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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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말았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경험은 내겐 최초의 사건이다. 물론 읽기위해 샀던 책이니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이 나라 정치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해방된 후 미군정 치하의 황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노의 피로감이 반복되는 것을 조금은 피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가의 산문집 환승 인간을 읽게 됨으로써 기억의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살아났다. 아마 산문집에 피력된 의도들 - 들끓는 어떤 것들, 어쩌지 못하는 슬픔들에서 비롯되는 복수심 등 - 이 작가의 소설 속에 숨겨져 보관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 문장을 썼을까? 이 글은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에 대한 조금 더 다가선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소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라는 문장이 몇 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글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Let the Right One in 의 한 대사이다. 작가 한정현에게 의외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던 중 지진을 느꼈을 때 오직 자신만이 영화관에 홀로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이어지는 기억의 연쇄들, 어렴풋 그 상황 속에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일한 느낌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은 혐오와 불의, 역겨움을 상징하는 한 인간을 처음부터 살해하고 시작한다. (물론 추리의 형식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썼더라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일제치하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덕분으로 미군정에 달라붙어 대학 강단 권력을 행세하며,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 제자 등 그들의 능력과 성()을 갈취하는 파렴치한이다. 제자의 글을 마치 관행인 듯 자신의 글로 도용하면서 능력을 착취하고, 한 때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여성의 과거를 빌미삼아 성노리개 취급하며, 미군정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에 방해되면 좌익몰이 놀이로 타인의 파괴를 일삼는 인간이다.

 

피살된 교수 윤박은 미군으로부터 살해되었음이 당사자의 자백으로 이미 밝혀져있으나, 친미의 탈을 쓴 일제부역자들인 우익 기생권력은 이러한 분께서 동료인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괴소문이 서울 휩쓸 것이라며 좌익세력에 뒤집어씌울 기회로 삼는다. 살해 용의자로 윤박과 관련된 세 여인을 지목하고 일본 경찰의 개였던 말단 형사출신이었으나 종로경찰서 수사팀 실권자가 된 주구(走狗)가 범죄 조작을 지휘한다. 범인인 미군은 일찌감치 본국인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좌익세력의 붕괴를 위한 공작에 착수하는 것이다. 조국 문학의 근대화를 위해 돌아온 명망있는 학자를 살해한 마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데, 살해용의자로 지목된 세 여성의 삶과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억압받는 당대 여인들의 모습이 흐르고, 한편으로는 이 과정을 수사하는 검시의인 가성과 기자 운서의 서로 함께 빛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믿음, 사랑의 이야기가 한정현표 낙관,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에 기초한 진짜 삶의 실천을 현시한다. 아마 이 두 축이 교호하는 중심 소재인 피살된 윤박의 제자 현초의가 쓴 어린 마녀들, 마고의 이야기인 소설 <마고>와 한정현의 소설 마고가 결합하여 억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들,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이 빼앗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낙관을 말한다. 그것은 비록 이겨내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 것일지언정 기억하고 말하고 있음, 바로 가희가 가성으로, 가성이 다시 운서로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무조건 살아있음의 의지일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밤중에 한낮 같은 빛이 생긴 거리를 보며 가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여성,퀴어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하지만 언어가 비껴간 자리에서 사라지는, 혹은 오해되고 숨겨지는 이야기들인 미군정기의 폭력의 이야기이며, 불의한 권력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고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여성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은 무기력한 애수가 아닐 것이다. 아마 더욱 단단해진 복수를 향한 슬픔이 아닐까?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빛, 미군의 초토화 작전 하에 비오듯 퍼붓는 폭탄의 눈부신 섬광이 사라지면 나는 너에게로 가리라.”는 가성의 눈에 가득 들어 온 어디선가 떠오른 낮달, 그 기억이 살아 세대를 그침 없이 이어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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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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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악취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소설,

-열악한 뇌세포의 강제 노역을 통해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가히 영묘한 작품이다!


 

소설은 도입부에서 배경이자 제재(題材)이며 상징적 주제어이기도 한 황니가(黃泥街)’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황니가는 아주 더럽고 지저분했다....하늘에서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1년 사계절 내내 시시각각 떨어져 내렸다.“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되듯 소설은 시종 악취와 더러움, 징그러움과 혐오를 맴돈다.

