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 2002-2015 이성복 시론집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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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花序)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으로 순우리말은 꽃차례라고 한단다. 무한(無限)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밖에서 속으로 피는 끝없는 실패의 형식이라는 의미에서 유한과 다른 추상과 거룩함의 방향성을 지시하려는 의도인 듯싶다. 이 시론집은 470개의 응축되고 예리하게 벼려진 생각들의 에피그램 모음으로 구성되어있다. 이성복 시인의 대학원 시 창작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이 개개의 에피그램들이 시()란 어떤 언어로 발설되어야 하고, 무엇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시란 무엇인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삶과 시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함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된다.

 

어쩌면 시()란 우리네 삶의 진실한 목소리, 과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은 일상의 모든 몸짓과 말 그 자체 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시인은 시의 에너지원은 세속이예요.”라고 말한다. 일상에서 잡생각은 시에서 진실이고 [...] 우리가 쓸데없다고 버리는 것 안에 우리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있어요.”라는 말처럼, 시는 거창하게 인간의 운명을 얘기할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냥 부엌에 숟가락 몇 개인지 쓰는 것이 곧 시라는 말이다.

 

뭐 좀 있어 보이는 소리는 다 헛소리예요. 절실하지 않으면서 쥐어짜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사기 치는 거예요.” - [언어-64], 33

 

인간 삶이란 것이 뭐 특별히 대단한 것이겠는가? 그러니 시로 개똥철학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저 사랑하고 일하고 여유가 있으면 남 생각도 좀 해주는 게 전부인 것을, 헛소리란 늘 자기 내면에 가까운 것이고, 뭔가 욕심내어 꽉 잡고 말하면 빨리 지치듯, 손에 힘을 빼는 것, 그것이 곧 시요, 삶의 진실이라 말하는 것일 테다.

 

책은 시론(詩論)’의 정수(精髓)들을 말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이는 곧 우리네 삶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태도로 읽어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속에 철학은 저절로 품어진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어느 쪽을 들춰도 이 말의 의미를 곧 발견할 수 있다.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수록되어있는 신문은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매일 읽는 그녀가 있다. 그저 일상의 한 풍경이 있을 뿐이다. 인간 삶의 실 면목 전체를 본 듯한 인상이 남는다. 그러면서 묻는 듯하다. 당신의 삶이란 뭐 다른가 하고.

 

매일 아침 그녀는 침대에 반쯤 누워

신문을 읽는다 매일 아침 그녀가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데도 그녀가 모른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기 때문이다

.... [中略] ....

그녀의 굵은 허리는 점점 아래로 깔리고

콧등까지 내려온 안경이 헐겁게 떨어질 때,

문간에 내놓은 음식 쟁반처럼 그녀의

얼굴 위로 구겨진 신문지가 내려 덮인다

 -신문,래여애반다라,2013.1 문학과지성사

 

시의 언어, 대상에 대해서, 시와 시 쓰기, 시와 삶의 관계성에 대한 오랜 통찰의 언어들 무엇 하나 소홀할 수 없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어 감히 어느 한 구절을 선택하여 말하는 것은 수많은 진실을 누락시키는 꼴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럼에도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선각(先覺)과 같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내 애기만 하려 하면 과장이 되고, 말에 힘이 붙지 않아요 [...] 시는 남 얘기를 통해 자기 얘기 하는 거예요.”라는 시의 대상에 대한 아포리즘은,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곳에서 모든 사연을 지워버리고 그리고로 시작해보세요 [... ]우리의 참모습은 그리고 이후예요.”라고 시는 일단 모르는 데서 시작할 때 진정한 시가 됨을, 그리고 삶의 관계에 이르러 자기 안에 아무것도 없어야 들을 수 있어요. 귀는 평등성이에요. 작가는 듣는 사람이에요. 안 들으면 안보여요. 소통이란 내 말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 남의 말을 듣는 거예요.”에 도달함으로써 시는 자기 머릿속에서 꺼내는 말이 아니라 자기한테 하는 말이어야 함을, 그래서 불리하고 불편한 말이 되고 그게 곧 진실의 목소리임을 깨우치게 한다.

