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한 멜모스·아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파롤앤(PAROLE&)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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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사건 재현의 한계를 기억과 서사측면에서 성찰한 오카 마리의 저술 복간과 때를 같이해 리얼리티 문학에 비판적 시선을 던졌던 발자크의 대표적 두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회개한 멜모스><아듀> 두 작품은 발자크의 인간극에 속하는 세 개의 하위 연구(풍속, 철학, 분석연구)’ <철학연구>에 속하는 작품으로, 환상과 기억, 현실의 관계성과 그 재현 ()가능성에 대한 고찰을 거의 직접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소설이다. 오카 마리는 기억서사의 한계를 논의하는 한 축으로 발자크의 <아듀>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쟁이라는 인간의 가장 잔혹한 폭력행위와 그 폭력적 사건 내에 존재했던 인간 고통의 기억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재현성의 문제로 부상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물론 특히 역사 서술에 있어 극한적 대립을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이 아듀를 읽게 된 동기다.

 

1. 소설, <아듀(Adieu)>에 대해

 

발자크의 소설 모두가 인간극이라는 인간에 대한 전반적 통찰인 까닭에 그는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여느 과학적 연구를 앞서고 있다고까지 여겨진다. 때문에 읽는 사람들의 집중을 쥐어 채는 데 있어 달관의 경지를 보인다. 작품 도입부에는 필리프 드 쉬시 대령과 친구인 달봉 후작이 실패한 사냥을 거두고 이동 수단 하나 없이 지친 몸으로 낯선 황폐한 건물을 발견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단지 건물과 주변 풍경의 묘사에서 마주하게 될 사건이 비유의 언어로 촘촘하게 박혀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어떤 인위적인 손질도 닿지 않은 (...) 야생의 은둔지에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세상의 풍문이 이 안식처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아름드리나무들발치에 서면 인간사 희로애락은 가뭇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100쪽 에서

 

야생’, ‘막아주는 역할’, ‘사라진 희로애락등의 표현은 등장인물들의 속성이나 전개될 사건의 내용을 이미 함축 예시한다. 어쨌든 이러한 폐허의 풍경들이 매혹적 시정(詩情)과 더불어 몽환적 관념을 독자가 공유하게 하며 텍스트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특히 달봉 후작은 일찌감치 저주의 시선으로 바뀌어 그 집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데,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사는 궁전이로군.”이라며 망령들의 세계에 속한 미지의 여인이 스쳐지나갔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윽고 그 미지의 여인은 두 남자와 얼굴이 마주치자 달려가며 아듀!”라 말하고 사라져간다.

 

이때 필리프 대령은 풀밭위에 죽은 사람처럼 뻗어버리는데, 그는 패퇴한 전쟁의 퇴각 길에서 이별하고 이미 죽었다고 여긴 연인을 상기했음에 분명한 충격을 상징하는 장면일 것이다. 병석에 누운 필리프에게 달봉은 그녀가 실성한 방디에르 백작부인이라 전한다. 여기까지가 작품의 주요 도입부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는 영화감독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시작 장면을 가득 채운 전쟁터의 리얼한 재현을 통해 전쟁의 폭력성을 노출하였듯이 발자크는 작품의 중간에 나폴레옹 군의 러시아에 패퇴한 전쟁 중 하나인 베레지나 강 도하 전투를 재현한다.

 

허기와 갈증과 피곤과 수마로 빈사 상태에 빠진 병사들 (...) 최악의 지경까지 몰린 그 무리에 끝도 없이 떨어지는 포탄들은 그저 불편함이 또 하나 추가되는 것일 뿐이었다.며 극한 상황에서 눈 덮인 광막한 허허벌판에 자신들의 목숨을 잔혹한 무관심에 맡긴 채 아무 곳이나 누워 잠들어 죽음으로 돌진하는 3만 명의 불쌍한 군인들의 전경이 흐른다.  제아무리 전쟁의 참혹성을 사실에 근접하도록 재현하더라도 손가락 사이로 무수한 사실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발자크는 리얼리티한 재현이란 것의 한 실례를 보여주려 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대체 그것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적 반증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의적 주제를 담고 있는데, 그 하나인 전쟁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후대의 사가들은 발자크의 베레지나 퇴각 장면의 묘사를 칭송한 것 같은데, 이는 작가의 의도와는 아마 상당히 동떨어진 이해였을 것이다.

