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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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변질하는 보수주의─진보주의 쇠퇴 속에서


"프랑스 혁명의 급진적인 개혁에 단호히 반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최대 관심사는 권력의 전제화를 방지하고 역사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권리들을 지키는 방법에 있었다. 그 핵심은 권력의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에 있다. 자유를 위한 제도 구상이야말로 버크의 보수주의에서 지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보수주의를 논함에 있어 버크를 언급하려면 적어도 1) 지켜야 하는 것은 구체적인 제도와 관습이며 2) 이러한 제도와 관습은 역사 속에서 다듬어져 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3) 자유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4) 민주화를 전제로 하면서도 질서 있는 점진적 개혁을 지향한다는 점을 근거로 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1) 추상적이고 자의적인 과거의 이미지에 바탕을 두고 2) 현실의 역사적 연속성을 무시하며 3) 자유를 위한 제도를 파괴하고 4) 나아가 민주주의를 전면 부정한다면 그것은 결코 보수주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버크적 의미의 보수주의는 아니다."(32-3)


제1장 프랑스 혁명과 싸우다


"미학사에서 버크는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1757)를 집필하여 '숭고'라는 관념에 처음 주목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 이전까지 미학에서 중시된 것은 '균형'이나 '질서' 혹은 '조화'와 같은 정적인 아름다움이었다. 이에 비해 18세기 유럽에서는 그랜드 투어라 불리는 여행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알프스 등지에서 증가한 산악체험을 배경으로 새로운 미의식 및 감수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다. 즉 높이 솟아오른 산이나 깊은 골짜기, 광대한 사막 등을 눈앞에 둔 인간은 일종의 외경심과 함께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동적인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한 관념이 '숭고'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미와는 대조적으로 '숭고'는 충격이나 긴장감을 가져다준다. 단 이러한 충격이나 긴장감은 인간의 삶을 북돋우며 재생의 기회를 가져다준다고 버크는 논했다. 이러한 '숭고'의 관념은 이마누엘 칸트가 재조명해 『판단력 비판』(1790)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되었다."(44-5)


"프랑스 혁명의 비판자이자 계몽사상에 적대적이었던 인물이라는 버크의 이미지는 다소 일면적이다. 버크는 분명 추상적 이성 사용을 비판했지만 결코 이성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의 계몽사상을 섭렵한) 버크는 실로 당대의 지(知)의 발전과 네트워크 속에서 만들어진 인물이었으며 훗날 그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 된 계몽사상을 비판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계몽사상 자체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아니었다. 버크는 어디까지나 이성을 믿었다. 다만 그 사용법에 관해 동시대의 계몽사상과 격렬히 대립했을 뿐이다. 또 버크는 이성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에 주목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인간을 추동하는 감정과 관념은 『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시절부터 그에게 중요한 테마였다. 인간의 이성뿐 아니라 감성에 주목하고, 인간의 인식능력의 무한한 발전보다는 그 한계에 착목했던 점에서 버크 사고의 특징이 생생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다."(50-1)


"버크가 『현재의 불만의 원인』(1770)을 집필할 당시 영국은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버크는 그 원인을 왕권의 정치개입에서 찾았다. 국왕(조지 3세) 자신의 음모야말로 영국 정치를 위협하고 현재의 불만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버크는 격렬히 왕권 비판을 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크는 국왕 본인을 직접 비판하는 일은 신중하게 피해갔다. 버크가 비판의 창끝을 겨눈 것은 왕의 측근들이었다. '국왕의 벗' 즉 궁정파야말로 현실의 내각 배후에 존재하는 세력이며 실질적으로 인민의 견제를 받지 않는 또 하나의 내각, 이른바 '이중내각제'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버크의 주장이었다." "명예혁명 이래 영국 정치의 최대 특징은 내각과 민중 사이에 의회가 존재하고, 특히 하원이 민중의 목소리와 정치 시스템을 잘 매개했다는 데 있다. 버크는 이렇게 논하면서 정치의 요체는 민중을 힘으로 억압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성정'을 잘 이해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56)