 

시 쓰기는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해서 진실을 밝히는 거예요. 혹은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기와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예요.” - [-212], 86

 

시가 안락하고 위로를 말하면 그건 분명 거짓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는 것이고, 마지막 표정 하나 얻기 위해 인생 전체가 걸려있는 그런 헛소리에 가까워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는 착한 소리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소스라치게 만드는 귓속에 들려오는 쌍욕처럼 위태롭게 만드는 혼잣말이며, 쓰는 사람 자신을 겨냥한 살기(殺氣)가 서려있어야 하는 것이라 말한다. 진실은 늘 불편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외치는 글들이 있다. 아마 헛소리이고 거짓말의 맨 얼굴일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을 돌아보게 한 구절이 있는데, 남들에게서 내가 비난하는 것은 내 안에 다 있어요. 그걸 잊어버리면 자기한테 속는 거예요.”라는, 아마 이 절대적인 진실의 목소리를 수시로 잊어버리는 망각증상의 환기였다. 시는 자기 의심으로 시작하고 그 의심으로 끝나야 하는 것, 자신에게 불리한 것에서 진실은 어슴푸레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니까. 어떤 말이 자기 대신 남을 베기 시작하면 안 좋은 말이에요. 하지 마세요.”, 내가 진실이라 내뱉기 시작하면서 그 진실이란 것에는 거짓이 함께 따라 들어오고 있음을 보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된다.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는 못된 말을 던지곤 그것이 곧 자기를 향한 말이었음을 깨닫는 것처럼 결코 시와 우리네 삶의 언어는 남을 향한 것이 아님을.

 

무언가를 볼 때는 항상 그것의 초라함과 속절없음을 보도록 하세요.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 [대상-112], 51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언어일 때 시가 됨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가 줄곧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향해 있었듯 시인 고유의 문학관일 것이다. 시는 이처럼 밑바닥에 인생이 있어야 하고, 남과 세상의 사물, 사건을 듣는 것이며,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당연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임을 배운다. 남을 향한 비난과 살벌함을 담은, 윤리나 이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그것이 천박한 포르노와 다르지 않음을, 때문에 시는 이것들을 대상으로 삼을 때조차 에로티시즘으로 하여야 하는 까닭을 또한 배운다. 보여준다고 다 보여주는 것도 아닐뿐더러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힘이 사라져버림을.

 

시의 대상(對象), 시작(詩作)과 삶의 관계를 모두 읽을 수 있는 이 시론의 일례로써 다음에 인용하는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수록된 그날의 일부분으로 소회를 마무리해야겠다. 이 시론집은 엄숙하거나 난해한 말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한, 다시말해 이성을 쥐어짜낸 말들이 아니라 그 이전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써진 언어들이다. 그래서 시를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보다 가까이 시로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쓰는 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리라 여겨진다.

 

.......... (前略) .........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前方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驛前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未收金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愛人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그날, 1992.1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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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1-17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애독한 책입니다.^^

필리아 2024-01-17 14:5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성복 시인의 낮은 곳으로 향한 시선을 좋아한답니다.
 
밝은 밤 (특별 한정 에디션)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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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풍부한 서사가 있는 소설을 읽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기 때문인데, 아마 나도 모르게 외로웠었는가보다. 짧은 소설들을 피해 비교적 호흡이 긴,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길지않은 작품을 고르다보니 익숙한 최은영 작가의 4세대에 걸친 여자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의 화자(話者) ‘(지연)’는 바닷가 할머니가 계신 희령이란 곳에서의 열 살 무렵의 추억을 더듬는다. 어린 자신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마음을 열었던 할머니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하는 지연은 새로운 직장인 천문대의 근무를 위해 희령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지연은 서른두 살이다.

 

지연은 결혼을 파탄으로 몰아대곤 이유를 지연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 외도에 대해 죄책감이라곤 없는 남편과의 이혼을 자기 존재가 부정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듯하다. 희령으로의 이동은 이러한 존재박탈이라는 자기부정의 고통을 해소하려는 삶의 분투이기도 하다. 지연은 아파트와 마트에서 수차례 할머니와 마주치지만 할머니가 다가와 아가씨 내 손녀를 닮았어, 이름이 이지연인데라는 조심스러운 인사말이 오기까지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그녀를 이끄는 무엇이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태도는 희령이란 장소가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조금씩 열리는 마음의 문과 함께 희령이 곧 지연으로부터 거슬러 세() 세대 여인들의 기억의 뿌리, 그네들 삶의 역사를, 살아갈 용기를 품고 있는 장소로 드러남으로써 모순은 와해된다.

 

이 어색한 만남 이후 조금씩 할머니에게 마음을 열며, 할머니 영옥이 들려주는 지난 삶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증조모 삼천이, 증조모의 벗인 새비 아주마이와 그녀의 딸 희자, 그리고 새비 아주바이, 증조부, 고조부, 피난길의 안식처가 되어 준 명숙 할머니까지,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 땅에 서린 곡절의 시간을 관통한다. 어머니와 딸 사이의 사랑과 몰이해, 강요와 속박의 굴레를 체념처럼 껴안고 살아야 했던 증조모, 할머니, 엄마 세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지녀야만 했던 여자들의 삶의 방식, 그리고 그 속에서 생의 유일한 믿음이 되어주었던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여인네들의 무한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드넓은 강처럼 유유히 흐른다.