 

방디에르 백작부인인 스테파니는 당시 필리프 드 쉬시 중령의 정부(情婦)였으며, 그녀는 남편인 방디에르 백작의 종군에 동행한 비방디에르(vivandiere)’였다. 이는 군인 남편을 따라 부대에서 세탁, 간호 업무를 지원하는 종군 아내를 이르는데, 프랑스는 20세기 초에 이 관행을 폐지하였다니 여성이 이러한 성적착취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불과 100년 전이었음을 시사한다. 손에 닿을 정도로 근접한 러시아군을 피해 도주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혹한의 강을 건너야 하고, 필리프는 연인을 위해 마차를 부수고 잔해들을 그러모아 뗏목을 만들지만 생존을 위해 몰려든 병사들로 인해 가까스로 방디에르 백작부부만 승선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때 스테파니는 필리프에게 몸을 던지고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입술을 맞추면서 아듀!”를 남기고 떠나지만, 남편은 도하(渡河)중 강물에 떨어져 죽고, 그녀는 러시아 군대에 2년 동안 끌려 다니면서 비루한 인간들의 노리개로 착취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스테파니가 실성한 사람이 되어 오직 본래의 뜻을 상실한 아듀만을 소리내는 이유는 이 같은 전쟁의 폭력성에 기인한다.

 

 

여자는 그 엄청난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충실하게 재현됨으로써 과거가 현실의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차단, 철저하게 망각하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음을 신체가 자각했다는 의미이다. 오직 실성만이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것인데, ‘사건의 기억이란 그녀에겐 곧 폭력이며, 그것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그 자체임을 가리킨다. 소설은 이 폭력으로서의 사건을 통해 또 다른 주제를 역설하는데, 실성한 연인 스테파니를 전쟁 전 파리 무도회의 여왕이었던 바로 그 여인으로 돌리고자 하는 필리프의 욕망에 깃든 젠더(性化)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필리프는 그녀를 길들이기로 마음먹는데, 그것은 자기 정부의 본능에 대한 지배이며, 여성으로서의 복원에 대한 갈망이다. 필리프가 스테파니를 보호하고 있는 숙부인 의사에게 하는 말 속에 이러한 이기심이 드러난다. 그녀가 미쳤더라도 여자다움을 조금이나마 간직했다면 난 어떤 일이든 견뎠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만적이고, 심지어는 수치심도 모르는 그녀를 바라보자니,..”와 같이 지난날 자신의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서 아름다움을 간직하던 여성성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결국 스테파니를 죽이려 하지만 의사의 방해로 미수에 그치고 추방된다. 의사는 그를 신랄하게 꾸짖는데, 그러니까 당신에게는 오페라에나 나오는 그런 터무니없는 사랑이 필요했던 거군요.”라며 실성한 스테파니를 하나의 인간 존재로서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필리프는 고아(高雅)한 여성으로서의 스테파니를 잃을 수 없는 것이고, 의사 몰래 베레지나 강을 도하 하기 위해 이별할 때의 장면을 위한 대규모 재현 작업에 돌입한다. 이로써 재현된 장면은 리얼리티에 대한 발자크의 냉혹한 비판 의지였던 것 같다. 필리프는 19세기판 스필버그로서 행위하는데, 실상에 가깝게 하기 위해 운하를 파고 폭약을 터뜨리고, 눈이 내려 벌판을 덮는 계절과 당시의 시간까지 정교하게 맞추는가하면, 복식과 병사들의 남루한 상태까지 그야말로 실감나게 형상화한 것이다. 스테파니를 잠에 취하게 한 후 마차에 태워 재현 장소로 달려가 그녀를 깨우고 준비된 뗏목을 두고 끔찍했던 진상의 재현 속에 빠뜨린다.

