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니가
찬쉐 지음, 김태성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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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고 악취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소설,

-열악한 뇌세포의 강제 노역을 통해서라도 읽을 가치가 있는 가히 영묘한 작품이다!


 

소설은 도입부에서 배경이자 제재(題材)이며 상징적 주제어이기도 한 황니가(黃泥街)’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황니가는 아주 더럽고 지저분했다....하늘에서 항상 검은 먼지와 더러운 불순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1년 사계절 내내 시시각각 떨어져 내렸다.“ 서사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견되듯 소설은 시종 악취와 더러움, 징그러움과 혐오를 맴돈다.

 

거리는 너도나도 마구 갖다버린 쓰레기로 넘쳐나고, 황니가의 인간들이 내지른 똥과 오줌이 넘쳐흘러 고인 똥물이 찌는듯한 더위로 끓어올라 악취가 진동하며, 구더기와 초록머리 파리, 모기떼가 득시글댄다. 아마 이렇게 황니가의 환경을 옮기기 시작하면 역겨움으로 구토가 일어나고 없던 질병도 전염될 정도이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양상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과 죽음을 타인에 대한 음모와 질시, 그릇된 확신, 그리곤 자연물에 깃든 미신적 허상에 책임을 전가하고, 거주민 자신들의 방기를 결코 인지하지 않는 듯하다.

 

고양이, 개들의 사체가 방치되어 썩어가며 내는 완강하고도 침투력 강한 냄새가 지면을 넘어 풍겨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머리를 뒤흔들게 된다. 집들에는 쥐가 들끓고, 검은 독버섯이 사방에 주렁주렁 매달리며, 천장에서는 바퀴벌레가 우수수 떨어지고, 곳곳에 구더기가 들끓는다. 그런데 황니가의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이렇다 할 개선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신들의 외부 요인에 어떤 문제나 해결책이 있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모여 하는 말은 터무니없이 뜬금없다. 동지들 이 문제의 성질은 아주 심각합니다.”, 그래 황니가의 실상은 정말 너무 심각하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는 원인의 추정은 완전 동문서답에 가깝다. 도시의 커다란 종이 밤새 미친 듯이 울려 댔어요.”, 종이 울린 것과 황니가에 닥친 역병과 주검들, 온갖 해충과 질병원들의 창궐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소설은 왕쯔광 사건과 왕쓰마 사건이라는 두 개의 사건이 서사를 이끄는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 또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전자는 황니가의 실상을 조사하려 왔던 인물로 추정되는 존재가 남긴 황니가의 회생불가능한 더러움에 대한 지적이 야기한 불안이었다면, 후자는 한 존재의 죽음 또는 실종에 대한 실존과 부존의 설왕설래이다. 왕쯔광 사건이 인심을 뒤숭숭하게 하고 있다는 황니가 사람의 말은 마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이해처럼 보이지만 엉뚱한 진단으로 치닫는다. 노선문제는 중대하게 시비를 가려야 할 문제입니다.”라며, 사건에 대한 문제제기와 같이 황니가의 오염된 환경과 질병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정파적 노선 문제가 되어버린다.

 

한편 왕쓰마를 실재했던 인물이 아니라 허구적 인물, 부재했던 가상의 인물로 처리함으로써 그 죽음 또는 실종의 규명이라는 본질의 차원은 사라지고 만다. 작가는 이 두 소재로부터 공허한 정치적 논리를 비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질을 엉뚱하게도 정쟁으로 돌리거나 사실성, 실재성을 부인하며 가짜, 환상으로 몰아가며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부패한 정치의 일상적 난맥상에 대한 지적일 것이다. 사실 이 소설을 이렇게 명백한 의미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위에서부터 똥 냄새, 역병, , 박쥐, 파리 구더기, 바퀴벌레, , 거미, 고양이, , 인간들에게 발생하는 기괴한 질병과 죽음, 세상 모든 것을 쩍쩍 갈라지게 할 만큼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지긋지긋하게 내리는 비, 그치지 않고 사납게 부는 바람, 그리고 기괴한 상황들이 파편처럼 깔려 독자의 인식망에 잡히지 않는 의미들을 음험하게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상징적 소재들이 암시하는 의미들을 해독하려다가는 아마 이 소설 읽는 것을 얼마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면 풀가동한 뇌신경세포들이 녹작지근해져 더 이상은 작동하려 들지 않는 상태임을 느낄 정도로 심취했으니 말이다.

 

찬쉐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결코 논리적 이성에 의해 덤벼들지 말라.’라고 했다든가? 그러니 감정적 직관, 있는 그대로의 전달되는 느낌에 의해서 읽으면 족하다는 말일 것이다. 민감하게 분석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버리면 아마 이 소설은 그의 말처럼 어떤 인식을 가져다준다. 인간 사회, 혹은 특정한 사회(중국)의 정치적 현실에 대한 은유로도 읽힐 것이며, 1960년대의 씻기 어려운 깊은 인민의 상처를 만들어낸 문화대혁명의 폭력적 광기와 난무하는 무질서의 파국, 혼돈의 시대에 대한 자성과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집 창문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았다면 그 집은 독사를 기르는 집으로 지목되고, 파리를 먹기 위해 등을 켠다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밤에 등이 켜진 집 문밖을 어슬렁거리며 돌멩이를 던지면, 후일 그 돌멩이를 던진 행위는 일종의 음모가 되어 조사 대상으로 변질된다. 보잘 것 없으며, 논란의 대상이 될 여지가 없는 것들이 역병과 죽음의 원인과 결합되어 음모와 조사 대상의 사건으로 확장되고 쓸데없는 행정과 사법의 남용으로 이어진다. 돌멩이를 던진 일이 일종의 음모라고 생각해. 나는 이미 결심이 섰어. 이 일을 조사해서, 물이 마르면 바위가 드러나듯이 진상을 밝히고 말겠어.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계산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희화된 정파적 생각과 행위는 그야말로 우습고 교활하기 그지없지만 실제 우리네 정치의 실상과 다르지 않음에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왕쓰마가 실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나?”라는 구청장의 물음에 황니가의 한 인물은 물론이지요. 황니가처럼 복잡한 동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한 동네입니다. 예컨대 아직도 바퀴벌레를 먹으면서 생활하는 곳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나요?”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오는 식이다. 답변에는 황니가의 실상이라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있지만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실도 답변된 것은 없다.

 

어쩌면 답변아닌 답변을 통해 상황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 할 수도 있으며, 바로 이 부적당해 보이는 것의 실체에 뛰어듦으로써 비로소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작가의 요청이라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이런 것이라면 정말 영묘한 이야기라 아니 할 수가 없다. 이 점이 구역질나고 추함에도 이 소설을 우아하고 품격있는 작품으로 느끼게 하는 바로 그 요소인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무수한 사유의 함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부조리하고 절망의 양상들로 채워진 소설은 기꺼이 열악한 뇌세포에 고된 노역을 강요하며 읽을 이유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우리네가 처한 작금의 정치적, 문화적 곤경이란 바로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황당무계, 기상천외한 맹랑함이라 할 것인지도. 이 작품을 읽다가 시선을 돌린다면 그건 신성모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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