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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인카르도나 지음, 장소미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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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과 고기, 그야말로 모든 것이 태양과 열기와 숯불에 타고 있다.” - P 156 에서

 

 

왠지 지옥 같은, 하지만 우리 사는 현실과 닮은 이 문장이 왜 내게 유독 꽂혔는지 모를 일이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헤이놀라. 언뜻 스칸디나비아 대안 포르노의 여배우 이름처럼 들린다.”그런데 이어지는 문장처럼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다. 소설의 한 축이 유명 포르노 배우인 니코라는 인물이고, 반수신(半獸神)으로 불리기까지 하니, ‘세계사우나대회가 열리는 핀란드의 소도시 헤이놀라는 맞춤의 지명이다.

 

심장마비, 화상, 페궤양을 일으켜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지정온도 섭씨 110도라는 극한의 공간에 펼쳐지는 이 가학적이고 피학적인 경기, 그야말로 허망함이 예견된 세계에 참가 선수, 각종 언론매체, 기업 마케터들, 나체와 사우나의 열기에 도취되어 쾌락을 만끽하려는 관광객까지 저들마다의 욕망이 끓어오른다. 주체할 수 없는 무료함, 시간을 처리하기 위해 기획된 고도로 상업화된 이 이벤트에서 기괴한, 그리고 낯선 공포의 냄새를 맡게 된다.

 

치명적인 열기를 버텨내고 사우나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마지막 최후의 인간이 챔피언이 되는 미련하고 해롭기만한 야만적인 경기, 여기에서 누군가들은 이익과 쾌락을 얻고, 누군가들은 소비의 대상이 되어 전시되고 추락한다. 소설의 묘사들은 유머와 풍자, 해학 그 자체이지만 열연하는 3년 연속 준우승자인 옛 소련의 잠수함 선장이자 해군 장군이었던 왜소한 체구의 러시아인 이고리, 중년에 이른 섹스 심볼인 포르노 배우이자 챔피언 자리를 지켜온 거구의 핀란드인 니코의 정신세계가 빚어내는 삶의 비극적 요소는 희비극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탈리아 작가 피란델로였던가? 유머와 공포는 상상력이 낳은 쌍둥이라 했던 말이 떠오른다. 소위 기묘한, 엽기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질서가 파괴되는 세계와 대면 할 때의 긴장감과 섬뜩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그로테스크하다는 미학적 용어가 어울리는 그런 이야기로 다가온다.

 

아마 그래서였을까? 결승전에 오른 5명 중 하나인 신부를 묘사하는 니코의 표현이 있다. “호리호리하고 비리비리한 몸에 달린 신부의 굵은 페니스의 왜곡된 듯한 조합은 오싹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참가자들을 향해 주절거리는 신부의 기도 소리는 부조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수고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신이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아름다운 선물, 고통, 아멘

비극을 향해 치닫는 공간에서 뱉어지는 이 희극적인 장면은 정말 그로테스크하다. 그로테스크 해!

어쩌면 이 그로테스크함은 불가해하고 모호하며, 우스꽝스럽고 경악스러우며 소름끼치기조차 한 인간 세계를 그려내려 한 작가적 의지의 소산이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것이 심연을 마주할 때의 공포가 아니라면 무엇이 공포이겠는가!

 

공산당에 배신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삶의 희망이 없는 치명적 매독에 걸린 이고리의 생사를 초월한 마지막 결전으로서의 도전, 포르노 배우로서 점차 수명을 다해가는 불안에 휩싸인 장년에 이른 니코의 멸망하는 세계의 마지막 기회로서의 결승전은 가히 점점 괴벽스러워지는 오늘의 세계, 상업적 착취와 관음증적 소비의 극한을 향한 무모함으로 그득한 맹렬한 질주, 바로 그것인 것만 같다. 110도 불가마 옆에서 1초의 버티기는 영혼마저 탈탈 털어내야 하는 혹독함이다. ‘선더 스트럭(thunder struck)’,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이 그들을 급습한다. 체온 상승의 충격으로 덜덜 떨기 시작한다. 신체 조직의 열 발산이 정지하고 열전도효과가 제로가 된다. “613, 최후 2인인 니코와 이고리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

 

 

안전 요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들의 피부가 벗겨지고 흘러내리며, 분사된 찬 물에 의해 피어오르는 연기의 묘사는 역겨움, 혐오, 괴이함이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지던 이 세계가 별안간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이때 느껴지는 갑작스러움과 당혹감은 그로테스크의 본질 아니던가?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의 희극적인 이 이야기는 점차 생경해져가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반성적 자기 응시인 것 같다. 나는 이 소설을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의 말을 빌려 마무리하련다. “그로테스크의 창작은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고 그것을 정복하는 일이다.”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그윈 플렌의 의도되지 않는 웃음, 의지에 상응하지 못하는 미소를 닮아가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발견케 될지도 모르는 그런 작품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소설의 제재인 세계사우나대회는 2010년 폐지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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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의 섬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4
에도가와 란포 지음, 채숙향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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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는 꿈, 밤의 꿈이야말로 진실” - 에도가와 란포

 

본명 히라이 타로(平井太郞)’, 필명 에도가와 란포의 이 좌우명은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간단명료한 문장이리라. 정신분석학, 분석심리학을 기저(基底)로 하여 과학과 예술의 결혼이라고 까지 한 란포 소설을 관통하는 정신적 배경이기 때문이다. 단편 두 작품과 중,장편 각 한 편씩 네 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작품집은 인간의 내적 본질, 그 내부의 모순된 감정들, 낯설고 이질적인 세계를 걷는 불안함과 두려움의 음습한 기운이 전체를 지배하며 흐르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한다.

