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완성
로베르트 무질 지음, 최성욱 옮김 / 북인더갭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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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집에 대한 리뷰는 두 차례에 나눠 기술하기로 했다. 그 까닭은 무질이 생전 의도하여 출간했던 의지에 따름이기도 하고, 감상자 역량의 한계이기도 하다. 우선 사랑의 완성세 여인에 대한 감상을, 그리고 두 번째에 생전의 유고에 실렸던 지빠귀를 비롯한 15편의 단편들에 대한 리뷰로 분할하여 남긴다.

 


사랑의 완성』 ❶ 사랑의 완성과 세 여인에 대해


 Robert Musil (Klagenfurt, 1880 - Ginebra, 1942)


무질의 작품을 읽기에 앞서 전통적 형식과 내용을 벗어나 이야기 될 수 없는 것의 이야기, 즉 사실주의적 이야기로는 삶의 심연에 이를 수 없다는 그의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선()지식이 요구되는 것 같다. 무질에게 문학은 경험적 현실의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포착 노력이며, 개념을 벗어난 사고의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독자들이 무질의 작품을 회피하게 하는 요인일 것이다.


특히 인간 이성이라는 합리적 논리에 길들여진 오늘의 사람들에게 인과적 논리에 대한 혐오나 비논리적 감성, 비현실성, 불가능의 경계를 향해 돌진하는 무질의 문학은 이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작품으로 쓸 필요는 없다.”는 그의 선언처럼 어떤 확정적 의미를 찾을 수 없게 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아무것도 확정된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단지 시도된 표현들의 여정에서 생성되는 것이기에 독자 각자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것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기도 한데, 이야기 아닌 이야기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어떤 확실성을 발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책의 표제를 사랑의 완성으로 한 것은 무질을 대표하는 문학론적 의미를 따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질은 학문적 개념체계, 즉 이성의 논리 강요를 폭력으로 비유하며, 문학의 논리를 사랑에 비유하듯, 그의 소설들은 다분히 비논리적 감성, 어떤 비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성을 표방하는 학문의 현학적 정확성은 오히려 객관성이라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며, 오히려 환상적 정확성을 표방하는 문학이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그의 생각처럼 문학이야말로 작가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완전한 모습임에 공감할 수 있다.

 

1. 사랑의 완성


 


무질의 작품 선집인 이 책은 그가 당초 발표했던 작품집의 의도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편 지빠귀가 생뚱맞게 별개로 제일 앞에 수록되어 있고, 각기 별도로 발표되었다가 후일 세 여인이라는 단편집에 묶여 출간된 작품이 두 번째이고, 사랑의 완성합일이라는 단편집을 위해 무질이 의도하여 개작하고 집필한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과 함께 구성된 작품으로 독립하여 세 번째에 수록되어 있으며, 끝으로 생전의 유고는 무질이 분류하여 수록한 30편의 작품 중 그 절반만이 무질서하게 구성되어 있다.

 

출판사 혹은 번역자의 의도는 사건이나 행위 대신 회상과 상상에 의해 진행되는 조용한 베로니카의 유혹의 선형적 시간 순서를 파괴하는 전개가 독자에게 이해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배제한 듯하다. 또한 생전의 유고중 부분만을 선택한 까닭도 이러한 연유로 이해되지만, 이러한 편집은 어떤 의미에서 오만함이고 부주의함으로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무질의 작품에 대한 출판시장의 척박함은 사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미완성 장편 특이성 없는 남자를 제외한 그의 작품집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출판독서시장의 현실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수록 순서를 바꿔 표제작인 사랑의 완성에 대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작품은 출판사의 청탁에 의해 2년에 걸쳐 집필된 두 편의 단편으로 출간된 모음집 합일(Vereinigungen)중 한 편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에 대한 혐오에서 썼다.”고 할 만큼 실험적 시도가 지나치게 압도한 나머지 소설적 긴장이 결여되어있음을 작가도 고백할 만큼 독자의 이해를 불가능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당대의 문제일 뿐이지, 무수한 실험적 시도의 작품에 익숙해진 오늘의 독자에겐 그리 낯선 것도 아니며, 독해 불능에 빠질만큼 어떤 난해성을 지닌 작품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사설은 이쯤에서 멈추고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설은 몇 안 되는 대화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사실 소설의 대부분이 기억의 회상과 몽상, 독백으로 이루어진 것에 비해 극히 예외적 장면이다. 정말 함께 갈 수 없어요?”, “안되겠소, 당신도 알다시피 급히 끝내야 할 일이 있소.” 딸 아이 릴리의 기숙학교 방문의 동행에 대한 남편과 주인공 클라우디네의 지극히 평범한 대화다. 그런데 이 대화에서 부부의 어떤 균열을 읽는다면 지나치게 과도한 해석이 될까? 딸 리아는 지금 남편의 소생이 아닌 결혼 전 치통으로 찾아간 미국인 치과의사의 자식이다. 여자는 홀로 기차 여행을 떠난다. 이 기억은 당시 열정과 과격하게 사로잡혀 저지른 평범한 충동일 뿐으로서, 본질상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흐르는 시냇물과 같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 여자의 회상과 몽상과 독백은 하나의 원 주위를 뱅뱅 돌 듯 은밀하게 숨겨둔 욕망, 과거의 문란했던 충동적 해방의 시절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남편과 이룬 안정되었지만 억제된 삶으로부터의 도주라는 경계를 선회한다. 그런데 이 순환 반복되는 상념이 가져오는 낯설고 이질적 세계, 다름의 상태를 드러내려는 것이 아마 작가의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성과 비이성이 반복되는 오고 감의 반복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조화? 혹은 통일?, 이 점진적이며 눈에 뛰지 않을만큼 미세하게 이동하는 진행에서 클라우디네는 어떤 합일(合一)의 체험에 이른다. 소설의 모티프라야 정말 보잘 것 없다. 흔해빠진 유부녀의 관능적 욕망과 간통이라는 진부한 통속적 내용이지만, 이 소설은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모티프는 하나의 소설적 구실에 불과한 듯 여겨진다. 즉 성적 부정(不貞)에 대한 윤리적 탐구가 아니란 점이다.

 

무질의 작품들 전반에 자리잡은 독특성인데 주인공을 현실로부터 격리하여 고립시키는 것이다. 클라우디네는 폭설로 인해 소도시에 한동안 고립되는데, 이를 통해 현실 세계에서 작동하는 온갖 제약, 그 제한성을 이탈함으로써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감정의 세계라는 다른 세계에 진입하게 되는 것 같다. 소설은 이러한 다름의 세계에 대한 느낌이 도처에서 표현되고 있다. 길을 떠난 사람만이 느끼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낯섦의 행복,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다보면 모든 것이 실제보다 크고 어렴풋한 제 2의 윤곽을 띠는 것처럼...등등 인습적 틀의 사고를 벗어나 진실의 또 다른 면을 직시하게 하려는 장치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은 무질 자신이 지향하는 문학을 말하려는 것이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문에 사랑의 완성이란, 이성과 비이성(감성 등)의 합일을 추구하는 주인공을 통해 문학의 완전성을 말 하려한 것이 아닐까?

