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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서사 ㅣ 교유서가 어제의책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3월
평점 :
이 책의 주된 물음은 이것이다. 어떤 부조리한 폭력적 ‘사건’의 당사자 혹은 그 사건의 내부에 존재함으로써 정신적 외상이라는 고통을 입은 사람의 기억, 그 증언이 말로 완전하게 표현될 수 있는가와, 외부에 있는 사람이 그 ‘사건’을 표상하는데 어떤 결여도 없이 온전하게 모두를 재현할 수 있는가의 논의다. 그 답은 물론 불가능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 말 되어지지 않는다면, 불의하거나 부조리한 ‘사건’ 외부에 있는 우리들은 타자에 이르는 길을, 그 회로를 영영 알 길이 없어지며, 지금 존재하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무관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의와 부조리한 폭력이 반복되는 세계의 도래에 무능과 무력함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억의 표상과 그 표상인 서사의 한계란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말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사건’의 잉여, 바로 이 말로 표상될 수 없는 잉여를 잉태하는 사건의 표상 불가능성을 넘어서 어떻게 이를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비평적 논설은 1982년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침공 때 베이루트 시내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기습한 레바논기독교민병대의 남녀노소를 불문한 무차별 대학살 사건으로 시작된다. 유대인 군사조직의 이같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학살은 반복되어 온 ‘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세계에 전달되지 못한 망각된 과거였다. (나누어 갖지 못한 기억이 그 불의가 반복 실행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여성 작가 ‘리아나 바드르’의 1991년에 발표된 소설 『거울의 눈(The eye of the mirror)』을 통해 전해지는데, 이는 베이루트 난민촌인 ‘탈 자아타르’ 포위와 학살 사건에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7년에 걸친 인터뷰 끝에 얻어낸 증언들을 토대로 픽션으로 재구축한 작품이다. 소설의 서문에서 작가는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 갖기를 바라는 바람을 담아 썼”으며, “겪어 온 고난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사건’의 기억을 공유해주기를 바라는 절박한 요청”을 담아내려 했다고 말한다.
이 소설의 중요한 점은 ‘사건’을 재현하려는 것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것은 “뜨거운 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은 찬물에 손을 넣고 있는 사람과 똑같이 느낄 수 없다.”는 것, 즉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은 내부에 있는 사람과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건의 참혹한 고통은 결코 말로, 글로 표현된 것을 넘쳐흐르는 잉여, 그것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경험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리얼(real)하게 보이는 서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사건’그 자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텍스트에 써 넣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제의식을 대변한다. 책은 두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1장에서는 말 되어지기의 한계와 2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기억을 나누어가지기 위한 서사를 사유한다.
1. 기억의 표상과 서사의 한계
일본군 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이야기인 듯한데, 탈출하다 붙잡혀 일본군 병사에 의해 태워지던 동료 위안부여성의 신체가 타는 냄새로 인해 고기 타는 냄새조차도, 그래서 고기조차 입에 대지 못한다는 증언을 통해 기억의 폭력성을 우선 문제시 한다. 잊어버리고 싶은 폭력적 ‘사건’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되살아와 폭력적 사건 전체가 그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과거’로만 순치할 수 없는 생생한 폭력으로 그녀의 신체에 살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무언가 근원적일 경우, 먼저 느낄 수밖에 없는 사실은 인간의 언어가 완벽하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며, 우리가 가진 언어의 윤곽 속에 완전히 담기지 않은 채 흘러넘치는 사건의 조각, 잘려나간 부분에 많은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사유한다.
