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힘을 다해 길을 나선 이가 이해가 되면서도 당한(?) 사람은 너무나 억울할 일이다. 하지만 숱한 세상 일에 가치판단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분명하게 옳고 그름을 가릴 수가 있을까. 누구도 막을 수 없던 일에 분노한다고 해서 일그러진 현실이 다림질한듯 펴질 리가 없잖아. 뭔가 질기고 단단히 얽힌 연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리라 짐작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삶과 죽음과 운명을 늘 생각하는 듯 보인다. 요가처럼 읽힌다. 옳고 그름 너머에 있는 평정과 고요. 그것이 바로 명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생과 우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죽기 전 마지막 일상을 누린 그를 누가 비난할 수 있는가. 그가 마지막으로 욕심내 누린 하루를 비난해야 하는가. 그에게는 곧 떠나버릴 세상일 뿐이며 죽음 후에 남겨질 세상에 관해 망자는 관심이 없다. 그 세상이 자신 때문에 몇 명이고 죽어버릴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에게는 그럴 의도도 없었다. 욕심이 있었을 뿐이다. 자신이 투쟁해서 얻어온 생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싶은, 지극히 평범하고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일상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심. 어차피 그것을 비난한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비난은 나를 향해 있는가. 아니 그건 우연에 가깝다.
나의 결정이 혹여 또다른 죽음까지 초래한 헛된 격려였다 해도 그것은 도의적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우연이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그렇듯 나는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굴레와 속박속에서 지내야 하므로 이 일에 관하여 두고두고 생각해야 한다.
억울한 한 죽음이 있었고,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도저히 어떠한 책망이 불가능한, 피칠갑한 모습의 잔혹한 죽음이었다. 우리는이 생명들이 얼기설기 위태롭게 얽힌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서도, 실은 어떤 죽음에 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죽음에 관해 쉽게 왈가왈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것이 타인의 문제이건 혹은 자신의 문제이건 간에 아무도 그런 일을 가볍게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 고뇌와 고통과 그를 넘어선 우연이 혼재하는 극적이고 거대한 세계, 그 일부만을 핥으며 공감을 표하거나 어면 죽음은 응당 왔어야 했다고 지껄이는 짓거리는 전부 미친 짓이다.
스물네 개의 갈비뼈와 폐부가 전부 으스러진 죽음에 관해서, 그리고 전신이 악성 종괴로 되어드는 죽음에 관해서 우리는 그 처참한 시체만을 눈앞에서 볼 뿐 아무것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 죽음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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