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동양학 강의 1 - 인사편
조용헌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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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동양학’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으나, 강호를 두루 두루 돌아다니면서 저자의 뻥도 좀 세진 것 같다. 그 1권인 인사(人事)편으로 시시콜콜한 인간만사를 통해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대략 100여개의 단상을 풀어내고 있으니 예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심오한 학문적 성취라기보다는 그야말로 독만권서(讀萬卷書)하고 행만리로(行萬理路)한 내공으로 버텨내는 입담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바람을 먹고 이슬을 덮고 자는“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과정을 거쳐야만 강호학(江湖學)을 할 수 있다.”라면서 인생의 시름과 깊이를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된 구라도 칠 수 있다는 것은 일견 설득력있어 보인다. 게다가‘강호의 4대 학파’까지 운운하면서 대개들 알법한 인물들로 구성된‘다석, 간송, 장일순, 야산학파’를 들먹이면 이건 그럴듯함을 넘어 지고한 경지로부터 솟아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사마천’은 세계의 구라꾼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중국 천지를 여행함으로써 인생을 알고 속세를 초월하는 상상력의 산물인『사기(史記)』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나,“이야기는 건달이 만드는 것이고, 건달이 되면 춥고 배곯으며 천하를 돌아다녀야 한다. 건달의 궁극적 관심은 주역의 건(乾)괘에 통달(達)하는‘건달(乾達)이 되는 경지다.”하면, 정말 강호를 주유천하(周遊天下)해야지만 인생의 참맛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되는데 유유자적 산천을 거닐며 만나는 사람들과 자연에서 삶의 이치를 깨닫는 느림의 철학과 다르지 않음을 발견케 된다.
그렇다보니 강호를 주유하며 사람 사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 담긴 진한 삶의 향기에서 인간의 도리와 인생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지혜를 온 몸으로 받아들인 이 강호학을 말하는 저자의 설레발이 그리 밉지는 않다.

1만2천석 대지주집 도령이 하인에게 건넨 정감 있는 말 한마디가 후일 목숨을 건지게 해주었다는‘봉소당 피화담(避禍談)’얘기에서 “논리(論理)위에 정리(情理)”가 있음을 확인케 하고, 조선 선조 조일전쟁의 의병대장이었던 고경명을 비롯하여 구한말 의병대장 고광순, 고광문에 이르기까지 세대를 이어가며 의로움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고씨 가문이나, 가난한 민중들을 의식하여 굴뚝을 낮게 하여 위화감을 없애려하고 사랑채 옆 쌀뒤주에서 쌀을 퍼가게 눈을 감아주는 사대부의 아량 넘치는 미덕에서 어느덧 잃어버린 고귀한 정신들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여기에“자신에게 이로우면 남에게도 이로워야 오래간다.”즉, 자리이타(自利利他)라는 인생의 보람 있는 무의식이자 양심의 세계를 통해 바로 이 무의식이 염라대왕의 장부책, 인간 양심의 블랙박스임을 설파하는 글이 더해져 나눔의 사회에 대한 정의를 더욱 맛깔스럽게 한다.

한편 깊은 인상을 준 글로, 고택(古宅)에 대한 인식인데, 오늘에까지 무너지지 않고 수백 년을 계속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은‘역사의 검증’에서 살아남았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변의 민중들에 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않았으며, 학문적 성취도 존숭(尊崇)받는 집안으로 자손 대대로 이를 긍지와 자존심으로 지켜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갓 잔류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고택이 민속가옥의 전통적 가치이외에 무어가 있을까 했던 시선이 순간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또한 오늘날 의전(儀典)의 문제가 대두하면 왼쪽이 상석이냐 오른쪽이 상석이냐 하며 자리배치에서 신경전을 벌이는 현상의 이면에 있는 좌(左),우(右)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공부(工)와 입구(口), 양과 음으로 바라보는 전통적 사고의 뿌리 깊은 인식으로 풀어내어 퇴계학파를 모시는 호계서원의 학봉과 서애의 위패 자리다툼시비가 400 년 만에 학봉 자손들의 양해로 마무리되었다는 미담은 슬며시 미소를 짓게 한다.

