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다가 말았던 소설을 다시 읽는 경험은 내겐 최초의 사건이다. 물론 읽기위해 샀던 책이니 작가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없던 것이 아니었지만 오늘의 이 나라 정치현실로 이어지고 있는 해방된 후 미군정 치하의 황망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분노의 피로감이 반복되는 것을 조금은 피하고 싶었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작가의 산문집 환승 인간을 읽게 됨으로써 기억의 한 구석으로 미뤄두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의욕이 살아났다. 아마 산문집에 피력된 의도들 - 들끓는 어떤 것들, 어쩌지 못하는 슬픔들에서 비롯되는 복수심 등 - 이 작가의 소설 속에 숨겨져 보관되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왜 이 문장을 썼을까? 이 글은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까? 에 대한 조금 더 다가선 읽기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 소설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는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라는 문장이 몇 차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글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Let the Right One in 의 한 대사이다. 작가 한정현에게 의외로 많은 생각을 떠오르게 한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모양이다. 영화를 보던 중 지진을 느꼈을 때 오직 자신만이 영화관에 홀로 있음을 인식하게 되고 이어지는 기억의 연쇄들, 어렴풋 그 상황 속에 있는 한 인간의 내면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동일한 느낌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소설은 혐오와 불의, 역겨움을 상징하는 한 인간을 처음부터 살해하고 시작한다. (물론 추리의 형식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썼더라도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일제치하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덕분으로 미군정에 달라붙어 대학 강단 권력을 행세하며, 지위를 이용하여 여성, 제자 등 그들의 능력과 성()을 갈취하는 파렴치한이다. 제자의 글을 마치 관행인 듯 자신의 글로 도용하면서 능력을 착취하고, 한 때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여성의 과거를 빌미삼아 성노리개 취급하며, 미군정의 위세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에 방해되면 좌익몰이 놀이로 타인의 파괴를 일삼는 인간이다.

 

피살된 교수 윤박은 미군으로부터 살해되었음이 당사자의 자백으로 이미 밝혀져있으나, 친미의 탈을 쓴 일제부역자들인 우익 기생권력은 이러한 분께서 동료인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이 밝혀지면 괴소문이 서울 휩쓸 것이라며 좌익세력에 뒤집어씌울 기회로 삼는다. 살해 용의자로 윤박과 관련된 세 여인을 지목하고 일본 경찰의 개였던 말단 형사출신이었으나 종로경찰서 수사팀 실권자가 된 주구(走狗)가 범죄 조작을 지휘한다. 범인인 미군은 일찌감치 본국인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좌익세력의 붕괴를 위한 공작에 착수하는 것이다. 조국 문학의 근대화를 위해 돌아온 명망있는 학자를 살해한 마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설은 커다란 두 개의 축을 가지고 있는데, 살해용의자로 지목된 세 여성의 삶과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 속에서 억압받는 당대 여인들의 모습이 흐르고, 한편으로는 이 과정을 수사하는 검시의인 가성과 기자 운서의 서로 함께 빛나는 삶의 동반자로서의 믿음, 사랑의 이야기가 한정현표 낙관, 현실에 대한 바른 직시에 기초한 진짜 삶의 실천을 현시한다. 아마 이 두 축이 교호하는 중심 소재인 피살된 윤박의 제자 현초의가 쓴 어린 마녀들, 마고의 이야기인 소설 <마고>와 한정현의 소설 마고가 결합하여 억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여성들, 마녀로 낙인찍힌 여성들이 빼앗긴 모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들만의 낙관을 말한다. 그것은 비록 이겨내지 못하고 지켜내지 못한 것일지언정 기억하고 말하고 있음, 바로 가희가 가성으로, 가성이 다시 운서로 여러 존재로 환승하며, ‘무조건 살아있음의 의지일 것이다.

 

폭격으로 인해 밤중에 한낮 같은 빛이 생긴 거리를 보며 가성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빛이 사라지면 너에게로 갈게.’” -186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여성,퀴어들의 사랑 이야기이기도하지만 언어가 비껴간 자리에서 사라지는, 혹은 오해되고 숨겨지는 이야기들인 미군정기의 폭력의 이야기이며, 불의한 권력에 의해 배제된 사람들의 저항과 고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여성들이 너무 많이 죽는다. 그런데 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슬픔은 무기력한 애수가 아닐 것이다. 아마 더욱 단단해진 복수를 향한 슬픔이 아닐까? 대낮의 작열하는 태양빛, 미군의 초토화 작전 하에 비오듯 퍼붓는 폭탄의 눈부신 섬광이 사라지면 나는 너에게로 가리라.”는 가성의 눈에 가득 들어 온 어디선가 떠오른 낮달, 그 기억이 살아 세대를 그침 없이 이어가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