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사 문지 스펙트럼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최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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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그리트 뒤라스는 72세 되던 해 그녀의 구술로 써진 물질적 삶에서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짧은 소회를 말하면서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는 책들이 있다고 이 작품 부영사를 비롯한 일곱 작품을 열거했다. 어떤 비극성으로 똘똘 뭉쳐진 자신에게 출구를 열어주기 위해 불가능할 정도의 안간힘을 썼던 글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손 댈 수 없음이라는 문장은 이 소설의 가장 의미심장한 일종의 부재 언어(혹은 구멍 언어)’로써 이 소설의 한 발단이 되는 캘커타 외교 당국에 치명적이라고 간주되는 사건의 구체적 설명이 거부되거나 모호하게 언급되며, 궁극적으로 진술되지 않는 것의 의미와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라호르의 부영사에게는 재현 불가능한 실재인데, 때문에 라호르라는 실재의 지명은 상징으로서 상상계를 잇는 일종의 구멍이자 삭제로서 기능한다 할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심연에 똬리를 틀고 앉아 결코 풀어줄 것 같지 않은 욕망이나 죄의식, 죽음의 유혹과 같은 이상한 욕동(慾動)과 마주했다면 그 무서운 두려움과 떨림, 광기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혹자들은 말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들은 출구 없는 비극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고.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끊임없이 터져나오려는 무엇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이 차단된 고통의 감정을 떨쳐내지 못했는데, 아마 그것은 재현되는 순간 현실의 일상성 언어로 진부화되어 하찮음으로의 전락을 참을 수 없어하는 인물들의 극한에 가까운 절제된 언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인 대사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나, 그녀의 친구 중 한 명인 피터 모건에 의해 써 지고 있는 갠지스강에 이르러 10년의 길을 멈춘 걸인 여인도 어떤 비극성에 의해 삶의 목소리가 막혀있다는 느낌에서 라호르의 부영사 장-마르크 드 아슈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는 이들 세 사람에 대한 타자의 시선 - 익명의 소문이나 뒷담화, 혹은 소설 쓰기 - 에 의해 묘사되거나, 설혹 그들 자신의 말조차도 내부에 갇혀 터져나올 수 없는 그 어떤 목소리에 의해 차단되어 절제되거나 중단되어 발화됨으로 인해 부영사의 라호르 사건 진술서의 표현처럼 설득력 있게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캘커타 프랑스 대사관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인사회와 자신들을 외부 세계와 분리하여 철책 바깥의 문둥이들, 걸인들로 형상화된 1930년대 부조리한 세계의 지점으로써 인도차이나와 인도의 대비로 상징되는 유럽 백인들의 왜곡된 시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이 한 축일 것이며, 이러한 인종과 지역에 대한 불안과 불신의 심리와 더불어 계절풍으로 대변되는 이 외부화된 기후적, 질병적 질시만큼이나 적대시되는 부영사에 대한 갖은 소문과 추측들은 존재가 야기하는 지옥 같은 외로움이거나 삶의 모든 욕망의 기억이 마치 표백되듯 증발해버린존재의 마지막 모습인 광기에 대한 인식의 성찰이 또 다른 하나의 축인 것만 같다.

 

캘커타의 백인들은 철책 밖의 세계와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않으며 단지 글로, 전해들은 소문과 추측된 정보들로 그 외부를 이해하려 할 뿐이다. 특히 문둥병으로 상징되는 그들 백인사회의 외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부영사의 라호르에서의 사건과 관련하여 자신들보부터 그를 소외시키거나 한 존재에 대한 왜곡의 정당한 수단처럼 활용된다. 이 백인 무리의 배타성은 철책 안에 자신들을 가둔 일종의 유폐(幽閉)여서 그들은 라호르의 사건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캘커타의 백인들에게 부영사는 라호르의 사건을 재차 설명한다. 라호르 그건 희망의 한 형태였다. 여기서 라호르라는 부재의 상징적 언어는 구체적 상상의 형상을 하게 된다. 샬리마르 정원에서의 총질이라는 파괴적 사건은 희망을 일궈내기 위한 하나의 폭발, 시쳇말로 새로운 세계를 위해 거쳐야만 하는 파괴였음을.

 

자신 안에 철저하게 유폐된 갠지스강 밤 아래 노래 부르는 걸인 여자, 파괴, 죽음이 녹아내리기를 기원함으로써 즐거운 행복을 느꼈던 부영사, 캘커타 대사관과 프린스오브웨일스가 있는 백인무리들의 섬 속 별장을 오가며 유배자의 눈물을 흘리는 대사부인 안-마리, 이들 모두 오래된 상실의 고통으로 파괴되어 유폐된 인물들의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측면에 대한 이해를 대변하는 것일 게다. 파괴되지 않고는 결코 수리 될 수 없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를 대상으로 한 깊은 고통의 앎(공감)에 대해서.

 

이들은 각자의 상징적 표상을 지니고 있는데, 유일한 단어 바탐방만을 말하는 갠지스강 걸인 여인의 밤 노래, “고독하고 음울하며 역겨운 행위에 대한 기억을 찢는 듯한 상처를주는 인디애나 송을 휘파람 부는 부영사, 권태와 습기처럼 이를 지워버리고자 할 때 안-마리가 치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번역자인 소설가 최윤의 해설처럼 수리 불가능한 고통 앞에서치루는 어떤 비장한 전환을 향한 예고를 감지케 한다.

 

이 소설은 특히 뚜렷한 세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발하는 지극히 분산 파편화되고 절약된 언어들을 짜 맞추고 유추하며, 독자는 인간 존재가 겪는 고통의 깊이와 결코 스스로 부패하여 멸실되지 않는 견고한 백인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뒤라스 문학만이 주는 독특한 매혹이자 즐거움의 요소일 것이다. 상실과 파괴, 눈물, 그리고 욕망과 광기,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는 출구 없는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설명될 수 없는 재현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어떻게 그것을 전달하려 애썼는지를 어렴풋 읽어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존재는 존재의 고통을 일깨우는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며 존재적 변화를 겪는다.” - 옮긴이의 말에서

 

附記

텅 빈 테니스장을 둘러싼 철책에 기대어진 채쓸모없이 버려져있는 대사 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의 여성용 자전거 이미지는 뒤라스의 물질적 삶, 몸의 말에 대한 그 어떤 고통스러운 믿음을 떠오르게 한다. 내겐 이 소설의 모두를 배제하고라도 건지고 싶은 소설 속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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