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키아 여자의 웃음 - 이론의 원 역사 모나드 인문학 시리즈 1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모나드 출판사 옮김 / 모나드출판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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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영면(永眠)에 들 때까지 독일 뮌스터고전문헌학과 철학교수로서 위대한 은유 속에 압축 변형되고 정교화된 인류 사상의 그 독특한 과정을 탐색했던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몇 안 되는 국내 출간저술이다. 이 저술을 만나기 전에 난파선과 구경꾼이라는 출중한 은유의 사상사에 매료되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는 모든 문화에서 개념적 파악에서 벗어나는 것, 즉 세계, , 역사 전체에 대한 조망은 오랫동안 조탁되는 이미지 가공 작업 쪽에 이양되어왔다는 글이 있다. 바로 이에 해당되는 저술이 이 책이다. 고대 천문학자의 우물 추락이라는 우화를 화두로 하여 시대라는 시간 경과에 따른 수용사를 통해 대표되는 사상가들의 입장과 사유를 추적한 철학적 사건들의 조명이고, 인간 인식의 변화사라 할 수 있겠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을 읽는 것은 늘 즐겁다. 아마 천박한 지적 쾌락을 충족시켜주는 동일 사태에 대한 그 무수히 변화되는 인간들의 관점들이 푸짐하게 펼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의 화두(話頭)는 기원전 6세기 이솝우화(Aesop‘s Fables)<점성술사(The Astrologer)>의 이야기다.

 

 【《Aesop‘s Fables, 'The Astrologer(점성술사)'

 

사실 이솝우화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이 책의 시작이 되는 원()이론이 아니다. 최초의 출발점이 되는 원 이론으로서의 이야기는 이것을 변주한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가 사형에 선고되어 감옥에 갇혀있는 사태를 투영하여 수정한 이야기다. 이솝우화의 내용은 <한 천문학자가가 별을 관찰하기 위해 밤 외출을 하곤 했는데,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하늘로 돌렸을 때 발밑에 놓인 진흙구덩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안에 빠졌으며, 고통 속에서 도와달라고 외쳤다. 이때 어떤 사람이 다가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살피고선 당신은 하늘에 무엇이 있는지 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아니오. 그런데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모르고 지나쳤단 말이요?’>라고 힐난하였다는 지극히 짧은 일화다. 1927년에 출간된 에밀 샹브리판본을 번역한 국내 번역서에는 매우 표피적인 교훈이 주석으로 달려 있는데, 나는 아주 크게 웃었다. 물론 실소를 하였다는 얘기다. 거창한 일을 한답시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상의 작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주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실 이 주석은 기존 질서에 대한 매우 순응적인 기계적 해석일 것이다. 블루멘베르크의 이야기에서 한참 비켜나간 것이기에 이런 읽기도 있다는 것으로 이 얘기는 그치고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이솝 우화에는 익명의 천문학자와 또 익명의 행인만이 등장할 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철학의 역사에 한 기원을 부여하는 이론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스승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운명의 부조리함, 즉 아테네 시민의 인식과 철학자의 인식과의 괴리에서 오는 몰이해, 그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사유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의 발견이었다. 그는 1세기 전부터 전해오는 우화의 등장인물에 구체적 면면을 부여한다. 익명의 천문학자는 밀레토스의 탈레스로, 행인은 재치있고 예쁜 트라키아 하녀가 된다. 천체의 궁창에 전념하던 탈레스는 하늘을 쳐다보았을 때 우물에 빠지고, 트라키아의 하녀는 그를 보고 웃는다. 그분께서 코앞과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없었던 가운데 하늘에 있는 것은 열렬히 알고자 하셨습니다.”(테아테토스174 AB번역)


표지 뒷면 이미지: 우물에 빠진 천문학자를 바라보고 트라키아 하녀는 웃는다

 