 

2. 세 여인


 

사실 연작처럼 묶여있지만 세 연인을 구성하는 세 편의 소설은 각기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작품들을 1924년에 단편집으로 엮어 출간한 것이다. 따라서 3부작으로 계획 집필된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록된 세 작품에는 분명 여인들이 등장하지만 여자들은 실제 거의 말하는 인물들이 아니며, 남자의 상대역으로만 존재를 알릴뿐이다. 그런데 세 여인이라 제목을 붙였을까? 무질은 자신이 추구하는 비현실성과 비이성의 진실을 말하는 자기문학의 지향점으로서 여자를 설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능동적 이야기의 주체가 아닌 침묵의 존재로 보이지만 실제는 바로 그 여자들이 소설이 말하고자하는 말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2-1. 그리지아(Grigia)

 

이 소설은 무질의 문학 정신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살다보면 계속 이렇게 살 것이냐 아니면 방향을 틀 것이냐를 망설일 때처럼 인생이 눈에 띄게 느리게 흘러 갈 때가 있다.(40)” 소설은 이 시작 문장을 구체화한 기록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작품도 예외없이 주인공인 호모는 오래된 금광 개발에 초빙되어 가족을 떠난다. 다시 말해 일상적 환경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이동하며, 그곳은 곧 외적 환경으로부터의 고립을 뜻하고, 이로서 낯선 경험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이 낯섦의 공간은 소설 초입부에서 해당 지역에 있었던 일화로 설명되고 있는데, 미국에 돈 벌러 갔다 돌아 온 남편과의 동침을 했던 농부 아내의 기억에 관한 것인데, 남자는 남편을 흉내 낸 사기꾼이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기 기억과 남자의 말을 비교해 보곤 듣자마자 자신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을 눈치 챘음에도 어느 누구도 자기의 기억에 확신을 가질 수 없어 감히 입 밖에 낼 수 없었다(48~49)”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에 대한 전복이다. 갑자기 세상사의 모든 것이 불안에 빠진 듯한 이런 상황이 지배하는 곳, 왠지 꽤 오래 현실 세계와 격리된 공간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호모는 그리지아라는 여인과 함께 살게 되는데, 그것은 동화같은 숲이 있으며, 자기 몸을 생전 처음 만져보는 것 같은”, “자기 삶의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린 것 같은 그래서 그의 마음은 거지처럼 가난해짐을 느끼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 반전이 있는 것 같다. 이성으로 무장된 엔지니어인 호모가 마주한 여인과 장소가 허공에 떠있는 유희처럼 느끼게 하는 순수 자연의 세계, 문명이 스며들지 않은 비이성의 인간 세계라는 점이다.

 

일상적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진입한 호모는 어느 날 버려진 갱에서 그리지아와 함께 쾌락을 나눈 후 잠시의 몽상 후에 여인은 없고, 갱 출구는 한 줄기 빛이 비치지만 큰 바위로 막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황당한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이 동화같은 소설은 독자에게 잔뜩 수수께끼를 남기고 종료된 것이다. 호모는 탈출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탈출의 가능성이 부재한다고 단언 할 수 없음에도 벗어나려는 시도를 중지한 그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남겨진 것이다.

 

평론가들은 이를 20세기 초 유럽이 처한 출구 부재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일상적 삶으로의 복귀를 거부한 것으로, 이성이라는 현학적 환상에 대한 혐오, 즉 신비와 비이성적 각성의 세계인 이 다른 공간에 머무는 것이 오히려 정직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어진다. 물론 호모의 내적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따라서 호모의 죽음 수용은 삶의 의지의 포기가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열정적 추구처럼 보인다.

 

2-2. 포르투갈 여인(Die Portugiesin)

 


이 소설의 배경은 중세의 외딴 수직 암벽 위의 성이다. 자 또 고립이다. 오백 걸음 밑에는 작지만 물살이 센 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소리가 워낙 거세 ...교회 종소리가 울려도 듣지 못할 정도(77)”의 공간이다. 이 고립이 의미하는 바는 일상적 현실과 무관하다는 것이 아니다. 무질은 단지 외적 현실의 영향을 배제한 표본적 공간으로서, 일종의 실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박사 출신의 무질은 외적 영향 요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 공간에서 인간들의 행동과 정신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케텐의 영주 또는 케텐이라 불린다. 외부에서 결혼 할 여자를 취해야 하고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트리엔트 주교와의 싸움을 수행하여 승리하는 것을 소명으로 하는 존재다. 케텐은 주도면밀하고 냉철한 사람이며, 그의 아내 포르투갈 여인은 마법과 같은 행위를 보이는 사람이다. 이성과 비이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몽환적 이야기는 주교와 마침내 종전에 합의함으로써 추구할 과제를 상실한 케텐의 상황으로 나아간다. 주인공 케텐은 케텐종족의 삶의 목표와 자아를 동일시한 인물이기에 종전의 결과는 자아 상실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치 이를 증명하듯 케텐은 병들어 수척한 환자의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존재가 출현한다. 언젠가부터 성에 와 있는 이방인 청년이다. 아내의 곁을 맴도는 인간에 대한 질투와 병마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케텐은 사경을 벗어나지만 점차 기력이 쇠잔해 간다. 소설에는 모호한 상징으로 늑대와 고양이가 등장하는데, 일종의 암시로 작동하는 것 같다. 자아의 상실로 쇠잔해가는 케텐은 무언가 행해야만 살아 있는 존재다.

 

케텐 사람들이 고양이를 죽이는 사건은 이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이고, 이방인 청년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마치 행동의 실천, 의지만이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듯, 다 죽어가던 케텐은 오르기 힘든 성벽을 기적처럼 올라간다. 청년의 방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떠나고 없다. 아내도 떠났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침실로 가 확인하지만 아내는 잠에 빠져 부드럽게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케텐은 불안감을 떨쳐버린 기쁨에 거의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에 빠진다. 그리곤   아무것도 증명된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정말 모호한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대체 무얼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해석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한 작품이다. 아마 도전을 요구하는 이 활짝 열린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하는 지는 두고두고 음미해보아야 할 숙제이다.

