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그게 최선입니까? - 윤리가 과학에게 묻는 질문들,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이음스코프
강호정 지음 / 이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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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V / 이음 2번째 리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학'이 주는 편리함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만능주의'에 기대어서 우리가 마주한 모든 문제를 '과학'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을 정도로, 어쩌면 그 '믿음'이라는 것을 넘어 '종교적 맹신'이나 '광신도'처럼 굴면서, 과학에 기대어 산다. 그렇다보니 때로는 '과학'이 가져온 새로운 문제마저도 '과학'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보통은 문제점이 발견된 '주체'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고 새로운 '대안'을 내세워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 마련이데, 현대의 과학을 대체할 새로운 것이 마땅하지 않기에 문제를 발생시킨 과학을 '비과학'으로 내몰고, 대안으로 내세우고 문제점을 해결한 과학을 진정한 '과학'으로 새롭게 세우는 일이 당연시 된다. 그만큼 오늘날의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위치는 견고하다고 놓고, '과학자'의 위치도 견고한지 되물어보자. 우리는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신뢰를 보인다. 물론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해서 '기존의 과학'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과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차치하고서 말이다. 그렇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과학'과는 달리 '과학자'들에게 보내는 신뢰도는 완벽한 신뢰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면 '과학자'들은 과학을 행하는 사람이기에 꽤나 신뢰도가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들 자체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미친 과학자'를 공상과학소설 속에 등장시켜 지구멸망, 인류멸종을 부추기는 '지구정복'이란 허황된 꿈을 꾸는 과학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때론 인간이 아닌 '과학의 결실'로 만든 '인공지능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서 허황된 꿈, 아니 로봇에게 어울리는 '엉뚱한 알고리즘의 결과'로 지구환경을 깨끗하게 되돌리기 위해서나, 하나 뿐인 지구를 멸망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인류멸종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미친 로봇'이 등장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때에도 우리는 '과학'을 맹신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과학이 완전무결하게 인간에게 이롭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은 과연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느냐고 말이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과학에게 '최선입니까?'라고 되묻고 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과학자의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지 않는다. 또 '과학적 수행'이라면 무조건 옳은 절차이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고 믿지도 않는다. 이렇게 과학적 판단과 수행의 결과물이 늘 '윤리적 문제'를 아무런 문제도 없이 통과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논란이 있었을 때에도 일본정부는 '과학적 검증'을 강조하며 완벽하게 걸러진 방사능 오염수는 깨끗하기 때문에 방류해도 안전하다고 발표를 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를 비롯해서 수많은 나라에서 '의문'을 내비췄고, '우려'를 표명했다. 왜냐면 현재의 '과학기술'로 아무리 완벽하게 '방사능 오염수'를 걸렸다고 하더라도 방사성원소인 '삼중수소'는 거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정부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방류하는 오염수는 안전하다면서, 이는 '과학적 검증'을 거쳤기에 오염수가 아니라 '처리수'라고 표현해야 맞다면서 끝끝내 방류를 해버렸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방류를 할 계획인가? 일본정부의 발표대로라면 2035년까지란다. 그때에는 '삼중수소'마저 완벽하게 걸러낼 수 있는 '과학적 기술'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안전하지만 그때에는 더 안전할 것이며, 더 나아가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핵연료봉을 해체할 수 있는 과학기술도 개발완료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문제점을 완전하게 해소할 것으로 기대한단다.