"버크는 〈정당이란 연대된 노력을 통하여 특정한 원리를 공유하고 이에 기반해 국가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통합된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현재의 불만의 원인』)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정당이 〈특정한 원리〉에 기반을 둔다고 명시하는 한편, 그 존재 이유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의 촉진〉에 있다고 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버크의 이 정의에 따르면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야합은 정당이 아니며 국가와 완전히 적대하고 국가의 이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집단 역시 정당이 아니다. 이러한 정당의 정의는 정치사상사에서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본래 정당과 파벌은 특별히 구분되지 않았으며 양자 모두 사회 전체의 공공이익에 반하는 '부분 이익'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버크는 정당을 국가이익의 촉진을 위해 특정 원리를 공유하는 집단이라 재정의함으로써 단순한 일시적 이해에 따라 생겨난 파벌과 구별하는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58-9)


"1774년 봄 이래 버크는 계속해 미국과 관련된 중요한 연설을 했다." "버크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것은 미국인을 특징짓는 자유의 정신이었다." "버크(그리고 토크빌)가 보기에 미국인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국인의 후예이며 미국인이 사랑하는 자유는 자유 일반이 아니라 영국식 자유의 이념이다. 게다가 그 자유는 결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영국의 역사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만들어 온 것이었다. 식민지 미국 땅의 사람 역시 자유민으로 태어났으며 그들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은 미국인과 영국인의 공통된 선조의 위업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미국인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유 그 자체의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파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피 흘려 싸워 얻어낸 원리 일부를 공격하고 그 감정 일부를 조롱하지 않고서는 논쟁에서 결코 우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식민지와의 화해 결의 제안에 관한 연설」)"(60)


# 버크의 핵심 논점은 일방적으로 미국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대영제국이라는 기존 제국 질서의 안정화라는 대의에 순응하는 영국과 미국 간의 화해와 협조였다.


"버크에게 '보수(保守)'란 낡은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변화의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에겐 자신을 보존할 수단도 없는 법이다. 그런 수단이 없다면 그 국가가 가장 절실히 유지하고 싶어 하는 헌정상의 한 부분을 상실하는 위험에조차 빠질 수 있다.〉『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1790) 변화할 수단을 갖지 않은 국가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여기에서 지키기 위해서는 바뀌어야 한다는, 역설처럼 들리는 보수주의의 신조(credo)가 태어났다. (왕위계승과 권리선언이 함께 선포된) 명예혁명은 그런 의미에서 보수와 수정이라는 두 원리가 강하게 작동한 사례였다. 그 혁명은 어디까지나 왕국의 오래된 원리를 회복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왕국의 과거 원리 회복은커녕 역사의 명확한 단절로서 이루어졌다는 점에 버크는 주목했다." "과거에서 회귀해야 할 모범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추상적 원리에 기반을 둔 미래로 도약하는 것, 버크를 뒤흔든 것은 이와 같은 사태였다."(70-1)


"사회라는 복잡한 건축물의 전체를 꿰뚫어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보존하고 개량해야 할까. 버크는 개인의 이성보다는 감성과 편견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버크가 이성을 부정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성을 논하면서 일개 개인의 사변적, 추상적 이성을 과신하는 것을 비판했다. 인간의 이성은 취약한 것이며 한 사람의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버크는 도리어 종종 편견이나 미신이라 불리는 인간 정신 활동이 이성을 보완하고 확장하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습관 역시 인간의 이성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보통 습관이라고 하면 사고가 결여된 동일패턴의 반복이라 이해하지만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에게 각자의 역할과 임무를 가르치고 편견 안에 숨겨진 지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습관이다." "이에 비해 계몽사상은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성을 벗겨버리고 개인을 추상적으로 바라본 데에 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74-6)


제2장 사회주의와 싸우다


"20세기 전반기의 보수주의는 영국을 주된 무대로 하는데 영국 보수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한 것은 문학자들, 혹은 문인들이었다." "T. S. 엘리엇은 〈그럼 우리 가 봅시다, 그대와 나/함께 수술대 위에 올라 마취당한 환자처럼〉(「J. 앨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처럼 전위적인 표현으로 알려진 시인이다. 그런데 31세 때 쓴 「전통과 개인의 재능」(1919)에서 그는 오히려 전통의 의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전통이란 첫째, 25세를 넘겨서도 계속해서 시인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무시해서는 안 될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즉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자기 스스로 호메로스 이래의 문학적 전통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그 전통 속에 위치지음으로써 비로소 그 현대성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다. 거듭 말하자면 전통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것을 추가하며 갱신해 나가는 것이다."(82-5)


