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 시대 - 거짓 문화에 빠진 미국, 건국기에서 트럼프까지 질문의 책 32
수전 제이코비 지음, 박광호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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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반지성주의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합리주의, 대중의 일반적 무지, 정크(junk)사상, 근본주의 등을 이용하여 그 편협성과 거짓말로 점철된 건국에서부터 트럼프 시대의 미국사회를 돌아본다. '사상과 이성, 논리, 정확한 언어를 황폐화시켜' 특정 집단이나 계급적 이해관계에 복무케 해왔으며, 여전히 그 근본적 양상들이 위력을 발하는 요인들을 분석, 비판하고 있다.

 

서 언 ; 반지성이란 무엇인가?

 

'반지성'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지성에 대한 반어로서 의심과 혐오, 그리고 두려움이 결합한 기이한 어휘다. 그런데 반지성을 알아보는 것이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자기 이익적 집단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 게으름이나 무지에 편승한 편협성의 토양에서 자라는 교활함, 사악함,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점이다.

 

지성을 혐오하는 반지성과 대중의 일반적 무지가 뿌리내린 미국사회의 역사적 토양을 읽는 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혹여 반지성주의에 침윤된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지성은 미국사회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뿐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현재 진행형인 양태이며, 이것이 정치사회적 퇴보는 물론 인간의 도덕적 역량과 문명적 퇴화를 재촉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질적 양적 후퇴로 이어지는 그 실재에 도사린 요인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더구나 미국이라는 강대국 대중의 무지는 물론 그 리더의 반지성이 다른 세계, 약소국에 특히 위험하다는 까닭에서 그 중요함을 가볍게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반합리주의 세계가 열린다." - P 336 에서

 

"디지털 환경이 추동하고 문자메시지와 트윗이 촉진한 언어의 황폐화"가 양산하는 가짜뉴스의 사례로 시작하는 서문은 "비디오 영상과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한 무지몽매의 대중문화와 공생하는 혼미한 정신의 신종 반합리주의로 악화"되는 오늘의 문화와 정치의 급증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을 지적한다. 이 위험이란 소셜미디어와 결합한 편협성의 증가인데, 이것은 견해가 같은 이들만의 집결로 편견을 강화하고, 그것의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편협성 충족의 공간 역할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오류와 거짓을 빠른 속도로 거리와 무관하게 확산시켜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아마 지금 바로 유튜브를 클릭하면, 많은 정치적, 문화적 동영상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없는 유언비어에서부터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사실과 다름이 드러날 거짓말,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데이터, 합리적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자신들의 욕구와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몰아 불의한 소음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대중의 무지를 먹고 사는 것이다. 실제적 오류의 간파는 기초지식과 비판적 사고력을 요구한다.

 

140자의 단문과 조금만 긴 문장이면 읽기를 중단, 회피하는 진지한 읽기의 쇠퇴, 줄임말의 난무와 심각한 문법적 오류투성이 문장,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러워하기 까지 하는 부끄러움 상실의 현실은 반지성이 활동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의 뒤나 캐는 화젯거리와 가십에 클릭이 모이고, 심각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무용(無用)의 것들에 손놀림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는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한다. 이에 비하면 지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반지성은 자기 이해라도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본 론 ;기독교 근본주의, 사회적 다윈주의, 빨갱이 좌익분자, 정크 과학과 사상 ..

 

18세기 건국기부터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반지성과 반합리가 사회적 주류였음을 주장하는 책의 저자 '수전 제이코비'"영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들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축적하려 애쓸 필요 없이 지식의 보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에 지적 추구를 무시하면서도 야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며 미국 건국기의 '유사 식민지적 종속성'이라는 당대 특징으로 반지성 역사의 포문을 연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가 열리자 전통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종교 문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믿음)적 신념을 파괴하는 지성에 의심과 혐오,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들의 근거지역과 흑인 노예와 무식한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부리는 대농장주가 중심인 남부지역 등은 연방정부에 의한 전국적인 공교육을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공교육의 심각한 불평등과 문화적 분열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남의 아이들 교육에 세금을 내는데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 지역(state)만의 종파적 교과서를 만들어 근본주의적 신앙을 위해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으며, 신이 4000년 전에 세심하게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과학적 문맹으로 생물학, 지질학 등의 과학은 물론 합리적 이성과 관련한 여하한 인문 사회적 통찰도 교과서에서 실리지 못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자연으로서의 인간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자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지적설계론이라는 사이비과학에 열광한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아마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범람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입각한 '적자생존의 사회선택'이라는 황망한 사이비 이론의 시작에 이러한 미국사회의 배경이 있었음에서 반지성의 그 적나라하고 견고한 뿌리를 보게된다.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 The Decent of Man에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바뀌면 환경 요인과 도덕적 사안이 자연선택에 우선하게 된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도금시대로 불리는 19세기 독점 자본가들과 빈곤의 만연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위니즘을 산업 자본가들과 대농장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사상적 토대로 제공한 사이비 과학의 전형이랄 수 있다. 즉 반지성이 사회를 잠식하고 오늘에도 재생되는 현실처럼 특정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거짓 이론의 끈질긴 생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W.부시의 뇌로는 예일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연줄이 없었다면(부시 가문의 부와 권력)

