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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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는 72세 되던 해 그녀의 구술로 써진 물질적 삶에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는 책들이 있다고 이 작품 부영사를 비롯한 일곱 작품을 열거했다. 어떤 비극성으로 똘똘 뭉쳐진 자신에게 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불가능할 정도의 안간힘을 썼던 글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음이라는 문장은 이 소설의 가장 의미심장한 일종의 부재 언어(혹은 구멍 언어)’로써 이 소설의 한 발단이 되는 캘커타 외교 당국에 치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사건의 구체적 설명이 거부되거나 모호하게 언급되며, 궁극적으로 진술되지 않는 것의 의미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라호르의 부영사에게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인데, 때문에 라호르라는 실재의 지명은 상징으로서 상상계를 잇는 일종의 구멍이자 삭제로서 기능한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앉아 결코 풀어줄 것 같지 않은 욕망이나 죄의식, 죽음의 유혹과 같은 이상한 욕동(慾動)과 마주했다면 그 무서운 두려움과 떨림, 광기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혹자들은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출구 없는 비극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터져나오려는 무엇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이 차단된 고통의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아마 그것은 재현되는 순간 현실의 일상성 언어로 진부화되어 하찮음으로의 전락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인물들의 극한에 가까운 절제된 언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인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나,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인 피터 모건에 의해 써 지고 있는 갠지스강에 이르러 10년의 길을 멈춘 걸인 여인도 어떤 비극성에 의해 삶의 목소리가 막혀있다는 느낌에서 라호르의 부영사 장-마르크 드 아슈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한 타자의 시선 - 익명의 소문이나 뒷담화, 혹은 소설 쓰기 - 에 의해 묘사되거나, 설혹 그들 자신의 말조차도 내부에 갇혀 터져나올 수 없는 그 어떤 목소리에 의해 차단되어 절제되거나 중단되어 발화됨으로 인해 부영사의 라호르 사건 진술서의 표현처럼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캘커타 프랑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인사회와 자신들을 외부 세계와 분리하여 철책 바깥의 문둥이들, 걸인들로 형상화된 1930년대 부조리한 세계의 지점으로써 인도차이나와 인도의 대비로 상징되는 유럽 백인들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한 축일 것이며, 이러한 인종과 지역에 대한 불안과 불신의 심리와 더불어 계절풍으로 대변되는 이 외부화된 기후적, 질병적 질시만큼이나 적대시되는 부영사에 대한 갖은 소문과 추측들은 존재가 야기하는 지옥 같은 외로움이거나 삶의 모든 욕망의 기억이 마치 표백되듯 증발해버린존재의 마지막 모습인 광기에 대한 인식의 성찰이 또 다른 하나의 축인 것만 같다.

 

캘커타의 백인들은 철책 밖의 세계와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않으며 단지 글로, 전해들은 소문과 추측된 정보들로 그 외부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특히 문둥병으로 상징되는 그들 백인사회의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부영사의 라호르에서의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들보부터 그를 소외시키거나 한 존재에 대한 왜곡의 정당한 수단처럼 활용된다. 이 백인 무리의 배타성은 철책 안에 자신들을 가둔 일종의 유폐(幽閉)여서 그들은 라호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캘커타의 백인들에게 부영사는 라호르의 사건을 재차 설명한다. 라호르 그건 희망의 한 형태였다. 여기서 라호르라는 부재의 상징적 언어는 구체적 상상의 형상을 하게 된다. 샬리마르 정원에서의 총질이라는 파괴적 사건은 희망을 일궈내기 위한 하나의 폭발, 시쳇말로 새로운 세계를 위해 거쳐야만 하는 파괴였음을.

 

자신 안에 철저하게 유폐된 갠지스강 밤 아래 노래 부르는 걸인 여자, 파괴, 죽음이 녹아내리기를 기원함으로써 즐거운 행복을 느꼈던 부영사, 캘커타 대사관과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있는 백인무리들의 섬 속 별장을 오가며 유배자의 눈물을 흘리는 대사부인 안-마리, 이들 모두 오래된 상실의 고통으로 파괴되어 유폐된 인물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파괴되지 않고는 결코 수리 될 수 없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를 대상으로 한 깊은 고통의 앎(공감)에 대해서.

