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이
왁자지껄한 잡담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P.80 )
도서관에서 만난 여자
나기철
집에 가려고
참고열람실에서
일어나
개가열람실을 지나가는데
안에 서 있는
한 여자!
다시 보려고
다가가니
자동문이 닫혔다
두드렸으나
열리지 않았다 (P.90 )
업어준다는 것
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P.106 )
볼록볼록
신현정
과연 이 시각 안내견을 앞장세워
맹인 하나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각 이 길을
발 디딜 때마다 해가 볼록볼록
달이 볼록볼록
그리고 꽃송아리들이 볼록볼록 올라오는
보도블록으로
교체해주셨으면 하고 존경하는 시장님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빵도 한 번쯤은 밟고 지나가게 해주셨으면
하고 시장님. (P.118 )
詩集
윤석위
詩集을 사는 일은
즐겁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 책을 사다가
모르는 이의
불꽃같은 詩가 있는
詩集을 덤으로 사는 일은 즐겁다 (P.96 )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에서
어제 저녁, 끄급한 마음으로 바삐 걸어 가다가
보도블럭을 오르던 찰나, 발을 삐끗해 속수무책으로 나자빠지고
얼굴이 옥떨메가 되어 막막한 심정으로 병원을 찾아들고
오늘도 또 병원을 다녀와 드레싱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
착찹한 심정으로, 불꽃같은 詩들이 있는 詩集에서
'볼록볼록'을 읽다가, 비로소 알았다.
내가 그간 얼마나 나만 생각하고 살았던 인간인지를.
오늘밤은 나도, 검은 염소를 업어주고 싶은 그런 밤이다,
김사인의 한 마디
대체로 나는, 시 쓰기는 제 할 말을 위해 말을 잘 ‘사용하는’ 또는 ‘부리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해왔다. 시공부는 말과 마음을 잘 ‘섬기는’ 데에 있고, 이 삶과 세계를 잘 받들어 치르는 데 있다고 말해왔다. 그러므로 종교와 과학과 시의 뿌리가 다르지 않으며, 시의 기술은 곧 사랑의 기술이요 삶의 기술이라고 말해왔다.
생각건대 쓰기뿐 아니라 읽기 역시 다르지 않아, 사랑이 투입되지 않으면 시는 읽힐 수 없다. 마치 전기를 투입하지 않으면 음반을 들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러므로 단언하자면 시 쓰기와 똑같은 무게로 시 읽기 역시 진검승부인 것이며, 시를 읽으려는 이라면 앞에 놓인 시의 겉이 ‘진부한 서정시’ 이건 ‘생경한 전위시’ 이건 다만 사랑의 절실성과 삶의 생생함이란 더 깊은 준거 위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고자 애쓰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