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올빼미
흰올빼미는 눈올빼미 또는 북극올빼미라고도 불린다. 머
리를 270도가량 돌릴 수 있는데 머리가 잘 안돌아갈 때
나는 이 올빼미를 생각하곤 한다. 북극의 사나운 눈보라를
헤치며 날아다니는 백야의 유령 같은 새, 눈 오는 날 당신
도 눈이 무척 밝은 이 새를 떠올리면 마음이 설원처럼 드
넓어지고 이마가 빙산처럼 시원해질지도 모른다
히말라야의 어떤 노승이
히말라야에 오래 살다보니
내가 히말라야가 되었다고 말하는 걸
우연히 텔레비젼으로 보게 되었는데
글쎄,
그 노승은
만년설처럼 얹혀살다가
흘러내리는 물처럼 죽게 되지 않을까 (P.18 )
달의 돌
카카오톡에서 카카오톡으로 뛰어다니는
톡토기 문자를 아시는지
톡토기 문자와 톡토기 문자 사이로 해 지고 달 뜨고
우주복으로 뚱뚱해진 우주인들이 달에서 돌을 조금 떼어
내서 지구로 귀환한 뒤로 달은 늘 일그러져 있다. 아마 분
석중인 그 월석(月石)을 다시 달에 갖다놓는다해도 이미
처녀성을 잃어버린 달은 늘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P.24 )
돌
돌들이 자꾸 거실로 굴러 들어오는 것은 바람 때문이다.
거센 바람이 굴리는 돌들, 집안에 자꾸 쌓이는 돌들, 사막
에서는 그렇다. 사막의 개미들은 집안의 돌들을 치우느라
하루종일 허리가 휜다.
코가 깨져본 사람은 이해하리라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돌부리들이 있다는 것을
넘어진 자리에서 흙먼지를 털고 얼른 일어나
다시 직립의 자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누가 봐도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당당하게 걸어가야 하고
걸어가고 또 걸어가다보면
해질녘 긴 그림자처럼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것을
돌에 걸려
코밑수염이 뜯겨나간 남자가 있었지
암각화처럼 얼굴이 긁힌 남자는
이런 생각을 했어
사람들이 자꾸 돌에다 뭔가를 새기니까
돌 조각도 이젠 사람의 얼굴에다 뭔가를 새기는 것
이라고 (P.30 )
소
소들은 왜 미치는 걸까, 영국소가 미치더니 포르투갈 소가
미치고 미국소가 미치더니 한우가 미친다. 산 채로 매장 되
는 소들, 진흙구덩이로 밀어넣는 소들이 버둥거리며 운다.
그 울음을 덮으면서 불도저가 간다.
진흙소들이 바다 밑에서 풀을 뜯고
산호 그늘 아래 게으르게 누워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날이 있을 것이다
저물녘이면 외할아버지는 소를 몰고 외양간으로 돌아오시
곤 했다. 그을음 시커먼 아궁이에서 훨훨 타던 장작불, 쇠죽
가마에 끓던 여물 냄새, 긴 여물통에서 침을 흘리던 황소의
크고 순한 눈, 저녁 어스름이 오면 툇마루에 앉아 외할아버
지를 기다리시던 외할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P.39 )
펭귄소녀
하늘로 날아오른 눈사람들이
다시 헤아릴 수 없는 눈송이들로 환생해서
펄펄 이 세상에 내려오던 날
편의점 펭귄소녀는 밖을 내다보다
눈을 털며 들어서는 나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한라산 물을 먹나
백두산 물을 먹나
나중에는 남극의 빙산을 먹어야 하나
생수를 들고 나오는 내 등뒤에서
편의점 펭귄소녀는 수줍은 목소리로 또 인사를 한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P.67 )
문체연습
코뿔소 문체로 얼룩말 문체로, 바람의 문체로 공검(空劒)의
문체로 아니면 광인의 문체로 덤벙의 문체로 글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왜 지렁이 문체를 고집하는 걸까.
지렁이 문체란 느릿느릿 꾸물거리며 기어가고 때로는 흐
느적거리면서 정해진 길 없이 막막하게 어디로 가
는데 어디로 가는지 알수 없고 언제쯤 끝나는지도 알 수
없어서 독자들이 꾹 참고 따라가다 결국에는 인내심의 한
계에 달해 중도에서 책읽기를 포기해버리는 아주 지루한
문체를 말한다.
이게 왜 끊어지지 않지? 통고무줄처럼 질긴 지렁이를 입
에 물고 개구리는 곤혹스런 표정이다. 앞발로 누르고 입으
로 잡아당겨도 지렁이는 주욱 늘어나며 끊어지지 않는다.
곤혹스럽기는 지렁이도 마찬가지, 악연이란 이런 것이다.
만나면 서로를 괴롭히며 자꾸 짜증나게 한다.