플라톤이 그려낸 탈레스와 트라키아 하녀의 이 이야기가 원 이론의 자리를 잡는다. 이름없는 한 천문학자가 플라톤에 의해 밀레투스의 탈레스라는 원철학자로 명명된 것이다. 플라톤은 밀레투스 철학자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철학적 실재론의 고유한 방식으로 자신과 남을 웃도록 한 것이다. 즉 밤하늘 세계 관찰자의 기괴함과 그가 실재와 부딪친 충동 반경에서 구경하는 구경꾼의 웃음을 묘사함으로서 당대의 근본적 사태인 스승의 죽음을 순교자로 발견하려는 참을 수 없었던 시대성의 반영이며, 그때까지 중심이었던 자연철학의 시선을 인간사회를 향한 전향으로 설정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획기적인 인식의 전환인데 이로써 하늘의 공간적 원거리 도달은 철학적 관심에서 사라진 것이다. 트라키아 여자는 당대 그리스 시민들처럼 천문학자의 권리로써 추구하는 이론적 순수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의 표본으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이제 이것은 원 이론으로서 표준이 되어, 이름께나 날린 사상가들은 개인적이고 시대적인 입장에 따른 성공 스토리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최초의 인물로부터 이 이론에 종지부를 찍는 최후의 인물이 되고자 이야기의 요소들은 탈락과 장식적 유입, 수정과 변경, 변조를 통해 시대성과 도덕적, 사상적 이익을 드러낸다. 그것은 천문학자 탈레스의 원철학자로서의 반영여부이며. 트라키아 여자의 역할 변화이거나 배제를 통한 인식 투쟁이다.

 

이같이 탈레스 일화의 수용사(受用史)는 이천 년을 가로지르며 이론의 역사에서 무엇이 본래적으로 우스운 것인지의 작업을 수행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초의 냉소주의 철학자 비온을 거치고 키케로와 에피쿠로스를 지나 기원후 1세기의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과 우물에 처박힌 천문학자를 죽임으로써 사라졌던 중세를 통과하며 11세기 다시 부상하는 천체관측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르네상스기에 이르러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에 부여된 두 유형의 의미를 쫓고, 몽테뉴, 볼테르, 포이에르바하, 훔볼트, 니체, 하이데거가 수용한 이야기에까지 이른다. 플라톤의 원 이론을 표준으로 불과 5세기 남짓이 지났을 때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의 텍스트와 해석을 읽다보면 인류 지성의 퇴행이 어떻게 저질러지는지를 봄으로써 염오(厭惡)에 빠지게도 한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천체관측자의 곤두박질이야기에서 탈레스를 아예 배제해 버리는데 발밑에 무엇이 놓인 줄 알게 하는 것이 하늘을 아는 일보다 절박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주 내부 표면에 대한 이교도적 성격으로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을 영원한 구원의 중요성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던 까닭이다. 그리곤 재빠르게 탈레스를 지워버리고 스토아 철학자 키케로를 그 자리에 끼워 넣는다. 교부 철학자 테르톨리아누스는 원철학자 탈레스를 우물 추락 즉시 악의 뿌리에 박힌 자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트라키아 하녀의 관념에서 철학적 세계관 입장을 조롱하는 자리에 빨간 밑줄을 그어 기독교 교리의 정당화에 이용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에게 머리 위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Quod supra nos, nihil as nos), 하늘의 재앙과 세상의 운명과 비밀을 읽으려 하지 말라. 발만 보아도 충분하다.”.



이제 천문학자의 이론인 일식은 기독교 박해에 대한 신적인 기호의 경고여야 하고, 임박한 하나님의 노여움의 공포(公布)이다. 그래서 천체의 경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음을 확증하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조짐이 된다. 천문학자는 사라졌고, 별을 우주 운명의 점성술적 위상배열로 인정하는 대신에 운명의 돌파구를 위한 기호로 보려했기에 더 이상 하늘을 관찰할 동기가 없었던 것이다. 인류의 지성이 정체되고 퇴보하는 데에는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압박만 있으면 아주 쉽사리 저질러 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기독교 교부 철학자들은 텍스트와 해석을 반대자를 확정하는 위장 전투로 삼는다. 저마다 세련된 입장의 해명으로 원 이론에 대한 무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너희는 입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다 구멍으로 처박아 들어갔다. 누가 하나님인지를 모르면서 탐구하였다.” 시리아 출신의 기독교 변증론자의 이 무시무시한 문장은 이성과 철학, 학문을 질식시켜버린다.