 

소위 범행의 빈틈을 발견하여 범인의 범죄사실을 입증한다는 탐정소설, 즉 미스터리의 형식이 근간이지만 이에 더해 기이하고 으스스한 란포 특유의 환상문학적 요소는 여타 추리문학 작품과는 다른 독특한 읽기를 선사한다. 아마 표제작인 중편 도플갱어의 섬 (원제목: 파노라마 섬의 奇談)이야말로 이러한 감정이 가장 강렬하게 구사된 작품일 것이다. “영혼을 파고드는 고혹적인 인외경(人外境)”이라는 인간계를 초월한 듯한 낯선 정경, 어떤 악마적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인공적으로 축조된 섬의 분위기에 그야말로 생명력의 압박을 느낄 만큼 괴이한 느낌에 압도되게 하는 작품이다.

 

좌절한 삼류 시인인 이토미 히로스케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거부(巨富) ‘고모다 겐자부로의 죽음을 이용하여 사자(死者)가 살아나 귀향하여 꿈꾸던 낙원, 몽환적 미()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축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이 살아난 사자인양 행세하기까지의 여정도 그 범죄적 행위의 대담함과 함께 흥미진진한 요소이지만, 이 소설의 백미는 죽은 자의 아내인 치요코에 의해 의심이 증폭되어 그녀를 살해하기 위해 자신이 축조한 특이한 예술공간인 섬으로 동행하여 서술되는 인공적 창조물인 섬 자체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들과 카니발적 망상의 형상들에 대한 당혹감일 것이다.

 

이 작품을 미의 극한을 추구한 탐미주의 소설의 끝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서울 만큼 선명한 해저 별세계, 벌거벗은 여자(裸女)들의 연화좌(蓮臺)를 타고 당도하는 골짜기 밑바닥 탕에서 보는 육체의 급류, 원근법에 의한 착시효과를 이용한 파노라마 수법으로 자연을 왜곡하여 현실 세계를 마치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것 같은 불가해한 악몽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세계는 섬뜩하고 괴이한 요소로 인해 혐오감으로 울렁거리게 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감정은 현실세계가 파괴되면서 발밑이 아득해지는 충격과 섬뜩한 뭐라 말 할 수 없는 불협화음, 그 괴상한 아름다움의 매혹이랄 수 있다. 현실 세계에 발 딛을 곳 없던 인물이 욕구 충족을 위해 창조한 환상의 공간은 마치 이 세상을 벗어난 황천길의 정적, 혹은 극락의 환희를 연상케 한다. 사취한 아내, 치요코의 목을 죄며 뒤엉킨 두 남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죽음의 유희로 묘사되고 황홀한 쾌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락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예술 지상의 탐미적 장면의 결정판은 자신의 신상이 발각되자 불꽃과 함께 산산조각이 되어 비처럼 떨어지는 선혈과 살덩어리일 것이다. 아마 그로테스크의 정의인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질서의 파괴, 초자연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세계에 대한 신랄한 조롱, 그것이 아니었을까?

 

이와는 달리 비교적 미스터리 탐정소설의 요소가 우위에 있는 작품은 첫 수록작인 단편 심리 시험지붕 속 산책자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작품 역시 당대에 부상하던 꿈과 무의식의 통찰인 인간 내면의 과학적 탐사인 정신분석의 심취를 엿보게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착상을 고스란히 빌린 셈이라고 란포가 고백하였듯이 심리시험은 학비와 생활비로 쪼들리는 대학생이 큰돈을 지닌 노파를 살해한다는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다만 라스콜리니코프와 달리 심리시험의 주인공 후키야 세이치로라는 인물은 윤리적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감정이 싹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돈을 갈취하기 위해 살인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 역시 단순한 절도보다 발각의 난이도에서 살해하는 것이 잔혹한 대신 깔끔하고 걱정이 없다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살해 행위에 있어서도 교살 후 잭나이프로 다시금 심장을 정확히 찔러 확실한 살해로 매듭짓는 것 또한 강박 신경증적인 범인의 심리를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범죄 심리적 서사의 세밀함에 더해 단어 연상시험을 통한 심리시험의 과학적 성과 소개가 이 소설의 의도로 이해되지만 란포의 이후 소설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게 되는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캐릭터를 접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지붕 속 산책자는 단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이루어지는 사례의 한 인물을 만나고 있는 기분을 느낄 만큼 성적 상징물들로 그득하다.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방황하는 염세적 인물이 새로 이사해 간 하숙집 반자널 위를 밤마다 살금살금 배회하는 이야기다. 벽장에 들어가면 안락하겠다는 유혹, 우연히 손을 뻗었다 열리는 반자널 위의 동굴 입구 같은 천장 구멍, 독액을 흘려 넣는 천장의 옹이구멍 등은 주인공의 억압된 욕망의 모습들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의 충족되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 혹은 부권에 의한 금지의 강제라는 트라우마가 성인이 된 남성에게 표출되는 정신병적 드러남의 본보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만 같다.