 

2-3. 통카 (Tonka)

 

이 소설의 테마는 정말 얄궂은 데가 있다.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 불분명한 지대를 거닐게 만든다. 남자 주인공은 이름 없이 다만 인 화학을 전공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다. 그는 빈민 출신의 통카를 대도시로 데려와 동거한다. 어느 날 이들의 평범한 일상에 균열이 생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의사진찰 결과 통카의 임신과 성병이 발견된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잉태의 시점을 재구성하였을 때 그는 오랜 출장 중이었다. 결국 통카의 임신과 성병은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 편의 작품 중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랄 수 있다. 그는 통카에게 진실을 말해 줄 것을 지속하여 요구하지만 통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과학도인 그에게 이 침묵은 의학의 진실을 부정할 가능성을 인정하기 어렵게 한다. 통카의 특징으로 별로 말하지 않는 소녀라는 말 할 수 없음이 곧 통카의 결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무질의 유머를 발견하는 것은 의외의 즐거움이다. 그는 한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 ‘마리아의 잉태만큼이나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침묵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확률과 기적’, 이성과 비이성의 갈등에 빠져 허우적대고, 믿고자 하는 소망은 의학의 높은 확률의 가능성에 휘청댈 뿐이다. 여기 다시 역사적 진술에 관한 무질의 멋진 신념이 드러난다. 잉태의 시점, 즉 역사의 재구성이란 사건 현장의 확인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실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의 현실이 사고 속에서의 현실보다 적어도 100년은 뒤져있다는 무질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다. 역사란 창안되는 것이지 수집된 자료들을 꿰맞추어 객관성이라 주장하는 것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역사란 인간 삶의 해석을 과제로 하는 학문이어야 한다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작가에 의해 자유로이 창작되는 세계야말로 완전한 세계라는 역사의식이 지닌 통념을 전도시키는 이 믿음의 수행이 무질의 문학이라는 것을 아마 가장 생생하게 실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일 것이다. 통카의 침묵은 단지 해석의 대상이 될 뿐이다. 주인공 화학도는 이성의 확실성에 집착하지 않고 통카의 침묵을 이해하려 한다.

 

무질은 이를 통해 그의 문학 논리인 사랑의 차원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그는 통카가 죽을 때까지 난 당신을 믿어요.”라는 말을 전하지 못한다. 평론가들은 통카의 침묵을 부정한 사실에 대한 시인이나 은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침묵은 침묵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무질의 의지였을 것이다. 그래야 무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무질의 냉철한 이성과 비논리적 대담성의 통합, 즉 이성과 비이성의 합일 추구는 그의 소설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는 문학의 환상적 정확성에 대한 독특함일 것이다. 아마 그의 대표작인 특성없는 남자에서 울리히의 목소리를 빌어 주장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 어떤 자아도, 그 어떤 형식도, 그 어떤 원칙도 확고한 것은 없다.”며 무한한 가능성의 감각을 열어놓으려는 의도의 실천을 체험하는 사뭇 새롭고 흥미진진한 문학이라 하겠다.



*두 번째 리뷰 참조- <지빠귀> 및 <생전 유고>

  https://blog.aladin.co.kr/729034103/14620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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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6
문진영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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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번에 일어나는 구원은 신의 일이겠지만, 인간들은 서로를 시도 때도 없이,

볼품없이 구해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 <작가의 말> 에서


 


성급한 더위가 여름을 재촉하는 조금은 못된 계절이다. 폭설 내리는 겨울의 시간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이 이러한 성급함과 못됨을 중화시켜주고, 아니 이 기운을 지그시 눌러주는 듯하다. 열이 잔뜩 오른 화를 다스리는데   창밖의 풍성하게 흩날리는 눈발은 아마 마음 평정에 제격일 듯싶다. 이 작품은 평온함, 따뜻해짐, 누군가와 같이함의 유대와 위로를 느끼게 해준다. 위에 인용한 작가의 말은 이러한 느낌, 아니 믿음의 반영일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란 무수한 갈등과 충돌을 헤치며 입은 상처를 어떻게든 봉합하고 다스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설은 죽음과 삶, 떠남과 떠나지 못함의 이 대조적 현상을 아주 소소한 마음들이 연결되어, 추운데도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체험토록 이끄는 듯하다.

 

소설은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수평선도 지평선도 점차 희미해지다 결국에 사라지듯그렇게 영혼의 상처들이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함의 나눔에 섞여 희미해지고 어느 샌가 평온함이 마음에 스며드는 그런 이야기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해변 전체가 마치 거대한 고물상처럼 퇴락한 바닷가 동네다. 이 공간을 중심으로 다섯 서사가 서로 물려들고 그 경계가 희미해지며 결코 뒤섞일 듯하지 않은 세상 모든 인간들의 고독과 상처가 바로 그 볼품없는 인간들에 의해 위로받고 평온을 되찾으며 삶을 지속할 동력임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서핑을 하면 (Ding)’나는 건 당연한 거니까. .....

그건...내가 오늘도 파도에 뛰어들었다는 증거니까.” -85

 

산다는 것은 세상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살아있음, 무언가f를 하고 있음으로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손상은 부정(否定)이 아니라 생()에 대한 긍정의 표시일 것이다. 떠남도, 떠나지 못해 떠남을 상상하는 것도. 소설은 이렇듯   퍽 다정한 침묵”,  “배고프지 않음”,  “폭설을 견딜 힘의 정체를 통해 위로와 평온을 선사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의 남루함, 타인의 죽음을 일종의 가십거리로 삼는 기만과 위선의 천박함을 통해 이 사회의 몰지각과 부도덕성의 일상성을 넌지시 풀어 놓기도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벌금 몇 백 만원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컨테이너 숙소 때문이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이 불에 덴 것처럼 쓰라림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네 일회성 연민은 사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지만, 귤 한 알의 건넴, 따뜻한 한 그릇 홍합 국물, 단지 함께 해 줄 수 있음으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 생에서 아주 잠시라도 닻을 내린 기분, 믿음의 안식이 된다. 이 소설의 따뜻함을 상징적으로 순환하는 귤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다시금 또 다른 사람으로 이어지며 세상의 온기를 퍼뜨린다. 타인을 이해해보려 애쓰는 인간들이 있는 세계, 누군가 내민 것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의 평온함이 전편을 나지막하게 흐르며 순백의 눈송이가 되어 찬란하게 흩날리는 존재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나라면 이 소설의 제목을 상황적 표현인 딩 보다는 고유한 결정체인 '눈송이들'로 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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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와 인간 - 가면과 현기증 (Le masque et vertige)
로제 카이와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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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가 일상과 뒤섞일 때 그 사회는 부패한다!

