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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선과 구경꾼 - 항해로서의 삶, 난파로서의 이론 ㅣ NOUVELLE VAGUE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21년 4월
평점 :
오늘의 제반 학문을 비롯한 이론들은 명석판명(明晳判明)한 개념을 추구해 온 서구의 근,현대 사상적 흐름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은폐되어있거나 말 되는 것이 금지되어 있거나, 또는 말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애쓰는 사유를 더 좋아한다. 때문에 퀴퀴한 지하 창고에 잠들고 있는 오랜 문서고를 들춰내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발굴해내고 연결하여 알지 못했던 진실을 길어 올리는 작업들의 노고에 귀 기울이고 찬탄하곤 했다. 사실 내 시선이 좁은 까닭도 있지만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른 가능성과 시선이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로 은유라는 어떤 대상이나 현상 또는 말 할 수 있는 개념이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기 위한 언어기술, 즉 비-개념을 해독하는 방법을 통해 “일의성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언어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모든 것이 부딪치는 불편함”의 대안으로 은유를 우리들 앎의 지평 속으로 끼워 넣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 책은 은유를 개념형성을 위한 보조적 기여도구로만 인식하지 않고, 우리들 생활세계 전반을 검토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아, 세계에서 은폐된 채 실존하는 실제를 건져내 세계와 역사를, 인간의 윤리 인식과 지성의 변천을 드러내고 입증해 보인다. 아마 지하에 숨기고 감춰 놓은 것들이 더 근본적으로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것이리라는 믿음일 것이다.
이 시대의 거실에 진열된 앎이란 것들은 너무도 많은 것들이 감춰져 있어 사유와 정치에서 무수한 동굴의 영역으로 여전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감춰진 것과 은폐된 것, 연기된 것을 밝혀 움켜쥐”려는 이 비-개념의 탐구는 우리들이 지각하지 못했음에도 인류가 지혜를 전달해 온 핵심 방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하버마스, 울리히 벡과 함께 20세기 지성계의 3대 문제작의 저술자인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이 국내 번역본에 없다는 것도 한국사회의 지성이란 것이 얼마나 편향적인가의 반증이라면 왜곡된 판단이 될까? 아무튼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소품적 성격의 이 철학 에세이라도 접할 수 있게 됨에 옮긴이와 출판사에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한다.
책은 독일어 초판본 소개 글로부터 시작되는데,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삶,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 왔다며, 이러한 작업은 “위대한 은유와 비유 속에서 압축되고, 변형되고, 정교화”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모델 중에 “인생은 항해다.”라는 은유를 하나의 패러다임으로 해서 현실화의 역사를 추적하고, 세계와 인간이 맺은 관계의 변화를 식별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을 읽기에 앞서 책의 끝에 부록으로 수록된 「비개념성의 이론을 위한 전망」을 본문 읽기에 앞서 읽는다면 책 전반의 정신을 헤아리기 위한 은유학, 또는 비-개념성의 이론을 이해하는데 더욱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나는 본문을 읽고 이 부록을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때문에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됨으로써 다시 본문을 한 번 더 읽는 수고를 해야 했다.)
책의 제목으로 짐작되는 것이지만 이 사유의 시발점은 에피쿠로스학파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해』 2권 「서시」의 다음과 같은 시작 구절이다. 즉 이 철학에세이는 ‘루크레티우스 수용사(受用史)’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 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오늘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이 구경꾼의 공감능력 없음과 그 관음증적 쾌락에 몸서리치는 혐오의 감정이 앞 설 것이다. 이 고대 원자론자인 시인이 난파를 보고는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는 사유의 즐거움에 빠져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사실 그의 쾌락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고대세계의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시대를 달리하며 끊임없이 재해석되어 지식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또 다른 세계인식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살던 시대는 바다란 인간의 계획이 실행되는 공간을 제한하기 위해 주어진 경계라는 것과, 육지와 달리 규정 가능한 힘의 권역을 집요하게 벗어나는 마력들과 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불가침의 영역이었다는 점에 있다. 바다로 나가는 인간에겐 의심의 눈초리가 주어졌고, 난파란 그 응당한 처벌이었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를 21세기 도덕의 잣대로 해석하면 당대의 인간과 세계관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
항해와 난파, 그리고 구경꾼이라는 이 은유는 16세기 몽테뉴에 의해 일종의 보신주의 철학으로 변모하는데, 단단한 대지에 난파라는 몰락[침몰]과 거리를 지킬 수 있는 능력에 만족하며 자기 보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즐거워하는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에 잡히는 일에 집착한다. [...]