 

39년생인 할머니는 개성 태생이다. 할머니의 엄마인 증조모가 들려준 할머니의 기억과 그녀가 간직한 한 장의 빛바랜 사진 속 증조모와 그녀의 친구 새비 아주마이의 모습, 증조모 삼천과 새비가 주고받았던 한 묶음의 편지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의 지연에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 삶의 태도와 방식의 길이자 빛을 뿌려준다, 그것은 전쟁 전 구습에 매여지내야만 했던 여인네들의 신산한 고립과 고통의 이야기들이며, 전쟁 속 피난시절의 여인들만이 나누던 마음 깊이 깃든 애정의 순간들이다.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사회의 냉혹함과 인간들의 폭력성, 생존을 위해 병석에 누운 엄마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증조모 삼천의 이야기가 그녀의 고통에 무관심과 백정을 구원했다는 보상심리로 일방적 권위만 강요했던 증조부의 좁아터진 이기심과 갈등한다. 또한 전쟁 후 기만적 중혼(重婚)으로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던 할머니, 허겁지겁 삶의 도피처로 결혼을 했던 엄마의 체념적 이야기와 더불어, 그런 엄마조차 딸에게 남자의 바람조차 여자의 태도에 있다는 근거없는 뒤집어씌우기가 곤혹스럽게 현재의 이야기로 줄기차게 이어진다. 이것은 현재를 사는 지연의 이야기들과 그 속살을 교환하기 시작하는데, 지연의 언니 정연의 어린 죽음으로 고통을 겪던 엄마 앞에서 지연 자신의 슬픔은 발설되지 못한 채 심연에 묻어두어야 했던 고통이 되었음과, 아마 이로부터 비롯된 모녀의 감정적 충돌이 여자의 삶에 씌워진 굴레의 서로 다른 이해로 변주되어 여자의 삶이라는 전체적 성찰이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읽으면 자칫 여성주의의 소설로, 남성의 가부장과 유교적 권위주의의 비판으로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이러한 범주에 갇힌 읽기를 거부하는 작품의 면모를 읽을 수도 있다. 삼천의 남편인 지연의 증조부는 표면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너그러운 시선을 보이지만 정작 아내에게는 무관심과 무시로, 자기 가계(家系)에 몰두하는 인간이니 위선적 인물로 비판을 피할 수 없지만, 증조부의 친구인 새비 아주바이로 등장하는 남자는 어떤 경우에도 남위에 올라가서 주인 노릇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거야.”처럼, 배려와 약자인 여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보내는 인물이다.

 

또한 증조부를 설명하는 증조모의 말 속에도 남성의 권위적 표시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의 품성, 인격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사람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며 처럼, 그는 자기 자신을 평생 몰랐던 자기 무지와 성찰적 인간이 아니었음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현재의 지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천문대에서 그녀가 수행하는 데이터 정리에서 오류가 발생했을 때, 사정(지연의 이혼)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사적 영역의 감정이 공적 영역에 영향을 줘선 안 되는 거라는 상대 직원의 말에 나의 실수가 사생활 때문일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그 생각을 내게 전할 수 있을까라는 대목처럼, 세상을 보며 어떤 사건의 양태를 하나의 관념으로 단순화하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무수한 진실들을 사라지게 하고서는 단 하나의 이해로 세상을, 인간을 판단하려 드는 어리석음, 그 무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배려 없음으로, 몰이해로, 무관심으로, 나아가 배제와 무시, 폭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이러한 양태의 가장 위선적인 장면을 보게 되는데, 지연의 이혼 사실을 친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었으나, 삼촌 딸의 결혼식에서 만나게 된 가족들의 모임에서 지연의 결혼 생활을 묻는 질문에 일 년 전 이혼했다는 사실을 발설 할 때이다. 이때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삼촌이란 인물이 형수라며 지연의 엄마를 낮추어 호칭하며, 조카의 이혼을 조롱의 화제로 비아냥대는 것인데, 지연은 형의 아내인 지연의 엄마에게 형수님으로 호칭을 제대로 부를 것, 그리고 이혼은 당신들에게 알릴만한 개인적 여건이 되지 않았을 뿐임을 설명한다. 여기서 삼촌이란 인물의 내심에 자리한 조잡한 가부장적 권위의식과 조카인 지연이 겪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부재하는 인간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란 것, 여전히 이 사회는 구태를 집요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실상의 강렬한 스틸-컷 같다.