- 주술과 홀림의 정치, 문명 퇴행의 표상에 대해서

 

 

이 책은 놀이를 출발점으로 하는 사회학의 기초를 놓고자 하는 작업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 시간 동안 놀이를 단순하고 무의미한 어린이 같은 기본 놀이로 간주해왔고, 고작 심리학이나 생물학적 기반에 의한 교육 또는 훈련 역할정도의 연구가 고작이었으며, 지금의 현실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지배 엘리트의 은폐된 어떤 의지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놀이에 대한 문화적 해석의 장을 전면적으로 열어놓은 요한 하우징거1938년 발표된 호모 루덴스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로제 카이와의 이 저술은 아마도 놀이에 은닉된 문화적 사회적 가치를 드러낸 지금까지의 가장 완결된 연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을 새삼 주목하게 되는 것은 놀이의 사회문화적 가치, 즉 현실 세계의 각종 제도와 규칙이 어떻게 놀이와 상호 작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며, 나아가 놀이는 한 문화의 도덕적, 지적 가치를 나타내는(58)” 중대한 표상이라는 점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의 지배적 놀이는 그 사회 실체의 얼굴이며, 야만과 문명 사이의 위치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저술은 바로 2023년 한국 사회의 문명적 위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수없이 다양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놀이가 무엇인지부터 아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로제 카이와 놀이를 규정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과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한정된 분리, 격리된 활동이라는 것, 그리고 결과나 놀이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지 않아야 하고, 재화나 부 같은 어떠한 새로운 요소도 만들어내지 않는 비생산적 활동이며, 규칙(약속)이 있는 활동이거나 허구적 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는 놀이란 즐거움 그 자체인 것이라는 점에서 언제든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자유로운 것이며, 일상생활과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놀이를 위한 별도의 장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개념 자체에서 당연히 도출되는 것이다.

 

특히 비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놀이가 생산에 참여하게 되면 실생활의 경계가 무너져 더 이상 놀이가 아닌 것이 되며, 놀이라는 순수한 즐거움을 파괴하게 된다. 아마 놀이의 가장 중요한 활동 요소일 텐데 필수적으로 해당 놀이의 절대적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과 이에 대한 준수가 없다면 놀이는 놀이로 수행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이는 모두 규칙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규칙 없는 놀이도 있다. 자유로운 즉흥적 발상을 전제로 하는 인형놀이, 병정놀이, 기차놀이처럼 역을 맡는 즐거움으로 인해 노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감정이 규칙을 대신하는 놀이로서 이 감정(허구)이 곧 규칙인 놀이이다. 여기서 어떤 놀이든 오직 규칙을 지니든가 허구를 지니든가 둘 중 하나를 지닌다는 점이다. 둘 모두를 지닌 놀이는 존재 할 수 없으며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특징들, 특히 규칙과 허구의 놀이를 장황하게 서술한 이유는 이것이 곧 특정 사회의 문명의 위치를 가늠하는 중대한 분류 개념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놀이가 한 사회에 만연하는 경우 그 사회의 현실은 공정성이나 평등성, 민주주의적 의식의 쇠퇴, 사회적 불안정성의 증대를 예측케 하는 지표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놀이의 역할에 따른 분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카이와는 모든 놀이를 경쟁, 우연, 모의(模擬), 현기증’, 네 개의 역할로 분류하고 있다. 이를 각기 아곤(Agon; 시합,경기), 알레아(Alea; 요행,우연), 미미크리(Mimicry; 흉내,연기,모의), 일링크스(Ilinx; 현기증,홀림,소용돌이)로 명명한다.

 

사실 오늘의 세계와 같은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세습계급을 불식시키며 주술적이고 열광적 제의(祭儀) 사회를 벗어난 것은 불과 1세기도 되지 않는다. 물론 서구 사회의 경우 계몽주의가 태동한 17세기를 전후한 4세기 남짓 되겠지만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30년 전까지 암흑 사회였다고 할 수 있으니 최근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불과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허구적인 환상에 의존하는 혹세무민의 사회였음을 의미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놀이의 네 역할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놀이(Jeu, Play)의 네 역할(아곤에서 일링크스까지)

 

아곤(Agon) 적절한 연습, 부단한 노력, 승리에의 의지, 지속적인 주의를 요구하는 놀이다. 스피드, 인내력, 체력, 기억력, 재주와 같은 개인의 능력이 경쟁하는 놀이로서 체스, 당구, 축구 등등을 열거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경쟁, 시합 놀이는 우선 공정하고 평등한 기회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불공평성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규칙으로 점철되어 있다. 아이들의 여러 참을성 놀이는 아곤의 초기 놀이 양식일 것이다. 숨 오래 참기, 눈 깜빡거리지 않기 등 상대방에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는 순수한 개인 능력 드러내기 놀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알레아(Alea) 상대방을 이기기보다는 운명을 이기는 것이 문제인 놀이다. 의지를 포기하고 운명에 몸을 맡기고 숙명의 결정을 수동적으로 또 고의적으로 기다리는 놀이. 이 놀이의 본질은 노력과 성과에 대한 오만불손한 경멸이 자리잡고 있는데, 가혹한 현실 세계에서 노력과 능력으로 도달 할 수 없는 성취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놀이의 중요한 점은 참여자가 무릅쓴 부담과 위험에 엄밀하게 비례한 보상처럼 위험과 이익의 균형을 위한 주의가 기울여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현실에 없는 순수하게 평등한 조건의 인위적 조성이다. 우연만큼 평등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이에서 절대적 평등의 실현 규칙은 불가능하다. 아곤의 경우 먼저 시작하거나 나중에 하는 것이 유리하기도 하며 육상이나 빙상 트랙경기에서 안과 바깥쪽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물론 이를 상쇄하기위해 교대로 차지토록 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평등을 확립하려 한다. 복권같은 출생의 우연에 의한 환경적 우열, 체급별 경기의 체중의 불가피한 차이 등 완전한 절대 평등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알레아는 우연이라는 평등성으로 이를 보완한다.

