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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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로맹가리’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 ‘에밀 아자르’를 부여하고 출간한 최초의 작품이다. 더구나 결말 부분이 잘려나간 채 출간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들까지 더해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그의 당시 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대해서였다는 그 자신과 세간의 주장을 조금은 전복하고 싶어진다.

첫 번째 아내를 떠나 당대 스크린의 아이콘이었던‘진 세버그’와의 염문과 재혼, 그리고 다시금 이혼이란 결과는 그의 신분상 명예(외교관으로서 또한 존경받는 작가로서)에 흠집을 안겨주었던 것이 사실이고, 또한 문단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더 이상 매혹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자르라는 변신은 비우호성을 돌파하기 위한 작가적 수단이 아니었을까하는 억측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작가 주변의 환경은 그에게 새로운 언어의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는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언어를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 작품 『그로 칼랭』의 주인공‘쿠쟁’이 하는 말은 세상 사람들의 어법과는 사뭇 다르며, 그 소통의 단절은 내면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일반적인 현상, 세계는 흘러 나가지 못해 공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사랑의 초과분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요새 안에서 엄청나게 축적된 애정의 자산이 쇠퇴하고 손상된다.”즉 감정의 잉여를 해소하지 못하는 대 도시 평범한 사람들의 소외와 단절로 인한 배출구의 차단 말이다.

어쨌든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비단뱀과 자신의 서식지(방 두 개의 아파트)에서 동거하는 쿠쟁이라는 사내는 직장 동료들로부터 “그 사람은 아무도 마음에 두질 않아...”라는 말을 듣게 될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는 “약간은 자기 나름의 내면생활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공공연한 소외의 소문을 떨치기 위해 자신에게도 “누군가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비단뱀‘그로 칼랭’의 사진을 꺼내어 내미는 것처럼 그의 언어는 세상과 다르다.

그러나 이러한 쿠쟁의 다른 언어는 경찰서 서장과의 대화에서 엉뚱한 제안으로 자신의 언어에 공포에 질린 것 같았음을 느끼고 있음에도 “나는 아주 쉽게 애착을 느낀다.”고 하는 것과 같이 외려 세상 사람들의 독해가 잘 못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역설적이고 뒤틀린 쿠쟁의 말을 듣다보면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웃음이 쿡쿡하고 터져 나오게 되는데, 이 코미디와 같은 언어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세련된 비판, 아니 조롱이라 하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일례로 “어떤 위대한 프랑스인은‘어려움을 꾹 참아야 한다.’는 훌륭한 말을 했지요. 만약 우리 아버지들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분명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주민 머릿수와 국민총소득 얘기입니다.”처럼 ‘인구 통계학’적이라는 쿠쟁의 반복되는 비유는 그 근원의 불완전성을 보잘것없게 보이게 하는 식이다. 결국 우리들이 잃어버린 진정한 언어, 즉 본질에 대한 제대로의 살펴보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한편, 그로칼랭의 탈피 장면이 거듭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쿠쟁은 경이로워하며 이유 없이 행복한 느낌에 젖어든다. 그리곤 “생애의 지극히 낙관적 사건, 재생, 부활절, 욤 키푸르(대속죄일), 희망과 약속 ”이라고 해석하고, 이는 “진정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비단뱀이 새로운 삶을 얻을 때가 되었음을 느끼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경탄한다. 여기에서 작가의 변신, 즉‘에밀 아자르’로의 새로운 탄생, 즉 작가 자신의 재생을 위한 간절한 희구를 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 언어는 마침내‘불가능의 끝’이라는 그로칼랭이 자신(쿠쟁)에게 인간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것과 같이 도달이 묘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작가가 자살하면서 남긴 <결전의 날>이라는 유언의 쪽지 마지막 문장,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고 한 것이야말로 바로 이‘불가능의 끝’을 완성한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사실 이 작품의 문장들 하나하나 마다에는“본성에 대한 진정한 승리가 열어주는 지평과 전망”을 일깨우고, 추가된‘생태학적’이라고 불리는 결말부분과 같이 자연보호라는“미래가 기대되는 예외와 도약의 순간”처럼 의미심장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밀도 높은 주제가 내재되어 있다. 가엾은 흰쥐 블롱딘을 그로칼랭에게 먹이로 주지 못해 고통 받는 쿠쟁에게 “생쥐를 무더기로 주세요. 알아보기 힘들 겁니다. ~ 中略 ~  개성이 생기는 거지요. 개성 없는 다수로 받아들이면 훨씬 인상이 희미해 질 겁니다.”에서와 같이 우리의 인식에 대한 역설적 반성을 요구하기도 하며, “다른 사람이 주게 하세요.”처럼 본질은 변화된 것이 없음에도 주체만을 바꾸어 합리화시키는 어리석은 세상을 조롱하기도 하는 것이다.

