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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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소설들은 여성 서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평론가 김미현의 말처럼  진행중인  "이 세계의 다양한 여성의 삶을 담아내기 위한 '천일 야화'엮기"의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이 변론적 해설이 조남주의 소설을 긍정하게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럼에도 비판적 시선을 배제할 수도 없습니다.  비록 '다양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지언정 내겐  여성의 삶이라는 동어 반복적인 피로감을 피하기 어려웠으니까요.  그런데 이 작품집의 두 번째 수록작인 작가의 경험적 소재를 차용한 듯한 1인칭 소설인 오기 읽다가 문득 2021년 여름호 창작과 비평통권 192호에 실린 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이라는 김태선 문학평론가의 글 중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타자의 목소리, 특히 고통을 듣는 일은 타자의 삶에 참여하며 나를 개방하는 가운데 서로가 의존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느끼고 배우는 과정이다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그 다음에 상상해야 한다."     

창작과 비평통권 192팬데믹 시대의 목소리를 함께 듣는 일51,김태선

 

 

그것은 내 마음을 열어 놓지 않고서는 타인의 고통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는 글이었죠. 열려야 그 목소리가 발하는 문제가 나의 것이 될 여지가 생기는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내가 마음을 닫아놓았으니 감정이입이 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고, 더구나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한다는 지적에  한참을 내 속을 들여다봐야 했습니다.

 

읽고 지나쳤던 작품들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단박에 어떤 감응으로 소설 속 그녀들의 목소리가 내면에 속속들이 울려 퍼졌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문제로서 인식하려는, 문제로 수용하려는 준비된 마음은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곤 이 작품집의 구성이 눈이 들어왔습니다.  

 

첫사랑 2020의 초등학생 소녀에서 가출의 미혼 여자여자아이는 자라서와 같은 학부형이 된 여자오로라의 밤의 주인공인 50대 중년 여자,  매화나무 아래의 노년의 여자에 이르기까지 연령과 세대에 따른 그녀들이 마주한 여성으로서의 삶의 문제들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발견이지요. 그래서 각 작품마다 그 고유의 문제의식이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킵니다. 즉 각각에 대응하는 책임의 문제를 생각케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그 분량적 속성으로 인해 단편 소설이 지니기에 수월치 않은 서사적 재미가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수록 단편인  첫사랑 2020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서연의 첫 사랑이 코로나 팬데믹이  어른들의 세계인 경제적 타격으로 다치게 되는 그 연결성이 그려지고 있는데요코로나-19가 초등생의 사랑에 미치는 영향이란 발칙한 소재로 사회의 많은 이들이 지금 겪는 고통의 현실을 경쾌한 필치로 풀어냅니다. 일본관광 여행업을 아빠 사업의 어려움으로 서연은 사귀기로 약속한 승민과 카톡도, 학원도 같이 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 아이의 사랑 전선에 먹구름이 끼는 것이죠"코로나 때문에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 얘가 헤어지재요!"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읽지 못해요. 타자의 문제 자체를 모르는 것이죠. 아니 타자의 삶에 참여하는 방법을 아직은 모를 때여서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소설집을 여는 첫 번째 단편은 치매요양병원에 있는 큰언니를 보러 다니는, 다 늙어 '말녀'라는 이름을 '동주'로 개명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매화나무 아래입니다금주, 은주, 그리고 말녀로 이어지는, 작명에 있어서도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남녀차별의 인식이 배어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이런 푸념을 합니다.  "아버지의 그늘도, 남편의 굴레도 참 지긋지긋해놓고 그래서 도망친 게 아들의 어깨였다."고 말이죠이러한 가부장적 질서의 억압적 삶에 대한 반성적 사유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환경에 익숙한 삶을 살았던 자신의 한계 또한 직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이 더욱 풍성한 의미로 다가오게  하는 것은 병원 휴게실 창 너머 매화나무 가지의 자줏빛 겨울눈에서 시작되는 무한한 순환의 깨달음이 주는 숙연함 같은 것이었습니다돌봄의 문제, 가부장적 굴레, 생명에 대한 견고한 믿음 등 정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어요.

 

아마 내 삶의 세계와 가장 친근했던 작품은 오로라의 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아내와 소설 속 쉰일곱 살 주인공의 연령적 공감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더 이상 타인과 생활습관, 태도, 취향, 성벽같은 것을 맞추고 이해하고 양보할 여력이 없는 지금 내게 남은 가족이 어머니라서 다행이다."라고 말이죠.  시아버지도 남편도 모두 죽고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는 직장 여성인 딸의 아이를 봐줄 것을 거절합니다그리곤 시어머니와 둘이 캐나다 옐로나이프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나죠.

 

이 소설은 세 세대에 걸친 여성의 삶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여성에 부과되고 강요된 질서가 각기 다른 세대의 사람들임에도 여자여서 지녀야했던 속박, 그 굴레에 대한 공감이 일치하고 있어요.  ''가 시어머니와 함께 이국에서 밤하늘의 영롱한 오로라의 빛에 감탄하며 기억을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하나 아쉬운 점이 있어요. 딸의 아이를 돌보는 것이 딸 부부의 문제라는 극히 개인적 책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 인상 때문입니다. 물론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희생을 요구하라는 퇴행적 요구가 아니라  사회적 장치와 연결망을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작업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졌으면 하는 것이죠.

