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2 - 천문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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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인문편이 강호고수의 걸출한‘구라빨’이었다면 2권인 천문편은 주역(周易)을 중심으로 풍수와 사주, 관상이 어울려 사람답게 사는 법, 자연과 화친하는 법등 우주의 섭리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까. 해서 산과 강, 자연이 있고, 천지의 질서인 태양과 달을 말하며, 유약한 인간이 섬기는 신의 세계인 종교가 있고, 우주 질서 속의 미물인 인간의 운명을 말하고 있다.

‘보약 세 첩 먹는 것보다 등산이 좋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등산 예찬을 하면서, 40~50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 3대 종주코스를 완등(完登)해 보라고 권유한다. 그러면서 고단백 에너지 코스로 바위의 화기(火氣)와 계곡물의 수기(水氣)가 이상적으로 버무려져 있는 백담사에서 봉정암 올라가는 길이 최고라고 적절한 중용의 길을 안내한다. 산을 오르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통즉등산 通則登山, 궁즉입산 窮則入山”이라고 즐거워서, 또는 삶의 궁지에 몰려 구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든 묶었던 노폐물이 걸러지는 상쾌함과 다 올랐을 때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이면 삶이 평화로워지는 것처럼 입산이건 등산이건 한 번 날 잡아 떠나야 할 터이다.

양기가 뭉친 명당이라는 지리산 남쪽의 악양(岳陽), 봉우리들이 뾰죽하여 화기가 넘친다는 화체산인 화왕산과 200칸 규모의 고택인 아석헌(我石軒), 속세의 먼지가 없는 절경인 관동팔경과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교장, 논산 노성리 윤증고택 등 풍수에 얽힌 재담과 이들에서 맛보는 별미인 무장공자(無腸公子)와 탕중왕(湯中王)이라면서 얼마나 맛있었으면 먹을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죽지말자”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민어탕에 이르면 역시 저자의 입담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자연 모두에서 절절한 사연들을 쏟아내는 이야기들을 보다보면 궁극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통하는 거대한 줄기를 발견케 된다. 선탠이 있으면 문탠(moontan)도 있어 매월 보름에 달의 기운을 받으면 오장육부에서 달 월(月)자 들어가는 장(腸)과 부(腑)가 튼튼해지고 감성에너지가 회복되어 화병이나 우울증을 다스리는데 좋다는 해설처럼 건강하게 살다가 평온하게 죽는 방편의 고수다운 인생지침이기도 하다. 문득 사람이 죽으면 지수화풍의 4대로 흩어지는데,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미세한 조짐에 대한 감지를 말하는 구절에서“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 中略 ~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하는 마종기 시인의 <바람의 말>이라는 詩구절과 겹쳐, 내 곁을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이 그 누군가일 것 만 같아 조심스러운 긴장이 돌기도 한다.

