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엽서
안느 브레스트 지음, 이수진 옮김 / 사유와공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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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통수에는 소화되지 못하고 우리가 계속해서 부담을 벗으려고 

노력하는 정신적 충격의 장소가 있다.” 

- 알레한드로 호도로프스키(Alejandro Jodorowsky;1919~ )


우리들은 이야기를 왜 읽는가? 스토리 컨설턴트인 리사 크론(Lisa Cron)’Wired for Story에서 소설을 읽는 것은 힘겨운 현실로부터 이야기 속으로 도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탐색하기 위해 읽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뜬금없이 서두에 하는 것은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 우편엽서야 말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현실사회가 인간 삶의 역사에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라거나 그럴 줄 몰랐어.’와 같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외면의 무지이거나 방관적 협조이다. 소설은 프랑스에 동화하려는 한 유대인 가족의 낙관적 욕망이 실제를 보지 못하게 됨으로써 초래된 가혹한 참상을 통해 인간 보편의 정서를 성찰하게 한다.

 

이 소설이 끝나는 후기 속에서 작가 안느는 이 책은 어머니의 조사(調査)와 글쓰기가 없었다면 쓰이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밝히고 있듯, 이 작품은 자전적이고 실화적인 20세기 일백년을 가로지르는 한 가문의 가족사라 할 수도 있다. 또한 이처럼 기록과 조사라는 사실성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객관적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독특한 방법을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소설에는 잘 알려진 문학과 예술인들의 글들과 기록된 사실로서의 이야기들이 양념처럼 이야기 속에 등장하여 역사적 상황을 입증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악착스러울 정도로 반()유대주의의 선봉에 섰던, 제멜바이스로 잘 알려진 루이 페르디낭 셀린 유대인은 85%의 찌꺼기와 15%의 빈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던가, 그 아둔한 유대인 놈이 누구(프로이트를 지칭)였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똥을 싸질러 놓았다.”며 상식을 벗어난 궤변으로 유대인종을 비방하는 글을 썼음을 드러냄으로써 당대(1930년대) 프랑스 내 유대인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분위기를 전하기도 하고, Suite Francaise(프랑스 조곡)의 작가 이렌 네미롭스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는 수용소의 이송 동선으로 소설 속 유대인 가족인 노에미와 자크의 가스실 죽음의 여정을 겹치도록 해서 사실로서의 역사성을 부각하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시인 르네 샤르의 레지스탕스로서의 적극적 저항 행위 속에서 독일 협력의 방관적 협조자였던 자연 예찬의 작가 장 지오노의 집 대문을 폭발시키는 일화가 그려지는가 하면, 그의 연인과 자손들이 라비노비치가() 생존자(미리얌-화자의 할머니)의 후손인 화자()와 연결됨으로써 프랑스 지성사적 인물들의 윤리적 현재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특히, 할아버지인 빈센트의 어머니와 변기(작품명 (Fountain))로 현대예술의 미에 대한 의문을 던졌던 '마르셀 뒤샹'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레지스탕스 자금지원의 사실도 표면화하고 있다.

 


이야기는 표제처럼 익명의 우편엽서로부터 시작된다. 1942년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에브라임 라비노비치의 가족 네 명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61년이 지난 2003년 화자의 어머니인 렐리아의 집에 배달된 것이다. 화자인 렐리아의 딸인 안(안느)은 자신을 뿌리까지 프랑스인이라 생각하는 유대인 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이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同化)된 성공한 프랑스 중산층 부르주아 계층이라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굳이 유대인이라는 인종적 범주를 상기할 이유가 없으며, 살아가는 데 어떠한 불편도 없다고 느낀다. 엽서는 곧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실제 일상에서 균열과 충동을 일으킨다.

 

소설은 총 44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장은 너무도 읽기가 고통스러운 장이다.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즉 화자의 증조부를 중심으로 그의 연애사로부터 시작해서 출생지인 러시아를 떠나 리투아니아를 거쳐 프랑스로 이주해 자신과 자식들이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서구의 찬란한 자유의 빛을 마음껏 쬐며 성장하는 삶을 꿈꾼다. 적극적인 프랑스 국민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그의 귀화 신청을 거부한다. 프랑스 공적 사회는 그(유대인)를 향해 수많은 부정적 신호를 보낸다. 주변의 소리들은 유대인 축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음에도 그는 별거 아닌 호들갑으로 들리고, 자식들인 노에미와 자크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유대인을 모욕하는 행위로 고통받고 있음에도, 이 모든 건 파리로 쳐들어 온 독일 출신 유대인들 때문이야. 프랑스가 침범 당했다고 느낀 거지, 그래. 그게 맞아.”라고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타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자기 몽매함을 부인하고 나아가 정당화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에브라임은 고작 앞으로는 조용히 사는 게 좋겠어.”를 삶의 답변으로 내놓는다. 파리의 집을 피해, 별장으로 사용하던 포르주의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옯긴다. 19393월 독일이 체코를 침공하고, 194010월 폴란드를 침공하며, 친독 정부 비시정부가 제정한 유대인 신분법에 의해, 도청에 유대인 등록을 하면서도, 기만적인 독일의 노동자 구인 포스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안 될 이유도 없지, 프랑스를 위해 우리가 몇 달 독일에서 일하는 게 귀화에 도움에 될지도 모르잖아? 우리의 노력,(...) 선의를 증명할 수 있을 거야.” 자기 욕망에 눈멀어 사실을 가리게 만들었을 때,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인데,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비참한 결과, 즉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와 자신의 참혹한 죽음으로 뒤바뀐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우매한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그런 정치적 일들은 나와 내 가족의 일상과는 관련이 없어.’, 과연 정치적 행위가 그 사회의 일원과 관련이 없을 수 있을까? 이 물음이 곧 답변이 될 것 같다. 안타까움과 미련할 만큼 어리석은 한 인간의 동화의 열정이 죽음으로 대답하는 여정을 읽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로서 소설의 중요한 탐색 중 하나가 끝났던 것 같다.

