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개와 진돗개의 트기로 이름은 별이다. 내게 오기 전 여러 사람 손에 키워진 탓인지 똥개처럼 아무에게나 꼬리를 흔들고 말도 죽어라 안 듣지만 외딴 곳이고 해 거의 풀어놓고 키운다. 하루는 외출에서 돌아와 보니 개가 묶여 있고 문 틈에 메모가 꽂혀 있다. 유기견이라고 신고가 들어와 묶어놓고 가니 다시는 풀어놓지 말라는 군청 직원의 메모였다. 사연인즉 지나가는 자동차만 보면 맹추격을 하는 녀석의 습성 때문이었다. 녀석은 자동차를 덩치 큰 짐승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덩치 큰 짐승이 자기가 무서워 도망치는 걸로 오해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자유의지가 어찌나 강한지 묶어놓을라치면 낌새를 채고 그 좋아하는 소시지를 흔들어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

 

어떤 땐 아무리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주인인 나를 개무시하는 것이다. 그럴 땐 패주고 싶지만 나를 닮은 것도 같고, 전생의 한 시절 녀석이 인간이고 내가 개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는해 참고 또 참다가 녀석이 풍산개와 진돗개의 트기라는 사실에 착안해 이풍진개새끼라는 별명을 붙였다.

 

녀석이 말을 안 듣거나 말썽을 피울 때면 '이풍진개새끼'라고 별명을 부르는 것이다.

(P.42~43 ) /  이풍진개새끼

 

 

 

 

11월의 바람이 생각을 여미게 하는 산막의 오후 찰리 헤이든Charllie Haden의 우드베이스를 들으며 하릴없이 낙엽의 군무를 구경한다.

죽음이 저토록 화려할 수 있다니, 낙엽이 되고 싶었다.

낙엽처럼 춤을 추면 나무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을까?

 

나무도 나도 귀만 환하다.  (P.47 ) / 군무

 

 

 

이제 산막을 떠나려 한다. 산막에서 삼 년을 살았다. 삼십 년을 더 살아도 솔잎과 생콩만 먹으며 살 수 있는 경지는 오지 않을 것 같다.

 

새벽에 오줌을 누며 별을 올려다볼 수 있었던 곳이고, 개를 풀어놓아도 괜찮았던 곳이고, 반딧불을 볼 수 있었던 곳이고, 새가 방 안까지 날아들던 곳이고,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며 시간을 태울 수 있던 곳이고, 양철지붕에 도토리 떨어지던 소리도 들을 수 있었던 곳이고, 시인에게 편지를 받았던 곳이고, 내가 오기 전에 이미 과거였던 곳이다.

 

아주 천천히 이삿짐을 정리했다. 최대한 많이 버리려 한다. 아깝지만 11월의 낙엽과 별자리도 버리기로 했다. 11월에 왔다가 11월에 떠나게 된 까닭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P,50 ) / 용하에게

 

 

 

 

라디오를 들으며 누워 숙취를 견디고 있다. 폭설이 내리고 한파 특보가 내렸다. 소리조차 얼어붙었는지 읍의 변두리는 고요하다. 쓰린 속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궁리 끝에 끓여본 콩나물 라면은 시원하다.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에게 붙여진 반문화의 계관시인이란 수사는 그럴 듯하다. 하지만 속은 여전히 쓰리다. 방 안에 누워 앨런 긴즈버그의 '너무나 많은 것들'이란 시를 읽으며 시린 속을 달래고 있다.

 

  너무나 많은 공장들 / 너무나 많은 음식 / 너무나 많은 맥주 너무나 많은 담배 / 너무나 많은  철학 /  너무나 많은 주장 /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공간 / 너무나 부족한 나무 / 너무나 많은 경찰 / 너무나 많은 컴퓨터 / 너무나 많은 가전 제품 / 너무나 많은 돼지고기 /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 아래 / 너무나 많은 커피 / 너무나 많은 담배 연기 / 너무나 많은 종교 / 너무나 많은 욕심 / 너무나 많은 양복 / 너무나 많은 서류 / 너무나 많은 잡지 / 지하철에 탄 너무나 많은 피곤한 얼굴들 /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사과나무 / 너무나 부족한 잣나무 / 너무나 많은 살인 / 너무나 많은 학교 폭력 / 너무나 많은 돈 / 너무나 많은 가난 / 너무나 많은 금속 물질