 

단편 오기에 대한 감상으로 마쳐야겠습니다아마 짐작컨데  여성주의의 문제작인 82년생 김지영이후 그녀 이름은의 발표에 이르러 작가의 소설에 대한 무성한 비판적 시각들이 있었던 것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작품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소설가인 주인공 초아는  "소설은 너무 많은 말들에 휩싸였다."고 기억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소설가 작품으로서 표현하려 했다는 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작중 소설가 초아의 작품에 대한 악플 사건과 관련하여 고교시절 선생님이었던 지방대 문학교수의 요청으로 진행했던 초빙강의 후 허물없이 들려주었던 선생님의 성장기 가부장의 폭력등에 얽힌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얘기는 초아의 가족사와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이 얘기가 발단이 되어 써진 소설이 발표된 것이고, 선생님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남의 얘기를 고스란히 훔쳐다가 쓸 수가 있어?"라고 초아를 비난합니다. 초아는 흔한 일이라고 답변하죠이에  선생님은  "세상 여자들의 삶이 모두 다르다는 것, 제각각의 고통이 버티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라며 초아의 무지를 힐난하죠여기에는 작가 조남주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있다는 인상입니다.

 

허구인 소설이 현실의 엄혹함 앞에서 무력해진 경험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왠지 여성의 삶의 문제에 대한 다양성이라는 이 문제의 환기에도 불구하고 1인칭 세계의 주관성 탓에 윤리적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는 것이죠. 막연하지만 독자인 저는 어떤 새로운 자기, 새로운 삶의 기대를 보여주는 초아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이번 작품집은 소설가 조남주의 작품에 대해 낯설고 새롭게 읽기를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제 마음의 문이 제대로 열리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요?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덮고 지나가기 쉬운 돌봄과 희생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직시에서부터 여성들 스스로 가부장적 주체가 되는 마음에 숨은 기만과 허위의 응시와  자신의 삶의 조건에 구속되지 않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진중한 문제제기와 해법의 가능적 사유들이 가득한 작품집이라 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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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공동체 - 미세먼지, 코로나19, 폭염에 응답하는 과학과 정치
전치형 외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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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사는 것은 같이 숨쉬는 것이다. 혼자 쉬는 숨은 없다.” - 15

 

공기에 대해 과학과 사회정치적 통합 시각을 전달하는 대중서는 아마 첫 출간물이 아닐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은 곧 삶 그 자연적 속성이기에 이 행위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여야 한다는 생각이 낯설게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상황은 지극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며, 외교적이고 과학적인 문제로 공기를 다각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비말이 타인에게 전달되어 감염되는, "공기의 위기, 숨바꿈의 위기, 공동체의 위기"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혼자서 결코 살아갈 수 없으며, 더구나 공기를 호흡하지 않고서는 단 일 분을 견뎌내기도 힘든 존재다. 결국 공기는 모든 인간에게 사회적 관계의 토대이고 생물학적 기본 조건이다. 제대로 된 인지가 있기도 전에 이 기본적인 토대가 흔들리는 위기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세먼지, 황사, 각종 유기화학물질과 질산염등 대기오염 물질의 증가는 이제 적절히 통제되지 않는다면 재앙적 상황이 될 지경에 이르렀으며, COVID-19는 물론 이전의 사스나, 메르스등의 진지구적 감염확산은 인간의 사회적 접촉을 회피토록하는, 즉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함께하는 상황을 용납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 갈수록 뜨거워지는 공기는 이에 노출된 채로 노동을 해야 하는 약자들에게 또 다른 재난이 되고 있다.

 

책은 이처럼 공기를 대기오염의 측면, 전염병 확산의 매질, 그리고 뜨거워진 공기, 즉 폭염의 재난적 측면에서 각자도생의 공기가 아닌 '공동체를 생각하는 공기'를 사유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계층은 즉각적인 방법으로 자신만의 울타리를 치고 탈공해, 신선한 공기가 있는 교외의 장소에 집을 마련할 수도 있다. 또한 개인을 위해 휴대용 공기청정기를 비롯한 공기가전시장이 활황을 맞이하는 것처럼 개개인의 사적 공기 관리를 도모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기는 내 앞의 공기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공기, 호흡 공동체의 공기를 도외시할 수도 없으며, 각자도생의 공기를 합산한다고 전체의 공기가 되지도 않는다. 개인의 수준을 넘어서는 공동의 대응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드는 각자도생의 이기적인 몸부림을 넘어서는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각자도생의 공기를 모두 더하는 것만으로 공동체의 공기를 지키는 일이 실현되지는 않는다."   -60

 

개인이나 기업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고 그 산물인 제품을 개발, 활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공기는 누가 관리해야 하는가? 중국발 황사에서부터 미세먼지를 관리하기 위한 과학기술과 그 예산이 요구되지 않는가? "미세먼지의 생성, 변화, 소멸 기작을 규명하는 연구"가 수행되는가하면, 당장의 대책으로 학교 교실마다 공기청정기와 미세먼지 측정기를 보급하여야하며, 무분별한 산업화, 느슨한 규제, 부실한 제도를 보완하여야 하고, 인접한 국가들과 '공기 외교'를 위한 노력도 하여야 한다. 이들 노력을 모두 경주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한반도의 공기가 청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실로 많은 자금과 길고긴 과학적 노력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지식이 경합하고, 가치가 충돌하며 제도의 도입을 둘러싸고 논쟁이 그치질 않는다. 엇갈리는 응답에 조율하는 기술, 어떤 요구에 가장 먼저 응답할지 결정하는 호흡공동체의 가치, 그 중요성이 높은 강도로 오늘의 사회를 압박하고 있다.