 

거리는 너도나도 마구 갖다버린 쓰레기로 넘쳐나고, 황니가의 인간들이 내지른 똥과 오줌이 넘쳐흘러 고인 똥물이 찌는듯한 더위로 끓어올라 악취가 진동하며, 구더기와 초록머리 파리, 모기떼가 득시글댄다. 아마 이렇게 황니가의 환경을 옮기기 시작하면 역겨움으로 구토가 일어나고 없던 질병도 전염될 정도이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 죽음을 타인에 대한 음모와 질시, 그릇된 확신, 그리곤 자연물에 깃든 미신적 허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거주민 자신들의 방기를 결코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고양이, 개들의 사체가 방치되어 썩어가며 내는 완강하고도 침투력 강한 냄새가 지면을 넘어 풍겨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머리를 뒤흔들게 된다. 집들에는 쥐가 들끓고, 검은 독버섯이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리며, 천장에서는 바퀴벌레가 우수수 떨어지고, 곳곳에 구더기가 들끓는다. 그런데 황니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렇다 할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외부 요인에 어떤 문제나 해결책이 있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모여 하는 말은 터무니없이 뜬금없다. 동지들 이 문제의 성질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 황니가의 실상은 정말 너무 심각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는 원인의 추정은 완전 동문서답에 가깝다. 도시의 커다란 종이 밤새 미친 듯이 울려 댔어요.”, 종이 울린 것과 황니가에 닥친 역병과 주검들, 온갖 해충과 질병원들의 창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소설은 왕쯔광 사건과 왕쓰마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서사를 이끄는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자는 황니가의 실상을 조사하려 왔던 인물로 추정되는 존재가 남긴 황니가의 회생불가능한 더러움에 대한 지적이 야기한 불안이었다면, 후자는 한 존재의 죽음 또는 실종에 대한 실존과 부존의 설왕설래이다. 왕쯔광 사건이 인심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는 황니가 사람의 말은 마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엉뚱한 진단으로 치닫는다. 노선문제는 중대하게 시비를 가려야 할 문제입니다.”라며,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이 황니가의 오염된 환경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정파적 노선 문제가 되어버린다.

 

한편 왕쓰마를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 부재했던 가상의 인물로 처리함으로써 그 죽음 또는 실종의 규명이라는 본질의 차원은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이 두 소재로부터 공허한 정치적 논리를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질을 엉뚱하게도 정쟁으로 돌리거나 사실성, 실재성을 부인하며 가짜, 환상으로 몰아가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부패한 정치의 일상적 난맥상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명백한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에서부터 똥 냄새, 역병, , 박쥐, 파리 구더기, 바퀴벌레, , 거미, 고양이, ,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기괴한 질병과 죽음, 세상 모든 것을 쩍쩍 갈라지게 할 만큼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그치지 않고 사납게 부는 바람, 그리고 기괴한 상황들이 파편처럼 깔려 독자의 인식망에 잡히지 않는 의미들을 음험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상징적 소재들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해독하려다가는 아마 이 소설 읽는 것을 얼마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풀가동한 뇌신경세포들이 녹작지근해져 더 이상은 작동하려 들지 않는 상태임을 느낄 정도로 심취했으니 말이다.

 

찬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결코 논리적 이성에 의해 덤벼들지 말라.’라고 했다든가? 그러니 감정적 직관, 있는 그대로의 전달되는 느낌에 의해서 읽으면 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민감하게 분석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버리면 아마 이 소설은 그의 말처럼 어떤 인식을 가져다준다. 인간 사회, 혹은 특정한 사회(중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것이며, 1960년대의 씻기 어려운 깊은 인민의 상처를 만들어낸 문화대혁명의 폭력적 광기와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 혼돈의 시대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집 창문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았다면 그 집은 독사를 기르는 집으로 지목되고, 파리를 먹기 위해 등을 켠다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밤에 등이 켜진 집 문밖을 어슬렁거리며 돌멩이를 던지면, 후일 그 돌멩이를 던진 행위는 일종의 음모가 되어 조사 대상으로 변질된다. 보잘 것 없으며,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는 것들이 역병과 죽음의 원인과 결합되어 음모와 조사 대상의 사건으로 확장되고 쓸데없는 행정과 사법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돌멩이를 던진 일이 일종의 음모라고 생각해. 나는 이미 결심이 섰어. 이 일을 조사해서, 물이 마르면 바위가 드러나듯이 진상을 밝히고 말겠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계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희화된 정파적 생각과 행위는 그야말로 우습고 교활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우리네 정치의 실상과 다르지 않음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왕쓰마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나?”라는 구청장의 물음에 황니가의 한 인물은 물론이지요. 황니가처럼 복잡한 동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동네입니다. 예컨대 아직도 바퀴벌레를 먹으면서 생활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오는 식이다. 답변에는 황니가의 실상이라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지만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도 답변된 것은 없다.