이런 일본정부의 발표에 당신은 얼마나 신뢰를 보내는가? 과연 '방사능 오염수'는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고 마실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또한 이미 '과학적 검증'이 되었다는 일본정부의 발표도 신뢰가 가느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을 윤리적 잣대로 판단을 할 때 '무한신뢰'를 보낼 수 없게 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 <과학, 그게 최선입니까?>에는 이런 불편한 진실을 더 많이 마주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과학자들이 항상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과학이 우리는 늘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마지막은 '과학이 우리에게 늘 밝은 미래만 가져다 주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물음에 '상세한 예시'를 보여줌으로써 과학, 또는 과학자에게 '윤리적 물음'에 대한 불편한 답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이 책은 '과학'을 불신하자는 말을 건내고 있단 말인가? 그건 아니다. 다만, 과학을 맹신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위험요소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알맞은 대비가 필요하다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그렇기에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다. 어차피 '과학'도 완벽할 수는 없다. 왜냐면 '과학연구'를 하는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과학일지라도 시간이 지나고나면 '틀린 과학'일 수도 있다. 마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옳다고 믿었다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오자 '틀린 과학'으로 증명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무리 믿어 의심치 않을 것 같은 '과학적 진실'이라도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으로 증명된 것'을 모두 부정하자는 말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적 증명을 부정하기 위해서 '또 다른 잣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과학적 검증'을 시도해서 두번, 세번 안전한지, 확실한지 살펴보는 꼼꼼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꼼꼼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 같은 문제는 아직도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쪽에선 '기후변화'는 축복일 뿐이며 따뜻해진 지구는 더 많은 생명체가 번성하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기에 걱정할 것이 전혀 없는 '자연스런 변화'일뿐이라고 일축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선 '기후위기'로 지칭하며 엄청난 자연재앙으로 인해 인류문명은 파괴될 것이고, 생태계는 망가지고, 지구환경은 펄펄 끓거나 빙하기를 맞아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절망적인 전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를 맞이했을 때를 대비한 '대안'을 마련되어 있는가? 그 또한 '없다'고 한다. 왜냐면 이미 늦었기 때문이란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온실가스배출'을 지금 당장 막는다고 해도 지구의 기온이 더 오를 수밖에 없고, 설령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비용'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인류는 멸종에 이르기까지 시간을 늦추는 정도밖에, 그래봐야 2040년까지라는 절망적인 전망만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온실가스 감축'을 하지 않으면, 그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만 내놓고 있다.

이런데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다. 우리 인간은 '하나 뿐인 지구'를 망치는데 주범이고, 확신범이자, 현행범이긴 하지만, 하나 뿐인 지구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되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역설적이지만 '과학'뿐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인간의 이러한 '오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긴 하다. 과학으로 망친 것을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지구환경에 최악이었고, 인류에게 끼친 해악이 차고도 넘친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어쩌랴? 인류에게 남은 방법이 '과학'뿐이지 않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는 맹신만큼은 결코 가져선 안 된다는 지적에 겸허히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과학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도 아무런 문제도 없고, 의심할 바도 없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과학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라는 당부를 덧붙이고 싶다. 적어도 이 책에서 묻는 '윤리적 질문'에 과학은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당당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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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2 : 자본이라는 신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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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I / 돌핀북 2번째 리뷰] 1권에서는 '생산수단'의 관점으로 구석기부터 근대 이전까지 경제적인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제 2권에서는 '자본주의시장'이란 주제로 근대 이후에 펼쳐진 경제상황을 살펴볼 것이다. 과연 '자본'이란 무엇이며, 그에 따른 '노동의 가치'를 살펴보자.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의 경제모습은 많이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까지는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었기에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농사꾼'이 더 많은 부를 쌓게 해주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일꾼을 '토지'에 얽매이게 만들었고, 이들을 '농노'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지배하는 '영주'라고 불리는 지배계급이 '토지(생산수단)'를 소유하고 있어서 농노가 만들어낸 '생산물'을 독점하며, 부를 늘려갔다. 이를 '장원경제'라 부른다. 원시공산사회였던 '석시시대'에는 함께 노동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어서 불만도 없고, 지배자도 없었지만, 경제생산력은 형편없이 낮았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연)환경변화'에도 인간들은 쉽게 굶주렸고 죽어나갔다. 이를 극복하고자 더 많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도구'를 발달시켰고, 단순한 돌칼이었지만, 농사일을 더 쉽게 해주는 원리를 터득하고부터 인간은 '생산량 증대'를 위한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중세의 봉건제와 장원제도가 정착되면서 인간은 더이상 평등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 사실상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계급이 구분된 것이다. 