 

동굴같은 어둠에의 유혹, 해방된 욕망은 지붕 위를 거닌다. 제어되지 않은 무의식은 살인조차 흥미, 쾌락의 요소가 된다. 이내 실현되자 살인행위의 쾌감조차 별거 아닌 게 된다. 탐정 아케치 고고로의 활약이 완전범죄 같은 살해사건의 빈틈을 집어내어 미스터리 소설의 완성을 이뤄내지만 이보다는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가 뒤섞여 유입된 20세기 당대 일본문학의 흐름을 살피는 데 일조하는 대표적 작품으로서 읽어보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을 듯싶다.

 

1925~1926년에 발표된 이들 세 작품과는 달리 란포가 중년(41)에 이른 1934년에 발표한 장편 검은 도마뱀은 란포 작품 중 손에 꼽는 수작중의 하나가 아닐까 여겨지는 본격 탐정소설이라 하겠다. 농염한 섹소폰 소리와 그에 따라 흔들리는 보석춤을 추는 나체의 여자, 그리고 그녀의 율동에 따라 꿈틀거리는 도마뱀 문신은 광기와 도취, 혐오와 환락의 기이한 조합으로 독자의 시선을 일거에 잡아들인다.

 

대표적인 탐미주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에 의해 각색되어 공연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여도둑과 사립 탐정의 공개적인 대결이라는 전통적 형식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 도입되는 도구들은 일견 세련되게 용해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일종의 도플갱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기 상()이라든가, 밀랍인형이 작품에 뒤섞이지 못하고 서걱되던 초기작과는 달리 내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그 상징적 책임을 다해낸다는 점을 들고 싶다.

 

세상의 아름다운 건 모두 수집하려는 일명 검은 도마뱀을 통해 악마주의를, 미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한껏 드러난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의 표정과 자태만큼 아름다운 건 이 세상에 없을 거야.” 묶인 채 대형 수족관에 처넣어 호흡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인간을 즐기고, 그 사체를 박제화하여 아름다움을 모으는 마조히즘, 편집증적 광기는 여자 아르센 뤼팡과 탐정 아케치 고고로와의 치밀한 대결과 어울려 미스터리 문학의 위치를 한 단계 올려놓는다.

 

어쩌면 란포는 존재의 가장 신비로운 충동들을 내보이는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순되고 불확실하게 흔들리며, 저 어두운 심연에 꿈틀대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관심, 바로 그것을. 우리의 지각 인식체계를 지배하는 시간, 공간, 인과관계의 선험구조를 넘어 작동하는 그것, 그 환상의 세계와 추리, 과학논리 세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란포 소설의 세계는 기묘한 감각적 긴장과 이질감의 차원으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이질적이며 매혹적인, 으스스함에 가능성을 열어놓은 란포의 세계에 잠시 빠져들며 더운 열기를 떠나보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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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19 소설 보다
김수온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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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집 - <소설 보다> ; 2019

 

 

이 계절의 소설선집과 인연이 이번으로 네 번째다. 젊은 작가들의 단편 3~4편으로 구성된 작은 단행본이지만 이 선택을 계속하는 이유는 매 작품 끝에 이어지는 문지문학상 후보작 선정위원들과 해당 작가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갓등단한 신예부터 10년 남짓의 작가에 이르는 신진들이기에 이들의 작품이 낯선 독자들에게 수록작품에 대한 구성과 지향점을 비롯한 창작 계기, 소설화 과정에서 염두에 두었던 혹은 작가적 고민, 근황과 계획에 이르는 담화는 한국문학의 다채로운 시도가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하게 해준다. 이는 작가와 독자의 내적 연결고리가 형성되는 계기로 작동한다. 이 선집을 통해 알게 된 몇 몇 작가의 작품이 발표되거나 출간되면 찾아 읽는 고정 팬이 되었기에 가능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이번 선집은‘<소설보다> ; 겨울 2018’에서 만났던 백수린 작가를 다시금 접하게 되기도 하지만, 내겐 낯 선 김수온, 장희원 이라는 두 작가와의 만남이 더욱 기대되었다고 해야겠다. 2018년에 등단해서 이미 여러 지면에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김수온 작가, 그리고 2019년 올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장희원 작가의 소설 세계를 조금이나마 엿보는 기회가 되었다.

 

    

 

2. 세 편의 수록작

 

2-1.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 - 백수린

 

그런데 몇 차례 작품을 접했다는 이유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라는 백수린 작가의 이번 작품은 소설 읽는 행위의 즐거운 기억을 되살려 주는 기쁨이 있었다. 어쩌면 작가가 무심히(?) 던진 하나의 문장 -“한 순간이나마 무언가를 욕망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은 욕망을 모르던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법이니까” - 탓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신도 알지 못했던 꾹꾹 눌려졌던 욕망의 모습과 마주하고 그것을 현실적 감각 - 의식이라 해야 하려나? - 으로 이해하는 화자(話者)의 여정이 왠지 경쾌하게 보였으니까.