한편 저자는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않으면서 넌지시 도덕을 야기하고 인물이나 정치사회의 일면을 은근슬쩍 비판하는 세련됨도 선사한다. 명당자리에 묻히면 후손들이 잘 될 거라고 명당을 찾지만, 풍수에도 윤리가 있단다. 도덕적 자격에 미달하는 자에게는 발복(拔福)하지 않는단다. 그러하니 적악자(積惡者)가 제아무리 명당에 묻히더라도 복하고는 인연이 없다니 살아서 공덕을 부지런히 들 쌓아야 할 터이다. 특히 이 저작에서 풍수법 하나를 배웠다면 화기와 수기에 대한 것으로 소득이라면 소득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년 전 소실된 숭례문이 정면에 화기가 넘쳐나는 관악산 때문에 이를 잠재우기 위해 비보(裨補:모자라는 것을 채워줌)용도로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두었었다는 것이다. 금싸라기 땅이고 도로확보 때문에 메워버려 표지판만 남아있다니, 만일 이 연못이 있었다면 역사적 유적이 그렇게 맥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만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결과론이긴 하나 풍수론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돌산(돌산-관악산-서울大)은 불이고, 기가 세단다. 그리고 돌 속에 잠재한 광물질로 인해 뇌세포의 활성화를 도와 암석위에 사는 것은 정신을 많이 사용하는 직업에게 좋다니 어디 돌산위에 지은 집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래서인지 지반이 온통 돌인 평창동, 구기동이 고급주택가로 뒤바뀐 것을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팔자니 관상이니 궁합이 맞느니 그렇지 않느니 하는 것에 사실 아예 관심이 없는 내게는 이 저술 중 예언, 사주, 관상을 말하는 운명의 장은 내키지 않는다. 다만 전, 현직 대통령의 관상을 동물의 유형에 빗대어한 운명 풀이처럼 심심풀이 장도 흥미롭거니와 나이 쉰이 넘으면 얼굴에 격(格)이 천격과 귀격으로 정해진다는 성찰은 나름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탐안(貪顔), 진안(嗔顔), 치안(痴顔)은 아닌지 거울을 한 번 들여다보고, 지안(知顔), 호안(好顔), 낙안(樂顔)이면 잘 산 얼굴 아니겠는가하며 또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즐거움이 어려 있는 얼굴이면 좋겠다. 우리의 수려한 산천과 고택 사찰은 물론 천문의 신비를 주역으로 풀어내어 들려주는  삶의 이치가 저자의 넉넉한 품성만큼 여유롭고 풍요롭게 수록되어 있는 역술 기행이라고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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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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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귀신(鬼神)하면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붉은 피를 흘리며 소름끼치는 흐느낌을 하고 나타나는 처녀 귀신의 공포를 떠올린다. 이렇게 고정화된 이미지와 귀신 이야기는 서늘한 두려움과 공포로 무더위를 날려버리겠다는 납량(納凉)물과 같은 단지 흥미의 산물이기만 한 것일까? 이들 귀신 이야기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의 본질적인 내면은 무엇일까? 왜 귀신하면 우리는 여자 귀신을 떠 올리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었던 사회적인 무슨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 저술은 이와 같은 한국의 귀신에 대한 조선후기 대표적 야담집인 『동야휘집』,『기총문화』,『청구야담』을 비롯하여, 고소설에 나타난 귀신이야기를 통해 문화적, 사회적 기호로서 표상된 이야기의 본성과 정신을 해독하고 있다.
“생사의 경계에서 삶과 죽음이란 이원적 구분을 조롱”하는 존재이자, “생기를 먹고 사는 사신(死神)의 기호”로서“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 낸 가학적 증거물”이라고 귀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있는데, 아마 죽었음에도 억울하고 분한 원한으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넘보며, 하나같이 귀신을 보면 그만 죽어버리는 현상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귀신이 나타나는 순간 현실적 규범과 질서에는 균열이 생기고 세계는 혼란에 빠지는데 현실이라는 삶에 죽음이라는 귀신의 충돌은 이미 우주의 질서를 교란하는 대 혼란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소복을 하고 흐느끼는 여성이 한 밤중에 나타난다면 소스라치는 놀라움, 그 충격은 물론 아마 심장이 멎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귀신이야기에는 유독 처녀귀신이 주로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당시 한문으로 써진 야담의 독자, 즉 이야기의 향유층이 사대부 남자였다는 점과, 당대 여성은 살아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가당한 일이 아니었으니, 오직 죽어서만 소위 ‘말하는 입’을 가질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던 여자들이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야기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性)의 구분, 즉 성의 차별적인 요인을 발견 할 수 있다. 야담과 고소설 등에 등장하는 귀신 중 한결같이 억울하게 죽은 원귀(寃鬼)나 자살귀(自殺鬼)는 여자귀신이며 통계적으로 여자귀신 대비 10%에 불과하게 간혹 등장하는 남자귀신의 경우 가족을 수호하고 미래를 알려주는 조상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귀신 이야기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건 향유층인 사대부 남자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보편성을 덧입힌 방편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을 들 수 있는데, 나타난 처녀귀신은 자신의 원한을 직접 복수하지 않고 꼭 남성인 관리들에게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이야기를 잘 못 살피고 있는 것으로서, 귀신의 호소는 원한을 복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선택하거나 죽게 된 사회적 여건을 말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여 훼손되고 추락한 자신과 가문의 자존심을 복구하는 데 있었기에 불가피한 것이라는 측면을 알게 되면 당연한 맥락임을 이해케 된다. 다시말해 귀신이야기는 “현실의 모순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교정을 요청하는 전복의 서사”이며, “현실의 복구를 강렬히 희구하는 환원의 서사”라는 것이다.

