉이라는 근무 일정표를 써 왔다. 당직 6시간, 기타 업무와 훈련 등 6시간, 개인 활동과 취침 6시간이다. 그런 다음 다시 당직을 선다. 하루 일정을 18시간으로 정한 결과, 각 선원은 24시간마다 6시간씩 당직을 한 번 더 서게 되었다. 문제는 이 일정표에 따른 활동이 개인의 생물학적 리듬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이 몹시 잠들기를 원하는 시간에 일하게 된다."(323-5)


14장 사자死者로부터의 피드백(시신은 어떻게 사람이 계속 살 수 있게 돕는가)


"골수 주사는 정맥 주사의 사촌격이다. 정맥보다는 골수를 통해서 수혈을 하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가 피를 다량 잃는다면, 혈관벽이 팽팽하지가 못해서 혈관을 찾아 바늘로 찌르기가 어렵다. 핀으로 새로 분 풍선을 찌르는 것과 파티를 한 뒤 일주일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풍선을 찌르는 것의 차이다." "예전이었다면, 이 남자의 멋진 가슴 근육이 그의 죽음에 관여했을 수도 있다. 매일 같이 역기를 들어 올리는 육군 병사나 해병대원은 가슴 근육이 너무나 우람해지는 바람에 허파가 쪼그라들었을 때─총알이 허파를 뚫는 바람에 허파의 공기가 그 주변 공간으로 빠져나가서 쌓일 때 같은─문제가 생기곤 한다. 그럴 때에는 바늘로 가슴을 찔러서 공기압을 줄여야 하는데 근육이 두꺼워서 바늘이 근육을 뚫고 더 안쪽까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남성 부상 환자의 약 절반이 그러했다. 미군 법의관시스템AFMES이 제공한 야전 피드백 덕분에, 지금은 우람한 병사에게는 더 긴 바늘을 쓴다."(33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북한이 온다 - 미국에 미련을 버린 북한과 공포의 균형에 대하여
정욱식 지음 / 서해문집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1 북한, 미국에 미련을 버리다


# 북핵과 미 안보 전략 간의 긴장

1. 1992년 북한의 비밀 핵무기 개발 의혹과 이에 따른 북한의 NPT 탈퇴 선언

2. 1990년대 중반 미사일방어체제(MD) 설치의 명분으로 '북핵 위협론' 제기

3. 2010년대 미중 전략경쟁의 여파로 북한에 대해 '전략적 인내' 정책 실시

※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 미국이 핵실험 등 북한의 움직임에 직접 반응하지 않고 한미일 군사협력과 대북 제제에 주력한다는 방침


"김정은의 '결심'에 변화가 포착된 것은 2018년부터 2019년 상반기까지 이어진 '톱-다운' 방식의 남북·북미 협상이 허망하게 끝난 뒤부터다. 많은 전문가는 그 가운데서도 2019년 2월에 일어난 2차 북미정상회담의 실패, 즉 '하노이 노딜No Deal'이 김정은의 변심에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여기에 같은 해 6월 30일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번개팅'은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하노이 노딜이 김정은에게 '충격'이라면, 판문점 번개팅 이후 일련의 흐름은 김정은을 변심을 넘어 또 다른 '결심'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이란 북한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에 대한 미련을 접고 핵무력을 정치·안보·경제·외교를 아우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체國體'로 삼은 것이다. 이후 김정은의 두 번째 결심은 미국의 정권교체 소식에도 흔들림이 없다." "그는 〈미국에서 누가 집권하든 미국이라는 실체와 대조선 정책의 본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며 '대미 장기전'의 결의를 다졌다."(34-5)


2 2019년 여름의 파국


"이른바 '판문점 번개팅' 자리에서 트럼프는 그해 8월로 예정된 한미연합훈련 취소를 약속한다. 김정은은 북미 실무회담에 응하겠다고 화답했다." "이후 볼턴은 자신이 북핵 동결안의 제안자로 지목한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정책 결정과정에서 소외시키려고 했다. 북한이 판문점 회동 이후 북미 실무회담을 8월로 제안했는데 정작 회담 파트너인 비건이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에서 소외된 셈이다." "또 하나의 합의는 한미연합훈련 중단 약속이다. 그런데 판문점 회동 이후에도 한미 양국은 연합훈련의 중단이나 연기를 발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볼턴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는 2019년 7월 청와대를 방문해 정의용 안보실장과 한미연합훈련 실시를 합의했다. 대통령의 약속을 참모가 뒤집은 셈이다." "정상 간의 합의를 뒤집고 2019년 8월에 한미연합훈련을 강행하는 대신 북미 실무회담이 열렸다면 상황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때마침 9월에 훼방꾼 볼턴이 경질되었기에 더욱 그렇다."(43-7)


3 남북, 역대급 환대에서 근친증오로


"2018년 8월, 종전선언을 둘러싼 한미 간 엇박자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지난 6월에 나온 싱가포르 북미공동성명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한반도에서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순서로 구성되었다. 무엇보다 평화체제는 평화협정 합의안의 이행 과정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완전한 비핵화가 이뤄지는 최종단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는 구상이었다." "또한 북한은 당시 공동성명의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트럼프 행정부가 말한 〈동시적·병행적 이행〉에 당연히 제재 완화가 포함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음날 정상회담의 후속 협상 테이블에서 폼페이오는 제재 완화는 비핵화가 완료될 때 고려할 사안이라며 〈동시적·병행적 이행의 예외〉라고 못 박았다." "북한 입장에선─한국 대통령이 회담 상대거나 중재자로 나선─남북·북미 정상회담의 주요 합의가 공수표가 되는 걸 지켜본 셈이다."(58-62)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김정은이 트럼프의 의중을 직접 확인하는 자리였다.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의 완전 폐쇄와 대북 제재 완화를 골자로 하는 1단계 타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이를 거절했고 회담은 결렬되었다. 트럼프가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중단을 약속한 한미연합훈련도 2019년 3월부터 '축소된 형태'로 재개되었다. 한국 정부의 첨단 무기 도입도 이때부터 본격화한다."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는 한미연합훈련 예고에 이어 '2020-2024 국방중기계획'을 발표했다. 5년간 290조 원을 투입하는 대규모 군비증강 사업으로, 이 또한 2018년 남북 정상이 합의한 '단계적 군축'을 뒤엎는 정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문재인은 '남북한이 힘을 합쳐 일본을 따라잡자'는 메시지(2019년 광복절 경축사)를 던졌고, 북한은 〈삶은 소대가리 앙천대소할 노릇〉이라며 〈남조선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 끝끝내 남북관계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62-5)


"이 책을 쓰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산이라 그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전시작전권 환수와 종전선언은 모두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다가 무산된 정책이다. 문재인은 임기 막바지까지 종전선언과 전작권 환수에 공을 들였다." "문재인 정부에 따르면 종전선언은 '정치적으로는 종전인데, 법적·체계적으로는 정전'이다. 또 한국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것인지, '끝내자'고 선언하자는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와 미국의 합의에 따르면, 한국이 전작권을 돌려받기 위해서는 대규모 군비증강을 바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초기 대응 능력을 확보하고 연합훈련을 통해 한국군의 작전권 행사 능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이를 그대로 계승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연합훈련 및 대규모 군비증강이 양립 불가능한 노선임이 분명해졌을 때도 후자를 선택하고 말았다. 요컨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문재인은 자신의 평화정책을 전작권 환수의 조건에 종속시킨 셈이다."(70-2)


4 이어달리기와 담대한 구상


"한미 양국은 2023년 3월 세계 최대 규모의 연합훈련(Freedom Shield, 자유의 방패)에 돌입했다. 문재인 정부 중후반에 전구戰區급, 즉 전면전을 상정한 대규모 훈련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기반으로 한 지휘소 연습으로, 실기동 훈련은 대대급 이하에서 주로 실시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정상화'를 내걸며 실기동 훈련도 전구급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북한 역시 '압도적 대응'을 공언하면서 맞불을 놓고 있다. 3월 16일에는 평양 순안에서 동해상으로 ICBM 화성 17형을 시험발사했다. 딸 김주애를 데리고 참관한 김정은은 〈우리 공화국을 노골적으로 적대시하며 조선반도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연습을 번번히 벌리고 있는 미국과 남조선에 그 무모성을 계속 인식시킬 것〉을 다짐했다." "이처럼 한미동맹과 북한은 갈수록 닮은꼴이다. 한미가 '압도적 대응'을 공언하면 북한도 똑같이 응수하고 '김정은 정권의 종말'이라는 위협엔 '남조선 괴뢰정권 종말'로 되받아친다. 말뿐이 아니다. 행동도 닮고 있다."(91-3)


5 한반도, 불가역적 핵시대로 접어들다


"한국전쟁 때부터 미국이 북한에 가한 '지속적이고 계획적이며 반복적인' 핵위협은 상수다. 변수는 북한의 핵무장 여부였다. 그런데 길게는 30년, 짧게는 2년간의 비핵화 협상 끝에 북한이 내린 결론은 '부질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핵무력을 '국체'로 삼기로 했다. 김정은 정권은 핵이 재래식 군비 절감과 군민융합, 그리고 군수-민수 전환을 촉진해 경제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적대국인 한미일을 상대로는 '억제력'이 되고 우방국인 중러를 상대로는 '자주의 무기'가 될 수 있다며, 핵무장을 통해 전략국가─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모두 갖춤으로써 미국 본토를 실제 타격할 수 있는 국가─가 되리라 자신한다. 2022년 9월 최고인민회의 법령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무력정책에 대하여'를 채택한 것은 그 결정판이다. 김정은은 〈핵보유국으로서의 우리 국가의 지위가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북한의 핵무장도 사실상 상수가 된 것이다."(102-3)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본격화한 이후, 한미 대응의 초점은 '맞춤형 억제'였다. 주목할 점은 북한 역시 핵무력의 다종화 및 핵 정책 법령화를 통해 '맞춤형 억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전술핵 강화를 통해 유사시 핵무기 사용 의지를 과시하고 다양한 작전에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겠다는 뜻이다. 북한의 전술핵 보유 논리는 미국의 입장과 판박이다. 북한은 2021년 1월 전술핵 개발을 공식화한 이후 핵무력의 '효과성과 다각화'를 강조했다. 작전 목적과 타격 대상에 따라 다양한 수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도 비슷한 표현을 쓰면서 전술핵 개발·보유를 정당화해왔다. 전술핵이야말로 핵능력과 전략의 '유연성과 다양성'을 증대해준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과 미국은 자신들의 핵무기 사용 옵션이 허풍이 아님을 전술핵을 통해 증명하려고 한다. 전략핵무기(전략핵)에 견줘 폭발력을 크게 낮춘 전술핵은 언제든 실전에 동원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104-7)


6 북한의 경제난과 식량난을 보는 다른 눈


"북한은 2021년 7월 유엔에 5개년 계획의 '전략적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하면서도, 〈2015~2019년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5.1%〉라고 보고했다. 5개년 계획 당시 북한은 미국이 제재로 경제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겪고 있음을 호소하며 제재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는 입장이었다. 제재의 고통을 강조하려는 북한으로선 유엔에 거짓으로 높은 성장률을 써낼 이유가 없다." "경제제재는 비핵화를 비롯한 대북정책의 강력한 도구였다. 경제난에 빠진 북한으로선 제재 해소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런 북한이 제재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물론 제재 해결이 여전히 '불감청고소원'이겠지만, 핵 포기를 압박하거나 거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남북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서는 제재 해결이 필수다. 그럼에도 북한이 '제제 해결'에서 '제제와 더불어'를 선택했다는 것은 남북경협에 대한 미련도 버렸다는 의미다.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128, 133-4)


7 병진노선은 망국의 길일까?