어쩌면 이 책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부분인데, 1830년에 발표된 발자크의 소설 「아듀(Adieu)」를 통해 바로 이와 같은 신체에 세차게 흐르는 강물이 되어 회귀하는 기억 또는 그 기억이 매개하는 ‘사건’을 나누어 갖는 것의 불가능성을 탐사하는 여정이다. 혹독한 전쟁에서의 후퇴 길에 이별한 연인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만났지만 여인은 정신을 잃은 미치광이 여인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아듀’라는 낱말만을 반복한다. 남자는 여자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지만 여인의 정신은 돌아오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최후의 방법으로 이별 당시의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 장면에 놓이자 여자는 기억을 되찾지만 ‘아듀’를 외친 그 순간 여자는 죽어버린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기억의 문제를 우리들에게 당혹스럽게 던지는데, 여자에게 과거 이별의 사건이 가하는 폭력에서 육체가 오랫동안 살아남게 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몸에 일어난 모두를 잊어버려야만 했던 것이고, 그래서 철저하게 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했을 때 그 엄청난 폭력을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은 돌연 도래하는 ‘사건’의 기억은 곧 폭력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고통 그 자체인 것이다. (작품의 세부 내용은 후일 별도 논의할 기회로 미룬다.) 소설에서 ‘아듀’라는 말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말, 자신에게 들씌워져 놓아주지 않는 말,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것이다. 이 소설의 위대성은 전쟁이라는 폭력적 사건을 완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작품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서 독자의 정신적 외상으로 전이(轉移)시킨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중대한 물음을 던지는데, 전쟁과 같은 폭력적 사건을 리얼하게 표상하려는 욕망의 불순함을 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 ‘오카 마리’는 이 리얼리즘을 예리하게 비판하는데, 표상과 실제를 얼마나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이 단어에 숨겨진 확신의 오만이다. 소설 「아듀」의 주인공 남자는 충실하게, 즉 리얼하게 장면을 재현한다. 그리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첫 장면에 전장의 리얼리티한 재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 아듀의 남자는 여자에게 연인이었던 자신을 인지시켜(즉 여자가 상실한 여성성의 복구) 자신의 나르시시즘적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며, 스필버그는 재현 불가능한 실제와 사건의 잉여, 타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행위로써 전쟁이라는 폭력의 기억을 억압하기 위한 욕망으로서 과잉의 리얼한 재현을 사용한 것이라 비판한다. 즉 서사는 근원에서부터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하고 있기에 과잉으로 리얼리티하게 폭력을 재현하고 보충한 부인(否認)된 사건의 폭력성 자체라는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쉰들러 리스트>는 사건의 기억으로서 고통을 외면하고, “인간의 숭고한 사랑의 찬가”로 소비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성을 그로테스크한 희화(戱畵)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스필버그와는 그 접근방법에서는 다르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1998)> 또한 사자(死者)들의 기억이라는 영상을 통해 전쟁이나 위안부의 폭력적 ‘사건’에 도사린 무의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의미를 채워 넣음으로써 사건 자체를 부인하는 기만, 즉 그것에 내셔널한(national;국수주의적) 욕망이 마치 없는 것인 양 부정하는 토대로 삼고 있는 “기억의 횡령”, “서사의 횡령”이라 비난하고 있다. 이처럼 사건의 충실한 재현들이 모두 기만이고 위선에 머물 수밖에 없다면, 다시 말해 이러한 ‘사건’의 폭력성들이라는 것이 원천적으로 표현되고 표상할 수 없는 ‘사건’과 ‘기억’이라면 대체 이것을 어떻게 타자와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인가?
2. 표상 불가능을 넘어 - 어떻게 기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사실 이러한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구성, 기술하는 존재는 ‘사건과 기억’을 경험하지 않은 살아남은 우리들, 곧 타자들이다. 때문에 비록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현실에 재현될 수 없는, 근원적으로 표상의 한계를 가진 ‘사건’을 이 외부에 있는 타자에게로 이르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기억의 문제를 둘러싼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역사 왜곡이 수시로 사건을 부정하고 터무니없는 의미를 쑤셔 넣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현실을 볼 때 이는 결코 간과될 수 없는 논의이다.
이러한 역사 왜곡의 양상을 표현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건의 기억이 타자와 공유되지 않고 사건의 기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외부 세계에 방치되어 온 그 자체와, 사건이 타자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리매김 되고 서술되어 왔다는 것 자체로서 타자에 의한 일방적 표상이라는 폭력의 뜻으로서 “타자에 의한 표상의 폭력”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을 비롯한 이에 뇌동하는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 부정주의자들인 뉴라이트라 자처하는 친일집단들이 이러한 표상의 폭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무리는 위안부 여성이었던 최후의 생존자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모두 부정하고, 식민지 여성에 대한 그 어떤 폭력도 존재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증언이란 본성상 수동적이고 주체의 언설 무능성에서 나온다는 점이기에,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의혹은 의미를 상실한다.
저자는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사람이 사건을 영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사람을 영유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폭력적 사건으로서의 기억은 당사자의 의사에 의해 떠올려지는 것이 아니라 불현 듯 심연에서 돌연 도래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사건’과 이의 ‘기억’은 그것이 억압된 존재를 통해 결코 말로 표현되지 못하고 항상 표현되지 않은 잉여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폭력적 사건의 희생자들과 그 관련자들을 인물로 하는 서사를 아주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은 우리에게 이해와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결코 묘사되는 ‘사건’에 빠뜨려 불안이나 위협하는 일 없이 알 수 없는 끈으로 이어져있다는 공감과 실감을 준다. 그럼으로써 무자비하게 낯선 폭력의 사건을 보편성의 시각으로 안전하게 감상하게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지적되어 온 사건의 잉여, 그 사건의 본질이라는 불가능한 진실을 영원히 막아버리는 봉인 행위가 되어, 한낱 지나간 과거의 일화로 휘발시켜 버리고 만다.