근처에도 못 갔을 것, (...) 노력 없이 얻은 특권...." - P 439 에서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이 질긴 생명력의 근간에는 이처럼 개신교 복음주의 근본주의자 집단이 놓여있다. 이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대중들(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믿음, 진화론의 부정)은 지성,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싸여있기에 반지성이 권력화되고 부를 축적하기에 훌륭한 기초가 되어준다. 이러한 사회의 바탕은 아이젠하워, 닉슨, W.부시로 이어지는 무식함과 개신교 복음주의 바탕의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급기야는 "상스럽고 무지를 숨기지조차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까지 한다.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골프장들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까지 지적 능력을 의심받는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 단문은 대중의 일반적 무지에 부응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패턴의 사용이라는 반지성적 성향의 증거이며, 이는 곧 대통령(국가 리더)의 스타일은 대중의 지식(지식의 부족)에 의해 형성됨을 의미한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근본주의 종교의 이데올로기와 정크과학이 결합하여 유독한 효과를 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코로나19에 대한 엉터리 의학적 권고와 처방의 난발, 대대적인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착용과 같은 확립된 과학 지식의 거부와 이러한 자기 결정에 대한 열렬한 정서적 확신은 반지성과 반합리주의의 전형적 위험의 표상이랄 수 있을 정도이다.

 

정크과학은 정크사상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자기계발이라는 반합리주의를 팔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유사식민지 근성은 그대로 이식되어 서점가를 누빈다. 이것이 잘 팔리는 이유는 늘 손쉬운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만큼 사유와 숙고라는 노력,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정크사상, 자기계발 따위의 책이 팔리는 사회라면 반지성의 적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허섭 쓰레기들을 쓰는 자들의 지적능력은 매우 높은데, 자신들의 필요 논리를 포획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곳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증거도 없으며, 수학적 논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와 인과관계도 구별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이따금 틀린 사실에 기초해 자신의 주장을 진실화 하기도 하는데, 이미 틀렸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를 악용하는 반지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반지성의 횡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빨갱이, 좌익분자라는 낙인찍기이다.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목을 조르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던 듯하다. 이를 그대로 이식하여 한국의 수구집단들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오늘까지 지겹도록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사회전체의 지성이 정치적 공격에 취약하게 한다. 애국주의와 국가반역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인데 반지성의 대표적 형상이라 할 것이다. 우파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반공 히스테리와 결합하여 자본과 기득 권력은 대중의 반지성을 구태여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 사회의 가속화된 문화적 대중성 추구는 '미들 브라우(middle-brow)'라는 일종의 지적 중간층을 해체케 함으로써 모든 지적 척도의 하향화를 재촉하여 전체 사회의 반지성, 반합리주의를 고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 어 ; 오늘의 미디어 - 반지성의 비옥한 토양

 

미국 백악관의 최고위급 정치인의 인터뷰 일화로 시작해야겠다. 그가 한 발언이 거짓말임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왜 그런 거짓 발표를 했는가고 기자가 질문했단다. ", 그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에요." 사실(fact)에 대한 대안(代案)이란 이 황당한 답변이야말로 반지성의 표상(?)이라 할만하다


소셜 미디어가 생활 플랫폼의 주류가 된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단문 메시지에서부터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와 같은 사진과 짧은 영상, 그리고 검색 엔진을 통한 텍스트의 무수한 링크 정보들, 이러한 것들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증식하고 있다. 누구나 쓰고, 게시할 수 있는만큼 그 모든 것들이 가치 있는 정보, 진짜 정보, 사유를 낳는 정보는 아니다. 왜곡과 거짓과 위선과 기만의 언어와 이미지들로 가득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진지한 사고와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이거나 망상일지도 모른다.

