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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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끔찍한 악의 세계가 될 것이다!

이 소설은 그 이유를 생각케 하는 이야기다.


소설의 제목 ‘Anti-Sapience’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비이성적 인류?, 이성적 인간이 아닌 것? 아마 이 둘의 개념을 모두 지닌 것 같다. 한 편으론 비이성적인 현생인류에 대한 고발이고, 다른 한편으론 현생인류가 아닌 다른 무엇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간을 기억과 의식만의 존재로 인식하고 육체는 이것들을 담고있는 일시적인 유한성의 물체정도로 이해하여 뇌 임플란트를 비롯하여 이 소설의 인물처럼 뇌 매핑을 통한 초지능의 컴퓨터와 일체가 된 존재를 꿈꾸는 세계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한 IT천재가 말기 췌장암으로 사망하기까지 스스로 과제를 생산하고 실행하는 인간형 AI 개발 여정을 토대로, 상업적 욕망과 죽음의 정의를 초월하는 불멸에 대한 급진적 기술의 욕망에 어우러진 윤리적, 도덕적 여정을 이끈다, 나는 이 여정의 핵심적 물음을 두 축으로 읽어내려 갔는데, 그 하나는 인간 육신의 죽음과, 기억과 의식의 불멸을 대비한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처럼 인간의 죽음을 존재 증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로 소설이 시작되듯 죽음으로서 살아가는 존재의 이야기이며, 인간이 순진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한 그 인간형 인공지능이 살아있는 인간들의 현실적 삶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줄거리 축은 컴퓨터에 이식된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에 존재하는 인격체의 인식의 세계를 기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라 설정한다면 과연 그것이 현 인류가 당면한 무수히 모순된 긴장을 극복한 대안의 세계가 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물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디스토피아임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 같다. 죽어서 초지능과 일체가 된 AI 인격체는 개발한 인간의 의지와 다른 결과를 생성하고 그것은 자신의 광활한 네트워크에서의 학습으로 인간의 지적, 경험적 능력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아닌 이상의 장소 아르카디아로 도피한다. 이 이상향이 인류의 기술문명이 도달하지 않은 지대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인류의 어떤 역사적 퇴행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말 아이러니는 AI의 완전성을 위해 인간의 흠결까지 학습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해가 선행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개발이 인간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부터 학습된 원초적 악에 기인함을 지적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소설이 보여주는 이 유토피아 혹은 아르카디아라는 종말론적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고 싶지만은 않다. 꿈꾸던 이상적 사고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무가치한 무엇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는 것이 그 이상의 잘못된 실천에 의해 현실 변화에 대한 개혁 의지의 촉매작용으로서 우리 의식의 현실적 상황을 다시금 점검할 여지를 제안하기 때문이다. 변화를 위한 어떤 가능성, 더 나은 세계를 위한 활동을 위한 참조 요인으로서.

 

육신을 버리고 의식만으로 이루어진 존재, 그래서 불멸을 이룬 존재가 되고자하는 이 기이한 욕망은 소설의 중심인물(혹은 인격체)IT천재 케이시의 주장들인 오늘날 급진적 기술자들의 신념과 맞닿을 것이다.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육체의 데이터다.”라며,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낫다는 말과 함께, 이의 정당화 논리로 인간의 역사가 늘 타인의 육체를 이용하는 행위로 이루어졌음을, 즉 타인의 노동력 탈취라는 개념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까지 이른다. 또한 인간이 AI에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개념은 너무도 위험하다는 말에 대해 이미 현실 사회에서 인간들이 AI의 손과 발이 되고 있음을 열거한다. 생성형 AI가 그린 그림을 복제하는 화가 마크 허먼, AI가 짠 퍼포먼스를 실연하는 무용가 제프 토드, 알파고의 충실한 손 역할을 했던 구글 딥마인드 엔지니어 아자 황 등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이미 펼쳐지고 있듯이.

 

오늘 우리들은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육체가 없는 앨런(소설 속 죽은 IT천재와 일체가 된 AI)이 인간의 육체를 의도대로 움직일 힘을 이미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그 힘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곧 인간기술의 미래에 대한 기만과 부정성을 연결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소설의 아주 중요한 주제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죽음의 정의에 관한 개념이다. 이것은 모두(冒頭)에 인용한 소설의 첫 문장에서부터 줄 곧 이어지는 질문의 하나인데,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고 정의되었을 뿐이라며 죽음을 단순한 하나의 사실로서의 인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주장하며, 오히려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것은 나의 인지 기능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증거다.”라고 죽음을 인정함으로써 불멸을 증언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육체는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의식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도구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아마 우리 인간은 이처럼 영원한 선택과 갈등의 길을 걷는 종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AI 시대라는 삶과 죽음의 정의에서부터 의식과 육체의 관련성, 노동의 형태, 기술 윤리 등 새로운 정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직면한 과제들에 맞선 인간들의 멍청함과 침잠한 원초적 악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불완전성에 대한 사랑의 두 얼굴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떤 얼굴, 어떤 길을 선택해 낼 수 있을까? 무엇인가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는 밖을 볼 수가 없다. AI시대 속에 들어선 우리는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이 흥미로운 소설을 읽으며 일상에서는 잊고 있던 우리들의 현안 문제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우리 인간을 명료하게 파악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 무엇인가에 인간을 학습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는 없을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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