 

이들은 각자의 상징적 표상을 지니고 있는데, 유일한 단어 바탐방만을 말하는 갠지스강 걸인 여인의 밤 노래, “고독하고 음울하며 역겨운 행위에 대한 기억을 찢는 듯한 상처를주는 인디애나 송을 휘파람 부는 부영사, 권태와 습기처럼 이를 지워버리고자 할 때 안-마리가 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번역자인 소설가 최윤의 해설처럼 수리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치루는 어떤 비장한 전환을 향한 예고를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특히 뚜렷한 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발하는 지극히 분산 파편화되고 절약된 언어들을 짜 맞추고 유추하며, 독자는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결코 스스로 부패하여 멸실되지 않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뒤라스 문학만이 주는 독특한 매혹이자 즐거움의 요소일 것이다. 상실과 파괴, 눈물, 그리고 욕망과 광기,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는 출구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설명될 수 없는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려 애썼는지를 어렴풋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고통을 일깨우는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며 존재적 변화를 겪는다.” - 옮긴이의 말에서

 

附記

텅 빈 테니스장을 둘러싼 철책에 기대어진 채쓸모없이 버려져있는 대사 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의 여성용 자전거 이미지는 뒤라스의 물질적 삶, 몸의 말에 대한 그 어떤 고통스러운 믿음을 떠오르게 한다. 내겐 이 소설의 모두를 배제하고라도 건지고 싶은 소설 속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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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합본 메피스토(Mephisto) 13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김선형 외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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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계 버전의 천로역정(天路歷程)?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긴 제목을 한, 그리고 이의 후속편 5책을 합본으로 엮은, 작가의 말로 지금 읽고 있는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책이 바로 이 두툼한 1,235쪽의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사두고서 첫 몇 페이지를 읽고는 책장에 꽂아두고 잊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이 책에 별 한 개의 평점을 준 독자들의 푸념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소회들이 너무 재밌어서 다시 꺼내들어 내처 읽게 되었다.

 

한 독자는 이걸 읽느니 전화번호부를 다섯 번 읽겠다며 참을 수 없이 재미없어 치미는 화를 표현한다. 또 다른 독자는 인생이 너무 지루하고 말이 안 되게 흘러가는 것 같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며 황당함과 지루함 그 자체라 혹평하기도하고,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오기로 씨름 할 수밖에 없었음을 토로하며 지루함과 인내의 독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재치 넘치는 푸념과 비아냥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이를 상쇄할 만큼의 유머와 즐거움, 잘난척하는 인간 지성의 보잘 것 없음에 대한 해학의 문장들로부터 막대한 분량의 부담을 지울 수 있다, 더구나 가까운 지방을 히치하이커로 여행하려해도 그 비용이 만만치 않거니와 상상 속 은하계를 책값만 지불하고 여행하는 것은 실익이 훨씬 큰 거래일 것이다. 본디 이 세계와 삶이란 것이 권태요, 끝없는 환멸 아닌 게 있던가?

 

아마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만물의 영장이라며 분별없이 으스대는 인간의 지적 오만을, 그 어리석음의 무한함을 까발리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를 노골적 경멸을 동반한 진지한 언어로 그 치부인 약점을 들춰내면 그 반발이 눈에 선했을 것이고, 해서 선량한 표정으로 풍자와 해학으로 우회하여 참을 수 있게, 나아가 미소 지으며 반성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꾸며냈을 것이다. 사실 이 작품은 슬프고 씁쓸한, 무수한 모순 덩어리인 인간과 인간사회의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것일 게다. 지구가 찰나(刹那)에 파괴되어 사라지는 어느 특정 목요일의 한 장면을 보면 이렇다.

 

은하계 변두리 지역 개발 계획에 따라 지구를 관통하는 초공간 고속도로 건설을 위해 행성 지구를 파괴하려는 보고 행성의 공병함대 우주선단이 도착하여 지구인에게 철거실행을 고지한다. 이때 지구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야단법석을 떨어대자, 보고인은 알파 켄타우리 행성 지역개발과에 지구 시간으로 50년간 공지했는데 알지 못한 지구의 야만적 생물체인 인간의 부주의를 나무란다. 이 장면은 인류사회의 관료제적 부조리와 인간의 지적 야만성을 비난하는 이중의 은유일 것이다. 익살과 해프닝과 유머로 긴장을 낮추며 피식거리며 웃다가 그 이면의 진실에 표정을 단속하게 하는 정말 뼈 때리는 이야기인 것이다.