 

실제 독서 및 글쓰기와 인터넷의 텍스트 접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소셜 미디어에 장황한 비평이나 서술의 문장 따위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나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더구나 상업성 추구가 최대 목적인 대중문화의 폄하에 발끈하며 엘리트 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으며,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코흘리개 편집자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지성적 자기 검열의 책임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적 돌팔이 짓을 하며 그릇됨을 추궁하면 그저 견해가 다른 것이라며 일축하고 사실 증명의 어려움을 악용하기도 한다.

 

"그가 입을 열면 늘 인간의 지적 능력은 총량이 줄어들고 만다." 

- 1890하원의장, 토마스 리드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플랫폼만이 이런 형국은 아니다. 주요 일간 신문이나 이명박 정권이 기업자본가들을 위해 선물한 우후죽순의 종합편성 채널과 같은 TV역시 지적 측면에서 이미 품질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 있다. 산만하기 짝이없는 반사적 인포테인먼트가 주를 이루고 뉴스는 진위의 확인 없이 아니면 그만 식으로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정보나 가십, 뒤캐기 식의 화젯거리 중심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용하는 이들, 시청하는 이들의 분별 능력 없음이라는 무지(無知)에 터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TV만 틀면 한국인들의 지적 능력 총량이 줄어드는 형국인 것이다.

 

일 년에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예술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라는 것은 새삼스런 자료가 아니지만, 많은 지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독서가 지닌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얻어들은 자기 편향적 클릭의 정보는 편견과 무지를 확대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를 찾고자 두리번거리는 것에는 사유가 불필요하다. 그리고 발견한 텍스트에서 집단지성 덕분에 한 권의 고립된 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엮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짜깁기(remix)와 표절 생산이 판치는 이유이다.

 

베토벤과 비틀스의 음악을 모두 사랑할 수 있지만 그 둘의 음악이 같은 수준의 음악적 천재성을 의미하지 못한다. 심미적 감각과 이성적 사고 능력의 엄청난 차이를 무시하려는 마케팅적 발상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반지성은 항상 반합리주의와 함께한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다른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정말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정의와 지켜야 할 도덕가치는 무엇인가, 삶에서 지켜내야 할 진정한 안전과 자유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 반지성주의의 본질은 게으른 정신과 함께한다고 한다. 무지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늘 악덕이다. 오늘 나와 우리들, 이 사회의 주체들은 과연 지금의 오늘을 이끄는 가치가 옳은 것인지 반성적 사유를 위해서라도 이 한 권의 책 읽기를 권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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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관이 충돌할 때 하나의 근본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J.S. 밀 공리주의』에 대해서



삶이란 무수한 선택의 과정이며, 사회적 사건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연속을 요구한다. ' J.S.밀'의 직관주의처럼  "인류는 경험에 의해 행동의 경향을 익혀왔기"에 대부분의 일상적 선택에서 사람들 개개인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옳은 방향의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그 개인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 아닐뿐아니라 타인이나 사회라는 집단적 측면에서는 그른 행위가 될 여지가 있다. 특히 도덕관이 충돌할 때에는 어떤 도덕관이 보다 우위인가, 즉 모든 도덕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근본원리 혹은 법칙의 필요성이 절실해 진다. 두 옳음 중에서 현재의 인간 사회가 합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도덕기준의 '제 1원리'로서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계보를 잇는 실용주의자들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 이라는 '공리(utility:;효용, 유용)'를 주장한다. 즉 '행복이 도덕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하나의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한 것 혹은 유일하게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 것"이라는 의미이다.  J.S. 밀은 그의 저술 『공리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 (...)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같은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밀은 "긍정이 부정을 압도하고, 전체 삶의 밑바탕으로서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들, 바로 그런 만족의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 하는 것이며",  "만족하는 인생의 두 가지 주된 요소는 '평온(tranquility)과 흥분(excitement)'이라는 충분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행복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즉 사회효용의 극대화를 이루는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최대 행복 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행복은 쾌락(즐거움)이며, 이에더해 밀은 "유익이 곧 유쾌함이요, 장식이다."라고까지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도덕관만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도 충돌하는데, "더 바람직하고 가치있는 쾌락을 측정할 때 (...) 오로지 수량에 의존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며, "양과 질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쾌락의 질적 차이란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질적 우수함"이라고 질은 수량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결국 공리주의의 도덕 근본원리는 다수가 좋아하는 쾌락이라는 의미이다.