지렁이 눈알이 생기는 날
우리는 차를 피해 건너가는
똘망똘망한 지렁이들을 보게 될 것이다 (P.70 )
산냄새
바위옷을 입었다 벗고 바위옷을 입었다 벗는
무쇠근육뿐인 바위들의 나이에 비하면
산신령님은 어린애
장마 뒤 햇볕이 금갈색이다. 볕 잘드는 바위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습한 몸을 말리고 있던 구렁이 한 마리, 고개를
천천히 들어 눈 마주친 심마니를 바라본다. 자네는 뭔가?
저요? 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삼에 눈이 멀어 길을 잘못
든 것 같네요. 산왕(山王)처럼 늠름한 구렁이에게 꾸벅 인
사하고 심마니는 서둘러 산을 내려온다.
누가 누굴 섬기라는 것인지
엉덩이를 들고 엎드려 절하는 두꺼비들 앞에서
허수아비가 인상을 쓰며
찌그러진 웃음을 웃고 있다 (P.81 )
말벗
묵은 햇빛 없는 양재천을 산책하면서
내 말벗은 여울 물소리
내 말벗은 지난날 허물
내 말벗은 태어나기 이전의 나
내 말벗은 쓰지 않은 시
왜가리는 내가 다가가면 왝왝 소리치며 저만치 달아난다 (P.85 )
-최승호 詩集,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에서
문학동네 임프린트 가운데 하나인 난다에서 詩에 관한 모든 것을 다양한 형식으로 담아내기 위해 시리즈 ‘난다시詩방’을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시의 만물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이것은 시다! 라는 닫힘에서 이것이 시야? 라는 열림으로 보다 개성 있고 보다 세련되며 보다 유연한 시의 자유를 꿈꾸는 한 권의 완전한 시, 그 시들만의 방”을 꾸려볼 작정으로 기획된 이번 시리즈의 포문을 열어준 이는 다름 아닌 최승호 시인. 이미 문학동네시인선의 첫 주자로 그 든든한 명맥의 선두가 되어준 그가 내어준 또 하나의 곁가지는 제목 하여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란 시집.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그 어떤 줄자로도 잴 수 없는 광대한 상상력과 바늘구멍 속으로 들여다본 듯 예민한 관찰력과 우주적 범주 안에서의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바, 정리하자면 최승호 시인의 시력 전반에 있어 그 주제적인 측면이나 형식적인 측면이 가장 유연하게 버무려져 있는 시집이 아닐까 한다.
거북이가 종종 왕따를 당하는 것은 건드릴 때마다 움츠리기 때문이다. 툭 건드리면 책상에 엎드려 엉엉 우는 거북이, 그런 거북이를 누가 두려워하겠는가. 그런 거북이는 아무나 두드리는 동네북이 된다. 때리면 머리를 파묻고 우는 동네북, 팔다리가 안 보이는 동네북, 세게 두드릴수록 큰 소리가 나는 동네북.
거북이 발에 마라톤화를 신기는 것은
거북이에 대한 실례이다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는 거북의 등껍질과 짐승의 뼈에 문자를 새긴 것으로 은허문자라고도 불린다. 유물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은대의 백성들. 은현잉크란 보통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나 가열하거나 화학약품으로 처리하면 글씨가 나타나는 잉크이다. 몰문자(沒文字)는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백색 문자를 말한다.
거북의 등껍질로 무슨 액세서리를 만드는지
등껍질을 벗기는 거북이가 발버둥친다
죽을힘을 다해 네 발을 젓고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뒤흔든다
왜 산 채로 거북이 등껍질을 벗기는 건지
칼잡이가 마침내 등껍질을 솥뚜껑처럼 들어내고
네 발을 잘라낸다
뚜껑 없는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간다
발 없는 거북이가 엉금엉금 기어간다
-「거북이」 전문
『허공을 달리는 코뿔소』는 4부로 나뉘어 총 56편의 시를 담고 있다. 시 한 편 시 한 연 시 한 행이 마치 저글링을 하는 시인이 갖고 노는 색색의 공처럼 허공중에 둥둥, 그러나 가볍지 않은 묵직함으로 제 몸을 부양하고 있는데 세상에, 세상에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내뱉어짐은 분명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을 알고 던진 그 시가 그 시의 연이 그 시의 행이 그대로 고스란히 떠 있더라, 하는 믿기 힘든 풍경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인의 빚어낸 사유의 돌덩어리가 좀처럼 하강할 줄 모르고 우리들 머리 위 파란 하늘 속에 박혀 괄약근을 꽉 조이고 있다니!
마을 - 최승호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나비처럼 소풍 가고 싶다
그렇게 시를 쓰는 아이와 평화로운 사람은 소풍을 가고
큰 공을 굴리는 운동회 날
코방아를 찧고 다시 뛰어가는 아이에게
평화로운 사람은 박수 갈채를 보낼 것이다
산사태는 왜 한밤중에
골짜기 집들을 뭉개버리는가
곰은 왜 마을을 습격하고
산불은 왜 마을 가까운 산들까지 번져오는가
한밤중에 횃불을 드는 마을의 소리
한밤중에 웅성거리는 마을의 소리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집에서
돌담을 높이 쌓는다
평화로운 사람은 한숨을 쉬고
문풍지 우는 긴 겨울밤엔 莊子(장자)를 읽으리라
-<고슴도치의 마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