그리고 항구에서 멀리 떠나지 않는다.” - 『에세』2권 「교만에 관하여」
그러나 개인의 난파와 거리를 지킴으로서 개인 자신을 지킬 수 있지만, 만일 국가나 세계적 사태의 몰락의 경우 피해갈 수 있겠느냐는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당신의 도덕은 지나치게 자족적 도덕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그래서 우리는 약삭빠른 몽테뉴가 침몰에 몸 맡길 준비가 되어있을 조건을 까다롭게 높여감으로써 안전한 구경꾼의 입장으로 끊임없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블루멘베르크는 구경꾼의 운명에 만족하는, 그리고 비참한 사건을 보고 고작 자기 인생의 고통을 환기하며 쾌감을 느끼는 몽테뉴에게 쓴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17~18세기의 괴테라고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할 줄 알았던 이 역사철학이 부재했던 인간은 1806년 예나에서 프랑스에 패배하자 많은 독일 지식인들과 민중은 고통스러워했다. 예나대학교 역사학 교수였던 ‘하인리히 루덴’은 1847년 『삶의 회고』라는 책에서 괴테와 이 전쟁 패배에 대해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그는 괴테에게 솔직한 심정을 물었으며, 괴테는 고대의 구경꾼을 넌지시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대화록만이 그의 인식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철면피한 괴테의 자기 미화는 수없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 한 구절이면 족하리라 생각된다.
“ 내가 불평할 게 뭐 있겠나, [...] 단단한 바위 위에 서서 사납게 놀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 난파자들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밀려오는 거친 파도에 휩쓸릴 일도 없는 사람 같은 심경이네. [...] 옛 성현 말에 의하면 그것이야말로 쾌감을 준다고 하더구만...”
이 대화에 동석했던 크네벨이 “루크레티우스 입니다!”라고 끼어든 것은 제3의 입증인이 있는 진실임을 의미한다.
니체도 후일 『선악의 저편』에서 괴테에 대해 “그는 평생 미묘한 침묵을 지켜왔다.”고 쓸 정도였으니 이것이 당대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던 대가 반열에 오른 인물의 인식수준이었다. 그렇다면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루크레티우스의 은유를 어떻게 수용했을까? 그는 바다와 난파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단단한 대지로서의 항구에 주목했다. “낡고 확고한 대지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것에 경탄”하는 난파자의 행복을 지복의 경지라 부른다. 이제 대지는 구경꾼의 장소가 아니라 난파에서 구조된 사람의 장소가 된 것이다. 감행한 모험의 보상으로서 신세계를 암시하는 항해의 은유를 확대한 것이다.
사실 니체의 철학을 자기극복의 초인성이라 예찬하지만 난파조차 새 세계 발견을 위한 모험의 불가결한 측면으로 이해하였듯이, 후일 그의 여동생으로부터 비롯된 나치에의 이념적 기여를 니체 또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게 한다. “세계의 모험들, 식민지 건설, 심지어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위대한 헌신에 작은 기여라도 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숙고”하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의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는 이제 자연을 길들이고 의인화해 자연 속에 반영되는 주체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항구가 보였다. 희망의 여신과 행운의 여신이여, 안녕!(『즐거운 학문』)”
이러한 인식은 갑자기 세기를 건너뛰어 니체에게 출현한 것이 아니다. 이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심취했던 과학기술과 우주적 이국취미에 의해 최초로 산출되었는데, 퐁트넬과 볼테르의 소설들에 나타난 호기심이라는 지식욕과 심미적 태도가 루크레티우스의 난파라는 은유의 독창적 변종의 출현을 보여준다. “아, 어떤 큰 난파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들어 그들의 특이한 모습을 편하게 이 두 눈으로 얼마나 보고 싶은지요!(『여러개의 세계에 대한 대담』,퐁트넬)”라든가, 돛에 불어 닥치는 바람이 “때로는 배를 전복시키는 일도 있지만 배가 움직이는 것도 바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자디그;Zadig』,볼테르)”, 다시말해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위험하며, 모든 것이 불가결하다는 말이다. 난파란 “추진력과 파괴의 위험이라는 이율배반의 증상일 뿐”인 것이다.