어쨌거나 산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나와 너 어울려 고통 없이 즐겁고 평안하게 살다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자니 밝은 마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같이 덕과 선함의 의지와 풍요로운 자연과 교감하면서 천천히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삶, 그 이상 무어가 있을까.
‘소동파’가 정했다는 시원하면서 즐거운 그 무엇인‘상심16사(賞心十六事)’, 즉 “시원한 비오는 밤 죽창(竹窓)옆에서 이야기 나누기, 여름밤 시냇물에서 발 씻기, 제방길 산보하기, 강 건너 산사의 종소리 듣는 것, 등나무 베개 베고 낮잠 자기,..등등”이나, 맹자의 군자삼락은 아니더라도 소인인 내게 있어 소인삼락(小人三樂)으로 저자가 꼽은, “지리산 천은사 뒤의 눈 덮인 소나무 숲에서 장엄한 광경을 보며 세상사의 때를 씻어내고, 오래된 벗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남은 인생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 맛있는 음식이 있다면” 정말 인생이 즐겁지 않겠는가!

민간에 자리 잡은 전해져 오는 민담에서, 지나가다 만난 의외의 강호의 고수에게서, 그리고 소소한 삶의 자투리와 장엄한 자연 모두에게서 배워내는 삶의 지혜들을 익숙한 고사에 먹음직스럽게 버무려낸 보편적 도덕과 사회정의를 말하는 도덕사회학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중년의 나이에 책을 읽고 그 소감을 쓰고 있는 내게 그것이 바로‘상팔자’아니냐고 하는 저자가 고맙기도 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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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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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대 서사시. 넘실대는 욕망의 끊임없는 쟁투. 거짓된 이데올로기로 위장된 탐욕과 파괴가 사랑과 파탄이란 애증과 교묘하게 교차된 야만으로 퇴행하는 인류사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신화적 상상력과 현실이 교감하는 루시디만의 특유한 마법적 이야기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리는 것은 예의가 아닐 정도이다.

‘카슈미르’,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종교가 어우러지고 전통을 긍지로 여기는 사람들의 평화가 깃든 낙원이었던 곳, 그러나 오늘날의 캬슈미르는 극단적인 종교 갈등과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부딪는 곳, 죽음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장소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은‘누가 이 아름다운 산야를 피로 물들이고, 경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는가? 그 의도와 목적에 도사리고 있는 진실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신화와 어우러진 전통 민속공연을 부족의 자긍심으로 살아가는 카슈미르의‘파치감’마을. 파치감의 족장‘압둘라 셰르 노만’은 “누가 힌두인이고 누가 무슬림이오?”할 정도의 공존과 개방을 신념으로 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자 철학자이며 요리사인‘판디트 피아렐랄 카울’과 여성해방의 유토피아적 비전을 설명하는 아내‘팜포시’는 바로 그 공존과 평화의 파트너라 할 수 있다. 작품은 이들의 자식인‘광대 샬리마르’와 ‘부니 카울’의 광풍같은 사랑의 열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마법의 선(善)따위는 없애버리고 자신의 운명에”맞서야 한다는 속박 없는 미래와 자유의 비전을 지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는 도덕적 판단도 멈출 수 있는 여인인‘부니’와 사랑의 지고지순함과 성스러운 결합이라는 신념의‘샬리마르’의 결혼은 이미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여기에 인도주재 미국대사‘막스 오퓔스’의 등장은 젊은 무희 부니의 지독한 굶주림을 채워줄 수 있는 노골적인 실용주의, 아니 공리(功利)주의적 기회이자 수단이 된다.  

이 소설의 재미는 바로 이 막스라는 인물로 인해 극단적으로 풍요로워지고 더욱 견고한 의미를 담은 의식을 시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욕망의 충족을 위해 남편을 버린 부니와 쉰다섯 살에 종교적이고 시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지상 낙원을 얻은 막스의 불륜은 외교적 실패와 정치 생명의 단절이라는 운명을 가져오지만, “그의 운명이 정책이나 외교, 무기 판매와는 거의 무관하며, 훨씬 더 오래된 태곳적 욕망의 명령과 전적으로 연관된 것임을 깨달았다.”는 인식처럼 거대해 보이는 세계의 정치 질서라는 것의 이면에는 인간의 탐욕스런 욕망이 꿈틀대는 것 이상이 아님을 암시한다.