 



매연으로 인한 고통이 인격권의 침해로 인정되고, 미세먼지가 사회재난의 범주가 되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우리의 '공기 과학'은 이제 초보상태를 막 벗어나고 있는 정도이다. 호흡공동체를 관리하는 과학에는 많은 비용이 소용될 뿐만 아니라 그 결과도 답답하리만큼 느리며, 즉각적인 이윤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돈이 안 된다고 공동체의 생존을 외면하는 과학, 기업, 정부(정치)로 머물 수 만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한반도의 공기는 정치(精緻)하게 관리되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음을 인지해야 한다.

 

"가난이 고인 곳에 열기도 고인다."  - 194

 

한반도의 공기, 공동체의 공기는 이같은 대기오염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어느덧 아열대 현상을 보이는 여름의 기온은 기상청장의 언급처럼 "5개월 여름시대를 준비"해야하는 상황에 이르렀으며, 폭염도 재난의 영역에 돌입했다는 인식이다. 여름이 점점 뜨거워지고 길어질수록 이 뜨거운 공기를 피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대책이 요구되는 것이다. 폭염이 "누군가에게는 잠깐의 불편으로 지나가는 온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열기로 작용한다." 뜨거운 공기가 직업에 따라 다르게 체험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폭염시민 모니터링'에 의한 택배기사와 건설노동자의 체험 온도는 관측기온보다 13.5도에서 21도가 높을 만큼 노동자가 겪는 '()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최고온도에 의한 법적 강제력 없는 작업중지 권고가 지금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를 따르는 기업이나 현장은 없다고 봐도 될 것이다. 노동력 착취에 혈안이 된 이익중심 사회에서 누가 노동자를 놀리겠는가? 자신들은 에어컨이 작동하는 서늘한 사무실에서 체감온도 50도를 넘나드는 중노동을 강요당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회이기를 이제라도 그쳐야하다. 독일은 노동강도를 기준으로 한 체감온도를 세분화하여 인지온도를 기준으로 작업중지를 마련하여 실행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도 이같은 기준과 법적 강제력의 도입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서울 평균 기온이 섭씨 28.1도를 넘어서면 1도 상승할 때마다 사망율이 9.6퍼센트씩 증가한다고 한다. 온열환자로 분류되는 폭염에 의한 매년 사망자 수가 COVID-19의 사망자수보다 많다면 이는 재난인가 아닌가? 아마 에어컨도 없는 닭장같은 초소에 꼼짝없이 갇힌 상태에서 24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경비노동자에서부터 쪽방촌의 노인들, 폭염 속 택배물품을 나르는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뜨거운 열기를 피하지 못하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는 무수하다. 일부 지방자치체에서는 '쉼터'를 마련하여 운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마저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운영이 중지되었거나 폐쇄되고 있는 실정인 것 같다. 우린 개인으로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일원이다. 뜨거워진 공기 또한 공동체가 그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는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해야 함이다.

 

도심의 열기는 더욱 극악하다.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 건물 벽 반사광선, 아스팔트가 머금은 열기," 고층빌딩으로 바람의 흐름이 차단되어 열섬 현상은 사람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최근 외곽의 자연적 찬 공기를 도심으로 유통시킬 바람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일명 "바람 생성 숲, 연결숲, 디딤,확산숲"으로 불리며 도심에 자연의 바람을 이끌 길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건물 높이 제한, 공원도로 너비 확장등 제도적 법규의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 대중이 마치 남의 문제처럼 외면하는 한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기는 어렵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낯설지만 호혜적인 공기관계를 구성함으로써 더 자주 더 극심하게 찾아올 공기위기를 겨우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피서는 끝났다. 피난 준비를 시작할 때다." - 209

 

COVID-19는 현재 진행형인 전염병이며, 지구적 재난이다. 사실 이 재난은 우리에게 '공기 인류학'이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공기관계를 이해하고 조정하는 일이 새로운 인류의 과제"가 된 것이다. 여기에도 사회적 약자는 어김없이 최대의 피해자로 부상하고 있다. 오랜시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옆 사람과 숨을 섞으며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 특히 콜센터 노동자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감염환자가 발생했던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다. 공간배치, 새로운 규칙...등 실내 구조, 장치(창문, 배기구, 에어컨 등)에 따라 공기의 흐름을 타고 떠다니는 비말에 대한 연구처럼 우리들의 지식은 쌓여 갈 것이다. 이들의 결실이 공동체가 함께 호흡하는 공기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제 해결의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각자도생의 기술이나 제품이 아니라 숨쉴 권리다. 이는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권리다." 서로 숨바꾸는 일을 회피하는 사회로서 공동체가 온전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나누어 쉬는 공기, 위기를 맞은 공동체의 공기를 되살리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책은 한반도의 공기에 대한 다층적 연구의 중간 결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재의 과학과 정치 사회적 현실을 가늠하고 현안 과제를 함께 사유함으로써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기 위한 공기 사회학, 공기 과학, 공기 정치학의 토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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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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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그러면 나의 우주가 그렇듯, 타인의 우주 안에도 다양한 작동 원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 작가의 말, 269쪽에서