"병진노선의 핵심은 '안보의 경제성'이다. 그리고 이는 재래식 군비를 축소하면서 핵전력의 증강으로 이를 상쇄하려고 한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룩New Look', 이를 그대로 모방한 소련의 흐루쇼프,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탄·수소탄과 인공위성)을 완성함으로써 경제발전을 꾀한 중국의 덩샤오핑 등의 맥을 잇는 유서 깊은 논리다. 가까이는 경제발전과 자주국방을 동시에 추구한 박정희 정권이 핵개발을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런데도 유독 북한의 병진노선에 대해서만큼은 비관적 견해가 절대다수다. '북한의 핵무장과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없다'는 게 상식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경제난의 원인이 북한의 핵개발이라는 진단과 '주민들은 굶주리는데 핵개발에만 매달린다'는 비난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북한의 병진노선의 핵심 기조 역시 핵무력 건설을 통해 '자위적 억제력'을 추구하고 재래식 군비 부담을 줄여 경제건설과 인민 생활 향상에 쓰겠다는 것이다."(147-9)


8 북핵 인플레이션과 대북 억제 결핍감


"북핵 인플레이션, 즉 북핵 위협을 과장하는 언동의 최고봉은 북한이 핵무기를 앞세워 남벌南伐, 즉 적화통일에 나설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이런 주장의 논리 구조는 대략 이렇다. 1단계로 북한이 파괴력이 낮은 전술핵무기를 동원해 남한에 기습적인 핵공격을 가하거나 위협한다. 2단계로 북한이 전략핵무기인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미국의 대도시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미국의 개입을 차단한다. 3단계로 북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의 주요 기지에 핵미사일 공격을 가해 한미연합 전력을 무력화하고 특수부대를 투입해 남한의 주요 시설을 장악한다. 끝으로 북한이 지상군을 투입해 한반도 무력통일을 완성한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앞세워 남벌을 시도하는 순간 지구상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할 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될 것이다. 생존을 위해 핵무기를 만든 북한이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핵전쟁을 선택할 리 없다는 지적은 이러한 맥락이다."(161-5)


"대북 억제는 '결핍'이 아니라 차라리 '과잉'이다. 한미는 1970년대 후반부터 '팀 스피릿' 연합훈련을 통해 강력한 대북 억제를 추구했다. 얄궂은 사실은 북한이 핵개발에 나선 이유 중 하나가 이 훈련에서 느낀 공포감이라는 것이다." "한국이 결핍감에 시달리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을 과도하게 억제하려고 할수록 정작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억제가 힘들어진다는 역설을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한미, 혹은 한미일이 대북 억제 강화를 이유로 군사력과 준비태세를 강화할수록 북한도 마찬가지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예견된 일이다." "한국이 이미 충분히 강력한 미국의 확장억제를 더 강화해달라고 매달릴수록 미국은 한국에 부당청구서를 당당히 내밀 것이다. 한국이 미국에 준 돈이 남아도는데도 방위비 분담금을 인상하라는 요구에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이기적 행태는 절제를 모른다."(170-2)


9 핵공유는 왜 나라마다 다를까?


"1953년에 체결된 정전협정에는 '신무기 반입 금지' 조항이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핵공유 협정을 체결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대규모의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데 따르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그 대안이 핵무기 전진 배치다. 그럼 미국은 정전협정과 한국 내 핵무기 배치 사이의 딜레마를 어떻게 풀었을까? 한국과 협의 없이 몰래 갖다놓는 방식이다. 당연히 한미 핵공유 협정도 없었다. 미국은 핵무기 배치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를 고수했다.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 배치 사실을 인정한 것은 1975년이다.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눈치챈 미국이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2023년 4월 채택된 워싱턴 선언에는 한국이 NPT와 한미원자력협정을 준수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다. 여기에는 어떤 식이든 핵공유는 불가하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178-80)


10 한반도에서 '공포의 균형'은 가능할까?


"한반도는 여러 차례 전쟁 위기를 맞았지만, '끝이 보이는' 위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이런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갈등의 중재자'가 사라졌고, 무엇보다 북한이 대화와 관계 회복에 흥미를 잃은 상황에서 한미를 상대로 대화에 나서라는 조언 자체가 먹히질 않는다." "한반도 위기가 남북관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다. 과거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는 주로 북미관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북폭론과 북한의 전쟁 불사론이 맞선 1994년 상반기, 아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과 김정일 정권의 핵개발 재개가 충돌한 2003년, 2017년 초 김정은-트럼프의 드잡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2020년부터 갈등의 진앙은 남북관계로 바뀌었다. 그해 6월 북한이 대북 전단 살포를 빌미로 개성공단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남북관계의 파국을 상징한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시계 제로에서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192-5)


11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이 진짜 온다


"'한미일 남방3각 동맹 대 북중러 북방3각 동맹'이라는 이분법적 오해는 오랫동안 '흥미로운 허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70년간 한반도에서 이 같은 대결 구도가 실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3년 들어 미국이 추진한 MD는 북한을 명시적으로, 중국과 러시아를 잠재적 적으로 삼았다. 요컨대 애초부터 한미일 대 북중러의 갈등 구조를 잉태한 전략인 셈이다. 미국이 한일은 포섭 대상으로, 북중러는 위협으로 삼으면서 양진영 간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한다. 이때 동북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 북한이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맞서 2003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한미일은 물론이고 중러도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협상 테이블이 6자회담(2003~2008)이다. 미국 주도의 MD가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결을 잉태했다면, 북핵은 사상 처음으로 동북아 주요국이 모두 참여하는 다자회담을 낳았다."(199, 203)


"6자회담은 한반도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동북아 평화안보체제를 추구했다. 하지만 2008년 청와대의 새로운 주인이 된 이명박 정부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그해 8월 김정일이 뇌질환으로 쓰러지자 북한의 붕괴와 흡수통일 실현이 눈앞에 잡히는 듯했다. 이명박 정부는 기다리기로 했다. 이러한 이명박의 '통일몽'은 2008년 12월 6자회담 결렬로 이어졌다. 곧 망할 북한과의 협상을 부질없는 짓으로 간주한 것이다. 2009년 1월 백악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어땠을까?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의 수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2008년부터는 금융위기가 미국과 서방세계의 경제질서를 강타했다. 반면 중국은 빠르게 부상하고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의 선택은 6자회담 재개가 아닌 한미일 군사협력이었다. 6자회담은 의장국인 중국의 위상에 이로운 일이고,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일의 결속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은 것이다."(203-4)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는 2017년까지만 해도 북한이 핵실험을 하거나 탄도미사일을 시험발사하면 대북 규탄과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2020년 이후엔 북한의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 급증하는데도 추가 제재 불가를 외치고 있다. 왜 그럴까? 전통적으로 북핵문제는 미중러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적 의제였다. 이견이 있을지언정 비확산이라는 국제규범의 규정력은 확실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신냉전의 기운이 확연해지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비확산보다 세력균형이 훨씬 중요해진 것이다. 이는 중러가 공식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공인할 수는 없어도 세력균형의 관점에서 북핵을 묵인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러로서는 미국과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미국이 동맹을 규합하자 북핵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미국이 중동의 세력균형을 위해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의 핵무장을 묵인한 것처럼 말이다."(208-9)


12 다시 친해질 수 없다면


"싸우지 않는 남북관계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미중관계에 힌트가 있다. 두 나라는 치열한 전략경쟁을 벌이며 험한 소리도 주고받지만, 경쟁과 갈등이 무력충돌로 번지지 않도록 가드레일(안전장치)이 필요하다는 데는 공감을 이루고 있다. 두 나라는 한반도-동중국해-대만해협-남중국해 등에서 치열한 다툼을 벌이면서도 무력충돌이 가져올 재앙을 의식하면서 대화에 임하고 있다." "사실 남북한에도 거대한 가드레일이 있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북 양쪽 155마일에 걸쳐 2km씩 설정된 비무장지대DMZ가 그것이다. DMZ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남북접경지역을 완충지대로 만들어 무력충돌을 예방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비무장지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중무장지대로 바뀌었고 수차례 충돌도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비무장지대의 취지를 살리는 동시에 이를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대하자는 복안을 담은 것이 바로 9·19 남북군사합의다."(220-1)


13 그래도 대안을 찾는다면: 사즉생의 해법은?