 

그리곤 두 번째 탐색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역사의 기억으로부터 아무런 경험도 도출해내지 못하는 무능력의 문제일 것이다. 1925, 1950, 1985, 그리고 현재에 지속되는 유대인을 향한 동일한 의미를 지닌 행위와 언어의 위협과 폭력이다. ‘더러운 유대인이라며 날아오는 돌멩이들이고, 집 담 벽에 그려진 나치문양이며, 우리 집에서는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무심한 배타적 언어이다.

 

한편으론 독일 점령기간 중 일어난 부역과 밀고, 무관심의 양상들이 레지스탕스의 활동과 대비되어 인간들의 혐오스러운 광기들이 열거된다. 비시 정권이 독일군에 보내기 위해 프랑스 청년들을 비롯한 건강한 남자들을 강제 동원하려 할 때, 이에 저항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조장하고는 함정으로 유인해 독일군에 넘겨 돈을 버는 민족 배신자들과 밀고자들,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으로 사실을 외면함으로써 독일에 동조하는 신호를 보냈던 사람들을 펼쳐 놓는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전쟁과 점령 기간이 지나고 해방된 1945년 이후의 프랑스 사회의 책임 회피와 사실의 부인이라는 행위로 죽은 자들이 1996년에 이를 때까지 부정되어 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무관심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협력이 아닌가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배우는 것이 없을 때, 이 무관심은 다시금 부정의 화살이 되어 되돌아온다. 오늘에도 여전히 반유대주의 정서는 사그라들 줄 모르고, 이젠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거라 믿는 현실 부정은 얼마나 위험천만한 인식인지를 깨워댄다. 불행의 역사가 반복되는 건 이런 어리석은 믿음과 눈 먼 욕망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외세의 반복되는 침략에 거듭 무력하게 굴복하는 상황들도 이것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소설의 중심에는 물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문제에 대한 고뇌어린 사유가 저변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한 인종이라는 개별성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 차별에 내재한 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내밀하고 굴절된 타자에 대한 혐오의 감정은 마치 은밀한 성적욕망과 닮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스티븐 소더버그감독의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아트 슈피겔만: 한 생존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정서적 유사성으로 화자인 안에게 떠오르기도 한다.

 

소설에는 아주 적절한 비유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안은 자신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리게 되는데, 그녀의 그림에는 불가피하게 아우슈비츠라는 마을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증조부모 에브라임과 엠마가 그렇고, 스페인계 프랑스인과 결혼함으로써 유일하게 생존하게 된 할머니 미리얌을 제외한 그녀의 동생들인 노에미와 자크, 증조부모의 형제들, 외조부모와 그 후손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트로스티네츠 절멸 수용소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조상들의 계통수를 그려 제출하라는 과제를 본 학교 선생이 이후 다정함과 애정이란 애초에 없었다는 듯 어린 안에게 멸시를 보내는 것으로 현실의 상황을 애처롭게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에 은닉된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한 의미들, 이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낙인찍힌 정체성을 안은 이렇게 묘사한다. 마치 피부 아래에 있는 또 다른 피부 같아, 우리 이전에 존재했고, 우리를 초월하는, 우리보다 더 큰 역사의 피부라고. 안은 신분증을 포함한 지갑 일체를 잃어버려 재발급을 신청하려 했을 때, 프랑스인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부모가 프랑스인인지를 증명 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했음을 쓰라리게 기억한다. 오늘의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 철저한 배제와 차별의 정서가 그들 사회에 동화하려는 이방인을 분리된 존재임을 각성시킨다. 만일 이러한 구별의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고통스러운 동화의 문제가 이렇게 계속해서 제기될 수 있었을까를 생각게 된다. 그리고 안은 이러한 감정이 “1942년 프랑스에 살았던 유대인 에브라임과 그 가족들이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음을 상기한다. ‘나는 프랑스인이야, 내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안주하는 순간 그들은 죽음의 소각장에 이르렀음을.

 

이 소설을 읽는데 나는 여느 작품들과 달리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 중 에브라임 라비노비치 가족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까지의 상황들과 그네들이 가스실에 밀려들어가 죽음에 이르는 기록의 여정을 읽는 데만 며칠이 걸렸기 때문인데, 안타까움과 이주와 탈출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기 합리화라는 무지에 매몰되는 것이 미련해보였던 까닭이다. 정말 힘든 독서였다. 계속 읽어야 할지, 그만 두어야 할지, 읽어나가는 데 무수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거대한 재앙으로서의 역사는 지속하여 증언되어야 한다는 것, 끊임없이 정의를 놓치는 단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우리의 역사도 일제 부역자 처리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과거를 안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일정한 국민적 윤리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 터무니없는 정치적 술책의 출현까지 빚어내고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근인(根因)에 역사적 무관심과 무지가 자리잡고 있음을 이 작품 또한 복기해내고 있다. 특히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의 유대인 혐오의 프로파간다나 수용소에서 발송된 친지들을 안심시키려는 내용들의 편지를 이용하여 잔혹성을 부인하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의 왜곡된 주장, 이를 여론으로 세뇌하려는 조작 행위는 사실 그 동기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에 가세한 담론 권력을 쥔 자들의 기회주의적 동조까지 우리들의 역사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그 어느 때 보다 극성인 지금이다.