그리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이 생산한 물질을 가로채면서(세금 따위) 일하지 않고도 부를 늘려가는 방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하거나, '생산도구'인 철제농기구, 가축, 그리고 강력한 무기 등을 이용해서 피지배계층이 생산한 물질을 착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평등했던 인간이 불평등해진 까닭이다. 부의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같은 일이 벌어지자 이러한 '구체제'는 빠르게 무너졌다. 부의 불균형으로 인한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왕이나 귀족, 성직자 같은 이들은 스스로 '신'을 자처하거나 '신에게 위임(왕권신수설)'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억압과 착취를 당연시 했으나, 르네상스 이후 '신중심의 사상'에서 '인간중심의 사상'으로 바뀌게 되자 더는 피지배계층이 자신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에 참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왕과 귀족, 성직자 들의 권력을 흔들어버리고 난 뒤에 '평등한 세상'이 찾아왔을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왕과 귀족같은 '특권계층'이 사라진 듯 싶었지만, 그들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층이 새롭게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점한 '부'를 이용하여 빠르게 '자본화'하였고, 그 많은 자본을 바탕으로 빠르게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자본을 이용한 부르주아들이 '지배계층'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피지배계층의 생산물을 또다시 착취하는 구조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노동착취'다. 노동자가 당연히 일을 한만큼 정당하게 받아야 할 '임금'을 경쟁의 논리를 내세워서 '저임금'만 주고 하루 15시간 이상 부려먹는 구조를 만들어나간 것이다. 그렇게 몸을 혹사당한 노동자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더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냥 '해고'를 하면서 말이다. 왜냐면 아픈 노동자를 대신할 건강한 노동자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노동자보다 농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농장에서 먹거리를 생산해야 겨우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공장'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을 판매해서 얻은 이익으로 먹을거리를 사다먹는 것이 더 싸게 먹히는 일이었다. 국내에서 먹을거리가 부족해지면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그뿐이었다. 이젠 '공장'을 얼마나 더 많이 돌리느냐가 '자본증식의 관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장의 수를 늘려나가다보니 더는 '수익창출'을 하기 힘들어졌다. 왜냐면 '공급과잉'으로 인해서 더는 생산품을 판매할 곳(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유럽국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저생산저성장 경제구조로 경제난에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유럽국가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건 바로 '시장개척'이었다. 공장에서 만든 생산품을 판매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자본주의'는 더 많은 생산을 해내는 것이 관건이다. 많이 만들어서 많이 팔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 '기계'를 도입해서 더더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유럽국가들 안에서는 더는 '시장'이 확보가 안 되니 공장을 돌리면 돌릴수록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장문을 닫고 기계를 멈추는 것이 '순리'겠지만, 자본주의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생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을 늘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유럽의 각국은 시장개척을 위해서 '식민지쟁탈전'을 벌였다. 그로 인해서 인간(백인)이 인간(유색인)을 죽이고 땅을 빼앗고, 원재료를 헐값에 사들이고, 자신들이 만든 생산품을 고가에 강매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도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미개한 사람들을 문명화시킨다'라는 제국주의를 퍼뜨려서 인간사회에 '약육강식의 이론'을 적용하는 무리수까지 저지르고 말았다. 그렇게해서 '자본주의'는 유럽인들을 배불리 먹여 살렸다.

그런데 발빠르게 식민지점령에 뛰어든 선발주자들은 배불리 먹었지만, 독일이나 이탈리아 같은 후발주자들은 '식민지'로 삼을 만한 땅이 없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으로 촉발된 전쟁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그 실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자본주의의 탐욕'이 부른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이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직면하고서 탐욕을 조금이나마 줄이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주의는 엄청난 인명살상과 파괴를 일삼고 온통 폐허가 된 자리에서 또다시 엄청난 수익창출을 해냈다. 각국이 참전한 전쟁에서 서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전쟁물자'를 더 많이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더 강한 무기를 만들려는 욕망 덕분에 '과학기술력'은 더욱더 발달하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를 기반으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하게 된다. 이른바 '수요폭발'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또다시 공장을 더 많이 만들고, 기계를 가동시켜서, '공급과잉' 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만드는 족족 '생산품'을 팔려나갈 테니까 말이다.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전후 복구사업'으로 인해 경제호황은 계속 이어나간다. 사람들은 호황속에서 노동만으로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주식투자'라는 새로운 수익창출 방법을 익혀 나간다. 경제호황 상황에서 '투자'는 곧 '이익'이니까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주가'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돈을 엄청 벌게 되고, 그 덕분에 돈을 펑펑 쓰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돈을 더 많이 벌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공급과잉'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시장'은 포화상태가 된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에는 전세계에 더는 '식민지'를 확보할 수 있는 곳도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정말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장'문을 닫아야만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멈추는 순간 큰일이 난다. 그동안 받은 '투자금'이 얼마인데, 그 투자금에 이익까지 챙겨서 투자자에게 돌려주려면 결코 멈출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공급과잉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포화상태다. 물건을 만들어서 내놓아도 사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여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경쟁사도 금방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럼 노동자를 해고해서라도 상품의 가격경쟁력을 올려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도 경쟁사가 금세 따라한다. 경쟁사는 더 싸게 물건을 판매하다가 그만 망해버렸다.