"놀랍게도 '한반도 비핵화'는 합의된 정의가 없다. 우선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와 미국이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가 달랐다.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 포기뿐만 아니라 미국 핵위협의 근본적인 해결까지 요구했고, 미국은 자신이 핵에는 손을 대지 않고 북핵만 폐기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한국의 경우에는 정권에 따라 달랐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공식적인 용어로 사용하면서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상태〉로 정의한 반면, 윤석열 정부는 '북한의 비핵화'를 공식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대체할 용어인 '한반도 비핵지대'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남북한은 핵무기를 개발·생산·보유·실험·접수를 하지 않고,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따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 또 핵보유국들은 남북한에 핵무기 사용 및 사용 위협을 가하지 않고 핵무기 및 그 투발수단을 배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법적 구속력을 갖춘 형태로 보장한다.〉"(230-1)


에필로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술의 충돌 - 미중 기술패권 전쟁과 7가지 게임체인저 서해문집 사회과학 시리즈
박현 지음 / 서해문집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롤로그


"(5G, 인공지능, 양자기술 같은) 첨단기술 경쟁에서 중국은 미국의 턱밑까지 따라붙었다. 한 세기 만에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위협받게된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중국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를 넘어뜨려야 한다. 이 사다리 걷어차기의 관건이 바로 반도체다. 때마침 반도체산업의 생태계는 미국과 그 동맹·우방국(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들이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는 미국이 반도체 기술을 틀어쥐면 중국의 추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가 미중 패권 경쟁에서 '초크 포인트Choke Point'(전략적 관문)로 불리는 이유다." "군사력 경쟁은 근본적으로 한 나라가 힘을 키우면 상대국의 안보 불안이 커지는 '제로섬 게임'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안보 딜레마'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기술 경쟁은 대개 국가 간 물적·인적 교류를 촉진하며 양측이 모두 만족하는 '윈윈 게임'을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데 세계질서가 어지러워질 때는 기술도 제로섬 게임의 도구가 된다. 오늘날이 그렇다."(12-3)


1 긴 전쟁의 서막


"지난 1세기 동안 어느 나라도 경제 규모에서 미국의 60%를 넘어선 적이 없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맞수였던 일본과 독일은 두 나라의 경제력을 더해도 그에 미치지 못했고, 냉전 당시 소련도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은 2014년 일찌감치 60%를 넘어섰고, 2020년에는 70%까지 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대 중반께 양국의 경제 규모가 엇비슷해질 전망이다. 물가 차이를 고려한 구매력평가PPP 기준으로는 중국이 2017년에 이미 미국을 추월했다. 또한 냉전 시기 소련은 세계무역기구WTO 이전의 국제경제체제인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 진영과는 별개의 경제 생태계를 구성했다. 반면 중국은 WTO 회원국으로서 이미 세계 최대 무역국이자 수출국이다. 미국과 서방 세력이 냉전 당시 소련에 시도한 봉쇄 전략이 구조적으로 먹혀들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미중 패권 경쟁의 승패는 양국 체제의 경쟁력과 지속 가능성, 특히 첨단기술을 둘러싼 경쟁에 달려 있다."(35)


2 세 개의 분수령


"반도체 산업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관건인 까닭은 무엇일까? 칩 하나를 설계해 완제품을 생산하기까지 국경을 수십 차례 넘어야 할 정도로 분업화가 매우 복잡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설계-제조-후공정(조립·테스트·패키징) 단계를 거치는데, 미국은 설계 부문만 주도하고, 생산과 후공정은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에 의존한다. 인텔·퀄컴 등 세계적 반도체 설계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은 설계 역량은 단연 앞서지만, 생산 비중은 12%에 불과하다. 전 세계 반도체 생산 능력의 70% 이상은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2019년 기준으로 대만(20%)이 가장 앞서고, 이어 한국(19%), 일본(17%), 중국(16%) 순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있는 대만은 세계 파운드리 시장의 63%를 차지한다. 한국은 전체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18%에 그치지만, 메모리 반도체로 좁히면 44%를 차지한다. 대만·한국 기업들이 협조하지 않으면 미국의 전략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59-60)


"미중 반도체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변수는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동맹·우방국과의 협력 관계다. 미중 어느 나라도 글로벌 공급망 바깥에서는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 글로벌 공급망의 길목에 있는 국가들에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시장이다. 아무리 제품이 뛰어나도 시장을 잃으면 설 땅이 없다. 중국은 세계 반도체 생산물량의 60%를 소비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는 중국과 단절할 수 없으며, 그 틈을 타 중국은 자체 기술력을 축적할 수 있다. 중국 경제가 별 탈 없이 성장을 지속한다면 시간은 중국 편이다. 세 번째는 생산성과 혁신 역량이다. 두 나라 모두 약점을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은 높은 인건비와 낮은 생산성으로 제조 경쟁력이 떨어진다." "반면 중국은 타개책을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자력갱생이라는 기치 아래 불가피한 흐름이지만 그 때문에 혁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66-7)


"인공지능 경쟁의 성패는 연산능력과 방대한 데이터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산능력의 발전은 처리 속도를 높이고,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정확도를 높인다. 연산능력이 인공지능의 엔진이라면 데이터는 연료에 비유할 수 있다. 미중의 경쟁도 이 두 가지를 빨리 확보하고 상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미국은 2019년 중국 최대 슈퍼컴퓨터 제조사인 중커수광中科曙光, 대표적인 음성·안면인식 업체인 아이플라이텍(중국명은 커다쉰페이科大訊飛), 센스타임(상탕커지商湯科技) 등을 수출제한 명단에 올린 데 이어,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인 2021년 4월에도 슈퍼컴퓨터 기업 7곳을 제재 명단에 추가했다. 슈퍼컴퓨터는 대규모 데이터 처리에 필수다. 중국은 중국대로 강점인 데이터 통제에 나서고 있다. 2021년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데이터 보안법'은 플랫폼 기업을 통제하려는 목적과 함께 데이터를 둘러싼 미중 경쟁에 대응하겠다는 포석도 담긴 법안이다."(73-4)


"미중 경쟁에서 가장 위태로운 부분은 군사 영역이다. 두 나라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자율무기체계 선점을 위해 사실상 인공지능 군비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이는 20세기 초반 영국-독일의 군함 건조 경쟁, 냉전 시기 미국-소련의 핵무기 경쟁에 비견된다. 그나마 핵 냉전 시대엔 일단 한쪽에서 핵 공격을 시작하면 상대도 보복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두 나라 모두 괴멸적 타격을 입는 시나리오(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로 인한 억지력이 작동했다. 그런데 인공지능 무기는 공격원 추적의 난점, 상대적으로 저렴한 개발 비용과 기술 습득의 용이성 등으로 인해 그런 억지력이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아가 근본적으로 전투에서 삶과 죽음의 결정권을 기계에 맡길 수 있는가라는 윤리적 문제까지 제기되는 형편이다. 유엔이 2014년부터 관련 국제협약 체결을 논의중이지만, 강대국들은 이런 우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미중 간 '인공지능 냉전'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76-7)


"미중이 통신기술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것은 이 기술이 경제적 파급 효과뿐만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이동통신은 초기 음성통화 중심에서 3G부터 데이터통신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데이터 전송속도 경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5G는 4G보다 전송속도가 20배나 빠를 뿐만 아니라, 사용자 그룹이 사람에서 서버-기계 간 통신으로 확장되었다. 자율주행·원격의료·사물인터넷·인공지능·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반 기술이 되는 셈이다. 5G의 기술표준은 스마트폰의 통신 기준을 넘어 산업용 기계장치와 로봇들을 연결하기 위한 방대한 양의 데이터 교환의 기준까지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5G의 기술표준을 장악한 국가와 기업이 4차 산업혁명의 기초 인프라를 통제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기술은 우주기술과 최첨단 군사 시스템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미중이 사활을 걸고 5G·6G 개발에 매진하는 이유다."(89-90)


3 지상·해저·우주에서의 네트워크 대전


"양자기술은 양자의 물리적 특성(중첩성, 복제 불가능성, 얽힘 등)을 이용해 기존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는 '파괴적 혁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가운데 양자통신은 양자의 복제 불가능한 특성을 이용해 통신 내용을 암호화하는 것으로, 현존하는 어떤 기술로도 해킹할 수 없는 보안 체계로 알려져 있다. 양자통신에서 미국을 추월한 중국은 2016년 8월 세계 최초로 양자통신 위성 '모쯔墨子 호'를 발사해 미국을 충격에 빠뜨린 바 있다."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사이버 공격은 행위자 입장에선 선전포고 없이 상대국을 위협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상대국 입장에선 사이버 공격이 물리적 폭력과 인명 살상으로 규정되는 무력 침공이나 테러 행위와 달라 강력하게 응징하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사이버 공격 카드를 자주 만지작거린다면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물론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커진다. 현재 사이버 무기 개발 및 공격·응징과 관련한 국제 협약이나 규범은 전무하다."(111-3)


"미국에선 과거 정부와 군이 우주개발을 주도했으나, 2015년께부터 민간이 주도하는 이른바 '뉴 스페이스' 시대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뉴 스페이스 시대에 급성장하는 영역이 바로 저궤도 소형 군집위성이다. 경제적 파급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기존의 통신위성이 정지궤도(고도 3만5786km)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과 달리, 저궤도 운용은 지구와 거리가 상대적으로 짧아 데이터 전송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강점이 있다.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전 세계 약 40억 명이 모두 잠재적 고객이다." "미군은 이런 민간의 혁신을 적극 채용하고 있다. 미 공군은 2019년 말 지휘통제실의 첨단전투관리체계ABMS 1차 테스트에 스타링크 위성통신을 적용했다. 중무장 지상 공격기인 AC-130에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 스타링크를 활용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이 초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통신 인프라가 파손된다고 해도 미 공군 지휘통제 시스템에는 장애가 생기지 않는 것이다."(117-9)


"미중은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를 자국 중심으로 만들기 위한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다. 이 네트워크를 가능케 하는 핵심 기반시설이 해저케이블과 데이터센터다. 여기에는 막대한 액수의 초기 투자액과 유지비용이 필요해 따라잡기가 쉽지 않다." "미중의 글로벌 디지털 네트워크 장악 경쟁은 세계패권 경쟁의 일환이다. 중국은 2013년부터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육로와 해로로 연결해 경제권을 형성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일대일로 연선국이 60여 나라에 이른다. 이 정책의 핵심축 가운데 하나가 '디지털 실크로드' 프로젝트로, 5G 통신망과 인공위성 기반의 위치 정보시스템(베이더우), 해저케이블, 데이터센터 등 디지털 기반시설을 패키지 형태로 제공한다. 두 나라가 지상(5G·데이터센터)과 해저(케이블), 그리고 우주(위치 정보)를 무대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특히 중국은 제3세계 국가를 대상으로 매력 공세를 펴고 있다."(126-30)