 

이 소설은 자신의 부모와 동생들을 죽음으로부터 지켜내지 못한 화자의 할머니인 미리얌의 자기 생존을 위한 몸서리나는 일생을 추적하며, 역사의 기억을 자기 정체성 고유의 언어로 되새긴 기록물이라 해야 할 것 같다. 600쪽에 이르는 이야기의 분량만큼 다양한 감동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우편엽서에 적힌 네 사람의 이름은 기억을 잃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일생을 자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한 생존자의 마지막 메시지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거듭 기술해본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은 재앙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홀로코스트라는 광기의 역사는 그 동일성에도 불구하고 매양 빠져들게 한다. 아마 인간 본성의 근저를 지속하여 자극하는 본질적 물음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매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늘의 현실에 여전히 작동하는 위선의 실체를 다시금 깨우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것은 반복될 수밖에 없고 한 세대 혹은 몇 세대 이후의 후손 중의 누군가에게 도달하게 된다.”는 한 시인의 경고는 어쩌면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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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라 덩컨의 영혼의 몸짓 - 진정한 자유는 내 안에 있다 이다의 이유 8
이사도라 덩컨 지음, 서나연 옮김 / 이다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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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무용은 인류 전체의 것이 되리라. (...)  

그녀는 여성의 자유를 춤출 것이다.  (...)  

미래의 무용가, 그녀가 온다.  

새로운 여성의 육체를 감싸는 자유로운 영혼이여.”

- 49, 50, 51쪽 발췌정리

 

한 인간이 시대정신이라 부르는 것, 세상이 너무도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돌파하고, 새로운 무엇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는 것은 실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행보가 아닐 수 없다. 형식과 인위적 규칙들로 구성된 동작으로 표현되는 발레’, 춤을 추어, 이것의 기교를 세련되고 능숙하게 구현해야만 시대의 지성들에게 인정받는 세계에서, 알려진 적 없는 새로운 표현을 내밀며 이것이 진정한 춤이라고 선언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춤, 무용 예술의 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의 전환이라는 인간의 정신 혁명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터이다.

 

책은 이 새로운 정신, 새로운 표현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한 인간의 힘의 의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예술을 향한 집념의 기록이라 할 것이다. 반감과 외면, 비난과 질시의 시선 속에서 인간사회의 그 오래된 믿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이것이 바로 지금 인간 정신의 올바른 반영이요!’ 라고 선언하는 것은 단지 용기를 뛰어넘는 것 정도가 아니다. 덩컨은 자신의 무용가로서의 사명을 말하는 가운데 내게는 의지가 있다.”고 천명한다. 이 의지는 인간 개체 안에 응축된 움직임이며, 춤은 이 의지의 자연스런 표현이라고 부연(敷衍)한다. 어쩌면 덩컨은 이 문장을 쓸 때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이미 체화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덩컨은 단지 춤추는 여성 무용수의 차원을 넘어선다.

 

덩컨의 야망은 미국의 정신을 담아낼 진정한 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거대한 대륙을 개척하던 불굴의 용기, 하늘 높이 머리를 치켜들고 위대한 생명의 진동을 담아대는 아름다움과 힘의 춤을 꿈꾸었다. 덩컨에게 스커트와 타이츠 안에서 춤추는 일그러진 근육, 근육 안에 변형된 골격이라는 몸에 무리한 변형을 강요하는(39)” 발레, 여성의 몸을 옥죄는 기성의 규칙에 대한 혐오가 흐른다.

 

덩컨은 인간의 몸, 그 자연을 구속하는 감금과 위선의 표현은 예술의 퇴보이자 살아있는 죽음일 뿐이라 말한다. 자연의 본질과 조화하지 못하고 이를 파괴하는 경직된 육체를 해방시켜 유연성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그녀의 소명이 된다. 그녀에게 자연을 닮은, 자유로운 영혼의 표현인 춤, 자연(自然)인 무용은 곧 코르셋과 구두로 변형되고 조여진 허위와 위선으로부터의 탈출, 여성과 인간 정신의 해방이다.

 

덩컨은 이러한 정신을 고대 그리스의 힘의 응축과 힘의 전개를 자연으로부터 재현한 조각들, 신전들, 화병의 그림들에서 발견한다. 그것은 바다의 물결과 바람의 흐름과 대지의 변화, 그리고 건축과 회화, 조각의 선 및 형태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 인간의 몸짓, 즉 자연의 파동이다. 그녀는 대체 어떤 예술이 작품을 위해서 자연을 고치는가? 라고 묻는다. 시인도, 화가도, 조각가도, 극작가도 어느 누구도 자연을 고치지 않는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변형시킨 발레를 비롯한 왈츠, 마르주카, 미뉴에트 등 기성의 춤들에 대한 비판이다. 음악과 춤추는 인간의 기형적 어긋남, 퇴색한 감상주의, 비굴함과 답답함에 얽매인 표현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사진: 덩컨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작을 반복적으로설명한다. 생명의 고양감과 자연과 합일이라는 황홀경,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자연스럽게 육체를 통해 표현되는 최고의 춤 동작이었던 듯하다.189992번째 Street Performance의 한 장면

덩컨은 인간의 고유한 몸짓, 본성에 대응하는 자연 본질과의 조화를 위해 대지와 자신의 몸이 일체화되는 맨발의 춤을 춘다. 또한 춤은 육체인 자연의 동작이기에 당시 유행하던 화려한 의상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벼운 한 겹의 천이면 족한 것이다. 그녀는 쓴다. “2천 년간 감금된 예술에 자유를 돌려주려 애써왔다.(85)”.