소설은 이들과 함께 일명‘인디아 오퓔스’, 또는 ‘라테타’, 아니‘카슈미라 카울’이 가세하여 이 비극적인 사랑과 증오의 승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인디아’,‘부니 카울’,‘막스’,‘광대 샬리마르’, 4인을 축으로 하여 그네들의 삶을 투영하며 이데올로기, 종교, 인종적 갈등의 본질을 탐색한다.
사실 작가는 종교나 정치적 이념의 갈등으로 포장된 이면의 진실을 이들 삶의 족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권력의 실체란 기껏 욕정과 흥정과 광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스의 칭송받는 2차 대전 레지스탕스로서의 경력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자기생존의 우연한 산물인지 하는 것이나 한낱 세밀화가의 열정을 타고난 위조 전문가의 재능이 무기거래상이자 억만장자로 정계의 막후 실력자로, 그리고 테러리스트로, 미래를 거래하는 세계의 설계자로 둔갑하는 것의 실상을 술회하는 것, 그리고 무자히드(성스런 전사)가 되어 파키스탄에서 필리핀에서 미국에서 이슬람의 적대자들을 심판하는 전문 테러리스트인 광대 샬리마르의 신념이란 것이 결국 부정한 아내에 대한 살의와 그 복수라는 것처럼 욕망의 광기, 부지(不知)의 부도덕(不道德)이 곧 세계 권력과 테러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캬슈미르와 로스엔젤레스, 소설의 배경인 두 도시는 승리와 패배가 거듭되지만 반복되는 야만의 전쟁이 가져오는 것은 헛된 죽음뿐인 곳으로서 또한 꿈틀대는 현대의 음험한 욕망의 장소로서 복수의 천사, 죽음과 저주의 천사를 암시하는 공간일 따름이다. 그래서 광대 샬리마르가 미국의 이 도시에서 막스 오퓔스를 살해하는 것은 겉으로는 반테러리즘을 옹호하면서 아프가니스탄 탈리브의 테러를 지원하는 창조자이자 파괴자인 세계의 권력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빼앗긴 남편의 명예의 손상, 수치에 대한 보복이자 사랑의 약속을 실현하는 행위일 뿐임을 더욱 명료하게 인식케 한다. 이는 달리말해 문명의 갈등, 종교의 갈등, 정치이념의 갈등이라 그럴듯하게 위장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위선의 조롱이자 인간의 탐욕이라는 본질의 규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오는 증오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른다. 더구나 “옳고 그름이란 단어가 의미를 잃고 산산이 부서지는”정의의 회색지대에 우리를 풀어놓아, 시체와 피, 광기,..흑마술, 결코 끝나지 않는 어둠이 계속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욕망이라는 충동처럼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실체를 대면케 하고 있다. 인디아 오퓔스는 아버지 살해자인 샬리마르에 대한 증오를 연속시키는 세대이다. 그래서 욕망이 잉태한 자식, 인디아 오퓔스 이자 카슈미라 카울은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벌이는 전쟁과 테러, 이데올로기와 종교 등 이 세계의 불가해한 현상을 연인의 사랑과 배신, 그리고 복수의 여정에 정말 멋지게 녹여내고 있다. 탐욕과 죽음으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권력, 평화의 진정한 적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적나라한 통찰과 규명을 가한 소설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자유가 곧 전쟁인 이 사악한 세기에 대한 도덕적, 사회적 선택을 놓고 벌이는 정의에 대한 최고의 문서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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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다만 이것은 누구나의 삶 - 특별하지 않은 청춘들의, 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박근영 지음, 하덕현 사진 / 나무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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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젊지만 녹록치 않았던 여정으로 삶의 시선이 한층 성숙한 젊은이들의 얘기들이다. 온몸으로 세상과 부대끼며 여행을 통해 마음의 여유를 얻었다는 포토그래퍼로부터 잡지에디터, 연극배우, 시인에 이르는 11명의 문화, 예술분야에서 자신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과 나누는 소박한 대화라 하여야 할까.

