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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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묘사하는 이야기들 속의 사람들, 사건들은 어지간한 주의력을 가졌다면 그리 낯 선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압축적인 서사로 일그러질 대로 구겨진 한국인들과 한국사회의 민 낯짝을 전체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은 아마도 처음이리라. 사실 우린 누구도 이 사회를 지탱하는 성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1945년 해방과 1948년 남한 단독의 절름발이 정부수립이후부터 오로지 비열함, 후안무치, 파렴치함, 야합, 폭력, 부조리, 부패, 탐욕, 모리배, 위선, 기만 등 온통 네거티브한 언어로 밖에 표현되지 못하는 이 사회의 일정한 습관과 기억이 60여 년간 체화되어 온통 개인들의 인식과 행동에까지 기이한 성향과 코드를 형성하여왔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열악한 가정환경으로부터 시작된 생존을 향한‘박선녀’란, 한 여인네의 삶의 파노라마가 어둠의 문화, 폭력과의 동거, 그리고 물질을 향한 쾌락과 거부(巨富)의 아낙으로, 바로 그 거부의 물질적 상징인 건물 잔해에 깔리기까지 쉴 새 없이 흘러간다. 그 어디보다 본성과 욕망이 절제되지 않는 곳, 룸살롱과 권력과 돈과 폭력은 우리시대를 설명하는 정말 잘 어울리는 기호들이다.
그래서‘강남’으로 표상되는 천박한 구별짓기의 계급화 된 이 언어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왔는지, 개인들의 사고와 행동의 도식이 되어왔는지에 대한 이 현대사 읽기는 그 치부로 내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다.

살기 위해서 일제의 밀정을 하고, 세상 흐름의 판세를 읽어낼 정도의 영악함으로 미군정의 정보원이 되어 권력의 본성을 터득하고 그에 야합하며, 이를 위해 선악의 도덕율이 무시되는 정치세계의 잔혹한 현실을 떠받치는 또 한사람의 주인공‘김진’이란 인물을 통해 물신주의와 지배권력의 실체를 따라가고, 폭력배들이 벌이는 탐욕과 정치의 공생, 배반, 그리고 피폐한 도시서민의 실상을 철거민의 고통을 통해 이 사회의 비뚤어진 습관을 대표하는 정치권력의 비열한 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간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어떤 대형 사건이 터지면 온갖 정보와 잡다한 기록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그 어느 시간보다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낸다. 아마 평상시에는 은폐되거나 견뎌내던 것들이 일시에 폭발하여 그 드러나지 않았던 진실, 바로 민중과 사회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여운형, 김구의 살해사건, 공산주의자 박정희 전향과 제주 4.3 양민학살사건, 군부의 쿠데타와 군사독재의 지리한 전체주의 시대, 이를 마무리하기라도 하듯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 개발독재시대의 산물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60여년의 짧은 기간동안‘압축적’이라고 표현할 밖에 없는 한국의 현대사를 과연 황석영이니 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엑기스만을 건져낸 역사적 통찰력은 맛깔나는 스토리에 버무려져 시간가는 줄 모르게 주인공들의 삶과 알록달록한 세상의 거친 속살에 빠져들게 한다. 정말 꿈결같이 흘러온 60년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작품의 전체가 시사하는 도식이‘강남’과 같은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익숙한 기능이 되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어찌 자고 일어나니 꿈이더라는 것과 같이 허망하다는 한마디에 담아 낼 수 있겠는가?

비록 하나의 문학작품이 하는 이야기지만 우리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사회의 발판이 얼마나 취약하고 무르고 부실한 것인지, 그리고 개인들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네거티브를 다시금 반성하고 확인하는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신뢰가 넘치는 건강하고 견고한 사회를 위해 우린 우리의 체제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미에서 소설 『강남夢』은 뒤틀려온 현대 한국사회의 독특한 병리현상과 정치변동의 흐름을 분석하여 우리사회의 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실천도구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각게 하는 출발점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정신없이 빠르게 스쳐가는 그 응축된 역사의 서사를 질주하듯이 따라가느라 가빠진 호흡을 이제야 내려놓는다. 가히 현대사의 한 구간을 정리하는 압도적 소설이라 명명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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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관의 정립을 위해 꼭 읽어두어야 할 역사론(歷史論)들

 

그 어느 때보다 특정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입장에 자신의 의도를 종속시켜 기술하는 당파적 역사가 기승을 부렸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내부에서는 친일사관을 비롯한 우익보수를 표방하는 자칭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이비역사가 있는가하면 좌편향의 일부 편협한 역사의 반영도 있다. 그리고 주변에서는 동북공정, 교과서 왜곡 등 인접국들의 역사침탈 작업이 지속되고 있다.