1. 공리주의에 내재하는 도덕적 한계들


(1) 만족 총량주의의 문제


개인의 공리와 다수의 공리가 합치하지 않아 다수의 쾌락으로 사건의 판단이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쾌락이 개인의 불쾌를 훨씬 상회하므로 도덕적 옳음이 된다. 여기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로 인한 양극화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사회전체의 부(쾌락)가 증대하지만 개인의 부는 감소하는 이 현상에 대해서 공리주의는 '옳음'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름'이지 않은가? 개인의 만족을 소외시키고 최대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2) 편의적, 직관적 도덕으로서의 문제


밀은 편의(expediency)란 "어떤 즉각적인 목적 또는 일시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유익함을 낼 수 있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이것은 "문명과 미덕 등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을 퇴화시킨다."고 비난하면서 공리주의는 결코 '편의적 부도덕한 도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무엇인가』의 한 사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망망대해에 조난당한 네 사람이 있으며,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이 없어 쾌락의 총량이 큰 선택으로 동료 한 명을 살해하여 식용하였다. 이 공리주의적 선택이 도덕적 올바름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아마 공리주의의 편의성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피살된 희생자 가족의 고통, 나아가 식인이라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문명적 파괴라는 인류전체에 대한 도덕적 상처 등 세 명의 생존이라는 쾌락이 인류전체의 고통으로 인해 최대행복을 최대고통으로 역전시키고 만다. 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편의적 부도덕성의 외피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3)쾌락의 성격이 지닌 문제


쾌락의 순수 잔여량 극대화가 도덕의 근본원리라면 자유를 구속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의 손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공리주의 도덕기준에서 옮음이며, 노동 착취를 통해 자본가의 부의 독식 또한 옳음이 된다. 행복의 총량주의에 기초한 공리가 뉴노멀, 새로운 가치와 표준을 창출해야하는 오늘의 인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퇴화와 소멸의 도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인간을 최대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와 같이  공리주의는 무수한 도덕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한 진정한 도덕 근본원칙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2.  진정한 도덕율 제1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나?


J.S.밀은 그들의 도덕율 제1원리인 공리와 충돌하는 도덕가치들에 대한 비판과 폄하를 위해 그의 책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미덕',  '정의',  '자유',  '안전'에 대해 이들 모두는 '행복(쾌락)'의 종속적인 도덕가치에 불과하다거나, 그 도덕 가치의 자기 제재 내용이 애매모호하며, 수학적 논증에 의문이 있다는 식이다.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해서는 혹독할 만큼 도덕원리가 될 수 없다는 증명에 많은 지면을 채우고 있다. 


아마 '존 롤스'가 그의 책 『정의론』에서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옳음의 우선성' 논리에 의거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이라는 도덕의 기본구조에 대한 이해를 상기한다면 왜 쾌락이 아니라 정의가 도덕의 근본원칙, 도덕 최고의 기준이어야 하는지 오랜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덕은 결코 쾌락과는 무관한 심리적 동인을 지닌 도덕적 가치이며, 안전(safety, security)은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매순간 살아갈 수 없는 중대한 가치이다. 만일 안전이 상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면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부인되고 만다. 안전의 욕구는 절대적 욕구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작금의 세계에서 안전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쾌락, 최대행복 이상의 논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무리 ; 2020년 오늘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수구집단과 진보집단은 저마다의 도덕관을 들이밀며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시민을 설득, 자기 집단화하려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집권세력이 되겠다는 권력의 욕심이 있겠으나 차치하고, 순수한 도덕적 대결로 좁혀 이 사회에 들끓는 갈등 이슈들을 보면, 그 기반 논리, 혹은 표면적 주장에는 자신들의 믿음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잣대가 있다.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 자녀의 군복무 의무에 대한 시비, 위계를 이용한 성 추행 또는 성 폭행에 대한 시비, 국가적 재난에 따른 재난지원금 지급이나 향후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시비의 근저에는 명료한 도덕관이 있다.


거대도시 서울의 시장이 직원 성추행 고소일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과 성추행 인과관계의 진의는 논외로 하고, 장례와 관련하여 그 형식에 대한 갈등에서 진영마다 내세우는 도덕적 잣대의 다름에 촛점을 맞추어 보면 우린 어떤 결정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오랜 헌신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의 증대,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행정적 수완등 그의 공적 행적에 마땅한 형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인의 미덕과 생명의 소실이라는 안전이라는 도덕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고소인인 성추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의, 즉 공평성에 근거한 인간존엄의 도덕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어떤 도덕관이 더 우월적 도덕가치를 지니는가? 