이제 시장에는 '값싼 물건들'이 넘쳐난다. 소비가 살아났을까? 소비를 해야할 주체가 바로 '노동자'였다. 그런데 그 노동자가 방금 '해고' 당해서 실업자가 되었다. 소득이 없어졌으니 생계가 막막하다. 그래서 소비를 더욱 줄인다. 그리고 맡겨놓은 예금과 내일을 위해 투자했던 원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가지만, 이미 늦었다. 공장들이 줄줄이 파산을 하니, 그 공장에 대출을 해주었던 은행도 뒤를 따라서 도산을 해버렸다. 노동자들은 실직에, 예금에, 투자금까지 다 날려버려서 살길이 막막해진다. 바로 미국 월가의 '검은목요일'과 뒤이어 벌어진 '경제대공황'이다. 이때 노동자 4명 가운데 1명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미국을 강타한 경제대공황은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퍼져 나간다. 그나마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국에 닥친 대공황의 여파를 '식민지'에 떠넘기면서 용케 해쳐나가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는 그야말로 산 사람 입에 거미줄을 칠 정도로 극심한 가난을 겪게 만들었다고 한다.

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경제상황을 만든 '자본주의'는 이후로 정신을 좀 차렸을까? 발빠르게 성장하고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 '공급과잉'이 저지른 폐해를 목도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인간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2권의 내용은 여기까지고, 그 뒷이야기는 3권에서 펼쳐질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1930년대다.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와 불과 100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자본주의는 참으로 많은 문제를 품고 있다. 그런데도 현재도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전세계적으로 유일한 경제체제로 작동하고 있다. 대안이 시급해 보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는 '대안'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3권에서는 그 '대안'이 보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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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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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 / 더퀘스트 2번째 리뷰] '필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 어처구니 없는 '비상계엄'이 발표되자 '윤석열 씨'로 시작하는 필사도 겸하기 시작했으니까. 작년 11월 4일이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리'를 작성해본 경험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에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는데, 나도 뭔가를 해봐야겠다면서 시작한 목표가 '1년에 책 100권 읽기'였고, 읽은책 목록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쉽게도 그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들은 보관상태가 엉망이어서 '다이어리 가죽자켓'에 곰팡이가 쓸기도 했고, 글씨도 삐뚤빼뚤이라서 한 10여 년 전에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독서기록'은 쭉 써오긴 했는데, 2005년부터는 손글씨가 아닌 '온라인'에 리뷰형태로 남겨왔기 때문에 '종이'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 작년 11월에 다시 시작한 것이 '필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나름 세 달째 쓰고 있고, 거의 날마다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온라인서점', 그리고 '투비'와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인기는 별로 없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꾸준히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필사'를 시작하고 보니, '필사'에 관련된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 있는 줄은 몰랐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문구점'에 각종 공책이나 다이어리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길래 '누군가' 사서 쓰기는 하다보다 싶었는데, '필사'나 '기록' 관련 책이 이렇게나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더욱더 부지런히 쓰고 있기는 하다. 배우고 싶은 선배(?)님들의 '필사기록'이 참 많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다. 왜냐면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작정 '따라쓰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 결국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난 20년간 꾸준히 '리뷰'를 써오면서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온라인 타이핑'과 '오프라인 손글씨'의 차이점은 빠르고 느린 '속도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쓰는 것은 '쓰면 쓸수록' 점점 손에 익어가는 느낌이 들고, 온라인과는 달리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과정이 녹아 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시점부터 고민과 불평이 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전문적인 필사가들'만큼 자신이 직접 쓴 '글씨의 모양'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맘에 안 들고, 글씨크기도 고민이고, 고수님들이 작성한 '기록'들은 한없이 예쁘기만 한데, 왜 내가 쓴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컸다가 작아지고, 왼쪽의 글자배열은 어느 정도 줄을 맞출 수 있겠는데, 어찌해서 오른쪽의 글자배열은 들쑥날쑥인 건지...