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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다보면 스무 살에 처음 만나(?) 푹 빠진 김산이 떠오른다. 88올림픽 유치를 위해 해금된 도서였을『아리랑』주인공 김산. 김산이 구술하고 님웨일즈가 받아 적은『아리랑』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대학을 다닌 학생들에겐 필독서였을 것이다. 내 또래 학번들은 김산을 잘 몰랐지만 80년대 후반 학번인 언니가 오래 전 책장에 꽂아둔『아리랑』을 뒤늦게 펼쳐보고 김산을 알게 됐다. 김산이 좋아 학부 졸업논문도 김산을 주제로 썼다. 차마 논문이라 부르기 어려운 조잡한 짜깁기 글이었지만. 이 책은 삶의 터전을 되찾으려 목숨 바쳐 싸우는 팔레스타인 김산이 부르는 아리랑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본 표지사진이 칙칙해 보여 몇 번이나 사기를 주저하다가 도서정가제 시행 며칠 전에야 겨우 샀다. 안 샀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을 만큼 좋다. 만화를 좋아해 만화방에 가면 안 읽은 만화가 거의 없을 정도인데 이 책은 우리나라나 일본 만화와 작풍이 많이 다르다. 꽤 낯선 그림인데 정이 간다. 구석구석 빼곡하게 표현된 사실묘사가 압권이다. 어쩌면 아랍 사람들 특징을 이렇게도 잘 잡아냈는지 신기하다. 만화로는 나이 든 사람 얼굴 표현이 어려워 어색하기 마련인데 이 만화는 딱 노인처럼 그려냈다. 예쁘고 보기 좋은 보여주기식 그림이 아니고 사실성이 강하게 느껴져 마음에 든다. 어쩌면 학습만화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무거운 주제를 거부감 없이 녹여냈다.
작가가 아랍, 아프리카, 유럽을 둘러싼 지중해 섬 몰타에서 태어났기에 이런 작품을 그리고 쓸 수 있었겠다. 팔레스타인, 내게는 너무나 먼 이야기라 치부해왔다. 어쩌다 듣는 가자지구, PLO, 끝없는 분쟁, 난민...알아야 하지만 복잡하고 골치아프다 여겨 일부러 관심두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남 얘기가 아니잖아.
가진 자들이 대놓고 드러내는 잔인함은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초월한다. 팔레스타인 상황은 종교를 가장한 폭력, 야만스러운 패권 문제이다. 인간 필요에 따라 생겨난 종교 따위(?)가 절대권력으로 사람을 재단하고 억압한다. 20세기에 끝났다고 믿었던 이데올로기, 종교 싸움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어 조상대부터 오래 뿌리내리고 살았던 사람들을 몰아낸다. 제국주의 땅따먹기식 패권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네들 등쌀에 등 터지는 새우들이 부르는 한스러운 아리랑. 삶터 주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주와 객은 언제 제자리를 찾을까. 치떨리는 식민 시기를 거쳐 온 우리역사와 꼭 닮아 분노가 치민다. 제발 이스라엘군을 지원하는 스타벅스 좀 가지 말라고 해도 갈 사람은 다 간다. 내 일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겠지. 지금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피흘릴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