한 인간의 죽음과 성적 추행이란 사실에서 한 사회가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미래를 낳는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성추행 피해 주장자를 위로하는 것이 정의인가? 무엇이 우위인가? 전체 쾌락의 크기로 도덕적 우위를 결정하는 공리주의자는 애도 집단과 미투 집단의 수를 비교해서 많은 쪽이 옳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와 같은 인간존재의 서사성이라는 삶의 이야기, 즉 우리 공동체가 써왔으며 쓰려고하는 서사축에 무게를 두게되면 우리가 오늘 어떤 이야기, 어떤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면 될 것이다. 망자를 두고 시비를 가리는 것에 외람됨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여전히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행동의 경향일 것이다. 이 직관적 도덕율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도덕원리이다.


도덕율의 근본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은 그 사회의 합의이다. 밀이 비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칸트의 도덕의 보편적 제 1원리인  "그대 행동의 바탕이 되는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발아들일 수 있는 보편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는 정언명령을 새기면서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합리적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 법(法, 規則, 制度) 아니겠는가? 도덕이 법에 물어야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에 거북한 흥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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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의 말 - 이 말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
김연숙 지음 / 천년의상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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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책은 그것과의 적정거리를 둘 수 없을 때가 있다가슴에 쿡 들이미는 육화된몸의 언어들이 발산하는 헤아릴 수 없는 의미들 탓이다토지의 인물들이 토해내는 켜켜이 체득된 언어들을 화두로 하여 세상사람관계들을 새삼스럽게 바라보고 이해케 하는 저자의 반추로 다져진 곡진한 이야기들은 그대로 좁아터진 내 이해 공간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 틈새로 깊숙이 스며든다.

 

"어 가자간장 녹을 일이 어디 한두 가지가산 보듯 강 보듯가자! "

 - 토지』 6권 370

 

언젠가부터 책을 읽기위해서는 안경을 벗어야 하고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시금 안경을 써야하는 노안이 저자 김연숙 교수처럼 내게도 찾아왔다이 현실을 "세상과 다시 관계 맺으라는 신의 명령"이라고그래서 "지금껏 바라보던세상 모든 것들과 다시금 거리를 조정하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이해는 그대로 내 이야기가 된다가난한 살림의 어미와 여동생을 두고 독립 운동을 떠나며 가족에 대한 연민으로 만주벌판을 향한 발걸음을 차마 떼지 못하는 석이를 향한 관수의 말에서 비롯된 배움의 사유이다이 호기로움의 말집착을 벗어나 새로운 거리 감각을 지닐 줄 알게 되는 담대함 앞에 또 하나의 산 언어를 배운다.

 

"초조함은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게 한다. (...) 성급한 해결을 원하는 

조바심이 아닌 어떤 것을 해결책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 (...) 

생각한다는 것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지름길을 믿지 않는 것이다. ...반추하는 것, ...에움길로 걷는 것, ...

충분히 주변을 살펴 보는 것, ...통찰하는 것이다." - P 113 에서

 

이렇게 공감의 문장들을 열거하다보면 책을 모두 베껴야 할 성싶다나에게 스며드는 말,질문하는 젊은이를 위하여,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3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이 책에서 노화가 한창인 내가 '젊은이를 위한()의 글들에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빠져 든 것은 어쩌면 여전히 삶의 미숙함에 허우적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아니 여기서의 '젊은이'는 '세상을 이해하고 배우려 하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련다대체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왜 지금껏 마치 전방만 있다는 듯이 급하게 질주하기만 했었나주변을 보지 못하는 편협과 외곬조바심에 이은 성급함어쩌면 삶 내내 정말의 생각이란 것을 하기 했었나를 자문하게 된다이러한 감상은 철새의 날개짓에 경외의 감탄을 쏟아내는 토지의 문장에 가닿게 한다.

 

"어중간히 눈 밝은 자들이 큰일이라. ... 순결한 마음 순박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리 장천을 나는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게요." 

