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나무 아우또노미아총서 12
움베르토 마투라나.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최호영 옮김 / 갈무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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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상과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알게 모르게 어떤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이데아론이니 물자체니, 표상이니 하는 실재(實在)에 대한 인식들인 역사적 산물에 의존한다. 사실 이러한 인식론들의 철학적 배경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들이 세상의 지배적 시선이 되어 일상에 녹아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인식 행위에 대해 새삼스레 성찰의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를 습관화시킨 이들 인식의 방식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수많은 세포(생명체)로 구성된 유기체인 존재를 라는 독립된 개체로 지각하게 되는 것은 어째서일까? 라든가, 우리라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존재인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물음들이다. 나아가 나라는 존재의 바깥인 환경을 나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이러한 것들은 어떤 작동방식을 지니는 것일까? 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외부 대상이나 사물의 표상(表象)을 인체 내 신경계가 작업한 결과물이라는 우리의 직관적 이해를 전복시키고 있다. 인식(認識)이란 어떤 표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물체로서의 존재가 자신의 생존을 지속케 하는 행위를 관찰자적 해석으로 바라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설명하는 용어의 핵심이 구조접속이라고 이해하게 되는데, 이는 생명체가 자기를 구성하는 조직을 유지한 채 환경과 적응 관계를 지속하며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의미한다.

 

즉 세계에 대해 어떤 인식과 반응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마치 인간만의 독특한 체계에 의한 것이라 바라보는 시선이란 인간중심적 해석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구성된 존재인가? 라는 물음을 하게 되면, 하나의 세포가 분열 증식하여 메타세포화 된 세포들의 통합구성체라고 답변할 수 있다. 이 답변은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미시적으로는 세포차원의 생존이며, 거시적으로는 몸체라는 거대한 메타세포체의 생존이라는 자기생성과 적응의 보존을 위해 매순간 역동적인 변화의 흐름을 지속하는 존재라고 정의하는 것과 같다.

 

이 설명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행위라는 것은 외부 관찰자가 바라보는 외부적익 해석적인 이해가 아니라 곧바로 그 실체인 세포 개체 본연의 활동에 주목하게 한다. 일례로 원핵세포인 아메바를 관찰하게 되면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위족을 뻗어 이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 관찰자는 아메바가 이동했다고, 아메바가 운동한다고 말한다. 신경세포도 없는 아메바는 외부의 표상 따위가 없다. 이 단세포 생물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의해 자기 역동성으로 인한 구조변화, 즉 내부 원형질이 화학적 반응에 의해 이쪽저쪽으로 흘러 떠밀렸을 뿐이다. 이를 섭동(攝動)작용(perturbation)’이라 부른다.

 

이 책을 읽고나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 개체들이 왜 그렇게 다양한 행위를 하게 되는지, 또한 왜 이러한 세계가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이 세계의 필연성이 바로 생명체들 저마다의 자기생성과 적응 본능의 산출물임을 수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조차도 모든 개체마다 달리 구성된 유전자에 각인되고. 또한 저마다의 개체발생이라는 구조변천을 겪으며 지니게 된 고유의 자기 생존체계의 차이로 인해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은 분명할 것이다. 따라서 이 전복적인 인지론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할 것이다.

 

이 저술의 목적은 바로 개체의 이 다름을 규명하는 것이며, 한편 이 다름을 포용하는 동일성을 유지케 하는 조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조직을 이루는 구조적 요소들과 그 변화의 역동성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산출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생명체의 역사인 원시지구로부터 오늘의 세계에 이르는 수십억 년, 그리고 영장류에서 현생 인류가 출현하는 수백만 년 자연 표류(漂流)’의 여정을 통해 문화의 탄생, 언어의 발생이 어떤 현상의 귀결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의 한 양식인 섭동작용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현상인 구조 접속이다. 그리고 원시 단세포 생명체가 다세포화 되어 인간의 몸체와 같은 메타세포체로 형성되는 것이며, 이들 거대해진 세포들의 정보 연결망인 신경세포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규명이다. 이로서 생명체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으며. 이 작용의 성질이 곧 인간의 문화적 현상들과 언어의 발생으로 표현되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가진 특별성 바로 인간의 언어와 문화현상 등의 행위란 세포와 메타세포체의 자기생성조직의 역동성과 적응의 산출물일 뿐, 도의 인식행위라거나 이성의 발현이라며 유기물인 생물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발현이 아니라는 설명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 거부감이 심하게 솟구쳐 오를 수도 있겠지만, 인식 현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경험 속으로 파고 들 수 있도록 잠시 확실성의 유혹, 즉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도 지혜일 것이다.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실성을 허물지 못하면 그 어떤 새로운 앎도 경험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인지적 경험은 자신의 생물학적 구조를 바탕으로 매우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인식자를 전제하기에 그 오랜 개체발생의 학습을 버리는 것이 몹시 힘든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인간 모두는 맹점(盲點)이 있다. 관념적 언어의 의미로서가 아니라 실제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망막부위의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부위가 빛에 무감각함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인간이라는 메타세포체는 그리 완벽한 구조체가 아니다. 단지 환경의 구조변천과 자기생성조직과 적응 보존 활동이 상보적(相補的)이었기에 적응 상실을 겪지 않고 지금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관찰능력은 무한히 제한적이다. 타고난 무능력 지대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과학적 도구들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과학적 설명 체계를 내놓을 수 없는 것들에 우연이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무능력과 무지를 실토하기도 한다.