"엘리엇의 또 다른 저서인 『문화 정의론』(1948)의 논점들 중 하나는 문화와 집단의 연결이다. 문화란 개인 혼자 짋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이나 가족 등 집단에 의해 지탱된다. 이러한 집단의 문화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문화에 기반하고 있다. 엘리엇은 문화에 관한 비개인주의적 이해를 제시한 것이다." "엘리엇의 담론은 단순한 엘리트 문화론에 머무르지 않는다. 문제는 일반적으로 문화라는 것이 과연 계급 등의 집단이 담당할 대상인가, 그 여부에 있다. 엘리엇에게 문화란 단순히 이런저런 활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통일성 있는 삶의 방식〉에 가깝다. 문화란 한 집단의 고유한 태도나 행동의 스타일일뿐 아니라 미의식과 지혜, 판단력, 심지어는 요리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요리법에 대한 무관심을 영국 문화 쇠퇴의 방증이라 보았다.) 이런 문화는 종종 집단의 특정인물로 인해서 체현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단 전체에 의해 유지, 발전되는 것이라고 엘리엇은 생각했다."(87-8)


"20세기 보수주의의 최대 테마가 사회주의와의 대결이었다고 한다면 그 대표적인 인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칭했으며 보수주의자임을 명확히 부정했다." "왜 하이에크는 자신을 보수주의자라고 일컫지 않는가. 〈그것은 보수주의가 바로 그 본질에 의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대신할 다른 길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수주의는 시대의 경향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바람직하지 않은 발전을 감속시키는 데는 성공할 수도 있으나 다른 방향을 제시하지 않기에 그 경향이 지속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나는 왜 보수주의자가 아닌가」) 즉 보수주의는 감속장치를 작동시킬 뿐 미래를 향한 가속기능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자유주의는 오히려 변화를 환영한다. 이 변화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자생적(spontaneous)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요점이다. 진화는 결코 계획할 수 없다."(95-8)


"『노예의 길』(1944)에서 하이에크가 문제시한 것은 것은 사회정의 실현이라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아니었다. 이 이념에 관해 하이에크는 꼭 반대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비판한 것은 사회주의가 이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채택한 방법, 곧 '집산주의(collectivism)'였다." "단순한 상황이라면 한 사람의 인간, 또는 하나의 위원회가 모든 것을 고려해 효과적인 계획을 만드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화한 사회에서는 하나의 주체가 모든 정보를 수집해 이를 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격이라는 비인격적 메커니즘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하이에크의 신념이었다." "선의에 의한 것이라 해도 사회 전체를 통제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은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정하고 모든 개인에게 하나의 목적을 강요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단일 가치체계가 존재한다는 이상주의와 사람들의 필요에 순위를 매길 수 있다는 환상이 모든 집산주의의 배경에 있다고 주장한다."(103-4)


"하이에크는 『자유의 구조』(1960)에서 '법의 지배'를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이 책에서 하이에크는 자유를 '강제의 결여'로 정의하고 있다." "하이에크가 중시한 것은 인간 행동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의도의 결과는 아닌 복잡한 질서였다. 이런 질서를 하이에크는 '자생적 질서'라고 부른다. 자생적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이다." "하이에크가 생각하는 '진화'란 제도와 관습이라는 '규칙'의 진화다." "하이에크는 이런 '진화'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법'이라고 했다. 이 경우 법이란 특정 입법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행동의 일반적 규칙을 가리킨다. 하이에크가 법에서 특히 중시한 것은 '일반성'이었다. 개별적인 대상에 대한 입법은 그 대상인 개인과 집단에 대한 강제와 같다. 법은 특정 대상을 노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에크는 일반적인 규칙은 강제를 최소화한다고 생각했다."(106-7)