과연 어떠한 역사가 진실일까? 우리는 역사를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긴 한 것인가?  신화와 전설은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일까? 대체 진짜의 역사, 다수 민중의 역사는 어떤 것인가? 와 같은 역사에 대한 끝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분명 왜곡되거나 역사의 흉내를 냈으나 역사가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우리들이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다.
“역사학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역사변화 전반에 걸친 메커니즘 형태를, 특히 변화가 극적으로 가속화되고 확대되어온 과거 몇 백 년 동안의 인간사회의 메커니즘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에릭  홉스봄’은 말한다. 즉 역사는 역사적 경험과 관점의 결합에 기초해 현대사회에 대한 전망을 가능케 하며, 미래와 미래를 준비하기위해 요청되는 인간행위를 판단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하기에 우리에게 역사는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자신의 책임을 기억하기를 거부하거나 책임을 인식할 줄 모르는 역사가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정체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격정에서 비켜서 있어야 한다는 역사가에 대한 주문은 우리 사학계에 대한 준엄한 요청이 될 것이다. 우린 이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역량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역사에 대한 냉정한 이해를 기반으로 미래를 준비해 낼 수 있는 탄탄한 초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에 대한 지성을 갖추기 위해 꼭 읽어두면 좋을 역사론서들을 추천해 본다. 특히, ‘페르낭 브로델’, ‘에릭 홉스봄’,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저작들 중 하나는 반드시 읽어보기를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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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론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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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문명과 자본주의 1-1- 일상생활의구조 -상
페르낭 브로델 지음 / 까치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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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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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음, 이광근 옮김 / 당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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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마리오 리딩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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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0여개의 장면(scene)으로 이루어져 급격히 빠른 전환과 전개가 우선 독자를 강하게 흡입한다. 또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세계적 권위자가 쓴 소설로서 전문성과 디테일의 탁월함은 물론 유럽사회의 국외자인 집시사회의 묘사를 통한 차원 높은 사회의식이 더해지고, 등장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은 마법처럼 이야기 속으로 매혹한다.
중세 기독교와 관련하여 비밀결사들과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거나 영원히 숨기기 위한 속세와의 대결은 사실 진부한 소재가 될 정도로 흔한 스토리다. 여기에 그 흔해빠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가세하면 진부함의 네제곱쯤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를 내심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첫 장을 열자마자 광기와 욕망이 가득하고 영혼까지 시려오는 공포를 마주하게 되면서 예사롭지 않은 작품임을 바로 간파하게 된다.

섬뜩한 죽음의 예고 같은 흰자가 없는 눈을 가진 사내, 그리고 알 수없는 두려움의 전율로 도망가는 집시, 느닷없이 달려와서는 피를 뿌리고 몇 마디 암호 같은 말을 전달하고는 황급히 달려가는 집시와 작가의 황망한 장면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 1000편중 유실된 58편에 대한 행방을 안다는 집시 바벨의 섣부른 행동은 죽음을 부른다. 집시의 죽음으로 작가인‘애덤 사비르’는 살인용의자로 공개 수배되고, 적그리스도의 보호를 의무로 하는 비밀결사인‘코퍼스 말레피쿠스’의 일원인‘에이커 베일’은 예언시를 찾기위해 죽은 바벨의 집단인 집시마을로 숨어든다.