이처럼 귀신들이 털어놓는 사연은 타의에 의해 억눌린 감정과 출구를 봉쇄당한 말들로써, 억울함과 분노, 슬픔과 절망으로 버무려진 순도를 상실한 묵은 감정이라는 억울함이 뒤섞인 불편한 정서로서, 그 실체는 바로‘한(恨)’이라는 것이며, 이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에 적절한 수단과 과정으로서 사대부 남성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납득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와 관련하여 원혼이 되는 여인네들의 자살에 대해서 물음을 갖게 되는데, 그녀들의 자살을 과연 개인적인 책임으로만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고찰하는 기막힌 이야기 한편이 소개되고 있는데, 충(忠),효(孝),열(烈) 삼강(三綱)의 덕목을 동시에 완수하고 희생된 여종의 이야기로서 자신을 탐한 양반을 죽이려는 동료 노비들의 낌새를 알아차리고 양반에게 미리 이를 고하여 죽음을 면케 하면서, 이들 노비들을 처벌할 때 대신 자신의 아비만은 살려달라고 청한 후 자살한 여종의 이야기이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던져 사대부 양반남성에게 충하고 노비인 아비에게는 효하며, 지아비에게는 열하였다는 것으로 이에는 여자의 슬픔이나 고통보다는 외적 명분에만 관심을 보내는 문화적 맥락을 살 필 수 있는 것으로서 자살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의 다름 아니었음을 발견케 된다.

한편 여인네들의 간절한 소청을 물리쳐 그 수치심과 좌절로 자살한 여인네들이 원혼이 되어, 자신들의 요청을 거부한 남성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것에서, 상처받은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즉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자의 출세나 성공은 좌절되어야 한다는‘시대적 합의’가 깃들어 있으며, 이는 곧 귀신이야기라는 공포의 기호가 문화적 건강성의 자리로 탈바꿈하여 사회적 건강성의 지표로서 작동하였다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귀신이야기는 저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현실의 이야기이며, 귀신담의 공포는 엄밀히 말해 귀신의 복수가 아니라 가해자의 죄책감, 자기처벌의 형식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즉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 발설하여 불합리한 현실을 준열하게 비판하는 정신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무방비의 복색인 소복을 한 쳐녀귀신의 패션코드로부터 한국사의 트라우마인 장화홍련, 금오신화의 여자귀신들과 같은 흥미롭고 기발한 이야기와 인문학적 독해는 물론, 다채로운 귀신담들의 소개와 이에 대한 사회사적 성찰, 게다가 “귀신의 말하기는 문화적 위험지수에 대한 안전장치이자 일종의 경고음이다.”라는 문화인류학적 통찰까지 우리 전통문화의 한 기호에서 화려한 정치도덕적 소통 도구를 발견케 하는 한국문화 해석의 정수라 할 수 있다. 이제 귀신은 개인 정체성의 형상화가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를 환기하는 장치로서 해독되는 하나의 문화적 기호임을 명료하게 환기시켜준다. 어쨌거나 30여 편의 귀신 이야기로 짜여있는 이 저술이 귀신이야기를 사회적 책임과 죄의식이 만들어 낸 공통의 문화적 사유임을 설파하고 있지만, 바로 이 예리한 해석을 수반하고 읽게 되는 귀신담은 재미에 그 상상력이 더해져 대단히 매혹적인 저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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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닷되
한승원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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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을 되돌아보니, 아물아물 안개 속의 음화 한 폭이네. ~ 그 슬프면서도 설레던 시의 편린들을.” - 본문 P10 中에서