바로 이같이 인간이 영유할 수 없는 사건의 기억을 말하고자 의도적으로 써진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칠레의 지진」은 ‘사건’과 ‘기억’이 소유하는 인간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의한 표상으로서의 폭력의 서사로서 관동(關東)대지진으로 무참하게 학살되는 조선인 사건과 함께 인용되는데, ‘사건’의 ‘기억’을 마치 한 때의 추억으로 서사와 한께 과거로 매장시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는 행위에 내재된 폭력성을 들춰내는 것이다. 「칠레의 지진」은 1647년 칠레 산티아고에 발생한 대지진을 배경으로 하는 픽션이다. 수녀원에서 수녀가 임신함으로써 남자를 수녀원 정원에서 처형하려는 날 대지진이 발생한다. 이 엄청난 혼란으로 남자와 수녀인 여자는 수녀원을 벗어나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출산과 행복한 날을 보낸다. 그리고 지진이 끝나고 일상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성당 미사에 참석하게 되지만, 사제는 대지진이 부도덕한 타락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며 수녀원 정원에서 일어난 신에 대한 모독행위 탓이라 비난한다. 이 규탄행위는 성난 폭력으로 발전하여 두 남녀는 맞아 죽고, 갓난아기는 교회기둥에 휘둘러 머리를 박살내 조각이 나도록 내려쳐진다. 뇌수가 흐르고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람들은 현장을 물러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는데, 바로 두 남녀와 갓난아기의 두개골을 박살내 죽인 바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억 속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설은 정신적 외상이어야 하는 그 기억을 역설적이게도 ‘기쁨’이라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스트는 사건에 위장 플롯을 부여함으로써 결코 매듭지을 수 없는 사건을 어긋나게 함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사건에 다른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사건의 폭력을 망각하도록 하는 것인데, 작가는 이렇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더욱 비장하게 ‘사건’에 사람들을 빠뜨려 신체화 한다. 반면에 관동대지진시 난무했던 일본인들의 기만적 플롯인 “조선인이 공격해 온다.”는 서사는 후일 일본의 방송기획 프로그램을 통해 한 여성의 “옛날 하나의 삽화로 추억을 완결하듯” 등장해 ‘사건’의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역사의 한 사건을 기억, 증언한다는 것은 타자와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라 한다. 역사를 결정하는 저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견뎌내고 있는 낮은 곳에 몸을 두는 것이라고.
소설 ‘칠레의 지진’과 일본 방송 프로그램 서사의 공통점은 인간을 영유한 대지진이라는 사건의 폭력에 대해 인간 스스로 그 압도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사건에서 부정된 자신들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체성을 징벌한 기만적 플롯(신이나, 헛소문)이 행한 폭력으로서 사건 자체가 지닌 폭력의 기억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음이 하나 떠오른다. 어떤 기억 서사도 그 ‘사건’의 당사자에 포함될 경우 그 서사를 자명한 것으로 읽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명한 것으로 향유하고 있던 것이 모두 내팽개쳐지고, 의미는 희미해져 이해 불가능한 것이 되고,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어떤 서사에서 우리가 자명성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건’의 나누어 가짐이 아니라 한낱 이야기의 소비로 멈추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표상 불가능한 사건을 표상하는 것, 말할 수 없는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건의 말할 수 없음 자체를 증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어떤 주체의 의사와 상관없이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신체에 습격해오는 폭력적 ‘사건’인 역사의 ‘기억’에 대한 우리 인간의 언어인 서사적 한계를 사유함으로써,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 세계의 사람들이 나누어가지는 서사로 말해지고 써질 수 있는가의 진지한 탐구이다. 대체 어떻게 ‘사건’에 있지 않은 외부자인 사람들이 그 ‘사건’의 기억과 증언의 표현과 표상을 함부로 재단하고 정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리얼리티라는 그 터무니없는 재현의 온전함을 확신하는 신화적 기만은 역겨움이라 할 것이다. 역사의 기억과 그것의 재현을 위한 서사의 정의를 향한 긴요한 사유의 단서를 제공하는 저작이라 하겠다. 이 기억과 서사와 관련된 많은 논의가 이미 존재하지만 이 저술은 특히 그 ‘한계’를 냉정하고 날카롭게 파헤쳐 직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이 저술을 읽고 나면 아마도 여타 문학과 역사 읽기의 안목이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으리라 생각된다. (절판되었던 책을 이렇게 다시금 출간한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