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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기계랑 삽질하는 기계가 살았어요. 알고리즘
이 그래요. 하나가 삽질해야 다른 하나가 요리할 수 있고
그렇게 요리해야 다른 하나가 메뉴대로 삽질할 수 있거든
요. 요리하는 기계와 삽질하는 기계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모두 여섯 시간. 요리도 삽질도 없는 무료한 시간에 그들은
톱니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죠. 서로의 톱니가 종종 어긋
날 때도 있는데 그러면 낯설어 얼굴을 가리기도 하지만, 날
이 밝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요리하는 기계는 자신의 메뉴
대로 한 솥 아침을 볶아 낼 테고, 삽질하는 기계는 할부로
판 실입주 공간을 총총 빠져나갈 테죠. 졸음이 질펀한 오
후, 삽질 기계는 정비 공장에 간 요리 기계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어요. 권위 있는 정비사의 말이 요리 기계의 배
에 새로운 톱니가 자라고 있다는군요. 자신이 판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삽질 기계는 서점에 들렸어요. 새로 자라날
톱니에게 되먹일, 작은 그림 메뉴얼들이 필요했거든요. 요
리하는 기계랑 삽질하는 기계가 살았어요. 알고리즘을 누
가 짰는지 나는 잘 몰라요. (P.15 )
1인 3역
나는 다리만 긴 난쟁이
그렇다고 말을 훔치랴
저녁까지 사과를 팔고
팔다 남은 사과는 독에 절이지
피멍 든 사과를 집어 든
나의 영혼은 백설
마녀는 말하지,
자, 독사과나 한 입 물고 잠이나 자
백설의 영혼으로는 거절할 수가 없지
아침이면 황금색 변을 보면서
과수원 시세를 확인해야 할까 봐
눈을 뜨면 긴 다리를 끌고
무대 구석구석 사과 영업을 다니지
마녀의 침대로 기어들기 전까지
종종 시계바늘에 걸려 목이 잠기면
거울에 걸린 벽을 바라보며 묻곤 해
벽아, 벽아
이 집안의 문고리를 어디에 감췄니?
마녀에게 보고하기 전에
백설과 입을 맞춰야 하는 데
말 없는 왕자는, 늘
무대에서 거절당하지 (P.36 )
花鬪 이야기
아버지는 꽃을 따셨어요
꽃밭은 자꾸 부피가 줄고
엄마는 뒤를 돌아봤지만
세월은 비풍초 똥팔삼
엄마의 지문을 뗀 수제비를 먹으며
아버지는 꽃을 따셨어요
여름 가고, 가을, 겨울 엄마의
패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느 날 엄마가 아무도
기억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무덤덤
피박 쓴 걸 알았지만
파투 난 꽃잎들은 비풍초
똥팔삼
더 이상 떼일 것도 없어
비 내리는 저녁
개나리 담벼락 밑에 아버지
우산을 쓴 채 엉엉
아주 혼자 엉엉
우셨더랬는데 말이에요 (P.66 )
과일촌 오형제
큰형은 배야, 얼굴은 돌배라도 마음은 삼베라서 인기가
좋지. 나는 복숭아. 나이 먹어도 이 솜털들은 어쩔 수 없나
봐. 포도하고 사과 형은 새벽종 울릴 때 나가서 아직 안 돌
아왔어. 큰형은 요즘 찾는 사람이 없어 뼛속까지 하얀 백
수가 됐지만. 어차피 갈아 먹을 거, 얼굴 보고 먹나. 포도
형은 나일론 환자들이 몰려 있다는 사거리 정형외과로 영
업을 다녀. 무가당과 올리고당의 선거 사무실에 불려 갈
때도 있고.
하지만 후르츠 타운 개발이 시작되면서, 이 동네 간병
일과 심부름이 다 끊겼지. 과일촌에서 나고 자라 몸을 갈
아 왔는데, 이젠 전부 갈아엎고 떠나야 할까 봐. 자전거에
동생을 싣고 후르츠 타운 망고 빌리지를 지나가는데. 한 귀
부인이 내 동생 감귤을 빠꼼히 바라보며 말했어. 어린지? (P.88 )
사람, 그 사람
지금을 접어 잠시 꺼내 본다. 지금 엿보는
그 사람은 지금은 없는 사람. 창가에 턱을 괴고
망을 보던 시간이 한 뼘의 그늘로 떨어진다.
관성의 힘으로 나는 장이나 보러 가고
별을 보던 그 사람, 지금은 우주로 흘러들었다. 두고
꺼내 맛보는 사람은 지금은 없는 사람
녹녹은 뒤집어 말려도 눅눅하고
망을 보다 맘을 다친 밤이 마을로 스며든다.
지금 엿보는 그 사람은 당신에게
밉보인 사람, 이 세상에 다신 없을
울보인 사람. 눅눅은
뒤집어 말려도 녹록치 않고
지금,을 닫아 두며 다시 꺼내 엿보는 사람은
지금은 가 버린 사람, 창가에
눈가에 금 간 턱을 그대로
받쳐 놓은 채 (P.95 )
-송기영 詩集, <.zip>-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