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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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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공교롭게도‘단독성(Singularity)'에 대한 서로 다른 의미접근을 한 두 권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 하나는 자유의 진지한 가치를 말함으로써 삶의 온전함을 말하는 이 책이고, 다른 하나는 『싱글라리티』라는 표제로 들뢰즈가 말한 단독성의 의미가 완전히 야만적으로 사용된, 즉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주의의 극한적 방법론을 말하기 위해 이 담론을 끌어댄 책이다. 인문학적 담론이 우리의 삶에서 왜 필요한가를 자문(自問)할 때 그것은 “사회의 문제에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는 것이고, “사회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발견하는 데” 유용한 지적바탕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이렇게 사용되지 않고 사회의 문제나 결함을 은폐하거나 그것들에 영합하여 인간의 보편적 삶의 가치를 훼손하며 자유를 구속하는 것으로 이용된다면 나는 그것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라고 말 할 것이고, 그러한 자들에게 침을 뱉을 것이다.

 

반면에 저자 강신주가 시인 김수영을 자신의 삶으로부터 분리하고 이제 자기만의 진지한 삶을 가꾸기 위한 첫 걸음을 위한 이별식이라 할 수 있는 이 책이 개별자의 단독성을 말하는 것은 그래서 자유의 가치를 더욱 새롭고 진지하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담론의 사용이 지성적으로 사용되는 그 실천적 현장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고, 진정한 지식인의 세계와 마주하는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야만을 봄으로써 지성의 빛이 훨씬 명료해졌다는 얘기이다. 나로서는 이 우연한 두 책의 읽기가 다행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더욱 온전한 단독자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시작할 저자의 자유를 향한 실천에 조용한 응원을 보낸다.

 

1. 검열에 찌든 정신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자신들은 자유의 지대에 살고 있다고 말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들의 자유가 방해받거나 억압되어 있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어떤 한계에 부딪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경계 지어진 영역에 길들어져 순응하는 데 안주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벌어지는 마녀 사냥하듯 개인의 신념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는 거대 보수언론 권력과 수구 정치권력의 행태에서는 어떠한 자유도 발견 할 수 없게 된다. 얼마 전까지 권력에 저항하면 빨갱이로 몰아세우던 것이 종북이란 표현으로 화장하고 이 땅에는 단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다양한 신념이나 이념이 들어 설 수 없는 곳이 과연 자유의 지대일까?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이들 권력들은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있다. 오직 자신들의 이념만이 옳다고 강변한다. 이들과 다른 신념을 말하면 사회에서 곧바로 매장되게 된다. 입을 달싹거리지 못하고 비겁하게 움츠러든다.

 

권력이‘허용한 자유’만이 자유라는 논리이다. 권력이 허용하지 않은 자유를 발설하거나 행동하면 바로 서슬시퍼런 억압이 시작된다. 그러니 이런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검열한다. 그리곤 스스로 자유에 어떤 경계를 친다. 체제가 그어놓은 줄 안의 자유 속에 안주하면서 자유의 지대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책의 첫 머리를 장식하는 “김일성 만세...”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詩)에 갑자기 서늘하게 굳어버린 청중들의 표정처럼 획일화된 이념의 장막에 갇혀있는 자신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 초상이다.

시인 김수영은 이처럼 허용된 자유를 자연농원의 동물처럼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깨워낸다. 스스로 자신의 정신을 검열하는 불완전한 자유에 안주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2. 단독성(Singularity)에 대해서

 

“인간은 자유를 가로막는 저항에 맞서 자신의 자유를 관철하는 존재이다.” 온전히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사람이란 얘기이다. 이것이 억압되면 우린 제대로 된 삶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된다. 무엇으로든 테두리로 제한 된 것들 속에서 철저히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단독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영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은 이것을 통찰해 냈다. 자기만의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표현 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던 그는 단독성의 가치를 찾아낸 것이다. 온 몸으로 삶과 부딪히면 세상의 모든 쾌와 불쾌를 감당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명료하게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온 몸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저항에 직면할수록 단독성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싱글라리티, 단독성은 그래서 자유의 경계를 자각하게 하고, 오직 자기만의 몸짓으로 겪어낸 것이기에 타인과의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그만의 고유한 것이기에 새롭고, 철저한 자기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어떤 일반성과도, 특수성과도 다른 보편성을 지니게 된다. 어떠한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 경계로 규정되지 않는 독특성 말이다.