1566년 6월 17일, 잔혹한 막후 권력자인‘드발 백작’이 가해 올 위험을 피하기 위한 노스트라다무스의 다급한 시편의 은밀한 숨김이 있은 지 500여년이란 시간을 훌쩍 넘어 21세기 프랑스와 스페인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숨 막히는 서스펜스의 질주는 호흡이 멎을 정도로, 아니 눈빛이 책장을 뚫어버릴 정도로 몰입되게 한다. 우여곡절 끝에 집시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된‘사비르’를 통해 주류사회의 곱지 않은 편견과 왜곡된 시선으로 그 진실이 알려지지 않은‘마누슈 집시’의 세계를 통해 그네들의 풍습, 신앙, 사랑의 방식 등을 애정 가득히 담아 보여줌으로써 주류와 국외자의 융합을 도모하기도 한다. 살해된 집시, 바벨의 누이‘욜라’의 영혼적인 오빠가 된 사비르와 욜라의 헌신적인 남자‘알렉시’ 세 사람이 쫓는 잃어버린 예언시편의 추적과 비밀결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광포한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에이커 베일’의 쫓고 쫒기는 긴장과 공포가 어우러진 아슬아슬한 스릴은 지금도 침을 꿀꺽하고 삼키게 할 정도가 된다.

고딕문학의 향취가 나는가하면 순간 지적인 민완형사‘칼크 경감’이 등장하면서 정교한 크라임 스릴러로, 그리곤 중세 기독교와 비밀결사의 흔적을 따르고, 종말을 경고하는 요한계시록의 암시와 집시들의 세계가 어울려 그 지성적 다채로움에 흠뻑 빠지게 한다. 눈앞에서 미세한 호흡의 떨림과 세밀한 움직임이 포착될 정도의 오감으로 전해지는 묘사는 여느 액션 스릴러 작품의 치밀함도 넘어선다.
‘재림’을 방해하고, ‘적그리스도’를 보호하려는 비밀결사와 적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전멸을 피할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지키려는 작가와 집시, 공권력의 대결은 풍요로운 지적향기와 진정한 비밀의 정수를 찾아내려는 역사의 호기심과 함께 고도의 흥미를 시종 자극한다.

아나그램, 카발라, 거울문자 등 암호의 해독과 ‘생트 말리 드라메르’의 ‘사라 에 칼리(검은 사라)’등 성상에 얽힌 신비, 마침내 드러나는 1960년 이후 52년간 일어날 사건을 경고하는 52편의 사행시의 발견은 마야력에 따른 2012년 12월 21일의 지구 대변혁과 조우하며, 인간사회의 종말을 암시한다. 잊을 만하면 다시금 수면으로 떠오르는 종말론은 사실 인류사회에 대한 도덕적인 불감증과 수그러들지 모르는 생태계에 대한 무지한 횡포가 극성을 부리면 떠오르는 현재의 반영일 것이다. 이 소설이 종말론을 내세워 단말마의 고통을 상기시켜 사람들을 위협하려는 그런 유치함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각성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말하고, 무자비하고 강박적으로 권력을 욕망하는‘엄청난 탕녀’의 실체를 암시함으로서 인류의 지속가능한 길을 안내하려는 소박한 의지로 이해될 수 있다.

영혼을 파괴할 수 있는 사악한 살인자와 정의의 세력이 대결하는 이 신비로움으로 무장한 소설은 올 여름 휴가철 여가를 풍족하게 해 줄 안성맞춤의 작품이 아닐까. 지적 즐거움과 스릴러를 초월하는 수준 높은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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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가격 - 뇌를 충동질하는 최저가격의 불편한 진실
엘렌 러펠 셸 지음, 정준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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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일전에 어떻게 합리적 소비를 할 수 있을까? 같은 제품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에 대형할인점 및 홈쇼핑의 유통 실무가가 해주는 싸게 사는 법을 익혔던 나로서는 사실 이 저술의 지적에 얼굴이 화끈 거려지는 쑥스러움이 파고든다. 제한된 재정 상태에서 같은 값이면 싸게 구입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고 유통업의 본성을 파악하여 소비자로서 유리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일견 합리적인 판단이라 위안을 삼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진정 소비자가 할인점, 아웃렛몰 등의 유통회사의 우위에서 소비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 저작은 바로 이와 같이“저가를 추구하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소비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그들의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유통업태의 100여년에 걸친 발전사를 통한 판매전략의 부조리한 실태를 통찰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경제질서 하에서의 약자인 개발도상국 등 제3세계 국가들의 착취를 통한 저가화가 가져온 폐해를 분석하여, ‘가격’의 정의와 ‘저가(低價)’가 가져온 궁극의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과연 싸게, 더 싸게라는 구호는 정당한 것인가? 또한 소비자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고 있기는 한 것인가? 국민경제, 세계경제의 질을 제고하긴 하는가?