“확실히 현 상태에서는 애무가 부족하다.”라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들어서지 못하는 현실세계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비단뱀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르는 쿠쟁이라는 현대인의 위태로운 소외의 강박이 해학적이고, 또는 변태적으로 , 그러면서 진중한 목소리로 외쳐지고 있다. “즉각적인 우정을, 자발적인 뜨거운 격정을, 일종의 상호관계 같은 감정”이 세상에 창궐하기를 바라면서.
아마 출생 전 의식 상태인‘프롤로고맨’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단뱀이 동물이 아니고 하나의 인식임을 깨닫기 위해서라도 몇 번의 재독이 필요한 작품이다. 어쩜, 순수한 상태의‘로맹 가리’를 비로소 읽고 있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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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씨 마을의 꿈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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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농촌마을이 주사바늘이란 탐욕의 얼굴에 무참하게 스러져 간다. 채혈(採血)을 위한 매개체인 주사바늘이란 물질에 인간 탐욕의 죄를 물을 수도 없으며, 그 목적인‘피’를 황폐해진 텅 빈 마을의 원인이라 할 수도 없다. 비록 주사바늘이 사람들의 살갗을 뚫어 피를 빼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인간들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혈액이 한낱 상품, 사고파는 거래대상으로 변질된 것에 있을 것이다.

물질지상의 자본주의체제가 인간까지 사물화한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폐쇄되어 있던 중국 사회에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서구 물질문명의 화려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농촌사회는 분출되는 욕구를 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득원이 부실한 빈곤한 농촌사회의 현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방정부는 매혈(買血)을 통한 소득을 부추긴다. 여기엔 오직 물질에 대한 욕망만이 있을 뿐, 인간 존엄성의 인식과 같은 도덕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정과 부패만 성화를 댈 뿐 공공성에 확보되어야 할 양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약삭빠른 인물들은 채혈소를 차리고 어수룩한 농민들의 피를 사들이기 시작하고, 피를 팔아 받은 돈은 사람들을 물질숭배와 과시적 소비에 휘둘리게 한다. 마을의 초가집은 벽돌집으로 바뀌고, 황톳길은 시멘트 포장로로 변화한다. 채혈소를 운영하여 폭리를 취한 자들과 마치 밑천 없이 벌어들인 것 만 같은 재화에 현혹된 사람들은 매혈을 통해 모방소비와 소비의 한계를 늘려나간다.  