 

표제작 타인의 집의 화자인 '시연' "블라인드 틈새로 들어온 햇살" "가늘게 뜬 눈 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중학생 소녀 '보라'는 장례식장의 "오래되어 갈라진 벽, 그 틈" 을 통해 "검은 곰팡이, 간헐적 울음소리, 삶에 관한 이야기, 찐득한 술 냄새, 그리고 죽음이라는 갑작스러운 사건"을 경험한다. 활짝 드러나 너무 뻔한 것일지언정 벽, 블라인드로 가려진 ''을 통해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 비로소 무심히 지나쳤거나 외면되었거나 혹은 가려져 있던 것들을 볼 수 있게 된다. 타인이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무수히 다른 삶의 이야기들이.

 

타인의 집은 불안한 생활의 터전으로부터 도약을 꿈꾸는이 시대 젊은 세대의 풍경이 고스란하다. 체인 어학원 상담업무로 위태로운 만족의 삶을 살아가는 '시연'은 집주인에게 세 들어 사는 걸 숨기고 전세입자에게 월세를 지불하는 방에 산다. 명목상인 전대차(轉貸借)의 집이지만 "탐탁지 않을지언정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에 소속돼"있다는 위안의 장소가 되고, "엄연한 집"으로서의 만족감을 준다. 다중 속에 위치해 있다는 안정감과 달리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타인과) 블렌딩 인 될 필요 없"음에 대한 욕구처럼 그 모순과 갈등의 풍경이 소소하게 풀어헤쳐진다. 창가에 서서 "각자 빛을 뿜어내며 차고 넘치도록 많은 풍경 속의 집들"을 바라보는 시연, 오늘의 젊은 세대들 시선이 시리게 다가온다.

 

''과 발음이 같은 zip이라는 제목을 지닌 단편에서는 막상 이렇게 소유된 집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인 '영화', 마치 압축된 동영상 파일을 풀어 놓듯 한 여인의 작은 우주로서의 집과 절묘하게 조우하는 듯하다. 여자에게 집은 편안히 머무는 곳이 아닌 블랙홀 같은 곳, "견고하되 구멍이 많고 드나들 수 있지만 도망칠 수 없는 울타리와 지붕",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굴레다. 고요했던 여자의 삶에 바람을 피우고, 재산을 탕진하는 등 "너무나 많은 드라마를 제공했던" 남편 '기한'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분노와 복수심으로, 그리곤 미움의 정열마저 태워버리기엔 너무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도망치고자 했으나 늘 회귀했던, 모든 것이 눌러 담긴 작은 우주"였던 집에 담겨 전달되는 21세기판 '여자의 일생' 압축파일이라 할까? 여자라 지녀야 했던 오래된 질서와 속박들...

 

"평화와 안온함의 상징, 단란하고 완결된 가족을, 때로는 뭔가를 더 완성시키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모든 것을 어그러지게 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

- 괴물들 , 51

 

불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시험관 시술로 쌍둥이를 얻은 여자, 이 과정의 불화는 부부의 관계 단절로 이어지고, 사고로 생계능력을 상실한 남편을 대신해 여자는 어린이집 교사로서 고단한 삶을 꾸려간다. 쌍둥이가 함께 사용하는 듯한 다이어리에 써진 "아빠를. 죽일거야. 오늘, 저녁. 우리 손으로."라는 섬뜩한 이 소설 괴물들 의 첫 문장은 어쩌면 부인하고 싶은 여자의 소망일지도 모르겠다.

 

"평온함마저 변질될 수 있음을 여자는 시간이 감에 따라 느끼고 있었다."는 목소리처럼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씌워진 자본주의의 허상이 사람들을 어떻게 황폐화 시키고 있는지 그 적나라한 고백록으로 읽힌다. 어린이집 교사의 돌봄 노동의 실상까지 더해져,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만들어지는 '마음의 병'"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는 여자로부터 오늘 우리들의 세계가 외면하는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괴물들은 누구일까? 교사에게 과다한 수의 아이를 맡기는 어린이집 원장? 자신의 자유를 위해 아이를 맡기고는 책임만을 강요하는 아이들의 부모?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안일한 관료행정? 어린이집 교사를 범죄자 취급하는 미디어와 이기주의의 대중?