 

한편 덩컨의 글에는 그녀의 정신에 깊게 스며든 바그너와 니체의 영향이 곳곳에 드러나는데, 특히 디오니소스 축제의 황홀경에 빠진 영혼을 반영하는 육체의 표현처럼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제자들에 보내는 편지에서 주요 참조 문헌으로 거듭 숙독해야 할 지표로 당부하기까지 한다. 지상의 세계보다 더 높은 영혼의 고양(高揚)을 향한 염원으로서 춤을, 진정한 예술로서의 무용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숭고한 인간 정신의 진지한 술회를 읽는 것은 어떤 숙연한 존경과 인류애를 느끼게 한다.

 

덩컨의 글은 감정적으로 정제되어 있어 어떤 수다스러운 사적 감정의 표현이 지극히 절제되어 있어 그녀가 겪었던 삶의 고통을 제한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1913년 자신의 두 아이 디어드라와 패트릭을 자동차 추락사고로 잃는데, 아주 짧게 당시의 고통이 표현되고 있다. 두 아이를 잃은 이후로 내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146)” 그것은 착란에 빠질 정도 억제할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음악과 하나 된 영혼, 이로부터 탄생한 자신의 춤이 주는 위로를 제자들에게 말하는 글에서 흘리듯 언급할 뿐이다. 아이들의 아버지인 각기 다른 두 남자, 그리고 유일한 결혼 배우자였던 시인 예세닌의 자살 또한 그녀의 글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다음의 문장과 같이 지극히 담백한 언어로 순탄치 않았음을, 그녀의 조화에 대한 철학과 달리 불화하였음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평생 사랑과 예술만 알고 살아왔다. 그리고 종종 사랑은 예술을 파괴했다.

예술의 오만한 부름은 사랑에 비극적인 종지부를 찍곤 했다.

둘 사이에는 일치란 없으며, 끊임없는 전투만이 계속될 뿐이다.” -164

 

자연의 고유한 언어, 자연과 합치하는 내적 충동의 춤을, 그 자유의 몸짓을 추구했던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지펴냈던 한 인간의 기록에서 진정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기꺼이 인생을 바칠 삶에 대한 소명의식을 생각게 된다. 성숙한 인간으로서 스스로 의식하고 자각하는 아름다운 한 영혼의 응축된 의지를 거닐며  자유로운 춤, 그 숭고한 이상을 표현하는  동작을  그려본다. 아마도 책은 현대 무용을 기획하고 공연하는 이들에게 귀중한 사상적 바탕을 제공해 줄 것이겠지만, 나아가 시대정신을 깨부수고 과감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혹적인 지표가 되어 줄 터이다. 진솔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읽는 것은 항상 기쁨이다. 우리를 에워싼 지식의 질서를 깨부수자, 그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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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원전 (컬러 도판 양장본)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 바다출판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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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으로 감상의 글을 시작해야겠다. 편저자(이하 저자라 표기함)존 캐리는 서문에서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으로써 목격자가 기록한 것이어야 한다는 글의 선택기준에 따라 엮은 르포르타주 성격의 모음집임을 밝히고 있다. 즉 글의 현장성을 담보하는 한에서 생생한 현실의 사건으로 독자가 안내되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저자 자신도 지적하고 있지만 현장성이 지닌 숨이 빠르고 주관적이고 불완전하기에 진실의 느낌을 준다는 유익이 있기도 하지만, 글의 정교함과 객관적 재현성의 불비라는 한계도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대해 그는 무서운 현실, 뜻밖의 현실과 대면시키는 언어의 힘이라는 르포르타주의 성격이야말로 어떤 의도된 덧칠이 없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실의 규명과 관련해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후일로 미루기로 한다.(책의 본질을 벗어난 얘기가 될 테니 말이다.)

 

한편 이 책의 한글 번역 제목이 왜 역사의 원전인가의 물음이다. 물론 2500년에 걸친 글들(르포르타주 성격)이다보니 당연히 연대기적 역사서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인데, 이는 자칫 저자의 의도를 곡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사의 주체가 되는 기록의 원형들이니 가능한 제목이긴 하지만, 181개 꼭지의 글들 개개의 문체가 지닌 개별성에 주목해서, 닳고 닳은 언어의 추상화를 이겨낸 기록자 개인의 경험으로 읽히기를 의도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의도가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즉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어지러운 다양성을 정돈하기 위해 포괄적 용어들을 이용해 일반화하여 언어의 회색담요 밑으로 사실을 가리지 않은 기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저자도 밝히고 있듯 생명력 없는 객관성의 재현으로서의 역사 서술과 다른 글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내 눈으로 봤다!”는 글들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 기병대가 적의 우익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라는 따위의 기록같지 않은 기록, ()살상의 구체적 표현을 철저히 피하는 이러한 완곡한 서술은 실제를 감출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현실이 감추어져 있는 글로서 여기 수록된 기록들과 그 성격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576114일 스페인군의 네덜란드 앤트워프 약탈 기록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기록자인 영국 상인은 시체와 핏덩이로 엉망진창이 된 길거리의 추하고 더러움도 기록하지 않겠다. 매장하지 않는 시체가 썩어가면서 뿜는 독기가 공기에 가득 차 살아남은 자들을 괴롭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겠다.”고 쓰고 있다. 기록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의 기록은 현재성과 구체성을 담고 있다. 열흘 넘게 지속된 도살장을 방불케 하는 앤트워프 시민들에 대한 무자비하고 무차별적 학살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스페인의 만행을 제3국 이방인의 시선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어떤 황급함으로 인해 예리한 위기감을 주고 있지만 그만큼 현장성이 생동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이 대형판형인 이 책의 페이지들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끝으로 르포르타주가 지닌 선정성(煽情性)의 문제이다. 사실 선정성이라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수사인지는 모르겠다. 르포르타주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호기심의 도구이다 보니 오늘날 우리네 뉴스 기사처럼 살인, 학살, 사고, 재해, 전쟁...등등 인간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르포르타주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인데, 어쩌면 이조차도 인간 욕망의 본질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이 겪는 참혹하고 불쌍한 죽음이나 소외와 고통을 생생히 그려내는 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것인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내용을 봄(듣거나)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겪지 않고 있다는 불멸의 안도감을 갖게 된다고 지적한다. 곧 이것은 일종의 종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르포르타주는 그래서 종교의 자연적 후계자라 불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르포르타주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심리 저류에는 진정 이러한 종교적 갈망이 흐르고 있는 것인가?