부의 축재에 열을 올리는 인간들에게 위생이라는 보건 안전망과 같은 인간에 대한 배려는 존재치 않는다. 이러한 상황은 이유 없는 열병으로 마을 사람들을 몰아넣고, 감기와 같은 미열을 동반한 증세는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로 밝혀진다. 마을은 집단 패닉상태에 빠진다. 너나 할 것 없이 매혈을 통해 부를 확보했던 마을 사람들을 공포의 죽음으로 이끈 매혈사업은 더 이상 지속가능 사업이 되지 못한다. 소설은 딩씨마을(丁壯)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딩선생(할아버지)’과, 사람들을 꾀어 매혈로 부를 축재한 부도덕한 파렴치한인 그의 큰 아들‘딩후이’를 대립시켜 도덕적 책임을 묻고 있지만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밀어닥친 물질주의에 대한 마을사람들인 일반대중의 탐욕이란 본성역시 책임을 회피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한편 흥미롭다하여할지는 모르겠으나 열병 환자들이 학교로 모여들어 집단생활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의 무차별적 사물화와 부의 차별성이 지니고 있는 악덕에 반(反)하여 공동 갹출과 노동의 형평성 등 공동생활을 위한 평등주의의 묘사를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향수, 일종의 회귀를 그리고 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가 폭로하고자 하는 것은 물질이 파괴하는 인간성에 있다. 마을의 리더인 딩선생을 축출하고 촌의 주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과 이에 부응하는 마을사람들의 의기투합은 학교의 기물을 개인의 소유로 분배하고, 나아가서는 죽어가는 자, 죽은 자들을 위한 관(棺)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고목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내는 행태에서 물질에 숨겨진 소유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열병으로 죽은 자들에게 현(縣)정부가 무상으로 공급하는 관을 빼돌려 판매하는 딩선생의 아들 딩후이라는 인물, 즉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에 대한 반발이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이해가 있을 수 있으나, 작가는 이 들 양자에게 공히 부도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다. 생태계의 무참한 훼손, 교육현장의 파손이라는 정신의 상실...

그러함에도‘피를 판다’라는 시작에서부터 이 소설은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이 무서운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한다. 무상 공급되는 관, 다시 말해 죽음에 대해 주어지는 보상까지 가로채는 파렴치함, 그리고는 에이즈로 죽은 미혼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음혼(陰婚:영혼결혼)을 부의 축재에 이용하는데 이르는 자본주의 물화의 대상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과 같다. 결국 비속(卑屬)살인이라는 비극에까지 이르며, 정의의 심판을 내리기까지 하지만 이미 마을에 인적은 사라지고 폐허만 쓸쓸하게 남아 스스로들을 사라지게 한 탐욕의 자취만 황량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자신의 생명으로 썼다고 하는 이 작품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통한의 절망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에 이어 이 역시 판금(販禁)된 소설이 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니 작가의 목숨을 건 집필의 처절함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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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몫 - 모더니티총서 10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문학동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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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력의 발전을 인간 활동의 이상적 목표로 보는 오늘의 우리에게‘비생산적 소비’,‘낭비’,‘소모’를 인류의 본원적 가치라고 말하는 이 전복적 사유의 저술은 바타이유의 사상적 기점이자 근원적 사고를 담고 있어 이후의 그의 저술들 - 『에로티즘』,『에로티즘의 역사』- 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할 수 있다.

모든 유기체는 에너지(부)의 원천과 본질을 아무 대가없이 베푸는 태양 광선에서 얻으며, 이 대가없는 베풂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초과분은 체계의 성장에 사용토록 한다. 그런데 만약 이 체계가 어느 순간 그 에너지를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그 초과에너지가 성장에 흡수될 수 없게 되면, 남아도는 에너지는 폭발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가없이 소모되어야만 안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이 저술을 관통하고 이후 바타이유의 모든 사유를 지배하는 관념이 된다.

즉 대가없이 소모하는 것, 바로‘비생산적 소비’라는 것으로써, 이는 인류평화, 생존과 유지를 위한최고의 진리로 인식되는 것이다. 물질의 풍부한 생산이 미덕이 아니라 생산에는 전혀 관여치 않는 사치와 소모가 미덕이라는 말이 언뜻 낯선 이야기로 인식되지만 고대사회의 증여에 의한 교환시스템이나 희생제의와 같은 종교적 축제를 비롯해서 군사기획사회로서의 이슬람의 소모적 전쟁이나, 티베트의 승려사회라는 비생산적 집단, 서구 중세 종교기획사회의 모습을 통해 잉여의 해소가 인간과 지구, 나아가 우주 질서의 본성임을 납득케 하고 있다.