 

우리네 삶의 현실이 안고 있는 이러한 지배적 몰지성과 몰염치함의 현상들을 총체적으로 품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아드네 정원은 노인 인구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의 계급화 된 노인 구획의 가장 아래 등급 바로 위인 'D등급 유닛'에 대한 미화된, 아니 "실마리도 없는 지옥 같은 미로"를 은폐하는 구역의 이야기다. 부유한 노인들이 거주하는 유닛 A로부터 점차 B,C,D,F로 하향 이동한다. 경제력도 신체와 정신력도 떨어짐에 따라 점차 야만적 원시적 구획으로 하강한다.

 

노인 '미화'는 유닛 C에서 유닛 D로 이동했다. 그녀는 마지막 등급인 F로의 이동을 지연시키려고, "구성원 실태에 도움 되는 정보를 '민원 AI'에 전달"함으로써 화폐처럼 사용되는 '생활평가지수 RM'을 쌓기 위해 노력한다. 이 점수로 소위 이야기 동무인 복지파트너를 초대해 "살아있음을 향한 본능"을 충족시키려한다. 그녀는 "손님을 초대한 주인이 되게 하는 기분(느낌)을 주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위협적 낙폭의 출산율, 이를 해결키 위한 불가피한 이민자 수용, 남북개방 등 단일성 지배문화가 다인종 계층이 넘실대는 곳으로 변모한' 세계는 어쩌면 눈앞의 근미래에 대한 우리의 현실이라해도 무방할 듯하다. 압도적인 노령화가 야기하는 경제적 부담의 정의에 대해서, 이민자 등 다양한 계층적 차별이 야기하는 혐오와 배제 등 사회 갈등에 대해서, 노인 사회가 만들어 낼 돌봄 등 인권 사각지대의 확산에 대해서, 청년 실업과 일자리 감소에 따른 세대 간 질시와 분열에 대해서 등 편협한 시야를 서로 촘촘히 연결된 복합적 과제로 확장하게 이끈다. 이 작품을 sci-fi 소설로 범주화하는 이들의 안일한 이해가 있는 듯하다. 닥친 과제로서 인식하지 못한다는 반증 아니겠는가? 엄혹한 현실적 허구로 인식되어야 하지 않을까?

 

 

【 『타인의 집스위치 에디션 & 편지엽서

 

"누가 도와달랬어요? 감사하다고 충분히 말했잖아요. 한번 도움을 받았다고 평생 죄인처럼 살라는 겁니까? 누가 도와달랬느냐고요..."

-상자속의 남자, 180

 

위의 인용된 문장은 작품 상자속의 남자 화자가 언덕에서 굴러 내리는 트럭에 무방비로 깔리는 아이를 구하고 대신 영원히 삶의 길로 되돌아올 수 없게 된 형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부모로부터 듣게 되는 말이다. 감사의 마음을 너무 쉽고 바르게 망각하는 사람들, 택배 상자를 분류하고 하루치 물량을 배송하는 택배 노동자인 ''는 세상이 가르쳐주는 이 교훈으로부터 "굳이 남들이 감사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더 위험해지거나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까.(181)"라고 상자 속에 살기로 한다. 안전이라는 삶의 모토를 지키기 위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두 개의 에피소드가 더해지는데, 눈앞에서 모녀인 두 여인이 잔혹하게 살해당할 때 ''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문 앞에서 무참히 스러져가는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경직되어 바라보는 소년을 발견하게 된다. ''는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해 장례식장을 찾고 은테 안경너머 무심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관찰하는 예의 소년과 마주한다. 소년은 ''에게 말한다. "알고 싶을 뿐이에요.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에 대해서요. 거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지. (187)" ''의 형이 마지막처럼 남기는 "어떻게 하든 누군가는 아프게 된다."는 말이 과연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이 불가능해 보이는 답에 근접하는 것은 우리들이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태도에 대한 한 위로의 방식이랄 수 있는 마지막 에피소드일 것 같다. 타자를 향한 내 태도만큼은 자신을 위해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런 삶이 될 수 있기를.

 

이 소설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라면 성장하고 나면 소설가 '손원평'이 되었을 것 같다고 여기고 싶은 문학소녀 '보라'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다. "어둠을 갈라내는 빛"을 향해 자기만의 소설을 완성해가는 씩씩함, 그리고 시니컬함 속에 위트까지 담고 있는 재치 있으며 남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심리적 능숙함이 던져주는 즐거움 탓이었다 할까? 문학계 원로라는 그럴듯한 의상까지 걸친 소설가 윤석이 세간의 맹목적 열광을 빌어 남의 작품을 자기만의 언어로 닥아 낸 후 출간하는 뻔뻔함 등 작품 내 갈등구조나 서사도 소설의 독특한 구성만큼이나 흥미롭지만 내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세계에 시선을 맞추고 자기 것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 맞는 기성 권력의 추악한 위선과 기만의 양상들이며, 그리곤 호들갑을 떨어대는 세상의 방정맞음에 대해 우아하게 날리는 마지막 질책의 한 방이다.