 

미미크리(Mimicry)는 허구적 닫힌 세계를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한 놀이다. 가공의 환경 속에서 가공의 인물이나 사물이 되어 그것에 어울리게 행동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놀이다. 집에 있는 의자를 죽 늘어놓고 칙칙폭폭 기차놀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이 기관사인 척 하며 논다. 또는 엄마, 요리사, 군인, , 비행기, 자동차를 흉내 내거나 연기하며 논다. 어른은 가면을 쓰거나 변장을 하고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숨기고 실제의 인격을 해방시켜 방종의 분위기를 이용하며 논다. 미미크리는 곧잘 아곤과 결합하여 구경거리가 됨으로써 즐긴다. 운동선수, 영화배우, 아이돌스타 등은 능력 경쟁을 통해 관객과 청중에 과시함으로서 즐거워한다,

 

끝으로 일링크스(Ilinx) 일시적 지각의 안정을 파괴함으로써 기분 좋은 패닉을 즐기려는 목적의 놀이다. 몸을 빙빙 돌려 쓰러지거나 비틀거림을 즐기는 것, 높이 올라가는 그네, 광란적 회전을 즐기는 놀이를 들 수 있겠다. 혼란과 패닉을 즐기는 이 놀이는 고대 주술사의 광란적 환상의 몸놀림을 연상시킨다. 설명이 길어졌지만 이들 놀이의 역할과 그 수행을 앎으로서 이들과 현실 세계의 제도와 규칙, 사회의 특성을 대응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 놀이가 인간의 강력한 본능들의 형식이며, 관념적이고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상생활과 떨어져 놀이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아곤은 페어플레이의 규칙 존중과 타고난 탐욕의 억제를 습관화 시킨다. 또한 알레아는 현대사회의 생존 경쟁이 요구하는 부단한 긴장과 경쟁의 열위의 체념을 보상하며 개인과 사회적 긴장의 배출구 역할을 한다. 미미크리는 자신의 인격에 잠시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서 공상과 환상을 즐기며 병적 일탈을 막으며, 일링크스는 기억의 부담, 책임의 고통,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일시적 도피 수단이 된다. 이렇게 이들의 역할에 따른 기능을 해석하다보면 놀이라는 것이 사회적 순화, 배출, 훈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일링크스에 분류되는 놀이가 만일 오염되거나 타락해서 더 이상 놀이의 범주를 벗어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는 지 생각해본다면 이 착란과 혼란의 추구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 상습화되는 것이다. 아마 취함과 현기증 속에 있는 인간은 개인 자신은 물론 주변을 황폐화 시킬 것이 다. 다시 말해 놀이는 본능을 억제하며 제도적 존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며, 이들 놀이를 부패, 타락케 하는 요인, 또는 사람, 권력의 침범은 질서와 규칙의 파괴를 낳게 될 것이다.

 

놀이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사회적 표상으로서의 놀이

 

놀이는 인간에게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 할 수 있게 해주는 사회적 순기능의 역할로서 작동한다. 격리된 놀이에 따른 장소, 시간적 한계, 그리고 규칙성과 생산의 부담 없는 비생산성의 해방감과 자유로운 진퇴, 실현 불능의 허구를 통한 감정의 우회와 일시적 분출의 창구로서 현실 사회의 가혹한 환경을 차단하고 휴식과 즐거움이라는 삶의 가능성을 조성하며 제도와 정치사회의 불충분성을 보완하는 균형추가 된다.

 

그런데 놀이가 일상으로 오염되기 시작하면 놀이의 성질 자체가 손상되고 놀이는 놀이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즉 놀이가 현실 세계와 뒤섞이면 부패가 일어난다. 즐거움이었던 것이 고정 관념이 되고, 도피였던 것이 의무가 되며, 기분 전환이었던 것이 집착, 강박 불안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놀이는 현실에 감염되어 부패가 일어난다. 이 부패에 주목하게 되는데, 바로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을 해석하는 하나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 정신에 의해서 더 이상 누그러지지 않는 대립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부패가 나타난다. ‘놀이 정신을 다시 반복 서술한다면 바로 정정당당한 규칙의 존중을 비롯한 모두에서 언급한 놀이의 여섯 특성과 같다. 놀이 정신은 곧 사회 제도가 반영하고 있는 원천이다. 작금의 한국정치사회는 이 놀이 정신이 훼손, 파괴됨으로써 도덕적, 사회적, 법률적 구속의 틈이 벌어졌다. 이 균열로 인해 경쟁의 선천적 난폭성, 즉 '자신의 반대자는 철저히 도륙한다'가  사회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규칙이 존중되지 않음으로서 폭력과 잔악성이 사회를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탐욕과 폭력의 억제 습관을 붙이는 교화적 역할을 수행하던 놀이의 정신이 파괴되었음은 하나의 현실 사건만으로 입증이 충분하다. 아곤(경쟁, 규칙존중)의 타락은 심판과 판정이 모두 무시되는 곳에서 시작된다.(81)”고 한다. 검경 수사권 분리와 일제 징용공 보상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 무시하며 권력 자신만의 독단을 내세우는 현 정권의 타락상은 적확한 판박이 사례라 하겠다.

 

인류 사회는 미미크리와 일링크스가 인간사회를 지배해온 끈덕진 야만의 역사시대를 벗어나는 데 거의 모든 인류의 시간을 보냈다. 주술과 미신, 환상과 공상의 허구 세계, 이를 벗어나 아곤과 알레아의 세계, 다시 말해 규칙과 기회의 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문명사회로의 진보를 이루어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회를 표상하는 재능과 노력의 산물을 겨루는 놀이들과 평등 실현을 보충하려는 제비뽑기, 공공 복권, 슬롯머신 등 우연 놀이가 현대 놀이의 중심을 이룬다. 사회가 제아무리 평등을 지향한다고 하지만 소질이나 악착같은 노력, 끈기있는 근면에도 획득할 수 없는 보상의 사회임을 부정 할 수 없다. 출생의 우연은 끈질기게 능력 경쟁을 방해하며, 차지한 기득권은 장벽을 세우고 사다리를 걷어차 기어오를 수단이나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인간 사회의 오래된 비극적 실상이다. 우연 놀이는 이러한 현실을 보상한다.

 

이처럼 문명으로의 이행은 일링크스와 미미크리의 우위를 점차적으로 없애며 대신 아곤과 알레아, 경쟁과 우연의 쌍을 사회관계의 우위에 놓는 것이다. 이 세계는 능력과 운 사이의 불안정하며 무한히 변하기 쉬운 균형 위에 근거를 둔 불안정한 곳이다. 때문에 출생의 우연을, 계급 특권을 효과적으로 없애버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이것의 투영이 아곤과 알레아다. 아곤의 시합에서 이길 수 없는 공정 실현 불능의 인간 사회에 무차별적 은혜인 우연놀이를 통해 마침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다시 재용출(再湧出)되고 있다. 흥분의 즐거움, 환상의 즐거움, 충격의 즐거움, 홀림과 취함의 세계로 회귀하려 한다. 일링크스가 놀이려면 한정된 시간의 추구여야 한다. 이것이 한정되지 않고 지속되면 혼란과 광기로 안전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한편 미미크리, 흉내와 가면 놀이가 놀이기를 멈추고 주술과 미신으로 실생활과 섞이기 시작하는 사회적 부패가 정치의 장에서 행해지고 있다. 놀이의 이러한 병적 일탈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권력은 홀림과 취함을 지속하려고 매양 알코올 타령이고 왠 주술사가 국가 행정, 외교, 국방, 경제를 훈수하고 있다. 놀이는 풍부한 문화적 창조성을 설명해 줄 뿐 아니라 그 사회의 얼굴, 스타일, 가치를 보여주고 이해하게 해준다.(107)”고 했다.