4 중국의 히든카드


"희토류는 네오디뮴 등 17종의 원소를 지칭하는데 부존량이 매우 적어 희토류rare earth라는 이름이 붙었다. 희토류의 독특한 화학적·전기적·광학적 특성이 소재의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탁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희토류가 사용되는 분야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영구자석이다. 특히 네오디뮴을 활용한 영구자석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자기공명영상MRI 등 첨단제품뿐만 아니라 첨단무기 개발에도 필수적이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보고서에서 희토류의 군사 응용 분야로 미사일 유도, 항공기·미사일의 디스크 드라이브 모터, 레이저, 위성통신, 잠수함 음파 등을 제시했다. 이를 활용한 첨단무기로는 F-35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미사일, 프레더터 등을 예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미국 첨단무기의 공급이 본질적으로 중국의 지속적인 희토류 생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은 치명적인 리스크이며, 미중 간 패권 전쟁 발발 시 결과를 가를 키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라고 밝혔다."(137-8)


"오바마 미국 행정부 말기인 2016년, 미중 기업 간에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코발트 광산을 사고파는 거래가 있었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불과 몇년 지나지 않아 미국이 땅을 치며 후회한 거래였다. 당시 미국 광산기업 프리포트 맥모란은 콩고에 소유하고 있던 2개의 대규모 코발트 광산을 중국 기업 뤄양롼찬무예China Molybdenum에 매각했다. 이 중국 회사는 지방정부가 지분 25%를 소유해 중국 당국과도 관련이 있는 곳이다. 콩고는 세계 코발트 매장량의 70% 이상을 보유한 나라로, 중국은 이 거래로 세계 코발트 시장을 사실상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내연기관차의 경쟁력이 엔진에 달려 있다면 전기차의 핵심은 배터리다. 전기차 생산원가의 40%를 차지할뿐더러 주행거리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에는 중국이 공급을 장악한 코발트가 필수다. 요컨대 중국은 '소재-배터리-전기차'라는 생태계를 완벽히 구현하며 전기차 사대를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152-4)


5 프랭클린과 마오의 금융패권 전쟁


"미국 달러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으로 기축통화 지위에 오른 이래 오늘날까지 무역·금융 등 국제 지불결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은 빌기에에 본부를 둔 국제결제시스템 스위프트SWIFT와 미국 내 은행 간 결제시스템인 칩스CHIPS를 활용한다." "미국의 제재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제재 대상에 오를 경우 미국 금융시장은 물론 국제결제시스템에 접근이 거부되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정상적인 국제 거래를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전 세계 은행들의 달러 결제는 반드시 미국 은행을 통해야만 가능하다. 한국의 국민은행 명동지점이 우리은행 명동지점과 달러 거래를 하려고 해도 미국 은행을 거쳐야 한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기업과 금융기관이 혹시라도 미국의 제재망에 걸릴까 우려해 거액의 자금과 인력을 투입해 자금세탁방지 등 내부통제에 신경 쓰는 이유다." "재무부 산하 해외자산통제국OFAC이 미국에 위협이 되는 국가·기관·개인과의 금융거래를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167-8)


"이런 제재가 소기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상당한 고통을 안기겠지만 미국이 만족할 만한 결과로 이어지긴 힘들 것이다. 미국이 그동안 북한·리비아·시리아·이라크·이란 등 다른 나라들에 시행한 경험을 보면 긍정적인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제재는 한번 시작하면 뒤로 물리기 어렵다. 제재 대상국이 행동을 바꾸지 않았는데도, 제재를 해제하면 유약한 이미지가 생길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재 회피를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금융 분야에서 위안화의 국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은 2010년께부터 위안화 국제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아직은 국제결제이 2.4%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 디지털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통화 발행을 준비하는 흐름은 새로운 변수다. 특히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는 달러 패권 체제를 뒤흔들 수도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169-71)


"반면에 디지털화폐와 관련한 미국의 움직임은 매우 느린 편이다. 반대파는 지금도 달러 거래가 매우 디지털화되어 있고, 금융포용은 다른 수단으로도 가능하며, 중앙은행이 개개인들의 거래 내역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점 등을 거론한다. 필라델피아 연방준비은행에서는 금융위기 발생 시 개인들이 은행 예금이나 펀드에서 돈을 인출해 초안전자산인 디지털 달러로 바꿀 유인이 생기는 등 금융 시스템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내놓은 바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디지털 달러화 발행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파월 의장은 2021년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국제 지급결제 시장에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언급하면서 〈빨리 도입하는 것보다 제대로 도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금융 전문가들은 각국 중앙은행이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더라도 국경 간 자금 거래를 위해서는 지금보다 간소화되더라도 여전히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177-8)


6 첨단 무기 전쟁


"국제정치학자 김상배 교수는 《4차 산업혁명과 신흥 군사안보》에서 〈인공지능·빅데이터·로봇 등의 기술혁신은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서 민간부문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에 군사부문에 적용되는 '스핀온spin-on'의 양상을 보인다. 이는 20세기 후반 냉전기에 주요 기술혁신이 주로 군사적 목적에서 진행되어 민간부문으로 확산되었던 '스핀오프spin-off' 모델과 차이가 있다〉라고 진단했다." "미국은 2014년에 이미 '제3차 상쇄 전략'을 내놨다. 이 전략은 새로운 기술적 우위를 통해 경쟁국의 수적 우위를 상쇄시킨다는 개념으로, 냉전 때 두 차례 시행된 이 전략을 다시 꺼내들 만큼 상황이 엄중하다는 의미다. 1차는 1950년대 동유럽에 배치된 옛 소련의 재래식 군사력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기 위해 시행한 핵무기 개발을, 2차는 소련의 핵·미사일 역량을 상쇄하기 위해 스텔스·위치 정보시스템 등을 개발한 것을 일컫는다. 3차에서는 인공지능·바이오·레이저·극초음속 등이 '게임체인저' 기술로 꼽힌다."(186-9)


"군산복합체는 군과 방산업체가 중심이며, 보수적 싱크탱크·언론이 이들의 논리를 전파하는 구조로 움직인다. 워싱턴 정치의 핵심으로 선거자금에 목말라하는 의원들에게는 정치자금을 합법적으로 제공한다. 의회에는 '미사일방어 코커스'라는 의원 모임까지 구성되어 있다." "2008년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이런 현상을 두고 '군산복합체'를 넘어 '군·산·의회 복합체'라며 개탄한 바 있다." "포스톨 교수는 워싱턴의 이런 구조가 국제관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꼬집었다. 미사일방어는 미중, 미러 간 핵억지력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핵억지력은 한쪽의 핵 공격 시 다른 한쪽이 남은 핵전력으로 상대를 보복해 둘 다 괴멸적 타격을 입기 때문에 어느 쪽도 선제공격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미사일방어망을 갖춰 핵미사일을 성공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면 이런 '공포의 균현'은 무너지고, 선제공격의 가능성은 커진다. 이로 인해 군비 경쟁이 가속화되는 것이다."(196-8)


"포스톨 교수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지금 동아시아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중국은 2021년 여름 두 차례에 걸쳐 극초음속 궤도 미사일 시험을 진행했다. 이 미사일은 지구 궤도를 돌다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한 뒤 음속의 5배 이상으로 활강해 목표물을 타격한다. 이른바 '부분궤도폭격체계FOBS' 기술이 적용된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국의 조기경보 레이더의 눈을 피해 MD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방장관 자문관을 지낸 밴 잭슨 교수는 〈첨단 미사일 기술이 아시아 우방국과 경쟁국들 사이에 확산하고, 핵 강국들은 광범위한 핵무기 현대화 노력을 진행 중〉이라며 〈미국이 이런 우려스러운 흐름의 원인은 아니지만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접근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그는 핵추진 잠수함 기술의 오스트레일리아 이전, 일본의 장거리 순항미사일 연장 검토,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제한 해제 등의 조처를 중국을 불안하게 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199-201)


7 디커플링─21세기의 냉전


"경제·기술 경쟁 분야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이른바 '디커플링' 가능성이다. 디커플링은 미국과 중국 간 경제·기술 생태계가 의도적으로 분리되는 상황을 말한다. 관건은 냉전 당시 미국과 소련처럼 완전한 디커플링이 가능할 것인지다. 현재로선 두 강대국의 경제·기술 생태계가 완전히 분리되는 상황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전반적인 분위기다." "실제로,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2021년 3535억 달러로, 대중국 관세 부과 직전인 2017년(3752억 달러 적자)에 다시 근접하고 있다. 미국 투자자들은 중국의 주식·채권을 2020년 말 기준으로 약 1조2000억 달러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2017년 7650억 달러에서 57.5%나 급증한 것이다. 중국의 미국 주식·채권 보유액은 2020년 말 기준으로 2조1000억 달러다. 이런 상황은 두 강대국이 상호 간에 격렬하게 제재와 반-제재 조처를 취했음에도, 민간 기업과 투자자들의 경제교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수준에까지 와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209-11)


"'중국판 우버'라 불리는 디디추싱DiDi은 2021년 6월 30일 중국 규제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기롭게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기업공개로 조달한 금액이 무려 44억 달러(약 5조 원)에 이른다. 2014년 뉴욕 증시에 입성한 알리바바(공모금액 250억 달러) 이후 최대 규모다. 그런 디디추싱이 반년도 되지 않은 2021년 12월 3일 뉴욕 증시에서 상장 폐지를 결정해 또 한번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전에도 차이나텔레콤 등 일부 중국 기업의 상장 폐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 리스크나 인권침해 연루를 이유로 제재 대상 기업으로 지목한 영향이 컸다. 그러나 디디추싱은 사정이 다르다. 무엇보다 자국 정보인 중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이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는 2021년 6월 중국 내 데이터의 국외 이전을 제한하는 내용의 데이터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중국 인터넷 기업이 수집·저장하고 있는 데이터가 잠재적으로 국가안보 리스크와 직결된다는 게 이유였다."(215-6)