 

이러한 관념의 단순화 욕구가 파생시키는 공감부재, 무지, 편협성, 판단오류는 인간 모두에 두루 편재하여 인간 세계의 유대를 폭 넓게 파괴하는 중대한 요인일 것이다. 소설은 물론 이러한 관념적 오류와 낡아빠진 신분제나 가부장적 권위의 불모성과 폭력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보다는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어쩌면 모성 신화에 심어둔 거짓 이야기들을 전복하며,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던 어느 날,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고 있음을 문득 깨닫듯, 아이에 대한 사랑은 엄마의 본성에 억지로 꿰맨 것이 아니라 사랑은 근심에서 자라는것임을, 자기감정에 진실한 어느 순간 다가오는 것일 뿐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실 이 작품 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장면이 딱 세 장면이 있는데, 모두 무조건인 사랑이 서로 무한히 교환되는 그런 공간이자 시간에 관련된 것이다. 특히 피난길의 고생을 면하게 해준 새비 아주마이의 고모인 명숙 할머니의 작은 집에서 증조모 삼천네, 새비 아주마이, 할머니, 희자, 다섯의 여자들만이 어우러져 모처럼 조촐한 술상을 앞에 두고 해맑은 애정의 몸짓들을 발산하는 순간이나 삼천의 딸 영옥이 로빈슨 크루소를 읽을 때마다 절제된 침묵의 여인인 명숙 할머니가 귀 기울여 듣는 양상이다. 그리곤 전쟁이 끝나고 증조부의 자기 피붙이들이 피난한 장소라는 희령으로의 이주 고집으로 삼천과 새비네의 이별 후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삼천과 새비가 재회하여 바닷가에서 공놀이를 하는 장면이다. 사실 여자들만의 이 이미지가 왜 낙원처럼 여겨졌을까? 그 해맑은 자유의 정경, 어떤 구속도 없는 그네들의 때 묻지 않은 사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찰나의 포착이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도입부에 이런 문장이 있다 지연은 할머니의 이야기, 그녀가 보관해 온 편지들과 사진,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세상에 머물다 사라진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의 역사에 회의적 심정을 밝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편지를 받아 읽었을 증조할머니의 마음도 내 안에서 살아났다.”로 변화한다, 지연은 엄마와 갈등으로 단절한 할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증조모의 이야기로 거슬러 자신의 직계 여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며 삶을 살아가는 길, 그 길을 비추는 빛을 따라 나아간다. 더 나아지는 모습, 더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 부정당한 자기 존재의 증명을 위해 조바심 서린 두려움에 장악된 자신의 반면교사들을 보았던 것일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우리는 타인을 향해 얼마나 공격적으로 변하곤 하는가? 그리고 또 얼마나 편리하게 타인과 세상의 일을 단 하나의 관념으로 축소하여 그것이 곧 진실이라 판단하곤 하는가? 그 사이에 수많은 진실들이 빠져나가버리고 편협하고 고루하며 알량한 쭉쟁이를 들고선 인간의 추레함이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알지 못했던 소설 속 지연의 증조부로 대표되는 인물이 어쩌면 우리네들의 일상적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이 말이 너무 생소해서 나는 순간 움칫 거렸다. 앞으로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우리들은 어떤 이유도 없이 사랑해주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렇듯 우리 역시 이유없이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 때 삶은 아마 풍성한 의미로 다가 올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우선 1945년 이전의 개성을 배경으로 한 식민지민의 삶, 제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작동하던 신분제와 남녀의 차별, 그리고 전쟁과 피난길, 피난지 대구에서의 여인들의 생업과 애환, 전쟁 후 현재에 이르는 질기게 작동하는 가부장적 권력 등 이야기를 구성하는 풍부한 소재들과 무엇보다 갈등하기도 하지만 여자들만의 고 고유한 유대와 압도적인 사랑의 이야기는 꿈길을 걷듯 안락한 즐거움이었다고 하겠다. 읽는 동안 외로움은 이미 떠나버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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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이의 불길한 말 문지 스펙트럼
루쉰 지음, 성민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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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鲁迅,1881-1936)의 산문 10편과 산문시집 야초(野草)전체로 구성된 모음집이다. 중국의 근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사회운동의 사상가로서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정선된 글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소설인 광인일기Q정전은 많이 소개되고 있으나 정작 그의 사상적 진수라 할 산문이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시대와 인간의 오랜 어리석음의 관성을 꿰뚫는 자기 성찰의 요구는 끈질기게 붙어 떨어지지 않고 시공을 거듭하며 이 세계를 혼란시키는 원인들을 명징하고 냉정하게 바라 볼 것을 요구한다.

 

이 책의 제목이 된 부엉이의 불길한 말이란 문구는 시집 야초(野草)에 수록된 산문시 희망(希望)의 한 구절이다. 20세기 초 혼란기 중국 사회의 청년들이 그 어느 늙은네들보다 더욱 늙어있음을 발견한 놀라움의 표현이다. 헌데 지금은 왜 이리 적막하지? [...] 세상의 청년들도 다 늙어버렸나?” 생물학적 연령은 젊은데 그 내면은 노인들보다 더 늙어빠진 젊음, 마치 동시대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의 붉은 뺨을 하였지만 죽음을 안은 등장인물들을 생각나게 한다. 부패한 아버지 세대를 비난하지만 정작 부패한 것은 표면의 젊음 속에 숨겨진 결핵을 품은 붉은 뺨의 젊은이들이듯 말이다.