이러한 표상들은 2023년의 한국 사회가 대략 30년 전의 망상적 주술사회, 불평등과 불공정이 만성적으로 날뛰는 야만적 세계로 퇴행하고 있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게다가 우중(愚衆)은 대중음악 스타와 스포츠 챔피언 등, 이들 필연적으로 단명(短命)하는 신()들을 숭배하는 일링크스 놀이에 심취해 화장법, 식사요법, 옷 입는 방식...까지 모방, 흉내 내며 동일시하려는 일반적 욕구로 대리 만족에 방목되고 있는지도 모른 체 문명과 정치적 퇴행에 일조한다,

 

출생과 실력(재능)의 싸움은 엉뚱한 교체가 일어나지 있는 이상 대다수의 군중은 결코 최상의 지위를 차지 할 수 없다. 여기서 일링크스 놀이, 즉 벗어나야 하는 환상의 대리라는 속임수가 생겨난다. 상상체험, 이는 알코올과 함께 타락한 사회, 부패한 기득권의 불안을 위한 평형추로 쓰인다. 제한된 장소의 한시적 체험이 아닌 일상과 뒤섞인 놀이는 놀이의 부패와 타락으로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놀이에서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카이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규칙을 조롱하거나 규칙에는 근거가 없다고 말하면서 거부하거나 경멸하는 자이다.(262)”라는 것이다. 법 위에서 행위하려는 불손한 인간들.

 

우중과 함께 이 사회의 가장 악질적인 자들에게 권력이 주어졌다. 무수한 희생과 노고 끝에 축적한 귀중한 사회적 제도와 윤리적 역량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있다. 이 몽매한 권력은 왜 낮은 소득 계층의 사람들에게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회의 균형성과 안전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보다 문명적인 공정의 지향인 것을, 공정과 자유를 추한 입으로 뱉어내지만 놀이의 정신인 자유와 공정, 규칙의 엄수, 정정당당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알지 못한다.

 

패자를 위로해주고 규칙있는 경쟁이 상대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능력의 발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능력도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주술과 홀림의 정치를 하는 권력의 퇴행성이 이 오래된 책을 다시 읽게 했다. 이 책의 부제는 가면과 현기증이다. 가면 뒤에 숨겨진 본래의 얼굴을 내밀고 민중과 마주하여 진실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 이 사회에 아곤과 알레아는 위축되거나 사라지고 일링크스와 미미크리가 횡행한다는 것은 곧 문명 퇴행의 지표이다. 놀이를 사회학의 중요 주제로 연결한 이 역작에 이은 정치학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있다면 어쩌면 놀라운 저작이 탄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한한 영감을 지펴내는 위대한 걸작이다. 호이징가의 호모루덴스를 같이 읽는다면 더욱 알찬 지식 여행이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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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김현창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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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生)의 지극한 열망의 기록 

나는 먹는다그리고 존재한다Edo, ergo Sum!

 


인류 역사 내내 인간을 괴롭혀 온 최고의 물음, 즉 인간의 존재론적 의문은 정말 끔찍하다고 할 정도로 반복되지만, 당연히 충분하고도 실질적인 문제로서의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존재를 무시당하거나 존재 자체를 외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며,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 앞에서 초연해지기가 너무도 어려운 까닭일 것이다. 이것은 수많은 종교를 낳고 즐비한 철학적 사변을 생산해왔지만 어느 것도 인간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더구나 인간의 존재적 실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지면 그것은 생에 대한 허무와 파괴로 이어지곤 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우나무노(Miguel de Unamuno; 1864~1936)’ 의 이 작품은 바로 이 존재의 불멸성에 대한 회의와 공허함을 참을 수 없어 이를 해명하고자 한, 생의 열망을 살해하는 계몽주의적 이성과 영혼 불멸과 같은 육체 소외에 대한 위선적 사변을 공박하기 위한 소설(Novela) 혹은 스설(Nivola)이 되어야만 했이다. 이 작품이 온전히 소설로 명명되지 않고 스설이니 수설이니 하는 정체불명의 범주로 읽히는 것은 아마 두 가지 이유에서라 할 것이다.

 

첫째는 형식에 있어 저자인 우나무노가 소설 속 대화에 직접 침입하여 소설 속 인물로서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과 대화하며 그 생에 개입한다는 의미에서이며, 둘째는 철학적 사변의 요소가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측면이다. 물론 이 작품은 분명한 서사가 있고, 매우 문학적이라 할 예술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이야기 속에 몰입하는 데 어떠한 지장을 받지도 않을 만큼 흥미롭기도 하다. 서사를 이루는 스토리는 다분히 통속적이기까지 하다. 남자의 일방적인 사랑을 이용하여 그 감정을 교활하게 자신의 또 다른 비천한 사랑의 도피를 위한 수단으로 기만, 배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남자가 끝내 자살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압축된 줄거리로 보면 거창하게 존재론을 들먹이는 수사가 한껏 과장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지만, 주인공인 남성 아우구스또란 인물의 여성 에우헤니아를 향한 사랑의 관념이 자기 영혼의 실체가 자욱한 안개 속의 불분명성에 휘감겨 존재의 실재성을 좀처럼 체감하지 못하던 인간의 영혼을 불러 깨우는, 다시 말해 자기 존재의 깨달음의 시작을 가져왔기에 예사스럽지 않은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머물던 존재를 비로소 구체화시켜준 사건으로서 사랑이다. 지나가던 여인의 눈빛이 우연히 한 남자의 내면세계를 내밀하게 율동케 한 것이다.

 

이 상황을 다시 관찰해보면 사랑이 에우헤니아를 유발한 것이라는 표현처럼, 이미 아우구스또라는 인물에게는 우연을 빙자해 구체화하여 산출할 여성 일반에 대한 추상성을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순수한 하나의 관념, 허구의 실체가 실재화되어 유령처럼 살던 인간에게 살아있음을 선사한 것이다. 아우구스또는 에우헤니아가 부모가 남긴 빚 때문에 유산으로 남겨진 부동산이 부채로 동결되어 피아노 교사로 그 빚을 탕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의 존재를 깨운 여성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앎에도 부동산을 매입하여 여자가 안은 부채를 탕감하고 동결된 연금의 수령까지 재개 되도록 한다.