 

  너무나 많은 비만 / 너무나 많은 헛소리 / 그러나 너무나 부족한 침묵  

 

  (P.102~103  / 숙취 2012

 

 

 

카페 올훼의 땅에 앉아 주인장이 읽고 있는 시집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시집의 한 문장이 눈시울을 적셔 창밖으로 이어진 시청 골목을 내다보았습니다. 주정차금지 팻말이 붙은 전봇대 아래 허리 굽은 노파가 낙엽처럼 떨어져 있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민원서류처럼 구겨져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이 단풍잎처럼 곱지 않은 까닭을 생각하고 생각했습니다. 생의 비의는 어느 페이지에 있을까요? 다시 시집을 하염없이 뒤적이고 있습니다. 커피가 식고 또 저녁이 오고 있습니다. (P.203 ) / K 형에게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눈에 보이는 것도 못 보고 지나쳤다.

물고기처럼 눈을 뜨고 자면 세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을 볼 수 있

을까?

나와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풍경을 볼 수 있을까? 

 (P.214 /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

 

 

 

 

                                              - 정현우 글.그림, <누군가 나를 지울 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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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11-05 19:50   좋아요 0 | URL
하늘숨과 하늘빛과 하늘노래 누릴 수 있을 때에
더없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과 사진이 태어나는구나 하고
느끼곤 해요.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하늘숨과 하늘빛과 하늘노래는 어디에나 있으니
마음이 있으면 누릴 수 있겠지요.

appletreeje 2013-11-06 08:56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께서는 그렇게 사시니
더없이 아름다운 글과 그림과 사진을 찍으시지요!
저도 밝은 마음으로 잘 바라보며 아름다운 모든 것들을
즐겁게 누리고 싶습니다~^^

2013-11-05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6 08: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3-11-05 21:14   좋아요 0 | URL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나봅니다..
지나친 욕심은 좋지가 않는데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책들...*^^*

책 내용도 좋지만 표지도 무척 마음에 드는 책입니다.

행복한 저녁 되세요~*^^*

appletreeje 2013-11-06 09:02   좋아요 0 | URL
후애님의 말씀에 저도 뜨끔합니다~
책욕심! 그래도 책욕심은 쉽게 끊지 못할 듯 하네요. ㅎㅎ
예~이 책은 작가가 화가이시라 짧은 글도 좋지만 책 속의
그림들도 참 좋아요.^^
후애님께서도 보시면 참 좋아하실 듯 합니다~

후애님! 얼마 남지 않은 아름다운 가을, 즐겁게 누리시며
오늘도 행복하고 좋은 날 되세요~*^^*

후애(厚愛) 2013-11-07 13:29   좋아요 0 | URL
저도 책욕심이 많습니다~ ㅎㅎ
책 욕심은 정말 쉽게 못 끊어요~ *^^*ㅎㅎ

2013-11-06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6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나다가 2013-11-06 12:0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너무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좋은 글은 무심히 지나치는 것들을 바라보게하고
그 사랑과 그 아픔과 그 가난과 그 비애와 그 기쁨을 느끼게 합니다.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감사해요.^^

appletreeje 2013-11-06 21:30   좋아요 0 | URL
지나다가님! 기쁘게 읽어 주시고
마음이 따뜻해지셨다니...제 마음이
더 따뜻해지고 감사 드립니다~^^
평온하고 좋은 밤 되세요~*^^*

보슬비 2013-11-06 20:54   좋아요 0 | URL
토토도 저도 눈뜨고 자요.. ^^

사실 오늘 페이퍼는 나무늘보님께서 올려주신 시들을 읽고 올렸어요. ㅎㅎ

appletreeje 2013-11-06 21:35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눈감고 자요..^^ ㅋㅋ

저도 이 책 읽다가, '나와 함께 사는 개는'이란 제목에
보슬비님과 토토 생각했는데용~ㅎㅎㅎ

보슬비님! 토토랑 오늘밤도 포근하고 좋은 꿈 꾸세요~*^^*

2013-11-0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8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 상연 2013-11-10 13:5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너무나 아름다운 글들...

appletreeje 2013-11-11 08:34   좋아요 0 | URL
읽어 주셔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