우선 이 저작에 인용되거나 인터뷰어로 등장하는 분야와 학자, 전문가의 숫자에서 엄청난 노고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행동경제학, 행동심리학, 정신의학은 물론 경제학(유통경제 포함), 사회학, 경영학, 산업공학(테일러시스템 등)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계, 재계, 유통전문가들의 다채로운 연구(실험)결과를 기반으로 견고한 이론으로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어, 단순한 대형판매 및 유통업의 저가화를 통한 소비자의 기만전략을 비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지속가능한 인류의 공생과 정의로운 미래 사회를 위한 경제정책의 제안으로까지 이해 될 수 있는 저술이라 하겠다.

대형 할인점의 가격은 정말 싼 것일까? 그리고 그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하버드의 사회학자 ‘제러드 잘트먼’의 “이 세상에 가격보다 더 주관적인 것은 없습니다. ~ 어디에 가격의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가격의 불안정성과 조작성에 대한 지적처럼 금전적 가치라는 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가변성을 지닌 기호임을 납득케 되는데,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hyperbolic time discounting)’를 이용한 시간제한 할인전략이나, 어떤 정황 속에서 특정 제안이 제시되는가에 따라 인지적 가치에 영향을 주는 프레이밍(framing)효과를 이용한 가격제시처럼 사람들의 행동 심리를 교묘하게 적용한 가격전략을 알고 나면 우리가 확신하는 합리적 소비라는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것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더구나 생산업체가 제시하는 소매가격은 실질가격일까? 역시 이는 가공의 가격으로 소비자에게 준거가격으로서 의미를 부여하여 할인가격에 대한 구매의욕을 부채질하는데 이용되는 가격일 뿐이며, 할인가로 위장한 정상가격은 물론 부풀린 준거가격을 마치 대폭 할인하는 것처럼 제시하는 할인가격이 내재하고 있는 기만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용품 구매에서는 가치보다는 가격을 중요하게 판단하고, 제품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제 경비가 적게 들어 가격이 싸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가격 대비 가치’라는 그럴듯한 언어로 싸구려를 대체하고, 감정적 반응을 일으켜 인지적 평가를 방해하는 등의 인간심리를 활용한 고도의 판매가격 정책의 실상을 보면 결국 소비자에게 감정적으로 괜찮은 가격을 곧 공정(公正)가격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비이성적 뇌에 실망하게 된다. 할인가격이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았는가? 분명 정상가격보다 싼 가격으로 팔면 판매자가 손해를 보지 않겠는가? 결코 판매자가 손해를 보면서 장사를 할 일은 없다. 다시 말해 할인가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정상가격에 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이니, 할인가격이란 누군가에겐 바가지를 쒸웠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할인점이 내세우는 싸다는 가격의 의미가 이러함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저가가 지니는 의미가 이렇게 단순히 특정 소비자들을 기만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문제가 된다.

가격 결정을 실질적 생산원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대형소매업체(할인점,아웃렛몰,백화점 등등)가 제시하는 것이 곧 가격결정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고, 엄청난 구매력을 확보한 대형유통업체가 가격결정권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싼 가격에 숨어있는‘할인차액보전금’같은 대형할인점의‘강탈전략’처럼 납품업체에 손실을 전가하거나,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매업체들을 파괴하면서 들어서는 대형할인점이 비정규직, 단순노동자자의 싼 노동비를 토대로 하고 있음도 이미 주지하고 있는 내용이다. 결국 싼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와 이러한 소비자의 주머니를 털어내기 위해서 무차별적으로 가하는 저가 공세는 내구성은 점점 상실되고 조잡한 싸구려만을 양산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서게 한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 손해를 보지만 유통업자만 이익을 보는 이상한 순환체제 말이다.