토지』 7권 274

 

결과에 맞추어진 삶의 태도가 아니라 과정자체에 정성스런 날개짓을 하는 삶의 방식몸에 새기는 그것이 곧 배움이며 삶의 영원한 태도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배움의 이야기는 여기서 그쳐야 하겠다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야말로 '스며드는이야기를 놓칠까 우려되니 말이다일본 홋카이도 탄광에 강제징용 당했던 이가 탈출하며낯선 일본인 할머니로부터의 도움을 받으며 그이를 묘사하는 문장은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 중 으뜸"이라는 '공감'의 의미를 온 몸으로 느끼게 해준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는데 마음속으로 늘 울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토지』 20권 154

 

인간과 인간이 이어져 있음을 증명하는 이 말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할 줄 아는 능력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지금 우리네 모두에게 요구되는 유대와 연대의 요구성으로어두워졌던 눈을 밝게 해주는 듯하다옮겨 적고 싶은 문장이 한 둘이 아니다이제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와 삶의 태도를 요구하는 그런 분기점에 도달해 있다노동가치의 재정의를 비롯해 자본주의적 무한 욕망에 이르기까지 모두 변화되어야 하는 그런 지점에그런데 사람이 단지 비용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고모든 사람들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들은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라는 비정규외주계약다단계 하도급이라는 방식으로 자본이익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하늘땅을 보믄 살아볼 만한 세상인데 우째 사람들 맴이 눈비겉이 질척거리는지 모르겄다."

토지』 10권 417

 

세상의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들하지만 우리는 자주 우리와 함께 있는 사람우리 뒤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아니 보지 않으며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조차 듣지 못하고듣지 않으며그들의 죽음을 통해야만 겨우 볼 따름이라는 말은 위협과 폭력에 시달리던 경비원 죽음지하철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던 청년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무엇을 보고 깨우쳐야 하는지를 생각케 한다사람이 사람이 아니게 되는 공포가 지속되는 오늘우리의 사회그리고 나와 너인 우리들의 책임임을 통감하여야 함을.

 

이 책의 띠지에 써진 문장으로 마쳐야 겠다. "'설움이 왈칵 솟는 삶'을 용케 살아내는 이들에게", "'박경리의 말'이 전하는 '인간의 말'"이라는 문장만큼 이 책을 잘 설명할 수는 없기에 말이다감각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다고 오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말처럼 이 책은 어떤 사태를 현실화하는 시선을 갖추게 해주는 그런 여정이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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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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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비가시성'에 대한 담론은 그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갈퉁의 구조적 폭력,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 지젝의 객관적 폭력 혹은 사회적-상징적 폭력 등으로 정의되면서 무수한 서사를 이루어왔다. 아마 철학자 '한병철'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이 이들의 인식과 다른 지평에 있다면 표제가 시사하듯이 '위상(位相)'이라는 공간의 상대적 관계성으로 상징되는 어떤 현상이나 상황, 사물간의 관계성, 즉 타자로부터 자아로, 외부에서 내부로, 적에서 경쟁자로와 같이 물리적 공간의 이동에서 폭력의 은폐성, 비가시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결정짓는 것, 즉 폭력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또는 폭력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경계에 '사회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성과 긍정성'이 놓여있다. 즉 외부로서의 타자가 자아에 침입할 때 그것에 대한 자기 내부의 반응에 따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면역학적 반응에 따라 법을 초월한 권력으로서의 주권 사회와 규율과 금지를 통해 지배하는 규율사회는 '부정성', 그리고 오늘날 과다와 과잉의 산만성과 자기 소진에 시달리는 성과사회는 '긍정성'으로 설명된다. 폭력이 가시적일 때, 이를테면 갈등과 적대관계 속에서 자기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가 자아에 침입하고 침투하여 굴종과 예속, 죽음을 요구하는 폭력의 작동방식은 외부화되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즉 부정성은 외부적이고 전시적이며 지배와 억압이라는 타자 강제의 산물이다.

 

이와달리 면역학적 부정성이 사라지고 긍정성만이 남은 오늘의 성과사회는 명령하는 타자 없이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는 사회이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끊임없이 더 많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강박에 시달리고 자발적인 자기 착취에 마침내 소진되어 우울증에 휩쓸려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타자라는 침입이 존재하지 않기에 면역학적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긍정성의 사회이니, 내재화된 폭력이 보일리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듯 '성과사회'의 속성들을 해독하여 21세기 오늘에 대한 진단을 하는 저자의 주장에 거시적 견지에서 이의의 여지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폭력의 미시 물리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긍정성, 투명성, 대량생산되는 미디어, 끊임없는 접속적 연합적 관계의 분열증적인 리좀, 그리고 지구화'가 내면화시켜, 직접적 의식이 불가능한 비가시성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과열과 과부하로 시스템의 파열을 목전에 둔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태도에 강력한 반성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할만큼 빼어난 비판적 통찰력에 몰입하게 한다.