 

"놀랍지만 늘 벌어지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망각했고 또다시 처음처럼 경악했다. 그렇기에 이것은 새로워도 낡은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야기도, 전부 똑같거나 혹은 전부 달랐다. "

-문학이란 무엇인가, 236

 

이 소설집의 처음을 시작하는 4월의 눈속 어느 눈 녹은 날 서로 어깨를 토닥여주는 이방의 여인과 남자의 정경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주인이 책방을 열기 전까지" 열리지 않은 책방의 비 그친 길을 걸어가는 "손님이었던 한 사람과 주인이 아니었던 다른 이의 허밍이 섞여" 흐르는 장면은 어느 한 폭의 그림처럼 깊은 잔상을 남긴다. 유토피아를 잊어버린, 아니 부존재라 낙인찍었던 세상의 가능성에 도전해야 할 의미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무한히 다른 타자의 세계를 알아가려 할 때 아마 우리는 조금은 더 살아갈 이유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 소설집을 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담한 정의라 해도 된다고 선언하고 싶다. 작가는 이 책이 "대중에서 시민으로, 관중에서 독자로 이끄"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해낼 만한 대단한 책이 아니라고 겸손해 하지만 그 일을 해낸 작품집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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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트랜스필 총서 4
권용선 외 지음, 최진석 엮음 / 비(도서출판b)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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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된 촉발에 응하여 발생하는 정서적 반응들의 집합이 감응(感應;affect)이다."

- 16쪽에서

 

사실 '감응(affect)'이란 개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와 정신을 일관되게 관통하고 상호작용하도록 만드는 실재적 힘"으로 규정한 바있다. 다만 이 세계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방법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사유의 도구'라 할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것의 잠재력을 문학을 비롯한 예술, 사회정치 및 세계를 고찰, 규명하는 시도들이라 할 것이다. 여섯 명의 저자가 쓴 여섯 꼭지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모두가 '유물론적 시학'을 말하는 이진경의 문장을 빌어 말한다면, '내 신체 속으로 밀고 들어와 스며들고 휘감겨', 어떤 변화를 표현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마다 수용능력이라는 감각이 다르니 말이다.

 

.  첫 번째 평설인 이진경의 감응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처럼 감응에 대한 입문으로 제격이다. 그의 말처럼 전공자의 호구가 된, "전공자의 가정된 지식 없이는 무의미한 단어"들을 남발하는 그런 조악하고 오만하며 무지를 포장하는 언어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념이란 철학자의 이론을 표현하는 용어가 아니라, 그 개념만으로도 사람들의 사유나 삶 속에 파고들어가 무언가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효과를 가진 독자적인 말"이라는 그의 정의가 그것이다. 어떤 외부- 책의 문장이 되었든, 사람 그자체가 되었든 - 와의 만남으로부터 촉발 받을 능력이 있는 신체라면 누구라도 이 감응의 시학과 함께 섞이며 감응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진경은 체코의 작가 '보후밀 흐라발'이 쓴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감응의 모호한 일원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가는 소설"이라고 35년째 폐지 압축 일을 하는 주인공 '한탸'를 통해 감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압축되어 버려지는 책들을 보면서 점점 스스로가 버려지는 책이 되는 감응을 갖게 되는데, 아마 들뢰즈/가타리가 말한 "예술 작품이란 감응의 응결"이란 문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구나라는 반가운 깨달음을 얻게된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

각각의 존재자의 신체에 변화를 야기한다." - 15쪽에서

 

감응이란 이처럼 "어떤 외부와의 만남에 의해 내 신체에 발생한 변화의 표현이자, 동시에 그 효과를 신체 안에 수용하여 얻는 능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재일(在日) 시인 김시종, 철학자이자 시인인 진은영의 시를 비롯한 감응의 다양한 양태들이 소개되는데, 이해되지 않아도 의미화 되지 않아도 전해지고 파고드는 감응의 독특한 능력, 특이함의 문턱을 넘어 흘러가지 않고 기억되어 신체 속에 응결되어 다시금 다른 것을 촉발하는 '사건의 말없는 신체'인 사태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합리주의 이성을 말하면서 이러한 감응의 능력을 잃게되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나 다 내재된 것임에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이같은 탁월한 감응의 능력이 있다. 그래서 가끔은 신체 안에 응결되어 있던 강밀했던 감응의 기억은 어쩌다 무심코 무엇인가에 의해 밀려 들어와 삶의 장소에 쏟아 내게 될 때가 있음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이진경의 평설은 문학작품을 쓰는 이, 그리고 읽는 이들 모두에게 진짜배기 사유의 도구로서 감응을 이해하는 최고의 안내자가 되어 줄 것 같다. "경험했던 잊을 수 없는 감응, 그렇게 밀려든 것을 외면할 수 없어서, 시간과 환경이 달라져도 잊지 않기 위해 신체를 갖는 어떤 것으로 응결"시킨 것이 곧 예술작품임을.





.   아마 내가 감응을 지녔던 두 번째 평설은 최유미가 쓴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이 될 것 같다. 생물의 다양성은 세대를 거듭한 차이의 누적이 계통수의 분기로 나타난 결과라는 전통적 진화론을 거부하고, "생물 다양성의 원동력은 분기가 아니라 융합"이라 주장한 1967생물학자 '린 마굴리스(Lynn Magulis)'의 이질적 세포의 공생, 이종간의 우발적인 엮임, "생명은 개체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라 말하는 새로운 배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간의 진화론과 신다윈주의자들의 게놈 중심적 생물학은 '타자와 관계를 경쟁과 적대'로 보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연결하는데 소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개체는 이질적인 것들의 복합체임을 인정하는 순간, 타자와의 관계는 화합과 공생의 관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시지구에서의 고세균과 박테리아가 

서로가 서로를 먹던 시대의 영상을 돌려본다. 이 적대의 일상이 

어느 순간 멈추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고세균이 박테리아를 먹다가 소화시키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 느닷없는 실패가 다른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틈을 연다.