 

인류와 지구 종말의 대참사를 묘사하는 실질적 문장은 오직 갑자기 지구에 고요가 흘렀다.” 이다. 무슨 긴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저 사라졌을 뿐이니 말이다. 이 작품의 시작 문장도 이러한 관점의 읽기를 암시한다. 이 행성에는 문제가 하나 있는데, 행성에 사는 대다수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불행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작은 녹색 종잇조각(달러)들의 움직임과 관련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는 애당초 나무에서 내려오지 말았어야 하며, 그 자체가 엄청난 실수였다는 의견이 확산되었다고 은하계의 고등 지적 생명체들 세계의 시선을 전하기도 한다. 급기야 바다에서 나오지 말았어야했다고까지 한다. 우주의 주인인 듯 행세하는 인간에 대한 자기 직시를 요구하는 조크이며, 신랄한 비난을 담은 유머다. 이러한 시작 문단의 해학적 분위기는 계속되는데, 가히 발칙하기까지 하다. 어느 목요일 한 남자가 이제는 사람들끼리 좀 잘해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는 이유로 나무에 못 박힌 지 2천년이 지난 어느 목요일의 끔찍한 대참사가 이야기의 발단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인류와 지구는 파괴되고 사라졌다. 유일한 생존자인 아서 덴트는 친구인 베텔게우스 행성 출신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이하 은여히로 표기함)이동 조사원인 포드 프리펙트 덕분으로 보고인 우주선에 탑승하게 되지만 곧 우주 공간에 버려진다. 공기가 없는 우주공간에서 생물체가 살아남을 무()에 가까운 확률에서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하는 우주선 순수한 마음호()‘에 구조된다.(책은 기꺼이 이 불가능속에서 마침 그곳을 지나갈 우주선의 확률을 제시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측면에서 즐거움을 주는 요소인데, 인류 지식으로 이해 불가능한, 아니 황당하기조차 한 말장난으로 꾸며진 미래 과학에 대한 무한한 환상의 자극이다. 포드와 아서를 구조하는 순수한 마음호의 추진장치가 발견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범블위니 57 서브-중간자 두뇌의 논리 회로를 강력한 브라운 운동 생성기에 매달려 있는 원자 벡터 작성기에 연결하면 제한적 불가능 확률을 조금 얻을 수 있다나 뭐라나 하며 상상을 무한하게 키워내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성찰과 보잘 것 없는 우주적 미물로서의 철학적 사유라는 굵직한 주제가 은닉되어 흐르며, 수십만 수백만 광년의 은하계 행성들을 누비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 인간 지식의 초라함이라는 무지를 일깨운다. ‘순수한 마음호()‘는 은하계 항성 솔(태양계)의 반대편 나선 팔 다모그 행성에 주재하는 은하제국 정부의 대통령 자포드 비블브락스가 무한 불가능 확률 추진기로 운항되는 최초로 개발된 우주선을 탈취한 것인데, 그의 두뇌를 지배하는 그 어떤 욕망에 의해 마그라테아라는 미지의 행성으로 향한다. 여기서 우리들을 자극하는 케케묵은 물음이지만 그 명쾌한 답이 부재한 이야기가 출현한다.


마그라테아는 한때 행성을 만들어 은하계의 부를 끌어모아 흥성했던 행성이다. 그러다 은하계 행성간의 전쟁으로 경기가 위축되어 다시 은하계의 부가 모아질 때까지 긴 잠에 든 행성이다. 여기서 아서는 슬라티바트패스트라는 한 늙은이와 조우하게 되는데, 두 번째 지구를 만들게 된 사연을 들려준다. 물론 첫 번째 지구도 마그라테아 거주자들이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지구의 존속은 하나의 실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실험이 막 종료되기 5분 전에 보고인에 의해 지구가 파괴되었기에 다시 실험에 착수하여야 되는 수고가 생긴 것이라는 얘기다.