이러한 구조의 사회적 문제는 노동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이로 인해 저임금 근로자들은 저소득 근로자가 되어 저렴한 상품을 찾는, 즉 한 노동자 집단이 다른 노동자 집단을 잡아먹는 동안 기업의 경영진은 뒷짐을 지고 그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는 양태가 고착화 된다는 점이다.“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저가격보다 조금 더 낮은 가격을 의미”한다는‘중국가격’이 지니는 극악한 노동착취 기반의 가격이나, 2008년9월 UN의 보고서중 9억2,500만 명이라는 세계기아인구의 통계는 인류역사 이래 유례가 없을 정도의 저가 식량이 넘쳐남에도 세계화라는 약육강식의 경제실상이 식량부족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저렴한 식량이 부족하다는 역설적 모순을 낳기도 한다.

노동을 착취하거나 노동자를 억압하여 저임금으로 만든 제품을 우리는 비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제품이 무조건 싸야한다고 한다. 가치는 실종되고 추상의 가격만이 춤을 춰대는 현실을 우린 모른 채한다. 이 바로‘인지 부조화’의 싸구려가 자신들의 목을 조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동안 잊혔던 그레샴의 법칙,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가 여지없이 들어맞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저렴한 식량, 저렴한 연료, 저렴한 신용, 저렴한 노동으로 이루어진 저렴한 세계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역사적 경험이다. 한국인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임에도 자신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이자 문화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중산층이라고 인지부조화의 현상을 보이고 있다. 쓰레기를 수거하면서‘위생기사’라 부르고, 보험모집인은‘재무설계사’로, 할인점판매원은‘어소시에이트’로 부르면서 노동자임에도 노동자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어리석음을 보인다. 경제가 바닥을 칠 때 할인점은 가장 많은 이익을 올린단다. 개인의 가처분 소득이 줄 때 할인점의 매출은 증가한단다. 즉 가난은 막대한 시장 잠재력 그 자체다. 가난한 사람들이 할인산업을 이롭게 하고 있다. 자신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바로 그 산업, 그 부자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난한 자들, 저임금자들이라는 악질적 고리다.

싸구려와 명품만 있다. 중간 제품이 없다. 거부들은 수억 원, 수십억 원대의 명품을 구매하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싸구려를 구매한다. 가치대비 가격이 좋은 상품이라는 웃기는 제품을 말이다. 내구성은 갈수록 떨어지고, 조롱하듯 춤추는 엉터리 가격으로 말이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잡아먹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저렴한 가격이란 그 환상을 지우고, 현재의 필요에서 미래의 필요를 추정하는 놀라울 정도로 어려운 임무를 강요하는 쇼핑, 궁극으로 착취의 또 다른 이름인 대규모 쇼핑행위는 지양되어야 할 시민들의 임무여야 하지 않을까. 중간의 제품, 중간의 임금, 장인(숙련자)의 부활, 품질과 환경의 복원, 인간존엄성의 회복까지를 지향하는 그런 각성이 요구된다. 지적이며, 흥미롭고, 소비자에게 제안되는 가격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속살을 여지없이 까발린 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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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위원회 모중석 스릴러 클럽 20
그렉 허위츠 지음, 김진석 옮김 / 비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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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사법체제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서 어떤 흠결도 없는 것인가? 또는 법이 구현하지 못하는 정의를 실현키위해 보다 상위의 도덕적 신념을 우리는 인정해야하는가? 만일 그러한 신념의 행동을 방임할 경우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공공의 안정성과 건강성에 어떤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닌가? 사실 이 작품이 던지는 정의에 대한 파문은 실로 곤혹스러운 것이다. 정의는 공공선이라는 때론 모호하기 그지없는 집단적 질서에 우위를 인정하다가도 개인이나 가족의 연대에 대한 미덕과 충돌할 때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최근‘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행복과 자유와 미덕의 이상(理想)을 통해 고민하는 바로 도덕적 딜레마에서 정의를 생각게 하는 바로 그 실제를 표현하고 있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일곱 살 여아의 무참한 살인, 아이의 아빠인 연방법원 부집행관‘팀 랙클리’와 엄마인 군 보안관‘드레이’부부에게 자식의 죽음을 알리는 음울한 전언으로 이 작품은 시작된다.