김수영은 치열하게 이 단독성을 추구한 시인이다. 자신의 단독적인 표현을 찾기 위해 교육과 습관이란 고질적인 무의식적 유산조차도 떨쳐내려 했고, 허용된 자유라는 사회가 공유하는 삶의 규칙과는 다른 규칙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아마 이러한 그의 단독성의 추구가 많은 오해를 낳았던 모양이다.

 

단독성을 추구하는 것은 권력이 그어놓은‘허용된 자유’를 넘나드는 것으로 보였을 테고, 이것으로 김수영은 자유의 모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에게 빨갱이, 민족주의, 참여파 시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오류들을 저질렀으니.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는 시, 자유를 관철시키려는 시인이 쓴 시는 당연히 과거에 생각지도 못했던 시적 형식을 만들어 냈고, 내용을 만들어 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일 터이다. 무지하고 탐욕스러우며 비겁한 무리들이 얼마나 그에게 철퇴를 내려치고 싶었을까? 터무니없는 범주화, 규정화, 패거리들의 오류와 기만들. 자유를 말하는 것, 허용된 자유라는 이기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권력에게는 불온한 것이고 두려웠을 것이다.

 

3. 모든 사람들이 시인이 되는 사회

 

시인은 단독성을 추구하는 자이다. 새로운 삶을 살아내려는 정말의 피와 땀이 어린 진지한 치열함을 가져야 하는 자이다. 팽이처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도는 힘을 회복하려는 자이다. 그래서 외롭고 서러운 과정이다. 자유란 이처럼 두려움과 슬픔이란 난관을 관통해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만의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현실의 상황 속에서 쉬운 일이겠는가? 타협해야하고 공통된 무엇에 규정되고 틀 지워져야만 살아 갈 수 있는 것이 소시민의 현실이다. 더구나 허용된 자유의 한계를 직면하고 분노했을지라도 권력에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외면하고 피해가는 것이 미덕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조금 나아가 관념에서나 자유를 이해하곤 마치 최선을 다한 것인 냥 거들먹거린다. 실천으로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머리로서 주어진 조건을 지적 조작으로 새롭게 하려하거나 자신의 정서적 반응에만 주목하면서 말이다. 아내 김현경을 우산대로 때리곤 자신의 나약함, 이기심을 바라보는 김수영의 통렬한 시선에서 현실에 주저앉아 자기 삶을 주도할 용기를 내지 않는 나약함과 비겁함에 물든 내 찌든 몰골을 본다. 불편함, 불쾌감에 대한 응시, 그것을 직면해야만 그 상황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정말의 의지가 작동되는 실천의 현장을 보고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또한 옳음과 그름은 생각의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구체적인 삶을 살아낼 때 비로소 자신의 생각이 옳은지 확인할 수 있다는 실천적 의지와 온 몸으로 삶을 살아내는 단독자로서의 다양한 목소리를 내야만 시가 될 수 있듯이 종교, 자본, 권력의 힘을 떨쳐내고 온전한 자유, 현실에서의 자유를 추구할 때 비로소 그 무수한 다양함들이 정작 우리의 문화와 민족, 인류의 발전이 되는 것임을 다시금 확신하게 된다. 한 사회의 문화에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한다는 거대 언론과 자본 권력의 주절거림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를 억압된 사회로 퇴행시키고 있는 오늘, 민주주의는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정신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것이며 이를 위해 단독성의 실천을 말하는 김수영 시인의 빛과 그림자를 담아낸 인문학자 강신주의 글에 어떤 긍지와 고마움을 갖는다. 한국인 모두가 시인이 되는 그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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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 - 곽세라 힐링노블
곽세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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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상징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사람들은 하나의 언어에 대해서 아주 다른 인식을 갖는다. ‘영혼’이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육신과는 다른 본질적인 정신세계? 의식을 형성케 하는 근원적 장치? 알 수 없다. 타인의 언어와 소통한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의 단어에서조차 수월치 않은 일이다. 두 개의 소설로 구성된 이 책의 첫째 작품인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은 그래서 내겐 선명치 않은 흐릿함으로 다가온다.

 

머리카락을 잘라줌으로써 ‘영혼’이란 것을 어루만져준다는‘류’라는 여성의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좀처럼 수용되지 않는 것이다. ‘플레이(Play)’라는 생활 속의 연극에 참가하여 스스로 완결하지 못하는 삶의 결여의 틈새를 부분적으로 충족시켜줌으로서 생의 지탱력을 부여해준다는 뮤토(Muto; 변화, 변하는 존재라는 라틴어)역할, 즉 치유자의 기능에 끝내 동화하지 못했다는 것이 내 심경이다. 타인의 삶에 뛰어들 때마다 하는 말이 바로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이라는 외침인데, 왠지 자기학대 같은 쓸쓸한 연민만 자아낸다.