 

그 사연은 이렇다.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주의 시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삶과 우주와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궁극에 대한 물음을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컴퓨터 깊은 생각에게 묻게 된다. 깊은 생각은 답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곤 그 답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칠백오십만 년이 걸린다고 한다. 궁극의 물음에 대한 종국적 해답을 기다리기로 하고, 이윽고 그 시간에 이르러 깊은 생각은  무지무지하게 엄숙하고 침착하게 42”라고 답한다. 여간 실망스러운 답이 아닐 수 없다. 작업 결과에 당황한 이들은 다시 묻는다. 칠백오십만 년의 작업결과가 겨우 그것이냐고. 컴퓨터는 말한다. 제 생각에 문제는 여러분이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라는 것이다.

 

궁극의 질문을 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진짜 질문이 무엇인지 알게되면 그 해답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다. 궁극의 질문?, 궁극적 해답을 위한 궁극의 질문? 깊은 생각은 이를 위해 새로운 컴퓨터는 미묘하게 복잡한 유기체가 작동 행렬의 일부가 된 컴퓨터, 즉 유기체 스스로가 새로운 형상을 취하고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서 천만년짜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한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의 물음에 대한 답이 42! 라는 이 우습기조차하지 않은 칠백오십만년짜리 해프닝은 우리에게 뭘 알려주려는 것일까? 더욱이 이 조차도 인간보다 높은 지적 생명체인 생쥐가 지구의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었다는 전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궁극의 질문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존재, 생쥐의 실험 대상에 불과했던 인류에 대한 조롱이다. 저 광대한 은하계를 여행해보라! 그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뭐 그렇게 으스대는가? 따위의 비난이기만 한 걸까? 이 장면에 대해서도 그럴싸한 해석을 내리지 못하는, 우주 역사의 원인과 결과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알 턱이 있겠는가? ~, 인생이란 그런거야라는 자조적인 운명론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내게는 매우 중대한 조연으로 보인 인격을 지닌 로봇 마빈의 존재인데, 순수한 마음호의 탑승자들에 조력하는 로봇이다. 마빈은 인간을 비롯한 지적 생명체들과 이들에 의해 제작된 모든 자동화된 시설들, 지능체인 컴퓨터들의 작동과 행위, 그 사고(思考)의 얼개에 대해 시니컬한 관점을 지니고 있다.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를 궁극의 질문을 하기 위한 새로운 컴퓨터 제작을 위해 그의 뇌를 깍뚝썰기해서 매핑하려하는 위기가 발생한다. 아서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블라굴론 카파 행성의 경찰들이 공격을 가하다 갑자기 그들 전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로부터 벗어난 아서 일행은 순수한 마음호로 돌아오는데, 그때 차가운 먼지 속에 고개를 처박고 누워있는 마빈을 발견하게 된다. 마빈 뭐하는 거야?”, “절 아는 척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순수한 마음호 옆에 나란히 서있는 경찰 우주선을 가리키며 마빈은 저 우주선이 자신을 미워했다며 우울한 이유를 설명한다. 너무 지루하고 우울해서 경찰 우주선의 컴퓨터와 자신을 연결하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자 그 컴퓨터가 그만 자살해버렸다는 것이다. 마빈이 은하계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사유한 것, 그 궁극의 결과는 생존(작동)의 이유가 없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서 일행을 공격하던 경찰들이 갑자기 사망했던 이유가 바로 마빈의 허무주의에 세례를 받은 경찰우주선 중앙 컴퓨터의 죽음이었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마빈의 활약을 주목해야하는 충분한 동기가 되는 장면이다.

 

은여히에는 은하계의 주요 문명 단계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뚜렷하고 확연한 세 단계를 거치는데, 그것은  생존, 의문, 세련의 단계로서, 어떻게, , 그리고 어디의 단계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떻게 먹을까? -> 우리는 왜 먹는가? -> 어디서 점심을 먹을까?’ 와 같은 질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지금의 인류는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우리들은 왜라며 물음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이 단계를 넘어선 그 어떤 의문도 불필요해진 여유 넘치는 풍요와 세련됨의 세계로 이행 할 수 있을까? 40여 년 전에 방송되고 쓰여진 이 오래된 코미디-SF 작품은 여전히 그 상상 속 사유와 인문학적 물음의 측면에서 실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인간이 지각하고 있는 우주에 대한 토대이론은 아마도 다중우주와 시뮬레이션 이론이 배경인 것 같다.