 

여기 매우 중요한 관점의 문제가 있다. 앞서 언급한 아메바의 생존 작업 방식인 위족 행위를 보고 이동이라는 표현을 하듯, 생물체의 상태변화란 결코 외부 관찰자의 해석처럼 세계에 대한 표상물을 가지고 작업한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생물체 자체의 역동성은 세계의 변화(장애물, 훼손 etc.)를 포함하지 않는다. 단지 주변 환경의 어떤 상태가 유발한 요인에 그저 자기 생존을 위해서 내부의 반응일 뿐이다.

 

인간 또한 단세포의 분열 증식으로 비교적 오랜 시간 개체발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메타세포체인 몸체가 되었다.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도 번식은 오로지 단일 세포로 시작된다. 이 말이 뜻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생물체든 자기생성조직과 적응보존이라는 세포 내부의 역동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작업 폐쇄적 조직이라는 점이다. 결국 인간이건 여타 동물들이 되었건, 그 밖의 어떤 생물체가 되었건 그들의 형태변화나 행동이란 유기체 안의 관계들이 춤추듯 변화하는 것을 밖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

 

사람은 사회적 삶 속에서 언어적영역을 산출하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지만 사람만이 언어적 행동조정을 통해 새로운 현상계인 언어의 나라를 산출했다.” -237

 

이제 우리들이 의미론적으로 말하는 인식활동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유기체의 인식활동이란 유기체가 살아가는 구조접속의 영역 안에서 감각 작용적 상호관계로서 일어나는 활동이라고. 신경계가 환경의 어떤 것을 내면화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말이 된다. 신경계는 어떤 외부 세계의 표상도 갖지 않으며 가질 수도 없다. 단지 유기체의 작업방식과 환경의 작업방식이 어울려 이루어지는 구조접속의 표현일 뿐이다. 생물로서 구조접속(적응)을 끊임없이 유지하는 일이 그 생물의 존재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활동인 것이다. (살아있는 것)이 곧 앎(인식)이라는 말이다.

 

묻게 된다. 의미론적 인식으로 보는 것이 인간중심적인 표현이라면 인간의 무수한 관념적이거나 물질적 표상을 뜻하는 소통의 언어들은 대체 무엇이고, 기억, 생각, 이성, 정신이란 또한 무엇이냐고. 인간은 여타 생물체와는 다른 존재임을 나타내는 표지 아니냐고. 구조접속의 이미를 되새기면 메타세포체와 같은 다세포 생물체의 각 개체들의 구조접속을 2차 구조접속이라하며, 사회적 행동 접속을 하는 것을 3차 구조접속이라 부른다. 이들 구조접속의 본질은 똑같은 기제가 작용한다는 점에서 그 현상적 차이 외에는 구분이 없는 유기체 각자의 적응과 조직 보존을 위한 상호 개체들 간의 섭동이라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유기체는 3차 구조접속에 의해 상호 재귀적 성격을 띠고 공동개체 발생을 겪게 된다. 사회적 유기체간의 섭동을 통해 함께 표류하는 개체들로서 새로운 현상계를 산출한다. 이때 모든 개체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생리적 역동성의 틀 안에서 밀접하게 접속되어 꾸준한 화학적, 시각적, 청각적, 그 밖의 온갖 요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들의 행동을 조정한다. 이 행동 조정을 통해 개체 자신들은 자기 자신을 공동의 상호작용 그물 속에 끼워 넣으며 개체발생을 실현하고 자기 생존을 보존한다. 이때 구조 접속의 영속성을 위해 개체가 하는 행동조정이 바로 의사소통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할 것이 있다. 유기체는 자기 구조적 역동성에 따르는 것을 결코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이란 바로 세포 개체 또는 유기체가 자기 구조적 역동성을 멈추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기체는 자기 구조에 따라 결정되는 데로 자기가 행동하거나 말하는 것을 행동 또는 말하는 것이고, 듣는 것을 들을 뿐이다. 즉 유기체가 무엇을 수용하는 가에 따라 일어나는 행동이나 말이 곧 의사소통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단세포의 본래 구조가 지닌 행동 양식에 의한 것개체 발생이라는 유기체 개별의 사회적 상황의 특수한 접속의 역사가 좌우한다. 이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이루는 이유이다.