 

이 동시대적 동일 양상은 나치와 기회주의적 극우 국민당이라는 끔찍한 세계로 이어졌다. 중국이나 독일, 이 역사적 동일 유사성은 오늘 한국 사회의 현실과 또한 동일 유사성에 닿는다. 1922년 출간된 그의 단편소설집 외침(吶喊)서문에서 그 어떤 반항도 도전에도 관심이 없는 청년세대의 평화의 안주, 그 사악함을 비판한다. 사실 그에게 평화는 암류가 잠복하는 음험한 파괴의 열화(烈火)에 불과한 것이다. 버젓이 벌어지는 불의에 눈감고 자기 이익에 열중하는 삶이 지속 가능할 것이라 여기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익에 전념한다는 것, 이것은 차츰 비겁과 인색으로, 후퇴와 공포로 변질되고 급기야 소박함을 잃은 말세의 각박함만 남게 되는 것이 필연적임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세상은 저항과 파괴의 도전 소리로 들끓어야 한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평온은 익숙한 실리에 가려진 독선과 아집의 세계, 몰락한 정신과 구습에 감염된 습관화 된 눈의 오류가 보이지 않게 할 뿐이다. 산문 악마파 시의 힘(摩羅詩力說)은 어떤 세계든 그 내부의 다른 반항의 목소리가 끝없이 외쳐져야 함을, 그럼으로써만 세계는 아주 조금씩 선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을 문학예술론, 시론의 지향할 바를 통해 강론하고 있다.

 

6세기 중국의 문학비평서인 문심조룡(文心雕龍)시자지야, 지인성정(詩者持也 持人性情)’이라며 시라는 것은 잡아두는 것이다. 사람의 성정을 잡아둔다.”라고 했으며, 공자는 시경(詩經)을 설명하길 시삼백 얼언이폐지왈 사무사 (施三百, 一言以蔽之曰 思無邪)’라며, 시 삼백 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각함에 삿됨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쉰은 이러한 자기 계급 유지 목적의 평화론이 얼마나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것인가하고 비판한다. 인간의 성정인 시를 규범에 가두어, 그 어떤 다른 목소리도 가두고 죽여 없애려는 권력인 유교적 질서에 경멸을 보내는 것이다. 그 깊숙이 숨겨진 보수적 기만이 민중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음을.

 

루쉰은 이러한 세태에 자신의 문학예술이 아무런 변화도 가져 올 수 없다는 실의로 좌절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 그에게 쓰기를 요구했던 후배 문인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의 먹물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일화이다. 일명 쇠로 만든 방(鐵屋子)’이야기. 창문하나 없는 쇠로 만든 방이니 부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다. 머지않아 모두 숨 막혀 죽을 것인데, 혼수상태에서 죽어가는 것이니 죽음의 비애랄 것도 없다.

 

루쉰은 자신이 살고 있는 중국 사회를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큰 소리를 질러 몇 사람을 깨우는 것은 그 깨어난 소수에게 돌이 킬 수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는 일이고, 그들에게 미안한 일이니 소리 지르는 일이 무용하고 공허한 일이라 말한다. 그때 후배는 말한다. 몇 사람이 일어난 이상 쇠로 만든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루쉰은 그 말에 문득 깨닫는다. 희망, 그것은 말살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속하는 것이어서 [...]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라고.

 


몰락한 정신들을 깨워야 하고, 강건함과 저항, 파괴와 도전의 소리를 질러대는 악마가 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그래서 그는 산문 눈을 뜨고 보는 것을 논함(論睜了眼看)에서 정시(正視)를 말한다. 무슨 일이나 눈을 똑바로 뜨고 보는 용기를 가지는 것, 감은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원만하고 [...] 문제도 결함도 불평도 없게 되고, 개혁도 반항도 없게 되는 것이니 문제와 결함을 보지 못하게 되고, 보이지 않게 된다고. 불온하고 불의한 세계의 개혁은 요원한 것이 되고 만다고.

 

오늘 우리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형국이 이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자신들만의 폐쇄된 음습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자기 이익에만 열중하던 한 탐욕스런 인간이 어느 날 한 낮의 눈부신 햇빛 아래 기어 나왔다. 그 자는 눈이 부셔 눈을 꼭 감은 채 잔존하는 옛 꿈만 계속 꿀 터이다. 눈 감은 그 자에게 어둠이나 빛은 보이지 않는 셈이고, 때문에 눈을 감고서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인다. 그렇게 기만과 사기가 이 세계를 가득 채운다. 어리석은 대중 또한 눈을 감고 있으니 자못 평화스럽다고 느낀다. 이렇게 세계는 시간을 퇴행하며 썩어 들어간다. 아마 어느 날 눈을 뜬 대중은 자신에게 공포 가득한 지옥이 열려 있음을 보게 되고 그 당혹스러움에 정신을 잃을지도 모른다. 루쉰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정시(正視)하지 않고, 기만과 사기로 기묘한 도피로를 만들어서 그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여긴다는 것. 여기에 국민성의 비겁함과 나태함, 교활함이 증명된다. 하루하루 타락하면서, 오히려 날마다 영광을 본다고 느낀다.”. - 論睜了眼看에서