 

아무튼 혹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지루해서 인내를 요구하는 것만도 아니며, 전화번호부만큼 의미없는 숫자들이 배열된 그런 책도 아니다. 어떤 책을 읽으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앎이란 단어의 과장된 확장이며, 부당한 일반화다. 오히려 물을 수 있는 것만큼 보인다는 것이 더욱 명쾌한 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 자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체화된 의문들을 담고 있을 때 그 의문의 양적 질적 크기만큼만 보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 시대의 지배적 습관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분명 많은 상상의 사유(思惟) 지대로 안내할 것이리라 믿는다.

 

이 우주가 무엇을 위해 있고, 또 왜 이곳에 있는지를 누군가 알아낸다면

그 순간 이 우주는 당장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더욱 기괴하고 설명 불가능한

우주로 대체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 더글러스 애덤스, 우주의 끝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참조 이야기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에는 유일한 지구 생존자인 아서 덴트가 등장한다. 이 이름은 천로 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쓴 존 버니언(John Bunyan)’에게 아내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두 권의 책 중 하나인 평범한 사람이 하늘에 이르는 좁은 길의 저자와 같다. 때문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는 이 구원을 향한 순례길에서 이 작품을 착안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은여히는 행성 지구를 넘어 은하계까지 그 시야를 넓힌 범우주적 구도의 길을 향한 걸음을 쓰려했다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사회의 무수한 부조리와 무지를 깨우치게 하며, 이 행성과 저 행성을 필사적으로 이동하며 영광의 문에 이르고자하는 여정을 담고있는, 그야말로 20세기판 天路歷程이라 읽어도 됨직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이 글은 리뷰어의 생각일 뿐이지 그 어떤 기성의 해석과는 다른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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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기세춘 지음 / 바이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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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독에 머무는 주석서의 범주를 넘어서 정치론, 논리학, 철학론, 평화론, 공동체론 등 사상에 대한 논의가 풍성한 묵자 이해를 위한 努作이다! 민중 철학과 진보주의 시조, 묵자로부터 평등의 정치(兼愛)와 의로움의 정치(義政)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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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키아 여자의 웃음 - 이론의 원 역사 모나드 인문학 시리즈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모나드 출판사 옮김 / 모나드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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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면(永眠)에 들 때까지 독일 뮌스터고전문헌학과 철학교수로서 위대한 은유 속에 압축 변형되고 정교화된 인류 사상의 그 독특한 과정을 탐색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저술이다. 이 저술을 만나기 전에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출중한 은유의 사상사에 매료되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왔다는 글이 있다. 바로 이에 해당되는 저술이 이 책이다. 고대 천문학자의 우물 추락이라는 우화를 화두로 하여 시대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수용사를 통해 대표되는 사상가들의 입장과 사유를 추적한 철학적 사건들의 조명이고, 인간 인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겠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아마 천박한 지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동일 사태에 대한 그 무수히 변화되는 인간들의 관점들이 푸짐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화두(話頭)는 기원전 6세기 이솝우화(Aesop‘s Fables)<점성술사(The Astrologer)>의 이야기다.

 

 【《Aesop‘s Fables, 'The Astrologer(점성술사)'

 