내 아이를 잔혹하게 살해한 살인범에 대한 증오, 그리고 결코 치유될 수 없는 부모로서의 정신적 고통이 처음부터 독자의 가슴을 묵직하게 짓누른다. 완벽한 살인증거물들과 현장, 그리고 용의자의 자백으로 쉽사리 매듭 될 듯이 작품은 빠르게 전개되지만, 여기서 작가는 첫 번째로 법과 정의에 대한 시험으로 우리들의 사유를 주춤거리게 한다. 범인을 체포한 아내의 동료들인 군 보안관들이 내밀하게 직접의 복수를 가할 기회를‘팀 랙클리’에게 제공한 것이다.

법의 판단에 앞서, 경찰력의 비호(庇護)하에 내 아이의 참담한 죽음에 직접적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어떤 결정을 하여야 하는가? 놈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가슴이 찢어들듯 울부짖는 아내의 슬픔과 사무치게 그리운 딸아이의 모습, 그리고 갈기갈기 찢긴 아이의 시신이 교차되어 이성이 마비될 것 만 같은 자신의 증오에 위로가 될까? 공공의 이성, 즉 사법부의 정의로운 판결에 맡겨야 할 것인가? 살인범을 앞에 두고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돌아오지만 결단에 대한 갈등이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이 이어지는데 아이를 추행하고 토막 살인한 살인범이 법집행절차의 흠결로 인하여 무죄판결을 받는다. 귀머거리인 범인에게 미란다수칙을 지키지 않는 수색과 체포의 결과물은 법적 증거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살인행위와 법집행절차의 충돌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살인용의자의 인권, 그리고 제도로서의 법적장치 수호와 개인의 행복과 자유의 충돌이기도 하다. 명백한 살인자이지만 단지 집행절차의 문제로 범인이 풀려나는 것이 과연‘정의’인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인 것이다. 내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법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자유로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면 아이의 죽음에 대해 우리사회는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사법제도는 무능력한 것이고, 정의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일까? 법집행절차를 비롯한 사법제도의 자기갈등 요소로 인해 세상에서 격리되고 처벌되어야 할 흉악범들이 자유롭게 활보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율에 상처임이 분명하다. 표제인『살인위원회; The Kill Clause』의 등장은 그래서 소설의 구조상 적절함을 넘어 주제를 선명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극악한 살인의 증거와 정황이 명료함에도 법적용의 흠결이나 하자, 오심으로 인해 풀려난 살인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척결하기 위한 은밀한 조직이 법집행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는 정의에 대한 판단을 누가하는 것인가? 인간사회가 합의한 질서를 초월하여 정의를 주장할 수 있는 존재란 가능한 것인가? 하는 어려운 질문이 된다.

사회심리 및 범죄심리학계의 유명교수가 중심이 되어 가족의 일원이 살해되는 고통을 안은 전직 FBI, 형사로 구성된‘살인위원회’의 활동이 갈등 끝에 합류한 주인공‘팀 랙클리’의 민완한 행동으로 본격화된다. 희대의 살인마들이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도 살해되고 사회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행동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찬사를 보내지만, 법질서의 훼손을 방치할 경우 사회치안의 부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법이 방치한 흉악범들에 대한 처단의 치밀한 전개가 기막힌 액션과 사실적 묘사를 통해 소설의 재미를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아마 책 읽는 자들의 쾌락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폭력성과 보복의 처참함으로 필름 느와르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고 있으나, 이보다는 고귀한 주제의식과 완벽함에 가까운 플롯으로 인해 장르소설이 지니는 주변적 시선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어 여느 정통소설 못지않은 작품성을 확보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밀리터리 액션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서스펜스와 스릴, 범인 소탕을 위해 벌이는 현장감이나 세밀한 디테일에서 상당히 뛰어난 서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초법적인 팀의 행동을 다시금 제도 내에 복귀케 함으로써 경직되고 냉정한 법 체제에 인간의 숨결을 불어넣고자 하는 작가의 인본주의적 신념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정의는 항상 갈등하지만 장기적으로 도덕적이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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