뉘엿뉘엿 황혼이 검붉게 물드는 인생의 시간은, 작가가 노래하듯 성장의 진통을 겪던 어린 시절의 그 아릿하고 시린 기억들이 아름답고, 슬프고, 또한 설렘이 교차하는 안타까움인가보다.‘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파우스트’를 자신에게 비유하였듯이 젊은 날의 기억인 이 소설을 위해 작가는 자신의 악마인“시꺼먼 놈”에게 영혼을 저당 잡혀야 했을 만큼 그 꽃 같은 시절로의 회귀는 간절함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었던 것 같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에세이처럼 펼쳐지던『해산 가는 길』이라는 작품의 연작으로서 『보리 닷 되』는 인생길의 선택에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성년 이행기의 자전적(自傳的)소설이다. 작가의 문단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신춘문예 당선작인, 단편소설「목선」이 탄생하기까지의 젊은 날의 치기와 오기에서부터 실패와 성공에의 갈등,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 만 같던 좌절의 운명을 교정하는 집념의 시간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른다. 가부장제의 전통, 병영국가의 획일적 군사문화, 겉보리 닷 되로 상징되는 가난한 삶의 끈적거림에 대항하고, 애틋한 사랑과 세속적 성공이 소설가 시인이 되고자하는 청년의 삶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친다.

빗나가기만 하는 형의 그릇됨을 방기하여 장자세습의 전통에 저항하는 둘째의 심리가 비밀스럽게 고백되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학교 악대원이 되어 엄격한 획일성을 강요하는 교련시간을 피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유로운 영혼의 본성을 엿보게 된다.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거예요.”라는 소박한 꿈은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과는 괴리된 실패의 삶으로 이해되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도, 연인에게서도, 형제로부터도 외면되는 것이었으니, 집안의 일손을 돕기 위해 쟁기질하고 김을 뜯어야 하는 문학청년의 번민은 자신의 현실이 과연‘성공을 준비하는 것인지, 실패를 준비하고 있는 것인지’, 시름을 깊어만 가게만 한다.

한편 소설에서 주인공‘승원’은 오금의 고질적 피부질환으로 수시로 긁어대는데, 바로 이“오금의 환부”는 긁어대어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아 걸음에 불편을 주는 고통이지만, 마구 긁어대면 가려움과 아픔을 한 순간에 덮어버리는 환장할 것 같은 쾌감이기도 하듯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역설이자 인생의“모순된 슬픈 거래”로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장애로서 따라다닌다. 그래서 이 오금의 가려움증이 낫게 될 때, 비로소 성장의 통증은 치유된다.

“소설가의 말로는 좋지 않다”는 아버지의 반대에 저항하여 가출하고는 머슴살이의 반복되는 노동에서 언덕위로 돌을 나르는 시시포스의 영원한 형벌을 생각하지만, 바로 이 영원할 것만 같은 동어반복의 고통에서 탈출시키는 것은 자신일 뿐이라는 깨달음, 그리고“오직 혼자만의 지혜와 판단과 힘으로 이를 갈면서 올바른 물길을 찾아 배를 저어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바닷가 거룻배 위의 교훈처럼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가는 것이 삶임을 어느 순간 우린 터득한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원고지 팔십팔 매의 단편소설「목선」이 게재된 신문을 아버지 영정 밑에 걸면서, “아버지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라는 주인공의 울음석인 자부심의 목소리가 짠하게 울려온다. “실패를 준비하는 삶을 기록하는 것”이 진짜 소설 아닌가? 하는 주인공의 외침처럼, 우린 누구나 다 이렇듯 자기만의 부대낌과 통증을 앓으면서 어엿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이제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 해산 토굴마당에서 소설가로서 그의 문학적 뿌리가 된 꽃 같은 시절의 추억을 들려주는 이 소설에서 진정“파릇파릇 새싹들”이 움트는 것을 확인케 된다. “시쓰기와 소설쓰기에 확실히 미쳐버린다는 조건”으로 영혼을 맡기겠다는 계약을 한 작가처럼 내게 다시 세월을 돌려준다면 난 무엇을 약속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맡아지던 유향, “곡신(谷神)의 향기”라 했던가? 아름답게만 기억되는 그 철없던 어린 시절이 문득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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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7
조지 오웰 지음, 김기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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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란 이 자전소설은 조지오웰이라는 필명으로 본격적 작가의 인생을 시작한 1933년 발간된 그의 최초 작품이다. 오늘의 경제적 사회적 현상과는 사실 많은 괴리가 있지만 “가난 그 자체”를 쓰려했다는 작가의 선언처럼 가난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 본질과 이를 만들어내는 사회, 사회의 왜곡되고 편협한 시선을 교정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을 탐지할 수 있다.

