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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ㅣ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한용운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3월
평점 :
한국시집 초간본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표 시집들이 출간되었습니다. 사실 시대의 간극은 물론 20세기 초, 한국의 현실이란 식민지민으로서의 고달픈 삶에서 비롯된 제한된 문명 접촉이라는 한계로 그 시적 언어의 빈곤함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당대의 시작(詩作)들에 대한 제 관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 몇 권의 시집을 선택하게 했고, 저는 네 권의 시집을 다시 손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네 권의 시집 중에서도 만해(萬海)의 『님의 침묵』은 당대 여타의 시작들과 확연히 다른, 즉 당대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언어와 상상력으로 오늘에도 전혀 빛이 바래지 않고 날카로운 미적 감동과 높은 사유의 감각을 깨우는 시집이라는 신뢰에서 유일하게 호의적으로 선택한 시집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편애가 이미 한용운의 시가 말하는 분별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남과 같은 것들과 괴리가 있는 행위이겠지만, 한편으론 그 벗어남이라는 언어 자체의 속박을 거부하는 저다움의 주장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집을 여는 첫 면에 시인의 「군말」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쓴 ‘님’에 대한 의미를 독자에게 먼저 알려주려는 의도로 저는 이해합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시작하여 “너에게도 님이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라고, 님이란 어떤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고, 그리고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말합니다. 나라를 잃고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는 백성들이 가엾어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세계 만물에 대한 연민을 통한 깨달음, 대자유의 진리를 가르쳐주고자 함이었던 듯싶습니다.
수록된 88편의 시(詩) 어느 하나의 시편도 생의 감각을 일깨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제 어린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님의 침묵」을 획일적으로 해석하도록 강요되었던 그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읽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편협하게 이끌었는지를 매번 분노로 곱씹습니다. 조국애니 민족애니 하며 오로지 국가의 충성만을 말하던 그 천박한 입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만해가 말하는 ‘님’은 연인이요, 민족 해방 구원의 힘이며, 인간 삶의 진리와 구도(求道)의 본원인 미륵이고, 인간 자체의 본질이 탁월하게 결합된 응결체입니다. 그것의 매체는 사랑이며 연민이자 그리움인 ‘기룸(기루다)’일 것입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로 시작되는 「님의 침묵」은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로 맺습니다. 연인이자 조국이며 삶의 본질인 깨달음은 떠나버렸지만 결코 시인은 떠나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님의 부재를 침묵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실재하는 것으로 뒤바꿔버린 것이죠. 그리곤 이별이 만들어낸 슬픔이 곧 새로운 삶의 원천일 것임을 말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시 「이별은 미의 창조」, “님이여 이별이 아니면 ...(中略)...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미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라는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사랑의 깨달음,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마 만해는 우리들에게 이 깨달음을 직접 체험하도록 견인하려 한 것 같습니다. 선(禪)불교에서는 이 깨달음을 ‘묘오(妙悟)’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이 있답니다. 완전히 죽은 뒤에 비로소 새롭게 소생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죽음이나 이별이라는 것은 상식화된 이름이나 관념의 초월로서 분별, 집착,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3/0418/pimg_7290341033827042.jpg)
특히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요, 「꿈 깨고서」와 「예술가」라는 두 편입니다. 전자에는 밤마다 문밖에 와서 발자취 소리만 남기고 그저 가버리는 사랑에 대한 야속함을 말합니다. 그 발자취 소리 탓에 “님을 찾아가려고 구름을 타는” 꿈을 꾸다 깨어났거든요. 해방의 광영이 들어오지 않고 도로 가버리는 안타까움, 님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 아련한 아쉬움 탓에 자꾸만 읽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연인의 눈 코 입, 그리고 두 볼에 파인 샘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예술가가 됩니다. 연인의 모습을 백 번이나 그렸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그 서투름이 묻혀버린 저 오랜 기억의 장소를 거닐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연인이 이젠 곁에 없습니다. 시의 화자는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장”합니다. 연인이 가는 바람이 되어 화답합니다. 고마움에 절로 두 손을 모아 사랑을 표현합니다. 이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어떤 생각도 일지 않는 어묵(語默)의 세계에 잠겨있는 순간이 너무도 좋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없는 참다운 존재가 된 것 같은 그런 상태, 이것이 부처인 것일까요?
구원의 간절한 염원이 절절히 느껴지는 「오셔요」라는 시를 읽으며 당대를 살던 우리들의 선조들의 마음이 안타깝게 다가왔는데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라고 시작하고 같은 시구로 끝납니다. 당신의 위험을 위해서는 황금 칼도 되고 강철의 방패도 되며, 자신의 가슴이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누구도 당신에게 손댈 수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당신을 위해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요. 그러니 어서 오시라고. 이처럼 만해의 시편들을 읽다보면 마치 문 없는 문을 열어젖히는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간 것 같은 평안 속에 침잠하게 됩니다.
시인은 시집의 마지막에 「독자에게」라는 글에서 “나의 시를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히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겸허하고 문학의 시대성을 예감한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늦은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는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다” 라면서 말이죠. 시인의 이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의 시는 철지난 메마른 국화송이가 아니라 더욱 그윽한 꽃향기를 여전히 발산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사를 부인하고 분별과 차별의 언어를 내세우며 권력과 재화에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인간들이 춰대는 망나니의 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깨달음 없음의 이 재현을 보며 더욱 시인 만해 선사의 ‘님’과 ‘기룸’의 의미가 높고 깊게 다가옵니다. 강과 산으로 「길이 막혀」 오지 못하는 님을 위해 시 속의 화자는 보석으로 사다리 놓고 진주로 배 모아 길을 냅니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선종(善終)하신 시인의 숨결이 한 겹 봄바람 속에 실려 임박한 님의 지엄한 행차를 알려주는 것만 같습니다. 시인의 위대한 사유의 광채를 감히 조금은 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