 

어쩌면 답변아닌 답변을 통해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부적당해 보이는 것의 실체에 뛰어듦으로써 비로소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작가의 요청이라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정말 영묘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점이 구역질나고 추함에도 이 소설을 우아하고 품격있는 작품으로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무수한 사유의 함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하고 절망의 양상들로 채워진 소설은 기꺼이 열악한 뇌세포에 고된 노역을 강요하며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우리네가 처한 작금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이란 바로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황당무계, 기상천외한 맹랑함이라 할 것인지도. 이 작품을 읽다가 시선을 돌린다면 그건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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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 나이듦의 의미와 그 위대함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홍상희.박혜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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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던 그 첫 시간이 그것을 거두기 시작했다

(Prima, quae vitam dedit, hora, carpsit)” 

- 세네카, 아우구스트, 몽테뉴 ,장켈레비치, 죽음, La mort에서

 

도래하지 않은 먼 미래의 사건으로서 노쇠를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비현실로 여기는 인간적 시간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으로 책의 감상을 시작하는 것이 타당한 것 같다.  책의 서론에 적절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농부는 자기의 늙은 아버지를 가족과 격리시켜 놓고 조그만 여물통 속에 음식을 담아 먹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나무판자를 짜 맞추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린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아빠가 늙었을 때 쓸려고 만드는 거야.’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은 언제나 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알고 싶지 않아도 노인에게 설정하는 조건이 바로 자기 자신의 내일의 인간의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일 것이다. 절대 자신에겐 노쇠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여기지만 그 누구도 이를 피한 인간은 없다.(젊어서 우연한 질병이나 사고에 의해 죽지 않고서는)

 

시몬 드 보부아르가 노년에 관한 에세이인 이 책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참 이상한 생각도 하셨군요!”라고 비아냥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대다수의 인간이 노인이 된다는 사실, 즉 삶의 이 자명한 큰 변화를 사전에 직시하는 사람이 거의 없음을 의미한다. 저런 일은 내겐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은 늙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계있는 것으로 몰아간다.

 

이 책은 노년에 이른 사람들의 운명이 어떠한가를 밝히는 것을 본질적 목표로 한 에세이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 민족지학적, 인류사적 자료들의 탐색, 문학과 사회학적 각종 지표들과 저술들, 정치경제적 국가별 정책들을 아우르며, 노년을 대하는 사회와 개인의 이해를 생물학적 현상을 넘어 문화적 현상을 포함하는 총체적 조망을 한 770여 쪽의 묵직한 노작이다.

 

사람들, 우리네 사회는 노년에 대해 상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마치 평등성이라는 윤리를 으스대듯 모든 차원에서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막상 경제적 지위나 욕구와 감정들에 대한 판단으로 다가서면 아주 차별적인 분류로 범주화하고 이질적 종류의 인간으로 취급한다. 이 사회는 노인들이 예전에 가졌던 인간의 자질과 결점들을 고스란히 가졌음을 모른 체하며 노인이 똑같은 욕망과 감정, 요구들을 표명하면 빈축을 사게 된다. 노인이 사랑하는 것은 추하며, 성행위는 혐오스러운 것이 되고, 무엇보다 노인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 존재이기를 요구한다.

 

노년기란 모든 인간의 직접적인 가능성의 일부라는 것을, 자신들의 내면에 이미 미래의 노인이 살고 있음을 생각지 못하는 이러한 가치관과 관점들은 마치 자신들은 결코 늙지 않을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노년은 이렇게 단순하게 인간의 신체적 감각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사실 노년기에 접어드는 분명한 연령 계층이란 것이 존재치도 않는다. 시작되는 순간은 명확히 정의되어 있지도 않을뿐더러, 시대와 장소, 사회적 계층에 따라 엄청난 차이와 변화가 있다. 잘나가는 시인, 고위 정치권력 계급, 축적된 상당한 부를 지닌 은퇴자 등 사회적 부와 권력이라는 지위를 지닌 자들은 노인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노년이란 나이가 많은 특정 개인에 대한 보편적 호칭이 아니다. 이들 계층은 무덤에 들어 갈 때까지 사회적 지위와 행세를 하며 노년을 인식하지 않은 채 죽는다. 어쩌면 장켈레비치의 말처럼 이러한 자들은 영원히 산 존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이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 말이다.