1차 및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우리가 목격하는 역사의 사실들을 저자는 바로 과잉에너지의 파국적 소모의 예로서 파악하고 있다. 예로서 산업혁명으로 인한 비약적인 생산력의 발달은 자원증대와 성장과잉을 초래하였으며, 이로 인한 유례없는 인구성장과 같은 압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잉여에너지의 발산, 소모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결국 많은 비생산적 소비의 방식이 있으나 서구사회는 파괴적인 비생산적 소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사회는 이러한 과잉에너지의 낭비가 일상적 태도이며 제도화 되어 있었음을 발견케 되는데, 고대 아즈텍인들의 희생제의나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증여교환시스템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신공양과 노예의 대량살상을 동반하는 거대한 희생제의는 생산이나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야말로 대량의 순수한 소비로서 비생산적인 소비라는 천박한 소모를 신성한 세계로 돌려놓아 삶의 균형을 축조했으며, 경쟁자에게 모욕을 주거나 굴복시키기 위해서, 또한 상대의 도전을 자극하기 위한 부의 막대한 파괴나 증여의 방식을 통한 일종의‘부의 순환방식’인 포틀래치는 효과적인 잉여의 소모였다는 점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폐쇄된 지역인 티베트사회의 경우 과잉에너지의 내부 폭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모의 출구가 요구되는데, 불교 라마승이 지배하는 신정국가로서 아무런 생산도 하지 않음에도 막대한 소비만 하고 더구나 아이도 갖지 않는 수많은 수도원과 소속 승려집단은 잉여를 흡수하는 탁월한 체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 자본주의사회의 최고의 선으로서 생산의 가치와 악덕으로서의 사치와 낭비라는 소비의 개념을 가져온 종교개혁을 과잉에너지의 비생산적 소비를 인류사회에서 거두어간 전환점으로 파악하고, 칼뱅주의를 중세의 순수한 종교적 요구인 비생산적 소비의 세계를 파괴하여 자본주의를 근본주의화한 기저로 설명하고 있다. 즉 가처분 노동력의 유용한 사용과는 거리가 먼 교회의 건축이나 교회장식물과 같이 구체적 이익을 벗어난 사치인 잉여의 소비라는 덕목을 말살하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비생산적 소비가 반드시 찬란한 가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폭발을 이완시키는 의미를 가지며,“베풂과 지체 없는 삶의 취향”이라는 실존의 미덕을 지닌다는 측면에서 자연의 평화로운 순환에 기여하고 있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하겠다.

우리 인류사회는“과잉생산이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전쟁만이 팽창산업의 유일한 고객”이었음을 경험하였을 뿐 아니라 그 파괴력과 결과가 가져올 공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시대적으로는 그 간극이 존재하긴 하지만 이 저술의 마지막장에서 언급하고 있는‘마셜플랜’은 2차 대전 종전 후 냉전의 시대에 유럽의 경제복구를 지원하기 위한 미국의 잉여를 해소하는 막대한 무상공여로서 파국적인 소비를 회피한 비생산적 소비의 슬기로운 모델이 된다.

그칠 줄 모르는 성장지향, 부의 축적에 여념 없는 현대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은 끓어 넘치는 상품, 즉 잉여의 문제를 이미 낳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의식을 장악하고 있는 고전경제학의 개인의 이익을 전제의 이익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관점은 바타이유의 이 일반경제학에 의해서 극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마셜플랜의 교훈인“개인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전체의 이익이 우선하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이 우리는 비생산적 소비를 실현하는 사회로의 복귀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부의 상당부분을 비생산적 소비에 바치도록 하는 노동자 운동(작업시간의 단축, 소득의 증가는 여가의 증가로 사치와 낭비를 촉진하며, 아울러 부의 공평한 배분으로 정의를 구현한다)이나, 좌파정책(복지 등)은 혁명과 같은 전복적 혼란에 의하지 않고 경제제도를 평화적으로 발전시키는 효과적인 방향이 될 것이다.