사실 이솝우화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이 되는 원()이론이 아니다.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 이론으로서의 이야기는 이것을 변주한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선고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사태를 투영하여 수정한 이야기다. 이솝우화의 내용은 <한 천문학자가가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 외출을 하곤 했는데,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하늘로 돌렸을 때 발밑에 놓인 진흙구덩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안에 빠졌으며, 고통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고선 당신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쳤단 말이요?’>라고 힐난하였다는 지극히 짧은 일화다. 1927년에 출간된 에밀 샹브리판본을 번역한 국내 번역서에는 매우 표피적인 교훈이 주석으로 달려 있는데, 나는 아주 크게 웃었다. 물론 실소를 하였다는 얘기다. 거창한 일을 한답시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상의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기존 질서에 대한 매우 순응적인 기계적 해석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에서 한참 비켜나간 것이기에 이런 읽기도 있다는 것으로 이 얘기는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솝 우화에는 익명의 천문학자와 또 익명의 행인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철학의 역사에 한 기원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운명의 부조리함, 즉 아테네 시민의 인식과 철학자의 인식과의 괴리에서 오는 몰이해,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발견이었다. 그는 1세기 전부터 전해오는 우화의 등장인물에 구체적 면면을 부여한다. 익명의 천문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로, 행인은 재치있고 예쁜 트라키아 하녀가 된다. 천체의 궁창에 전념하던 탈레스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우물에 빠지고, 트라키아의 하녀는 그를 보고 웃는다. 그분께서 코앞과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던 가운데 하늘에 있는 것은 열렬히 알고자 하셨습니다.”(테아테토스174 AB번역)


표지 뒷면 이미지: 우물에 빠진 천문학자를 바라보고 트라키아 하녀는 웃는다

 

플라톤이 그려낸 탈레스와 트라키아 하녀의 이 이야기가 원 이론의 자리를 잡는다. 이름없는 한 천문학자가 플라톤에 의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라는 원철학자로 명명된 것이다. 플라톤은 밀레투스 철학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철학적 실재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웃도록 한 것이다. 즉 밤하늘 세계 관찰자의 기괴함과 그가 실재와 부딪친 충동 반경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의 웃음을 묘사함으로서 당대의 근본적 사태인 스승의 죽음을 순교자로 발견하려는 참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반영이며,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자연철학의 시선을 인간사회를 향한 전향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인데 이로써 하늘의 공간적 원거리 도달은 철학적 관심에서 사라진 것이다. 트라키아 여자는 당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천문학자의 권리로써 추구하는 이론적 순수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원 이론으로서 표준이 되어, 이름께나 날린 사상가들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입장에 따른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물로부터 이 이론에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인물이 되고자 이야기의 요소들은 탈락과 장식적 유입, 수정과 변경, 변조를 통해 시대성과 도덕적, 사상적 이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천문학자 탈레스의 원철학자로서의 반영여부이며. 트라키아 여자의 역할 변화이거나 배제를 통한 인식 투쟁이다.

 

이같이 탈레스 일화의 수용사(受用史)는 이천 년을 가로지르며 이론의 역사에서 무엇이 본래적으로 우스운 것인지의 작업을 수행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초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온을 거치고 키케로와 에피쿠로스를 지나 기원후 1세기의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과 우물에 처박힌 천문학자를 죽임으로써 사라졌던 중세를 통과하며 11세기 다시 부상하는 천체관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에 부여된 두 유형의 의미를 쫓고, 몽테뉴, 볼테르, 포이에르바하, 훔볼트, 니체, 하이데거가 수용한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의 원 이론을 표준으로 불과 5세기 남짓이 지났을 때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의 텍스트와 해석을 읽다보면 인류 지성의 퇴행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봄으로써 염오(厭惡)에 빠지게도 한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이야기에서 탈레스를 아예 배제해 버리는데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 알게 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보다 절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 내부 표면에 대한 이교도적 성격으로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을 영원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던 까닭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탈레스를 지워버리고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다. 교부 철학자 테르톨리아누스는 원철학자 탈레스를 우물 추락 즉시 악의 뿌리에 박힌 자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트라키아 하녀의 관념에서 철학적 세계관 입장을 조롱하는 자리에 빨간 밑줄을 그어 기독교 교리의 정당화에 이용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Quod supra nos, nihil as nos), 하늘의 재앙과 세상의 운명과 비밀을 읽으려 하지 말라. 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제 천문학자의 이론인 일식은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적인 기호의 경고여야 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공포(公布)이다. 그래서 천체의 경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확증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조짐이 된다. 천문학자는 사라졌고, 별을 우주 운명의 점성술적 위상배열로 인정하는 대신에 운명의 돌파구를 위한 기호로 보려했기에 더 이상 하늘을 관찰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정체되고 퇴보하는 데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압박만 있으면 아주 쉽사리 저질러 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텍스트와 해석을 반대자를 확정하는 위장 전투로 삼는다. 저마다 세련된 입장의 해명으로 원 이론에 대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희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다 구멍으로 처박아 들어갔다. 누가 하나님인지를 모르면서 탐구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론자의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이성과 철학, 학문을 질식시켜버린다.