이런 불만이 점점 쌓이다보면 어느새 '필사'를 빼먹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쓰지 않고 마는 경험이 다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문가들의 다이어리'는 한권 한권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멋져 보이는데, 내가 직접 쓴 다이어리는 왜이리 허술하고 맹탕인 건지, 다 쓰고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 남 보여주기 부끄럽기만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필사공책'이나 '다이어리'는 한 10년쯤은 '연습' 삼아 이렇게 저렇게 써보다가, 그 가운데 '어멋! 이건 딱 내 스타일이야!!'라는 것이 유레카! 처럼 발견이 될 때, 그걸 중심으로 삼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깨달음을 온라인리뷰 20년을 써보고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완성형 필사기록'을 남겨야지..라는 욕심을 버리고, 1000원짜리 싸구려 공책을 사서, 모나미 검정 볼펜으로 쓱쓱싹싹 꾸준히 써나가는 연습부터 하다가, 그 공책이 10권쯤 쌓였을 때, 예쁜 다이어리와 잘 써지는 펜을 구입해서 '나만의 다이어리'를 작성해나가는 방법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현재 필사 3달째인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공책'에다가 '공짜 선물로 받은 펜'으로 매일매일 쓰는 연습부터 하고 있다. 리뷰쓰기는 '20년차'지만, 손글씨는 이제 '완전초보' 딱지를 떼기 전까진 이런 작업을 매일매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글씨도 한글자 한글자 '예쁘게' 쓰는 것도 좋겠지만, '줄'을 맞춰서 쓰는 연습이나 '글씨크기'를 일정하게 쓰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이어리 작성 고수들'은 글씨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예쁜 글씨체'나 '유행하는 글씨체'가 따로 있기도 하고, '펜글씨 교본' 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 어떤 글씨체라도 웬만하면 '줄 맞추고', '크기만 일정'하면 나름대로 개성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습만 꾸준히 하게 되면, 굳이 '다이어리'에 옮겨 쓸 것도 없이, 책의 한귀퉁이에 써넣은 '메모'만으로도 꽤나 볼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고, 그렇게 '코멘트'나 '밑줄'을 남긴 책은 읽을 때마다 '추억'이 되살아나서 기쁘고 '예쁜 글씨'에 또 한 번 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록'을 잘 남기기 위해서는 '글씨 쓰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개성 넘치는 글씨는 대환영이고, 중요한 것은 '줄'과 '크기'만 일정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 다음에서야 이 책 <기록이라는 세계>의 저자인 '리니'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리니님이 남긴 기록물을 참고 삼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 '내 수준'은 초보임이 분명하기에 리니님처럼 '완성형 기록물'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꼭 따라하고 싶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인생의 오답노트'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오! 이 방법은 꼭 따라하고 싶어졌다. 사실 '오답노트 학습법'의 효용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도 학창시절이 아니라 논술쌤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오답노트 작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이고 보니, '인생의 오답노트'도 귀에 너무나도 솔깃했던 것이다. 50살이 넘도록 살아온 내 인생에 '오답'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아예 없는 셈이다. 그래서 써야할 '오답노트'가 쌓이고 쌓였음을 생각해볼 때, 이건 정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고전 리뷰'를 필사해보겠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도 하고 있고, 쭉 해오기도 한 것인데, '온라인 타이핑'으로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고전 리뷰'를 그동안 5000자 이상씩 써왔는데, 그걸 모두 '손글씨'로 쓰는 것은 무리일테고, 그렇게 쓴 리뷰를 거르고 걸러서 '딱 한 문장', 혹은 '딱 한 문단'으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면 좋을 듯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손글씨 연습부터 하고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시작하려고 한다. 꽤나 멋진 기록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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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사장의 지대넓얕 1 : 권력의 탄생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생각을 넓혀 주는 어린이 교양 도서