 

스테파니는 생생하게 되살아난 기억 속 현장에 자신을 옮겨놓고 필리프를 바라본다. 순간 아름다운 얼굴에 화색이 돌고, 눈부시게 빛나는 젊은 여자의 광채를 되찾는다. 재현된 그 리얼리티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육체를 활기차게 살아 움직이게 한 것이다. 여자는 드디어 말한다. ! 필리프 당신이군요.” 그리곤 벼락을 맞은 것처럼 순식간에 축 늘어지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듀, 필리프. 당신을 사랑해, 아듀!”, 여자는 필리프 대령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둔다. 그녀는 말 할 수 없어 망각으로 지워버렸던 사건이 의식의 표면에 이르는 순간 죽은 것인데, 끝을 알 수 없는 사건의 흔적인 아듀라는 말만 남은 폭력적 사건으로서 기억은 완결되지 않는 채 하나의 정신적 외상으로 읽는 사람들에게 전이시키곤 소설은 종결된다.

 

이 소설은 몇 가지 고발을 하고 있는 것인데, 물론 전쟁의 폭력성은 주된 한 가지이고, 두 번째는 리얼리즘 문학에 대한 비판이다. 온전한 재현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리얼리티란 것이 엄청난 틈새, 사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정작 중대한 사실성들이 다 빠져나가고, 그럴듯함만 남겨진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여성의 젠더화에 은폐된 남성적 욕망의 이기주의적 시선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기억의 서사를 표상하는 문제에 있어 발자크는 재현의 과신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는 것이고, 또한 그 자체가 또 다른 폭력을 내포하고 있음에 대한 사유의 촉구였을 것 같다. 리얼리티라는 사실성 재현의 욕망에는 필리프의 그것처럼 항시 불순한 동기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경종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2. 소설 <회개한 멜모스>에 대해

 

이 작품은 몇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떤 환유(換喩)로서의 사유를 제안하는 것으로 갈음하려 한다. 발자크는 그의 인간극에 대한 보조적 참고서로서 일련의 생리학 시리즈를 썼다. 이 작품의 도입부는 이들 중 <공무원 생리학>을 연상시키는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그 신랄함이 가히 현대적이어서 비판의 대상 주체만을 바꾸면 그 의미가 손상됨 없이 그대로 전해질 것만 같다. 소설의 첫 문장부터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데 다음과 같다.

 

식물계에서 화초재배업자가 (...) 번식시킬 수 없는 희귀한 잡종을 온실 교배를 통해

새로 만들어내듯이, 사회계에도 문명이 빚어내는 희한한 인간종이 하나 있다.”

-회개한 멜모스, 첫 문장에서

 

희귀한 잡종이자 희한한 인간종에 대한 구체적 인물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는데, 악행의 손으로 자잘하게 가지치기되면서 (...) 참한 아내와 성가신 아이들에 둘러싸여 나무처럼 자란다.”, 한마디로 악행의 손길에서 나무처럼 자라는 불의하고 부도덕한 관료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그 인간종을 떠올려보라며, 덫에 갇힌 생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항상 돈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며, 선박 조타실에 못 박혀 있는 항해사보다도 덜 움직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고, 왜소하다고 할 만한 몸집을 가진피조물이다. 왠지 저절로 온갖 도덕적 규범으로 지탄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는가? 이러한 신랄한 언어로 악덕에 대한 대담성과 법망을 빠져나갈 교묘한 능력까지 갖춘 패덕한 인간을 사회적 생리에 만연한 덕에 출현한 생태계로 그려나간다. 이것은 소설의 사건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예비고찰로서 써 진 것인데, 특히 폐쇄된 공적 권력 조직에 일찌감치 소집된 젊은이들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어떻게 부패하며 재능을 소진하는 가를 오늘 한국의 정치검찰과 비교하며 읽어나가면 꽤나 흥미로운 읽기가 될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문명의 진정한 상처를 미리 내다볼 만큼 뛰어난 통찰력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고. 허튼 소리가 아니라 정말 믿어도 될 만큼 흥미로운 작품이다. 글자 조합에 절대 누설될 수 없는 비밀이 담겨있고. 단조(鍛造) 흔적이 역력한 캐비닛이 보이기까지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금융공무원이다. 금융공무원의 자리에 어떤 부패하거나 불의한 인간 무리를 대입해도 의미는 통할 것이다.  ‘멜로스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를 연상시키는 악마에 가깝지만 발자크는 환상론자가 아니기에 현실 감각으로 환상을 끌어내린다. 사실주의 비판자이기도 했지만 환상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자로서의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줄거리는 독서의 흥미를 위해 남겨놓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여기서 멈추기로 한다. 아무튼 꽤나 흥미를 돋우는 작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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