"미국 정부도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에 대한 압박에 가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퇴임 직전인 2020년 12월 18일 '외국회사문책법안HFCAA'에 서명을 했다. 이 법은 미국에 상장된 외국 기업은 외국 정부 소유가 아니고 외국 정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외국 회계법인이 상장사 회계감사를 하면서 취득한 회계 관련 증거자료에 대해 미국 규제당국이 3년 연속 검사를 하지 못할 경우 증권 거래를 금지한다. 이미 미중은 거의 10년간 이 회계 검사권을 놓고 갈등을 빚어왔는데 협상에 진척이 없었다. 중국은 이런 '무제한' 자료 접근권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반발해왔다. 데이터를 많이 보유한 인터넷 기업의 경우, 회계 증거자료에는 고객 정보뿐만 아니라 회사와 정부기관 간에 오간 이메일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중 양국이 모두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가 이어진다면 중국 IT 기업의 미국 증시 상장을 통한 윈윈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217-21)


에필로그


"미중 패권 경쟁은 둘 사이에 낀 나라들이 받을 타격이 더 크다. 전쟁 같은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배제하고 경제적 측면만 따져봐도 그렇다. 두 강대국이 보호주의로 돌아설 경우 우리처럼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들은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중 간 또는 OECD-중국 간 디커플링이 이뤄져도 두 블록과 모두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국내총생산이 소폭 증가했다. 한국이 중국을 대체하는 어부지리 효과를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블록 내에서만 교역이 허용될 경우에는 한국이 입을 타격은 치명적이다. 미중 간 디커플링 때는 GDP 감소율이 6%로 조사 대상국 중 피해가 가장 컸다. OECD-중국 간 디커플링 때도 감소율이 5%에 달했다. 일본은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한국의 절반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는 것으로 나타났다. 인도는 미중 디커플링 때에는 -1%였지만, OECD-중국 디커플링 때는 0%였다. 이런 예측은 미중 패권 다툼을 대하는 안목과 태도에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230-1)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수석과 정책실장을 지낸 이호승 전 실장의 말이다. 〈이걸 선택의 문제로 국한해서 보면 국익에 부합을 안하는 거고, 너무 성급해요. 물론 어쩔 수 없이 나중에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국면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두 나라가 다투다가 이를테면 극단적으로는 대만을 둘러싸고 전쟁을 한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어느 편이냐고 묻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급하게 어느 편에 빨리 서야 한다, 어느 편은 배제해야 한다는 태도는 단견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준은 우리가 선진국으로서 민주주의·환경·공정한 경쟁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분명하게 지지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방형 통상국가로서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원칙을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원칙 속에서 누구를 배제하거나 누구하고만 관계를 맺거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232-3)


"미중 경쟁은 우리에게는 기술력과 산업경쟁력을 유지·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을 통해 원천 기술에 접근할 수 있지만, 중국은 미국의 제재로 기술 접근에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반도체·배터리 같은 분야는 세계시장에서 더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다. 중국에 뒤처져 있는 인공지능·클라우드·빅데이터·항공우주·양자기술 등에서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요컨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으로,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벌리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런 행운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늘날의 미중 관계는 마주 달리는 기차처럼 위태롭다. 기술의 진보 단계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점, 그리고 대결의 주무대가 유럽에서 동아시아로 바뀐 점 등만 빼면 미중 대결은 영독 대결의 판박이다. 한국 등 주변국들이 진영 대결이나 각자도생에만 매몰된다면 비극의 역사는 다시 반복될 것이다."(2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토록 기묘한 양자 - 과학이 세상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기묘한 6가지 이야기
존 그리빈 지음, 강형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지? 양자 해석의 필요성


미스터리 1. 파동인가, 입자인가


"1974년에 세 명의 이탈리아 물리학자인 피에르 조르조 메를리, 지안 프랑코 미시롤리, 줄리오 포치는 전자들에 대해서 두 개의 구멍 실험─파인만의 이중 슬릿 실험으로 빛의 파동 성질을 증명함─과 동일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이 '단일 전자 이중슬릿 회절' 실험에서 전자들은 상당히 여유 있는 간격으로 발사되었다. 전자 발사 장치와 탐지 스크린 사이의 거리는 10미터였고, 각각의 전자는 앞서 출발한 전자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야 비로소 출발했다. 실험을 통해 순차적으로 수천 개의 전자들이 발사되었을때 이들은 탐지 스크린 위에 간섭무늬를 만들었다. 개별 입자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이 시간과 공간 모두에 걸쳐 일어난 것이다." "빛의 이중 슬릿 실험과 동일한 실험에서 전자들은 한 번에 하나씩 발사하면 각각의 전자는 탐지 스크린 위에 하나의 빛 방울을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방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치 자신들이 파동인 것처럼 간섭무늬를 형성한 것이다."(22-5)


미스터리 2. 유령과 같은 원격 작용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의 방정식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는 두 전자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예측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정한 상황에서는 보존 법칙이 적용되는데, 이 법칙에 따르면 전자들은 반대의 스핀, 즉 하나는 위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아래 방향인 스핀을 가져서 결과적으로는 두 스핀이 서로 상쇄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방정식에 따르면 방출원에서 방출되었을 때 전자들은 명확한 스핀을 갖지 않는다. 전자 각각은 위 방향과 아래 방향 상태가 섞여 있는 중첩superposition이라고 불리는 상태로 존재하며,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할 때 비로소 확률의 규칙에 따라서 어떤 스핀을 가질지 '결정'할 뿐이다. 만약 전자들이 서로 다른 스핀을 가져야 한다면, 전자 A가 위 방향 스핀을 갖도록 '결정'하는 순간 전자 B의 스핀은 아래 방향이 돼야 한다. 이는 두 전자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지상관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유령과 같은 원격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 불렀다."(37-8)


해석 1. 코펜하겐 해석─우리가 바라보지 않으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자를 하나의 작은 당구공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실험은 전자의 운동량을 측정하고 전자가 입자라는 우리의 개념을 입증한다. 또한 우리가 전자를 파동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실험은 파장의 값을 측정하며 전자가 파동이라는 개념을 입증한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하고 닐스 보어는 말한다. 그저 당신이 입자를 찾을 때 전자가 마치 입자인 '것처럼' 행동하고, 당신이 파동을 찾을 때 전자가 마치 파동인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에 전자가 입자 또는 파동이거나 입자이자 파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당신은 그저 당신이 보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고,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볼지에 대해 내린 선택에 의존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전자와 원자 같은 양자적 개체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는 이 개체들이 그 누구도 이들을 측정하지 않을 때─혹은 누구도 이들을 바라보지 않을 때─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58-9)


"상자 안에 갇힌 하나의 전자를 생각해보자. 확률 파동은 상자 안을 고르게 채우도록 퍼져 있고, 이는 상자 안의 임의의 위치에서 전자를 찾을 확률이 동일함을 의미한다. 이제 상자 중간에 칸막이를 세워보자.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전자는 상자의 두 부분 중 한 부분에 갇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은 여전히 확률 파동이 각각의 절반 모두를 채우고 있으므로 분할된 부분 중 하나에서 발견될 확률이 동일하다고 말한다. 이제 상자를 아예 두 부분으로 분리시켜보자. 반쪽 상자는 당신의 실험실에 그대로 두고, 나머지 반쪽 상자는 화성으로 가는 로켓에 실어 보내자. 보어에 따르면 전자가 연구실에 있는 상자나 화성에 있는 상자에서 발견될 확률은 50 대 50 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실험실에서 상자 안의 내용물을 검토하는 경우에만 파동함수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EPR '역설'과 슈뢰딩거의 유명한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에 관한 퍼즐의 근저에 있는 핵심 개념이다."(60-3)


"내가 학생 시절 배웠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대표적' 방법으로 여겨지는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험의 한쪽에서 전자는 하나의 입자로서 전자총이라는 원천으로부터 방출된다. 그 직후 전자는 실험 전체에 퍼져 있는 '확률 파동'으로 변해서 실험의 다른 한쪽에 있는 탐지 스크린을 향해 나아간다. 이 파동은 얼마나 많은 구멍들이 열려 있든 관계없이 구멍들을 통과해 나가면서 적절한 방식으로 그 자신과 간섭하거나 간섭하지 않기 때문에, 탐지 스크린에는 확률의 패턴으로서 도달한다. 어떤 곳은 다른 곳보다 확률이 높고 다른 곳은 더 낮게 스크린 전체에 퍼진다. 탐지 스크린에 도달하는 순간 파동은 '붕괴하여' 입자로 다시 돌아오며, 탐지 스크린 위에서 입자의 위치는 무작위적이기는 하지만 확률의 규칙을 따른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불린다. 전자는 파동과 같이 움직이지만 입자와 같이 도착한다."(63-5)


해석 2. 파일럿 파동 해석─세계는 우리가 바라보기 전까지 숨어 있다


"드 브로이의 '파일럿 파동pilot wave' 해석은 파동-입자 이중성을 설명하는 가장 자연스럽고 명백한 방식이다. 그는 (전자와 같은 개체가 파동이자 입자라고 말하는 대신) 파동과 입자 모두가 실재하며, 파동이(이후 '파일럿 파동'으로 알려진다) 입자를 그 목적지까지 안내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바다에서 서퍼가 파도를 타는 것과도 같다. 두 개의 구멍 실험에서 파일럿 파동은 두 개의 구멍을 통과하여 퍼진 후 그 자신과 간섭하여 간섭 파동의 무늬를 만든다. 실험에서 발사되는 입자들은 처음에 출발할 때 속력과 방향이 약간씩 다르기 때문에, 이들은 결국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서핑을 타며, 탐지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드는 파동들을 따라간다. 우리는 입자들의 속성은 측정하지만 결코 파동의 속성은 측정할 수 없다. 입자들의 행동으로부터 파동의 존재를 추론할 뿐이며, 입자들은 탐지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접근법은 '숨은 변수 이론'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75-6)


"잘 섞인 카드 한 벌이 유용한 비유를 제공한다. 그와 같은 카드 한 벌이 양자물리학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작다고 상상하자. 당신은 초현미경과 같은 장치를 가지고 카드를 한 번에 한 장씩 들춰볼 수 있다. 숨은 변수 이론에 따르면, 당신이 가장 위에 있는 카드를 뒤집을 때 당신이 보는 값은 그 카드 한 벌에 허용되는 52개의 가능성 중에서 무작위로 선택된다. 붉은색의 카드를 볼 확률은 50 대 50이고, 클로버 5 카드를 볼 확률은 1 대 52 등등이다. 카드의 값은 당신이 보기 전까지는 숨겨져 있다. 그러나 그 카드는 당신이 보지 않을 때도 항상 그 값을 갖고 있었다(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실제로는 변수가 아니다!). 첫 번째 카드를 본 다음에는─그 카드가 정말 클로버 5였다고 하자─클로버 5를 발견할 확률은 이제 0이며, 붉은색 카드를 찾을 확률은 49 대 51 등등이 된다. 이를 당신이 보기 전까지는 카드가 어떤 값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코펜하겐 해석과 대조해보라."(76-7)