채사장.마케마케 지음, 정용환 그림 / 돌핀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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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 / 돌핀북 1번째 리뷰] 지적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이다. 보통은 '대학교육'을 이수한 학사 수준 이상의 지식인들이 나눌 수 있는 전문적인 의사소통을 일컫는 말이 '지적 대화'겠지만, 하나의 주제로 1시간 이상 웃고 떠들 수 있을 정도의 교양을 쌓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대화인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 이런 '지적 대화'가 나눠지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열'로 뜨겁고, 전세계에서 카페와 도서관이 가장 많아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장소가 널리고 널렸는데도 '지적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참 힘들다. 그냥 '수다'를 떠는 사람들은 많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지적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말'을 많이 해야 할까? 물론, 어느 정도 수준 높은 '주제'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뛰어나야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을 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경청'이다. 경청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의 의견을 잘 듣고, 정리를 잘 해서,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실하게 요구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지적 대화는 '목소리가 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목소리만 크면 오히려 '상대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기 주장'만 옳다고 얘기할 공산이 크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자세다. 그리고 경청을 잘 하면 '동영상 강의' 내용을 들을 때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고, 심지어 '책 읽기'를 할 때에도 핵심내용을 잘 파악하는 눈썰미도 더불어 챙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경청하는 자세'를 갖춘 사람이 별로 없다. 그래서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수다'만 떨며 시간을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도 뭘 좀 알아야 '지적 대화'를 하든, '경청'을 하든 할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기 위해서 이런 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책은 '채사장'이 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다. 이 책을 통해서 뭐라도 '지적 대화'가 흐르는 '담론의 장소'에서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 물론, 어린이라도 말이다. 사실 '지식'이라는 것이 별 것 아니다. 초중고 학창시절에 배운 모든 것이 다 '지식'이었다. 그런데 그 소중한 지식을 그저 시험성적을 위해서 벼락치기처럼 짧은 시간 안에 '외울 생각'만 했지, 그 지식을 통해서 뭘 해보려는 '큰 그림'을 세워 보질 않았던 탓에 '지적 대화'를 위해서 뭔가 대단한 교양을 새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기에 '지적 대화'를 나누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뭔가 '자랑질'을 하는 것 같은 쑥쓰러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 앞에선 '겸손한 척', 자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지식을 꺼내질 않아서, 이런 수준 높은 대화가 원활히 통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행여나 자신의 입에서 나온 '지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부담감에 더욱더 '지적 대화'를 즐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건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옳은 것'은 나도 다 아는 평범한 지식일 뿐이고, 몇몇 '틀린 것'만 콕 짚어서 지적하려 드는 나쁜 버릇이 불쑥불쑥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대화법은 '지적 대화'는커녕 수준 떨어지는 수다, 다시 말해, 맞든 틀리든 아무 상관이 없는 덜 떨어진 대화만 즐기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말게 한다. 지적 대화를 나눌 때 '절대금물'이 바로 '지적질'이다. 차라리 "나와는 의견이 다르군요~"라면서, '내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하면, 지적 수준이 높은 상대방이라면 "내 의견보다 당신의 의견이 더 수긍이 가는군요"라면서, 양보하게 된다. 그래야 '다음 주제'에서도 서로 교양 넘치는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적 대화에 목이 말라서 '서론'이 길어졌지만, 암튼 이 책 <채사장의 지대넓얕>은 앞서 소개한 '채사장'의 또 다른 책의 어린이책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내용적인 면에서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어린이도 한 눈에 이해하기 쉽게 '라이트노블' 형식으로 펴낸 책이라서 아주 유용한 책이다. 그 첫 번째 책으로 핵심 내용은 '권력의 탄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이 누리는 권력은 사실 애초에는 없었다. 권력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이라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먼 옛날 '구석기 시대'에도 족장은 있었고,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이 '권력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무언가 '독점'할 수 있을 만한 물질적인 것들이 너무도 부족한 시절이었던만큼 조금이라도 '물질'을 얻게 되면 부족구성원의 모두가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갖는 것이 부족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원시공산사회'라고 일컫는데 '생산수단'과 '생산물'로 나눌만한 '물질의 풍요로움'이 발생하기 전까지 인간들은 부족원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는 무리사회를 이루고 살았다.