이들은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각자를 자신의 부분과 융합한 것이다."

- 78~79쪽에서, 부분 변형 발췌인용

 

우리(인간)는 개체였던 적이 없다. "소화불량 메타포는 약육강식이라는 계산된 드라마"의 허위를 들추어낸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에게 다른 신체와의 마주침, 서로 밀려들어가고 응결되어 새로운 감응을 촉발하는 것은 존재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종혼효적 결합의 아름답고 멋진 사례인 꿀물을 제공하지 않는 오프리속 난초와 꿀벌의 공생 이야기는 수분과 꿀물의 교환이라는 타산적 경제원리를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과학을 "자연이란 무자비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규정"하여 인간사에 투사하려는 물신화된 왜곡의 도구화 환상을 깨부순다.

 

난초와 꿀벌이 서로의 즐거움과 놀이를 위해 서로 감각을 촉발하고 반응하는 모습은 매혹 이상의 '감흥의 생태학'이 발설하는 얽힘, 그 현명한 신체들의 마주침의 의미를 읽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신체에 맞춰나가는 성취의 기쁨, 아마 고매한 지능을 가졌다는, 신이 되려하는 인간이 망각한 이것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바로 지금에라도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는 각성을 촉발한다.

 

.  내게 감응을 일으킨 세 번째 평설은 문학평론가 송승환이 쓴 증언의 문학성과 시적 감응의 정치성 이다. 2차 세계대전 독일강제수용소 체험의 기록을 쓴 '로베르 앙텔므''프리모 레비', 고문의 기록을 쓴 '장 아메리' 글을 통해 공백의 언어, 비인간의 증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증언 불가능성의 고백이야말로 감응의 말임을 듣게 된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세살 가량 되어 보이는 죽어가는 아이의 환원 불가능한 언어, "'후르비네크(Hurbinek)'의 언어"가 비언어롤 읽힐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지금-여기 부재하는 증인임을 의미화 하는 문장들은 그 상상 불가능성의 사건을 내 신체의 어느 공간 속으로 풀어 놓는다. 이것은 시인 랭보의 1인칭 주체의 시선을 상실하고 타자로서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여 새로운 이해와 경험을 신체에 새기게 되는 시()를 통해 증인의 언어가 시인의 언어일 수밖에 없음을 몽롱하게 바라보게 한다.

 

.   '발터 벤야민'192612월 모스크바 박물관에서의 세잔의 그림과 우연의 마주침은 "예술작품을 관조와 반성의 대상적 위치로부터 탈출시켜 작품 고유의 무게를 방사하는 '신체'로서의 지위"가 되었다는 신체 또는 감응의 전도체를 말하는 권용선의 평설은 '감응'이 예술작품을 새로운 공동체적 신체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각성의 전도체임을 가리킨다. 이밖에 스피노자의 'affect'에 대한 해설이라 할 현영종의 글과 문학평론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최진석의 글이 감응의 역동적 적용을 시도하여 그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 글에는 여전히 일본식 번역어인 '정동(情動;affect)'의 사용이나, 또는 감응과 감정의 명료한 개념적 분리 없이 혼용되어 독자의 읽기를 방해하기도 한다.

 

감정은 감응의 산물이다. 감응이 "상이한 정서적 반응이 섞이는 이행상태"라면, 감정은 "이렇게 섞인 정서적 반응이 귀착되는 정서적 상태"이다. 이진경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사유에 파고들 수 있는 언어로서 개념어들의 정리가 요구된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보다 폭넓고 깊이 있는 세계의 이해와 통찰 도구로서 감응이 많은 사람들의 신체로 확산되기를 염원하는 그런 멋진 걸음임을 의심치 않게 된다. 삶이란 부단한 배움의 연속인 것만 같다.

 

"동종과 동류가 아닌 것들 사이의 상호적인 포획은 어떻게 하면 상대를 더 잘 촉발할지,

어떻게 하면 상대에게 잘 촉발될지를 부단히 배워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모든 신체는 상대에게 자신을 맞추어나간 부단한 배움의 기록이다." - 105쪽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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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란 / 철학이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월드북 67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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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질서가 횡행하는 것을 이것도 자유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고 

체념할 것이다."

- 존 윌리엄 워드(John William Ward; 1781~1833)

 

1930년 발표된, 당시 부상하던 파시즘에 대한 경고와 대중민주주의의 비판을 담고 있는 이 저술을 2020년 다시 깨워야 하는 것은 "범용한 정신이 ...모든 곳을 밀어 붙이려고 하는(19)" , 고정된 자기 인식에만 맞춰 사는 편협의 공존으로 퇴화하는 사회대중의 현상 때문이다. "말을 토해내고 싶다는 욕망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63)", 정작 필요의 의론은 중지시키고 적의와 선동적 야만이 여론을 장악하는 역사적 오류가 반복되고 있음에서이다.