 

이렇게 신나게 읽었던 것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재들이 발산하는 무의식의 향취 때문이었을까? 고급주택가의 한 붉은 지붕의 집, 새빨갛고 탐스러워 보이는 만개한 덩굴장미, ‘하늘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배꼽 위가 간지러워하고 깔깔거리게 하는 그네, 작지만 운치있는 레스토랑 카페 뮐러, ..., 마치  나보코프의 에이다를 번역하는 마을 사람들 탓에 브르타뉴의 브레아 섬을 가득 떠도는 그 활기찬 관능의 냄새를 떠올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오빠만 학원에 보내주었고, 그녀의 재수를 반대했으며,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언제 직장을 그만둘 거냐고 물었다.” 아마 많은 그녀들은 이러한 환경이 익숙하지 않으려나? 이런 그녀가 불현듯 자신이 지금껏 누구에게도 떼쓰지 않았음을, 그녀의 삶은 그저 커다란 체념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소설 속 그녀는 미묘한 다른 삶의 징후를! 하고 예견한다.

 

그녀가 동경하던 붉은 지붕의 집이 어느 날 철거되기 시작하고 야생적으로 드러난 골조들 사이를 지나, “리드미컬하지만 대담한 움직임으로 벽을 부수는, 싱싱하게 젊고 군살이 전혀 없는 근육질의 남자여자는 그의 옷을 벗기기라도 할 것처럼 남자를 맹렬히 쳐다보았다.”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남자를 대상화하는 여자의 시선, 즉 남성우위의 시선을 전복하는 페미니즘 결정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억눌렸던 욕망,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욕망을 과감하게 마주하는, 즉 무의식에서 끌어올려 비로소 의식화하는, 균형을 잃었던 자아의 온전한 정립의 멋진 정경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가 훨씬 마음에 든다.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이제 곧 더 근사하게 다시 짓는대에 대응하여 이젠 상관없어라고 말하는 그녀는 이미 새로운 욕망의 세계로 갈아탔으니 말이다. 내게도 삶의 변화를 예감하는 아주 짧은 한 순간이 내면을 명쾌하게 울려댔던 적이 있었나? 하고 골똘히 기억을 더듬어 보게된다. 유쾌한 아름다움! “꽃놀이 가듯 즐겁게 쓴다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들을 기대하게 된다.

 

2-2. 한 폭의 빛 - 김수온

 

인생의 전환을 예견케 하는 이처럼삶의 짧은 어느 순간이란 언어적 포착은 김수온 작가의 한폭의 빛에 등장하는 얼어붙은 호수의 한 줄기 금이 되어 또 다른 의미를 새기게 한다. 이 순간은 오히려 의식에 있었던 것을 무의식으로 침잠시켜버리는 그런 사태인 것 같다. “작은 일이 일어나는 순간, 일생이 바뀌기도 하잖아요.”그리고 빛은 언제나 어둠을 동반하잖아요.”라는 작가의 변()은 나의 이해를 어둠으로 이끈다.

 

소설 모든 정황이 압축되어있는 것만 같은 첫 문장을 대하면서 왠지 금지된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도시의 서쪽에는 숲이 있다.

나무가 우거져 있으므로 그늘이다.

숲에 작은 면적의 호수가 있다.

거기 유일한 빛이 비추고 있어.“

 

어떤 신경증적인 세계를 보는 듯하다. 동쪽의 도시에는 아기를 잃은 듯한 여자가 있고, 서쪽 숲속에는 검은 모포를 두른 사내가 있다. 그러나 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별로 규명된 것이 없는 실체들이기 때문이다. 통념들이라 이해하는 내 지각이 부정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어둠 속에 빛이 아니라 빛에 동반되는 어둠을 먼저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일인용 소파에 앉아 지새는 여자, 아기가 없는 빈 요람, 빈 방, 닫혀 있는 문, 얼어붙은 호수, 숲 그늘, ...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 이미지는 한결같이 기억되려 하지 않는, 망각하려는 어떤 회피 혹은, 단단히 걸어 잠그려는 힘이 연상된다.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한 폭의 빛조차 손차양을 하여 가리면 어둠, 그늘이 있잖아요 하는 작가의 말 속에서도 집요하게 기억에 도달하려 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평자(評者)는 공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이 작품을 공간의 이미지가 주는 오묘한 힘이라고 긍정적 해석을 하기도 하였지만 내겐 그것은 그저 텅 빈 것으로 두려는, 아무것도 채우려 하지 않는 의식의 공허함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끄집어내거나 마주서기에는 버거운 것이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너무 아픈 상실과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이기도 할 것이며, 혐오스럽거나 혹은 수치스러운 기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의식의 세계로 길어 올려 자기화하거나 영원히 무시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붙들려 있으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한다. 그 세계에 머물러 끝없이 자기형벌과 자기애에 묻혀 그 슬픔의 쾌락에 자신을 적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볼 일이다.

 

소설 속 여자는 가스 불에 올려놓은 물이 끓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손수건이 탁자에서 왜 바닥에 떨어져있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무심함이 가장된 것일까? 내겐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자기행위를 반성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어떤 거부감만이 보인다. 무얼 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 같다. 성장하지 못한 의식세계, 정신질환적 세계의 문턱만이 보인다. 다만, 여자의 일인용 소파에 잠든 어머니를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 그리고 그 옆 바닥에 드러눕는 여자의 행위, 한 줄기 금이 간 얼어붙은 호수에서 어렴풋한 무의식과의 대면의 가능성을 볼 뿐이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는 이처럼 소멸해가는 흐름, 그 두려움에 맞설 용기를 갖기가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린 모두 마주서왔고 그것을 굴복시키는 정신적 진화를 성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 아파하고 거부하고 억압할 만한 일은 아니지 않을까? 더 알고 싶은 작가다. 김수온 작가의 기 발표작들 -행렬,,한 겹의 어둠이 더- 을 챙겨 보아야 할 것 같다.