소설로 분류되고 있지만, 파리 빈민가의 하층민들과 섞여 그들의 힘겨운 일상과 호텔 접시닦이 등을 통한 생존을 위한 분투와 런던 구빈원을 들락거리며 걸인을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통찰하는 일종의 밑바닥 삶에 대한 체험기이자 사회고발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인숙 숙박비와 빵 값을 조달하기 위해서 일자리 찾아 헤매지만 청소부, 접시닦이와 같은 허드레 일도 주어지지 않는 일상이 지속되고, 급기야 굶주림과 하늘을 가린 냄새나고 불결하며 조잡한 안식처인 여인숙마저도 유지하기 힘든 날이 계속 된다.

“사람이 처음으로 가난에 부닥치게 되면 아주 묘해진다. ~ 무시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저 궁상맞고 진절머리가 날 따름이다. 처음에 발견하는 것이 특유의 구차스러움이다. 편법과 비굴한 쩨쩨함...”

그리곤 가난이 지닌 장점으로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리고, 마침내 밑바닥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주는 쾌감을 말하는데 이르면, 가난이 사람을 정상적으로 온건하게 살고자 하는 노력을 왜 포기하게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욕설이 난무하고 허리를 펼 수조차 없이 낮은 지하의 지저분한 호텔 주방에서의 접시닦이로 하루 17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리면 잠이“휴식이라기보다는 관능적인 무엇, 즉 탐닉과 같은 것”이라는 잠의 진가를 말하는 화자(話者)의 고통이 그대로 전달된다. 현대의 노동자란 사실 노예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임금에서 일전 한 푼 저축하기 불가능하고 겨우 연명할 정도이며 죽도록 아니 악착같이 일하지 않으면 그나마 기다리는 것이 헐벗은 굶주림 박에 없을 때 선택이란 자유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유일한 휴가는 해고당했을 뿐이라는 자조(自嘲)섞인 유머는 육체적 노동을 숭배하고 신성하다고 부추기는 맹목적 설교의 허위를 강타한다.

런던으로 건너와 전당포에 잡혀먹을 옷가지조차 없게 되자 부랑자 구호소를 전전하게 되는데, 부랑자가 재활 할 수 없도록 조장하는 당시의 구빈시스템을 고발하고, 나아가 물질주의에 침몰된 상실되어가는 인간 존엄성과 자선, 구빈을 말하는 사회주체의 위선, 가진 자들의 폭력적인 격리체계임을 지적하고 있다. 단지 적절한 생계비를 벌지 못한다는 이유로 경멸 받는 부랑자들, 결국 능력이니, 효율성이니 하며 돈이 미덕을 가늠하는 위대한 척도가 되어 이 기준에 맞지 않기에 멸시당하는 것은 웃기는 이야기란 것이며, 만일 구걸로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면 존경 받는 직업이 될 것이라고 자본주의 물질 지상의 이념에 조소를 보내기도 한다. 예배를 조건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교회의 위선적인 자선이 그네들에게 얼마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지, 생활방식의 결과를 원인으로 호도하여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은 타고난 악덕이 아니라 바로 영양실조였다.”라는 사회 편견에 대한 냉소적 시정의 이 한마디는 이 작품의 전체를 설명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비록 한 세기라는 격세지감이 있지만 소외받는 하층민과 빈곤에 대한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케 하여 사회 공동의 일원으로서 우리들의 자세와 태도 교정에 소박한 일조를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930년대의 영국과 프랑스 사회 서민들의 일상을 보는 사료적 재미뿐만 아니라, 오웰의 이후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경험과 시선을 만끽 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엿보는 기회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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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소설집에는 예나 지금이나 유토피아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실상을 우화적으로 비판한, 오웰의 작가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해준 <동물농장>이 수록되어 있는데, 봉사의 즐거움과 노동의 존엄성에 대한 그럴듯한 감언이설로 기만을 하는 지배자의 탐욕이나, 당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권력투쟁과 사회주의의 폭력과 위선, 그리고 실패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읽을 수 있다. 볼쉐비키의 멘쉐비키에 대한 잔혹한 처단이나 인간 해방을 부르짖는 이면의 암울한 실상이‘수퇘지 나폴레옹’이란 독재자를 통해 비유적으로 흥미롭게 그려지고 있다. “누가 돼지인지 누가 사람인지 구별하기란 이미 불가능 했다.”고 맺는 이 소설은 인간이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다른 어떤 동물의 이익을 위해서도 봉사하지 않는다는 개인 이기주의 본성에 대한 신랄한 반성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유의 지평을 넓혀주는 고전은 아무리 반복해서 읽어도 그 재미를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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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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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영어표현인 'Justice' 의 사전적 의미는 공평성, 공정성으로 해석되고, 우리말 사전은“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올바른 도리’나, ‘공정한 도리’, ‘공평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 대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에 이르면 그만 모호해지고, 수많은 견해들이 갈등한다.