"데이비드 린들리는 그린에서 퍼팅을 연습하는 골프 선수의 비유를 제시한다. 골프 선수는 매번 동일한 홀을 향해 골프공을 치지만, 각각의 공은 골프 선수의 퍼팅 기술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소한 변수들로 인해 약간씩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린의 표면 역시 완벽하게 매끄럽지는 않다. 따라서 각각의 공은 약간씩 다른 방향을 따라 약간씩 다른 거리를 간다. 이때 공이 그려낸 패턴은 골프공들이 지나간 표면의 불규칙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표면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공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속력과 방향을 정확하게 안다면, 원리상 각각의 공이 도달하는 최종적인 위치는 결정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파일럿 파동 해석은 결정론적이며, 파동함수의 붕괴와 결부되는 우연의 요소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파동함수의 붕괴 그 자체를 없앤다. 모든 입자는 항상 명확한 속성을 갖고 있다. 잘 섞인 카드 한 벌 속의 카드들처럼, 우리가 보기 전까지 그 속성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77-8)


해석 3. 다세계 해석─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평행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난다


"슈뢰딩거의 지적처럼, 방정식들에는 (그의 유명한 파동방정식을 포함해서) 붕괴에 관한 내용이 아무것도 없다. 붕괴는 바로 보어가 왜 우리는 실험 결과로서 오직 하나의 결과만을─죽어 있는 고양이 또는 살아 있는 고양이만을─보고 혼합물 즉 상태들의 중첩은 보지 못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론에 덧붙여놓은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직 하나의 결과─파동함수에 대한 하나의 해─만을 탐지한다고 해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대안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슈뢰딩거의 용어들을 정리해보면, 두 개의 평행한 우주 또는 세계가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의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살아 있고 다른 우주에서는 고양이가 죽어 있다. 하나의 우주에서 상자를 열 때 죽은 고양이가 발견된다. 다른 우주에서는 살아 있는 고양이가 발견된다. 그러나 두 세계는 항상 존재했고, 그 끔찍한 장치가 고양이(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 전까지 서로 완전히 동일했다. 이와 같은 그림에서 파동함수의 붕괴는 없다."(90-1)


"휴 에버렛은 프린스턴대학교 박사과정이던 1955년에 자신의 학위논문 초고에서 이 생각을 전개했는데, 여기서 그는 이 상황을 아메바가 두 개의 딸세포로 분열하는 것에 비교했다. 만약 아메바에게 뇌가 있다면 각각의 딸세포는 분열되기 이전까지의 동일한 역사를 기억할 것이고 그다음부터는 자신의 고유한 개별적 기억을 가질 것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양이의 예를 들자면, 우리는 그 끔찍한 장치가 격발되기 전까지는 하나의 우주와 한 마리의 고양이만을 갖지만, 장치가 격발되고 나면 두 개의 우주와 그 각각에 존재하는 고양이 등등을 갖는다." "에버렛은 그 어떤 관측자도 다른 세계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긴 하지만 우리가 다른 세계들을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세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우리가 지구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타당하지 않다."(93-4)


"우주적인 파동함수는 시간 속 특정한 순간에 우주에 있는 모든 입자의 위치를 기술한다. 그러나 이 함수는 또한 그 순간에 그 입자들의 모든 가능한 위치를 기술한다. 그리고 이 함수는 시간 속 임의의 순간에서 모든 입자의 모든 가능한 위치 또한 기술한다. 비록 가능성의 수는 시간과 공간의 '양자적 입상성'에 의해 제약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단일한 파동함수는 모든 가능한 시간에서의 모든 가능한 우주들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 함수는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간 상태들은 이들이 기술하는 사건들에 의해서 질서지어질 수 있고 이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만, 이 상태들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바뀌지는 않는다. 모든 상태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친숙하게 생각해온 시간은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에서는 '흐르지 않는다.'"(105-7)


해석 4. 결여긋남 해석─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은 이미 일어났고 우리는 그 일부를 알 뿐이다


"결어긋남 해석의 옹호자들이 옳다면 양자성과 일상적 세계 사이의 경계는 크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결맞음에 의존한다. 앤서니 레깃은 당신의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크거나 이보다 더 큰, 이른바 '거시적' 대상들의 행동을 기술하는 데 여전히 양자역학의 규칙들을 이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기 위한 실험을 고안하고자 결심했다." "그는 SQUID(초전도 양자 간섭 장치)를 순환하는 전류에 전자기장을 이용해 수정을 가했다. 이 실험은 반지를 따라 맴도는 전자 파동이 마치 단일한 양자적 개체와 같이 행동함을 보여주며, 이는 원자보다 1억 배 더 큰 크기다." "21세기 초에 수행된 실험들은 파동이 반지의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일 때 일어나는 효과들을 보여주었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파동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파동들이 한 번에 두 방향으로 가는 것, 즉 중첩인 것이다. 대상의 양자성을 결정하는 것은 대상의 크기가 아니라 파동의 결이 맞는다는 사실이다."(111-4)


# 파동의 결이 맞을 때 특징적인 양자 상태를 보여주며, 파동들의 결이 어긋나면 양자성을 보여주는 것을 멈춘다.


"그렇다면 '순수한' 양자적 개체가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여 '결이 어긋날 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때는 얽힘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해진다." "(양자적 상태가 중첩된) 얽힘은 속담 속의 산불보다도 더 빨리 퍼지므로 실질적으로 외부 세계와 분리된 '순수한' 양자적 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원래의 입자와 상호작용했던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이 지금까지 상호작용했거나 접촉했던 모든 것들이 중첩된, 두 개의 얽힌 계가 존재할 따름이다. '결어긋남'은 실제로 전체 세계─우주─에 있는 모든 것을 단일한 양자계로 연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필립 볼이 지적했던 것처럼, 결어긋남은 관측 가능한 우주 속의 기본 입자들보다 많은 양자적 상태들의 중첩과 동등한 비결맞음incoherent 상태를 아주 빠르게 생성한다." "결어긋남은 더 큰 대상들에게서 더 빨리 일어난다. 왜냐하면 이 대상들 안에는 다른 사물들과 그리고 서로 간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비트들이 더 많이 있기 때문이다."(116-8)


"몇몇 연구자들은 결어긋남 해석의 사고방식을 우주의 전체 역사─혹은 역사들─에 적용했다." "만약 모든 '측정', 모든 양자적 상호작용이 가능한 역사들의 배열 속에서 선택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역행하여 결어긋남을 통해 일관된 역사들의 판본들을 걸러내며 빅뱅에까지(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으나 나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겠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최초 시작점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임의의 양자적 상호작용이 일어나자마자 몇몇 가능성들은 배제되고 서로 다른 우주들의 다양성은 줄어든다. 즉 일관된 과거의 우주들의 범위는 줄어든다. 이러한 과정은 현재까지로 이어져, 가능성의 세계들로부터 우리 우주의 역사를 선택하게 된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 우주만이 선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어긋남 역사 접근법은 유일한 우주를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경로를 통해 다세계라는 주제의 한 변형으로 돌아오게 된 셈이다."(119-22)


해석 5. 앙상블 해석─존재 가능한 모든 것은 공간을 뛰어넘어 상호작용한다


"일상 언어에서 앙상블은 몇몇 공통된 속성을 갖거나 함께 작동하는 것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통계학자에게는 600개의 동일한 주사위들의 집합체가 앙상블을 이루는데, 만약 이러한 주사위들을 한꺼번에 굴릴 경우에 우리는 확률의 법칙에 따라 대략 6의 눈 100개, 5의 눈 100개, 4의 눈 100개, 3의 눈 100개, 2의 눈 100개, 1의 눈 100개를 볼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또한 하나의 완벽한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방법으로도 동일한 통계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양자물리학자들이 언급하는 종류의 앙상블이다. 기체 분자들로 가득 차 있는 상자는 이러한 의미의 앙상블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방식으로 실험할 수 있는 다수의 동일한 기체 상자들은 앙상블을 구성한다. 이상적 상황에서, 당신은 정확히 동일한 입자에 정확히 동일한 실험을 여러 번 하고 이러한 각각의 '시행' 결과를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앙상블이다. 시행 결과는 막스 보른이 발전시킨 규칙들에 따라서 확률 분포를 따를 것이다."(129)


"리 스몰린은 '실재적 앙상블 해석'이라는 새로운 판본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앙상블 해석에서 앙상블의 구성원들은 실제로 동시에 모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스몰린의 앙상블 해석에서는 모든 구성원이 동시적으로 실재한다. 이러한 논점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기 위해서 약간의 전문 용어가 필요하다. 앙상블의 가능한 양자 구성 성분들(예를 들어 수소 원자)은 '존재 가능한 것beable'이라 불리는데, 이들은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00개의 주사위를 한 번에 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경우, 이들은 함께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스몰린이 제시한 실재적 앙상블 해석은 앙상블을 이루는 존재 가능한 것들이 하나의 주사위를 600번 굴리는 경우와는 달리 실제로 600개의 주사위들을 함께 굴린 경우와 같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임의의 주어진 시간에 임의의 양자계에서는 존재 가능한 것들의 값들에 의해 결정되는 실재적인 사태들의 상태가 존재한다."(135-6)


"스몰린은 그의 단순한 수학적 규칙들로부터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유도할 뿐만 아니라 고전 역학의 법칙들─뉴턴의 법칙들 등─또한 양자역학의 근사로서 유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양자역학 그 자체가 우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기술에 대한 하나의 근사적 판본이 아닌가 의심하며(사실상 이것이 바로 스몰린이 이 난해한 논의에 참여한 진정한 동기였다), 더 나아가 그는 만약 이러한 의심이 맞다면 진정으로 빛보다 빠른 신호가 발생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당신이 눈치챘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아직 궁극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강력한 힌트는, 존재 가능한 것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유일한 우주적 시간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상호작용은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이는 상대성이론의 확장을 요구할 것이다. 스몰린에 따르면 〈양자물리학은 다른 용어들로 공식화되는 우주론적 이론에 대한 하나의 근사임이 분명할 것이다.〉"(140-1)