 

중세의 해가 저물 즈음인 11세기에 이러한 교부 철학의 갱신이 움트기 시작한다. 다미아누스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천체 관측자의 우물 추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탈레스는 여전히 익명으로 머물지만, 트라키아의 하녀는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고 기분을 불어주는 조력자로 엘레시우스 창립 신화의 구성원인 이암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의 의례적 기능을 담당하던 이암베로 하여금 트라키아 여자의 조롱을 위안과 기쁨과 결합시킨 것이다. 주인의 불운으로 생겨난 교훈을 시적으로 공연하는 하녀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다미아누스는 이암베로 하여금 다음의 대사를 읊게 한다. 나의 주님은 발밑에 있는 똥을 모르고 별을 보려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은 상황 극화를 위한 장식으로 처리하고, 이암베를 통해 철학을 짓밟아 으깨고 신성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인간들의 윤색을 열거하다보면 이들에게서 역사적 주인공 자리를 성취하려는 야심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역류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오늘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이데올로기를 관전하게 하는데, 아마도 블루멘베르크의 지적처럼 그는 스승의 대화록 테아테토스를 읽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해 냈는데, 아마도 당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가리키는 가난 때문에 탈레스를 욕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올리브 풍작을 사전에 알게 된 탈레스는 올리브 압착기를 전부 확보하여 올리브 수요가 일어나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를 통해 철학의 목표는 돈이 아니며, 어떤 물질적 혜택도 도출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의 이론적 업적을 증명하여 탈레스를 보호하려는 필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레스는 그가 일구었던 유산을 철학에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 올리브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나 지혜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다시 등장한다. “소유할 수 없으면 쓸모없다.”, 그런가하면 14세기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술에 취한 뮐러 이야기에서 천문학자의 추락이야기를 변조하여 쓰고 있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별들을 응시하였다. 그는 거기서 시궁창에 빠졌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고 당대 점성술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야기의 원 의미는 탈색되고, 자신들의 상황에 유리한 용도로 변형시켜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몽테뉴는 또 어떨까? 에세(Esse)212절에 원이론에서 필요한 트라키아 하녀의 증언만 남기고 천문학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녀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이 도덕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에게는 가설이나 추측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바로 발밑 땅을 위해 포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는 우물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하늘보다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했습니다.”라고, 하녀가 현장에서 벌인 행위를 선의로 간주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등 이러한 변주된 이야기들이 계속되며, 시대의 사상적 진화와 철학자 개별의 사유를 쫓을 수 있으나 이쯤에서 그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멈추어야겠다.

 