‘사치, 종교예식, 기념물 건조, 전쟁, 축제, 스포츠, 장례, 예술, 도박, 섹스, 증여, 기부’와 같은 ‘소비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소비’는 과잉 에너지를 해소하는 유용한 수단이다. 초과 에너지가 부르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들 비생산적 소비를 오늘의 사회에서 여하하게 복원하고 촉진하는 가하는 것이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잉여를 가진 부자의 헛된 사치와 과시는 기부와 공공증여와 같이 내부의 폭발을 터뜨리는 정의로운 수단으로 배출되어야 할 것이다. 이후 죽음의 사치, 성의 사치와 같은 방식으로 고찰되는 생명의 심오한 진실로 나아가는 이 소모의 개념은 인류 문명의 변화를 규명하고 그 발원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기호가 된다. 바타이유를 읽어나가는 모든 이들에게 그의 탁월한 저술들에 앞서 『저주의 몫』을 우선 필독하기를 권한다. 이는 그의 사상의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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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던 프랑스 작가‘로맹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첫 발표한 작품 『그로 칼랭(Gros-Calin)』을 접하자, 우연히도‘니콜라 파르그’의 작품에서 지적 아름다움의 비유로 인용된‘진 세버그(Jean Seberg)'를 발견하게 되었고, 한동안 미루어 두었던 호기심이 발동했다. 1962년 결혼한 로맹가리와 진세버그의 관계란 어떠한 것이었을까? 로맹가리의 작품에서 진세버그의 영향은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왜 자살이란 극단적 수단을 통해 생을 마감한 것일까? 하는 것들...

             

1914년5월8일 러시아에서 출생한 로맹가리와 1938년11월13일 미국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무려 24년의 연령 차이를 둔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두 사람의 명성만큼이나 적지 않은 것이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 진 것인지는 정황으로 파악할 수 있는데, 진세버그의 데뷔작인 <성 잔다르크>에 이어 두 번째 작품인‘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슬픔이여 안녕』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세실’역으로 출연하면서, 당시 영화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로맹가리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자의 배우자가 있던 두 사람으로서는 서로의 사랑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이혼이 선행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960년 6월 진세버그는 첫 번째 남편인‘프랑스와 모레이유’와 서둘러 이혼한다. 그러나 가리의 정신적 지주이자 그의 외교적 업적을 가능케 했던 아내‘레슬리’와의 이혼은 수월치 않았던 모양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슬픔이여 안녕>이 상영된 1958년 이후부터 서로를 동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0년 프랑스‘장 뤽 고다르’감독의 발탁으로 일약 세계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된 그녀의 출세작 <네 멋대로 해라>는 당시(1960년) 이미 프랑스의 유명작가이자 고위 외교관이었던 로맹 가리의 어떤 영향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호간의 호감과 영향의 행사는 두 사람을 더욱 친밀한 관계로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쨌든 1961년 봄부터 이 두 사람은 동거에 돌입하고, 레슬리와의 이혼이 매듭지어지는 1962년10월16일 결혼식을 올린다.

진 세버그의 영화촬영이 있는 날이면 로맹가리가 항시 동행하여 격려하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고 증언하는 것이나 1963년 이들의 아들인 디에고의 출생이 있었던 사실로 보면 두 사람은 성격이나 사상적으로 상당한 일체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눈부신 외모와 밤톨을 깍아놓은 듯한 단단하고 새침한 이미지와는 달리 지극히 내성적이고 자신을 꾸미는데 인색하며 소박한 삶을 지향했던 진세버그의 예민한 감수성과 고통 받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이 민감한 프랑스 작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이 아닐 수 없게 하였던 모양이다. 나긋하고 순종적이며 헌신적인 여인, 그래서인지 괴팍하기만 했던 가리의 성격이 다 변할 정도였다니 진세버그의 현명함이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의 영화 촬영장에 따라다녔다는 것은 그의 단편「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가  촬영 장소였던 스페인 마요르카의 몇 개월 간의 체류에서 외교관 시절 딱 한 번 가본 경험이 있는 페루의 해변으로 이어진 것이다는 작가의 설명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이들 부부에게는 그리 훌륭한 것이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로맹 가리는 이 작품으로 영화를 제작 감독하게 되는데, 아내인 진 세버그를 주인공으로 출연시키면서 심한 균열이 발생한다. 환상적이고 적나라한 촬영을 요구하여 극한의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정신적 상처를 주기에 이르는데, 아마 이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되었던 것 같다. (프랑스에서는 상영이 금지되고 미국에서 X등급 판정이 내려질 정도였으니 아내로서 진세버그의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한편, 진 세버그의 타인에 대한 연민이 그녀의 사회활동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조명하는 것도 이후 그녀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실체를 추측케 하는 유용한 성찰이 된다.‘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가입해 인권운동을 하고, 흑인자경단‘블랙펜더(Black Panther)'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등 민권운동가로 활약하는데, 이는 미국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결국 당시 FBI국장‘존 에드거 후버’의 지휘 하에 매스컴을 동원한 입체공작을 통해 진 세버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1970년 그녀의 실명까지 공개하며 진세버그가 불법시위를 주동하고 마약에 빠져있으며, 흑인과격단체 중 한명과 추잡한 섹스를 하여 임신까지 하고 있다고 악질적이고 근거 없는 추문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잔인한 공격을 지속한다. 남편과의 정신적 갈등에 더해 정치적 음모로 한 여인을 무차별로 공격해대는 광적인 공작으로 진 세버그는 가리와의 사이에 잉태한 두 번째 자녀인 딸‘니나’를 조산하게 되고, 니나는 이틀 만에 사망하는 고통을 겪는다. 이처럼 사악한 정치권력의 폭력은 한 여자의 삶을 완전히 몰락시켜 버리고, 급기야는 1979년 9월 8일 그녀는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추측은 약물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것이다에서 FBI의 살해다라고 분분하지만 이 역시 알만한 사람들은 알고도 남을 이야기다.