 

OECD 노인 자살률 1위를 놓치지 않고 유지하는 국가가 바로 한국이다. 고려장이란 옛날 고대의 풍습이라며 마치 지금 한국사회는 그 같은 문명이전의 비윤리적 야만성과는 거리가 먼 사회라고 자기기만을 떨어대지만 이 지표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냉혹하고 반도덕적인 차별사회임을 쉽게 반박하기 어렵게 한다. 노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은 지극히 취약하고, 생활에 필요한 것을 조달할 능력이 없는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말년의 불행이 휩쓰는 사회, 그것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착취제제임을 강경하게 고발하는 하나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인구로 활동하여 획득한 소득의 많은 부분이 최상위 계층의 주머니에 들어감으로써 사회안전망의 자원이 되어야 했던 것들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사적 부가 되는 자본주의의 착취적 속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윤에 종속된 문명은 인간이라는 도구도 이익을 가져오는 한에서만 관심의 대상이므로 늙은 여자와 남자는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된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마치 노년을 항해를 다 끝마치고 도착한 항구의 감미로운 즐거움을 떠벌려 예찬하는 책들이 염치없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을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실제 대부분의 수많은 노인들에게 사회가 부과하는 생활수준은 너무도 비참해서 늙고 가난한이라는 표현은 이제 중복 표현에 불과할 정도이다. 천박한 극우집단의 정치적 앞잡이가 된 자유주의 수구 경제학자는 이렇게 지껄인다. 노년의 그 많은 여가시간에 뭐라도 창의적이고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게으름 탓이라고 말이다. 여가시간이 많다고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해방되는 순간 그 자유를 활용할 수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작금의 이 사회의 정책이 소수의 특권층만을 위한 것이다보니 대다수인 인민을 위한 정책이 극성스럽게 훼손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인간은 절대로 자연 상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노년기에도 한 개인의 지위는 그가 속한 사회가 그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노년기라 생산 활동에서 배제시키고선 그 배제됨을 비난하는 특권층의 악의가 날로 기승을 부린다. 지금도 고독과 권태 속에서 그럭저럭 목숨을 부지하며, 인수를 거절당한 불량품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이 즐비하다. 이 사회의 문명적 실패의 징후이다. 아니 야만의 실체적 표지이다. 한국 사회는, 특히 현재의 정치지배 권력은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도 없으며 오히려 노년의 비인간화를 윽박지른다. 개인은 사회가 그에게 취하는 실제적이며 관념적인 태도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이 책을 통해 우리사회의 현실을 판단할 수 있다. 무수히 노정되는 사회적 난점을 해결하기 위한 처방들과 사회가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 무언지를 말이다. 이 사회의 중산층의 신화는 점점 노년을 타자화하며 자신들과는 무관한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노화란 변화의 한 유형이다. 불가항력적이며 불리한 변화, 이러한 변화를 우리는 노화라 부르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숙기 이후 뚜렷해져서 마침내는 확고부동하게 이르는 불리한 변화의 점진적 과정이다. 이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없다. 모두 노년기를 거치며 늙는다. 다만 노년을 맞게되는 방식이 계층에 따라 다를 뿐이다. 그 다름은 10%90%의 두 다름이다. 90%의 대다수 노인은 결코 황금인생이라거나 풍부한 경험을 지닌 예지의 인간이 아니다. 늙은 여자, 늙은 남자,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노인을 단지 비경제 활동 인구로서의 짐이라 인식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의 미래 역시 비경제 활동인구가 될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을 부양할 책임을 맡음으로써 자신들의 미래를 오히려 확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동물적인 생존, 그것은 죽음보다 못하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노년의 인간들에게 죽음 보다 못한 인간으로 내치고 있는 중임을 각성해야 할 때이다. 노년은 다른 연령층처럼 사회적 목소리를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노인일 뿐이다. 설혹 그들의 목소리가 잡음으로 들려올지라도 그것은 결코 귀 기울여 들을 주제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 들으려 애써야 겨우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문명인, 윤리적 인간이기를 멈추는 것이 될 것이다. 20, 40세에 자신이 노인이 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마치 타인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타인인 그 미래의 노인을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우리는 인간이기를 너무도 많은 부분에서 놓치고 있다. 아니 놓으려 하고 있다.

 

책은 노쇠에 대한 어떤 환상적 수사로 기만적 찬사를 하는 엉터리를 말하지 않는다. 단지 노년의 모습 그대로, 그 자체를 삶의 한 순간으로 어떻게 지혜롭게 관리해 나갈지 개인적 태도의 사유를 돕고 있으며, 또한 사회, 문화적 정책과 기능, 역할에 대해 보다 총합적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는 사례와 방법론들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을 인간 조건의 영역 밖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의 오래된 한계를 자각하는 깨어남의 시간이 된다. 노화라는 불행의 표적이 된 삶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대한 유익한 문화 산책의 시간도 될 것이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나이듦의 의미에 대한 이 위대한 저술을 모든 인간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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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3-08-04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대한노인회 회장이 ˝손찌검을 하면 안되니까 내가 사진이라도 뺨을 한대 때리겠다˝며 김은경 위원장의 사진을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경악했습니다

어제 오늘 머리속에 노년.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 존경받는다는 것. 천박해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생각이 머리속에 가득하네요

필리아 2023-08-04 18:51   좋아요 2 | URL
이런 자들이야말로 노년을 예찬하는 사기꾼들이죠. 이들은 권력에 심취해 노년을 자기이익을 위한 선전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 그 이상이 아닐겁니다. 이들로 인해 다수의 약자인 노인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이들은 결코 노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노인을 착취하는 권력일 뿐이죠.
 