끝으로 니체의 한 걸음 더 나간 기원전 6세기에 벌어졌던 신화와 철학 대결의 탐지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도리이겠다. 탈레스는 존재의 통일을 직관하기 위해 밤하늘의 도시에서 등을 돌렸고, 별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 철학의 시초 역사인 원이론의 이야기에서 니체는 사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결정적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자기 신뢰의 철인을 발견한다. 탈레스의 정치적 좌절로 인한 신화에 대한 도시국가의 관계로 읽어내는 독법에서 가히 초인의 철학자를 거듭 발견하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독창적인 은유의 독법을 지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은 역자의 해설처럼 우물과 하녀를 오가며 우리들의 부족한 앎을 대체하여 우리 자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철학으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리한 지점에서 자빠짐으로써 웃음을 은유적 상상의 토대에 세울 수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수많은 사유의 실험과 이론의 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누린다는 것은 항시 유쾌한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탈레스의 추락과 여자의 웃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쓰고 싶을까? 여기에 우리 시대의 숨어있는 진실,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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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많은 탈오자와 비문은 열악한 번역 출판시장에도 불구한 귀중한 저술의 출간이라는 고마움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다. 적극적 개정이 뒤따라야 할 성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흠결은 정말 아쉽다.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할 위대한 저술임에도 별 네 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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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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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끔찍한 악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이유를 생각케 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 ‘Anti-Sapience’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비이성적 인류?, 이성적 인간이 아닌 것? 아마 이 둘의 개념을 모두 지닌 것 같다. 한 편으론 비이성적인 현생인류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한편으론 현생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간을 기억과 의식만의 존재로 인식하고 육체는 이것들을 담고있는 일시적인 유한성의 물체정도로 이해하여 뇌 임플란트를 비롯하여 이 소설의 인물처럼 뇌 매핑을 통한 초지능의 컴퓨터와 일체가 된 존재를 꿈꾸는 세계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IT천재가 말기 췌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스로 과제를 생산하고 실행하는 인간형 AI 개발 여정을 토대로, 상업적 욕망과 죽음의 정의를 초월하는 불멸에 대한 급진적 기술의 욕망에 어우러진 윤리적, 도덕적 여정을 이끈다, 나는 이 여정의 핵심적 물음을 두 축으로 읽어내려 갔는데, 그 하나는 인간 육신의 죽음과, 기억과 의식의 불멸을 대비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인간의 죽음을 존재 증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 소설이 시작되듯 죽음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그 인간형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인간들의 현실적 삶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줄거리 축은 컴퓨터에 이식된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격체의 인식의 세계를 기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 설정한다면 과연 그것이 현 인류가 당면한 무수히 모순된 긴장을 극복한 대안의 세계가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임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죽어서 초지능과 일체가 된 AI 인격체는 개발한 인간의 의지와 다른 결과를 생성하고 그것은 자신의 광활한 네트워크에서의 학습으로 인간의 지적, 경험적 능력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아닌 이상의 장소 아르카디아로 도피한다. 이 이상향이 인류의 기술문명이 도달하지 않은 지대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어떤 역사적 퇴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아이러니는 AI의 완전성을 위해 인간의 흠결까지 학습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간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부터 학습된 원초적 악에 기인함을 지적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설이 보여주는 이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만은 않다. 꿈꾸던 이상적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무가치한 무엇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 이상의 잘못된 실천에 의해 현실 변화에 대한 개혁 의지의 촉매작용으로서 우리 의식의 현실적 상황을 다시금 점검할 여지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어떤 가능성,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활동을 위한 참조 요인으로서.

 

육신을 버리고 의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 그래서 불멸을 이룬 존재가 되고자하는 이 기이한 욕망은 소설의 중심인물(혹은 인격체)IT천재 케이시의 주장들인 오늘날 급진적 기술자들의 신념과 맞닿을 것이다.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데이터다.”라며,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낫다는 말과 함께, 이의 정당화 논리로 인간의 역사가 늘 타인의 육체를 이용하는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즉 타인의 노동력 탈취라는 개념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또한 인간이 AI에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개념은 너무도 위험하다는 말에 대해 이미 현실 사회에서 인간들이 AI의 손과 발이 되고 있음을 열거한다. 생성형 AI가 그린 그림을 복제하는 화가 마크 허먼, AI가 짠 퍼포먼스를 실연하는 무용가 제프 토드, 알파고의 충실한 손 역할을 했던 구글 딥마인드 엔지니어 아자 황 등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미 펼쳐지고 있듯이.

 

오늘 우리들은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육체가 없는 앨런(소설 속 죽은 IT천재와 일체가 된 AI)이 인간의 육체를 의도대로 움직일 힘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곧 인간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만과 부정성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소설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정의에 관한 개념이다. 이것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소설의 첫 문장에서부터 줄 곧 이어지는 질문의 하나인데,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정의되었을 뿐이라며 죽음을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서의 인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며, 오히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나의 인지 기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라고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불멸을 증언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육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의식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도구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마 우리 인간은 이처럼 영원한 선택과 갈등의 길을 걷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AI 시대라는 삶과 죽음의 정의에서부터 의식과 육체의 관련성, 노동의 형태, 기술 윤리 등 새로운 정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직면한 과제들에 맞선 인간들의 멍청함과 침잠한 원초적 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불완전성에 대한 사랑의 두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 어떤 길을 선택해 낼 수 있을까? 무엇인가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밖을 볼 수가 없다. AI시대 속에 들어선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이 흥미로운 소설을 읽으며 일상에서는 잊고 있던 우리들의 현안 문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인간을 명료하게 파악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가에 인간을 학습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는 없을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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