 

이에 분노한 로맹가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사회에 분노하며, 한 고귀한 생명에 대해 가해진 FBI의 끔찍한 공작이‘살인’을 저질렀다고 고발하기에 이른다. 로맹 가리는 1970년 정신적 혼란과 갈등을 겪던 진 세버그의 요청으로 이혼하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과 이해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내의 죽음으로부터 대략 1년 후인 1980년 12월 1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로맹가리가 죽기 8개월 전에 작성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라는 텍스트가 몰고 온 세상에의 파문은 그야말로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다. ‘에밀 아자르’가 바로 ‘로맹 가리’라는 고백이다.
자살하면서 가리가 남긴 <결전의 날>이라고 쓴 한 쪽의 유언 또한 그야말로 의문투성이다.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 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 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 할 것이다 ; La Nuit sera calm』라는 내 자서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자신의 자살은 이혼한 아내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으니 부질없는 추측은 하지 말라는 얘기이며, 상심한 마음이나 신경쇠약의 문제는 아니라고 못 박는다.

다만 자살이란 죽음이 자신의 문학 작업을 완성하는 수단이며, 궁극에는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학의 완성은 죽음으로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것이다. 이를 보고 대단한 작가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위대한 작가와 은막의 대스타의 결합에 대한 호기심으로 예기치 않은 탐색을 다하여 보았다. 대작가인‘F.스콧 피츠제럴드’와 혹독한 정신병으로 시달리다 죽음에 이르렀던 그의 아내‘젤다 세이어’가 오버랩 된다. 닮은꼴의 커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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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6-25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딱 궁금했던 스토리를 이렇게 짚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진 할로우와 혼동하기도 했어요. 둘 다 은막의 스타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활동에서도 공통의 교감을 보여주어서 신기합니다. 로맹 가리의 유서도 참 흥미롭네요. 아내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지적하는 대목도^^;; 잘 읽고 갑니다.

필리아 2010-06-25 21:24   좋아요 0 | URL
로맹가리는 자기문학에 일종의 신성을 부여하려했던것 같습니다. 여기에 모두 기술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의 프랑스총영사까지 지냈던 사람이 장관 비서까지 하면서 자기작품의 PR에 열을 올리기도 했구요, 사실 에밀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하는 행위의 숨겨진 의도에는 추락한 자신의 이미지를 회피하기위한 방편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세버그는 그야말로 천사였지요. 엄청난 지원자였던 첫번째 아내 레슬리를 떠나게 할 정도의 여자라면 아마 그 이상의 헌신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지거든요. 아무튼 이 두사람의 관계는 알수록 흥미로운 요소가 많습니다...

반딧불이 2010-06-27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끔하고 차분하게 정리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필리아 2010-06-27 17: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맹가리의 작품을 읽을실 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별헤는밤 2010-06-2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를 읽었었는데, 이렇게 또 마주치게 되네요.
좋은 정보 얻고 갑니다. ^^

필리아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그로 칼랭>이 당시 출간될때 배제되었던 부분까지 수록되어 결정판으로 국내에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롭게 읽고 있답니다...