 

다만, 읽어가는 동안 몇 개의 작품 이미지들이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첫째는 7년간의 플레이를 멈추고 류가 찾아간 자기만의 새로운 시간, 즉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출발의 시공간처럼 여겨지는 일본의 어느 한적한 마을이 ‘파스칼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의 ‘안 이덴’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나는 결연히 그곳으로 달려간다. 내게 결여된 그곳에서 내가 헤매고 싶어지는 느낌”, 바로 이런 시원적 감성을 자극한다. 그리곤 청년 ‘카레’의 식당과 어린 아들과 여행 가방을 끌고 인적 없는 기차역(驛)을 거니는 여인 ‘리에’로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속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들을 이끌고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삶의 완성된 사건으로 스며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인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플레이를 하는 뮤토로서의 경험을 통해 타인들의 미완성, 결여의 치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결코 그 결핍의 틈새가 완결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죽음과 좌절, 돌이킬 수 없는 절망임을 이야기한다. 아마 생의 절대적 완성, 실체의 세계에서 어떤 절대성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처럼 이해된다. 환상으로만 완결되는 공허함이라는 말일까? “마법, 기적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작가의 선언처럼 삶의 신비를 말하는 언어가 내 감성과는 꽤나 다르다.

 

「천사의 가루」라는 두 번째 수록 작품은 첫 작품과는 달리 실체적이다. 비현실적 인물들로 보이던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에 비해 상대적으로 현실감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치과 의사인 남자‘요요’와 ‘라라’라는 여성의 필연으로서의 만남과 사랑이야기가 이들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이해와 연민이 제각기의 목소리로 들려지고 있다. 세상에 환생을 믿는 이들이 65퍼센트가 된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윤회(輪廻)에 대한 믿음이 저변을 흐른다.

 

찰나(刹那)에 불과한 순간에 여자와 남자는 자신들의 모든 것이 그(그녀)에게 향하고 있음을 거부하기 힘든 마력에 빠져든다. 전생의 연(緣)이 이생에서 비로소 마주했다는 것인가? 남자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오지 않을 남자의 마중을 위해 공항 대기실을 찾는 여자. 그런 여자의 절대적 사랑을 바라보기만 하는 또 다른 남자, 이런 남자의 행위자체를 온전히 보듬는 또 다른 여자, 그리고 그 사랑들을 이해하는 또 다른 사람들에서 생과 사의 끈적한 순환을 마주하게 된다.

 

만남과 이별, 출발과 도착의 공간인 역사와 공항이란 공간이 자아내는 얕고 야릇한 설렘과 통증이 있다. 우리 고독한 짐승들이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수한 장애와 번민을 쓰다듬는 치유의 언어와 문장들이 아름답게 구성된 이야기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질적인 언어의 상징들이 소통을 불편하게 하여 소설을 온전히 읽는 것을 방해한다. 영혼과 신비의 환상에 공감하는 이들, 그들을 위한 삶의 위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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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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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마비시키는 온갖 소음들과 사건들에 싸여 지내는 현대 도시의 일상에서 도덕적 균형을 잃지 않기란 너무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다. 각종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정보들이 진실을 왜곡하고, 급기야는 거짓이 증폭되고 확산되어 사실 자체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마녀를 사냥하는 중세의 그것처럼 선량한 한 시민을 악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입증되지도, 도덕성을 지니지도 않은 말들이 기승을 부린다.

 

소설은 크게 네 개의 물음을 가능케 하는 어떠한 인과관계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행위와 사건을 하나의 도덕적 언어로 연결한다. 용서 ! 타인의 죄나 잘못한 일을 벌하거나 보복하지 아니하고 감싸고 덮어주는 미덕이다. 관용이고 포용이다. 내게 상처와 좌절, 해악을 끼친 사람을 감싸준다는 것은 말처럼 용이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나를, 내 가족을, 내 벗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었을 경우 에는 더더욱 어려운 감정이다. 바로 이것을 향해 소설은 강박과 위협의 지대를 달린다.