"마이클 오크숏이 비판하는 것은 '합리주의자'다. 합리주의자는 정치에 관해 항상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한다.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정치가 존재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항상 획일적으로 완전한 답이 존재함을 당연히 여기며 정치를 그 실천의 장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오크숏의 경우 이런 지(知)는 '기술지'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지(知) 속에는 기술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지(知)가 존재한다. 오크숏은 이를 '실천지'라고 부른다. 실천지는 기술지와는 달리 명확히 정식화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른 개연성의 지인 실천지는 보통 관습과 전통이라는 실천 속에 내포돼 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실천지를 실천지라고 알지 못한 채 배워 간다. 바꿔 말하면 실천 속에서 어떤 행동양식과 매너로서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 실천지이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여러 직업과 전문 속에서 축적되어 온 이와 같은 실천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나아가 적대시하기도 한다."(118-9)


제3장 '큰 정부'와 싸우다


"1950년대 미국에서 보수주의 부활의 봉화를 올린 이가 러셀 커크다. 『보수주의 정신』(1953)에서 커크는 보수주의의 여섯 가지 규범(canon)을 제시하고 있다. 제1규범은 '인간 의식과 사회를 동등하게 지배하는 초월적 질서 또는 자연법에 대한 믿음'이다. '정치 문제는 근본적으로 종교적 그리고 도덕적 문제'라고까지 단언한다. 제2규범은 '획일성과 효율주의의 지배에 반대하며 이에 따라 인간 존재의 다양성과 신비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3규범은 '문명사회에 있어 서열과 계급은 불가결한 것이라는 확신'이다. 커크에게 '계급 없는 사회'는 결코 이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를 잇는 제4의 규범은 '자유와 소유권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신념'이다. 제5규범은 '추상적 계획에 기초해 사회를 개조하고자 하는 궤변가, 계산가 그리고 이코노미스트를 신용해서는 안 된다', 제6규범으로 '변화가 꼭 유익한 개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132-3)


"이러한 주장은 머지않아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운동과 연결돼 결국 정치와 사회의 존재방식을 크게 변화시킨다. 그 정신적,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면 우선 미국이 현대 선진국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종교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는 동부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종교화한 '선벨트'의 신앙심 깊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근저에 있는 것은 세속화, 개인화한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정신적 안식처를 구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욕구이다." "현대 미국 보수주의의 또 다른 정신적 배경에는 이른바 '반지성주의'가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사상가 토크빌은 지역의 기초적 자치를 담당하는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지성에 감명 받았다. 미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지적 엘리트가 아니다. 지위도 학력도 없으나 생활에 뿌리내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토대라는 신념을 뒷받침하는 반엘리트 사상이 바로 '반지성주의'이다."(134-7)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가 단순한 정신적 태도와 심리상태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혁명'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전통주의'와 함께 또 하나의 요소가 더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리버테리어니즘'이다." "'리버테리언'이라는 말은 원래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일련의 사상을 일컬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이 단어는 미국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그 배경에는 리버럴리즘이라는 단어의 의미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원래 정부 권력을 억제해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 시기에는 오히려 '큰 정부' 아래에서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이와 같은 리버럴리즘에 위화감을 느낀 리버테리언은 리버럴파에 의한 정부 권한 확대와 격렬히 대립하며 개인의 선택과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의 '융합'이 실현된 것이야말로 현대 미국 보수주의 발전의 커다란 비약을 위한 디딤대가 되었다."(141-3)


"밀턴 프리드먼은 『선택의 자유』(1980)에서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경제적 자유와 정치적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이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경제적 자유이며 경제적 자유가 없는 곳에 정치적 자유는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프리드먼이 신뢰하는 것은 가격 메커니즘이다.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들의 개별적 이익 증진을 위해 협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가격 시스템은 중앙집권적 지시 없이, 서로 대화하지 않고, 나아가 서로를 좋아하지 않고서도 이 과제를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인간과 인간의 공동 행위에 대한 눈에 띄게 낮은 평가와 그것과는 대조적인 시장질서에 대한 극명히 높은 평가이다. 사람들의 자발적 상호행위는 중요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치 않은 것으로 가격 메커니즘을 매개로 한 것에 한정된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 '대화하고', '좋아하는' 관계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144)