 

2-3. 우리畜舍의 환대 - 장희원

 

아마 이 작품은 이야기 자체는 모호하지만, 그것을 굉장히 분명한 감각들로 전달하고 있다는 평자의 말처럼 감각의 언어들이 우리 지각의 현상들을 꿰뚫고 지나가게 하는, 그래서 구태여 어떤 너절한 담화나 수사의 필요 없이 삶의 이해에 다가서게 하는 감각과 행위로 현상을 묘파해내는 성취임에 동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 장치라는 것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된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들이 검열장치에 걸러져 변질, 왜곡되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가 손상되는 것을 그 누가 용인하겠는가? 아들과 아버지의 기억은 사뭇 다르다. 아직은 소년이었던 사춘기 시절 영재는 아버지의 무참한 폭력으로 커다란 상처를 새기고 있다.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려, 아빠”,

더러운 놈, 주먹이 탁상에 찢긴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아이를 때렸다.”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들과 아버지, 호주 남서부 끝 퍼스라는 곳에 있는 아들 영재를 만나기 위한 여정, 아이가 살고 있는 초라한 주택에 동거하는 노인과 스무살 여자아이 미영, 이들의 삶과 마주한 재현 부부의 그 어색함이란, 그리고 도망치듯 호텔로 향하는 이들에게서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말끔히 망각해버리곤 기만적인 행위를 일삼는 오늘의 우리들을 생각게 된다. 다만, 작가의 기대만큼 무게있는 부끄러움, 창피함을 돌아보고 타자의 아픔을 알 것 같은 순간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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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화된 신
레자 아슬란 지음, 강주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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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신의 자기표현이다. 당신이 신이다!

   

레자 아슬란인간화된 신(humanized god)'유발 하라리신이 되려는 인간(homodeus)'과 대척점에 위치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양극단을 가리키는 듯한 표현이 이 책을 읽게 한 자극이었다고 해야겠다. 구태여 문장론을 빌어 두 의미가 동일한 주체임을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즉 양자 모두 인간인 주체의 욕망을 말하고 있음에 동의할 것이다. 하라리의 신()영생불멸, 전지전능한 초월적 능력()’으로서의 신이다. 인간이 지니고 싶어하는 궁극의 욕망으로서의 신, 그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한 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려는 인간행동에 대한 반성의 제언이었다.

 

아슬란의 신은 어떤 의미를 담은 신(god)일까? 그 신은 “All is One, One is All. 본질적으로 신은 모든 존재의 총합이며,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당신이 곧 신이다!”로 귀결되는 신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작동할 욕망, 불사(不死), 초월적 능력에 대한 갈망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만다. 어쩌면 이 범신론적 정의야말로 하라리가 경고한 인류공멸을 제어하는 방법론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게 된다.

 

이처럼 이 책은 신이 인간의 창조물이라든가, 신의 존재 증명을 하려는 책이 아니다. 인간 영성의 역사, 혹은 종교의 역사를 통해 신적 존재를 인간 자신의 반영으로 경험하려는 뿌리깊은 욕망, 신이 인간처럼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거의 보편적 현상을 드러냄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혐오와 적대로 이 세계를 휘젓는 종교적 갈등의 원인을 탐색하여, 인간과 이 세계의 본질 규명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랄 수 있다.

이 증명의 여정에서 레자 아슬란은 수 십 만년 인류 역사의 종교 흔적을 따라가며 신에 투영한 인간의 욕망, 그 보편적 충동에 내재된 부조리, 모순, 인지부조화의 현상을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1. ()의 형상들 - 인간의 욕망과 기원이 투영된 인격화된 신들

 

중기 구석기(기원전 20만년~4만년)시대에부터 발견되는 매장(무덤)풍습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인간의 마음에 깃들어 있었음을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영혼과 육신 분리에 대한 믿음이다. 사자(死者)의 영혼이 만물에 깃들어 초자연적 존재로서 숭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충동의 발현이랄 수 있는 현상이 후기 구석기,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완벽한 종교적 형식이 완성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레트루아 프레르 동굴, 볼프강 동굴 등지에서 발견되는 동물과 인간의 복합된 형상, 물질적 세계 너머의 상징, 달리 표현하자면 신의 형상으로 해석되는 일명 야수의 제왕(Lord of Beasts)’ 암각화처럼 반()직관적인 신인(神人; god-man)이라는 종교적 표현이 그것이요, B.C. 12천년~1만년으로 추정되는 우르파의 괴베클리 테페에서 발견된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신들의 모습 조각과 종교의식을 위해 세워진 성지가 또한 그것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고대인의 정신세계에 각인된 신이란 곧 인간의 욕망과 기원(祈願)이 투사된 인격화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금 농업발생과 함께 자연 현상을 신격화하여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과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인격화된 신들을 탄생시킨다.