 

첫 번째 물음은 무책임한 알콜중독 여성의 음주운전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려는 방송 리포터‘웬디’의 시선으로부터 이다. 가해자로서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집요하게 용서를 구하는 여자에 대한 도덕성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한다. 두 번째 물음은 허무맹랑한 소문이 진실이 되어버리는 무능력에 빠진 이성의 지대인 매스미디어의 폭력성이다. 유죄판결이 나기 전까지 모든 용의자는 무죄가 추정된다는 형법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신문, 잡지, 케이블 방송, 공중파 방송 등 매스미디어의 무분별한 몰아대기 식의 행위는 선량한 한사람의 시민을 쉽사리 악인으로 둔갑시키곤 한다. 한번 미디어에 오르면 좀처럼 표적이 된 사람의 도덕성은 회복되지 않는다. 대중들은 이유없이 낙인을 찍어버리고 자신들의 경계 밖으로 밀어낸다. 대중과 미디어의 부도덕성, 특정되지 않기에 아무도 자신들의 과오가 드러나도 책임지지 않는다.

 

세 째는 사법부의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유죄로 의심되는 사람을 대중이 정의의 실현이라는 이유로 직접 처벌하는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그것이 내 아이를 성적으로 유린했으리라 확신하는 사람을 법이 놓아주었을 경우 부모로서의 분노를 생각하면 어떤 보복도 도덕적으로 공정하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과연 그럴까? 그리고 마지막 물음은 자신과 가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도덕적 실수로 야기된 타인의 죽음을 은폐하는 행위와 공공의 선(善)이 충돌 할 때 우리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내 가족의 안위라는 선을 위해 도덕성의 기준을 달리 적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을 이처럼 획일적인 범주로 분할하는 것은 작품의 본질을 해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범주에 억지로 끼워 넣을 수 없는, 동료들을 위해 희생자가 된 사람의 진실의 복귀를 위한 삶의 역행이 잉태하는 부도덕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질문도 있다.

 

이 작품이 발군의 빛을 발하는 것은 이 같은 물음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무관함에서 상관성으로 그리고 인과성에 이르게 되는 구성력이다. 바이럴마케팅, 입소문의 무차별한 자기증폭과 확산력이 도덕성과 진실을 지니지 못할 경우 그것이 일으키는 씻을 수 없는 파괴력이다. 익명의 문자메시지로 특정인이 추악한 소아성애자임을 알려온다. 이것은 한 남자를 소애성애자라는 낙인을 찍어버리고, 궁극에는 무죄 판결이 났음에도 피살된다. 여기에 피살자와 대학 동료시절 지울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누군가는 이 상황을 보복의 환경으로 이용한다. 더욱이 실종된 십대 여자아이의 스마트폰이 피살자의 도피처에 발견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비열한 도덕성을 은폐하는 또 다른 가족의 부도덕함이 더해진다.

 

입증되지 않은 소문에 의거해 한 남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매장해버리고 급기야 죽음에 이르게 한 방송 리포터 웬디의 자각, 무능력 지대에 빠졌던 이성의 회복은 소아성애자의 오명을 쓰고 피살된‘댄 머서’ 의 대학기숙사 동료들을 추적함으로써 진실에 다가가게 한다. 이 진실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장면들은 미스터리 문학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 논리적 정교함이란! 기막힌 반전이란! 더구나 예상치 못한 선(善)의 기대가 충족되는 순간, 진심과 용서, 이성이 회복된 지대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전화선 저 멀리서 웬디를 향해 들려오는 목소리. “당신을 용서합니다.” 한 마디 문장에 절망적이고 어두웠던 세상이 감동으로 환희 밝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의 재미에 압도당하고, 사회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을 회복시켜주며, 용서라는 도덕적 미덕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결백』에 이은‘할런 코벤’의 또 하나의 걸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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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우리가 '문화'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것은 실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발설된다. 좁게는 문학, 미술, 음악등의 예술을 말하기도 하고, 조금 넓게는 패션이나 대중연예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특정 사회 사람들의 삶 전반을 매개하는 일상적 사상과 가치관 전반을 지칭하는 데 이의없이 사용한다. 이처럼 바로 그 사람들의 생활 양식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기에 문화는 더 없이 민감한 언어가 된다.

 

그래서 공기처럼 흡입되는 이 문화는 조금만 경계를 소홀히 하면 사람들에게 독소가 되어 삶을 피폐화시킬 수 있다. 문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정당하다 할 수 있지 않을까? 문화자본, 대중문화, 주류문화라는 화두를 지닌 다음의 책들은 이러한 까닭을 성찰하는데 훌륭한 안내가 되어줄 것 같다.