모든 열정이 다하고 쏜살 문고
비타 색빌웨스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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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너희는 옷을 걱정하느냐

들판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 마태복음628절에서

 

 

1대 슬레인 백작, 인도총독과 대영제국의 총리를 지낸 아흔네 살의 헨리 라이얼프 홀랜드가 죽었다. 자식들은 미망인이 된 여든여덟 살의 레이디 슬레인을 자기만의 의지가 없는”, “한평생 자애롭고 온화했으며 전적으로 가족의 의지에 따르는 일종의 부속물로 인식한다. 큰 아들 허버트는 어머니는 잘났다고 설치는 다른 여자들이랑 다르잖아.라고 떠벌리며, 슬레인 경의 책상에 놓인 신문처럼 어머니를 치워버려야할 존재로 취급한다. 아버지가 죽자 자식들은 부모의 집인 엘름 파크 가든스의 매각처분과 어머니의 연금을 빼앗기 위해 자신들이 돌아가며 수개월씩 모신다는 데 뜻을 모은다. 어머니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아버지의 장례도 치러지기 전이다. 자식들은 이러한 뜻을 어머니에게 전한다. 마치 자신들이 통보하면 그대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듯이. 그러나 레이디 슬레인은 이들의 제안을 물리친다. 런던 교외 햄스테드에 보아 둔 집에서 혼자 살 계획임을,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사람들만 곁에 두고 살고 싶구나.”, 레이디 슬레인은 조용히 맏딸 캐리와 맏아들 허버트의 간섭을 저지함으로써 그들의 탐욕을 궤멸시킨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녔던 보석 모두를 허버트 내외에게 미련없이 주어버린다. 기쁨을 숨긴 허버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식들은 혼자 살겠다는 어머니를 비난한다. 그리곤 자신들은 어머니에게 모실 것을 제안한 효심있는 자식이라고 도덕적 기만, 알량한 양심에 만족스러워한다. 남편 헨리의 죽음은 급작스레 레이디 슬레인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 70여년의 세월을 남편의 야망을 보조하는 역할, 그 대가로 보호받고 무지를 강요받고, 분리되고 억압당했던 세월에서 해방된 것이다. 여든여덟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던, 성의 기쁨과 권리를 포기하고 꿈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기위해 변장하고 도망을 꿈꾸던 열일곱 살 데버라 리가 세상이 그녀에게 걸었던 기대를 실현하는 대단하고 즐거운 미덕으로서 홀랜드와 약혼함으로써 인생의 목적이 중지되었던 것이다. 이제 여든여덟의 레이디 슬레인은 분투하는 삶을 살기 위한 그녀 안의 여자를 벗어나 사색하는 삶, 그녀 안의 예술가, 그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을 선택 한 것이다.

 

소란과 경쟁은, 한 사람의 야망이 다른 사람의 야망을 찍어 누르는 상황은 지긋지긋했다. 빈집으로 흘러드는 존재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67

 