해석 6. 거래 해석─미래는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빛과 모든 전자기 복사의 행동을 기술하는 방정식들은 빛의 속력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고 말하며 오늘날 이는 상수 c로 쓰인다." "빛의 속력이 모든 관측자에게 같음을 말하는 방정식은, 그 방정식을 발견한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이름을 따서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맥스웰 방정식'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속성을 갖고 있다. 이 방정식은 시간 대칭적이다. 움직이는 전자와 연관되는 복사에서처럼 전자기 복사를 포함하는 그 어떤 문제에도 항상 이 방정식에는 두 개의 해가 있다. 하나의 해는 이른바 '지연된retarded' 파동을 기술하는데, 파동은 원천으로부터 나와서 시간 속에서 앞의 방향으로 진행하며, 세계 속 어떤 곳에서 흡수된다. 또 다른 해는 이른바 '앞선advanced' 파동을 기술하는데, 미래로부터 출발하는 이 파동은 세계 속 흡수체로부터 나와서 우리가 파동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경우에는 움직이는 전자)으로 수렴한다.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단순하게 이러한 '앞선 파동 해'를 무시한다."(143-5)


"대다수의 물리학자들과 달리 존 크레이머는 이 개념을 양자역학과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플로리다 해변에서 대서양으로 던진 병의 비유를 제시한다. 이 병이 양자적 병이라서 파동 속으로 사라지고 이 파동은 대양 너머로 퍼져 유럽에까지 나아간다고 상상하자. 영국의 어느 해변에 그 병은 다시 나타난다. 그 순간에 전체 대양에 퍼져 있던 파동은 사라진다. 크레이머는 공간 전체를 걸쳐 양자적인 '악수'를 하는 앞선 파동들과 지연된 파동들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것 그리고 오직 앞선 파동을 '메아리'로 삼은 지연된 파동들만이 입자들의 위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A와 B 사이의 공간을 통과하지 않고서 A에서 B로(또는 하나의 에너지 준위에서 다른 에너지 준위로) 이동하는 신비로운 양자역학적 전이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에 있는 병으로부터 나온 파동들이 시간을 거슬러 대양을 가로질러 플로리다로 이동했고, 이 파동들이 유일한 연결을 수립하여 다른 파동들을 소거해버린 것이다."(148)


"거래 해석에 따르면 지연된 '제안 파동'은 실험에서 두 개의 구멍을 통해서 퍼져나가고, 탐지 스크린으로부터 앞선 '승인 파동'을 촉발시키는데, 승인 파동은 두 개의 구멍을 거꾸로 이동하여 방출 원천으로 되돌아간다. 각각의 입자는 어떤 제안을 수용할 것인지를 무작위적으로 선택하며, 이러한 선택이 간섭무늬를 만든다. 그러나 만약 이 실험의 또 다른 판본인 정교한 지연된 선택 실험에서처럼, 입자가 그 여행을 떠나고 난 뒤에 두 개의 구멍 중 하나가 닫힌다면 입자는 이미 이에 대해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승인 파동이 악수를 하기 위해 되돌아갈 때 오직 하나의 구멍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의 퍼즐들을 해결하는 데 거둔 이와 같은 성공은 (원인은 항상 현상에 선행해야 한다는 우리의 직관 같은) 상식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단 하나의 개념을 수용하는 것을 그 대가로 삼아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양자 파동의 일부분이 실제로 시간을 거슬러서 이동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156-7)


나오며, 제정신인 말이 하나도 없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장 변질하는 보수주의─진보주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개혁에 단호히 반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의 전제화를 방지하고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권리들을 지키는 방법에 있었다. 그 핵심은 권력의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에 있다. 자유를 위한 제도 구상이야말로 버크의 보수주의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보수주의를 논함에 있어 버크를 언급하려면 적어도 1) 지켜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이며 2) 이러한 제도와 관습은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3)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4) 민주화를 전제로 하면서도 질서 있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을 근거로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1)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과거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2) 현실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며 3) 자유를 위한 제도를 파괴하고 4) 나아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수주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버크적 의미의 보수주의는 아니다."(32-3)


제1장 프랑스 혁명과 싸우다


"미학사에서 버크는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1757)를 집필하여 '숭고'라는 관념에 처음 주목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 이전까지 미학에서 중시된 것은 '균형'이나 '질서' 혹은 '조화'와 같은 정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에 비해 18세기 유럽에서는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여행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알프스 등지에서 증가한 산악체험을 배경으로 새로운 미의식 및 감수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즉 높이 솟아오른 산이나 깊은 골짜기, 광대한 사막 등을 눈앞에 둔 인간은 일종의 외경심과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동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이 '숭고'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미와는 대조적으로 '숭고'는 충격이나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단 이러한 충격이나 긴장감은 인간의 삶을 북돋우며 재생의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버크는 논했다. 이러한 '숭고'의 관념은 이마누엘 칸트가 재조명해 『판단력 비판』(1790)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44-5)


"프랑스 혁명의 비판자이자 계몽사상에 적대적이었던 인물이라는 버크의 이미지는 다소 일면적이다. 버크는 분명 추상적 이성 사용을 비판했지만 결코 이성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의 계몽사상을 섭렵한) 버크는 실로 당대의 지(知)의 발전과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었으며 훗날 그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된 계몽사상을 비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계몽사상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아니었다. 버크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믿었다. 다만 그 사용법에 관해 동시대의 계몽사상과 격렬히 대립했을 뿐이다. 또 버크는 이성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주목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인간을 추동하는 감정과 관념은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시절부터 그에게 중요한 테마였다.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 주목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의 무한한 발전보다는 그 한계에 착목했던 점에서 버크 사고의 특징이 생생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50-1)


"버크가 『현재의 불만의 원인』(1770)을 집필할 당시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버크는 그 원인을 왕권의 정치개입에서 찾았다. 국왕(조지 3세) 자신의 음모야말로 영국 정치를 위협하고 현재의 불만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버크는 격렬히 왕권 비판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크는 국왕 본인을 직접 비판하는 일은 신중하게 피해갔다. 버크가 비판의 창끝을 겨눈 것은 왕의 측근들이었다. '국왕의 벗' 즉 궁정파야말로 현실의 내각 배후에 존재하는 세력이며 실질적으로 인민의 견제를 받지 않는 또 하나의 내각, 이른바 '이중내각제'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버크의 주장이었다." "명예혁명 이래 영국 정치의 최대 특징은 내각과 민중 사이에 의회가 존재하고, 특히 하원이 민중의 목소리와 정치 시스템을 잘 매개했다는 데 있다. 버크는 이렇게 논하면서 정치의 요체는 민중을 힘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정'을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56)


"버크는 〈정당이란 연대된 노력을 통하여 특정한 원리를 공유하고 이에 기반해 국가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통합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현재의 불만의 원인』)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정당이 〈특정한 원리〉에 기반을 둔다고 명시하는 한편, 그 존재 이유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의 촉진〉에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버크의 이 정의에 따르면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야합은 정당이 아니며 국가와 완전히 적대하고 국가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집단 역시 정당이 아니다. 이러한 정당의 정의는 정치사상사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본래 정당과 파벌은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으며 양자 모두 사회 전체의 공공이익에 반하는 '부분 이익'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버크는 정당을 국가이익의 촉진을 위해 특정 원리를 공유하는 집단이라 재정의함으로써 단순한 일시적 이해에 따라 생겨난 파벌과 구별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58-9)


"1774년 봄 이래 버크는 계속해 미국과 관련된 중요한 연설을 했다." "버크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은 미국인을 특징짓는 자유의 정신이었다." "버크(그리고 토크빌)가 보기에 미국인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의 후예이며 미국인이 사랑하는 자유는 자유 일반이 아니라 영국식 자유의 이념이다. 게다가 그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국의 역사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만들어 온 것이었다. 식민지 미국 땅의 사람 역시 자유민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미국인과 영국인의 공통된 선조의 위업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미국인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피 흘려 싸워 얻어낸 원리 일부를 공격하고 그 감정 일부를 조롱하지 않고서는 논쟁에서 결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식민지와의 화해 결의 제안에 관한 연설」)"(60)


# 버크의 핵심 논점은 일방적으로 미국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영제국이라는 기존 제국 질서의 안정화라는 대의에 순응하는 영국과 미국 간의 화해와 협조였다.


"버크에게 '보수(保守)'란 낡은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변화의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에겐 자신을 보존할 수단도 없는 법이다. 그런 수단이 없다면 그 국가가 가장 절실히 유지하고 싶어 하는 헌정상의 한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처럼 들리는 보수주의의 신조(credo)가 태어났다. (왕위계승과 권리선언이 함께 선포된) 명예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수정이라는 두 원리가 강하게 작동한 사례였다. 그 혁명은 어디까지나 왕국의 오래된 원리를 회복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왕국의 과거 원리 회복은커녕 역사의 명확한 단절로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버크는 주목했다." "과거에서 회귀해야 할 모범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 원리에 기반을 둔 미래로 도약하는 것, 버크를 뒤흔든 것은 이와 같은 사태였다."(70-1)


"사회라는 복잡한 건축물의 전체를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보존하고 개량해야 할까. 버크는 개인의 이성보다는 감성과 편견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버크가 이성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성을 논하면서 일개 개인의 사변적, 추상적 이성을 과신하는 것을 비판했다. 인간의 이성은 취약한 것이며 한 사람의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버크는 도리어 종종 편견이나 미신이라 불리는 인간 정신 활동이 이성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습관 역시 인간의 이성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보통 습관이라고 하면 사고가 결여된 동일패턴의 반복이라 이해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에게 각자의 역할과 임무를 가르치고 편견 안에 숨겨진 지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습관이다." "이에 비해 계몽사상은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성을 벗겨버리고 개인을 추상적으로 바라본 데에 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74-6)