이 저작에는 우리들이 좀처럼 결정을 할 수 없는 질문들이 예시되고 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표류하는 4인이 있다. 그러나 병약한 17살 소년을 죽여서 먹으면 나머지 세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래서 살해하여 식용하면서 연명했고 드디어 구조되어 생환했다. 과연 이 행위는 정의로운가? 우린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여기서‘제레미 벤담’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功利主義)이론을 통해 한 명의 고통을 통해 세 명의 행복이 달성 되었으니 정당하다고 주장해보자. 정말 그럴까? 그러나 생존자와 생존자 가족의 기쁨을 고려한다 해도 이러한 죽음을 허용할 경우 사회전체의 행복이 증가할까 하는 질문에 이르면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더라도 결코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지는 못하다. 나아가서 도덕 문제를 모조리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 측정하려는 공리주의가 빠뜨리고 있는 것이 분명 있지 않을까?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의지에 반하는 죽음 즉, 개인의 권리를 소홀히 취급하는 자유의 권리와 충돌하고 있지 않은가? 좀체 정의를 획일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가능치 않을 것 같다.

저자는 정의를 공리주의자들의 행복을 비롯해서 자유와 미덕이라는 세 가지 이상(理想)을 통해 고민하고 있다. 한 가지 문제에 공리주의적 관점, 자유지상주의자의 관점, 칸트의‘순수실천이성’과 정언명령에 의해서, 그리고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이라는 원초적 평등에 기초한 차등원칙,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telos:목적,본질)와 영광이라는 삶의 목적론적 사고에 의한 도덕적 미덕으로서의 판단이 어떻게 개인과 인간사회의 정의에 관여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일례로서 우리의 헌법은 적정 연령에 이른 남성을 징집대상으로 하고 군에 입대하여 국방의 의무를 부담 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만일‘대리복무’제도를 헌법에 도입하여, 즉 적정의 댓가를 지불하고 누군가를 대신하여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는 정당한가? 아니면 부당한가? 부당하다면 왜 부당하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대리복무가 아니라 납세자들이 세금을 조금 더 부담하여 아예‘자원병제’를 도입하여 희망자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하여 복무케 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대리복무보다 더 도덕적인가? 자유주의자들은 징병제는 심각하게 개인의 자유, 즉 선택을 제한하는 노예제라 비판할 것이고, 공리주의자는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전체의 행복을 감소시킨다고 비판할 것이다. 이들 자유주의자와 공리주의자의 비판은 옳은 이야기일까? 만약 오류가 있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자원병제나 대리복무제는 애초에 공정성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청년실업이 상습화되어 가난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것 아닌가. 결국 강제의 형태만 다를 뿐 사실상 자원군은 경제적 어려움이 강제하고 있는 것으로 이미 기회의 균등이 적절하지 못하며, 자유로운 의사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군 복무를 상품 취급해 모든 시민은 나라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미덕과 공동선을 파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의무를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급기야 댓가를 받고 임신을 하는 일과 같이 임신을 서비스로, 아이를 생산물로 취급하여 거래하는 계약도 있다.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인간을 상품화하고 거래의 대상으로 하기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정의로운 행위인가? 아기나 임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에서 과연 가치는 어떻게 평가하는 것인가? 존중 받아야 할 인간이 사용가치로 인식되는 것과 같이 일반적 생산을 지배하는 준거로 대체 할 수 있는 것일까?