비연 2010-06-27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의 팬으로서, 잘 정리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내와 그런 일들이 있었군요....불행하게 마무리되어 슬픈.

필리아 2010-06-28 12:45   좋아요 0 | URL
진 세버그의 죽음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로맹가리가 과연 자신의 문학을 완성한다는 이유로 자살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구요...

레와 2010-07-02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고 [자기 앞의 생]을 읽었어요.
이 작가에 대해 더욱 궁금해지는데, 남은 작품중에 어떤 책을 먼저 읽는게 좋을까요? ^^

실례가 안된다면 조언 부탁드립니다. ^^;

필리아 2012-06-26 07:20   좋아요 0 | URL
읽으신 <자기앞의 생>은 <그로칼랭>,<가면의 생>,<솔로몬 왕의 고뇌>와 같이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이구요, 그 밖의 작품들은 '로맹 가리'로 발표된 작품입니다.
특히 이들 작품은 '아자르 語'로 불릴만큼 선명하게 문체와 서술방식이 다르기때문에 이들을 우선 읽으신 후, 여타 작품을 읽게되시면 보다 폭넓은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은 제 私見이니만큼 절대성은 없사오니 레와님의 독서 취향에 따르시는 것이 오히려 답이 아닐까 합니다.)
 
난 네 뒤에 있었어
니콜라 파르그 지음, 이혜원 옮김 / 뮤진트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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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쓴 유일한 소설이라고 작가가 말했듯이 감정의 미세한 흐름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화자에게서 삶의 민낯 그대로를 보게 된다. 사랑하고 질투에 분노하며, 비참한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또 다른 성적욕망에 행복과 불안으로 갈등하는 남자가 있다. 사실 소설의 테마만 놓고 보면‘사랑과 이별’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밖에 없지만 일상의 사건에서 부딪는 순간순간들의 감정에 대한 찬란한 묘사와 자기 행복을 꿈꾸는 인간들 본연의 욕구에 대한 숨김없는 발설, 남편과 아내의 관계성에 대해 수없이 반복되는 이해와 갈등, 그리고 사랑에 대한 오해와 균형을 상실한 관계의 비대칭성이 가져오는 고통 등이 내면의 서사라는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의 맛으로 진부함을 완전히 참신함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화자(話者)인 30대 남자가 쏟아내는 처연해 보일정도의 세세한 내면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하는지, 자신에 대한 엄숙한 비판인가하면 어느덧 아내‘알렉상드린’의 일방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의 결함을 우회하고 있고, 필요이상으로 아내에게 무력감을 보이며 자기의 삶을 희생하는 남자인가 하면 스물일곱 남자로 변하여 자유와 사랑의 열정에 휩싸인 자신감 넘치는 남성을 희구하는 것처럼, 그 감정의 오르내림으로 멀미가 날 정도이다.

“잠자리를 할 마음도 없는 여자” 때문에 아내에게 헤어지자고 불쑥 내뱉은 고백으로 전깃줄에 상처가 나도록 얼굴을 맞고는 비열한 위협으로 죄스럽기 짝이 없는 짓을 한 자신이기에 아내의 감당해야하는 고통을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야 했다는 남자의 말은 과연 진실일까? 자기의 비굴할 정도의 희생은‘마조히즘의 극치’였다고 말하는 남자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남편을 자기마음대로 부릴 수 있으며, 일방적 감정을 강요하는 아내, 항상 화를 내는 폭력적 아내에 대한 잠재의식 속의 반란이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화자는 한 달 반 동안 쉬지도 않고 신뢰를 손상한 대가를 치르지만 필요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아내에 대한 적의로 고통을 받는다.

한편 소설의 중요한 두 사건인 아내가 태연히 저지르는 성적 일탈과 화자의 이탈리아 로만체에서의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발생한‘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사랑이야기로부터 파생하는 심리적 파동의 섬세한 묘사는 바로 이 작품의 탁월함 그 자체로서, 아마 이러함이 소설을 풍요롭게 하고 공감을 일으키게 하는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 성적탐닉에 빠져버린 아내의 수첩을 우연히 읽고 반응하는 화자의 절망적인 감정의 흐름은 그야말로 문장의 진수이다.