 

여인의 눈빛을 영적인 광명이라 생각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사랑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지 묻고 다니며 자신의 사랑을 확인하기조차 한다. 반면 여자는 피아니스트로 불리지만, 이는 혐오스러운 생계로서의 직업일 뿐, 여자에게 음악이란 지겨움이며, 끝나지 않을 영원한 족쇄이다. 또한 여자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간략하게 묘사할 수 있기도 하다. 에우헤니아는 문간의 비좁은 방에서 자기 애인의 사랑의 평정을 자극하고 있었다.”라고. 건달 애인과 음란 행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 문장은 아우구스또의 사랑이란 이미 불모성(不毛性)을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더구나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마치 굶주린 개의 눈초리 같다고, 눈으로 구걸하는 작자라고 하기까지 한다.

 

여자는 아우구스또가 종결한 자신이 안은 빚을 해결한 조치에 대해 자기 육체를 사려는 파렴치함이라고, 결혼을 강제하려는 악의라 주장하며 선의를 거절하고, 그 의도를 매도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에 대한 심리 실험을 통해 여자를 알고자 시도한다. 이때 여자는 자신의 건달 애인으로부터 아우구스또와 결혼하여 부채가 해결된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고 자신과는 계속해서 연인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자신과 함께 할 하나의 대안임을 제시받는다.

 

느닷없는 어느 날 여자는 아우구스또의 집을 찾아 와 부동산과 연금 수령권을 받아들이겠다고 결혼 승낙을 은연히 암시하며 유혹한다. 아우구스또는 여자의 제안을 일순간 거절하지만 친구 빅또르와의 대화로부터 결혼을 않는 자는 심리적으로 여성을 체험 할 수가 없으며, 여성 심리학의 유일한 실험은 결혼이며, 실수나 실패에 대한 구제를 용납지 않는 결혼에 대한 이의에 대해 여하한 진리의 실험도 구제는 없다고 후퇴의 길을 열어놓게 되면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는 말에 따라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이 진리 실험인 결혼 준비로 한껏 들뜬, 그리고 결혼식 일자가 임박했을 때, 에우헤니아는 아우구스또가 증여해준 재산을 챙겨 건달 애인과 함께 유유히 도주한다. 구제는 없다. 아우구스또에게 남겨진 거대한 수치감, 조롱! 웃음거리가 됐다는 의식에 의해 영혼의 파괴가 시작된다. 조롱당함으로써, 이 존재에 대한 부정은 그의 독백마저 무너뜨릴 만큼 고통을 새긴다. 부정당한 존재는 존재를 방어하기 위해 이 조롱의 흉포한 체험이 라는 존재를 느끼고 만져볼 수 있는 실재적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게 한 사건이라며 합리화한다.


 

이처럼 이성(理性)은 인간의 감정, 생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생의 적임을 드러낸다. 아우구스또의 이 냉소적 이성에서 자기기만의 위선을 읽게 된다. 그럼에도 자신의 내면을 온통 삼켜버리는 고통은 존재와의 결별, 자살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 빅또르는 고통당하는 너 자신을 삼키라고, 자살을 하나의 방법으로 권유한다. 자살이란 존재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고 존재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개똥철학의 유명한 공리가 등장한다. “AA에 동일하다, 이 말은 정말 아무것도 말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바로 AA라는 사실 때문에 가장 진실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철학의 논리적 이성, 이 사변적 이성은 얼마나 인간의 생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진실은 존재 부재이다? 그러니 자기 살해의 죽음이 순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아마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 될 것 같은데 자살을 결심한 아우구스또는 자살을 결행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작가와 상의를 해보고 싶은 생각으로 살라망까에 사는 저자 우나무노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 우나무노는 소설 속으로 침입하여 자신이 창조한 등장인물인 아우구스또와 대화를 나누는 소설 속 인물이 된다. 아우구스또 자신의 처분권을 가진 창조자인 우나무노와 대화해 봄으로써 불운의 원천인 자기 존재와의 결별을 최종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 황당해 보이는 장면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대화로 읽게 되는데, 이 지점까지 썼을 때 작가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의 처리에 대해 결정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며 그는 더불어 상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음에 착안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대화는 서사이론에서도 빈번하게 인용되어 잘 알려져 있는데, 소설 속 인물인 아우구스또는 저자 우나무노의 환상의 산물로서 허구의 실재로서 존재할 뿐, 즉 한 인간의 기록을 위해서 만들어진 산물 이상이 아니다. 따라서 죽이고 살리는 것은 작가의 마음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아우구스또의 반론이 바로 유명한 문장이다. 허구의 실재도 내적 논리가 있으며, 이는 작가도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에 더해 그는 실로 비수같은 지적을 던진다. 더욱 어려운 일은 작가들이 상상한다고 믿는 인물들을 잘 안다고 하는 것만큼 어려운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우나무노는 이 지적에 창조주로서의 불안을 감지하고 아우구스또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아우구스또는 살아야 함을 하소연하지만 작가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이 대화에서 우리 독자들은 아우구스또의 처절한 생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읽게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우구스또는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지연시키기 위해 애쓰며 자신의 집에 도착한다. 우나무노는 아우구스또에게 허구의 존재,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우구스또가 이 말에 집착하는 까닭은 살아있음을 연장하려는 몸부림의 생각임을 해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으니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실재이니 죽을 수 없기에 자신은 불멸이다! 이 모든 것, 허구의 실재라는 생각을 하는 자신은 불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말이다.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거림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는 먹고 있다. 먹고 있는데 살지 않은 것이 될 수 없고, 그러므로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존재한다. Edo, ergo Sum! 나는 먹는다. 그리고 존재한다!’ 육체의 철학이다. 이 비극 앞에서 웃음이 나온다. 웃음은 비극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했던가? 상상력을 자극하여 사물의 현실을 직시토록 유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말이 바로 이러한 예를 두고 한 말 같기만 하다. 죽음을 알아차린 육체는 맹렬한 식욕을 보이며 자기를 방어한다. 인간은 영혼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존재는 육체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래서 아우구스또는 세 가지로 사망한다. 의사는 두뇌와 심장과 위장이 동시에 종합적으로, 온 육체로 사망했다고 최종 진단한다.

 

이 작품은 인간을 추상적 존재로 사유하는 이성주의가 존재를 제거한다고 비판하는 반()이성주의 산물이랄 수 있다. 작가는 생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살과 뼈를 가진 사람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내밀한 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간이란 정신적 영혼의 존재라는 사변을 개 같은 수작, 위선이라고 보았던 듯하다. 존재를 의심케하는 예술의 소임을 다하는 작품이다. 이 의심 속에서 우리 인간은 삶의 의지를 더욱 강렬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 세계에는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비대해진 자아로 거들먹거리는 인간들로 얼마나 어지러운가?