그러다 신석기 시대가 펼쳐지면서 '도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흔히 '신석기'라고 불리는 도구를 소유하게 되면서 사냥과 채집 따위를 넘어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농업을 하게 되면서 부족원들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고, '목축'도 할 수 있었다. 그럼 '농업'을 할 수 있게 된 신석기인들은 이제 무엇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신석기인들도 구석기인들과 마찬가지로 '평등사회'였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농업의 발달'로 인해 점점 '사유재산'이 늘어나게 되었고, 더 많이 생산물을 가진 '유산계급'과 유산계급에 기대어 빌어먹게 되는 '무산계급'으로 나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는 결정적인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바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권력자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왕(군장 또는 군주)'이란 계급이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거기서 나오는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아니, 평등했던 사람들끼리 무슨 수로 '생산수단'과 '생산물'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을까? 이 방법의 비결은 바로 '신'이란 존재를 만드는 것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힘'을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잘 이용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에, 그런 자연의 힘을 좌지우지하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왕'이라 일컫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단박에 '지배계급'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고, '피지배계급'은 왕에게 절대복종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급기야 '왕' 스스로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사회를 우리는 '제정일치사회'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기억이 나실 것이다.

그렇게 청동기, 철기 시대를 거쳐 4세기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고등종교'가 정립되면서 왕이 신을 자처하지 않고, 신에게서 왕권을 위임받았다는 '왕권신수설'과 같은 것으로 '제정분리사회'가 이루어진다. 이는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등등 어느 정도 '경전'을 갖춘 고등종교가 자리 잡은 지역에서 벌어진 공통적인 사건이다. 이때에도 '생산수단'은 여전히 토지였으며, 토지에서 만들어진 '생산물'은 모두 지배계급이 독차지하고서 실제로 '노동'을 한 사람들은 그 일부만 가질 수 있는 불공평한 일이 계속 이어졌다.

이러한 불공평한 일은 흔히 말하는 '중세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특히 서양에서는 무려 1000년 동안(4세기~14세기)이나 지속되었는데, 이 시기를 '종교'이외의 다른 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사상의 암흑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다 15세기 이후 '르네상스'가 유럽 곳곳에 전파되면서 '신 중심사회'가 '인간 중심사회'로 점점 바뀌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를 흔히 '인본주의'라고 일컫는데, 다른 말로 '이성의 빛'이 밝게 빛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인본주의'는 신 중심의 사회, 다시 말해, 신이 부여한 신성한 왕권을 철저히 부수는 결과를 낳는다. 이때까지도 권력의 향방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독점한 '국왕'에게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생산수단(상공업)'이 만들어지자 구시대의 생산수단(농업)은 점점 취약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생산수단을 '독점'한 새로운 세력집단, 다시 말해 '부르주아'가 등장하면서 생산물의 불공평한 분배에 성난 군중들이 혁명을 일으키자, 이들 혁명세력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한 '부르주아'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바로 '초기 자본주의'를 이끌었던 주역들인 셈이다.

1권의 내용은 여기까지다.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향방을 이해하면 '권력'을 누가 소유하게 되는지 파악할 수 있고, 만약 '소유'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유리할까?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이 더 유리할까? 고민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답은 바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다. 왜냐면 '생산수단'이나 '생산물'이나 모두 물질적인 것이지만, 비물질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선 끊임없는 소비가 가능한 '생산수단'을 독점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소비밖에 할 수 없는 '생산물'을 소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인 셈이다. 이런 지식을 이해하고 있다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산수단'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니 놓칠 수 없는 지식일 것이다. 정답은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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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10
히로시마 레이코 지음, 미노루 그림, 김지영 옮김 / 넥서스Friends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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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 / 넥서스Friends 10번째 리뷰]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말을 남겼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말이다. 즉, 만남에는 헤어짐이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더 슬퍼했을 것이. 그러자 석가모니는 뒷말을 덧붙인다. '거자필반(去者必返)'. 다시 말해,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이다. 그러자 제자들은 비로소 스승을 떠나보낸다. 죽음 뒤를 기약하고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 '윤회사상'이란 불가의 가르침을 석가모니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명강의를 한 셈이다. 히로시마 레이코는 이런 불가의 '윤회사상'을 이 책에 담뿍 담고 싶었던 것일까?