오늘에야 많은 이들에게 잊혀지고 혹은 알지 못하는 사건이겠지만 작자인‘박근영’의 고향인‘암태도’는 내 청년시절 공부에 있어 중요한 장소였다. 농민에 대한 착취, 지주와 공권력이 가세하여 저항하던 농민들을 학살했던‘암태도 소작쟁의’로 불리는 역사적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던 곳이기에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갖게 하였다 할까. 아무튼 이 저작에서 이러한 90여년 가까운 세월의 흔적을 혹여나 했던 것은 내 편협하고 시간을 붙잡으려는 이기심이자 자기기만이었던 게다.

책은“더디게 오지만 결코 없지 않은 희망을 충실히 일구는 사람들과 함께 미로와 같은 세속을 걷고 싶다.”는 작자의 머리말이 그대로 대표한다 할 수 있다. 누가 삶의 미래를 알고 살아가겠는가. 다만
이리 저리 세상에 부딪히며 사람도, 사회도, 그리고 우주 질서의 한 가닥이나마 알아가며, 어떤 스님이 쓰시더라는“담락(湛樂)”이란 말처럼 평화롭고 담담하게 즐길 수 있는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 바로 그것 아닐까.

어린나이에 안아야만 했던 엄청난 삶의 무게로 휘청대었고 세상에 나가서 대면해야 했던 가파른 절벽, 보이지 않는 무수한 장애들에 다시한번 기가 꺾이고, 그럼에도 살아야만 하기에 어떤 길을 발견하고 걸음을 내딛어야 했는지 많은 망설임들과 좌절, 혼란, 그리고 비로소 자신만의 길을 도도히 다져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작자 특유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조용히 흐르는 문장과 함께 삶의 가치들을 사유케 한다.

사실 “현실과 꿈 사이에 타협하지 못하는”것은 젊은이들만의 딜레마는 아니다. 때론 불가피하게 현실에 복종하기도 하지만 그 외연(外延)이 인간의 정신마저 복속시키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들은 끝없이 꿈을 희망하고 안개 자욱한 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우리들의 젊은이들이 걷는 길은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고되지만 기쁨이 가득한 길을 자신 있게 걷는 자의 당당함, 삶의 주도자, 주체로서의 멋스러움이 있다.
일상을 훌훌 떨치고 드넓은 이방의 지대를 탐닉하기도 하고, 무일푼의 주머니지만 세계를 과감하게 거닐 수 있는 젊음의 패기와 도전이 있는가하면, 삶이 보여주는 수용키 어려운 기묘한 슬픔과 애상에 젖어 명상에 잠기는 얼굴도 있다.

어쩌면 누군가의 별 것 아닌 행복처럼 “처마 밑에 앉아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마시는”커피의 향이 흐르는 삶의 기록들이랄까. 버겁기만 할 수 있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쉬이 쓰러지지 않고 삶의 내실을 다져가는 사람들의 멋진 발걸음에 가슴 뿌듯한 위안과 공감, 평화로움을 안겨준다. 비오는 밤 읽기 좋다는‘김일영’시인의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라는 시집을 뒤로하며, 어쩜‘박근영’의 이 에세이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불면의 밤을 사라지게 해주고 마음의 넉넉함을 가져다주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빗방울 듣는 소리를 들으며, 이들이 들려주는 삶의 조용한 외침과 화보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것의 즐거움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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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이유 - 저주의 몫. 에로티즘 e시대의 절대사상 20
유기환 지음 / 살림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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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푸코, 보드리야르 등 현대사상을 대표하는 이들의 뿌리를 이야기하다보면 거기에는 항상 ‘조르주 바타이유’가 있다할 정도로 그의 전복적 사유, 과잉의 탐구, 소비의 사회학 등 그의 사유는 “현대사상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성(性)과 성담론, 그리고 소비의 경제학에서 그를 배제하고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영향은 오늘에도 뿌리 깊다.