 

아마 루쉰의 엄청난 산문들 중에서 그 상징적 의미에서 가장 웅변적이고 강경한 글은 단연코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일견 관용적이고, ()을 막론한 도덕애(道德愛)의 지고로 여겨질 경구에 대한 치열한 반론인 페어플레이의 시행을 늦춰야 함을 논함('Fair-Play'應該綬行)이다.

 

여기서 물에 빠진 개는 호시탐탐 사람을 무는 개이고, 굽신거리며 사람을 기만하고, 수시로 악행을 저지르며, 악행이 드러나면 절름발이 흉내를 내며 동정을 애걸하고, 구제되면 다시금 전과 똑같이 사람을 무는 개다. 루쉰은 이러한 개들, 즉 악을 방임하면 그 개는 사람을 물어 댈 뿐 아니라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까지 던져 넣을 것(投石下井)이라고 말한다. 해서 물에 빠진 개는 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신에게 페어(fair) 하지 않은데 당신만 페어 하면 결국 폭행을 당하고 죽음에 내몰린다고. 페어 할 자격이 없는 것에 페어를 기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민중이 일제 부역자들의 처단을 말 할 때, 이러한 것들에 공정한 도리를 말하면서 보복하지 말아야 하느니, 너그럽게 용서하라느니 떠들어 댄 결과가 오늘 한국사회의 역사적 퇴행을 보게 하고 있다. 이것들은 구제 받은 뒤 고마움이나 회개는커녕 나쁜 짓을 하려는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는 사람들을 물어뜯고, 심지어 뱃속을 채우려 나라마저 팔아치울 태세다.

 

여기서 고사가 등장한다. 옹기를 만들어 그 안에 사람들 가두어 죽이는 방법을 고안한 주홍이라는 인간이 있었다. 그 자가 지독히 나쁜 짓을 하여 처벌을 받게되자 판관은 그 자를 옹기에 들어가게 하라!’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청군입옹(請君入瓮)’이라 한다. 악에 대한 방임을 마치 관용이라 고지식하게 관대한 체하다 오늘과 같은 역사를 부인하는 혼란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것들에게는 관용의 도(恕道)가 아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곧음의 도(直道)를 적용해야 하는 것이 옳다. 페어플레이는 폐단이 크다. 여전히 한국의 정치사회에서는 페어플레이, 물에 빠진 개는 때리지 않는다는 말은 이른 윤리적 잣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안타깝고 수치스럽지만 말이다.

 

당대 민중의 정신 개조를 위해, 쇠로 만든 방 같은 권력의 경계 속에 잠든 인간들을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를, 들리든 말든, 위협이 다가오든 말든, 그침없이 반항의 목소리를 외치던 이방의 문인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초월해 오늘 이 땅에 잠에 취한 몽롱한 인간들을 깨운다. 뜻있는 사람이 발양(發揚)하려면 먼저 자기를 성찰하라고 했다. 또한 반드시 남을 두루 알고서야 자각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자각의 소리가 나오면 그 소리는 반드시 사람들의 마음에 적중하고, 그 깨끗함과 맑음이 이 세계를 향한 빛이 될 수 있다고. 이 땅의 인간과 세계는 한 치도 변하지 못했는지 모른다.

 

사실 적절한 인용이 되지는 않겠지만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때로 유인원과 원인(原人)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인간과 인종 차별 등의 논리를 만들어낸 문제 많은 사회진화론자 에른스트 해겔(E. Haeckel)의 웅변마저 공감되는 시절이다. 구제된 물에 빠졌던 개들이 설치는 형국이니 관대하게 이해될 것으로 믿는다. 이 자기 성찰적 산문을 이제야 발견하고 읽게 된 것도 어쩌면 스피노자기 말하는 유일한 실체로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인 것만 같다. 안타까움과 분노로 가득 한, 그러면서 자기 성찰적 지혜로 꽉 채워진 글을 읽으며 켜켜이 쌓인 체증이 조금은 내려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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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문학사적 위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헤아려야 한다.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1908~1950)’어른이 되어서는 두 가지 경험, 즉 성공과 실패밖에 없다는 말을 했다. 서글픈 말이다. 극단의 투쟁, 살기 아니면 죽어야 하는 것이 그가 숨 쉬던 파쇼 사회였기에 가능한 말이었을 것이다. 흰 고래를 죽이든지 배가 난파되든지 둘 중의 하나라는 이 양단의 잔혹하고 참담한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이겠는가?  한 메이저 온라인 책 판매 사이트에 벌어지고 있는 흉물스런 얘기다.

