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오늘은 산책하며 길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 생각합니다
움막 뒤편으로 흔적만 남은 오솔길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가면 혼자 죽고 스스로 넘어진 나무가
껍질 벗겨지고 슬어 소멸해가는 모습을 봅니다
돌담만 구들장만 남은 옛 집터들도
드문드문 흩어져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돌 위에 앉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숲에 갇힌 아이들 웃음소리
흙집 굴뚝으로 솟는 연기
마당 화덕에서 산나물을 데치는 여인의 주걱질,
창호지 틈으로 스미는 물소리 바람소리
이 길은 그들의 남루한 생을 연결한 실핏줄이지요
나는 무엇을 바라 오늘 이 길을 걷고 있는가
바람이 없는 삶을 꿈꾸며 산으로 들어왔으나
어떤 바람을 안고 길을 걷는 사내를 봅니다
나는 나에게 합당한 것을 꿈꾸는가
만져지고 느껴지는 대상을 바라는가
잠복한 몽환을 끌어내줄 매개를 바라는가
당신은 내 몽환의 사랑을 완전하게 해 줄 현재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마음은 당신 것입니다
당신은 내 정신을 퍼 올릴 두레박
구속하지 않아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육신이 저 길을 막는 나무처럼 소멸해갈 때가지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퍼 올릴 것입니다
당신이 그 주인이길 원합니다
내 입술 닿지 않아도
사랑에 상처주지 않고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 산책입니다 (P.20 )
풍경소리
추녀 끝에 풍경이 걸려 있다
가을의 방문객이 걸어준 것이다
그녀는 내가 만나본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툇마루에 웅크리고 앉아
먼 능선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울지 않는 풍경 같았다
그의 삶도 어딘가에 매달려 있으리라
쓸쓸히 매달려 있으리라
긴 말은 해보지 못했다
가끔 내 마음에 풍경소리 들린다 (P.34 )
가시 감옥
내 움막 마당에는 혼자 사는 닭이 있습니다
언 땅을 파헤치며 온종일 돌아다녀도 주먹만한
자신의 모이통을 채우지 못합니다
개 밥그릇을 기웃거리다 구박을 당합니다
그는 매일 쌓아놓은 장작더미에서 잡니다
겨우내 장작을 빼다 때서 이제 그의 집은 거의
평지가 되었습니다 하루씩 집이 낮아지고
그만큼씩 닭은 지상이 두려워집니다
그래도 그는 별을 보고 잠들고 바람소리를 듣고
꿈을 꿉니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언 마당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햇살이 퍼지는 오후에 그는 잠시 몸을 쉽니다
그가 쉬는 곳은 온몸에 가시가 다닥다닥 붙은
해당화 꽃밭 속입니다 잎도 꽃도 없는 앙상한
줄기들의 가시감옥 속에서 그는 비로소 몸을 쉽니다 (P.69 )
밥
찬바람 분다.
다람쥐가 밤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식사를 한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두 손으로 받쳐 든 알밤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껍질
을 벗긴다. 어찌나 정성스레 벗기는지 이빨 자국 하나 없이 노란
속살이 나온다.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오독오독 깨물어 먹
는다. 작은 소리 하나에 입을 딱 멈추고 숨죽이는 다람쥐 눈빛,
지상의 차가운 한 끼 식탁 위로 가랑잎 흩날린다 (P.85 )
흰산
자작자작 눈 내리고
생장작 탁탁 털어 아궁이에 넣는다
맹물 가마솥 자박자박 어스름 스민다
물기를 쥐어짜며 일렁이는
불의 거울에 얼굴 비춘다
나를 태운 이들은 눈물 흘렸다
자작자작 눈 내리고 아궁이 재가 식는다
검은 나무들 흰 옷 입는다 (P.90 )
혼자 중얼거리다
잠든 동안 눈이
이불을 덮어주었다
삶을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겨울 나무들은 제 몸을 꽃으로 만들었다
내가 생각지 않는 동안에도
염려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눈길이 있다는 것
외로움이란 그런 것들을 가끔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움이란 어느 날 문득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것이다 (P.97 )
- 정용주 詩集,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에서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의 정용주詩人의
새 詩集이 나왔다.
'내 입술 닿지 않아도/ 사랑에 상처주지 않고 사랑할 것 입니다/
이것이 오늘 내 산책입니다'라는 시인의 산책을 따라 나도 말없이
풍경소리,같은 나의 사람을 생각한다.
이제 곧 겨울이 오고, 그 겨울엔 자작나무를 생각하고 눈이 만든
흰꽃이불을 밟으며, '내가 생각지 않는 동안에도/ 염려하고/ 격려
하고/ 위로해주는 눈길이 있다는'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나도
그대를 염려하고 격려하고 위로해주는 그런 겨울을 살아야겠다,
누군가의 삶은, 때론 다른 이를 만지지 않아도 느끼지 않아도
아름다운 영혼으로 쓸쓸하지만, 지극한 위로로 다가오는 그런 저녁이다. 별을 보고 잠들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꿈을 꾼다. 가을 깊어가고 나는 어떻게 그대들을 사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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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기획 시인선 그 세 번째,
정용주 시집 『그렇게 될 것은 결국 그렇게 된다』‘나는 숲 속의 게으름뱅이’라고 스스로를 낮추며 산의 친구가 된 시인. 그의 고백은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연민이었다. 치악산 산정에서 들려주는 정용주 시인의 처절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불멸의 사랑
이제 눈으로 그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차라리 그것이 나은 것이다
아픈 날들이었다
눈으로 사랑을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병들게 한다
나는 이제 어느 시인의 시구도 인용하지 않으며
어떤 폐인의 절망도 동조하지 않고
사랑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천사가 되는 자와
광인이 되는 자와
노예가 되는 자의 이름은
다만 하나일 뿐이고
그것의 이름이 나였다
심장을 재로 바꾼 그의 영혼에
내 육신을 순교한다
이제 눈으로 다시는 사랑을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