 

중세의 해가 저물 즈음인 11세기에 이러한 교부 철학의 갱신이 움트기 시작한다. 다미아누스의 전능에 대하여에서 천체 관측자의 우물 추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철학자 탈레스는 여전히 익명으로 머물지만, 트라키아의 하녀는 대지의 여신 테메테르의 슬픔을 위로하고 기분을 불어주는 조력자로 엘레시우스 창립 신화의 구성원인 이암베의 이름을 부여받는다. ()의 의례적 기능을 담당하던 이암베로 하여금 트라키아 여자의 조롱을 위안과 기쁨과 결합시킨 것이다. 주인의 불운으로 생겨난 교훈을 시적으로 공연하는 하녀의 모습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다미아누스는 이암베로 하여금 다음의 대사를 읊게 한다. 나의 주님은 발밑에 있는 똥을 모르고 별을 보려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문학자의 곤두박질은 상황 극화를 위한 장식으로 처리하고, 이암베를 통해 철학을 짓밟아 으깨고 신성으로 포장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인간들의 윤색을 열거하다보면 이들에게서 역사적 주인공 자리를 성취하려는 야심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을 역류하여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오늘의 타산적 이해관계의 이데올로기를 관전하게 하는데, 아마도 블루멘베르크의 지적처럼 그는 스승의 대화록 테아테토스를 읽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를 창작해 냈는데, 아마도 당대 그리스인들은 철학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가리키는 가난 때문에 탈레스를 욕하고 있었던 연유도 있었을 것이다.

 

천문학 지식에 근거한 올리브 풍작을 사전에 알게 된 탈레스는 올리브 압착기를 전부 확보하여 올리브 수요가 일어나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원하기만 하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고, 이를 통해 철학의 목표는 돈이 아니며, 어떤 물질적 혜택도 도출하지 않는 순수 무결점의 이론적 업적을 증명하여 탈레스를 보호하려는 필요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탈레스는 그가 일구었던 유산을 철학에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이 올리브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나 지혜에 대한 조롱의 이야기로 윤색되어 다시 등장한다. “소유할 수 없으면 쓸모없다.”, 그런가하면 14세기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술에 취한 뮐러 이야기에서 천문학자의 추락이야기를 변조하여 쓰고 있다. 미래를 예견하기 위하여 별들을 응시하였다. 그는 거기서 시궁창에 빠졌다. 그는 유감스럽게도 그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고 당대 점성술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한다. 이야기의 원 의미는 탈색되고, 자신들의 상황에 유리한 용도로 변형시켜 상대를 비난하는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몽테뉴는 또 어떨까? 에세(Esse)212절에 원이론에서 필요한 트라키아 하녀의 증언만 남기고 천문학자는 사라진다. 그리고 하녀도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이 도덕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에게는 가설이나 추측보다 많은 것을 약속하는 바로 발밑 땅을 위해 포기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탈레스는 우물에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다. 그녀는 확실히 그에게 하늘보다 자기 자신을 보라고 충고했습니다.”라고, 하녀가 현장에서 벌인 행위를 선의로 간주하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볼테르, 니체, 하이데거 등 이러한 변주된 이야기들이 계속되며, 시대의 사상적 진화와 철학자 개별의 사유를 쫓을 수 있으나 이쯤에서 그들의 구체적 이야기는 멈추어야겠다.

 

끝으로 니체의 한 걸음 더 나간 기원전 6세기에 벌어졌던 신화와 철학 대결의 탐지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 책에 대한 도리이겠다. 탈레스는 존재의 통일을 직관하기 위해 밤하늘의 도시에서 등을 돌렸고, 별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그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 철학의 시초 역사인 원이론의 이야기에서 니체는 사물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결정적 공포를 환기하기 위한 자기 신뢰의 철인을 발견한다. 탈레스의 정치적 좌절로 인한 신화에 대한 도시국가의 관계로 읽어내는 독법에서 가히 초인의 철학자를 거듭 발견하는 과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 독창적인 은유의 독법을 지닌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저술은 역자의 해설처럼 우물과 하녀를 오가며 우리들의 부족한 앎을 대체하여 우리 자신을 비웃을 수 있도록 이끈다. 또한 철학으로부터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리한 지점에서 자빠짐으로써 웃음을 은유적 상상의 토대에 세울 수 있음을 발견토록 한다. 수많은 사유의 실험과 이론의 발전을 한 권의 책으로 누린다는 것은 항시 유쾌한 일이다. 오늘 우리들은 탈레스의 추락과 여자의 웃음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쓰고 싶을까? 여기에 우리 시대의 숨어있는 진실, 욕망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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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많은 탈오자와 비문은 열악한 번역 출판시장에도 불구한 귀중한 저술의 출간이라는 고마움을 상쇄할 정도로 심각하다. 적극적 개정이 뒤따라야 할 성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흠결은 정말 아쉽다. 별 다섯 개를 받아야 할 위대한 저술임에도 별 네 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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