 


2500년 인간 역사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기록들이 지닌 생명성과 선정성으로 인해 마치 살인 선집(殺人選集)”이 될 우려가 있어 이를 완화하려 의도했음에도 인간의 역사적 현장은 피로 얼룩진 것임을 회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181개의 기록들 중 3분의 2를 넘는 기록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수많은 전쟁과 약탈, 각종 재난과 또 죽음과 살인, 비열한 학살과 보복으로서의 학살, 정치적 적에 대한 고문과 처형, 그리고 또 살인, 농민, 노동자 저항과 학살..., 사실 읽다보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 아예 인간 역사의 기록은 살인과 죽음의 기록이라고 해두자.

 

책을 처음 여는 기록이 BC 430년 투키디데스가 전하는 아테네를 강타한 역병의 모습이다. 대책없이 죽어가는, 즉은 사람들의 시체가 거리에 가득 차 있으며, 이로인해 법질서가 붕괴되고 매장 예법의 대혼란으로 절망에 빠진 아테네의 현실을 전하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니 이 기록은 오늘날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 초기 상황이 아테네에 불리했음을 이해하는 하나의 중요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BC 401년 그리스 용병 부대원으로 페르시아 정벌에 참전했다 패퇴하여 혈로를 찾아 헤매던 크세노폰(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쓴 크세노폰 맞다)의 생생한 글이다. 설맹(雪盲)으로 시력을 잃은 병사들과 동상으로 발가락이 떨어져 나간 동료들을 버려두고 생존의 도주를 하는 한 인간의 혼돈의 걸음이 눈에 밟히는 것 같다.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도주로에 발견된 마을을 불시에 덮치는 장면들...,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인간의 생존을 향한 의식에 여전히 공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의 철학토론의 글들이 친근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읽다보면 역사의 반복되는 동일유사성이 저절로 느껴지는데, 12세기에 국왕 헨리와의 반목으로 처형되는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게트의 살해 현장을 기록한 한 사제의 글은 16세기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처형으로 반복되는 수도사의 현장 기록으로 복사된 듯 출현하는데, 죽음에 처하는 두 사람의 대주교 모두 왕에 빌붙어 그 지원으로 대주교가 되자 왕과 대립하기 시작했다는 것까지 닮아있다. 야심을 위해 최고 권력의 심복처럼 굴다가, 척을 지는 것이 어찌 그렇게 동일한지 인간 욕망의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오직 비참한 죽음임을 후대에 알려주려 했던 것만 같다.(지금 한국 정치권력의 동일 유사함은 구태여 말하지 않으련다.)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과 그 진압에 가해지는 권력의 잔악한 학살의 역사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지역을 망라해서 수없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음을 마주하게 된다. 1851124일 나폴레옹의 파리 진압 현장을 쓴 빅토르 위고의 기록은 인간이란 종의 극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병력 16,400명이 파리에 집결해 눈 깜짝 할 사이에 하나의 도시를 도살장으로 변모시키는 지옥의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총소리 한 방을 신호로 하여 탄환의 소나기가 군중에게 쏟아지지 시작했다.(...) 파리 전체의 4분의 1이 날아다니는 탄환과 끔찍한 비명으로 가득 찼다 (...) 병사들은 아이를 끌어내 죽였다. 웃어대면서 아이의 상처를 칼로 벌려가며 구경했다. (...) 빈둥대다가는 이런 꼴을 당하는 거야. (...) 지하실에도 공기구멍으로 총을 쏘아댔다. 학살일 뿐이었다. 학살은 방사(放射)되어 나갔다. (...) 병사가 행인을 죽인다. 찔러라, 후려쳐라, 베어라! 광란의 살육이었다. (...) 이 범죄, 이 도살, 이 비극을 나는 목격했다.” - 빅토르 위고, <루이 나폴레옹 군대의 파리 진압, 1851.12.4.>

 

190519일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의 일요일은 잘 알려진 역사이다. 기자가 쓴 르포르타주인데, 차르가 있는 겨울궁전을 향해 청원을 위해 평화행진을 하던 노동자와 그 가족 15만 명이 궁전 앞 광장에 이르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무차별 사격을 통해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대()유혈 사태의 현장 취재기록이 있는가하면, 191671, 1차 대전의 한 격전장이었던 솜 강() 전투의 부상자 구호소에 참여했던 한 신부의 참담한 기록도 있다.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듯 광란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부상자들은 문자 그대로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못 받아 죽는 자들이 부지기수다. (...) , 너무 피곤해서 더 쓰지 못하겠다. (...) 이제 전쟁의 흉측함을 좀 알 것 같다. 하루에 1,000명씩 중상자가 나오는 판에 (...)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

 

아주 눈에 띄는 기록이 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직접 대면하고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그 현장성이 주는 생동감이 높은 글이다. 1933227일 독일 의사당이 화재에 휩싸였는데, 이 날은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화재 현장에 히틀러가 직접 나온 것이다. 외신기자인 영국인은 히틀러와 그 측근들의 무리를 따라 현장을 함께 둘러보고 있었다. 히틀러가 내게 돌아서며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소행임을 하느님은 알고 있소, 당신은 독일 역사의 위대한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있소, 이 불이 그 시작이오.’” , 이 화재 사건은 히틀러 나치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를 탄압하고 독재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기획한 사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화재현장을 관리하던 내무장관 괴링 대령에게는 하늘이 내린 계시오. (... ) 이 못된 해충들을 우리의 철권으로 박멸하는 데 아무 망설일 필요가 없소라고 주위사람들이 들으란 듯 정치적 적대자들을 숙청할 기회임을 시사한다.