"프리드먼의 경제적 리버테리어니즘과는 달리 개인의 인권과 자연권을 중시하는 이른바 윤리적 리버테리어니즘을 전개한 것이 바로 로버트 노직의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1974)다. 이 책에서 노직이 주장한 것은 '보호협회'라는 모델이다." "자연상태에서 자발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보호협회'는 상호 경쟁하는 과정에서 점차 다른 협회를 압도하는 사실상 독점 조직이 된다. 노직은 이를 지배적 보호협회라고 불렀다. 지배적 보호협회는 이윽고 영역 내의 나머지 주민에 대해서도 무료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최소국가가 되어 간다. 노직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자생적인 프로세스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최소국가는 보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단 하나의 점에서만 정통성을 가진다." "따라서 사람들의 노동이 결실을 맺은 소유권에 정부가 과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며 노직은 정부의 권한 확대를 강하게 비판했다."(147-9)


"현대 미국의 보수주의를 구성하는 것은 전통주의와 리버테리어니즘, 이 둘뿐만이 아니다. 이 둘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질적 요소가 보수주의에 유입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이른바 '네오콘(Neo Conservatism)', 즉 (리버럴 반공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신보수주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1964년 대통령 선거이다. 이 선거는 비명에 죽음을 맞이한 케네디 대통령의 뒤를 이어 현직에 있던 민주당 출신 린든 존슨 대통령과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의 대결이었다." "당시 훗날 네오콘으로 불리는 이들은 골드워터가 아닌 존슨을 지지했다." "그러나 네오콘들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계획에 환멸을 느끼고, 카운터컬처(반체제문화) 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에 반발하면서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을 지지하는 쪽으로 정치적 입장을 전환해 간다. 네오콘이 골드워터 지지 세력과 합류했을 때, 처음으로 레이건 대통령 당선에 이르는 미국 '보수혁명'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것이다."(154-8)


# 네오콘의 사상적 특징

1. 독특한 국제주의 :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강한 적대심을 품고 있어 국제정치에 (억제를 넘어)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한다.

2. (도덕적) 리얼리즘 : 국제정치를 권력 투쟁의 장으로 여기는 고전적 리얼리즘과 달리 도덕적 이념 실현의 장으로 취급한다.

3. 사회개혁 유보 : 대규모 국가 개입과 복지 정책, 특히 반전운동 같은 '좌경화'된 리버럴은 사회의 유기적 연결을 파괴한다.


제4장 일본의 보수주의


종장 21세기의 보수주의


"진보주의 시대가 끝나고 보수주의도 갈 길을 헤매는 지금 더 이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또는 리버럴과 보수주의라는 구별은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을까. '예'와 '아니오' 모두 그 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의 구별은 불분명해지고 있다. 오늘날 모든 전통을 부정하고 사회를 이성에 기초한 청사진을 바탕으로 0에서부터 새로 만들기를 바라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사회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해도 과거로부터의 전통과 지혜는 계승하며 발전시키는 것이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임에 분명하다. 사람들이 '진보'라는 이름의 강한 순풍을 받아 앞으로 나아갔던 시대는 확실히 그 끝을 고했다. 이후에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사회를 되돌아봄으로써 전진을 위한 에너지와 지혜를 얻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서 얻은 추진력으로 아직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217-8)


"또 한편 리버럴과 보수라는 대립축이 완전히 무효해졌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리버럴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충성심이 필요하다." "반대로 어디까지나 보편주의의 입장을 중시하는 입장도 있을 수 있다. '동료'를 강조하는 순간, 배제되는 '그들'이 생겨난다." "동료와의 관계를 우선하는 전자의 입장이 보수, 보편적 연대를 주장하는 후자의 입장이 리버럴과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에 있어 공동체 내부의 '공통감각(common sense)'을 중요시하는가, 아니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 사이의 상호성을 중시하는가 하는 차이와도 연동해 이후 사회를 논해 가는 데 유력한 대립축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버럴과 보수의 차이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다양한 지향점의 공존이다. 즉 가장 심각한 위기는 리버럴과 보수 모두가 원리주의적이 되어 서로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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