자꾸만 옛 기억을 잃어가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은 센야는 자신이 사랑으로 키운 야스케와의 추억만 콕 집어서 잊혀져가는 간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앞서 야스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음감옥에서 탈주한 고주'와 한 판 대결을 하기 위해 우부메에게 주었던 '바쿠란의 눈'을 되찾았는데, 그것 때문에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왜냐면 요괴의 세계에서 '한 번 맹세한 것'을 어기게 되면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뤄야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아무리 악랄한 요괴라하더라도 '자신이 한 약속'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것이 요괴세계의 규칙인 셈이다. 그런데 센야가 '그것'을 어기고 말았다.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럼에도 규칙을 어긴 것은 마찬가지고, 그로 인한 저주는 물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모든 힘을 잃어버린 센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아이, 야스케'다. 그렇게 센야는 야스케와 함께 겪었던 기억들을 하나씩하나씩 잊어버리게 된다. 끝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말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면 '잊어버렸다'는 기억조차 잊어버려야 하는데, '야스케에 관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서는 '무언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기억'만큼은 떠오른다는 것이다. 이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센야는 '영원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부메가 이야기했던 '무서운 저주'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저주에 걸린 센야는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도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힘을 되찾지 않으면 당장 '야스케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에, 센야는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센야는 야스케의 곁을 서둘러 떠난다. 왜냐면 '야스케'라는 이름마저 잊어버리게 되었을 때, 센야는 '요괴의 본능'만 남아서 자신도 모르는 새, 야스케를 공격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야스케를 모르는 요괴처럼 죽여버리고도 스스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아픔만 간직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센야를 더욱 공포로 몰아넣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없애버리고도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평생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간다'라는 기억만 간직한 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저주에 빠질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센야는 야스케를 떠나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떠나버린다.

하지만 센야는 안다. 자신이 가장 소망하는 것이 '야스케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분명한 사실이 센야를 더욱더 괴롭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감옥 같은 곳에 자신을 가두고 '야스케'를 헤치지 않게 만들고서는 오직 '유일한 한 사람'만이 그곳을 열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바로 그 느낌이다. 사랑에 실패했음을 직감했을 때,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곳에 스스로를 '유폐'시켜놓고서,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상구인 '문'을 만들고서, 자기가 사랑했던 이가 다시 찾아와주길 바라는 그 심정 말이다. 센야는 바로 그런 '감옥'을 찾아냈고, 그 감옥에서 '야스케'를 기다렸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야스케'는 그곳을 찾을 수 있었을까? 센야와 야스케는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회자정리 거자필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인사말이다. 흔히 '종업식'이나 '졸업식' 때 자주 쓰이던 말이었는데, 시대가 변하니 이젠 잘 쓰이지 않는 말이 되었다. 왜 그럴까? 아마도 너무도 발달한 '통신기기' 덕분일 것이다. 옛날에는 '서신왕래'를 하면서 며칠이나 몇 달에 한 번씩 '서로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던 탓에 편지 한 통 받고 나면 그렇게 반갑고 기뻤다. 그러다 전화기가 대중화 되자 더 빠르고 편하게 '연락'을 주고 받을 수 있었지만, 오히려 연락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더 '연락'을 뜸하게 할 뿐이었다. '삐삐'가 등장했을 땐, 반짝이나마 소통이 활발해졌다. 소식을 전하는 '메시지'가 한정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때문에 '한정된 메시지'에 어떻게 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발휘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더 자주 연락하게 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다 '핸드폰'이 등장하자 연락은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주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 자주, 뜸하게 연락하는 대상과는 더욱 뜸하게 연락을 취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젠 SNS로 전세계 불특정다수와도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자 '이별'을 슬퍼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검색기능'으로 편리하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무색해졌다. 헤어짐이 아쉽지 않은데, 굳이 다시 만난다는 것이 무에 기쁠쏜가?

이런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일까? 10권의 '시즌1'을 마감하는 대목에서 야스케와 센야가 다시 '만남'을 갖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옛날이었다면 '시즌1'의 결말은 '헤어지는 대목'에서 멈추고, 독자들의 애간장을 다 녹이고 난 뒤에야 느긋하게 '시즌2'의 서두를 '둘의 재회'로 거창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별이 아쉽지 않은 시절'이다보니, 급기야 '만남(재회)'으로 결말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그 둘의 '새로운 이야기'로 시즌2를 장식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렸다. 이걸 참신하다고 해야할까? 솔직히 맥이 쭉 빠지는 결말이었지만, 이야기는 재밌었으므로 '시즌2'에서 다시 리뷰를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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