 

왜 지금의 세계, 사람들이 면역학적 저항을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왜 타자의 침입에 반항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될 것이다. 아마 오늘의 사회를 '과잉의 시대'라 일컫는 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극도의 과잉생산, 과잉 성과, 과잉 소비,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정보 (...), 비만은 내 쫓을 지방이 없으며 다만 줄 일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동일한 것은 긍정적이다. 동일한 것에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이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며, 무한한 자기 소진만을 촉발한다. 긍정성의 폭력이 곤혹스러운 것은 이처럼 내재성의 테러, 부정성이 없는 폭력이기에 효과적 방어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확산 방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제일 준칙이 '투명성'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투명한 정보와 실천 방안을 통해 국민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과 방역의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모범적 사례로 국민적 자부심까지 안겨준 정책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투명한 사회, 이 긍정성의 사회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문턱이라는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전면적 투명성이 장악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까? 궁극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획일화되고 이질성이 제거되는 양상이 드러날 것이며, 정치적, 기업적, 사적 비밀이라는 개체의 존엄성과 같은 배타적 공간이 들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기능화되고 기계적, 수치(數値), 노골적인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시화의 과정 속에 던져 넣으려는 강박은 외설적이다." 이것은 자유와 통제가 하나가 된 자기 감시의 저항할 대상 없는 폭력으로 몰아 넣는다. 그것은 고통의 늪이 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를 이보다 철저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더해, "동일한 것의 무더기에서,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서 태어난다."는 새로운 언어 폭력의 실체인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스팸화, 일말의 정보적 가치도 없으며, 소통적이지도 않은 쓰레기 더미는 자아의 비대화와 함께 공허한 커뮤니케이션만을 낳는다. 타자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그러나 진정한 타자는 없고 소비자와 구경꾼의 무관심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자발적 전시의 강박이란 이 과도함은 산만함과 지각의 둔감함을 재촉하고 정작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존재의 결핍"이라는 진단에서 '미디어 무더기 시대(Mass-Age)'의 동영상 속, 발가벗음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파괴된 경제적 관계를 읽는 것은 이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모든 것은 "더 열광적으로 시장의, 탈코드의, 탈영토의 운동속으로 뛰어들고",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행되도록 추동할 뿐이다. 폭력의 내재성은 정면으로 싸울 상대를 소멸시킨다. 전지구적 차원의 과잉 가속화는 지구라는 시스템의 전소(Burnout)상황이 되어서야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루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기 착취적 관계가 우울증이란 병리현상을 오늘의 사람들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피한, 아니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마침 코로나19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 긍정성, 과잉의 욕망이 휩쓰는 비가시적 폭력을 잠깐 가시권역에 드러내준 자연의 선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성과사회라는 오늘의 진단 속에 내재한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성의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마비된 우리네를 차갑게 깨워댄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비판적 통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성과사회라는 오늘이 면역학적 저항이 부재하는 자기 관계적, 자타의 동일성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이다. 21세기 오늘, 규율사회,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암약하는 사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책은 칼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푸코, 지라르, 들뢰즈에 이르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터 잡아 면역학적 부정과 긍정성에 기초하는 독창적 폭력의 실체 해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모두에 대한 비판 배경을 옮길 생각은 없다. 다만 시대착오적 사상이라며 아감벤이 여전히 면역학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과연 오늘의 사회가 오직 자기소진에만 매달리는 성과사회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렇게 오늘의 사회를 단절적으로 면역학 전후의 시대로 명쾌하게 분리,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획일화된 규명이 아닐까?

 

"아감벤은 주권사회도, 규율사회도 지나온 사회,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 부정성의 형상을 긍정성의 사회에 (...) 잘못된 투사로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 P 99 에서

 

한병철이 아감벤을 이처럼 비판하는 것은 성과사회는 온통 긍정성의 사회이며, 결코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이다.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은 오늘의 사회에 존재치 않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오히려 오늘날의 폭력은 합의의 순응성보다 이의의 적대성이 여전히 주가 되는 사회이지 않은가? 아감벤이 성과사회 특유의 긍정성의 폭력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부정성의 폭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배와 영광이 자본의 내부공간으로 옮겨왔다고 사회가 빈틈없이 자기착취만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과 법을 분간할 수 없는 지점의 사태가 더욱 극명하게 대두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미디어 속 스펙터클의 가상 속에 몸을 숨기는 정치, 속이 텅 빈 공허한 내용 없는 정치"의 현실이 물론 현존하지만, 권력과 지배의 형태는 달라졌으며 보다 큰 정치 또한 실재하고 있음을 오늘 한국 사람들은 경험하고 있다. 즉 부정성의 폭력과 긍정성의 폭력이 상존하고 있음이다.