 

폐쇄집단의 자기이익 실현에만 능숙한 한 천박한 인간이 모비딕을 읽었다는 것을(정말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천박성을 넘어 수치도 모른 체 책 판매의 선전문구로 사용하고 있음에 아연실색했다. 해당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 두 집단의 권력을 향한 더러운 아부이자 정치적 야합(野合)일 것이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고는 그 실패를 덮기 위해, 다시 한 방을 돌려주기 위해 무슨 일이든 실행하는 폭력성, 무도함을 내놓고 지껄이는 이 후안무치함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겁에 질렸거나 이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기회주의적 패거리들이 극성을 부린다.

 


에이허브는 마치 빈틈이 없으면 강제로라도 뚫어 만들어내서 그 구멍에 온갖 추잡한 것들을 들이 밀어야 한다는 강박적 악의에 경도된 인물이다. 이 인물에 매료된 인간 군상들을 상상해 보라. 왜소한 능력으로 장대한 상대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저 무엄함과 무법성을.

 

거대하고 불가해한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 불굴의 의지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며, 인간의 지성과 무한한 능력의 한 표본으로 제시되어 왔지만, 이것은 배에 탑승한 모든 이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가장 유해하고 극악하며 탐욕스런 욕구 이상이 아니다. 아직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위엄이 인류사회에 터 잡지 못했던 180년 전 야만의 시대(1851년 초판출간)에 출현한 옛날의 허구 이야기다. 타인의 희생을 토대로 하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기만은 오늘의 세계에서 더 이상 그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불의와 어리석음이 저지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 그 배경의 인식 수단으로 모비딕을 이용하는 저열한 욕심만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이다.

 

나와 다른 상대를 죽여 없애거나 거꾸러 뜨려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하고, 나만이 옳다고 믿는 것, 그것이 파시즘이다. 파시스트의 세계가 무엇인지 너절한 설명을 생략하겠지만. 그것은 수많은 사람의 참혹한 학살의 역사임을 알려준다. 그것의 끝은 광기와 전쟁, 공멸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이다.

 

출판업자와 유통판매업자의 무지함이 빚어낸 실수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판매 전략은 의도라는 적극성의 산물이니까. 어느 누구도 시선을 피할 수 없게 배너 창까지 띄워대고, 더러운 욕망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원시적이고 퇴행적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국 사회가 이렇게까지 부패하고 있다는 것의 한 상징적 이벤트 같다.

 

어느 누구나 모비딕을 읽을 수 있으며, 또한 읽어야 하는 고전적 지위를 확보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낱 파렴치한 인간의 정치적 선전 수단의 도구로 둔갑했다는 것, 그리고 이에 적극적으로 뇌동(雷同)하는 인간 집단이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모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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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9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필리아님!

필리아 2024-01-12 22:35   좋아요 1 | URL
네, 너무도 흉물스러워서요...

그레이스 2024-01-12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이 시원하네요
 
꿰맨 눈의 마을 트리플 22
조예은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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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집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단편은 연작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각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연속성을 지닌 동일 캐릭터이며, 배경 또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난화로 인해 극지대의 빙하가 80퍼센트 너머 녹기 시작하면서 활성화된 신종 바이러스로 인류 신체의 변형이 발생한 근미래(近未來)이다. 이러한 감염자(변형 신체자)들이 증폭되자 변이를 겪지 않은 일군의 사람들은 인간이 찾지 않은 황야에 마을을 건설하여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다. 이렇게 건설된 곳이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가는 타운이라 불리는 곳이다.

 

표제작 꿰맨 눈의 마을을 시작으로 히노의 파이그리고 의 순서로 수록되어 있는데, 하나의 원처럼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이 시간상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회상의 시간이 놓여 소설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들어 주는 듯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합니다

교장 나침이 조례 때마다 하는 말이었다.”

 

타운을 변이를 겪지 않은 사람들로만 유지하기 위해 감염자, 즉 신체에 변형이 발견된 사람들은 타운 밖으로 버리듯 내쳐진다. 그래서 타운을 지키는 제 1규칙은 얼굴이 아닌 곳에 난 이목구비를 보면 신고하라!”. 교장의 말은 한 아이가 버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꿰맨 눈의 마을은 이렇게 한 아이를 타운으로부터 퇴출시키는 사건을 중심으로 고립된 공간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관찰토록 한다.