“나아닌 다른 몸을 향한 사랑의 말을 읽고 또 읽었어. ~ 나는 그 글을 읽는 바로 그 순간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줄 알았지. ~ 중략 ~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 아무 차에나 뛰어들 수도 있다는...”
“그녀는 나 없이 정욕의 역사, 일시적인 열정의 역사를 체험한 거야. ~ 그 자식의 완벽한 육체와 무심함에 홀딱 반했지.”

이렇듯 배신의 고통으로 몸을 떨면서도 아내의 성적 욕망은 부부의 사랑, 가정의 존속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자신을 위로한다. 더구나 아내와 헤어지자고 한 비열한 남자로서 당연히 감수하여야 할 문제로 말이다. 그럼에도“그놈의 호텔방에서 섹스 할 때 쏟아냈을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상상하며 괴로워하는 화자에게서 제도와 윤리,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 대한 끊임없이 소모적인 충돌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알리스라는 여성과의 운명적 만남이 남자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사랑, 성적욕망에 대한 중요한 이해가 된다. ‘로맹가리(에밀 아자르)’의 아내기도 했던‘진 세버그(Jean Seberg)'처럼 윤곽이 또렷하며, “르네상스 시대 그림에 나오는 금발의 라틴계 마돈나”라고 묘사되는 여자, 알리스로부터 비로소 알게 되는 사랑의 희열, 행복과 삶의 자유에 대한 이해이다. 작품의 표제인‘난 네 뒤에 있었어(Ero dietro di te)’는 바로 이들 만남의 표상이기도 하다.

“꿈결과도 같은 구원의 이 늦여름 햇살, 내 마음을 달래주고, 나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이 햇살, 이 자유의 빛, 정지된 시간, 제 빛을 되찾은 색채, 완벽하리만치 온화한 대기, 매혹적으로 전개되는 일들...”

같은 순간에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 있는 미지의 여자를 어디선가 만난다면 그 행복을 구체화 시킬 수 있을 거라고. 바로 알리스가 그런 여자라고. 행복은 그런 여자. '랭보‘의 「감각」이라는 詩의“여자와 함께 할 때처럼 행복하다”는 바로 그런 감정. 소설 속 길게 나열되는 사랑의 산문시 같은 문장들에서 만사를 잠시 잊고 문득 언젠가 느꼈던 것만 같은 늦여름 아침의 나른한 햇살이 그리워지고 좋아지게 된다.

자신의 비정상적이고 공격적인 감정에 순응하며 희생하는 남편, 배려하는 남자에 대한 일종의 중독증을 사랑으로 오해하는 여자와 이러한 기만적인 감정으로 심적 고통과 삶의 균형을 잃어가는 남자의 내면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에서 그려진다. 결국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주고 같은 사랑을 원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는 여자에 대한 로망은 남자에게 자신을 생각할 권리, 삶의 본질적 자유를 환기시켜준다. 남편의 감정을 지배하려는 아내의 굴레를 벗어나 프랑스에서 연인이 있는 이탈리아를 향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남자, 그리곤 5일간의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그의 시선에 비친 제야의 불꽃에서 왠지 심각하고 복잡한 인생이란 벗어던질 수 없는 무엇이 있는 것처럼 아득함이 느껴진다. “경쾌함에 대한 작은 환상”이라고 치부하면서, 더구나 “각자가 지닌 비밀의 정원 속에 감추어진 멋진 추억”정도로 묻어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여자와 평생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 작품은 이렇듯 사랑했으며,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를 두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우리네들 모두에게 항상 반복되는 질문에 대한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햇살이 적당하고 만사가 순조롭다고 억지를 부리지 않을 때, 그 순간이 바로 행복”인데, 바로 그 햇살의 기억이 흐리멍덩하기만 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한 무능한 남자의 고백을 읽고 가슴이 뭉클하고 시린 것은 왜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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