최근 발표된 노인의 소녀에 대한 갈망을 주제로 한 국내의 소설작품은 거의 노골적으로 바타이유의‘에로티즘’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할 정도로 그의 성과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성적 욕망에 대한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과시적 소비사회인 오늘에 있어 보드리야르, 부르디외로 이어지는 인간과 세계의 존재조건을 과잉 에너지의 비생산적소비로 파악한 일반경제학은 인간 생명체의 근본적 본질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무한히 활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의 우리들이 접하는 많은 저작들에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는 중에도 바타이유를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있다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바타이유의 사상을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수월하게 해석하고 그의 본격적인 접근을 위한 친절한 길동무가 되어주고 있다. 그의 사상적 기반에 어떠한 형식으로든 영향을 끼친 출생과 불우한 성장의 환경에서부터, 니체로부터의 영감이나 투우장 죽음의 목격처럼 사상적 근간이 된 계기, 그리고 문학작품을 포함한 저작의 세계를 통해 핵심 사상이자 저술인 『저주의 몫』과 『에로티즘』에 대한 명쾌한 이해를 돕는다. 특히, “시공을 초월한 고전”이라 칭송을 받는 이 두 저작의 보다 심층적인 이해를 위하여 사유의 원천이 되었던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이나, 바타이유 자신의 저술인『내적 체험』,『에로스의 눈물』등 관련 저술들의 설명까지 더해져 바타이유에 대한 완벽한 길라잡이로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바타이유 사유의 출발점은‘에너지 과잉’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된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는 대가없이 무한히 주어진 태양열 때문에 늘 에너지의 과잉에 시달리고 있으며, 바로 이 에너지 과잉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하면 폭발, 즉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즉 “가계경제에서는 에너지의 부족, 즉 빈곤이 발생할 수 있지만, 전체경제, 예컨대 세계경제에서는 언제나 에너지의 과잉 즉 잉여가 발생”해서, “적절히 이 잉여를 해소하지 못할 경우 전쟁”이라는 파괴적 행위가 발발한다는 관점이다.

이를 위해서 바타이유는‘비생산적소비’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예로서 고대사회의 증여교환 체계는 과잉에너지를 해소하는 더 할 수 없이 현명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북미 인디언의‘포틀래치’와 같은 독특한 증여메커니즘을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비생산적소비의 예로서“값비싼 장신구, 넘치는 음식물, 피의 희생과 같은 엄청난 부의 소비를 요구했던” 고대 아즈텍인들의‘희생제의(犧牲祭儀)’는 신성한 소비, 비생산적 소비, 과잉에너지의 효율적 소비라고 해석하고 있다.

결국“전쟁이란 비극적 해결책을 피하기 위해 인간이 생각한 것이 바로‘비생산적 소비(데팡스: depense)’”라는 것으로, 전체의 관점에서 항상 잉여의 문제로 야기되는 폭력을 해소하기 위한 지혜로운 소비였다는 것이며, 인간사회의 경제적 관점은 자원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라 과잉에너지의 소비를 위한 문제였다는 통찰이다. 바로 증여교환이나 희생제의와 같이 인간은 과잉에너지를 가장 사치스럽게, 가장 집약적으로, 가장 과시적으로 소비하여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오늘의 사회는 생산과 성장, 그리고 부의 축재(蓄財)에 매진하여 성장이 한계에 부딪치자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비생산적 소비라 할 수 있는 양차대전이란 비극적 파괴의 수단에 이르렀다고 진단한다.