 

자신의 등에 또 하나의 눈을 옷 속에 감추고 살아 온 소년 이교는 타운 밖 황야로 내쳐진 절친 에 대한 그리움과 그와 나누었던 타운 밖의 세계에 대한 상상의 이야기들, 그곳에 관한 소문들을 통해 타운의 규칙들이 공포라는 하나의 장치에 의존한 공간이라는 의심을 키운다. 폐쇄적 공간의 존립은 외부 정보의 유입 차단과 단일 정체성을 위한 수많은 장치들로 구성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의 발생은 불가피하며 장치들은 거짓으로 축조된 것임을 드러낸다. ‘이교는 자가용 비행기의 추락으로 타운에 떨어져 만나게 된 타운 밖의 변형된 존재인 으로부터 타운내 사람들이 구인류, ‘도망친 포비아들로 불린다는 것을, 최선이자 배려라 믿었던 타운의 규칙이 야만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단일성, 순수성이라는 역겨운 폭력성의 잠재태임을...

 

히노의 파이는 조카인 이교를 황야에 버리고 돌아온 문지기인 백우의 자기 행위에 대한 윤리적 성찰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감염자로부터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타운 밖 황야에 감염자를 유기하는 일, 그들에게 치사량의 독극물을 버무려 구워낸 미트파이와 콜라 한 병을 들린 채 버리고 돌아오는 일의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동정심이나 죄책감으로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멍청한 문지기라는 신념으로 할아버지까지 버린 문지기인 아버지의 대를 이은 문지기 백우는 외부자로서 독극물 파이를 구워내야만 했던 히노와의 사랑의 추억, 히노가 그에게 던졌던 황야에 남겨진 이들의 최후에 대한 상념으로 이어지며, 타운의 규칙들에 의혹을 품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한다.

 


권력의 명령, 체제의 수호를 책임진다는 미명 하에 젊은이들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며 자신의 도덕성을 돌아보지 못했던 민주화투쟁 시절의 고문기술자를 떠 올리게 한다. 백우는 최선을 다하는 게 어떤 최악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사유할 줄 모르는 이 땅의 공권력 수행자들과 다르다. 타운의 장노들, 권력이 요구하는 짐짓 배려인 채 행하는 유기가 과연 추방되는 이들의 선택, 문지기인 자신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외면했던 질문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다. 황야로 자발적으로 사라진 히노에 대한 그리움, 그녀가 미트파이 레시피와 함께 남겨놓은 우리는 언젠가 황야 너머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널 위한 쿠키를 구워둘게. 사랑해, 백우.”, 라는 메모는 그가 행한 일에 대한 정당화란 비루하기만 한 한낱 위로와 합리화에 불과했다는 각성에 이르게 한다.

 

단편 은 추방된 이교의 친구 램의 버려진 황야에서의 삶을 향한 도전의 걸음이다. 램은 굶주림에 독이 있다는 미트파이를 꼭꼭 씹어 삼킨다. 스스로 조용한 죽음에 이르기 위한 행위지만 그는 깨어난다. 미트파이에 독극물이 주입되지 않고 만들어진 것은 아마 히노의 은밀한 전환, 타운의 체제에 대한 저항, 동료 주민에 대한 연민의 행위였을 것이다. 램은 이교와 나누었던 황야에 대한 상상, 괴물이 득실거린다는 황야란 공포를 조장하기 위한 한낱 거짓이었음을 상기한다. 램은 추락하는 비행기를 환영처럼 발견하지만 그 실체의 확인을 위해 추락지점으로 반죽음의 육신을 옮긴다. 그리곤 추락한 비행기 무전기에서 울리는 교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타운은 소거법으로 유지되는 땅.  그렇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곳에는 몇이나 남게 될까?”   -155쪽에서

 

이렇게 꿰맨 눈의 마을에서 추락했던 비행기와, 추락한 비행기의 소년 람과 이교의 발걸음 은, 시체가 파이와 나뒹구는 황야를 조카 이교가 벗어나길, 그리고 그리운 이 히노를 향해 황야를 걷는 백우의 히노의 파이를 경과하여, 다시 무전기를 향해 살려주세요를 부르짖는으로, 회귀한다. 세 편의 소설은 굵직한 하나의 주제들을 품고 우리들에게 윤리적 질문을, 그리곤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듯하다. 세계 밖을 상상해 보세요, 그 상상의 지대에 진실이 숨 쉬고 있어요. 라고.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에세이 빛나는 모형들에서 들려주는 진실보다 더 진실로 여겨지는 삿포로 시장의 어느 음식점의 진열대 너머 모형이 일으키는 진짜에 대한 맛의 상상처럼, 더욱 풍성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닫힌 세계, 고립을 요구하는 폐쇄된 세계를 벗어나 열린 외부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수한 다양성, 그 다름의 세계와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게 될 터이다. 타자를 향한 너그럽고 부드러운 시선, 조금은 더 진실의 세계에 다가갈 수 있으리라. 때론 가짜가 거짓을 말하는 진짜의 위선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을. 나른한 평온함과 밝은 생명력이 절로 발산되는 조예은 작가의 이 소설을 읽으며 왠지 세상이 살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면 과장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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