 

존재의 소멸로 돌진케 하는 죽음의 사유없는 인간에겐 냉소의 소용돌이 외에는 없을 것이다. 메마른 감성이야말로 바로 존재를 부식시킨다. 오늘의 과학기술 최전선의 전사들은 뇌 스캔이 곧 동일한 자아라고 주장하며 인간 총체성으로서의 육체를 부정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으로부터 생의 열망을 소진시키고 육체로서의 존재는 언제든 처분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이 작품이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질만을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반이성주의적 표방은 오늘 우리네 삶의 현실을 다시금 주의 깊게 성찰케 한다. 소설에는 실로 많은 물음들과 대화가 있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과 출생에 대해서, 질투와 증오와 배신과 고통과 슬픔이라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또한 살과 뼈에 대해서. 이 한 편의 소설 혹은 스설에서 실로 다채로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생의 사유들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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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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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소설의 제목을 내 취미는 타인의 사생활이라고 읽는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난 후의 나름 이해한 결과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위층에 사는 네 아이를 둔 여섯 가족을 이웃에 둔 홀로 사는 여자다. 위층 2302호에 사는 은협의 목소리가 서술자인 2202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된다. 서술자의 시점 선택에서 작가의 깜직하고 발칙한 재치를 읽게 되고, 호흡 짧은 문장들의 경쾌한 질주와 촘촘하게 배치되어있는 암시의 문장들, 그리고 우리네 흔한 일상사를 흥겨운 한바탕 게임으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들에 언제 빠져들었는지 모르게 책장을 거듭 넘기게 되는 소설이다.

 

은협은 네 아이에 치이고 여느 서민들의 살림처럼 경제적 압박에 푹 삶아진 듯한 여인이다. 화자의 목소리를 신뢰한다면 은협은 자신의 삶과 이해관계가 얽힌 타인에 대한 불신과 피곤함, 짜증이 온 몸에서 발산되는, 그래서 때론 그 지친 현실로 인해 삶의 방향 감각을 잃고 넋이 나가기 일쑤인 사람이다. 갓난 아이, 유치원생 여자 아이, 연년생인 초등생 남자아이 둘, 왠지 나도 정신이 사납다. 2202호 여자는 이런 은협의 갓난아이를 맡아 돌봐주고, 유치원생 소연의 등원을 돕는가하면, 남자 아이들의 사건에 호출되어 은협 대신에 학교에 출석하여 해결사가 되어주기도 한다.

 

나아가 은협의 내밀한 사생활에 개입하여 은협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기도 하며, 심지어 전세 계약 만기로 인해 집을 비워달라는 은협의 집주인에게 대신 협의 전화를 맡기까지 한다. 여자는 자신을 자칭 임시 은협이라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들, 당사자인 은협의 목소리가 아니라 서술자인 2203호 여자의 목소리를 통해 발설되고 있다는 것은 은협의 사생활을 비롯한 삶의 전모를 꿰뚫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야심찬 복선이라고 생각되는 데, 루브탱 15센티미터 검은색 펌프스 에피소드다. 갓난아이 배냇 이불을 삶다가 태워버려 이불장에서 대신할 것을 찾다가 남편의 외도가 의심되는 물증을 손 에 쥐게 된 사건이다. 좁아터진 전셋집에 여섯 식구가 바글거리는 가정이 휴식처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남편의 취미이자 사생활이 발각되는 해프닝이다.

 

서술자의 화법도 아주 얄궂다.  여섯 식구가 사는 은협에게 같은 규모의 집에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해 이웃으로서 지니는 호기심은 당연하달 수도 있다. 은협을 잘 알고 있는 여자는 항상 상대가 스스로 답을 지닌 질문을 하도록 함으로써 극히 경제적 답변만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회피한다. 결국 서술자의 목소리로 표현되는 은협과 그녀의 남편 보일, 아이들의 말과 사건의 묘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소설을 구성하는 여러 일화들을 전달하는 여자의 화법이나 차림새와 처세는 독특하고 튀는 데가 있어 주의 깊은 독자는 재미에 빨려들면서도 언짢고 불편한 느낌의 근원을 찾게 된다. 국민연금 수령노인이라는 별난 연령기준의 사용, 검사의 입을 빌려 발설되는 검경수사권 분리와 검찰정권에 대한 희망의 변, 서울시장 자살에 대한 죽어 마땅한”, “죽는 게 우월 전략과 같은 동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몰() 윤리적 언사,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의 제도적 틈새를 악용하는 무용화의 생각 등, 정치 시사적 소재들의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목소리이다.

 

물론 신뢰할 수 없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어 발설되고 있으니 서사 흐름의 한 요소로 수용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이는 소위 내포저자로 추정되는 이의 부당한 소설 내 개입으로 읽힌다. 나는 내포저자(추정되는 소설 속 저자의 목소리)는 서술자가 어린 유치원생 소연에게 죽음을 설명하며 목을 긋는 몸짓을 하는 장면들처럼 서술자의 본래 성품을 독자가 가늠하게 해주듯 서사의 진전과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혹시 곡해하고 오독하는 것인가?

 

아마 이 소설의 주제어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대중의 집단적 착각, 즉 자신의 기억력과 판단력을 의심하는 대신에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우매함을 지적하는 서술자의 목소리가 있다. 오직 서술자인 여자 단독의 목소리에 다중적 의미의 표현을 발설케 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의심하지 않는 은협의 착각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고 틈틈이 묘사된 시국에 대한 총평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침 전세입자 사기 사건이 나라를 온통 어수선하게 하고 있는 즈음이다. 이 소설의 주요 제재이기도 한데, 자신이 꽤나 약삭빠르고 현명하게 세상을 판단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작금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인식할 수 있다면 서술자 표현의 방점이 어느 곳에 찍히고 있는 것인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희극적 드라마들이 모여 하나의 비극을 완성하고 있다. 은협은 결혼 생활의 위기에 직면케 한 남편을 향해 이렇게 내뱉는다. 사기는 걸리면 친 사람 잘못, 안 걸리면 당한 사람 잘못이래요.”라며 자신의 결혼은 사기결혼과 같다고 푸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현실은 사기 친 놈의 잘못이 아니고 걸린 놈이 봉변을 당하는 실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도덕적 책임이다.

 

이 도덕적 양심을 팔아먹은 인간에 희생당한 세입자들, 검찰을 비롯한 정치배들에 농락당한 시민들 또한 자기 판단에 대한 의심을 소홀히 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이 결말로 치달으며 들려주고 보여주는 장면들은 이 책임의 규명일 것이다. 그래서 비극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나게 재미있다고 소설이 은연히 발설하는 의사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경쾌함 속의 진지함과 속 깊은 말들이 산재한 뛰어난 소설이다. 눈 밝은 독자들,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우리들의 자화상이 보이게 될 줄도 모르겠다.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독자들은 당황과 분노, 자신의 어리석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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