그녀는 다짐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은 평온과 사색을 위해 살리라고. 분투하고 계획에 얽매이고 애써야 하는 삶은 거부하리라고.” 그런 거짓된 삶으로 낭비하지 않으리라고. 햄스테드의 집주인이자 중개인 영감 벅트라우트와의 매주 화요일의 친밀한 차 한 잔의 담소, 언덕 위로 갈색 나무와 탁 트인 푸른 하늘이 어우러진 지극히 아름다운 햄스테드 히스의 산책, 그녀가 원하는 잔잔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간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데버리 리이자 레이디 슬레인은 남편을 위해 살았던 삶을 결코 희생이라 말하지 않는다. 사치스러운 여성주의적 사고관을 탐닉하기에는 너무나 현명한여성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본질과 운명 사이의 간극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이해하려 애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상황이 악화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당대 가부장적 권위와 남편의 사회적 지위로 인한 총독의 부인, 총리의 부인이라는 부속적 수식어의 삶이 불가피했으며, 그녀는 그러한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수행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삶을 원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녀는 이러한 삶이 자신의 소망을 질식시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잘 살아냈으며 그 삶 또한 언제나 안락했음이 진실이었음을 인정하듯 그녀는 지난 삶을 압축된 하나의 단어로 규정짓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 소설을 노년의 삶에 대한 이해를 위해, 죽음에 등을 기대고 삶을 곱씹을 수 있는 무색의 풍경을 읽는 시간으로 삼는데 오히려 주력했다. 그래서 나이 많은 한 여인의 시선이 자신의 유년기와 젊음의 시기를 관통하고 인생의 윤곽을 그려보는 작업에 공감하고 동참하며 읽어나갔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유하다가 죽음이 그녀를 부드럽게 쫓아내고 문을 닫으면 그것으로 끝이기를 바랐다.”는 문장에 나는 시선을 박고 한동안 머물렀다. 이런 평온을 얻으려한다고 모두 얻는 것은 아니겠지만 무엇을 표현하든 상징밖엔 사용할 수 없는 노년의 마지막 소박한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의 실현조차 세상은 결코 그대로 놓아두질 않는 모양이다. 새로이 그녀의 늙은 친구가 되었던 수집가인 백만장자가 죽으면서 그녀, 레이디 슬레인에게 남긴 엄청난 유산으로 다시금 불가피한 소문에 휩싸인다. 이때 장녀 캐리가 형제자매들을 모아놓고 어머니가 젊었던 옛 시절을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배신, 존재하지도 않는 불륜의 추문으로 더럽히면서까지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막대한 유산에 대한 욕심을 부린다. 레이디 슬레인은 상속받은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하고 돈은 병원에 기부해버린다. 이때 자식들은 미쳐 날뛰고 온 세상이 들썩인다. 그러나 정작 레이디 슬레인은 무덤덤하게 통과해버린다.

 

그래, 세상은 정글같으며 결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재물의 유혹에 무심한 채 자기만의 뜨거운 열정으로 은밀하게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세상은 참지 못한다. 그들은 이른바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되어 무능한, 무력한, 무지한, 게으른, 배제되어야 할 비난의 대상으로 몰아붙이기 일쑤다. 레이디 슬레인의 이름을 물려받는 증손녀 데버라는 마치 그녀의 생의 의지를 닮은 듯 예술가를 꿈꾸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면에 돌처럼 견고한 솔직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음에도 세상은 쓸모없는 존재로 간주한다고 자신이 마주한 딜레마를 말한다. 이때 레이디 슬레인은 효모(leaven)같은 존재들이야. 세상에 생명력을 불어넣지.”라며 그들도 쓸모있는 존재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구태의연하게 진부한 도덕적 인생론을 말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삶의 모습이야 천태만상 아니겠는가? 다만 나는 레이디 슬레인이 바라는 제 기력으로 살 수 있는 그런 평온과 사색의 삶, 젊음의 분투가 온몸에 새겨진 소란만큼은 피한 암묵적이고 상호배려로 가득한 관계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고 싶어진다. 그리곤 언젠가 조용히 죽음이 나를 쫒아내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노년 (La Vieillesse)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의 노쇠는 언제나 사회 안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노쇠는 그 사회의 성격과 그 사람이 그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밀접한 종속 관계에 있다. ...노인의 조건은 결코 생물학적 여건들에만 달려있지 않다. 거기에는 문화적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노인들에게 지정되는 자리는 어떤 것이며, 사람들이 어떤 노인상()을 품고 있는가에....”

 

레이디 슬레인의 자식들, 세상과 분투하며 자기 이익에 몰두하는 인간들은 자신의 시선이 위치한 자리를 망각하기 일쑤인 것 같다. 노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 지금의 사회가 가진 노인상은 노인을 한낱 물질, 하나의 종속적 양태로 여기는 듯하다. 그들이 하나의 동일한 인간 존재임을 잊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끝까지 세상에 굽히지 않았던 인간, 모든 것을 누렸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들이었으며, 들판의 백합이기를 바랐던 한 인간의 마지막 삶의 기록이 아름답게 흐르는 작품이다. 정말 열정이 다 할 때까지 더 기민한 정신과 깨어있는 감각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그러한 마지막 시간을 꿈꾸어 보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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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7-31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타 색빌웨스트의 글이 궁금했는데... 보고 싶네요.

필리아 2023-07-31 18:22   좋아요 1 | URL
편견과 관습적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 예민한 경계를 보인, 그리고 자신에게 진실하려 했던 생의 신념을 고수한 인물이랍니다. 소설 속 노년의 레이디 슬레인에게서 이러한 전념의 열정이 보인답니다. 생전에 10편의 시집과 12편의 장편, 무수한 단편과 산문을 남겼으며 계관시인으로 거명되었던 작가였음에도 우리에게는 고작 버지니아 울프와의 관계정도로만 소개되고 있는 것이 아쉽지요. 즐겁고 건강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악마는 잠들지 않는다 - 일상화된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줄리엣 카이엠 지음, 김효석.이승배.류종기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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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해로움 때문에 주의를 끌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사회와 제도의 실체를 비추기 때문에 

관심을 끈다. 재난은 이미 잘못된 것을 드러낸다.”