 

특히 이집트 고왕국(B.C. 2686~2181)시기에 이르면 인간화된 신들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종교 확립을 통해 신의 상징적 기능을 관리 및 나아가 조종하려는 증거들을 접하게 된다. 또한 가장 극명한, 잘 알려진 중기 청동기 시대(B.C. 1600년경)인 미케네로 알려진 그리스 문명에서 등장하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12신이야말로 인간의 속성을 신격화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조건에 대한 사고의 변화를 요구하는 생존환경의 변화는 모든 창조물에 깃든 근원적 실체, 완전한 본질에, 모든 창조물을 조종하는 통일된 원칙이라는 단일한 신, 하나의 신을 상상케 한다.

 

    

 

2. 일신숭배(一神崇拜)와 일신교(一神敎)

 

이같은 하나의 신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은 이집트 신왕조시대인 B.C. 1335년경 통치를 시작한 아멘호테프(일명 아케나텐)의 태양신 아톤의 일신교적 세계관의 제국 전체에의 강요로 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사후 다신(多神)을 섬기는 세계로 회귀하고 만다. 인간의 특성, 선과 악, 사랑과 폭력이 하나의 존재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지역과 민족 저마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수호신이 들끓는 세계에서 단일한 신이란 가당치 않았다는 것이다.

 

B.C. 1100년경 차라투스트라 스티타바에 의해 진실, 미덕, 정의와 같은 추상적 개념의 인격화로 탄생한 일명 조로아스터교 역시 아후라 마즈다(지혜로운 주;)’라는 하나의 신을 섬기는 일신교를 지향하였지만 뿌리 내리지 못했음은 모두가 아는 바다. 이처럼 일신교가 인류의 역사 내내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는 유일신이라는 개념이 신적인 존재를 인간화하려는 인간의 보편적 충동과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아슬란은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일신숭배와 일신교의 차이를 구별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전자는 다른 신의 숭배를 배제하지 않으며 만신(萬神)중 최고의 신을 섬기는 것이며, 후자는 다른 신은 모두 가짜라는 배타적 유일신을 섬기는 것을 지칭한다. 이 구별은 인간 사유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러 특성을 지닌 다수의 신중 최고의 신인 주신(主神)과 애초부터 이러한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단일신(單一神)의 상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점이다. 특성간의 모순과 충돌이 하나에 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엄청난 인지적 노력을 요구하는 사유의 진척이 있어야 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인격화된 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밖에 없다. 신을 탈 인간화하는 것이다. 신에게서 인간의 속성을 모두 떼어내고 신을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창조적 본질이라 재()정의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인간과 인간사회가 그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아니 오늘에도 여전한 측면이랄 수 있다. 이 개념이 합당하려면 신의 개념이 먼저 생겨나야 하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의 믿음에 대한 인지과정이 부정되는 것, 즉 형상없는 존재의 형상을 생각해내야 하는 비현실적이고 어려운 과제였다는 점이다. 아마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종교들에서 특별한 통찰력 없이도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 “인간세계를 기초로 한 하늘의 왕국은 지상의 거울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는 '정치사상(政治寫像; politicomorphism)'이라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정치현상이 종교체제에 투사 반영되는 것 말이다.

 

유대교가 확립되는 B.C. 1050년경 통일왕국을 형성하는 이스라엘이 권력의 중앙집중, 즉 인간의 지배방식이 바뀌면서 신들의 지배방식도 지상에 맞춰 변화했던 것은 정치사상의 직접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미디안 지역의 군신(軍神)이었던 야훼’, 모세의 신 야훼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낯선 존재였다는 것이다. 황소, 송아지 모습으로 묘사되었던 가나안의 최고신 은 일종의 주신이었으며, 신들의 옥좌에 오른 왕, 최고신의 프로파간다 수단인 시편(82, 97)의 묘사는 이러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시기에도 여전히 일신숭배의 주신(主神)에 불과했던 야훼가 유일신이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인지부조화의 극치인 현상을 목격하게 한다.

 

바빌로니아의 통치자 느브갓네살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 이스라엘에게는 바빌론의 신 마르두크에 의해 야훼가 여지없이 패배한 민족적 야망의 종말, 종교의 종말이었다는 점이다. ‘바빌론 유수는 정체성 위기를 초래했으며, 과거 역사의 재검토, 종교적 관념의 재해석을 요구하는 인지부조화를 촉발했다는 것이다. 패배한 신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네들에게 인격화된 주신 야훼는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단일신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지만 인간을 자기형상대로 만든 단일한 신, 인간의 좋고 나쁜 감정과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영원하고 분할되지 않는 신이라고 아슬란은 재정의 된 유대의 단일신을 묘사한다.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비합리적 문장에는 숨겨진 조롱으로 그득 차있다.