 

오르테가는 '대중'이란, "스스로를 ...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다생각하고 타인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느끼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들(16)" 이며,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공통형을 스스로 반복하는 인간"이기에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배제(19)"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관념의 창고 안에 들어있는 인식에 만족하며 이는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자신 밖에 있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이 "관념의 창고에 안주하고 자기 폐쇄의 메커니즘(59)"을 반복한다. 바로 편협성, 무지의 어리석음이다. 이 어리석음에 터 잡은 위력을 포퓰리즘이라 부른다.


 



이같이 지성이 폐쇄된 인간들의 군집인 대중은 파시스트가 성장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알량한 지식, 이미 정해져 있는 관념의 변죽을 울리며 자신의 머리에 쌓인 공허한 문장에 감탄하며 그 외곬의 대담함으로 황색언론의 기수로 변신한 스스로에 감동한다. 정의와 공정성을 외치지만 그 속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부정의에 따른 자기 편익뿐이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모순된 형태는 자만한 도련님이라는 형태이다." 

- 본문 86

 

이 밀봉된 마음의 존재는 자기만의 규칙에 따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이 자만한 도련님의 규칙이 아닌 이유이다. 그저 자신의 견해만이 정의라는 태도를 취하는 인간 유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상대 입장에 어떠한 존중 의지도 없는, 상호 따라야 하는 일련의 규제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결국 의지할 사회적 규준의 권위가 사라지고 협의(協議)의 의론이 불가능(62)"하게 된다. 기댈 수 있는 규칙이 없으니 문화가 존재할 도리가 없어진다. 결국 이 결여는 문화를 사멸시키고 야만성이 득세케 한다.

 

오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와 원한의 거친 언어가 정치 무대를 지배하고, 여기에 환호작약하는 대중의 원시성이 활개를 친다, 조중동을 비롯한 황색언론과 미디어들, 기득권을 결단코 내려놓지 않으려는 수구정당과 검찰 등 권력기관, 여기에 주구노릇을 하며 자기 이익의 기회를 엿보는 기회주의적 담론가들이 마치 정의의 수호자 행세를 하며, 대중은 어느 사이엔가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 불어 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야만 상태이며 대중민주주의, 포퓰리스트들이 마음껏 날뛰는 세계를 조성해준다. 틈만 나면 규제의 폐기를 제안하는 '야만인의 대헌장'이 수시로 읊조려진다. 내가, 우리가, 이들 대중이 아니기 위해, 전체주의 세계의 도래를 저지하기 위해 무지의 편협을 벗어나야 하는 까닭이다.

 

"세계 안에서 풍부한 수단만 보고 고뇌는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대중! " 

- 본문 85

 

이제 마음껏 "활개치고 있는 것은 대중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의해 세력을 부여받은 원시성 충만한 범용(凡庸)(81)" 인간이 외관상의 승리를 향유한다. 어리석음, 프로파간다, 적의(敵意) 충만한 언어로 인간본능의 가장 저열한 부문을 자극해 점점 지배력을 확장한다. 그래서 오르테가의 책 제목은 '대중의 혁명'이 아니라 '대중의 반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 정신적 야만성을 밀어붙이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자기 영역의 아주 작은 한쪽만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그래서 대중의 평범성에 기생해 이 사회 모든 분야의 전문가로 행세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누구인가?

 

더구나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복잡 미묘해져만 가는 문명 자체의 진보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것을 해결할 수단을 획득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지능과의 부조화(77)"를 깨닫지 못한다. 기술 문명에 킬킬대며 저항할 이유도 느끼지 못한 채 엉뚱한 반문을 하기까지 한다. 앎의 깊이가 어디까지이냐고? 타자의 고뇌를 헤아릴 만큼, 자기 앎이 천박한 것을 인식할 만큼, 이것이면 족하지 아니한가? 자기 관념의 창고가 결여, 공백 투성이임을, 그래서 끊임없이 타자의 의견을 경청할 수 있게 될 만큼 겸허한 앎이면 대중에 파묻히고 휘둘리는 정신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르테가가 정리한 '대중의 심리구조'라 기술한 항목들을 열거하며 맺어야 할 것 같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나 자신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 권위로부터 자기를 폐쇄하고 자신의 의견에 의심을 품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매사에 개입하며 자신의 평범한 의견을 진실이라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혹여 자기 삶에서 비극적인 제약이란 없다고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야만적 정신의 응석받이를 탈피해야 우리가 가까이 가려하는 민주주의, 자기 삶의 주역임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그 사생아인 전체주의는 너무 빼 닮았기에 이를 인식하는 것은 오직 개인의 몫이다. 대중은 항상 어리석기 때문이다.(1) 대중에 대한 이 신랄한 비판적 고찰의 서술은 어쩌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회귀할 테마일 것 같다.

 

 

(1)2016년 촛불을 든 시민들은 '공중'이라 부른다. 이와 달리 대중은 그저 수신자로서의 집합적 군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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