 

인간의 언어는 이러한 의사소통적 행위, 즉 언어적 행위로부터 발생한 행위들의 상호 조정이 일어남으로서 실현되었다. 언어가 생길 가능성은 이같은 3차 접속을 하는 사회적 유기체들의 자연 표류 속에 늘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이를 초기 인류의 사회적 동물로서의 생활양식에서 찾고 있는데, 친밀한 정서적 대인관계의 역사다. 3차 구조접속을 통해 인류는 계절과 상관없는 여성 신체의 구조적 변화를 산출하고, 이는 결속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이 생활양식이 재귀적으로 조정됨으로써, 즉 언어적 상호작용이 보존되는 가운데 애정에 찬 협업의 결과로 언어가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프리카 숲 속에 사는 앵무새는 시각적 접촉이 어려워 짝끼리 어울려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공동의 노래를 이용한다. 모든 쌍들은 그들만의 또 다른 가락을 만들어낸다

하나가 한 마디를 부르면 또 하나가 이어 부르는 이중창이다. 둘 만의 구별이 발생하고

이러한 의사소통을 언어적 행동조정이라 이른다.



다시 말해 언어적 행동이 언어적 행동조정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언어가 생겼다는 것이다. 매번 결속을 확인하는 한 쌍의 남녀는 그들만의 친밀함을 여타의 것과 구분하기 위해 차별화된 소리로 개성화하였을 것이며, 언어적 행위의 영역 안에서 구분을 통한 자기라는 존재적 조건이 생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구분의 능력, 즉 언어는 언어적 재귀현상이 없다면 결코 발현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이것이 곧 자기의식이요,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만일 언어가 없다면 자기(selbst)’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우리 사람은 언어 안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를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재귀적 상호작용의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자들이다. 이는 또다시 중대한 이해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언어 안에 존재함으로써 의식과 역동성이 비로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달리 말한다면 어떤 바깥세계를 내면화하기위해 어느 특정한 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언어를 구성하는 행동조정을 통해 오히려 세계를 산출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 세계에 가득 들어 찬 의식과 정신들, 수많은 규칙성들은 모두 우리가 겪어 온 생물학적, 사회적 역사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이 결과물을 통해 이 세계란 우리가 타자들과 함께 산출한 하나의 세계임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유기체는 자기 고유의 구조적 역동성에 의해 자기생성과 적응을 유지하려는 존재이기에 그 무수한 구조적 변이체인 인간 개체들은 모두 다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또 한편 이 세계는 함께 만들어낸 것이며, 이 공동의 산출물과 상호작용, 즉 구조접속을 회피하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존하려면 서로 확실성을 고집하고 타자를 부정하면서 살아 갈 수 없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렇기에 세계를 산출하는 공동의 일원이라는 윤리적 책임을 가진다. 이것이 바로 타자 존재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이며 윤리의 바탕이 된다.

 

자기 것을 확신하는 한 다툼이 생긴 영역에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극복하려면 공존할 수 있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가야 한다.” -276

 

진부하지만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잘려진 장면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돌아다니며 세계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락한 뒤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알았다. 즉 비로소 자신들이 안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들의 앎을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 생물학적 일치 때문에 타인을 볼 수 있고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둘 줄 안다. 이 신경생물학적 인지철학은 남을 받아들임 없이 세계는 존재 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은 바로 이 사람다움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 조건의 존재론적 근본 특징을 규명하는 위대한 고전이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앎의 나무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의 모든 어려움은 바로 앎을 잘못 아는 것, 즉 앎을 모르는 데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앎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의 윤리적 책무일 것이다. 그저 안다고 하는 것이 이 세계를 얼마나 어지럽히는지 우리는 매양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이 인지 혁명적 신경철학의 세계를 거닐어 보는 것도 화려한 이 계절의 길을 산책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선사해 줄 것이다.

 

 

용어 참조

 

*구조접속: 조직을 유지한 채 적응관계를 존속시키며 구조변화를 이루는 상태, 이 상태에서 유기체와 환경 모두가 자신들만의 독립적 변화를 겪는다.

*자연표류: 목적, 계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때그때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흐를 뿐이다. (저자들은 학계를 지배해 온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렇다고 진화 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생물이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최적화하여 적응해가는 과정이라는 통속적 진화, 진보를 부인하는 것이다. 진화란 생물의 특정 성질을 최적화하는 과정이 아니며, 단지 자기생성과 적응이 보존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어떤 외부의 힘도 필요 없는 자연적인 표류의 산물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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