 -본문 56쪽에서

 

 

지금 한국사회는 짧은 시간에 너무도 많은 재난을 겪고 있다. 이 재난은 바로 그 사회의 제도와 정책, 관리들, 사회구성원의 민낯을 드러내 윤리적, 정치적 실체를 까발린다. 딱 그 정도의 수준과 위치임을, 젊은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예견된 재난에 대한 무대책과 방관이 야기한 불필요한 죽음들이 마치 불가피하고 대비 불능했다는 듯이 일탈적인 예외적 사건으로 치부되고 책임을 회피한다. 책임져야 할 정부는 외면을 넘어 터무니없는 변명과 정쟁으로 시선을 왜곡하기까지 한다. 때문에 재난이 야기된 원인에 대한 조사도 애초에 하지 않게 되고, 재난은 반복되고 더 빨리 재앙이 되어 돌아온다. 그 피해는 온전히 시민대중이 반복적으로 뒤집어쓰게 되는 결과만 초래한다.

 


이 책은 재난에 대한 인식제고를 통해 어떻게 재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지, 더 성공적으로 이겨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전략과 지표, 척도를 제시한다. 재난의 본질이란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준비는 결코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한 재난은 어떤 일회적 일탈적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늘 함께하는 일상적 표준으로 인식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경고의 목소리. 재난조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덧씌워 쟁점을 흐리거나 정치화하여 일개 괴담놀음거리로 만들어대는 권력의 선전장으로 전락하는 작금의 현실은 너무도 안타깝기만 하다.

 

국민의 안전을 위해 아무런 짓도 하지 않은 주무처 장관에게 헌재(憲裁)는 면제부를 쥐어줬다. 과연 이러한 권력의 시선으로 국민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을까? 아마 잠자지 않은 재앙은 끊임없이 무대책과 무방비로 일관하는 권력으로 인해 시민대중에게는 각자도생의 길을 찾는 험한 길만 주어진 것 같다. 이 책은 위에서 언급했듯 재난에 대한 인식과 대비를 위한 깊이 있는 지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주목하게 것은 재난에 대처하는 지방 및 중앙 정부의 주무관리들과 그 수뇌부들이 응당 해야만 하는 책무와 태도이다. 때문에 시민의 시선에서 이들 행정권력 기관에 대한 재난 정책에 대한 감시 역량을 높이는데 분명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있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지역의 수장은 재난 상황의 실시간 상황인식의 엄중성을 부정하는 말을 감히 내뱉으며 책임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국민은 이들에게 강력하고 엄격한 명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재난은 지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의 정체성과 문화, 무시해 온 문제들을 드러낸다. 오송 지하차도 침수로 인한 인명 피해는 예견된 집중폭우에 대한 그 흔한 대비가 전무했음을 드러낸 여실한 사건이다. 재난에 대한 사전 대비 없음도 문제지만 실시간 상황에 대한 상황보고 체계도 작동하지 않았으며, 이를 통합 지휘해야하는 도지사는 마치 자신과는 무관한 재난이 펼쳐진 것처럼 자신을 예외지대로 두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책은 리더의 상황 인식과 상황지휘 체제를 중요한 재난관리 요소로 다루고 있다. 특히 사고지휘체계(ICS)는 모든 리더가 이해하고 있어야 할 대응체계로서 현장 정보를 보고, 분석, 의사결정하여 신속한 재난 대응 처리를 위한 필수책무로 강조하고 있다. 재난의 실시간 상황보고와 상황인식은 지역의 수장, 중앙기관의 리더, 최고통치권자에 이르는 자들이 왜 재난 현장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의 중대한 앎을 제공한다. 결과 추이에 따른 문제 최소화를 위한 즉각적 조치뿐 아니라 후일 반복되는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에 효과적 지식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이를 회피한 자들은 재난에 대해 결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뿐 아니라, 재난의 실체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의심할 여지없이 절대적으로 대응이 필요한 위협을 위기(risk)라고 말한다. 이 위기가 적절히 해결되지 않고 끔찍한 결과가 발생할 때를 재난(disaster)이라 부르며, 이 재난이 미숙하게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을 재앙(catastrophe)이라 한다. 금의 한국사회는 위기의 단계에서 처리되는 것이 없다. 위기가 발생하면 모두 재앙에 이르고 있는 현실은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는 말과 같다. 재난 불감증에 걸린 권력은 배워야 하지만 배우려 하지 않는다. 국정을 장악한 현 권력들은 한결같이 실존적 결정을 돌아보길 거부하면서 학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때문에 아무런 학습이 되지 않으며 실패의 역사를 반복하게 된다. 신속하고 정직하게 배워야 될 절실한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외면 혹은 무능을 자처하기에 이 사회의 재난은 항시 재앙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견되는 재난에 대비하는 계획을 유비무환이라 하여 전통적인 사전 대비책도 재난관리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재난이 닥쳤을 때 재난이 진행 중인 상황을 관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대에 우리는 진입해있다. 상황인식은 재난관리에 있어 더욱 중요해졌으며, 그래서 정부(중앙 및 지방) 수장의 현장관리는 재난의 최소화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책은 재난의 예견에 따른 준비 및 재난 차단도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더욱 중점을 둔 분야는 재난이 발생한 이후의 관리에 보다 역점을 두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후 정부 리더와 원자력발전을 비롯한 당해 기관의 위기관리자 역할에 따라 재앙이 되기도 하고 재난의 최소화로 방어 할 수 있기도 하다. 재앙으로 귀결된 사례들로부터 우리들은 상당한 교훈과 지침, 윤리적 책임의식 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무시하고 은폐하고 거짓말로 기만적으로 넘어갔던 재난은 재앙으로 반드시 그 추악한 몰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위기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외면하는 현상을 타조의 역설이라 부른다. 근시안, 낙관주의, 기억상실, 타성, 단순화, 자기 이익과 무관함 등이 서로 얽혀 다가오는 위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는 태도이기에 이들에게 재난의 닥침은 곧 재앙으로 무참히 연결될 뿐이다. 특히, 서울의 상습적 침수는 배수관로에 대한 전반적 점검 및 개량을 필요로 한다, 즉 예산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수장은 이 예산을 전면 삭감하였다. 자원낭비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겐 재난 대비 예산은 본질적으로 바보같은 짓이며, 신경쇄약자의 과잉반응으로 간주된다. 그리고는 재난이 닥치면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진부한 문장으로 짐짓 결연한 기만적 태도로 자신감을 내보이곤 한다.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재난은 반복된다.