이를 오늘의 사회에서 해석한다면 비등한 과잉의 에너지가 야기할 상상하기 싫은 공멸이 아니라 비생산적소비로서의 증여인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 사회복지의 강화, 다양한 기부 등이 이루어져야 함의 당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타이유는 자연스럽게 비생산적소비의 원형으로서“자연의 기본적인 사치인‘먹기’,‘성(性)’,‘죽음’”이라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조건없는 소비로서 에너지를 열광적으로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성행위나, 빈자리를 만들어주는 죽음은 가장 탁월한 비생산적소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소비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저작 『저주의 몫』이 말하는 에너지 과잉의 소비론에서 『에로티즘』이라는 사회인류학으로 이어진다. 그는 에로티즘이 탄생한 최초의 조건을 밝히고 있는데, 2만 년 전의 동굴벽화인 라스코 동굴의 내장이 흘러내리며 죽어가는 황소와 발기한 성기를 한 인간의 죽음이 그려진‘우물’그림에서 성과 죽음과 종교의 일치를 읽어낸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경외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관능의 모습, 공포라는 죽음의 외연이 만들어낸 종교적 감수성이다.
공포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죽음의 관능을 인식한 최초의 인류는 섹스에 목적의식을 갖게되었고 그것은 바로 즉각적 쾌감이었다는 것이다. 이를 시발로 하여 에로티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은 죽음의 인식으로부터 살해의 금지와 같은 금기를 낳고 궁극에는 금기위반을 둘러싼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에로티즘이란 진정 무엇이란 말인가? 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바타이유는 인간은 서로 교통하고 싶어 하나 본질적으로 두 개체는 거리를 좁힐 수 없는 불연속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연속적 존재들의 삶에 모종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기막힌 시간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생식의 시간으로서, 이로 인해 정자와 난자라는 두 개체가 하나로 결합하여 새로운 불연속적 존재를 탄생시키고 둘은 소멸한다는 것으로 곧 성행위는 죽음의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적 표현으로서 알몸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하게 되는데“알몸은 존재의 불연속성, 즉 폐쇄성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며 알몸과 알몸이 결합하는 한 순간 자아의 경계가 사라지며, 이순간이 바로 존재의 연속성이 구현되는 순간”, 즉 신성성에 이르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더해 금기와 금기의 위반이라는 개념이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인간사회가 설정한 금기의 대상은 폭력으로서 죽음과 성(性)은 본질적으로 폭력에 연관된다는 점이다. 즉“성의 외양은 그것이 아무리 황홀할 것이라 할지라도 폭력성을 띤다.”는 것이며, “성행위는 정상 상태의 상대방이 보유하고 있던 폐쇄적 존재 구조를 파괴하는 것으로 이때 필연적으로 숨을 멎게 하는 파열이 발생하며, 뒤이어 존재의 와해 속에서 황홀한 연속성이 구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폭력은 무서운 동시에 황홀한 것이며,
말을 바꾸면 생명의 절정인 에로티즘을 통해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심연을 맛보는 것의 다름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에로티즘은 신성성의 현현임에도 오늘날의 에로티즘에 그늘이 드리워지게 된 것은 비생산적소비의 전형인 에로티즘이 노동이라는 생산과 성장, 축재라는 사회에서 제한되고 죄악시되는 왜곡된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성(性)금기의 위반을 조직적으로 수행한 전형적 예로서 결혼이나, 신성성을 가졌던 고대의 매춘에서 오늘의 매춘에 이르는 금기위반의 관념을 통한 성찰은 매혹적인 담론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나 바타이유가 말하는 에로티즘이란 애초에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기에 모순과 역설에 빠지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순과 역설을 인간은 삶의 본질로 여긴다는 사실을 발견케 된다. 아마 “모순과 역설은 에로티즘의 본성 앞에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연속성의 열락을 희망하고 때로는 불연속성의 고독을 희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혜롭게도 또는 음험하게도 모순되는 두 항의 양립을 모색”하는 발칙한 존재 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금기를 완전히 와해시키지 않으면서 순간순간의 위반의 관능을 만끽”하고, “
죽지 않으면서 죽음 저편의 세계로 살짝 넘어갔다 오는 길, 그리하여 욕망도 살리고 우리도 살리는 길”, 바로 에로티즘의 길을 숙명적으로 걷는 것일 것이다.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이 해박한 입문서이자 탁월한 두 저작의 해설에서“욕망이란 결국 금기의 위반이 맺는 역설의 윤무(輪舞)이며,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생산의 이성보다 소비의 욕망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는 정말 엄청난 사유의 대 전복을 경험케 된다.
“도대체 욕망이 선악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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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우린 우리가 언제 삶에서 소멸될지 대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 죽음의 날을 알게 된다면 우린 남은 삶의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소멸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을까? 초연하고 당당하게? 아님 죽음의 두려움과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할까?
마흔여덟의 남자. 이사부장이란 직위를 가진 중견 직장인. 어느 날 남아있는 삶의 시간이 6개월이라는 폐암 진단을 받아든 남자,‘후지야마’는 남은 생을 병원에 갇힌 채 받아야하는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짧은 시간이지만 진정한‘자기찾기’를 위한 적극적인 삶의 시간을 마련코자 한다.