 

이후 500년이 지나 느닷없이 그리스도(christian)’를 자칭한 종말론적 유대교 종파에 뒤엎어진 신()”의 출현은 요한복음(1:1)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로고스는 신과 함께 있었고, 로고스는 곧 신이었다.” , (1:14) “로고스가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구절만큼 느닷없고 터무니없는 비합리와 모순으로 넘쳐난다고 아슬란은 지적한다. 더구나 예수는 유일한 신이 취한 단 하나의 인간적 형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면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이 이를 수용하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을지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로지 하나의 신만이 존재하며, 분할되지 않는 신임에도 신이 둘이라는 부조리함은 둘째로 치고,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의 논쟁은 이신론(二神論)까지 낳으며, 오늘날에 이른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결정한 니케아공회의의 타협안, “아들 예수는 아버지 신과 함께 하나의 실체를 이룬다.”에 이르면, 기독교 역시 얼마나 끈덕지게 인간화된 신의 욕망, 즉 인간의 원초적이고 깊이 내재된 충동에 철저히 순응하고 있는가를 발견하게 된다.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일신교랄 수 있는 무하마드 이븐 압드 알부탈지브에 의해 탄생한 야훼와 동일한 신이라고 칭한 알라를 섬기는 이슬람교도 이러한 인격화된 신을 비켜나가지 못한다. 쿠란에는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한 구절로 가득하다고 아슬란은 지적한다. 게다가 창조주가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니, 분할되지 않는 신이 어떻게 창조주와 창조로 분리되었는가고 묻는다. 이슬람신학계에서는 이를 잡소리라고 일축하는 모양이지만, 분할되지 않는 것에서는 어떤 것도 생겨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지 않은가?

 

3. ()인간화 된 신 - 인류 미래에 대한 믿음의 제언

 

()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만큼 인류에게 위험천만한 물음이 없을 것이다. 이 모호한, 상상불가한 의문은 인류 문명의 건설과 파괴, 평화와 변영과 전쟁과 폭력의 세계를 오가게 한다. 인간 욕망의 투영, 정치사상(寫像)이기에 그럴 것이다. 자기의 믿음만이 진실이니 그 답변의 동질성 여부에 따라 배제와 배타, 구별이 시작된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에 생명을 주는 힘, )신격화한 자연이 되면,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호모데우스로 별칭되는 자못 위험천만한 세계로 치달으며, “ )인격화한 신인가? )신은 곧 인간인가? ”에 이르면 종교간의 비난과 갈등으로 폭력의 세기를 낳는다. 그렇다면 )우주에 스며든 추상적 힘인가?” “창조자와 창조는 항구적이고 구분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는 본질을 정확히 똑같이 공유하는 신()”이라면 어떤가? “어떤 것도 신과 관계없이 존재할 수 없다. 신 이외에는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라고 주장하는 범신론 철학자 '마이클 레빈(Michel P. Levine)'의 탈 인간화된 신이라면 우리들은 파괴와 폭력, 혐오와 증오를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인격화된 신은 모순과 부조리, 논리적 비합리, 인지적부조화로 가득한 실체이다. 이 믿음을 전환할 새로운 변화의 시기, 다신을 섬기는 세계에서 단일신으로 이전하는데 엄청난 사고의 변혁이 요구되었듯이 다시한번 사유의 대변혁이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레자 아슬란은 말한다. “나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든 존재들을 신처럼 대한다. ...(中略)... 자신의 영혼을 아는 사람은 주(;God)를 아는 사람이다.” 라고. 세계는 신의 자기표현이며, 세계는 신의 본질이 현실화되고 구체화된 것이라는 이 믿음은 어쩌면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미래의 인류를 위해 절실한 사유의 전환이 되지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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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이 닿는 순간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 - 촉각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의 과학
마르틴 그룬발트 지음, 강영옥 옮김 / 자음과모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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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는 정념과 감정의 거울이다.”

                                     - 애슐리 몬터규 터칭(Touching)에서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그의 저서 지각의 현상학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면을 만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예견할 수 있다.”라고 주체의 몸’, 고유한 몸의 종합으로서 신체접촉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선언하기도 했다. 나는 내 신체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 어떤 관념적 실체가 달리 실재하고 있어 그것이 사유하고 판단하며 반성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내 신체의 종합을 인지함으로써 나는 외부 세계의 공간과 시간적 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나의 실재함, 실존적 느낌을 갖는다. 내 몸을 촉각으로 감지하며 어느 것이 나의 신체 부위에 속하고 아닌지를 구분할 줄 안다. 만일 이러한 촉각체계가 없었다면 나는 나의 실존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내 실존에 대한 이해와 달리 지금 우리의 세계는 몸을 소비의 대상, 기계화된 물질, 한낱 대상화된 무엇으로만 이해하며, 타인의 몸은 경계와 혐오, 두려움, 회피의 대상으로 치닫는다. 이제 접촉이라는 언어는 한없이 낯설고 어떤 흉물(凶物)의 인상까지 덮어쓰고 있다. 접촉, 촉각을 폄훼하고 지워버리는 세계, 감각의 현재성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나와 너,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를 생각게 된다.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감각이 차고 넘치는 세상은 일찍이 없었다는 주장이 들려오기도 한다. 아마 무진장한 시각적 감각에 쇄도해오는 다양한 감각채널들을 염두에 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결코 옳지 않다.

 

이 주장은 감각의 외피에 싸인 지식과 정보를 말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단말기와 데이터 중심의 문명은 감각을 열등한 것으로 밀어젖힌다. 개인과 개인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감소시키는 문명이다. 접촉 상실의 문명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이곳에서 인간의 신체는 소외되고 고립된 채 실존적 위기로 고통스러워한다. 바로 오늘 한국인의 삶을 대표하는 어휘가 혐오, 비혼, 혼밥인 것은 접촉이라는 타자와의 관계가 이질적이 되어버린, 실재적 감각의 세계를 상실해가고 있는 세계의 다른 표현이지 않겠는가? 손을 잡고 포옹할 때 애정의 온기와 볼을 만지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인정과 칭찬의 기쁨, 이들 긍정의 감정들이 균질화되고 통제된 주장들에 의해 왜곡되어 멸실되고 있지 않은가?