 

혹여 행정기관의 재난에 대한 준비태도나 방법에 대한 시민적 오해가 있다면 그것에는 도사리고 있는 무수한 또 다른 방해 요인이 있을 것이다. 지식이나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 구조의 책임 분산이 통합된 노력으로 대응하는 체제를 방해했거나, 예견되는 무수한 적색신호의 잡음에 대한 무시, 사적 이해관계가 얽힌 규제의 느슨함이거나 규제 특권이 부여된 예외지대의 탈법적 지대가 생성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최후 방어선이라는 함정에 빠져 최후의 안정장치에 의존하여 재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최후의 안전장치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전장치는 사라지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만다. 저자는 이와같이 재난에 대한 대비책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들, 리더가 필히 갖춰야 할 태도와 방법적 도구들, 그리고 심리적 태도들에 이르기까지 재난 대응책들을 촘촘하게 제시하고 있다.

 

재난 대비예산의 촉구와 대응책을 요구할 때 지금까지 잘 작동하고 있는데, 별다른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데...’와 같이 변화란 없다는 듯한 반론을 곧잘 듣게 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것들은 항상 변하고 있으며, 더구나 인간도 변하고 있다. 과거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만일 똑같았다면 모든 재난관리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을 것이다. 재난 관리란 끊임없이 울퉁불퉁한 바닥상태에 맞춰 안정되게 만들려는 세 발 의자와 같은 것이라고 저자는 역설한다. 항공기 추락, 태풍과 홍수, 쓰나미와 같은 자연재해, 컴퓨터 네트워크의 해킹, 감염성 질병의 확산, 테러로 인한 재앙 등 유형별 재난 사례들과 함께 재난의 대비성이 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인가를 거듭 확인할 수 있게 된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멜팅(melting) 사고, 911 테러, 보잉 737의 연속적 추락, COVID 확산,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제방 붕괴 등 지구촌 뉴스를 장식했던 재앙적 사건들은 성공적 예방으로 엄청난 인명 손실과 재산의 파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사전 대비가 가능했던 사건들이다. 사욕과 권위적 과시, 권력과 기업의 결탁, 규제 완화와 같은 공적 감시소홀로 재난을 촉진한 인재가 위기를 재앙으로 만들었음을, 즉 재앙의 거의 모든 중심에는 인간의 재난에 대한 이해의 결여, 미숙함, 회피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재난에 대한 이 전문적이고 밀도높은 저술은 재난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바꿔 놓는다. 지방 및 정부 관리들은 물론, 기업 위기관리자, 그리고 시민 대중 모두에게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 책은 분명 한 층 올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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