 

취향의 정치학

 

이 책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아비투스(habitus), 문화자본, 계급적 에토스 등에 핵심개념에 접근하는 사상적, 언어적 개념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지식의 이해를 지원하며, 또한 그의 명저 『구별 짓기』의 해설서라 할 수 있다.

 

부르디외의 사상은“인간의 행동은 엄격한 합리성과 계산을 근거로 행해지기 보다는 일정한 기억과 습관 그리고 사회적 전통의 영향을 받는다.”는 곳에서 출발한다. 즉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순수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전수되어온 도식(표상)이며, 문화적 성향을 만들어 내고, 사회적 행위에 일정한 코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도식의 사회적 기능을 통해서 계급적 질서가 재생산되고 있다는 데 주목한 비판 사상의 걸작이다.

 

 

거리의 지혜와 비판이론

문화연구 분야의 가장 독창적인 책 중의 하나이다.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대중이 광고전문가들의 조작이나 지배권력의 수동적인 대상물이 아니라 능동적인 사회 문제의 제기자라고 하는 주장이다.

천박함, 상업주의, 권력의 조작이 아니라 대중의 일상 속에 강력한 진리가 담겨있으며, 누구보다 먼저 사회적 모순과 선전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토착이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군중의 시대적 삶과 언어만큼 사회의 현상을 말하는 힘은 없다는 것이다.

 

과연 문화를 통한 지배권력의 조작이 아니라 대중이 권력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 이 주장은 옳은 것일까? 은근히 비판력을 자극하는 저작이다.

 

 

메인 스트림

주류(主流), 즉 사회를 견인하는 중심적인 추세, 경향을 메인스트림(main stream)이라고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반(反)문화, 하위문화, 니치 문화의 이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메인스트림 문화라는 대중적인, 즉 “엘리트주의적이지 않은 문화라는 긍정적 의미와 상업적이고 규격화되어 있으며 단일화된‘시장 문화’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이것은 예술과는 대척점에 있음을 의미할 수 도 있다. 모든 사람을 매혹시키고자 하는 생각이나 운동, 그리고 주류에 속하게 하려는 정치적 입장과도 관련된다. 메인스트림이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긍정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한국사회는 한류(韓流)라 하여 세계 속에 자신들의 대중문화를 확산시키는 데 어떤 단순한 논리적 관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경제적 효율, 즉 경제적 이익과 문화적 헤게모니의 쟁취를 통한 국가적 위상의 제고와 같은 것. 메인스트림을 장악하는 것이 이처럼 이롭기만 한 것일까? 혐한(嫌韓)이라는 반대 논리에 부착, 누증되는 영향, 그 부정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세계 대중문화의 속살을 조사하기 위해 5년간의 발품으로 낳은 이 문화비평의 결실이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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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0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인 스트림, 의 소개글이 흥미롭네요. 좋은 소개글 잘봤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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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이 돈으로 거래되는 것에 대해 거북함, 불쾌감, 부정적 의식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본질적 요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 그리 명쾌하지 않다. 분명 거부감이 있는 것만큼은 사실임에도 말이다. 그간 이러한 부정적 감정을 야기하는 근원에는 정의의 균열, 즉 공정성의 파괴라는 도덕규범을 근거로 내세우곤 했다. 그럼에도 설명되지 않는, 혹은 반대론의 강력함이나 체제의 순응성으로 인해 미흡함이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공정성이외에 어떤 도덕적 진실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특정 대상물의 관행과 가치평가를 변질시키는‘부패’라는 도덕의식이라고 마이클 샌델은 말하고 있다.

 

난자를, 줄기세포를, 여성을 임신 대리 장치로 거래하는가하면, 사망을 담보로 하는 말기환금 생명보험을 팔고, 줄서기라는 질서를 판다. 이젠 생명은 물론 죽음까지도 포함한 거의 모든 것들을 거래 대상화 하고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란 우주 천지에 더 이상은 없다는 시장지상의 논리가 잠식하고 있다는 말이다. 내 생명을, 나의 죽음을 담보화하여 돈으로 거래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나처럼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장자유주의자들도 있겠지만.