 

폴란드 도시 오수비엔침 인근에 1940년 세워진 제1수용소가 아우슈비츠이고, 194110월에 추가로 세워진 제2수용소를 비르케나우라 부른다. 비르케나우에 SS(나치 친위대)가 직접 처형시설을 만들어, 시간당 1천명을 소각할 수 있는 거대한 지옥을 완성했다. 유대인 생존자의 증언 기록이다. 트럭이 서자 마치 감자나 석탄 짐 내릴 때처럼 짐칸을 기울여 올려 우리를 쏟아냈습니다. 샤워장 같이 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조그만 창문에서 연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출처폐허가 된 드레스덴 시가 전경첵 755


2차 대전 전쟁 기록과 함께 생체 실험의 역겹고 참혹한 실상의 기록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외과의사 면허 소지자였던 기록자는 독일 의사들의 조수로써 해부 외과의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독일을 현대 의학의 선도자로 만들게 했던 사악한 각종 생체 실험들이 즐비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지독하게 잔인한 실험의 상세 기술 내용은 옮기지 않겠다. 인간 아닌 인간들, 이 모순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언어의 한계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1945214일 영국과 미군 폭격기에 의해 독일의 도시 드레스덴이 완전히 파괴되고 도시민이 몰살된 현장의 참혹한 기록은 시민들의 잘못된 국가 리더의 선택이 어떻게 자신들에게 돌아 오는지에 대한 냉혹한 반면교사일 것이다.

 

이 방대한 인류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 글들을 읽다보면 과연 나는 이들과 얼마나 다른 존재인가를 다시금 생각게 된다. 아마 이러한 자기 성찰적 물음은 눈을 감을 때까지 반복해야 하는 것일 게다. 한국전쟁도 세 꼭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1970년대의 한 사건으로 맺고 있다. 인류는 자신들의 문명을 으스대고 있지만, 여기 수록된 르포르타주들은 그 문명이란 것의 민낯이란 타인의 죽음을 딛고 선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살해와 학살이란 적나라한 언어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그리스 신전의 부조물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화재의 약탈과 파손, 약소국의 노동력과 자원 약탈을 위한 무자비한 탄압과 광범위한 학살이 동반되는 현장의 기록들이 살해선집으로서의 오명을 피하기 위해 구성된 일견 낭만적이거나 새로운 문화적 이기의 현장 이야기들로도 좀처럼 완화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 책은 르포르타주, 즉 보도기획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이거나 소설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체기술에 대한 참조 도서가 될 수 있으리라. 또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원전(原典)을 참조하는 안내서로서 유용한 도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들은 대체 2,500년간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지금 이 문명이란 것은 대체 무엇을 품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이 책은 인간 존재에 대한 지엄한 성찰을 촉구하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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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권() 수를 좀 줄여 조금은 가벼운 한 달을 준비했다. 해서 좀 두꺼운 것으로, 한 권의 책에 긴 호흡을 가져가고 싶은 마음으로 오직 다섯 책만을 선택했다. 우선 옥스퍼드 영문학 교수인 존 캐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The Faber Book of Reportage)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제 거의 종착지에 이르렀다. 해설의 덧칠이 없는 순수한 현장기록이라는 서문을 하고 있는데, 서구 중심의 2,500년 인간역사의 기록들이 목격자 기록이라는 기준을 모두 충족하기는 어려울 것이겠지만 나름 근접한 기록물들을 담아내고 있다.

 

현장의 목소리라는 신빙성과 긴박성이 진실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현장성이 진실이라 할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아무튼 이 기록들을 살인 선집이 되지 않도록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르포르타주라는 인간의 관심사는 죽음의 기록들을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각기 MIT와 프린스턴에서 문학과 독문학을 가르치는 하워드 아일런드와 마이클 제닝스 두 교수의 공저인 발터 벤야민 평전(A Critical Life)은 원제목처럼 일생을 비평가의 삶으로 지낸 인간에 대한 전기이다. 다만 이 평전은 개인의 사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의 저술들을 근저로 한 사상에 중점을 둔 연대기라 할 수 있겠다. 아마 벤야민을 읽는 이들에게는 개별 저작들의 사유의 기초가 되었던 정황들을 접할 수 있어 독서에 유용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독일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기수였던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리스 시문학 연구에 관하여는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으로 낭만주의를 탐색하는, 그러면서 기성의 문학에 대한 일견 잔혹한 비평을 담아내고 있는 저작으로 보인다. 지적 자만심에 가득 찬 청년기의 저작으로 현학적 글쓰기가 보인다. 그의 소설들이 근간으로 출간되고 있는데, 참고 도서로 읽을 만할 것이다.