“지금까지 내가‘~ 해야만’한다. 라고 여겨온 것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고 와르르 무너지는 듯 했다.”라는 심경의 표현처럼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 많은 것들이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이 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간신히 매달릴 수 있는 나뭇조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 수 있을까? 주인공은 유서를 남기고 싶은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고 자신의 인생에 관련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이별을 고하는 의식을 수행한다. 자신의 해결되지 못했던 감정을 확인하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석연찮은 이별의 앙금을 남겼던 여자, 사소한 말다툼으로 모른 체 했던 죽마고우, 냉정한 기업사회에서 탐욕에 멀어 낭떠러지로 몰았던 사람, 젊음의 치기 속에서 상처를 주었던 여성 등 그네들에게 죽음을 알리고 비로소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은 더없이 삶을 정화(淨化)시켜주는 시간이 된다.

다분히 통속적인 멜로 드라마적 스토리 구성을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사실 끊임없이 눈물샘을 자극하는데,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고통스러운 이별의 감정, 소멸을 기다리는 자의 감성의 기복과 그 여정에 드러나는 인간의 원초적인 심리와 최후의 떨림이 보여주는 그 진실의 무게가 시종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듯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후지야마는 자신의 방벽을 세우지 않고 진솔한 모습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상대로 아내가 아닌 여자를 말하고 있다. “그녀 앞에서만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남자가 될 수 있다.”는 심정은 가슴 아픈 말이다. 죽음을 앞두고 진행되는 모든 의식들이 이 여성,‘에쓰코’와 함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아마 죽는 자가 남아있는 자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짊어져야 할 짐인가에 대한 중대한 윤리적 질문이 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사회에 첫 걸음을 내 딛어야 하는 아들에게 세상의 소소한 조언들을 해 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그리고 어엿한 숙녀가 될 딸아이에게 아빠와의 따뜻한 추억을 더 이상 남겨줄 수 없게 된 아비로써, 아내에게 이 모든 책임을 남기고 떠나는 자의 미안함과 한 여인으로서의 아내에 대한 고백과 사죄와 참회, 부탁, 그리고 고마움의 사연들이 가슴 뭉클하게 작품 전체를 장식하고 있어, 죽음을 준비하는 자를 엄습하는 슬픔의 파상공격 못지않게 읽는 이의 콧속도 마비되고 눈물의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들과 아내, 형제, 연인, 동료들에게 삶과의 이별에 초연한 자세를 보이는 주인공이지만,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잊혀지는 게 무섭더군”하는 고백이나, “내가 정말로 두려운 건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처럼 세상으로부터 잊혀지는 존재라는 점이 고통의 중심에 있음을 헤아리게 되고, 바닷가 호스피스병원으로 옮겨져 소멸의 순간을 기다리는 밤에 불을 켜둔 채 잠을 자야만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선 자의 불안의 근원에서 인간의 숙명적 실체를 보곤 수다스러웠던 입을 굳게 다물게 된다.

이 작품에서 내겐 잊을 수 없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그 하나는 주인공과 장인의 마지막 이별의 대화인데,

“아버님 인생은 행복하셨나요?”
“전 그저 그랬습니다.”
“그것도 좋지 않은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되네, 이제 그만 편해지게...”
“고맙습니다.”

이 장면은 삶을 이별하는 이의 통증이 이면에 잔뜩 담겨있는 것 만 같아 거의 마음에 새겨질 정도가 되고, 큰형과의 대화에서는 이처럼 진정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감동과 경외로 겸허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인간은 누구나 완만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처럼 우린 소멸을 향한 시간을 달려가는 존재이다. 죽음의 선고 일에서 삶의 빛이 끊기는 순간에 이르는 한 남자의 여정에서 삶이란 비록 그저 그러함이지만 그 실존의 기억만큼 생생한 우리네 일상의 모든 것들에 깃든 소중한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인생의 존귀함을 다시금 확인하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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