인간이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18세기를 전후하여 얼마나 급하게 변한 것인지를 우리는 이를 통해 조망할 수 있게 된다. 고대와 중세의 구경꾼의 태도였던 부동의 관조라는 정신은 불타오르는 호기심으로 바뀌었다. 한편으론 난파자의 대안으로서 단단한 대지가 아니라 인생에서 행복을 얻을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버린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고의 변화인가! 급기야 근대 이성주의는 구경꾼의 위치를 지워버린다. 쇼펜하우어는 난파자와 구경꾼의 위치에서 두 인간 주체의 동일성을 해명하기에 이르는데, “인간 본인이 겪는 고통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것은 이성 덕분이다. 인간은 항상 현실과의 갈등에 휘말리지만 그것을 순수하게 관찰하는 입장에 도달한다면 삶 전체를 모든 측면에서 조망 할 수 있게 된다.”,
해서 “이 인식 주체는 모든 욕망과 궁핍을 떠난 채 태연히 이념을 포착한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의식은 니체의 그것과 유사한 냄새가 난다. 인간의 모든 행위와 세계를 저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이 확고한 믿음, 이러한 오만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역사철학자 부르크하르트에 이르면 그의 저술 『세계사의 고찰』, 「역사적 위기」에서 “폭풍이 계속 우리도 앞으로 밀고나가는 것을 깨닫고 있다. 파괴하고 동요시키고 난파를 야기하면서...”라면서, 폭풍우에 의한 파도 자체가 인간과 인간의 행위임을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역사가는 그것의 추진력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이미 인간은 구경꾼이 되는 것도, 역사가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이제 19세기 과학의 세기는 기항할 항구(대지)도 구경꾼도 없는 바다에 떠도는,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상황임을 문득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제 극단적인 배의 변종이 출현한다. 도달 가능한 육지도 없으니 바다 위를 떠도는 배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배는 거친 바다 위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 선조들은 떠다니는 통나무를 이용해 배를 만들었으며, 그리고 그것을 계속 개선해 오늘날 편안한 배가 되어 인간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다시금 시작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 편안한 배의 은유로의 전환은 인간을 자연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험이 불가능한 존재로 보이게 한다. 이러한 변종 은유는 역설적으로 편한 배에서 뛰어내려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그 용기를 전파하려는 구경꾼을 자극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할 용기있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 널빤지와 통나무를 어디서 구한다?
이 거대한 지성사, 비-개념의 은유지대를 거닐다보면 바다와 난파와 구경꾼의 은유가 실로 엄청난 인간 인식 능력과 그것들에 내재된 윤리의식, 세계관, 삶의 이해방식 등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때론 심미적으로, 때론 윤리적으로, 때로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구경꾼에 대해서, 난파에 대해서 저마다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정당화하기 위한 사유의 풍경들을 읽을 수 있게 된다.
난파자를 바라보는 구경꾼의 시선은 이미 한국사회의 병리적 실상 때문에 익숙한 재료이다. 또한 난파의 위험이라는 상시적 재난에 대한 사회와 제도의 미성숙은 위험사회를 교묘하게 은폐하기에 바쁜 몸짓으로만 이어지고, 난파자라는 타인의 고통을 향해서는 오히려 가학적 발언과 함께 소금을 뿌려대는 반사회적 고질병이 수구청치집단에 의해 난무하는 현실이다. 이 비-개념의 철학에세이를 읽다보면 매 문장마다 현실 생활세계의 현안들이 겹쳐 떠오르며, 무수한 말이 되어 둥둥 떠다닐 지경이다.
아마 우리들의 정신적 초상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최고의 지성사적 고찰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나에게, 그리고 우리들의 세계에서 난파는 무엇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는지, 혹은 나와 이웃이 이미 난바다에 떠 있는 이미 승선한 동료는 아닌지, 그리고 나는 괴테나, 몽테뉴 같은 방관자이거나 자기 보신적 위선자는 아닌지, 나아가 난파자를 보고 루크레티우스의 관조적 즐거움이 아니라 낄낄거리며 남의 고통을 즐기는 반사회적인 정신 파탄자는 아닌지,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들을 멈출 수 없게 한다. 은유의 세계, 비-개념의 이론을 토대로 한 이 해박하고 재치 넘치는 글에 매혹되지 않는 이가 없을 듯하다. 블루멘베르크의 주저인 『근대의 정당성』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