 

그리고 두 편의 소설 작품을 선택했는데, 프랑스 작가 안느 브레스트의 우편엽서와 중국 작가 찬쉐의 격정 세계. 안느 브레스트의 소설은 단 네 사람의 이름만이 적힌 엽서가 도착함으로써 그 이름들의 역사가 술회되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요 제재인 홀로코스트보다는 20세기 유럽사회를 휩쓸던 반유대주의에 어린 인종주의와 그것의 근저를 차지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로 보인다. 욕설을 꽤나 주절거리면서 읽어 나갈 것 같다.

 

찬췌의 소설은 더럽고 악취나는 절망의 양상으로 채워졌음에도 한껏 우아함을 뽐내며 오늘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에 빠진 우리 개별 인간들을 떠올리게 했던 전작(前作) 황니가의 생생한 매혹 때문에 다시 시선이 간 작품이다. 무미건조한 삶, 먹고 사는 게 빠듯한 삶, 대충 건성건성으로 사는 삶, 목표도 의미도 없는 삶....” 이렇게 살아가는 수많은 우리네 삶을 과연 문학이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 삶들에 다시 격정을 불러 낼 수 있을까를 질문하는 소설 같다. 아마 또 한 번 찬쉐의 세계에 빠져들어야만 할 것 같다. 작품만으로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작가에게 하버드, 코넬등에서 문학교재로 찬쉐의 소설이 활용되고 있다는 선전문구는 사족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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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상은 가수 아이유의 노래 Love wins all로 촉발되어 박지영의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로 연결된 장애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에 대한 소박한 상념이다. 소설집의 간략한 감상으로 시작해 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는 쓸모없음과 잉여나 허수와 같은 언어를 통해 쓸모와 효용과 생산성의 언어가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혹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어떤 균열이 있는지를 직시토록 하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들 효용이니 생산성이니 하는 언어는 하나의 언어로 집결된다고 할 것인데, 바로 쓸모있음이라는 유용(有用)’또는 소용(所用)이다. 이 단어는 인간을 구분하는 언어로 사용되어 무용(無用;쓸모없음)’한 인간을 질서에서 배제, 소외시키겠다는 폭력성을 은닉하는 지배의 기호로 이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단편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는 치매를 앓는 일흔아홉 살 아버지가 등장한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집 밖으로 나가면 실종되기 일쑤인, 아무 쓸모가 없는, 생산력도, 어떤 효용가치도 없는 인간이다. 치매 아버지와 무생물 밥솥이 나란히 거론될 정도이지만, 쓸모의 가치 측면에서만 보는 이 세계의 관점으론 언제라도 폐기처분해도 될 것만 같지 않은가? 효용 가치가 전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주 웃기는 모순의 언어를 이 사회는 또한 가지고 있다.

 

의사 소통능력을 상실한 치매 아버지와 함께 산책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나? 멋대로 움직이거나 아무 곳이나 드러누우려 하거나, 예기치 못한 행동으로 타인의 위협이 되거나 하는 행동들 말이다. 그런 사람을 끌고 가다시피 하는 자식들이나 배우자등 가족을 향해 사람들은 무슨 도살장에 개 끌고 가는 개장수도 아니고서야 원~, 노인 학대야라고 섣부른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 얼마나 편리한 생각인가? 쓸모없는 것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그 쓸모없는 존재를 돌보는 이에게 쓸모없음을 잘 못 보호한다고 칼날을 들이대는 것이다. 소설은 아마 이 이중의 위선적 잣대가 우리들의 인식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

 

가끔 TV 프로그램에는 이러한 치매환자를 돌보는 배우자나 자식들이 함께하는 매끈한 영상을 방영하면서 포장된 거짓과 위선으로 치매 가족의 현실을 미화해서 보여준다. 소설에서도 이러한 예가 등장하는데, 유튜브에 <마담 케이의 비밀 정원>이란 제목을 하고 우아한 치매할머니와 시인인 아들이 등장해서 운치있는 풍경 속에 시와 한 잔의 차가 오가는 예쁜 장면으로 연출된다. 치매가 이렇게 우아한가? 똥칠을 온갖 곳에 하고, 한 순간에 사고가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의 연속이다. 치매의 본질을 싹 걷어내고 효자이고, 지극정성의 배우자 모습만을 과시하는 이것들은 치매환자를 돌보는 다른 가족들은 물론 세상 모든 타자에게 왜곡된 이미지를 전달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유해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치매 아버지를 형과 누나를 대신해 돌보는 마흔의 아들인 주인공 강선동은 남에게 치매 아버지를 돌보는 선행을 하는 효자로 보이기 위한 많은 위선과 과장을 행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 신드롬에 걸린 한국사회의 많은 우리들은 자기 안의 착한 아이와 싸워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을 돌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의 착함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착함은 양보가 아니었다. 희생이 아니었다. 투쟁하고 악착같이 싸우고

탐욕스레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 버텨내야 하는 것이었다.” -59

 

쓸모있음이라는 말은 우리네 일상 곳곳에서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음이 드러난다. 인간 삶은 결코 유용이나 효용으로 논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소설의 표제작인 이달의 이웃비는 지적장애와 조현병을 앓던 형이 죽자, 그 형의 내면의 어둠과 혼돈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해할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신도 형의 블랙홀에 같이 빠져들까 두려워 줄곧 멀리서만 지켜봐 왔음에 내재한 진실을 향한 동석이란 인물의 자기 성찰적 걸음의 이야기다.