 

서두가 지나치게 길어졌다. 나는 이 책을 이처럼 상실되어가는 인간 신체의 접촉을 회복시키기 위한, 즉 타자성의 회복을 통해 삭막한 인간세계가 관계가 넘쳐나고, 사랑과 존중, 안락함이 풍부한 세계로 전환해 나가는 근원으로서 촉각의 체계, 피부자극이라는 접촉의 생물학적, 인류학적 반전의 세계를 그려보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인간 개체에 있어서 제2의 뇌, 혹은 피부의 정신으로 불려야 하는 촉각체계가 지니는 생명체의 성장과 발달에의 의학적, 생리학적 영향에서 심리학적, 문화적 영향의 양태에까지 광범위한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피부는 신체에서 가장 넓은 감각기관이며, 감각은 피부에 가장 밀접하게 관계한다. 더구나 촉각은 인간 배아에게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이다. 왜 촉각이 처음으로 발달해야하는 것일까? 촉각을 통해 태아는 끊임없는 자극의 반복 학습을 통해 신체인식, 위치탐색 등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초지식은 물론 감각구조의 협력 체제를 완성해 나간다. , 지속적인 자기 접촉은 신체와 동작과 자의식을 형성시키는, 자아개념을 각인하는 과정이랄 수 있다. 그래서 접촉은 태초의 지식으로 불린다.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시작되는 태초의 촉각 체험들은 이처럼 자아와 신체도식의 형성, 신체적 친밀감, 긍정적 감각의 깨우침으로, 모방이라는 사회적 학습과 인식으로, 지각, 인지 능력은 물론 사회적 판단과정에 전방위적인 영향을 미친다. 받은 촉각 자극의 질은 유기체 전 기관계의 질적 발달에 직접 관계한다. 그렇다면 피부접촉의 자극이 없는 인간 유기체에게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게 될까? 지속적 접촉 결핍을 겪는 아이는 신체, 사회, 감정, 인지 능력의 저하는 물론 뇌의 발달이 지연된다. 친밀감과 애정이라는 식량, 신체적 친밀감의 결핍은 발달장애는 물론 영유아의 사망까지 불러온다. 책은 촉각의 감각이 인간생명체 활동의 원천적인 자양분임을 입증하는 사례들이 이처럼 빼곡하다. 굳이 스킨십이 신경전달물질 세로토닌을 분비해서 심리적 이완을 돕는다라든가, 성행위 후 옥시토신 농도가 가장 높아 느슨한 황홀경의 마비로 긴장완화에 유익하다든가, 혹은 접촉자극이 면역체계를 안정시켜 염증억제 가속화 효과가 있다와 같은 인체 약국작용으로서의 신체접촉을 수다스럽게 늘어놓지는 않겠다.

 

그러나 빼놓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오늘의 인간이 물질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음에도 인간 개체는 물론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실로 지대한 영유아의 촉각자극은 타자성 상실과 관련하여 사유의 방편을 제공한다. 엄마와 아빠의 부드럽고 애정어린 손길, 모유 수유와 관련하여 아기가 체험하는 신체자극이 어떤 인간들을 만들어 내는지를 알게 된다면, 유모차에 분리되어 앉아있는 아기들, 출산하자마자 엄마와 분리되어 육아실에 격리되는 아기가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놓이는지 알게 된다면, 그러한 시대에 성장한 아이들로 구성된 오늘의 사회가 왜 이처럼 접촉을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는 내내 타인과의 접촉을 이어가야하는 개체에게 촉각 욕구를 빼앗는 세계에서 이상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어쩜 지극히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스마트폰 터치패드에 연신 검지손가락을 문지르는 소외된 인간들, 기술을 매개로 하는 세계는 사건을 지각하는 과정을 대폭 축소시킨다. 활동과 활동의 연쇄적 반응, 연결관계는 훨씬 어렵지만 그만큼 인간 개체의 성장과 개체들간의 관계 발전을 돕는다. “만지는 것이 곧 앎이다.”라는 말만큼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문장은 없을 듯하다. 지구촌 곳곳에서 미투운동의 바람이 거세다. 여성차별의 오랜 역사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평등한 성의 구현을 실현하자는 윤리적 외침이 이제는 성()간의 혐오와 파멸로 치닫는 양상마저 보인다. 이들 세계에서 접촉, 터치의 세계는 범죄가 되고 만다. 과연 촉각이 문제인 것인가?

 

책은 이외에도 촉각 경험이 지니는 일상의 실용적 사례들도 그득하다. 특히 산업부분에서 촉각이 발하는 유용한 효과들, 협상과 설득에서, 촉각 광고문구나 제품 디자인에 있어서 촉각호기심 자극이나 촉각체험의 마케팅적 활용의 가치를 소개하기도 한다. 비교적 작은 분량의 소책자이지만 인간 촉각체계에 대한 다양한 사유의 가지를 뻗어나게 하는 터전을 제공하는 시의성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겠다. 각양의 분야, 다양한 관점에서 촉각, 접촉의 세계를 감각하는 시간이 되어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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