칸트는 이와 같이 우연히 생기는 욕구에서 도덕을 끌어내는 것은 도덕을 생각하는 방식부터 그르친다고 이들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쾌락(편리함, 위험의 면제 등등)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는 것처럼 인간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도덕적 일 수 없다는 것으로 인간은 그 자체의 목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의미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 몰리지 않고 이성이 우리의 의지를 통치하게 할 때 우리는 자율적 존재이며 선택 할 능력이 비로소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순수실천이성이 참여 할 때 도덕법을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적절한 기회균등이나 공정한 상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존 롤스’의 누구도 우월한 위치에 있지 않는 원초적 평등한 상황을 말하는 평등주의, 즉 롤스가 주장하는 차등원칙은 자율과 호혜에 대한 도덕적 평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출생이라는 우연을 기준으로 소득, 재산, 기회, 권력과 같은 도덕적 임의성은 불공평을 조장하고, 더구나 혜택 받은 가정환경의 산물로서 우연의 영향을 받는다면 노력의 미덕도 인정치 않는다. 이러한 도덕적 임의성을 배제하고 엄격한 평등을 추구하여, 사회의 기본 구조를 조정해 우연한 차이가 행운을 타고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쓰이도록 하는 차등원칙의 주장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설명하는 고귀한 도덕적 배경이 되어준다.

한편‘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에 입각한 텔로스와 영광을 통한 정의를 통하여 시민의 도덕적 미덕을 강조하고, 인간존재를 서사의 개념으로 파악한‘매킨타이어’를 통해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이라며,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를 설명한다.

이것은 역사적 부당행위에 대해 집단적 사죄와 보상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개인은 단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한다면, 즉 자신이 출생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사과할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해외에서 추한 한국인을 보았을 경우 우린 수치심을 느끼고,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월드컵에서 승리하면 우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는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감정으로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만드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즉 이러한‘연대의식’은 자연적 의무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자발적 의무를 넘어서는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대나 가족에 대한 충성(직)이 도덕과 충돌할 때가 있다. 내 형제가 악질의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이 정당한가, 아니면 그의 도피를 돕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처럼 공동선과 개인의 연대의식은 어느 것이 정의라고 결정하기가 버거운 상황이 있다.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비난하여야 하는가? 과연 우린 연대의식 없이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연대는 우리에게 도덕적 부담을 안겨주기도 하며, 또한 도덕적 힘이 필요하기도 하다. 도덕보다 가족의 연대가 더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린 놀라기도 하지만 정의를‘공적 이성’에만 호소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 할 수 있다.

이처럼 도덕적 판단이나 정의에 대한 판단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하는 요소는 실로 다양하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관념에 입각하여 판이한 정의를 주장할 수 있다. 자유와 행복, 공동체로부터 영광과 인정을 받을 가치와 같은 미덕을 생각하기도 해야 하며, 목적, 즉 텔로스를 묻기도 해봐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행복을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 만들 수도 없으며,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서로의 이견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논의하는 문화를 요구하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생각의 다양성들 중에서, 오늘의 현대사회에서 판단의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리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 존 롤스의 차등원칙, 칸트의 순수실천이성, 자유(지상)주의이념을 중심으로 적절한 사례를 통한 비판과 반박의 이론으로 정의의 이상에 한 발 가까이 가게 해주는 이 저작은 도덕철학, 도덕정치학의 진수이다. 특히 우리를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일상의 문제들에서 보다 정의롭고 좋은 삶에 대한 미덕의 실현에 기여하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도덕 교과서라 할 수도 있다. 풍부하고 정교한 지식과 재치 넘치는 서술로 도덕철학을 이렇게 흥미롭게 읽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가히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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