 

우리의 현행 민법은 제 103조에서‘선량한 풍속이나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면 무효’라고 하여, 개인의 생명 등 인륜이나 정의 관념에 반하거나 개인의 자유를 극히 제한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문화된 강행규정을 두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법으로 생명과 죽음을 거래대상으로 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점차 이‘선량한 풍속’과 ‘사회 질서’를 해석하는 내용의 범위가 축소됨과 아울러 생명의 의미도 지극히 협소해지고 있거나 아예 생명 자체를 물질에 불과한 것으로 까지 밀고 나가고 있어, 아마 오래지 않아 이 법률 조항은 사문화(死文化)되고 말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말해 시장만능의 경제적 논리가 인간의 모든 생활양식을 지배함에 따라 지금까지 도덕과 이의 사회 규범적 실천으로서의 법으로 존중받고 보호되던 영역들이 비도덕과 비법률적 영역으로, 즉 시장의 거래 대상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돈이 잠식하거나 밀어낼지 모르는 태도와 규범에 담긴 도덕적 중요성의 인식을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경고를 의미한다. 시장이 인간 삶의 고유한 비시장적 규범의 영역을 침해하는 이것이 우리 인간과 인간사회를 어떻게 손상시키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감정을 불쾌하고 거북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규명이 이 책의 논지이다. 시장의 도덕적 한계란 무엇인가? 하고.

 

가장 먼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발견 할 수 있는 줄서기에 대한 새치기의 시장 의식의 검토를 통해 시장과 부패의 문제를 제기한다. 줄서기는 공평함과 자기노력의 가치를 존중한다. 반면에 새치기는 이 공정성의 가치를 훼손시킨다. 그러나 공정성은 공리주의자들에 의해 반박된다. 새치기도 쾌락의 증가가 불쾌의 감소를 능가하면 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줄서기는 이러한 경제적 효율성만이 전부인 재화이고 가치일까? 그렇지 않다. 줄서기는 새치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배분양식으로 민주적 질서를 기초로 하고 있다. 가장 민주적인 배분양식이란 의미이다. 사실 새치기는 오늘 우리의 사회적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다. 항공기의 1등석, 비즈니스석, 스포츠 경기장의 박스석, 은행의 구별된 창구, 대리 줄서기, 진료 예약권 및 전담의사제 등 새치기를 돈으로 사고파는 양식은 깊숙이 잠식하고 있다.

 

이 논의에서 센델은 시장의 논리를 명쾌하게 반박한다. 소위 경제학자들의 자유주의와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거래 대상물의 가치평가와 시장가격의 일치에 대한 불완전성, 그 불일치를 보여준다. 또한 재화의 분배방식은 재화가 지닌 본질의 일부임을 알려준다. 그 첫째는 부자가 평범한 시민의 권리를 빼앗는다는 불공정의 문제이며, 둘째는 부패의 문제이다. 부패는 뇌물의 문제를 넘어 어떤 대상이나 사회적 관행의 평판을 깎아내리며, 가치를 합당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타락이자 품위의 실추인 것이다. 비시장적 영역이 시장 논리로 대체되는 이러한 경향에 내재된 중대한 상실이 무엇인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어떠한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야기하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중차대하다.

 

책은 이와 같이 전통적으로 비시장 규범이 지배하던 삶의 영역으로 시장이 확대되면서 시장이 교환되는 재화를 건드리거나 훼손시키는 현상들을 광범위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불공정한 차이가 없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돈으로 사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이 특정 가치를 구현해서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비시장적 규범을 밀어내는 양상들의 도덕적 문제점, 그것에 내재하는 부패의 도덕적 잠식을 규명하고 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생명보험 증권을 할인해서 사들이고 그것을 펀드화해서 사망채권으로 판매하는 말기환금산업처럼 타인의 죽음이란 불운을 놓고 돈 벌이를 하는 지경에 이른 시장의 거침없음은 아마 이들의 좋은 사례일 것이다.

 

노벨상을 돈 주고 살 수 있게 된다면 노벨상은 더 이상 과거의 노벨상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시장 규범이 비시장 규범의 영역을 잠식할 때 발생하는 가치의 변질, 도덕적 타락, 부패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도덕적 영역으로의 침식이 야기하는 논쟁적 토의가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는 이 책은 공정성, 평등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현대적 삶의 영역 곳곳에 침투해 있는 시장화, 경제화가 갖는 파괴되어가는 도덕적 미덕, 복원하고 지켜내야 할 도덕적 양식을 일깨우고 있다. 나아가 비도덕적 영역화되어가는 우리 삶의 현장이 발설하고 있는 계층의 구별짓기와 소통의 단절, 이원화된 양식의 고착화, 이해 고리의 단절로 인한 적대화 등 인류사회의 건강성 훼손을 통찰해 내고 이 논의가 단순히 시장의 비도덕성과 도덕적 규범의 대결장 이상의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성찰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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