 

길거리에 버려진 쓰레기와, 쌓인 눈을 치우고, 상점들의 짐을 거들어 날라주고, 밤새 토해낸 악취나는 말라붙은 오물을 치우는 일을 하는 부자(父子)가 등장한다. 미화원이었던 아버지 배철영은 약한 지적장애인 아들 배병식이 자기가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 이웃으로부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웃비()를 선() 지불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웃에게 쓸모없는 것들을 그들은 보상을 지불하고 가져감으로써 쓸모있는 이웃이 되려는 것이다. 여기서 약자들이 소용있음을 증명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극렬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반증 행위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의 화자인 동석의 형은 함께하는 동생으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그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해 집에 머물면서 실내 자전거 페달을 돌리고 <무한도전>을 보며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신의 체적을 최대한 줄이는삶을 살다가 죽었다. 그때 체중은 50Kg 남짓이었다고 동석은 말한다. 그는 이를 형과 닮은 보이지 않는 이웃 배병식을 통해 상기하는데, 그것조차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동석 자신이라는 고작과 모자라는 병식이라는 존재의 감히의 관계를 넘지 못한다. 동석은 병식에 대한 이러한 보이지 않는 선, ‘선 밖의 이웃우리안의 이웃에 존재하는 매우 엄중한 제도 혹은 잣대가 있음을 깨닫는다.

 

사실 이 같은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인 척이라도 하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세계에 조금이라도 공평함을 돌려주기 위해필요한 것이리라. 위선적이거나 보여주기 위한 의도된 선행일지라도 진실한 수고가 뒤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계의 밝음을 위해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 동석의 행위처럼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이다는 감정을 갖는 것, 아마 여기가 훈련되고 학습되어야 하는 지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 소설집의 몇 작품이라도 급하게 읽게 된 이유가 있다. 최근 예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던 행태가 다시금 추한 민낯을 드러내며 노래 제목조차 간섭하기 시작하는 형국을 접하며 촉발된 선 밖의 이웃 갈라치기라는 폭력성의 속살을 보다 넓게 이해하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수 아이유(IU)의 노래 <Love wins>가 성소수자 구호로 이해되어 사회에 부정적(?) 메시지를 전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수정해서 Love wins all이라는 제목으로 변경 발표되는 일이 있었다. 발표된 음악영상의 내용은 육면체 상자가 청각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인 두 연인을 추적하며 혐오 가득한 편견으로 감시를 그치지 않는 상황 속에 끝내 서로 밖에 의지할 곳이 없는 두 사람이 사회로부터 버려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유튜브, IU 'Love wins all' MV영상 화면클릭(원 영상)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자(Cube,Box)로 상징되는 것은 서구사회에선 익숙한 은유이다. 사회라는 울타리에는 동일성만 유지되고 자기와 다른 이질성에는 곧 혐오와 폭력을 가하는 억압과 편견의 상징으로 이해되는 기호이다. 바로 그 편견의 존재를 사랑으로 이겨내자는 노래에 비난을 가하는 세계가 바로 지금 이 사회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지만 이 노래가 담고 있는 고귀한 정신을 알아본 세계인들의 높은 반향이 있다는 소식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다.

 

노래는 날 데려가 줄래? / 나의 이 가난한 상상력으론 / 떠올릴 수 없는 곳으로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곤 세상에게서 도망쳐 Run on / 나와 저 끝까지 가줘 My lover / 나쁜 결말일까 길 잃은 우리 둘이라는 음절로 이어진다. 그 혐오와 배제의 시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으면 자신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벗어난 상상을 넘어서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버림받은 이 세계에서 길 잃은 두 영혼은 그래서 세상 끝 다른 세계가 있는 곳을 향해 도망친다.

 

오늘 한국 사회는 장애인, 성소수자, 정신적질병자, 노인, 그 밖의 사회적 약자(경비,미화 노동자등)에게 그 어느 때보다 극렬한 혐오의 감정을 뱉어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이러한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앙치매센터는 2024년 치매환자 수가 100만 명을 넘어서고, 2050년에는 300만 명을 훨씬 초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21 장애인 통계>에 따르면, 2020년 등록 장애인 수는 전체 인구의 약 5.1%26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적어도 이 두 집단의 인구만 하더라도 360만 명에 이르고, 여기에 성소수자와 독거노인등 사회안전망에서 소외된 인구까지 더하면 인구 10명에 1명은 이러한 범주에 포함된다는 말이며, 이는 둘 또는 세 가족 중 한 가족은 이들을 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일 세 세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라 가정한다면 전체 인구가 모두 이들과 관련을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타자라고, 사회가 배제하여야 할 존재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부모 일수도, 자식일수도, 형제자매일수도, 삼촌이고 고모와 이모이고 사촌형제이고 조카이며 손녀손자일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니 잃은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테고, 설혹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체하고 있는 것이라면 외면하는 의도의 행위일 것이다. 모르는 것과 외면하는 것은 그 결과 행위에서 동일한 양상을 낳는다. 시각장애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고 주먹질을 하는 인간의 무지나, 경비노동자에게 자기 차를 주차할 공간이 없다고 발길질을 하고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다를 것이 없다.

 

사회 약자를 향해 저질러지는 혐오와 폭력들을 방임하는 세계에 우리는 이미 깊숙이 들어 와 있는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은 세계인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진짜 마음을 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정한 거짓이라도 이들 소외된 이들에게 표현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그 표현에도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들의 누군가는 이들이 될 수 있다. 모두 늙어 노인이 된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순리다. 우리들의 편견과 혐오의 시선은 이 사회의 소외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작동한다. 왜 세계인들이 하나의 노래에 이토록 열광하겠는가? 청각장애인으로 분()한 아이유가 노래하는 오직 장애인만이 서로 의지가 되는 세상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들의 우주(유니버스)를 진지하게 탐색하는 노력, 그래서 그 다름의 불신의 정체를 해소하는 걸음을 걸어보자. 혐오와 편견을 저멀리 날려보내고 설혹 위선이라도 행해보자. 아마 우리 세상은 조금은 더 밝고 환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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