제2장 사회주의와 싸우다


"20세기 전반기의 보수주의는 영국을 주된 무대로 하는데 영국 보수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한 것은 문학자들, 혹은 문인들이었다." "T. S. 엘리엇은 〈그럼 우리 가 봅시다, 그대와 나/함께 수술대 위에 올라 마취당한 환자처럼〉(「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처럼 전위적인 표현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그런데 31세 때 쓴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9)에서 그는 오히려 전통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이란 첫째, 25세를 넘겨서도 계속해서 시인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무시해서는 안 될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즉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자기 스스로 호메로스 이래의 문학적 전통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그 전통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비로소 그 현대성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다. 거듭 말하자면 전통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추가하며 갱신해 나가는 것이다."(82-5)


"엘리엇의 또 다른 저서인 『문화 정의론』(1948)의 논점들 중 하나는 문화와 집단의 연결이다. 문화란 개인 혼자 짋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나 가족 등 집단에 의해 지탱된다. 이러한 집단의 문화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엘리엇은 문화에 관한 비개인주의적 이해를 제시한 것이다." "엘리엇의 담론은 단순한 엘리트 문화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문화라는 것이 과연 계급 등의 집단이 담당할 대상인가, 그 여부에 있다. 엘리엇에게 문화란 단순히 이런저런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통일성 있는 삶의 방식〉에 가깝다. 문화란 한 집단의 고유한 태도나 행동의 스타일일뿐 아니라 미의식과 지혜, 판단력, 심지어는 요리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요리법에 대한 무관심을 영국 문화 쇠퇴의 방증이라 보았다.) 이런 문화는 종종 집단의 특정인물로 인해서 체현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에 의해 유지, 발전되는 것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87-8)


"20세기 보수주의의 최대 테마가 사회주의와의 대결이었다고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칭했으며 보수주의자임을 명확히 부정했다." "왜 하이에크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일컫지 않는가. 〈그것은 보수주의가 바로 그 본질에 의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대신할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시대의 경향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바람직하지 않은 발전을 감속시키는 데는 성공할 수도 있으나 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에 그 경향이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즉 보수주의는 감속장치를 작동시킬 뿐 미래를 향한 가속기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오히려 변화를 환영한다. 이 변화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자생적(spontaneous)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요점이다. 진화는 결코 계획할 수 없다."(95-8)


"『노예의 길』(1944)에서 하이에크가 문제시한 것은 것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아니었다. 이 이념에 관해 하이에크는 꼭 반대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비판한 것은 사회주의가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 곧 '집산주의(collectivism)'였다." "단순한 상황이라면 한 사람의 인간, 또는 하나의 위원회가 모든 것을 고려해 효과적인 계획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화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주체가 모든 정보를 수집해 이를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라는 비인격적 메커니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신념이었다."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개인에게 하나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단일 가치체계가 존재한다는 이상주의와 사람들의 필요에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환상이 모든 집산주의의 배경에 있다고 주장한다."(103-4)


"하이에크는 『자유의 구조』(1960)에서 '법의 지배'를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자유를 '강제의 결여'로 정의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중시한 것은 인간 행동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의도의 결과는 아닌 복잡한 질서였다. 이런 질서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고 부른다. 자생적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이다." "하이에크가 생각하는 '진화'란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의 진화다." "하이에크는 이런 '진화'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법'이라고 했다. 이 경우 법이란 특정 입법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행동의 일반적 규칙을 가리킨다. 하이에크가 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일반성'이었다.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입법은 그 대상인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강제와 같다. 법은 특정 대상을 노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일반적인 규칙은 강제를 최소화한다고 생각했다."(106-7)


"마이클 오크숏이 비판하는 것은 '합리주의자'다. 합리주의자는 정치에 관해 항상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치가 존재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획일적으로 완전한 답이 존재함을 당연히 여기며 정치를 그 실천의 장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크숏의 경우 이런 지(知)는 '기술지'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지(知) 속에는 기술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지(知)가 존재한다. 오크숏은 이를 '실천지'라고 부른다. 실천지는 기술지와는 달리 명확히 정식화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른 개연성의 지인 실천지는 보통 관습과 전통이라는 실천 속에 내포돼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실천지를 실천지라고 알지 못한 채 배워 간다. 바꿔 말하면 실천 속에서 어떤 행동양식과 매너로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 실천지이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여러 직업과 전문 속에서 축적되어 온 이와 같은 실천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나아가 적대시하기도 한다."(118-9)


제3장 '큰 정부'와 싸우다


"1950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 부활의 봉화를 올린 이가 러셀 커크다. 『보수주의 정신』(1953)에서 커크는 보수주의의 여섯 가지 규범(canon)을 제시하고 있다. 제1규범은 '인간 의식과 사회를 동등하게 지배하는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에 대한 믿음'이다. '정치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문제'라고까지 단언한다. 제2규범은 '획일성과 효율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며 이에 따라 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신비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3규범은 '문명사회에 있어 서열과 계급은 불가결한 것이라는 확신'이다. 커크에게 '계급 없는 사회'는 결코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를 잇는 제4의 규범은 '자유와 소유권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이다. 제5규범은 '추상적 계획에 기초해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궤변가, 계산가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를 신용해서는 안 된다', 제6규범으로 '변화가 꼭 유익한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132-3)


"이러한 주장은 머지않아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운동과 연결돼 결국 정치와 사회의 존재방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 정신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미국이 현대 선진국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종교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는 동부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종교화한 '선벨트'의 신앙심 깊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근저에 있는 것은 세속화, 개인화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정신적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욕구이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또 다른 정신적 배경에는 이른바 '반지성주의'가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은 지역의 기초적 자치를 담당하는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지성에 감명 받았다.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지적 엘리트가 아니다. 지위도 학력도 없으나 생활에 뿌리내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토대라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반엘리트 사상이 바로 '반지성주의'이다."(134-7)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가 단순한 정신적 태도와 심리상태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혁명'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전통주의'와 함께 또 하나의 요소가 더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리버테리어니즘'이다." "'리버테리언'이라는 말은 원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상을 일컬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 단어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 배경에는 리버럴리즘이라는 단어의 의미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원래 정부 권력을 억제해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 시기에는 오히려 '큰 정부' 아래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리버럴리즘에 위화감을 느낀 리버테리언은 리버럴파에 의한 정부 권한 확대와 격렬히 대립하며 개인의 선택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의 '융합'이 실현된 것이야말로 현대 미국 보수주의 발전의 커다란 비약을 위한 디딤대가 되었다."(141-3)


"밀턴 프리드먼은 『선택의 자유』(1980)에서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이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경제적 자유이며 경제적 자유가 없는 곳에 정치적 자유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먼이 신뢰하는 것은 가격 메커니즘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개별적 이익 증진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가격 시스템은 중앙집권적 지시 없이, 서로 대화하지 않고, 나아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서도 이 과제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공동 행위에 대한 눈에 띄게 낮은 평가와 그것과는 대조적인 시장질서에 대한 극명히 높은 평가이다. 사람들의 자발적 상호행위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치 않은 것으로 가격 메커니즘을 매개로 한 것에 한정된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144)


"프리드먼의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과는 달리 개인의 인권과 자연권을 중시하는 이른바 윤리적 리버테리어니즘을 전개한 것이 바로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1974)다. 이 책에서 노직이 주장한 것은 '보호협회'라는 모델이다." "자연상태에서 자발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호협회'는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다른 협회를 압도하는 사실상 독점 조직이 된다. 노직은 이를 지배적 보호협회라고 불렀다. 지배적 보호협회는 이윽고 영역 내의 나머지 주민에 대해서도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최소국가가 되어 간다. 노직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생적인 프로세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최소국가는 보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단 하나의 점에서만 정통성을 가진다." "따라서 사람들의 노동이 결실을 맺은 소유권에 정부가 과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며 노직은 정부의 권한 확대를 강하게 비판했다."(147-9)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를 구성하는 것은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 이 둘뿐만이 아니다. 이 둘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질적 요소가 보수주의에 유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네오콘(Neo Conservatism)', 즉 (리버럴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신보수주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1964년 대통령 선거이다. 이 선거는 비명에 죽음을 맞이한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어 현직에 있던 민주당 출신 린든 존슨 대통령과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대결이었다." "당시 훗날 네오콘으로 불리는 이들은 골드워터가 아닌 존슨을 지지했다." "그러나 네오콘들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계획에 환멸을 느끼고, 카운터컬처(반체제문화) 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에 반발하면서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지지하는 쪽으로 정치적 입장을 전환해 간다. 네오콘이 골드워터 지지 세력과 합류했을 때, 처음으로 레이건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미국 '보수혁명'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154-8)


# 네오콘의 사상적 특징

1. 독특한 국제주의 :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어 국제정치에 (억제를 넘어)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다.

2. (도덕적) 리얼리즘 : 국제정치를 권력 투쟁의 장으로 여기는 고전적 리얼리즘과 달리 도덕적 이념 실현의 장으로 취급한다.

3. 사회개혁 유보 : 대규모 국가 개입과 복지 정책, 특히 반전운동 같은 '좌경화'된 리버럴은 사회의 유기적 연결을 파괴한다.


제4장 일본의 보수주의


종장 21세기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시대가 끝나고 보수주의도 갈 길을 헤매는 지금 더 이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또는 리버럴과 보수주의라는 구별은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을까. '예'와 '아니오' 모두 그 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별은 불분명해지고 있다. 오늘날 모든 전통을 부정하고 사회를 이성에 기초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0에서부터 새로 만들기를 바라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해도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지혜는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이 '진보'라는 이름의 강한 순풍을 받아 앞으로 나아갔던 시대는 확실히 그 끝을 고했다. 이후에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되돌아봄으로써 전진을 위한 에너지와 지혜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서 얻은 추진력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217-8)


"또 한편 리버럴과 보수라는 대립축이 완전히 무효해졌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리버럴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반대로 어디까지나 보편주의의 입장을 중시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동료'를 강조하는 순간, 배제되는 '그들'이 생겨난다." "동료와의 관계를 우선하는 전자의 입장이 보수, 보편적 연대를 주장하는 후자의 입장이 리버럴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에 있어 공동체 내부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사이의 상호성을 중시하는가 하는 차이와도 연동해 이후 사회를 논해 가는 데 유력한 대립축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버럴과 보수의 차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다양한 지향점의 공존이다. 즉 가장 심각한 위기는 리버럴과 보수 모두가 원리주의적이 되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219-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