 

지나치게 긍정성의 폭력만 상정할 경우,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개인에게 몰아 넣어 권력화된 것들, 사회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치 못하게 하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가치와 표준의 창출을 위한 시험 무대에 서있다. 진정 패러다임의 전환, 과잉의 성과사회라 표현되는 자기 소멸적 시스템의 전환을 화급히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진다. 무한 욕망의 무한 긍정,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케하는 성과사회의 내재적 폭력,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이 도발적인 저술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 불가능한 무한성의 환상적 삶에서 우리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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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PIKETTY'자본과 이데올로기- with Essence Book

 

 

'토마 피케티'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본책과는 별도로 에센스 북(Essence Book)이 발간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긴요한 참조 문서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던가 삼원주의, 다중엘리트체제, 사회토착주의, 보편적 자본지원 등의 비교적 낯선 용어들에 대한 핵심 개념의 설명,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제학자 '이정우' 전 경북대 교수의 해제, 그리고 본문 내용의 참조 도표들과 그에 대한 설명이 있다.

 

피케티를 일약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돋움하게 했던 전작인 21세기 자본"도래하는 21세기는 불평등이 커지는 '세습자본주의'로의 회귀"라는 우울한 전망이었다. 특히 자본수익율(r)이 경제성장율(g)보다 높아지는 것, 즉 자본/소득 비율(일명 피케티 비율)이 높아져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명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불평등의 크기와 변동 추세를 분석했던 것에 이어 자본과 이데올로기'불평등 체제의 역사와 정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세운 다분히 정치 사회적인 분석과 대안적 모색을 중심으로 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그 구조적 형태나 논리에 있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담론과 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문제의식의 제기이며, 이에대한 경제적 지표들과 통계 및 사회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를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일련의 여정이다. 여기에 소유권을 사회적 안정의 핵심적인 필수조건으로 옹호하는 '소유주의'와 사제, 귀족, 노동자(3신분)의 세 기능으로 분할되어 작동했던 '삼원사회(三元社會, Societe ternaire)'가 오랜 역사의 기간 인간사회의 체제였음과, 21세기 자본주의 오늘의 학력 엘리트와 자산 엘리트의 유착 메커니즘인 '다중 엘리트 체계'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불평등주의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모습 등 정치 사회적 통찰이 더해진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이 출간된 1867, 영국의 소득분배가 최악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역사적 아이러니만은 아니었으리라.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마르크스가 주장했다면, 피케티는 '불평등의 역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의 망라를 통해 부의 분배가 왜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따라 불평등이 왜 심화 또는 축소되었는지를 규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가공할 노고의 결과물이 곧 자본과 이데올로기이다.

 

이정우 교수가 피케티의 정치경제적, 나아가 인류사회적 기여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듯이, 불평등의 축소를 통해 더불어 사는 인류사회를 염원하는 어떤 소명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전 지구적으로 기존의 생활양식을 바꿀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좋던 싫던 새로운 시대를 마주해야 하게 되었고, 우리 한국사회 역시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성장의 논리는 어불성설이 되었으며, 긴급구호와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마련과 같은 생존 정책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었다. 한국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은 피케티가 예시하는 20세기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축소하고 경제의 실질성장율 증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서의 성공적 정책이었음과 마침 그 궤도를 같이 한다.

 

불평등주의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대안은 일견 급진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참여사회주의'를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기업 내부 권력의 분유를 확대'하고 '누진세 정책을 적극적 시행'하여 '사회적 소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또한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 '보편적으로 자본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소유집중과 자본의 순환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나아가 초민족적, 초국가적 규제를 시행하기 위한 '금융자산의 소유에 대한 범세계적 등록 강제제도'의 도입 등은 분명 점차 심화되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요구하는 코로나 팬데믹은 어쩌면 도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이러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류 역사의 대전환적 운명인 것 만 같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코로나19 사태와 이후 전망에 대한 프랑스 르몽드 지에 올린 피케티의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실증적 경제 분석을 토대로 한 사회과학적 성취의 최고 산물이라는 표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시대의 역작이라 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계적 신질서의 창출을 위해, 인류의 공존을 위한 더할나위 없는 통찰과 제안으로 가득한 이 책은 그의 전작의 명성을 훨씬 능가한다고 감히 말해도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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